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113화 (113/118)
  • [■] 아직은 안 끝났다고! 아직은! [■]

    ─────

    세상의 모든 것이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최정훈은 이런 광경을 본 적이 있다. 영화에서 말이다. 하지만 그가 본 영화의 광경이 이처럼 폭력적이지 않았다. 그가 본 광경은 항거할 수 없는 힘 앞에 무기력하게 빨려 들어가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좀 더 잔혹했다.

    우드드드득!

    바닥이 그대로 뜯겨 나간다. 강풍과 인력이 동시에 작용하며 연이은 전투로 탄탄하게 다져진 바닥마저 버티지 못하고 뜯겨 나가고 있는 것이다.

    바람은 금세 모래를 가득 머금고 날뛰기 시작했다. 흙과 자갈로 이루어진 눈보라가 치는 것만 같았다.

    카아아아아아악!

    하나 진정으로 위기에 처한 것은 바닥 따위가 아니었다.

    마수들은 본능적으로 저곳에 빨려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바닥에 납작 엎드린 마수들이 바닥에 손톱을 박아 넣고 이를 틀어박으며 저항했다.

    하지만 부질없는 짓.

    카아아아아아악!

    빨려 들어간다.

    세상의 모든 법칙을 무시하는 듯이 작용하는 인력 앞에서는 그 어떤 것도 버팀목이 되어주지 못했다. 바닥이 뒤집히고, 박아 넣은 발톱이 뽑혀 나가며… 마수들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처절하게 울부짖는 비명이 터져 나온다.

    귀를 찢는 강풍 소리와 함께 마수들의 울부짖음이 거칠게 세상으로 울려 퍼졌다.

    최정훈은 차라리 귀를 틀어먹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손을 떼는 순간, 육체가 허공으로 날아오를 것만 같다.

    그리고 그 비명 소리에 기이한 소리가 섞이기 시작했다.

    "아아……."

    최정훈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몰려든다.

    하늘로 날아오른 마수들이 이지혁이 만들어낸 작은 구슬을 향해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마수들의 수가 너무 많다 보니 허공으로 떠올라 빨려 들어가는 마수들끼리 서로 얽혀들기 시작했다.

    콰드드득! 콰득!

    뼈가 부러지고 살이 터져 나가는 소리가 섬뜩하게 파고들었다.

    울부짖음인지, 아니면 비명 소리인지 도통 구분조차 할 수 없는, 마치 성대를 찢어내는 듯한 소리가 마구 울려 퍼진다.

    콰득! 콰드득!

    거대한 프레스에 넣고 눌러 응축하는 것처럼 마수들이 짜부라졌다. 더 이상은 응축될 수 없을 것 같은 크기로 줄어들었음에도 멈추지 않고 줄어든다. 더, 더욱더!

    최정훈은 눈을 질끈 감았다.

    마수들이 마치 얼기설기 엮어둔 타이어 넝쿨처럼 일그러져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 마수들이 지금까지 인간들을 얼마나 괴롭게 했는가를 생각해 보면 통쾌해야 할 광경이건만, 실제 최정훈이 느끼고 있는 것은 통쾌함이 아닌 끔찍함이었다.

    절대적인 존재 앞에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는 생명들이 일그러지고 짜부라져 빨려 들어가는 모습은 결코 유쾌하게 바라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그리고 그건 최정훈에게도 해당되는 일이다.

    "젠장!"

    발이 떠오른다. 아직 완전히 떠오르지는 않았지만, 누가 위에서 잡아당기는 것처럼 그의 몸이 들썩이고 있었다. 최정훈이 기겁을 하여 잡을 것을 찾았다.

    하나 여기서 대체 뭘 잡으란 말인가.

    전투와 전투가 연속되다 보니 주변은 마치 사막처럼 변해 버린 후였다. 흔한 나무 하나, 풀뿌리 하나 찾아볼 수 없다. 잡을 수 있는 것은 결국…….

    "최정훈 씨!"

    서아영이 최정훈을 잡고 늘어졌다.

    "잡아!"

    그들도 인지하고 있었다.

    저기로 빨려 들어가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말이다.

    '실드를 쳤는데도 이 정도인가?'

    아니, 당연한 것이다.

    그나마 실드 안에 있기에 최정훈이 버티고 있는 거다. 실드 밖에 있는 마수들이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빨려들고 있는 것을 떠올려 보면 그 마수들보다 몇 배는 가벼운 최정훈이 버티고 있는 것이 신기한 일이었다.

    코끼리보다 거대한 마수들의 무게는 최저로 잡는다고 해도 5톤은 가볍게 넘을 텐데, 그런 마수들이 종잇장처럼 날리고 있지 않은가.

    최정훈은 돌풍 때문에 잘 벌어지지도 않는 눈을 억지로 떴다. 따끔거리고 눈물이 줄줄 흘렀지만, 눈을 감을 수가 없다. 눈을 감는 그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질까 두렵기까지 하다.

    콰아아아아아아아!

    바람이 더 거세진다.

    세상의 모든 공기를 빨아들여 버리겠다는 듯이 말이다.

    "큭!"

    몸이 떠오른다.

    "잡아! 잡아요! 빨리!"

    최정훈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그를 잡고 있는 서아영의 몸마저 허공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빌어먹을!"

    인력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 강해지고 있었다. NDF들은 서로의 몸을 엮었다. 미친 듯이 바닥으로 팔을 꽂아 넣고 바닥을 움켜쥐면서 서로의 몸을 단단히 끌어당겼다.

    "이게 씨발, 대체 뭔 일이냐고!"

    바람을 뚫고 김다현의 절망 어린 목소리가 들려온다. 저 사람이 저리 공포에 젖은 반응을 보일 정도로 상황은 심각했다.

    "으아아아아아아!"

    최정훈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누구?'

    비명 소리가 가까운 곳에서 들린다. 고개를 들어 하늘로 솟아오른 이를 확인한 최정훈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베라프 인들도 서로의 몸을 얽으며 바닥으로 납작 엎드렸지만, NDF들처럼 완전히 서로를 끌어당기지 못했다.

    "으아아아아아악!"

    "살려줘어어어!"

    허공으로 날아드는 이들의 비명 소리가 들려온다. 위태롭게 떨리고 있는 실드를 벗어나자마자 인간의 육체가 마치 엿가락처럼 길게 늘어지면서 순식간에 이지혁 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빌어먹을!"

    몸이 허공으로 완전히 떠올라 서아영의 손에만 의지하고 있는 최정훈이지만, 이 순간만은 자기혐오를 버텨내기가 힘들었다.

    안심했다.

    허공으로 떠오른 이가 그가 아는 이가 아님을.

    희생된 이가 지구인이 아님을.

    인류를 돕기 위해 다른 세계에서 넘어온 이들이 희생되는 상황에 그 사소한 이유로 안심해 버린 자신에 대한 혐오가 최정훈을 반쯤 미치게 하고 있었다.

    "정신 차려요!"

    손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낀 서아영이 비명을 질렀다.

    "개죽음이라고! 죽는다고! 손에 힘 꽉 줘요! 지금 이렇게 죽으면 저 새끼는 당신이 죽었다는 것도 모른다고!"

    "으!"

    정신이 번쩍 든 최정훈이 서아영의 팔을 꽉 움켜잡았다.

    '안 죽어.'

    죽더라도 이렇게는 죽지 않는다. 절대로! 절대로 이리 허무하게는 죽지 않을 것이다.

    허공으로 떠오른 몸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실제로 서아영의 팔을 잡은 손에는 감각이 사라지고 있었다. 피가 뒤쪽으로 몰려 팔이 새하얗게 변하는 게 눈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언제 끝나는 거야, 이 미친!"

    최정훈은 자신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앞을 보는 쪽이 힘을 주기에 훨씬 낫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돌아보지 않고서는 버틸 수가 없었다.

    "아……."

    "힘 주라구요!"

    맥이 탁 풀렸다.

    등 뒤로 보이는 광경은 인세의 그것이 아니었다.

    모든 것이 빨려 들어간다.

    마수도, 마족도, 그리고 이지혁이 소환해 낸 괴물들마저도.

    우우우우우우!

