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105화 (105/118)
  • [■] 그게 그렇게 의미가 없다니까 그러네 [■]

    ─────

    "저건 어디서 튀어나온 것들이야?"

    크리스토퍼의 눈이 찢어질 듯이 부릅떠졌다.

    게이트에서 코스프레라도 한 듯한 기사들과 로브를 뒤집어쓴 이들이 물밀듯이 몰려나오고 있었다. 그나마 그뿐이라면 다행일 텐데, 그 뒤로는 인간이 아닌 것 같은 이들마저 튀어나오고 있는 중이었다.

    "저들이 이지혁 씨가 말하던 이계인들인가?"

    크리스토퍼가 다리에 힘이 풀린 듯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휴우……."

    "국장님, 어떻게 합니까?"

    "일단 보류해! 당장!"

    "예."

    모든 게 글렀다는 생각에 현존하는 모든 핵무기를 때려 박을 계획까지 세우고 있던 크리스토퍼가 작전 중지를 명했다.

    '다행이군.'

    아무리 핵을 때려 박는다고 해도 상황을 호전시킬 수 없다는 것쯤은 크리스토퍼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그래서 준비한 마지막 한 수였다. 크리스토퍼는 이 막 나가는 한 수를 쓰지 않을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했다.

    "…도와주러 온 건가?"

    "그런 것 같습니다."

    "이것참."

    크리스토퍼가 미묘한 웃음을 입가에 머금었다.

    "단 한 번도 교류해 본 적도 없는 이들과 같이 싸워야 한다니, 이것도 재미있는 일이구만."

    마족과 마왕에 대항하는 것에 종족이 어디 있고, 차원이 어디 있겠냐마는 말이다.

    "결국은 한 건을 해내는군."

    크리스토퍼가 화면에 비친 이지혁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구원자라는 말에 저토록이나 잘 어울리는 이도 없을 것이다. 세상에 위기가 닥친다 싶으면 어떤 방식으로든 간에 해결책을 찾아내고 있었다.

    "최악의 구원자이지만 말이야."

    "저… 국장님?"

    "음?"

    "이지혁 씨에게서 전화가 들어와 있습니다."

    "전화?"

    화면을 보니 이지혁이 전화기를 귀에 대고 인상을 쓰고 있었다.

    그러니까 저게 지금 나를 찾는 전화라는 말이지?

    크리스토퍼가 뚱한 얼굴이 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기는 했지만, 이지혁과의 전화는 여전히 부담스러운 일 중의 하나였다.

    "여, 연결해."

    "예."

    - 아, 여보세요?

    "네, 이지혁 씨. 접니다."

    - 뭐해요, 아저씨? 안 쏟아붓고?

    "지금 최대한 지원을 하고는 있습니다만… 그 게이트에서 나온 이들과 몬스터들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폭격이 쉽지가 않습니다. 될 수 있는……."

    - 그냥 갈겨요.

    "네?"

    - 쟤들, 맞아도 안 죽어요. 그러니까 그냥 갈기면 돼요.

    "사람인데요? 몬스터도 못 버티는 화력을 사람이 있는데다가 그냥 갈기라는 말입니까?"

    - 네.

    "죽어도 되나요?"

    - 안 죽는다니까 자꾸 무슨 소리를 하고 있어요. 쟤들은 인간이 아니에요. 인간인 척하는 애들이지. 폭격이 아니라 핵을 맞아도 안 죽을 놈들이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아니, 상식적으로……."

    - 이놈들에게 언제 상식 통하는 거 보셨어요?

    "못 봤죠."

    그 말을 듣고 나니 이해가 간다. 하기야 하늘에서 몬스터가 비처럼 내리고, 게이트를 열어 이계인이 지원을 하러 오는 판인데 일반적인 상식을 운운하는 게 시대착오적이기는 했다.

    - 쟤들 방어력이 마수들보다 더 우월하니까, 그냥 갈기세요.

    "아, 알겠습니다."

    - 그리고 의료 쪽 지원도 좀 부탁할게요.

    "예! 걱정하지 마십시오."

    - 그럼.

    "아, 잠시만요, 이지혁 씨."

    - 네?

    "저들이 이지혁 씨가 말하던, 그 '베라프'라는 곳의 사람들입니까?"

    - 네. 징글징글한 것들이 이곳까지 따라왔네요.

    "지금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이 좀 시기상조로 느껴지기는 합니다만……."

    - 네?

    "이대로 전쟁이 끝났을 경우에 저들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저들이 침략군으로 돌아설 확률은 없는 겁니까?

    - 그건 아니에요.

    이지혁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 얘들은 신성력이라는 것을 생명수처럼 아는 애들이라서 라트렐과 다른 신들의 힘이 많이 미치기 힘든 이 세상에서는 살아가기 힘들 거예요. 그러니 아마 일이 끝나면 돌아가겠죠.

    "아무런 대가 없이 말입니까?"

    - 대가가 없는 것은 아니죠. 여기서 마왕군을 물리칠 수 있으면, 베라프는 피해를 입지 않잖아요.

    "아……."

    크리스토퍼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지구가 얼마나 많은 피해를 입었는가를 감안하면 매우 현명한 선택이다. 마족의 침공이 이런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크리스토퍼 역시 마게로의 원정을 계획했을 것이다.

    그게 더 힘든 싸움이 될지라도 민간의 피해는 발생하지 않을 테니까.

    - 여하튼 그러니까, 그쪽으로는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거예요. 포탄 공급이나 잘하고 공격이나 똑바로 해주세요. 겨우 탱커가 생겼으니 프리 딜 넣을 찬스잖아요.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 네, 그럼.

    전화가 뚝 끊기자 크리스토퍼는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굳은 얼굴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넣을 수 있는 화력은 모조리 끌어모아! 저 건방진 마족 놈들에게 한 방 날릴 기회다!"

    "라져!"

    사라졌던 희망이 다시 피어오르는 것을 느끼며 크리스토퍼가 전율했다.

    * * *

    찰칵.

    "아오, 뒈지는 줄 알았네."

    "…이렇게까지 여유를 부릴 때는 아닌 것 같습니다만."

    "사람이 좀 쉬고 살아야지, 어떻게 24시간 싸움박질만 해요."

    "그렇긴 합니다만……."

    그렇다고 이리 퍼지는 것은 아니지.

    최정훈이 떨떠름한 눈으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대체 어디서 났는지 커다란 비치 의자를 가져다 놓은 이지혁이 의자에 드러누워 담배를 뻐끔뻐끔 피워 대고 있었다.

    '여기 전쟁터지?'

    뭔가 위화감이 몰려들고 있었다.

    정말 이래도 되는 것일까?

    "…저기, 이지혁 씨."

    "왜요?"

    "사람은 때와 장소를 가릴 줄 알아야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사람 안 할래요."

    "아니, 그러지 마시고."

    "아, 좀!"

    이지혁이 발끈 했다.

    "사람을 부려 먹으려면 노동 시간을 준수해 주면서 부려 먹어야지, 누가 하루 여덟 시간 지켜 달라고 했어요, 아니면 잔업수당을 달라고 했어요. 그냥 그 와중에 잠깐 좀 편히 쉬겠다는데, 그것도 못 참아서 사람을 갈구고 그래요!"

    "…갈구는 게 아니구요."

    "최정훈 씨가 제일 문제예요."

    "네? 제가요?"

    "같이 월급 받아먹는 입장에서 매일 그렇게 잔업하고, 일하고, 퇴근 안 하면 남들은 뭐가 돼요? 최정훈 씨는 그렇게 열심히 일하는데 다른 놈들은 같은 돈 받고 놀고먹는다 그럴 거 아니에요. 그거 민폐예요."

    "아……."

    그게 그렇게 되는 건가?

    뜬금없이 노동 지도를 받게 된 최정훈이 쪼그라들었다. 심지어 저 옆에서 윤혁규와 김다현이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이지혁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이 말이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나?'

    순식간에 노동자의 적이 되어버린 최정훈이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돌아오는 시선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그거랑 이거랑은 관련이 없잖아요."

    "그럼 때와 장소를 가려서 집에 가서 쉬다 올까요?"

