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106화 (106/118)
  • [■] 다녀오세요. 기다릴 테니까 [■]

    ─────

    최정훈이 침을 꿀꺽 삼켰다.

    다르다.

    전에도 느꼈지만, 저놈은 다른 마왕들과 그 격이 달랐다. 너무도 말이다.

    그저 그 모습을 보이는 것만으로도 지켜보는 이들이 그 위압감에 숨도 쉬지 못할 만큼 압박을 느끼기 시작했다.

    "하등한 것들이 감히!"

    스트레오 타입에 가까운 바르바체의 반응에 이지혁이 혀를 찼다.

    "아, 저 새끼는 왜 자꾸 지들이 고등 생물이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에 차 있는 건지 모르겠네. 팬티도 안 입고 다니는 것들이."

    "…이런 걸로 긴장 풀어주지 마세요."

    최정훈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무서워서가 아니라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참아내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팬티 이야기가 왜 나오는가.

    물론 인간형 마왕이 팬티를 안 입고 다니는 것이 좀 어색하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그건 인간이 아니라 마족이니 뭐라 할 수…….

    "아, 씨, 더럽게 웃기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몸을 바짝 죄어오던 긴장이 이지혁의 한마디에 완전히 날아가 버렸다.

    "막아서겠다는 것이냐?"

    하지만 바르바체가 입을 여는 순간, 날아갔던 긴장이 다시 조여지기 시작했다.

    무슨 말을 하는지는 모른다.

    베라프의 일부는 알아듣는 것 같지만, 인간인 최정훈은 마족의 언어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너희가 연합을 하여 우리의 앞을 막아선다고 해서 뭔가가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바르바체가 주변을 돌아보았다.

    "너희 따위가 말이야?"

    바르바체가 홀로 웃기 시작했다. 끅끅대는 그의 웃음소리가 정적으로 가득 찬 세상에 울리기 시작했다.

    "자비는 이것으로 끝이다. 어울리지 않은 짓을 했군. 나는 너희의 비명으로 가득 찬 세상을 원했지만, 그걸 거부한다면 너희의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세상 역시 나쁘지는 않겠지. 좋다, 그렇다면 이제 감당해 보아라."

    쿵!

    무거운 무언가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바르바체의 등 뒤에서 마왕들이 일제히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으아아앗!"

    그 순간,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는 듯이 이지혁의 양손이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눈부신 빛이 허공으로 뻗어져 나가며 거대한 빛의 그물이 솟아오르는 마왕들의 머리 위를 뒤덮었다.

    하지만 그뿐.

    "큭큭큭큭!"

    낮은 비웃음과 함께 이지혁이 펼친 빛의 그물은 마왕들의 손톱 아래 너무도 쉽게 찢겨 나가 버렸다. 하지만 이지혁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캐스팅을 했다.

    두 번, 세 번… 몇 번이고 빛의 그물이 그들을 감쌌다.

    "거리를 벌려! 이 병신들아!"

    이지혁의 외침이 베라프 어로 튀어나왔다. 마왕들이 노리는 것이 어디인지를 확인한 드래곤들이 날개를 펄럭이며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 대응은 너무도 늦었다.

    이지혁이 만들어낸 빛의 그물을 완전히 와해시켜 버린 마왕들이 검은 악마의 날개를 펼치며 드래곤들의 사이로 뛰어들었다.

    "하찮은 것들."

    촤아아악.

    거대한 검은 마나가 깃든 마왕의 클로가 드래곤의 육체를 찢어발긴다. 고통에 찬 울부짖음이 터져 나오고, 피가 하늘을 뒤덮기 시작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하늘로 뛰어오른 마왕들이 베라프의 군세 사이에도 날아들었다.

    검은 마나의 기류가 마왕들을 뒤덮었다. 그러고 나서 그 기류가 사방으로 뻗어져 나가자 검은 마나로 이루어진 거대한 폭풍이 광포하게 몰아쳤다.

    "으아아아아악!"

    "라트렐이여!"

    검은 마나의 폭풍에 휘말려 올라간 이들이 비명을 질렀다. 세상 그 어떤 것보다 날카로운 마나의 칼날들이 휘말려 올라간 이들의 육체를 갈가리 분쇄했다.

    금세 검은 마나의 폭풍이 검붉게 물들고 말았다.

    "막아아아!"

    "죽여! 뛰어든 놈들부터 죽여라!"

    대응은 즉각적이고 신속했다.

    하지만 대응이 신속하다고 해서 그것이 꼭 좋은 결과로 이어진다는 법은 없었다.

    마왕에게 달려든 인간들은 자신들은 왜 인간이고, 저들이 마왕이라 불리는 것인지 처절하게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베라프가 그 오랜 시간 동안 어째서 마왕들의 침입을 그토록이나 두려워했는지도 말이다.

    "가소로운 것들."

    바닥이 뒤집힌다.

    마왕의 발 구름 한 번에 땅이 쩍쩍 갈라지고, 바윗덩어리들이 하늘로 치솟았다. 떨어지는 바위가 아니라 바닥에서 솟구치는 바위에 부딪치는 데도 몸이 으스러졌다.

    "피, 피해라!"

    어찌 막으란 말인가.

    어찌 대응하라는 건가.

    인간은 대지에 발을 딛는 것부터 모든 것을 시작한다. 하지만 그 대지가 제대로 존재하지 않는데 무엇을 어찌하겠는가. 하늘을 날 수 없는 인간은 그저 추락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아……."

    노엘은 바닥이 보이지 않을 만큼 깊게 파여 시커먼 암흑을 품어버린 대지를 보며 몸을 떨었다.

    "…마왕."

    저것이 마왕이다.

    그 육체는 드래곤처럼 강인하고, 그 발톱은 세상을 찢는다. 그런 마왕들이 마법조차 인간과 드래곤을 압도하고 있었다. 불과 인간의 두 배밖에 되지 않는 크기의 마왕들이 드래곤의 입속으로 뛰쳐 들어가 그들의 창자를 찢어내고 머리를 터뜨려 버린다.

    추락하는 드래곤들의 사체가 인간을 덮친다.

    아비규환.

    마왕들이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하자, 순식간에 아비규환이 벌어졌다.

    '막을 수 없다는 말인가.'

    노엘의 눈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분위기 좋게 저들을 밀어붙이던 것이 불과 몇 분 되지도 않았건만, 상황이 완전히 반전되었다. 마왕들이 제 실력을 드러내기 시작하자 이 많은 군세들이 순식간에 오합지졸로 변해 버렸다.

    "물러서지 마라! 신이 우리와 함께……."

    외치던 이의 목이 날아든 시커먼 마나의 칼날에 잘려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다.

    "신은 여기에 없어. 병신 같은 것들."

    이죽거리는 마왕의 목소리가 모두의 귓가에 똑똑히 들렸다.

    "녀희의 신은 이곳에 없다. 그리고 이곳이 베라프라 하더라도 달라질 것은 없어. 너희의 신이 우리를 이겨낼 수 있다면, 우리를 막기 위해 세상의 힘을 소모할 필요도 없었겠지."

    "닥쳐라!"

    디오레 12세가 소리쳤다.

    "너희 같은 필멸자들이 그분들에 대해서 무엇을 안다고 함부로 지껄이는 것이냐! 신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한다. 우리의 마지막이 비록 죽음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신이 우리와 함께하지 않는다는 증거는 되지 못해."

    "그럼 죽으면 되겠군."

    마왕이 이죽이기 시작했다.

    베라프의 신관이라는 것들은 한쪽 방향밖에 보지 않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신이 아닌 그 어떤 존재도 인정하지 않고, 믿지 못한다.

    하지만 딱히 별다를 것도 없는 일이다.

    하늘을 날지 못하는 이들이 하늘을 날아 세상을 보려 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까. 인간이 그 수준에 머물러 있기에 인간인 것이다.

    신의 부재를 증명할 필요는 없다. 그들은 저들의 존재를 부정해 버리면 그만이니까.

    "그럼 너희의 신이 이것도 막아줄까?"

    거대한 덩치를 가진 마왕이 앞으로 달려들어 전방에 있는 성기사에게 강렬한 정권을 날렸다.