    세상을 뒤덮어 버릴 것 같은 거대한 괴물이 이지혁이 만들어낸 구슬을 향해 떠오르고 있었다. 이무기와도 같은 머리들이 미친 듯이 몸을 흔들지만, 허공으로 떠오르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바닥을 한 움큼씩 물고 버티려 했지만, 바닥째로 허공으로 날아오른다.

    그러고는 응축되기 시작한다.

    그건 응축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이상했다. 섬을 통째로 허공으로 띄운 것 같은 거대한 동체가 한곳으로 길쭉이 늘어나며 좁아진다.

    비명.

    파아아앗!

    과도한 응축을 버티지 못한 육체가 갈가리 찢기며 피 보라를 뿜어냈지만, 뿜어져 나온 피조차도 순식간에 빨려 들어갔다.

    "으아아아아악!"

    끝내 버티지 못한 베라프 인들과 능력자들마저 허공으로 떠오른다.

    "라트렐이여!"

    귀를 쩌렁쩌렁 울리는 디오레 12세의 고함 소리와 함께 허공의 실드가 우윳빛으로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텅! 텅!

    허공으로 떠오른 자들이 실드를 뚫지 못하고 재차 튕긴다. 바닥에 내려친 공처럼 몇 번이고 튕긴 이들이 실드의 벽에 다닥다닥 붙어버렸다.

    "으윽!"

    디오레 12세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몸에서 신성력이라는 신성력은 모조리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방어막이 깨지게 된다면 어떤 참사가 일어날지 빤히 예상이 되는 상황에서 우는소리를 할 수는 없었다. 저 많은 생명이 그와 신성병단에 달려 있는 것이다.

    "생명을 구하는 것 이상의 일은 없다! 라트렐의 피조물들을 보호하라!"

    "찬미 라트렐!"

    고함을 지른 성직자들이 저마다 신성력을 뿜어냈다.

    '부족하다!'

    디오레 12세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이것마저 할 수 없다는 건가.

    이지혁이라는 존재를 말살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그가 만들어낸 현상에 저항하는 것뿐이다. 실질적인 공격이 들어온 것도 아니고, 그저 빨려 들어가는 이들을 잡아내고 싶은 것인데 그것마저 할 수 없다면… 대체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무력감.

    형용할 수 없는 무력감이 그를 뒤덮기 시작했다.

    '신은 전능하지 않다.'

    하나…….

    이 먼 이계의 땅으로 와 이리 벌레처럼 죽어갈 것을 알았다면 그녀는 왜 자신들을 이 세계로 보냈단 말인가. 그들이 막을 수 없다는 것 역시 잘 알고 있을 터인데.

    신앙에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려온다.

    크롸롸롸롸롸롸!

    그리고 그의 금이 가는 신앙을 움켜잡아 준 것은 라트렐의 목소리가 아닌, 드래곤들의 포효였다.

    우우우우우우웅!

    리버스 그래비티가 대단위로 전개된다. 아니, 리버스가 아닌, 그래비티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들의 중력이 향하는 곳은 바닥이었으니까.

    드래곤들이 힘을 모아 중력을 강화시키자 떠오르던 이들이 한결 안정되고, 실드에 좀비 떼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던 이들도 살짝 아래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중력과 무중력, 그리고 역중력이 제멋대로 뒤섞인 공간 안에 인간들이 위아래로 춤을 추듯 유영하고 있었다.

    "아직은 아니야!"

    디오레 12세가 이미 너무 짓씹어 성한 곳이 하나도 없는 입술을 과격하게 깨물었다.

    아니다. 아직은 아니다.

    아직은 절망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가 아니었다.

    이곳에는 모든 의지가 모여 있다. 인간도, 인간이 아닌 자들도 세상을 지켜내겠다는 의지 하나로 이곳에 오지 않았는가. 베라프 인간들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그가 신의 뜻을 의심하고 절망에 몸을 맡긴다면, 그 치욕을 어찌 감내할 수 있겠는가.

    방금 자신이 망칠 뻔한 것이 신앙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라는 것을 깨달은 디오레 12세가 목청을 높였다.

    "신앙을 내려놓아라!"

    성직자들이 눈을 크게 뜨고 디오레 12세를 바라보았다.

    "신앙의 벽을 허물어라! 신도와 비신도의 경계를 버리고 하나의 의지로 뜻을 모아라! 우리는 이곳에서 죽지 않는다! 우리는 이곳에서 미래를 잇는다!"

    디오레 12세의 선언과 함께 다른 종단의 성직자들도 크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들 역시 알고 있다. 디오레 12세가 무엇을 말하는가를.

    교단과 교단은 서로 반목해 왔다. 하지만 멸망의 좌의 존재는 반목하던 교단들을 연합하게 만들었고, 언젠가 그가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그들의 끈을 느슨하게나마 이어놓았다.

    그리고 그들은 바로 지금이 그들이 교단과 종교의 경계마저 허물고 서로의 힘을 합쳐야 할 때라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저 강대한 적 앞에서 말이다.

    "후우!"

    그리고 그 힘을 받아 겨우 바닥으로 내려선 최정훈이 덜덜 떨리는 다리를 꽉 짓누르며 입을 열었다.

    "아직은 안 끝났다고! 아직은!"

    피를 토하는 그의 외침이 퍼져 나갔다.

    * * *

    "흐음?"

    이지혁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한 일이로군.'

    물론 그는 지금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광경에 매우 만족스러웠다.

    세상 모든 것들이 그의 의지 아래 굴복한 느낌이다. 물론 그 굴복이라는 것은 저들이 원한 것이 아니겠지만 말이다.

    그의 의지 역시 그저 의지라 칭하기에는 과도하게 폭력적이고, 물리적이었다.

    어찌 되었든 그의 의지 아래 세상 모든 것이 굴복하고 있었다. 마왕들도 몸을 낮추고, 마족과 마수들은 속수무책이었다.

    그런데…….

    '인간들이 버틴다고?'

    이지혁의 눈이 이채를 머금었다.

    물론 그리 말하고는 한다, 인간은 뭉칠수록 강해진다고.

    하지만 이지혁은 그 말만큼 허무한 말이 없다고 생각했다. 뭉치면 강해지는 것은 모든 생물이 마찬가지다. 그건 인간의 특성이 아니다. 되레 인간이란 모아놓으면 분열하고 스스로를 갉아먹는 것들이었다.

    뭉치면 강해진다는 빤한 말을 자랑으로 삼아야 할 만큼 딱히 강점이랄 게 없는 종족이 인간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인간들이 그의 의지 앞에 저항하고 있었다.

    아무리 드래곤과 이종족의 힘이 뒷받침되고 있다고는 하나, 그 지금 그의 힘을 막아내고 있는 이들이 인간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재미있군.'

    인간 출신임에도 이지혁은 이곳에서 가장 위협이 되지 않는 존재가 인간이라 생각했다. 그들이 마족과 마수들의 위협 앞에 버틸 수 있던 이유는 이지혁이 그들을 진두지휘했기 때문이니까.

    하나 지금 인간들은 이지혁에게 말하고 있었다.

    그건 너의 힘이 아니라고.

    그게 인간의 힘이라고.

    "재미있어."

    건방지기도 하지만 흥미롭기도 하다. 저 단합된 힘을 바탕으로 그에게 부딪쳐 올 인간들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드는 광경을 보는 것은 더할 나위 없는 즐거움이 될 것이다.

    또한…….

    그건 지금 당장도 할 수 있는 일이다.

    우우우우우웅!

    구슬에서 작용하는 인력이 힘을 더해가기 시작했다.

    빨아들인다.

    그가 만들어낸 구슬은 그를 제외한 모든 것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공간과 차원에 대해서는 세상 누구보다 정통한 마도사인 이지혁이기에 만들어낼 수 있는 인력이었다.

    그리고 구슬이 빨아들인 모든 것은 기운으로 바뀌어 이지혁에게 흡수되었다.

    강해진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저 숨을 쉬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지혁은 기하급수적으로 강해지고 있었다. 이러다가 몸이 받아들인 기운을 소화하지 못하고 펑! 터져 버리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들 정도로 말이다.

