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112화 (112/118)
  • [■] 방법이야 찾으면 나오는 거니까요 [■]

    ─────

    "뭐, 벌써부터 그런 얼굴 할 것 없어. 이게 끝은 아니니까."

    이지혁이 낄낄대며 웃었다.

    종속의 인이 박힌 것들을 소환하는 데는 별 힘이 들지 않지만, 인이 박히지 않은 존재들을 이계에서 소환하는 것은 많은 힘이 소모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지혁이 그런 방법을 택하지 않은 것은 단순히 힘이 들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통제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세상을 완전히 무너뜨려 버릴 생각이 아니라면 불러서는 안 되는 존재들이 있었다. 이지혁은 그들을 이곳으로 끌고 올 수는 있지만, 얌전히 돌려보내는 방법을 몰랐다.

    지금까지는 말이다.

    "낄낄낄낄."

    세상이 어찌 되든 상관이 없어진 지금은 그가 사용할 수 있는 것들의 바리에이션이 극단적으로 넓어진다. 예를 들어…….

    우우우웅.

    이지혁의 우수가 허공을 가리키자 그곳에 거대한 홀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게이트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거대한…….

    바르바체는 경악한 눈으로 위를 올려다보았다.

    이지혁이 만들어낸 게이트가 거대해서 놀란 것이 아니다. 그 게이트 너머에서 바르바체조차 움찔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거대한 힘이 느껴졌다.

    "빌어먹을."

    저 게이트에서 나오는 것이 무엇이든 자신들에게 그리 우호적이 아닐 것이란 건 얼마든지 짐작할 수 있었다. 바르바체의 시야에 게이트에서 나오는 거대한 동체가 눈에 들어왔다.

    "…이지혁."

    신음이 흘러나왔다.

    대체 저놈은 어디서 이런 말도 안 되는 것들을 알아냈다는 말인가.

    수많은 차원을 둘러보면서도 저런 괴물을 본 적이 전혀 없던 바르바체는 이를 갈 수밖에 없었다.

    "힘들어 보이네."

    비웃는 듯한 목소리에 바르바체가 이를 갈며 뒤를 돌아보았다.

    "어디에 처박혀 있다가 지금 나타난 거냐?"

    "그런 눈으로 보지 말라고. 너같이 무식한 놈도 기를 펴지 못하는 이 상황에 나처럼 나약한 마왕이 뭘 할 수 있겠어? 숨어서 지켜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 그렇지 않아?"

    "잘도 지껄이는군."

    "그래서 내가 경고했잖아, 조심하라고."

    "……."

    바르바체는 뭐라 항변할 수 없었다.

    에르카나는 지속적으로 그가 이지혁에게 당할 것이라 경고해 왔다. 상황이 이리되니 에르카나가 정말 그를 걱정해 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을 너무 얕봤어."

    "그래봐야 인간이었다."

    "수천 년을 살아온 인간은 수억 년을 살아온 마족에 비견되는 법이지. 수동적으로 자신에게 주어지는 것들을 받아쳐 나가는 마족과 능동적으로 일을 벌이는 인간을 동일시해서는 안 되는 거였지. 그가 이룬 것을 봐. 같은 힘을 가진 마족이라면 수억 년을 준다고 해도 결코 이룰 수 없는 것들을 이뤄냈지. 너는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알았어야 해."

    "그래서?"

    바르바체가 눈을 치켜뜨고 에르카나를 노려보았다.

    "그래서 너는 저것에 만족하는 모양이지? 네가 말한 대로 나는 여기서 마지막을 맞이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저건 이미 이지혁이 아닐 텐데?"

    "상관없어."

    "…뭐?"

    에르카나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말했잖아. 달링은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니까. 이미 죽어버린 사람에게 집착하지는 않아. 내 사랑은 살아 있는 달링에게 국한 된 것이니까."

    바르바체가 묘한 눈으로 에르카나를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지금 그녀가 원하는 것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그저 지켜보고 싶은 거야. 내 경고를 무시하고 달링을 저런 꼴로 만든 너희가 어떻게 당하는지."

    에르카나의 얼굴에 원독이 차올랐다.

    "내가 바라는 것은 이제 너희가 모두 짓밟히는 것뿐이야. 무슨 수를 써서도 달링은 이제 돌아올 수 없으니까. 나는 달링을 저리 만든 너희를 용서할 수 없는 것뿐이야."

    "…넌 미쳤어."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뭐 어때? 이제 다 죽을 텐데."

    "우리가 저놈에게 모두 당하는 일이 벌어질 거라 생각해?"

    "호호호호호."

    허리를 젖히며 웃은 에르카나가 머리 위를 가리켰다.

    "네 발등에 떨어진 불이나 처리하지그래? 다급해 보이는데? 그러다가 몸이 다 타고 나서 후회하지 말고."

    바르바체가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위로 돌리자 에르카나는 붉은 화염의 날개를 펼친 이지혁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당신이 선택한 길이니까.'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지혁은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순간이 몇 번이고 있었다. 그가 원했다면 베라프로 돌아가 영원한 삶을 살 수 있는 방법도 있었을 것이고, 베라프나 마계가 아닌, 다른 세계로 가서 전투와 관계가 없는 삶으로 여생을 보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가 지구에 남기를 굳이 고집한 이유는 이 세계가 익숙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지구에서 죽는 것을 택한 것이다. 그가 떠나 버린 세계는 멸망이 확실해지지만, 그가 이곳에 남아 있다면 조금이나마 가능성이 생기니까.

    '멍청해.'

    이지혁이라는 남자는 항상 그랬다.

    무모하고, 바보 같고…….

    그래서 사랑스럽다.

    에르카나는 변해 버린 이지혁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시작하지 말아야 했어.'

    어쩌면 그의 운명을 가장 크게 뒤틀어 버린 것은 라트렐이 아니라 그녀일지도 모른다. 그녀가 흑마력을 넘겨주지 않았다면 이지혁이 저리 서글픈 모습으로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족의 호의는 호의가 아니라고 하더니, 결국은 그녀가 이지혁을 죽인 꼴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지혁은 절대 그녀를 원망하지 않겠지만, 그녀는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었다.

    '그리고 너도 같은 심정이겠지.'

    저 멀리 아펠드리체의 모습이 보였다. 에르카나는 조금은 씁쓸한 마음으로 아펠드리체를 바라보았다. 그녀 역시 지금 에르카나와 같은 심정일 것이다.

    그 스스로 원한 것이기에 막을 수도 없고, 막아서도 안 되지만…….

    '그래도 원망스러운 것만은 어쩔 수 없네.'

    어쩐지 이 세상에 그 사람을 빼앗긴 기분이었다.

    '당신이 원한 거니까 참는 거야.'

    에르카나는 조금은 슬픈 눈으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 * *

    쿠르르르르르릉!

    천지가 개벽하는 소리와 함께 하늘에서 '그것'이 떨어져 내렸다. 바르바체는 떨어지는 그것을 보며 전율했다.

    '대체 뭐냐?'

    저 기이하고 거대한 것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그 괴물은 마계의 생물들조차 압도하고 있었다.

    이지혁이 만들어낸 소용돌이는 마치 머리가 아홉 개가 달린 전설의 용 같았다. 하지만 지금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것은 정말 히드라였다.

    그것도 그가 알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비늘이 덮인 형태가 아니라, 육체가 반쯤 녹아내린 것 같은 히드라의 모습이었다. 슬라임과 히드라를 적절히 섞어 반죽해 놓으면 저런 모양새가 나오지 않을까 싶은, 그런 히드라 말이다.

    아니, 히드라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히드라에게는 육체가 있으니까.

    하지만 지금 떨어져 내리는 것은 이무기를 뭉치고 엮어낸 것처럼 기이한 존재였다.

    바르바체를 질리게 만든 것은 그 존재의 어마어마한 크기였다. 그 옆에 가져다 대면 드래곤조차 작아 보일 것이다. 그런 것이 지금 하늘에서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카아아아악!

    스스로가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사방으로 빠져나온 미꾸라지 같은 머리가 짙은 점액질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촤아아악!

