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104화 (104/118)
  • [■] 지옥이 있다면 여기겠지 [■]

    ─────

    에르카나는 굳은 얼굴로 바르바체를 바라보았다.

    "뭘 준비했다는 거지?"

    "무대."

    "무대?"

    바르바체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지혁과 우리의 질긴 인연을 마무리할 무대, 그리고 인간들을 정복하겠다는 우리의 길고 긴 염원이 이루어지는 무대. 모든 무대는 극적이어야 맛이 있는 법이지."

    "그게 여기라는 건가?"

    "그래."

    "그래서 일부러 이지혁과 다른 이들을 이곳으로 모았다고?"

    "잘 아는군. 아주 상징적인 일이지."

    "글쎄, 말만 들으면 그렇긴 한데… 그 모든 것들이 네 생각처럼 잘 돌아갈까? 이미 다섯의 마왕이 죽었다는 것을 잊지는 않았겠지?"

    "큭큭큭큭."

    바르바체가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확실히 너는 조금 이상해졌어."

    "너희 눈으로 보면 그렇겠지."

    "아니, 아니야. 정말 너는 이상해졌어. 너는 너무 많은 것을 잊어버렸거든."

    "잊어?"

    에르카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단순한 도발로 하는 말이 아니다. 바르바체는 정말 그녀를 이상하게 여기고 있었다.

    "인간과 함께 생각하고, 함께 생활하다 보니 사고방식조차 인간을 닮아버렸군. 이상한 일이야. 보통은 인간과 마족이 함께 생활을 하게 되면 인간이 마족에게 동화되는데, 너는 지고하고 강대한 정신을 가지고 있음에도 인간에게 동화되어 버렸군. 동화의 대상이 너무도 굳건한 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인가?"

    "…본론만 이야기해."

    바르바체가 손을 쫘악 폈다.

    "내가 누구지?"

    "……."

    "생각하고 말해봐라, 에르카나. 내가 누군지 말이야. 나는 시작의 마왕이자 끝의 마왕. 모든 것의 시작이자 끝이다."

    에르카나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이해가 갔나?"

    "…네게 있어 다른 마왕들의 희생 따위야 아무런 가치가 없겠지. 하지만 전력이 줄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일 텐데?"

    "전력이 줄어? 크하하하핫!"

    바르바체가 광소를 터뜨렸다.

    "그까짓 것들이 죽었다고 해서 전력이 줄었다고? 에르카나여. 너 역시 너무 오랜 세월 동안 잊었구나. 내가 누군지 말이다."

    바르바체가 가만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내가 이지혁이라는 인간을 증오하면서도 존중하는 이유는 그가 그 어떤 마왕도, 그 어떤 존재도 감히 범접할 수 없던 나에게 칼을 들이댈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것인가?"

    바르바체가 인류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무리 저항한다고 한들 달라지는 것은 없다. 내가 나설 것도 없는 일이지."

    "입만 살았군."

    "그럴지도."

    바르바체가 에르카나를 보며 말했다.

    "내 삶은 너무도 길고 지루하거든. 여흥이 생겼을 때 즐겨두지 않으면 평생을 살아가는 것은 너무도 힘든 일이지."

    "여흥이라고?"

    "그래, 여흥이지. 단순한 여흥. 그게 아니라면 인간 따위 무너뜨리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지. 예를 들어, 흐음……."

    바르바체가 가만히 인류 쪽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내가 가진 카드와 저들이 가진 카드는 너무도 다르지. 저들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 겨우 지금을 유지할 수 있지만, 나는 무엇을 해도 저들을 무너뜨릴 수 있다. 예를 들자면……."

    바르바체가 손가락을 튕겼다.

    "나뉘어 있는 힘을 한 곳으로 모으면 어떨까?"

    * * *

    "뭐, 뭐야, 저거?"

    최정훈이 기겁을 하여 뒤쪽을 돌아보았다.

    뒤쪽에서 이상한 파동이 느껴진다 싶더니, 거대한 게이트가 생겨나고 있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었다.

    등 뒤에서 생겨나는 십여 개의 게이트를 본 최정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설마!'

    지금까지 그들이 마왕을 상대할 수 있던 이유?

    그들이 오로지 힘으로 밀어붙이며 전진했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이 전략과 집중을 해온다면 인류는 절대 마왕들을 상대할 수 없었다. 가진 힘의 크기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마수들이 마왕을 상대하고 있는 이들을 노린다면 인류의 군대는 그것을 저지할 수 없었다. 그나마 고위 능력자들은 마왕을 상대하고, 군은 마수들을 막는다는 분업 체제가 돌아가고 있기에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다.

    그런데…….

    혹여 저 뒤에 열리고 있는 게이트의 정체가 최정훈이 짐작하고 있는 그것이라면, 그들은 가장 아픈 곳을 찔리게 된다.

    크아아아아아!

    카르르륵!

    그리고 불행한 예감은 항상 어긋나는 법이 없었다.

    입을 쩌억 벌린 게이트 안에서 몬스터들이 몰려나오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뒤쪽이다!"

    최정훈의 외침에 여력이 있는 이들이 뒤를 바라보았다. 활짝 열린 게이트 안에서 몰려나온 마수들이 그들을 향해 달려드는 모습.

    뒤를 본 이들의 눈에 절망이 어리기 시작했다.

    * * *

    "저게 뭐지?"

    정인수가 흔들리는 눈으로 앞을 바라보았다.

    미친 듯이 달려들던 마수들이 뒤쪽으로 물러서고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물러선다기보다는 방향을 바꾸어서 돌진한다는 것이 맞겠지만 말이다.

    "이게 무슨 상황이야?"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마수들과 전면전을 벌여온 정인수다. 마수들의 행동 패턴 정도는 웬만큼 파악이 되어 있다고 생각하는데, 지금까지 그는 단 한 번도 마수들이 물러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애당초 달려들지 않았다면 모를까, 한 번 달려들기 시작하면 결코 물러서는 법이 없던 것들이 마수가 아닌가.

    그런데 그냥 물러나는 것도 아니고, 뒤쪽으로 달려들다니.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정인수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당장 언제 무너질지 모르던 전선에서 마수들이 이탈해 준다는 것은 반길 일이지만, 저 지긋지긋한 것들이 자신들 좋은 일을 해줄 리가 없었다.

    뭔가 더 큰 것을 노리거나, 아니면 이곳보다 더 급하게 쳐야 할 곳이 있다는 뜻이었다. 마수들이 지금까지 지능적인 모습을 보여준 적도 없고, 명령을 수행하는 모습을 보여준 적도 없지만, 정인수는 직감할 수 있었다.

    이건 안 좋은 징조다.

    "사, 사령관님."

    "…일단 상부에 보고해."

    "알겠습니다."

    "그리고 상부에 물어."

    "뭘 말입니까?"

    "이지혁 씨 쪽……."

    뭔가 말을 하려던 정인수가 입을 다물고 눈을 부릅떴다.

    마수들이 물러서던 곳에 검은 무언가가 피어오른다 싶더니, 이내 커다란 게이트가 만들어졌다.

    "빌어먹을!"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직감한 정인수가 소리를 질렀다.

    "당장 상부에 연락해서 최정훈 씨에게 문제가 생겼다고 전해! 어서!"

    "예!"

    "안 돼……."

    게이트 안으로 몰려 들어가는 마수들을 보며 정인수가 절망에 휩싸였다.

    만약 저 마수들이 지금 미국으로 향하고 있는 거라면,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사태가 벌어지고 말 것이다.

    "제발."

    정인수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 * *

    크리스토퍼가 물고 있던 시가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후방에 있는 능력자들 당장 전방으로 밀어 넣어! 지금 당장!"

    "하, 하지만 그랬다가는 후방이 무너지게 됩니다! 그 뒤쪽에는 민간인들이 있단 말입니다."

    "민간인을 살리려다 인류가 멸망한다! 희생을 감수하고 전방 지원시켜!"

    "…사령관님!"

    "세상을 네 손으로 멸망시키고 싶다면 네 마음대로 하지그래?"

    "……지금 당장 지시 내리겠습니다."

