소설리스트

대장간의 랭킹 1위-4화 (4/200)
  • ◈4화

    그래, 일단 호기롭게 자리를 떴다.

    말고삐도 잡았고 자신에게만 귀속된 고대룡 젠트라의 초대장도 보유하고 있다.

    문제는 이것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몰랐다.

    정혁은 말에게 모든 것을 맡긴 채 정처 없이 앞으로 나아가고만 있었다.

    머릿속은 잔뜩 어질러진 그의 방처럼 복잡하고 지저분했다.

    고작 레벨 5의 플레이어에게는 가질 기회조차 오지 않는, 로또와도 같은 아이템을 소유하게 됐다.

    이 아이템이 그의 플레이에 어떤 변수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초대장이니 젠트라를 찾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용들은 세계에서 모습을 감춘 지 오래 되었다고 들었다.

    정혁이 ‘한’이었을 땐 용의 가호 따위 젠트라가 아니라면 싱겁다고 느껴져 받으려 하지도 않았다.

    그의 아래에 있었던 나머지 랭커들은 용의 가호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이길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한’이 에드가를 만났던 때야 젠트라의 힘이 자신에게 도움이 될 거라 믿었었지만 아득바득 랭킹 1위의 자리에 오른 뒤엔 젠트라의 초대장에 대한 흥미 자체가 사라졌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수단과 방법을 가려선 안 된다.

    레벨이 올라갈수록 여러 스탯이 상승하면서 소위 ‘감’이라는 것이 발달하게 되는데 지금은 앞날이 보이지도 않는 저렙에다가 전투 특화 직업도 아니기 때문에 더욱이 막막할 수밖에.

    여러 고민들에 휩싸여 있다가 우연히 한적한 호수에 도착한 그는 말을 나무 그루터기에 묶어 두고서 자신도 근처 나무에 몸을 기대앉았다.

    아직도 에드가의 소름 돋는 목소리와 표정이 눈에 선하다.

    자존심이 완전히 구겨졌다.

    당시의 기억에 머물러서 거만에 가득 찼던 녀석.

    만약에 ‘한’이었다면 한주먹 거리도 안됐을 거다.

    하지만 지금의 자신은… 게다가 소량이지만 HP가 떨어졌다.

    세상에 이따위 약골이.

    - 쿠콰강!

    한참 고뇌에 빠져 있던 정혁의 곁으로 엄청난 물보라가 일었다.

    공중에서 호수 속으로 뭔가가 떨어졌다.

    주변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말은 당황한 듯 이리저리 난동을 부렸다.

    정혁은 반사적으로 말고삐를 낚아채고 근처의 큰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물보라가 서서히 가라앉고 얕은 물안개 속에서 괴수의 비명 소리가 쟁쟁히 사방을 울렸다.

    그와 동시에 주변에서 플레이어들이 튀어나왔다.

    철제 갑옷이 절그럭거리는 소리, 무겁거나 혹은 가벼운 발걸음, 조직적이고 유연한 움직임.

    필시 숙련된 자들이 분명했다.

    그 순간 기척도 없이 한 남자가 그의 곁에 나타났다.

    “레이드가 진행 중입니다. 주의해 주세요.”

    정혁의 머리가 두 개나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이 큰 어깨 갑옷을 입고 있는 기사였다.

    전신을 완전히 가리고도 남을 방패에 여러 군데 균열이 가 있는 스피어가 인상적이었다.

    방패에는 붉은 원 안에서 포효하는 황금빛 사자가 새겨져 있었다.

    “제논의 기사단!”

    정혁이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을 주워 담을 새도 없이 기사는 또 한 번 기척 없이 사라졌다.

    ***

    “하늬안!”

    “예, 팀장!”

    하늬안이 대도 둘을 바닥에 내리꽂으며 지면에 강하게 착지한 뒤 그녀가 팀장이라고 불렀던 사내의 곁으로 다가갔다.

    전세는 소강상태에 이르렀다.

    제논의 기사단의 수습 레이드 팀원이었던 하늬안은 오랜만에 가슴 뛰는 전투 속에서 한껏 자신의 기량을 뽐내고 있었다.

