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직 실패하지 않았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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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으로 몸을 띄워올린 바르바체를 보며 이지혁이 피식 웃었다.
"뭐, 내가 지금 반쯤은 껍데기만 남아버린 건 분명한 사실이니까."
나약해진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하나…….
"그렇다고 우습게 보는 건 곤란하지."
이지혁이 손을 뻗어 움켜쥐자 허공으로 떠오르던 바르바체의 육체가 콰득, 우그러들었다.
"커헉!"
기세 좋게 떠오르던 바르바체의 육체가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이게 무슨 변신 로봇물인 줄 아나. 네가 뭘 한다 싶으면 내가 그냥 지켜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만약 그렇다면 너무 순진한데……."
바닥으로 피를 마구 게워낸 바르바체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미학도 없느냐, 이 저열한 놈아."
"나 원래 저열해. 알고 있을 텐데? 내가 과거의 이지혁에게 배운 게 하나 있다면, 폼 잡다가 지는 것보다는 구차하게라도 이기는 게 낫다는 거지."
이지혁이 어깨를 으쓱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렇지 않나?"
"……."
"제대로 한 방 먹었군. 이지혁이 대체 왜 너를 그리 높이 평가했는지 몰랐는데 말이야. 당해보고 알았으니, 나도 내 지력에 대해 그리 자부심을 가질 수준은 아닌 모양이야."
최정훈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리 화를 낼 만한 내용은 아니지만, 그가 분노하고 있는 것은 내용 같은 게 아니었다.
저자가 이지혁과 같은 얼굴과 육체를 가지고 태연하게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 그를 부글부글 끓게 만들었다.
"새삼 너를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바지라도 챙겨 입지그래, 썩을 놈아."
"흠, 그렇군. 잠시 잊었어."
이지혁이 아공간을 열어 파란 트레이닝복을 꺼내더니 주섬주섬 챙겨 입었다.
"그래도 부끄러움이란 건 남은 모양이군."
"오해하는 것 같아서 굳이 부연하자면, 내가 지금 이걸 챙겨 입은 이유는 과거 내 몸을 차지하고 있던 그놈이 바르바체에게 팬티도 안 입고 돌아다니는 미개한 놈이라고 욕을 한 기억이 남아 있기 때문이야. 어차피 나는 내 스스로가 인간이나 마족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너희 앞에서 발가벗고 있다고 딱히 창피하거나 하진 않아. 강아지 앞에서 옷을 벗었다고 부끄러움을 느끼는 인간이 없듯이 말이야."
"한 방 처 맞더니, 혀가 더 매끄러워진 것 같은데?"
"인정하지."
이지혁이 눈가를 문질렀다. 마치 대미지가 여전히 심각하다는 듯이 말이다.
"정말 강렬했어. 진짜 이러다가 육체가 재생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야. 내 삶은 아니지만, 오랜 그놈의 삶에서도 이만큼이나 강렬한 일격을 맞아본 적은 거의 없는 것 같군. 대부분이 내가 만들어낸 힘이 역류한 거지만, 그래도 그 상황을 만들어냈다는 건 인정하지. 인정해 주지. 너는 내게 있어서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한 방을 먹인 놈이다. 너에 대한 평가를 수정하지. 그리고 인간에 대한 평가도 말이야. 너희는 정말 대단한 것들이야."
이지혁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에게 당했다. 그래, 인간에게 당했지. 하지만… 하지만 그게 전부다. 너희는 확실히 선전했다. 그리고 분전했다. 하지만 아쉽게 패배했다는 결말이 이제 확실해진 것뿐이지."
가볍게 고개를 내저은 이지혁의 눈이 점점 더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이제는 더 이상 나를 막을 힘이 없을 텐데? 그래도 끝까지 항전할 텐가?"
"죽기라도 한 것 같나?"
"음?"
최정훈이 가운뎃손가락을 치켜올렸다.
"네가 강하다는 거야 인정하지. 하지만 그런다고 우리가 손 놓고 절망이라도 할 것 같나? 개소리 지껄이지 마. 목이 잘려도 네 다리는 물어뜯으면서 죽을 테니까."
"의지는 높이 사지, 의지는. 하지만 말이다……."
이지혁이 바르바체를 가리켰다.
"실질적으로 너희의 유일한 희망이 될 수 있는 자가 저런 꼴인데 이제 뭘 하겠다는 거지? 핵은 모조리 썼고, 그 핵으로도 나를 잡을 수 없다는 게 역으로 증명된 것 같은데? 내가 약해지기는 했지만, 그 정도 힘이야 금방이라도 보충할 수 있지. 지금 남은 힘으로도 너희를 모두 쓸어버리는 것에는 부족함이 없어."
"에이, 아니죠."
한 남자가 천천히 걸어 나오며 말했다.
"잊으신 모양인데, 유일한 희망이 될 수 있는 사람은 저 마왕이 아니라 바로 저 아니겠습니까? 당신이 이지혁 씨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면 저의 무서움을 충분히 알고 계실 텐데요."
"……과거 이지혁의 기억대로라면 실속 없는 떠버리 같은데."
"와, 나 상처받았어."
알파가 얼굴을 감싸며 쪼그려 앉자 최정훈은 자신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쉬었다.
'저런 놈이 인류 대표라니.'
방금 알파가 한 말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 최정훈의 슬픈 현실이었다. 부정하고 싶지만, 확실히 지금 인류가 조금이라도 희망을 걸어볼 만한 상대는 알파밖에는 없었다.
비록 그 희망이라는 게 로또 당첨만큼이나 현실성이 없는 꿈이나 다름없지만 말이다.
"기억이 잘못된 거 아닙니까? 제가 아는 이지혁 씨라면 저를 그렇게 허접으로 기억하지는 않을 텐데요."
"기억을 그대로 말해줄까?"
"…사양합니다."
알파가 쪼그려 앉자 최정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건 논외로 하지."
"세상이란 건 의지만으로 어찌할 수 없는 거지. 그건 이미 봤을 텐데? 의지만으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다면, 그 이지혁이 죽지도 않았겠지. 너희가 그토록 그리워하는 그놈은 결국 실패자야."
"머저리 같은 소리를 하고 있군."
최정훈이 이를 갈았다.
"이지혁 씨는 실패한 게 아냐. 선택을 한 것뿐이지."
"그 선택의 결과가 실패라면, 다를 것도 없는 것 아닌가?"
"아직 실패하지 않았어."
이지혁이 피식 웃었다.
"실패하지 않았다고?"
이지혁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나를 봐."
이지혁이 양팔을 과장스레 벌리고 최정훈을 비웃었다.
"이지혁이 만들어낸 결과가 나야.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그가 결국 나라는 존재가 나타날 것이라 생각했을 것 같나? 그가 바라던 결과는 나보다는 몇 배는 더 온건한 존재였어. 적어도 그놈은 자신의 기억이 나에게 조금이라도 영향을 줄 거라 생각했지. 입으로는 아니라고 하면서 말이야."
최정훈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럴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이성적으로 생각하기 이전에 인간이라면 자신이 사라지고 새로이 나타난 존재가 자신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을테니까.
나에게서 비롯해 태어난 결과가 나를 완전히 부정할거라고 누가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건 자식이 부모를 부정한다는 것과 같은 일이다. 실제로 그런 일이 빈번하게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아이를 낳는 시점에 어느 부모가 그런 생각을 하겠는가.
"하지만 그 결과가 이거다."
이지혁이 자신을 가리켰다.
"나라는 존재가 그전의 이지혁을 부정하는 수단이 되는 건 그리 기분 좋지 않은 일이지만, 너희의 희망을 깨부순다는 의미에서는 괜찮겠군."
"희망?"
"그래, 희망. 다른 이름으로는 종교, 혹은 아무런 근거가 없는 맹목적인 믿음."