    "…아니죠."

    "진짜 악독하네. 마트 캐셔들 의자 놓는 걸로도 간섭한다더니, 딱 악덕 고용주 마인드네, 진짜.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왜, 왜 그런 눈으로 사람을 봐요! 왜!"

    이 인간들이 진짜!

    모두가 이지혁에게 동조하고 이었다.

    아니, 이 양반들아. 여기가 전쟁터인데, 드러누워서 쉬는 게 말이나 되나?

    얼씨구? 어디서 콜라까지?

    세상 귀찮다는 얼굴을 한 이지혁이 웅얼거렸다.

    "이만큼 싸웠으면 이제 교대하고 쉬기도 해야죠. 마나도 다 떨어져서 다시 모아야 한단 말이에요."

    "끄응."

    "최정훈 씨도 얼른 쉬어요. 이제 쉴 시간도 얼마 안 남았으니까."

    "예."

    "그리고……."

    "네?"

    "저놈들이 그렇게 만만한 애들이 아니에요. 내가 상대했다고 해서 쟤들이 상대하기 쉬워 보여요? 나도 마수 군단 없으면 혼자서 쟤들 못 이겨요."

    "……."

    최정훈이 의혹에 찬 눈으로 베라프의 군세를 바라보았다.

    "애초에 저쪽은 수천 년 동안이나 마족과 몬스터들과 싸워온 프로페셔널이거든요. 이쪽과는 짬밥이 다르다구요."

    "맞는 말씀이십니다."

    "아, 깜짝이야!"

    이지혁이 고개를 획 뒤로 돌렸다. 법복을 입은 디오레 12세를 본 이지혁이 떨떠름한 눈으로 물었다.

    "아니, 합류 안 해요?"

    "라트렐의 의지로 함께하는 우리는 굳이 한곳에 모여 지휘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 알고 계실 텐데요."

    "뭔 외계인이여?"

    이지혁이 궁시렁댔지만, 디오레 12세는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라트렐의 교황으로 임명되는 이가 가장 먼저 받는 교육은 흥분하지 않는 법을 익히는 것이었다.

    언제부터 그런 교육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멸망의 좌께서 이 세계로 가신 뒤, 우리는 아주 오랜 세월을 전쟁에 대비해 왔습니다. 언젠가 당신께서 베라프에 멸망을 가져 올 것이라는 신탁대로 말입니다."

    "…응? 내가?"

    "예."

    "그거, 이미 끝난 이야기 아니었어요?"

    디오레 12세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끝이 아닙니다. 시작이지요."

    "시작?"

    "예. 언젠가 당신이 다시 돌아올 때, 베라프는 빛을 잃고 어둠으로 돌아가게 되리라. 이것이 라트렐이 우리에게 내린 신탁입니다."

    "…살벌하네."

    이지혁이 코웃음을 쳤다.

    "뭐,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나는 그쪽 세계로 돌아갈 생각이 없으니까. 죽어도 여기에서 죽을 거예요."

    "하하."

    "그리고 이건 비밀인데……."

    "네?"

    "라트렐, 그 기집애가 매번 진실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교묘하게 사람 속여 먹는다니까. 거짓말을 얼마나 찰떡같이 하는지… 그거 사이비여, 사이비."

    디오레 12세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교황을 앞에 두고 신성모독이라니, 아무리 이지혁이라고는 하지만 이건 정도가 너무 심하지 않은가.

    * * *

    "그에게 어떤 것도 바라지 말고, 그의 어떤 말도 귀담아듣지 말지어다."

    라트렐이 그에게 내린 신탁을 금과옥조처럼 여기면서 디오레 12세가 입을 열었다.

    "여하튼 그 신탁 덕에 우리는 오백 년이 넘는 세월을 전쟁 준비에만 몰두했습니다."

    "오, 오백 년?"

    "예."

    "시간이 벌써 그렇게 지났어요?"

    "그렇습니다.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헐……."

    이지혁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와, 이거… 거기 있을 때는 더럽게 시간 안 가더니, 여기서는 정말 금방이네. 오백 년이라니. 하기야 12세인 걸 보니 그새 교황이 열 명은 더 죽었다는 건데."

    "……다른 이름도 있습니다. 정확히는 28대가 흘렀습니다."

    "진화 실험해도 되겠네."

    "그 결과가 이것이지요. 당신이 베라프를 지배했을 때에 비하면 모두가 더 강해졌습니다. 상대가 마왕이라 할지라도 결코 주눅 들 필요가 없을 정도로 말입니다."

    "흐음……."

    이지혁이 마수들과 마왕들을 몰아치고 있는 베라프의 군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가 깽판을 칠 때에 비하면 몇 배는 더 강해진 느낌이었다.

    하지만…….

    "거꾸로 말하면, 당신들 벌써 오백 년이나 마왕이나 나를 경험해 보지 못했다는 거네?"

    "그건 그렇습니다."

    "그러니 그렇게 말을 하겠지."

    "예?"

    이지혁이 최정훈을 보며 입을 열었다.

    "얼른 쉬어요. 시간 얼마 안 남았으니까."

    "네?"

    "베라프가 돕는다고 쉽게 처리될 일이었으면 이 고생을 하지도 않았지."

    그 말은 그대로 적중했다.

    * * *

    "물러서지 마라!"

    "모두 무찔러라!"

    그건 광기라고 불러야 할 광경이었다.

    눈앞의 마수가 사람을 통째로 집어삼키고, 마수의 앞발에 맞은 이가 하늘을 날아 구석으로 처박히는 광경을 똑똑히 보면서도 라트렐의 성기사단은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사기를 올리며 달려들었다.

    "순교!"

    "순교! 순교!"

    이지혁의 '광신도'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았다.

    최정훈이 그 광경을 보며 눈을 찌푸렸다.

    "확실히 대단하기는 한데, 뭔가 거부감이 드는 광경이네요."

    "거부감 들 것 없어요. 저게 가장 인간적인 모습이니까."

    "인간적이라구요?"

    "예."

    이지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신이 없는 세상에서도 인간을 반신으로 모시며 추앙하기도 하고, 죽은 이를 신으로 모셔서 온갖 막장 짓을 저지르는 게 지구의 인간들 아니에요?"

    "……."

    "그런 이들에 비한다면 신이 실존하는 세상에서의 신앙이라는 것은 몇 배는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거죠. 당장 우리 세상만 해도 물을 꿀로 바꾸는 이적만 선보여도 전 세계적으로 신도를 모아서 광신도 집단을 만들 수 있을 텐데,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고, 인간이 낼 수 없는 힘을 그저 믿는 것만으로 부여해 주는 세상에서 신이 어떤 가치를 가질지는 빤한 거 아닌가요?"

    듣고 보니 그 말도 맞았다.

    신의 존재가 증명되지 않은 이 세상에서도 종교는 인간에게 어마어마한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 신의 존재가 증명이 되고, 그 신이 인간에게 직접 영향을 끼친다면?

    '당연한 거겠지.'

    이상하게 보이지만, 그건 신을 믿지 않는 세상에서 살아온 최정훈의 시선이었다. 그가 베라프에서 태어났다면, 저 모습이 그리 이상하게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 신이라는 게 영 사기꾼 같은 망할 것이라 문제지."

    "크흐흐흐흠."

    참지 못한 디오레 12세가 마침내 크게 헛기침을 했다.

    "사레들렸어요? 물 줄까요? 콜라 있는데?"

    "…콜라가 뭔지 모르겠군요. 여하튼 베라프는 강해졌습니다."

    "아니, 강해진 건 아는데……."

    이지혁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게 그렇게 의미가 없다니까 그러네."

    콰아아아아앙!

    이지혁의 말에 동조하듯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디오레 12세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마수나 마족을 상대로야 선전할 수 있겠죠. 그런데 이 동네에는 마왕이 떼거리로 내려와 있거든. 시간을 끄는 정도라면 모르지만, 그 공격력으로 저놈들을 상대할 수는 없을 거예요."

    * * *

    "이, 이게?"

    선두에 서 있던 기사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것은 성전이다.