    우우우우웅!

    공명하는 구슬이 더더욱 힘을 내뿜기 시작했다.

    콰아아아아아아아!

    그와 동시에 바람이 한층 더 강하게 불기 시작했다. 인력의 작용 없이 그저 바람만으로 땅거죽이 솟아오른다. 대지가 쩌적쩌적 갈라지기 시작했다.

    깊이 갈라져 버린 대지 아래에서 용암이 솟구쳐 오른다. 매캐한 연기와 함께 세상이 점점 더 어둠으로 뒤덮인다.

    종말의 날이 있다면 바로 이런 모습일 것이다.

    "버틸 수 있다면 버텨보는 것도 좋겠지."

    이지혁이 머리 위로 구슬을 띄워 올렸다. 빨려 들어오는 마수와 마족들이 뒤엉키며 형이상학적인 문양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정돈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혼돈.

    그 아래에서 이지혁이 악마처럼 광소를 터뜨렸다.

    억지로 기워낸 실드가 다시 뒤흔들리기 시작한다. 몸이 떠오르는 느낌을 받은 최정훈이 헛웃음을 지었다.

    '대체 얼마나 더 보여줘야 만족한다는 거지?'

    충분할 만큼 봤다.

    너무나 충분할 만큼.

    "그러니 적당히 하라고, 이 빌어먹을 새끼야."

    최정훈이 팔목에 찬 스마트워치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듣고 있어요?"

    "물론. 내 말이 당신에게 들린다면 말이야, 미스터 최."

    크리스토퍼는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의 침착은 강제로 유지되고 있었다. 사람이 너무 혼이 빠지면 되레 냉정해진다더니, 그 말이 맞았다. 놀랄 것을 다 놀라고 나니 얼음처럼 차가워지는 이성이 거기에 있었다.

    - 갈겨요.

    "불가능해. 조준이 안 돼."

    저 강풍 속에 목표물을 맞춘다는 건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저 압도적인 인력 앞에서는 유도나 추진도 먹히지 않는다.

    - 조준할 필요 없습니다.

    "네?"

    - 알아서 빨려 들어갈 테니까요. 대충 이쪽으로 잡아서 갈기기만 하세요. 지금 저건 뒤로 쏴도 알아서 탄착군이 형성되는 역대 최대의 표적지니까요.

    크리스토퍼가 주먹을 꽉 쥐었다.

    '틀린 말은 아니군.'

    먼 거리에서 지켜보고 있느라 정확한 상황은 파악이 불가능하지만, 지금 이지혁이 주변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렇다면 조준 같은 건 필요 없다. 대충 근처로만 떨어뜨려도 알아서 빨려 들어갈 것이다.

    "종류는?"

    - 당연한 걸 물으시네요.

    "괜찮습니까?"

    - 해야 하니까.

    "알겠습니다. 지금 당장 날리죠."

    - 서둘러 주세요. 버티기 힘드니까.

    크리스토퍼는 통신이 끊겼는가를 확인도 하지 않고 소리 질렀다.

    "핵미사일 날려!"

    "몇 기나?"

    "가용한 거 다 날려 버려!"

    "…주변에 피해가 막심할 것입니다."

    "설명할 시간 없어. 그냥 날려! 당장!"

    "……."

    부관은 한숨을 쉬며 핵무기 프로그램을 입력했다.

    '이건 미친 짓이야.'

    성공한다고 해도 저 주변에 있는 사람은 모두 죽는다. 그리고 이지혁을 잡아내지 못하면 결과는 너무 빤했다. 최정훈과 크리스토퍼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미 핵 발사 프로그램은 백악관의 통제를 벗어나 그들에게 넘어와 있고, 그는 크리스토퍼의 명령을 거부할 권한이 없었다.

    '거부해서도 안 되겠지.'

    저 사람을 믿을 수 없다면, 믿을 수 있는 사람이란 게 이 세상에 존재할 리가 없다.

    "준비됐습니다."

    "발사해."

    "……."

    "발사하라고."

    "누르십시오."

    "뭐?"

    "이건 제 손으로 못하겠습니다. 누르십시오."

    크리스토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부관의 자리로 다가가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인류의 멸망을 결정지을 버튼인지도 모릅니다. 항명이 아니라, 저는 이걸 누를 담이 없습니다."

    "이해한다."

    크리스토퍼가 깊게 한숨을 쉬었다.

    막상 버튼을 누르려고 하니 압박감이 지독하게 자신을 덮쳐 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버튼이 가지는 무게감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 버튼을 쉽사리 누를 수 있다면 그건 사람이 아니겠지.

    '진짜 미사일 발사 버튼이 아니라서 다행이지.'

    대통령과 부통령이 가지고 있는 열쇠로 열 수 있는 진짜 미사일 발사 버튼이었다면 지금쯤 부담감에 숨이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그런 절차를 지킬 상황이 아니기에 프로그램을 모두 해제하고 엔터 버튼 하나로 핵을 날릴 수 있게 해두었다.

    '아니, 거꾸로 이게 더 긴장될지도 모르지.'

    저 아무것도 아닌 버튼 하나에 수십 발의 핵이 날아간다는 생각을 하면 눈앞이 깜깜해진다.

    심호흡을 한 번 한 크리스토퍼가 이를 악물었다.

    '믿는 거다.'

    현장에 있는 이의 판단을 믿는다. 그건 크리스토퍼가 지켜온 오랜 원칙이었다. 크리스토퍼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 엔터 버튼을 강하게 눌렀다.

    * * *

    하늘로 떨어진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콰드드득!

    그건 기묘한 경험이었다.

    중력이 바뀐다는 것은 살아 있는 인간이라면 경험해 보기 힘든 일이다. 무중력 상태를 경험하는 극히 일부의 사람이 있다고는 하지만, 이건 무중력도 아니다.

    시시때때로 바닥이 뒤집히는 느낌. 하늘로 떨어지고, 옆으로 떨어지고 또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진다.

    "빌어먹을!"

    최정훈이 피가 통하지 않을 만큼 꽉 쥔 손을 죽어라 움켜잡았다.

    드래곤들이 전력을 다해 전개하는 리버스 그래피티와 이지혁의 인력이 만나자 보호막 안은 마치 거대한 쉐어커 안에 들어간 것처럼 뒤집히고 흔들렸다.

    실제로 위아래가 바뀌는 것은 아니지만, 떨어지는 방향이 순간순간 변하는 느낌은 당겨진다기보다는 뒤집힌다에 가까웠다.

    "포기하지 마라!"

    디오레 12세가 목청을 돋웠다.

    "포기하는 순간 모두가 죽는다! 나 하나가 죽어도 상관없다는 마음으로 신성력을 뿜어내라! 두려워 마라. 너희가 죽는다 해도 그건 죽음이 아니다. 라트렐께서 너희를 받아주실 것이다!"

    "순교!"

    "순교!"

    미친 광신도 같은 모습이지만, 지금 이때만큼은 더없이 믿음직스러웠다. 그리고 저들 덕분에 최정훈들이 아직 살아 있는 것이다.

    저 이상의 힘을 가진 이는 이곳에 수도 없이 많다. 성직자 하나가 아무리 강한 힘을 가졌다고 해도 저 마수 하나만큼 강하지는 않을 테니까.

    하지만 마왕은 모른다. 마족은 모른다. 그리고 마수들도 몰랐다.

    그들은 아군을 구하기 위해서 자신의 힘을 사용한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옆에 있는 마수가 하늘 위로 날아오르면, 그 마수를 걷어차서라도 바닥으로 파고들려 한다.

    '마왕 놈들.'

    성직자와 드래곤들이 할 수 있다면, 분명 마왕들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마왕들은 힘을 사용해 주변을 보호하기보다는 자신의 힘을 아끼며 웅크리는 쪽을 택했다.

    "그 와중에 강해진다고, 이 멍청한 새끼들아!"

    최정훈이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저 납득이 안 가는 마왕들의 분전을 바라야 하는 지금의 현실이 야속하기 그지없지만, 다른 수가 없었다. 저 이지혁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마왕들의 협조가 필요했다.