이지혁이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이지혁이 한 일이니 뭔가 다른 수가 있을 것이다. 다른 안배가 있을 것이다. 그는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싸웠으니, 우리도 똑같이 싸우면 반드시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을 거다'라는 믿음 말이지. 그 가장 큰 반례가 나다. 이지혁은 나라는 존재가 만들어질 것이라고는 죽는 그 순간까지도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내가 바로 그의 가장 큰 실패다. 그가 실패했다는 살아 있는 증거지."
최정훈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아니다, 멍청한 놈아."
"아니라고?"
"실패라는 건 결과야. 하지만 아직 결과는 나오지 않았어."
"…재미있는 발상이군."
"우리가 너를 쓰러뜨리면, 결과적으로 이지혁 씨는 성공한 도박을 하게 된 셈이지. 내가 그렇게 만들면 그만이야."
"하하… 하하하하하!"
이지혁이 어이없다는 듯 커다란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말로는 못 당하겠군."
"그래서 너는 안 되는 거야. 이지혁 씨는 말로 내게 진 적이 없거든."
"그래. 그가 나보다 우월한 분야가 있다는 걸 인정해야겠군."
이지혁이 가만히 최정훈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하지만 말이야……."
우우우우우웅.
이지혁의 몸 주변을 피처럼 붉은 혈기가 돌기 시작했다. 검붉은 혈기의 아지랑이가 피어오르자 대지가 그 힘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듯 덜덜 떨린다.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말이다.
"다른 건 몰라도 그 말은 이해할 수가 없군. 무슨 수로 나를 쓰러뜨리겠다는 거지? 너희가? 너희 따위가?"
이지혁의 몸이 천천히 허공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여흥은 끝났다. 분전에 대한 상은 충분하겠지. 이제는 현실을 깨달아야 할 때다. 마지막 카드까지 써버린 너희가 어떻게 나를 막을지 궁금하군."
"……."
최정훈이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허세는 부릴 만큼 부렸다. 결코 저놈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정말 냉정하게 말하자면 저놈의 말이 틀린 게 없었다.
'어떻게 막아야 하지?'
사용할 수 있는 수는 다 써버렸는데?
이지혁이 말한 분전이라는 단어가 딱 들어맞았다. 그들은 정말 최선을 다했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다. 하지만 마지막의 마지막에 와서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빌어먹을, 분전이든 참패든 똑같은 패배라고.'
그리고 패배의 결과는 어느 쪽이든 동일하다. 최정훈이 분함을 참아내지 못하고 바닥을 내려쳤다.
"빌어먹을!"
"그리 화내실 것 없어요."
알파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방법이라도 있는 거예요?"
"방법은 제가 있는 게 아니라 저쪽이 있는 것 같은데요."
알파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을 바닥에 쓰러져 있는 바르바체였다.
'바르바체?'
물론.
이곳에서 이지혁에게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를 꼽으라면 바르바체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저 꼴로 뭘 어떻게?'
상반신만 겨우 남아 있지 않은가.
인간이 아니니까 저 상처가 생명에 지장을 줄 만큼 심각한 위험은 아니겠지만, 저 모습 자체가 바르바체는 더 이상 이지혁을 감당할 수 없다는 증거와도 같았다.
그런데 저자에게 더 이상 뭘 기대하라는 거지?
"이런 말을 인간인 내가 하는 것도 이상하지만……."
알파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이 정도로 쓰러진다면 마왕 중의 마왕이라 불릴 이유가 없죠."
알파의 말에 최정훈이 눈을 가늘게 뜨고 바르바체를 바라보았다.
"쿡쿡쿡쿡."
바르바체가 바닥을 잡고 나직하게 웃었다.
"폼 잡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그만큼이나 얻었는데, 아직 체화하지 못했군. 맞아도 싸지."
팔을 밀어 몸을 뒤집은 바르바체가 파랗게 개어버린 하늘을 보며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포기할 것은 포기하고, 얻을 것은 얻어야겠지."
바르바체의 두 눈이 붉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그의 주변으로 마왕들이 몰려들었다.
"자존심 같은 건 됐어."
바르바체가 이를 으득 갈았다.
"너를 쓰러뜨리는 게 내가 아니어도 좋다. 설사 나라는 존재가 사라진다 해도 좋다. 그게 내 선택이다, 이지혁."
바르바체의 몸에서 폭풍 같은 마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 * *
이지혁의 눈이 살짝 치켜떠졌다.
'뭘 하려는 거지?'
뿜어져 나오는 마기의 양은 어마어마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지금의 이지혁을 위협할 정도는 아니었다.
코끼리 앞에서 고양이가 이를 세우는 느낌이랄까?
그럼에도 이지혁이 바르바체를 완벽하게 무시할 수 없는 것은 그의 성향 때문이었다. 바르바체는 기본적으로 자존감이 높아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지만, 다른 면으로는 현실주의자였다.
이지혁이 과거 불멸의 존재였던 시절, 불멸의 존재를 봉인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이유로 이지혁과의 충돌 자체를 피한 바르바체다.
그런 이가 저토록 이를 드러낸다는 것은 지금의 이지혁을 쓰러뜨릴 수 있다는 확신이 섰기 때문일 터.
'그게 아니라면 단순한 허세나 궁지에 몰린 이의 발악이라는 건가?'
어느 쪽이든 바르바체가 어떤 존재인가를 떠올려 보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 이대로는 무슨 수를 써도 자신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은 그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 대체 무슨 방법을 사용하여 자신을 상대하려 할 것인가.
발악하는 걸 지켜보는 것도 나름의 맛은 있겠지.
"하지만 귀찮음을 감내할 정도는 아니야."
이지혁이 손을 들어 올렸다. 바르바체가 무슨 일을 꾸미기 전에 그의 존재를 완벽하게 말살해 버리면 되는 것이다.
우웅!
이지혁의 손에서 피어난 검은 광선이 바르바체를 향해 광속으로 날아들었다. 이지혁은 이 공격 하나로 바르바체를 완벽히 끝장낼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그 순간, 바르바체 앞으로 누군가가 뛰어들었다.
"크아아아악!"
바르바체 대신에 이지혁의 공격을 받아낸 마왕이 비명을 지르며 몸을 떨었다. 이지혁의 공격을 완벽하게 몸으로 막아낸 대신 그의 육체가 마치 햇살에 녹는 얼음처럼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막아?"
이지혁이 눈을 치켜떴다.
그의 공격을 막아냈다는 게 놀라운 게 아니다. 바르바체 대신에 이지혁의 공격을 받으러 뛰어들었다는 것이 놀라운 것이다.
기본적으로 마족이라는 것들은 동료 의식이라는 게 없다. 모두가 서로를 향한 투쟁에서 살아남는 자가 강해지는 체제인 마족들은 서로에 대한 존중은 있을지언정 동료 의식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마족이 '희생'이라는 짓거리를 한 것이다.
"미쳐 버린 모양이군."
지금 이지혁의 전신을 지배하는 것은 볼쾌함이라기보다는 황당함이었다. 저 마족들이 이지혁이란 존재로 말미암아 희생정신이란 거창한 것을 깨닫기라도 했다는 것인가?
이지혁이 황당하다는 듯 혀를 차며 말했다.
"끝에 가더니 스스로가 군체라는 것을 자각하기라도 했나? 희생이라니… 이거, 이래서야 정말 용사 같지 않은가, 바르바체."
"내가 말을 했을 텐데?"
바르바체가 피식 웃었다.
"용사는 동료를 이용하는 법이라고 말이야."
"동료라……."
"그리고 하나 더."
"음?"