    그들은 이 멀고 먼 이계에 뼈를 묻을 각오로 게이트를 넘었다. 그들이 얼마만 한 각오로 이 세계로 왔는지 평범한 이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 어떤 것을 본다 해도 굳건한 그들의 신앙은 흔들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오늘 알 수 있었다.

    신앙이 흔들리는 이유는, 신앙으로 넘을 수 없는 장애물을 만났기 때문이 아니다.

    절대적이라고 믿어온 신과 대등한 이를 보는 순간, 신의 존재에 대한 의문을 느끼게 된다.

    그러한 존재가 바로 마왕이었다.

    "크하하하핫!"

    하늘에서 내리꽂힌 마왕이 손을 휘저을 때마다 수십의 기사들이 말 그대로 분쇄된다.

    그건 '죽는다'라는 말로 표현하기는 부족했다.

    마치 거품으로 이루어진 병사들을 광포한 바람이 휩쓸어 버리듯이 마왕의 손길이 닿는 곳은 피육으로 만들어진 어떤 것도 버텨내지 못했다.

    강인한 갑주로 전신을 감싸고, 웅대한 신성력으로 전신을 두른 성기사들마저 단순한 힘, 폭력 앞에 스러져 갔다.

    "라트렐이시여!"

    신앙의 시험에 직면한 기사가 고함을 지르며 마왕에게로 돌진했다.

    "순……."

    "큭큭큭."

    마왕이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움켜잡았다. 그러고는 그도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는 익숙한 대륙어로 속삭였다.

    "네가 지금 이렇게 죽어가는데, 너의 신은 어디에 있지?"

    콰드드득.

    대답은 할 수 없었다.

    머리가 부서진 이는 말을 할 수 없으니까.

    마왕은 손에 묻은 피와 뇌수를 핥으며 말했다.

    "너희는 너무 오랫동안 우리를 잊고 지냈군. 굳이 찾으러 갈 것도 없이 스스로 죽으러 온 것은 칭찬해 주지. 수고를 덜었으니 말이야."

    "사악한 악마여!"

    드란의 주교가 소리쳤다.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다! 너희의 존재를 알고도 찾아온 우리다! 이제 우리가 너에게 신의 철퇴를 내릴 것이다. 저 악마를 물리쳐라!"

    주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하늘이 검게 물들었다.

    "재미난 짓을 하는군."

    마법이 아니었다.

    끝도 없이 쏘아 올린 화살의 비가 태양을 가려 버린 것이다. 엘프들이 쏘아 올린 화살은 한 발, 한 발 마나를 잔뜩 머금고 마수와 마왕들에게로 쏟아져 내렸다.

    콰득! 콰드득!

    화살이 마수들의 육체를 파고든다. 하지만 그 어떤 화살도 마왕의 육체에 손상을 입히지는 못했다.

    "돌격하라!"

    신관들의 축복이 기사들의 육체를 감쌌다.

    황홀하기까지 한 충만함을 느끼며 기사들이 고함을 질렀다.

    "죽음으로 라트렐을 수호하라!"

    "죽음으로!"

    광기를 머금고 달려드는 기사들을 보며 마왕들이 눈을 빛냈다.

    "베라프 놈들은 싸우는 맛이 있다니까. 어떻게든 거리를 벌리려고 하는 이쪽 놈들과는 다르게 말이야."

    "그리고 어리석지."

    "그건 부정할 수 없겠군."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은 마왕이 양손을 들어 올렸다.

    "그럼 저놈들이 잊은 절망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해줘 볼까?"

    마왕의 손에서 피어오른 마나가 빙글빙글 회전하기 시작했다.

    콰아아아아!

    그것도 잠시. 이내 폭풍처럼 피어오른 마나가 허공으로 치솟아 오르더니, 마치 유성처럼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검은 유성의 비가 세상을 검게 물들이며 바닥으로, 또 바닥으로 낙하하기 시작했다.

    "아……."

    하늘을 뒤덮으며 떨어지는 검은 유성을 본 이들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본 이지혁이 혀를 찼다.

    "너무 편히 지냈구만."

    과거에는 간간이 마왕의 화신이 베라프를 침공하곤 했다. 완벽히 차원을 넘지 못해서 본래의 힘도 발휘하지 못하는 마왕을 잡기 위해서 용족과 인류, 거기에 유사 인류까지 힘을 합쳐야 했다.

    마왕이란 그런 존재니까.

    누구보다 마왕의 두려움을 잘 알아야 할 베라프 인들이 마왕을 잊었다면, 그 대가를 치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콰아아앙!

    "크아아아악!"

    "사, 살려!"

    콰아앙!

    떨어져 내리는 유성은 자비가 없었다.

    차라리 유성이라면 그 피해라도 적었겠지만, 하늘에서 떨어지는 마나의 탄은 바닥에 추락하는 순간, 주변을 휩쓸며 폭발했다. 그 가공할 폭발에 휩쓸린 이들은 시체조차 제대로 남기지 못하고 죽어갔다.

    "신관! 신과아아안!"

    회복 마법이 쏟아졌지만, 원래의 형태를 거의 잃어버린 채 죽어가는 이들에게 회복 마법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쯧."

    이지혁이 혀를 찼다.

    이건 말로 한다고 해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디오레 12세의 반응을 보아하니 쓸데없는 자신감에 차 있는 모양인데, 한 번 제대로 당해봐야 정신을 차릴 것이다.

    게다가…….

    "내 말을 들을 리가 없지."

    이지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리 디오레 12세의 반응이 과거 디오레 1세처럼 발작적이지는 않다고 해도, 베라프의 입장에서 이지혁은 마왕과 그리 다를 것도 없는 존재였다.

    아니, 따져 보자면 베라프 한정으로는 마왕보다 더 끔찍한 존재가 이지혁이었다.

    그런 이지혁이 경고를 해준다고 해서 저들이 들은 척이나 하겠는가.

    "다 당해봐야 아는 거지."

    "저건 대체 무슨 마법입니까?"

    디오레 12세의 반응에 이지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헛똑똑이들이 되었네."

    "우리는 모든 것을 연구했습니다. 신의 뜻에 반하는 이들과 싸우기 위해 이종족과 손을 잡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모든 것을 준비해 왔단 말입니다. 하지만 저런 것은 듣도 보도 못했습니다. 어찌……."

    "모든 것을 준비했다고?"

    이지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내가 보기에는 그냥 소꿉장난이나 한 것 같은데? 너희끼리 강해지기만 하면 다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나? 아니지. 적을 알지 못하면서 대체 뭘 연구했다는 거지?"

    "하나 이미 마왕이 베라프에 강림한 지가 천 년이나 지났습니다. 경험한 자도 없고, 자료가 있던 곳은 모두 불타 없어졌는데, 저희가 뭘 어찌 알고 준비를 하란 말입니까?"

    "자료는 왜 없어졌는데? 그거 하나 제대로 보관 못해? 한심하긴."

    이지혁이 혀를 차자 지금까지 잘 견뎌오던 디오레 12세가 마침내 참지 못하고 폭발하고 말았다.

    "당신이 오백 년 전에 모두 불태워 버리지 않았습니까! 문명 자체를 반파해 버렸죠! 그 와중에 휩쓸려 사라진 역사와 사료가 얼마나 많은 줄 아십니까?"

    주변의 시선이 이지혁에게로 꽂혔다.

    "뭐! 뭐! 내가 알았나? 모르면 그럴 수도 있지!"

    "적반하장."

    이지혁이 슬쩍 고개를 돌려 버렸다. 이건 그조차도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대책은요?"

    "응?"

    디오레 12세의 말에 이지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한테 지금 묻는 거냐?"

    "그대가 아니고는 저들을 상대하는 방법을 아는 이들이 없지 않습니까."

    "음, 그건 그렇지."

    디오레 12세가 다급하게 이지혁을 재촉했다.

    "그러니 방법을 말해주십시오. 저들을 어찌 상대해야 합니까?"

    "내 생각을 그냥 말하면 되는 건가?"

    "예!"

    이지혁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언제나 정직한 그답게 있는 그대로의 대답을 해주었다.

    "답 없는데?"

    "……."

