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110화 (110/118)
  • [■] 그 사람은 이제 없어요 [■]

    ─────

    "이, 이지혁 씨?"

    살아 있다.

    이지혁이 살아 있다.

    그 사실만으로도 최정훈은 환희를 느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최정훈은 조금도 기뻐할 수 없었다.

    이지혁의 붉은… 아니, 핏빛으로 빛나고 있는 눈동자를 보는 순간, 예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뭔가가 달라졌다.

    단순히 눈빛이 달라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천천히 담배 연기를 뿜어내는 모습은 그가 알던 이지혁의 그것과는 전혀라고 해도 좋을 만큼 달랐다.

    때때로 이지혁이 우울한 모습을 보여주기는 했지만, 지금처럼 허무하고 염세적인 표정을 보여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지혁 씨?"

    최정훈의 목소리가 떨려 나온다.

    이지혁이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 기뻐할 수가 없었다. 이지혁의 숨이 이어진다고 해도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이 지금까지 그가 알던 이지혁이 아니라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거니까.

    아니겠지.

    설마 아니겠지.

    최정훈의 절규에 대답을 해준 것은 이지혁이 아니라 바르바체였다.

    "기분이 어떠신가?"

    바르바체의 얼굴에는 이제껏 발견할 수 없던 쾌감이 가득했다.

    누군가를 타락시킨다는 것은 그 어디에도 비할 수 없는 저열한 쾌감을 선사해 주기 마련이다.

    인간의 대표이자 마족이 아닌 존재로서 유일하다시피 마족들을 위협해 온 이종족의 대표를 지금 그들과 같은 존재로 만들었다는 것이 바르바체를 웃을 수밖에 없게 만들고 있었다.

    "후우우우."

    담배 연기를 가만히 뿜어낸 이지혁이 고개를 들어 바르바체를 바라보았다.

    "나는 인간처럼 나약해 본 적이 없어서 지금 네 기분을 상상하지 못하겠군. 흑마력과 동화된 기분이 어떻지? 나약해 빠진 인간에서 벗어나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난 기분이 어떠냐고 묻고 있는 거다."

    이지혁은 무표정한 얼굴로 가만히 바르바체를 바라보았다.

    대답 없이 바짝 타버린 담배를 입에서 뱉어낸 이지혁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최정훈의 주머니에 들어 있던 담배가 허공으로 솟구치더니, 이지혁에게로 날아갔다.

    이지혁이 날아드는 담뱃갑을 한 손으로 집어 들고는 그 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탁.

    손가락을 튕겨 담배에 불을 붙인 이지혁이 다시금 깊이 연기를 빨아들이고는 천천히 내뱉었다.

    "이상한 기분이군."

    이지혁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무척이나 저음이었다.

    최정훈은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건 분명 이지혁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가 들어오던 이지혁의 목소리와는 뭔가 달랐다. 쇳소리가 섞여 긁어 대는 듯한 목소리가 자연스레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지혁의 내면부터 무언가가 바뀌었다는 것을 증명하듯 말이다.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은데 말이야."

    이지혁이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같은 것을 보고 같은 것을 느끼는데, 전혀 다른 기분이 든다는 것은 무척이나 신기한 경험이로군."

    이지혁과 눈이 마주친 최정훈은 느꼈다.

    느낄 수밖에 없었다.

    아니다.

    이자는 이지혁이 아니다.

    맹수 같은 눈으로 먹이를 노려보듯 그를 바라보고 있는 이자를 이지혁이라고 할 수 없다.

    이자는 겉모습만 이지혁과 같은 뿐이다.

    차라리 뭐라고 해야 할까, 이 느낌은…….

    '바르바체.'

    비슷했다.

    바르바체를 볼 때 느껴진, 그 극심한 격의 차이.

    지금 이지혁에게서 그게 느껴지고 있었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전신이 쪼그라드는 것 같은 공포감과 위압감이 말이다.

    "아……."

    이지혁의 눈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한 최정훈의 눈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아니겠지.

    아닐 거야.

    그 순간.

    우웅!

    바로 뒤로 텔레포트해 온 아펠드리체가 최정훈의 어깨를 움켜잡더니, 다시 텔레포트를 시전해 저 멀리 거리를 벌렸다.

    그 광경을 본 바르바체가 이죽거렸다.

    "뭔가? 아직 미련이라도 남았나? 죽이려고 했다면 얼마든지 죽일 수 있었을 텐데, 아직 인간이던 시절에 대한 감정이 남아 있는 건가?"

    "……."

    이지혁이 고개를 돌려 바르바체를 보았다.

    천천히 담배 연기를 뿜어낸 이지혁의 입가가 기괴하게 뒤틀렸다.

    "뭐라 처 지껄이는 건지 모르겠군."

    "뭐……?"

    "눈앞에 벌레가 앵앵댈 때, 대처법은 여러 가지가 있는 거지. 굳이 그걸 잡으려 드는 이도 있는 것이고, 그저 손을 휘둘러 쫓아내는 이도 있는 것뿐이야."

    "큭큭, 벌레라……. 그거 꽤나 마음에 드는 발언이로군."

    "그래서 지금 고민 중이야."

    바르바체의 얼굴에 살짝 의문이 떠올랐다.

    "지금 가장 앵앵대는 벌레를 어떻게 찢어 죽일까 말이야."

    이지혁이 천천히 그 몸을 일으켰다.

    * * *

    "아펠드리 체님?"

    아펠드리체는 아무 말 없이 최정훈의 두 다리를 치료하고 그에게 힐을 쏟아부었다.

    "말하지 말아요. 몸 상태가 많이 안 좋으니까."

    "이, 이지혁 씨가……."

    아펠드리체의 반응은 냉담하기 그지없었다.

    "그 사람은 이제 없어요."

    "…네?"

    최정훈의 두 눈이 떨렸다.

    이곳에 있는 그 누구보다 이지혁을 중히 여기던 이가 바로 아펠드리체다. 그녀가 이지혁을 바라보는 눈빛에 최정훈마저 가슴이 아프지 않았던가.

    하지만 지금 아펠드리체의 눈은 마치 철갑이라도 씌운 듯 딱딱하기 그지없었다.

    "지혁 씨가 쓰던 몸을 그대로 사용한다고 해서 같은 존재인 건 아니에요. 저건 지금까지 최정훈 씨가 알던 그 이지혁이 아니에요. 그 모습으로 강림한 최악의 재앙이죠."

    "하, 하지만! 나를 알고 있었다구요! 나를!"

    "조금만 늦었으면 최정훈 씨는 아마 갈가리 찢겨진 육편이 되었을 거예요. 저 마족에게 있어서 최정훈 씨는 더 이상 의미를 갖지 못해요. 그저 인간인 거죠."

    "…아니……."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반복해서 들은 말이다.

    하지만 인정할 수가 없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저 육체로 살아 숨 쉬던 이지혁이라는 존재가 완전히 사라지고, 전혀 다른 마족이 저 몸을 차지했다는 것을 어찌 인정하라는 말인가.

    차라리 빙의라든가, 이지혁을 마족의 정신이 억제하고 봉인했다면 되돌릴 방법이라도 있을 것인데, 지금 아펠드리체가 하고 있는 말은 이지혁의 완전한 소멸을 의미하고 있지 않은가.

    "돌아올 수 있는 거죠?"

    "……."

    "어떻게 쓰러뜨린다든가! 그러면!"

    "최정훈 씨."

    "……."

    무감정한 아펠드리체의 목소리가 이미 대답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지혁 씨가 한 말을 잊지 말아요. 그는 이리될 것을 미리 예상했어요. 그리고 당신에게 당부한 것도 있을 텐데요."

    최정훈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알고 있다.

    알고 있다고.

    "그가 이 세계를 멸망시키지 않게 어떻게든 죽여주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에요. 다만……."

    아펠드리체의 신음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가능하다면 말이죠."

    그녀의 눈이 불안을 담기 시작했다.

