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115화 (115/118)
  • [■] 덕분에 알아챘거든. 너를 쓰러뜨릴 방법을 말이야. [■]

    ─────

    바르바체의 이마로 붉은 땀이 쏟아졌다.

    마치 피를 철철 흘리는 광경과도 같았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피를 흘리는 것보다야 땀을 흘리는 것이 훨씬 낫겠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일방적인 상황이 아니었고, 차라리 피가 흘러내리는 것이 더 나은 상황이었다.

    "허어억."

    바르바체의 육체가 떨려왔다.

    일순간 이지혁을 압도한 것은 좋았지만, 그의 육체는 빠른 속도로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후우."

    솔직하게 말하자면, 지금 바르바체는 당황하는 중이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런 식으로 지쳐 본 적이 없었으니까.

    이전의 그의 육체는 끓어오르는 용광로와 같았다. 아무리 대미지를 입는다고 해도 활력을 잃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지금 그의 육체는 빠르게 사그라들고 있었다.

    '겨우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건가?'

    바르바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이지혁을 상대하기 위해서 그는 모든 것을 희생했다. 하지만 그의 전력을 받아낸 이지혁은 지금 멀쩡하게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과연 대미지가 있나 싶을 정도로 말이다.

    반면에 바르바체는 빠르게 지쳐 가고 있었다. 조금은 더 싸울 수 있겠지만, 남은 체력으로 이지혁을 쓰러뜨리는 것이 가능할까는 회의적이었다.

    우두둑.

    목을 한 번 꺾은 이지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고작 이거냐?"

    "……."

    "그 모든 걸 희생해서 네가 도달한 곳이 고작 여기냐고 묻고 있다."

    바르바체가 이를 갈았다.

    모욕적이다.

    전신에 힘이 빠져나갈 정도로 말이다.

    더욱 절망적인 것은 이 스태미나를 보충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육체를 변형했다 하더라도 그는 마족. 마족은 마기를 통해서 체력과 회복을 한다. 하지만 지금 그는 마기를 끌어들일 수가 없었다.

    모든 힘을 파괴력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마기를 끌어들여 변환시키는 과정조차도 거추장스럽다. 그렇기에 버렸다.

    나쁜 생각은 아니었다.

    이지혁이라는 존재는 마기를 통해서 잡아낼 수 있는 이가 아니다. 이지혁은 마도사에 정점에 오른 존재. 그는 그 누구보다 마법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다.

    물론 다른 분야에 대한 이해도가 그리 떨어진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다른 분야는 비벼볼 여지라도 있는 반면에 마법으로 이지혁을 타격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마기의 근본을 해체해 버리는 수준에 오른 것이 지금의 이지혁이었으니까.

    그렇기에 버렸다.

    모든 것을 육체에 걸었다.

    하지만 그 한계가 지금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아니."

    이지혁이 고개를 저었다.

    "말이 잘못됐군. 나도 흥분을 한 모양이야. 흥분이라니. 큭."

    이지혁이 낮은 비웃음을 흘리고는 말을 이었다.

    "그만큼이나 네 공격이 위협적이었다는 거겠지. 인정해야 할 것은 인정해야지. 바르바체, 너는 강했다. 너의 변화도 훌륭했다. 평생을 마기와 함께 살아온 네가 마기를 버리면서까지 진화를 획책한다는 것은 보통 각오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오히려 네 수명과 목숨을 갉아먹은 것보다 그게 더 대단하군."

    바르바체는 굳은 얼굴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저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나 거기까지다."

    이지혁이 고개를 저었다.

    "원인은 하나뿐이지. 다른 이유는 애초에 그저 변명일 뿐이야. 이유는 오직 하나, 너와 나의 격이 그만큼이나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

    "전략과 전술, 대응과 방책이라는 것은 힘의 차이가 극심하지 않을 때나 통하는 거지. 압도적인 전력의 차이 앞에서는 그 어떤 것도 무의미하다. 너는 훌륭했다. 내가 조금만 더 약했더라면 지금 너의 공격 앞에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산화했겠지. 다만, 지금의 나는 너의 공격에 쓰러지기에는 너무 강할 뿐이다. 그래, 그리고 그게 전부지."

    딱히 위로하고자 하는 말은 아니었다.

    지금의 이지혁에게 그런 생각이 있을 리는 없으니까. 지금 이지혁은 진실만을 말하고 있었다. 바르바체의 공격이 이지혁의 육체에 손상을 줄 수 있는 수준이었다면 이지혁도 이리 멀쩡히 일어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는 이미 불멸의 권능을 잃었으니까.

    하지만 바르바체는 종이 한 장 차이로 그 수준에 오르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이 모든 결말을 가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건 조금 슬픈 이야기가 될지 모르겠지만……."

    이지혁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너의 육체는 과도하게 강건하다."

    "…무슨 수작이지?"

    "그저 사실만을 말하고 있을 뿐이야. 너의 육체는 강건하기 짝이 없지. 너 정도의 육체를 지닌 존재는 지금까지 단 하나도 없었을 거다. 다시 말하자면, 너는 딱히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웬만한 공격은 다 받아낼 수 있다는 뜻이겠지. 심지어 나의 공격조차 말이야."

    바르바체가 미간을 좁혔다.

    "설명하기 쉽지 않지만, 이런 거다. 능력의 총합으로 봤을 때는 너는 절대 나를 이길 수 없다. 너의 공격은 나의 방어를 뚫지 못하고, 너의 방어는 나의 공격을 완전히 막아내지 못하니까. 그런데 문제는 이 '완전히'에 있는 거야."

    바르바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내가 너를 공격한다 해도 너의 육체는 자연히 내 공격을 막아낸다, 네 의지와 상관없이. 극도로 강해진 육체가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겠지. 아쉽지만 지금의 나로서는 너를 단번에 죽일 수도 없다. 결국 바르바체……."

    이지혁이 낄낄대며 말했다.

    "너는 아주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어간다. 어쩔 수 없이 말이야."

    그 말이 끝나는 순간, 이지혁의 몸 주변에 피처럼 붉은 아홉 개의 불덩어리가 나타났다.

    "그럼 시작해 볼까? 꽤나 긴 시간이겠지만, 잘 참아주길 바라지. 마왕의 마지막은 마왕다워야 하니까 말이야."

    이지혁의 몸 주위를 휘돌던 아홉 개의 불꽃이 빛살처럼 날아가 바르바체의 육체를 뒤덮었다.

    "크으윽!"

    바르바체는 이지혁이 한 말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고통스럽다.

    확실한 대미지가 그의 육체를 무너뜨리고 있다. 하지만 저항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지혁이 그를 고통스럽게 만들기 위해서 이러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이지혁의 공격을 그의 육체가 철저하게 막아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너무 약했나? 다시."

    하늘이 열린다.

    구름 낀 하늘이 좌우로 열린다 싶더니, 허공에서 거대한 붉은빛이 아래로 내리꽂혔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

    충천하며 작렬하는 붉은 혈기가 바르바체의 육체를 집어삼켰다. 너무도 거대한 화력의 줄기가 바닥으로, 바닥으로 내리꽂힌다. 멀리서 보면 마치 거대한 붉은 창이 대지를 꿰뚫는 것 같았다.

    피부가 갈려 나간다.

    쏟아지는 혈기의 창은 바르바체의 육체를 안팎 가릴 것 없이 파괴해 나갔다.

    "끄으으으윽!"

    당장 이곳에서 탈출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태풍에 불어난 탁류처럼 광포한 기세로 내리꽂히는 혈기는 육체의 자유조차 앗아갔다.

    바르바체는 그저 탁류에 휘말린 배처럼 방향타를 잃은 채 부유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안 되는 건가?'

    내핵까지 뚫어버릴 기세로 바닥을 꿰뚫던 혈기가 일순 씻은 듯이 사라졌다.

    바르바체의 몸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안 되지."

    이지혁이 바르바체의 바로 옆에 나타나 걷어찼다.

