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혼자 가게 두지는 않을 테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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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다현아."
"응, 형."
"너 저번에 이 정도면 그래도 이지혁 씨랑 한 번 붙어볼 만하다고 하지 않았냐? 혼자서는 절대 안 되어도 NDF 다 모으면 이제는 제압 가능할 것 같다면서?"
"내가?"
"그랬잖아."
김다현이 피식 웃었다.
"뭔 개소리야? 내가 무슨 자살 희망자도 아니고."
"…그래, 내가 잘못 들었나 보다."
윤혁규는 부르르 떨리는 오른손을 꽉 잡아 눌렀다.
'미치겠군, 진짜.'
저건 아니다.
지금까지 이지혁이라는 사람은 그들에게 있어서 이레귤러 같은 사람이었다.
자신들은 절대 상대할 수 없는 거대한 몬스터들을 이지혁은 마치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았다. 비교할 수도 없고, 비교해서도 안 되는 사람이다.
목표로 삼기에는 너무 멀고, 배우기에는 그 간극이 너무 컸다. 그저 옆에 존재하지만 다른 세상을 살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도 착각이었어.'
이지혁의 말은 여러 번 들었다. 자신이 제대로 힘을 발휘할 수 있던 시절을 생각하면 지금 자신은 쓰레기조차 안 된다는 이야기 말이다.
반쯤은 진실이고, 반쯤은 허세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그동안 보아온 이지혁도 그들로서는 도무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으니까. 그 이상 강할 수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말하는 것처럼 극명한 차이가 날 정도로 강해진다는 말은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오늘 윤혁규는 인정해야 했다.
이지혁의 진짜 힘은 그가 감히 상상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도대체 저 사람이 그동안 왜 그들을 상대해 주었는지가 의아할 정도였다.
'사람인가? 정말로?'
아무리 마법을 배우고, 아무리 수도 없는 시간을 살아왔다고는 하나, 인간의 몸으로 저 마왕들마저 초라하게 보이게 할 정도의 힘을 뿜어내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저 사람의 눈에는 우리가 어떻게 보였을까?"
"개미?"
"개미는 모이면 사람 하나 정도야 어떻게 잡을 수 있겠지. 아마존에는 그런 개미도 있다잖아."
"미생물? 진딧물?"
"…이상하게 열 받네."
윤혁규가 이를 갈았다.
"우린 그동안 대체 뭐한 거지? 저 사람이 우리를 볼 때 얼마나 한심하게 느껴졌을까?"
"그만해, 형."
"사실이잖아."
윤혁규의 목소리가 울분에 차올랐다.
"그렇게나 빡세게 굴렀는데, 그 결과가 저 사람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라니. 우린 그동안 대체 뭘 한 거지?"
김다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윤혁규의 발언은 과했다. 하지만 그 역시 같은 생각해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자신들이 해온 모든 노력이, 참아내 온 고통이 모두 부정당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렇지 않아요."
그 순간,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윤혁규와 김다현이 고개를 돌렸다.
"아펠드리체 님?"
불어오는 바람에 황금색으로 빛나는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아펠드리체가 그곳에 서 있었다.
"…아뇨. 우리가 한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이지혁 씨를 탓하는 것이 아니라요……."
"저 힘이 부러운가요?"
"예?"
아펠드리체가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저 힘이 부럽냐고 물은 거예요."
"……."
윤혁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부정할 수 없었다.
그들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이 지옥 같은 상황을 타개할 만한 힘이었다. 인간이 쌓아 올린 그 어느 것도 지금의 상황을 해결해 주지는 못했다.
그런데 이지혁은 홀로 이 최후의 전쟁에 맞서고 있는 것이다. 전 인류의 희망을 그 두 어깨에 걸고 말이다. 그런데 어찌 부럽지 않겠는가.
"네, 부럽습니다. 지긋지긋할 정도로 부러워요. 나에게도 저 힘이 있다면, 저런 힘을 가질 수 있는 재능과 그릇이 있다면……."
"아니요."
아펠드리체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뭐가 아니라는 거죠?"
"재능이라는 측면과 그릇이라는 측면에서는 아마 당신이 이지혁 씨보다 열 배는 더 나은 사람일거예요."
"네?"
윤혁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아펠드리체를 바라보았다. 그럼 저 힘을 어떻게 손에 넣을 수 있다는 말인가. 재능도, 그릇도 없는 사람이.
"이지혁 씨가 당신들에게 마나를 가르친 방법을 알고 있죠?"
"…알죠. 몸으로 지긋지긋하게 겪었으니까요."
그렇게까지 해서야 윤혁규들은 겨우 마나라는 것을 이해하고 운용할 수 있었다. 그 지긋지긋한 방법을 사용해서야 말이다.
"그건 이지혁 씨가 개발한 방법이에요. 자신의 육체에 사용하기 위해서 말이죠."
"자기 스스로에게요?"
"마나를 느낄 수 없었으니까."
아펠드리체가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다.
"이지혁이라는 표본이 있는 당신들과는 다르게, 이지혁 씨는 이계인으로서 홀로 베라프에 떨어졌어요. 그곳의 사람들이 숨 쉬는 것처럼 느끼고 자연스레 다루는 마나가 이지혁 씨에게는 뜬구름 잡는 소리로 느껴졌겠죠."
"…그렇겠죠."
"그러니 그 방법밖에는 없었어요. 몸으로 느껴야 하니까. 그래서 그는 그 육체에 마나를 밀어 넣는 방법을 택했죠. 지옥과 같은 고통을 감수하고 말이에요."
"그렇게 저 힘을 손에 넣은 겁니까?"
"아니요. 실패했어요."
아펠드리체가 냉정하게 말했다.
"그렇게 성공할 수 있었으면 흑마력에 손을 대지 않았겠죠. 이지혁 씨는 그 실험을 백 년 이상 반복하고 나서야 그 방법으로는 도저히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알아버렸죠."
"…몇 년이요?"
"백 년이요. 이곳의 시간과 그곳의 시간이 다르지 않으니, 백 년이 정확할 거예요."
윤혁규가 입을 다물었다.
백 년, 백 년이라니…….
인간이 어떻게 백 년 동안 한 가지 목표만을 위해서 고통을 참아낼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결국 실패했다는 것은 마나를 느끼지도 못했다는 말인데, 어떻게 마나를 느끼지도 못하면서 그 끔찍한 고통을 계속 참아냈다는 건가.
어떻게…….
"…우리에게 한 강도로?"
"그 이상이었겠죠. 그에게 마나를 불어넣은 것은 다름 아닌 저였으니까요."
"……."
"이해할 수 없는 짓이었어요. 제 눈에는 그게 불을 이해하기 위해서 직접 불에 몸을 태워보는 짓처럼 보였거든요. 불을 이해한다고 불을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그는 그 사실 역시 이해하고 있으면서도 매달렸죠. 마나를 얻지 못하면 결코 이 세계로는 돌아올 수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는 그런 사람이에요."
"……."
"저 힘?"
아펠드리체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아펠드리체를 꽤 봐왔다고 생각하는 윤혁규이지만, 그녀가 저리 얼굴을 찌푸리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인간에게 저 힘은 허락되지 않은 것이에요. 인간이 아닌 존재들 역시 마찬가지죠. 저 힘은 신성에 도달한 영역이에요. 신이 아니고서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이죠. 육체를 가진 존재가 저 힘에 도달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 힘을 사용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고통에 시달려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셨나요?"
"아, 아뇨."
윤혁규는 입을 다물었다.
"영혼이 찢겨 나가는 고통이라고 말하면 이해가 되실까 모르겠어요. 저 힘은… 저런 힘은 차라리 없는 게 나은 거예요. 한 인간이 가질 만한 힘이 아니죠."
그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세상에는 언제나 반작용이 있다. 힘을 가진 자는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된다.
아펠드리체는 슬픈 눈으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어째서 신은 그에게 이런 고통을 안겨주었을까?'