    * * *

    "그 벌레라는 게 설마 나를 의미하는 건 아니겠지?"

    조금의 웃음기를 담고 바르바체가 되물었지만, 이지혁은 여전히 냉담한 얼굴이었다.

    "그래서는 안 될 이유라도?"

    "큭큭큭큭."

    바르바체가 유쾌하게 웃었다.

    "이해하지, 이해해 주지."

    연신 고개를 끄덕이던 바르바체가 양팔을 쫘악 펼쳤다.

    "너는 지금 인간이라는 제약을 벗고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존재로 다시 태어난 거니까. 그러니 육체에서 느껴지는 힘에 자신감이 넘칠 수밖에 없을 거야. 이해하지, 이해하고말고."

    바르바체의 반응에 이지혁이 피식 웃었다.

    "아니, 이해를 전혀 못하는 것 같은데?"

    "……?"

    "머리가 있다면 생각을 할 줄 알아야지. 그 저열한 머리로 생각한다고 뭐가 나오겠냐마는."

    이지혁이 양손을 후드득 털었다.

    "기억해라, 바르바체. 나는 인간이었을 때도 너희를 짓밟던 존재였다. 그리고 지금은 마족이 되었지."

    이지혁의 말에 바르바체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마족이 된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는 정확하게 표현하기 힘들군. 굳이 말하자면 결별이라고 해야 할까?"

    "결별?"

    "그래. 이전까지와의 나와 결별. 지금까지 살아온 나의 인생을 제3자의 입장에서 그저 바라보는 느낌. 이해할 수 있고, 느낄 수도 있지만, 동조하지는 않는, 그런 느낌. 누군가의 인생을 영화관에서 길게 지켜본 것 같은 느낌이야. 그래서 아직은 평을 하기 힘들지. 하지만 하나는 확실해."

    이지혁의 입꼬리가 기괴하게 말려 올라갔다.

    "내가 어떤 존재가 되었는가는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것은 내가 얼마나 강해졌는가지. 육체에 흐르는 이 끝도 없는 마력이 대체 얼마나 큰 파괴력을 낳을지 나도 상상이 가지 않는군."

    바르바체의 손에서 손톱이 돋아났다.

    그의 혀가 바짝 마른 입술을 핥았다.

    그의 가슴을 울리는 이 감정은 '기대'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바르바체 역시 이지혁이 얼마나 강해졌는지는 상상할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확실한 건 한 가지.

    인간의 몸으로 마족이 된 이들이 비록 최하급 마족의 지위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하나 최하급 마족이라도 인간 중의 최고보다는 몇 십 배는 강하다.

    물론 이지혁은 일반적인 인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흑마력을 다루던 사람인 만큼 그만한 효율을 내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그렇다 해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해졌겠지.'

    바르바체의 가슴이 떨리고 있었다.

    어쩌면 지금 그의 앞에 그가 태어난 이후로 단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던 그의 대적자가 나타난 것일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어도 좋다.

    그가 정신마저도 완전한 마족이 되어 마왕 중 하나로 마계를 자신과 함께 이끌어간다 해도 반길 일이고, 마족이 되어서도 그에대한 증오심을 간직하고 있어 적대시한다고 해도 좋다.

    전자라면 동료를 얻을 것이고, 후자라면 적을 얻을 것이다.

    그 어느 쪽이라 해도 그에게는 단 한 번도 없던 즐거움이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지?"

    "시험해 봐야겠지."

    "시험?"

    이지혁이 킥킥대며 웃었다.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샌드백이 눈앞에 있는데 시험해 보지 않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지. 쉽게 죽지 마라, 바르바체. 네가 쉽게 죽어버린다면 나 역시 너와 같은 고통에 시달려야 할 테니까. 이를 악물고 버티라고."

    그 말과 동시에 이지혁의 몸에서 시커먼 마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오……."

    바르바체의 눈이 희열로 물들어갔다.

    다르다.

    지금까지의 이지혁과는 다르다.

    이제껏 이지혁이 흑마력을 사용하던 방식은 외부의 흑마력을 육체라는 통로를 통해 활용하는 방식이라면, 지금 그는 마족처럼 육체 내에서 마력을 정제해 내고 있었다.

    아니, '마족처럼'이 아니다.

    그는 마족이니까!

    "큭큭큭, 그래. 좋지, 좋아. 얼마든지 받아주지!"

    반쯤 이성을 잃은 듯한 눈으로 바르바체가 마기를 뿜어냈다. 그의 육체를 타고 도는 마기가 하늘로 솟구쳐 오르며 거대한 마기의 소용돌이를 만들어냈다.

    콰아아아아아!

    세상을 찢어버릴 것 같은 마기의 소용돌이 앞에 연기 같은 마기를 흘리고 있는 이지혁은 너무나도 작아 보였다.

    하지만 이지혁의 눈은 단호하고… 잔인했다.

    "이해를 못하는 모양이군."

    이지혁의 우수가 천천히 앞으로 뻗어졌다.

    "그럼 알게 해줘야지. 그 몸으로 말이야."

    짐승같이 이를 드러낸 이지혁이 앞으로 돌진하며 바르바체가 만들어낸 마기의 소용돌이로 뛰어들었다.

    * * *

    "최정훈 씨!"

    서아영이 최정훈에게 달려가 그의 팔을 꽉 움켜잡았다.

    "이……."

    그의 무모한 행동에 대한 비난을 마구 늘어놓으려 한 서아영은 풀려 있는 최정훈의 눈을 보고는 입을 닫고 말았다.

    짙은 허무.

    그저 실망이라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짙은 허무가 그의 눈에 가득 차 있었다.

    "…최정훈 씨."

    서아영의 떨리는 목소리를 들은 최정훈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지혁 씨가……."

    최정훈이 어색한 얼굴로 웃었다.

    "이지혁 씨가 죽었대요."

    "……."

    "저 사람은 더 이상 이지혁 씨가 아니래요."

    서아영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알고 있던 일이 아닌가.

    이미 오래전에 모두 알고 있던 사실이지 않은가.

    이지혁이 그만큼이나 설명을 했고, 이곳에 도착하기 전에도 몇 번이나 마음을 다잡았다.

    심지어 흔들리는 서아영에게 그게 이지혁 씨를 위하는 길이라고 말한 사람이 최정훈이다.

    그런데…….

    서아영이 최정훈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울지 마요."

    "……."

    "울지 마……."

    다그칠 수가 없다.

    저 사람은 이미 당신이 아는 그 사람이 아니니, 멍청한 짓 하지 말라고 다그치며 화내고 욕할 수가 없다.

    이리 어린아이처럼 흐느끼고 있는 사람에게 어찌 그리 잔인한 짓을 하겠는가.

    이해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이지혁이 이 세계로 돌아온 이후로 가족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 사람이 최정훈이다. 외롭기 짝이 없는 삶을 살아온 이지혁도 은근히 다가오는 최정훈을 밀어내지 않았고, 최정훈도 이지혁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들이 쌓은 유대는 짧은 시간임에도 결코 얕다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지혁이 외로운 사람인 만큼 최정훈도 외로운 사람이었으니까.

    "그만해요."

    "하지만……."

    "이지혁 씨가 지금 당신을 보고 있으면 고맙다고 할 것 같아요?"

    "……."

    최정훈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 사람의 성격이라면 분명 짜증을 냈겠지. 하라는 짓은 안 하고 반대로 해 댄다고, 무능하고 멍청하기 짝이 없다고 말이다.

    "이지혁 씨가 의식이 있다면 자신을 막아주길 바랄 거예요. 그리고 그 일에 가장 큰 역할을 해야 하는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최정훈이 얼굴을 감쌌다.

    못한다.

    자신은 못한다.

    이건 자신에게 너무 잔인한 짓이었다.

    "뭘 위해서?"

    핏발이 선 눈으로 최정훈이 소리쳤다.

