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107화 (107/118)
  • [■] 너희 역시 오랜만이겠지 [■]

    ─────

    "이렇게 믿음을 받고 있으니, 제가 그 기대에 부응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최선을 다해서 죽여 드리겠습니다."

    "죽여 버릴라, 이 새끼가."

    김다현이 울컥하자 윤혁규가 앞을 막았다.

    "진정해."

    "아니, 저 새끼가……."

    "괜히 말리지 마. 시간 아까워."

    김다현은 씩씩대긴 했지만, 더 이상 상황을 악화시키지는 않았다.

    윤혁규가 대화를 다시 돌렸다.

    "꼭 그래야만 하는 겁니까?"

    "다른 방법이 있으면 나도 그쪽을 선택하고 싶죠. 하지만 그게 안 되는 걸 어쩌겠어요."

    이지혁은 담담하게 대답했지만, 지금은 그 담담함이 오히려 모두의 가슴을 무겁게 만들었다.

    "힘을 쓰게 되면 붕괴는 필연적이에요. 거기서 확률은 반반이죠."

    이지혁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목을 쭉 그었다.

    "죽거나, 아니면 마족이 되거나."

    "마족이라……."

    윤혁규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저… 그런데 이지혁 씨가 마족이 된다는 건 정확하게 어떤 의미입니까? 마족이 된다고 해서 기억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사고방식이 전혀 다를 수는 없는 거잖아요."

    "어, 음……."

    이지혁이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골치가 아프다.

    "마족화라는 게 그리 흔한 현상이 아니라서 정확하게 어찌 된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하나는 확실하죠. 마족으로 변화한 생물은 본인의 정체성을 유지하지 못해요."

    "유지 못한다뇨?"

    "에, 그러니까 이런 건데……."

    이지혁이 자신을 가리켰다.

    "여기 내 옆에 내가 아닌 다른 놈이 하나 복제되어 있다고 치자구요. 기억도 그대로고."

    "네."

    "그런데 얘가 분노 조절 장애가 있는 거야. 뭐만 하면 빡치고, 열 받고, 주변 다 때려 부숴."

    "뭐가 다르죠?"

    "…착한 놈이 있다고 치자구요. 놀려도 헤헤, 때려도 헤헤."

    "이해 갔습니다."

    이지혁의 얼굴이 살짝 불편해졌다.

    "동일한 곳에서 출발하는 놈이라도 생각이 달라지면 기억의 해석도 달라지고, 동일한 사건에 반응하는 방식도 달라질 수밖에 없어요. 그럼 과거의 기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놈이 나와 동일한 존재다'라고 확언할 수 있어요?"

    "없겠죠."

    이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족화라는 건 쉽게 말해서 인간의 육체와 사고를 가지고 있던 존재가 그 기억을 모두 가진 채 인간이 아닌 마족이 되어버리는 거예요. 게다가 마나 친화도는 올라가고, 육체는 비할 바 없이 강해지고, 흑마력을 다루는 실력은 수십 배가 나아지는 거죠."

    다들 심각한 얼굴로 바라보자 이지혁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내가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기는 조금 민망하지만, 나는 역사상 최강의 마도사거든요. 그런데 그건 마법으로 한정했을 때의 이야기고, 흑마력을 다루는 능력은 마족보다 뛰어나요. 그러니까 나는 역사상 다시없을 사기캐라는 건데……."

    "네네, 잘 들었습니다. 다음 분!"

    "아니! 내가 지금 금칠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니까 그러네. 금칠은 적당히 잘난 애들이 하는 거고, 나는 제대로 잘났는데 귀찮게 왜 그런 짓을 해요?"

    "살면서 이렇게까지 격렬한 재수 없음을 느낀 건 이번이 처음이야."

    주변에서 어떤 반응이 돌아오든 이지혁은 당당했다. 사실을 사실이라 말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겸양이라는 것은 적당히 잘나서 자기가 사실을 말하여 다른 이들의 반감을 불러오는 것을 감당하기 싫은 이가 하는 짓이고. 그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으니 겸양도 필요 없었다.

    "여하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지금도 제가 이 정도인데 여기서 마나 친화도가 오르고 흑마력을 훨씬 잘 다루게 되면 어떻게 되겠어요?"

    "…재앙이네."

    "그거라니까."

    이지혁이 깔끔하게 결론을 내렸다.

    "일단 마족화에 익숙해져서 인류를 적대하는 순간에 다 끝나는 거라니까. 게다가 내 성격상 마족도 그리 이쁘게는 보지 않을 거예요. 그럼 뭐, 거의 뭐……."

    이지혁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게다가 에르카나가 하는 말을 통하면, 그냥 마족인 것과 인간이 마족이 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래요. 일단 인간은 마족이 되는 수준까지 흑마력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어서 그런 케이스가 많이는 없지만, 지금까지 마족이 된 인간들은 하나같이 얼마 못 살았대요."

    "부작용 때문에?"

    "아니. 미친놈이라서."

    "…그건 또 무슨 소리예요?"

    "원래 마족이라는 애들은 제 욕망에 충실하기 마련인데, 인간은 자신의 욕망을 숨기려 하는 경향이 있어서 그런지, 마족이 되고 나면 같은 마족들이 보기에도 감당 안 되는 또라이가 되는 경우가 많대요. 그래서 제거당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니까. 에, 그러니까……."

    서아영이 신음을 흘렸다.

    "지금도 또라이인데……."

    "인정하기 싫지만 그거죠."

    이지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뭐, 스스로에 대한 평가는 냉정할수록 좋은 거니까. 여하튼 그런저런 이유로 제가 마족이 된다는 건 마계가 쳐들어오는 것 이 상의 확실한 사망 플래그예요. 무슨 말인지 알겠죠? 그러니 마족으로 변하는 기미가 보인다거나, 마족으로 변한 것 같다 싶으면 육체에 적응하기 전에 목을 따버려요."

    이지혁은 마치 남의 이야기라도 하는 듯했다.

    "이지혁 씨는 그걸로 괜찮습니까?"

    이지혁은 가만히 물어보는 김다현에게 시선을 주다가 뭐 그리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대답했다.

    "괜찮을 것 같아요?"

    * * *

    '괜찮을 리가 없지.'

    누가 자신의 죽음을 태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말인가.

    죽을 줄 알면서도 싸워야 할 때가 있고, 죽을 줄 알면서도 목숨을 내던져야 할 때가 있다.

    하지만 해야 하는 일이라고 해서 담담할 수는 없는 거다.

    인간이라면, 그가 인간이라면 말이다.

    지금 이지혁의 기분은 어떨까?

    김다현으로서는 평생 느껴볼 일 없는 기분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모든 병력을 뒤로 물린 바르바체가 가만히 이지혁을 바라보며 말했다.

    "역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지?"

    "역사?"

    "그래. 역사 말이다."

    "뭔 개소리야?"

    "쿡쿡쿡."

    바르바체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네게 지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은 무리였던가. 좋아, 본론부터 이야기하지. 인간들은 역사와 전설을 재미있는 방식으로 구분하는 듯싶더군."

    "증거가 있냐, 없냐?"

    "아니."

    바르바체가 손가락을 저으며 말했다.

    "군대가 이룬 건 역사로 기록하지만, 개인이 이룩한 것은 전설이 되더군. 역사로 남고 싶다면 세상을 정복해야 하지만, 전설로 남고 싶다면 용을 잡아야지."

    "뭐라는 거야?"

    이지혁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 새끼들, 진짜 보면 좀 멍청한 것 같다니까.

    "지금 네게 전설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는 것이다. 네 이야기가 미래에 전해질 수 있다면, 너는 역사가 아니라 전설로 기억되겠지. 그 누구도 믿지 않을 전설 말이야."

    "난 이미 그 수준은 넘었어, 멍청아."

    "그래?"

    바르바체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겠군. 인간의 기준이라면 너는 이미 닿지 못할 곳에 닿았으니까. 하지만… 전설이든 역사든 인간이 남아 있지 않다면 달라질 것이 없겠지."

