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109화 (109/118)
  • [■] 사람이라는 것은 미련을 버릴 수 없는 존재로군 [■]

    ─────

    '죽겠군.'

    이지혁은 무너지기 시작하는 육체를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일백 개가 넘는 드래곤 하트를 쏟아부어 얻어낸 잠시의 권능도 이제 그 힘을 다해가고 있었다.

    어차피 도핑이나 다름없는 지금의 상태가 오래 유지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짧은 시간 내에 어떻게든 바르바체를 쓰러뜨리고, 그의 존재를 소멸시켜 버리는 것이다.

    '그게 쉬울 리가 없지.'

    마왕이란 존재들은 하나같이 인간의 상식을 벗어나는 이들이다. 이지혁이 그들을 상대할 수 있던 이유는 그 역시 인외(人外)의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그는 급격하게 인간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바르바체가 힘을 전혀 잃지 않은 것과는 반대로 말이다.

    "하, 젠장."

    이지혁이 허탈하게 웃어버렸다.

    "저기서 완전 회복해 버리는 건 반칙이지."

    쏟아부을 수 있는 것은 모두 쏟아부었다. 조금 전에 날린 일격은 지금까지 그가 사용한 모든 마법과 공격을 통틀어 최강의 수법이라고 자부할 수 있었다.

    과거처럼 대단위 마법을 소나기처럼 쏟아부을 수 있을 정도는 아니지만, 단발의 위력으로 따지자면 한 번도 이 이상의 힘을 써본 적이 없었다.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바르바체는 이지혁이 만들어낸 회심의 일격을 아주 간단히 받아내고 있었다. 마왕 중의 마왕이라는 말이 괜히 붙은 것이 아니라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지금…….

    턴이 넘어갔다.

    콰아아아아아아!

    솟구치는 바르바체의 마기를 바라보는 이지혁의 눈이 떨리고 있었다.

    '저게 가능한가?'

    이지혁은 마계의 코어에 인을 박아 넣고 그곳으로부터 직접 마력을 공급받고 있었다.

    하지만 저들은 마기를 내부에 축적한 채 주변의 마기를 이용하는 수준일 뿐이다. 어느 단계가 더 수준이 높고, 어디가 더 효율적인지는 굳이 말로 설명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이지혁은 허탈하게 웃었다.

    기관총을 든 한 명의 병사가 활과 화살을 든 일천을 상대로 이길 수 있을까? 일만을 상대로는?

    지금 바르바체가 하고 있는 짓거리가 딱 그런 식이었다.

    효율?

    그런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맥이 탁 풀리는 거대한 마기의 폭풍 앞에서 이치와 논리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마치 마기가 거대한 바다처럼 요동치고 있는 것 같았다.

    가장 오래되고, 가장 긴 삶을 살아온 마족의 육체 안에는 무한의 마나가 넘실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 그 마나가 바르바체의 육체라는 구속을 벗으며 세상으로 밀려나오고 있었다.

    새까만 마나가 하늘로 솟구친다. 그리고 다시… 다시 떨어진다.

    올라가던 속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속도로 말이다.

    "이번에는 내가 선물을 줘야겠지."

    바르바체가 비릿한 미소를 입에 담았다.

    "자, 막아봐라, 인간들이여. 나를 실망시키지 말고 말이다."

    하늘에서 유성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마나가 마치 암석처럼 뭉쳐 들어 가공할 속도로 바닥으로 내리꽂힌다.

    하나가 아닌 수십, 수백, 아니, 수천수만.

    검은 비가 내리듯이 끝도 없는 유성의 비가, 마력이 응축된 유성의 비가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메테오 샤워의 원형인가?'

    "낄낄낄."

    이지혁이 말도 안 된다는 생각에 웃어버렸다. 마나를 집중시켜 쏘아내는, 그런 잡스러운 마법이 감히 비교될 수준이 아니었다.

    저것은 절망이고, 암흑이요, 그리고 파멸이었다.

    "으아아아아아!"

    이지혁의 전신에서 기운들이 줄기차게 뿜어져 나온다.

    오른손은 마기, 그리고 왼손에서는 에테르, 육체 주변에서는 마나가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모아낸 거대한 기운들이 휘말리고 얽혀들며 머리 위로 올라간다.

    그러고는 좌우로 퍼진다.

    세 가지 색이 섞인 거대한 기운의 우산이 인간들의 머리 위를 뒤덮었다.

    "지원해라아아아아아!"

    디오레 12세가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질렀다.

    그 역시 직감한 것이다. 저것이 바닥에 떨어지게 되면 막을 수가 없다. 인간의 육체 따위는 아무리 신성력의 가호를 받는다고 해도 일순간 먼지 조각으로 분해되어 버릴 것이다.

    "라트렐이여!"

    "베라프를 위하여!"

    디오레 12세를 중심으로 신성력이 모이기 시작했다. 새하얀 광휘처럼 빛나는 신성력이 하늘을 뒤덮는다. 그 파괴력이야 마나에 미치지 못하겠지만, 방어력만큼은 마나 따위라 칭할 수 있을 만큼 신성력의 장벽이 빛나는 막을 이루었다.

    라트렐을 믿는 자뿐 아니라 다른 교단의 신관들도 기운을 모아 방어막을 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마기의 유성이 막에 충돌하기 시작했다.

    "끄으으으으윽!"

    이지혁의 입에서 피가 분수처럼 토해져 나왔다.

    막을 수 있다.

    그가 만들어낸 방어막이 바르바체의 공격을 확실하게 막아내고 있었다.

    방어막과 충돌한 마기의 유성이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지만, 그의 방어막은 흔들림 없이 그 기운들을 막아내고 있었다.

    하나 이대로는 끝이 없다.

    "으아아아아아아!"

    아무리 막아도, 막고 또 막아내도 유성은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한 발, 한 발을 아무리 막아내도 유성의 비는 그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우드드득!

    이지혁의 몸이 마치 프레스에 눌린 것처럼 우그러지기 시작했다. 허공을 딛고 있던 몸이 바닥으로 처박히고, 그에 멈추지 않고 바닥을 파고들어 간다.

    우드드득.

    살이 터지고, 뼈가 으스러진다. 직접 그 마기를 상대하고 있는 것이 아님에도 그 압력만으로 육체가 버텨내지 못하는 것이다.

    "쿨럭!"

    입을 닫을 수도 없다.

    대체 몸 안에 어떻게 이리도 많은 피가 있는지 의아할 정도로, 입을 터뜨려 버릴 기세로 피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콰득, 콰드득, 콰득.

    버티지 못한 육체가 갈라지고 찢겨진다.

    드래곤 하트가 미친 듯이 힐을 뿌려 댔지만, 몸이 붕괴하는 속도가 회복되는 속도보다 몇 배는 더 빨랐다.

    이것은 불멸이 아니다. 과거 먼지 한 톨 남기지 않고 무너진 육체조차도 재생할 수 있던 이지혁이지만, 지금은 그런 수준의 원형 복원은 불가능했다. 이 이상 대미지가 들어오면 소멸 이외에는 남는 것이 없다.

    "아아아악!"

    결국 버티지 못한 이지혁은 들어 올린 손을 내리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하늘을 뒤덮고 있던 이지혁의 방어막이 소멸된다.

    신관들이 만들어낸 방어막은 유성 하나도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다. 마치 쏟아지는 비 아래의 비눗방울처럼, 유성에 맞은 방어막들이 픽픽 터져 나간다.

    "아아……."

    디오레 12세의 눈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그만큼이나 막아냈음에도 하늘을 새까맣게 뒤덮은 유성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은 듯했다. 그리고 그 유성은 지금 그들을 향해 쏟아지고 있었다.

    "으아아아아아!"

    바닥에 반쯤 박혀 들어간 이지혁이 양손을 쫘악 펼쳤다.

    우우우웅!