    쿠우우웅!

    세상이 터지는 듯한 폭음과 함께 전방에 있던 성기사가 말 그대로 분해되고 말았다. 그러고도 그 여력이 마치 소닉붐처럼 터진다.

    정권의 여력에 휘말린 성기사들의 육체가 갈기갈기 찢겨 나갔다. 수십의 성기사를 순식간에 고깃덩어리로 만들어 버린 마왕이 포효하며 뛰어들었다.

    "쏴라! 쏴라!"

    엘프들의 화살이 허공을 가른다.

    "원시적이군. 무척이나 말이야."

    우우우웅.

    순간, 하늘에 거대한 검은 홀이 생겨났다. 그 검은 홀은 마치 자석이라도 된 것처럼 떨어지는 화살들을 모조리 빨아들였다. 그러고는…….

    우우우웅.

    엘프들의 머리 위로 또 하나의 검은 홀이 생겨나더니, 앞의 홀로 빨려 들어간 화살들이 비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피, 피해라!"

    괴성이 터진다.

    "너희는 자연과 하나가 되는 삶을 추구한다고 하더군. 이상한 일이지. 죽어서 묻히면 그게 자연과 하나가 되는 일인데, 그 조악한 머리로는 그 정도도 이해할 수 없는 걸까? 내가 너희가 원하는 바를 이뤄주도록 하지."

    쏟아지던 화살이 붉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피처럼 붉디붉게 타오르는 화살에 꿰뚫린 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구르기 시작했다.

    "뭐하고 있지? 판이 깔렸잖아."

    "큭큭큭, 알고 있어."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마왕이 양손을 들어 올렸다.

    "일어나라! 나의 종들아!"

    그러자 재앙이 시작되었다.

    시체가 바닥에서 일어난다.

    "뭐, 뭐야!"

    "언데드다! 물러서!"

    크륵크륵거리는 숨소리와 함께 죽은 자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반쯤 육체가 날아가 버린 성기사들이 바닥을 기며 주변에 보이는 발목을 닥치는 대로 물어뜯는다.

    "으아아아! 꺼지라고! 꺼져!"

    몇 번이고 검을 내리꽂지만 목이 반쯤 날아가서도 좀비들은 멈추지 않은 채 닥치는 대로 주변을 할퀴고 물어뜯었다.

    "축복을! 어서!"

    "턴 언데드!"

    신관들의 성력이 우윳빛으로 빛났다. 언데드의 상극인 성력이 쏟아지자 몸을 일으키던 언데드들이 다시 바닥으로 처박혔다.

    하지만 성력이 모든 부분에 닿는 것은 아니었다. 성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는 여전히 언데드들이 날뛰었다.

    기본적으로 신성력을 갖춘 성기사들은 언데드에 저항력이 있기에 공격을 당했다 해서 곧장 언데드로 전염되는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지만, 조금 전까지 어깨를 대고 같이 싸우던 동료들이 마의 주구가 되어 공격해 오는 모습은 그들에게도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었다.

    개중에는 눈물을 흘리며 기도문을 외우는 자들마저 속출하고 있었다.

    "흔들리지 마라! 저것들은 영혼이 없는 꼭두각시들이다. 너희의 동료가 아니다."

    디오레 12세가 이를 갈았다.

    "간악한 것들."

    마왕들은 어찌해야 인간이 흔들리는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가진바 전력만으로도 그들을 상대함에 있어 모자람이 없을 것인데도 끝끝내 인간의 나약한 점을 파고드는 것은 저들의 습성인가, 아니면 그 상화에서도 효율을 추구하는 것인가.

    '결코 저들을 베라프로 들여서는 안 된다.'

    라트렐께서 왜 저들을 반드시 이곳에서 막아내야 한다고 그에게 신탁을 내렸는지 알 것 같았다.

    라트렐은 저들이 베라프로 발을 들이는 순간, 모든 것은 끝이라 말하셨다. 이제야 그 의미를 이해하는 디오레 12세였다.

    '하나 어찌해야 한다는 말인가.'

    지옥도.

    그의 눈앞에 지옥도가 펼쳐지고 있었다.

    마왕들의 힘은 그의 예상을 한참이나 벗어나고 있었다. 고문헌과 전설을 통해 전해 내려오던 마왕들에 대한 기록이 과장되었다고 생각했으나, 지금 보고 있으려니 마왕들에 대한 기록은 오히려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하기야 있는 그대로 썼다면 누가 그것을 믿을 것인가.'

    마왕의 강림을 경험한 적 있는 드래곤들마저 저들의 힘을 제대로 예측하지 못했는데,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이제 신심에 모든 것을 맡기고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뿐이었다.

    "라트렐의 용사들에게 축복을! 그리고!"

    디오레 12세가 다급한 눈으로 이지혁을 돌아보았다.

    "이 세계의 힘은 이것이 전부입니까?"

    "상황 이리되니 이쪽 탓하는 것 보소. 여하튼 라트렐 운운하는 것들 인성하고는."

    "…아니, 지금 그걸 따질 상황이……."

    그리고 그 순간, 검은 뇌전이 그들을 향해 들이닥쳤다.

    * * *

    뇌전의 정체는 마왕이었다. 김다현의 속도를 아득하게 초월하여 자신들을 향해 날아드는 마왕을 보며 이지혁이 눈을 크게 떴다.

    "와, 씨!"

    "아, 죄송, 죄송."

    그 순간, 알파가 앞으로 뛰쳐나가며 날아드는 마왕을 맞았다.

    "이쪽은 제가 막고 있을 테니까, 편히 대화 나누시지요."

    "…서비스 좋네?"

    "뭐 이 정도로."

    여유가 넘치는 알파의 대응에 이지혁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상황이 이리되었는데도 알파는 처음부터 끝까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있었다.

    이곳에서 현 상황을 냉정하게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이지혁과 그뿐일 것이다.

    '난놈은 난놈이야.'

    날아드는 마왕의 목줄기를 틀어쥔 채 허공으로 솟구치는 알파를 보며 이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에서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화력이야 지원하겠지만, 마왕을 상대하기는 힘들다."

    "그럼 지금의 전력만으로 싸워야 한다는 거군요."

    "뭐, 그렇게 되겠지."

    "가능하겠습니까?"

    "뭐가 가능하냐는 거야? 승산을 묻는 거야?"

    "예."

    "승산이라……."

    이지혁이 씨익 웃었다.

    "웃긴 일이로군. 라트렐의 교황인 네가 교의 가장 큰 적이라고 할 수 있는 나에게 승산을 묻다니 말이야. 이거야말로 코미디 아닌가."

    이지혁이 냉담한 얼굴로 돌아왔다.

    '승산이라…….'

    * * *

    "으아아아!"

    서아영은 탁하게 쉬어버린 목으로 죽어라 비명을 질렀다. 이렇게 고함을 지르며 소리친다고 해서 불꽃이 강해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소리를 지르지 않고는 참을 수가 없었다.

    죽음, 또 죽음, 그리고 또 죽음.

    세상에 죽음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개자식들!"

    서아영이 이성을 잃고 불을 뿜어 댔다.

    "진정 좀 해요! 부장님!"

    윤혁규가 외쳤지만, 그의 목소리는 서아영의 뇌리에 전혀 꽂히지 않았다.

    그저 들리기만 했을 뿐이다.

    "죽여! 저 새끼 죽이라고!"

    "제발!"

    윤혁규가 그녀의 어깨를 확 잡아 흔들었다.

    "진정하라구요. 이럴 때일수록 진정해야 한다는 것 몰라요?"

    "진정?"

    서아영의 얼굴에 비웃음이 어렸다.

    "지랄하고 있네. 진정한다고 뭐가 달라지는데? 보면 몰라?"

    "……."

    윤혁규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잠시 동안의 선전이 마치 환상이었던 것처럼 마왕군은 압도적인 기세로 그들을 몰아치고 있었다.

    이제는 더 이상 반전의 요소도 없었다.

    전에 비할 수 없이 강해진 인간 능력자의 힘으로도, 베라프의 최정예 병력의 힘으로도 마족들을 막아낼 수 없었다.