    "당장!"

    "예!"

    크리스토퍼는 능력자들을 덮치고 있는 마수들을 보며 몸을 떨었다.

    '빌어먹을.'

    전략적으로 보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마수와 마왕을 동시에 막아내야 하는 인간과 다르게 마족 측은 전방을 맡고 있는 고위 능력자들만을 쓰러뜨리는 것으로 간단하게 인류를 무너뜨릴 수 있다.

    그 가능성을 충분히 알고 있으면서도 지금까지 딱히 대응책을 찾지 않은 것은 마족들이 전술이나 전략을 배제한, 오로지 힘으로만 밀어붙이는 방법을 써왔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대응책이 없다.'

    절대적인 방어력의 차이가 낳는 문제였다.

    일반 능력자들과 고위 능력자의 연합군을 구성했을 시, 일반 능력자들은 마왕들에게 전혀라고 해도 좋을 만큼 타격을 줄 수가 없다.

    하지만 마수들은 고위 능력자들의 육체를 간단하다고 해도 좋을 만큼 쉽게 찢어발길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 서로 섞여 싸우게 된다면 이쪽의 일방적인 손해였다.

    "서둘러! 뒤섞이게 되면 끝이다!"

    "예!"

    크리스토퍼가 초조한 얼굴로 전장을 바라보았다.

    "제발."

    상황이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 * *

    "크윽! 이 새끼들!"

    서아영이 양손에 불꽃을 피워 올렸다.

    파문은 순식간에 번져 갔다.

    호수 위에 얕게 얼어붙은 얼음이 작은 충격에 천천히 깨져 나가듯이 말이다.

    그 속도는 결코 빠르지 않지만, 한 번 깨져 나가기 시작한 얼음을 다시 얼릴 방법은 없었다. 등 뒤를 신경 쓰지 시작하는 순간, 앞쪽으로 집중되던 화력이 분산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건 죽음의 전조였다.

    "등 뒤 신경 쓰지 마, 이 새끼들아!"

    서아영이 소리를 지르며 앞쪽으로 불꽃을 뿜어냈다.

    등 뒤는 막는다.

    아군들이 반드시 막아줄 것이다.

    그리 믿고 앞쪽이 집중하지 못하면 마왕들을 저지할 수가 없었다.

    "앞 봐! 뒤돌아보지 마!"

    서아영은 필사적이었다.

    그녀도 알고 있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뒤쪽에 신경을 빼앗기는 순간 모두가 죽는다는 걸.

    그들의 화력은 대부분이 원거리 공격에 집중되어 있었다. 마왕들이 그들이 짠 진형으로 파고드는 순간에 화력은 급감할 것이고, 마왕들은 제멋대로 날뛰기 시작할 것이다. 동료를 같이 죽일 생각이 아니라면 공격을 할 수 없게 된다.

    심지어 동료를 죽일 각오로 공격을 퍼붓는다고 해도 동료는 확실하게 죽겠지만 마왕은 멀쩡히 살아남을 확률이 높았다. 절대 거리를 줘서는 안 된…….

    그 순간, 서아영의 눈에 이글거리는 검은 화염이 들어왔다.

    콰아아아아아!

    마왕들 쪽에서 날아든 화염이 동료들을 집어삼키고는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비명조차 없다.

    한순간에 재조차 남기지 못하고 무(無)로 화해 버린 이들의 빈자리만이 남았을 뿐이다.

    "이……."

    날아드는 에테르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마왕이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상하긴 했지.'

    마왕들이라고 해서 마나를 발출하지 못할 리가 없다.

    그럼 왜 지금까지는?

    으드드득.

    서아영이 이를 갈았다.

    "사람을 가지고 노는 게 아니야, 이 새끼들아."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처음에는 폭음 속에서 아주 희미하게 들려온다 싶은 웃음이 점점 커지더니, 이내 귀를 찢을 듯이 크게 울려오기 시작했다.

    "으!"

    서아영이 불꽃을 전방으로 마구 집어 던졌다.

    막아야 한다.

    이대로 앞뒤에서 밀리기 시작하면 끝이었다. 그들의 패배는 단순히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인류의 종말인 것이다.

    '너무 커.'

    조금 전까지 품고 있던 희망이 거짓말 같다.

    그들과 마족들 사이의 전력 차는 너무도 컸다.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몸으로는 알지 못한 그 압도적인 차이가 피부로 실감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우우우우웅.

    서아영이 떨리는 눈으로 위를 올려다보았다.

    "아, 안 돼……."

    그녀의 머리 위, 허공에 열리기 시작하는 거대한 게이트를 보며 서아영이 절망에 찬 비명을 질렀다.

    "적당히 하라고, 이 새끼들아아아아!"

    마치 악마의 입처럼 활짝 열린 게이트에서 마수들이 우수수 비처럼 떨어지기 시작했다.

    * * *

    그 광경을 뭐라 표현할 수 있을까?

    최정훈도, 서아영도 말을 잃어버렸다. 지금 당장 소리를 질러 아직 이 상황을 눈치채지 못한 이들에게 경고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입이 열리지 않았다.

    그건 마지 지옥의 현신과도 같았다.

    누구나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꺼지지 않는 지옥불이 타오르는 지옥이라든가, 간수들의 무한한 고문이 자행되는 이미지로서의 지옥이 아니다.

    하지만 지켜보는 이로 하여금 끝도 없는 절망감을 느끼게 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지옥이라는 말에 이만큼이나 어울리는 광경도 없을 것이다.

    "…제기랄."

    욕지기를 내뱉어내는 서아영의 어깨를 최정훈이 움켜잡았다.

    "정신 차려!"

    "큭!"

    서아영이 양손에 불꽃을 피워냈다.

    "머리 위! 위다!"

    최정훈이 고함을 지르자 모든 이들의 시선이 일순 위로 올라갔다.

    그런 후에 잠식해 가는 절망.

    "…이게 뭐야?"

    "아……."

    머리 위에서 몬스터들의 비가 쏟아진다.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광경에 일순 대처법을 찾아내지 못했다. 아니, 대처법이라는 것을 생각할 여력조차 없었다.

    머리가 멍해진다. 패닉이 모두를 휩쓸고 있었다.

    "으아아아아아!"

    서아영이 뿜어낸 불꽃이 마치 화염방사기처럼 하늘을 가득 뒤덮었다.

    "…와!"

    윤혁규가 그 광경을 보며 입을 벌렸다.

    "피처링 쩌네요."

    떨어져 내리던 몬스터들이 서아영이 뿜어낸 화염에 맞아 마치 불타오르는 유성 같은 모습으로 바닥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지옥이 있다면 여기겠지."

    "문제는 우리는 아직 그 지옥에서 살아남아 있다는 거야."

    최정훈의 얼굴이 더 일그러질 수 없을 만큼 일그러졌다.

    '어떻게 해야 하지?'

    그의 머리도 버벅이기 시작했다.

    앞에서는 마왕들이 밀고 들어오고, 등 뒤는 마수들이 헐떡이며 달려들고 있었다.

    날개가 없어 하늘 위로 날아 도망칠 수도 없건만, 저 마왕 놈들은 인간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한지 굳이 하늘까지 메우고 있는 것이다.

    마왕과 싸운다는 것.

    마족과 전쟁을 벌인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이제 그들은 진정으로 실감하고 있었다.

    "충격에 대비해! 쏟아진다!"

    "빌어먹을!"

    최정훈의 눈이 냉정하게 전장을 살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마수 위주로 가장 먼저 정리해!"

    "뒤쪽에서 밀려오는 놈들은요!"

    "…막아줄 거야."

    최정훈의 눈이 멀리서 미친 듯이 달려오는 아군 능력자들에게로 향했다.

    '막아줘야 해.'

    여력이 있다면 세 방향 모두 이쪽에서 막아낼 수 있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위와 앞에 집중하는 것뿐이다.

    "온다!"

    쿵! 쿠우웅! 쿵!

    하늘에서 마수들이 말 그대로 떨어졌다.

    착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전신으로 바닥에 처박히고 있었다.