    뿜어져 나온 점액질에 닿은 모든 것이 녹아내렸다.

    마수도, 마족도, 그리고 마왕까지도.

    그나마 강철을 뛰어넘는 육체를 가진 마왕은 피부가 타오르는 수준에서 멈출 수 있었지만, 마족과 마수들을 얄짤 없이 한 줌의 핏물이 되어 녹아내렸다.

    쿠우우우우우웅!

    사방으로 점액질을 토해내던 히드라가 바닥에 처박히며 수천의 마수들을 깔아뭉갰다. 그와 동시에 주변의 마수들을 한입에 집어삼킨다.

    너무도 거대한 그 머리에 마수들이 마치 작은 생물이라도 되는 듯이 빨려 들어갔다. 코끼리보다 더 큰 마수들이 곤충 정도로 느껴질 정도였다.

    "저 빌어먹을 놈이!"

    바르바체가 이를 갈았다.

    이지혁의 전투 방식은 수많은 쟁투를 겪어온 그에게도 생소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장담하건대, 캐스터의 영역에서 저만한 수준에 오른 이는 역사를 통틀어도 없을 것이다.

    대단위 군중을 상대로 할수록 효율이 올라가는 캐스터의 힘을 이지혁이 제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크아아앗!"

    "흥분할 것 없어."

    바르바체가 기겁을 하여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이동하여 그의 바로 옆에 나타난 이지혁이 손가락을 까딱거리고 있었다.

    "아직 시작도 안 했으니까."

    콰아앙!

    이지혁의 발이 바르바체의 옆구리를 걷어찬다.

    바르바체의 몸이 바람에 휘날리는 팔랑개비처럼 하늘을 날았다.

    "커헉!"

    바닥에 떨어진 바르바체가 옆구리를 부여잡으며 입에서 피를 토했다.

    '어떻게 이게 가능하지?'

    이지혁은 캐스터다.

    다시 말하자면, 이지혁의 체술은 보잘것없는 수준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지금 그의 옆구리에 틀어박힌 일격은 결코 초심자의 그것이 아니었다.

    "멍청한 놈."

    에르카나가 그런 바르바체를 보며 혀를 찼다.

    '이해를 못하는군.'

    그들이 본 이지혁은 마법사에 불과하다. 하지만 에르카나는 알고 있었다. 에르카나를 만나 흑마법사로 전직하기 전, 오백 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이지혁은 세상의 모든 체술과 기술을 익히고 다녔다.

    마나를 쌓지 못하는 몸과 미약하기 짝이 없는 에테르로는 그가 배운 기술들을 거의 활용할 수 없었지만, 지식만큼은 확실하게 쌓아놓았다.

    덕분에 이지혁은 세상 모든 체술과 기술들을 적어도 중수급 이상으로는 활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지금 폭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과거에는 결코 꿈꿀 수 없던 강건한 육체와 무한의 마나가 그와 함께하고 있으니까. 그 사실을 간과했으니 저런 꼴을 당해도 하등 이상할 게 없었다.

    이지혁이 에르카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쩌지?"

    그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난 이런 놈이 되어버렸는걸? 아쉽게도 같은 종족이 되는 것에는 실패했군, 에르카나."

    "실망할 것 없어. 마족인 당신은 나도 별로 달갑지 않으니까."

    "그건 안타까운 일이군."

    "어때? 당신의 마족에 대한 증오가 나에게도 똑같이 적용되고 있어? 나를 죽이고 싶어?"

    "흐음……."

    이지혁이 에르카나를 보며 미간을 좁혔다.

    "아닌 것 같군. 확실히 그래. 나의 증오라는 것은 마족에 대한 증오가 아니었군. 저들에 대한 증오였어. 이건 꽤나 의미심장한 일인데? 아닌 것 같지만, 이지혁의 기억과 감정이 지금의 내게도 영향을 주고 있다는 뜻이 아닌가?"

    이지혁은 불쾌하다는 듯이 얼굴을 문질렀다.

    "영향을 주지 않는 기억이라는 것은 무가치한 거야. 당연한 일이지."

    "그도 그렇군."

    이지혁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기억이 영향을 주고 있는 모양이야. 하지만 다행스러운 것은, 그리 큰 영향을 주는 것 같지는 않군. 지금 당장 네 목을 꺾어버려도 딱히 기분이 나쁠 것 같지는 않거든."

    씨익 웃는 이지혁을 보며 에르카나가 마주 웃었다.

    "꺾어봐, 멍청한 놈아."

    에르카나가 싸늘하게 냉소했다.

    * * *

    "패기가 넘치는데? 내 앞에서 그런 말을 하고도 무사할 줄 아는 모양이지? 나는 과거의 이지혁이 아니야. 네 재롱을 받아줄 생각 따위는 없어."

    "과거의 이지혁이 아니니까 하는 말이야, 병신 같은 놈아. 나는 너 같은 건 하나도 무섭지 않아."

    "…재미있는 발언이군."

    이지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과거의 이지혁보다 몇 배는 강하고 잔혹하다. 그럼에도 지금의 나보다 과거의 이지혁이 더 두렵다는 건가?"

    에르카가나 명백한 비웃음을 입가에 머금었다.

    "너는 그냥 화가 나 있는 아이일 뿐이야."

    "아이?"

    "너의 분노에는 원인도 방향성도 없어. 그저 화를 낼 뿐이지. 달링과는 전혀 달라. 그런데 왜 내가 너 같은 놈을 두려워해야 하지? 네가 나를 죽일 수 있기 때문에? 호호호호호!"

    에르카나가 고혹적으로 웃었다.

    "착각하지 마, 멍청아. 누가 죽는 게 두렵다고 했어? 어차피 내게 삶에 대한 미련 따위는 남아 있지도 않아. 내게 있어서 두려운 것은 죽는 게 아니라 달링이 없는 이 세상에 홀로 남겨지는 거야. 그걸 피하기 위해서라면 너 따위 쓰레기가 주는 죽음이라도 달게 받아주지."

    이지혁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대체 뭔가, 이것들은.'

    정확하게는 이들이 문제가 아니라 이지혁에 대한 의문이 끊임없이 솟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는 이지혁의 모든 기억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기억들을 아무리 분석해 보아도 이들이 이리 이지혁에게 집착할 만한 이유를 찾아낼 수가 없었다.

    이성적으로 볼 때, 그들이 이지혁에게 집착할 만한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최정훈이나 아펠드리체를 봐도 그렇고, 에르카나를 봐도 그렇고…… 그들은 비정상적으로 이지혁이라는 존재에 집착하고 있었다.

    '이해를 할 수가 없군.'

    스스로의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서까지 이지혁에 대한 집착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모를 테지."

    "……."

    "감정이 남지 않은 너로는 알 수 없는 일이지. 그래서 말하잖아, 너는 이지혁이 될 수 없다고. 그리고 이지혁이 아닌, 그저 생물로서도 불완전하기 짝이 없는 존재지."

    이지혁의 눈빛이 점점 가라앉았다.

    "아무리 마족이라 한들 감정은 존재해. 우리도 사랑을 하고, 화내고, 기뻐하고, 슬퍼하지. 인간과는 다르게 그 감정의 폭이 크지 않을 뿐이야. 하지만 너에게는 그런 감정이 없지. 그렇지 않아?"

    "……."

    "감정이 없는 너는 이지혁이 될 수 없어. 아니, 감정이 있다고 해도 너는 이지혁이 될 수 없어."

    "애초에!"

    이지혁이 이를 갈았다.

    "나는 그런 불완전한 존재가 될 생각 따위는 전혀 없어! 감정에 이리저리 휘둘리고 제가 원하는 것 하나 하지 못하는 쓰레기 같은 존재가 되기 위해 내가 애써야 할 이유가 있나?"

    에르카나가 대놓고 이지혁을 비웃었다.

    "예전에 달링이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지. 너의 기억 속에도 있을 거야. 인간이란……."

    에르카나가 말을 하기도 전에 이지혁이 입을 열었다. 오래된 기억 속에 존재하는 말이었다.

    "……불완전하기에 완벽하다."

    "그래."

