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111화 (111/118)
  • [■] 가짜가 진짜를 따라 할 수는 없는 법이지 [■]

    ─────

    "저게 뭐지?"

    겉에서 본 광경은 괴이하기 짝이 없었다. 최정훈은 어느 순간 그의 앞을 완전히 차단하다시피 하며 나타난 거대한 붉은 벽 앞에 넋을 놓고 말았다.

    '아니야.'

    벽이 아니다.

    저건 돔이다.

    너무 거대해서 곡면이 곡면으로 느껴지지 않고, 벽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거대한 돔.

    거대하기 짝이 없는 돔이 그들의 앞에 있던 마왕과 마수들을 모두 뒤덮어 버린 것이다. 마치 이 세상에서 유리시키듯이 말이다.

    '기억에 있어.'

    비슷한 광경을 본 적이 있다. 과거 좀비 드래곤과 싸우던 당시에 이지혁은 흑마력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돔을 만들어내 안에 있던 존재들을 완벽하게 지워 버렸다.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돔에 뒤덮인 이들이 어느 순간 사라졌다는 것만은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곳에서 그와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스케일이 다르다.

    그리고 그때의 불온한 느낌을 주던 짙디짙은 검은 돔과는 달리, 선연한 붉은빛으로 빛나는 지금의 돔은 불온하다기보다는 섬뜩하기 짝이 없었다.

    보고 있는 이의 영혼까지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불길하고 섬뜩한 모습이었다.

    '저 안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지?'

    최정훈은 두 눈을 부릅떴다.

    봐야 한다.

    그는 이 상황을 모두 지켜볼 의무가 있었다. 최후의 전쟁이 역사에 그 이름을 남길지는 아직 알 수 없는 일이지만, 혹여 이 모든 광경이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못하더라도 그는 지켜봐야 한다.

    설사 이것이 인류와 마족의, 이지혁과 마왕들의 싸움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이 싸움이 인류의 향방을 결정한다는 사실은 달라질 게 없었다.

    그렇다면 두 눈을 부릅뜨고 지켜봐야 한다.

    "너무……."

    서아영이 눈앞에 생겨난 붉은 벽을 보며 전율했다.

    "너무 거대해."

    크기를 말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 형질은 이제껏 그들이 알고 있던 마나나 에테르와는 다르지만, 저 붉은 벽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이제껏 그들이 알고 있던 힘이라는 것과는 너무나 달랐다.

    차원을 달리하는 밀도 높은 기운이 느껴진다. 대체 저것에 어찌 저항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최정훈 씨……."

    "네."

    "혹시 이지혁… 아니, 저 이지혁 씨의 모습을 한 놈이 이긴다면 말이에요……."

    "예."

    "우리가 저 사람과 싸워야 하는 거예요?"

    최정훈은 대답하지 않았다.

    굳이 대답이 필요하지 않은 말이다. 서아영도 대답을 원하고 한 말은 아닐 테니까.

    하지만 이 말만은 해야 했다.

    "굳이 한쪽과 싸워서 결판을 내야 한다면, 그 상대가 마족인 것보다는 저자인 쪽이 낫겠죠. 마족 놈들에게 이 세상을 넘겨주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서아영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떨리는 눈으로 마치 세상의 마지막을 종언하는 듯한 거대한 붉은 벽을 바라보았다.

    * * *

    무언가 있다.

    인간과는 비교되지 않는 마족의 감각이 그것을 캐치해 내고 있었다.

    하지만 어디서?

    이 붉은 막이 그들을 뒤덮었다고는 하지만, 그전까지는 다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안에서는 게이트가 열린 기척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그들이 아닌 다른 존재가 느껴진다.

    '뭐지?'

    칼라이제는 격하게 고개를 좌우로 틀었다.

    기묘하다.

    이 감각은 기묘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무언가 존재한다는 것은 느껴지는데, 그 '무엇'이 뭔지 알 수가 없었다. 반쯤은 느껴지는데 반쯤은 느껴지지 않는, 그런 감각.

    생명이되 생명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게……."

    칼라이제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느껴진다.

    앞에서, 옆에서, 머리 위에서, 그리고 발밑에서…….

    무언가가.

    마족인 그가 느끼기에도 음산하기 짝이 없는 무언가가 슬금슬금 나타나고 있었다.

    '벽면?'

    칼라이제의 고개가 정신없이 주변을 훑었다.

    그들을 감싸고 있는 거대한 막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오고 있었다.

    이형의 무언가가 말이다.

    "이지혁……."

    칼라이제가 신음을 흘렸다.

    그제야 칼라이제는 실감할 수 있었다.

    이지혁은 인간이다.

    인간임에도 이지혁은 마법과 마나의 일대 종사에 오른 인물이었다. 그런 이가 마족이 되는 순간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이해도가 높아진다는 것은 단순히 강해진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건 지금까지 그가 가지고 있던 이론과 현실을 완전히 재해석하고 재배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축구 경기를 보는 사람은 모두가 답답함을 느낀다.

    경기장에서 뛰는 선수들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당연히 움직여야 할 곳으로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이들은 보통은 한 가지를 간과하기 마련이다.

    지켜보는 이들은 머리 위에서 모든 것을 관조하지만, 경기에 뛰는 이들은 위가 아닌 아래에서 주변을 바라보게 된다.

    위에서 볼 때는 너무도 잘 보이는 빈 공간이 경기장 안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아마 지금 이지혁은 살아생전 처음으로 머리 위에서 경기장을 보고 있는 것이다.

    마나에 대한, 그리고 마법에 대한 이해도는 극한에 오른 이지혁이지만, 단 한 번도 마족급으로 마나를 이해해 본 적은 없다. 이론으로 알고 몸으로 체화했다고는 해도 기운 자체를 느끼는 감각이 다른 것이다.

    장님이 아무리 그림을 공부한다고 해도 눈으로 그 색감을 느끼고 볼 수 있는 이들과는 그 이해도가 다를 수밖에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지금 이지혁은 눈을 떴다.

    아마도 세상이 달라 보일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가 알고 있던 모든 지식이 해체되고 다시 재정립되기 시작한다.

    이지혁이 단순히 마족이 되었기 때문에 더 강한 것이 아니었다.

    장님임에도 그림에 대한 이해도가 다른 이들을 능가한 그 이지혁이 지금 눈을 뜨고 세상을 그 두 눈으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이 파급력이 얼마나 거대한 것인지를 생각해 본다면…….

    칼라이제가 기겁을 한 눈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예상할 수가 없다.'

    이지혁이 대체 어디까지 가버렸는지 그들로서도 상상할 수 없었다. 물론 그들에게는 바르바체라는 거대한 산이 있으니 일방적으로 밀리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이지혁은 과거의 바르바체에게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던 것이다.

    그리고 칼라이제는 볼 수 있었다.

    이지혁이 어디까지 가버렸는지.

    전혀 상상하지 못한 형태로 말이다.

    카르르르르르.

    끼에에에에에에에.

    그것은 마치 유부에서 흘러나오는 짐승의 울부짖음 같았다. 마수들과는 다르다. 마수들이 내뱉는 위협성과는 달랐다. 그건 마치 영혼을 쥐어짜 내는 소리 같았다.

    소리가 들려온다.

    머리 위에서.

    옆에서, 앞에서, 그리고 뒤에서…….

    게다가 발밑에서까지.

    마치 비명에 포위된 것 같았다.

    '대체 뭐냐?'

    수많은 세월을 살아온 칼라이제이지만, 이런 것은 듣도 보도 못했다.

    마기를 마치 힘처럼 사용하는 그들과 마법사로서 그들의 위치를 능가해 버린 이지혁이 가지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는 하지만…….

    '그 어떤 마도사도 이런 짓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어.'