"마왕이란 언제나 홀로 서는 존재인 법이지. 너도 마왕이니 알겠지. 마왕의 자격을 손에 넣는다는 것은 그 누구의 도움으로도 불가능한 일이지. 오로지 홀로, 홀로 모든 것을 해내야 한다. 제 발로 마계의 대지를 밟고 수많은 마족들을 굴복시키고 그 격을 인정받았을 때, 마족은 마왕이 되지."
"모순되는 말을 잘도 지껄이는군."
"아니, 모순이 아니다."
바르바체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기본적으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아.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추가되었을 뿐이지. 너를 막지 않으면 마왕의 존재가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마계가 무너진다. 세상이 무너질 위기에 처했는데, '마족이 어떻고, 마왕이 어떻고' 모양 좋은 소리만 늘어놓고 있을 수는 없지. 일단은 네놈을 막아야겠지."
"그래서 마왕에서 용사로 전직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큭큭큭큭."
바르바체가 기이하게 웃었다.
"너희가 말하는 용사라는 것은 개념이 아닌가. 용사 자격증이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니 말이지."
"그건 그렇군."
"마왕 역시 마찬가지이지. 인정받으면 되는 거야. 마왕이 되면 마족이 진화한다든가 하는 게 아니니까. 이것 역시 개념이라고 할 수 있지."
"뭐, 그것도 그렇겠지."
"그럼 마왕인 용사가 존재해도 이상할 것은 없지."
"……그거 좀 많이 이상한데?"
태연한 얼굴로 대화를 주고받던 이지혁의 눈에 바르바체의 주변을 다른 마왕들이 둘러싸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인간과는 전혀 다른 형태를 지닌 이들이지만, 그들의 표정이 결연하다는 것은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다.
전갈처럼 생긴 얼굴에 떠오른 결연함이라는 것은 뭘 어떻게 설명하기가 난감하지만, 확실히 그리 느껴졌다.
"그래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거지?"
"간단하다. 나는 마왕이다. 하지만 지금은 용사이기도 하지. 그러니…… 동료를 이용해서 홀로 서면 되는 것이지."
"흠?"
이지혁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 방식은 아니겠지?"
"글쎄."
바르바체가 양손을 벌렸다.
그와 동시에 바르바체를 둘러싼 주변의 마왕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마기가 바르바체를 향해 쏟아지기 시작했다.
"뭘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이상을 보여줘야겠지? 그렇지 않나, 이지혁?"
육체로 빨려드는 마력을 받아들이며 바르바체가 광소를 터뜨렸다.
"빤한 짓을."
이지혁의 양손에 붉은 혈기가 맺혔다. 바르바체가 뭘 하려는 것인지는 알고 있지만, 그걸 두 눈 뜬 채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그는 상대의 힘을 즐기겠다고 상대가 강해지는 것을 지켜보고 있을 정도의 멍청이는 아니니까.
우우우우우웅!
그 순간, 하늘을 뚫고 이지혁의 육체로 눈부신 빛줄기가 쏟아졌다.
"큭!"
쏟아진 광휘는 이지혁의 육체를 모조리 태워 버릴 듯이 작렬했다. 전신에 쏟아지는 격통을 느낀 이지혁의 눈동자가 붉게 타올랐다.
"이 빌어먹을 놈들이 끝까지."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어느새 뭉쳐서 기도를 하고 있는 성직자들이 있었다.
"통한다!"
디오레 12세가 목소리를 높였다.
아무리 기존의 마족과는 다르다고 하나 그 근본은 마족. 신성력이 통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베라프의 신성력은 마족들에게는 상극이나 다름없으니까.
과거, 이지혁은 인간이기에 흑마력을 지니고 있다 한들 신성력이 잘 통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지혁은 인간이 아니라 마족이 되어버렸다.
그 점에 착안한 디오레 12세의 공격이 지금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이걸로 이지혁을 죽일 수는 없겠지만, 발목을 묶는 정도는 될 것이다.
"기도하라! 찬미하라! 너희의 신앙을 증명하라!"
"찬미 라트렐!"
"드란이여!"
각 종단의 성직자들이 저마다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이 먼 땅에서마저 그들의 신성력이 강하게 발휘되고 있다는 점이 그들의 사기를 높이고 있었다.
신의 가호는 단순히 베라프에만 머무르지 않는 것이다. 그들이 이곳에서 이적을 행할 수는 없겠지만, 그들을 매개로 신성력을 발휘할 수는 있었다.
신과 인간을 이어주는 것이 성직자라는 사실을 그들이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더없이 강대한 적 앞에서 그 어느 때보다 신성력이 차오르고 있다. 벅찬 가슴에 눈물을 흘리는 이들마저 속출했다.
"시선을 끌어요! 지금 당장!"
최정훈이 소리를 치자 드래곤들이 일제히 날아올라 이지혁에게 브레스를 내뿜었다.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인간의 지성을 인정하지 않는 드래곤들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최정훈의 지시를 순순히 따르고 있었다. 적어도 전투의 전략에 있어서만큼은 저 최정훈이라는 자가 이곳에 있는 그 누구보다 우월하고 뛰어나다는 것을 드래곤들조차 인정한 것이다.
집단전이라는 것을 상정할 필요가 없는 드래곤들은 그 지성에 비해 전투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졌다.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먼저 생각하는 드래곤들은 자신이 일개 조각이 되어 전투의 한 부분을 담당한다는 생각 자체를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지시할 사람이 필요했다.
"발목 묶으라고!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지 못하게! 인간 측, 갈겨!"
능력자들이 에테르를 쏘아냈다.
바바리안들이 도끼를 투척하고, 엘프들이 화살을 날려 이지혁의 시선을 끌었다. 지능을 갖춘 이에게 공격을 해서 어그로를 끈다는 것은 불가능이나 다름없는 일이지만, 그 공격의 횟수가 워낙에 어마어마하다 보니 이지혁도 일순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시야가 완전히 가려질 정도였다. 세상이 빛과 화살로 뒤덮인 것만 같았다.
"잘도 해 대는군."
이지혁이 이를 갈았다.
혈기가 잘 움직이지 않는 느낌이다. 눈에 보이는 것도 보이는 것들이지만, 그에게 쏟아지고 있는 신성력이 발목을 제대로 잡아끌고 있었다.
처음에는 희고 투명하던 광채가 이제는 칠색으로 다채롭게 빛나고 있었다. 라트렐뿐 아니라 다른 신들의 신성력도 강하게 발휘되고 있는 것이다.
육체가 뻑뻑하게 굳어지고 전신의 피가 거꾸로 도는 느낌이었다. 신성력을 직접적으로 받는 피부에서 검은 그을음이 올라왔다.
"이 버러지 같은 놈들!"
이지혁이 입을 크게 벌리며 포효했다.
조금 전의 이지혁이었다면 이런 공격 정도는 손가락 하나로 튕겨냈을 것이다. 라트렐의 광휘가 아니라 라트렐 본인이 현신한다 하더라도 이지혁은 3초 내로 그녀를 찢어버릴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지혁은 그녀가 아닌 그녀의 이적에도 발목이 잡히고 있는 것이다.
최정훈의 회심의 공격이 그에게 제대로 먹혀들었다는 증거다.
고오오오오.
이지혁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혈기가 거칠게 주변을 돌면서 이지혁의 육체를 감싸기 시작했다. 해체되었던 혈기의 갑주가 다시 그 모습을 드러내고, 갑주 사이로 드러난 이지혁의 눈동자가 검붉은 광망을 마구 뿌려 대기 시작했다.
"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모조리 쳐 죽여주마!"
이지혁이 막 주변을 뒤집어엎으려는 순간!
그것이 일어났다.
쿠웅!
충격.
그건 충격이라는 말이 가장 들어맞는 현상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일순 충격음이 들려온 곳으로 돌아간다.
"……."
최정훈이 할 말을 잃고 숨을 죽였다.
바르바체.