    에르카나가 비웃음을 머금고 그를 바라보았다.

    "너는 스스로가 완벽하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그건 보완할 수 없다는 말과 같아. 세상에 완벽한 건 없어. 있는 것은 바뀔 수 없는 것과 바뀌지 못하는 것뿐이지. 너는 완벽한 게 아니라 고정된 거야."

    이지혁이 한숨을 쉬었다.

    그의 한숨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에르카나는 그 한숨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저건 이지혁의 오랜 기억의 영향일 뿐, 그가 정말 이지혁처럼 한숨을 쉬지는 못할 테니까.

    지금의 이지혁은 반성하지도, 이해하지도 않는다. 타인의 말을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고정되었다는 것은 그런 거니까.

    "나는……."

    쿠웅!

    에르카나가 입을 열려는 순간, 그녀의 배에 이지혁의 발이 틀어박혔다.

    비명도 지르지 못한 에르카나가 피를 뿌리며 나가떨어졌다.

    "별 쓸데없는 말을 지껄이고 있군."

    힘겹게 몸을 일으킨 에르카나가 차가운 눈으로 이지혁을 노려보았다.

    역시 이놈에게는 대화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오로지 일방통행만이 있을 뿐이다.

    "이지혁이 좀 더 완전한 존재였다고? 불완전하기에 완전하다고? 웃기지도 않는 소리를 하고 있군."

    이지혁의 몸 주변에 붉은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네 말대로라면 나는 완벽함을 포기한 대신에 힘을 얻은 것이 되겠군. 그렇다면 보여줘야지. 내가 얼마만큼의 힘을 얻었는가 말이야."

    고오오오오오오!

    이지혁의 주변으로 붉은 혈기가 마치 폭풍처럼 휘돌기 시작했다. 맹렬한 기세로 이지혁의 몸 주위를 회전하던 기운들이 이지혁의 몸으로 달라붙기 시작한다.

    에르카나의 눈이 크게 떠졌다.

    마기 이상으로 광포한 저 기운들이 이지혁의 의지에 따라 완벽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지금의 이지혁이 얼마나 불가해한 존재인가를 보여주는 광경이다.

    붉은 혈기가 이지혁의 몸 주위를 마치 갑주처럼 감쌌다.

    새삼 에르카나는 실감했다.

    지금의 이지혁은 마법사이자 전사다. 과거의 이지혁과는 전혀 다른 패턴으로 싸울 수 있는 것이다.

    "잘 보라고, 내가 도달한 영역을 말이야."

    이지혁이 양손을 펼쳐 들자 그의 뒤로 새하얀 홀이 열리기 시작했다.

    '홀?'

    에르카나가 눈을 크게 떴다. 지금까지 이지혁이 사용하던 게이트는 검은빛을 띠었다. 하지만 지금 이지혁이 연 게이트는 새하얗다.

    '뭘 끄집어내려는 거지?'

    * * *

    "악몽이군."

    최정훈은 일그러진 얼굴로 이지혁을 보고 있었다. 붉은 혈기를 마구 뿜어내는 이지혁의 앞으로 거대한 아홉 개의 용권풍이 회전하며 마수들을 갈아버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간으로 단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한 거대한 괴물이 나타나 마족과 마수들을 짓밟는다.

    "레이드라도 뛰는 건가?"

    그냥 객관적으로 상황을 보자면 이지혁이라는 보스 몹을 마왕과 마족들이 레이드 하는 광경 같았다. 그것도 이길 확률이 거의 보이지 않는 절망적인 레이드를 말이다.

    압권인 것은 소환된 괴물이었다. 대체 어디서 저런 것을 불러낸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지혁이 소환한 괴물은 말 그대로 산처럼 거대했다.

    그냥 크기만 크다면 어찌 납득하겠지만, 괴물은 압도적으로 강하고, 또한 그로테스크 했다. 최정훈이 보기에는 수십 마리의 거대한 뱀, 혹은 이무기를 얼기설기 엮어서 묶어놓은 꼴 같았다. 수십 마리의 뱀들이 하나의 몸처럼 움직이며 각각 따로 머리를 놀린다.

    일전에 이지혁이 히드라를 부리는 것을 보았지만, 그걸 여기에 비교할 수는 없다. 고양이와 호랑이가 종족적으로 비슷하다고 해서 둘을 비교할 수는 없으니까.

    학살이 벌어지고 있었다.

    물론 마왕들 역시 그 이름값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거침없이 뛰어올라 뱀의 머리를 갈라 버리고, 사납게 달려들어 뱀의 몸통을 찢어발기고 있지만, 뱀은 상처를 입는 족족 체액을 내뿜으며 마왕들의 육체를 태워냈다.

    워낙 동체가 거대하다 보니 뿜어져 나오는 체액의 양도 어마어마히고, 확실히 공격이 먹혀드는 대신에 공격을 하는 이도 그만한 피해를 감수해야 했다.

    그리고…….

    아아아아아아아아아!

    "뭐야?"

    어디선가 울음소리 같기도 하고 노랫소리 같기도 한 음성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저, 저거!"

    이지혁이 만들어낸, 홀로 새하얀 빛을 머금은 투명한 여인의 형상들이 느릿하게 그 모습을 드러냈다.

    "정령?"

    최정훈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이미 마법사로서, 소환사로서, 전사로서 마족들을 유린하고 있던 이지혁이다. 그런데 저기에 정령까지 다룬다고?

    '농담이 아냐.'

    게이트에서 나온 정령들은 순식간에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순결한 백색으로 자애로운 미소를 보이던 정령들이 이지혁의 혈기를 받아들이는 순간, 나찰 같은 얼굴로 변하더니 붉어진 몸으로 날아올랐다.

    새빨갛게 몸을 물들인 정령들 수십, 수백이 동시에 허공을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노래하는 광경은 마치 종말의 상징처럼 느껴졌다.

    "…마족이 차라리 인간적이네."

    정령들이 노래를 하다가 일제히 멈춰 선다 싶더니, 앞쪽으로 거대한 빛을 뿜어냈다.

    아아아아아아아아!

    노래와 함께 뿜어져 나간 빛은 닿는 모든 것을 증발시켜 버리며 전면으로 깔끔한 길을 만들어냈다. 심지어 이지혁이 소환한 뱀 덩어리의 머리까지 몇 개 잘려 나갔다.

    하늘에는 먹구름이 가득하고, 대지에는 지독한 괴물이 요동친다. 하늘과 땅 사이에는 아홉 줄기의 붉은 소용돌이가 세상을 유린하고, 그 사이로 피의 정령들의 노랫소리가 울려 퍼진다.

    이 모든 것이 단 한 사람이 만들어낸 광경이었다.

    그 두렵고 무서운 마족과 마왕들이 차마 이지혁에게 접근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일인 군단.

    이지혁은 철저하게 혼자였지만, 결코 혼자가 아니었다. 과거 이지혁이 마수들과 아이언 골렘을 부려 혼자서도 베라프 전체를 상대했듯이, 지금의 이지혁은 마법과 정령, 그리고 소환수만으로 마계 전체를 상대하고 있는 것이다.

    "…절대라는 말이 어울리네요."

    "절대라……."

    아펠드리체의 말에 최정훈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혼자서 저런 힘을 손에 넣은 존재는 이제껏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거예요. 이제껏 없던 것은 확실하고, 앞으로는… 역시나 있을 수 없겠죠. 세상이 멸망할 테니까."

    "……."

    "영혼의 굶주림은 사라지지 않아요. 저자는 본능적으로 다른 존재들을 파괴하게 될 겁니다. 처음에는 살아 있는 것을 죽이고, 나중에는 그 흔적마저 없애려 들겠죠. 나중에는 차원마저 무너뜨리려고 할 겁니다."

    "그렇게까지?"

    "이지혁 씨가 그러더군요. 그렇게 될 거라고……."

    최정훈이 눈을 질끈 감았다.

    이지혁의 말이라면 틀리지 않을 것이다. 돌이켜 보면 그가 한 말은 모두가 맞았으니까.

    "이지혁 씨의 말이라면 확실하겠군요."

    "예."