    그 힘의 수준을 논하기 전에 저 미친 머리 안에 대체 무슨 생각이 들어 있는지를 확인해 보고 싶은 심경이었다.

    하지만 칼라이제에게는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이지혁에게 신경을 쓸 수 없었으니까.

    크아아아아아아아!

    비명이 점점 짙어진다 싶더니, 무언가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꿈틀댄다고 생각했다.

    처음 그가 발견한 것은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붉디붉은 벽면이 살짝 일렁이는 것 같다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안력을 집중한 칼라이제는 그가 본 것이 벽이 일렁이는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나 벽이 움직인 것은 사실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벽이 요동을 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벽을 통해 무언가가 튀어나오고 있었다.

    '뭐냐?'

    이형이다.

    그리 말할 수밖에 없었다.

    마계의 기괴한 마수들조차 강아지처럼 귀여워할 수 있는 칼라이제가 보기에도 끔찍하기 짝이 없는,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과도한 불쾌감이 몰려올 정도로 끔찍한 형태의 무언가들이 붉은 벽면을 통해 튀어 나오고 있었다.

    짧은 팔다리를 마구 뒤흔들며 입으로는 붉은 침을 줄줄이 흘리며 뒤흔들고 요동치는 것들…….

    느껴지는 것은 절박함, 갈증, 그리고 극도의 굶주림.

    아귀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그것들이 벽에 반쯤 끼어버린 형태로 발악을 해 대고 있었다.

    "이게 대체……."

    세상에는 수많은 차원이 있고, 그 차원들 속에는 그들이 알지 못하는 존재들도 수도 없이 많다. 지금 그들이 지구라는 세상을 침공하고 있기는 하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런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알지 못했으니까.

    그렇기에 세상 모든 존재들을 알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저런 존재들이 있을 것이라고는 예측하지 못했다.

    기괴하다.

    그리고 끔찍하다.

    마족인 그가 보기에도 지금 그의 눈에 보이는 생물들은… 아니, 저 생물이라도 할 수 없는 유기체들은 혐오감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문제는 저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아귀들이 세상에 가득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의 주변을 둘러싼 돔의 벽을 타고 아귀들이 미친 듯이 뚫고 나오고 있었다. 더러운 침을 줄줄 흘리고, 악다구니를 쓰며 말이다.

    "이익!"

    분노와 동시에 오기가 치밀어 오른다.

    저딴 하등 생물 따위를 순간적으로나마 두려워했다는 것이 그를…….

    그 순간, 칼라이제의 몸이 살짝 흔들렸다.

    느꼈다.

    그건 보았다기보다는 느꼈다는 말이 정확했다. 칼라이제는 이 순간 변화를 느끼고 있었다. 눈으로 판별하기는 쉽지 않다. 그들의 주변을 감싸고 있는 막은 너무도 거대했으니까.

    하지만…….

    느껴진다.

    지금 분명 저 막이 좁아졌다.

    '설마?'

    다가온다.

    아귀가 가득 차 이제는 '우글거린다'는 표현을 넘어 파도처럼 일렁이고 있는 붉은 벽들이 천천히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짙어진다.

    "이 개 같은……."

    막의 안쪽을 희미하게 채우고 있던 붉은 기운들이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강해진다기보다는 짙어지고 있었다. 주변이 마치 붉은 진흙으로 가득 채워지는 것처럼 말이다.

    시야를 앗아가고, 촉감을 앗아간다.

    들리는 것은 악다구니를 쓰는 아귀들의 울부짖음뿐이었다.

    그 순간.

    칼라이제는 공포라는 감정을 제대로 실감할 수 있었다. 공포라는 것은 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미지의 무언가에 대한 존재하지 않는 대처에서 나온다는 것을 말이다.

    "으아아아아아!"

    칼라이제가 사방으로 마기를 줄기줄기 뿜어내며 소리쳤다.

    "이지혀어어어어어어억!"

    아귀와 죽음, 굶주림이 가득한 공간 아래서 학살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물어뜯고, 씹어 먹는 죽음의 축제.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지혁이 이 세상을 지배하는 신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 신의 의지에 따라 붉은 기운이 가득한 공간으로 벽의 억제에서 풀려난 아귀들이 기괴하게 몸을 뒤틀며 달려들기 시작했다.

    카라라라라라락!

    기이한 울부짖음이 고통스레 울려 퍼졌다.

    * * *

    그건 뭐라 말할 수 없는 생물이었다. 미꾸라지 같기도 하고, 뱀 같기도 한 길쭉한 생물체에 수많은 팔다리를 달아놓은 것 같았다.

    아니, 생물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 어떤 학자나 그 어떤 사람을 가져다놓는다 하더라도 저것을 생물이라 부르지는 못할 것이다.

    생물을 생물이라 정의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는 '살아 숨 쉬는가'가 아니라 그것이 '정형성을 가지고 있는가'가 될 테니까.

    일단 그 팔다리라는 것이 수십 개가 붙어 있는데, 그 팔과 다리가 불규칙하게 붙어 있다는 것만 해도 저건 생물이라 부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머리.

    그 육체에 비해서 기괴할 정도로 큰데다 머리의 8할을 입이 차지하고 있다면 당신은 그것을 생물이라 부를 것인가.

    저건 생물이 아니었다.

    아귀.

    말 그대로 아귀.

    굶주림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그 무언가였다.

    그 아귀들이 벽을 뚫고 나온다.

    마치 알이 부화하듯이, 벽에 달라붙어 있던 수많은 알들이 일제히 부화하는 것처럼 벽을 꿰뚫고 아귀들이 현실로 쏟아졌다.

    이곳이 현실이라면 말이다.

    "하찮은 짓을!"

    아귀들의 끔찍한 모양새에 일순 기세를 빼앗기기는 했지만, 그는 마계의 고고한 마왕이다. 저런 잡스러운 것들에게 당할 존재는 아니었다.

    하나 모두가 마왕인 것은 아니었다.

    카아아아악!

    끔찍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마수들은 달려드는 아귀들을 감당하지 못했다. 물론 그들 하나하나는 아귀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할 것이다.

    하지만 아귀들은 그 게걸스러움과 집요함에 있어서만큼은 마수들조차 순한 짐승으로 만들어 버릴 정도로 독랄했다.

    짧은 팔다리를 쉬지 않고 놀려 가공할 속도로 달려든 아귀들이 허공으로 튀어오르듯 날아댄다. 그러고는 마수들의 육체에 들쑥날쑥 제멋대로 돋아난 이빨을 틀어박고는 씹어 댄다.

    피 한 방울, 살점 한 조각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말이다.

    물론 마수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그들 역시 달려드는 아귀들을 짓밟고 후려쳤다.

    하지만 끝이 없다.

    아귀들은 몸이 터져 나가고, 허리가 끊겨 나가도 틀어박은 입을 쉬지 않고 씹어 댔다. 마치 살점 하나를 더 뜯어먹는 것이 자신의 죽음보다 중요하다는 듯이 말이다.

    마수 하나가 수십의 아귀를 짓밟고 터뜨렸지만, 더 많은 아귀가 달려들었다. 하나의 아귀를 잡아 죽일 때마다 살점이 움푹 움푹 파여 나가자, 버티지 못한 마수들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리고 곧 파티가 시작되었다.

    쓰러진 마수를 아귀들이 닥치는 대로 물어뜯기 시작했다. 코끼리보다 거대한 마수의 동체가 갈가리 찢겨 나가고 있음에도 피 한 방울도 바닥에 흐르지 않았다. 게걸스러운 아귀들은 마수들의 세포 한 점 남기지 않고 모조리 물어뜯었다.

    곳곳에서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아귀들은 마치 파도처럼 밀려왔다. 마치 꿈틀대는 벌레 같은 아귀들이 구불대며 몰려드는 모습은 인간이 아니라 해도 끔찍하게 느낄 수밖에 없는 광경이었다.