베라프에서 이지혁은 수천 년 동안 좌절했다.
그의 삶은 그저 좌절의 연속,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죽을 수 있다면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지혁은 죽을 수 없었다.
죽지 못했기에 포기할 수도 없었다. 포기해 버리면 그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으니까. 이곳으로 돌아온다는 목적이 없어져 버리면 그는 노회하지 않는 뇌로 끝없는 세월을 그저 살아가기만 해야 한다.
자신을 이해해 줄 수 있는 이들이 단 하나도 없는 곳에서 그저 살아가기만을 해야 하는 것이다.
누가 그를 이해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건 다 돌아오기 위해서 한 거잖아요?"
"돌아오기 위해서?"
"…이 세계로. 나라도 그랬을 것 같은데?"
아펠드리체가 웃음을 지었다.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명백한 비웃음에 윤혁규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곳에서 이지혁 씨가 보낸 시간이 몇 년인지 알고나 있나요?"
"그야……."
"베라프에서 그 사람이 보낸 시간은 이천 년도 안 돼요. 하지만 그는 마계에서 그 이상의 시간을 보냈죠. 그 세월을 지낸 사람은 한 가지를 알게 되요. 그게 뭔지 아나요?"
"…모르죠. 겪어보지 않았으니까."
"없겠구나."
"네?"
아펠드리체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없겠구나.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겠구나. 내가 사랑하던 사람들, 내가 돌아가고 싶은 땅, 내가 다시 살아가고 싶은 그 시간은 이제 차원을 넘어도 돌아올 수 없겠구나."
윤혁규의 눈빛이 흔들렸다.
"아……."
"당신이 이계에서 수천 년의 시간을 보냈다면, 이 세계로 다시 돌아온다고 해서 세상이 그대로 남아 있을 거라고 생각하겠어요? 지금으로부터 이천 년이 지난 지구가 어떤 모습일지 상상이나 할 수 있어요?"
윤혁규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이계는 시간 축이 다르다. 하지만 그 시간 축이라는 것은 거의 20대 1을 넘지 않았다. 지금까지 이지혁이 그들을 수련시키겠다고 가장 시간 축이 크게 뒤틀린 곳을 찾았는데도 그 정도가 한계였다.
베라프가 특별히 이상하게 뒤틀려 있는 것이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백 년, 그 이상의 시간이 흘러가 있죠. 시간이 역으로 흘렀다면 지구는 이미 몇 만 년이 흘렀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어요. 아무리 좋게 생각을 해도 지금의 이곳이 이지혁 씨가 생각하는 그곳일 확률은 없는 것이었죠."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는 그런 곳으로 돌아온 거예요. 그를 증오하는 이들은 어떻게든 그를 방해하려 했죠. 그를 사랑하는 이들은? 더 심하게 방해하려 했어요. 그런 허무한 죽음이 그의 마지막에 걸맞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는 필사적인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이 세상으로 돌아온 거예요. 그도 알고 있던 거죠. 이 세상으로 돌아온다고 해도 그가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무도 없는 곳에서 맞이할 쓸쓸한 죽음뿐이라는걸."
아펠드리체가 서글픔이 담긴 눈으로 말했다.
"당신은 말했죠, 이 세상으로 돌아오기 위해서라면 감수할 수 있다고. 지금도 그리 생각하나요?"
"…아니요."
윤혁규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돌아갈 곳 없는 이가 오로지 죽기 위해서 수천 년의 고통을 감수한다는 것.
그건 너무도 슬픈 이야기다.
"지금의 힘을 갖기 위해 당신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는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그 힘을 쉽게 손에 넣었다고는 생각하지 말아요. 지켜본 내가 말하니까. 그건 차라리 얻지 않는 게 나은 힘이었으니까."
숙연해진 윤혁규가 입을 닫았다.
그래서일까.
그를 참담하게 몰아붙이던 아펠드리체가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그리고 이지혁 씨는 당신들을 하찮게 보지는 않았을 거예요."
"네?"
뜬금없는 아펠드리체의 말이 윤혁규가 되묻자, 아펠드리체가 고개를 돌려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그는 즐거워 보였으니까요."
"즐거워요?"
아펠드리체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단 한 번도 그리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었지.'
베라프에서는 말이다.
단 한 번도.
* * *
아펠드리체는 이 사람들에게 조금 질투마저 느끼고 있었다.
드래곤이 질투를 한다고 하면 누가 믿을 것인가.
자아에 대한 확고한 자신을 가진 드래곤은 다른 존재에 대해 부러움을 느낄 수가 없다. 하지만 아펠드리체는 지금 부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건 아펠드리체가 더 이상 드래곤과 같은 정신을 유지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미쳐 간다는 말이겠지.'
신은 이유 없이 생명을 설계하지 않는다. 신이 설계를 했다는 말은 그 생물에게는 그런 것이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드래곤이 확고부동한, 주위에 결코 휘둘리지 않는 자아를 가져야 하는 이유는 확연하다.
너무나도 오랜 세월을 살아가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소화하는 정보는 과도할 정도로 많다. 그들이 이해해야 하는 세상의 이치 역시 과하게 많다.
다른 존재와 감정에 휘둘리기 시작하는 순간, 감정이 쌓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수천 년을 살아가는 그들에게 감정이라는 것은 독과도 같았다.
누군가를 수천 년 동안 증오할 수 있겠는가.
누군가를 수천 년 동안 사랑할 수 있겠는가.
감정은 부담이 되고, 관심은 독이 된다.
그렇기에 드래곤들은 자신의 마음의 주변에 강철의 격벽을 치고 자신을 다른 존재들에게서 유리시켰다.
세상을 뒤엎을 수 있는 힘을 가지고도 오지로 숨어들어 레어를 파고 살아간다. 많은 시간을 수면으로 보내고, 교류를 가지지 않는다.
인간에게 고립이 독이라면, 드래곤에게는 교류가 독이었다.
그렇게까지 해서 유지해야 하는 정신이었건만.
'이미 나는 드래곤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었어.'
틈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은 이지혁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다. 이지혁은 인간이었다. 그리고 그 어떤 인간보다 격렬하게 흔들리고, 격렬하게 살아가는… 그저 인간이었다.
그런 인간을 천 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지켜보면서 변화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쩌면 이것은 라트렐이 그녀에게 내린 저주일지도 모른다.
그를 감시하고 묶어두는 일을 그녀에게 맡긴 것은 라트렐이었으니까.
그건 너무도 가혹한 형벌이었다.
결국 아펠드리체의 드래곤으로서의 정체성은 파괴되었고, 그녀에게 남은 것은 이제 비참한 죽음뿐이다.
살아갈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감정에 흔들리는 존재는 시간을 버티지 못한다. 상실을 이기지 못하니까.
이대로 이지혁이 죽고 나면 아펠드리체는 어찌 되겠는가.
그녀의 수명이 다하는 시간 동안 그의 빈자리를 느끼게 될 것이고, 그 사실은 아펠드리체를 조금씩 갉아먹어 들어갈 것이다.
남은 결과는 미치는 것. 그게 아니라면 쓸쓸히 홀로 죽어가는 것.
고고히 살아가는 드래곤에게는 그 어느 것도 어울리지 않았다.
이제 그녀는 드래곤이되, 드래곤이라 부를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후회하지 않았다.
그 원인이 된 사람이 지금 포효하고 있었다.
나를 보라고.
이 나를 보라고.
내가 그 끝도 없는 고통 속에서 헤매고 헤매이다 마침내 찾아낸 이 힘을 보라고 세상을 상대로 울부짖고 있었다.
'가련한 사람.'
아펠드리체는 가슴을 짓누르는 슬픔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아무런 이유 없이 베라프로 끌려와 인간이 감당하지 못할 고통을 감당해야만 했던 이다.
그의 포효가 아펠드리체에게는 마치 아이의 울음처럼 들려왔다. 어찌할 수 없고,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몰라서 그저 울 수밖에 없는 아이의 울음 말이다.