    콰아아앙!

    포탄처럼 쏘아진 바르바체가 바닥에 처박혔다.

    "그래도 떨어지면 끌어올리기 귀찮아서 말이야. 조금만 더 들어갔으면 문제가 생겼겠군. 나도 내가 우주 공간에서 생존할 수 있는지는 확인해 보지 못했거든. 음, 그런데 너…… 우주라는 개념을 이해하나?"

    이지혁이 낄낄대며 웃었다.

    "비장의 한 수마저 무위로 돌아갔군. 하지만 뭐, 그것도 나쁘지는 않았잖아. 너는 내게서 유일하게 우위를 가져간 존재로 기억될 테니까. 기억할 이가 남는다면 말이지."

    "거참, 씨발, 말 많네."

    "음?"

    이지혁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최정훈이 짝다리를 짚고 선 채 이지혁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래도 예전 이지혁 씨는 말은 많아도 센스라도 있었지. 저건 뭐, 교장 선생님도 아니고."

    "순순히 차례를 기다리는 게 낫지 않겠나? 그리 도발하지 않아도 모두 죽여줄 텐데 말이야."

    "확실히 그것도 나쁘진 않겠지. 그런데 어쩌지? 이쪽도 기다리는 데는 신물이 나서 말이야."

    "죽음을?"

    "그렇지. 정확하게는 너의 죽음을."

    이지혁이 웃기 시작했다.

    "너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생물이로군. 이 순간에조차 부릴 허세가 있다니 말이야."

    "아니, 아니야."

    최정훈이 손가락을 내저었다.

    "덕분에 알아챘거든. 너를 쓰러뜨릴 방법을 말이야."

    "호오?"

    이지혁이 손가락을 들어 최정훈에게 가져갔다.

    "조금 우스운 말이지만, 나는 너를 매우 인정하고 있는데… 그런 말을 듣고도 네 입에서 그 방법이 나오기를 내가 가만히 기다릴 것 같은가?"

    "확실히 너는 지능이 별로 발달하지는 않은 것 같군. 과거의 이지혁 씨보다 멍청해. 내가 이런 말을 할 때는 이미 준비를 다 끝냈다고 생각되지 않나?"

    "음?"

    이지혁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준비가 끝났다고?'

    그제야 하나의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인간.

    지금까지 전투에 딱히 도움이 되지 않던 인간들이 진형을 갖추고 있었다.

    '뭘 하려는 거지?'

    이만한 전투에서 저들이 도움이 될 리가 없었다. 심지어 드래곤조차도 들러리에 불과한 이 전투에서 저만한 인간들이 대체 뭘 할 수 있다는 것인가.

    베라프의 성직자들도 아닌, 나약해 빠진 지구의 능력자들이 뭔가를 할 수 있다고?

    "크으으."

    그 순간, 바르바체가 몸을 일으켰다.

    "미친 짓거리를 하는군."

    툴툴대며 웃은 바르바체가 이를 갈았다.

    "하지만 저놈을 쓰러뜨리기 위한 일이라면 동참해 주지. 좋다, 인간. 갈 데까지 가보지."

    최정훈이 손을 들어 올렸다.

    "이 상황에서 어린 시절의 로망을 실현하려니, 이거 영 이상한 기분이지만… 뭐, 좋아. 일석이조가 될 수 있겠지."

    "…도통 이해를 못하겠군."

    "이해할 것 없어. 곧 알게 될 테니까."

    그 순간, 인간이 대형을 갖추기 시작했다.

    '마법진?'

    이지혁은 바로 알아챘다. 저 대형이 의미하는 바가 뭔지를. 극도로 높은 그의 마법적 지식은 과정 없이 결과를 내놓았다.

    "미친."

    보통 웬만해서는 자신이 다른 이에게 이런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는 이지혁이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놈은 미쳤다.

    그것도 제대로 미쳤다.

    "잘도!"

    이지혁이 손을 뻗어서 마법진을 파괴하려는 순간, 인간들의 주변을 수백 겹의 보호막이 감쌌다. 그와 동시에 드래곤들이 몸을 던져 인간들의 앞을 틀어막기 시작했다.

    "최정훈! 이 미친놈이!"

    "너한테 배운 거야, 새끼야."

    최정훈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대답했다.

    "옛날 이지혁 씨가 하던 거에 비하면 이건 미친 짓도 아냐. 진짜 미친 게 그 양반이지. 너는 그 양반의 마이너 카피밖에 안 된다고. 그 양반이야말로 미친놈 중의 미친놈이지."

    욕인지 칭찬인지 모를 말을 늘어놓은 최정훈이 커다랗게 외쳤다.

    "발진이다, 바르바체! 실패는 용납하지 않아!"

    "큭큭큭, 명령대로, 인간."

    인간 능력자들이 구성하고 있는 마법진에서 시커먼 마기와 새하얀 에테르가 동시에 구름처럼 피어오르더니, 바르바체의 육체를 향해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제 끝내자, 이 지긋지긋한 놈아!"

    * * *

    최정훈의 피끓는 듯한 외침과 함께 바르바체의 육체로 희고 검은 기운들이 쏟아지는 폭포수처럼 밀려 들어갔다.

    "큭!"

    이지혁이 손을 뻗었다.

    저 상황이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인가는 지금 당장 해석이 되지 않는다.

    이지혁으로서도, 그 수많은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있는 이지혁으로서도 처음 겪는 상황이었다. 그 파급력이 얼마나 될지 순간적으로 계산한다는 것은 그로서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 결론은 빤했다.

    뭔가 이루어지기 전에 제거해야 한다. 상대의 수작질을 가만히 기다려 주고 있을 정도로 이지혁은 멍청하지 않았다.

    곧장 바르바체를 날려 버리기 위해 혈기를 끌어모으는 이지혁에게 커다란 동체들이 달려들었다.

    "이 도마뱀 새끼들이!"

    드래곤들이 전력으로 이지혁에게 날아들었다.

    이지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드래곤의 거대한 동체는 그 자체로 무기다. 드래곤에게 있어서 가장 위협적인 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마법이겠지만, 드래곤의 육체는 아무리 이지혁이라도 그저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니, 이지혁에게 있어서는 완벽히 대처할 수 있는 마법보다는 이런 육체적 공격이 되레 더 귀찮고 짜증나는 일이었다.

    아무리 다른 방면에도 어느 정도 통달을 했다고 하지만, 그의 근본은 마법사인 것이다.

    "자존심까지 버렸다는 거냐? 쓰레기 같은 것들."

    드래곤은 육체 공격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스스로의 육체를 마나를 담는 그릇이라 여길 뿐, 공격을 위한 수단이라고는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 고고한 자존심은 저등한 생명체들처럼 육체로 공격하는 걸 수치스럽게 여겼다.

    하지만 지금 이들은 그 자존심을 모두 벗어던지고는 말 그대로 육탄 돌격을 하고 있는 것이다.

    콰아아아아!

    이지혁의 손에서 뻗어 나간 혈기가 드래곤들의 육체를 뱀처럼 휘감았다.

    콰드드득!

    그러고는 덤불이 파고들 듯 드래곤들의 몸을 옥죄고 갈라 버린다.

    크롸라라라라라라!

    드래곤들의 비명과 포효가 터져 나온다. 하지만 동료가 처참한 꼴을 당하고 있음에도 드래곤들은 눈길조차 주지 않고 이지혁에게 달려들었다. 단 한순간만이라도 시간을 끌겠다는 듯이 말이다.

    자존심이고 뭐고 모두 버린 드래곤들의 돌격에 이지혁의 움직임이 순간 멈췄다.

    "큭!"

    자신의 실책을 알아챈 이지혁이 전신에서 화염탄을 뿜어냈다. 육체 전체를 뒤덮으며 뿌려지는 화염의 비에 드래곤들의 몸이 녹아내리고 타올랐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이지혁이 바르바체에게 혈기를 날렸다.

    콰아아아아앙!