    "그리고 그렇다면 저 괴물을 쓰러뜨릴 방법도 있다는 뜻이죠."

    "…네?"

    아펠드리체가 의문이 담긴 눈으로 최정훈을 바라보았다.

    "그 사람이 그랬거든요. 자기가 마족이 되어 세상을 파괴하려 든다면 반드시 자신을 죽이라구요."

    "……."

    "그게 불가능한 일이었다면 시키지도 않았겠죠. 이지혁 씨는 그런 사람이니까요."

    "하지만 어떻게?"

    최정훈이 미간을 살짝 눌렀다.

    "쉽지 않은 일이고, 어려운 일이겠지만… 글쎄요, 불가능할 것 같지는 않은데요? 방법이야 찾으면 나오는 거니까요."

    최정훈이 몸을 빙글 돌렸다.

    그의 뒤에는 그가 원한 모두가 집결해 있었다. 인간들의 대표와 베라프의 대표들. 그들 모두가 최정훈의 소집에 응해 이곳에 와 있었다.

    혹자들은 한낱 능력도 없는 인간이 자신들을 소환한 것을 탐탁치 않아 했지만, 지금 날뛰고 있는 이지혁을 보면서 그런 불만을 늘어놓을 만큼 정신 나간 자는 없었다.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이 그들이 맞은 진정한 위기라는 것을. 라트렐이 그토록이나 두려워하던 멸망의 좌가 마침내 강림했다는 것을 말이다.

    "자, 모두들 모여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이제부터……."

    최정훈이 슬쩍 고개를 돌려 이지혁을 바라보고는 입을 열었다.

    "저 미친놈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한 계획을 짜겠습니다."

    최정훈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 * *

    세상이 무너지는 것은 수도 없이 보았다.

    그들의 손으로 무너뜨린 차원만 해도 하나둘이 아니었다. 마계는 타 차원을 침략하지 않으면 그 차원 스스로 자생할 수 없는 곳이었다.

    자조적인 말이지만, 마족이란 존재는 차원의 기생충과 같았다. 어떠한 세계를 침략하여 무너뜨리고, 그 안에 사는 생물들이 내뿜는 부정(不淨)한 기운이 있어야 스스로의 힘을 유지할 수 있으니까.

    그렇기에 지금껏 그들은 수많은 세상의 끝을 목도했다.

    하나…….

    단 한 번도 이런 감정을 느껴본 적은 없었다.

    아아아아아아아아!

    노래 소리가 울려 퍼진다.

    하늘 위에서 마수와 처음 보는 이형의 짐승들이 떨어지고, 바닥에서는 아홉 줄기의 용권풍이 솟구친다. 그와 함께 붉게 몸을 물들인 정령들이 노래하며 춤추고 있었다.

    '종말.'

    그 말이 가장 어울리는 모습일 것이다.

    마치 종말이라는 단어가 현실에 그 모습을 드러낸 것만 같았다. 종말이라는 말이 주는 이미지가 이 이상 들어맞는 경우는 다시없을 것이다.

    그들은 언제나 다른 이들에게 종말을 주는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은 가만히 목도하고 있었다. 자신들에게 강림한 종말의 사자를 말이다.

    '이지혁.'

    인간이되 마왕의 지위에 오른 자.

    그 사실만으로도 대단한 존재였다. 그들을 적대하지 않았다면 종족을 뛰어넘어 존중해 줄 수 있을 만큼 말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던 것이다.

    기미는 있었다.

    베라프의 신들은 그들보다 이지혁을 막는 데 더 큰 힘을 기울였다. 아무리 이지혁이 강하다고는 하나 마계 전체의 힘에 비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한데도 마치 이지혁을 막아야 세계가 존속된다는 듯이 말이다.

    그에게 멸망에 좌라는 과하고도 어이없는 이름을 붙이고, 세상의 모든 힘을 모아서 견제하고 막아서던 이들이 바로 베라프의 신들이 아니던가.

    그 이유가 지금 밝혀지고 있는 것이다.

    과거의 이지혁은 멸망의 좌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존재가 아니었다.

    멸망의 좌라는 이름을 가지기에는 그 힘도 부족하고, 무엇보다 그의 마음이 너무도 인간적이었다.

    지구로 돌아오던 때, 이지혁은 베라프를 반쯤은 끝장낼 수 있었으면서도 그러지 않았다. 멸망의 좌라는 이름을 얻기에는 너무도 나약한 마음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지금은?

    아아아아아아아아아!

    정령들의 노랫소리와 함께 거대한 빔이 세상을 수놓는다.

    콰아아아아아아!

    하나의 소용돌이가 사라진다 싶더니, 다시 새로운 소용돌이가 마수들 한가운데에 나타나 주변 모든 것을 찢고 갈라 버려 무로 되돌린다.

    사라진다.

    마수도, 마족들도…….

    마치 거대한 지도를 도화지에 옮겨 부분, 부분을 지우개로 지워 나가는 것처럼 마수도, 마족도 너무도 덧없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죽어 나간 마수와 마족들의 몸에서 뽑혀 나온 마기들이 이지혁의 몸으로 빨려 들어간다.

    '강해지고 있다.'

    얼마나 더 강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이지혁이 처음 마족화한 이지혁보다 더 강해진 것만은 확실했다. 그는 자신이 죽인 생물들의 힘을 흡수하고 있는 것이다.

    거꾸로 말하자면, 이지혁은 앞으로도 더 강해질 것이다. 더 많은 생물을 죽이고, 더 많은 힘을 흡수하면서 끝없이 강해져 나갈 것이다.

    "그럴 수 있다면 말이지."

    바르바체가 이를 갈았다.

    실수다.

    인정한다.

    지금 그가 보고 있는 광경은 그의 실수가 만들어낸 최악의 참사였다.

    하나 항변할 거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그렇지 않겠는가.

    인간들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호랑이 새끼를 주운 이는 누구나 키워보고 싶은 마음이 들기 마련이다. 호랑이가 커서 그 웅장한 모습을 보이는 광경을 상상하며 말이다.

    한 가지 잘못된 점이 있다면, 그가 주운 호랑이 새끼가 호랑이 새끼가 아니었다는 사실 정도겠지.

    바르바체는 붉어진 이지혁의 눈을 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사라져 간다.

    점점 더.

    자욱한 혈기 때문에 그의 시력으로도 제대로 보기가 힘들지만, 언뜻언뜻 드러나는 이지혁의 눈에서 인성이라 할 것이 점점 더 사라져 가고 있었다. 감정을 배제하고 주변의 모든 것을 철저하게 지우는 것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아니.

    감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너무도 노골적이라 되레 느끼기 힘든 감정의 편린이 전해지고 있었다.

    증오.

    그리고 분노.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분노가 밀려온다.

    "제멋대로 날뛰게 둘 것 같으냐?"

    바르바체가 고함을 지르며 팔을 들어 올렸다.

    "몰아쳐라!"

    마왕들의 눈이 빛났다.

    상대는 더없이 강하다.

    세상에 존재한 이후로 단 한 번도 두려움이라는 것을 느껴보지 못한 마왕들조차도 절로 움츠러들게 만들 정도로 말이다. 하나 그렇다고 해서 전의를 잃은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전투를 위해 살아가는 존재들.

    상대가 강하면 강할수록 더욱 타오르는 이들이었다.

    "죽여라."

    바르바체가 으르렁대며 말했다.

    "봐라. 그는 우리의 앞에 나타난 이제껏 가장 강대한 적이다. 다시 말하자면, 저자를 쓰러뜨릴 수만 있다면… 이제 더 이상 우리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없다. 죽여라. 그 살점 하나 남기지 말고 모조리 물어뜯어라!"

    신호도 필요 없었다.

    바르바체가 말을 끝내는 그 순간, 마왕들이 일제히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이지혁을 향해 달려들었다. 얼마나 빠른지 수십 줄기의 유성들이 이지혁에게 쇄도하는 것만 같았다.

    "크큭."

    이지혁은 그 광경을 보며 비웃음을 흘렸다.

    불나방 같은 것들이 달려들고 있다.