그가 기억하는 처음의 형태와는 완전히 달라진 바르바체가 그곳에 서 있었다.
'아니, 바르바체가 맞나?'
너무도 이질적인 모습에 최정훈마저 눈을 의심해야 했다. 이전까지의 과정을 보지 못했다면 저자가 바르바체라고 확신하지 못했을 것이다.
"실로 걸맞은 모습이로군."
미이라처럼 삐쩍 말라서 바닥에 쓰러져 있는 마왕들의 주검. 수십 구나 되는 그 주검의 한가운데에서 바르바체가 그 웅장한 모습을 내보이고 있었다.
"……마왕이라는 말에 말이야."
칠흑같이 검은 피부.
금방이라도 피부를 찢고 나올 듯이 꿈틀거리는 근육.
그리고 등을 뚫고 나온, 코끼리 상아 같은 여섯 개의 뿔.
머리 쪽에 잘 말려 있는 두 개의 산양 뿔과 그 아래 더없이 붉게 일렁이는 눈.
그야말로 '마왕'이라는 이름에 더없이 걸맞은 형상으로 변한 바르바체가 이지혁을 올려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치 쇠를 긁는 듯한 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제 준비가 끝났다, 이지혁."
이지혁이 바르바체와 같은 붉은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 * *
이지혁이 눈을 치켜떴다.
"…일단 그 모습은 뒤로하고서라도 말이지."
이죽이는 그의 눈이 주위를 돌았다.
"나 하나를 상대하자고 조금 전까지 목숨 걸고 싸우던 것들이 합공을 하는 꼴이 그리 아름다워 보이지는 않는군. 뭔 국공 합작도 아니고 말이야."
이지혁의 눈이 최정훈을 향했다.
"마족들에 대한 증오심을 버린 건가? 자존심도 없이?"
최정훈이 어깨를 으쓱했다.
"이건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다, 멍청아. 전략이라는 거지. 물론 고등적인 개념이라 너 따위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흐음……."
이지혁이 영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눈을 찌푸렸다.
"이런다고 해서 달라질 게 있을 것 같은가?"
"거참, 말 많네."
"뭐?"
"달라지고 달라지지 않고가 중요한 게 아니야. 나는 항상 지금 상황에서 최선을 밟는 거지. 나아지고, 나아지고, 또 나아지다 보면 결국에는 닿지 못할 거라 생각한 곳에도 닿을 수 있을 거라고 믿으면서 말이야."
"명언이군."
이지혁이 고개를 우드득우드득 꺾었다.
"하지만 계산을 잘못했군. 그렇게 티끌만큼 끝없이 나아간다고 해도 결코 내가 있는 곳에는 닿지 못해. 내가 그 사실을 깨닫게 해주지."
이지혁의 시선이 바르바체에게로 향했다.
"우선은 저 용사부터 무찔러야 하는가? 용사라고 하기에는 돌아올 수 없는 몰골이 되어버린 것 같지만 말이야."
과거의 바르바체는 그래도 인간과 비슷한 모양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바르바체는 누가 봐도 완연한 괴물의 모습이었다.
마족의 미적 감각으로 본다면 전과 지금 중 뭐가 더 나은가를 딱히 따질 게 없다지만, 인간의 기준으로 본다면 추악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변해 버린 것이다.
"용사니 어쩌니 지껄여 대더니, 결국 하는 거라고는 주변 마왕들을 집어삼키는 것인가?"
"가장 마왕다운 짓이지."
"그게?"
바르바체는 대답 없이 미소를 지었다. 이미 인간의 그것이 아니게 되어버린 얼굴로 짓는 미소는 섬뜩하기 짝이 없지만, 그건 분명히 미소였다.
"말하지 않았는가, 마왕은 홀로 서는 존재라고 말이야. 나는 지금에 와서야 온전히 홀로 서게 된 거지. 나는 지금 마계의 의지를 대변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뭐, 인정할 수 있을 것도 같군. 다른 마왕들이 순순히 네게 생명까지 가져다 바친 것은 의외였지만 말이야."
"위기감이다, 이지혁."
"…위기감?"
"마왕들에게 부족한 것이 뭔지 알게 되었지. 그건 위기감이다. 우리는 단 한 번도 우리의 땅을 위협받은 적이 없다. 우린 언제나 다른 땅을 침공하며 살았고, 그곳에서 패배한다고 해도 본토를 위협받은 적이 없었지. 네 덕분에 우리는 처음으로 지킨다는 개념을 알게 된 것이다."
"'히틀러가 인류애를 알게 해주었다'와 비슷한 개드립이군."
"비웃어라."
바르바체가 양팔을 좌우로 들어올렸다.
"얼마든지, 네 마음껏. 비웃을 테면 비웃어라. 네 덕분에 알게 되었지. 체면이니 명분이니 하는 그따위 것에 의존하다가는 진짜 이뤄야 하는 것을 이룰 수 없게 된다는 것을 말이야. 그래. 마왕 따위는 언제든 다시 생겨난다. 마계가 존재하고 마족이 존재하는 한에는 언제든 마왕은 생겨난다. 그렇다면 우리는 마왕이 아닌 마계를 지켜야 하는 법이지. 그걸 네 덕분에 알게 되었다."
"흐음……."
바르바체의 각오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이지혁이 미간을 좁혔다.
"정말 용사 같은 말을 지껄여 대는군."
"처음에는 비꼬는 의미였지."
"응?"
"하지만 생각해 봐라. 한 세계를 무너뜨리기 위해 다가오는 존재와 맞서 싸우는 자라면, 그 누구라도 용사라 불릴 자격이 있겠지. 너와 마주한다면 나 역시 용사겠지. 그렇지 않나?"
"……."
"그만큼이나 지금의 너는 악이다. 마족조차도 치를 떨 만큼. 의지도, 목적도 없는 파괴신, 그 자체에 불과하지."
"인정해야겠군."
"너를 막는다. 그리고 세상을 원래대로 되돌리겠다."
"의도는 좋다. 그건 인정하지. 하지만 아무리 다른 마왕들의 힘을 받아들였다고 한들 네가 나를 이기는 게 가능할까?"
"아직도 모르겠나?"
"흠?"
"이 육체는 네놈을 쓰러뜨리기 위해 최적화되어 있는 육체다. 이 육체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나는 수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했지. 이제는 네가 그 대가를 치를 시간이다."
이지혁이 미묘한 시선으로 바르바체를 바라보았다.
'마기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군.'
그 많은 마기를 받아들이고도 마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건 바르바체가 지닌 마기가 이지혁이 감지할 수 있는 영역을 뛰어넘었다는 의미였다.
'그건 불가능해.'
바르바체와 다른 모든 마왕들의 힘을 합친다고 해도 그 수준에 도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육체를 변환시키기 위해 마기까지 포기했다는 뜻인가?"
생각지도 못한 발상이었다.
마기를 끌어모으기에 단순히 마기를 극한까지 끌어올려 자신을 상대하려는 줄만 알았는데, 마기를 매개체로 육체를 변환시킬 줄이야.
과거 에테르를 사용하는 인간이었기에 필연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마기의 활용에 대한 한계. 그 한계가 이지혁의 상상력을 제한하고 있었다.
하지만 바르바체는 마기, 그 자체나 다름없는 마왕이 아닌가. 그 바르바체가 저만한 마기를 바탕으로 만들어낸 육체가 얼마만 한 힘을 가질지는 이지혁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단순하게 생각해 보자면 네 육체의 총량은 투여된 마기의 총량을 넘지 못할 텐데?"
"단순한 생각이지. 말했을 텐데, 나는 모든 걸 포기할 수 있다고. 네놈을 쓰러뜨릴 수 있다면 나는 어떤 것도 포기할 수 있다. 심지어 내 수명조차도 말이다."
처음으로 이지혁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수명?"