    최정훈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무심한 눈으로 이지혁만을 바라보고 있는 아펠드리체가 있었다.

    "도움이 필요합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어요."

    "아뇨. 당신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당신이 제게 뭘 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만두세요. 나는 당신을 돕지 않아요."

    "네. 당신이 다른 꿍꿍이가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당신의 힘이 필요한 게 아닙니다. 필요한 건 당신의 인맥이죠."

    "…무슨 뜻이죠?"

    "드래곤들을 불러주세요."

    "지금 그들에게 경황이 없다는 것 정도는 당신도 알 텐데요. 동족을 비하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들은 저자가 만들어놓은 현상에 저항하는 것만으로 한계예요."

    "네, 압니다! 하지만 제 말을 전달하는 정도는 해주실 수 있겠죠."

    아펠드리체의 눈이 의문으로 물들었다.

    "뭘 하려는 거죠?"

    "살아남으려는 겁니다."

    최정훈의 눈을 가만히 바라본 아펠드리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세요."

    "아니, 제 말은……."

    "이해했어요. 당신이야말로 잊고 있군요. 당신들이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드래곤의 지능은 낮지 않아요. 다른 드래곤들과 텔레파시를 연결했으니, 제게 말하면 돼요. 번역까지 자체로 해드릴 테니."

    최정훈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공사다망하신 드래곤님들께 말하옵건대……."

    이거, 말투가 좀 이상해지는 것 같지만… 뭐, 상관없겠지. 저들이 그의 미묘한 어감을 번역해서 듣지는 않을 테니까.

    "타이밍에 맞춰 제 지시를 이행해 주시기 바랍니다. 단 한 번의 반격 찬스가 지금 시작될 겁니다."

    아펠드리체가 눈을 빛내며 최정훈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면 이 인간은 인간 중에서도 특별했다.

    "반격이 시작될 겁니다. 뭐, 물론……."

    최정훈이 어깨를 으쓱했다.

    "일단 반격에 시작에서 살아남는 것부터 해야 하니까요. 아니꼬우시겠지만, 제 말을 들어주시길 바랍니다."

    지옥의 한복판에서 인류의 반격이 고개를 들고 있었다.

    * * *

    뭘 하고 있는 거지?

    이지혁은 고개를 들었다. 그가 만들어낸 구슬이 세상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광경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랬지.'

    그가 만든 광경이다. 그가 저지른 일이다.

    하지만 뭔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현실감이 느껴질 만큼 기억이 이어지지 않고 있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그는 분명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머리로 생각한다.

    하지만 그 순간순간이 분절되고 있었다. 마치 진정제에 취한 것처럼 의식은 존재하되 세상이 멍하니 멀어졌다가 순간 다가오는 현상이 반복되고 있었다.

    '잃어가는 거로군.'

    과거 자리하던 이지혁이라는 존재를 밀어내고 그가 이 자리를 차지했다. 하지만 그의 끝도 딱히 해피엔딩은 아닌 모양이다.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결국 그는 이성을 잃고 오로지 파괴의 본능에만 매달리게 될 것이다.

    블랙아웃을 당한 뇌가 본능만으로 움직이듯 말이다.

    하나 나쁠 것은 없었다.

    조금은 우스운 이야기이지만, 이성이 있는 그와 이성이 없는 그가 하는 행동은 그다지 다를 것도 없었다. 오히려 과거 이지혁의 기억 덕분에 조금이나마 거리낌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는 지금 상태보다는 이성을 완전히 날려 버리는 것이 그의 의지를 수행하는 데 더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한심하기 짝이 없게도 말이야.]

    이지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알고 있다.

    이지혁은 사라졌다.

    그는 이지혁을 봉인한 것이 아니다. 이지혁이라는 존재는 완벽하게 소멸했다. 그러니 그가 그에게 말을 걸어올 리는 없었다.

    지금 그가 듣고 있는 말은 이지혁이 하는 것이 아니다. 너무도 완벽하게 과거의 이지혁을 기억하고 있는 그의 초월적인 뇌가 그 기억을 바탕으로 이지혁의 인격을 재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짓을."

    결국 재구성이라는 것은 그의 의지가 있을 때에 가능한 일이다. 다시 말하자면, 지금 그의 의지가 과거의 이지혁의 인격을 궁금해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납득하고 싶은 일은 아니지만, 납득할 수밖에 없다. 그의 이성은 억지를 허락하지 않았으니까.

    그는 궁금해하고 있다.

    이지혁의 기억을 모두 가지고 있음에도 이지혁이라는 존재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으니까. 과거 이지혁이 어떤 생각으로 어떻게 움직였는지를 모조리 기억하고 있음에도 도무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과거의 이지혁이 지금의 그보다 저열한 존재이기에 이런 위화감이 생겨났다고 여겼다.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이기 짝이 없는 행동의 반복을 그가 이해한다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그는 이해하고 있었다.

    그게 전부가 아니다.

    '뭔가 빠진 부분이 있어.'

    이지혁이라는 존재에서 지금의 그로 변화하면서 뭔가 빠진 부분이 있었다. 과거의 이지혁을 구성하던 가장 핵심적인 요소 하나가 그에게로 이어지지 못한 것이다.

    중요한가?

    그렇지 않다.

    그래도 달라지는 것은 없으니까.

    그는 과거의 이지혁이 아니고, 과거의 이지혁일 필요도 없다. 과거의 이지혁에 비한다면 지금 그는 훨씬 더 진화한 존재이고, 완전한 존재다. 완전한 존재가 불완전한 존재를 갈구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이성적으로 따지자면, 과거의 이지혁이 어떤 존재였든 그가 신경 쓸 필요는 없다. 그건 지금의 그에게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으니까.

    "그런데 왜……."

    이지혁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분노와 증오, 그리고 쾌락 외에 짜증이라는 감정이 생겨나고 있었다.

    왜 이리 자꾸 뭔가 뒤틀린 듯한 느낌이 든단 말인가.

    갈증이었다.

    아무리 물을 마셔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이지혁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갈증 같은 건 느낄 이유가 없는데도.'

    보라.

    모두가 그를 경배하고 있다.

    마수도, 마족도, 마왕과 인간들도, 드래곤조차도.

    경의와 공포를 담은 눈으로 그에게 경배를 바치고 있다.

    이러한 광경을 그 누가 볼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세상이 생겨난 이후로 처음으로 세상에 강림한 파괴의 화신이고, 이제 곧 세상 모든 것에게 공평한 죽음이란 평등을 안겨줄 존재다.

    비록 그것이 그의 의지라기보다는 본능에 가까운 것이라 해도.

    '상관없다.'

    본능에 스스로를 맡기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마음에 안 드는군."

    이지혁의 눈이 정확하게 한곳에 꽂혔다.

    '거슬려.'

    단둘이 있다.

    이곳에 있는 모두가 이지혁을 경배하지는 않는다. 한없는 적개심을 품은 바르바체도 있고, 여전히 그를 증오하고 있는 마왕들도 있었다.

    하지만 단 두 개의 눈빛이 그의 마음에 걸렸다.

    '거슬린다고.'

    저 눈.

    공포도, 증오도…… 그리고 적개심도 아니다.

    노골적인 경멸.

    결코 그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가득 담긴, 노골적인 경멸을 담은 두 쌍의 눈이 아까부터 계속 그를 거슬리게 만들었다.

    하나는 이해할 수 있다.

    그녀는 예전부터 그런 존재였으니까.

    하지만 저 나약한 인간이 그를 경멸하는 눈빛을 보내는 것만은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었다.

    '돌아버린 건가?'

    마족도, 마왕들마저 두려움을 내비치는 그를 상대로 저런 눈을 한다? 한낱 인간이?

    제정신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아니…….

    오히려 하찮은 존재이기에 가능할 수도 있는 일일지 모른다. 그의 기준으로는 이지혁의 강함을 제대로 측정조차 할 수 없을 테니까. 이곳에 있는 모든 존재들이 자신보다 강한데 그중 더 강하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납득한다.

    납득하려 한다.

    "이……."

    하지만 가슴 한구석을 자꾸 긁어 대는 듯한 불쾌감이 이지혁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오냐."