    "뭘 위해서 우리 손으로 이지혁 씨를 죽여야 하는데?"

    "살기 위해서!"

    "그럼 차라리 죽는 게 나아!"

    최정훈이 이를 드러내며 이지혁을 가리켰다.

    "안 보여? 지금까지 우리를 지키려다가 이제는 저 꼴이 됐어. 그런 사람을 죽여서까지 살아남겠다고? 개 같은 소리! 인간이 자신의 죽음을 선택할 수 있어서 인간이라면, 나는 차라리 여기서 죽겠어. 저 사람을 죽이고 인류가 살아남는다고 해서 그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데!"

    "오빠!"

    서아영이 막 소리를 지르려는 찰나, 칼날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꿈은 적당히 꾸는 게 좋아요."

    아펠드리체의 목소리였다.

    꿈?

    꿈이라고? 뭐가?

    "이지혁 씨와 함께 죽겠다는 감상에 빠지는 것은 꽤나 재미있는 발상이지만, 그럼 지금 그냥 자살을 해도 다를 게 없어요. 저건 이미 이지혁이 아니니까."

    아펠드리체는 더없이 냉정하게 말했다.

    "모습이 같다고 해서 향수를 느낄 거라면, 차라리 이지혁 씨의 사진을 봐요.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저건 지금까지 최정훈 씨가 알던 그 이지혁과는 전혀 다른 존재예요.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든 상관없지만, 저자가 당신을 조금이라도 생각할 것 같아요?"

    "……."

    "그리고……."

    아펠드리체가 어울리지 않게 이죽이며 말했다.

    "…죽일 방법이나 있으면 좋겠네요."

    서아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지혁은 인간일 때도 아흔아홉 번째 마왕이었어요. 때는 불멸의 존재라는 이점이 있기는 했지만, 그 이점을 뺀다고 해도 마왕이라는 격에 전혀 부족함이 없는 존재였죠. 그런데 그런 자가 지금 흑마력을 사용하기에 가장 적합한 존재가 되어버린 거예요."

    아펠드리체가 황금빛으로 빛났다.

    "얼마나 강할지… 대체 어느 정도의 힘을 보여줄지 모든 게 미지수인 거죠."

    서아영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일단은 지켜봐요."

    "일단은?"

    아펠드리체가 낮게 속삭였다.

    "뛰어들어야 할지도 모르니까. 어쩌면… 동맹의 대상이 하나쯤 늘어날지도 모르죠."

    "예?"

    서아영은 아펠드리체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최정훈은 정확히 이해했다.

    이곳에 그들이 손잡을 대상이라고는 단 하나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마족.

    아펠드리체는 지금 어쩌면 이지혁을 상대하기 위해 마족과도 손을 잡아야 할지 모른다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 * *

    바르바체는 자신이 만들어낸 마기의 소용돌이를 뚫고 들어오는 이지혁을 보며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만들어낸 마기의 소용돌이는 그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그 하나하나가 산을 가르고 바다를 갈라 버리는 위력과 날카로움을 지닌 기운들이 뭉쳐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런데 그 무시무시한 기운의 소용돌이를 향해 이지혁이 뛰어들고 있는 것이다.

    그게 왜 놀랍냐고?

    놀라울 수밖에!

    이지혁은 기본적으로 캐스터니까.

    이지혁이 가공할 존재였다는 것은 그도 인정한다. 마지막까지 그에게 도달한 적이 있었다고는 인정할 수 없지만, 적어도 인간의 힘으로 확고하게 마계의 정점까지 올랐다는 것은 인정해야 했다.

    하지만 그때도, 이지혁이 불멸의 존재였을 때도 달라지지 않은 사실은 이지혁은 마법사라는 것이다.

    이 세계로 돌아와 자신의 힘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을 때는 어쩔 수 없이 육체를 활용해야 할 때도 있었지만, 이지혁이 마나를 제대로 사용할 수 있던 이후로 단 한 번도 그는 마법사라는 본성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이지혁이 자신의 육체를 무기 삼아 그의 마기에 뛰어들고 있는 것이다.

    바르바체가 이를 꽉 깨물었다.

    '멍청한.'

    이지혁이라는 존재가 완전히 달라졌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이전까지 그에 대한 이미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전투를 준비하면서도 그의 행동이 지금까지의 이지혁의 전투 스타일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을 거라 지레짐작하고 만 것이다.

    세상 누구라도 이 판단에 있어서만큼은 바르바체를 탓하지 못할 것이다. 그만큼이나 이지혁은 예상과 다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카가가가가가각!

    바르바체의 마기가 찰나의 순간 수십, 수백, 수천 번이나 이지혁의 몸으로 쇄도한다. 하지만 그 어떤 기운도 이지혁의 주변에조차 닿지 못했다.

    '저건?'

    이지혁의 육체 주변을 투명하게 돌고 있는 기운들이 바르바체의 마기를 모조리 튕겨내고 있었다.

    바르바체조차 저 현상이 대체 어떤 원리로 생겨나고 있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이익!"

    막 바르바체가 마기를 강화해 이지혁의 몸을 짓이기려는 순간, 이지혁이 그 자리에서 퍽 꺼지듯 바르바체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바르바체가 눈을 부릅뜨고 주변을 살피려는 순간, 그의 귓가에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느려."

    우드득.

    압도적인 힘이 그의 팔을 움켜잡는다. 채 저항할 틈도 주지 않고 허리에 강렬한 일격이 틀어박혔다. 어깨 아래부터 허벅지 부근까지가 순간적으로 소멸되어 버린 것 같은 거대한 충격이 바르바체의 전신을 휩쓸었다.

    "크아아아악!"

    가공할 충격에 빛과 같은 속도로 튕겨 나간 바르바체가 바닥에 그대로 틀어박혔다.

    쿠우우웅!

    얼마나 강한 힘으로 튕겨나갔는지, 바르바체의 육체가 드릴처럼 바닥을 꿰뚫으며 한참을 지하로, 또 지하로 파고들어 갔다.

    "으아아아아!"

    대지가 폭발하듯 솟구치더니, 흙투성이가 된 바르바체가 땅거죽을 뒤집으며 솟아올랐다.

    "이지혀어어어억!"

    한 팔이 뜯겨 나간 바르바체가 이제껏 단 한 번도 없던 지독한 분노를 품고 이지혁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이지혁은 관심도 없다는 듯 한 손에 들고 있던 바르바체의 팔을 바닥에 던지고는 가볍게 짓밟았다.

    "한심한 수준이군."

    이지혁의 좌우로 목을 꺾었다.

    처음에는 붉은색으로 빛나던 그의 눈동자가 육체에 가득 들어찬 마기의 영향으로 완전히 검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눈동자와 흰자의 구분이 사라지고, 완연한 검은색으로 물든 눈은 이제껏 없던 기괴함을 느끼게 해주고 있었다.

    "흐음……."

    이지혁이 턱을 몇 번 쓸어내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거로군."

    고개를 들어 바르바체를 바라본 이지혁이 심드렁한 어조로 말했다.

    "마족이 된다는 건 꽤 불편한 일이군."

    "이이……."

    "생각해 보면 마족이란 건 같은 종족이란 이름으로 엮기에는 과할 만큼 개성이 다양하지. 같은 마나를 써도 어떤 놈들은 육체를 활용하고, 어떤 놈들은 마법에 강하지. 교육을 받지 않는 마족이 자신에게 가장 걸맞은 방향을 선택한다는 건, 본능적으로 자신이 어떤 방향으로 강해지는지를 안다는 거겠지. 그렇지?"

    바르바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머리는 지금 분노와 혼란으로 어지럽기 짝이 없었다.

    방심했다.

    분명 방심해서 벌어진 일이다.

    하지만…….

    방심하지 않았다고 해서 과연 조금 전의 그 일격을 막아낼 수 있었을까?