    "오지랖도 넓으시지. 별걸 다 걱정해 주신다니까. 내가 아무리 맛이 갔다고는 해도 너한테까지 걱정을 시킨다고 생각하니 자살 충동이 든다. 싸우기도 전에 내가 이 자리에서 혀 깨물고 죽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그 못생긴 얼굴 좀 치워줄래?"

    "저열하기 짝이 없군."

    "그러니까 고상하신 분은 이제 꺼지시라고. 나도 슬슬 시동 걸어야 하니까. 이제 서 있기도 힘들어. 말했지? 관절."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세운 이지혁을 보며 바르바체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말로 저 인간을 상대하는 것을 할 짓이 아니었다.

    "건승을 빌지. 내 앞에 도달할 수 있도록 말이야."

    "참 가오도 잘 잡으시지."

    바르바체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자리를 뜨자 이지혁이 깊게 한숨을 쉬었다.

    "자, 보자."

    심호흡 한 번 하고…….

    "이게 잘될까 모르겠네."

    워낙에 흑마력을 다뤄본 지가 오래된 느낌인데다, 풀로 출력을 돌려본 적이…….

    '이 세계에 돌아온 이후로는 한 번도 없네.'

    처음에는 못해서 할 수가 없었고, 이제는 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지만 하면 몸이 망가져서 할 수 없었다.

    어떤 이유에서든 그동안은 자체적으로 능력을 봉인하고 있는 기분이었는데, 이제 그 봉인을 푼다고 생각하니 일순 후련한 마음이 들었다.

    "자, 그럼 어디……."

    이지혁이 목을 좌우로 꺾자, 우둑거리는 뼈 마찰 소리가 울려 퍼졌다.

    "흐음……."

    이지혁이 앞을 바라보았다.

    그의 전방에 가득한 마수들이 보인다. 아마 마왕들은 저 뒤에 숨어 있을 것이다.

    아니, 숨었다 하기에는 그렇고, 일단은 간을 보는 거겠지.

    "한심한 놈들."

    아무리 이지혁이 강하다고는 하나 인간이다. 인간을 상대하면서 마왕이라는 놈들이 마수들 뒤에 숨다니.

    그럴 거면 평소에 인간을 무시하는 발언은 하지 말았어야 할 것 아닌가. 뭐, 저들이 자신을 인간으로 생각해 주는가는 둘째 치더라도 말이다.

    여하튼 저 마수들부터 쳐야 한다는 거겠지.

    "괜찮으시겠습니까?"

    "아, 깜짝이야!"

    갑자기 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이지혁이 기겁을 하여 뒤를 돌아보았다.

    디오레 12세가 빙그레 웃으며 그를 보고 있었다.

    "뭐야, 너?"

    "축복이라도 걸어드려야 하나 싶어서 왔습니다."

    "흑마법사한테 축복이라니! 미쳤어?"

    "…그렇겠죠?"

    디오레 12세가 어색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이게 말이 안 된다는 건 알고는 있는데, 그래도 뒤에서 마냥 보고만 있으려니 좀 어색해서요. 게다가 저 많은 마수들을 홀로 상대하시려는 걸 보니 조금……."

    "혼자라니?"

    "예? 혼자 상대하시는 것 아니었습니까?"

    "혼자는 무슨 혼자야? 쟤들 수가 얼만데, 내가 혼자 저걸 상대해?"

    "…제가 알기로 멸망의 좌께서는 1인 군단으로 홀로 베라프와 싸우신 분인데……."

    "그건 내가 나름 병사들이 있을 때의 이야기고, 혼자 싸워야 하는 상황인데 어떻게 내가 혼자 싸워? 신호하면 달려들어."

    "알겠습니다."

    디오레 12세가 궁시렁거리며 뒤로 빠지자 이지혁이 피식 웃었다.

    '뭐, 그래도 사람이랑 같이 싸우는 게 마수들 데리고 싸우는 것 보다는 심정적으로 괜찮네.'

    도움이 되는가는 별개로 말이다.

    "기대해도 되겠습니까?"

    뒤로 물러나던 디오레 12세가 넌지시 물어왔다.

    "뭘?"

    "당신에 대해 전해져 내려오던 그 전설들이 다 사실인지 말입니다."

    "뭔 말이 어떻게 전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지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실망할 일은 없을 거야."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다행?

    다행이라고?

    이지혁이 낄낄대며 웃었다.

    라트렐의 교황이 그의 강함에 안심하다니, 디오레 1세가 이 꼴을 봤다면 저승에서 거품을 물고 쓰러졌을 것이다.

    '세상이야 변하는 거니까.'

    저들의 신앙은 굳건하다고 하지만, 과거 이지혁의 앞을 막아섰던 이들에 비하면 세속적인 느낌이 강했다. 그건 인간이 결국에는 신을 졸업하고 독자적인 길을 걸을 수밖에 없는 생물이라 그런 것일까, 아니면 이지혁이 신이 전능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했기 때문일까?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이제 보여줄 테니까.

    눈으로 보고 나면 미약한 신앙 따위는 남아나지 못할 것이다. 신 이상의 힘이 인가에 깃들 수 있다는 것을 저들의 눈으로 확인할 테니까.

    이지혁의 양손에 검은 마나가 뭉치기 시작했다.

    * * *

    "흐으음……."

    이지혁이 콧소리를 냈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마나의 감각. 감촉이라기보다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 그 감각이 이지혁의 마음을 살짝 들뜨게 하고 있었다.

    '오랜만이네.'

    평생이라고 해도 좋을 시간을 흑마력과 함께해 온 이지혁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육체가 붕괴한다는 이유로 흑마력을 완전히 억제해 왔다.

    이제 그 고삐가 풀리고 있는 것이다.

    대기에 가득한 흑마력들이 이지혁의 몸을 채우기 시작했다. 흑마력 특유의 음습하고 짜릿한 느낌이 육체를 채우기 시작하자, 이지혁이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충만감.

    잊고 있던, 그리고 잃어버린 것을 다시 채우기 시작하는 감각은 세상 그 어떤 쾌감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마치 잘려 나간 사지를 다시 이어붙이는 것처럼 이지혁은 세포 하나하나에 흑마력을 밀어 넣었다.

    고통.

    쾌감과 동시에 참을 수 없는 고통이 그의 육체로 밀려들기 시작한다. 익숙한 고통이 느껴지자 이지혁이 휘파람을 불었다.

    '오랜만에 이만큼 아파보니, 이것도 좀 특별하게 느껴지는데?'

    그리고 다른 의미로도 오랜만이었다.

    이지혁은 이 세계로 와서 단 한 번도 흑마력을 제한 없이 사용해 본 적이 없다.

    불멸의 육체를 가진 베라프에서는 그의 육체가 받아들일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까지 흑마력을 운용했다. 하지만 지구는 흑마력이 부족했고, 이지혁의 육체도 그 흑마력을 모두 활용할 만큼 강인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뒤가 없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라면, 차라리 마음껏 날뛰다 죽는 편이 나았다. 이지혁은 그를 제약하고 있던 심리적인 리미터를 풀어버렸다.

    고오오오오오.

    대기가 공명하기 시작한다.

    마계로부터 흘러나와 세상을 떠돌고 있던 흑마력이 진공으로 빨려 들어가는 공기처럼 이지혁의 육체를 향해 폭풍처럼 질주하기 시작했다.

    "장관이로군."

    그 광경을 보는 바르바체마저도 감탄을 하게 만드는 광경이었다.

    "볼 때마다 놀랍단 말이야. 어찌하여 인간이 저리 흑마력을 자연스레 다룰 수 있다는 것인가."

    에르카나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인간인데'가 아니라 '인간이라' 그럴 수 있는 거야."

    "…과연 그럴 수도 있겠군."

    바르바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흑마력은 수족과도 같다.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자연스레 흑마력을 다루고, 육체를 움직이는 것 이상으로 자연스레 운용한다.

    그러니 모든 것이 당연할 수밖에.

    "확실히 그렇군. 우리는 마력을 활용할 뿐, 연구하지는 않지. 자신의 손이 어찌 움직이는지 고민하는 인간이 없는 것처럼 말이야."