    인간이었다면 바닥에 부딪친다는 감각조차 느끼지 못한 채 피떡이 되어버리겠지만, 마수들은 달랐다. 바닥에 처박힌 마수들이 하나둘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쿠우웅! 쿠웅!

    떨어진 마수들도 급하지만, 여전히 떨어지고 있는 마수들도 문제였다.

    "으아아아악!"

    "비, 비키라고!"

    마왕들의 공세에 대항하기 위해 사람들을 밀집시켜 놓은 것이 실수였다.

    추락하는 마수들의 크기는 하나하나가 코끼리보다 크다. 멀리서 떨어져 내릴 때는 실감하지 못하던 크기가 눈앞으로 다가오자 그제야 난리가 나기 시작했다.

    몸을 피하려고 해도 사람들이 너무 몰려 있어 그러기가 쉽지가 않다. 결국 피하지 못하는 이들도 있었다.

    "아아아악!"

    마수에 완전히 깔려 바로 숨이 끊긴 이들은 그나마 낫지만, 반쯤 깔려 의식이 남아 있는 이들은 마수가 자신을 짓밟는 것을 생생하게 느껴야 했다.

    쿵! 쿠웅!

    능력자들의 요격에 숨이 끊어진 채 바닥으로 추락하는 마수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바닥에 떨어지자마자 벌떡 몸을 일으켜 주변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능력자들이 마수를 상대할 때 필수적으로 필요한 '거리'를 빼앗긴 대가는 컸다.

    "살려줘!"

    "아악! 내 팔!"

    고통 어린 비명이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빌어먹을, 갈겨 버려!"

    "너, 너무 가깝다고! 되레 우리가 죽어!"

    바로 앞에 나타난 마수의 존재 탓에 공포와 패닉에 빠져 마구 공격을 남발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다급하게 하는 공격이 효과를 발휘할 리는 없고 되레 주변의 다른 이들이 그 피해를 고스란히 덮어썼다.

    "으아아아!"

    "저 새끼 막아! 뭐하는 거야!"

    "틀렸어! 완전히 맛이 갔어!"

    그리고…….

    잠깐의 혼란으로 공격이 멈춘 틈을 마왕들은 놓치지 않았다.

    "크크크큭."

    소름 돋는 웃음과 함께 마왕들이 거리를 좁혀 능력자들의 진형으로 난입했다,.

    서걱!

    살과 뼈를 단번에 끊어내는 듯 섬뜩한 소음과 함께 사방으로 피와 육체가 비산한다. 단 한 번 손을 휘두르는 것만으로 눈앞의 인간을 말 그대로 분해해 버린 마왕들이 포효하며 주변을 휩쓸어가기 시작했다.

    "죽어어엇!"

    루드라의 벼락이 떨어지고, 윤혁규의 화포가 작렬했다. 하지만 개인의 힘으로 마왕을 제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가소로운 것들."

    마왕들은 그동안 받아온 스트레스를 풀겠다는 듯 사정없이 날뛰기 시작했다.

    마왕들이 뿜어낸 검은 마나가 마치 안개처럼 자욱하게 주변을 덮치기 시작했다. 마왕과 마수들이 거리를 좁혀 날뛰기 시작하자 능력자들이 추풍낙엽처럼 나가떨어졌다.

    "아, 안 돼."

    최정훈이 절망 어린 눈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거리라는 단 하나의 반드시 지켜야 할 이점을 놓친 대가는 컸다.

    피가 하늘로 솟구치곤 잘린 팔다리가 튕겨 나간다. 곳곳에서 마치 양 떼 사이에 맹수가 난입한 것 같은 수라장이 벌어졌다.

    '끝이다.'

    이제 저 뒤쪽에서 달려들고 있는 마수들까지 합류한다면, 이 자리의 모든 이들이 죽는 것은 얼마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것으로 인류는 끝이었다.

    아무리 머리를 짜내도 방법이 없다.

    "최정훈 씨! 위험해요!"

    "아!"

    고개를 돌리자 마수가 그 거대한 손으로 최정훈을 내려치고 있었다. 순간, 죽음을 직감한 최정훈이 눈을 부릅떴다.

    "아오!"

    그와 동시에 김다현이 벼락처럼 날아들며 최정훈을 덮쳐 몸을 날렸다.

    콰아앙!

    마수가 손을 내려친 곳이 움푹 파이면서 지진을 일으켰다.

    "뭐하는 거예요! 정신 안 차려요!"

    "…미안하다."

    "상황 엿 같은 거 누가 몰라요! 그럴 때일수록 정신 차려야 할 거 아니에요."

    "그래."

    최정훈이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머릿속에 떠오르는 부정적인 생각을 완전히 걷어낼 수는 없었다.

    정신을 차린다고?

    그런다고 뭐가 달라진단 말인가.

    죽음에 이르는 시간을 조금 늘이는 것 말고는 달라질 게 없었다. 이미 승부는 끝났다. 바르바체가 살짝 변덕을 부린 것만으로도 처참하게 무너질 만큼 전력의 차는 컸던 것이다.

    '끝났어.'

    비관과는 거리가 먼 최정훈이지만, 지금 상황은 그 말 말고는 달리 표현할 수가 없었다.

    다른 이들 역시 그 상황을 직감하고 있는 모양이다. 날뛰는 마수와 마왕들을 바라보는 이들의 시선에는 절망이 담겨 있었다.

    잿빛으로 죽어 있는 눈으로 이제 곧 다가올 자신들의 마지막을 기다리는 것처럼 말이다.

    "아……."

    그 순간.

    우우우우우웅!

    세상이 진동하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바닥이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어?"

    최정훈이 놀라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마법진? 언제?'

    바닥에 새겨진 커다란 문양들이 새하얀 빛을 내뿜는다. 최정훈이 알기로 이만한 마력을 바탕으로 한 마법을 쓸 수 있는 이는 오직 하나밖에 없었다.

    급격하게 돌아간 시선이 눈부신 빛을 내뿜고 있는 이지혁을 포착했다.

    "……."

    저 사람을 보며 이런 생각을 하게 될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눈을 감은 채 새하얀 빛을 뿜어내고 있는 이지혁의 모습은 뭔가 성스러움마저 느껴졌다.

    이지혁의 양손이 확 벌어진다.

    최정훈조차도 확실히 느낄 수 있는 마나의 파동이 그를 중심으로 돌기 시작했다.

    '하지만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거지?'

    모두가 뒤섞여 버린 상황에서 무슨 마법을 써야 이 난국을 타개할 수 있겠는가.

    이대로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을 같이 날려 버릴 생각은 아닐 것이다.

    그게 가능했다면 접근하기 전에 마수들부터 처리했겠지.

    '아무리 이지혁이라고 하더라도…….'

    지금에 와서 버프를 거는 것은 딱히 의미가 없다. 여기서 조금 더 강해진다고 해서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것이다.

    이지혁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는 최정훈마저도 대처 여부가 의심할 정도로 지금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화아아악!

    그 순간, 바닥에서 뿜어져 나온 빛이 솟아올라 능력자들의 몸을 감쌌다.

    '어?'

    최정훈은 자신의 시야가 완전히 가려지는 것을 느꼈다. 눈부신 빛이 그의 시아를 앗아가 버린 것이다. 몸이 부웅 뜨는 것 같은 기이한 느낌이 육체를 감싼다 싶더니, 이내 빛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어?"

    최정훈이 놀라 주변을 돌아보았다.

    "여긴?"

    위치가 바뀌어 있다.

    그리 멀리 떨어진 것은 아니다. 불과 1㎞?

    조금 전 그들이 있던 자리가 분명하게 눈에 보일 정도로 짧은 거리를 이동했다.

    하지만 그 효과는 지대했다.

    몬스터들을 모두 남겨두고 이동한 덕분에 거리를 다시 확보할 수 있었다. 동시에 진형을 다시 정비할 수 있는 기회도 생겼다.

    "…쩐다."

    최정훈이 놀란 얼굴로 이지혁을 돌아보았다.

    게임에서야 간단한 일이겠지만, 이건 엄연한 현실이다. 아군과 적군을 구분해 주는 표식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그 뒤엉켜 있던 곳에서 아군만을 모조리 골라 텔레포트 시킨다는 게 상식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마법에 대한 이해도가 높지 않은 최정훈이 생각해도 이건 기적적인 일이었다.