    손가락 하나 휘두르면 피떡이 되어 나가떨어질 것들이 제 목숨 아까운 줄도 모르고 말이다.

    '아니지.'

    어쩌면 올바른 선택일지도 모른다. 살아남겠답시고 몸을 사린다고 해도 그들에게 주어진 운명은 하나뿐이니까.

    죽음, 그리고 멸절.

    자신이 그리 만들 것이다. 그들을 세포 하나 남겨두지 않고 세상에서 지워 버릴 테니까.

    아아아아아아아!

    정령들은 이지혁의 지시가 없이도 노래하며 사방으로 빔을 뿜어냈다. 붉은 레이저가 달려드는 마왕들을 사정없이 꿰뚫는다.

    결코 마왕의 상대가 될 수 없는 정령들조차 이지혁의 혈기의 영향으로 어마어마한 위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크아아아아!"

    육체가 꿰뚫린 마왕들이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면서도 쇄도를 멈추지 않았다.

    우르르릉.

    발밑이 무너진다.

    바닥이 푹 꺼지면서 거기에서 검은 손 수백 개가 솟아올라 이지혁의 몸을 움켜잡아 왔다.

    "하찮은 짓."

    하지만 바닥에서 나타난 손들은 이지혁의 육체에 닿지조차 못했다. 혈기로 만들어진 갑옷은 저열한 마나로 이루어진 손들의 접근조차 불허했다.

    쿠르르르릉!

    하지만 마왕들 역시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진다.

    백여 줄기의 검은 뇌전이 이지혁의 육체로 떨어졌다.

    콰릉! 콰르르릉!

    대기를 찢어내는, 마치 비명과도 같은 소리와 함께 이지혁의 육체가 벼락에 관통되었다.

    "큭."

    전신을 타고 흐르는 짜릿한 고통에 이지혁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혈기의 갑옷이 대부분의 공격을 막아내고는 있지만, 모든 공격을 완벽히 막아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마족화가 되며 강화된 그의 육체는 이 정도의 공격으로 상처를 입지는 않지만, 고통까지 막아낼 수는 없었다.

    "이!"

    저열한 것들에게 공격을 당한 이지혁의 분노가 하늘을 찔렀다.

    이지혁이 우수를 들어 올려 그대로 내리그었다.

    스읏.

    파열음이랄 것도 없었다.

    그의 손짓은 마치 절대의 명령과도 같았다. 그저 손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그었을 뿐인데, 세상이 갈라지고 있었다.

    "뭐……."

    달려들던 마왕들이 기겁을 하여 분분히 좌우로 산개했다.

    우르르르르르르릉!

    하늘이 갈라진다.

    땅이 갈라진다.

    단 일 수에 바닥에 거대한 절벽이 생겨났다.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고 깊은 골짜기가 지평선 너머까지 펼쳐지고 있었다.

    "……."

    할 말을 잃은 마왕들이 아연한 얼굴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이건 살아 있는 존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신의 영역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정신 차려!"

    바르바체가 소리쳤다.

    "물러서지 마라! 망설이는 순간 죽는다. 위협이 아니야! 현실이다!"

    바르바체는 상황을 냉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이지혁과 원거리전을 벌인다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그가 한낱 마왕이었을 때도 그와 원거리에서 마법으로 맞붙을 수 있는 이들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전부 다 달려들어도 상대가 안 돼.'

    거리를 줘서는 안 된다. 이지혁이 아무리 다른 힘을 손에 넣었다고 한들 그는 기본적으로 캐스터다. 마법사를 상대로는 거리를 좁히는 것이 모든 전투의 기본이었다.

    다른 마왕들도 그 사실을 깨달았는지 지체 없이 이지혁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이지혁은 그 광경을 보며 나직하게 웃었다.

    "으아아아아! 이지혁!"

    가장 앞에서 쇄도한 마왕의 손에서 길게 자라난 클로가 그의 배를 꿰뚫어왔다.

    "큭큭큭큭."

    까드드득.

    이지혁이 날아드는 클로를 손으로 움켜잡았다.

    다이아몬드라 할지라도 무딘 찰흙처럼 갈라 버릴 수 있는 날카로운 클로가 이지혁의 손에는 생채기 하나도 내지 못했다.

    "뭔가 할 수 있다고 생각했나?"

    이지혁의 눈을 들여다본 마왕은 자신의 전신이 뱀을 본 쥐처럼 굳어버리는 것을 느꼈다. 다른 감정은 일체 없이 분노로만 이글거리는 그 눈은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을 굳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우드드득!

    "크아아아아아아!"

    팔이 꺾인다.

    완력으로 마왕의 팔을 뒤틀어 버린 이지혁이 손에 잡은 클로를 끌어당겨 마왕의 목에 틀어박았다.

    푸우우웃!

    푸른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온다.

    딱!

    이지혁이 손가락을 튕기자 마왕의 전신이 발화하기 시작했다. 검고 붉은 불길이 순식간에 피어올라 마왕의 전신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크윽!"

    육체에 불이 붙은 마왕이 뒤로 물러났다.

    '어설퍼!'

    이 정도로 마족은 죽지 않는다. 마왕 역시 당연히 죽지 않는다. 고작 목에 구멍이 뚫리고 몸이 불탄다고 해서 죽는다면 마왕이라 불릴 자격이 없었다.

    그래도 이 정도…….

    "으으?"

    그 순간, 마왕은 자신의 몸에 일어난 이변을 눈치챘다.

    '꺼지지 않아?'

    불이 꺼지지 않는다.

    아까부터 마기를 방출하여 불을 날려 버리려 하고 있지만, 불길이 조금도 사그라들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으아아앗!"

    냉기를 만들고 마기를 뿜어낸다. 그럼에도 불꽃은 조금도 사라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기겁을 한 마왕이 본능적으로 바닥을 뒹굴었다.

    "크아아아아악!"

    불꽃이 피부를 녹이기 시작한다.

    마왕의 입장에서는 결코 그리 강하지 않은 열기였다. 하지만 그 열기가 지속되자 피부가 녹아내린다. 그리고 녹아내린 피부 아래의 근육들이 불에 타오르기 시작했다.

    "끄아아아아아!"

    고통.

    언어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이 육체를 지배하고 있었다. 느릿하게 불에 타는 고통은 그 어떤 감정보다 강렬했다. 더구나 이 불꽃은 보통 불이 아니었다.

    마치 영혼이 타오르는 듯한 고통에 마왕이 체면도 잊고 절규했다.

    "사, 살려……."

    이지혁이 애원하는 마왕을 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좀 더 빌어보라고."

    "으으아……."

    "내가 좀 더 즐길 수 있게 말이야."

    악귀처럼 낄낄대며 웃어 제낀 이지혁이 양손에 피처럼 붉은 불꽃을 피워 올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아무도, 아무도 살아남지 못해."

    그것은 선언이자 예언이었다.

    * * *

    변화는 단숨에 시작되었다.

    지금까지 나름 수동적으로 사태를 지켜보고 있던 이지혁이 전광석화처럼 마왕들에게 뛰어들었다.

    "헉!"

    당황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당연한 일이다.

    이지혁은 캐스터. 그는 거리를 벌릴 때 최고의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마법사다. 마법사가 전사나 다름없는 마왕들에게 되레 거리를 좁히며 달려들 것이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당혹은 몸을 굳게 만들었고, 몸이 굳은 대가는 처절했다.

    촤아아악!

    이지혁에 손에 걸린 마왕의 어깻죽지가 그대로 뜯겨 나간다.

    "……."

    어깨가 뜯겨 나가는 그 시점까지도 마왕은 자신에게 벌어진 일이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그만큼이나 이지혁이 육체를 활용하여 공격을 한다는 것이 이들에게는 충격적이었던 것이다.

    이미 과거의 이지혁과는 다른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이지혁을 보아온 시간이 길었기에 아는 것을 체화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크으윽!"

    팔이 뜯겨 나간 자리에서 힘이 쭈욱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아니! 느낌이 아니야!'