    "마력에 관한 한은 달링이 마족 이상으로 정통한 거야. 그는 마력을 운용하는 데만 수천 년 이상의 시간을 바쳤으니까."

    인간의 백 년은 마족의 천 년에 필적한다.

    더 뛰어난 두뇌를 갖추고 있음에도 마족은 인간만큼 빠르게 발전하지 못한다.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무한의 시간을 가지고 있는 그들은 시간에 쫓길 필요가 없다. 지금 이루지 못하다고 해서 갑갑해할 필요도 없다. 시간은 그들의 편이었으니까.

    하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다.

    한정된 짧은 삶을 사는 인간들은 마족이 보기에는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열정적인 삶을 살아간다. 그런 인간이 수천 년의 시간을 한 가지에만 매달린다면?

    마족과 인간이 가지고 있는 육체적인 차이를 극복할 만큼의 성과를 내는 것도 어렵지 않다. 그 증거가 바로 이지혁이었다.

    "이야기했어, 바르바체."

    "…뭘 말이지?"

    "너는 너의 오만 때문에 죽을 거라고 말이야. 잘 봐. 지금 네 눈앞에 있는 이가 사신이야. 네 길고 지루하던 삶을 끝내줄 사신 말이야."

    "사신이라……."

    바르바체가 빙긋 웃었다.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군. 너를 위해서도 말이야, 에르카나."

    * * *

    마력은 끊임없이 몰려들었다.

    주르륵.

    빨려 들어오는 마력을 버티지 못한 육체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코와 입에서 피가 울컥울컥 쏟아져 나오고, 피부가 퍽퍽거리며 터져 나간다.

    하지만 우습게도 찢겨 나간 피부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재빠르게 수복되었다.

    '좋은 현상은 아니군.'

    마족에게 있어서 흑마력은 생명의 원천이다. 상처의 수복 역시 흑마력으로 하는 것이다. 이론상으로 끝없이 흑마력이 공급된다면 마족은 죽지 않는다. 육체는 복원되고 세포는 재생하니까.

    마족이 죽는 것은 육체의 손상이 주변에서 빨아들이는 마력으로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클 때뿐이었다.

    그게 아니면 치료된다. 회복한다.

    지금의 이지혁처럼 말이다.

    육체가 터져 나가기가 무섭게 다시 회복되고 있음에도 이지혁은 지금의 상황을 좋아할 수 없었다. 이건 과거의 그의 육체가 가지고 있던 불멸성과는 달랐다.

    흑마력이 그의 몸을 치료하고 있었다.

    '마치 마족처럼 말이야.'

    그의 육체가 이미 거의 마족화되었다는 증거였다.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지혁은 눈을 감았다.

    지금은 이런 게 중요하지 않다. 나를 규정하는 것은 이따위 육체가 아니다. 그는 지금 누구보다 인간이다. 인간의 편에 서서 인간으로서 인간을 위해 싸우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일단은 생각 같은 건 안 한다고!"

    우우우웅!

    발아래 커다란 검은 홀이 생겨나며 이지혁의 육체가 허공으로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부유 마법이 아니다. 그의 육체를 휘감고 있는 마나가 용량을 초월하여 다시 육체 밖으로 빠져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마나가 농축되고 농축되어 그의 몸을 허공으로 밀어 올린다.

    이지혁이 심호흡을 했다.

    '할 수 있을까?'

    아니, 할 수 있을까가 아니다. 반드시 해야만 한다.

    이지혁이 눈을 번쩍 뜨자, 그의 눈에서 뿜어져 나온 붉은 안광이 주변을 밝혔다.

    "으아아아아아아!'

    이지혁이 괴성을 지르자 그의 발아래에 열린 검은 홀에서 시커먼 무언가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어둠.

    어둠보다 더욱 어두운 무언가가 넘실거리며 이지혁의 몸을 향해 빨려 들어갔다.

    "끄으으으으윽."

    이지혁의 몸이 학질에라도 걸린 양 벌벌 떨리기 시작했다.

    * * *

    "무모하군."

    바르바체가 눈을 찌푸렸다.

    지금 이지혁이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마계의 코어에서 흘러나오는 가장 순수한 흑마력이었다. 인간의 부정적 감정이 원동력이 되어 만들어지는 흑마력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순수한 마력.

    이곳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악의 근원, 혹은 정수.

    마왕들조차도 함부로 다룰 수 없는 것이었다. 그 차라리 순결하다는 말이 어울리는 근원의 마나를 이지혁이 빨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과거의 이지혁이라면 가능하다.

    그는 불멸의 존재였으니까.

    흑마력은 그 자체로 정신을 파괴하고 육체를 파괴한다. 하지만 이지혁의 정신은 무너지기 무섭게 회복되었고, 육체는 파괴되기 무섭게 재생되었다.

    그렇기에 가능했다.

    그렇기에 이지혁이 아흔아홉 번째 마왕이자 인간 출신으로서 제대로 된 유일한 마왕이 될 수 있던 것이다. 코어에 박아 넣은 인을 바탕으로 바르바체조차도 활용할 수 없는, 가장 순수한 흑마력을 사용하는 이지혁은 변수, 그 자체였다.

    '이 내가 승부를 꺼려할 정도로 말이지.'

    불멸의 존재라고 해서 상대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한 번 무너진 육체를 복구하는 데는 일정한 시간이 필요한 법이고, 육체가 재생하기 전에 끊임없이 부숴 버리면 되니까.

    하지만 저 마력이 가진 변수가 바르바체가 이지혁과의 승부를 피하게 만드는 원인이었다. 단순히 강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하나 지금의 이지혁은 불멸의 존재가 아니다.

    바르바체가 인상을 썼다.

    '뭘 하려는 거지?'

    지금 그의 육체로는 저 마나를 감당할 수 없다. 육체는 순식간에 산산조각이 날 것이다. 저만한 흑마력의 반동을 버티기 위해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수준의 마나가…….

    "잠깐. 마나?"

    그 순간, 이지혁이 손을 들어올렸다.

    "판을 깔아줘서 고맙군."

    이지혁이 낄낄대며 웃기 시작했다.

    왜 보고만 있었냐고?

    왜 아군이 철저하게 쓰러질 때까지 손도 쓰지 않고 있었냐고?

    그래야 했으니까.

    조건은 단 하나다. 저 썩을 드래곤들이 반 이상 쓰러질 것. 그럼 그는 단 한 번의 기회를 얻을 수 있으니까.

    "장담하건대, 여기에는 전 차원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많은 드래곤의 시체가 있겠지."

    이지혁이 웃었다.

    소름 돋게.

    듣는 이가 기겁을 할 정도로 섬뜩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검은 마나를 육체에 둘둘 말고 허공에서 소름 돋게 웃어 젖히는 이지혁의 모습은 말 그대로 마왕, 그 자체였다.

    마족보다 더욱 마족 같은.

    마왕보다 더욱 마왕 같은 인간이 이곳에 있었다.

    "그 말은 이곳에 세상에서 가장 많은 드래곤 하트가 모여 있다는 소리가 되지. 단 하나만으로도 마나의 폭풍을 불러일으키는 마나의 정화가 말이야."

    우우우우웅!

    중력이 비틀어지고, 세상이 뒤흔들린다.

    그와 동시에 바닥에 처박혀 있던 드래곤들의 사체가 허공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들의 육체가 들썩들썩 하더니, 가슴팍 어림에서 무언가가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너희에게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계륵이지. 하지만 내게는 어떨까?"

    콰드드드득!

    드래곤들의 사체가 찢겨 나가며, 그 안에서 빛을 뿜어내는 주먹만 한 광석들이 허공을 거쳐 이지혁에게 날아들기 시작했다.

    "이놈!"

    바르바체가 고함을 질렀다.

    일백이 넘는 드래곤의 몸에서 뽑아낸 드래곤 하트들이 이지혁의 주변을 공명하며 돌기 시작했다. 종족의 특성에 따라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드래곤 하트가 그를 수호하듯 주변을 가득 채웠다.