    그 모습만으로도 끔찍하기 짝이 없는데, 달려드는 것들이 굶주림에 가득 찬 아귀이다 보니, 결코 두려움을 모르는 마수들마저 주춤주춤 물러날 정도였다.

    언제나 위에는 위가 있기 마련이니까.

    '이게 가능한 일인가?'

    칼라이제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이지혁이 아무리 강해졌다고는 하나 다른 차원의 존재들을 이토록 손쉽게 자신의 수족처럼 활용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전능(全能)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바르바체조차 이런 일은 하지 못한다.

    그럼 그의 권능이 바르바체를 능가했다는 말인가.

    칼라이제는 감히 평가할 수 없었다.

    사용할 수 있는 능력과 그 힘의 방향이 다르다고 이유를 가져다 붙이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리고 그건 그리 틀린 말도 아니었다.

    소환사라고도 분류할 수 있는 이지혁에 비한다면, 바르바체는 전사라고 불러야 할 테니까. 이러한 일을 할 수 있는가가 둘 중 누가 강한가를 결정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렇다고는 해도.'

    어마어마하다.

    이 광경을 눈으로 보지 못한 이들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세상이 온통 아귀들과 짙은 운무로 뒤덮인 것 같았다. 진흙처럼 끈적한 붉은 기운 때문에 시야가 극도로 제한된 상태에서 대체 어디서부터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몰려오는 아귀들은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의 공포를 근원부터 자극하고 있었다.

    "크아아아아아악!"

    자신의 가슴이 공포로 잠식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칼라이제가 고함을 지르며 마기를 줄기줄기 뿜어냈다. 그는 누군가에게 공포를 주는 존재이지, 누군가에게 공포를 느끼는 존재가 아니었다.

    뭉쳐 든 마기가 주변으로 마구 솟구친다. 그의 반응을 알아챈 마왕들도 일제히 마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아무리 끔찍한 형태를 띠고 있다고는 해도 형태가 있다는 것은 결국 부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이대로 제멋대로 농락당할 생각은 없었다.

    이지혁이 아무리 강하다고는 하나, 자신들은 마왕이다.

    마왕에게는 마왕의 격이 있다. 적이 예상치 못한 모습을 보인다고 해서 두려움에 떨 수는 없는 노릇인 것이다.

    크게 소리를 질러 사기를 끌어 올린 칼라이제가 이제는 잘 보이지도 않는 벽면을 향해 마기의 벼락을 줄기줄기 뿜어냈다.

    하나…….

    커허허허허허헝!

    돌아온 것은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아니라 세상을 뒤엎을 것 같은 거대한 포효였다.

    "…뭐야?"

    압도적인 존재감.

    지금까지의 아귀들과는 다르게 정말 몸이 짜릿하게 떨릴 정도의 거대한 존재감이 곳곳에서 느껴지기 시작했다.

    선명해진다.

    인간이라면 결코 볼 수 없을 정도의 짙은 기운들을 뚫고 그의 시야에 보이기 시작했다. 거대함이, 차마 무시할 수 없는 거대함이 말이다.

    벽면에서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크기의 거대한 아귀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고 있었다.

    뿌득, 뿌드드드득.

    육체라고 부르기도 뭐한, 반쯤은 썩어버린 동체를 뒤흔들며 시체를 얼기설기 엮은 것 같은 아귀들이 육중하게 달려들고 있었다.

    시체로 뒤얽어 만들었다는 느낌. 플래시 골렘과 비슷한 형태이기는 하지만, 확실하게 달랐다. 유기체에 가까운 아귀들이 서로의 몸을 엮어 만들어냈다는 느낌.

    그리고 그 순간.

    카아아아아아!

    바닥이 쩍 벌어지더니, 그 아래에서 거대한 입이 튀어나와 마수들을 통째로 집어삼켰다.

    하늘로는 기괴한 날개를 단 새로운 아귀들이 떨어져 내려 마수들을 낚아채 하늘로 다시 날아오른다.

    지옥.

    이건 지옥이었다.

    '단순한 소환이 아니야.'

    소환은 불가능하다. 이만한 괴물들을 소환한다는 것은 엄청난 힘이 필요하다. 아무리 이지혁이라고 해도 결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괴물들이 소환된 게 아냐.'

    그들이 이동한 것이다.

    다른 세상으로.

    이지혁은 세상에 경계를 긋고 결코 이어질 수 없는 영역을 서로 겹쳐 그들을 아귀들의 한가운데로 밀어 넣어버린 것이다.

    가능한가?

    이런 일이?

    이건 신성의 영역이다.

    결코 믿고 싶지 않지만, 믿을 수밖에 없었다. 이론으로 설명되지 않는다고 해도 말이다. 실존하는 것을 믿지 않을 수는 없으니까.

    악마.

    이건 악마의 소행이다.

    우습게도 다른 세상으로부터 악마라고 두려움을 사는 마족들은 지금 진정으로 영혼을 농락하고 조롱하는 악마의 현신을 목격하고 있었다.

    "흐아아아아악!"

    칼라이제가 울분에 찬 고함을 지르며 자신에게 달려드는 아귀들을 향해 뛰어들었다.

    * * *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냐고."

    최정훈의 눈은 아무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귀는 이변을 감지하고 있었다. 저 시뻘건 공간 안에서 듣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는 비명과 악다구니가 그대로 흘러나오고 있으니까.

    사람이 가장 공포를 느낄 때는 눈앞에서 무언가가 벌어질 때가 아니다. 무언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 확실한데, 그 눈으로 확인할 수 없을 때였다.

    끔직한 소음.

    그리고 그 소리가 인간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 최정훈을 더욱 애닳게 만들고 있었다. 마수와 마족들만이 가득한 저 안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이계예요."

    "이계?"

    최정훈이 고개를 돌려 아펠드리체를 바라보았다.

    "세상이 베라프와 마계, 그리고 이곳만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죠?"

    "…그럴 리가요."

    이미 그들은 다른 세계를 몇 번이고 가보지 않았던가.

    "이지혁 씨는 인간인 시절에 이미 차원과 공간에 있어서는 신의 영역마저 뛰어넘은 사람이에요. 그는 역대 최대의 마도사이기도 하지만, 역대 최대의 소환사이기도 하죠. 하지만 그중에서도 이지혁 씨가 가장 높은 이해를 보였던 것이 공간과 차원에 대한 지식이었어요. 당연한 일이죠. 그는 이 세계로 돌아오기 위해서 마법을 익혔으니까."

    최정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지혁이 어디에 가장 중점을 두고 마법을 익혔을지는 너무도 빤한 일이었다.

    "그리고 단순히 마법의 문제가 아니에요. 다른 차원을 이지혁 씨만큼 많이 아는 존재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이지혁 씨는 이 세계로 돌아오기 위해서 차원의 미아가 될 위험을 무릅쓰고 수많은 세상을 탐험했어요. 결국은 그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포기했지만요."

    "그럼……."

    아펠드리체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하지만 지식은 남는 거죠. 위험한 세상… 이 세계의 말로 하자면 지옥이라 불러야 할 세상들을 수도 없이 알고 있는 이가 바로 이지혁 씨이니까요. 이제 이지혁은 없지만, 그의 지식은 저자의 머리 안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거예요. 과거에는 알아도 너무 위험하기 때문에 실행할 수 없던 수많은 방법들이 이제 다 터져 나오겠죠."

    침묵하는 최정훈을 보며 아펠드리체는 한숨을 쉬었다.

    '멸망의 좌라는 말에 걸맞은 사람이 되어버렸군요.'