    "막말로 너희 전력으로 쟤들을 상대하겠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는 말이 희망적으로 들릴 정도야. 계란이야 얼리면 단단해지기라도 하지, 너희는… 음, 얼리면 죽고, 단련시키다 보면 강해지기 전에 죽고… 여하튼 죽지."

    '뭐 이런 또라이 같은 놈이 다 있지?'

    세상에 전해지던 이지혁에 대한 악명이 결코 과장되지 않았다는 것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그, 그럼 방법이 없는 겁니까?"

    "방법이라니?"

    "뭘 듣는 겁니까! 저들을 상대할 방법을 물었잖습니까! 우리는 도저히 저들을 막아낼 수 없다면서요."

    "그렇지."

    "그럼 이걸로 끝장이냐고 묻고 있는 겁니다."

    "아닌데?"

    "예?"

    이지혁이 피식 웃었다.

    "너희 전 베라프가 신탁을 받고 이쪽을 지원하는 중이었다면서?"

    "그렇습니다."

    "그럼 방법이 있지."

    디오레 12세의 얼굴이 결연해졌다. 마왕의 위력은 그에게 많은 것을 내려놓게 만들었다. 단 한 번의 공격이지만, 그걸로도 견적서는 확실하게 나왔다.

    이대로는 절대 이길 수 없다.

    "그 방법을 말씀해 주십시오."

    "근데 그게 너랑은 별 상관이 없어. 네가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예?"

    이지혁이 기지개를 쫙 켜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베라프의 진짜 전력은 너희가 아니잖아. 이제 본대가 오고 있겠지."

    이지혁의 시선이 게이트로 향했다.

    아직 닫히지 않은 게이트를 보며 이지혁이 이죽거렸다.

    "적일 때는 정말 엿같이 짜증나는 것들이 이편에서 싸워준다면 나야 땡큐지."

    곧 게이트 안에서 거대한 포효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 * *

    최정훈의 등골을 타고 소름이 돋아났다.

    '이, 이건?'

    귓가로 낮은 저음의 하울링이 들려오는 순간, 그의 육체가 그 힘에 반응하고 있는 것이다.

    최정훈이 급히 고개를 돌려서 게이트를 바라보았다. 새하얀 빛으로 빛나는 게이트 안으로 붉은빛의 그림자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드래곤?"

    모습을 드러낸 것은 드래곤이었다.

    20m는 훌쩍 넘어 보이는 거대한 동체와 반짝이는 붉은 비늘, 그리고 머리 위로 돋아난 커다란 두 개의 뿔.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입을 쩌억 벌리게 만드는, 위엄 넘치는 모습이었다.

    "드래곤이라니……."

    왜 잊고 있었을까.

    아펠드리체의 존재를 아는데, 왜 베라프에서 올 지원군이 이게 전부라고 생각했을까?

    유사 인류라는 개념에 너무 함몰되어 있었다.

    "도마뱀들이 시끄럽게……."

    위연호가 귀를 후비적후비적 팠다.

    "…거, 이 상황에서 참……."

    "내가 뭐, 못할 말 했나요?"

    최정훈이 낮게 한숨을 쉬었다. 나름 감동을 받고 있었는데 말이다.

    '포스가 남다르긴 하네.'

    물론 마왕들이 저 드래곤보다 약할 리는 없다. 아무리 드래곤이 강인한 생명체이고, 베라프에서는 끝판왕급으로 강한 존재들이기는 하지만, 마왕들은 그 드래곤을 학살할 만한 능력을 갖추었다는 것을 모를 최정훈이 아니었다.

    다만, 뭐라 해야 할까?

    강인함과 별개로 보이는 것에 대한 경탄이라고 해야 하나?

    기껏해야 2~3m 크기에 불과한 마족들에 비해서 지상에 도저히 존재할 수 없는 크기의 생명체가 하늘을 날아다니는 모습은 그 자체로 경이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과거 좀비 드래곤 사태 때 목격한 드래곤 역시 거대한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앙상한 뼈다귀가 날아다니는 모습과 활활 타오르는 붉은 화염 같은 레드 드래곤이 하늘을 유영하는 모습은 확실히 그 차이가 컸다.

    "저들은 자신의 본모습으로 올 수 있는 건가요? 아펠드리체 님은 그러지 못했잖아요?"

    "차원의 벽이 깨졌으니까. 마왕 놈들이 부숴놓은 차원의 벽을 통하면 얼마든지 올 수 있지. 그리고 드래곤 하나가 여는 게이트와 라트렐이 개입해서 여는 게이트의 차이도 크고. 음……."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것 같은데…….'

    차원의 벽이 깨졌다고는 하나, 그것이 베라프의 이곳이 연결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세상에는 수많은 차원이 있고, 그 차원들은 각각의 통로로 이어져 있으니까.

    마계와의 문이 열렸다고 해서 다른 차원의 존재들도 제멋대로 드나들 수 있다면, 이곳은 이미 각 차원의 각축장이 되었을 것이다.

    "아펠드리체가 뭔가 했겠지."

    이지혁은 고개를 휘휘 저어버렸다.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하지 않다. 차원의 문이 어떻게 열렸는가보다는 저들이 지원을 왔다는 것이 중요했다.

    게이트 안에서 드래곤들이 속속들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이내 하늘이 유영하는 드래곤으로 가득 차버렸다.

    그들이 하늘을 날아다니자 거대한 그늘이 만들어져 세상이 어두워졌을 정도다.

    마지막으로 게이트 안에서 등장한 이는 드래곤이 아니라 인간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금발의 여인이었다.

    "아펠드리체 님!"

    최정훈이 반가움을 담아 소리쳤다.

    아펠드리체가 이쪽을 슬쩍 바라보더니, 텔레포트를 이용해 이지혁의 바로 앞으로 몸을 옮겼다.

    "다녀왔어요."

    황금빛의 풍요로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부드럽게 미소를 짓는 아펠드리체의 모습은 최정훈조차 순간적으로 넋을 잃게 만들 정도로 아름다웠다.

    "뭐한 거야?"

    하지만 이지혁의 목소리는 심드렁하기 짝이 없었다.

    '저 심장까지 돌로 만들어진 인간 같으니라고.'

    아펠드리체의 미소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는 극명하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자신조차도 가슴이 떨릴 정도인데, 저걸 저리 심드렁하게 받다니.

    너무 오래 살아서 연애 세포가 퇴화한 것이 틀림없었다.

    "모두를 설득하러 갔어요."

    "설득?"

    "예. 침공은 분명 예정되어 있으니까요. 이 세계가 무너지고 나면 베라프가 다음 목표가 될 테니, 그전에 전력을 구성해서 이 세계를 지원하는 것이 낫다고 설득하려 했죠."

    "그 말을 들어줄 놈이 있던가?"

    "없었죠."

    아펠드리체가 상큼하게 말했다.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더군요. 드래곤도, 인간도."

    "그야 그렇겠지."

    이지혁만 하더라도 누군가가 지금 듣도 보도 못한 세계가 마계로부터 침공받고 있으니 거기를 도우러 가자는 말을 한다면 중지를 치켜올렸을 것이다.

    "그런데 용케 끌고 왔네?"

    "제가 한 게 아니에요."

    "그럼?"

    아펠드리체가 신심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라트렐 님께서 이미 준비를 하고 계셨어요. 그분은 이 세계를 반드시 구원해야 한다고 하셨죠. 다른 주신들께서도 같은 신탁을 내리셨어요. 세계의 명운을 걸고 이 세계로 원정을 떠나야 한다고. 그 후로는 일사천리였죠."

    "이해를 못하겠네."

    이지혁이 아는 라트렐은 그리 자비로운 신이 아니었다. 그가 보기에 라트렐의 애정은 베라프 인들을 향해 국한되어 있다. 그 외 세계의 피조물은 베라프의 먼지로도 취급하지 않는 것이 라트렐이다.

    그런 라트렐의 방식 덕분에 가장 피해를 본 이가 바로 이지혁이 아닌가.

    "우리 같은 이들이 어찌 신의 뜻을 짐작할 수 있겠어요."

    "아니. 너희 신들은 그리 전지전능하지 않다니까."

    이지혁이 혀를 찼다.