    "뭐, 그리 흥분할 것 없어."

    이걸로 공격을 할 생각은 없으니까 말이야.

    일백 개가 넘는 드래곤 하트.

    그 안에 담긴 마력은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일 것이다. 하지만 이지혁은 그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만족할 수 없었다.

    이만한 드래곤 하트가 필요한 이유는 공격을 위해서가 아니다.

    아주 잠시.

    아주 잠시만 그의 육체를 유지해 주면 된다. 일백의 드래곤 하트를 모조리 힐에만 사용한다면, 잠시나마 그는 과거의 불멸성을 회복할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콰아아아아아아!

    순간 이지혁의 발아래 생겨난 홀이 순식간에 몇 배는 커진다 싶더니, 마치 진득한 타르 같은 마나가 끊임없이 그의 육체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우우우우웅.

    대지가 떨린다.

    세상이 이지혁의 움직임에 따라 춤추고 흔들렸다.

    육체를 가득 감싼 흑마력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지혁이 입을 열었다.

    "꽤나 오랜만이군, 이런 기분."

    끔찍한 고통과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고양감이 공존하고 있었다. 흑마력이 육체를 갈기갈기 찢는 동시에 드래곤 하트에서 밀려 들어오는 마나가 육체를 회복시킨다. 흑마력의 자체 회복력만으로 감당할 수 없는 육체의 붕괴를 드래곤 하트의 마력이 아슬아슬하게 유지시킨다.

    그걸로 충분했다.

    그걸로.

    "너희 역시 오랜만이겠지. 나를 대면하는 것은 말이야."

    이지혁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걸렸다.

    "기억 속에서 희미해진 트라우마를 끄집어내 주지. 기억해라.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떤 존재인지 말이야."

    지금 이곳 지구에…….

    베라프의 절망.

    세상에 멸망을 가져오는 자.

    멸망의 좌가 강림했다.

    * * *

    고오오오오.

    세상이 뒤바뀐 것 같았다.

    '저게 대체 뭐야?'

    최정훈은 자신의 눈에 보이는 광경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저 광경을?

    다른 의미로 인세에 지옥이 강림한 것 같은 광경이었다.

    지옥도라는 뜻이 아니다. 피 한 방울, 비명 하나 없지만, 눈앞에 보이는 저 광경은 최정훈에게 강렬한 이질감을 선사해 주기에 충분했다.

    세상은 불과 5년 만에 상전벽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바뀌었다.

    과거에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고, 지금까지 그들이 생각하던 상식은 상식이라는 지위를 내려주고 역사라는 이름을 뒤집어써야 했다.

    그렇기에 최정훈은 웬만한 광경에는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현대의 지구에서 벌어질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고 일일이 놀아야 한다면, 최정훈은 이미 심장마비로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가 보고 있는 광경은 그런 그의 다짐마저도 무색하게 만들고 있었다.

    "어떻게……."

    말이 나오지를 않는다.

    할 수 있는 건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영혼을 빼앗길 듯이 그저 응시하고 있는 일뿐이었다.

    마치 무저갱과 같은 어둠.

    너무도 검어서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검은 바닥에서 보기만 해도 섬뜩한 느낌이 절로 드는 짙고 짙은 타르와 같은 기운들이 솟구치고 있었다.

    그 밀도가 얼마나 높으면, 물리력을 갖추지 못한 기운들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점성 높은 액체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너무도 검어 마치 세상에 구멍을 뚫어놓은 것처럼 보이는 검은 액체들이 허공에 떠 있는 이지혁을 향해 솟구쳐 오른다.

    이지혁의 발끝으로 빨려 들어간 흑마력들. 채 그 안으로 모두 밀려 들어가지 못한 마나들은 이지혁의 몸 주변은 거대한 토네이도처럼 휘돌고 있었다.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결코 존재해서도 안 되는 검은 토네이도가 끔찍한 크기로 불어나고 있었다.

    입을 열 수가 없다.

    아무 말을 할 수가 없다.

    광포하다.

    검은 흑마력들은 저들끼리도 섞이지 못하고 서로 부딪쳐 응축하고 반발하여 솟구쳐 튕겨 나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일정한 방향으로 부는 토네이도가 아니라 서로 잡아먹을 듯이 달려들고 폭발하는 토네이도였다.

    그리고 그 안에서는 그 충격을 감당하지 못한 마나들이 폭발을 일으키며 뇌전을 부르고 있었다.

    '세상의 끝인가…….'

    최정훈은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저 사람이 왜 멸망의 좌라 불렸는지.

    그저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마나를 모두 운용하는 것만으로 세상이 당장에라도 무너져 내릴 듯한 광경을 만들어 버리는 이였다.

    그가 처음부터 이런 모습을 보았다면 과연 스스럼없이 이지혁에게 다가갈 수 있었을까?

    오만한 인간에게 심판을 내리기 위해서 강림한 것 같은 저 초월자의 모습을 보고도 말이다.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검은 폭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공포를 느끼면서도 최정훈은 도망치지 않았다. 의미가 없다.

    저 안에 얼마만 한 힘이 모이고 있는 것인지를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도망이라는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저건 도망친다고 하여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너무나도 사악하고, 너무 악마적이기에 되레 성스럽게까지 느껴지는 광경이었다.

    최정훈은 뒤를 돌아보았다.

    무릎을 꿇고 손을 가슴에 모은 채 기도하는 이들의 모습이 들어온다. 베라프 인들만이 아니었다. 수많은 능력자들조차 저 광경에 저항할 생각을 하지 못한 채 그저 기도하고 있었다.

    누구에게?

    자신의 신에게 구원을 구하는 것인가, 아니면 현실에 출현한 저 심판자에게 자비를 구하는 것인가.

    정도를 넘어버린 힘은 힘이 아니라 신앙의 영역으로 그들을 이끌어가고 있었다.

    '그러면?'

    저 힘의 폭풍을 불러일으킨 자는 지금 어떠할 것인가.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경배하고 싶어지는 힘의 화신은 지금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지혁이라는 사람에 대해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해 온 최정훈조차 지금의 이지혁은 한없이 낯설게 느껴졌다.

    너무도 짙어 그 안의 모든 것을 가려 버린 검은 마나의 폭풍 사이로 희미하게 이지혁의 모습이 보인다.

    마나에 일그러져 흐릿한 그 뒷모습을 보며 최정훈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아버렸다.

    인간이 저만한 힘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감당해 낸다고 하더라도 저곳까지 가버린 인간이 다시 인간으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인가.

    최정훈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이지혁이 이지혁이 아닌 것 같았다. 그가 알고 있는 이지혁이라는 사람이 아닌, 전혀 다른 존재로 변해 버린 것 같은 위화감에 앞으로 뻗은 최정훈이 힘없이 그 손을 내렸다.

    '괜찮은 거죠?'

    마음속으로 내뱉은 질문이 그에게 닿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최정훈은 간절하게 묻고 또 물었다.

    * * *

    "아름답군."

    바르바체는 조금은 몽롱한 얼굴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저 광경을 처음 보는 것은 아니지만, 볼 때마다 저 모습은 그를 잡아끄는 무언가가 있었다.

    "너무도 말이야."

    그건 조금은 질투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마족도 아닌 인간이 마족 이상으로 더욱 마에 가까워지는 것을 지켜보는 마족의 심정이랄까?

    자존심이 상하고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광경이다.

    그럼에도 눈을 뗄 수가 없다.

    그것은 그에게는 마치 마약 같은 광경이었다. 그가 가장 원하는 것을 이루고 있는 장면인데, 어찌 황홀하지 않겠는가.

    "크크큭, 정말 아름다워."

    파괴의 화신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바로 저런 모습일 것이다. 그 모습을 만들어내는 것이 인간이라는 사실이 바르바체를 거슬리게 만들었지만 말이다.

    크르르륵.

    마수들의 떨림이 느껴졌다.

    그 어떤 것에도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마수들이 저 광경만은 참아낼 수가 없는지, 머리를 땅에 처박고 있었다. 마왕들조차 동요하는 것이 느껴질 정도다.