    예전의 이지혁도 비슷한 수를 썼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위험성과 스케일이 차원이 다르다. 과거 그가 소환해 낸 것들은 혹여 문제가 생겨 풀려난다 하더라도 어떻게 처리할 수 있는 존재들이지만, 지금 저 안에서 포효하고 있는 괴물들은 조금만 풀려나도 순식간에 이 세계를 암흑으로 뒤덮을 수 있을 만큼 끔찍한 것들이리라.

    과거 이지혁이 가지고 있던 약간의 이성과 조심성마저도 사라졌다는 뜻이다.

    당연한 일이겠지.

    이지혁에게 있어서 이 세상은 더 이상 보호해야 할 존재가 아닐 테니까.

    아펠드리체가 서글픈 눈으로 이지혁이 만들어낸 공간을 바라보았다.

    저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다.

    이 세계이되 이 세계가 아니고, 다른 세계이되 다른 세계가 아니다. 결코 겹치지 않아야 할 두 세계가 겹쳐져 만들어낸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었다.

    그 공간이 마치 지금의 이지혁을 대변해 주고 있는 것 같다.

    인간이되 인간이 아니고, 마족이되 마족이 아닌…….

    경계자로서 이지혁의 내면은 저 안에서 벌어지는 일과 같이 들끓어 오르고 있을 것이다.

    그 광포하고 혼란스러운 내면이 어디로 향할지 모른다는 점에서 지금 이지혁은 전 차원에서 가장 위험한 존재라고 할 수 있었다.

    마족과 마수, 그리고 마왕들이 뜯겨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이지혁은 허공에 몸을 띄운 채 낄낄 웃고 있었다.

    * * *

    "큭큭큭큭."

    즐겁다.

    유쾌하다.

    자신들이 뭐라도 되는 양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 있던 것들이 당황하고 공포에 젖어 고함치고 소리치고, 발악하는 모습이 이지혁에게는 너무도 즐겁게 다가오고 있었다.

    이형의 존재가 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지혁은 원래 그런 존재였으니까.

    그는 다른 존재들을 조롱하고 비웃으며 자신의 존재를 느끼는 이였다.

    그때도, 그리고 지금도.

    그는 그가 비웃는 존재들보다 더 가여운 존재였다.

    키득대며 웃던 이지혁이 이를 갈기 시작했다.

    밉다.

    증오스럽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말이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증오스럽기 짝이 없다.

    이 분노가 어디서 오는지는 이지혁도 알지 못했다.

    마족화가 이루어지면서 그저 분노하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인지, 아니면 그가 쌓고 쌓아온 내면의 분노가 자제력을 상실하며 터져 나오는 것인지도.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왜 자제해야 하는가.

    분노가 밀려온다면 분노하면 그만이다.

    어째서 들끓는 분노를 진정시켜야 한다는 말인가.

    그는 이제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었다.

    분노의 결과로 그가 아닌 다른 무언가를 파괴시킨다고 해도, 그 파괴의 대상이 돌고 돌아 그가 된다고 해도, 이지혁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되는 걸까?'

    기이한 느낌이었다.

    그는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인간이던 시절, 그가 얼마나 이곳으로 돌아오고 싶어 했는지, 그리고 이 세계로 돌아오고 나서 지구가 침공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얼마나 불안해했는지 말이다.

    '이상하기 짝이 없어.'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이지혁은… 아니, 이지혁이었던 존재는 이 세계로 타 차원의 괴물들이 쏟아져 들어온다는 사실이 얼마나 공포스러운 일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 마계까지 이 세계로 손을 뻗었을 때, 얼마나 절망했는지도 생생히 기억에 남아 있었다.

    '이해할 수 없다니까.'

    기억을 통해 평가한 이지혁은 겉으로는 세상 두려울 것이 없지만, 속은 여리기 짝이 없는 존재였다. 무슨 일만 벌어져도 그 일이 이 세계의 파멸로 이어질까 봐, 그리고 이 세계가 파멸되는 이유가 자신 때문일까 봐 고뇌하고 떨어 댔다.

    지금의 이지혁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 떤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고, 고통스러워한다고 해서 나아질 것이 없는데 말이다.

    그리고 이지혁의 기억이 남긴 가장 강렬한 의지.

    이 세상을, 가족을, 친구들을 지켜야 한다.

    "큭큭큭큭."

    이지혁은 웃어버렸다.

    어째서?

    멍청한 자여.

    어떤 생물도 서로를 이해하지는 못한다. 그저 그럴 것이라 짐작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다른 존재들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는 멍청한 짓거리를 해 대니 그리 멍청한 최후를 맞는 것이지.

    기묘한 감각이었다.

    이지혁이 지키려고 한 것들에 대한 감정, 그리고 이지혁이 왜 그리 피를 토하면서 그들을 보호하려 했는지 빤히 알고 이해하지만 전혀 공감이 되지 않았다.

    되레 다른 존재였다면 이해하기가 좀 더 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하나 이해가 가지 않는 행동을 반복하는 이지혁에 대한 기억은 지금 그에게는 역겨움과 메스꺼움을 가져다주고 있었다.

    그가 살아 있다면 눈앞에서 그가 지키려 했던 것들을 갈기갈기 찢어발긴 후에 그 표정을 보고 싶다는 충동이 들 정도로 말이다.

    "어리석은……."

    두 눈을 검붉게 물들인 이지혁이 나직하게 웃기 시작했다.

    일단은 눈앞에 있는 마족 놈들부터다.

    과거의 이지혁의 영향이 남아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그에게 있어서 가장 증오스러운 존재들은 누가 뭐라고 해도 저것들이었으니까.

    그다음은 이 세계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

    아니, 하나쯤은 남기는 것도 좋겠지. 완전히 무너져 버린 세상에서 홀로 살아가야 한다는 절망감에 미쳐 버리는 것을 즐기는 것도 나름의 맛이 있을 테니까.

    그리고 그다음은 베라프다.

    그리고…….

    그가 알고 있는 차원, 알고 있는 곳의 생명체는 단 하나도 남기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부수고 무너뜨리고 흡수하다 보면, 이지혁은 지금보다 더, 더더욱 강해질 것이다.

    신조차도 범접할 수 없는 수준으로 말이다.

    그런 후에…….

    그러고 나서는 뭘 해야 하지?

    부수고 또 부수고, 죽이고 또 죽인 다음에는 뭘 해야 하는가. 더 이상 죽일 것이 없고 부술 것이 없다면, 뭘 해야 하는가.

    벌써 고민할 필요는 없다.

    그건 그때 가서 고민하면 될 일이다. 지금 해야 할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이 들끓는 분노를 풀 곳을 찾는 일이었다.

    죽어간다.

    마수도, 마족도, 그리고 마왕마저도.

    끝도 없이 몰려드는 아귀들의 밥이 되어 죽어가고 있었다. 이 세상에 세포 하나 남기지 못한 채로 말이다.

    그 광경을 지켜보며 이지혁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과거 불멸의 육체를 가지고 있는 이지혁조차도 저 세계에 떨어졌을 때는 살아 돌아오는 것이 고작이었다. 먹히고 또 먹혀도 다시 살아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가 필멸하는 존재였다면 열 배 더 강했다 하더라도 결코 살아 돌아오지 못했을 것이다.

    팔다리가 뜯겨 나가면서 전진하고, 허리가 끊어져도 날아오를 수 있었기에 겨우 빠져나왔을 뿐, 아차 했다면 아무리 불멸의 육체를 가지고 있는 그라고 할지라도 결코 빠져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재생하는 족족 먹혀 버리면 재생하는 의미가 없을 테니까. 아귀들이 그의 몸을 끝없이 뜯어먹고 만족한다면 모르겠지만, 저 아귀들은 만족이라는 것을 모르는 존재들이었다.

    그리고 그 무서움은 지금 마족들이 뼈저리게 느끼고 있…….

    '음?'

    이지혁이 고개를 살짝 꺾었다.

    불편한 시선이 느껴진다.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말이다.