    "애초에 신이라면 좀 빠와가 있어야지. 물리적인 개입을 못하고, 그저 신탁이나 내리는 것들이 무슨 신이라고."

    "그렇다 해도 피조물들에 비하면 전능하시죠."

    "그냥 잡귀지, 잡귀."

    이지혁이 손을 휘휘 저었다.

    그 모습을 보며 아펠드리체가 슬쩍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라트렐에 대한 묵은 감정 때문에 솔직하게 고맙다고 하지 못하는 이지혁의 모습이 조금은 귀엽게 느껴졌다.

    "다행히 잘 버텼네요."

    "잘이라……."

    이지혁이 허리를 두드렸다.

    나중에 합류한 이들이 보기에는 이게 잘 버틴 모습인 모양이다. 당사자들은 정말 죽을 뻔했는데.

    "뭐, 여하튼 좋아. 도마뱀들도 모이면 마왕 몇 정도는 잡을 수 있겠지."

    이지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이제는 합류할 전력은 모두 다 합류했다. 더 이상 새로운 전력의 합류를 바랄 수는 없었다.

    이곳에 모인 전력만으로 마왕들을 감당할 수 있다고 자신할 상황은 아니지만, 이제는 이들만으로 어떻게든 해야 한다.

    다만…….

    "할 만해지기는 했지."

    이제야 모든 전력이 모인 것이다.

    이지혁이 자리에서 일어나 눈을 빛냈다.

    "자, 이제 시작하자고."

    모든 것을 결정지을 마지막 전쟁을 말이다.

    * * *

    "동료라……."

    바르바체는 하늘을 가득 메운 드래곤들을 보며 혀를 찼다.

    "이지혁과 드래곤들은 철천지원수가 아니었던가?"

    "그래, 맞아."

    "그런데 동료라고?"

    "서로 이해는 할 수 있는 사이라는 거야."

    "이해?"

    "그래, 이해."

    에르카나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적어도 드래곤들은 달링이 왜 그들을 적대했는지는 알고 있거든. 타인에 대해 굳이 이해할 필요가 없는 존재가 드래곤들이지만, 이성적으로는 볼 수 있지. 그렇기에 달링을 적대하기는 하지만 달링에 대해 증오를 품고 있지는 않아. 게다가 그들이 달링을 적대해야 하는 이유는 사라졌으니, 이제 손도 잡을 수 있는 거지. 우리와는 다르게 말이야."

    "우리와는 다르다?"

    "우리에게는 목적이 없으니까."

    에르카나의 목소리는 시니컬하기 짝이 없었다.

    "우리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 인간의 마이너스 에너지가 필요하다고는 하지만, 그게 없다고 죽는 것도 아니지. 그저 쾌락을 위해서 다른 이들을 정복하고, 죽이고, 괴롭히지."

    "그게 마족 아닌가? 너는 마족이면서 그게 틀렸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아니, 틀렸다는 게 아니야. 우리는 애초에 그런 종족들이고, 그렇기에 어디에도 이해를 구할 수 없다는 거지."

    "큭큭큭, 웃기는 소리군."

    바르바체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왜 이해를 구해야 하지? 너의 사고방식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군. 마치 인간 같은 말을 하고 있잖아. 강자가 약자에게 이해를 구해야 한다고? 어째서?"

    에르카나는 입을 닫았다.

    어차피 말을 해봐야 말이 통하지 않을 것이다. 마족이란 원래 그런 존재들이니까.

    그녀 역시 잠깐의 변덕으로 이지혁과 엮이지 않았더라면 이런 생각은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직 이지혁이기에 그녀의 생각을 변하게 할 수 있었다.

    애초에 오랜 세월을 살아가는 존재들은 타인에 대한 관심이 극도로 적기 마련이고, 자신만의 생각이 확고하다.

    그 외골수적일 정도의 무심함과 자기애가 없으면 오랜 세월 동안 정신을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하니까.

    하지만 이지혁이라는 이레귤러는 그것이 불가능했다.

    그는 인간처럼 격렬하게 요동치면서도 무한에 가까운 세월을 살아야 하는 존재였다. 그렇기에 끝도 없이 고통받고, 주위의 모든 것을 자기의 색으로 물들였다.

    수많은 인간들.

    그리고 드래곤과 마족마저 말이다.

    이지혁이 없었다면 에르카나는 지금쯤 마왕들의 선두에 서서 전투를 즐기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말이야, 현실을 자꾸 잊는 모양인데……."

    바르바체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깟 드래곤들이 뭘 어쨌다는 거지? 저 정도의 전력으로 우리에게 대항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지금까지도 계속 그리 생각했잖아?"

    "…뭐?"

    "이 세계로 마족을 보낼 때도, 마왕을 보낼 때도, 그리고 결국 너희가 스팟을 열었을 때도 그리 생각했잖아. 이 정도만으로도 저들은 막을 수 없다. 이제 이 세계는 끝이 날 것이다."

    에르카나가 입가에 비웃음을 담았다.

    "하지만 아니었지. 달링은 항상 불리하고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뒤집어왔어. 이번에도 딱히 달라 보이지는 않는데?"

    "흐음……."

    바르바체가 가만히 턱을 긁었다.

    "더 이상 말이란 건 의미가 없군. 이제 증명하는 수밖에. 네가 옳은지, 아니면 내가 옳은지."

    "그렇겠지."

    바르바체가 가만히 하늘에 떠 있는 드래곤들을 보다가 소리쳤다.

    "머리 위를 지배당하는 건 그리 기분 좋은 일이 아니겠지!"

    "큭큭큭큭."

    그 말에 호응하듯 마왕들이 모인 곳에서 웃음과 신음이 흘러나왔다.

    "기다릴 만큼 기다렸고, 놀 만큼 놀았다. 그럼 이제는 마무리를 지을 시간이지."

    그리고 그 순간,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뭘 들어주고 있어! 처 갈겨!"

    마수와 마왕으로 이루어진 군단.

    인류와 유사 인류, 그리고 드래곤으로 이루어진 군단.

    그 두 군단을 사이에 두고 이지혁과 바르바체의 시선이 서로 얽혀들었다.

    "흐음……."

    바르바체가 흥미롭다는 듯이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저 불굴의 의지는 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건지 모르겠군.'

    다른 이들이면 몰라도 그의 힘과 마왕들의 힘을 제대로 직시하고 있는 이지혁이라면, 이 상황이 결코 희망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지혁의 눈에는 한 점 의혹도 없었다.

    결국에는 자신이 승리할 것이라는 자신감이 가득한 그 눈을 보고 있으려니, 저 눈빛을 절망으로 물들이고 싶다는 가학적인 충동이 일었다.

    "이 세계에 종말을 고해라!"

    "처 죽여 버려!"

    두 개의 군단이 서로를 향해 그 이를 드러내고 전력으로 상대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갖춘 마지막 싸움이 시작되고 있었다.

    * * *

    첫 포문을 연 것은 드래곤들이었다.

    그르르르르르.

    고개를 한껏 뒤로 젖힌 드래곤들의 입안에서 용암이 들끓는 듯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런 후, 거대한 입을 쫘악 벌리자 그 안에서 눈부신 섬광과 함께 거대한 불꽃의 폭풍이 마수들을 향해 쏘아졌다.

    "브레스?"

    최정훈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말로만 듣던 드래곤의 브레스가 그의 눈앞에서 뿜어지고 있었다.

    화염과 얼음, 빛과 산성.

    각 종족의 특성에 따른 브레스들이 마치 바닥으로 작렬하는 빛의 기둥과도 같은 모양세로 마수들을 덮쳤다.

    비명조차 흘러나오지 않았다.

    불꽃의 브레스에 휩싸인 마수들은 순식간에 새하얀 재가 되어버렸고, 얼음의 브레스에 맞은 마수들은 그 자리에서 하얀 동상이 되어버렸다.

    산은 마수들을 녹였고, 빛의 브레스는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며 주변을 휩쓸었다.

    가공할 위력.

    왜 이지혁이 드래곤들이 진정한 베라프의 전력이라고 했는지 이해할 수 있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베라프의 다른 이들도 가만 두고 보고 있지만은 않았다.