    "그렇다고 정신 줄 놓고 죽지는 말자구요! 바짓가랑이라도 물고 늘어져야 할 것 아니에요!"

    "그래서 지금 늘어지고 있잖아!"

    서아영의 목소리는 거의 비명에 가까웠다.

    "빌어먹을, 뒈지고 나서 체면 찾으면 그게 무슨 소용이야! 나는 그냥 발악하다 죽을 거라고! 저 새끼들 면상에 화상 자국 하나라도 남기고 죽겠다는데, 뭐? 냉정하게 공격하면 공격이 더 잘 먹히기라도 한대?"

    "부장님!"

    "닥쳐, 새끼야!"

    서아영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안다.

    이미 알고 있다.

    이 전쟁은 끝났다.

    더 이상은 무슨 수도 쓸 수 없었다. 폭격을 통해 거의 분쇄했다고 여긴 마수들은 어느새 원래의 숫자를 회복해 가고 있었다.

    검은 게이트 속에서 끊임없이 튀어나오는 마수들의 웨이브를 막을 도리가 없다. 그리고 마왕들은 이제 그들의 손을 떠나 버렸다.

    "사람 농락하면 좋냐! 이 개새끼들아!"

    이럴 거면 희망이라도 주지 말 것이지.

    처음에 그들의 힘 앞에서 주춤하던 그 모습은 다 뭐였다는 말인가.

    서아영의 눈에 저 멀리 옥좌에 앉아 있는 바르바체의 모습이 들어왔다.

    "저 새끼!"

    모든 것이 다 저놈의 계획이다.

    놈들은 인간의 절망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리고 서아영은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절망하고 있었다.

    인간은 궁지에 몰렸을 때 절망하지 않는다. 진정 인간이 절망하는 때는… 존재한다 여긴 희망을 잃어버리고 현실을 직시하는 순간이다.

    그리고 만약 이 모든 상황이 저놈이 인간의 절망을 극대화하려는 계획이었다면, 너무도 멋지게 맞아떨어졌다고 할 수 있었다.

    "죽여 버리겠어!"

    서아영의 눈이 불을 뿜었다.

    바르바체를 향해 달려드는 서아영을 윤혁규가 필사적으로 움켜잡았다.

    "정신 차려요!"

    "놔! 이거 안 놔?"

    "이런 빌어먹을, 이런다고 달라지는 게 없다니까! 지금은 버텨야 한다고!"

    "버티면?"

    서아영이 소리쳤다.

    "버티면 뭐가 달라지는데!"

    "이대로 끝나지는 않아요. 모를 리가 없을 텐데?"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윤혁규가 나직하게, 하지만 확신이 담긴 어조로 입을 열었다.

    "다 끝났다 싶어도 아직 끝난 게 아니에요. 그 인간이 이대로 잠자코 있을 리가 없으니까. 우리가 모두 죽는다고 해도, 그 인간이 살아 있으면 아직 진 게 아니죠."

    그 인간?

    서아영의 머리가 급격하게 뒤로 돌아갔다.

    * * *

    크롸라라라라!

    베라키우스는 자신을 향해 섬전처럼 날아드는 마왕을 보며 공포에 짓눌려 비명을 질렀다. 드래곤이, 그것도 레드 드래곤인 그가 비명을 지른다는 사실은 누구도 쉬이 믿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베라키우스는 지금 이 순간 체면도, 자존도 모두 잃어버렸다.

    생명의 위협.

    그가 다른 존재로 인해 목숨이 달아날 수 있다는 공포를 느끼는 것은 오백 년 만이었다. 그나마 오백 년 전, 멸망의 좌의 공격은 그 하나를 노리고 날아들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저 마왕은 오직 자신을 향해 그 발톱을 세우고 있는 것이다. 마나로 인해 시커멓게 늘어나 10m는 되어 보이는 발톱이 그의 육체를 향해 가차 없이 날아들었다.

    카카카캉!

    오리하르콘보다 단단하다고 자부하던 그의 비늘이 마치 칼에 베인 짐승의 가죽처럼 길게 찢겨 나간다.

    찢어질 듯 벌어진 입에서는 신음조차 새어 나오지 못했다. 성대를 비롯한 목 부분이 모두 잘려 버린 베라키우스는 비명조차 내지 못하며 바닥으로 추락했다.

    "큭큭큭큭."

    마왕은 그런 그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추락하는 그를 따라 바닥으로 날면서 연신 그의 육체를 찢고, 찌르고, 물어뜯는다.

    "크하하하하하핫! 드래곤의 피 맛은 정말 오랜만에 보는군! 아주 각별하다니까!"

    그 어떤 생물과도 비교되지 않는 생명력을 가졌다는 것이 언제나 그의 자부심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드래곤의 생명력이 저주스러울 따름이었다.

    겨우 가죽 한 장으로 목을 붙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명은 끊어질 줄 몰랐다. 육체에 대한 통제를 잃고 그저 추락할 뿐이지만, 다른 생물이라면 이미 끊겼어야 할 생명은 끈덕지게 그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쿠우우웅!

    바닥으로 추락한 그의 눈이 주변으로 향했다.

    멀어지는 의식 사이로 수많은 것이 보였다.

    '끝인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절망이었다.

    하늘을 날고 있는 그의 동족들은 그들보다 빠르고 영활하고 잔인한 마왕들에게 속수무책이었다. 곳곳으로 브레스가 날아들었지만, 전혀 마왕들을 격추시키지 못하고 애꿎은 종족들의 날개를 태우거나 얼릴 뿐이었다.

    하나하나 동족들이 바닥으로 추락한다.

    추락한 곳 역시 마찬가지였다.

    바닥의 인간들은 더욱더 무력했다. 그들은 감히 마왕에 대적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성기사들은 마치 코끼리에게 짓밟히는 개미와 같은 몰골이었다.

    한 번의 손짓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수십, 수백의 성기사들이 마치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처럼 허공을 비산한다. 그리고 바닥으로 떨어지기가 무섭게 이성을 잃고 언데드가 되어 일어선다.

    어둠.

    이것이 어둠이었다.

    신관들이 계속해서 축복을 하고 있지만, 마왕들의 힘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라트렐이여, 무엇을 원하신 겁니까?'

    당신의 신실한 종들이 이곳에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더 빠른 죽음을 위해 우리를 이곳으로 보내신 겁니까?

    죽음을 목전에 두자 그의 신앙에도 금이 가기 시작했다. 라트렐은 결코 자신의 피조물이 의미 없이 죽기를 원치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곳에 그들이 합류하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면, 결코 이른 죽음을 택하게 만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음에도 베라키우스의 머릿속에서는 의문이 끊이질 않았다.

    무엇이 달라진다는 말인가.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 압도적인 전력 앞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굳건한 드래곤의 정신조차도 무너질 정도로 마왕들은 강력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흐려지는 의식을 놓으려는 찰나, 그의 눈에 누군가가 들어왔다.

    가만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이.

    과거의 복장과는 너무도 달라져서 순간적으로 알아보지는 못했지만, 그의 영혼 속에 마치 화인처럼 박혀 있는 그 얼굴을 보는 순간, 베라키우스는 미소를 짓고 말았다.

    짜증이 어려 있는 그 얼굴.

    하지만 그 얼굴이 이 순간만은 세상에서 가장 믿음직스러운 얼굴이었다.

    '…멸망의 좌이시여, 부디…….'

    간절한 그의 바람이 이지혁에게 채 전해지기도 전에 그의 의식이 끊겼다.

    * * *

    "개판이네."

    이지혁은 죽어가는 이들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의 눈앞에서 추락해 죽은 이 레드 드래곤은 뭐 이런 눈빛으로 사람을 본단 말인가.

    "씨바, 살다 보니 파충류한테 연민을 느끼는 날도 오네."

    저 지긋지긋한 도마뱀들을 전부 갈아 마셔 버리고 싶던 시절도 있었는데, 이래서 사람은 오래살고 봐야 하는 것 같다.

    '너무 오래 살았지.'

    그래서인가 보다.