    세상을 찢어발기는 듯한 진동음과 함께 그들의 머리 위로 거대한 홀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지혁!"

    디오레 12세가 고함을 질렀다.

    그러고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꾹 다물었다.

    목숨이 엇갈리는 순간 그들의 눈앞에 일어난 이적을 보며, 그는 라트렐이 아니라 이지혁의 이름을 불러 버린 것이다.

    상식적으로, 이성적으로 생각한다면 당연한 반응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는 결코 상식으로 세상을 판단해서는 안 되는 자였다. 그는 이미 모든 것을 라트렐에게 봉헌한 라트렐의 종이었으니까.

    '어찌 이리 불경한 짓을!'

    디오레 12세의 꽉 깨문 입술이 찢어지며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와 동시에 그의 신심을 흐트러뜨린 이지혁은 전력을 다해 인류의 머리 위에 시커먼 게이트를 만들어냈다.

    콰아아아아아!

    유성들이 게이트 안으로 빨려들 듯 사라진다. 그 장엄한 광경을 보며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비처럼 쏟아지던 유성들을 모조리 빨아들인 게이트는 순식간에 소멸해 버렸고, 아무도 입을 열지 못하는 공간에는 이지혁의 거친 숨소리만이 울려 퍼질 뿐이었다.

    "허억! 허억! 허억!"

    이지혁이 바닥을 겨우 짚고 엎드려 거친 숨을 토해낸다.

    "…이지혁 씨."

    최정훈의 눈에 습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럴 순간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다. 지금은 감상에 빠질 때가 아니다. 하지만 지금 이지혁의 모습은 이곳에서 가장 냉정해야 할 최정훈마저도 치밀어 오르는 비애를 어찌할 수 없게 만들어 버렸다.

    새하얗게 새어 버린 머리카락, 갈기갈기 찢겨 나간 옷들 사이로 보이는 육체는 마치 거미줄처럼 상흔이 그어져 있었다. 앙상하게 말라 버린 육체가 지켜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침음성을 이끌어낸다.

    소진.

    더 이상은 육체를 재생하지 못하고 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마왕들의 앞을 막아선 이지혁마저 이제는 그 힘이 다한 것이다. 바르바체의 단 일격을 막아내는 것만으로 말이다.

    "서글픈 일이지."

    그 광경을 보며 바르바체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

    "때로 세상이라는 것은 너무도 잔인하지. 그렇지 않나?"

    바르바체의 시선은 오로지 이지혁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너희 인간들은 약육강식이라는 말에 분노하더군. 재미있는 일이지 않은가. 원래 너희가 분노해야 할 것은 약육강식의 세상이 아니라 태어나는 순간부터 강함과 연약함이 나뉘어 버리는 불공평일 텐데 말이야."

    "허억, 허억……."

    바르바체가 양팔을 벌렸다.

    "자, 봐라. 너는 인간으로서 그 누구보다 노력해 왔다. 인간이 아니라 태초에 이 세계가 생겨난 이후로 너 이상으로 강해지기 위해 발버둥을 친 생물은 존재하지 않을 거다. 하지만 그 결과는 고작 이것이지. 애초에 인간으로 태어나 버린 한계가 그것이다."

    바르바체가 낮게 웃었다.

    "막아냈다고 생각하나?"

    콰아아아앙!

    폭발.

    마나의 폭발이 주변을 휩쓴다. 그 폭발에 휩쓸린 이들은 그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다. 인간도, 마수도, 드래곤도.

    반경 십여 미터에 이르는 작은 폭발이었을 뿐이다.

    그 폭발 안에 있던 이들에게 주어진 것은 그저 소멸. 세상에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던 것과 같은 완전한 소멸뿐이었다.

    "막아냈다고?"

    콰아아아앙!

    연쇄적으로 폭발이 일어난다.

    보이지도 않는다. 무언가가 날아드는 것도 아니다. 그저 제자리에서 폭발이 터진다. 그리고 그것에 휘말리는 이들에게는 자각조차 하지 못하는 죽음이 부여되었다.

    적어도 지금 이곳에서 바르바체는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생사여탈권을 움켜쥔 신과 다름없었다.

    "아니, 아니겠지."

    바르바체가 가만히 이지혁에게 걸어갔다. 엎드려 숨을 몰아쉬고 있는 이지혁의 바로 앞까지 다가간 바르바체가 그 앞에 쪼그려 앉아서 이지혁의 어깨를 두드렸다.

    "너도 알고 있겠지. 방금 전의 공격은 내게 있어서는 그저 손을 휘두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이야. 손은 얼마든지 다시 휘두를 수 있어. 그렇지만 너는 이제 더 이상 나를 막을 수가 없겠지."

    그 목소리에는 어울리지 않게도 조금의 비애마저 어려 있었다.

    "이 감정을 뭐라고 해야 할까?"

    바르바체가 엎드려 있는 이지혁을 가볍게 걷어찼다. 이지혁의 몸이 뒤집어지자, 그 목을 지그시 밟은 바르바체가 일그러진 이지혁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그래. 너희 인간의 말로 설명하자면, 이건 슬픔이라고 해야겠군. 나는 지금 몸서리가 처질 정도로 슬픈 거다, 아흔아홉 번째 마왕이여."

    * * *

    "개…소리… 하고 있네……."

    이지혁이 힘겹게 내뱉은 말을 들으며 바르바체가 미소를 지었다.

    "아니, 너는 알겠지, 내가 느끼는 감정을. 오로지 너만이 알 수 있지. 이 수많은 차원에 존재하는 그 수많은 생명 중에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존재는 오로지 너 하나밖에는 없다."

    이지혁이 뭔 개소리를 하고 있느냐는 얼굴로 바르바체를 바라보았다.

    "너 역시 오랜 세월을 헤매지 않았던가. 인간을 찾아서 말이야."

    "……."

    "베라프에도 인간은 존재하지. 하지만 너는 다른 인간들을 찾아 헤맸다. 심지어 네가 돌아간 곳에 네가 아는 인간들이 남아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이 세계로 돌아오려고 했지. 왜 그랬지?"

    "……."

    바르바체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찾고 싶어 한 거겠지. 동격의 존재를 말이야."

    "지랄하고 있네……."

    이지혁의 악담에도 바르바체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동격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 누군가에게는 힘이 그 기준이 될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격이 그 기준이 되겠지. 네게 있어서는 의식이라고 해야 하나?"

    이지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겉모습이 같다고, 유전자의 배열이 같다고 해서 같은 인간일 수는 없는 거지. 적어도 네가 세운 인간의 기준이라는 것은 서로 비슷한 가치관을 공유할 수 있는 존재들이었겠지. 설령 너와 다른 시대를 살아간다고 해도, 설령 너를 전혀 모르는 존재라고 해도 말이야. 그렇지 않은 존재들은 결코 너의 외로움을 채울 수 없었을 테니까."

    "낄낄낄낄."

    이지혁은 웃었다.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 지독하고 고통스럽던 시간,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고 이해를 바라지도 않은 지옥 같던 시간을 조금이나마 이해하는 존재가 마왕들의 우두머리라는 것이 그를 웃게 만들었다.

    이런 블랙코미디가 어디에 있는가.

    "그렇기에 너는 이해할 수 있다. 오직 너만이 이해할 수 있지. 나는 너 이상의 세월 동안 너 이상의 외로움에 시달린 존재이니까."

    바르바체는 조금은 회한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격에 맞는 상대를 결코 만날 수 없다는 것은 아쉬운 일이지. 그리고 서글픈 일이기도 하다."

    "세상의 왕처럼 처 굴던 새끼가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는군."

    "그 말도 틀리지는 않았지."

    바르바체가 가만히 이지혁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나는 왕이었지. 네 말 그대로 세상의 왕이었다. 나는 그 무엇도 파괴할 수 있고, 어떤 것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하지만… 너 역시 알고 있겠지. 내가 원치 않는데 손에 넣은 것의 가치를 말이야."