이지혁은 지금 어떤 심정일까?
이 전투의 결말을 그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죽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가치 있게 죽기 위해서 지금 그는 영혼이 찢어지는 고통을 감내하고 있었다.
만약 그녀가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면, 지금 그녀는 이지혁의 마음도, 심정도 지금 그가 왜 저렇게까지 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죽음이라는 온당한 결말을 맞이해야 한다면, 조금이라도 덜 고통스럽고 덜 힘겨운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당연하니까. 그게 드래곤의 사고방식이니까.
어떤 존재가 그 홀로가 아니라 다른 존재들과 교류하면서 살아가고 타인을 통해 자신을 완성시킨다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 과거의 그녀라면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이 세계에 와서 좋았던 것?
'볼 수 있었으니까.'
그가 웃는 모습을.
단 한 번도 그녀에게는 보여주지 않던 미소, 베라프에서는 결코 볼 수 없던 미소를 이 세계의 그는 짓고 있었다.
'조금은 야속하기도 하지만 말이야.'
그녀가 채울 수 없는 부분을 이 세계의 사람들은 채워준 것이다. 그 사실이 못내 부럽고, 또 가슴 아프고, 그러면서도 좋은 그녀였다.
그는 그럴 자격이 있으니까.
그 오랜 시간을 고통받아 온 이지혁이라면 마지막 순간만큼은 웃을 수 있어야 하니까.
그 웃음을 안겨준 이가 그녀가 아니라 다른 이들이라는 것이 아쉽고 안타까웠지만…….
'그래도 조금은 행복해졌나요?'
물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그렇지 않다고 해도 그녀는 가슴이 아플 테니까.
하지만…….
그저 부러운 것만은 아니었다.
그 누가 뭐라고 해도 이지혁이란 사람을 가장 잘 이해하고 그 누구보다 오래 지켜봐 온 사람이 그녀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 결코 서로 이해할 수 없는 드래곤과 인간이라는 그 깊은 간격 속에서 말이다.
아펠드리체는 미소를 지었다.
그도, 그녀도…….
이미 홀로 자아를 유지할 수 있는 단계는 지나 버렸다. 평범하게 살아갈 수 없다. 살아남는다면 살아서 지옥을 볼 것이고, 죽는다 해도 편히 죽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
'혼자 가게 두지는 않을 테니까.'
그건 너무 쓸쓸하니까.
그 정도는 괜찮을 것이다.
홀로 고고히 죽는 것이 이지혁이라는 인간에게 더없이 어울리는 죽음이라 하더라도, 그 고고함을 조금은 해칠 자격이 그녀에게는 있을 테니까.
그것이 천 년의 세월 동안 이지혁을 지켜봐 온 그녀가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보답이었다.
'그러니까…….'
그녀의 눈에 이지혁의 모습이 아프게 틀어박혔다.
다른 이들의 눈에 이지혁이 뿜어내는 마기가 보일 때, 그녀의 눈에는 부서지고 무너지는 육체에서 흘러나온 피가 보였다.
항상 그렇다.
저 사람은.
앞에서는 의연하게 서 있지만, 그 뒤에서는 그 누구보다 많은 피를 흘리고, 누구보다 고통받는다.
조금은 티를 내도 괜찮을 텐데.
조금은 말이다.
그러니까…….
"힘내요."
* * *
이지혁은 자신도 모르게 슬쩍 고개를 돌렸다.
무슨 말이 들린 것 같은데?
그의 눈에 저 멀리서 양손을 모으고 있는 아펠드리체의 모습이 들어왔다.
"큭."
이지혁은 웃고 말았다.
'안 어울려.'
기도라는 것은 자신의 일을 타자에게 맡길 수밖에 없는 인간이란 나약한 존재의 권리이자 특권이다. 드래곤 주제에 기도를 하다니.
'멍청한 도마뱀 같으니.'
멍청하고 어리석은 도마뱀.
그 홀로 완전하고, 그 홀로 당당한, 가장 완벽한 존재.
베라프의 드래곤 로드.
그런 여자가 꼴사납게 양손을 모으고 기도를 하는 꼴이라니. 그것도 인간처럼 말이다.
'신은 아무것도 도와주지 않아.'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자신이 직접 해야 한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기고 물어뜯어서라도 스스로 쟁취해야 한다.
그것이 이지혁이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아펠드리체가 기도를 하게 된 것은 자신의 무력감을 실감했기 때문인가, 아니면…….
"큭큭큭큭."
꼴사납다.
꼴사나워.
그녀가 아닌 자신이 말이다.
인간은 어떻게 살았는가로 평가받지만, 어떻게 죽었는가로 완성된다.
그의 죽음이 그녀가 저리 간절해질 정도로 못나 보였던가.
이지혁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우드득 소리와 함께 손가락의 뼈와 손톱이 부러져 나가고, 살이 터지며 피가 흘러내린다. 하지만 이내 거짓말처럼 그의 육체가 회복되고 있었다.
"멍청한 도마뱀 같으니."
똑똑히 보라지.
자신이 마지막으로 얼마나 화려한 축포를 터뜨리는지 말이다.
이 축포는 단순히 이 지구를 축복하는 축포로 멈추지 않을 것이다. 베라프와 그 모든 차원을 넘어 울려 퍼질 테니까.
더없이 화려한 죽음이 될 것이다.
세상 모두가 그를 축복하겠지.
그의 죽음으로 지켜지는 세상에 환호하겠지.
하지만…….
'알아, 멍청아.'
그곳에 이지혁은 없다.
그가 지켜내야 할 세상에, 그가 지켜낼 세상에 이지혁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부재가 이 세상을 지켜내는 절대의 조건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그 당연한 이치를 벗어났을 때, 이지혁이 받은 고통이 얼마나 컸던가.
그러니 죽음을 두려워할 건 없다. 누구나 죽으니까.
다만…….
그녀도 이제 이해할 수 있을까?
다른 존재가 부재한다는 현실이 때로는 자신의 죽음 이상으로 고통스러울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드래곤인 그녀가…….
과연 이지혁의 죽음을 그저 존재의 부재 정도로만 받아들일 수 있을까?
'멍청한 도마뱀 같으니.'
사서 고생이다.
그녀도, 이지혁도 겪지 않아도 될 고통을 스스로 감내하고, 쫓을 필요도 없는 것을 쫓고 있다. 여름밤의 불꽃 속으로 뛰어드는 나방처럼 말이다.
"낄낄낄낄."
죽기 위해서 살아왔으면서도 이 순간 그 누구보다 강렬하게 삶을 갈망하는 자신의 태도에 모순을 느끼면서 이지혁은 전방의 마수들을 바라보았다.
'아직 감상에 빠질 때가 아니지.'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얼마 되지 않으니까.
죽음이라는 것을 피할 수 없다면, 마지막 남은 시간만큼은 화려하게 불타올라야 하지 않겠는가.
"똑똑히 보라고, 이 멍청한 도마뱀아."
이게 그가 그 지옥을 버텨오면서 얻어낸 힘이다.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한…….
* * *
우우우우웅!
그의 우수가 허공으로 들린다.
"끄으으으으으."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고통이 그의 육체를 지배했다. 하지만 괜찮다. 고통은 지긋지긋할 정도로 익숙하니까.
손끝에서 뿜어져 나간 마기가 허공을 향해 날아가서 뭉쳐 든다.
최정훈은 이지혁이 만들어내는 광경을 보며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하늘이 검게 물든다.
세상이 검게 물든다.
이지혁의 몸을 타고 허공으로 날아든, 짙은 타르와도 같은 마기들이 허공에서 서로 뭉쳐 들고 있었다.
구름.
그것은 구름이었다.
하지만 그저 먹구름이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이었다.
검은 것이 아니라 암흑.
빛도, 어둠도, 그 어떤 것도 빠져나갈 수 없는 무저갱이 하늘에 열린 것만 같았다.
요동친다.
하늘을 뒤덮은 거대한 어둠이 요동치고, 타오르고, 작렬한다.