    이 상황이 그리 화가 나지 않고, 분노가 차오르지 않는 이유가 말이다.

    그저 담담할 뿐이었다.

    '나도 화를 내며 소리치고 싶다.'

    하지만 그 모든 감정은 거짓이다.

    이지혁은 알고 있었다. 자신은 이미 인간이라 부를 수 없는 존재임을 말이다.

    인간을 인간으로 규정하는 가치는 뭘까?

    이지혁은 그것을 공감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이들의 의견은 다르겠지만, 같은 모습을 하고도 결코 공감할 수 없는 인간들의 틈바구니에서 수천 년을 살아온 그는 서로 공감할 수 없는 존재는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베라프에서 그는 인간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이 지구에서조차 인간이 아니었다.

    불멸이 깨진 순간, 그는 모든 것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되찾기 위해서 온 세계이지만, 되레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베라프에서 돌아온 초기의 그는 쉽게 웃고, 쉽게 화내고, 쉽게 흥분했다. 즐거움을 느꼈고, 기쁨을 느끼고, 때로는 슬퍼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지혁은 피식 웃었다.

    '사람도 아니지.'

    감정이 요동치지 않게 된 것은 이미 오래전이다. 어떤 상황을 보더라도 마치 투명한 막이 그 사이를 막고 있는 것처럼 감정이 움직이지 않는다.

    지금도 그렇다.

    인간이 죽어간다.

    수많은 인간이 죽어가고 있음에도 이지혁은 그저 그 광경을 무성영화의 한 장면처럼 담담하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새삼 궁금해진다.

    이곳에서 그가 가장 아끼는 이들이 처참하게 죽어간다고 하면 그는 과연 분노할 수 있을까? 화를 내고 소리치고 울 수 있을까?

    "쿡쿡쿡쿡."

    결과는 중요하지 않다.

    그러한 가정을 머리로 떠올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과거의 이지혁이라고 할 수 없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니까.

    이곳에 남아 있는 것은 이지혁이 아니다.

    이지혁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괴물일 뿐.

    그러니…….

    "별다를 것도 없잖아? 안 그래?"

    이지혁의 육체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 * *

    "에?"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이지혁이 고개를 돌렸다.

    "하려는 겁니까?"

    "너, 꼴이 왜 그러냐?"

    "열심히 싸운 대가이지요."

    이지혁은 어이없다는 눈으로 알파를 바라보았다.

    "너, 진짜 진심으로 싸웠던 거냐?"

    "…저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것 아닙니까? 제 입으로 이런 소리 하면 민망하기는 하지만, 겨우 그 정도 배우고 이 정도 능력을 갖춘 거면, 저는 역사상 최강의 재능을 가진 인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구요! 그게 이 정도라는 게 슬프지만."

    "아니, 뭐, 그런 말이 아니라……."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놈이네.'

    알파의 오른팔과 왼 다리는 어디로 날아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한쪽 눈은 뻥 뚫려서 시커먼 피를 흘려내고 있고, 남아 있는 사지 중 둘도 그리 멀쩡해 보이지는 않았다.

    "헤헤, 그래도 두 놈 잡았습니다. 여기서 좀 무리하면 한 놈 정도는 더 동귀어진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무리일 것 같은데, 그냥 좀 쉬지? 얼마 안 남은 것 같은데?"

    "어차피 죽는데 쉬어서 뭐하겠습니까? 아직 이는 남았으니 싸워보죠, 뭐. 그런데 마왕 피부에 제 이가 박힐까요?"

    "글쎄."

    이지혁이 피식 웃었다.

    '여력을 남겨두고 싸울 줄 알았는데…….'

    단 한 번도 알파를 믿은 적이 없다. 그가 알파에게 모든 것이라도 해도 좋을 만큼의 지식을 전수한 것은, 알파가 무엇을 획책하든 마족에게 지배당하는 세상보다는 알파에게 지배당하는 세상이 차라리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알파의 몰골을 보아하니, 이놈도 다른 계획이 없었거나 끝까지 참는 것에 실패한 모양이었다.

    "대충 내가 저놈들과 동귀어진하고 나면 남아 있는 세상을 지배하겠다, 뭐, 이런 생각 아니었어?"

    "비슷했는데……."

    알파가 히히 웃었다.

    "뭐, 그렇게까지 디테일하게 계획을 짠 건 아니었지만 말이죠."

    "지랄하고 있네."

    "에이, 못 속이겠네요. 대충 전력을 보존한 다음이면 남아 있는 이들을 싹 쓸어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죠. 이지혁 씨만 죽어주면… 뭐라고 해야 할까, 저 NDF로는 우리를 막을 수가 없을테니까?"

    "음……."

    서아영 등으로는 알파를 막기 힘들 것이다. 그 하나만 남는다면 어찌어찌 막아볼 수 있겠지만, 알파와 NDF가 살아남는다면 알파의 세력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수준으로 살아남을 테니까.

    알파가 하나밖에 남지 않은 팔로 머리를 벅벅 긁었다.

    "비슷하게 굴러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다만, 뭐랄까… 이대로 있다가는 남아 있는 어쩌고가 통하지 않을 수준까지 박살이 날 것도 같고, 그리고 또, 음……."

    알파가 깊게 한숨을 쉬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제 안에도 인류애라는 게 있는 것 같더라구요."

    "최근 천 년 사이에 들은 농담 중 제일 웃기는 소리로군, 그거."

    "아니, 아니, 뭐랄까… 이걸 인류애라고 말하니까 좀 이상한 거지, 그런 기분 있잖아요. 인간은 참 엿 같고 싫어서 싸그리 인종청소해 버리고 나서 신인류만의 세상을 만들고 싶은데……."

    "히틀러 같은 새끼."

    "그런데 저 새끼들이 더 싫은 거. 인류는 싫은데, 그 인류가 저 놈들에게 패한다는 게 더 싫어서 참을 수가 없더라구요."

    "…이해될 것도 같네."

    "결과가 이거죠."

    알파가 어깨를 으쓱했다.

    "뭐, 결국은 저도 소인배에 불과했던 거죠. 거물이라면 아무리 싫은 상황이라도 참고 넘길 줄 알아야 하는데, 마왕이 싫고 인류가 멸망하는 꼴을 보기 싫다는 이유로 설쳐 댄 대가이니… 뭐, 달게 받아야죠."

    "흐음……."

    이지혁이 가만히 알파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 일단은 살려줄게."

    "예? 저 어차피 죽잖아요. 피를 너무 흘렸는데……."

    "살 확률이 한 십 프로 정도 되는 것 같은데?"

    "심장도 찢어진 것 같은데요?"

    "그러니 십 프로지. 아니면 무조건 사는 건데."

    "십 프로라… 이거, 희망적이라고 해야 하나? 말기 암 환자도 희망을 가지고 사는데, 십 프로나 살 확률이 있다면 열심히 도망 다녀 봐야겠네요. 그런데… 살려준다니요?"

    "그 십 프로 가능성으로 살려주기에는 너는 너무 위험한 놈이니까."

    "이 꼴이 되었는데요?"

    이지혁이 뚱하게 대꾸했다.

    "사실 너, 그 상태로도 웬만한 놈은 찜 쪄 먹을 수 있잖아."

    "그건 그렇죠. 그럼 살려주셔서 감사하다고 해야 하나?"

    씨익 웃는 알파를 보며 이지혁이 고개를 내저었다.

    애초에 알파가 위험한 이유는 그가 강하기 때문이 아니다. 가지고 있는 사상이 너무 과격하고, 그 과격한 사상에 비해서 친화력이 극도로 좋기 때문이었다.

    아마 그의 추종자들 중에서는 그가 주장하는 바에 대해 제대로 실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알파를 따르는 이들도 상당수 될 것이다.

    그러니 팔 하나, 다리 하나 떨어졌다고 해서 그 위험성이 줄어들었다고 볼 수도 없다.

    "어이, 디오레."

    이지혁이 뒤를 향해 소리쳤다.

    그러자 사색이 된 얼굴로 신성력을 퍼붓고 있던 디오레 12세가 이쪽으로 헐레벌떡 뛰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얘 치료 좀 해."

    "…치료요?"