    그렇다면 그 눈빛을 바꿔주지. 절망과 좌절로 말이야.

    우우우웅!

    "자초한 일이니, 달게 받으면 되겠지."

    이지혁의 손 위에 올려진 구슬이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 * *

    "징글징글한 새끼!"

    최정훈이 이를 갈았다.

    "왜 이렇게 늦냐고! 거리 얼마 된다고!"

    여기가 한국이면 말도 안 한다. 미국 영토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인데, 미사일이 날아오는 데 이리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빌어먹을 크리스토퍼!"

    "아! 시끄러워요! 말할 힘 있으면 팔에 힘이나 주라구요!"

    허공으로 떠오르는 최정훈이 쉴 새 없이 욕을 해 대고 있었다.

    "다 죽게 생겼잖아요!"

    "그럼 죽을 때 욕해요! 아직은 살아 있으니까!"

    최정훈이 이를 갈았다.

    그의 눈에 보이는 광경은 여전히 최악이었다. 마수들은 이제 거의 다 빨려 들어갔다. 마족들의 모습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마수들의 양이 워낙에 많아서 아직도 뭔가 빨려 들어가고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마수가 아니라 뒤집힌 땅거죽과 불어온 모래바람이었다.

    그 자리를 대신 채우는 것은 인간이었다.

    아무리 리버스 그래비티를 전개하고 실드를 강화해도 모든 이들을 지킬 수는 없었다. 실드의 벽면에 다닥다닥 붙어 있던 사람들이 결국에는 인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실드 밖으로 튕겨 나가기 시작했다.

    '제발!'

    시간이 없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희생은 늘어난다. 그리고!

    '강해지고 있다고 했지.'

    모든 생물의 힘을 빨아들여서 말이다. 마수도, 인간도 저곳에 흡수되면 결국 이지혁의 힘을 강화시켜 주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의 전력은 줄어들고, 이지혁은 강해진다. 지금도 이지혁을 감당할 계획을 세우지 못하고 있는 판인데, 이대로 시간이 더 지나게 된다면?

    파멸이다.

    그러니 도박을 할 수밖에 없다.

    최정훈은 두 가지에 집중했다.

    이지혁이 존재하는 모든 것을 빨아들이고 있다는 것. 심지어 대지를 가르며 솟구쳐 오르는 용암마저 빨아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생물이다.'

    지금 이지혁이 흡수하는 것을 살아 있는 것들이었다. 다른 흙더미나 바윗덩어리, 그리고 용암 같은 살아 있지 않은 것들은 빨려 들어갈지언정 이지혁에게 힘을 주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어떻게 아느냐고?

    "빌어먹을, 흙 파먹고 세지는 놈을 어떻게 이겨? 그건 솔직히 말도 안 되지!"

    "뭐라는 거야, 이 인간아!"

    최정훈이 자꾸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차게 내리눌렀다.

    '가능성, 가능성이야.'

    절대 이길 수 없는 상대와 맞서 싸워야 할 때, 어떤 전략을 세워야 하는가.

    간단하다.

    버리는 것이다.

    다른 가능성을.

    모든 상황에 대처한다는 생각으로는 절대 이길 수 없다. 전력의 차이가 나니까. 그러니 검증 따위는 날려 버리고, 통하기만 하면 확실하게 타격을 줄 수 있는 모험을 할 수밖에 없다.

    실패해도 본전이고, 통한다면 로또다.

    "멀었나요?"

    아펠드리체의 싸늘한 목소리에 최정훈이 소리를 질렀다.

    "그러지 말고 일단 좀 도와주고 말해요! 제가 이 상황에 뭘 할 수 있겠어요!"

    "손이 많이 가는 사람이네요."

    아펠드리체가 손을 내밀자, 강풍에 휘날리는 깃발처럼 팔랑거리던 최정훈의 몸이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으……."

    "중력을 강화했어요. 몸은 좀 힘들겠지만, 날아다니는 것보다는 낫겠죠."

    "충분합니다."

    최정훈이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조금은 이상한 기분이었다.

    지금까지 그는 언제나 이지혁을 돕는 방향으로 움직여 왔다. 이지혁을 만난 이후로 그의 모든 사고는 이지혁을 보좌하는 것과 결코 움직이지 않으려고 하는 이지혁을 꼬셔서 움직이게 하는 것에 쏠려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저자가 이지혁이 아니라고는 하나 그를 죽이기 위해서 머리를 쓰고 있으려니, 기이한 감정이 몰려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곧 핵무기가 미사일에 실려 날아올 겁니다. 그럼 저 인력을 따라 이지혁에게 모두 명중하겠죠."

    최정훈이 손을 들어 이지혁을 가리켰다.

    "제 생각이 맞다면… 저놈은 살아 있는 생명의 기운을 모조리 빨아들여 흡수하지만, 무생물은 흡수하지 못합니다. 핵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니죠. 그리고 그 위력은 당신들도 충분히 알고 있을 겁니다."

    아펠드리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보기에도 핵은 인간이 만들어낸 최악의 무기였다. 그 어떤 대마법사도, 그리고 그 어떤 마왕도 그만한 화력을 광범위하게 뿌릴 수는 없다.

    "하지만 그 핵이라는 걸로 이지혁을 잡을 수는 없어요. 알고 있을 텐데요?"

    최정훈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핵에 그런 난점이 있을 줄은 몰랐죠. 하지만 괜찮을 겁니다. 생각해 둔 것도 있고, 지금 날아오는 핵은 한 발이 아니니까요. 계산만 맞다면 말이죠. 제 계산은……."

    "설명을 들을 시간이 없겠네요."

    "네?"

    "거의 도착했어요."

    아펠드리체의 시선이 한곳을 향했다.

    최정훈이 이를 꽉 깨물었다. 그는 전혀 느낄 수 없다. 핵이 터지는 그 순간까지도 그는 미사일을 포착하지 못할 것이다. 드래곤인 아펠드리체이기에 알 수 있는 것이다.

    "전달해 주세요! 이지혁에게 핵이 빨려 들어가는 그 한순간입니다. 저 망할 놈을 밀어 올려야 해요."

    "……무지막지한 일을 시키는군요. 하지만……."

    아펠드리체의 눈이 결연해졌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요. 드래곤의 명예를 걸고 해내도록 하죠."

    * * *

    '음?'

    이지혁의 고개가 살짝 돌아갔다.

    '뭔가 날아오는데?'

    날아오는 것이 뭔지를 확인한 이지혁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별짓을 다 하는군."

    미사일이 날아들고 있었다.

    나쁘지 않은 대응이다. 저 미사일들이 자신에게 타격을 줄 수 있는가 없는가는 둘째 치더라도 가용한 화력을 사용도 해보지 못하고 멸망하는 것 또한 어리석기 짝이 없는 짓이었으니까.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심정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겠다는데, 그걸 비웃을 필요는 없다.

    다만, 동정할 뿐.

    짜내고 짜내 할 수 있는 공격이 겨우 이거라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저들의 분발을 촉구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대로는 너무 재미가 없으니까.

    이곳에는 세 개 차원의 정예들이 모여 있다. 다른 어느 차원으로 간다 하더라도 이곳만큼 강자들이 모여 있는 곳은 없을 것이다. 서로 다른 특성을 지닌 차원의 강자들이 이만큼이나 모여 있는데도 변변한 저항조자 없다는 것은 너무 싱겁지 않은가.

    조금 더.

    조금은 더 즐기고 싶다.

    "저런 하찮은 짓거리 말고 말이야."

    이지혁이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지구의 과학은 확실히 위협적이다. 저 핵에서 발생하는 에너지를 직격당한다면 아무리 이지혁이라고 할지라도 위험할 수밖에 없다.

    "하나 느려."

    아무리 강한 힘을 갖추고 있다 해도 명중시키지 못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애초에 저 정도 속도만으로도 인간은 대응할 수가 없다. 하지만 이지혁은 아니었다.

    마족화가 된 그에게는 날아드는 미사일의 존재와 그 궤적이 손에 잡힐 듯 확실하게 보이고 있었다. 제아무리 대단한 힘을 갖췄더라도 이곳에 도착하기 전에 폭발한다면 아무런…….