    '그렇다'라고 대답하고 싶지만, 과도하게 높은 그의 이성이 허락지 않고 있었다. 아무리 대비를 했다 하더라도 방금 전의 일격은 결코 쉽게 막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지혁."

    바르바체는 분노로 거의 자신을 잃을 지경까지 왔다.

    그리고 그 분노의 한 켠에서 이제껏 없던 흥분과 긴장이 그를 사로잡고 있었다.

    "크크큭. 그래그래! 이거지, 이거야! 내가 원하던 순간이다. 그 길고긴 외로움의 시간 속에서 내가 바라고 또 바란 그 순간이다!"

    이지혁이 바르바체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마치 이미 그는 이지혁의 관심사가 아니라는 듯이 말이다.

    "흐으음……."

    이지혁의 눈에 들어온 것은 두 마왕의 충돌이라는 거대한 사태 앞에 숨을 죽이고 있는 마수들, 그중에서도 이지혁을 따르는 마수 쪽이었다.

    "큭큭큭."

    이지혁이 마수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뭘 하려는 거지?'

    모두의 시선이 의문으로 물드는 그 순간.

    쿠우우웅!

    난데없는 충격파가 발생한다 싶더니, 마수들이 마치 배수관을 열어버린 욕조 속의 물처럼 이지혁을 향해 빨려들기 시작했다.

    "뭐, 뭐야!"

    서아영이 기겁을 하여 소리를 질렀다.

    카아아아아악!

    크라라라락!

    마수들이 비명을 질러 댄다.

    결코 두려움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 같은 마수들이 범을 본 하룻강아지처럼 발버둥치고 악다구니를 썼다. 발톱을 바닥에 박아 넣고, 피맺힌 울음을 지으며 저항했지만, 모든 게 부질없는 짓이었다.

    하늘로 날아오른 마수들의 육체가 이지혁이 내민 손을 향해 날아들며 저들끼리 얽혀들기 시작했다.

    끔찍한 비명 소리와 함께 마수들의 육체가 응축되고 뒤틀리며 조금씩 줄어들었다.

    뼈 부러지는 소리와 살이 터져 나가는 소리, 그리고 기괴하기 짝이 없는 비명 소리가 뒤섞여 귀를 틀어막게 만드는 악마의 음악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흐하하하하하핫!"

    이지혁이 그 광경을 보며 광소를 지었다.

    그리고 최정훈은 인정해야 했다.

    '아니야.'

    저건 아니다.

    저건 절대… 절대 이지혁이 아니다.

    절대.

    * * *

    우드드득! 우득!

    마수들의 육체가 이지혁에게 빨려 들어감에 따라 얽혀들고 짓눌렸다. 뒤틀리고 밀려 들어간 마수들의 육체가 어느 순간 육체를 통째로 갈아버린 것처럼 한줄기의 검은 덩어리로 변해가더니, 거기서도 더더 뭉쳐 들다 이내 검은 연기로 화해가기 시작했다.

    '마, 마기?'

    이 듣도 보도 못한 상황을 지켜보던 마족들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이지혁은 지금 마수들을 쥐어짜서 마기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어째서?"

    마왕들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마수들을 마기로 만들어낸 모습이 잔인하기 짝이 없어서?

    천만에.

    그런 것으로 잔인함을 느낄 마족들이 아니었다. 그들이 이지혁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저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짓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도 그렇겠지만, 마계에서 유일하다시피 순수한 흑마력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는 이지혁에게 저리 만들어진 불순한 마나는 아무런 가치가 없을 텐데?

    "후우우웁."

    이지혁이 자신의 손끝으로 몰려드는 검붉은 마력을 육체 안으로 빨아들였다.

    "그래, 이거군."

    이지혁이 키득대며 웃었다.

    "아무래도 나는 너희와 다른 모양이야. 그래, 인간이 마족이 되었는데, 평범한 마족이 될 리가 없지."

    이지혁의 주위로 검붉은 마나가 천천히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발끝에서부터 흘러나온 마력이 마치 불꽃처럼 피어올라 번져 나가는 연기처럼 휘돈다.

    이지혁의 육체로 빨려 들어가면 빨려 들어갈수록 조금씩 더 붉어지더니, 이내 피처럼 선명한 붉은색으로 화해갔다.

    쿠웅!

    쿠우웅!

    마수들이 점차 빨려감에 따라 아직 이지혁의 통제하에 있던 아이언 골렘들이 빛을 잃고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리고…….

    마지막에 남은 것은 황량한 대지뿐이었다.

    마수들이 채우고 있던 드넓은 공간은 애초부터 아무것도 없었다는 듯이 황량하게 비어버렸고, 그 중간중간에 빛이 바래 버린 아이언 골렘들이 쓰러져 몸을 바닥에 처박고 있었다.

    마치 무너져 버린 문명의 폐허처럼 말이다.

    "…지금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김다현은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지금 벌어지는 모든 일이, 그를 스쳐 가는 모든 순간순간이 하나같이 그의 상식과 이해를 벗어나 있었다.

    그들의 운명이, 세상의 운명이 뒤틀리고 있는 곳에 함께하고 있음에도 그저 방관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그의 속을 뒤집어놓고 있었다.

    '격이 달라.'

    하지만 인간에 불과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지혁이 인간이었을 때조차 그들은 전투를 도울 수조차 없었다. 그런데 그 이지혁이 인간이 아니게 되어버린 지금, 그들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니까……."

    윤혁규의 어이없어 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저 인간은 우리더러 저렇게 된 자기를 잡아 죽이라고 한 건가?"

    "그런가 본데?"

    "또라이 같은 놈."

    윤혁규가 황당하다는 듯이 웃어버렸다.

    저걸? 어떻게?

    이 계획은 전제부터 잘못되어 있었다. 이지혁이 바르바체를 죽일 정도로 강해졌는데, 그들이 무슨 수로 이지혁을 감당한다는 말인가.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윤혁규가 손을 내저었다.

    "그 정도 계산도 못할 사람은 아니죠."

    대답을 한 이는 김다현이 아니라 알파였다.

    어느새 회복을 하고 돌아온 알파가 흥미로운 얼굴로 이지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장난 아니네요."

    "…언제 왔어?"

    "방금요. 너무 안 늦게 돌아왔네요. 저 광경은 눈으로 직접 봐야 하는 광경이죠. 뭐라고 해야 할까…… 음, 좀 역겨울 정도로 굉장한데."

    "표현 참 더럽고 정확하네."

    알파가 키득대며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입은 웃고 있지만, 그의 눈은 조금도 웃지 않았다.

    '경이롭군.'

    이들은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 같지만, 지금 그들이 보고 있는 광경은 역사를 통틀어 생물이 도달한 가장 높은 곳이었다.

    인간으로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이지혁이라는 존재가 이제는 그 인간이라는 탈마저 벗어던지고 무력의 화신이 되어버린 것이다.

    "질투가 날 만큼 말이지."

    재능이라는 측면에 있어서 이지혁과 알파는 비교의 대상조차 아니었다. 아무리 이지혁이 강하다고 해도 그가 도달한 경지에 언젠가는 도달할 자신이 있던 알파다. 시간이 부족하다면 시간을 늘리고, 방법을 모른다면 방법을 배워서라도 말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알파는 이지혁이라는 존재가 그가 닿을 수 없는 곳으로 가버렸다는 것을 느꼈다. 비록 저 존재를 과거 그가 알던 이지혁이라고 부를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알파는 이지혁처럼 마족이 된다고 해도 결코 그처럼 강해질 수 없다. 마력에 대한 이해도가 다르고, 마력을 겪어온 시간이 다르다. 그가 이지혁과 같은 시간을 겪는다 해도 불멸이라는 이지혁 최대의 변수를 손에 넣지 못한다면, 이지혁과 동일한 마나 친화도를 쌓을 수는 없을 테니까.

    '이레귤러라는 말이 딱 맞군.'

    알파 역시 사람들로부터 비슷한 평가를 받는 자이지만, 알파의 의외성이 그 재능과 능력에 기인한 바라면 이지혁의 의외성은 시의성에 기인한 바가 컸다.