    거대한 화염 덩어리. 마치 세상에 태양이 내려온 것같이 거대한 화염이 바르바체를 향해 날아들었다.

    * * *

    "이게 통한다고?"

    서아영은 불신 가득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최정훈은 단호하기 짝이 없었다.

    "이론상으로는 가능해."

    "하지만……."

    "방법이 없어요. 이게 유일한 방법이에요. 할 수 있는 건 다 해볼 수밖에! 그리고 명색이 마왕인데, 인간이 할 수 있는 걸 못하지는 않겠지!"

    서아영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허황되기 짝이 없는 짓거리다.

    하지만 만약 성공한다면?

    그렇다면 지금의 상황을 일거에 뒤집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미 서아영이 그 자신의 몸으로 경험한 일이었으니까. 얼마나 강해지는지는 이미 충분히 알지 않는가.

    "그러니까 집중해요."

    "알겠어요."

    최정훈이 굳은 얼굴로 서아영 등을 바라보았다.

    '통한다. 반드시!'

    아펠드리체를 통해 바르바체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던 점이 컸다. 지금의 바르바체는 마치 연료가 없는 엔진과도 같았다. 재미있는 것은 그 연료를 이쪽에서 공급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졌지.'

    마치 이지혁이 이 모든 것을 예상하고 준비한 것처럼 말이다. 지금의 이지혁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자면, 과거의 이지혁이라고 이 상황을 예측하고 움직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이지혁이 만들어놓은 안배가 맞아떨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성공만 한다면 말이다.

    이지혁의 수련을 통해 세상에 가득해진 흑마력을 다룰 수 있게 된 NDF들이 한곳에서 흑마력을 끌어모으고 있었다.

    이만한 흑마력을 다루는 것은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만, 그걸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모아서 전달하는 수준이라면 어찌어찌 가능할 것이다.

    '애초에 한계를 초월하는 양의 흑마력은 다룰 수도 없으니까.'

    서아영을 중심으로 검은 흑마력의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진하고 강렬하게.

    그리고 최정훈은 거기에 한 가지를 더 추가했다.

    "전할 수 있다면 전해야겠지."

    중심에 있는 NDF들 뒤로 어느새 능력자들이 모여 있었다. 곧 그들에게서 피어난 우윳빛 섬광도 바르바체를 향해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배웠으니까.'

    에테르와 흑마력이 만났을 때는 엄청난 시너지가 일어난다는 것은 이미 이지혁을 통해 알고 있던 사실이다. 이지혁은 그 사실에 착안해 NDF들에게 흑마력을 공급하여 버프를 주기도 했으니까.

    육체가 붕괴한다는 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바르바체의 저 육체라면 이만한 마력과 에테르를 동시에 사용하고도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아니, 버텨야 한다.

    바르바체가 에테르라는 전혀 다른 동력을 활용할 수 있을 때의 이야기이겠지만…….

    "그것도 못할 거면 마왕이라는 이름이 아깝겠지! 바르바체!"

    최정훈의 외침에 바르바체가 낮은 웃음을 흘렸다.

    "기세등등하군, 망할 인간."

    바르바체가 이를 으득, 갈았다.

    저 이지혁을 제외한다면 태초 이래 그 어떤 인간도 감히 자신에게 저리 큰소리를 치지는 못했다. 그런데 이지혁 정도의 수준에 오른 인간도 아니고, 약해 빠진 인간이 자신에게 큰소리를 치는 것을 듣고 있으려니 어이가 없다 못해 몸에 힘이 빠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인정해야겠지.'

    아펠드리체가 느낀 것을 바르바체도 비슷하게 느끼고 있었다.

    힘이 없다고 해서 강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이 모순 가득한 말을 그대로 보여주는 인간이 바로 최정훈이었다.

    저 최정훈이 없었다면 지금쯤 인간이고 마왕이고 할 것 없이 싸그리 다 쓸려 나갔을 것이다.

    죽어가는 이지혁에게 다가올 때부터 뭔가 다르다고 생각했지만, 설마 이 정도 능력을 보여줄 줄이야…….

    '어쩌면 진짜 전투를 위해 태어난 존재들은 인간일지도 모르겠군.'

    인간들이 마족을 전투와 살육으로 살아가는 이들이라고 평하지만, 마족의 입장에서 본다면 인간만큼 전투에 미쳐 날뛰는 종족은 존재하지 않았다.

    마족의 전투가 개체와 개체 간의 싸움으로 대변된다면, 인간은 종족과 국가를 이루어서까지 싸우고 또 싸우지 않는가.

    그런 인간의 전투 방식을 가장 잘 대변하는 이가 바로 최정훈이었다.

    "꼴좋게 됐군."

    인간의 지시에 따라 싸워야 한다는 것이 자존심 상하기는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저 빌어먹을 이지혁을 쓰러뜨릴 수만 있다면 인간의 발을 핥는 것도 주저하지 않을 바르바체였다.

    등 뒤로 크게 돋아난 바르바체의 뿔이 밀려오는 흑마력과 에테르를 흡수하기 시작했다. 원리는 대충 들었다. 남은 건 그걸 과연 그의 육체에 적용할 수 있는가의 문제뿐이다.

    "크으으윽!"

    두 가지 기운이 육체 안으로 밀려 들어오자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몰려왔다.

    '잘도 이런 미친 생각을 해냈군.'

    두 가지 기운을 동시에 다룬다는 것은 바르바체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건 인간이 아니고서는 생각도 할 수 없는 발상이다. 흑마력을 베이스로 삼아 살아가는 바르바체는 흑마력을 높이는 것 이외에 자신을 강하게 만드는 방법을 생각할 수 없었다.

    '아니, 그도 아니겠지.'

    그는 이미 흑마력을 버렸으니까.

    우득, 우드득.

    육체 하나만으로는 태초 이래 최강의 영역에 도달한 바르바체의 몸마저도 밀려오는 마력과 에테르의 소용돌이를 감당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나하나의 힘이라면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지만, 육체 내에서 두 가지 기운이 얽히면서 만들어내는 충격은 강건한 바르바체의 몸을 종잇장처럼 찢어내고, 강철처럼 단단한 그의 의식을 아득하게 날려 버릴 정도였다.

    "크크크큭, 죽이는군!"

    그렇기에 더없는 희열이 차오르고 있었다.

    가능하다. 이거면 가능하다!

    부서진 육체가 순식간에 다시 복원된다. 이지혁이 마나를 통해 힐을 시전한 것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속도와 효율이었다. 무너지는 육체를 복원시키는 체계를 완벽하게 갖춘 바르바체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 순간, 하늘에서 태양이 떨어졌다.

    입이 쩌억 벌어질 정도의 가공할 힘이었다.

    과장을 좀 보태자면 정말 태양이 지구로 날아드는 것 같았다.

    하지만 바르바체는 절망하는 대신 웃었다.

    저 힘은 너무도 엄청나다. 너무도.

    하지만…….

    "그만큼이나 내가 강해졌다는 거겠지!"

    뒤로 살짝 당겨진 바르바체의 주먹이 앞으로 뻗어 나간다.

    콰아아아앙!

    하늘로 일권(一拳).

    단순한 주먹질뿐이지만, 그 여파는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마치 하늘을 뚫어버릴 듯 가공할 충격파가 낙하하는 태양을 향해 날아들었다.

    폭발.

    바람과 태양이 충돌했다.

    모든 소음을 지워 버리는 굉음이 터지며 충격의 여파가 대기를 뚫고 솟구쳤다.

    하늘 위로 치솟아 오르는 거대한 용권을 보며 최정훈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된다!'

    모험은 성공했다.

    정확히 어떤 방식인지는 모르겠지만, 바르바체는 지금 에테르와 흑마력을 조합해 냈다. 그리고 그 위력은 지금 최정훈의 눈으로 확인하고 있지 않은가.

    성직자들이 만들어내고 있는 실드가 아니었다면 지금 이곳에 있는 이들이 모두 즉사하고도 남았을 만한 가공할 충격이 그들을 덮쳤다.