그건 너무도 압도적인 광경이었다.
하늘에 떠오른 마기의 구름이 꿈틀댈 때마다 최정훈의 육체가 움찔하고 있었다. 그리고 온 세상이 그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귓가로 울부짖는 비명이 울려 퍼지는 것 같다.
저 가공할 힘을 감당하지 못한 세상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전설은 한 치의 거짓도 없었다는 말인가?"
디오레 12세의 신음이 그의 귓가로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이지혁의 손이 아래로 천천히 내리그어진다.
아주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세상에 멸망을 선고하는 것 같은 그의 손짓이 아래로 향하자, 허공에 떠 있는 절망의 암운(暗雲)이 세상을 향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세상 모든 것을 파괴할 것 같은 이질적인 마기의 구름이 마수와 마왕들을 덮치고 있었다.
절망이 하늘에서 내려왔다.
* * *
파지직.
아주 작은 스파크가 튀는 것이 시작이었다.
요동치던 마기의 구름이 일순 그 움직임을 멈춘다 싶더니, 작은 스파크가 튀는 것과 동시에 아래로 하강하기 시작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결코 빠르지 않게 말이다.
세상 모든 것을 다 불태워 버릴 듯한 기세로 검은 어둠의 구름에 아래로, 아래로 천천히 하강했다.
모든 움직임이 멈추었다.
격렬히 싸우고 부딪치던 마수들도, 기계처럼 정해진 명령만을 수행하는 골렘조차…….
그리고 천하의 마왕들조차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그들에게로 떨어져 내리는 절망을 바라보았다.
그 힘을 느끼지 못하는 이들조차도 저 구름이 얼마나 거대한 절망을 담고 있는지 직감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파지지지직!
요동친다.
일순 정지된 것처럼 그 움직임을 멈춘 구름이 아래로 향할수록 천천히 뒤틀리기 시작했다.
더욱더, 더욱!
이윽고 그 하강이 끝에 달할 시점에는 마치 요동치는 검은 폭풍이 휘몰아치는 것 같은 모양새가 되었다.
그것은 절망이고, 멸망이었다.
"말 그대로군."
최정훈은 이미 오래전에 지나가 버린 예언을 떠올렸다.
하늘에서 공포의 대왕이 내려온다.
노스트라다무스가 이 광경을 보고 한 말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이 광경을 설명하는 데 그 이상 적절한 말이 있을까.
강림한 절망이 마수들을 뒤덮었다.
절망의 다른 이름은 평등이었다.
너무도 거대한 구름은 도망칠 기회조차 부여하지 않았다. 몸을 빼낸다고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아군과 적군조차 가리지 않았다.
뒤엉켜 있는 마수들에게로.
차마 도망치지도 못하고 굳어 있는 마수들에게로.
절망은 평등하게 떨어져 내렸다.
츠으으으으.
느릿하게 내려앉은 구름이 광포하게 주변을 휩쓸기 시작했다.
최정훈은 눈이 부시다 생각했다.
어둠이 눈부실 리가 없다. 물리학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비웃을 발언이다.
하지만 눈이 부셨다.
찬란한 어둠이란 당치도 않는 말이 떠오를 정도로 마수들을 뒤덮은 어둠은 눈부시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그 눈부신 어둠이 내려앉은 곳에 남은 것은 절망도, 공포도 아니었다.
소멸.
집어삼킨다.
어둠이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절망에 떨 만큼의 고통도, 공포도 존재하지 않았다. 어둠은 자신이 집어삼킨 모든 것들에게 공평한 소멸을 선사했다.
짙은 어둠이 마치 영혼까지 빨아들일 기세로 닿는 모든 것의 존재를 무(無)로 되돌렸다.
절망으로 가득 차 고요하기만 한 대지에 아주 작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소리는 이내 점점 커지더니, 온 세상을 가득 매우는 굉음으로 화했다.
굉음과 함께 어둠이 마치 발악을 하듯이 넘실거렸다. 불꽃처럼 일렁이고, 파도처럼 휘몰아치는 어둠.
세상에 다시없을 광경이었다.
그리고…….
스스로를 부풀리고 불태우며 발악을 하던 어둠이 일순 잦아들기 시작하더니, 환상처럼 스르륵 꺼지기 시작했다.
"아……."
최정훈은 눈을 크게 떴다.
어둠이 사라진 곳에 남은 것은 광명이 아니었다.
무(無).
그곳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마치 거울처럼 반듯하게 잘려 나간 대지 위에는 파괴의 잔재 따위는 찾아볼 수도 없었다. 그저 애초에 그렇게 되어 있는 것처럼, 그저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이 더욱 지켜보는 이들을 소름 돋게 만들었다.
차라리 저곳에 신음하는 마수들의 잔재가 남아 있었더라면 이런 등골을 타고 오르는 위화감은 느껴지지 않았을 것이다.
대체 얼마만 한 힘이 작용해야 저런 결과가 나올 수 있단 말인가.
숨을 죽인다.
그러고는 몸을 웅크린다.
경배.
최정훈은 어째서 인간이 신을 맞이할 때는 자세를 낮추는지 알 수 있었다.
그건 존엄에 대한 경외가 아니었다.
자신이 감히 어쩔 수 없는 초월자에 대한 근원적인 공포의 표현인 것이다.
'이렇게 시작되는 거구나.'
신앙이라는 것이 말이다.
환상이라고 생각되는 이적에 대한 공포, 그리고 그 이적을 벌인자에 대한 경외와 경배.
멋 옛날 선각자, 혹은 신의 화신이라 불리던 이들도 이런 식으로 자신의 신을 세상에 알리지 않았을까?
'아니겠지.'
지금 그의 눈에 들어오는 광경은 신의 이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과격하고 폭력적이었다. 물론 신은 화마와 용암으로 도시를 멸하고 세상을 홍수로 잠기게 하여 몰살시킬 정도로 폭력적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재해라는 형태로 일어나는 폭력과, 이능이라는 형태로 일어나는 폭력은 받아들이는 느낌이 달랐다.
앞쪽이 신성의 또 다른 형태로 받아들여진다면, 이건 뭐랄까…….
'그만두자.'
해석하고 설명하는 것도 부질없는 짓이다. 설명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능(異能)이 아니고, 이적(異蹟)이 아니다. 인간의 지식과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기에 이적이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적을 목격한 이들의 반응은 극명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서아영이 신음을 흘렸다.
모르지는 않다. 이지혁의 힘이 보이는 모든 것을 앗아가 버린 것이다.
하지만 저 광경을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서아영이 질린 눈으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마왕들보다 이지혁이 더 공포스럽고 이질적이었다.
다른 이들의 반응 역시 별다르지 않았다.
순간적인 경외와 경배에서 벗어난 이들은 몸을 덜덜 떨며 이지혁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리도 아니지.'
최정훈은 혀를 내밀어 입술을 축였다.
애초에 신을 바라보는 인간의 심정은 경외가 반이고, 공포가 반이다. 절대적인 힘을 가진 이가 나를 지켜보고, 결국에는 나의 죄를 심판할 것이라는 공포. 그것이 신앙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그저 지켜보기만 하는 이라면 두려울 것도, 무서울 것도 없다. 신앙을 어기고 그의 의지를 따르지 않았을 때, 나에게 돌아올 불이익이 그들에게 신앙을 믿게 만든다.
혹자는 그것이 지옥이라 하고, 혹자는 그것이 내세라 한다.
그리고 지금 이지혁은 현실에 그 심판의 공포를 끌어오고 있었다. 뜬구름 잡는 내세나 지옥이 아니라, 당장 눈앞에 닥치는 절대적인 심판 앞에서 그 누가 평정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그때, 이지혁의 육체를 둘러싸고 있던 마기들이 일순 잦아들었다.
시뻘건 혈기가 가득 차오른 이지혁의 눈동자가 슬쩍 뒤쪽을 향한다.
'아…….'