    "……."

    "의미가 없지, 아무런 의미도. 나는 그저 강하게 태어났고, 강하기에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럼 나라는 존재의 의미는 대체 무엇인가. 오로지 강하여 옥좌에 앉는 것만이 나의 존재 가치인가?"

    이지혁이 피식 웃었다.

    "차원급 금수저 새끼의 징징대는 소리를 들어주기에는 내가 좀 짜증이 나서 말이야. 이쪽은 역대급 흙수저라 생각 같아서는 죽창질이라도 좀 하고 싶을 정돈데."

    "큭큭큭큭."

    바르바체가 웃었다.

    "재미있는 상황이지, 너와 나는 대적임에도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네가 아니면 나를 이해할 자가 없고, 내가 아니면 너를 이해해 줄 수 있는 존재가 없다."

    "……."

    "그래서 조금은 기대를 했지. 어쩌면 네가 나를 조금 더 재미있게 만들어줄 것이라는 기대를 말이야. 하나……."

    바르바체가 고개를 저었다.

    "헛된 기대였군."

    콰아아아앙!

    세상이 폭죽처럼 터져 나가고 있었다.

    우드드득.

    이지혁의 목에서 발을 뗀 바르바체가 이지혁의 어깨를 그대로 짓밟았다. 섬뜩한 소음과 함께 이지혁의 어깨 부분이 말 그대로 짓이겨졌다.

    하지만 이지혁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바르바체가 원하는 바도 아니었다. 고통이라는 방식으로 이지혁을 굴복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바르바체 역시 알고 있었다.

    "어쩌면 너는 나의 대적자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헛된 기대일 거라 여기면서도 두근거리는 마음을 멈출 수가 없었지. 내가 너의 존재를 지금까지 용납해 온 것은 네가 좀 더 강해져서 언젠가는 나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존재가 되어줄지도 모른다는 바람 때문이었다."

    "저기, 잠깐만요."

    이지혁이 멀쩡한 팔을 들어 올리고는 말했다.

    "거, 구구절절하신 사정이 있다는 건 제가 잘 알겠는데, 솔직히 말하면 저는 그딴 거에는 아무 관심이 없거든요? 그냥 진행하던 거나 빨리 진행했으면 좋겠는데? 팬티도 안 입은 마족 새끼 아래에서 이러고 있으니, 내가 이러려고 이 세계로 돌아왔나 자괴감 들고 괴롭거든요?"

    "…큭."

    바르바체가 고개를 내저었다.

    "인간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바랐군. 어쩌면 너는 나를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 지능으로는 무리였던가."

    "까고 있네."

    이지혁이 몸을 뒤틀면서 바르바체의 얼굴에 에테르를 갈겼다.

    "흐음."

    바르바체는 딱히 대미지를 받은 듯하지는 않지만, 흥미롭다는 얼굴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고통에 너무 익숙해진 건가?"

    바르바체가 미간을 좁혔다.

    "하지만 잊지 마라, 이지혁. 나는 마족이고, 또한 마왕이다. 딱히 육체적인 고통이 아닐지라도 너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지."

    바르바체가 손가락을 튕겼다.

    콰아아아앙!

    폭발이 연쇄적으로 일어났다.

    이지혁이 목이 짓눌린 채로 필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폭발이 일어난 곳이 어디인지를 확인하려 하는 것이다.

    "베라프에서 온 것들이 아무리 죽어 나간다고 하더라도 너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겠지. 하지만 다른 이들이라면 어떨까?"

    바르바체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 세계의 존재들이 하나하나 네 앞에서 죽어 나간다고 해도 너는 고통받지 않을까? 정말 아무렇지 않게 버틸 수 있느냐는 말이다."

    "이 새끼……."

    "큭큭큭, 좋은 반응이로군. 그래, 내가 원한 게 바로 그런 거다."

    이지혁의 눈에 귀화가 피어올랐다.

    "내가 원한 반응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이지."

    바르바체가 몸을 숙여 이지혁과 눈을 마주쳤다.

    "어차피 모두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텐데, 누가 먼저 죽고 누가 나중에 죽는 게 그리 중요한 일인가? 어차피 너희에게 남은 것은 죽음뿐인데 말이야. 네가 나에게 패배하는 순간, 이미 그렇게 결론이 난 일이지."

    이지혁이 피식 웃었다.

    "그래, 결론이 났지."

    그의 눈은 여전히 적의로 불타고 있었다.

    "그래서 고상하신 마왕님께서는 이런 식으로 승리를 즐기시는 취미가 있는 모양이로군."

    "즐겨?"

    바르바체가 으르렁대기 시작했다.

    "네 눈에는 내가 지금 즐기고 있는 것으로 보이나? 이따위 허무한 승리를 손에 넣은 것이 기뻐서?"

    바르바체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종족이 달라서가 아니라 그가 인간이었다고 하더라도 이지혁은 지금 그가 느끼고 있는 감정을 이해하기 힘들 거라는 생각을 했다.

    "승리라는 것은 이미 내 손에 들어와 있던 것과 같은 것이지. 나는 언제나 그래왔으니까. 새삼스러울 것도 없고, 기쁨 같은 건 느낄 이유도 없지."

    "휴우……."

    이지혁이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못 들어주겠군."

    "……."

    "이거 치워봐."

    다시 자신의 목을 짓밟고 있는 바르바체의 다리를 툭툭, 친 이지혁의 말에 바르바체가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어째서?"

    "원하는 대로 해줄 테니까, 이거 치우라고."

    바르바체는 말없이 이지혁의 목에서 발을 뗐다.

    "아, 씨."

    이지혁이 목에 묻은 흙을 털어내더니 몸을 일으켰다. 팔 한쪽이 완전히 떨어져 나가기 일보 직전이지만, 이지혁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마왕이라는 놈이 애새끼처럼 징징대기는."

    이지혁이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말했다.

    "그 지랄 안 해도 어차피 네가 원하는 대로 할 생각이었으니까, 닥치고 있어."

    "큭큭큭큭."

    바르바체가 유쾌하다는 듯이 웃었다.

    그의 눈에는 기대감이라는 새로운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결국 이리될 일이었지."

    "알아, 새끼야."

    이지혁이 나직하게 한숨을 쉬고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더럽게도 맑네.'

    그들의 싸움에 따라 세상이 요동쳤다. 먹구름이 몰려오기도 하고, 하늘이 검게 물들기도 했다. 하지만 마지막에 남은 것은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이었다.

    이지혁은 그 하늘을 두 눈에 박아 넣었다.

    마치 다시는 볼 수 없는 것을 바라보듯이 말이다.

    그의 고개가 천천히 내려와 주변을 훑었다.

    "표정하고는……."

    베라프에서 온 것들 따위는 알 바 아니다. 이지혁의 시선이 가 닿은 것은 당황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 NDF들이었다.

    최정훈과 서아영, 다른 이들, 그리고…….

    '아펠드리체.'

    이지혁이 피식 웃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몰라서 당황하고 있는 NDF들과는 다르게 아펠드리체는 입을 꾹 다문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흔들리는 눈동자와 앙다문 입술이 그녀가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을 전해준다.

    '웃기는 일이야.'

    드래곤이 저런 얼굴을 하다니 말이다.

    인간의 몰골로 너무 오래 산 모양이다.

    감정마저도 인간과 비슷하게 표현하는 법을 배운 것인가.

    드래곤이 슬픔이라니, 그딴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이지혁은 격하게 고개를 돌려 바르바체를 바라보았다.

    "후회하지 마라."

    "큭큭큭, 그럴 리가."

    "여하튼, 마왕이라는 것들은."

    이지혁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결국은 이리될 일이었지.'

    그건 운명과도 같은 예감이었다. 피하려 발버둥치고 아무리 애를 써도 결국에는 대면해야 하는 운명처럼, 언젠가는 이 순간이 오고 말 것이라 이지혁은 예감하고 있었다.