    마치 세상이 그를 강하게 만들려고 작정한 듯, 그에게 모든 조건이…….

    '잠깐?'

    알파가 고개를 갸웃했다.

    '세상이 그를 강하게 만들려 한다?'

    뭔가 감을 잡은 듯 알파의 미간이 극도로 좁아졌다.

    * * *

    "라트렐이여……."

    디오레 12세는 그의 신을 찬미할 수밖에 없었다.

    교황인 그조차도 반쯤은 의심할 수밖에 없던 말이 지금 실현되고 있었다.

    이지혁에게 붙은 멸망의 좌라는 말은 과도한 것일 수밖에 없었다. 힘이라는 것은 존재하는 것만으로는 위협이 되지 않는다. 그 힘이 의지를 가졌을 때, 힘은 위협이 되고, 무기가 되는 것이다.

    그가 지켜본 이지혁이라는 존재는 강대한 힘을 가진다고 해서 세상을 멸망으로 몰고 갈 이가 아니었다.

    라트렐의 말을 절대적으로 따르며 그녀를 찬미하는 그로서도 이 점만은 의혹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의 신은 결코 그에게 헛된 신탁을 내리지 않았다.

    '여기까지 보고 계셨던 것입니까?'

    그는 알 수 있었다.

    신성력과 신앙을 기반으로 살아가는 그의 눈에는 지금 이지혁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존재가 되었는지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전의 이지혁도 두려운 존재이지만, 이전의 이지혁을 두려워해야만 하던 이유가 단순히 그가 가진 힘이 파멸을 부를 수 있기 때문이었다면, 지금의 이지혁은 그 이유가 전혀 달랐다.

    느껴지지 않는다.

    인간의 온기가.

    아무리 악에 물들어 있는 인간이라고 할지라도 그 내면의 한구석에는 스스로가 인간임을 증명하는 온기가 숨어 있기 마련이다.

    하나 지금의 이지혁에게는 인간성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족에게서 느껴지는 음산함과는 또 달랐다. 지금 디오레 12세가 보고 있는 이지혁은 마치 무기물 같았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고, 아무것도 담아내지 못한.

    저 비어버린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서 이지혁이 무엇을 할 것인가.

    자신을 채우지 못한 존재는 결국 둘 중 하나의 선택을 내릴 수밖에 없다.

    자신을 채우려 들거나, 아니면… 다른 모든 것도 자신처럼 채울 수 없는 존재로 만들려 하든가.

    그렇다.

    이제 더는 저자를 이지혁이라 부를 수 없다.

    저건 말 그대로 살아 있는 멸망의 화신이다. 전해지는 역사와 신의 신탁으로도 이해할 수 없던 멸망의 좌라는, 충분히 넘칠 만큼 과도하던 그 이름이 지금 그 이유를 증명하고 있었다.

    "…라트렐이시여."

    그리고 결국 강림해 버린 멸망 앞에 디오레 12세는 그의 신을 찾아 흐느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하늘에 노을이 퍼져 나간다.

    핏빛으로 물든 노을은 너무도 섬뜩하면서, 또한 너무도 아름다웠다.

    지금부터 그들이 겪어야 할 멸망처럼 말이다.

    * * *

    "흐으음……."

    이지혁의 시선이 천천히 주변을 살핀다.

    '충동은 딱히 없는 것 같군.'

    스스로가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었다는 자각은 있다. 재미있는 것은 그 자각이라는 것이 감정적인 부분이 아니라 이성적인 부분이라는 것이다.

    마족이라는 존재가 되는 순간 인간에 대한 증오가 끓어오를 것이라 생각했지만, 우습게도 그는 지금 딱히 인간이라는 존재들에게 증오나 분노 같은 감정의 편린을 느끼고 있지는 못했다.

    그가 느끼는 것은 그저 거리감뿐이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설명을 못하겠군."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마치 마약 없이는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마약중독자가 하룻밤 잠을 자고 있어났더니 마약에 대한 격렬한 거부감과 구토감을 느끼며 하루아침에 마약을 끊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랄까?

    머리로는 그동안 왜 마약에 집착했는지, 마약을 손에 넣기 위해 무슨 짓까지 했는지 다 이해하고 있는데, 일순간 그 모든 짓거리가 멍청한 바보짓같이 느껴지는, 그런 순간.

    그래 그건 조금의 혼란이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아마 이 혼란이 잦아들겠지.

    그리고…….

    그 혼란이 어느 방향으로 잦아들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가 이렇게 되기 전에 예상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그전에…….'

    이지혁이 미소를 지으며 마족들을 돌아보았다.

    한 가지 다행이라고 생각되는 점은, 그가 마족이 되었음에도 저 저열한 마족 놈들에 대한 짜증은 조금도 가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마족이라는 개체는 결국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개체들이고, 서로에 대한 종족 의식이 없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저들에게는 불행한 일이겠지만 말이다.

    마수들을 짜부러뜨리며 받아들인 혈기가 그의 육체를 들뜨게 만들고 있었다.

    "아주 재미있는 장난이군."

    운명이란 게 있다면 아주 적절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의 몸은 흑마력을 다루기에 아주 적합했지만, 조금 더 근원적인 부분에 더 적합했다.

    생명체가 죽으며 뿜어내는 마이너스 에너지.

    흑마력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그 에너지.

    일반적인 마수들은 그 힘을 이용할 수는 있겠지만, 스스로 정제하지는 못한다. 정제한다 하더라도 마계가 스스로 정제하고 순환시켜 만들어내는 마력에 비할 바 없이 저열하고 적은 힘만을 얻을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지혁은 그걸 할 수 있다.

    마계가 해내는 것 이상 효율적으로.

    그리고 그것은 단 한 가지를 의미했다.

    "죽일수록 강해진다."

    그게 인간이든, 마족이든, 그 어떤 생물이든 말이다.

    이지혁이 낄낄대며 웃었다.

    멸망의 좌라…….

    아주 어울리는 말이다.

    그 멍청한 라트렐이 웃기지도 않는 별명을 붙여놨다고 생각했는데, 신은 신이라는 건지.

    인간이되 인간이 아니었고, 이제는 마족이되 마족이 아니게 된 그는 결국 그 어디에도 섞이지 못하고, 그 어디에도 안주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의 모든 것을 파멸시켜 그의 힘으로 만들 것이다. 그러고는 하나하나 세상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새로운 차원을 집어삼키는, 말 그대로의 멸망의 화신이 되어가겠지.

    자신의 운명을 직감한 이지혁이 조금 서글픈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그 얼굴은 이내 아득할 정도의 쾌감에 가득 찬 얼굴이 되어 즉각 아래쪽으로 뒤틀리듯 꺾였다.

    그의 시선에 닿은 마족들을 향해 이지혁이 입을 열었다.

    "자, 시작하자."

    영원히 끝나지 않을 전쟁을.

    * * *

    "부활?"

    크리스토퍼가 떨리는 눈으로 화면을 바라보았다.

    분명 죽었다고 생각한 이지혁이 지금 그의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다.

    "국장님, 이지혁 씨가 죽지 않았습니다! 살아 있어요!"

    "……."

    "그럼 그렇죠! 죽을……."

    "조용히."

    낮고 냉정한 크리스토퍼의 목소리에 열기가 끓어오르던 상황실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차갑게 식어버렸다.

    "국장님?"

    크리스토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영문을 모를 수밖에.

    마나를 과도하게 쓴 이지혁이 어떻게 되는지는 극히 일부만 아는 정보였으니까. 크리스토퍼조차 최근에 알게 된 사실이다. 굳이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을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해결할 방법이 없으니 아는 사람이 많아지면 불안감만 전염될 뿐이다.

    그렇기에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를 이 자리에서 아는 사람은 크리스토퍼밖에 없었다.

    '저건… 아니겠지.'