최정훈은 순간 충격을 느꼈다. 이지혁의 시선이 그를 관통했다고 느끼는 순간, 몸이 돌처럼 굳어졌다.
살의와 악의를 가득 담고 있는 이지혁의 눈빛을 보는 순간, 그는 마치 어린아이가 부모의 분노를 마주하는 순간처럼 피할 수 없는 내면과 대면해야 했다.
이지혁의 눈이 그들을 훑는다.
붉게 물든 그의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던 최정훈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설마…….'
이지혁이 지금까지 저 힘을 사용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었더라?
그렇다, 마족화.
힘을 쓰면 힘을 쓸수록 그는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잃어가고, 결국은 마족이 되어버릴 것이다.
저 시선의 의미가…….
'아니, 아니어야 해.'
아직은 아니다, 아직은…….
최정훈이 이지혁이 마족이 되어 그들을 쓸어버릴 것이라는 최악의 상상을 하는 순간, 이지혁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아주 천천히.
그러고는 묵직하고 섬뜩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후우우우우."
낮은 호흡 소리.
한숨을 쉬는 것 같기도 하고, 자신을 억누르기 위해 심호흡을 하는 것도 같은 그 호흡이 끝나고 나자, 이지혁이 두 눈으로 시뻘건 안광을 줄기줄기 뿜어내며 말을 하기 시작했다.
"뭐해요?"
"…네?"
이지혁의 목소리는 지금껏 최정훈이 알고 있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저 세상의 온갖 짜증이 다 담겨 있는 목소리를 들으니 정신이 번쩍 드는 느낌이다.
"아니! 뭐하냐고! 이쯤 해줬으면 알아서 타이밍 보고 치고 들어와야 할 거 아니냐고!"
"네?"
"내가 탱하고 쩔하고 딜하고 다 해요? 응? 나 혼자 다 할까? 남으신 분들은 뒤에서 구경하시고? 팝콘이라도 튀겨 드려야 하나?"
"…아니, 그게 아니고……."
천하의 최정훈마저 당황하여 떠듬대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하지만 이지혁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악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사람이 염치가 있어야지. 앞에서 이리 난리를 치는데, 도울 생각은 하지도 않고 그냥 보고 놀고 있네? 세상에. 아이고, 어머니. 내가 이런 인간들을 동료라고 믿고 싸우고 있습니다."
뭐랄까…….
꿈을 꾸다가 순식간에 현실로 확 끌어 올려진 기분이었다.
'저런 인간이었지.'
신성은 얼어 죽을.
신이면 품격이 있어야지. 힘만 세면 그게 깡패지.
그들의 앞에 있는 저 인간이 이지혁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은 최정훈이 허탈한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그랬지.'
이지혁은 뜬금없이 강해진 것이 아니다. 원래 이지혁은 이 경지에 오른 사람이었다. 그런 양반이 지금까지 그들과 개드립을 치며 같이 놀고 웃고 살아온 것이다.
지금 이곳에서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이지혁과, 그의 사무실에서 게임을 하다가 면박을 먹는 이지혁은 같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지혁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저 바라보는 그들이 이지혁이라는 사람을 달리 보고 있을 뿐이다. 그 사실을 깨닫자 마음이 편해졌다.
"괜히 방해될까 봐 뒤로 빠져 있던 것 아닙니까?"
"네. 변명 잘 들었구요."
이지혁이 혀를 찼다.
"다 노셨으면 이제 일 좀 하시죠? 아니면 정말 팝콘이라도 소환해 드릴까?"
"사양하죠."
최정훈이 씨익 웃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들었죠?"
"아, 뭐……."
"네. 물론이죠."
나직하게 호응이 났다.
그러자 이지혁이 고개를 들어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거기, 진짜 팝콘 튀겨 먹고 있는 양반들도 일 좀 하지? 멀리 떨어져서 구경만 하는 거 배알 꼴려 죽겠는데, 진짜로 놀고 있네? 손가락으로 버튼 하나 누르는 게 그리 어려워요?"
화면으로 보고 있을 크리스토퍼가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지혁은 진실된 마음을 담아 가운뎃손가락을 치켜올려 주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일인분만 하라고! 일인분만!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이 잉여들아!"
이지혁이 양손으로 다시 마나를 모으기 시작하자, 최정훈이 소리쳤다.
"더 욕 퍼먹기 싫으면 공격!"
"으아아아! 빌어먹을!"
"이게 뭐냐고! 이게! 이 상황에 와서까지 이 꼴이야!"
NDF들이 울분을 토하며 앞으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뒤, 뒤지지 마라! 달려라!"
"라트렐을 위하여!"
"베라프를 위하여!"
NDF들과 능력자들이 돌진하기 시작하자, 그동안 멈춰 있던 베라프의 군세들도 다시 달려들기 시작했다. 드래곤과 이종족들도 정신을 번쩍 차리고는 마수들을 향해 불을 뿜어 댔다.
그 사이를 미친 듯이 질주하는 마수들과, 그런 마수들을 짓밟으며 뒤뚱뒤뚱 전진하는 아이언 골렘들.
'기억해 두자.'
아펠드리체는 그 광경을 그 두 눈에 똑똑히 박아 넣었다.
이제까지 없던, 그리고 앞으로도 다시는 없을지도 모르는 전 인류와 전 생물의 공조가 지금 이곳에서 이뤄지고 있었다.
저 이지혁을 중심으로 말이다.
어쩌면…….
이 광경은 이지혁이 그토록 바라고 소망하던 모습일지 몰랐다.
그래서일까?
등을 보이고 있는 이지혁의 모습이 조금 전과는 다르게 조금은 신나 보였다.
아주 조금은 말이다.
그리고 그 순간…….
바르바체가 그 무거운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 * *
"놀라운 일이군."
밀린다.
그가 이끌고 온 세력들이 밀리고 있었다.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마계의 긴 역사에 타 차원을 침공한 일은 빈번했고, 그때마다 그들은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지금 객관적으로 봐도 그들은 밀리고 있었다.
인간들에게.
그리고 인간을 지지하는 이들에게 말이다.
"진형을 무너뜨리지 마라!"
이미 한 번 마수들과 마왕에 당한 바가 있는 기사단들은 좀 더 뭉쳐 드는 것으로 대책을 세웠다. 그들의 주변에서 빛나는 신성력은 마력의 천적이나 다름없다.
쏟아지는 마력탄들을 신성력으로 튕겨내고, 완화하고, 육체와 갑옷이 가진 방어력으로 버텨낸다. 시커먼 마력탄은 그들이 뿜어내는 새하얀 신성력의 결계에 닿는 순간, 그 위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러고는 돌격!
"으하하하하하하핫!"
이성을 잃고 눈을 까뒤집은 기사들이 자신들보다 수십 배는 거대한 마수들에게 전력으로 달려든다. 말과 하나가 되어 달려든 기사가 신성력을 바탕으로 들이받는 충격력은 아무리 단단한 갑피를 가진 마수라고 한들 쉽사리 버텨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콰아아아앙!
인간과 마수가 충돌하는데, 어이없게도 폭음이 울려 퍼졌다. 뒤로 튕겨 나간 마수를 향해 기사들은 새하얀 오러가 맺힌 롱 소드를 사정없이 틀어박았다.
푸른 피가 사방으로 튀어 오른다.
"크하하하!"
광기 어린 고함 소리가 채 퍼지기도 전에 쌔앵- 하는 날카로운 음이 들리더니, 기사의 앞쪽으로 형형색색의 에테르와 마법이 틀어박혔다.
"갈겨! 처 갈기라고!"
누군가의 커다란 고함 소리와 함께 에테르가 비처럼 쏟아졌다. 얼음의 불꽃이 타오르고, 차가운 뇌전이 천지를 뒤덮는다. 그런 후…….
대기를 찢는 듯한 굉음과 함께 머리 위에서 폭탄이 비처럼 쏟아졌다.
쿵! 쿠웅! 쿠웅!