    이지혁의 고개가 돌아갔다.

    "드래곤인가?"

    아펠드리체가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시선은 다른 이들이 그를 바라보는 시선과는 조금 달랐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공포와 경악을 담아 그를 바라보는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아펠드리체에게서는 슬픔과 연민이라는 생소한 감정이 느껴졌다.

    연민이라고?

    이지혁은 비웃었다. 비웃을 수밖에 없었다.

    저 하찮은 존재가 지금 자신을 연민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어리석은.'

    이전의 기억에서도 그랬다.

    세상이 모두 그를 증오하고 경계할 때, 저 도마뱀만은 그를 다른 눈으로 바라보았다. 과거의 이지혁은 때때로 그것을 위안으로 느끼기도 했다.

    결코 서로 이해할 수 없는 둘이지만, 시간이 흘러가면서 둘 사이에는 묘한 공감대가 쌓이기도 했으니까.

    "흐음……."

    이지혁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렇다면 지금 그가 해야 할 일이 하나 있었다.

    이지혁의 몸이 그 자리에서 퍽, 꺼지듯 사라지더니, 아펠드리체의 바로 앞에 나타났다. 갑자기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이지혁을 본 아펠드리체가 움찔했다.

    하지만 그뿐.

    아펠드리체 역시 황금색의 심유한 눈으로 이지혁을 바라볼 뿐, 결코 물러나거나 도망치지 않았다.

    "어떤 느낌이지?"

    "……."

    "네가 지금의 나를 바라보는 게 어떤 느낌일까?"

    이지혁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이지혁은 저런 식으로 웃을 때가 많았다. 조롱하는 듯, 조소하는 듯.

    아펠드리체는 이지혁의 그런 웃음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 미소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 미소에는 자신의 처지를 한심스레 여기는 이지혁의 자조가 섞여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지혁의 미소에서는 그런 기미를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같은 얼굴로 같은 미소를 짓고 있는데 전혀 다른 느낌이 든다는 것은 아마도 이 안에는 이지혁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다는 뜻일 것이다.

    아펠드리체는 이미 알고 있던 일임에도 가슴 한쪽이 저릿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드래곤은 결코 느낄 수 없는, 슬픔이라는 감정은 그녀를 제멋대로 뒤흔들고 있었다.

    하지만 슬퍼할 겨를은 없다.

    이지혁 대신 이지혁의 몸을 차지한 이 게걸스러운 악마는 그들조차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을 테니까.

    "어떤 느낌이냐고 물었다."

    아펠드리체는 미소를 지었다.

    이자에게만큼은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없다. 다른 이라면 몰라도, 이지혁도 아닌 주제에 이지혁의 몸을 차지한 이에게만은 영혼이 조각나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결코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광대."

    "…광대?"

    "제 것도 아닌 것은 거죽처럼 걸친 광대."

    이지혁의 눈이 빛났다.

    "내 것이 아니라고 했나?"

    "그래."

    이지혁이 낄낄대며 웃었다.

    "이봐, 아펠드리체."

    이지혁이 양팔을 벌렸다.

    "나는 과거의 이지혁은 아닐지 모르겠지만, 이지혁과 완전히 다른 존재라고 할 수도 없어. 나는 이지혁이자 이지혁이 낳은 또 다른 괴물이지."

    "……."

    "내 머릿속에 너와 같이한 시간이 이리 선명하게 가득한데, 너는 내가 이지혁이 아니라고 할 셈인가?"

    "인간을 규정하는 것은 기억이 아니다."

    "……."

    "그 사람이 했던 말이야. 기억상실에 걸린 인간이 이전과 다른 인간이라고 할 수 없듯이 말이야. 그 사람이 완전히 소멸해 버렸는지, 네 안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는지는 몰라. 아마 이제 알 방법조차 없겠지. 하지만 그 사람이 살았든 죽었든, 너 따위를 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걸 원하지는 않을 거야. 너는 이지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저렴하니까."

    "저렴하다고?"

    "그래."

    아펠드리체가 이를 갈 듯 말했다.

    "그는 고뇌하는 사람이고, 흔들리는 사람이었어. 네가 생각하기에는 한심할지 모르겠지만, 자신이 할 수 없는 일마저도 고민하고 고통스러워했기에 그 사람이 이지혁인 거야. 그저 힘을 휘두를 줄밖에 모르는 너는 이지혁이 아니야. 나는 인정 못해."

    "그것참, 안타까운 일이로군."

    이지혁이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나를 이지혁으로 알고 있는 네가 갈가리 찢겨 죽을 때 어떤 표정을 지을지 무척이나 궁금했는데 말이야."

    이지혁이 키득대며 말했지만, 아펠드리체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되레 도발적인 눈으로 이지혁을 바라보며 똑똑히 말했다.

    "기억이 있다면 알 텐데?"

    "음……?"

    "내가 죽는 것을 두려워하는지, 아닌지 말이야."

    아펠드리체의 말에 이지혁이 움찔했다.

    확실히…….

    이 도마뱀에게는 삶에 대한 집착이라는 것이 없었다. 생명에 대한 의지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죽어야 할 때가 된다면 죽는 것 역시 당연한 이치라는 생각으로 살고 있을 뿐이다.

    "이래서 드래곤이라는 것들은 재미가 없군."

    "많이 듣던 이야기야. 하지만 네 입에서 나오니 불쾌하군. 적어도 그 사람은 지금의 너보다는 내가 조금 더 재미있다고 생각할 테니까."

    "큭큭큭, 그것도 그럴지도 모르지."

    이지혁이 손을 들어 올리는 순간, 등 뒤에서 거대한 파장이 일어났다.

    "으음?"

    이지혁이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자 그가 친 붉은 막이 거칠게 뒤틀리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며 이지혁이 미소를 지었다.

    "그리 쉽게 당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

    그럼… 자, 이제 어쩔까?

    저 쓰레기들을 마무리해야 하나, 아니면 지금 눈앞에 있는 것들부터 죽여 버릴까?

    "이지혁 씨……?"

    그때, 최정훈이 천천히 이지혁에게로 다가왔다.

    * * *

    "오?"

    이지혁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최정훈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최정훈 씨? 아까 다친 것 같았는데, 괜찮아요? 치료는 받았어요?"

    "…이지혁 씨?"

    최정훈이 조금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바라보자, 이지혁이 불만스레 턱을 쓰다듬었다.

    "흐음, 이게 아닌데? 기억에는 분명 있는데… 그때의 말투와 그때의 목소리를 정확하게 따라 하는 게 영 쉽지가 않단 말이야."

    아펠드리체가 피식 웃었다.

    "가짜가 진짜를 따라 할 수는 없는 법이지."

    "가짜라고?"

    "그래, 가짜."

    "이봐, 아펠드리체."

    이지혁이 붉어진 눈으로 가만히 아펠드리체를 보며 말했다.

    "가짜는 내가 아니라 이전까지의 이지혁이겠지. 이미 죽어 있는 사람의 몸에 덕지덕지 생명 유지 장치를 달아 겨우 숨만 붙여놓은 그 이지혁 말이야. 자연스러운 흐름대로라면 그는 진즉에 사라지고 내가 나타났어야 하는 거야. 그러니 내가 좀 더 진짜에 가깝지 않을까? 네 머리도 그리 말하고 있을 텐데?"

    "아니."

    아펠드리체가 단호하게 말했다.

    "의미도 없는 논쟁을 하고 있을 생각은 없어. 그 어떤 이유에서든 너는 이지혁이 아니야. 가짜일 뿐이지."

    "이성으로 먹고사는 드래곤답지 않은 말이로군. 하기야 너는 이미 드래곤이라고도 부를 수 없는 존재던가?"

    아펠드리체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고 해서 너와 내가 비슷한 것은 아냐. 나는 타인을 닮아간 것이고, 너는 그저 타락한 것뿐이니까."