    마나가 뽑혀 나간다. 마나라는 것은 유형이자 무형의 존재다. 팔이 끊어져 나간다고 해서 마나가 육체에서 뽑혀 나가는 것은 아니다. 팔 쪽에 머물러 있던 마나가 본원으로 스며들어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이지혁의 손에 뜯겨 나간 팔의 마나는 그에게로 돌아오지 못했다.

    '사라진 건가?'

    아니다.

    희끗한 마나가 이지혁의 몸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 보인다. 보인다기보다는 느껴진다.

    로바엘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건 말이 안 된다.

    지금 현상이 현실이라면, 이지혁은 상대를 상처 입히는 것만으로도 더 강해진다는 소리가 아닌가.

    '괴물.'

    세상에 수많은 마족과 생물들이 존재하지만, 단언컨대 이런 사기적인 존재는 이제껏 단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강렬한 위기감이 찾아왔다.

    '더 강해진다고? 여기서?'

    그 말인즉슨, 이지혁을 여기서 쓰러뜨리지 못하면 다음에는 지금보다 더 강해져 있는 이지혁을 상대해야 한다는 뜻이 아닌가.

    "빌어먹을!"

    로바엘이 뜯겨 나간 팔을 재생시키며 이지혁에게 달려들었다.

    죽여야 한다!

    반드시 여기서!

    하지만 이지혁은 제 목숨까지 반쯤 내놓으며 달려드는 마왕을 보고도 희미하게 웃을 뿐이었다.

    "뭐라고 할까……."

    콰득!

    이지혁의 손이 달려드는 로바엘의 얼굴을 그대로 움켜잡았다.

    콰드드득!

    갑옷처럼 그의 손을 둘러싸고 있는 혈기가 길게 늘어나며 로바엘의 얼굴을 몇 번이고 꿰뚫었다. 얼굴을 꿰뚫린 로바엘이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그 와중에도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마왕의 끈질긴 생명력을 증명해 주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로바엘에게 있어서는 더욱 불행인지도 몰랐다.

    빨려 나간다.

    얼굴에 난 구멍을 통해서 마나가 쭉쭉 빨려 나가고 있었다. 얼마나 강렬하게 마나를 빨아대는지, 몸이 말라붙는 느낌마저 들고 있었다.

    "확실히 마왕은 먹을 게 많아."

    이지혁이 손에 든 로바엘을 살짝 흔들었다. 저항할 힘을 잃은 로바엘의 육체가 힘없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잡몹들은 아무리 빨아들여도 포만감이라는 게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는데, 마왕은 그 질이 다르군."

    낄낄대며 웃는 이지혁을 보며 마왕들은 오싹한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살아생전 처음으로 포식자를 마주하는 것이니까. 단순히 그들보다 강하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저기에 있는 저 생물은 그들을 먹이로 삼고 있었다.

    처음으로 자신들의 목숨이 노려진다는 그 압박감이 마왕들의 심장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뛰게 만들었다.

    "끄으으읍!"

    모든 마력을 빨아들인 이지혁이 깊게 숨을 내쉬더니, 로바엘을 바닥으로 집어 던졌다. 그러자 아직 살아 있는 로바엘의 몸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마력을 모두 빨려 생기가 사라진 로바엘의 몸이 움찔거렸다. 압도적인 고통 때문에 육체에 힘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데도 절로 몸이 뒤틀리고 있는 것이다.

    소름 끼치는 광경이었다.

    마왕들은 인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고통을 잘 버틴다. 그건 종족의 특성이었다. 그런 마왕이 저렇게 허덕일 정도라면 저 불꽃은 대체 얼마나 큰 고통을 준다는 말인가.

    고통이 두려워 싸움을 포기할 마왕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가슴 한구석이 스산해지는 것만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부족하군."

    이지혁이 손을 입가로 가져가 혈기의 갑옷 끝으로 흘러내리는 로바엘의 피를 핥았다.

    "이상한 일이지."

    이지혁이 손끝의 피를 바닥으로 흩뿌리고는 앞으로 걸었다.

    "허기라고 할 만한 걸 느낄 몸은 아닌 것 같은데, 허기가 갈수록 심해져 가니까 말이야."

    이지혁이 목을 우득우득 꺾었다.

    "배가 고프다기보다는…… 뭐라고 해야 할까, 이건 말로는 표현하기가 힘들군. 확실한 건 아무래도 이 굶주림이라는 건 너희를 모조리 죽이기 전에는 풀리지 않을 것 같군."

    이지혁이 낄낄대며 웃었다.

    아니, 저들을 모조리 죽여 흡수한다고 해도 이 굶주림이 사라질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보통 생물이라는 것은 생존과 번식을 목적으로 살아간다. 고등생물로 갈수록 이러한 양상에서 벗어나는 경향을 보이기는 하지만, 기저에는 그 영향이 남아 있기 마련이다.

    하나…….

    이지혁은 자신의 상태를 냉정하게 분석했다.

    그가 인간을 초월했을 때도 느껴지던 삶에 대한 의지가 전혀라고 해도 좋을 만큼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그 자리를 채운 것은 오로지 굶주림뿐이었다.

    기이할 정도로 쏟아지는 분노 속에서 살아 있는 모든 것에 대한 굶주림이 과도할 정도로 위벽을 긁어 대고 있었다.

    "흐으음……."

    이지혁이 낮은 침음을 흘렸다.

    '모두를 죽인다고 해서 풀릴 굶주림이 아니로군.'

    어쩌면 가장 먼저 소환한 존재가 아귀였던 것에도 이유가 있던 모양이다. 지금 그는 아귀와 다를 바가 없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저 배를 채우면 그만인 아귀와는 다르게 그는 더 많은 것을 원한다는 정도일까.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뭔가가 흐려지는 느낌이다. 조금 전까지는 그래도 이들을 농락한다는 즐거움이 그를 가득 채우고 있었는데, 가면 갈수록 즐거움은 사라지고 갈증만이 남았다.

    그도 알지 못하는 본능이 이성을 밀어내는 느낌.

    뭔가 이상해지고 있는 건지, 아니면 이게 정상인 건지는 그도 알지 못했다. 일반적으로 정상이라고 하는 것은 비교 대상이 필요하다. 동일한 종족들이 일반적으로 하는 행동일 때, 정상이라는 말이 성립한다.

    하나 그는 마족이며 또한 인간이다. 그리고 마족이 아니며, 또한 인간도 아니다. 중간자이자 지금껏 단 한 번도 나타난 적 없는 생물이었다.

    확신하건대, 이전에 인간의 몸으로 마족이 된 몇몇과 이지혁은 전혀 다른 존재일 것이다. 그게 이지혁이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상태에서 마족화가 이루어졌기 때문인지, 아니면 차원을 넘어 다닌 영향이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진짜 이레귤러가 되어버렸군."

    이지혁이 자조하듯 웃었다.

    이전에도 때때로 스스로를 돌연변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지만, 그것과 이건 달랐다. 그는 이레귤러였으되, 그래도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은 유지하고 있었다.

    특이하고 다른 인간인 것과 인간이 아닌 것의 차이가 적을 리 없다.

    하나 딱히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되레 얼마 전까지 스스로 인간임에 집착하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우스운 일이다.

    신과 같은 힘을 손에 넣은 주제에 종족에 집착한다는 것은 얼마나 무의미한 일인가. 그가 인간이면 어떻고, 인간이 아니면 어떤가. 결국 그라는 존재는 인간과 어울릴 수 없는데.

    '어울릴 마음도 없지만 말이야.'

    지금은 그저 충동을 따를 때였다.

    이런 기분은 누구도 느껴보지 못했을 것이다.

    뭐라고 해야 할까.

    해방감? 아니면 전율?

    인간일 때 그에게는 한계라는 것이 존재했다. 그가 아무리 강해진다고 해도 인간이 가진 본연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힘이 강한 것과는 별개의 문제다.

    설사 그가 신과 같은 힘을 손에 넣는다고 해도 그는 인간이다. 숨을 쉬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고, 먹지 않으면 힘을 쓸 수 없다. 불멸의 존재였을 때는 그러한 페널티를 버텨낸 것뿐이지, 결코 이겨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다르다.

    뭐든 할 수 있다.