"과하게 활성화된 육체는 수명이 짧은 법이지. 이 육체로 살아갈 수 있는 시간이라 해봐야 불과 이십여 년뿐이다."
"…그거 매우 미묘하군."
물론 영생에 가까운 시간을 살아가는 마족이 이십 년의 한계 수명을 가진다는 것은 인간이 의사에게 당신 살날이 삼 일밖에 남지 않았다는 선고를 받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겠지만 말이다.
우드드득.
바르바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그의 육체가 절로 약동하기 시작했다. 꿈틀거리는 근육은 징그럽다기보다는 경이로웠다. 그 안에 얼마나 큰 힘이 숨어 있을지를 생각한다면 더더욱 말이다.
"에, 그러니까… 그 마족의 대표나 다름없는 바르바체가 육체파가 되어버렸다는 뜻이로군."
이지혁이 황당하다는 듯이 말했다.
"예전의 이지혁이 전투를 앞두고 주둥아리를 놀리는 이유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는데, 지금 네 덕분에 한 가지를 이해하게 되어버렸군. 쏟아내고 싶은 개드립이 한둘이 아니야. 삼박 사일은 떠들 수 있을 것 같군."
"사양하지. 고막은 딱히 진화한 게 아니라 말이야."
"…상상이 안 가는데? 극한으로 강해진 육체라는 건 대체 뭘 말하는 거지?"
"상상할 필요 없어."
바르바체가 미소를 지었다.
"그 몸으로 알게 될 테니까."
바르바체가 팔을 뒤로 쭉 당겼다가 앞으로 강하게 일격을 내뿜었다.
투우우웅!
가죽 북 치는 것과 같은 소리가 터지며 이지혁의 몸이 뒤로 총알처럼 튕겨져 나갔다.
"큭?"
한참을 허공으로 튕겨나 이지혁이 겨우 정신을 차리고는 몸의 중심을 잡았다.
'마기는 전혀 느끼지 못했는데?'
그럼 풍압만으로 지금의 이지혁을 이리 날려 버렸다는 건가? 풍압만으로?
이건 상상 이상이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바르바체가 큭큭대며 웃었다.
"말했잖아. 너를 잡기 위해서 나는 모든 것을 포기했다고 말이야."
"……."
"포기해야 할 것은 포기해야 했지. 설사 그게 내 목숨이라도 말이야. 그래서 도달한 곳이 이곳이다. 동료들을 모조리 집어삼키고 내 수명마저 집어던져 나는 지금껏 누구도 도달하지 못한 곳에 섰다. 마치 너처럼 말이다."
바르바체가 목을 좌우로 꺾더니 말을 이었다.
"네가 지금껏 겪은 고통에 비하면 싸게 먹힌 거지. 그렇다고 억울해할 건 없어. 세상은 평등하지 않으니까. 억울함을 느껴야 한다면 인간에 불과하던 네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꼴을 감내해야만 하는 내가 훨씬 더 심하지 않겠어?"
"잘도 떠들어 대는군."
이지혁이 이를 갈았다.
"겨우 그 정도로 나를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조금 전이었다면 불가능했겠지. 하지만 지금은 너도 별것 없어졌지. 딱히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저 인간이 큰일을 해냈지."
"…눈물겨운 장면이로군. 인간은 마왕이 강해질 수 있도록 시간을 벌고, 마왕은 인간을 칭찬하고. 내가 꿈이라도 꾸고 있는 건가?"
"목적은 이유를 만들어내는 법이지. 너를 잡아낸다는 목적이 있다면 인간과 손을 잡는 것도 얼마든지 감수하겠다."
"큭큭큭큭."
이지혁이 몸을 뒤틀며 웃어 젖혔다.
"그래, 그것도 좋지. 그것도 좋겠지……."
이지혁의 몸 주변이 거친 혈기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어차피 모두 죽이려 했다. 그러니 시간 끌 것 없이 한 번에 덤비는 것도 나쁘지 않지. 죽음으로 깨닫게 될 것이다. 너희의 모든 노력이, 너희의 모든 방법이 아무런 의미가 없었음을 말이다."
이지혁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혈기가 거대한 소용들이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육체를 완벽하게 변형해 낸 바르바체조차 움찔하며 뒤로 살짝 물러났다. 그러고는 이를 갈며 몸을 살짝 숙였다.
하나 쉽사리 달려들지는 않았다.
느끼고 있는 것이다.
모두가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이제 대화는 없다. 이제 전투가 시작된다. 그리고 그 전투는 세상의 운명을 결정지을 마지막 전투가 될 것이다.
인간도, 마족도, 그리고 드래곤과 유사 인류들마저 결연한 눈으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지금 이 전투에서 밀린다면 이 자리에서 살아남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저 악마는 세상의 모든 것을 파괴할 테니까. 단순히 죽음을 뒤로 미루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후우우……."
최정훈이 깊게 한숨을 쉬었다.
"떨려요?"
"아뇨."
서아영의 말에 최정훈이 고개를 저었다.
"결과야 어떻게 되든 이 지긋지긋한 싸움의 끝을 본다는 게 후련합니다."
"'결과야 어떻게 되든'이 아니에요. 이겨야죠."
"뭐, 물론 그렇겠죠."
최정훈이 씁쓸하게 웃었다.
'결과와 상관없이 말이지.'
지면 당연한 일이고, 설사 이 전투에서 이긴다고 해도 두 번 다시는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갈 수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의 손으로 이지혁의 흔적을 지운다는 것은 가혹하기 짝이 없는 일일 테니.
"그럼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최정훈이 가라앉은 눈으로 이지혁을 노려보았다.
후회할 수 있다는 것은 좋은 것이다. 적어도 실패를 되새길 수 있다는 거니까. 아직 살아 있다는 뜻이니까. 덧없이 죽어버린다면 후회조차 할 수 없다.
"그러니……."
최정훈이 손을 들어 올렸다.
"전력으로 쳐 죽여주마!"
그의 손이 아래로 내려지자 드래곤들의 브레스가 하늘을 꿰뚫었다. 비늘과 같은 색으로 빛나는 브레스의 줄기들이 이지혁에게 쇄도하며 전투의 시작을 알린다.
세상의 운명을 결정지을 마지막 전투가 시작되고 있었다.
* * *
뿜어지는 브레스는 과격하기 이를 데 없었다.
드래곤들은 그 한 번의 숨결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겠다는 기세로 광포하게 브레스를 뿜어냈다.
하지만 그들도 알고 있었다.
이곳에 있는 드래곤들은 하나같이 모두 과거 이지혁이 베라프를 탈출할 때, 데라 라트렐에서 이지혁을 상대한 이들이다. 그때도 통하지 않던 브레스가 지금의 이지혁에게 통할 리가 없었다.
조금 전의 이지혁에 비한다면 비약적으로 약해진 상태라고는 하지만, 방어력으로 따진다면 과거의 이지혁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드래곤의 최종 병기가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축포 이상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들의 자존심을 사정없이 긁어버리고 있었다.
자존심이 과해 이지혁이 자존심 빼면 아무것도 없는 도마뱀이라고 평가 내린 그들이 아니던가.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지금 최선을 다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단순히 발목을 잡는 역할에 지나지 않아도 좋다. 그렇게라도 저자를 막아야 한다.
과거 멸망의 좌를 상대할 때, 그들은 오로지 라트렐에게 모든 것을 의지했다.
그녀가 이지혁을 세상에 멸망을 불러오는 자라 지목했기에 그저 그 말을 믿었을 뿐이다.
하나 지금은 다르다.
실감하고 있다. 그들의 본능이, 그리고 그들의 이성이 한목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지금 이자가 바로 멸망의 좌다.