    "음?"

    그리고 그 순간, 바닥에서 가공할 힘이 밀어닥치기 시작했다.

    "바르바체?"

    지금껏 이상할 정도로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바르바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육체에서 뿜어져 나온 시커먼 뇌전들이 이지혁을 향해 줄기줄기 날아들고 있는 것이다.

    "과연이라고 해야 하나?"

    머리로 알고 아는 것인지, 본능적으로 만들어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바르바체의 뇌전은 이지혁의 인력이 끌어당기는 방향을 절묘하게 계산하여 이지혁에게 날아들고 있었다.

    그 안에는 이지혁을 반드시 죽여 버리고 말겠다는 바르바체의 강한 의지력마저 느껴지고 있었다.

    "영광인데, 이거?"

    저 대마왕이 자신에게 이만큼이나 적개심을 뿜어내고 있다는 사실이 더없이 유쾌한 이지혁이었다. 그동안의 바르바체에게서는 볼 수 없던 모습이다.

    이지혁은 자신에게 날아드는 뇌전들을 손으로 받아냈다. 마왕의 마기가 잔뜩 실린 뇌전이지만, 지금의 그에게는 그리 위협적이지 못한 공격일 뿐이었다.

    하지만 겨우 그 정도가 아니었다.

    "크아아아!"

    뇌전이 걷히기 무섭게 바르바체가 이지혁의 바로 앞으로 불쑥 나타났다.

    "호오?"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온다.

    콰앙! 콰아아앙! 콰앙!

    바르바체의 주먹이 연신 이지혁의 육체를 후려쳤다. 팔로 가드를 했음에도 한 방, 한 방을 맞을 때마다 욱씬한 대미지가 남는 일격들이었다.

    "의외로군."

    이지혁이 씨익 웃었다.

    "너는 꽤나 겁쟁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확실한 승산이 있을 때가 아니면 달려들지 않는 것이 너의 방식 아니던가? 적어도 내게는 지금 네게 승산이 없어 보이는데?"

    "그럴지도 모르지."

    바르바체가 씨익 웃었다.

    "지금까지였다면 말이야. 지금은 어떻게든 그 승산이라는 것을 만들어내야 하는 상황이거든."

    "뭐랄까, 마치 용사 같은 대사로군. 그러면 내가 마왕이 되어야 하는 건가?"

    "큭큭큭."

    바르바체는 알 수 있었다.

    그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말이다.

    '절박함.'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강하기 짝이 없던 그는 절박함이라는 감정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손만 뻗으면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그가 어찌 그러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단 말인가.

    "어설프군."

    콰득!

    이지혁의 발이 바르바체의 배를 뚫고 들어갔다.

    "끄윽."

    배가 꿰뚫리며 내장이 조각조각 난다. 동시에 목구멍으로 푸른 핏물이 마구 역류했다.

    "흐으음?"

    이지혁이 흥미롭다는 듯 바르바체를 바라보았다.

    그 꼴을 당했음에도 바르바체는 거리를 벌려 스스로의 재생을 시도하지 않고 이지혁의 발을 잡고 늘어졌다.

    "이런, 마왕의 체면은 어디로 가버린 거지?"

    이지혁이 자신의 다리를 잡고 늘어지는 바르바체를 다른 발로 몇 번이고 걷어찼다. 일격, 일격이 마왕의 육체를 분쇄할 만한 위력이 실린 발길질이었다. 순식간에 바르바체의 육체가 너덜너덜해졌다.

    그럼에도 바르바체는 이지혁을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거머리 같은 놈이."

    이지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일반적으로 마왕이 이 정도 대미지를 입는다면 어떨까?

    겉으로 보기에는 굉장한 상처를 입은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리 큰 대미지가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다.

    마왕에게, 그리고 마족에게 있어서 육체란 의지를 실행하는 도구일 뿐, 그들의 생명력과 힘은 모두 마나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아무리 육체가 무너진다고 하더라도 마나가 있는 이상 순식간에 복구할 수 있다.

    하지만 이지혁에게 입은 상처는 단순한 외상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지혁은 파괴한 육체에서 마나를 남김없이 빨아들여 흡수한다. 결국 지금 바르바체는 인간과 동일한 수준의 타격을 입은 것이다.

    배가 꿰뚫리고 육체가 전부 걸레짝이 될 정도의 타격을 말이다.

    그럼에도 바르바체는 그를 놓지 않고 있었다.

    "인간과 협조라도 하겠다는 건가, 용사여?"

    이지혁의 비웃음에 바르바체도 웃음으로 화답했다.

    "네놈 덕분에 알게 된 것이다."

    "흠?"

    "상대를 쓰러뜨리는 데는 격도, 체면도, 자존심 따위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걸 말이야. 중요한 것은 마지막에 누가 서 있느냐 하는 거겠지. 덕분에 알게 되었다."

    "난 그리 구질구질한 적이 없던 것 같은데."

    "기억 왜곡이 심하군."

    "뭐, 좋아. 그건 내가 아니니까 상관이 없지. 하지만 이걸로 나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큭큭큭, 너는 나를 용사라 불렀지."

    "그래. 지금 너에게 딱 맞는 말이지."

    "너희의 이야기들에는 나도 관심이 많지. 용사의 가장 큰 조건이 뭔지 아는가?"

    "용기?"

    "빤한 소리를 지껄이는군. 용사의 가장 큰 조건은 다수로 하나를 핍박하면서도 결코 비겁하다 여기지 않는 강건한 멘탈이겠지. 지금의 나처럼 말이야."

    이지혁의 눈이 일그러졌다.

    "내 동료들이 있다는 걸 잊지 말라고, 멍청한 마왕 놈아!"

    이지혁이 고개를 돌렸다.

    아래에 남아 있던 마왕들이 힘을 모아 거대한 마나의 덩어리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작렬하는 마력이 제멋대로 응축되고 팽창하며 이리저리 뒤섞이는 꼴이.

    "어디서 많이 본 광경이겠지? 큭큭큭, 그래서 말했잖아. 많이 배웠다고 말이야."

    "이 쓰레기 같은 놈들이."

    "늦었어."

    마왕들이 힘을 모아 만들어낸 마력의 덩어리가 이지혁을 향해 솟구치기 시작했다.

    "너는 아무래도 마족이 되었음에도 더 이상은 마나를 다루지 못하게 된 모양이더군. 그렇다면 대미지도 더 강하게 들어가겠지. 선물이다, 마왕."

    바르바체가 자신의 배 아래를 잘라내며 뒤로 튕겨 나갔다.

    "이!"

    마기가 이지혁의 육체를 그물처럼 엮어댄다. 스펠 바운드가 계속 쏟아져서 텔레포트조차 불가능했다.

    "큭."

    이지혁의 육체를 뒤덮은 마나의 덩어리가 폭발적으로 회전하며 거대한 마나의 소용돌이를 만들어냈다. 마치 이지혁이 그러했듯 말이다.

    "크아악! 이 하찮은 놈들이!"

    "아주 스테레오 타입의 마왕이로군. 지긋지긋할 정도야."

    자신이 얼마 전까지 비슷한 말을 내뱉었다는 걸 알지 못하는지, 바르바체가 키득대며 웃었다.

    "빌어먹을 인간 놈들아! 너희가 원하는 대로 해주었다! 실패는 용납지 않겠어!"

    최정훈이 소리치는 바르바체를 보며 혀를 찼다.

    "잘난 체하기는."

    통역이 안 돼서 무슨 말인지 몰라야 정상인데, 이상하게도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똑똑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하기야 저 상황에서 할 말이야 빤하지.

    "들어 올려요!"

    일순 드래곤들이 리버스 그래비티를 이지혁의 아래로 집중시켰다. 방향은 정방향. 말 그대로 중력과 반대 방향으로 거대한 인력이 작용하기 시작했다.

    솟구쳐 오르는 소용돌이와 역중력의 공격을 동시에 받은 이지혁의 육체가 돌풍에 솟아오른 바람개비처럼 하늘로, 하늘로 날아오른다.

    최정훈이 그 광경을 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가라!"

    콰아아아아아아!