    피하려 했다.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피할 수 없다.

    수천 년간 그를 괴롭혀 온 운명처럼, 이 세계로 돌아온 이후로도 그는 온전히 자유롭지 못했다. 그리고 결국은 스스로 최악과 차악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시간이 오고 만 것이다.

    '어쩔 수 없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

    이게 바르바체의 손에 놀아나는 결과라고 하더라도, 그리고 이지혁이라는 존재의 완전한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이지혁에게는 다른 선택권이 없었다.

    다만…….

    이지혁이 씁쓸하게 웃었다.

    '사람이라는 것은 미련을 버릴 수 없는 존재로군.'

    그토록 각오해 온 시간이 결국에는 찾아온 것뿐인데, 왜 이리도 시선이 자꾸 돌아간다는 말인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본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는데.

    이지혁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고 있는 이들을 다시금 보았다.

    그들 역시 무언가를 예감했는지 더없이 심각한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다. 불안과 서글픔, 그리고 안타까움이 뒤섞인 눈으로 말이다.

    '안 어울린다고.'

    그런 얼굴은 말이야.

    이지혁은 냉정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눈을 감았다.

    어두워진 세상 사이로 흔들림 없이 그를 응시하던 눈동자가 선명히 되살아난다.

    인간의 것이 아닌, 황금빛 눈동자를 선명하게 새기며 이지혁은 마지막으로 미소를 지었다.

    '안녕.'

    머리로 밀려 올라오는 흑마력을 제어하던 마지막 구속이 지금 이 순간 풀려 나갔다.

    * * *

    "…뭘 하려는 거지?"

    최정훈이 불안한 얼굴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잊혀지지가 않는다.

    방금 이지혁이 자신들에게로 고개를 돌렸을 때의 그 눈빛이 말이다.

    지금까지 그가 알던 이지혁은 단 한 번도 그런 눈으로 자신들을 바라본 적이 없었다. 단 한 번도.

    본능적으로 지금 이지혁이 뭔가를 하려 한다는 것을 눈치챈 최정훈이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뭘 하려는 거냐구요!"

    그가 물어볼 수 있는 사람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아펠드리체.

    흔들림 없는… 아니, 흔들림이 없다기보다는 이지혁밖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듯한 눈으로 정면을 주시하고 있던 아펠드리체가 시선도 돌리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생각하시는 대로예요."

    "……."

    최정훈의 몸이 덜덜 떨렸다.

    "그건 너무……."

    "다른 방법이 있나요?"

    최정훈이 뭔가 말을 하기도 전에 아펠드리체의 대답이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다른 방법?

    그런 게 있을 리가 있나.

    조금 전까지 그들은 그저 고통 없는 죽음이 내려지기를 기도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압도적인 바르바체의 힘은 그들의 의욕마저 앗아가 버렸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죽을 수도 있는 거잖아요!"

    최정훈의 목소리는 악에 받쳐 있었다.

    "죽을 수도 있잖아요! 저건……."

    "다를 게 없으니까요."

    하지만 아펠드리체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 이지혁 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감정의 편린조차 보이지 않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하지만 다르다.

    그때는 이지혁 외의 인간은 굳이 상대할 가치가 없다는 의미였다면, 지금 그녀의 눈에는 이지혁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실패해서 죽든, 성공해서 마족이 되든……. 지금 이 순간 이후로 이지혁이라는 사람은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거예요. 다른 형태의 죽음이 될 뿐이죠."

    "아……."

    최정훈은 조여오는 심장을 움켜쥐었다.

    저건 자살이다.

    미래를 이어가기 위한 방편이라고는 하나, 본질적으로 저 선택이 자살이라는 의미는 변하지 않는다.

    희생?

    고결한 죽음?

    그 어떤 수식어를 사용하여 꾸민다 하더라도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지금 이지혁은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빌어먹을."

    감상에 빠지고 싶지는 않다.

    이지혁이 죽음을 선택한 이유가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며 질질 짤 생각은 없다. 멀쩡한 사람을 순교자로 만들어 기리고 추앙하는 것은 최정훈의 방식이 아니었다.

    다만…….

    어쩔 수가 없다.

    아무리 참으려고 해도 욱신거림을 참아낼 수가 없었다.

    "이지혁……."

    앞으로 뻗으려는 최정훈의 팔을 서아영이 움켜잡았다.

    "놔봐요!"

    "적당히 해요!"

    "지금!"

    분노한 최정훈이 쏘아붙이려는 순간, 서아영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자기 위안일 뿐이에요."

    최정훈은 말문이 막혔다.

    자기 위안?

    이게?

    "최정훈 씨가 뭐라 말한다고 해도 저 사람은 마음을 돌리지 않아요. 항상 그랬잖아요. 그냥 시키는 대로, 말하는 대로 따르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건 그냥 저 사람이 쑥스러워서 그러는 척한 것뿐이에요. 저 사람은 단 한 번도 우리의 설득에 넘어간 적이 없었잖아요. 그저……."

    서아영이 잠시 목이 메는 듯 말을 잇지 못하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하고 싶은 대로 한 거라구요. 항상……."

    최정훈은 눈을 감았다.

    서아영의 말이 맞았다. 그를 막아선다 해서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내게는 막을 용기도 없지.'

    지금 이지혁을 막는다는 것은 그들이 살아날 수 있는 가능성을 완전히 저버린다는 뜻이었다. 동반으로 같이 죽기 위해서 타인의 죽음을 만류해야 한다고?

    최정훈은 웃어버렸다.

    절망보다 더한 무력감이 그를 침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지혁이 자신의 목숨을 버려서까지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주기를 말이다.

    자신의 내부에서 흘러나오는 저열한 목소리가 그의 혐오감을 부추기고 있었다. 머리를 쥐어뜯고, 고막을 찢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인다.

    '언제나 이런 식이지.'

    마지막이라 생각되는 순간에 언제나 그들은 한발 물러서서 이지혁이 기적을 일으켜 주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설사 그 대가가 이지혁의 목숨이라도 말이다.

    영웅의 희생이라는 것은 어쩌면 대중에게 등 떠밀린 결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최정훈이 진저리를 쳤다.

    그리고…….

    자신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가장 들키고 싶지 않은 이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아펠드리체.

    자신도 모르게 돌아간 시선이 그녀의 눈을 쫓는다. 동시에 타이밍 좋게 아펠드리체 역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인간은 원래 이리 저열한 동물입니다?

    그러니 나를 비난할 일이 아닙니다?

    헛소리.

    비열하고 저열한 것은 인간이 아니라 최정훈 자신이다. 지금의 상황을 모르고 그저 기도하고 있을 이들과 그 짐을 나눠 지겠다는 발상부터가 그 저열함을 말해주는 것이겠지.

    견딜 수 없는 혐오감에 구토가 치밀어 올랐다.

    "자책할 것 없어요."

    하지만 아펠드리체는 그를 비난하지 않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고저가 없고, 그녀의 태도 역시 조금도 변하지 않고 있었다.

    "누구나 그럴 테니까."

    아펠드리체의 말은 최정훈을 위로해 주지 못했다. 되레 최정훈이 자신에게 느끼는 혐오감을 가중시킬 뿐이었다.

    하지만 아펠드리체의 시선은 이미 최정훈에게서 떠나 있었다. 그녀의 말은 최정훈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저 있는 사실을 그대로 말한 것뿐이다.

    인간이란 그런 존재다.

    타인을 위한다고 위선을 떨어 대지만, 막상 자신의 목숨이 위협받는 순간이 오면 다른 이들보다 자신을 우선해서 생각하는 이들.

    그 빤한 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보다 보면 인간이라는 존재들에 대한 신뢰를 접을 수밖에 없다. 스스로의 말조차 지키지 못하는 존재들이니까.