    그녀가 사력을 다해 얻었던 두 자루의 명검 대도 ‘절’과 ‘멸’ 역시 강철 망치에 맡긴 뒤로 본래보다 훨씬 날카롭게 적의 신체를 도륙 내고 있었다.

    “지금도 충분해. 일단 상황을 보자. 전체 들어라! 호수 주변으로 진을 친다. 쥐새끼 하나 빠져나가지 못하게 철저히 틀어막고 호수를 주시해라! 하늬안, 너는 나와 함께 정면에서 놈을 맡는다. 나머지는 내 신호 전까지 절대 선제공격을 금지한다! 흩어져!”

    팀장의 고함과 함께 주변의 레이드 팀원들이 사방으로 산개했다.

    “이제 얼마 안 남았다. 긴장을 놓지 말고.”

    “예, 팀장님!”

    하늬안은 다시 두 자루의 검을 뽑아 들고서 호수를 주시했다.

    그러다 문득 저 멀리 나무 뒤로 마주치고 싶지 않은 얼굴을 발견하곤 자연스럽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 ‘싸가지’였다.

    “팀장님, 외부 플레이어가 저기 있습니다.”

    그녀의 말에 팀장은 물 안개 속을 계속 경계하면서 대답했다.

    “왈로가 가서 경고했다. 이제부터는 본인 책임이야.”

    하늬안은 팀장의 말에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든 사력을 다해 날뛰어서 공격이 저쪽으로 흐르게 만들리라.

    자신이 죽이면 얻게 되는 패널티를 피하면서 레이드 대상의 공격을 통해 끔찍한 죽음을 선사하고자 하는 그녀의 욕심 어린 시선이 정혁에게로 꽂히고 있었다.

    그 순간 수면이 잔잔하게 일렁였다.

    다시 한번 물보라가 크게 일어나고 물속에서 괴수가 위용 넘치는 모습을 뽐내며 당당히 등장했다.

    전신이 초록빛 오라로 일렁이는 괴수는 날카로운 비늘을 갑옷처럼 두르고서 몇 번의 날갯짓으로 호수의 물 들을 사방으로 밀쳐 낸다.

    세 개의 머리 중 가운데 머리의 이마에서는 붉은 빛 수정이 반짝인다.

    이 괴수는 속칭 맹독의 키메라라고 불리는, 이 지역에서 쉽게 만날 수 없는 상위급 몬스터이자 희귀 레이드 사냥감이다.

    이미 몸 이곳저곳이 크고 작은 상처로 뒤덮여 있었지만 기세만큼은 그대로였다.

    정혁에겐 녀석의 레벨조차 가늠이 되지 않았다.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가 가진 경험에 의한 본능이 움직임을 막았다.

    전투는 균형이다.

    과거 ‘한’이었을 때 그에게는 인생을 바쳐도 모자랄 스승이 있었다.

    그는 스승에게 모든 기초와 강력한 기술들을 배워 나갔지만 제일 중요하게 배웠던 것은 바로 전투의 흐름을 읽는 것이었다.

    자신보다 강한 상대와 싸우는 법.

    싸우지 않고도 이기는 법.

    질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우는 법.

    그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 피부로 익히면서 일종의 흐름을 캐치해 냈다.

    대치 상황에서 균형은 굉장히 중요하다.

    제논의 기사단은 나름의 사방진을 펼쳐 놓았다.

    대형 몬스터를 상대로는 크게 유리하지 않은 진형이다.

    그러나 대상의 위협 수치를 온전히 흡수한 전방의 두 사람이 시간을 끌어줄 수만 있다면 생겨난 빈틈으로 다수의 공격이 집중될 기회를 얻게 된다.

    이런 팽팽한 긴장 속에서 정혁의 움직임은 모든 균형을 깨트릴 수 있다.

    이따위 몸으로는 녀석의 시선이 닿기만 해도 죽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한 이유로 그는 결코 몸을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

    녀석의 마지막 포효를 끝으로 이마의 붉은 수정이 다시 한번 빛을 발했다.

    팀장이 방패를 꺼내 들었다.

    하늬안은 그의 곁에서 두 검을 휘어잡고 마치 춤사위 같이 허공에 몇 번의 검 선을 긋더니 거침없는 고함을 키메라에게 내질렀다.

    “포효의 검사, 하늬안.”