    단 일격의 교환이건만, 지형 자체가 바뀌고 있었다.

    "된다고!"

    최정훈이 흥분하여 소리쳤다.

    이제 끝이다.

    그의 머리에서는 더 이상 나올 것이 없다. 더는 어떠한 방법도 없다. 그렇다면 이걸로 끝내야 한다. 저 지긋지긋한 이지혁을 이걸로 가루로 만들어 버리는 것 말고는 다른 수가 없었다.

    "이걸로 되는 거예요?"

    서아영이 큰 목소리로 물어오자, 최정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바르바체몬을 믿는 수밖에 없어요."

    "우정, 사랑, 용기라도 나와야 할 것 같은 대사네요. 몬스터 볼은 챙겼어요?"

    "뭐, 본인 주장대로라면 용사니까."

    최정훈이 피식 웃었다.

    농담이라도 하지 않으면 긴장감을 이겨낼 수 없었다. 최후의 최후까지 오고 말았으니까.

    고개를 든 최정훈의 눈에 검고 붉은 두 줄기의 유성이 하늘에서 서로 맞부딪치는 광경이 들어왔다.

    피처럼 붉은 유성과 검디검은 유성.

    검은색의 유성이 미미하게 섞여 있는 흰빛이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두 색의 유성이 서로 맞부딪칠 때마다 붉고 검은 기운들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세상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불꽃놀이 같군.'

    최정훈이 이를 꽉 깨물었다.

    아니, 저건 세상의 새로운 시작을 축복하는 불꽃놀이가 되어야 한다.

    붉은 유성을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치켜올린 최정훈이 나직하게 말했다.

    "반드시 역사에 기록해 주지. 반드시 말이야!"

    최정훈의 목소리와 함께 바르바체에게 밀려가는 기운들의 색이 더더욱 짙어졌다.

    * * *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크리스토퍼는 멍한 눈으로 화면을 바라보았다. 이미 저 전투는 그의 손을 떠났다.

    지원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조금 전부터는 대체 저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이해를 할 수 없게 되었다.

    '저 또라이 같은 놈이…….'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지금 최정훈이 바르바체를 지원하여 이지혁과 싸우게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인간과 마왕이 편을 먹고 싸우다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그 기묘한 이질감에 당황한 크리스토퍼는 화면에서 고개를 떼고 사무실을 바라보았다.

    '영화관에라도 온 것 같군.'

    화면에 집중하기 위해 불을 줄여놓은 사무실 안을 채운 이들이 모두 손을 내려놓은 채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호통이라도 쳤을 광경이지만, 크리스토퍼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크리스토퍼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를 지배하던 무력감은 떨쳐 낸 이후였다. 지금 그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깊은 피곤함과 허탈함뿐이었다. 모든 것을 쏟아내고 결과를 기다리는 심정은 겪어보지 않는 이들은 모를 것이다.

    '기도하는 심정이라는 건가.'

    이 세계에 신성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건 이미 증명이 되었지만, 크리스토퍼는 성호를 그었다.

    존재하지 않는 신이라 해도 상관없다. 그저 믿고 싶을 뿐이니까.

    여기가 끝이 아니기를.

    지금이 마지막이 아니기를.

    인류의 끝이 지금 이곳만은 아니기를 크리스토퍼는 기도했다. 들어줄 누군가가 없다고 해도 말이다.

    화면에 얼핏 스쳐 지나가는 슈트 차림의 동양인을 본 크리스토퍼가 헛웃음을 지었다.

    '그렇지.'

    기도를 해야 한다면 신이 아니라 저 사람에게 해야겠지.

    크리스토퍼가 복잡함이 가득 담긴 눈으로 최정훈을 바라보았다. 불과 반년 전만 해도 저 동양인이 이만큼 인류를 이끌어 나갈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크리스토퍼는 최정훈이라는 이를 무척이나 인정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이루어낸 것에 비하면 과할 정도로 말이다.

    세상을 움직이는 자들의 최정훈에 대한 평가는 이지혁의 등에 업혀 호가호위하는 건방진 동양인 정도였다.

    그 와중에 이지혁을 등에 업을 수 있는 것도 능력이라 평가한 크리스토퍼의 눈은 나름 정확했다고 볼 수 있다.

    '정확이라…….'

    크리스토퍼가 고소를 머금었다.

    이걸 정확이라 한다면 세상에 정확하지 않은 것은 없을 것이다.

    크리스토퍼의 최정훈에 대한 평가는 완전히 틀렸다. 그는 이지혁을 등에 업은 자가 아니라, 이지혁과 동등하게 걷는 동료였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이지혁에게 있어 최대의 대적자가 되어 있었다.

    '그 사람은 이걸 예상했을까?'

    때때로 이지혁에게서 그도 따라갈 수 없는 깊은 생각이라는 걸 느낄 때가 있었다. 겉으로 드러나 있는 이지혁의 모습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전쟁에 의한 PTSD에 익숙한 크리스토퍼는 이지혁의 겉모습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이지혁은 험난한 이계에서 수천 년을 살아온 존재다. 그런 이가 생각이 얕을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런 이지혁이 최정훈을 선택했다.

    '그때 눈치를 챘어야 하는 건데.'

    당시에는 이지혁이 그저 곁에 있던 최정훈을 이용한다고 생각했다. 최정훈이 능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지혁과 대등할 수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완벽한 오판이었다.

    위기가 커질수록, 판이 커질수록 최정훈은 자신의 능력을 백분 발휘해 나갔다. 급기야 이제는 완전히 인류를 이끌고 있는 것이다.

    크리스토퍼는 기도하는 심정으로 최정훈을 바라보았다.

    '믿는다.'

    그리고 믿을 수밖에 없다.

    "국장님."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크리스토퍼가 고개를 돌렸다.

    "우리가… 인류가 이길 수 있겠습니까?"

    크리스토퍼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미국이라는 나라의 그림자 속에서 움직이면서 그동안 수도 없이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받았다.

    하지만 이번처럼 대답이 힘든 질문은 처음이었다.

    "이길 수 있는지는 나도 모른다."

    크리스토퍼가 고개를 저었다.

    눈에 실망이 어리는 부하를 보며 크리스토퍼가 미간을 모았다.

    "그런데 그게 왜 중요하지?"

    "…네?"

    "이길 수 있으면 어쩔 거고, 이길 수 없다면 어떻게 할 건가?"

    "……."

    크리스토퍼가 으르렁거리듯이 말했다.

    "판이 기울었다 싶으면 티켓이라도 버리고 집에 돌아갈 텐가? 마지막 시간을 가족이랑 즐겨보고 싶나?"

    "아닙니다."

    "그래, 아니겠지. 아니어야지."

    크리스토퍼가 낮게 심호흡을 했다. 이건 대답이기도 하지만,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대답과도 같은 다짐.

    "이길 수 없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어. 이길 수 있다고 해도 달라질 게 없다. 우리가 할 것은 그저 저들을 믿는 것뿐이야. 저들이 반드시 인류의 미래를 가져다줄 것이라고 믿고 기도하는 것뿐이다."

    "예."

    "전장에서 피를 흘리지 않는 우리는 실망할 자격도 없어. 피 흘리는 자들에 대한 존중을, 인류라는 무거운 짐을 어깨에 지고 싸우는 이들에 대한 존경을."

    크리스토퍼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앞에 서서 싸우지도 못하는 주제에 뒤에서 우는소리하지 마."

    "예! 국장님!"

    굳은 얼굴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부하를 보며 크리스토퍼가 씁쓸한 얼굴로 시가를 물었다.

    '십 년만 젊었어도…….'

    그의 몸이 현장의 가혹함을 버틸 수 있는 수준만 되었어도 이 먼 곳에서 화면으로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현장으로 가는 게 방해가 되는 순간, 미련을 버리고 자신의 상황을 인정하는 게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빌어먹을.'