    "허어억!"

    당연하게도 그 대가 역시 큰 모양이었다.

    이지혁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는 거친 숨을 토해내고 있었다.

    과거 마왕을 상대하면서 전신이 걸레짝이 되었어도 아픈 티를 내지 않던 이지혁이 저리 고통스러워하다니.

    '아니, 감상에 젖을 시간이 없어.'

    최정훈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여기서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다면 다시 같은 일이 반복될 것이다.

    이지혁이 만들어준 마지막 기회를 이대로 날려 버릴 수는 없었다.

    "진형 만들어요! 다시!"

    "예!"

    다른 이들도 지금의 상황이 기회라는 것을 알아챈 모양이다. 어떻게 이곳으로 이동해 왔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도 있지만, 지금은 한가하게 설명을 주고받을 때가 아니었다.

    '하지만 절망적인 건 사실이군.'

    그새 능력자들의 수가 무척 줄어들어 있었다.

    실제로 하늘에서 마수들이 떨어져 날뛴 것은 불과 1분도 되지 않는 시간이지만, 그새 몇 백이 죽어 나갔다. 저쪽은 딱히 피해를 입은 것도 없는데, 이쪽의 전력만 10% 이상 줄어버린 것이다.

    놈들이 다시 한 번 같은 식으로 공격해 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최정훈의 가슴에 절망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전략도, 전술도 최소한 힘이 어느 정도는 상대가 될 때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압도적인 전력 차 앞에서는 어떤 계략도 무의미했다.

    "놀랍군. 역시 이지혁인가?"

    그때,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최정훈의 고개를 천천히 돌아간다.

    바르바체.

    2m가 넘는 신장을 가진 거인이 바로 앞에서 최정훈에게는 눈도 주지 않은 채 이지혁을 바라보고 있었다.

    * * *

    "대단위 전송 마법이라니, 듣도 보도 못한 짓을 해내는군."

    바르바체의 얼굴에는 정말 경악이 떠올라 있었다.

    이건 파괴력의 문제가 아니었다. 마왕들조차 할 수 없는 일을 인간인 이지혁이 해낸 것이다.

    인간으로서 결코 이를 수 없는 경지에 오른 이지혁에 대한 경의와 시샘 반으로 그 마력의 운용만큼은 마왕조차 초월했다 평하기는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파괴력의 문제였다.

    무한의 마력을 사용할 수 있던 이지혁은 마왕들 이상으로 제약 없이 마력을 운용할 수 있었고, 그 대가로 마왕들 이상의 파괴력을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건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바르바체조차 저렇게 아군과 적군이 뒤섞여 있는 곳에서 아군만을 골라서 대단위로 전송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공간에 대한 이해도만은 역사상 최강이라고 하더니.'

    이지혁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 바르바체조차 경악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굉장하다고밖에 할 수 없군.'

    바르바체는 힘겹게 헐떡이고 있는 이지혁을 보았다.

    저 작은 생물이 이만한 일을 해낸 것이다.

    심지어 지금의 그는 무한히 사용할 수 있는 마력도, 불멸의 힘도 모두 잃어버린 뒤였다.

    그저 인간의 존재로 이러한 이적을 선보인 것이다.

    그러니 어찌 인정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바르바체가 신음을 흘렸다.

    "그대가 마력을 잃지 않았더라면 나의 상대로 부족함이 없었을 터인데, 안타까운 일이로군."

    최정훈은 눈앞에 있는 마왕의 기세에 압도되고 있었다.

    '농담이 아냐.'

    그저 강한 수준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마왕을 한둘 보아온 것도 아니다. 격전을 벌이기도 했고, 그들 중 일부를 때려잡기도 했다.

    그럼에도 마왕은 여전히 두려운 존재였다. 멀리서 그저 마주 보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려올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바르바체는 그 격이 달랐다.

    그저 두렵고 강하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상위의 존재.

    인간으로서는 결코 느껴본 적 없던, 그런 느낌이다.

    모든 면에서 자신보다 우월한 생물이 눈앞에 있는 것이다.

    그 압도적인 존재감 앞에 최정훈은 정신을 잃지 않는 것만으로도 모든 힘을 다 소진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어쩔 거지?"

    바르바체의 목소리에 조롱이 어렸다.

    이지혁이 고개를 들었다.

    "거… 새끼, 참 말 많네."

    "큭큭큭."

    "마왕이라는 놈이 뭐 그리 입이 싸? 그렇게 나불대지 않으면 안 되는 거냐?"

    최정훈의 정신이 맑게 깨어났다.

    '자아비판인가?'

    이지혁도 마왕이고, 입이 싼 걸로 따지면 이지혁이 최고일 텐데 말이다.

    이지혁에 비한다면 바르바체는 과묵하기 이를 데 없는 남자였다. 그런데 그런 이지혁이 저리 말하고 있으니 황당할 수밖에.

    "안타까운 일이다. 무척이나 말이야."

    "…뭐가?"

    바르바체는 무척이나 아쉽다는 투로 말했다.

    "지금에 와서야 내가 그대를 인정하게 되었다는 것이 너무도 아쉬운 일이다. 이 기분, 이 마음을 네가 힘을 잃기 전에 느꼈다면 너와 승부를 겨루었을 것을."

    "지랄한다."

    이지혁이 그 자리에 주저앉더니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게 아니라 내가 힘을 잃었으니 인정하는 척하는 거겠지. 내가 힘이 있었을 때는 도망가기 바빴고 말이야? 안 그래?"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건 너도 알고 있을 텐데?"

    "내가 알긴 뭘 알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지혁 역시 자신이 힘을 갖고 있을 때도 바르바체는 결코 자신에게 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지혁이 마지막까지 마계에서 깽판을 쳤다면 결국은 바르바체와도 일전을 겨루어야 했겠지만…… 아쉬운 일인지, 아니면 다행인 일인지, 이지혁은 바르바체가 나서기 전에 마계의 코어에 접근할 수 있어 더 이상 마계에 머무를 이유를 잃어버렸다.

    그게 아니었다면?

    '아쉽군.'

    이지혁이 입맛을 다셨다.

    '그때 죽여야 했어.'

    지금이 아니라 과거였다면 바르바체와의 일전을 겨뤄볼 수 있었을 것이다. 승산이야 어느 정도인지 감이 서지는 않지만, 적어도 지금보다는 일억 배는 더 나을 테니까.

    만약 그때 그가 바르바체를 죽였더라면 마계의 인류 침공을 방지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항상 지나고 나면 아쉬움이 남는다니까.'

    이지혁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말 나와 손을 잡을 생각은 없는가?"

    "거참, 개소리도 다양하게 하네."

    이지혁이 한숨을 쉬었다.

    "너쯤 되면 그냥 봐도 알 텐데? 내 삶은 얼마 남지 않았어. 기껏해야 보름에서 한 달이다. 그런데 이제 와 내가 너와 손을 잡아서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어."

    "방법이 없는 건 아니겠지."

    "이봐, 바르바체."

    이지혁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처음부터 마왕이고, 처음부터 마족이었던 너에게 있어서 마족이 된다는 건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겠지. 하지만 나는 인간이라고. 내가 마족이 된다는 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된다는 뜻이야."

    "기억도 그대로 남고, 인격도 그대로 남아 있는데?"

    "한 사람을 규정하는 건 기억이 아니야."

    이지혁은 단호했다.

    "어떤 상황이 벌어졌을 때 어떻게 '대처하는가'이지. 지금의 나와 마족이 된 나의 행동이 같지 않은 이상, 그건 나라고 할 수 없는 거야."

    "꽤나 철학적이군. 인간 주제에 말이야."

    "하등 생물이라고 말하고 싶은 건가?"

    "너희의 말로 하자면 실존주의라고 해야 하나? 아무리 네가 성향이 바뀐다고 해도 죽음보다는 나을 텐데, 일부러 죽음을 택하는 이유는 알지 못하겠군. 결국 나는 인간을 이해할 수 없겠지. 너희는 너무 비이성적이고 충동적이야."