이자를 지금 이곳에서 막지 못하면 세상은 정말로 멸망하고 말 것이다. 단순히 그들이 사는 세상뿐만이 아니다. 이 굶주린 아귀 같은 파괴신은 차원과 차원을 집어삼키며 세상을 무(無)로 되돌릴 것이다.
태어난 이후로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격한 위기감이 지금 그들을 지배하고 있었다.
과거 라트렐의 말에 의존할 때에는 이지혁을 막아야 한다는 목적의식은 있을지언정 지금처럼 위기감이 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당면한 파괴신의 힘 앞에 드래곤들은 비늘을 바짝 세우며 전력으로 브레스를 뿜어냈다.
콰아아아아아아!
이지혁에게 와닿은 브레스들이 대폭발을 일으킨다. 브레스와 브레스가 상호작용을 하며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고 있었다.
드래곤들조차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일이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 그들이 하나의 목표물을 향해 힘을 합쳐 브레스를 날리는 일은 자연계에서 벌어질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설사 마왕이 베라프로 쳐들어왔다 하더라도 이만한 드래곤들이 한곳에 모여 마왕을 상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그만큼이나 개인적인 생물들이고, 개인이 아닌 그 무엇을 위해서도 위험을 무릅쓰지 않으니까.
하지만 이 순간, 이곳에 있는 드래곤들은 이지혁의 존재 자체를 생명의 존속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라 파악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그를 막아내야 생존이 보장된다.
"더! 더 갈겨요! 더! 뒤쪽으로! 바르바체 쪽으로 향하지 않게!"
최정훈의 목소리가 아펠드리체를 통해 전달되었다.
바르바체라는 이름을 들은 드래곤들이 움찔했지만, 순순히 최정훈의 말을 따랐다.
마왕과 드래곤이 합작을 한다는 건 산이 뒤집어지고 바다가 하늘 위로 치솟아도 벌어질 수 없는 일이지만, 지금 이곳에서는 그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웃기는 일이야.'
아펠드리체는 지금 그녀의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을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단 하나의 존재를 상대하기 위해서 인간과 드래곤, 그리고 마족이 합작을 벌이고 있었다. 상식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마족과 드래곤이라는 이들은 목적을 위해서 힘을 합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니까.
아무리 사정이 다급하다 해도 신성을 따르는 드래곤은 마족을 본능적으로 역겹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저 남자가 있기 때문이겠지.'
이 비정상적인 협공이 가능한 이유는 가운데서 그들을 조율하는 최정훈의 존재가 있기 때문이었다.
마왕은 결코 드래곤에게 뭔가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리고 드래곤 역시 마왕에게 뭔가를 요구하지 않는다.
하지만 돌아가는 상황을 보며 최정훈은 드래곤과 인간을 움직여 바르바체의 움직임을 떠받치려 하고 있었다. 인간이 아니라면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발상이었다.
'알면 알수록 놀라운 존재들이군. 인간이란 말이야.'
과거 그녀가 알던 인간의 특별함이라는 것은 오로지 이지혁에게 기반한 것이었다. 이지혁이기에 특별할 수 있고, 이지혁이기에 인간 이상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단 한 번도 이지혁의 특별함이 인간의 특별함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구로 와 드래곤조차 꿈꾸지 못한 문명을 이룩하고, 드래곤은 생각하지도 못하는 발상을 하는 인간들을 보고 있으려니, 어쩌면 인간이라는 존재의 잠재력은 아펠드리체나 다른 드래곤들이 짐작한 것 이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더 갈겨요! 더!"
'특히나 저 남자는 그중에서도 특별해.'
최정훈이라는 자는 아펠드리체가 보기에는 무척이나 이상한 존재였다.
그는 같은 인간 중에서도 딱히 강하지 않다. 아니, 오히려 이곳에 있는 인간들 중에서는 최약체라는 말이 전혀 이상하지 않을 이였다.
하지만 그는 지금 이곳에 있는 이들 중 어느 누구보다 강한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모두가 자연스레 그의 지시를 따르고 있지 않은가.
'무력의 강함만이 전부가 아니야.'
인간의 강함이라는 것은 무력을 의미하지 않는다. 저 사람이 인간의 강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펠드리체는 고개를 돌려 브레스의 폭발 속에 있을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그리웠던 건가요?'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지만, 저곳에 있는 이가 이지혁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지만… 그래도 묻고 싶었다.
그 사람에게.
그래서 그토록이나 이 세상을 그리워했느냐고. 한 번이라도 이 세계로 돌아오고 싶어 한 이유는 베라프와는 다른, 이런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냐고 말이다.
"갈겨!"
최정훈이 손목에 채워진 스마트 워치를 향해 소리치자 하늘을 어디선가 날아온 전투기들이 뒤덮기 시작했다.
휘이이이잉!
바람을 가르며 날아온 전투기들이 미사일을 갈겨 대고, 거리를 유지하고 있던 M-3와 자주포들이 이지혁을 향해 포탄을 날려 댔다.
표적이 워낙 작기에 전탄이 명중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지만, 이지혁이 떠 있는 공간 자체를 미사일과 포탄으로 뒤덮어 버릴 작정이었다.
'무너진다.'
최정훈이 이를 꽉 깨물었다.
전력의 차이는 알고 있다. 압도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 정도는 머리가 있으면 모를 수가 없다. 하지만!
"제방도 작은 구멍 하나에 무너지는 법이지."
쏟아붓고 또 쏟아붓다 보면 분명 어딘가에서는 구멍이 뚫릴 것이다. 최정훈은 굳은 얼굴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알고는 있다, 지금 대미지가 들어가고 있지 않다는 것쯤.
"휘유, 고생하시네요."
등 뒤에서 들려오는 능글능글한 알파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최정훈이 얼굴을 굳혔다.
"뭐라도 좀 해보지?"
"저 사람을 상대로요?"
"그 양반이 전력이 깎여 나가는 것을 감수하며 너를 살린 것은 이럴 때라도 써먹기 위해서 아닌가?"
"물론 뭐, 그렇죠. 알고는 있습니다."
능글능글하게 말은 하고 있지만, 알파의 눈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리고 잊은 적도 없구요."
원한은 백배로, 은혜는 열 배로.
따지고 보면 그는 이지혁에게 원한도, 은혜도 가득가득 했다. 그리고 그 은혜와 원한을 풀 방법도 동일했다. 이지혁이라는 존재의 완전한 말살.
'간단해서 좋군.'
물론 말처럼 간단하지는 않겠지만 말이야.
"조금 나서보고 싶은 생각이 없는 건 아니지만, 지금은 참는 게 낫겠네요."
"어째서?"
"안 보이세요? 근처에 다가갔다가는 나부터 찢어 죽일 기센데?"
알파의 말에 최정훈이 고개를 돌렸다.
"크르르르릉."
납작 엎드린 바르바체가 짐승처럼 그로울링하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달려들 듯이 말이다. 이지혁에 대한 증오라면 그도 다른 이들에 못지않을 것이다.
이지혁을 죽이기 위해서 다른 마왕들을 제물로 바치고 스스로의 수명마저 포기했다는 점에서 어쩌면 주변에 있는 이들 중 가장 증오에 불타는 이는 바르바체일지도 모른다.
'조금 더.'
드래곤이든 인류든 한 번 공격을 쏟아내고 나면 다시 공격을 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다. 그 간극을 바르바체가 메워줘야 한다. 최정훈은 지금 화력을 온전히 뿜어내고 싶었다.
하지만 과한 욕심은 언제나 화를 부르는 법이다.
지잉.
이상한 일이었다.
결코 크지 않은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작은 소리가 들렸다는 것이 이상한 것이 아니다. 이상한 것은 지금 이 주변 전체가 드래곤들의 브레스와 포탄이 터지는 소리로 귀를 찢을 듯 굉음을 뿜어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사이에서 이런 작은 소음이 이리 확연하게 들릴 리가 없다.