    "글쎄?"

    이지혁이 이죽거렸다.

    "너의 동족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 역시 타락이겠지."

    "그럴지도. 하지만 나는 내가 닮아간 이들에게조차 배척받지는 않아. 너와는 다르게 말이야. 가짜의 한계겠지."

    "부정한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다. 이제 이지혁은 없어. 남은 것은 나뿐이야."

    "아니."

    아펠드리체가 냉정하게 말했다.

    "너는 남은 것이 아니야. 새로 생겨난 것뿐이지. 네가 그 사람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무언가를 물려받은 것은 아니야. 그건 너에게 있어서는 의미 없는 것들일 테니까."

    "……."

    "너는 진짜가 될 수 있을지 모르지. 살아 있고 숨을 쉬니까. 하지만 그것뿐이야. 너는 진짜일지는 모르지만, 진짜 이지혁은 될 수 없어. 결코."

    아펠드리체의 선언에 이지혁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그럴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이지혁은 빠르게 본래의 안색을 되찾았다.

    "하지만 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 내가 이지혁이 아니라는 것쯤은 내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데?"

    "가엽게도."

    아펠드리체가 조금은 안쓰러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집착하고 있는 것은 너뿐이야. 다른 이들은 이미 인정하고 있어, 네가 이지혁이 아니라는 것쯤은. 그것에 가장 집착하고 인정받고 싶어 하는 것은 바로 너야."

    "……."

    "그 모습이 되어서조차… 혼자구나."

    이지혁이 심드렁하게 고개를 젖혔다.

    "글쎄? 예전의 이지혁이라면 지금 너의 말에 어느 정도 동요를 보였을지도 모르겠군. 속은 약해 빠진 놈이었으니까. 하지만 어떡하지? 지금의 나는 그런 말을 들어도 딱히 감정이 움직이지 않는데 말이야. 어쩌면 내 안에 감정이라는 것이 증오와 분노를 빼고는 모두 사라진 것인지 모르지."

    "내가 묻지."

    아펠드리체가 단호히 말했다.

    "지금의 너를 보는 기분이 어떠냐고 물었지?"

    "그랬지."

    "너는 어떻지?"

    "……."

    "지금의 네 모습을 보는 너는 어떤가? 스스로의 변화에 만족하는 건가?"

    "어리석은 소리."

    이지혁이 낄낄대며 웃었다.

    "지금의 내 모습이라는 건 얼마나 네 중심적인 이야기일까. 나는 처음부터 이런 모습이었어. 내가 생겨난 지가 얼마 되지 않은 것뿐이지. 너는 나와 이지혁의 연관성을 부정하면서, 내게 이지혁의 잔재가 남아 있기를 바라는군. 어리석은 드래곤이여, 그대가 바라는 것은 그 무엇 하나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지혁이 아니되 이지혁이며, 과거의 나를 조금도 그리워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아펠드리체는 차가운 눈으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이걸로 확실해졌다.

    이자는 이지혁의 모습을 하고는 있지만, 결코 이지혁이 아니다. 이지혁은 이미 소멸한 것이다.

    입술을 질끈 깨문 아펠드리체가 차갑게 쏘아붙이려는 찰나, 요동치던 붉은 막의 윗부분이 터져 나갔다.

    촤아아아아아악!

    막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붉은 기운들이 벌어진 위쪽으로 마치 피처럼 뿜어져 나온다.

    "흐음……."

    이지혁이 손가락을 까딱하자 뿜어져 나온 기운들이 이지혁에게로 쇄도했다.

    "……."

    최정훈은 기겁한 얼굴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한눈에 보기에도 불길하고 끈적한 기운들이 이지혁의 코와 입으로 쭈욱 들어간다. 그게 공기라고 해도 다 마시지 못할 양의 기운들이 몸 안으로 잘도 들어가고 있었다.

    '착각인가?'

    기운을 받아들이면 받아들일수록 이지혁의 몸에 생기가 도는 느낌이었다. 몸이 살짝 부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끝내주는 메커니즘이로군."

    이지혁이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었다.

    모든 생물은 한계치라는 것이 존재한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다. 아무리 훈련을 하고, 아무리 노력을 한다고 해도 생물은 정해진 한계치 이상으로 강해지지 못한다.

    토끼가 아무리 단련을 한다고 해도 사자 이상으로 강해질 수 있을까?

    결코 불가능한 일이다.

    인간 역시 마찬가지다.

    에테르라는 능력이 생겨나고서부터 노력을 하면 노력을 하는 대로 강해진다고 착각하고 있었을 뿐, 인간 역시 강해지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마족도, 인간도, 드래곤도 모두가 벗어날 수 없는 정해진 법칙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지혁은 그 법칙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가 죽인 것들의 기운은 그가 내뿜은 혈기(血氣)에 흡수되어 지금 이지혁의 체내로 고스란히 밀려 들어오고 있었다. 물론 그들이 가진 힘을 100% 효율로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는 없겠지만, 이것만으로도 충분한다.

    죽일수록 강해진다.

    그리고 싸울수록 강해진다.

    리미트가 존재하지 않은 채 무한히 강해져 나간다는 것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쾌감이었다.

    다른 존재들에게는 불행이겠지만 말이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아!"

    거친 고함 소리가 들려오자 이지혁이 혀를 찼다.

    "교양 없게."

    콰아앙! 콰아아아앙!

    커다란 폭음과 함께 이지혁이 만들어낸 거대한 막의 여기저기가 터져 나가기 시작했다. 이지혁은 그 광경을 보며 피식 웃었다.

    어차피 저거 하나로 끝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바르바체와 마왕들은 그리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하지만 엿은 좀 먹었겠지."

    이지혁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기다려. 금방 끝내고 올 테니까 말이야. 그때 다시 이야기해 보자고, 물론 다음에는 얌전히 말로 하지 않을 거야."

    이지혁이 터덜터덜 앞쪽으로 걸어가자 최정훈이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

    지금 그의 심정은 말로 표현하기가 힘들었다.

    '없어.'

    없다.

    이지혁이 다른 존재가 되어버린 것은 알고 있다. 최정훈도 머리가 있는 사람이고, 지금까지 지겹도록 들어온 일이다. 혼란스러울 것도 없었다.

    그가 확인하려 한 것은 이지혁이 변했는가의 여부가 아니다. 변한 이지혁에게 과거의 이지혁의 잔재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가를 확인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

    언뜻언뜻 느껴지는 이지혁의 말투와 표정이 되레 확연하게 알게 해주었다. 이자에게는 정말 이지혁이 남아 있지 않았다.

    최정훈이 자신의 얼굴을 감쌌다.

    '정말 없는 거구나.'

    어찌할 수 없는 절망감이 최정훈을 덮치고 있었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그걸 자신의 눈으로 확인한다는 것은 너무도 잔인한 처사였다.

    "고개 숙이지 마요."

    서아영이 최정훈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당신답지 않아요. 자꾸 약한 모습 보이지 마세요."

    "…그래야죠."

    "이지혁 씨가 지켜보고 있다면 지금 당신을 얼마나 비웃고 있을지를 생각하라구요."

    최정훈은 낮게 웃고 말았다.

    모른다.

    그렇게도 오랜 시간을 보내놓고도 서아영은 이지혁이라는 사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지혁이 지금 최정훈의 모습을 보았다면 겉으로는 툭툭 쏘아 제꼈겠지만, 속으로는 가슴 아파했을 것이다. 이지혁은 그런 사람이니까.

    여리고 약한 속을 감추기 위해서 겉으로는 독설을 내뱉는, 그런 사람이니까.

    하지만 이제 그런 사람은 없다.

    그 사실이 최정훈의 몸에서 힘을 빼고 있었다.