    비록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저 존재를 이지혁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이지혁의 말대로라면 저건 이지혁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결코 이지혁일 수 없는 존재였다. 기본적인 사고의 베이스가 다른 존재를 인간이라 할 수 없는 것 아니겠는가.

    '어떻게 움직일 거냐! 어떻게!'

    이미 저 존재가 이지혁이 아니라는 것은 빤한 일이었다. 중요한 것은 저 이지혁의 모습을 한 마족이 과연 어떤 성향을 보이는가였다.

    마족이 되어버린 이상 다른 마족들과 손을 잡는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원래 인간이었으니 마족이 되어도 인간에게 우호적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예측할 수도 없고, 재단할 수도 없는 존재를 앞에 두고 크리스토퍼는 처음으로 미지의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교전합니다! 교전! 이지혁이 바르바체의 팔을 뜯어냈습니다!"

    "해냈어!"

    "이긴다! 이지혁이 압도하고 있어!"

    마치 히어로라도 만난 듯이 환호하는 부하들을 보며 크리스토퍼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시가 끝을 뜯어내고 다급하게 불을 붙였다. 매캐한 시가 연기를 뿜어내며 크리스토퍼가 눈두덩이를 문질렀다.

    '최악이군.'

    전투라는 것은 단순히 누가 강한가로 결정 나지 않는다. 세상에는 체급과 강함을 뛰어넘는, 상성이라는 게 존재하는 법이니까.

    예전 이지혁이 마왕마저 때려잡는 세계 최고의 능력자였던 시절에도 크리스토퍼는 이지혁을 인류에 대한 위협이 될 거라고는 여기지 않았다.

    그가 정말 마음먹고 이지혁을 죽이려고 했다면 방법은 수천 가지가 되었을 것이다. 이지혁은 강대한 공격력을 가졌지만, 그에 걸맞은 방어력은 갖추지 못한 존재였으니까.

    대물저격총을 든 저격조 십여 명만 운용해도 순식간에 이지혁을 벌집으로 만들어 버릴 자신이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이지혁의 주변을 폭격해 버리면 그만이다. 사람인 이상 결코 그곳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인간의 과학과 무기는 마왕이나 마수들에게는 무력할지 모르지만, 같은 인간을 죽이는 것에는 최적화되어 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무기는 그걸 위해 발전해 왔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이지혁에게는 그것이 통하지 않았다.

    바르바체가 만들어낸 배리어를 뚫고 들어가 맨손으로 바르바체의 팔을 잡아 뜯었다는 말은 이미 이지혁의 육체가 인간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무언가로 변해 버렸다는 뜻이다.

    이제 인류의 기술로는 저 이지혁을 공격할 방법이 없었다. 바르바체에게 그 어떤 공격도 통하지 않았듯이.

    크리스토퍼는 절망이 어린 눈으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대체 그가 저자를 어찌 대해야 한다는 말인가. 지금 당장은 바르바체와 대적하고 있다. 그러니 인류를 구원하러 내려온 인류의 구원자로서 이지혁이 다시금 태어났다고 해야 하는가?

    아니면…….

    "클로즈업해 봐."

    "예?"

    "…당겨보라고, 얼굴 쪽으로."

    "알겠습니다."

    멀리서 이지혁을 찍고 있던 화면이 줌인되더니, 이지혁의 얼굴이 화면 가득 잡혔다.

    "아……."

    "저, 저거?"

    경악에 가까운 탄성이 흘러나왔다.

    크리스토퍼는 자신의 예감이 맞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차라리 틀렸으면 좋았으련만, 안타깝게도 적중률이 그리 높지 않던 그의 예감이 완벽하게 맞아떨어지고 있었다.

    "빌어먹을."

    드러난 이지혁의 얼굴은 도저히 인간의 그것이라 할 수 없었다. 딱히 이전과 다를 것 없는 얼굴이지만, 그 얼굴에 드러나 있는 표정은 사람이 지을 수 없는, 섬뜩하기 짝이 없는 얼굴이었다. 지금까지의 이지혁에게서는 단 한 번도 볼 수 없는 얼굴이다.

    "어, 어떻게 합니까?"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것인지, 상황실에 혼란이 찾아왔다.

    "일단은 대기한다."

    "…또입니까."

    크리스토퍼는 대답하지 않았다.

    같은 말의 반복.

    대기한다. 기다린다. 지켜본다.

    판단이라는 것은 내가 무엇을 해야 최선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에 대한 고찰이다. 하지만 지금 크리스토퍼와 인류는 그 어떤 행동으로도 결과를 바꿀 수 없었다.

    그렇다면 변수가 생기지 않도록 그저 기다릴 수밖에 없다.

    시시각각 변해가는 현장의 상황을 보면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기다린다는 말을 되뇌며 그저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 * *

    "오빠?"

    이예원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화면을 바라보았다.

    움직인다.

    이지혁이 움직이고 있었다. 화면 너머로까지 숨이 멎어버렸다는 것이 너무도 확연하게 느껴진 그 이지혁이 지금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어, 엄마! 오빠가! 오빠가 살아났어! 엄마!"

    기쁨에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엄마! 저기!"

    이예원이 기쁨에 화면 안에서 움직이는 이지혁을 가리켰지만, 박선덕은 가만히 손을 뻗어 이예원의 손을 잡고 내리눌렀다.

    "엄마?"

    이예원이 영문을 모른 채 박선덕을 돌아보았다.

    "아니야."

    "응?"

    "네 오빠 아니야."

    "…엄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이예원은 박선덕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저기 분명히 이지혁이 살아 움직이고 있는데, 지금 그녀의 어머니는 무슨 말을 하고 있단 말인가.

    "엄마…… 오빠잖아. 저기……."

    "예원아."

    박선덕이 이예원의 손을 꼭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처연하고 힘없이 말이다.

    "아니다. 저건 네 오빠가 아니야."

    "엄마."

    "내 새끼야."

    박선덕이 입술을 살짝 깨물고 말했다.

    "아무리 오래 떨어져 있다고 해도 내 배 아파 내가 낳고 기른 내 새끼야. 그런데 엄마가 내 새끼 하나 못 알아보겠니."

    박선덕의 목소리는 확신과 서글픔이 동시에 담겨 있었다.

    "아니야. 같은 모습 하고 있어도 저건 지혁이가 아니야."

    "엄마……."

    이예원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박선덕의 말이 대체 뭘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박선덕의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무작정 그녀를 다그칠 수도 없었다.

    그러니 그저 바라볼 수밖에.

    살아 움직이고 있는데.

    그녀의 오빠가 저리 살아 움직이고 있는데, 그게 오빠가 아니라니. 그 말을 대체 어떻게…….

    이예원이 입을 다물었다.

    바짝 다가간 화면으로 이지혁의 얼굴이 보인다. 그 순간, 이예원은 박선덕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단숨에 이해할 수 있었다.

    아니다.

    저건 이지혁이 아니다.

    이지혁은 까탈스럽고, 까칠하고, 때로는 짜증 날 정도로 사람을 열 받게 만드는 사람이지만, 결코 사악하거나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저 얼굴은…….

    이예원이 입술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오빠의 몸을 다른 무언가가 차지한 것이다. 그녀의 오빠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그럼…….

    그럼 이지혁은 어떻게 되는 거란 말인가.

    혼란과 참을 수 없는 절망이 동시에 그녀를 뒤흔들기 시작했다. 박선덕은 아무 말 없이 떨리는 그녀의 어깨를 가만히 안아주었다.

    "괜찮아."

    "엄마……."

    "괜찮아."

    박선덕이 이예원의 어깨를 꽉 끌어안았다.

    슬퍼할 일이 아니다.

    이미 그녀는 이지혁을 떠나보냈으니까.

    하지만…….

    차마 더 이상은 이지혁의 모습을 바라보지 못한 박선덕이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저건 죽음보다 더 서글픈 일이다.