이상을 알아챈 최정훈이 다급히 소리를 지르려고 했다. 하지만 그보다 빨리 움직인 것이 있었다.
지이이이이이잉!
쏟아지는 브레스들 사이에서 뿜어져 나온, 피처럼 붉은 광선이 허공을 이리저리 갈라 버린다. 마치 레이저 쇼를 하는 것처럼 화려하게 허공을 수놓은 레이저가 드래곤들의 육체를 여러 번 가르고 지나갔다.
그러고 나자…….
투두둑.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이지혁이 뿜어낸 핏빛의 레이저가 다이아몬드보다 더 단단한 드래곤들의 육체를 절단기에 들어간 고깃덩어리처럼 갈라 버렸다.
순식간에 조각조각의 육편으로 화해 버린 드래곤들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피해애애애애애!"
그 거대한 동체가 바닥으로 떨어지자 아래에서 지켜보던 이들의 얼굴이 시커멓게 질려 버렸다.
저 조각조각 난 동체 하나하나가 고래만 한 크기다. 거기에 깔리면 인간은 살아날 방도가 없었다. 그저 허공을 유영하던 드래곤을 갈라 버리는 것만으로 메테오 샤워와 비슷한 효과가 나버린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을 하고 한 공격인지, 아니면 우연히 그런 효과가 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지혁의 이 한 수가 확실한 공격이 되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쿠웅! 쿠우웅! 쿠웅!
바닥에 추락한 드래곤의 동체가 사람들을 터뜨리고 날려 버렸다.
"빌어먹을! 일격에!"
최정훈이 욕을 내뱉었다.
단 일격에 삼분의 일이나 되는 드래곤들이 전투 불능이 되어버렸다. 끈질긴 생명력으로 육체가 반 토막이 났음에도 어찌어찌 갈라진 육체를 붙여내는 드래곤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조각나 떨어지거나 즉사하고 말았다.
그 압도적인 전력 차가 다시금 실감이 난다.
멈춰 버린 브레스 덕분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이지혁이 전신을 붉은 갑주로 감싼 채 으르렁거렸다.
"빌어먹을 도마뱀놈들, 잘도 해 대는군."
막 이지혁이 포효하려는 찰나, 그것이 뛰어올랐다.
콰아아아아아아!
공기가 그대로 찢어진다.
단순한 도약만으로 바닥에 운석이 처박힌 듯 거대한 크레이터를 만들어낸 바르바체가 빛살 같은 속도로 뛰어올라 이지혁의 몸에 자신의 육체를 들이받았다.
콰아아아아아아앙!
육체와 육체가 부딪쳤다기에는 믿을 수 없는 굉음이 터졌다. 이 광경을 눈으로 보지 못했다면 핵이라도 떨어진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이지혁이 하늘 위로 튕겨 오르자 바르바체의 등을 찢어내며 거대한 악마의 날개가 펼쳐졌다.
날개를 뽑아낸 바르바체가 두 눈으로 광망을 줄기줄기 뿜어내며 이지혁을 쫓아 날아올랐다.
* * *
"이지혀어어어어억!"
바르바체가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비단 목소리뿐 아니라 지금 그의 모습은 짐승이라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아니, 짐승이라기보다는 괴물, 증오로 만들어진 괴물이었다.
"큭."
허공으로 튕겨 올라간 이지혁이 신음을 내뱉었다.
'대체 이게 뭐지?'
육체가 맞부딪치는 순간 의식이 아득하게 날아간 느낌이었다. 순간적으로 잃어버린 육체의 통제권이 이제야 돌아오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수준이군.'
바르바체가 모든 것을 버려가면서까지 손에 넣은 힘은 이지혁의 상상마저 뛰어넘고 있었다. 어떻게 순수한 물리력만으로 이만한 충격력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지경이었다.
저 육체는 대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이란 말인가.
납득은 가지 않지만, 생각은 나중이다. 지금은 생각할 때가 아니라 움직일 때였다.
하지만 바르바체는 그가 움직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지혁!"
바르바체의 날개가 한 번 펄럭일 때마다 폭풍이 친다. 단순한 수사가 아니었다. 정말 날개가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반대쪽으로 폭풍이 불고 있었다.
그리고 그 폭풍을 일으킨 반동으로 바르바체는 공포감이 절로 몰려올 정도로 빠르고 과격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허공에서 대적하는 것이 결코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최정훈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이게 뭐야?'
일반인과 크게 차이가 없는 그이기는 하지만, 나름 마도사라고 할 수 있었다. 특히나 안력은 이지혁이 그에게 가장 강조한 것이다. 적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눈으로 쫓지 못한다면 그 어떤 공격을 쏟아부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이 이지혁의 지론이었다.
하지만 쫓을 수가 없다.
바르바체가, 그리고 이지혁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그의 눈으로는 포착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폭풍이 일고 굉음이 터진다.
희끗한 무언가가 나타나지 말아야 할 곳에 나타난다. 저쪽 끝에서 나타났던 동체가 순간적으로 바람의 폭발을 일으키면서 반대쪽 하늘에서 희끗한 그 모습을 살짝 드러냈다가 다시 시야에서 사라진다.
이래서야 지원도, 보조를 맞추는 것도 불가능하다.
"휘유, 살 떨리네."
알파가 너스레를 떨었다.
"뭔가 보입니까?"
"아뇨."
알파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저건 사람 눈으로는 못 쫓아요. 드래곤이나 되어야 뭐가 보일 텐데."
알파의 말이 끝나자마자 최정훈이 아펠드리체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아펠드리체 역시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불가능해요."
"…세상에."
드래곤의 눈으로도 볼 수 없는 싸움이라니.
저 둘은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가.
"차원이 달라요. 저 둘은 지금 생물이라고 볼 수 없는 수준까지 가버렸으니까요."
그 순간이었다.
콰아앙! 콰아앙!
허공에서 거대한 빛의 폭발이 터지기 시작했다.
"뭐, 뭐야?"
"스펠 바운드."
"예?"
"그 와중에서도 자신에게 버프를 걸고, 또 그걸 지우고 있는 거예요. 걸면 지우고, 지우면 걸고… 초당 수백 번씩. 그 반동으로 마력이 터져 나오는 거죠."
"…이게 뭔 소리야?"
들어도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의 싸움이 펼쳐지고 있었다.
"하나 묻겠는데요."
"네."
"저 둘 중 육체적으로는 누가 더 강하죠?"
"물론 바르바체예요. 종합적으로 보면 이지혁이 더 강하겠지만, 지금 육체 하나만을 두고 싸운다면 바르바체를 이길 수가 없어요."
"그래요?"
최정훈이 눈을 빛냈다.
"디오레 12세와 연결해 주세요. 지금 당장."
"네."
이제는 아펠드리체도 군말을 하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군 전체에 이득이 된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자각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세요."
"신성력을 퍼부어요. 이 땅 전체에."
디오레 12세의 대답이 바로 들려왔다.
"하지만 바르바체 역시 영향을 받게 됩니다."
대답을 하면서도 디오레 12세는 어이가 없었다.
마왕이 신성력에 피해를 받을까 봐 공격을 자제해야 하는 상황이라니,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가.
베라프가 생겨난 이후로 수많은 성직자들이 존재했지만, 이런 황당한 경우를 겪는 이는 단언컨대 디오레 12세가 유일할 것이다.
상식이 뒤집어지고 적군과 아군이 모호해지고 있었다.
"시키는 대로 갈겨요."
아펠드리체가 냉정한 어조로 말했다.
"하나……."
"육체에 있어서 이지혁보다 바르바체가 우위를 점하고 있어요. 그리고 지금은 그 하나에 매달려서 바르바체가 칼날 위를 걷고 있는 겁니다. 지금 저곳에 신성력을 뿌리면 육체가 더 약한 이지혁이 받는 방해가 더 커요."