    왜 아니겠는가.

    마계 역시 하나의 생태계다. 인간이 신의 힘인 신성력을 목격하면 경외와 두려움을 느끼는 것처럼 마계의 존재들 역시 자연 그 상태로는 존재할 수도, 사용할 수도 없는 순수한 흑마력 앞에서는 경외와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위력 앞에서도 말이지.'

    세상 그 어떤 것도 두려울 것이 없는 바르바체였다. 베라프 역시 차원의 문이 열리기만 한다면 지체 없이 쳐들어가 복속시킬 자신이 있었다.

    신이 존재하는 땅.

    신의 의지가 힘이 되는 땅조차도 바르바체에게는 그저 조금 귀찮은 힘이 작용하는 대지에 불과했다. 신성이 직접 그를 노린다고 하더라도 우습게 받아칠 수 있다.

    물리력이 작용하는 세계에서는 그는 신 이상의 존재이니까. 그들의 전능성에는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들의 힘 정도는 얼마든지 짓눌러 줄 수 있는 바르바체였다.

    하지만 저 광경은 그 바르바체마저도 움찔하게 만드는 위력이 있었다.

    "큭큭큭큭."

    바르바체의 눈이 공포와 희열로 뒤섞이기 시작했다. 육체 전체가 기이한 열기로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바르바체가 입을 열었다.

    "강림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재림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그야말로 마왕의 귀환이라 해야겠군. 이지혁, 아니, 아흔아홉 번째 마왕이여."

    바르바체의 목소리가 퍼져 나갔다.

    * * *

    우우우웅.

    육체는 찢겨 나간다.

    설명하기 힘든 단계였다. 과도한 마나가 주입된 육체는 풍선처럼 부풀어 터져 나가다가 재생하기를 반복했다. 그 과정이 몇 번이고 되풀이되고 나서야 육체에 밀려드는 마나와 육체 밖으로 빠져나가는 마나가 타협점을 찾아냈다. 거대한 마나의 순환 통로가 만들어진다. 그의 육체를 중심으로 말이다.

    발끝으로 밀려온 마나가 육체를 통과해 머리로 빠져나간다. 그 과정이 완벽하게 정착되기 시작하자 주변을 헤집던 폭발적인 마나의 흐름도 점차 안정되기 시작했다.

    약해진 것이 아니다.

    그 모든 마나가 이지혁의 의지에 따라 돌기 시작한 것이었다. 과거 그의 전성기에 육박하는, 아니, 그 이상의 마나가 통제하에 들어온 것을 느낀 이지혁이 가만히 눈을 떴다.

    그런 후에 보이는 광경.

    이지혁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흑마력은 결국 인간이 다룰 수 있는 힘이 아니다. 한없이 음에 가까운 마이너스 에너지는 인간의 육체를 파괴하고 정신을 병들게 한다.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을 부숴 버리고 싶은 파괴적인 충동과 살아 있는 생명체를 용납하지 않고 싶어지는 가학성. 그리고…….

    "잘도 고개를 처 들고 있군."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분노.

    과거 그가 멸망의 좌라 불릴 시기에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파괴했다. 부수고 또 부쉈다. 굳이 그럴 필요까지 없음에도 말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만한 마력을 받아들이고 있을 때, 그는 인간이 아니다. 오히려 마족 이상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분노로 들끓어 올랐다.

    지금 역시 그렇다.

    되레 최대한 흑마력을 억제하다가 다시 받아들이니 충동이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지기 시작했다.

    이지혁의 눈에서 검붉은 안광이 쏟아져 나온다.

    "후우우우웁."

    손은 살짝 들어 올린다.

    그리고 그 동작만으로 세상이 우르릉, 하는 비명을 쏟아내고, 하늘이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밀려오는 먹구름과 쏟아지는 천둥 번개.

    마치 이 세상이 존재하지 않아야 할 존재에 대해 두려움을 표하는 것 같았다.

    우우우우웅!

    들어 올려진 그의 손끝에서 뻗어 나간 마력들이 허공에 거대한 홀을 만들어낸다.

    하나, 둘…….

    그리고 셋.

    순식간에 하늘에 십여 개의 거대한 홀들이 생겨나 세상에 그 그늘을 드리웠다.

    "마계는 넓고 광활하지."

    그가 한 번 헤집고 난 이후, 저들 역시 마계를 정리하려는 시도는 했을 것이다. 그가 마계에 낸 상처는 너무도 깊어서 그대로 내버려 두면 썩어 들어갈 테니까.

    하지만 그것도 한계는 있었을 것이다.

    "가장 먼저 정리해야 할 것이 무엇이었을까?"

    이지혁의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맺히기 시작했다.

    이지혁이 만들어놓은 드높은 성?

    아니면 그가 지배한 영토에 스며들어 있는 그의 흔적?

    그들의 입장에서는 인간인 그가 마계에 쌓아놓은 그의 흔적은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이었을 것이다. 마계인들은 인간처럼 문명에 집착하지 않으니까.

    그러니 그런 것들부터 들어내기 시작했겠지.

    하지만 멍청한 짓.

    그들이 가장 먼저 정리했어야 하는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언젠가 이런 상황이 벌어질 것을 예상했다면, 가장 먼저 했어야 하는 일은 제거하는 것이다.

    무엇을?

    "큭큭큭큭, 여전히 그대로인 것 같은데? 그럼 다시 기어야지."

    그의 명에 따라 말이다.

    * * *

    '뭘 하려는 거지?'

    하늘에 열린 십여 개의 게이트를 보며 최정훈이 고개를 갸웃했다.

    저 게이트는 아무리 봐도 이지혁이 열어놓은 것 같은데, 지금 게이트를 여는 이유가 뭐란 말인가. 저 게이트에서 대체 무슨…….

    그 순간, 최정훈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들린다.

    들려오고 있었다.

    저 게이트 안에서 익숙하고도,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거대한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수많은 울음이 끝도 없이 교차하여 만들어내는 장대한 오케스트라.

    "온다!"

    그리고 게이트 안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찌푸려질 만큼 끔직한 몬스터들이 비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 * *

    비.

    비라는 말이 가장 적절할까?

    더 적절한 말을 찾으려면 뭐가 좋을까?

    폭우?

    하늘에서 바닥으로 쏟아지기 시작하는 마수들의 떼를 보는 최정훈의 눈이 흔들렸다. 일전에 바르바체가 그들의 머리 위에서 마수들을 추락시킨 적이 있긴 하지만, 이건 그것과는 완벽하게 다른 광경이었다.

    "…폭포 같네."

    서아영의 말에 최정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폭풍이 몰아쳐 검게 변해 버린 강이 바닥으로 추락하는 것 같았다.

    검은 마수의 폭포.

    굳이 설명하자면 그 말이 딱 들어맞을 것이다.

    쿠우웅! 쿠우웅!

    마수의 물결이 바닥과 충돌하면서 사방으로 마수의 피와 진물이 튕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

    바닥에 추락한 마수들 위로 또다시 마수가 쏟아지고, 연이어 마수가 쏟아진다. 처음 바닥에 떨어진 마수들은 그 몸을 일으키지도 못했다.

    마수의 강인한 육체를 생각한다면 그 정도 높이에서 떨어졌다 해서 움직이지 못할 수준으로 육체가 망가질 것 같지는 않지만, 끊임없이 그 위로 쏟아지는 마수들의 무게와 압력에 꼼짝도 하지 못하고 그 몸으로 모든 마수들을 받아내야 했다.

    그리고 그 위로 떨어진 마수들은…….

    크아아아아아!

    한 달은 굶주린 맹수처럼 광포한 흉성을 터뜨리고는 앞으로 돌진한다.

    돌진, 또 돌진.

    '달라.'

    지금껏 보아오던 마수들과는 다르다.

    최정훈 역시 끝도 없이 몰려드는 마수들을 상대해 본 경험이 있다. 그리고 그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도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지혁이 다루는 마수들은 겉모습은 지금까지 그들이 상대한 마수들과 그리 다를 것이 없지만, 그 성향이 달랐다.