    디오레 12세가 눈살을 찌푸렸다.

    "어느 선입니까? 목숨을 붙여놓는 수준이라면 어렵지 않겠지만, 팔다리를 복원시키는 수준의 치료는 지금으로서는 무척 힘듭니다."

    "힘들어도 해."

    "다른 이 수십을 치료할 수 있는 신성력이 소모됩니다."

    "그래도 하는 게 좋을 거야. 얘가 아마 인류의 마지막 보루가 될 테니까."

    디오레 12세는 이지혁이 무슨 말을 하는지 순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그 말을 따라야 한다는 것 하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디오레 12세가 말귀를 알아들은 듯하자 이지혁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그리고 알파."

    "예."

    "네 역할은 잘 알고 있겠지?"

    "…가능할까 모르겠네요."

    "가능할 거야. 가능해야겠지."

    이지혁이 혀를 찼다.

    "가능할 수 있는 상황이 왔으면 좋겠군. 그럼 일단 한 고비는 넘긴 거니까."

    "그렇기야 하지만, 저는 되레 그쪽이 더 무섭습니다만? 막타를 쳐야 한다면, 저쪽을 치는 걸 선호하겠습니다."

    "뭐, 그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이지혁이 손을 내저었다.

    "그럼 꺼져."

    "예이."

    알파가 너스레를 떨며 한 발로 콩콩 뛰어 물러나자 이지혁이 피식 웃고는 몸을 돌려 앞으로 걸어갔다.

    크롸라라라라라!

    머리 위에서 드래곤의 하울링 소리가 울려 퍼진다. 추락하던 드래곤이 그의 몸 바로 옆으로 떨어졌다.

    "쯧."

    이곳만이 아니다.

    그의 눈에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학살극이 들어왔다. 예상은 했지만 이토록 일방적으로 몰릴 줄이야.

    '뭘 바라겠어.'

    이들을 탓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지구도, 베라프도 최선을 다했다. 정말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마왕을 막기 위해서 수련해 왔다.

    하지만 그게 전부다.

    압도적인 전력 차는 그저 노력만으로 메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할 수 있는 것을 다 했는데도 답이 없다면, 새로운 답을 찾아야 한다.

    비록 그 답이라는 게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위험성을 내포한다고 해도 말이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이지혁이 심드렁하게 말하는 순간, 등 뒤에서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지혁 씨."

    "응?"

    등 뒤에 보이는 이는 아펠드리체였다.

    그녀의 얼굴은 영 좋지 못했다. 감정 변화가 그리 크지 않은 드래곤이 저런 얼굴을 한다는 것은 속이 썩어 들어가고 있다는 증거다.

    동족들이 학살당하고 있으니까?

    아니면 이제부터 이지혁이 할 일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유는 그도 알 수 없었다.

    "울 것 같은 얼굴이네?"

    "드래곤은 눈물을 흘리지 않아요. 당신도 알고 있을 텐데요."

    "그래서 하는 말이야."

    아펠드리체의 얼굴이 의문으로 물들었다.

    "너는 이제 드래곤처럼 느껴지지가 않거든. 마치 사람 같아. 아니, 드래곤과 인간의 사이의 그 어딘가라고 해야 하나?"

    이지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 변하기 힘들다는 드래곤을 여기까지 변하게 한 걸 보면, 나도 참 대단한 놈이기는 하네."

    "저도 인간 때문에 제가 이리 변할 줄은 몰랐어요."

    "그래. 질기고 질긴 인연이었지."

    그리고 그 긴 인연은 오늘 어떤 식으로든 종말을 맞이할 것이다. 세상에는 미래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에게는 미래가 남지 않을 테니까.

    "당신은 정말 괜찮나요?"

    이지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펠드리체는 마치 그의 대답을 들었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알아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당신에게는 다른 길도……."

    "존엄사는 내게 있어서 너무 과분한 죽음이야."

    이지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과분하게 살았지. 마지막까지 편히 죽고 싶다는 것은 너무 큰 욕심이겠지."

    "하지만……."

    "나라고 해서 이런 상황이 달가운 건 아니겠지만 말이야. 세상에는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은 사실 별로 없어. 해야 하니까 하는 거지. 네가 나를 지독하게 막아왔던 것처럼 말이야."

    아펠드리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지혁의 감정에 공감하지 못할 때는 그가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가 보기에 이지혁은 인간으로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영생을 손에 넣은 행운아였으니까.

    하지만 드래곤이라면 결코 알 수 없는 주변인이라는 개념을 이해하게 되자 이지혁의 고통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인간은 결코 홀로는 완전해질 수 없는 생물이었던 것이다.

    그때부터는 이지혁을 잡아두는 것이 그녀에게도 고통스러운 일이 되었다.

    그때 그녀가 라트렐의 명을 무시하고 이지혁을 원래의 세상으로 돌려보내기 위해서 노력했다면, 상황이 지금과는 조금 달라졌을까?

    "슬프네요."

    "슬퍼?"

    "네. 이별이라는 게요. 드래곤에게는 없는 개념이거든요."

    "그렇겠네. 너희는 다른 존재와 관계라는 것을 맺지 않으니까. 그저 옆에 나무가 서 있는 것과 별반 다를 것 없겠지."

    "…그랬죠."

    아펠드리체가 조금 머뭇대자 이지혁이 빙긋 웃으면서 돌아보았다.

    "그럼 어떨까? 나는 이제 너에게 나무 이상의 의미가 있을까?"

    아펠드리체는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녀가 지을 수 있는 가장 환한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내게 있어 가장 소중한 사람이에요."

    드래곤의 입에서는 결코 나올 수 없는 말이었다.

    그가 변한 것처럼 그녀도 변해 버렸다. 그리고…….

    혹여 그녀가 살아남게 된다면, 그녀는 드래곤이 결코 느끼지 않아도 될 슬픔과 외로움을 안은 채 결코 끝나지 않는 영겁의 시간 동안을 고통받아야 할 것이다.

    그건 차라리 저주였다.

    이지혁은 가만히 아펠드리체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고마웠어."

    그 말에는 수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안녕."

    이지혁은 단호히 이별을 고했지만, 아펠드리체는 그런 이지혁에게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다녀오세요."

    "……."

    "기다릴 테니까."

    "음……."

    무슨 대답을 해야 할까?

    천하의 이지혁조차도 이 순간만큼은 평소처럼 받아칠 수가 없었다.

    그저 대답하지 않고 아펠드리체를 두고 걸어가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녀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전장으로 향하는 이지혁을 보는 아펠드리체의 눈동자가 떨려왔다.

    어쩌면 다시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르는 저 뒷모습을 아펠드리체는 하염없이, 또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 * *

    "흐음……."

    바르바체는 전장을 응시하며 낮은 신음을 흘렸다.

    "술을 가져오지 않은 것이 아쉬운 광경이로군. 최고의 안주가 눈앞에 펼쳐져 있는데 말이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에르카나?"

    에르카나는 대답이 없었다.

    "왜 즐기지 못하지? 마왕이 왜 이 광경을 즐기지 못하는 거지?"

    "원하는 대로 됐는데도 불만인가?"

    에르카나의 목소리는 독랄스럽기 짝이 없었다.

    "네가 원하는 것은 내가 이 광경을 보며 고통받는 것이겠지. 어차피 그게 네 목적 아니었어? 목적을 이루게 되어서 축하한다고 해야 할까? 이 빌어먹을 자식아."

    바르바체가 비릿하게 웃었다.

    "너는 더 이상 마족이라고 할 수도 없는 존재가 되었군."

    "마족이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야."

    "너의 영원한 생명과 그 힘은 모두 마족이기에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마족임을 부정한다고?"

    "너 같은 놈이 마족인데, 내가 어떻게 마족임을 기뻐할 수 있지?"

    "내가 문제라는 건가?"

    "아니. 마족이 문제인 거지."

    에르카나는 독랄하게 말을 했다.

    "네가 나를 죽이지도 않고 그저 잡아두는 이유가 뭔지 알아?"

    "애정 아니겠어?"