디오레 12세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는 잘 알아듣지 못했지만, 아펠드리체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디오레 12세가 소리쳤다.
"신성력을 이 땅에! 라트렐의 은총을! 그리고 베라프를 수호하는 모든 신의 은총을 이곳에!"
"찬미 드란!"
"베라프를 위하여!"
디오레 12세의 외침이 끝나기가 무섭게 성직자들이 기도성을 내뱉었다. 그리자 성기사단들도 성직자들의 옆에 붙어 조금의 힘이나마 보태기 위해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하늘이 좌우로 열리는 것 같았다.
이지혁의 위치를 특정할 수 없기에 눈에 보이는 모든 곳에 눈부신 빛이 쏟아져 내렸다.
"지역 디버프란 거군요."
"네?"
"아뇨. 대답은 됐어요."
아펠드리체는 굳은 얼굴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발상 자체가 우리와는 달라.'
눈으로 쫓을 수도 없는 속도로 움직이고 있는 이지혁이다. 공격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대체 어떤 식으로 공격을 해야 할지 감도 잡을 수 없었다. 하지만 최정훈은 그 순간 가장 적절한 대처를 찾아내고 있었다.
집단전에 있어서만큼은 그는 드래곤 이상의 지능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드래곤들을 움직여 주세요."
"어떤 식으로요?"
"중력 가중. 지역 전체에 중력을 올려요. 미묘할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도움은 되겠죠."
아펠드리체가 고개를 끄덕였다.
신성력이 떨어지는 순간 그녀가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을 최정훈이 그대로 말하고 있었다.
"이미 지시했어요."
정확하게는 최정훈의 말이 떨어지는 그 순간에 텔레파시를 날렸다. 확인이 끝났으니까.
드래곤들이 일제히 지역의 중력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 * *
"크윽."
이지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것들이……."
육체가 미묘하게 딜레이를 일으키고 있었다. 쏟아지는 신성력과 가중된 중력이 그의 몸을 무겁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평소였다면 이 정도의 거슬림이 그에게 딱히 영향을 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지혁으로서도 쫓기 힘든 속도로 움직이는 저 바르바체를 상대함에 있어서 이 미묘한 딜레이는 치명적이었다. 눈으로 보고, 아니, 눈으로 보기 전에 피부로 느끼고 몸을 움직임에도 반응이 조금 느려진다. 덕분에…….
콰아아앙!
처음으로 안면에 적중한 바르바체의 주먹이 이지혁을 탄환처럼 뒤로 날려 버렸다.
"이지혀어어어어어억!"
튕겨 나가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날아들어 이지혁을 쫓아간 바르바체가 양손을 들어 올려 강하게 내려쳤다.
콰아아앙!
폭탄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이지혁의 육체가 바닥으로 처박힌다.
쿠우웅!
소용돌이치듯 휘돌며 바닥으로 파고든 이지혁의 육체가 크레이터를 남기는 정도로는 만족하지 못했는지, 바닥으로, 바닥으로 파고들었다.
또한 바르바체 역시 이지혁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대로 바닥으로 파고든 바르바체가 이지혁의 머리를 움켜잡고 아래로, 아래로 내려갔다.
과도한 육체 능력은 단단한 바위와 흙더미가 마치 솜사탕이라도 되는 듯이 거침없이 파고들었다.
콰드드득! 콰드드득!
한참 동안 지하를 내달리던 바르바체가 이지혁의 육체를 위로 걷어찼다.
쿠우우우웅!
땅이 뒤집어진다.
이지혁과 함께 지반 전체가 마치 전설 속에 하늘을 부유하는 섬처럼 떠올랐다.
정확하게는 떠오른 게 아니라 튕겨 나간 것이지만 말이다.
"으아아악!"
뒤집혀 나간 바닥에 최정훈이 기겁을 했지만, 서아영이 재빠르게 그를 붙들고 뒤로 몸을 날렸다.
"빌어먹을, 뭔 스케일이……."
주먹질 한 방에 대륙이 들썩이고, 발길질 한 방에 태산 같은 크기의 땅덩어리가 하늘로 치솟아 오른다.
그와 함께…….
콰아아아아아앙!
바르바체가 허공으로 뛰어올라 이지혁의 몸을 걷어찬다.
비스듬히 바닥으로 날려진 이지혁의 몸이 붉은 혈기에 둘러싸인 채 바닥에 처박혔다.
동시에 바닥이 뒤집힌다.
바닥이 저지력을 전혀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지혁의 육체가 바닥을 마치 포탄이 처박힌 진흙처럼 걷어 올리며 지평선 끝까지 밀려 들어갔다.
크르르르르.
마치 대륙이 갈라진 것만 같았다.
바닥으로 수십 미터를 내려간 거대한 골짜기가 생겨났다.
최정훈은 그 광경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분명 조금 전 이지혁이 설칠 때가 더 위험했는데 말이야."
이지혁이 만들어낸 인력이 세상 모든 것을 빨아들일 때가 지금까지 전투중의 가장 위험한 순간이었다. 아울러 이지혁의 힘이 더없이 강하게 발휘된 순간이기도 했고.
그런데 이상하게도 지금 눈에 보이는 광경을 더 믿을 수가 없었다.
육체와 육체가 맞부딪쳤는데 저런 광경이 나온다는 것을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말 그대로 저놈들이 계속 이렇게 싸워 댄다면 북아메리카가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았다.
"…어디까지 할 셈이지, 저 미친놈들?"
이제는 남은 핵도 없지만, 설령 핵을 날린다고 해도 저놈들에게 흠집이나 가겠나 싶은 심정이었다.
그리고 객관적으로 봤을 때.
"리드하고 있는 거죠?"
바르바체가 이지혁을 완벽하게 몰아붙이고 있었다. 마왕을 응원한다는 게 웃기는 상황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지금은 바르바체가 선전해 주는 것이 그들 입장에서도 이득이었다.
하지만 아펠드리체는 냉정했다.
"아뇨."
"네?"
"바르바체가 얻은 힘은 확실히 엄청나요. 저도 저렇게까지 할 수 있을지는 몰랐으니까요."
"…그게 무슨 소립니까?"
긍정을 말하는 듯하지만 뭔가 부정적인 어조였다.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는 최정훈에게 아펠드리체가 냉정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바르바체가 잃은 것은 수명뿐만이 아닌 모양이네요."
"네?"
최정훈이 고개를 돌려 바르바체를 바라보았다. 허공에서 날개를 펄럭거리고 있는 바르바체의 모습은 위풍당당하기 그지없었다.
다만…….
"지쳤다고?"
"네."
최정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찰나였다.
그사이 어마어마한 일들이 벌어지기는 했지만, 바르바체와 이지혁이 맞붙은 순간은 찰나라고 해도 좋을 만큼 짧은 시간이었다. 그런데 바르바체의 모습에서는 이미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어째서 벌써?"
징글징글하게 다시 일어나고, 아무리 대미지를 입어도 다시 벌떡 일어나던 그 마왕들의 모습을 기억하는 최정훈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심지어 변이 전의 바르바체는 하체가 날아가고도 싸우지 않았던가.
"폭발력에 모든 것을 건 모양이네요. 덕분에 스태미나를 잃었어요. 하기야…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저 괴물에게 대항할 수 없었겠죠."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물음이 잘못됐네요."
"네?"
"…이제 할 수 있는 게 없거든요. 바르바체는 더 이상 이지혁을 막아낼 수 없을 거예요."
최정훈의 얼굴에 절망이 어렸다.
콰아아아앙!
순간, 지평선의 끝이 터져 나갔다.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확연한 폭발이 인다 싶더니, 이지혁이 순식간의 그들의 머리 위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분노 가득한 얼굴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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