    가공할 속도로 날아든 미사일들이 이지혁이 만들어낸 구슬의 인력을 따라 빨려 들어갔다.

    "크윽!"

    그 광경을 빤히 보고 있음에도 이지혁은 저항할 수 없었다. 아무리 그가 절대에 가까운 힘을 손에 넣었다고는 하나, 이 많은 마왕들이 전력을 다해 만들어낸 마나를 일시에 흡수하거나 해소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 일격에 죽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잠시간 행동 불능이 되는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

    평소라면 딱히 저항도 없이 받아들였을 상황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비약적으로 상승한 육체의 능력은 이런 상황에서조차 그에게 날아드는 미사일들을 똑똑히 느끼게 만들었다. 육체를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서 자신에게 슬로우모션처럼 느릿하게 미사일들이 날아오는 걸 그저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 빌어먹을!"

    이지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의 육체는 핵폭발 정도로 무너지지 않는다.

    방사능?

    그의 육체를 붕괴시키기에 이 정도 방사능은 너무도 부족했다. 인간으로 따지면 엑스레이 한 방 수준도 안 될 것이다.

    그럼에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저들의 공격을 그저 받아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이지혁에게 굴욕적인 마음을 품게 만들고 있었다.

    "죽여 버리겠다!"

    일단은 이 한 방을 버텨…….

    순간, 이지혁의 눈이 살짝 커졌다.

    '이거?'

    계산 착오가 있었다.

    지금 그에게 날아드는 핵미사일은 정확하게 스물일곱 발. 그 모든 것을 육체로만 받아낸다 하더라도 이지혁은 치명상을 입지 않을 것이다.

    하나…….

    "이 빌어먹을 놈!"

    미사일이 노리는 것은 이지혁이 아니었다. 날아들던 미사일들이 이지혁의 인력의 영향권에 드는 순간, 수십 배로 가속하며 길쭉하게 늘어나 그가 만들어낸 구슬로 빨려 들어갔다.

    스물일곱 발의 핵이 마치 하나인 것처럼 말이다.

    이지혁은 그 순간 깨달았다.

    우우우우우우웅!

    그가 만들어낸 것은 생물의 힘을 흡수하는 것이다. 하지만 핵은 결코 생물이 아니다. 좁은 공간으로 압축되고 또 압축된 핵이 일시에 터져 나온다면?

    이지혁이 고개를 돌려 최정훈을 보았다. 분노와 증오가 목소리가 되어 터져 나온다.

    "최정후우우우운!"

    그러자 최정훈은 이지혁과 눈을 마주치고는 씨익 웃었다. 과거의 이지혁에게서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저 당혹스러운 얼굴을 보니 십 년 묵은 체증이 훅 내려가는 것 같았다.

    최정훈은 그가 내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거만함을 담아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인류의 선물이다. 엿이나 처먹어라, 병신아."

    * * *

    "틀어막아!"

    최정훈의 피맺힌 고함 소리와 함께 일순 이지혁의 몸 주변을 실드가 뒤덮어 버린다. 얼핏 보면 마치 이지혁을 보호하기 위해서 수천 겹으로 싸인 실드 같았다. 하나 저 실드의 실제 용도는 이지혁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지혁을 날려 버릴 핵폭발이 조금도 낭비되지 않도록 공간 자체를 틀어막아 격리하는 것이다.

    성직자들이 모든 힘을 다해 이지혁의 주변에 보호막을 쳤다. 신성의 가호와 마나의 가호가 동시에 작용한다. 마왕들조차 날려 올린 마나를 조종해 이지혁의 몸을 둘러쌌다.

    "신마 공조라는 건가? 더러운 기분이군."

    바르바체가 바닥에 피를 게워내며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쓸 수 있는 수단이라면 모두 써야겠지. 네가 가르친 대로 말이야."

    바르바체가 비릿한 웃음을 머금었다.

    "더! 더! 이게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다 퍼부으라고!"

    최정훈의 고함과 함께 드래곤들도 리버스 그래비티를 풀어버리고 이지혁의 육체를 공간에서 격리시키기 시작했다.

    이윽고…….

    "터져라!"

    간절한 바람이 이루어진다.

    눈이 멀 것 같은 강렬한 빛이 보호막을 꿰뚫으며 세상을 뒤덮었다.

    고막이 터져 나간다.

    보호막은 소리를 막을 수 없으니까.

    눈이 멀 것 같은 빛이 쏘아지고, 터져 나간 고막 대신 육체가 덜덜 떨리며 얼마나 큰 소리가 터지고 있는지를 감지했다.

    그 고통 속에서도 최정훈은 웃었다.

    '그만한 힘을 다 흡수했을 리가 없지.'

    그게 가능했다면 굳이 저런 매개체를 만들어냈을 리가 없다. 매개체가 아니라 이지혁이 직접 바로 힘을 흡수하면 그만이니까. 그게 안 되니까 저런 거추장스러운 방법을 쓴 것이다.

    스물일곱 발의 핵미사일은 그저 그 힘을 일시에 해방시키는 매개체에 불가능한 것이다.

    물론 저 작은 공간 안에 그 힘이 온전히 작용한다면, 그 힘도 결코 무시할 수는 없다. 그리고 거기에 이지혁이 마수들을 흡수하며 모아둔 힘들까지 더해진다면?

    '저 안에서는 신조차도 살아남지 못해.'

    인간과 마족, 그리고 드래곤들이 힘을 합쳐 만든 혼신의 일격이었다. 이걸로도 이지혁을 잡아내지 못한다면, 그들에게는 더 이상 희망이란 게 없을 것이다.

    하지만 최정훈은 확신했다.

    "버틸 수 없어."

    버텨낸다면 깨끗하게 인정해 주지. 차라리 내 목을 잘라서 내가 바쳐 주겠다. 저 힘을 온전히 버텨낸다면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으니까 말이다.

    '잘 보이지가 않아.'

    처음 빛이 뿜어져 나왔을 때 눈이 멀어버린 모양이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최정훈은 이지혁에게서 단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으니 빛을 피할 방법도 없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좋다.

    눈이 어쨌다는 건가. 고막이 터진 게 어쨌다는 거냐. 그 정도의 피해로 막아낼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주고 만다.

    순간, 눈으로 뭔가 따뜻한 것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아……."

    흐릿해진 시야의 초점이 맞아 들어가기 시작한다. 겨우 사물을 분간할 수 있게 된 최정훈이 본 것은 무뚝뚝한 얼굴로 그의 눈가에 힐을 넣고 있는 아펠드리체였다.

    "…감사합니다."

    지금 내가 제대로 말한 것이 맞나?

    들리지가 않으니 알 수가 없었다. 귀가 들리지 않는 이들이 왜 말투가 어눌해지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똑똑히 봐요."

    하지만 일순간 고막이 고쳐졌는지, 아펠드리체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당신이 만들어낸 광경이니까."

    최정훈이 입술을 꽉 깨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저 광경을?

    마치 하늘에 작은 태양이 하나 더 뜬 것 같았다. 여전히 눈부시게 강렬한 빛을 내뿜는 태양이 그 힘을 다 소모하지 못해 이글대고 있었다.

    최정훈은 순간 실제 태양이 내뿜는 힘과 저 안의 힘이 어떨까를 비교했다. 태양이 만들어내는 에너지 총량에 비교한다면 티끌도 되지 않겠지만, 동일 공간에 작용하는 힘이라는 조건이라면 그 이상이지 않을까?

    '모르겠다.'

    그는 천체물리학자가 아니니까. 아니, 천체물리학자가 온다고 해도 저 안에 얼마나 거대한 힘이 작용하고 있는지는 계산할 수 없을 것이다.

    "대단한… 대단한 인간이네요, 당신도. 이지혁 씨가 왜 당신을 특별하게 여겼는지 알 것 같아요."

    "그 특별함을 지금도 인정하고 있을까요?"

    "누구보다 기뻐하겠죠."

    자신의 육체가 무너지고 있는 것을 말이다.

    "……."

    최정훈이 정신을 번쩍 차렸다.

    '아직 끝난 게 아니야.'

    "저 마왕들을 다시……."

    "인간은 실수에서 배우는 게 없는 종족인가요?"