    죽어서도 쉬지 못하는 아들을 지켜본다는 것은 그녀에게 있어서도 죽음보다 더한 형벌이었다.

    '너무 가혹합니다.'

    박선덕은 존재하지도 않을 이세계의 신을 원망했다.

    * * *

    이지혁의 손이 움직이는 그 순간까지도 마족들은, 그리고 마왕들은 이지혁이 무슨 짓을 하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 역시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으니까.

    인간들이 마족이 되어버린 이지혁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하는 것처럼, 마족이 되어버린 이지혁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판단을 내리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이전에 마족이 된 인간들도 있지 않았냐고?

    마족이 된 인간은 존재했다. 하지만 마왕이 된 인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더구나 이지혁은 마족이 되기 이전에 마왕이던 존재다. 그런 이가 인간에서 마족으로 화했으니, 대체 저 존재를 어찌 평가하고, 어찌 대해야 할지를 도통 알 수가 없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어엇?"

    이상을 느낀 것은 그즈음이었다.

    몸에서 뿜어져 나온 피처럼 붉은 기운들이 이지혁의 어깨를 타고 올라 뻗어 나갔다. 그러고는 세상을 붉게, 아주 붉은 핏빛으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마치 노을처럼 말이다.

    '저건?'

    이지혁은 마족이 되었다.

    원인과 과정을 제외하면 저곳에는 그들과 그리 다르지 않은 마족 하나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리 생각하지 못했다.

    저게 그들과 같은 존재라고?

    저게?

    그럴 리가.

    저토록이나 이질적인데.

    저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저 붉은 기운의 정체가 무엇인지 이해조차 할 수 없었다.

    인간들이 이지혁이 자신들과 다른 존재라는 것을 직감했듯이, 마족들 역시 이지혁이 단순히 마족이 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저걸 대체 뭐라 불러야 하는 걸까?

    아펠드리체가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돌연변이."

    "…네?"

    서아영의 되물음에 아펠드리체가 냉소하듯 말했다.

    "가끔 지혁 씨는 자신을 그렇게 부르며 자학하고는 했죠. 그의 언어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던 저로서는 알 수 없는 말이었지만요. 이 세계의 정보를 받아들인 이후에야 그 자조가 얼마나 깊고 외로운 것인지 이해할 수 있었죠."

    "아……."

    "하지만 그 말은 틀린 거였네요."

    서아영이 의문 어린 눈으로 아펠드리체를 바라보았다. 마치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듯이 말이다.

    "돌연변이가 아니에요. 당시의 이지혁 씨나 지금의 이지혁 씨를 표현하는 데는 이 세계의 언어 중에서도 당신들의 언어가 아닌 다른 나라의 언어가 더 잘 어울리는 군요. 이지혁 씨도 그랬죠. 자신은 그저 이레귤러라고."

    "……."

    서아영은 입을 꾹 닫았다.

    그들 역시 때때로 이지혁을 그리 불렀다.

    "예전에 그 말은 그저 보통 인간이 처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버린 자신을 자조하는 말이었다면…… 이제는 말 그대로 그가 이레귤러가 되어버렸네요. 인간도 아니고…… 마족도 아닌."

    아펠드리체의 눈동자는 흔들리지 않았다.

    마치 감정을 끊어낸 듯 딱딱하기만 했다. 아무리 이지혁의 모습을 하고 있어도 결코 저자는 이지혁이 아니라는 듯이 말이다.

    "재앙이네요."

    "어째서요?"

    "아마…… 어디에서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할 테니까."

    "네?"

    아펠드리체는 말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 * *

    서아영이 그녀의 말을 알아들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저 사람의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이런 거였군요.'

    아펠드리체가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더는… 더는 참아낼 수가 없다.

    드래곤인 그녀는 그를 이해할 수 없다.

    이해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를 이해한다는 것은 같은 수준과 같은 사고를 하는 인간끼리도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애초에 종족이 다른 그녀와 이지혁이 어찌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저 짐작할 뿐이다.

    그러리라고.

    하지만 이성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일을 동조하는 과정에서는 반드시 한 가지가 동반된다.

    상대방에 대한 멸시.

    '그가 나만큼 이성적이고 똑똑하다면 결코 그럴 리는 없겠지만, 그러지 못하니 저럴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하는 과정.

    초기의 아펠드리체 역시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지혁이 왜 그러는지는 알 수 있지만, 그건 그저 어리석음의 다른 발현일 뿐이라 생각했다.

    혐오스러운 것은 그때의 자신이다.

    몰이해, 자신에 대한 맹신.

    전혀 이해하지 못했으면서 이해하는 척, 자신의 몰이해를 받아들일 수 없기에 이해의 대상을 희화화해 버리는 짓거리.

    단 한순간이라도 저 사람을 그런 눈으로 바라보았다는 것이 아펠드리체를 견딜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저 사람을 말이다.

    그저…….

    그저 자신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차원의 미아가 되어 영원의 세월을 살지도 죽지도 못하게 될지 모르는 위험을 감수하며 이 세계로 돌아온 사람을.

    수천 년의 세월 동안 그 누구와도 대화해 보지 못하고 그 누구와도 이해해 보지 못하고 살아온 이를 말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수만, 수억 번을 더 자살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지혁에게는 그 죽음마저 허락되지 않았다. 그에게 허락되는 것은 온전한,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는 정신으로 단 한순간도 그를 놓아주지 않는 외로움을 그저 버티고 또 버티는 것이었다.

    그가 가장 두려워한 것은 죽음도, 고통도 아니고… 외로움이었다.

    그래서…….

    그래서 서글프다.

    외로움을 버티고 또 버텨 여기까지 와버린 사람이 또다시 세상 누구도 그를 이해해 줄 수 없는, 혼자뿐인 존재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이 말이다.

    '다시 또 혼자가 되어버렸네요, 당신.'

    아펠드리체는 망연한 눈으로 말없이 이지혁을 바라보고 또 바라봤다.

    * * *

    움직인다.

    이지혁의 손이 살짝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르바체는 그 광경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다르다.'

    마나의 유동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상한 일이다.

    지금 이지혁의 발아래에는 홀이 열려 있다. 그리고 그 홀에서 막대한 흑마력이 이지혁의 몸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이지혁에게서는 마나의 유동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 말인즉, 지금 이지혁의 몸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저 붉은 기운은 마나가 아니라 전혀 다른 무언가라는 뜻이었다.

    '저게 가능한 일인가.'

    어떠한 힘이 다른 힘으로 전환되는 것은 그리 새로운 일이 아니다.

    그들 역시 생물이 만들어내는 마이너스 에너지를 흑마력으로 전환하니까.

    하지만 마나를 제3의 기운으로 만들어 사용한다는 것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일이다.

    저게 가능한 이유는 이지혁이 마나를 완전히 이해한 캐스터이기 때문인가, 아니면 그가 이제껏 없던 마족이기 때문인가.

    '뭐, 알 필요도 없는 일이지.'

    중요한 것은 새로운 기운을 만들어냈다는 것이 아니라, 그 기운으로 뭘 할 수 있느냐다.

    이지혁의 어깨 위에서 넘실거리던 붉은 기운이 그의 양손에 몰려들어 일렁인다.

    이지혁의 손이 천천히 들어 올려려 마왕들이 모여 있는 곳을 가리켰다.

    "뭘 하려……."

    이지혁의 손에 지목된 마왕이 막 경계를 하려는 찰나.

    우웅!

    바닥에서 붉은 용암 같은 기운들이 하늘 위로 솟구쳤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

    그건 마치 아래에서 쏘아진 폭발이었다. 바닥에서 솟아오른 기운은 순식간에 하늘을 꿰뚫고 닿지 않는 곳까지 뻗어가더니, 이내 그런 적이 없었다는 것처럼 깨끗하게 사라져 버렸다.

    "……."

    마왕들의 고개가 기운이 솟구쳐 오른 곳을 향했다.

    없다.