    * * *

    "흐음."

    이지혁은 무너지는 돔을 보며 혀를 차고 있었다.

    "생각보다 일찍 빠져나왔는걸?"

    세상에는 수많은 차원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 차원들을 힘의 논리로 줄을 세우게 된다면 마계는 가장 앞에 설 자격이 충분했다. 지금 저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지혀어어어어억!"

    붉은 기운들이 피처럼 뿜어지는 전장의 한가운데서 바르바체가 이지혁을 향해 광포한 분노를 뿜어내고 있었다.

    "낄낄낄낄."

    이지혁은 그 광경을 보며 유쾌하게 웃었다.

    이지혁의 웃음을 본 바르바체의 눈이 더더욱 붉게 물들었다. 뜯겨 나간 팔은 어느새 재생되었지만, 찢겨 나간 자존심은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마수들도 반 이상 아귀들에게 희생되었다. 그리고 마족들도 대부분 부상을 입었고, 심지어 마왕들조차 무사하지 못했다.

    일격이라고 해도 좋을 공격에 전력의 20% 이상이 날아가 버린 것이다.

    바르바체는 이지혁이라는 존재가 가진 힘을 새삼 실감해야 했다. 이지혁이 강해진다는 것은 일반적인 마왕이 강해지는 것과는 그 파급력이 달랐다.

    인간의 마도사로서 정점에 오르고, 마왕으로서도 극한에 올라본 이지혁은 자신의 힘을 제대로 활용할 줄 알았다. 지금의 십분지 일도 안 되는 힘으로도 바르바체를 제외한 다른 마왕들을 가지고 논 이지혁이다. 그러니 지금 이지혁은 얼마나 강하겠는가.

    "잘도 저질렀구나."

    이지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네가 원한 것 아니었어?"

    "……."

    "외롭다고 했잖아. 너와 대등하거나, 더 강한 존재가 그리웠다고 했지."

    이지혁이 바르바체를 비웃었다.

    "자, 이제 어떤가?"

    "네가 나를 능가했다고 말하고 싶은 거냐? 건방진 놈!"

    "아아……."

    이지혁이 손가락을 튕기자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던 최정훈의 주머니에서 담배가 솟아나와 이지혁에게 날아들었다. 날아든 담배를 잡아 입에 문 이지혁이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싱긋 웃었다.

    "아직도 모르겠다면, 알게 해주면 되겠지. 그리고……."

    이지혁이 담배를 깊게 빨았다.

    "후우우우……."

    천천히 담배를 내뿜은 이지혁이 말했다.

    "세상에 홀로 오롯이 선다는 게 외롭다는 너를 이해할 수 없군. 이토록이나 즐거운데 말이야. 잡아 죽이고, 찢어버릴 것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왜 외롭다는 거지?"

    바르바체가 이를 악물고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저건 위협이나 허세 같은 게 아니다. 이지혁은 진심으로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

    "마족을 만들어내려고 했는데, 디스트로이어를 만들어내 버렸군."

    때로 세상에 저런 존재가 나타나기도 했다. 오로지 파괴만을 행동의 원동력으로 삼는 존재들…….

    하지만 지금까지 나타난 디스트로이어들은 이지혁처럼 강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세상이 유지될 수 있던 것이다.

    '파괴신이라 불러야 할지도…….'

    바르바체는 자신이 태어난 이후로 처음으로 지키는 입장에 섰다는 것을 자각했다.

    저 악마 같은 존재를 막아내야 하는 것이다.

    "자, 그럼 다시 시작해 보자."

    이지혁이 악마 같은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바르바체를 향해 걸었다.

    * * *

    바르바체는 생전 느껴본 적 없는 기이한 감각에 몸을 떨 수밖에 없었다.

    '떨고 있는 건가? 내가?'

    세상은 일정한 법칙으로 돌아간다. 지금까지 그가 살아온 세상에서 확고부동한 단 하나의 진리가 있었다.

    누구도 그를 막을 수 없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홀로 오롯한 존재였다. 상대하는 것이 힘겨운 적이 아예 없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는 상대적으로 우월한 입장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는 이였다.

    살아오며 단 한 번도 자신보다 강한 자를 겪어본 적이 없던 바르바체에게 지금의 이지혁은 무척이나 생소한 존재였다.

    이지혁의 육체에서 붉은 혈기가 마구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검붉게 물든 두 눈으로 붉은 기운을 마구 뿜어내는 이지혁을 보는 바르바체의 심정은 복잡미묘하기 그지없었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자신과 동격의 힘을 가지거나, 자신보다 강한 자의 존재를 간절히 바라왔다. 오로지 자신보다 약한 존재들을 빼앗고 강탈하는 삶에서 지친 것이다.

    그렇기에 이지혁이 마족이 되기를 바라왔다. 이지혁이 마족만 될 수 있다면, 그가 그토록 원하던 존재가 탄생할 수 있을 테니까.

    하나 바르바체는 자신의 계산에 실수가 있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저건 마족이 아니다.

    이건 정체성의 문제였다. 아무리 이지혁이 마족의 육체를 가졌다고는 하나, 그의 정신마저 완연한 마족이 되지는 못한 것이다. 저건 마족도 아니고, 인간도 아닌, 어정쩡한 존재였다.

    그리고 그 존재는 확실하게 바르바체를 능가하고 있었다.

    그의 드높은 이성이 계속 같은 말을 해주고 있다.

    '저자는 나보다 강하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바르바체는 설령 그 상대가 신이라고 할지라도 스스로가 밀린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물리력이 통하는 현세에서라면 감히 신도 그를 막아설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지금 처음으로 자신보다 강한 존재를 대면한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그가 그 어떤 상대보다 강하다는 것은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는 것처럼 당연한 이치였다. 한데 지금 그 절대적인 법칙이 깨어지고 있는 것이다.

    "흐음……."

    바르바체의 입가로 낮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처음으로 상대할 수 없는 적을 만났다는 것이 바르바체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감정은 묘한 쾌감으로 발전해 나갔다.

    '이걸 원했지.'

    흥분이 찾아들기 시작한다.

    삶이란 얼마나 지루한 것인가.

    원하는 것은 뭐든 손에 넣을 수 있고, 하고 싶은 것은 모조리 할 수 있는 삶이란 얼마나 덧없는 것인가. 삶이란 장애물을 뛰어넘어 가기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바르바체는 그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거대한 벽을 맞이하고 있었다.

    "큭큭큭큭."

    기분 좋게 웃어 제낀 바르바체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이지혁을 보며 양팔을 벌렸다.

    "입장이 뒤바뀐 것 같은데?"

    이지혁이 피식 웃었다.

    "그게 웃을 일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너는 머리가 나쁜 것 같단 말이야."

    "웃을 일이지, 웃을 일이고말고."

    바르바체가 이를 드러냈다.

    "존재하는 모든 이들의 적의를 그 한 몸으로 맞이하는 기분은 어떤가? 한때나마 너는 구원자의 위치였지. 하지만 지금은 타락한 마왕에 불과하다. 인간에게도, 마족에게도 경원시되는 타락한 마왕. 어떤가?"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뭐가 다르지?"

    "…뭐?"

    "아니. 뭐, 딱히 딴지를 걸고 싶은 마음은 아닌데 말이야. 내가 베라프에 있던 때와 그리 달라진 것은 없는 것 같은데?"

    바르바체는 대답하지 못했다.

    "확실히 넌 멍청해. 그리고 전혀 이해를 못하고 있군."

    "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지?"

    "너는 지금과 같은 입장에 처해본 적이 한 번도 없겠지. 그래서 지금의 상황이 생소하고 신기할지 모르겠지만, 경험자로서 한마디를 해주자면……."

    이지혁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거 그리 좋은 거 아냐, 멍청아."