    수천 년의 세월을 드래곤과 싸우고, 마족과 싸우며 살아온 이들의 투지는 현대를 살아가는 최정훈이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강대하고 일관적이었다.

    "달려라!"

    드란의 기사단이 마수들의 배후를 치고 들어갔다. 말이 내뿜는 거친 숨소리와 소리 지르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뒤섞여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지켜보고 있는 최정훈조차 가슴이 타오르고 절로 몸이 들썩이는 느낌이었다.

    "장난 아니네."

    불에 반쯤 녹아든 마수가 그 큰 입을 쩌억 벌려 달려드는 기사를 그대로 물어뜯는다.

    마수의 이빨이 갑주를 뚫고 내장까지 닿은 것이 눈으로도 빤히 보이는데, 기사는 허공에 들려진 채로 검을 휘둘러 마수의 눈을 후벼 판다.

    오로지 상대를 죽이기 위해서 증오를 불태우고, 적의를 곤두세운다.

    최정훈은 그동안 자신이 알고 있던 전쟁이라는 것이 꽤나 말랑한 인식이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여기 진짜 전쟁이 있다.

    '그러니 강할 수밖에.'

    베라프의 인류들은 지금까지 저런 상대와 싸워왔을 것이다. 가장 큰 적이 짐승이나 같은 인간일 수밖에 없는 이곳의 인류와는 그 마음가짐 자체가 다른 것이다.

    최정훈이 저만한 마수들의 무리를 바로 앞에서 본다면 그 순간 전의를 상실하고 도망갈 궁리부터 했을 것이다. 하지만 저들은 바로 앞에서 자신들의 동료가 갈가리 찢겨 죽고 있는데도 전혀 물러설 기미가 없었다.

    오로지 전진.

    오로지 돌진!

    뒤를 돌아보지 않는 광전사들이 목숨을 내다 버리겠다는 듯이 마수들에게 돌진했다. 하나하나로는 마수에게 미치지 못하는 이들이지만, 똘똘 뭉친 기사들이 끊임없이 돌진하자 그 마수들이 버티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기 시작했다.

    "…강하다."

    형형색색의 기사단들이 쉬지 않고 마수들을 몰아친다. 현대 지구의 화기도 없는 베라프 인들이 어떻게 마왕과 마족의 침공을 막아내 왔는지를 알 것 같았다.

    드래곤과 인간이 함께 공격을 하기 시작하니, 이건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인간도 질 생각은 없나 본데?"

    "인간이요?"

    최정훈이 고개를 갸웃하자, 이지혁이 씨익 웃으며 위를 가리켰다.

    "이쪽의 인간도 질 생각이 없어 보인다구요."

    콰아아아앙!

    그 말과 동시에 세상이 폭염으로 뒤덮였다.

    "으아……."

    바로 앞에서 하늘을 뒤덮을 듯한 폭염이 마수들을 끝도 없이 뒤덮는다. 불꽃이 땅을 차지하려 서서히 그 세력을 넓히는 것처럼 폭발과 폭발이 이어지고 이어져 검은 연기와 새하얀 폭염이 사방을 뒤덮었다.

    그리고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들리지 않는다.

    시력을 잃을 듯한 빛이 작렬했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아니, 그저 들리지 않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모든 소리가 순간적으로 사라졌다.

    최정훈이 그 이변을 깨달은 것은 자신의 말이 귀에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이었다.

    '어?'

    의아함을 느끼는 순간, 귀가 찢어지는 듯한 통증과 함께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굉음이 그를 덮쳤다.

    웅웅거리는 귀를 틀어막으며 최정훈이 이를 꽉 깨물었다.

    '세상에…….'

    그의 눈앞에 빛의 기둥이 나타난다.

    대체 저것의 정체가 뭔지는 몰라도 미국에서 제대로 한 방을 갈긴 모양이었다.

    "…이네."

    "뭐라구요?"

    "제대로 좀 갈기라고 했더니, 너무 오버하네요. 잘못하면 이쪽도 휩쓸렸겠는데?"

    레이저 정밀 타격이 특기인 미군의 장기가 십분 발휘된 순간이었다.

    "죽었나?"

    최정훈은 자신의 입술로 새어 나온 말을 들으며 어이가 없었다.

    바랄 걸 바라야지.

    이 정도로 쓰러뜨릴 수 있는 적이었다면 지금까지 이 고생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인류의 병기에 익숙한 최정훈이 화력만으로도 입을 쩌억 벌릴 정도의 공격이 쏟아졌음에도 상대를 쓰러뜨렸다고 자신할 수 없는 것이 지금 인류가 처한 처지였다.

    마족들, 그리고 마수들은 그만큼이나 강한 존재인 것이다.

    고오오오오오!

    하늘 위에서 마나의 공명이 느껴졌다.

    마나를 느낄 수 없던 때였으면 모르되, 이제는 마나를 느낄 수 있는 최정훈이다. 그런 만큼 지금 자신들의 머리 위에서 모이고 있는 마나가 얼마나 거대하고 위협적인지 직감할 수 있었다.

    '이게 드래곤인가?'

    흑마력을 쓰는 마왕들은 얼마나 큰 힘을 사용하든 간에 그 힘을 피부로 느끼지는 못했다. 하지만 드래곤들이 모으는 마나는 눈앞에 거대한 헤일이 밀려오는 듯한 위협을 최정훈에게 선사해 주고 있었다.

    다시 한 번 드래곤들의 브레스가 폭염 속으로 작렬한다.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장관.

    장관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그 광경을 어찌 설명해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순간, 이지혁이 입을 열었다.

    "아이돌 콘서트 같네."

    "네! 아이돌 콘… 네?"

    최정훈이 멍하게 묻자 이지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형광봉 같지 않아요?"

    "……."

    아니, 물론…….

    서로 다른 색으로 물들여진 빛의 기둥이 바닥으로 내리꽂힌다는 개념에서는 형광봉과 비슷하다고 할 수는 있겠지만, 저 광경을 형광봉이라고 표현하는 게 제정신으로 할 수 있는 말인가.

    "비슷하죠?"

    은근한 강요에 최정훈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이쁘기도 하고."

    "그, 그러네요."

    그냥 인정하고 넘어가자. 저 인간이랑 말싸움을 할 시간도 없고, 그럴 의욕도 없다.

    '드래곤의 위력이 이 정도인데…….'

    저 마왕들은 그런 드래곤을 상대로도 우위를 점한다는 뜻이 아닌가.

    "이게 대체 밸런스가 어떻게 되는 거예요?"

    "넹?"

    "아무리 봐도 저 드래곤들은 인간이 상대할 수도 없을 것 같거든요. 그런데 마왕은 저 드래곤을 이긴다는 거잖아요. 그리고 그 마왕을 우리가 잡아냈다는 거고."

    "그렇죠."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립니까? 밸런스가……."

    "쯧쯧."

    이지혁이 혀를 찼다.

    "더 강한 놈이라는 개념으로 모든 걸 생각하니 그리되는 거예요. 드래곤은 방어력 자체는 마왕보다 우월해요. 그래서 능력자들의 힘으로는 그 두꺼운 비늘을 뚫을 수가 없는 거지. 하지만 마왕들은 그 비늘을 찢어발길 만한 위력을 가지고 있거든."

    "…아!"

    "반면에 인간은 드래곤보다는 공격력이 약하지만, 대인 공격력이 강하죠. 저 봐요. 쟤들은 광역 마법 펑펑 퍼붓는 거 이상은 못한다니까. 브레스도 일점 타격은 아니거든요."

    "이해를 못하겠네요."

    "굳이 이해할 필요 없어요. 이제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까."

    "네?"

    그 순간, 신관들이 양손을 모으고 기도했다.

    신앙이 미치지 않는 이 땅에서 그들은 힘의 반 이상을 잃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멀고 먼 차원의 거리를 뛰어넘어 백색으로 빛나는 차원의 문 건너편에서 그들을 수호하는 신의 의지가 느껴진다.

    그렇다면 두려울 것이 없었다.

    "라트렐이여!"

    신성이 하늘을 뒤덮는다.