    정혁이 중얼거렸다.

    플레이어의 앞에 붙는 칭호는 개인이 특별히 붙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독자적인 프로그램인 오아시스의 시스템이 플레이어를 평가하고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부여되는 일종의 머리말이다.

    이는 플레이어의 특징을 완벽하게 드러내며 이 부분이 플레이어 본인에게는 장점이 될 수도 단점이 될 수도 있다.

    필요하다면 칭호를 밝히고 다닐 수도 있지만 표시를 해제하고 다닐 수도 있다.

    다만 상대가 탐색을 할 경우에는 결코 숨길 수 없는 것이 이 칭호다.

    그녀의 포효는 엄청난 위력을 가지고 있다.

    상대의 사기를 떨어트리고 두려움 혹은 공포를 심는다.

    이는 곧 환각으로 이어져 하늬안 자체를 자신보다 훨씬 강한 상대로 보이게 만든다.

    상대의 감정을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은 전투에서 승기를 잡는 데 귀중한 역할을 하게 된다.

    물론 그녀를 만났던 ‘한’에게 두려움 따위는 없었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말이다.

    정혁에게는 고막을 찢을 듯한 하늬안의 포효는 몇 번 듣다 보니 지긋지긋했던 것 같다.

    포효와 동시에 키메라의 모든 위협 수치가 하늬안에게 집중되었다.

    지체 없이 키메라가 하늬안에게 달려들었고 그 앞을 팀장이 막아선다.

    황금빛 보호막이 방패의 전방위에 뻗어 나가고 그의 뒤로 잔상이 어려 마치 황금빛의 비가 내리는 것 같다.

    키메라의 선공격이 보호막에 부딪치자마자 팀장의 수신호와 함께 사방에서 기사단원들이 튀어나왔다.

    그리곤 정확하게 이미 키메라가 공격당한 지점에 각자의 기술들을 꽂아 넣었다.

    키메라의 비명이 끔찍하게 울려 퍼지고 녀석의 발악이 시작되었다.

    주변이 붕괴된다.

    정혁은 사력을 다해 사방으로 튀는 주변의 잔해들을 주시하며 피했다.

    자칫 말고삐를 놓칠 뻔했지만 말을 놓치거나 말에 실어 놓은 물건들을 잃어버린다면 정말 답이 없었기 때문에 고삐를 잡은 손이 부러질 것 같아도 고쳐 잡으며 버텨 냈다.

    “광란 상태다.”

    팀장의 말에 하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키메라에게 고정 대상이 없다.

    이제 주변에 산개한 팀원 누구든 키메라의 타깃이 될 수 있다.

    “방어력이 낮거나 회복이 가능한 팀원들을 최우선으로 보호한다! 후방 그룹에 왈로밖에 없다! 몇 명 더 지원 나가!”

    그의 지휘 아래 몇 번의 공격이 더 이루어졌다.

    키메라의 피가 튀어 맑았던 호수가 점점 붉은색으로 물들어 가고 군데군데 구덩이가 생겨난다.

    제논의 기사단은 일사불란했다.

    사방으로 퍼졌다가 다시 모이기를 수십 번.

    다음 공격을 읽을 수 없을 정도로 변칙적인 키메라의 광란 상태에도 누구 하나 망설임 없이 치명타로 밀어붙인다.

    약자에게는 강자가 버티고 선다.

    강력한 공격 뒤에는 항상 그 공격을 이어받는 연계기가 따라온다.

    얼마만큼의 HP가 남았는지 정혁에게는 보이지 않았지만 녀석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짐작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무 곁에 잔뜩 웅크리고 있던 정혁의 곁으로 기척이 다가왔다.

    정혁은 순간 놀라서 그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늬안이었다.

    “어이, 싸가지?”

    하늬안이 윙크를 찡긋했다.

    그리곤 키메라를 바라보면서 고함을 내질렀다.

    정혁이 막을 새도 없었다.

    단일 대상을 잡지 않는다고 해도 순간적으로 내지르는 도발성 고함에는 당연히 키메라가 반응할 수밖에 없다.

    붉은 수정이 달린 머리가 하늬안을 주시했다.