폭격기가 스치듯 지나간 자리에 검은 매연과 함께 붉은 폭염이 솟아올랐다.
시커멓게 물든 대지를 다른 색으로 채우는 것처럼, 수많은 폭격기가 마수들의 머리 위로 폭탄을 계속해서 투하했다.
콰아아아앙!
그뿐만이 아니었다.
음속을 넘어 날아든 포탄 역시 마수들의 육체를 갈기갈기 찢어내고 있었다. 대부분의 포탄은 마왕들에게로 집중되고 있었지만, 중간중간 타깃이 바뀔 때마다 거대한 마수들이 속절없이 핏덩어리로 화해간다.
그런 후, 폭염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를 이지혁의 종속하에 있는 마수들이 치달리고 있었다.
카아아아아아!
크롸라라라라라라!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은 채 달려드는 마수들은 게걸스럽게 쓰러진 마수들을 덮치고 물어뜯었다. 재생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갈기갈기 찢긴 마수들은 그 힘을 잃고 숨통이 끊겨간다.
쿠우우우웅!
아이언 골렘들 역시 마수들을 짓밟고 후려친다.
'놀라운 생물들이로군.'
하나하나를 떼어놓고 본다면 그들은 마수 하나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런데 저리 뭉친 것만으로 마수들은 물론, 마왕까지 밀어내고 있었다.
개체가 집단이 되었을 때, 그 힘이 증가하는 종족들을 하나둘 본 것은 아니지만, 이 인간이라는 것들은 그동안 바르바체가 알아오던 집단의 시너지를 가볍게 뛰어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이 된 자는 누가 뭐라 해도 이지혁이었다.
'마치 그에게 이 역할을 부여한 것처럼 말이야.'
신은 존재한다.
다만, 누군가가 생각하는 절대적인 힘을 가진 신이 존재하지 않을 뿐이었다.
바르바체는 이미 신이 존재하는 수많은 세상을 망가뜨리고, 무너뜨리고, 또 먹어 치웠다. 그러니 신이라는 존재를 굳이 존중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바르바체는 '신'이라고 명명하지 못할 절대적인 의지의 흐름을 느끼고 있었다.
이지혁이 베라프로 떠밀려 와 지금 이 순간에 그의 앞에 서기까지의 과정은 너무도 작위적이다. 우연과 우연이 거듭되어 만들어졌다고 하기에는 너무 절묘하지 않은가.
"큭큭큭큭."
바르바체는 통렬하게 웃었다.
'그렇다면 그것 역시 의미가 있겠지.'
그와 마계를 막으려고 하는 절대적인 의지를 깨부수고 의지를 관철하는 것 역시 재미가 있을 것이다. 그는 신의 이름을 들먹이지 않아도 그들의 신성을 부정할 수 있는 존재였으니까.
어쩌면 바르바체는 신 이상의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는 신이 만든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있으니까.
베라프의 그 많은 신들이 그가 넘어오는 것을 전력을 다해 막아낼 만큼, 감히 그의 존재를 부정하지 못하고 그의 강림만을 전력을 다해 막을 만큼의 능력을 갖추고 있으니까.
신이라는 이름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와 신은 아니되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있는 존재 중 누가 더 우월한 것인가.
그 답은 너무도 빤하다.
하지만 지금 바르바체는 그리 여유롭지 못했다.
몰려오고 있었다.
인간이, 그리고 인간의 의지가.
드래곤과 이종족이 섞이기는 했지만, 지금 저 무리들의 중심을 잡고 있는 이들은 누가 뭐라 해도 인간이었다. 그리고 그 인간들의 맹목적인 돌진이 바르바체를 뒤흔들고 있었다.
"큭큭큭큭."
짜릿한 경험이다.
이런 감정을 느껴본 것이 대체 얼마 만이던가.
존재를 부정당할 만큼의 위기를 경험해 본 것은 그가 스스로의 존재를 자각한 이후로 단 한 번도 없었다. 지금처럼 누군가가 그의 목숨을 노리고 달려든다는 느낌조차 받아본 적이 몇 번 없었다.
생소한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바르바체는 그 중심에 있는 이지혁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바르바체가 혀를 내밀어 가만히 입술을 핥았다.
'정말 구미가 당기게 만드는군.'
이제 무대는 모두 갖추어졌다.
더는 참을 필요도 없고, 더는 시간을 끌 필요도 없다. 그가 원하던 순간이 마침내 도래했으니까.
콰아아아앙! 콰아아아아앙!
머리 위에서 폭탄이 쏟아진다. 주변의 땅이 솟아오르고, 폭염이 그의 전신을 뒤덮었다. 폭염의 한중간에 서서 바르바체는 자신을 향해 돌진해 오는 백은의 기사단을 보았다.
"너무 기분 내지 말라고."
바르바체가 만면에 미소를 머금었다.
기세를 탔다고 해서 토끼들이 사자를 잡겠다며 달려드는 꼴이 아닌가.
'무능한 것들.'
그 기세에 밀려서 주춤대고 있는 마왕들을 보고 있으려니, 한심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마왕이라는 이름을 걸고 있는 이들이 어찌 저런 모습을 보인단 말인가.
차라리 그들보다 건너편의 이지혁이 훨씬 더 마왕다웠다.
아니, 마왕이겠지.
자신이 가진 권능을 대부분 회복한 이지혁이라는 존재는 바르바체를 제외한 그 어떤 마왕들보다 마왕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존재였다. 인정할 수밖에.
하나…….
바르바체의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그것 역시 건방지기는 마찬가지다."
이지혁이 마왕 중의 마왕이라면, 바르바체는 마왕을 뛰어넘은 존재였다. 세상에 마신이라 불려야 할 이가 있다면, 그건 단 하나, 바르바체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에게 대항하는 이를 어찌 너그러운 얼굴로 보아줄 수 있겠는가.
콰아아아앙!
바르바체의 육체 주변으로 포탄과 폭탄이 쏟아진다. 그의 주변을 휩쓴 불꽃의 소용돌이가 대기를 집어삼키고, 마치 이곳을 다른 세상인 것처럼 바꾸어놓고 있었다.
"큭큭큭큭."
그 폭염 속에서 바르바체는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저항하라.
좀 더 저항하라.
그래야 굴복시키는 맛이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 순간이었다.
고오오오오오오.
세상의 모든 마나가 앞쪽으로 빨려드는 것 같다. 결코 물리력을 갖추지 못한 마나가 빨려들고 있는데, 마치 거대한 폭풍이라도 일어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일 정도였다.
바르바체의 눈이 부릅떠졌다.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마나를 빨아들이는 주체가 누구인지는 너무도 빤한 일이다. 지금 이곳에서 이지혁이 아니라면 저만큼의 마나를 다룰 수 있는 존재는 없을 테니까.
하지만 의아한 일.
이지혁은 지금 마계의 코어에 박아 넣은 인을 통해서 흑마력을 원하는 만큼 수급하고 있었다. 그런데 굳이 일반적인 마나를 저만큼이나 빨아들일 필요가 있단 말인가.
의문은 금세 풀렸다.
"…이지혁?"
이지혁의 육체 주변이 마나의 소용돌이로 가득 찼다.
검고 희고, 그리고 투명한.
서로 다른 세 종류의 기운이 서로 얽혀들며 파괴적으로 요동친다.
'흑마력에 마나, 그리고… 저건 인간의 기운인가?'
세 종류의 기운을 동시에 사용한다고?
"큭큭큭큭."
대체 저 인간은 얼마나 자신을 놀라게 해야 직성이 풀린단 말인가.
마족조차 할 수 없는 짓을 태연하게 저지르는 인간이라니.
그가 가진 힘과 능력이 문제가 아니라 그가 하고 있는 파격적인 발상이 바르바체를 당황하게 만들고 있었다.
다른 기운들은 서로 섞이지 않는다. 그런데 두 가지도 아니고, 세 가지의 기운을 동시에 활용한다는 생각을 저 미친놈이 아니면 누가 할 수 있겠는가.
