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101화 (101/118)
  • [■] 괴물과 괴물의 싸움이로군 [■]

    ─────

    "어? 저 아저씨들……."

    김다현은 전장의 한가운데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두 사람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폭격이 비처럼 쏟아지고 있지만, 어떤 폭염도 그들의 주변으로는 범접하지 못했다. 마치 지우개로 그들의 주변만을 깨끗하게 지워 버린 듯이 말이다.

    "야, 저리 자연스럽게 위협을 하나?"

    자연스레 뿜어져 나온 마나가 주변 모든 것을 밀어내고 있었다. 예전이었으면 그저 신기하게 보았을 광경이지만, 마나에 대한 이해도가 있는 지금은 저게 얼마나 무시무시한 모습인지 알 수 있었다.

    차라리 모르는게 나은 것도 있는 법인데 말이다.

    "마왕쯤 되면 저 정도는 해줘야지."

    "그래도 저건 좀 심하지 않나? 일부러 막는 것도 아닌데, 폭격 자체가 주변에 접근을 못하고 있잖아. 저게 말이 돼?"

    "눈으로 보고도 묻는 거냐?"

    "그건 그렇네."

    윤혁규는 손목에 찬 스마트워치에 대고 무전을 넣었다.

    "이쪽에 마왕이 출현한 것 같다. 지원 바란다."

    손을 내린 윤혁규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일단 이쪽부터 시작을 해야 할 것 같……."

    말을 하다 말고 윤혁규가 위를 가리켰다.

    "근데 저거 뭐냐?"

    "박쥐 떼 같은데?"

    "박쥐?"

    그렇게 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얇은 피막으로 이루어진 날개는 딱 박쥐를 연상시키게 하고 있었으니까. 문제는…….

    "……박쥐치고는 너무 크지 않아?"

    "유전자 변형 박쥐인가 보네."

    "저만한 게 날 수 있는 거야?"

    "비행기도 큰데 날잖아."

    뭔가 말이 안 되는 것 같은데도 말이 되고 있었다.

    윤혁규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저거, 어떻게 막아야 하지?"

    마법을 좀 더 체계적으로 배웠다면 레비테이션이나 플라이 등으로 하늘을 날아 상대할 수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은 버프나 공격에 몰빵한 이후였다.

    그러니 하늘을 날 수 있는 방법 따위가 있을 리가 있나.

    "쟤들이 상대하겠지."

    고오오오오오오!

    김다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전투기들이 그들의 머리 위로 날아들었다.

    "보아하니 폭격하는 애들 말고는 손가락이나 빨고 있던 모양인데, 오늘 밥값 좀 하겠네."

    '밥값이라…….'

    아래에서 벌이는 전투는 어떻게라도 뒤가 있는 반면에, 위에서 하는 전투에는 그런 게 없었다.

    전투기가 피격되는 순간 죽을 것이다.

    비상 탈출 장치?

    그런 걸로 튀어나온 이들을 살려주면 마수가 아니겠지.

    "뭐, 우리는 우리 할 거나 하면 되겠지만 말이야."

    윤혁규가 피식 웃었다.

    그 우리가 할 것이라는 게 결코 만만치가 않다. 하필이며 저놈들이 이쪽으로 오고 있다는 것도 문제였다.

    어디에서 출현할 줄 몰라서 NDF를 넓은 지역에 뿌려놨는데, 하필이면 이쪽으로 올 줄이야.

    "재수도 없지."

    "재수가 좋은 거지."

    김다현이 씨익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그 모습을 보며 윤혁규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가 보기에 김다현은 죽고 싶어서 환장을 한 사람 같았다. 또한 마왕을 상대할 수 있다는 것에 즐거워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을 통틀어도 김다현밖에 없을 것이다.

    "어허이!"

    김다현이 막 앞으로 나서려는 순간, 그의 어깨를 누군가가 잡았다.

    "에이."

    자신의 어깨를 잡은 최정훈을 보며 김다현이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이 양반이 온 이상 제멋대로 날뛸 수는 없게 되었다.

    "언제 왔어요? 이렇게 빨리."

    "텔레포터는 괜히 있는 게 아니죠. 설마 제가 사람 뿌려놓고 마왕 나타나면 알아서 막으라고 계획을 짰겠습니까?"

    "그런 줄 알았는데?"

    "…거참."

    그러는 와중에도 주변으로 사람들이 속속 나타나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흐릿하게 정해민의 모습이 보이는 것으로 봐서는 열심히 사람을 나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충원이 빨라서 좋기는 한데……."

    김다현이 어깨를 으쓱했다.

    "나 혼자서도 해결할 수 있는데, 괜히……."

    콰아아앙!

    그 순간, 그들의 머리 위에서 거대한 폭발이 연쇄적으로 일어나며 전투기들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공중에서도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것이다.

    "농담할 시간 있어요?"

    최정훈의 말에 김다현이 입을 다물었다. 긴장을 풀려고 한 행동이기는 하지만, 지금은 농담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제 진짜 시작이니까.