    오직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아펠드리체는 가만히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가슴에 욱신거리는 슬픔이 밀려온다. 하지만 그녀는 흔들리지도, 좌절하지도 않았다.

    정해진 운명이라면 맞아들여야 한다. 그도, 그녀도 언젠가는 이 순간이 올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순간을 막아내기 위해, 그게 안 된다면 조금이라도 늦추기 위해서 그녀는 이 세계로 왔고,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그걸로 된 걸까?

    그래서 이지혁은 조금이라도 더 오랜 시간을 행복할 수 있었을까?

    아펠드리체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는 그가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는 것뿐이다. 그러니 그녀 역시 각오를 굳혀야 한다.

    그녀가 눈을 다시 떴을 때, 황금빛을 뿜어내는 그녀의 눈동자가 더없이 영롱하게 빛을 발했다.

    * * *

    투두둑.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어?"

    그의 머리에는 아펠드리체가 신성력과 마나로 몇 겹이나 쌓아 올린 방어막이 자리하고 있었다. 흑마력이 새어 들어오는 것을 완전히 막아낼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 양은 극단적으로 줄일 수 있는 방어막이 말이다.

    지금 이지혁은 그 방어막을 제거했다.

    순간적으로 생긴 마력의 공백에 그의 육체를 가득 채우고 있던 흑마력들이 머리로 밀려들고 있었다.

    그런데 생각과는 조금 달랐다.

    "어, 음……."

    이지혁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러고는 품 안으로 손을 넣어 담뱃갑을 꺼냈다. 마구 구겨진 담뱃갑을 탈탈 털어 그나마 멀쩡한 담배 한 개비를 발견한 이지혁이 씨익 웃고는 입에 물었다.

    "뭐, 생각처럼 깔끔하게 변하지는 않는 모양이니, 한 대 정도는 피워도 되겠지? 갈 때 가더라도 담배 한 대 정도는 괜찮잖아?"

    "육체에 해롭기만 한 마약을 흡입하는 건가? 인간이란 정말 모르겠군."

    "이쪽은 니 취향을 이해하기 힘드니, 피장파장으로 하자고."

    이지혁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자 바르바체가 손가락을 튕겼다. 이지혁의 바로 뒤에서 바닥이 살짝 솟아오르더니, 이지혁이 딱 앉기 좋은 자리가 만들어졌다.

    "땡큐."

    이지혁은 사양하지 않고 자리에 앉더니, 담배에 불을 붙였다.

    "좋구나……. 싸우던 와중에 담배도 피울 수 있고 말이야. 예전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인데. 이래서 이 세상이 좋다니까."

    머리로 천천히 마력이 밀려든다.

    "어떤 기분이지?"

    "글쎄, 표현하기가 쉽지 않은데 말이야."

    "사형수가 약물을 주입받는 기분일까?"

    "…너, 이쪽 세상 공부 많이 했구나?"

    "필수적인 일이지."

    이지혁이 낄낄대며 웃었다.

    저만한 능력을 갖춘 놈이 공부까지 하는데, 이길 수 없는 게 당연했다.

    "말해봐라, 아흔아홉 번째 마왕이여, 인간 이지혁이여. 그 오랜 세월을 살아온 네게 죽음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이지? 새로운 존재로 변화할지도 모른다는 환희인가, 아니면 지금까지와의 자신과 결별한다는 공포인가?"

    "에……."

    이지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둘 다 아닌 것 같은데."

    "아니라고?"

    "그래."

    이지혁이 담배를 깊게 빨아들이고는 천천히 내뱉었다.

    "나만 그런 건 아닐 테지만, 인간에게 있어서 죽음이라는 건 언제나 아쉬움이겠지."

    "아쉬움?"

    "그래, 아쉬움. 후회라는 말과는 조금 다르지. '조금 다를 수 있었는데', '조금 나을 수 있었는데', '왜 이 순간이 될 때까지 그러지 못했을까' 하는 아쉬움 말이야. 누구도 두 번의 인생은 살 수 없으니까. 세이브한 지점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게임기를 꺼야 하는 안타까움이랄까."

    "이해할 수 없군."

    "너한테 이해를 바라지는 않아. 너는 평생 설명해도 못 알아먹을 테니까."

    이지혁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졸리군.'

    그의 몸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 무엇인지는 그도 알 수 없었다.

    겪어본 적이 없고, 예측할 수가 없으니까.

    이 졸림이라는 것이 육체의 한계를 넘어선 그가 죽어가기 때문인 건지, 아니면 그의 의식이 또 다른 그로 변해가고 있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인 건지 말이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졸음에는 항거할 수 없었다.

    육체에 스며드는 졸음이 그의 몸을 잠식해 들어가고 있었다. 조금씩 귀가 멍멍해지고, 눈앞이 흐려진다. 바르바체가 뭐라고 지껄이는 것 같지만, 그 말도 이제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알겠군.'

    한 가지는 확실하다.

    이 순간이 마지막이다. 이걸로 그라는 존재는 완전히 사라진다. 그 결과가 무엇이든 말이다.

    이지혁이 부들대는 손으로 담배를 잡고는 입에서 빼냈다. 폐 속으로 빨려 들어간 담배 연기가 폐를 깊이 억누르고는 천천히 밖으로 흘러나왔다.

    '다음 생이 있다면…….'

    이지혁이 피식 웃었다.

    '담배는 끊어야겠어.'

    그의 고개가 천천히 아래로 떨어진다.

    고개를 들어서 하늘을 보고 싶지만, 그의 몸은 이미 머리의 통제를 듣지 않았다. 눈앞마저 구분이 가지 않을 만큼 흐려진다 싶더니, 이내 어둠이 찾아왔다.

    깊은 어둠, 더없이 깊은 어둠이 말이다.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인 이지혁의 육체가 완벽한 정적으로 접어들었다.

    숨이 끊긴다. 그리고 체온이 싸늘하게 식어가기 시작한다.

    이런 현상을 사람들은 이리 지칭한다.

    죽음.

    석상처럼 죽어버린 이지혁의 심장이 멈췄다. 그리고 이지혁이라는 존재가 이 세상에서 소멸했다.

    바닥에 떨어진 담배가 아주 천천히 타들어 가다가 이내 꺼지듯이 말이다.

    * * *

    "……."

    말을 하지 않은 지 얼마나 됐을까?

    정신을 차렸을 때, 크리스토퍼는 그를 둘러싼 세상이 멈췄다고 느꼈다. 물론 말 그대로 모든 것이 멈췄다는 뜻은 아니다. 모니터에서는 여전히 곳곳의 카메라로 촬영한 영상이 나오고 있고, 귀를 통해서 소리도 들리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세상이 멈춘 것 같은 적막이 그 사이에 공존하고 있었다.

    보고가 오가지 않는다.

    전투에 대한 의견도 오가지 않고 있었다. 바쁘게 움직이던 손들은 이제 축 늘어진 채 움직일 기미가 없었다.

    그래. 그저 지켜보는 것이다.

    저 안에 세상의 모든 것이 존재한다는 듯이 그저 홀린 채 화면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크리스토퍼 역시 그중 한 명이었다.

    새삼 정신이 들었음에도 크리스토퍼는 다른 이들을 나무라지 않았다. 그들은 인류의 최전선에 서 있는 사람들이고, 지금의 전투를 최대한 컨트롤하고 지원할 의무가 있는 이들이었다.

    하나 대체 뭘 지원해야 한다는 말인가.

    그들은 어느 순간 관객석으로 내몰렸다. 그들이 스스로 자리를 옮긴 것이 아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저 바라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인간의 싸움이 아니야.'

    그리고 슬슬 그 결과가 나오고 있었다.

    숨소리조차 새어 나오지 않는 것은 그저 긴장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다들 직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싸움의 승부가 나고 있다는 것을.

    막을 수 없다.

    막을 수가 없었다.