    지금 당장 할 수 없는 것도 강해지고 또 강해지면 해낼 수 있다. 인간이란 종족이 가지고 있는 천형과도 같은 리미터를 완전히 벗어나 버린 것이다.

    그 압도적인 해방감 앞에 이지혁은 전율하고 있었다.

    "이런 거지."

    우우우웅!

    이지혁의 주변을 유영하듯 노닐던 정령들이 몸을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녀들의 눈에 공포가 어리기 시작했다. 정령과 계약하거나 그녀들을 타일러 활용하는 것이 아니었다. 힘으로 정령을 짓밟고 억누른다.

    [아아아아아아아아!]

    고통을 이기지 못한 정령들이 사방으로 마구 빔을 발출했다. 붉은 빛줄기들이 마치 레이저 쇼라도 하듯이 주변으로 쏘아졌다.

    그리고 이지혁은 돌진을 시작했다.

    파티를 시작하듯이 말이다.

    검붉은 혈기의 갑주로 전신을 감싸고 등 뒤로 이글거리는 화염의 날개를 펼친 이지혁이 광속으로 돌진한다.

    천하의 마왕들이 움찔하며 분분히 뒤로 물러난다. 하지만 그들이 물러나는 속도보다 이지혁이 달려드는 속도가 몇 배는 더 빨랐다.

    "흐윽!"

    가장 앞에 있던 마왕이 달려드는 이지혁을 보고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두 눈에 붉은 정광을 줄줄이 내뿜으며 달려드는 이지혁의 모습은 제아무리 마왕이라도 공포심을 느낄 만한 것이었다.

    "으아아!"

    3m는 넘게 돋아난 긴 손톱이 이지혁의 몸을 베었다.

    하나 그뿐.

    까가강!

    이지혁의 갑주에 부딪친 마왕의 클로가 마치 수수깡처럼 부러져 나갔다. 마기를 응축하고 또 응축하여 만들어낸 클로가 이지혁의 갑옷을 상대로는 전혀 힘을 쓰지 못하는 것이다.

    드래곤의 비늘마저 종잇장처럼 찢어내는 손톱이 부러져 나가는 것을 본 마왕의 심정은 어떨까.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생각할 틈이 없을 테니까.

    손톱을 부순 이지혁이 손을 뻗어 마왕의 머리를 움켜잡았다. 조금 전, 로바엘이 어떻게 죽었는가를 그 두 눈으로 똑똑히 본 마왕이 격렬하게 몸을 뒤틀었지만, 이지혁의 손은 석상이라도 된 듯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마왕은 꽤나 운이 좋았다.

    콰드득!

    이지혁이 손을 움켜잡아 그의 머리를 그대로 부숴 버렸다.

    털썩!

    바닥에 떨어진 마왕의 몸에서 마기가 흘러나와 이지혁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낄낄낄낄."

    이지혁이 유쾌하다는 듯이 웃으며 몸을 허공으로 띄워 올렸다.

    "막아야지. 그렇지 않다면 죽을 테니까 말이야. 재미없게 굴지 말고 바짓가랑이라도 물고 늘어져 보란 말이다, 쓰레기들아."

    고오오오오오오오!

    붉은 혈기가 이지혁의 몸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온다?'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거대한 것이 온다는 느낌을 받은 바르바체가 이를 악물었다.

    광소를 터뜨리는 이지혁의 모습이 바르바체의 눈으로 아프게 파고들었다.

    * * *

    "…빌어먹을."

    이지혁의 전력을 살피고 있던 최정훈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안 보인다.

    아무리 봐도 약점이라는 게 보이지 않았다.

    '생각해 본 적은 있었지.'

    직업병이라고 해야 할까?

    처음 만났을 때는 이지혁이라는 사람을 완전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의 능력적인 면은 자신들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거대했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성격이 불안함을 증폭시켰다.

    그렇기에 몇 번이고 시뮬레이션을 해봤다.

    이지혁이 만약 인류를 적대하고 돌아선다면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가.

    그리고 결론은 간단했다.

    의외로 이지혁을 잡아내는 방법은 수도 없이 많았다.

    이지혁은 가지고 있는 화력에 비해 그 방어력이 극단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약했다. 그의 주변에 접근만 할 수 있다면 언제든 쓰러뜨릴 수 있는 이가 이지혁이었다.

    과거 이지혁이 상대한 마왕들도 그러한 점을 고려했다면 이지혁이 그들을 쓰러뜨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일례로 이지혁은 이미 박성찬의 일격에 쓰러진 적이 있지 않은가.

    굳이 접근을 할 필요도 없다.

    이지혁을 상대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대단위 마법이나 능력자가 아니다. 적당한 거리에서 대물저격총을 열 정만 배치해도 이지혁은 순식간에 벌집이 되고 말 것이다.

    마왕이나 몬스터를 상대한다면 전혀 의미가 없는 방법이겠지만, 이지혁을 상대로 할 때만은 그 효과를 자신할 수 있었다. 이지혁은 결국 인간이니까.

    하지만 지금의 이지혁은 인간이 아니었다.

    약점이 없어서 강한 것이 아니다. 강점이 극단적일 만큼 뛰어나기에 강한 것이다. 그런 이지혁이 지금 자신의 약점을 강점으로 바꾸어 버렸다.

    맨몸으로 마왕들의 공격을 받아내고, 맨손으로 마왕을 잡아 찢는다.

    방어력과 근접 공격력이라는 두 가지 약점을 극복한 이지혁을 표현하는 데 완전 무결이라는 말 외에는 들이댈 단어가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최정훈의 머리가 팽팽하게 돌아갔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저 이지혁을 상대할 수 있을 만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범 인류의 수뇌가 모두 모였다는 이곳에서조차 이지혁을 상대할 방법은 나오지 않고 있었다. 최정훈만이 아니다. 모두가 입에 접착제라도 바른 듯이 입을 다물고 침통한 얼굴로 이지혁이 날뛰는 것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절망, 그리고 좌절이었다.

    "…또 뭘 하려는 거지?"

    이지혁이 허공으로 몸을 띄워 올리는 것을 본 최정훈이 주먹을 꽉 움켜잡았다. 과거의 이지혁이 어느 정도 패턴이 예상된 것에 비해 지금의 이지혁은 대체 무슨 행동을 할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불가능해요."

    그리고 그의 마음을 아는지 아펠드리체가 나직하게 말했다.

    "지금의 그는 누가와도 막을 수 없어요."

    "마왕들조차 말입니까?"

    "바르바체의 힘은 제가 짐작할 수 없는 수준이에요. 하나 아무리 그라고 해도 저자를 막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아요. 그건 바르바체 본인이 제일 잘 알고 있는 것 같네요."

    최정훈이 눈을 찌푸리고 바르바체를 바라보았다.

    멀어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먼 거리에서조차 그 여유와 품격이 느껴지던 바르바체에게서 쫓김이 느껴졌다.

    "…확실히."

    최정훈이 긍정하자 아펠드리체가 말을 이었다.

    "라트렐께서 괜히 저 사람을 경계한 것이 아니에요. 그분은 그때부터 알고 계셨던 거죠.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걸 말이에요."

    "라트렐이라면… 당신들의 신 말입니까?"

    "예."

    "그는… 아니, 당신들의 신은 저 사람을 막을 수 없습니까?"

    "그게 가능했다면 저 사람을 이 세상으로 보내지도 않았겠죠. 당신들이 생각하는 전지전능한 신과 같은 개념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신에게도 한계가 있어요. 라트렐은 모든 것을 주관하지만, 파괴를 할 수는 없어요. 현실에 직접 관여할 수도 없죠."

    "아……."

    "그런 그분에게 타 세계에서 넘어와 베라프의 인과에 속하지 않는 이지혁은 껄끄럽기 짝이 없는 존재였겠죠. 지금까지는 저도 그리 생각했어요. 하지만……."

    아펠드리체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한때, 라트렐이 이지혁에게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을 가진 때가 있었다. 실제로 한낱 인간으로서는 결코 버틸 수 없는 고통을 이지혁에게 부여한 것은 라트렐이나 다름없었다.