    "개소리하지 마. 그건 단순한 소유욕이야. 누구보다 마족답고, 그 누구보다 순수한 마족인 네가 다른 이들에게 정을 줄 리가 없지. 네가 나에게 느끼는 감정은 그저 너의 전리품 중 하나가 뒤틀린 것에 대한 분노일 뿐이야. 너는 나를 예전으로 되돌리려는 것이 아니라, 그저 고통을 주려 하는 것뿐이지."

    "그럴지도 모르겠군. 아니, 정확해."

    바르바체의 목소리는 살짝 들떠 있었다.

    "그래서 지금 기분은 어떻지?"

    "네 소원대로 더럽기 짝이 없군. 축하해. 여기에 있어서만큼은 네가 이겼어."

    바르바체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에르카나도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기쁘지 않은 것 같군."

    "천만에. 나는 확실히 이 기분을 즐길 수 있을 때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바르바체가 고개를 돌려 에르카나를 바라보며 이죽였다.

    "네가 진정으로 후회하는 순간은 지금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지. 이지혁이 내 손에 죽는 그 순간이 우리를 배신한 너에게 가장 큰 형벌이 되겠지."

    "……."

    "마족에게 내리는 형벌이 인간을 죽이는 것이라는 게 참 우습기도 하지만 말이야."

    "잘도 지껄이는군."

    에르카나의 목소리는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화도 나지 않는다는 듯한 목소리로 에르카나가 조용히 속삭였다.

    "너는 달링을 죽일 수 없어."

    "예전부터 모두가 착각을 하는 모양인데, 나는 언제든 그를 죽일 수 있었어. 다만, 내가 그를 죽임으로써 감당해야 할 피해가 만만치 않던 것뿐이다. 지금은 충분히 그 피해를 감내할 만하지. 더 큰 먹잇감이 주변에 널려 있으니까."

    바르바체가 입가에 비웃음을 머금었다.

    "그리고 애초에 이지혁이 나를 적대한다 하더라도 내 앞까지 올 수 있을까? 저곳을 뚫고?"

    바르바체가 날뛰고 있는 마왕들을 가리켰다.

    "이곳은 우리가 뿔뿔이 흩어져 있던 마계가 아니야. 이지혁이 마왕을 동시에 몇까지 상대해 봤지? 기껏 셋? 아니면 다섯? 그 정도나 겨우 상대해 본 놈이 저 많은 이들을 뚫고 내 앞까지 온다고? 그럼 칭찬해 줘야겠지. 그 대가로 목을 받겠지만 말이야."

    "이제 쓸데없는 말은 필요 없을 거야. 상황이 이리된 이상 달링도 나서지 않을 수 없을 테니까. 너는 이제 실감하겠지. 그와 적이 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말이야."

    "큭큭큭큭."

    바르바체는 나직하게 웃고는 말을 이었다.

    "그런 것치고는 네 표정이 영 좋지 않은데? 잘도 마족인 주제에, 마왕인 주제에 울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군. 그건 이지혁의 운명을 예상하기 때문이 아닌가?"

    "맞아."

    에르카나는 순순히 인정했다.

    "하지만 그게 너 때문은 아니야. 달링이 여기에서 싸우는 선택을 하게 된다면, 달링의 끝은 정해져 있기 때문이지. 네 목을 따고도 기뻐할 수 없는 입장이니까, 그래서 슬픈 거야."

    "농담은 그 정도면 충분해."

    바르바체가 고개를 돌렸다.

    "확인해 보지. 과연 그에게도 그럴 의지가 있는지 말이야."

    천천히 몸을 일으킨 바르바체가 마수와 인간들 사이를 걸어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는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그를 마중하듯 앞으로 걸어갔다.

    이지혁의 모습은 바르바체에게 조금의 위화감을 주고 있었다. 치열하게 서로를 탐하는 전장의 한중간이건만, 이지혁은 매우 허허로워 보였다.

    그런 그의 기운을 느꼈는지, 주변의 마왕과 마수들도 이지혁에게는 달려들지 않았다. 마치 이곳에 있지만 또한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이지혁은 모두의 관심을 끌지 않고 바르바체의 앞까지 도달했다.

    '이것 역시 기묘한 일이군.'

    새삼 놀랄 것도 없다. 이지혁이라는 인간은 언제나 그에게 놀라움을 안겨주었으니까.

    "죽을 곳을 찾고 있나?"

    이지혁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알고 한 건지, 얻어걸린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이 순간, 저 말보다 이지혁의 처지를 잘 표현한 말은 없을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이제 와 죽을 곳을 찾는 게 아냐, 멍청아."

    천 년이 넘게 찾고 있었어.

    죽을 곳을, 죽을 수 있는 곳을.

    흑마법을 배우고, 마계에 쳐들어가고, 베라프 전체와 전쟁을 벌인 이유도 다 죽기 위해서였다. 죽을 수 있는 곳을 찾기 위해서였다.

    '인간… 아니, 나는 모순적이군.'

    이지혁이 가볍게 웃었다.

    죽을 곳을 찾기 위해서 수천 년을 떠돌았건만, 막상 그럴 수 있는 곳을 찾아 안주하자 죽음이라는 것이 껄끄럽게 느껴졌다. 언제라도 죽을 수 있다는 듯이 굴었지만, 언제 생겨난 것인지도 모르는 삶에 대한 미련을 쉽게 끊어낼 수가 없었다.

    '이래서 웃기는 거지.'

    항상 안식을 원해왔음에도 미련 때문에 안식을 두려워한다니 말이다. 삶에 대해 미운 정이라도 든 모양이었다.

    "그래서 이곳이 네가 찾은 무덤인가?"

    "그래."

    이지혁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죽기에 이보다 더 좋은 곳은 찾을 수가 없겠지."

    이지혁의 말에 바르바체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확실히 그렇군."

    이곳은 가장 죽음이 짙은 곳이었다. 인간과 마수, 그리고 유사 인류들과 드래곤까지… 수많은 죽음이 존재했다.

    이지혁이라는 지긋지긋한 인간의 죽음이 이루어지기에 이곳보다 더 어울리는 곳은 없을 것이다. 시체로 쌓아 올린 옥좌라는 말은 멸망의 좌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가장 어울리는 말일 테니까.

    "그렇군. 그런데……."

    바르바체가 가만히 이지혁을 보며 물었다.

    "내게 원하는 것이 있는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면 이미 싸우기로 마음을 먹은 이가 여기까지 와서 그에게 말을 걸 리가 없었다.

    "지금이라도 내 앞에 무릎을 꿇어보겠다는 건가? 하지만 너무 늦은 것 같은데?"

    "아아, 그것도 좋은 방법이기는 하지만… 너는 인간이 아니라서 모르겠지만, 인간이 이만큼이나 살다 보면 관절이 성한 데가 없거든. 무릎이 안 굽혀지는데 어쩌지?"

    그러더니 이지혁이 가운뎃손가락을 치켜올렸다.

    "아이고, 손가락도 안 굽혀지네. 이래서 늙으면 죽어야 한다니까."

    이지혁이 너스레를 떨자 바르바체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에 와서도 농담할 여력이 남아 있는 모양이로군. 인간은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걸로 아는데?"

    "그건 마왕도 마찬가지야. 내 손에 죽은 마왕들이 얼마나 징징 짜댔는지 모르는 모양인데, 너도 그 상황이 되어보면 이해가 갈 거야. 삶에 대한 집착은 너희가 훨씬 더 심하더군. 뭐, 안 그런 놈도 있었지만 말이야."

    "허세는 충분해. 하고픈 말이나 해봐라."

    "병력 물려."

    이지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일일이 찾아내 죽이기 귀찮으니, 한꺼번에 쓸어주지. 전부 뒤로 물려. 나 혼자 상대해 주마."

    "내가 그 말을 들어야 하는 이유는?"

    "허세적으로는 나를 상대하면서 뭐든 다 들어줘도 네가 승리할 수 있다는 심리적 만족감을 추구할 수 있고, 현실적으로는 저놈들이 저리 섞여서 날뛰면 결국 나는 홀로 튀어나와 있는 너만 노리고 달려들 수밖에 없다는 거지. 겁이 많은 너는 내가 너를 바로 상대하는 것보다는 다른 놈들과 싸우면서 충분히 힘이 빠지는 걸 선호할 텐데? 내 말이 틀렸나?"