    "그게 인간이니까."

    이지혁이 바르바체를 노려보았다.

    "그래서 인간으로 죽겠다는 거다. 뭐 불만이라도?"

    "불만이라기보다는 아쉬움이라고 해야겠지."

    "아쉬움?"

    "그렇다."

    바르바체가 가만히 이지혁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너무도 오랜 시간을 내려다보며 살았지. 그로 인한 우월감으로 현재의 처지를 자위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나 버렸어. 이제 내게 남은 것은 지루함과 외로움이다."

    "대마왕 주제에 외롭다는 건가?"

    "동격의 존재가 없다는 것이 얼마나 사람을 외롭게 하는지 너는 이해할 텐데?"

    "…너와는 별로 공감하고 싶지 않은데 말이야."

    "큭큭큭큭."

    바르바체가 잠시 고개를 숙였다가 번쩍 들었다.

    "대화는 끝이다. 아흔아홉 번째 마왕이자 마도의 극에 오른 자여, 그대에 대한 연민은 이걸로 끝내겠다. 내가 직접 너의 숨통을 끊어주는 것이 너에 대한 예의겠지만……."

    바르바체가 가볍게 웃었다. 비웃음이 아닌 순수한 웃음이었다.

    "아니겠지. 네가 원하는 것은 너의 격을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저것들과 함께하는 소꿉놀이일 테니까."

    "…잘 아는군."

    "그래. 그럼 원하는 죽음을 너에게 선사하지. 덕분에 긴 세월 만에 즐거웠다, 이지혁."

    바르바체가 천천히 몸을 돌려 뒤로 돌아갔다.

    '거, 텔포 쓰면 될 것을.'

    굳이 걸어서 이동하는 바르바체를 보고 있으려니 헛웃음이 나왔다. 마왕의 입장에서는 텔레포트를 하는 것이 걷는 것에 비해서 훨씬 간편하고 힘도 덜 드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굳이 걸어서 가는 꼴이라니.

    '조금이라도 더 살려주겠다는 건가? 눈물나는군.'

    이지혁이 낄낄대며 웃었다.

    "이지혁 씨?"

    최정훈의 부름에 이지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뭐, 나름 최선을 다 해보기는 했는데요……."

    이지혁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 마수들과 다른 마왕들이 그들 주변으로 다가와 대기하고 있었다.

    "더는 무리네요."

    "…그런 것 같습니다."

    이지혁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쉽군.'

    할 수 있는 최선은 다했다. 하지만 최선을 다한다고 언제나 결과가 좋은 것은 아니다.

    "고생하셨습니다."

    "뭐, 벌써 다 끝났다는 듯이 말하지 말아요. 마지막까지 발버둥은 쳐봐야죠. 지는 건 납득할 수 있는데, 편히 이기게 해줄 생각은 없거든요."

    "그야 물론이죠."

    최정훈이 씨익 웃었다.

    '이지혁 씨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우리는 어땠을까?'

    아마 진즉에 인류가 멸망했을 것이다.

    이지혁 덕분에 삶이 길어졌고, 덕분에…….

    '험한 꼴을 무지하게 봤지.'

    이거, 고마워해야 하는 건가?

    최정훈이 키득댔다.

    "뭘 그리 쪼개고 있어요?"

    서아영이 도끼눈을 떴다.

    "다 죽게 생겼는데 웃음이 나와요?"

    "…어차피 죽는 건데, 울상 지을 필요 있습니까? 이왕 죽는 거, 쿨하게 죽어줘야죠."

    "성격 참 이상하네."

    "울면서 죽어버리면 저놈들이 좋아하겠죠. 마지막까지 저는 그런 꼴은 못 보겠습니다."

    "그건 그래요."

    서아영이 뭔가 말을 하려는 찰나, 최정훈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

    "아영아."

    "아, 아영?"

    "고생했다."

    "…네."

    서아영은 뭔가 입술을 달싹대더니,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 광경을 본 이지혁이 솔직한 감상을 늘어놓았다.

    "잘 논다."

    "…거참, 분위기 깨게."

    "이 상황에서 분위기 찾는 게 정상적인 일이에요? 사람이 때와 장소를 가릴 줄 알아야 사람이지."

    "때와 장소 찾을 상황입니까? 이제 다 죽게 생겼는데?"

    "죽을 때 됐으니 짐승처럼 살아보겠다는 말이네요. 아주 훌륭한 선택이에요."

    "끄응."

    최정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지혁과 함께 있다 보니 마지막 순간까지 영 껄쩍지근하다.

    "뭐, 여하튼."

    최정훈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눈앞에 마왕들과 주변을 포위하고 있는 마수들을 바라보았다.

    "가는 길에 고춧가루는 확실하게 뿌리고 가야겠죠. 죽는 그 순간까지 말입니다."

    "뭐, 그것도 나름 좋은 방법이지만……."

    이지혁이 고개를 위로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에휴."

    "왜 그러십니까?"

    "죽는 것도 쉽지 않다 싶어서요."

    "네?"

    이지혁이 씨익 웃었다.

    * * *

    "마지막 회포는 잘 풀었어?"

    "물론."

    바르바체는 진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보내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로군. 여전히 기분이 좋지 않아."

    "너는 그를 싫어하지 않았어?"

    "싫어할 수밖에."

    바르바체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는 나의 지위를 위협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으니까. 하지만 다시 말하자면, 그는 유일하게 나를 이해해 줄 수 있는 존재였다. 마족이 아닌 타 종족에게 이런 것을 바라게 될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무능한 너희가 할 수 없는 일을 그는 할 수 있던 거지."

    "흐음, 이제야 달링을 제대로 평가하는 모양이네."

    "너야말로 아쉽지 않은가? 이제 이지혁은 끝인데 말이야."

    "끝?"

    에르카나가 깔깔 웃어젖혔다.

    "이봐, 바르바체. 너와 달링의 가장 큰 차이가 뭔지 알아?"

    "…차이?"

    에르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그 오랜 세월을 살아오면서 부하 말고는 만들지 못했지. 그 부하라는 것들도 그저 너의 힘에 굴복하는 것뿐이지."

    "마족에게 그 이상이 필요한가?"

    "그래. 어쩌면 그게 우리의 한계일지 모르지. 하지만 달링은 달라. 달링은 인간이거든."

    "…그게 어쨌다는 거지?"

    "인간은 동료를 만들 수 있지. 달링에게는 동료가 있다는 말이야.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서라도 달링을 지키겠다는 동료가."

    순간, 바르바체의 눈이 흔들렸다.

    '뭐지, 이 마나의 파동은?'

    세상의 마나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제 그걸 보게 될 거야."

    * * *

    세상이 뒤흔들린다.

    바르바체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져 있었다.

    파동.

    그야말로 거대한 파동이었다. 이건 일개 개인이 만들어낼 수 있는 파동이 아니다.

    게다가…….

    '신성(神聖)?'

    단순한 마나가 아니었다. 거대한 마나의 파동에는 그가 가장 증오하는 힘이 깃들어 있었다.

    "이건……."

    "느낀 모양이네?"

    "불가능해!"

    바르바체가 으르렁거렸다.

    "아무리 신성이라 해도 타 차원에 개입할 수는 없어."

    "물론이지. 신이라 해도 다른 차원의 신은 아니니까."

    "그런데 어떻게?"

    "이상한 말 하지 마, 바르바체. 신성이 개입할 수 없는 견고한 차원의 벽을 허물어뜨려서 약화시킨 것은 바로 너잖아?"

    "…이, 이런."

    바르바체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 틈을 타서 차원의 문을 열었다는 건가? 라트렐이?"

    "그런가 보네."

    "하지만 어떻게 알고! 이곳과 베라프는 아무 연관성이 없는 곳이야. 그녀가 아무리 신이라고 해도 다른 차원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수는 없을 텐데?"

    에르카나가 깔깔 웃었다.

    "알려준 이가 있던 거지."

    "알려준 이?"

    "그녀의 신실한 종이자 이곳의 상황을 모두 알고 있는 이. 그리고 베라프가 멸망하는 한이 있더라도 달링이 죽기를 바라지 않는 이."