    라트렐의 피조물로서 그녀의 의지에 결코 의문을 품어서는 안 되는 아펠드리체조차 어째서 선한 의지 그 자체인 라트렐이 이지혁에게만 이토록이나 가혹한 것인가 의아했을 정도로 말이다.

    하나 라트렐이 틀린 것이 아니었다.

    '알고 계셨던 거였어.'

    인과가 흐르고 흐르면 언젠가 이 순간이 온다는 것을 라트렐은 알고 있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어떻게든 이지혁을 베라프에 묶어두려고 했고, 그녀가 아끼는 자신의 피조물들까지 이 지구로 보내가며 어떻게든 이 상황을 막으려 한 것이다.

    '멸망의 좌.'

    더없이 어울리는 말이었다.

    지금의 이지혁은 세상에 멸망을 고하러 내려온 파괴의 화신 같은 모습이었으니까.

    고오오오오오!

    이지혁의 주변으로 붉은 혈기가 모여들었다. 아홉 개의 용권이 방향을 틀고는 이지혁에게 빨려 들어간다. 하늘을 뒤덮고 있는 먹구름마저 이지혁에게 빨려 들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수십 줄기의 붉고 검은 기류들이 이지혁을 중심으로 펼쳐진 것 같았다.

    그와 동시에 이지혁의 등 뒤에서 불타고 있던 날개가 더욱더 강렬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언밸런스할 정도로 거대해진 날개는 핏빛으로 날름거리고 있었다.

    파괴신의 혓바닥처럼 요사하게 흔들리던 불꽃의 날개가 일순 쑥 하고 줄어든다.

    "아아……."

    최정훈이 몸을 떨었다.

    물러날 수도 없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느낄 수는 있다. 지금 이지혁에게 모여드는 힘이 얼마나 거대한 것인지. 세상을 부숴 버릴 것 같은 힘이 저 작은 몸으로 모여들고 있는 것이다.

    감고 있던 이지혁의 눈이 떠졌다.

    그의 눈에서 붉은 섬광이 번쩍 빛난다고 느낀 순간, 이지혁이 양손을 들어 올렸다.

    전율.

    과도하다고 해도 좋을 만큼 모여든 힘이 약동하는 것이 피부로 느껴진다.

    최정훈은 알 수 있었다.

    이 기분이 무엇인지.

    이건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눈앞에서 지켜보는 것과도 같았다. 그의 육체는 감당할 수 없는 힘 앞에 벌벌 떨고 있지만, 정신은 기묘한 이질감을 느끼고 있다.

    마치 이인증라도 걸린 것처럼 또 다른 내가 나의 육체를 관망하는 듯한 느낌.

    그 기묘한 느낌 앞에 최정훈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그것'이 시작되었다.

    이지혁이 들어 올린 손을 천천히 앞으로 내밀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인간의 기준으로 보아도 너무 느려서 숨이 넘어갈 정도로 느릿한 손길이었으니, 그것을 보고 있는 마족들이의 긴장감이야 오죽할 것인가.

    뻗어진 손끝에서 흘러나온 것은 작은 불덩어리였다.

    '아니야.'

    불이 아니다.

    나온 것은 아주 작은 구슬 같은 것이었다.

    흘러나온 피를 꾹꾹 뭉쳐 빚은 듯한 핏빛의 구슬 말이다.

    조금의 당혹감.

    그리고 황당함.

    거창하기 짝이 없던 준비에 비해서 나온 결과물은 기묘하리만큼 작았다.

    "…뭐지?"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확인하려는 순간, 격한 떨림이 느껴졌다.

    "응?"

    고개를 돌린 최정훈의 눈이 크게 떠졌다. 아펠드리체의 얼굴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물러서……."

    "네?"

    "물러서요!"

    그건 비명이었다.

    단 한 번도 당황한 모습을 보이지 않던 아펠드리체가 얼굴이 파랗게 질린 채 비명을 지르는 모습은 최정훈의 심장을 덜컥하게 만들었다. 지금 뭔가 어마어마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텔레포터! 당장!"

    "어, 어디로?"

    "뒤로! 멀어질 수 있는 곳이면 어디라도! 이곳에서 최대한 멀어져요!"

    말을 끝내자마자 아펠드리체는 최정훈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소리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베라프 인들은 되묻지도 않고 격한 반응을 보이며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래. 그녀는 로드였지.'

    아무리 그녀가 드래곤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했다고는 하나 그녀는 드래곤 로드. 그 어떤 드래곤보다 발언력이 높은 베라프의 대표 중 하나였다.

    스스로 아펠드리체를 매우 존중한다고 생각해 온 최정훈이지만, 베라프 인들은 그 이상으로 아펠드리체를 존중하고 있던 것이다.

    "당장!"

    다른 생각을 할 틈도 없이 아펠드리체가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질렀다.

    우우우우우웅!

    베라프인들의 대처는 빨랐다. 곳곳에서 텔레포트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어디로?'

    그리 멀지 않은 곳.

    짧게는 수백 미터부터 길게는 수킬로미터까지 아주 짧은 거리로 대단위 전송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더 먼 거리를 이동하는 것도 가능할 테지만,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이들을 옮겨야 하기 때문인지 이동 거리는 짧기 그지없었다.

    최정훈이 스마트워치에 입을 대고 소리쳤다.

    "이쪽으로 텔레포터! 지금 당장!"

    긴 명령은 필요 없었다.

    긴장한 채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것은 그들만이 아니었으니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의 주변으로 텔레포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뒤쪽으로!"

    최정훈이 뒤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당장! 모두 데리고 갈 수 있는 거리만큼! 어서!"

    텔레포터들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으로 달려 나가 자신들이 감당할 수 있는 수만큼의 능력자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설명도 필요 없었다.

    최정훈의 다급한 모습을 본 능력자들은 묻지도 않고 텔레포트에 응했다.

    그들도 알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이곳에서 뭔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방금 전 그들이 느낀, 그 말도 안 되는 힘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지는 않았다는 걸 말이다.

    정해민이 최정훈과 서아영들의 손을 잡고는 주변 사람들과 함께 텔레포트를 시전했다.

    불과 1킬로미터.

    한 사람을 피해 달아난다고 하기에는 터무니없이 먼 거리이지만, 최정훈은 그 거리마저 가깝게만 느껴졌다.

    '여기가 한계인가?'

    텔레포터를 키워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들은 비전투 요원이었으니까. 그러다 보니 현존하는 텔레포터들에 비해 지금 이곳에서 활용할 수 있는 텔레포터의 수는 극단적으로 적었다. 모두가 온다고 해도 이곳에 있는 이들을 다 옮기지는 못할진대, 눈앞의 수로는 빤한 일이었다.

    탈진해서 그 자리에 주저앉은 정해민을 보며 최정훈이 이를 꽉 깨물었다.

    "실드! 지금 당장!"

    아펠드리체가 상황을 주관하듯 소리쳤다.

    방어막을 시전할 수 있는 이들은 모조리 방어막을 펼쳤다.

    "할 게 없는 사람들은 뭐라도 붙잡아요! 어서!"

    '붙잡으라고?'

    이게 무슨 말인가? 붙잡으라니?

    어째서?

    의문은 곧 풀렸다.

    휘이이잉.

    '바람?'

    바람이 불어온다.

    천천히 불어오기 시작한 바람은 이내 점점 거세어지기 시작했다.

    "아……."

    최정훈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리기 시작했다.

    '서, 설마?'

    미풍은 강풍이 되었고, 이내 폭풍이 되었다.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거대한 압력의 바람이 그들의 등 뒤쪽에서부터 앞으로, 앞으로 불어오고 있었다.

    "크흡!"

    바람은 순식간에 호흡이 불가능할 지경으로 거세어졌다. 눈을 뜨는 것만으로도 안구가 찢어져 나갈 것 같은 격한 바람 속에서도 최정훈은 결코 눈을 감지 않았다.

    아니, 감을 수가 없었다.

    빨려 들어간다.

    세상 모든 것이 이지혁이 만들어낸 작은 구슬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마치 블랙홀처럼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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