    "큭큭큭큭."

    바르바체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리 말한다면 내가 나 혼자서도 충분히 너를 상대할 수 있다고 달려들 줄 알았나? 인간이라는 것들은 되도 않는 격장지계를 쓰는군. 오냐, 소원대로 물려주지. 한 번 상대해 봐라."

    "어. 음, 그래. 그래주면 고맙지."

    이지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저것들은 왜 자기들이 똑똑하다고 믿을까?'

    지능이 높은 것과 현명한 것은 차이가 있는 모양이었다. 저들은 인간의 비이성적인 행동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다. 이성적으로 보자면 이지혁이 지금 바르바체 하나와 승부를 결하는 게 이득이겠지만, 이지혁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가 이긴다 하더라도 등 뒤를 지키는 이들이 모두 죽는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인연이 얽힌 한 사람의 목숨이 다른 모두의 목숨보다 중요하다 믿는 이지혁이었다. 남아 있는 인류를 지키는 대가로 여기 있는 모두가 죽는다면, 이지혁이 얻어낸 승리는 패배만도 못하게 될 것이다.

    "물러나라."

    바르바체의 외침과 함께 인간의 군세를 몰아붙이던 마왕과 마수들이 행동을 멈추고 일사불란한 움직임으로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필사적으로 공격을 퍼붓던 이들마저 손을 놓고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뭐, 뭐야?"

    서아영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전방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의 눈에 파란 트레이닝복을 입은 이지혁의 모습이 보였다.

    이상한 일이다.

    서아영은 저 인간을 좋아하지 않았다. 인간적으로는 결코 좋아할 수 없는 사람이다. 서아영의 성격이 개차반이라서 이지혁과 좀 더 자주 충돌하기는 했지만, 성격이 좋다 하는 이들도 이지혁을 딱히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인간적인 면으로만 본다면 저 인간은 낙제점이다.

    그런데 참 웃기게도…….

    저 등을 보고 있으면 뭔가 안심이 된다.

    '홀렸네.'

    서아영이 피식 웃었다.

    이 이상 절망적인 상황은 없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저들을 막아낼 방법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윤혁규의 '저 인간이 패하기 전에는 우리가 진 게 아니다'라는 말을 납득하게 된다.

    서아영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가만히 이지혁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동안은 느끼지 못하던 것들이 전해져 온다.

    저 등.

    수많은 이들의 믿음을 이끌어내는 저 등을 가지기 위해서 이지혁은 얼마나 많은 시간을 고통 속에서 헤매었을까?

    그저 '믿음직하다'라는 말로 끝내 버리기에는 그 오랜 시간 동안 그가 겪었을 고통과 좌절에 숙연해지는 느낌이었다.

    살짝 구부려져 있던 등이 쫘악 펴지며 이지혁이 주위를 둘러본다.

    절망이라는 단어를 세상에 구현한다면 이보다 적절한 상황은 없을 것이다.

    아직 힘이 빠지지 않은 수십의 마왕들과 지평선 끝까지 펼쳐져 있는 검은 마수의 군단.

    대적이라는 것이 우스울 지경이었다.

    "뭐, 새삼스럽지도 않지."

    이지혁이 피식 웃었다.

    항상 그랬다.

    힘없는 일반인의 몸으로 베라프에 떨어졌을 때도 그가 하는 짓은 언제나 무모하고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들뿐이었다. 하지만 굴하지 않고 계속 달려들었기에 지금의 이지혁이 있는 것이다.

    "자, 그럼……."

    이지혁이 고개를 좌우로 꺾었다.

    "시작해 볼까?"

    * * *

    화면을 바라보는 이들의 눈에는 생기가 없었다. 그저 뭔가 터지고, 폭발하고, 또 죽어간다.

    보고 싶지 않은 광경이지만, 그 누구도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크리스토퍼의 주관은 뚜렷했다.

    이것은 인류의 명운을 건 전투다. 일반인인 그들이 본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없다는 이유로 자신들의 운명이 결정되는 순간조차 지켜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은 일이다.

    그렇기에 크리스토퍼는 전투 장면을 모두 공개했다.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모습일지는 모르겠지만, 모두가 알아야 한다.

    전방에서 싸우고 있는 이들이 어떠한 압박을 견뎌내고 있는지 말이다. 그들이 대신 피를 흘리고 있기 때문에 자신들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화면을 보고 있는 이들도 다들 느끼고 있었다.

    저곳에서 흘리고 있는 피는 그들을 대신한 피였다.

    화면을 보고 있는 이들 중에는 능력자들이 쓸데없이 세금을 먹는다는 이유로 싫어하는 이들도 있고, 같은 인간이 아니라는 얼척 없는 이유를 대며 증오하던 이들도 있었다.

    그런 이들조차도 지금 저들이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엄마……."

    그리고 그 화면을 보고 있는 이들 중에 박선덕과 이예원도 있었다.

    "그래."

    박선덕이 손을 뻗어 이예원의 손을 꼭 잡았다.

    그들이 보기에 적절하지 않은 화면이다. 공포 영화조차 제대로 눈 뜨고 보지 못하는 그들이 마귀들이 날뛰고 피가 난무하는 화면을 본다는 것은 너무도 가슴 떨리는 일이었다.

    더구나 그것이 영화가 아니라 실제 상황이라면 세상 어느 누가 그 광경을 담담히 볼 수 있겠는가.

    하지만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중에 있다.

    그녀의 아들이, 그녀의 오빠가.

    말 안 듣고 뺀질거리기 일쑤인 그들의 가족이 지금 저곳에서 인류의 운명을 지키기 위해서 피를 흘리며 싸우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눈을 뗄 수 있겠는가.

    "…밀리는 것 같은데……."

    어디선가 들려오는 신음 섞인 음성에 박선덕이 이예원의 손을 꽉 잡았다.

    확연하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들이 보기에도 지금 인류가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었다.

    "오빠… 괜찮을까, 엄마?"

    "괜찮을 거야."

    박선덕이 단호하게 말했다.

    "누구 자식인데, 어떻게 키웠는데… 겨우 저런 데서 죽을 리가 없어. 내 새끼 그리 나약하지 않아."

    "안 죽어."

    화면을 차가운 눈으로 보고 있던 김다솜도 중얼거리듯 말했다.

    "죽을 사람 아냐. 그렇게 죽을 사람 아냐. 꼭……."

    뭔가 더 말을 하려던 김다솜이 눈을 크게 떴다. 정신없이 몰려들던 괴물들이 갑자기 일제히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마왕도 마족들도 모두 말이다.

    '무슨 일이지?'

    김다현 덕에, 그리고 몇 번 함께 전투를 치른 덕에 몬스터와 마수들의 습성을 조금이나마 알고 있는 그녀는 마수들의 움직임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한 번 공격을 시작하면 전멸하는 한이 있어도 결코 등을 보이지 않는 것들이 마수고, 몬스터 아니던가.

    그런데 왜…….

    "아……."

    김다솜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전장이 정리되자 홀로 앞으로 나와 서 있는 한 남자의 뒷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오빠."

    "지혁아……."

    이예원과 박선덕의 입에서도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저 등만을 볼 수 있다고 해도 어찌 모를 수가 있겠는가. 알 수 있기에 가족이다.

    "왜, 왜 오빠가 혼자 저러고 있지?"

    박선덕의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의 아들은 항상 저렇다.

    무모하기 짝이 없다. 다른 이들이 말리는 일을 태연하게 저지른다. 그녀가 그만큼이나 이야기를 했건만 말이다.

    싸우더라도 다른 이들을 방패막이 삼아서 싸울 수도 있을 텐데, 꼭 저렇게 자신이 모든 짐을 지려고 한다.

    "…그래야지."

    박선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 내 새끼지."

    걱정이 되는 마음이야 어찌하겠는가. 아들이 장성하여 바른길을 걸어가겠다는데, 걱정이라는 말로 자식의 길을 막는 것은 부모가 할 일이 아니었다.