    아무것도.

    심지어는 기운이 뚫고 나온 바닥조차도 조금의 변화가 없었다. 마치 지금 그들이 본 것이 환상이라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환상일 리가 없다.

    결코.

    모든 것이 사라졌으니까.

    그곳에 애초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분명 마왕이 존재했다. 하지만 붉은 기둥이 나타났다 사라진 그곳에는 마왕의 존재가 처음부터 없던 것처럼 사라져 있었다.

    마치 지옥의 혀가 마왕을 움켜쥐어 지옥으로 끌고 가버린 것처럼 말이다.

    마왕들조차 할 말을 잃었다.

    그들은 자신의 강함을 절대적으로 믿는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자신들보다 강한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 그들의 앞에는 같은 마왕이되 그 격이 다른 바르바체라는 존재가 있고, 인간이되 그들을 능가한 이지혁의 존재도 있었다. 이미 지고하다고 칭해져야 할 강함은 몇 번이고 목격했다.

    하나…….

    이건 다르다.

    이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달랐다.

    바르바체가 강하다고는 하나 그가 왜 강한지는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지혁이 강하다고는 하지만, 그의 강함이 어떠한 원리로 이루어지는 것인지 모르지 않았다. 안다고 해도 따라 수 없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 그들은 이지혁이 대체 얼마나 강한지, 어째서 저리도 강한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상대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이내 공포라는 감정이 되어 그들을 스멀스멀 잠식하기 시작했다.

    사라졌다.

    그들의 동료가.

    일순간 마치 잡몹처럼 아무것도 해보지 못하고 목소리 한 번,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그 어마어마한 일을 만들어낸 당사자는 지금 영 마음에 안 든 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손을 털어내고 있었다.

    "미묘하군."

    이지혁은 자신이 만들어낸 광경에 눈을 찌푸렸다.

    컨트롤이 아직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새끼 사슴이 어미 배에서 태어났을 때부터 네 다리를 가지고 태어나지만, 그 다리로 일어서기 위해서는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겪어야 하는 것처럼 지금 이지혁은 자신의 새로운 육체에 적응하는 중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오로지 하나.

    '과도하게 민감하고 예민하군.'

    이 정도 힘을 뭉치면 아무리 뭉친다고 해도 건물 하나 정도는 날려 버릴 크기가 나올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의 마나 컨트롤 능력이 과거와는 비할 바 없이 높아지다 보니 겨우 사람 하나 들어갈 공간 정도의 폭발을 만들어내고 말았다.

    물론 그 위력은 커다란 폭발에 비할바가 아니겠지만 말이다.

    "생각한 것 이상의 위력을 제멋대로 뿜어내는군. 몸뚱아리를 통제하는 게 영 쉽지 않겠어."

    이지혁이 키득키득 웃었다.

    하지만 뭐 어떤가.

    약한 것보다는 강한 것이, 효율이 떨어지는 것보다는 효율이 높은 것이 천배, 만 배는 낫다.

    이지혁이 손을 털어냈다.

    '자아, 이제 어떻게 할까?'

    예전이었다면 그가 싸울 수 있는 방식은 오직 하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는 캐스터, 마법사이자 소환사.

    앞쪽에 그가 지배하는 권속들을 수도 없이 깔아 바리게이트를 치고, 뒤쪽에서 대단위 마법을 펑펑 날려 대는 것이 그가 가장 선호하는 전투의 방식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방식이 별 의미가 없다.

    지금까지 그 방법을 사용해야 했던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마법사니까 육체가 약해서?

    천만에.

    과거의 이지혁은 불멸의 존재였다. 단순히 육체만 따지면 지금의 이지혁도 과거의 이지혁을 상대할 수 없다. 결코 무너지지 않고 순식간에 재생하는 육체를 가졌던 이지혁이 상처와 공격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었다.

    그가 그러한 방식을 써야만 한 이유는 육체의 강건함 때문이 아니라, 캐스팅 시간의 확보 때문이었다. 아무리 강해진다고 한들 그는 인간. 마족들처럼 마력을 직접적으로 활용하여 공격하는 방식은 불가능했으니까.

    하지만 이제 그런 제약은 사라졌다.

    이지혁은 지금 마치 재미있는 장난감을 손에 넣은 아이 같은 기분이었다.

    그동안 머리로만 생각하고 실행해 볼 수 없던 수많은 공격 방법이 머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뭘로 시작할까?"

    키득대던 이지혁의 눈이 검붉게 빛났다.

    "시작은 클래식한 게 좋겠지."

    이지혁의 우수가 머리 위로 올라갔다.

    "어?"

    최정훈은 자신의 눈을 비볐다.

    뭔가 벌어지고 있다.

    하지만 대체 뭐가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확실하게 알 수 없었다.

    '붉어.'

    세상이 살짝 붉어진 느낌이다.

    착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아무리 이지혁이 전능에 가까운 힘을 손에 넣었다고 한들 세상의 색을 바꿀 수는 없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자 최정훈은 자신이 착각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세상이 붉어진 것도 아니었다.

    이지혁의 앞쪽에 붉은 기운들이 미세하게 뿌려지고 있었다. 워낙 범위가 넓고 커서 세상이 붉어진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뭘 하려고……."

    최정훈의 머릿속으로 기억 속 아득하던 광경이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저건…….

    서아영이 최정훈의 팔을 꽉 움켜잡았다.

    "본 적 있는 거죠?"

    최정훈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대한 반구.

    너무나 거대해서 그저 세상을 반으로 갈라놓은 거대한 벽처럼 보이는 반구가 앞쪽을 뒤덮고 있었다.

    카라라라라라!

    카아아악!

    마수들은 주변을 뒤덮는 거대한 붉은 구에 당황하기 시작했다. 마계에서도 단 한 번도 볼 수 없던 현상이다.

    짙어진다.

    더더욱 짙어진다.

    처음에는 투명한 수준이었던 붉은 반구가 서서히 붉음을 더해가더니, 이내 시야로는 뚫을 수 없는 선명한 막이 되어버렸다.

    안쪽에서 바라보면 세상 전체가 붉게 물들어 있을 터.

    마치 거대한 돔 경기장 안에 들어가 있는데 외벽이 모두 붉게 칠해져 있는 것 같은 느낌일 것이다.

    문제는 이건 경기장도 아니었고, 눈이 시릴 만큼 붉은 저 벽은 결코 페인트 따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라진다.

    시야가, 그리고 빛이.

    이지혁이 만들어낸 거대한 붉은 기운의 막이 세상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빛이 들어오지 못하는 곳에서 자리할 수 있는 것은 깊디깊은 어둠뿐이었다.

    칠흑 같은 어둠.

    아니, 선명한 붉은 어둠이었다.

    "얄팍한 짓을!"

    마왕들이 막 그들을 감싼 벽을 꿰뚫으려 할 때, 그 일이 일어났다.

    마왕들의 몸이 움찔한다.

    들린다.

    소리가.

    짐승의 울부짖음과는 다른…….

    마치 세상 다시 없이 거대한 뱀 안에 삼켜져서 그 안에서 그 뱀의 심장소리를 듣는 것처럼 더없이 끔찍하고, 더없이 섬뜩한.

    위협하는 소리.

    절규하는 소리.

    그리고 고통에 겨워하는 소리.

    비명과 악다구니, 위협음.

    마왕들의 눈이 당혹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대체 무슨 일을 벌이는 건가?"

    어둠이 두려울 리가 없었다. 그들은 마족. 태초부터 어둠과 함께하는 존재들이다. 하지만 이지혁이 지배하고, 이지혁이 만들어낸 어둠은 그들이 알고 있는 어둠과는 조금 달랐다.

    좀 더 음산하고, 좀 더 끔찍하다.

    그리고 마왕들은 보았다.

    너무도 어두워 이제는 그 경계마져 제대로 찾을 수 없는 벽면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오고 있었다.

    게걸스럽고.

    괴이하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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