    바르바체가 몸을 떨었다.

    "도마뱀 년이!"

    "그래. 그녀가 모든 짐을 지고 베라프로 돌아갔지. 헛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성공한 모양이야?"

    "잘도 저질렀군."

    에르카나가 어깨를 으쓱했다.

    '어림도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리 지구가 정복당하고 나면 다음 타깃은 베라프가 될 게 빤하다지만, 일면식도 없는 차원을 위해서 지원을 올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어찌어찌 아펠드리체가 설득에 성공한 모양이었다.

    '아니면?'

    인류를 지켜야 할 이유가 있는 건가?

    "달라질 건 없다!"

    바르바체가 소리쳤다.

    "신성 따위 현실에 개입하지 못하는 비물리력일 뿐이야. 라트렐이 강림한다고 해도 나를 막을 수는 없다."

    "물론 라트렐은 너를 막을 수 없지. 그건 당연한 일이야. 하지만 말이야, 바르바체."

    에르카나가 고혹적으로 웃었다.

    "라트렐이 아니라 베라프의 전력이 인간들과 힘을 합친다면 재미있어지지 않겠어?"

    기이이이이잉!

    그와 동시에 공간을 찢어버리는 듯 기이한 음양과 함께 그들의 앞에 새하얀 백색의 선이 나타났다.

    바르바체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 선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선이 좌우로 갈라지며 거대한 백색의 홀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홀 주변으로 오로라처럼 번지는 신성력이 바르바체의 속을 뒤집어놓았다.

    "라트레에에에에엘!"

    휘이이이이잉!

    눈부신 백광이 홀을 가득 뒤덮는다 싶더니, 이내 홀이 몇 배로 불어났다.

    * * *

    "저, 저게 뭐지?"

    최정훈의 눈이 떨렸다.

    "아니, 이제 놀랄 만큼 놀랐다고. 자꾸 이상한 일 벌어지면……."

    최정훈이 이지혁에게 설명을 구하는 눈빛을 보냈다. 이지혁이 양팔을 살짝 들어 올렸다.

    "나라고 모든 걸 다 아는 건 아니라고."

    "그래도 저보다는 더 아시겠죠."

    "끙."

    이지혁이 앓는 소리를 내고는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꼴 보기 싫은 아줌마의 힘이 작용하고 있는 것 같은데. 여기까지 와서도 저 꼴을 보니 속이 뒤집어지고 소화가 잘 안 되는 느낌이네."

    "꼴 보기 싫은 아줌마?"

    "왜 날 봐요! 죽고 싶어요?"

    "…미안."

    서아영이 씩씩거리자 최정훈이 얼른 달랬다. 그래도 한 번 달래놓은 약발이 있어서인지, 서아영은 순식간에 진정되어 이지혁에게 물어왔다.

    "저거도 적이에요?"

    "적이지."

    이지혁이 이를 갈았다.

    "심지어 마왕보다 악독한 최악의 적이지."

    서아영이 눈을 가늘게 떴다.

    "우리한테두요?"

    "…아니. 너희한테는 적이 아닐 것 같기는 하다."

    "그럼 아군이네요."

    서아영이 씨익 웃었다.

    역시 죽으라는 법은 없는 모양이다.

    "글쎄, 아군이라고 해야 할까?"

    이지혁이 피식 웃었다. 베라프와 인류가 마왕 없이 만났다면 아마도 끔찍한 전쟁이 벌어졌을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원하는 바가 있을 테니까.

    '하지만 이런 상황이라면 또 모르지.'

    공동의 적이 있다면 쥐와 고양이도 연합할 수 있기 마련이니까.

    이지혁이 복잡한 심경이 담긴 눈으로 게이트를 바라보았다. 빛을 뿜어내던 게이트가 안정이 된다 싶더니, 그 안에서 새하얀 무언가들이 밖으로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헐?"

    서아영이 입을 쩌억 벌렸다.

    "저, 저거 뭐예요?"

    "…내가 내 눈으로 저 꼴을 다시 보는 날이 올 줄이야."

    이지혁은 그새 몇 년은 늙은 듯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신성제국의 신성 기사단이다. 베라프 최강의 기사들이지."

    * * *

    "달려라!"

    눈부신 은색의 갑주를 갖춰 입은 기사들이 말에 박차를 가했다. 그들이 입은 갑옷과 같은 은색의 마갑이 눈부시게 빛났다.

    "저기 간악한 마족들이 있다! 라트렐의 이름으로 오늘 우리는 여기서 마족들을 섬멸한다! 라트렐의 이름으로!"

    "라트렐의 이름으로!"

    게이트에서 끊임없이 돌진해 나오는 백은의 기사단들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구호를 외치는 모습은 보는 이들을 전율하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저, 저게 뭡니까?"

    "으, 소름 돋아. 내가 저 꼴을 또 보는구나."

    "베라프입니까? 당신이 있던?"

    "그래."

    이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최정훈의 얼굴에 혼란이 감돌기 시작했다. 물론 베라프 역시 얽혀 있으니 마족들의 위력을 모를 리는 없겠지만…….

    '저거 너무 올드한 거 아닌가?'

    분대화기로도 흠집 하나 낼 수 없는 마수들에게 칼 한 자루 들고 말을 탄 채 돌진하다니, 저게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괘, 괜찮은 겁니까?"

    "그냥 봐요."

    이지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바퀴벌레가 왜 무서운지 알게 될 테니까요."

    "바퀴벌레?"

    최정훈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라트렐의 이름으로!"

    "라트렐의 이름으로!"

    그사이 신성 기사단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마수들을 향해 돌진했다.

    선두에 선 기사가 헬멧의 창을 내리고는 롱 소드를 앞으로 들이밀었다.

    "우리는 오늘 여기서 그분의 종으로 죽는다!"

    동시에 기사의 육체에서 새하얀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크라라라라라!

    신성력의 발현을 목격한 마수들의 입에서 괴성이 흘러나왔다. 증오와 공포가 반쯤 뒤섞여 있는 괴성을 내지른 마수들이 기사단을 향해 맹렬하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헐?"

    최정훈이 입을 쩌억 벌리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검고 붉은 물결 같아 보이는 마수들과 새하얀 파도 같아 보이는 기사단이 정면으로 충동했다.

    "으아아아아악!"

    카르르륵! 크라락!

    기사들의 비명과 마수들의 괴성이 뒤섞이며 세상 다시없을 끔찍한 부조화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소리가 아니었다.

    "미, 밀어낸다?"

    피육으로 이루어진 인간이 마수들을 밀어내고 있었다. 코끼리조차도 일격에 죽일 수 있는 대물저격총으로도 흠집조차 나지 않던 마수들의 두꺼운 가죽이 기사들의 장난 같은 칼질에 쩌억쩌억 갈라지면서 푸른 피를 사방으로 뿜어낸다.

    "…저게 어떻게?"

    이지혁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생각을 해봤는데요……."

    "네."

    "나는 베라프의 인간이 발전하지 못하는 이유가 드래곤을 위시로 한 고위 종족 놈들이 인간이 발전하지 못하게 막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에요."

    "…네?"

    "원래 발전이라는 것은 전쟁을 동반하기 마련인데, 저런 놈들과 싸우려면 과학이 아니라 마나와 신성력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거죠."

    이지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뭐, 덕분에 좀 불편하기는 하지만, 그 대가는 지금 보시는 그대로죠."

    "쩌네요."

    최정훈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대마수전만큼은 인류보다 저들이 압도적으로 우월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도 보라.

    빛을 뿜어내며 돌진하는 기사들의 위세에 마수들이 그 힘을 전혀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라트렐의 이름으로!"

    "성전이다!"

    이지혁이 그 광경을 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오, 진짜 저 광신도 새끼들."

    한때는 저 미친 돌격이 그를 향하던 시절도 있었다. 베라프 말기에 이르러 그가 저 모든 것을 초월하는 힘을 얻기 전에는 저 은색만 봐도 노이로제에 시달릴 지경이었다.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은 채 목적을 위해서 모든 것을 내던지는 이들만큼 무서운 게 없다. 더구나 죽는다고 해도 그게 죽음이 아니라 순교라고 받아들이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없다. 되레 신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을 평생의 소원으로 생각하고 사는 이들이다.