    깊게 연기를 뿜어내며 크리스토퍼가 고개를 저었다.

    '나도 저곳에 있고 싶었다.'

    인류 최후의 보루에 말이다.

    * * *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최정훈은 피부를 찢어버릴 듯이 몰아치는 광풍을 전신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눈을 떼지 마.'

    찢어진 눈꺼풀에서 피가 흘러내린다. 하지만 최정훈은 두 다리로 굳건하게 서서 모든 상황을 그 두 눈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물론 따라갈 수는 없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눈으로 확인한다는 것은 인간인 그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순간적으로 세상이 번쩍인다 싶더니, 땅이 하늘로 솟아오르고 하늘이 땅으로 떨어졌다.

    치솟아 오른 용암이 비처럼 떨어져 내렸고, 둘이 뿜어낸 기운을 감당하지 못한 대지가 하늘을 부유했다.

    '지옥이 따로 없군.'

    최정훈은 자신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저놈들이 이곳에서 싸워주고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했다.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싸웠다가는 지구가 남아나지를 않을 것이다. 이 전투가 끝난다면 설사 살아남는다 해도 지도를 다시 그려야 할 것이다.

    살아남을 수 있다면 말이다.

    쿠우우우우웅!

    검은 유성이 바닥으로 내리꽂혔다.

    단단한 바닥이 마치 물이라도 된 것처럼 파문을 만들어냈다. 지각이 파도처럼 밀려 나가고, 충격력을 이겨내지 못한 바닥은 아래로, 아래로 응축되었다.

    '저거… 맨틀까지 가는 거 아닌가?'

    얼마나 가공할 기세로 내리 꽂히는지, 저러다가 지구를 뚫고 나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단 일격으로 지형이 바뀐다.

    바닥에 난 구멍을 통해 분수처럼 역류하는 용암 한가운데서 시커먼 그림자가 튀어 올랐다.

    콰아아아아앙!

    검은 그림자가 허공에 떠 있는 이지혁을 향해 날아들었다. 뭔가 나타났다 싶더니, 허공에서 거대한 충격파가 터진다.

    한 방, 다시 한 방, 또 한 방!

    한 번 한 번의 충격파가 터질 때마다 몸이 찌그러지는 것 같은 압력이 최정훈을 짓눌렀다.

    '어떤 레벨이냐고!'

    거대한 크레이터로 변모한 땅덩어리가 다시 움푹움푹 파이다가 뒤섞이고 솟아오른다.

    전투와 동시에 바닥이 춤을 추고 있었다. 최정훈은 그 광경을 보며 웃어버렸다.

    '어마어마하군, 진짜.'

    바닥을 파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지형 따위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을 테니까. 그럼에도 그저 땅 위에서 전투를 하는 것만으로도 바닥을 고문하는 꼴이다.

    저 가열찬 학대를 지구가 버텨내 줄 수 있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

    최정훈이 허공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보이지 않아.'

    그럼에도 알 수 있다.

    저기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인류의 마지막을 건 전투가 말이다.

    그 마지막의 선봉을 마왕에게 맡긴다는 것은 조금 껄끄러운 일이지만, 아무려면 어떤가.

    가축도 길들여 써먹는 인간이다. 마왕을 써먹는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지.

    쿠우우우웅!

    그때, 거대한 너무도 거대한 충격파가 세상을 덮쳤다.

    최정훈은 순간 자신의 몸이 허공으로 날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걸 날아오른다고 표현할 수 있다면 말이다.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육체가 튕겨져 나간다. 그리고 날아간 정신을 되찾아준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끔찍한 격통이었다.

    "끄으윽."

    눈을 뜬 최정훈이 처음으로 본 것은 하늘이었다.

    검은 하늘.

    '해가 졌나?'

    너무 집중한 모양이다. 세상이 어두워진 것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제멋대로 부러져 나가 꺾여 있는 팔다리를 인식한 최정훈이 신음을 흘리며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한 300m는 날아온 것 같은데…….'

    잘도 살아남았군.

    성직자들이 쳐준 실드가 아니었다면 충격을 맞이하는 순간 세포 단위로 분리되고 말았을 것이다. 저 싸움은 지금 그런 레벨이니까. 연약한 인간의 몸으로는 바라볼 수조차 없는 싸움이었다.

    "최정훈 씨! 괜찮아요?"

    함께 날아온 서아영이 자신에게 뛰어오는 것을 본 최정훈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오지 마!"

    "……."

    "정신 차려! 지금 내 걱정 할 때야? 다시 마법진 만들어! 지금 당장!"

    "예!"

    입술을 질끈 깨문 서아영이 쓰러진 동료들을 재촉해 다시금 진영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본 최정훈도 유일하게 부러지지 않은 다리에 힘을 줘 몸을 일으켜 세웠다.

    남은 팔다리에서 잇몸을 드릴로 파내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고, 어딘가가 터졌는지 온몸이 피로 축축하게 젖어들었지만, 최정훈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우는소리할 때가 아니다.

    이곳은 모든 것이 걸린 전장이니까.

    지친 얼굴로 모여드는 NDF들을 보며 최정훈이 이를 꽉 깨물었다.

    "힘든 것 알아."

    최정훈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힘든 것 아니까, 우는소리하지 마! 차라리 지쳐서 죽어! 그게 저놈 손에 죽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최정훈의 목소리를 들은 이들의 눈에 증오가 어렸다.

    "얼마 안 남았어! 반드시! 반드시 처 죽인다!"

    "라져!"

    최정훈이 핏발 선 눈으로 허공에 떠서 바르바체와 대치하고 있는 이지혁을 노려보았다.

    '그렇지?'

    얼마 안 남았겠지.

    이제 정말로 말이야.

    이지혁이 죽든, 그들이 죽든 이제 결론이 날 것이다.

    "생각해 보면……."

    최정훈이 낮게 입을 열었다.

    "내가 제대로 해준 게 하나도 없거든."

    쉬고 싶다는 사람 억지로 끌어들여서 일을 시켜 댔고, 그만 싸우고 싶다는 사람을 어르고 달래고 협박해 가면서 전장으로 내몰았다.

    현실로 돌아온 이지혁의 마지막은 결국 싸우고, 싸우고, 싸우다 죽은 것이다.

    그 사실이 최정훈을 견딜 수 없게 했다.

    그 오랜 시간 동안 고통받은 이의 마지막이라기에는 너무도 서글프지 않은가.

    "그러니까!"

    최정훈의 목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나를 죽여 달라는 그 마지막 부탁은 내가 반드시 들어줄 테니까! 반드시!"

    최정훈의 목소리가 세상으로 울려 퍼졌다.

    * * *

    바르바체의 주먹이 대기를 뚫고 날아들었다. 순간적으로 압축된 공기가 마치 포탄처럼 뿜어져 나갔다.

    만약 주변에 사람이라도 있었다면 그 압력만으로 갈기갈기 찢겨 나갈 상황이지만, 그 정도의 충격으로는 바르바체와 이지혁 둘 중 누구에게나 조금의 걸림돌도 되지 못했다.

    하늘로 치솟은 유성과 유성이 맞부딪친다.

    콰앙!

    콰아아앙!

    일격, 일격이 교환될 때마다 세상이 뒤흔들리고 있었다.

    "큭!"

    이지혁의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빌어먹을 놈이!"

    육체적으로 큰 손상을 당한 것은 아니다. 지금 바르바체와 이지혁은 백중세를 유지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 백중세라는 사실이 이지혁의 자존심을 사정없이 짓밟고 있었다.

    아무리 바르바체가 인간들의 도움을 받고 있다고는 하나 애초에 바르바체는 물론, 바르바체에다가 인간의 힘을 모두 더한다고 해도 그를 상대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최정훈의 지휘 아래 바르바체는 지금 자신의 한계를 아득히 뛰어넘는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이지혁이 이를 갈았다.

    '이렇게까지 올라올 줄이야.'