    말을 끝낸 이지혁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와 동시에 마족들의 한가운데서 붉은 소용돌이가 순간적으로 솟아올랐다.

    콰아아아아아!

    붉은 혈기로 이루어진 소용돌이가 주변을 닥치는 대로 끌어당기고 집어삼킨다. 소용돌이에 휘말린 마족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믹서기에 갈리는 재료들처럼 갈가리 찢겨 나갔다.

    "이해를 못하는 것 같은데……."

    따악.

    다시 한 번 손가락이 튕겨지자 하나의 소용돌이가 새로이 더 생겨났다.

    따악, 따악.

    손가락을 한 번 튕길 때마다 집조차 집어삼킬 것 같은 거대한 소용돌이가 하늘로 솟구쳤다. 순식간에 하늘이 검어지며 광풍이 불어온다.

    어느새 가득 차버린 먹구름 아래로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야 할 붉은 소용돌이들이 마구 요동쳤다.

    콰르르르릉!

    소용돌이의 윽박지름을 이겨내지 못한 먹구름들이 바닥으로 마구 번개를 내리꽂는다.

    "학살당하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 확실하게 느끼게 해주지."

    이지혁이 낄낄대며 앞으로 걸어갔다.

    * * *

    "참, 뭐라고 해야 할까."

    서아영이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보며 몸을 떨기 시작했다. 밀려온 먹구름 사이로 비바람이 몰아치고 벼락이 떨어진다. 그리고 그 아래서 아홉 마리의 붉은 용이 승천하는 것 같았다.

    인세에는 결코 없어야 할 광경이다.

    서아영은 도저히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 같은 광경을 보며 몸을 떨었다.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딱히 다르지도 않아.'

    그 의도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저 광경이 이어지는 순간 세상은 멸망할 것이다. 여기에 있는 모두가 그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이지혁은 없다.

    이제 남은 것은 이지혁이 아닌, 진정한 의미의 멸망의 좌뿐이었다. 저대로 내버려 두면 이지혁은 마족들을 모조리 먼지로 돌려 버리고 이 세상을 암흑으로 물들일 것이다.

    인간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마족들에 비한다면 되레 이지혁이 몇 배는 더 힘겨운 상대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막아야 해.'

    서아영이 이를 꽉 깨물고는 최정훈을 돌아보았다.

    "최정훈 씨."

    여전히 넋이 나가 있는 것 같던 최정훈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최정훈과 시선을 마주친 서아영이 흠칫하여 뒤로 살짝 물러났다.

    빨리 정신을 차리라는 말을 해주려 한 것인데, 최정훈은 이미 정신을 차리다 못해 차가운 분노를 내뿜고 있는 중이었다.

    "다 모아요."

    "네?"

    "지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모조리 다 모아요."

    "…지금?"

    최정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이지혁은… 아니, 저 이지혁의 몸을 차지한 놈은 한동안 마족들밖에 신경 쓰지 않을 겁니다. 그의 입장에서 우리는 별다른 위협이 되지 않을 테니까요. 하지만 길지 않을 거예요. 그 시간 안에 대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갑자기 사람이 변해 버린 듯 냉정하게 말을 하는 최정훈을 보며 서아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당신 괜찮아요?"

    "뭐가 말입니까?"

    "조금 전까지……."

    최정훈이 피식 웃었다. 평소와 그리 다르지 않은 것 같은 미소이지만, 그걸 보는 서아영은 최정훈의 미소가 무척이나 씁쓸하게 느껴진다고 생각했다.

    "용납 못하는 것뿐입니다."

    "…예?"

    "이지혁 씨가 죽었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이지혁 씨의 잔재는 남아 있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지혁 씨가 남긴 거라고는 저 몸밖에 없는데……."

    최정훈이 이를 으득 갈았다.

    "저따위 가짜가 이지혁 씨의 몸을 사용하고 있는 걸 용납하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그럴 바에야 아예 없애 버리는 게 낫죠."

    최정훈의 말에 서아영이 이를 꽉 깨물었다.

    그건 다른 의미의 집착이었다.

    하지만 조금 전까지 무기력하기 짝이 없던 모습보다야 이 방향이 몇 배는 더 낫다.

    "시키는 대로 할게요. 누굴 모으면 되죠?"

    "전부."

    최정훈이 승천하는 아홉 마리의 용을 보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전부요. 관련된 사람은 모두 모아주세요."

    * * *

    힘으로 눌린다는 것은 생소한 경험이었다.

    그리고 그 생소한 경험을 통해 바르바체는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힘이 날뛴다는 것이 얼마나 공포를 가져다주는 것인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인간들은 이만한 공포를 안고 우리와 싸운 것인가?'

    새삼 인간이라는 종족에 대한 경의가 일었다. 인간과 마왕들의 차이는 이지혁과 그들의 차이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컸다.

    지금의 이지혁을 보는 것만으로 몸이 오그라드는 것 같은 압력을 감내해야 하는데, 인간들은 얼마나 거대한 압력을 버텨가며 마왕들과 싸웠다는 것인가.

    "물러서지 마라!"

    바르바체는 크게 고함을 질렀다.

    단 한 번도 그가 마왕과 마족들을 향해서 이런 말을 하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마왕은 물러설 줄 모르는 존재들이었으니까.

    하지만 아니었다.

    그들이 그동안 굳건한 정신을 가지고 있다고 믿어온 이유는 그들을 상대할 만한 존재가 없었기 때문이다. 상대적인 우월감이 사라지는 순간, 그들 역시 그저 평범한 생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이지혁이 천천히 다가온다.

    등 뒤로 핏빛의 불타는 날개를 펼치고 세상에 먹구름을 몰아 다가오는 이지혁은 멸망의 화신, 그 자체였다. 신성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그 끔찍한 모습을 보며 바르바체는 몸을 떨어야 했다.

    실감이 난다.

    아무리 마족이라고는 하지만, 그들 역시 살아 있는 존재들이었다. 그리고 저자는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자다. 그런 자 앞에서 살아 있는 이들이라면 떨지 않을 수가 없다.

    "겁먹을 것 없다."

    그건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다른 이들에게 하는 말이지만, 바르바체 스스로에게 되뇌는 말과도 같았다. 스스로 하는 생각을 입 밖으로 내 자신에게 다시 강조해 마음을 다잡아야 할 만큼 지금 바르바체는 궁지에 몰려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여러 번 지켜보았다. 그리고 우리가 당하기까지 했지 않은가. 상대가 나보다 강하다고 두려울 것은 없다. 저자는 혼자니까."

    말을 하면서도 바르바체는 스스로를 비웃을 수밖에 없었다.

    혼자라고?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이지혁은 언제나 혼자였다.

    그가 동료라고 부를 수도 없는 쓰레기들을 주변에 쌓기 시작한 것은 그의 긴 삶의 막바지, 그야말로 순간이라 불러야 할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 그전의 이지혁은 언제나 혼자였고, 그 혼자서도 인간의 몸으로 마왕의 위에 오른 자였다.

    그런 이가 혼자라는 사실이 뭐 그리 대단한 약점이라도 된단 말인가.

    하지만 이지혁은 그 말이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혼자?"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혼자, 혼자라……. 그래,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네가 말하는 혼자라는 말은 조금 틀린 것 같은데? 나 혼자 너희를 상대하는 것은 아니니까."

    이지혁이 손가락을 튕겼다.

    우웅! 우웅!

    순간, 공간이 벌어지는 소리와 함께 이지혁이 만들어낸 게이트에서 마수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현세로 소환된 마수들을 모조리 집어삼켰음에도 아직 이지혁의 통제하에 있는 마수들은 이만큼이나 남아 있던 것이다.

    바르바체는 이때만큼 마계의 드넓음이 저주스러운 적이 없었다.

    끝도 없이 밀려나오는 마수들을 보며 바르바체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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