'지독할 정도로 파격적이고, 또한 합리적이군.'
자연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을 강제로 일으켜 거기서 생겨나는 반동으로 공격을 한다는 것은 마법의 기본 논리 중 하나다. 마법이라는 것은 결국은 분열이고 융합이니까.
이지혁은 그 마법의 논리를 마나를 뛰어넘어서까지 전개하고 있는 것뿐이다. 더없이 이성적인 일이지만, 그런 발상을 할 수 있다는 것부터 제정신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세 가지 기운이 서로에게 자극을 받아 미쳐 날뛰고 있었다. 도저히 컨트롤이 불가능할 것 같은 기운들이 이지혁의 손짓에 따라 조금씩 움직인다.
마치 인간을 증오하는 야생마를 조금씩 길들이듯이 섬세한 손끝을 따라서 마나와 흑마력, 그리고 에테르가 이끌리고 있었다.
하나 그것도 잠시.
콰아아아아아아아!
순간적으로 세 기운이 서로를 향해 마치 뱀처럼 얽혀들더니, 아홉 줄기의 거대한 용과 같은 형상을 띠며 하늘로 승천하기 시작했다.
바람이 불고, 폭풍이 인다.
그 거대한 기운 때문인지 하늘이 시커멓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비바람을 다룬다는 용이 현신한 것처럼 말이다.
"대단하군."
바르바체가 광소를 터뜨렸다.
"대단하다! 대단해! 그러니 좀 더! 좀 더 보여봐라, 이지혁!"
아홉 줄기의 기운이 하늘을 제멋대로 수놓는다 싶더니, 이내 바르바체를 향해 일제히 그 머리를 틀었다.
이지혁의 입에서 거대한 고함 소리가 터져 나왔다. 고함과 함께 피가 마치 폭포수처럼 뿜어져 나온다.
"뒈져라!"
아홉 줄기의 기운이 바르바체를 향해 맹렬하게 돌진하기 시작했다.
자신을 포위하며 달려드는 거대한 용의 형상.
아니, 차라리 용이라기보다는 거대한 뱀, 또는 거대한 물줄기로 불러야 할 그것을 보며 바르바체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건 상상조차 뛰어넘지 않는가.
"끝내주는 선물이로군."
용이, 뱀이, 그리고 암흑이 그를 뒤덮었다. 사방에서 날아든 기운들이 마치 거대한 히드라의 머리처럼 동시에 바르바체를 향해 달려든다.
콰아아아아아앙!
겨우 균형을 유지하고 있던 세 종류의 기운이 서로 얽혀들면서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대지를 뒤엎고, 하늘을 꿰뚫으며, 차원의 문을 갈라 버릴 것 같은 기운의 폭풍이 연약한 물질계를 처절하게 유린했다. 빛은 그 자취를 감추었고, 어둠마저 숨을 죽인다.
세상을 무너뜨릴 멸망의 힘이 바르바체의 육신을 사정없이 찢어발겼다.
* * *
검고, 희고… 이제는 투명함에서 붉은빛으로 물들어 버린 세 가지 기운이 서로 얽혀들었다. 아홉 줄기로 솟구쳐 오른 기운이 바르바체를 집어삼키면서 소용돌이가 일어났다.
승천한다.
마치 수십, 수백 마리의 뱀들이 서로 얽혀들 듯 징그러운 형상을 띤 기운들이 하늘로, 또 하늘로 솟아올랐다.
'거대하다.'
최정훈은 경직된 얼굴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세상이 꿰뚫리고 있었다.
지금 하늘로 솟구치는 기운들은 아래로 내려쳐지는 기운들의 반작용이다. 그렇다면 저 아래로는 얼마나 거대한 기운들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인가.
최정훈이 허탈하게 웃었다.
'말 그대로 내핵까지 파고들 기세로군.'
과거 이지혁이 쏘아낸 마나가 바닥에 거대한 구덩이를 만든 적이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그 구덩이를 보면서 최정훈은 이러다가 정말 맨틀까지 파고드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건 겨우 그런 수준이 아니었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 지구의 안위가 걱정될 수준이었다. 바르바체 하나 잡으려다가 세상을 날려 버릴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덜컥 들 만큼 말이다.
"정말……."
서아영의 신음이 그의 귓가로 파고들었다.
"어디까지 갈 셈이지, 저 미친놈은?"
서아영의 목소리도 혼이 빠져 있었다.
왜 아니겠는가. 그녀 역시 능력자이고, 지금까지 이지혁이라는 자를 오랫동안 지켜봐 온 사람이다.
그런 서아영이 보기에도 지금 이지혁이 발휘하고 있는 능력은 욕이 절로 튀어나올 정도였다.
'무엇을 상상하든 정말 그 이상을 보여주는군.'
에테르와 마나를 뒤섞어 파괴력을 증강시키는 방법은 그들 역시 이지혁으로부터 배운 바가 있다. 그걸 통해서 NDF의 전력을 비약적으로 상승시킨 바도 있었다.
하지만 그 방법을 익히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을 허비해야만 했던가.
"세 가지라니, 미친……."
서아영이 질린다는 얼굴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두 가지의 기운을 뒤섞는 것도 육체를 찢어발기는 고통을 수반한다. 거기에 일정 이상의 기운들이 뒤섞이면 몸이 텨져 나갈지도 모르기에 아주 소량을 조심스레 배합해야 하는 일이다.
그것만으로도 보통 일이 아닌데, 저만한 양의 에너지를 세 가지나 뒤섞어서 파괴력을 증강시키다니. 몸 안에서 핵분열을 일으켜도 저보다 위험하진 않을 것이다.
'미친 새끼.'
서아영은 안력을 돋워 기운들의 소용돌이 사이에서 광소하고 있는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저건 제정신이 아니었다.
인간이라는 것은 언제나 마지막 순간에 브레이크를 거는 존재다. 자신의 몸이 파괴될 것이라 생각하는 순간, 이성이 나서기도 전에 본능이 자신을 억제한다.
하지만 저 인간은 브레이크가 없다.
차를 몰다 눈앞에 장애물이 나타나면 브레이크가 아니라 액셀을 처 밟아 가속을 해서 뛰어넘어 버리려는 인간이었다.
'그러다 죽는다고!'
공격을 받고 있는 마왕보다 공격을 하고 있는 이지혁이 더 걱정이 된다. 애당초 몰랐으면 모르되, 이미 저 공격이 얼마나 거대한 위험을 내포하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말 그대로 혼을 불태우는 일격이었다.
그리고 그 일격의 위력은 어마어마했다.
세상이 뒤흔들리고, 지켜보고 있는 서아영의 영혼이 떨리고 있었다.
'저기에서 살아날 수는 없어.'
상대가 마왕이라 할지라도, 설령 바르바체라고 할지라도… 불멸자가 아니라 죽일 수 있는 존재라면, 저 거대한 힘 앞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절대로.
이건 믿음이라기보다는 확신이었다.
서아영이 주먹을 꽉 쥐고 눈을 부릅떴다.
하나…….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마왕이란 존재가 어째서 마왕이라 불리는가를 말이다.
마왕은 상식을 초월하는 존재이기에 마왕이라 불리는 것이다. 그녀가 아는 모든 상식은 바르바체라는 이름 아래서 부정된다.
지금 이 순간.
지이이이잉!
마치 레이저가 쏘아지는 소리 같았다.
아니, 굳이 '마치'라는 말을 붙일 필요는 없었다. 그건 말 그대로 레이저였으니까.
용틀임 치는 기운들의 소용돌이 안에서 시커먼 빛이 새어 나왔다. 그와 동시에 그 빛은 자신에게 닿는 모든 것을 뚫고 지나갔다.
"어……?"
빛이 자신의 몸을 스치고 지나간 광경을 목격한 이들은 의아함에 내려다보았다.
분명 뭔가가 뚫고 지나간 느낌이 나긴 하는데, 딱히 달라진 것이…….
그 순간, 이변이 일어났다.