    애초에 이 모든 일은 결국 이지혁이 만들어낸 방식이었다. 지금의 이지혁이 아닌, 이전의 이지혁이 흑마력과 에테르가 서로 시너지를 일으킨다는 사실을 알아냈고, 그것을 바탕으로 마왕들의 침공을 막아냈으니까.

    하지만 그 방법이 이런 식으로 돌아올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자업자득이 아니라고!'

    그 방식을 사용한 것은 지금의 이지혁이 아니다. 이제는 사라진 과거의 이지혁의 방식이었다. 그 방식이 돌고 돌아 마왕에게까지 들어간 꼴을 보고 있자니,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게다가 지금의 이지혁을 더더욱 어이없게 만드는 것은 바르바체라는 존재였다.

    이 마왕 놈은 과거의 이지혁보다 훨씬 능숙하게 에테르를 다루고 있었다. 과거 이지혁은 에테르 기반의 생명체임에도 지금의 바르바체만큼 에테르를 잘 다루지 못했다.

    하지만 전투를 위해 태어난 생명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바르바체의 에테르 활용은 능숙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그 능숙함이 지금 이지혁의 목을 조여오고 있는 것이다.

    지금 바르바체는 인간들의 에테르를 받아서 사용하고 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인간들의 몇 배나 되는 효율을 발휘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저만한 에테르를 하나의 육체에 모을 수 있다는 것만으도로 인간들이 각자 따로 에테르를 사용하는 것에 비하면 효율이 수십 배는 올라갈 텐데, 바르바체는 거기에서 또 몇 배의 효율을 보이고 있었다.

    인간들이 몇 년에 걸쳐서 확립한 에테르의 활용법을 바르바체는 수분 만에 뛰어넘어 버린 것이다.

    '과연 마족이라는 건가?'

    세상에는 수많은 전투 종족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건 상대적인 개념일 수밖에 없다.

    과거 베라프의 인간들은 오크를 보며 전투를 위해 태어난 존재들이라 불렀다. 그들의 육체는 강인하기 짝이 없고, 그들의 흉포성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오크들의 전투 본능마저 저 마족들에 비한다면 초라하기 짝이 없다.

    강하고 약하고의 문제는 아니다.

    동등한 힘을 가진 마족과 오크가 싸우기 시작한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마족이 오크를 가볍게 찢어버릴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전투라는 건 영혼에 새겨진 본능 같은 것이니까.

    지금 바르바체는 그 영혼 가득한 본능을 활용하여 에테르를 완벽하게 통제해 내고 있다.

    우우우우웅!

    바르바체의 내부에서 에테르가 약동하는 것이 느껴진다. 등에 돋아난 거대한 뿔을 통해 바르바체의 육체로 밀려 들어간 에테르가 흑마력과 뒤섞인다.

    푸우우웃!

    바르바체의 육체 곳곳이 갈라지며 푸른 피가 사방으로 분수처럼 뿜어졌다. 순식간에 수복된 육체가 다시 갈라지고, 다시 터지기를 반복한다.

    '기묘한 느낌이군.'

    이지혁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과거 그의 육체를 차지하고 있던 이가 했던 방식 그대로였다. 하지만 그 파괴력만큼은 과거의 그와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연약한 인간의 육체와는 다르다. 세상 다시없을 강인한 육체를 소유한 바르바체조차 버티지 못할 정도의 압력이 지금 그의 육체를 찢어놓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저 안에서 얼마나 거대한 힘이 약동하고 있다는 뜻인가.

    지금의 이지혁조차 무시할 수 없는 힘이 일거에 뿜어져 나왔다. 검고 흰 기운이 서로 얽히며 회색빛의 어스름한 기운이 쏟아지는 폭포수처럼 이지혁을 향해 날아들었다.

    "큭!"

    이지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잘도.'

    마족의 힘은 어마어마하다.

    하지만 마족은 다른 의미로 보면 정직한 종족이었다. 그들의 힘은 가공하지만, 예측을 벗어나지는 않는다. 예측되는 힘의 정략이 일정하다는 것이 마족이 가지는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인간의 힘을 받아들인 바르바체의 힘은 예측을 할 수 없었다.

    에테르와 흑마력이 만나는 그 순간, 힘이 기이할 수준으로 치솟아 오른다. 순간순간 자신을 위협할 만큼 말이다.

    "바르바체!"

    이지혁의 우수가 검붉은 혈기를 머금었다.

    인정한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그의 앞에 나타난 이는 다시는 없을 상대였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인간들의 힘마저 빌려서 기어 올라왔다고는 해도 감히 자신의 대적자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는 이미 마족마저도 뛰어넘은 존재였으니까.

    "하찮은 짓거리를!"

    이지혁이 우수를 앞으로 뻗어내고는 그대로 바르바체가 날린 마력을 향해 뛰어들었다. 오른손을 검붉게 물들인 혈기가 마력을 가르며 찢어냈다.

    콰아아아아!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마력.

    이지혁은 쏟아지는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처럼 마력의 강을 꿰뚫으며 전진했다.

    우득!

    팔이 부러져 나간다.

    갑옷처럼 육체를 감싸고 있던 혈기가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찢겨 나가기 시작했다. 다이아몬드조차 찌그러지고 부서질 만큼의 가공할 압력이 이지혁의 육체를 짓눌렀다.

    꽉 다문 어금니가 부러져 나간다.

    지금 이지혁의 육체는 마족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아니, 그 이상의 내구도를 지니고 있다. 연약하기 짝이 없던 인간의 육체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강인한 육체였다.

    하지만 그 육체조차 날카로운 가시 채찍에 찢겨 나가는 인간의 피부처럼 갈라지고 터져 나가기 시작했다.

    "큭!"

    이지혁의 눈에 핏발이 섰다.

    그가 두른 혈기의 갑옷을 뚫고 이만한 압력이 전해진다는 말은 혈기의 갑옷 없이 이 공격을 맨몸으로 받았다면 지금쯤 그는 세포 단위로 분해되어 버렸을 것이란 뜻이었다.

    이지혁의 육체는 착실하게 부서지고 있었다.

    '모르겠군.'

    그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이지혁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마족이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는 것들이었나?'

    마족이 그만한 힘을 가지고도 전 차원을 정복하지 못한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그들의 삶에는 치열함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인간에게 마족과 같은 힘이 주어졌다면 인간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지배하려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족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영원에 가까운 시간을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지금 당장 무언가를 이루지 않아도 상관없다. 시간은 그들의 편이고, 그저 기다리는 것만으로 원하는 대부분을 이룰 수 있으니까. 그렇기에 마족들은 적극적이지 않다.

    일례로 마족들이 이지혁에게 복수하겠다는 마음의 십분지 일만 쏟았어도 베라프는 완벽하게 멸망했을 것이다. 마왕이 두셋만 넘어왔어도 베라프로서는 막을 방법이 없으니까.

    하지만 마왕들은 베라프를 원하면서도 그들을 침공하기 위해 노력하거나 머리를 짜내지 않았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치열할 필요가 없으니까 말이다.

    이지혁의 기억 속 마족들은 축복받은 신체와 마력을 타고난 대신에 그것을 활용할 줄 모르는 멍청이들일 뿐이었다.

    하나 지금의 바르바체는 어떤가.

    지금 바르바체는 공격을 하는 입장임에도 이지혁 이상의 대미지를 착실하게 축적하고 있었다. 에테르와 흑마력을 뒤섞는 것은 과도할 정도의 부하를 감내해야 하는 일이다.

    으스러져 나가는 바르바체의 육체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저 강대한 육체마저도 버텨내지 못하는 것이다. 금세 회복이 된다고는 하지만, 대미지를 완벽하게 지울 수는 없다.

    공격하는 자가 공격을 받아내는 자보다 더 큰 대미지를 입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자신의 육체가 입는 피해를 명확하게 알고 있음에도 바르바체는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다면 멈추게 해주지!"

    이지혁이 이를 갈며 속도를 더 높였다.

    콰드드득.