    뒤에서 지켜보는 속이 썩어들어 가더라도 묵묵히 응원을 해주는 것이 부모가 할 일일 터.

    김다솜이 떨리는 손을 주체하지 못할 때였다.

    우우우웅.

    뭔가 진동하는 소음이 들린다 싶더니, 그녀의 앞쪽에 정해민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다솜아."

    "언니!"

    김다솜이 다급하게 모습을 드러낸 정해민의 손을 잡았다.

    "어떻게 된 거예요?"

    "치료사가 부족해.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해. 도와줘."

    "갈게요!"

    김다솜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가 간다고 뭐 그리 큰 도움이 되겠냐마는, 그녀의 도움까지 바랄 정도로 다급하다는데 여기서 손가락이나 빨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더 가까이서 지켜봐야 해.'

    어쩌면 이지혁이라는 사람이 어떤 성정인지는 박선덕보다 그녀가 더 잘 알고 있을 수도 있다. 지금 이지혁은 모든 짐을 짊어지고 홀로 이 상황을 감당할 생각이다.

    그럼 지켜봐 줘야 한다.

    "해민아!"

    "예, 어머니."

    박선덕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혹여 우리 지혁이에게 말을 전할 기회가 있으면……."

    박선덕의 말을 들은 정해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기억할게요."

    정해민이 김다솜의 손을 잡고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럼."

    두 사람의 모습이 퍽, 하고 사라지자 박선덕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괘, 괜찮겠지, 엄마?"

    박선덕은 끝내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저 화면으로 보이는 아들의 등을 하염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 * *

    "마지막인가요?"

    "그렇습니다.."

    "저 어깨에 너무 많은 것이 맡겨져 있네요."

    "무겁겠죠?"

    "우리가 짐작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송정수는 낮게 한숨을 쉬었다.

    전 세계적으로 지금 이 순간 가장 중요한 인물의 순위를 따진다면 넉넉잡아도 열 손가락 안에는 쉽게 들어갈 송정수마저도 이지혁이 느끼고 있을 부담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수준이었다.

    '그걸 버텨내는 사람이지.'

    그렇기에 이지혁이다.

    송정수는 이지혁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너무도 많은 것이 그 등에서 느껴졌다.

    문득 세상일이라는 것은 오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 세상은 사람들이 힘을 합쳐 이끌어간다. 사회는 사람이 지탱하고, 그 사람들을 사회가 이끌면서 인간은 이곳까지 발전해 왔다.

    그런데 막상, 정말 결정적인 순간이 되면, 세상의 흐름은 몇몇 사람에게 집중된다. 그들이 어떠한 결정을 내리고, 어떠한 일을 해내는가에 따라서 세상의 운명이 뒤바뀌는 것이다.

    러시아 원정을 결행한 나폴레옹처럼 말이다.

    그리고 지금 송정수는 인류 역사상 단 한 번도 없던 일을 지켜보고 있다. 인류의 운명을 두 어깨에 이고 선 남자가 저곳에 있었다.

    '내 삶은 나쁘지 않았을까?'

    이지혁을 알게 된 이후로는 이지혁을 지원하는 데 최선을 다한 송정수다. 지금도 그 선택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훌륭한 선택이라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 이지혁이 그 사실을 증명해 줄 것이다.

    "마지막에 이겨야 이기는 겁니다, 이지혁 씨."

    송정수는 존재하지 않을 신에게 이지혁의 건승을 기원하며 양손을 모았다.

    * * *

    "여기!"

    모습을 드러낸 정해민과 김다솜을 보며 김다현이 과격하게 손을 흔들었다.

    "다솜아! 여기! 여기다!"

    "오빠!"

    "빨리!"

    정해민이 김다솜의 손을 잡고 달렸다. 김다솜 역시 다급하게 김다현이 가리키는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배에 구멍이 뻥 뚫린 윤혁규가 입가로 피를 쿨럭쿨럭 뱉어내고 있었다.

    "혁규 씨!"

    정해민이 기겁을 하여 소리를 지르자 윤혁규가 손을 내저었다.

    "아, 안 죽… 꾸륵."

    피 때문에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윤혁규를 본 정해민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와 동시에 김다솜은 두말없이 윤혁규의 배에 손을 대로 힐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어때?"

    "상처가 심하기는 한데, 치료 못할 정도는 아니에요. 죽지는 않을 거예요."

    "그래?"

    "확실하지는 않지만… 괜찮을 거예요. 괜찮아야죠."

    일반인이라면 벌써 열 번은 죽었을 상처다. 능력자이기에 살아 있는 것이고, 능력자라서 회복을 기대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하… 씨, 다행이다."

    김다현이 긴장이 풀렸다는 듯이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윤혁규는 그 꼴이 되어서도 굳이 말을 해야겠다는 듯이 목구멍으로 솟구치는 피를 옆으로 뱉어내더니, 히죽 웃었다.

    "어차피 죽을지도 모르는데… 지금… 살았다고 좋아할 일인지 모르겠다."

    "주둥아리는 미리 죽여줄까?"

    김다현이 진짜로 죽빵을 갈길 기세로 노려보자 윤혁규가 움찔했다. 평소라면 몰라도 반항도 할 수 없는 지금은 김다현의 성질을 돋워 좋을 게 없었다.

    '이 새끼는 진짜 팰 놈이다.'

    이 세상에서 딱 둘. 이지혁과 김다현, 아니, 거기에 알파에게까지는 상식을 바라지 않기로 결심한 윤혁규였다. 환자를 팰 리가 없다는 빤한 생각을 하다가는 강냉이가 다 날아간다.

    "…뭔가 좀 허무하네."

    김다현이 조금은 멍한 눈으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뭐…가?"

    "우리도 열심히 했는데, 마지막은 이렇게 되네. 우리가 그토록 고생을 해서 강해져도 결국에는 저 사람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결국은 이렇게 뒤에서 지켜보는 게 할 수 있는 전부라 생각하니까 좀……."

    "그건 아닙니다."

    어느새 그들에게 다가온 최정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전력은 엄청나게 줄여놨어요. 저들도 태연해 보이지만, 최소 3할 이상의 전력이 날아간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한 게 없는 건 아니죠."

    "…그렇겠죠?"

    "이지혁 씨도 마지막까지 기다린 겁니다. 적의 전력이 조금이라도 더 줄어들길 기다리면서 말이에요. 그러니 지금이 되어서야 나서신 거죠."

    김다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이지혁은 더 이상 흑마력을 쓸 수 없는 몸이 되었지만, 최후에 최후의 순간이 되면 결국 그가 다시 나설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이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음에도 가슴이 쓰려온다.

    "괜찮을까요?"

    "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었지만… 이제는 리스크를 감수하지 않을 수 없어요."

    "리스크라……."

    김다현은 이 세계로 돌아오기 전, 이지혁과 마지막으로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 * *

    "죽이라고?"

    "그래."

    "…누구를?"

    다들 황당한 얼굴로 이지혁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

    그러더니 이지혁은 태연하게 손을 들어 자신을 가리켰다.

    "아, 아니, 잠깐만요."

    최정훈이 기겁을 하여 소리쳤다.

    "그러니까… 여기서 배운 것을 바탕으로 최후의 순간이 왔다 싶으면, 이지혁씨를 죽이라는 겁니까?"

    "네. 정확하네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이지혁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이게 좀 설명하기가 껄끄러운 문젠데, 간단히 말하자면… 날 안 죽이면 여러분이 다 죽어요."

    "…네?"

    "인류도 다 죽을 거고, 마족도 다 죽을걸요? 아마 마족 놈들보다 더 큰 재앙이 될 확률이 크죠."

    "이지혁 씨가 마족이 되면요?"

    "네. 그러니 그 꼴 보기 전에 어떻게든 죽여야 해요."

    "…기분의 문제는 그렇다 치고, 현실적이지는 않은 것 같은데요? 우리가 전부 달려든다고 이성을 잃은 이지혁 씨를 죽일 수 있습니까?"

    "기본적으로 어려우니까 쟤를 키운 거겠죠?"

    이지혁이 알파를 가리켰다.

    모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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