    백색으로 빛나는 라트렐의 광휘(光輝)가 질주하는 기사들의 육체로 스며들었다. 축복이 이어진다. 상처 입은 육체에 새살이 돋아나고, 흐트러진 정신이 맑게 깨어난다.

    그리고 인간의 정신 근간을 일깨우는 신앙의 힘이 공포를 잊게 만들었다.

    "순교오오오오!"

    누군가의 입에서부터 나왔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 언어는 이내 베라프의 인간들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모두가 순교를 외치며 눈을 까뒤집고 앞으로 달려들었다.

    "쏴라!"

    돌진하는 기사단 앞으로 화살의 비가 쏟아진다. 엘프들이 쉬지 않고 활시위를 당겼다.

    마나를 머금어 새파랗게 빛나는 화살들이 마치 비가 내리는 것처럼 아직 가라앉지 않은 흙먼지들 속으로 쏟아졌다. 얼마나 화살이 수도 없이 쏟아지는지, 정말 소나기가 쏟아지는 것처럼 흙먼지가 일순 가라앉을 정도였다.

    '어마어마하군.'

    최정훈은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원거리 공격은 이쪽이 특기라는 듯이 화살이 쏟아지는 와중에서도 M-3의 포격이 작렬했다.

    폭발이 터지고 그 포화 속을 화살의 비가 꿰뚫는다. 하늘에서는 미사일이 떨이지고, 폭탄이 우수수 낙하하고 있었다. 그리고 외곽에서는 성기사단들과 야만 용사들이 광전사처럼 달려들고 있었다.

    세상 그 어떤 이들이 이에 대항할 수 있겠는가.

    그 아무리 대단한 마왕들이라고 하더라도 두 세상의 모든 전력이 모인 이 공격을 감당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게다가 그새 정신을 차린 NDF들과 미국의 능력자들도 에테르를 퍼붓고 있지 않은가.

    아무리 마왕이라 해도 이런 공격 앞에서 살아남는 것이 가능할까?

    그런 생각이 들자 새삼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다.

    '이 인간은 대체 뭐지?'

    그러니까 전에 들은 바에 따르면, 이지혁은 저 베라프의 전력을 상대로 단독으로 승리한 적이 있다는 뜻 아닌가.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리는, 저 미친 광전사들과 드래곤들의 합작을 홀로 물리쳤다는 건데…….

    '진짜 미친놈은 여기 있었네.'

    그게 얼마나 무시무시한 일인지를 실감한 최정훈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생각해 보면 그는 단 한 번도 이지혁의 진짜 전력을 본 적이 없었다.

    이지혁은 지금 전성기의 십분지 일의 힘도 내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런 사실만으로도 인류 최종 병기라는 말을 듣기에 부족함이 없는데, 진짜 힘을 내기 시작한다면?

    '그럴 일이야 없겠지만…….'

    그게 가능했다면 인류도 이리 형편없이 밀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게 안 되니까 여기까지 온 것이지.

    쓸데없는 미련을 버린 최정훈이 눈을 빛냈다.

    '조금만 더!'

    화력은 충분하다. 아니, 남아돌 정도였다. 이만한 화력을 조금 더 퍼부을 수 있다면 마족과 마왕이 문제가 아니라 화력이 쏟아지는 곳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분자 단위로 분해해 버릴 기세였다.

    하지만 그 순간, 냉정한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들려왔다.

    "준비해요?"

    "…네?"

    이지혁의 눈은 가라앉아 있었다.

    "…저리 순순히 당할 놈들이 아니지. 이제 반격이 시작될 테니까요."

    "반격이요? 저걸 뚫고?"

    방어를 하는 것도 벅차 보이는데?

    "실감할 때가 된 거죠, 이제."

    "…뭘 말입니까?"

    이지혁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왜 저만한 전력을 지닌 베라프가 한 마리의 마왕도 강림하지 못하게 하는 데 촉각을 곤두세워 왔는지."

    최정훈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 * *

    드란의 성기사단을 이끌고 있는 노엘은 갑주 사이로 보이는 전방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굉장하군.'

    이계인들이 가지고 있는 능력은 보잘것없는 수준인 대신, 그들이 가지고 있는 기술은 베라프의 것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그 말이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노엘은 알지 못했다.

    기술이 발전해 봐야 얼마나 발전한다는 말인가.

    하지만 직접 목도한 인류의 가능성은 그의 머릿속을 완전히 헤집어놓고 있었다.

    '저 드래곤의 브레스조차 무색하게 만드는 거대한 폭발을 정녕 인간이 일으킨 것이란 말인가!'

    아무리 인간이 강해진다고 해도 하늘을 날며 브레스를 쏘아대는 드래곤을 상대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곳의 인간들은 그 가능성을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신앙조차 없는 이교도들이 어찌 이리 발전할 수 있다는 말인가.'

    신심을 가지고 진정으로 신을 따를 때, 신께서 그들이 나아갈 길을 열어준다고 믿었다. 하지만 저들은 신심이 없는 이교도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손에 넣지 못한 힘을 손에 넣지 않았는가.

    그건 오로지 저들이 이세계의 인물들이기 때문일까?

    '웃기는 소리.'

    신심 없는 자들이 이세계에 존재하기 때문에 자신들 이상의 문명과 힘을 손에 넣었다면, 신의 존재가 그들의 발전을 막고 있다는 말밖에 더 되는가.

    굳건하기 짝이 없는 그의 믿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인간이 갈 길이란 신이 밝혀주는 것이라 생각해 온 그였다. 그런데 이곳에는 신이 아닌 인간의 힘만으로 미래를 개척한 인류가 있는 것이다.

    그들이 자신들과 같은 인간이라면 시사하는 바가 있지 않을까?

    '아니, 흔들려서는 안 된다.'

    노엘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가 지금 서 있는 곳은 신심에 의혹을 가질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마왕과 마족, 그리고 마수들이 우글대는 전장의 한복판에서 무슨 생각을 한다는 말인가.

    "위대한 드란에게 목숨을 바쳐라!"

    "순교! 순교!"

    고함을 질러 사기를 북돋우면서 노엘이 이를 꽉 깨물었다. 생각은 나중이다. 지금은 눈앞에 있는 마족들을 무찌르는 것이 먼저다. 고민은 전투가 끝나고 나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가슴속을 단단히 감싸고 있던 굳건한 신앙의 벽에 금이 갔다. 그 금을 없던 것으로 만들 수는 없겠지만, 지금 당장은 보강을 해 더 이상 무너지는 것을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노엘이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장관이로군.'

    눈앞에 보이는 폭발의 연속 역시 장관이지만, 그의 등 뒤로 보이는 광경도 결코 그에 못지않았다. 각 교단을 상징하는 색으로 전신을 물들인 성기사단들이 신심을 무기로 삼고, 육체를 도구로 삼아 돌진 또 돌진하고 있었다.

    베라프에서 서로를 물어뜯던 드워프와 엘프들도 한마음으로 공격에 박차를 가하고 있고, 그 어느 세력에도 섞이지 않던 야만 용사들도 지금은 그 누구보다 든든한 아군이 되어주고 있었다.

    마음이 들끓어오른다.

    비단 가장 뒤쪽에서 끝없이 축복하며 사기를 높여주고 있는 신관의 영향만은 아닐 것이다.

    '베라프가 이처럼 한마음이 되어 싸운 적이 있었던가?'

    전 베라프의 동맹을 낳았다는 멸망의 좌 사태 이후로 베라프가 이리 똘똘 뭉친 것은 오백 년 만이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베라프 역사상 단 한 번도 없던 위기를 만들어낸 멸망의 좌조차 지금은 그들과 함께 싸우고 있다는 점이다.

    '그야말로 동맹이로군.'

    적은 강대하다.

    그 어떤 적보다 강대한 적을 상대로 모든 것을 바쳐 인류의 미래를 지켜내는 싸움이다. 신앙에 대한 의심은 접어두고, 지금은 최선을 다해 싸워야 한다.

    '하나 이 앞에 적이 존재할 수 있을 것인가?'

    단합된 베라프의 힘은 무서웠다.