    손끝이 부러져 나가고, 안면이 뜯겨 나간다. 하지만 이지혁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쏟아지는 마력의 물결을 헤쳐 나갔다.

    "이지혀어어어어억!"

    바르바체가 포효했다.

    조금 전 이지혁의 손에 하체가 뜯겨 나갔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격통이 그를 지배하고 있었다. 흑마력이 터져 나간 육체를 빠른 속도로 재생시킨다.

    하지만 대미지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육체는 완벽하게 회복되었지만 체력은 급격하게 소진되었고, 고통을 이겨낼 때마다 정신력은 극도로 깎여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바르바체는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물러날 이유가 없다.

    어차피 그는 미래를 버렸으니까.

    그에게 남은 미래는 이지혁을 쓰러뜨리고 죽거나, 이지혁의 손에 죽는 것뿐이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

    손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력의 색이 점점 변하기 시작한다.

    조금 전까지는 검은색과 흰색이 뒤섞인 모양세로 뿜어져 나오던 마력과 에테르가 시간이 흐를수록 완연한 짙은 잿빛을 띠기 시작했다.

    에테르에 점점 더 익숙해진 바르바체가 육체 내부에서 에테르와 흑마력을 완벽하게 융합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그만큼 육체가 받는 부담은 늘었지만, 그 대가는 확실했다.

    콰아아아아아아아!

    뿜어져 나가는 잿빛의 마력이 가면 갈수록 그 기세를 얻어갔다. 처음에 비하면 세 배쯤은 더 거칠어진 마력이 이지혁의 육체를 완전히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마력의 물살을 거슬러 오르던 이지혁의 육체가 주춤한다.

    "크윽!"

    갑자기 더 강해지기 시작한 압력에 마력을 거슬러 오르던 이지혁의 육체가 태풍을 만난 조각배처럼 이리저리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검붉은 혈기를 줄줄이 내뿜는 이지혁의 눈이 바르바체의 모습을 쫓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곧 쓰러질 것처럼 휘청거리는 주제에…….'

    바르바체의 몸은 간질에라도 걸린 것처럼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마왕이 입술을 질끈 깨물고 고통을 참아내는 모습을 대체 어디서 보겠는가.

    하나 그 진귀한 광경을 보는 이지혁의 마음은 조금도 만족스럽지 못했다. 육체를 옥죄어오는 압력이 가면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 혈기로 만들어낸 그의 갑옷마저 일그러지며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바르바체에에에에!"

    증오와 분노를 담아 고함을 내지른 이지혁이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돌진하기 시작했다. 부러지고 꺾이기를 반복하는 오른팔을 몇 번이고 회복하여 마력을 밀어낸다.

    그리고 그 순간.

    콰아아아아아아!

    바르바체의 혼을 담은 듯한 거대한 파동이 이지혁의 육체에 작렬했다.

    * * *

    최정훈은 시야가 닿는 곳을 넘어 우주까지 날아가는 듯한 바르바체의 일격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저거, 각도가 조금만 아래로 향했으면 아마 지표가 개박살이 났겠지.'

    그 위력이 얼마나 큰가에 놀랄 시점은 이미 지나 버렸다. 이곳은 극장으로 따지자면 특등석이 아닌가. 가장 가까운 곳에서 분명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대한 화력 쇼를 지켜보고 있는 중이다.

    자극이란 것은 반복되면 익숙해지는 법이다. 처음에는 저들의 힘에 경악하던 최정훈이지만, 이제는 나름 담담히 지켜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위기감만은 버릴 수 없다.

    방금 일격이 우주 공간으로 날아가 버렸으니 망정이지, 저 공격이 지표를 꿰뚫기 시작했다면 되돌릴 수 없는 자연재해가 일어났을 것이다.

    아마 이 주변은 다시는 사람이 살 수 없는 세상이 되었을 것이다.

    '새삼 어마어마하네.'

    저놈들이 핵무기 이상으로 강하다는 생각은 하고 있다. 공격 한 번, 한 번이 핵무기가 줄 수 있는 충격을 뛰어넘고 있다.

    그런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을 이해한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한 번의 주먹질로 지표가 뒤집히고 태풍이 불어온다는 걸 무슨 수로 이해하라는 말인가.

    능력자가 등장하면서 세상은 바뀌었다. 인류가 등장한 이후로 단 한 번도 가능할 거라 생각해 보지 못한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그런 세상에서 5년이 넘게 살아온 최정훈이다.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일들을 받아들이는 것에는 익숙해져 있었다.

    하지만 이건 정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최정훈이 눈을 부릅뜨고 눈앞에 보이는 광경을 필사적으로 받아들였다. 이해할 수 있든, 이해할 수 없든… 이 광경이 세상의 운명을 결정짓는 승부처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압도하는 건가?'

    팽팽하던 승부의 추가 기우는 것이 보인다. 그의 능력으로는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들을 명확하게 이해하기는 힘들지만, 조금 전부터 바르바체가 뿜어내는 회색의 마력들이 이지혁의 붉은 혈기를 압도하고 있었다.

    확연하게 말이다.

    최정훈의 눈에서 희망의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거, 정말 되는 건가?'

    허세를 부리기는 했지만, 정말 통할 수 있을지는 그 역시 장담할 수 없었다. 애초에 단 한 번도 시도해 보지 않은 짓을 이론만으로 확정할 수는 없는 거니까.

    대충 짜맞춰 놓고 마왕인 바르바체의 전투 본능을 믿는다는, 그야말로 제멋대로의 계획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계획이 완벽하게 맞아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바르바체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회색의 마력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일반적인 마력도, 마족의 흑마력도 아닌, 새로운 마력. 그 전인미답의 경지에 바르바체도 도달한 것이다.

    최정훈이 눈을 크게 떴다.

    바르바체가 뿜어낸 어마어마한 양의 마력이 이지혁의 혈기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저, 저거?"

    최정훈의 몸에 힘이 꽉 들어갔다. 아무리 설레발을 치지 않으려 노력해도 눈에 보이는 것이 너무 확실하다.

    "아직 아니에요."

    "네?"

    "이지혁은 힘을 잃지 않았어요. 더구나… 아직 전혀 나온 게 없으니까요."

    "무슨 말씀이시죠?"

    아펠드리체는 최정훈의 물음에 낮게 한숨을 쉬었다.

    "하나는 최악의 마왕이고, 다른 하나는 다시없을 최강의 인간 출신이에요. 방향은 조금 다르지만, 전투에 있어서는 일가를 이룬 이들이죠."

    "그렇죠."

    아펠드리체의 살짝 걱정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이들의 마지막 싸움이 이리 쉽게 끝날 리가 없어요. 적어도 누구 한쪽이 바닥을 드러내는 싸움이 되겠죠."

    "바닥이요?"

    최정훈은 아펠드리체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바닥이라니, 저들이 무슨 바닥을 드러낸단 말인가.

    하지만 아펠드리체는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변화는 바로 그 순간에 일어났으니까.

    콰아아아아아아!

    세상을 찢어내는 듯한 가공할 폭음이 터져 나온다. 최정훈의 고개가 반사적으로 돌아갔다.

    하늘을 가득 뒤덮은 회색의 거대한 마력 사이로 검붉은 혈기가 선명하게 그 모습을 드러냈다. 완벽하게 짓눌러 버렸다고 생각했건만, 오산이었던 것이다.

    회색의 마력 사이에 확연히 나타난 검붉은 혈기는 자신의 영역을 확고하게 구축하며 마력을 뿜어내고 있는 바르바체를 향해 전진했다.

    "저……."

    최정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무리 이해력이 떨어진다 해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저 혈기가 회색의 마력을 뚫고 바르바체에게 도달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걸 말이다.

    "마력! 마력을 더 보내야 합니다!"

    "하고 있으니까! 좀 닥쳐요!"