    오연하게 대지를 딛고 서 있는 바르바체의 모습은 마치 사신이 세상에 강림한 것과 같았다.

    '이런 기분이었겠군.'

    대홍수로 세상을 씻어 내렸다던 그 신이 세상에 강림하여 인간을 바라보았다면, 그 광경을 보는 인간들은 어떤 기분이었겠는가. 자신이 무슨 수를 써도 막아낼 수 없는 절대자의 의지가 분노로 변해가는 것을 보는 기분은.

    무력감.

    더할 수 없는 무력감이 지금 크리스토퍼를 덮치고 있었다.

    '이래서는 안 되는데…….'

    그는 피 흘리며 싸우는 자가 아니다.

    전선에 있는 이들이 피를 흘리고 고통받고 있는데 그저 지켜보며 손가락이나 놀리는 인간이 무력감을 느껴서는 안 된다. 저 중 포기하지 않은 이가 단 하나라도 있으면 전력을 다해서 그를 지원해야 한다.

    알고는 있다.

    알고는 있는데…….

    저자에게 어찌 대항하라는 말인가.

    바르바체는 인류가 감당할 수 있는 적이 아니었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퍼부었음에도 오연하다는 말이 어울리게 그들을 비웃는 저자를 대체 어찌 해야 하는가.

    크리스토퍼는 전신을 타고 흐르는 무력감을 어찌할 수 없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안 된다는 건가…….'

    그들만이 아니었다.

    이세계까지 그들과 함께 싸워주었다. 용맹하게 적을 향해 돌진하는 그들을 보며 이 전쟁, 잡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이 얼마나 됐다고… 이리 큰 절망을 느껴야 한다는 말인가.

    그의 눈에 천천히 고개를 숙이는 이지혁이 보였다.

    '할 만큼 하셨소.'

    그 누구도 이지혁이 해온 일을 부정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게이트가 열린 국면부터는 그 혼자만이 전 인류를 끌고 이곳까지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크리스토퍼는 고개를 숙인 이지혁을 보며 눈을 감았다.

    지금 인류의 마지막 희망이 지고 있었다.

    * * *

    "마지막까지……."

    송정수의 노안에 눈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힘겹게 다시 몸을 일으켰다가 다시 주저앉는 이지혁의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싸워야 한다.

    당연히 싸워야 한다.

    하지만 그가 저 입장이었다면 저렇게까지 싸울 수 있었겠는가.

    싸워야 한다고 말로 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자신이 선두에 서서 모두를 이끌며 싸우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더구나 인류가 존재한 이후로 한 사람에게 저만큼의 책임과 짐이 주어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항상 이죽거리는 이지혁의 얼굴 뒤로 언제나 고심하던 모습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송정수로서는 지금 저 모습을 담담히 바라볼 수가 없었다.

    이 눈물은 인류의 패배를 한탄하는 눈물이 아니다. 온전히 이지혁이라는 이를 위해서 바쳐진 눈물이다.

    "끝인 것 같네요."

    힘없는 윤영민의 목소리를 들으며 송정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정말 반전의 요소가 없었다.

    "고개 듭시다."

    윤영민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우리는 그저 지켜보는 입장이었습니다. 앞에 나가 싸운 저들에 비하면 한 것도 없이 자리만 채우고 있을 뿐이었지요. 그런 우리에게는 좌절할 자격도 없습니다."

    "…그렇겠지요."

    윤영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듭시다. 전해지지는 않겠지만… 인류의 마지막이 절망에 빠진 이들의 한탄에 불과하다면, 그건 그거대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니겠습니까."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다.

    송정수가 조금은 서글픔이 담긴 얼굴로 화면을 바라보고 있다가 허리를 쫙 폈다.

    '우리는 최선을 다했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고, 영혼과 몸을 아낌없이 불태웠다. 안타깝기는 해도 아쉽지는 않다. 해볼 수 있는 모든 것을 했으니까.

    송정수는 눈가에 차오른 눈물을 닦고 가만히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고생만 시켰어.'

    고생만…….

    결국 이리될 줄 알았으면 얼마 남지 않은 삶, 조금은 편히 보낼 수 있도록 했을 것을. 살아야 한다는… 인류를 존속시켜야 한다는 미명하에 그에게 너무 많은 짐을 떠넘겼다.

    그는 그저 강할 뿐이다. 인류의 구원에 대해 어떠한 책임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이가 싸우고 또 싸우다가 이제는 한 방울도 남지 않아 저리 죽어가고 있었다.

    '늙으면 감성적이 된다더니.'

    송정수가 다시 눈가를 뿌옇게 만드는 눈물을 훔쳐 내고는 입을 열었다.

    "고생했네."

    * * *

    "…엄마."

    화면에 보이는 광경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모를 수가 없었다. 천천히 숙여지는 이지혁의 모습을 본 이예원의 몸이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떨렸고, 박선덕은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이예원의 손을 꽉 움켜잡았다.

    "오빠!"

    이예원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오빠! 오빠아! 오빠아아아아아아!"

    이성을 잃은 이예원이 미친 듯이 TV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박선덕은 그런 그녀를 막을 수 없었다.

    어찌 막겠는가.

    어떻게 막을 수 있단 말인가.

    필사적으로 정신을 다잡아서 쓰러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칠 지경인데, 그녀가 어찌 이예원을 말릴 수 있겠는가.

    다른 이들 역시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화면을 모두 가리다시피 한 채 이예원이 오열하고 있지만, 누구도 그녀를 탓하지 못했다. 인간이라면, 인간의 탈을 쓰고 있다면 지금 그녀의 슬픔에 동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녀를 말린 것은 다른 이가 아닌 어머니였다.

    "그만해라, 예원아."

    "어, 엄마! 오빠가! 오빠가아!"

    "그만… 그만해."

    박선덕이 이예원을 안아 당겼다.

    "울지 마. 오빠 가는 거 봐야지. 오빠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네 눈으로 봐야지."

    "…엄마."

    "우리가 봐줘야지."

    박선덕이 이예원의 어깨를 꽉 움켜잡았다.

    "오빠 가는 길 외롭지 않게 우리가 봐줘야지, 우리가. 한평생 외롭게 살았는데, 가는 그 순간까지 우리가 울면 지혁이가 얼마나 힘들겠니. 그러니 울지 마."

    박선덕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이예원은 오열을 멈추지 않고, 박선덕도 가만히 그런 그녀를 안아주었다.

    '울면 안 돼.'

    이지혁은 항상 틱틱대기는 해도 항상 그녀를 먼저 생각하는 효자였다. 세상 모든 사람에게 막 대하던 이지혁이지만, 단 한 번도 그녀의 말에 반발하거나 화를 내지 않았다.

    그런 아들이다.

    그런 아들이 마지막으로 가는 길인데, 어떻게 눈물을 보일 수 있겠는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저리 대견하게 싸운 아들인데, 칭찬은 못해줄망정 눈물을 보일 수는 없지 않은가.

    박선덕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같이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기특하다고 등이라도 두드려 줄 수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화면으로 보이는 아들에게 마음으로 말을 전하는 것뿐이었다.

    '대견하기도 하지, 우리 아들.'

    그리고 그 생각과 함께…….

    결국은 참아내지 못한 눈물 한 방울이 그녀의 눈가를 타고 흘렀다.

    * * *

    "……."

    최정훈의 얼굴은 마치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

    고개를 떨군 채 움직이지 않는 이지혁의 모습을 보는 순간, 그의 가슴도 멈춰 버렸다.

    '웃기는 일이군.'

    저 사람과 뭐 그리 긴 시간을 같이했다고.

    뭘 그렇게 대단한 우애를 다졌다고.

    때로는 저 사람 때문에 열이 머리끝까지 치솟기도 하고, 때로는 정말 힘만 있으면 죽어라 패버리고 싶다는 생각으로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그의 가슴은 가족이 죽었을 때 이상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차마 입도 열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아니겠지.'