    그가 만약 이 건너편에서 이들을 상대하는 입장이라고 했으면, 지금쯤 모든 것을 내려놓고 드란의 구원을 바라는 것 외에는 어떤 것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이나 지금 그들이 가진 힘은 강대하다.

    거기에 이곳의 인간들도 결코 베라프에 뒤지지 않았다.

    슁!

    짧고 강렬한 파공음이 일면서 눈앞에서 연속적인 폭발이 일어난다. 눈으로도 도저히 포착할 수 없는 무언가가 머리 위로 날아들어 전방의 마수들을 가공할 폭발의 소용돌이 안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인간은… 인간은 이토록이나 강한 것인가?"

    노엘의 가슴속에 감동과 희열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분열되어 있는 각 교단, 그리고 분열되어 있는 각 종족, 거기에 존재하는 줄도 모르던 이계의 인간들까지 모두 힘을 합치자, 무엇이든 다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그를 고양시킨다.

    "베라프를 위하여!"

    어디선가 들려온 외침!

    "인류를 위하여!"

    그리고 살아 있는 그 모든 것을 위하여.

    각 교단의 신을 되뇌던 외침이 이제는 인류와 세상을 위한 것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가 느끼고 있는 것을 다른 이들도 느끼고 있다는 뜻이다.

    "물리쳐라! 저들을!"

    노엘이 괴성을 지르며 앞으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 * *

    "흐음……."

    이지혁이 그 광경을 보며 깊이 숨을 내쉬었다.

    "…이 정도로도 안 된단 말입니까?"

    최정훈의 얼굴은 더없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이지혁에게 물은 것이지만, 그 대답을 굳이 이지혁이 할 필요는 없었다. 대신 대답해 줄 이가 있었으니까.

    "아, 이거 어렵네요."

    "음?"

    어느새 이지혁이 비운 비치 의자를 꿰차고 누운 이가 있었다. 최정훈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하는 짓이 왜 이렇게 비슷해?'

    얼굴만 다를 뿐, 형제라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불툭거리며 튀어나오려는 짜증을 애써 억누르며 최정훈이 알파에게 물었다.

    "어렵다구요?"

    "네. 쉽지가 않네요."

    "지금 굉장히 잘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렇기는 하지만……."

    알파가 폭염을 가리켰다.

    "안 보이세요?"

    "뭘 보라는 겁니까? 저 폭발?"

    "아뇨, 아뇨."

    알파가 혀를 차며 말했다.

    "폭발 안에 마왕들이 너무 멀쩡한 게 안 보이냐구요. 아… 최정훈씨에게는 안 보이려나?"

    "시비 거는 거죠?"

    "노노. 아니죠."

    알파가 어깨를 으쓱했다.

    "굉장히 화려하고 대단해 보이기는 한데, 사실 그리 효과가 있다고 할 수는 없겠네요. 마수들이야 뭐, 거의 지우개로 지우는 수준으로 없애 버리고 있기는 한데, 애초에 마수들은 그리 문제가 아니었으니까요."

    알파의 말에 최정훈이 눈을 가늘게 떴다.

    '보이는 건가?'

    흐릿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그냥 시야 자체가 폭염과 흙먼지로 가려져 도저히 안을 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닌데, 뭘 보라는 말인가.

    이 상황에서 저 안을 볼 수 있다면, 그건 시력의 문제가 아니라 투시력의 문제였다.

    "뭐가 보여요?"

    "일단 다른 건 모르겠고, 퍼붓고 퍼부어도 통하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알겠네요."

    "…안 통한다고?"

    최정훈이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지형을 바꿔 버릴 정도의 화력이 쏟아부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통하지 않는다고?

    "그럴 리가."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정확하게는 믿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이만큼의 공격이 통하지 않는다면, 대체 뭘 어떻게 상대해야 한다는 말인가.

    "그냥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보면 돼요."

    이지혁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사실 최정훈 씨가 저 입장이라면 어떻게 하겠어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텔레포트를 쓸 수 있고, 충분히 피할 수 있는 놈들이 저리 쏟아지는 화력을 그대로 받아내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지요."

    최정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지혁의 말은 틀린 게 없었다.

    워낙에 쏟아지고 있는 화력이 화려하고 강해서 거기에 매료되다 보니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한 것이다.

    마왕들이 무슨 마초도 아니고, 저 화력에 버티지 못할 것 같다면 몸을 빼버리면 그만이다.

    그런데 왜 피하지 않고 있을까?

    지금의 화력 집중은 능력자들이 마왕들을 상대할 때와는 다르다. 그때는 개체에게 집중하는 공격이었다면, 지금은 개체가 아니라 지역 자체에 화력이 쏟아지고 있었다.

    몸을 빼버리면 그만인 화력을 전신으로 받고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최정훈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이게 안 통한다고?'

    믿고 싶지 않다. 믿을 수가 없다.

    인류와 유사 인류가 모든 전력을 동원하여 퍼붓고 있는 공격이 무용지물로 돌아간다면, 대체 이 이상 무엇을 해야 한다는 말인가.

    "뭐, 물론 화력을 버틸 수는 있어도 쉽게 반격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는 하지만 말이야."

    "…그럼 된 것 아닙니까?"

    화력을 계속 퍼부어서 반격도 하지 못하게 해버리면 되지 않는가. 모든 화력을…….

    "그런데 저 안에서도 쉽게 움직일 수 있는 놈이 하나 있거든요. 별로 그리 인내심이 깊지 않은 모양인데……."

    순간, 최정훈의 머릿속으로 한 마왕의 이름이 스쳐 지나갔다.

    바르바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 능력을 보여주지 않은 마왕 중의 마왕.

    이지혁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했다.

    "정신 똑바로 차려요, 최정훈 씨."

    "……."

    "처음부터 알고 있었잖아요. 그리 쉽게 끝날 일이 아니라는 걸 말이에요. 피해 없이 이길 수 있다는 꿈 같은 건 꾸지 말아요. 이건 말 그대로 전쟁이니까. 화친도 없고, 항복도 없이… 둘 중 하나가 완전히 죽어야 끝나는 전쟁이에요."

    이지혁의 말이 새삼 섬뜩하게 들려왔다.

    '그래, 그랬지.'

    미래에 희망을 더하는 것은 지금 순간에 가장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시작하려는 모양이네."

    이지혁이 심드렁하게 말하자 최정훈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시작한다고?

    뭘?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우우우우웅!

    세상이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단순한 표현이 아니었다. 발을 딛고 있는 대지가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위아래로 격렬하게 진동했다.

    그런 후…….

    지이이잉!

    화염이 타오르는 소리 같기도 하고, 불로 지져 버리는 소리 같기도 했다.

    흙먼지 사이로 튀어나온 검은 광선이 높이 뻗어 나가 하늘을 반으로 갈라 버린다.

    "…아?"

    최정훈의 눈이 부릅떠졌다.

    검은 광선이 지나간 곳은 마치 새하얀 도화지를 검은 볼펜으로 그어버린 것처럼… 아니, 마치 칼로 도화지를 잘라내 버린 것처럼 선명하게 갈라졌다.

    동시에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크롸롸롸롸롸롸!

    거대한 선을 미처 피해내지 못한 드래곤들의 육체가 반으로 갈라졌다.

    그것은 마치 꿈과도 같은 광경이었다. 그 어떤 강철보다, 그 어떤 금속보다 단단한 드래곤의 비늘이 면도날로 그러진 종잇장처럼 깔끔하게 잘려 나간다.

    수십 마리에 달하는 드래곤들의 동체가 반으로 갈리며 선홍빛의 피가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졌다. 그와 동시에 나머지 드래곤들 역시 부유 마법을 유지하지 못하고 바닥으로 추락했다.

    "피, 피해라아아아!"

    그 거대한 동체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은 재앙이었다. 밀집해 있던 베라프의 군세가 미처 드래곤들을 모두 피해내지 못하고 그 아래에 깔렸다.

    비명과 피.

    울음과 분노.

    장중하게 울려 퍼지는 암흑의 오케스트라 속에서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집중되었다. 피어오른 흙먼지 사이로 거대한 그림자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하찮은 것들이."

    바르바체가 지금까지의 여유를 잃은 얼굴로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장난은 여기까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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