"어… 어? 어?"
갈라진다.
검은빛이 스치고 지나간 곳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갈라지고 있었다. 완벽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깔끔하게 말이다.
하지만 그저 감탄하고 있을 수만은 없는 것은, 그 갈라지는 것이 다름 아닌 자신의 육체라는 것이었다.
스르륵.
너무도 반듯하게 잘린 육체는 피조차 흘리지 않았다. 갈려진 방향대로 얼음이 미끄러지듯이 스르륵 흘러내릴 뿐이다.
툭.
그건 기괴한 광경이었다.
검은빛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있던 모든 것이 갈라진다. 너무도 선명한 선이 생겨나 마치 세상이 갈라진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인간도, 마수도, 골렘도…….
선이 스쳐 지나간 곳에 있던 모든 것들이 갈라져 쓰러져 내리기 시작했다.
툭, 투툭, 툭.
그리고 뿜어져 나온다.
바닥에 떨어진 충격으로, 마치 얼어붙은 물체가 해동된 것처럼 반듯하던 절단면이 젖어들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촤아아아악!
뿜어져 나온다.
분수가 일제히 물을 뿜어 대듯이, 잘려진 단면에서 피가 솟구쳐 올랐다.
"끄으으윽."
"으아아아아악!"
허리가 갈리고, 목이 잘린다.
바닥을 뒹굴며 숨이 붙어 있는 자들은 여전히 영문을 모른 채 대지에 발을 딛고 서 있는 자신의 하체를 보며 전율해야 했다. 얼굴 앞에 잘려 구르고 있는 자신의 팔을 보며 헛웃음을 흘리는 자들도 있었다.
목불인견.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참상이 지금 벌어지고 있었다.
"이……."
최정훈의 손이 벌벌 떨리고 있었다.
단 일 수.
단 한 번이었다.
그 단 한 번이 전세를 완전하게 뒤집어놓았다.
바르바체가 발출한 검은빛의 영역에 닿은 모든 것들이 반듯하게 잘려 나갔다.
'이렇게까지 차이가 난다고?'
자신들이 모든 힘을 다해서 몰아붙이고 쏟아부어서 겨우 이루어낸 성과를 바르바체는 단 한 번의 공격으로 되돌려 버렸다.
더욱 최정훈을 좌절하게 만드는 것은 이게 바르바체의 전력이 아니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기 때문이었다.
'설마?'
최정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바르바체가 아무런 생각 없이 그저 공격을 했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바르바체의 공격은 무엇을 노린 것이었을까?
"이지혁 씨!"
최정훈이 절규했다.
그의 눈에 허리부터 잘려 나간 이지혁의 육체가 들어온 것이다. 머리로 피가 과도하게 몰리고 눈에 모세혈관이 툭툭 텨져 나간다.
"진정해요!"
"놔봐요! 이거!"
"진정하라니까! 안 죽었어!"
서아영이 최정훈을 꽉 잡아당겼다.
"똑바로 봐요!"
"……."
그제야 최정훈의 눈에 잘려 나간 이지혁의 상체가 바닥으로 추락하지 않고 그 아래에 둥둥 떠 있는 것이 들어왔다.
"저건 또 뭐야?"
기괴하다면 기괴한 광경이었다.
"끄응차."
이지혁이 몸을 띄워 올리고는 자신의 허리 아래를 몸에 붙였다. 그러자 뭔가 꿈틀꿈틀한다 싶더니 육체가 절로 붙기 시작했다.
"……."
최정훈은 할 말을 잃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좀 겉모습 보고 오버 좀 하지 마요. 쟤 몸 안에서 실시간으로 핵폭탄이 터지고 있는 거나 마찬가진데, 그깟 허리 좀 갈라진 게 뭔 대수라고."
"아니……."
거, 좀 싸워도 사람답게 싸워주면 좋으련만.
최정훈의 얼떨떨해하던 얼굴이 다시 굳어가기 시작했다. 이지혁이 살아 있다는 것은 다행이지만, 바르바체가 반격을 시도했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거기서 살아남았다는 건가.'
최정훈이 긴장된 얼굴로 흙먼지가 가라앉고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바르바체가 서 있던 바로 그곳을 말이다.
"으……."
흙먼지가 가라앉고 드러난 바르바체의 모습을 본 최정훈이 침음을 삼켰다.
무저갱처럼 깊이 파여 검은 입을 벌리고 있는 거대한 크레이터 위에 바르바체라 짐작되는 무언가가 허공에 몸을 띄우고 있었다.
왜 '바르바체'가 아니라 '바르바체라 짐작되는 무언가'냐고 묻는다면, 저 광경을 가리킬 수밖에.
새까맣게 타고 반쯤 녹아내려 원래의 형태가 무엇이었는지도 짐작하기 힘든 무언가가 그곳에 떠 있었으니까.
그것을 바르바체라고 짐작하는 이유는 바르바체가 아니고서야 그 가공할 공격 안에서 저만한 형체를 유지하는 것도 불가능했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해치운 건가?"
"아니!"
최정훈의 호들갑에 서아영이 냉정하게 대답했다.
느껴진다.
저 일그러진 형체 안에서 느껴지는, 거대하기 짝이 없는 힘이 말이다. 겉모습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녀가 보기에 바르바체는 자신의 힘을 조금도 잃지 않았다.
'그 가공할 공격 안에서 말이야.'
이미 이건 싸움이나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수식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상식으로는 예측도 할 수 없는 무언가가 지금 그들의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저거?"
최정훈의 눈이 흔들렸다.
일그러진 형체가 꿈틀댄다 싶더니, 다시 그 형체를 갖춰 나가기 시작했다.
"아주 고어 영화를 찍는구나."
허리가 잘려 나갔는데 무슨 타박상이라도 입은 것처럼 회복해 버리는 이지혁이나, 저 몰골이 되었는데도 순식간에 원래의 형체를 복원해 버리는 바르바체나.
최정훈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어쩌면 지금 이 전쟁은 이지혁과 바르바체라는 거대한 존재들의 사이를 자신들이 의미 없이 메우고 있는 형상일지도 모른다.
콰드드득!
기괴하게 뒤틀리던 바르바체의 몸이 원래의 형태를 완전하게 복원해 냈다.
"흐음……."
바르바체가 목을 두어 번 꺾더니 입을 열었다.
"아주 화끈한 인사였군."
이지혁이 혀를 찼다.
"너는 좋겠다, 그따위로 개박살이 나도 옷 다시 안 입어도 되니까 말이야. 팬티도 안 입고 다니는 미개한 족속들이 부러워질 때가 있다니.
이지혁이 반듯하게 잘려 나간 자신의 상의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 옷, 비싼 거거든?"
"변상하지."
"이제 생산하는 데도 없어, 이 썩을 마족 놈아."
바르바체가 비릿하게 웃었다.
"여유가 넘치는군. 사실은 허세밖에 남은 게 없는데 말이야."
"……."
"회심의 일격이었지. 네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실은. 그렇지 않나? 멍청한 작자들은 분위기가 고조될 때까지 공격을 삼가지. 하지만 너는 알고 있는 거야. 퍼부울 수 있을 때 퍼붓지 않으면 결국은 공격을 해볼 틈도 없다는 걸."
"칭찬인가?"
"칭찬이지. 칭찬이고말고."
바르바체가 이를 드러냈다.
"비록 이제는 모든 것을 쓰고 껍데기만 남아버렸다 할지라도 나를 이렇게까지 몰아간 이는 모든 종족을 통틀어 오로지 너 하나뿐이었다. 경의를 표하지."
이지혁의 얼굴은 조금 굳어 있었다.
"그 상으로… 너에게 보여주지."
바르바체의 등 어림에서 마기가 뭉클뭉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전력을 다하는 내 모습을 말이다. 영광으로 아는 게 좋을 거야. 나 역시 모르니까, 전력을 다한 내 힘이 어느 정도인지."
마기가 마치 폭포처럼 하늘로 치솟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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