    아니, 아니지.

    그렇게 죽으면 안 되지.

    천하의 이지혁이다. 그 이지혁의 마지막 도박이 저런 식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차라리 그가 인간을 초월한 마족이 되어 세상을 멸망으로 몰고 가는 한이 있더라도… 이런 식은 아니었다.

    "…이건 아니라고, 씨발."

    웬만해서는 험한 말을 하지 않는 최정훈의 입에서까지 욕이 흘러나왔다.

    마계와의 전쟁을 여기까지 끌고 온 영웅의 죽음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이건 아니다. 이런 식은 아니다.

    패배하더라도 이지혁은 화려하게 죽어야 한다. 저들이 비록 승리할지라도 훗날 돌아볼 때 그의 이름만 떠올려도 절로 몸서리가 처질 정도로 화려하게 말이다.

    저런… 저런 감상적인 죽음은 그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일어나라고!"

    그가 하는 말이 투정에 불과하다는 것은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투정이라도 부리지 않으면 대체 뭘 해야 한다는 말인가.

    자존심도, 체면도… 그따위 빌어먹을 것들이 대체 무슨 소용이 있다고.

    추하게 죽지 말라고?

    개소리!

    역사에 다시없을 정도로 추하고 끈질기게, 보기만 해도 욕이 날아올 정도로 구차하게.

    "일어나라고! 씨발!"

    그의 목소리는 고함이라기보다는 절규였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세계의 멸망보다도 저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을 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언제나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되는 시점에 벌떡 일어나서 사람들을 놀래킨 그가 아닌가.

    그럴 것이다.

    이번에도 그럴 것이다.

    죽은 게 아니란 말이다!

    "이지혁 씨……."

    멍하니 이지혁에게 다가가는 최정훈을 서아영이 움켜잡았다.

    "놔."

    "가면 안 돼요."

    "놓으라고 했어. 이거 놔, 죽여 버리기 전에."

    "…가면, 가면 안 돼요."

    최정훈이 허탈하게 웃었다.

    가면 안 된다고?

    어째서?

    죽을까 봐?

    어차피 우리는 다 죽어.

    죽는 그 마지막 순간에 저 사람이 저렇게 혼자 쓸쓸하게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잖아.

    우리는 동지니까. 우리는 친구니까. 그리고 우리는…….

    "놔."

    최정훈이 피식 웃었다.

    "같이 살 수 없다면 같이 죽어주기라도 해야지. 그게 저 사람에 대한 우리의 마지막 예의야."

    서아영의 손에 힘이 빠졌다.

    그녀 역시 알고 있었다.

    이제는 전쟁이 아닌, 마지막을 선택해야 할 시점이라는 것을.

    최정훈이 두말하지 않고 이지혁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 * *

    "빌어먹을."

    의외로 지금의 상황에 가장 절망하고 있는 이는 인류도, 아펠드리체도 아닌, 바르바체였다.

    완전히 숨이 멎어버린 이지혁의 상태는 그에게 깊은 절망을 안겨주고 있었다.

    "이게 무슨 꼴이냐!"

    바르바체가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드러나는 그의 진정한 분노에 세상이 숨을 죽였다.

    "설마 이렇게 끝은 아니겠지, 이지혁! 아흔아홉 번째 마왕이여!"

    바르바체가 이지혁을 향해 손을 뻗다가 화들짝 놀라서 손을 뒤로 당겼다.

    마치 유리로 만들어진 귀한 조각을 자신의 손으로 깨버릴까 저어하는 것처럼 말이다.

    "아니… 아니겠지!"

    바르바체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그가 아무리 마계의 역사와 함께한 마왕이라고는 하지만, 인간이 마족으로 변할 때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지를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일반적인 인간은 마족화가 진행되는 동안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죽는다. 그리고 겨우 마족이 된다고 해도 최하급 마족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 바르바체가 그러한 일이 관심을 둘 리가 없었다.

    그러니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가 보기에 이지혁은 죽었다. 완전히 숨이 끊겼다. 하지만 이 것이 그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인지, 아니면 마족화가 되어가고 있는 과정인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인간! 인간이 마족이 될 때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지 아는 녀석 없는가?"

    마왕들을 향해 소리쳤지만, 마왕들도 대답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이… 쓸모 없는 것들."

    바르바체는 그 위엄에 걸맞지 않게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아니지, 아니겠지. 이대로 죽는 것은 아니겠지? 이지혁, 그렇지?"

    그는 깨어나야 한다.

    그래서 자신의 대적자가 되어주어야 한다. 이렇게 허무하게 죽는 것은 허락할 수 없는 일이다.

    "이……."

    바르바체가 막 뭔가를 말하려던 순간, 그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의 눈에 이쪽으로 저벅저벅 걸어오는 최정훈이 보였다.

    '뭐지, 저 인간은?'

    당황스럽다.

    이 기분을 정확하게 명명한다면 그 말 외에는 없을 것이다. 이지혁을 제외한다면 처음으로 그를 당혹스럽게 만든 인간이 나타난 것이다.

    저 인간은 무슨 배짱으로 이곳으로 다가오는 것일까?

    과도한 공포 앞에 미쳐 버렸나?

    "꺼져라."

    바르바체가 손을 들었다. 그러고는 친절하게 그들의 언어로 말까지 해주었다.

    "너를 죽이는 것은 간단한 일이다. 하지만 지금 나는 어떠한 변수도 만들고 싶지 않다. 당장 물러나서 죽음을 기다려라. 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도 나는 허락하지 않았다."

    "후후후."

    최정훈이 가볍게 웃었다.

    "잘도 지껄여 대는군."

    바르바체를 마주 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마음을 다잡았다고는 하지만, 그를 정면에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최정훈은 영혼이 찌그러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결코 노력이나 요행으로 따라잡을 수 없는 격의 차이가 그를 짓누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물러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바르바체는 자신을 향해 실실 웃으며 다가오는 인간을 보며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미쳐 버린 건가?'

    하기야 그들의 입장에서는 절망밖에 남은 것이 없을 테니, 정신을 놓아버리는 이가 하나둘쯤 나온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었다.

    다만, 지금 그는 그 광경을 보며 즐길 정도의 여유가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지잉.

    바르바체의 손가락 끝에서 뿜어져 나간 빔이 최정훈의 허벅다리를 꿰뚫는다.

    털썩.

    순간적으로 다리에 힘이 풀린 최정훈이 그 자리에 쓰러졌다.

    "흐흐."

    하지만 그대로 쓰러져 있지는 않았다. 최정훈이 비릿한 미소를 흘리더니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뼈가 통째로 꿰뚫려 버린 다리는 그의 몸을 지탱하지 못했다.

    하지만 최정훈은 남아 있는 한 다리로 몸을 일으켜 세우고는 절뚝거리며 앞으로 걸어왔다.

    바르바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하찮은 놈이!"

    그를 죽이는 것은 별것 아닌 일이다.

    하지만 죽음이라는 현상은 그 자체만으로 세계에 영향을 주는 일이다. 지금 바르바체는 최대한 변수를 차단하고 싶었다. 저자의 죽음이 이지혁의 변화에 무슨 영향을 줄지 모르는 상황이 아닌가.

    "비켜, 새끼야."

    그런 바르바체의 마음을 알 리 없는 최정훈이 절뚝거리며 이지혁에게 다가갔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군."

    바르바체가 조금은 멍한 눈으로 최정훈을 바라보았다. 이지혁도 그렇고, 최정훈도 그렇고… 그의 상식으로는 이해를 할 수가 없는 존재들이었다.

    지능이 떨어져서?

    아니다.

    멍청해서 하는 짓이 아니었다.

    바르바체는 저 최정훈과 이지혁의 이해할 수 없는 신념 앞에 당황하고 있었다.