    지금도 보라.

    보통 사람 같으면 저 그로테스크한 마수들에게 감히 달려들지 못할 것이다. 특히나 앞에서 달려든 이들이 배가 갈리고 목이 하늘로 튀어 오르고 있는 상황이라면 아드레날린이 극히 줄어들고 멘탈이 터져 나가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저들은 그런 광경을 보고 있으면서도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더 빨리, 더 강하게 돌진한다.

    인간이되 인간의 이성을 버리고 오로지 신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맡겨 버린 자들.

    이지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금은 아군이겠지만, 저들을 보는 것은 여전히 유쾌하지 못한 일이었다.

    "저, 저기!"

    어느새 하늘이 붉고 푸른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라이트닝!"

    "플레어!"

    겨우 그 끝을 드러낸 신성 기사단의 뒤로 백색의 로브를 걸친 이들이 튀어나오며 마나를 뿌려 대기 시작했다.

    "제마 병단."

    이지혁이 한숨을 내쉬었다.

    마도를 숭상하는 마도제국의 제마 병단이 예전 모습 그대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끄응."

    신성 기사단이 이지혁의 가장 큰 적이었다면, 제마 병단과 그는 조금은 미묘한 관계였다.

    따지고 보자면 베라프에 존재하는 모든 세력 중에 가장 그에게 우호적인 곳이 제마 병단이다. 인간의 몸으로 마도의 극한에 오른 그를 추앙하는 세력마저 암암리에 존재하던 곳이 제마 병단이니까.

    그 뒤로도 끊임없는 군세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 옷을 입은 파로의 군세와 각자의 신을 추앙하는 성기사단. 그리고…….

    "엘프?"

    최정훈이 멍하게 중얼거렸다.

    긴 귀를 가진 새하얀 피부의 종족이 게이트에서 나오자마자 긴 활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와, 이거… 진짜 눈 돌아가게 예쁘네."

    "저… 최정훈 씨."

    "네?"

    "눈 돌리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잘못하면 눈이 지져질 것 같은데……."

    이지혁의 말을 들은 최정훈이 떨리는 눈으로 옆을 돌아보았다. 양손에 불꽃을 피워 올리고 있는 서아영이 매우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서, 서아영 씨?"

    "고민 중이에요."

    "뭐, 뭘요?"

    "그 눈알을 태워 버리는 게 맞는지, 아니면 저것들을 태워 버리는 게 맞는지."

    죄도 없이 불세례를 당하게 생긴 엘프의 뒤로 짜리몽땅한 전사들이 도끼를 들고 튀어나왔다.

    "드워프까지."

    이지혁이 신음을 흘렸다.

    "데자뷰인가?"

    유사 인류 연합.

    베라프 역사상 단 한 번만이 이루어진 유사 인류 연합이 지금 이 지구에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지혁은 알 수 없는 환희에 몸을 떨었다.

    마치 과거를 조우하는 느낌이었다.

    "마족들을 물리쳐라!"

    누군가의 거대한 함성과 함께 형형색색의 군세들이 물밀듯이 마수들을 향해 밀려들었다.

    * * *

    "저 빌어먹을 놈들이!"

    바르바체의 몸이 들썩였다.

    다된 밥에 재를 빠뜨리는 것도 유분수지, 이제 조금만 있으면 인류의 저항을 완벽하게 무력화시킬 수 있는데!

    "라트렐! 빌어먹을 라트렐!"

    바르바체의 분노가 하늘을 찔렀다.

    "그런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있을 것 같으냐! 허약하기 짝이 없는 베라프의 군세 따위는!"

    쿠우우웅!

    "또!"

    바르바체가 고개를 돌려 폭발이 터진 곳을 바라보았다.

    서너 마리의 마수들이 곤죽이 되어 쓰러져 있다.

    "이……."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쏴라!"

    쿠웅! 쿠우우웅!

    포격과 폭격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군대와 교전하고 있던 마수들을 이쪽으로 돌린 대가였다. 크리스토퍼의 기민한 대처로 M-3가 지체 없이 위치를 조정하고 포격을 해 대기 시작한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부우우웅!

    귀를 찢는 듯한 소음과 함께 그들의 머리 위로 폭격기들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쏟아지는 포탄의 비.

    콰아아앙!

    작렬하는 폭염 앞에서는 두려움을 모르고 돌진하던 신성 기사단마저 움찔할 정도였다. 사나운 폭염이 하늘 위로 솟구쳤다.

    "흐음."

    이지혁이 그 광경을 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일단 저 뒤로 좀 빠지자."

    "예?"

    "여기서 빠져나가자구요. 저기 길 열렸잖아요."

    "아, 예!"

    이지혁이 마수들 사이로 벌어진 틈을 가리키자 최정훈이 재빠르게 지시를 내렸다. 일사불란한 퇴각이 이루어졌다.

    "하, 십년감수했네."

    마왕과 마수들이 새로 등장한 베라프의 기사단에 그 시선을 빼앗긴 동안 피해 없이 몸을 빼낸 이지혁이 이마에 흐른 식은땀을 닦아냈다.

    "자, 그럼 이제 내가 해야 할 게……."

    저들만 재미 보도록 할 수는 없었다. 지금 이 순간, 교전을 바라고 있는 이가 또 있으니까.

    이지혁의 손이 수인을 맺기 시작했다. 짧은 시간 동안 완벽한 마법진을 그려낸 이지혁이 손을 뻗어 마나를 주입하자, 그의 앞에 커다란 게이트가 생겨났다.

    "이건 무슨 게이틉니까?"

    "…반응이 느리네요. 안 나오네?"

    이지혁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빌어먹을 코리안 타임 같으니라고! 문을 열어줬으면 재깍재깍 튀어나와야지! 보나마나 조사한다고 시간 보내고 있겠지, 이 멍청한 윗대가……."

    "그래서 윗대가리가 직접 왔지 않습니까!"

    게이트에서 머리를 빼꼼 내민 정인수가 억울하다는 듯이 소리쳤다.

    "헐, 왔네?"

    "전방 부대부터 진입시켜!"

    무전기를 들고 소리치는 정인수를 보며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주파수가 닿아요?"

    "위성 무전기 무시하지 마십시오! 남극에서도 터집니다."

    "…기술의 발전은 인간을 기다려 주지 않는군."

    정인수가 앞으로 나서자 게이트에서 특수부대가 우수수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아니! 탱크나 데리고 오라구요! 도움도 안 되는 저런 애들 말고."

    "진입로를 확보해야 M-3를 끌고 오든 K-1을 끌고 오든 할 거 아닙니까! 그런데 왜 이리 가까워요, 사람 간 떨리게?"

    "우리는 항상 이 거리에서 싸우고 있거든요."

    "평범한 인간은 보호를 좀 해줘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아니, 저건 또 뭐래?"

    정인수가 마수들을 몰아치고 있는 베라프의 기사단들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코스프레?"

    "…정신 좀 차려요."

    "나 이거 영화에서 본 광경 같은데……. 멋지네요."

    "각은 좀 살죠."

    최정훈이 입을 쩌억 벌리고 상황을 살펴보았다.

    '이, 이거?'

    상황이 순식간에 반전되고 있었다. 저 멀리서 속속들이 화력을 뿜어낼 수 있는 화포들과 M-3가 합류하고 있었다. 새하얀 게이트에서는 아직도 병력들이 추가되고 있고, 이지혁이 연 게이트에서도 한국에 모여 있던 병력들이 합류하고 있었다.

    '가능할지도 모르겠는데?'

    최정훈의 뇌리에 처음으로 희망이라는 말이 떠오르고 있었다.

    '물론… 물론 저들이 얼마만 한 위력을 발휘해 줄지는 아직 미지수지만…….'

    최정훈이 베라프의 전사들이 얼마만 한 위력을 발휘해 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지혁의 반응과 마수들의 동요만 봐도 상황이 반전되었다는 것은 실감할 수 있었다.