    미쳐 있다고 해야 할까?

    흉포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자신의 육체를 돌보려는 성향이 있던 일반적인 마수들과는 다르게, 이지혁의 명을 듣는 마수들은 마치 프로그램이 입력된 기계 같았다.

    물론, 물론 완벽히 기계 같다는 것이 아니다.

    미쳐 날뛰고 있는 마수들을 기계에 비교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조악한 일이다. 저 광경을 보는 사람에게 '기계 같지 않아?'라는 말을 한다면, 돌아올 말은 비웃음뿐일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최정훈은 저 광경이 마치 기계 같다고 생각했다.

    어떤 생물도 자신의 육체를 돌보지 않고 돌진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저 마수들은 입력된 명령을 어떤 일이 있어도 수행하는 기계처럼 스스로의 육체를 돌보지 않았다.

    질주하고 또 질주한다.

    게걸스럽게 질주하다가 앞에 더디게 가는 마수가 있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지금까지의 마수들은 속도를 줄였다. 하지만 이지혁이 조종하는 마수들은 속도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 앞의 마수를 짓밟고 끌어내고 물어뜯으며 돌진한다.

    저건 생물이 아니다.

    그야말로 상대를 물어뜯어 죽이겠다는 생각밖에 입력이 되어 있지 않은 존재였다. 그리고 그 어떤 것보다 '마수'라는 이름에 걸맞은 존재였다.

    우습게도 마족들이 다루는 마수들보다 이지혁이 다루는 마수들이 일반적으로 최정훈 등이 생각하는 마수라는 존재의 이미지에 더 들어맞고 있는 것이다.

    카아아아아아아아!

    크라아아아아아아아!

    마수들의 울부짖음이 귀를 먹먹하게 만들 정도로 퍼져 온다. 최정훈은 그 광경을 보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것은 마치 해일 같았다.

    해안가로 치밀어온 검은 물들이 스멀스멀 세상을 검게 물들이며 보이는 모든 것들을 집어삼키는 것처럼, 마수들로 이루어진 파도가 해일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속도로 밀려 들어가고 있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십여 줄기의 검은 폭포.

    그리고 바닥에 떨어지기가 무섭게 해일처럼 밀려가는 마수의 떼.

    그 한가운데서 마력의 폭풍을 몸에 감은 채 고고히 떠 있는 이지혁의 모습.

    그것은 마치 세상의 파멸을 의미하는 것만 같았다.

    저러니 배척당할 수밖에 없다.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저런 모습으로 어떠한 말을 한다고 누가 그의 말을 듣겠는가.

    악마가 속삭이지 않고 불을 뿜고 칼날을 들이밀며 고함치고 위협하며 좋은 말로 타이르려 한다면?

    그 말을 들을 인간이 있겠는가.

    지금 이지혁의 모습이 딱 그러했다.

    이지혁이 이 세계로 돌아오려 할 때, 왜 모든 이들이 그 앞을 막아섰는지 최정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이지혁이 베라프를 멸하려 한 것이 아니라고 말할지라도 그의 모습을 보는 이들은 이지혁이 원하는 대로 하는 것이 베라프의 멸망을 초래하게 될 거라 믿었을 것이다.

    지금 최정훈의 기분이 딱 그랬으니까.

    이지혁에게 적지 않은 호감을 가지고 있는 최정훈조차도 지금 저 광경에 세상이 무너질 것 같은 절망감을 느끼고 있는데, 이지혁을 모르는 이들은 오죽했겠는가.

    "…멸망의 좌, 멸망……. 베라프의 멸망을 가져오는 자."

    디오레 12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가고 있었다.

    '그가 더 마음이 넓은 것이 아니었어.'

    과거 이지혁이 무슨 일만 하려고 하면 이유고 뭐고 따지지도 않고 목숨을 걸고 이지혁의 앞을 막으려 애썼다던 라트렐 교단의 교황들.

    그 이야기를 들은 최정훈이 어이없어 할 정도로 오로지 이지혁을 막아내는 데 혼신의 힘을 다해온 그들과 지금 보는 디오레 12세의 행동은 너무 괴리감이 심하다고 생각했다.

    예전 교황들이 디오레 12세처럼 합리적인 사람들이었다면 어째서 그런 행동을 했겠는가.

    하지만 지금 최정훈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지혁을 바라보는 디오레 12세의 눈에 공포와 적의가 어리기 시작했다. 조금 전, 신기한 역사 속 등장인물을 바라보는 것 같은 호기심 어린 눈은 어느새 온데간데없다.

    '그럴 수밖에.'

    단순히 이지혁이 강하기 때문이 아니다.

    저 모습을 보라.

    저 광경은 그 존재 자체로 신성에 대한 부정이다.

    신이 존재한다면, 저만한 악(惡)이 세상에 존재하도록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이지혁은 그가 살아서 세상에 두 발을 딛고 서 있다는 것만으로도 신성을 모독하고 있는 것이다.

    "…멸망의 좌."

    그것은 신음이고, 절망이었다. 그리고 신앙에 대한 회의이기도 했다.

    공존할 수 없는 것.

    최정훈이 얼이 빠진 얼굴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광기와 마기가 뒤섞여 휘몰아치는 폭풍 속에서 이지혁이 소름 끼치는 얼굴로 웃고 있었다.

    "물어라."

    이지혁의 손끝이 향하는 곳으로 마수의 떼들이 게걸스레 돌진했다.

    마치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이지혁이 손을 놀렸다. 그의 손끝이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마수들이 요동친다. 검은 호수 위로 거대한 파문이 이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건 호수가 아니었다.

    카아아아아악!

    마수들이 건너편의 마수들에게 달려들어 물어뜯고, 할퀴고, 짓밟는다. 마수들이 항전해 보기는 하지만 이미 기세에 눌려 있던 그들의 반발은 미약하기만 했다.

    카아아악! 카아아악!

    그뿐 아니었다.

    이지혁의 명에 따르는 마수들은 두려움이라고는 조금도 없다는 듯이 마왕들에게도 달려들었다.

    마왕들이 그르릉 소리를 내며 달려드는 마수들을 향해 마기를 뿜어냈다.

    하찮은 마수들이 그들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달려드는 광경은 그들의 드높은 자존심을 짓뭉개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그 자존심 상하는 광경이 그들의 기억 속에 박아두었던 공포를 다시 끄집어내고 있었다.

    저자가 얼마나 잔인하게 마계를 유린했던가.

    한낱 인간에 불과한 이가 마계에 홀로 침투해 와 전 마계의 전반에 가까운 영역을 손에 넣고 얼마나 많은 마왕들에게 굴욕을 안겼던가.

    그때, 그의 손에 찢겨 죽은 마왕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마족이 인간을 공포의 대상이라 여기고 인간을 피하기 위해서 발악하던 순간은 그때가 유일했고, 다시는 없을 것이다. 그 치욕의 역사가 되살아나자 분노와 함께 스멀스멀 불안함이 그들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아!"

    달려드는 마수를 후려쳐 곤죽으로 만들고 나서 앞으로 흑마력의 칼날을 날린다.

    마수들의 몸이 잘 드는 칼을 만난 버터처럼 매끈하게 잘려 나갔다. 반으로 잘린 육체에 마기로 이루어진 산이 쏟아지자, 매캐한 냄새와 함께 마수들이 녹아내렸다.

    하지만 그뿐.

    멈추지 않는다.

    바로 앞에서 처참하게 녹아내리고 있는 동료를 보면서도 마수들의 웨이브는 멈추지 않았다. 아니, 멈출 수가 없다. 멈추는 순간, 등 뒤에서 달려드는 동료들이 이빨을 틀어막고 짓밟고 살을 찢어낼 것이다.

    멈춰도 갈기갈기 찢기는 것은 다를 게 없었다. 그리고 그들의 머릿속에는 멈춘다는 생각 자체가 없었다.

    종속의 인으로 이성이 완전히 지배당해 버린 마수들은 오로지 눈앞에 보이는 목표들을 죽이는 것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

    "감히!"