    다른 머리들은 각기 다른 플레이어들과의 전투에 사력을 다하고 있었지만 밀리고 있는 상황 속에서도 하늬안을 주시하고 있는 머리의 기세만큼은 하늘을 찌를 듯했다.

    번뜩이는 눈빛 사이로 섬광이 빛나는 듯하다가 키메라의 고함과 함께 붉은 빛무리가 순식간에 입안에서 뿜어져 나왔다.

    “야, 야, 야!!!”

    뭐라고 이야기할 겨를도 없었다.

    하늬안의 포효에 반응하여 키메라가 붉은 힘이 담긴 브레스를 쏟아 내기까지는.

    하늬안은 이미 그 공격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났다.

    브레스는 정면으로 정혁을 향해 날아들었다.

    반응할 수도 없는 속도 때문에 정혁은 소위 주마등이라는 것도 볼 수가 없었다.

    끝이었다.

    그의 모든 인생이 이곳에서 끝나려는 순간이었다.

    “숙이세요!”

    푸른 빛 강렬한 보호막과 함께 정혁의 앞에 거대한 방패가 세워졌다.

    그에게 경고를 던졌던 왈로라는 플레이어였다.

    어느새 그가 들고 있었던 스피어는 두 동강이 났는지 부서진 채 그립 부분만 남아 있었고 그나마 성치 못한 방패를 들고 그는 남은 힘을 쥐어짜고 있는 듯했다.

    그때였다.

    [오아시스의 대장장이가 탐나는 광물을 발견했습니다!]

    평소의 상태 창과는 다른 붉은 빛 정보 창이 정혁의 시야를 가렸다.

    이는 정혁에게만 활성화된 것이었다.

    [500년 동안 이끼 낀 만년 동굴에서 생활하던 키메라의 머리에는 강력한 붉은 원석이 심겨져 있습니다! 태초의 원석인 이 보물은 이제 당신의 통제를 받습니다!]

    뭐? 내 통제를 받는다고?

    [키메라의 체력이 2% 미만으로 떨어집니다. 이제 원석을 제거해 낼 수 있습니다!]

    어…어떻게?

    [채광을 활성화하시겠습니까? YN]

    “그, 그래! 할게! 한다고!”

    황금빛 마나가 정혁의 양손에서 뻗어 나와 전신을 감싸고 그의 두 손에 독특한 모양의 두 망치가 형성되었다.

    자연스럽게 망치를 쥐자마자 정혁의 몸이 붕 떠올라 키메라의 머리 위로 이동되었다.

    정혁은 자신을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이 경이로운 동작에 감탄하고 있었다.

    거의 자신의 전성기 시절의 움직임과 같았다.

    하늬안을 비롯한 제논의 기사단 일원들은 놀라운 광경에 모든 전투를 멈출 수밖에 없었다.

    신경도 쓰지 않았던 저레벨의 플레이어가 순식간에 누구도 감히 오르지 못했던 키메라의 중심부 머리 위에 올라서더니 붉은 수정을 향해 몇 번의 망치질을 하자마자 키메라가 단말마의 비명을 내지르면서 몸을 비틀기 시작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플레이어는 이 난리 통에도 평안히 수정에 망치질을 할 뿐이었다.

    몇 번의 망치질에 균열이 난 것은 수정이 아니라 오히려 수정이 박혀 있는 키메라의 머리였다.

    수정 근처가 천천히 벌어지기 시작했고 키메라의 피가 용솟음쳤다.

    어느새 양손에 쥐었던 망치가 사라지고 그는 한 손을 뻗어 수정을 움켜쥐고서 키메라의 머리에서 뜯어냈다.

    그렇게 크지 않은 수정이 한 손에 들어왔고 키메라는 마지막 숨을 길게 내지르며 육중한 몸을 힘없이 무너트렸다.

    정혁은 수정을 쥐고서 지상으로 안전히 착지했다.

    어느새 자신을 감싸던 황금빛 기운이 사라지고 손맛이 뛰어났던 두 망치 역시 없어졌다.

    굉장히 상쾌한 기분이었지만 이는 곧 마음 깊숙한 곳에서 밀려 올라오는 찝찝함에 사라졌고 사방에서 정혁에게 쏟아지는 따가운 시선과 함께 이제는 한 단어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뭐 됐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