    "어쩌면……."

    "혹시……."

    "헐."

    최정훈이 기겁을 하여 뒤를 돌아보았다.

    "누, 누구?"

    뒤돌아본 그곳에는 은색과 흰색이 뒤섞인 법복을 걸친 노인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 놀라실 것 없습니다."

    "어? 말이?"

    이게 어느 나라 언어지? 그런데 왜 내가 저 말을 알아듣고 있지?

    이지혁이 노인을 보고는 코웃음을 쳤다.

    "많이 급했던 모양이로군. 라트렐의 주교가 통역 마법을 다 쓰고 말이야. 너희는 마법을 거부하지 않았나?"

    "시대가 많이 흘렀습니다. 많은 것이 변하고, 많은 것이 바뀌었지요, 멸망의 좌이시여."

    노인이 이지혁을 향해 깊이 고개를 숙였다.

    "듣던 것과는 많이 다르시군요."

    "듣던 것?"

    "전설에 의하면 멸망의 좌께서는 검은 마기를 줄기줄기 내뿜으며 마치 악이 그 자체로 현신한 것 같은 모습이라 했는데, 지금 제가 보는 모습은 그저 보통 청년의 모습이군요."

    "힘을 잃어서 그래, 힘을 잃어서."

    "어린아이를 즐겨 드시고, 처녀 간음하기를 즐기……."

    "그건 어느 새끼야!"

    이지혁이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소문이란 다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끄응."

    이지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서 네가 현 시대의 교황인가?"

    "예. 제가 미력하나마 라트렐 교단의 교황 자리에 올라 있는 디오레 12세입니다."

    "…그놈의 디오레는."

    이지혁이 영 언짢은 기색을 드러내자 디오레 12세가 빙긋이 웃었다.

    "디오레 1세와의 인연을 생각하시는 모양이군요."

    "그건 인연이 아니라 악연이야. 그리고 내가 베라프에서 굴러먹던 동안 겪은 교황이 한둘도 아닌데, 디오레 1세 따위 생각이나 날까 보냐?"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끄응."

    이지혁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 영감은 특별하게 사람 짜증 나게 했지. 그 인간이 땡깡만 안 부렸어도 좀 더 편하게 이 세상으로 넘어오는 건데 말이야."

    "베풀어주신 자비에 감사드립니다."

    "뭔 자비?"

    "선대께서 임종하시기 전에 항상 말씀하셨습니다. 멸망의 좌께서 본디 온 세계로 돌아가기 전에 벌어진 인류와의 전쟁에서 마지막 순간, 자비를 베풀지 않으셨다면 지금쯤 베라프는 멸망했거나 멸망한 것과 다름없는 처지에 처했을 거라고 말입니다."

    "흥."

    이지혁이 코웃음을 쳤다.

    "그건 자비가 아니라 힘을 아낀 거다. 차원을 넘는 동안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데, 괜히 그런 데다가 마나를 낭비할 필요는 없지. 나는 그냥 라트렐의 눈만 가져가면 그만이었으니까."

    "그것을 자비라 하는 것이지요."

    "아, 안 맞아, 안 맞아."

    이지혁이 치를 떨었다.

    여하튼 저 라트렐 교단이라는 것들과는 천성적으로 뭐가 맞지 않았다. 대화를 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두드러기가 날 정도로 말이다.

    그저 저들이 광신도이기 때문이 아니라, 교단의 철학과 그 모든 것이 이지혁과는 상극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그 감사 인사를 하기 위해서 찾아온 것은 아닐 테고?"

    "그분께서 전하라 한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분? 라트렐?"

    "신성하신 그분이시지요."

    이지혁이 이를 갈았다.

    "신성하긴 개뿔이 신성해. 그 미저리 같은 년이."

    눈앞에서 거침없이 신성모독을 자행하는 이단이 있지만, 디오레 12세는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베라프에 퍼져 있는 멸망의 좌의 악명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그냥 기본적으로 감안해야 할 일이었다. 이 정도 각오도 없었더라면 감히 이지혁과 대화를 할 용기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너… 직접 소통도 하냐? 예전에 디오레 1세도 그건 못했는데?"

    "…미력하나마 은총을."

    "케헤헤헤, 그 영감 역대 최강 교황이니 뭐니 재더니만, 별것도 아니었네."

    "…말 좀 들어요!"

    "헐, 교황이 소리 지르는 거 봐. 예전에는 안 그랬는데, 요즘 애 들은 하여튼!"

    "끄응."

    디오레 12세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이 상황에서까지 저리 뺀질뺀질하게 굴 수 있다니.

    "여하튼 그분께서 전하라 하신 말씀이 있었습니다."

    "별로 안 듣고 싶은데."

    디오레 12세의 이마에서 핏대가 솟았다.

    "아니, 사람이 다른 차원까지 도우러 와서 이렇게 이야기까지 하면 귓등으로라도 듣는 척을 해야 할 것 아닙니까!"

    "교, 교황님, 체통, 체통!"

    최정훈이 말리고 나서야 디오레 12세가 헛기침을 했다.

    "아흐흐흠."

    "여하튼 요즘 것들은."

    나라를 걱정하는 할아버지 같은 말투로 틱틱 내뱉은 이지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 알았으니까 말해봐.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그분께서 전하라 하셨다니까요. 제가 아니라."

    "그래그래.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끄으으으응."

    디오레 12세가 머리를 감쌌다.

    전해지는 소문은 이 사람을 반도 표현하지 못하고 있었다.

    베라프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은 악마,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결코 꺾이지 않았던 불굴의 화신, 그리고 언젠가는 돌아와 세상을 멸망으로 밀어 넣을 진정한 멸망의 좌.

    그 전설에 아직도 공포로 떨고 살아가는 베라프 인들이 이지혁의 이런 모습을 보면 뭐라 생각하겠는가.

    그나마 디오레 12세는 이지혁의 실체에 대한 비밀에 접근할 권리가 있는 최상층 중의 하나였기에 실망감이 조금은 덜했다.

    "그런데 니들, 아펠드리체가 불러서 왔냐?"

    "…제가 먼저 말하고 있는데?"

    "궁금해서 그래, 궁금해서."

    "그분께서 라트렐께 진언을 드린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 때문에 온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이곳을 도우러 온 이유는 그분께서 차원을 넘어 그대를 도우라는 신탁을 내렸기 때문이지요."

    "라트렐이?"

    "예."

    "그년이 미쳤나?"

    "쿨럭!"

    교황의 앞에서 신을 욕해 대는 이 패기를 보니 이자가 과연 그 악마가 맞는 모양이었다. 최소한의 배려라든가 예의가 있다면 결코 할 수 없는 짓을 태연하게 저지르고 있는 이지혁이었다.

    "여하튼!"

    이놈과는 정상적으로 대화를 이어가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디오레 12세가 제 할 말만을 하기 시작했다.

    "저희는 그분의 명을 따라 이 세계로 넘어왔습니다. 차원을 여는 문은 그분이 열어주셨습니다."

    "흐응."

    "그리고 그분께서 전하라 한 말은……."

    "……."

    디오레 12세가 성호를 그었다.

    지금까지의 기세와는 다르게 조금은 머뭇대는 듯하던 디오레 12세가 이를 질끈 깨물고는 눈을 감았다.

    "'미안하다'였습니다."

    "……."

    이지혁은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디오레 12세의 입에서 사과의 말이 흘러나오자마자 몸을 슬쩍 반쯤 돌려 버린 이지혁이 먼 하늘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진짜 미쳤네."

    최정훈은 그런 이지혁의 등이 조금은 쓸쓸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말이다.

    "여하튼 그래서 병력을 모조리 다 끌고 왔다는 말이지?"

    "예."

    "쉽지 않았을 텐데?"

    "어마어마한 시간이 걸렸지만, 준비를 마치는 데는 별문제가 없었습니다. 그사이 교황이 둘이나 바뀌었지요."

    "…아, 맞다. 너희는 엄청 느긋하게 준비했겠네."

    이렇게 늦은 것을 보면 말이다.

    이지혁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그럼 이제 반격의 시간이군!"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