    마왕들이 앞서 달려드는 마수들을 모조리 곤죽으로 만들었지만, 마수들은 멈추지 않았다.

    인간들을 상대하는 것과는 또 다르다.

    마수들은 그 갑피 때문이라도 마왕의 공격에 그저 속수무책으로 당하지만은 않았다. 단 한 번에 마수들을 행동 불능으로 만들지 못하면 기어서라도 마왕들의 발에 이빨을 박아 넣기 위해 꿈틀댄다.

    그런 마수들이 점차 쌓이기 시작하자 제아무리 마왕이라 하더라도 무작정 버텨낼 수는 없었다.

    마수들에게 밀린다는 생각에 화가 머리끝까지 차오른 마왕들이 고함을 지르고 악다구니를 쓰며 달려드는 마수들을 잔혹하게 도륙했다.

    "낄낄낄낄."

    그 광경을 보며 이지혁이 재미있다는 듯이 웃어 댔다.

    웃던 입이 순간적으로 붕괴하며 아래턱이 뜯겨져 나갔다. 하지만 뜯겨진 직후, 순식간에 재생했다. 드래곤 하트에서 나오고 있는 가공할 양의 마나가 그의 육체를 지금 이 순간에도 수복하고 있는 것이다.

    전성기에 그가 가진 불멸성에 비한다면 조악한 회복력에 불과한 수준이지만, 이 정도만 해도 육체를 유지하는 것에는 큰 무리가 없었다.

    '겨우 그 정도 수준이지만 말이야.'

    하지만 육체가 재생된다는 것이 고통을 덜어준다는 말은 아니었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1초 동안 열 번은 더 쇼크사하고도 남을 만큼의 고통이 이지혁의 육체를 지배하고 있었다.

    고통은 익숙해지는 것이 아니다.

    그저 버틸 수 있게 될 뿐.

    과도한 고통이 가해지면 육체는 뇌를 보호하기 위해서 의식을 날려 버린다. 하지만 이지혁의 뇌는 고통을 더 이상 위험으로 인식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또렷한 정신으로 육체가 실시간으로 붕괴되는 고통을 그대로 느껴야 하는 것이다.

    "아주 엿 같고 좋네."

    이지혁이 혀로 입술을 핥았다.

    전신에서 느껴지는 이 끔찍한 고통이 모두 저 마족들의 탓이라 생각하자, 뇌가 탈색될 만큼의 분노가 몰려들었다.

    '죽인다.'

    모두 죽여 버린다.

    거슬리는 모든 것을 쓸어버려야 한다. 하지만 지금은 힘이 부족하다.

    그렇다면?

    "더 끌고 오면 되겠지."

    낄낄거리며 웃던 이지혁이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지금까지 생겨난 게이트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거대한 크기의 게이트 셋이 허공에 떠올랐다.

    "네 주인의 명에 화답하라."

    명은 절대적이었다.

    기긱대는 금속음과 함께 게이트 안에서 거대한 동체가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신장이 10여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아이언 골렘들이 뭉쳐 있는 마수들의 머리 위로 추락한다.

    하늘에서 강철의 신병들이 바닥을 향해 양팔을 쫘악 벌렸다.

    * * *

    쿠우우우우우웅!

    마치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충격이었다.

    "…세상에."

    바닥에 처박힌 강철 거인이 거대한 크레이터를 만들어낸다. 마치 커다란 운석이 박힌 것처럼 대지가 진흙처럼 짓눌렸다. 그리고 그 아래에 있던 마수들이 발버둥을 쳐 댄다.

    카아아아아악!

    카아아아악!

    최정훈은 머리를 움켜잡았다.

    저 광경을 만들어낸 이지혁이 대단해다고 해야 할지, 저 거대한 강철의 거인들에게 짓밟히고도 살아 있는 마수들이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감이 서지 않았다.

    '어마어마하네, 진짜.'

    강하다.

    물론 아직 이지혁은 제대로 공격을 시작한 것도 아니다. 그가 한 것이라고는 자신의 종속들을 이 세계로 소환한 것뿐이었다. 과거 이지혁이 자신은 캐스터이기에 앞을 쌓아줄 병력이 필요하다고 수도 없이 말했다.

    예전의 자신이라면 말 한마디로 가죽까지 벗겨서 바칠 종속들을 수도 없이 다를 수 있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기에 나약해 빠진 너희를 가르치고 써먹으려 드는 것이라고 얼마나 한탄을 해 댔던가.

    '한탄할 만하네.'

    이런 것들을 앞에 두고 싸워온 사람이 NDF와 함께 싸우려고 했으니 얼마나 답답하고 못 미더웠겠는가.

    이건 NDF의 잘못이 아니다. 이지혁이 잃은 것이 너무 큰 것이다.

    '이걸 무슨 수로 대체하라는 거야.'

    전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전력을 모은다고 해도 마수들의 군단과 아직도 추가되고 있는 저 강철의 거인을 대체할 수 있겠는가.

    화력 측면에서라면 어찌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이지혁이 원하는 탱킹을 해줄 수 있는 지구의 전력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나마 그들이 탱커로서 가장 신뢰해 온 아이언 박성찬조차도 저 강철 골렘 한 기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이지혁의 강함에 대한 경외와 동시에 그동안 자신들이 해온 것이 다 무엇이었는가 하는 회의가 밀려왔다.

    강철 거인은 고함을 치지도,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거대한 동체가 움직일 때마다 귀를 찢는 듯한 금속음이 끼긱대며 들려왔다.

    소름이 끼친다.

    몸이 떨린다.

    그래도 숨이 붙어 있는 것들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지금까지 마수들은 끔찍하다 싶기는 하지만 그래도 살아 움직이는 것들이었다.

    한데 그들이 기계 같다고 느끼자마자 정말 기계 같은 것들이 나타난 것이다.

    "저, 저건 대체 뭐야?"

    "…아이언 골렘입니다."

    통역 마법으로 최정훈의 말을 알아들은 디오레 12세가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멸망의 좌가 만든 아이언 골렘은 여타 아이언 골렘과는 그 차원이 달랐다고 합니다. 골렘 한 기로 성문을 돌파하고 성벽을 부수었다고 하지요. 그저 과장된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말로는 저 골렘의 위용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고 할 수 있었다.

    "그 형태조차 확연히 다르다고 하더니, 과연."

    "…그거야 뭐……."

    최정훈이 떨떠름하게 말을 흐렸다.

    인간이란 자신이 아는 것에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법이니까. 그러니 아이언이든 뭐든 골렘을 만들어내려고 했다면 자신이 알고 있는 형태에서 따왔을 것이다.

    그러니 이지혁의 골렘들이 현대 만화 속에 나오는 로봇들과 닮았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최정훈도 아무것도 없는 세상에서 새로운 골렘을 만들어내야 한다면 그쪽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폼은 나는데… 저거, 정말 비실용적인 것 아닌가?'

    인간형 병기는 로망이 있지만, 그 실용성이 영 좋지 않은 것으로 예전에…….

    '아, 아니겠네.'

    최정훈은 납득하고 말았다.

    포탄과 탄환이 날아다니는 현대의 전장이라면 모르겠지만, 발출형 무기가 주요 화력을 담당하지 않는 베라프에서라면 인간형이든 아니든 관련이 없다. 중요한 것은 이지혁의 의지에 따라 잘 움직이는 것이다.

    그렇게 따진다면 어설픈 전차나 동물형에 비해서 인간형인 것이 이지혁이 명령을 내리기가 한결 좋았다.

    쿠우우웅!

    골렘이 바닥을 내려치자 마수들은 말 그대로 피떡이 되어서 사방으로 튕겨 나간다.

    몸을 격하게 휘두를 때마다 귀를 찢는 금속음이 터지고 있었다. 마치 그 소리가 골렘이 포효하는 것 같았다.

    카라라라라라!

    가가가가각!

    이형의 존재들이 뿜어내는 울부짖음 소리와 골렘의 금속음이 동시에 울린다. 최정훈은 그 광경을 보며 몸을 떨었다.