    최정훈이 보채기 시작하자 서아영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머리카락이 뽑혀 나가도록 힘을 주고 있는데도 저리 사람을 보채니 야속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흑마력을 자체적으로 다룰 수 있다지만, 애초에 흑마력이라는 것은 인간이 다룰 수 있는 힘이 아니다. 가능하다고 해서 피해가 없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흑마력이 육체를 타고 흐를 때마다 오장육부가 찢어지고 근육이 한 올, 한 올 갈라지는 것 같은 고통이 전신을 뒤덮는다.

    '빌어먹을.'

    서아영의 눈에 핏발이 섰다.

    '잘도 이 짓거리를 해왔군.'

    에테르가 아닌 흑마력에 집중하니 알겠다. 이건 사람이 다뤄서는 안 되는 힘이다. 흑마력이 육체와 반발하여 상상도 할 수 없는 고통이 밀려온다. 하지만 서아영을 정말 괴롭히는 것은 고통이 아니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고통 때문에 우는소리를 할 수는 없다. 그들이 멈추는 순간, 모든 게 끝날 테니까. 그녀를 진정으로 괴롭히는 것은 고통이 아니라 정신이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죽이고 싶다.

    그것도 아주 잔인하게.

    음의 에너지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흑마력은 그녀의 정신을 직접적으로 뒤흔들었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참을 수 없는 살육의 충동이 그녀를 지배하려 했다.

    "제길!"

    꽉 깨문 서아영의 입술이 찢어지며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끓어오르는 증오를 표출할 곳이 필요했다. 그렇지 않으면 무슨 사고를 쳐도 사고를 칠 것이다.

    "최정훈 씨가 더 열심히 하라잖아요! 뭐해요! 힘 안 내고!"

    "이런 씨!"

    "진짜 몸만 움직일 수 있으면 쳐 죽였다. 진짜!"

    곳곳에서 쌍욕이 터져 나왔다. 살기 어린 시선이 자신에게 쏟아지는 것을 보면서도 최정훈은 오히려 그 상황을 반겼다. NDF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흑마력이 확연히 강해진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것밖에 없어.'

    이지혁은 조금 전에 비해 확연하게 약해졌지만, 되레 개입은 더 불가능해졌다. 조금 전, 그가 이지혁에게 날린 일격은 그의 힘이 아니라 이지혁의 힘을 폭주시킨 것이다.

    인력을 만들어내지 않은 이지혁이었다면 핵을 천 발 날린다 해도 타격을 주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지금의 이지혁과 바르바체의 전투에는 그 누구도 끼어들 수 없었다.

    그러니 지원할 수밖에.

    "텔레파시 지원해 주세요!"

    "네."

    아펠드리체가 고개를 끄덕이자 최정훈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신성력 더 퍼부어요! 그리고 중력도 더 강화하라구요! 발목 잡을 수 있는 건 모조리 잡아요! 이 순간이 지나 버리면 잡고 싶어도 잡을 수가 없다구요. 전투가 끝나는 순간에 여력을 가진 사람이 있으면 그것 때문에 지는 겁니다! 여기서 죽겠다는 각오로 퍼부으라구요!"

    아펠드리체를 통해 최정훈의 잔소리가 퍼져 나갔다. 반감이 극도로 고조되었지만, 쓴소리를 들은 이들이 다시 한 번 기운을 바짝 북돋웠다.

    최정훈이 다시 고개를 돌려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래도 밀리나?'

    이지혁이 만들어낸 것이 틀림없을 붉은 혈기가 바르바체의 회색 마력을 밀어내고 있었다.

    "바르바체에게도 연결할 수 있나요?"

    "지금은 불가능해요. 지금 저곳에는 신도 개입할 수 없어요."

    "제길!"

    최정훈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조금 승기를 잡았다 싶으면 뒤집히고, 또 승기를 잡았다 싶으면 뒤집히는 일이 반복되고 있었다.

    "빌어먹을, 이럴 때 저력 발휘하지 말란 말이야!"

    징그럽다.

    과거 이지혁을 상대하던 마왕들도 아마 이런 기분이었을 것이다. 쓰러뜨렸다고 생각한 상대가 자꾸 일어나서 상황을 반전시켜 오는 것을 지켜보는 심정이 딱 이랬을 것 같다.

    저놈은 이지혁도 아니면서 그런 면만 닮아서 사람을 골치 아프게 하고 있지 않은가.

    '이대로는 안 돼.'

    바르바체에게 전해야 한다.

    지금 그의 출력은 이지혁을 능가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공격의 효율이 너무 달랐다.

    저 넓은 범위로 뿌려지는 마력들을…….

    "아!"

    그 순간, 바르바체의 몸에서 뿜어져 나가던 마력들이 일순 방향을 바꿔 다시 바르바체의 몸으로 밀려 들어갔다.

    '알아챈 건가? 저 와중에?'

    상대를 쓰러뜨리기 위해 목숨까지 건 채 전력을 다하고 있다. 그 와중에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순간적으로 전략을 수정한다?

    최정훈은 왜 바르바체가 마왕 중의 마왕이라 불리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결국 이지혁이 없었다면 자신들은 바르바체를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자신의 육체를 회색의 마력으로 가득 채운 바르바체가 으르렁대며 포효했다.

    괴물과 괴물이 서로의 목줄을 물어뜯기 위해 달려들었다.

    마법의 극한에 오른 마도사.

    마나의 지배자나 다름없는 마왕.

    그 둘의 마지막 승부는 아이러니하게도 마법과는 전혀 관계없는 육탄전이었다.

    "이지혀어어어어어억!"

    거친 포효를 내지른 바르바체가 이가 부러져 나가도록 힘을 주고는 전력으로 이지혁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지혁 역시 날아들던 속도를 전혀 줄이지 않고 바르바체를 향해 날아든다.

    자존심과 자존심을 걸고 두 짐승의 머리가 그대로 충돌했다.

    콰아아아앙!

    폭음과 함께 사방으로 혈기와 마력의 파편이 불꽃놀이처럼 뻗어 나간다. 저 충격력만으로 주변의 모든 것이 소멸하고 있었다. 하지만 둘은 멈추지 않았다.

    콰앙!

    이지혁의 주먹이 바르바체의 머리를 날려 버린다.

    제대로 방어를 하지 못한 바르바체의 머리가 이지혁의 주먹에 닿는 순간, 말 그대로 흔적도 없이 소멸되어 버렸다. 하지만 소멸되기가 무섭게 순식간에 다시 머리를 복원해 낸 바르바체가 뻗어진 이지혁의 팔을 양손으로 내려친다.

    콰드득!

    이지혁의 팔이 통째로 뽑혀 나가며 바닥을 향해 내리꽂힌다.

    콰아아아앙!

    튕겨 나간 이지혁의 팔이 바닥에 처박히는 순간, 마치 핵이라도 떨어진 것 같은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미친!"

    운석이라도 떨어진 것 같은 거대한 크레이터가 만들어지며 하늘로 먼지구름이 솟아올랐다. 최정훈은 그 기묘한 광경을 보며 치를 떨었다.

    '상식적으로 좀 싸우자, 상식적으로!'

    공격의 위력도 상식을 벗어났지만, 저들의 방어력과 재생 능력 역시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도마뱀도 아닌 것들이 팔다리를 순식간에 다시 만들어내고, 심지어 날아가 버린 머리마저 재생하고 있다.

    등 뒤로 솟아오른 뿔을 통해 바르바체의 육체 내부로 빨려 들어간 마력들이 소용돌이처럼 뒤섞이며 그의 주먹에 뭉쳐 들었다.

    "크아아아아아아!"

    그 주먹이 이지혁의 육체를 후려치는 순간, 바르바체의 주먹 안에서 두 기운이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콰아아아아아앙!

    귀를 찢는 폭음과 함께 이지혁의 상체가 걸레짝처럼 너덜너덜해졌다.

    "이!"

    분노한 이지혁의 발이 바르바체의 어깨를 내리찍었다.

    세상을 찢어내는 굉음과 함께 바르바체의 육체가 운석처럼 바닥으로 틀어박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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