    "네?"

    "앞서 나가지 말아요. 당신이 만들어낸 저 공격이 먹혔다는 건 확실하지만, 그게 저자의 소멸을 의미하는 건 아니니까."

    최정훈의 눈동자가 떨렸다.

    소멸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살아 있다고?

    저 안에서?

    최정훈이 부러질 듯 목을 꺾었다.

    마왕들은 조금도 긴장을 풀지 않은 채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저 안에서 이지혁이 튀어나온다는 듯이 말이다.

    '말도 안 돼. 빌어먹을.'

    저 유리된 공간 안에서는 지금 현실에서 있을 수 없는 힘이 작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걸 맨몸으로 버텨낸다는 말인가? 저걸?

    "…해도 해도 너무하네."

    "좌절할 것 없어요."

    아펠드리체가 무뚝뚝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의 공격은 확실히 먹혔으니까. 이제 우리에게도 승산이라는 게 생겼어요."

    최정훈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러니 물러나요."

    "네?"

    "당신은 소중한 전력이에요. 어쩌면 이 전투에서 당신은 유일하게 변수를 만들어낼 수 있는 존재일지도 모르죠. 그러니 이제는 뒤로 물러나는 게 좋을 거예요. 터져 나올 테니까, 저 폭발이. 보호막만으로는 막을 수 없을 거예요."

    "아……."

    "늦었나?"

    아펠드리체가 얼굴을 굳히고는 앞쪽으로 보호막을 쳤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저 거대한 힘을 막아낼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해 보였다.

    고오오오오오오!

    응축되고 응축된 기운이 일시에 터져 나간다.

    "둘러라!"

    그리고 그 순간, 마왕들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마기가 새하얗게 빛나는 구를 뒤덮어 버렸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뒤덮었다기보다는 완벽하게 둘러쌌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우우우웅.

    "저거?"

    최정훈이 눈을 크게 떴다.

    게이트!

    지독스레 봐온 이지혁 스타일의 게이트가 구형으로 전개되어 빛의 구슬을 완전히 둘러쌌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천붕지음이 터져 나왔다.

    아펠드리체의 수고가 무색하게도 최정훈의 고막은 다시금 터져 나갔다. 하지만 고통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 사소한 일에 고통을 느끼기에 지금 최정훈은 너무도 긴장하고 있었다.

    천붕지음이 사라지자 게이트조차 사라진다.

    그리고 정적이 자리한 그곳에서 바르바체가 조용히 읊조렸다.

    "홀로 다른 차원의 전투를 하고 있었군. 과연 이지혁이 사용하던 방법은 쓸모 있는 게 많단 말이야."

    아펠드리체가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한 거죠?"

    "폭발을 타 차원으로 전이시켰다. 나 혼자서라면 불가능했겠지만, 나도 이제 협동이라는 것을 배웠거든. 무지막지한 반동이 있기는 했지만, 저 힘을 고스란히 뒤집어써야 했을 타 차원에 비하면 싸게 먹힌 거지. 생명이 있든 없든 차원 몇 개는 날아갔을 만한 에너지다."

    바르바체의 입가에서 피가 계속 흘러내렸다. 그뿐 아니라 마왕들의 육체도 다들 걸레짝처럼 터져 있었다.

    "허억, 허억, 허억!"

    그 오만한 마왕들이 바닥에 몸을 누이고, 엎드린 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만큼이나 조금 전 발생한 단 한순간의 기회에 모든 마력을 몰아넣었다는 뜻이다.

    "이… 이지혁 씨는?"

    최정훈이 떨리는 눈으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허공에는 먼지 한 톨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말려든 먹구름도 사라지고, 깨끗해진 공기 덕분에 청명한 하늘만 보일 뿐이었다.

    평화롭기 짝이 없는 하늘과는 반대로 땅은 마치 거대한 갈퀴로 마구 헤집은 듯했다. 없던 산이 생겨나고, 지옥으로 이어지는 것 같은 거대한 골짜기가 생겨났다.

    지형을 뒤바꾸는 전투라는 말이 딱 들어맞았다.

    "이지혁 씨는 죽은 겁니까?"

    "죽어?"

    바르바체가 최정훈을 보며 웃었다. 그러고는 친절하게 통역까지 활용하며 말을 해주었다. 저 오만한 마왕이 하찮은 인간을 위해 말이다.

    "이 정도로 죽을 리가 없지. 아마 폭발에 휘말려 타 차원으로 날아갔을 것이다."

    "그럼……."

    "돌아오고 있겠지."

    바르바체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증오와 분노를 품고 말이야."

    "언제?"

    "언제라니?"

    바르바체가 키득대며 웃었다.

    "굉장히 소중한 척 대하더니, 그를 제일 무시하는 게 너로군. 바로 지금이다."

    우우우우우웅.

    바르바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들의 앞에 핏빛의 게이트가 생겨났다. 모든 것을 예상하고 있었음에도 바르바체는 신음을 흘렸다.

    "괴물 같은 놈."

    그토록 오랜 삶을 살아온 바르바체이지만, 이토록이나 처절한 전투는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 전투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바르바체가 긴장한 눈으로 게이트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그가 신을 능가하는 힘을 손에 넣었다고는 하나, 이만한 충격을 버텨낼 수 있을 리는 없었다. 대미지는 있다. 반드시 있다. 문제는 그 대미지가 얼마나 먹혔냐는 것이다.

    모습이 드러나기 전에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트라우마라는 건 존재하는 모양이군."

    이지혁의 발이 게이트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저벅.

    바닥을 디딘 발을 시작으로 나머지 이지혁의 육체도 게이트를 빠져나왔다.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그의 육체가 완전한 형태 그대로 말이다.

    "육체가 계속 소멸하고 재생하는 건 끔찍한 경험이지. 어쩌면 이지혁이 그토록 강할 수 있던 이유는 불멸의 권능이 아니라 최상의 상태로 고정되어 있는 정신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어. 아무리 나라도 이런 걸 한 번 더 당하면 미쳐 버릴 거야."

    최정훈의 눈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멀쩡하다.

    너무도 멀쩡하다.

    그만큼이나 강대한 공격을 퍼부었는데, 이지혁은 마치 산보라도 나온 사람처럼 여유롭기 짝이 없었다.

    "…그것마저 통하지 않았다는 건가?"

    "아뇨."

    아펠드리체가 확고하게 말했다.

    "통했어요. 그것도 제대로."

    파아아아아앗!

    아펠드리체의 말이 끝나지 무섭게 이지혁의 양팔이 폭탄에라도 맞은 것퍼럼 터져 나갔다.

    "큭!"

    몸을 굽히자마자 등 부분도 터지며 피 분수를 사방으로 뿜어낸다. 동시에 다리와 얼굴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크윽!"

    완전한 결말은 아니었다.

    터져 나간 부분과 녹아내린 부분이 일순간 재생되어 순식간에 다시 멀쩡한 그의 모습으로 돌아갔으니까.

    육체에 흩뿌려진 피와 바닥에 떨어진 팔의 파편들만이 이지혁의 육체가 붕괴했다는 증거로 남아 있었다.

    "큭큭큭큭."

    바르바체가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거의 껍데기만 남아버렸군. 강렬하긴 강렬했던 모양이야?"

    "거의 죽는다고 생각할 정도로. 생각하기 싫은 순간이군."

    이지혁이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네 말이 맞아. 살아남는 데 너무 많은 힘을 썼군. 살아남은 게 고작이라고 할 정도야. 하지만 그건 그쪽도 마찬가지 아닌가. 지금 내게 남은 힘만으로도 너희를 모조리 죽이는 건 별 무리가 없어 보이는데?"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아니란 건가?"

    "안타까운 마왕이여, 너는 마왕이되 마왕이 되지 못했구나. 결국 너에게는 인간의 잔재가 남아 있는 것이지."

    "무슨 뜻이지?"

    "마왕이란 모름지기 홀로 서는 것이지. 너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아야 했다."

    바르바체가 그 육중한 몸을 허공으로 띄워 올렸다.

    "이제 결착을 내주마, 이지혁. 지긋지긋한 인간이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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