    "어째서 죽음을 재촉하는 것인가. 모든 생물의 제1행동 원칙은 생존일 텐데, 조금이라도 더 사는 것이 너희의 목적이어야 하지 않나?"

    최정훈이 바르바체를 보고는 한심하다는 듯이 웃었다.

    "마왕이라고 뻐기는 놈이 1차원적으로 사는군."

    "뭐?"

    "잘 들어, 새끼야. 자기가 죽을 자리를 선택할 수 있으니까 인간인 거야. 자기가 언제 죽어야 하는지를 아는 게 인간인 거고."

    "……."

    "나는 그저 내가 죽어야 할 곳이 이곳이라고 정했을 뿐이야. 본능? 생존 원칙? 웃기는 소리 지껄이고 있네."

    최정훈이 키득키득 웃었다.

    "죽이고 싶으면 죽여. 그런다고 해서 나를 말리지는 못할 테니까."

    절뚝이며 최정훈이 이지혁을 향해 걸어갔다.

    "이……."

    지이잉!

    바르바체가 뿜어낸 빔이 최정훈의 반대쪽 다리도 꿰뚫었다.

    털썩.

    바닥에 쓰러진 최정훈이 먼지투성이가 되어서 낄낄대며 웃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손을 뻗는다.

    다리가 움직이지 않는다고 해서 움직이지 못할 것은 없었다. 그에게는 두 팔이 남아 있으니까.

    최정훈이 손을 뻗어 바닥을 움켜쥐고는 힘겹게 앞으로 또 앞으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어째서 그렇게까지 하는 거냐?"

    바르바체의 말에 최정훈은 대답하지 않았다.

    말해봐야 이해 못하겠지.

    마족 따위의 머리로는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바르바체 님!"

    "……."

    "어째서 저자를 죽이지 않는 것입니까? 지금 당장 저자를 죽이시고 이지혁의 육체도 산산조각을 내 후환을……."

    촤아아아아악!

    바르바체에게 직언을 올리던 마왕의 머리가 하늘로 솟구쳤다.

    일격에 마왕의 머리를 날려 버린 바르바체가 얼굴을 완전히 일그러뜨리고는 중얼거렸다.

    "귀찮게 하지 마라."

    그는 봐야 했다.

    지금 저자가 뭘 하려는지를.

    어쩌면 지금 그는 이지혁의 그 도무지 이해하려 해도 이해할 수 없던 근성과 강함의 비밀을 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인간이라는 종족이 이토록 강해질 수 있는 그 비밀을 말이다.

    "끄으으으……."

    양 허벅지에서 흘러나온 피가 최정훈이 기어간 자리 뒤로 마치 연못처럼 고이기 시작했다. 어질어질한 의식으로 최정훈은 조금씩, 아주 조금씩 이지혁에게 다가갔다.

    바르바체도, 마왕들도, 그리고 지켜보는 다른 인간마저도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봐야 한다.

    저 광경을 지켜봐야 한다.

    흐린 의식으로 겨우 고개를 숙이고 있는 이지혁의 바로 앞에 도착한 최정훈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 꿰뚫린 두 다리가 후들거려 몇 번이고 넘어질 뻔했지만, 겨우 몸을 일으킨 최정훈이 이지혁의 옆에 걸터앉았다.

    "후우……."

    피범벅이 된 손으로 이마에 흘러내린 땀을 닦아낸 최정훈이 피가 묻어 엉망이 된 얼굴로 씨익 웃었다.

    "거참, 내가 보기에……."

    최정훈이 주머니로 손을 밀어 넣었다.

    "이지혁 씨는 죽는 순간에도 나름 가오가 있다는 말이지. 보통은 이렇게 앉아서 뒈지지는 못하는데 말이야."

    혼자 피식 웃은 최정훈이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피에 젖은 담뱃갑 안에서 그나마 멀쩡한 담배를 찾아낸 최정훈이 담배를 입에 물었다.

    찰칵.

    불을 붙이고 깊숙이 한 모금을 빨아들인 최정훈이 담배를 입에서 떼어내고는 이지혁의 입술에 물려주었다.

    이미 차갑게 굳어버린 그 입에 담배를 물려주는 것이 쉬울 리는 없지만, 최정훈은 이지혁의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게 조심스레 그의 입술에 담배를 물리고는 자신도 다시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생각해 보면 NDF 내에 흡연자는 이지혁 씨랑 나밖에 없었죠."

    그래서 언제나 담배를 피우러 나가는 이는 그와 이지혁밖에 없었다. 흡연실을 만들어내라고 이지혁이 깽판을 칠 때마다 같이 담배를 피워주며 그를 진정시키는 것도 최정훈이 해야 하는 일 중의 하나였으니까.

    "돌이켜 보니까 그렇네. 이지혁 씨가 없었으면 나도 좀 팍팍하게 살았을 거 같아."

    최정훈이 가볍게 웃었다.

    참 웃기는 사람이다.

    먼저 나서서 친해지겠답시고 손을 내미는 경우는 한 번도 없던 사람인데 이상하게 주변 사람들은 그를 중심으로 움직인다.

    강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이지혁에게 사람을 끌어당기는 인화력이라는 게 있다고는 믿을 수 없지만, 비슷한 무언가가 있기는 한 모양이다.

    "마지막으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엄청 고민했어요. 여기까지 오면서 말이죠. 그래도 마지막이니 뭔가 거창한 말을 해줘야 할 것 같은데… 무슨 말이 좋을까. '고생했다'는 너무 딱딱한 것 같고, 고맙다고 하기에는 낯간지럽고."

    최정훈이 볼을 가볍게 긁고는 이지혁을 보며 씨익 웃었다.

    "그래서 생각한 말인데……."

    그의 눈가에 뿌연 습막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재밌었어요."

    최정훈이 빨아들인 담배 연기가 그의 폐를 가득 적시고는 천천히 뿜어져 나온다.

    "끔찍하기도 했지만… 재밌었어. 웃기는 소리기는 하지만 말이야."

    흐려진다.

    의식이.

    이제는 눈앞에 있는 것도 가물가물 잘 보이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는 다리에서 피가 줄줄 새어 나오는 감각이 확실하게 느껴졌는데, 이제는 허리 아래에 뭐가 붙어 있는지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 죽는 거구나.'

    최정훈은 실감했다.

    그리 마음에 드는 죽음은 아니었다.

    그의 목표는 아들딸 하나씩 낳고, 딸내미의 손을 잡고 100살이 넘어 죽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뭐, 이것도 나쁘지 않지.'

    그런 죽음을 택할 수 없다면, 이런 죽음도 나쁘지 않았다. 적어도… 외롭지 않아야 할 사람을 외롭지 않게 보내줄 수 있을 테니까.

    평생을 홀로 외로움을 버텨내며 살아온 이다. 죽음조차 홀로라면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최정훈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입에 문 담배를 잡아 내리고는 가만히 입을 열었다.

    "재밌었다고."

    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죽음을 실감하는 순간, 그의 얼굴에 걸린 것은 미소였다.

    그리고…….

    "후우우우우."

    최정훈의 눈이 번쩍 떠졌다.

    낮은 숨소리.

    익숙한 숨소리.

    빨아들인 담배 연기를 천천히 내뿜는 그 소리가 확연하게 들리고 있었다. 피를 너무 흘려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그의 뇌에 벼락처럼 밀고 들어온 그 소리에 최정훈이 눈을 번쩍 떴다.

    타탁.

    이지혁의 입에 물린 담배가 단숨에 타들어 간다. 그러고는 그의 코와 입으로 새하얀 연기가 가만히 뿜어져 나왔다.

    "이… 이지혁 씨?"

    축 늘어져 있던 이지혁의 고개가 천천히 들린다.

    쿵!

    그리고 최정훈은 자신의 가슴이 내려앉는 소리를 들었다.

    눈동자.

    인간의 것이 아닌 것 같은 붉은 눈동자가 최정훈의 눈에 들어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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