    '이게 마왕들의 싸움인가?'

    * * *

    "…신이여."

    크리스토퍼는 자신도 모르게 양손을 가슴으로 모았다.

    지금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맡고 있는 이들 중 하나가 크리스토퍼다. 굳이 누군가의 동의를 구할 것도 없이 그는 인류를 대표하는 이 중 한 명이었다.

    그런 크리스토퍼가 그저 양손을 모은 채 기도하고 있었다.

    그 어떤 지시도 내리지 못하고, 별다른 방도를 찾아내지도 못한 채 말이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런 크리스토퍼를 비난하지 못했다.

    그들의 눈에 보이는 광경을 보는 이라면 알 것이다. 이건 이미 인류의 손을 떠난 싸움이었다.

    '라그나로크라는 건가.'

    신과 신이 그 명운을 건 전쟁을 벌인다면 그 사이에서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저 자신이 믿는 신의 승리를 기원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 크리스토퍼의 심정이 꼭 그랬다.

    이지혁과 마왕들의 싸움은 감히 그가 끼어들 수 없는 전쟁이었다.

    저 과격한 싸움을 대지가 버텨준다는 것이 신기할 지경이니까.

    마수가 마수를 물어뜯는다.

    마치 검은 해일이 덮쳐들 듯 광ㅍㅎ하게 달려드는 마수들은 눈앞에 보이는 마수들을 물고, 할퀴고, 붙잡고 뒹굴었다. 앞쪽의 마수들이 건너편의 마수들을 물어뜯으면 뒤쪽에서 달려들던 마수들은 앞쪽의 마수를 타 넘고 돌진하거나 걸리적거리는 아군을 쥐어뜯고 잡아 찢으며 달려들었다.

    그야말로 아비규환.

    카아아아아아아아!

    귀를 찢는 듯한 고음이 스피커를 통해 전해져 온다.

    이미 한 번 걸러진 소리를 들으면서도 전신에 소름이 돋는데, 저 소리를 바로 앞에서 들으면 어떻게 될 것인가.

    아마도 크리스토퍼는 그저 저 마수들이 자신을 곱게 죽여주길 기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끼기기긱! 끼기기기기긱!

    철과 철이 마찰하는, 혐오스러운 소리가 울리며 골렘들이 앞으로 뒤뚱뒤뚱 걷는다.

    인간의 형태를 띠고 있다고는 하지만, 너무도 부자연스럽고 우스운 걸음걸이였다.

    하지만 크리스토퍼는 웃을 수 없었다. 골렘의 다리가 옮겨질 때마다 지축을 뒤흔드는 굉음이 울려 퍼진다. 그리고 그 발에 깔린 마수들은 아군이고 적군이고 할 것 없이 터져 나갔다.

    인간의 입장에서 보자면 거대하기 짝이 없는 마수들이 마치 작은 짐승이나 되는 것처럼 짓밟혀 발악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왕 측의 마수들 역시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마수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골렘의 동체를 타고 오른다. 관절부로 기어 들어가 요동치고, 강철보다 단단한 육체를 그 이로 물어뜯었다.

    순식간에 전신이 새까맣게 뒤덮여 버린 골렘이 균형을 유지하지 못하고 바닥으로 쓰러진다. 그러자 마수들이 그 위를 뒤덮고는 물어뜯으며 산을 내뿜었다.

    몇 번이고 들썩들썩하던 골렘들이 축 늘어지면 마수들은 바로 다음 먹이를 찾아 몰려들었다.

    그 광경을 보던 크리스토퍼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너무도 끔찍한 광경이다.

    서로를 파괴하겠다는 순수한 본능만이 자리하는 전쟁.

    인간의 전쟁은 저렇게까지 잔혹하지 못하다. 스스로의 육체도 돌보지 않는 짐승들이 서로를 물어뜯고 있었다.

    "국장님! 국장님!"

    "왜?"

    "최정훈 씨가 연락을 취해왔습니다!"

    "연결해!"

    말을 하면서도 크리스토퍼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단 한순간도 놓칠 수 없다. 저것이 바로 세상의 운명을 결정짓는 싸움이다.

    * * *

    "…엄마."

    이예원의 몸이 떨리고 있었다. 갈 곳을 찾지 못한 그녀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방황한다. 박선덕은 이예원의 어깨를 꽉 움켜잡았다.

    "무서워."

    "…괜찮아."

    박선덕의 눈은 화면 한가운데를 쫓고 있었다. 도대체 정체가 뭔지 알 수 없는 검은 소용돌이 한가운데에 떠올라 오만하게 세상을 굽어보고 있는 그의 아들을 말이다.

    박선덕도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괜찮은 거지?'

    화면으로 보이는 그의 아들은 지금까지 그녀가 알고 있던 모습과는 너무도 달랐다.

    그녀의 아들은 굳이 말하자면 마음 착한 사고뭉치 같은 녀석이었다.

    언제나 틱틱대지만 막상 엄마가 힘을 주어 말하면 입을 삐쭉 내밀고는 시키는 대로 따르는 착한 아들이고, 다른 아이들을 괴롭히고 다니기는 하지만 결코 정도를 넘지는 않았다.

    그래, 흔하다.

    흔히 볼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지혁의 모습은 지금껏 그녀가 알고 있던 아들의 모습이 아니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인간이, 사람이…….

    저런 모습이 되려면 대체 어떤 일을 겪어야 하는 것일까?

    박선덕은 못내 그 사실에 마음이 아팠다. 다른 이들은 이지혁의 힘을 보겠지만, 박선덕의 눈에는 이지혁의 고통이 보였다.

    그 누구도 손을 뻗어주지 않는 아는 이 하나 없는 곳에서 저런 힘을 손에 넣기까지 이지혁을 얼마나 홀로 고통을 감내해 왔을까?

    그런 생각을 떠올리니 자꾸 눈물이 앞을 가렸다.

    "엄마… 울어?"

    "아니, 아니야."

    눈가를 훔친 박선덕이 눈에 힘을 주고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오빠 괜찮겠지?"

    "당연히 괜찮지."

    박선덕이 이예원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네 오빠야. 비록 지금은 어색해 보이기는 하지만… 지혁이란다. 가족이 가족을 무서워하는 일은 없는 거야. 그렇지?"

    "으응."

    "그러니까 지켜봐 주자. 오빠 혼자 외롭게 싸우게 해서는 안 되는 거니까."

    이예원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화면으로 보이는 이지혁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달라.'

    어머니께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저 사람은 그녀가 알고 있는 그녀의 오빠의 모습과는 달랐다. 그저 겉모습이 무시무시하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불길함.

    이지혁을 볼 때는 단 한 번도 느낄 수 없던 불길함이 한껏 배어 나오고 있었다.

    이예원이 정말 두려운 것은 이지혁이 평소 같지 않은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 아니라, 저러다가 정말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오빠라는 사람이 사라져 버리고, 저 무시무시한 사람만이 남아버릴 것 같아서 두렵고 겁이 났다.

    그녀의 오빠는 멍청하고 한심한데다 사람을 약 올리는 데 도가 터서 항상 그녀를 열 받게 했지만…….

    '그래도 내 오빠야.'

    약 올리는 모습은 끔찍하지만, 웃는 얼굴은 부드러운 사람이었다. 항상 그녀를 괴롭히지 못해서 안달이지만, 그녀가 누구에게 놀림을 받았다고 하면 만사를 젖혀두고 달려와 학교고 놀이터고 할 것 없이 뒤집어엎어 버리던 사람이다.

    평소에는 절대 쓰지 않던 '내 동생'이라는 말로 말이다.

    그러니까…….

    지금 저 모습으로 남아서는 안 된다. 언제나 사람을 짜증나게 하던 그 모습이 그녀가 사랑하는 그녀의 오빠이니까.

    이예원은 눈을 감았다.

    신이 있다면, 이 세계에도 신이 있다면…….

    '오빠를 도와줘요.'

    단 한 번도 인간의 부름에 손을 뻗어주지 않은 신에게 이예원은 간절한 마음으로 빌고 또 빌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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