    "저쪽 마왕이 누구인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리고 절대 모르고 싶네요. 그러니까……."

    최정훈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입 뗄 틈도 주지 말고 죽여 버려요! 당장!"

    그 말과 동시에 모두의 몸에서 에테르와 마나가 소용돌이치듯 뿜어져 나왔다.

    * * *

    "마왕의 등장인가……."

    크리스토퍼는 앓는 소리를 냈다. 이제야 진짜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아직 나타난 마왕은 소수에 불과하지만, 아마도 속속들이 다들 전투에 합류하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파악한 대로라면 마왕들은 어느 정도 침략에 대한 의식을 공유하기는 하지만, 누군가의 명을 따라서 체계적으로 움직이지는 않았다.

    바르바체가 마왕들을 대표한다는 성격을 띄기는 하지만, 그들을 부하로 부리는 건 아니라는 뜻이다.

    바르바체가 오늘 모든 것을 끝내겠다고 했다면 그렇게 되기야 하겠지만, 군대처럼 일괄적으로 몰려들지는 않을 것이다.

    하이에나처럼 어슬렁어슬렁.

    하지만 확실하게 주변을 점거한 채 다가올 것이다.

    그들의 눈으로 보자면 양 떼가 스스로를 한쪽에 가두고는 주변에 가시 울타리를 친 격이니, 가시 울타리만 제거하면 모여 있는 양 떼들을 제 맘대로 농락할 수 있을 테니까.

    크리스토퍼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울타리에 박힌 가시들이 생각 이상으로 날카로워서 하이에나들이 감히 접근하지 못하기를 비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중 가장 날카로운 가시 하나가 지금 그의 눈앞에서 하이에나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콰아아아아앙!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임에도 귀가 찢어질 것 같다. 그와 동시에 화면이 지직거리며 깜빡인다.

    "알파와 마왕 2개체가 전투에 들어갔습니다!"

    "알파가 적들을 유인합니다. 전투 영역을 일반 영역에서 분리하여 피해를 줄이려는 의도 같습니다.

    "빌어먹을 놈."

    정말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저 알파 놈은 지금 인류가 가장 믿을 수 있는 전력이었다.

    객관적으로 본다면, 적의 가장 위협적인 전력이 등장한 상황에서 스스로 홀로 나서 그들을 본대에서 분리해 내고 있는 것이 알파였다.

    적장이라면 차라리 칭찬을 했을 것이고, 부하라면 박수를 쳤겠지만, 하필 그 적절하고도 위대한 대처를 해내고 있는 이가 바로 알파라는 점이 크리스토퍼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빌어먹을, 유능한 적이랑 일시 동맹을 맺은 느낌이로군.'

    잘해줘서 좋기는 한데, 일이 잘 풀리고 나면 저놈이랑 재차 붙어야한다는 사실 때문에 순수하게 기뻐할 수가 없었다.

    "아, 알파가……."

    보고를 하던 부관이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리고 굳이 보고를 들을 필요도 없었다. 크리스토퍼에게도 눈은 있으니까. 화면을 통해 알파와 마왕의 싸움이 그의 눈에 똑똑히 보이고 있었다.

    '위화감.'

    지금 몸을 타고 흐르는 이 강렬한 전율의 정체를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위화감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크리스토퍼가 느끼고 있는 위화감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마왕과 인류 최강의 싸움이 그들의 생각처럼 화려하지가 않다는 것이다. 과거 이지혁이 마왕들과 싸울 때는 온갖 화려한 마법과 보기만 해도 무시무시해 보이는 공격들이 줄을 이었는데, 알파의 방식은 조금 달랐다.

    그는 마치 사냥꾼이 맹수를 사냥하듯이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하지만 확실하고 치명적인 공격을 연이어 퍼부으며 마왕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알파가 마왕들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 어떻게 저런 게 가능하지?"

    알파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이지혁 등장 이전에는 단 한 번도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능력자라는 타이틀을 놓친 적이 없었고, 단 한 번도 최강의 능력자라는 자리를 내준 적이 없는 사람이다.

    인류 최강이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이는 이지혁이 아니라 알파라고 할 수 있다. 그를 무시한다는 것은 인류를 무시한다는 것과 동일한 말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기대와 존중 역시 범위가 있고, 그 선이 있는 법인데, 지금 알파는 그 선을 깔끔하게 짓밟고 그 위를 향하고 있었다.

    그의 신화적인 신위를 목격한 크리스토퍼는 전율하고 절망했다.

    '우리가 지금 잘하고 있는 건가?'

    마족들을 막아내기 위해서 알파와 그 부하들을 키워낸 것이 과연 제대로 된 선택인가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그 방법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음에도 반문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알파의 성장세가 그의 상상을 산산조각 내버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저렇게까지 강해질 수가 있지?"

    이지혁과 NDF, 그리고 모든 미국의 능력자들이 달려들어야 겨우 하나 막아낼 수 있던 게 마왕이라는 존재다. 그런데 지금 알파는 별 힘을 들이지 않고도 마왕 둘을 쉽게 상대하고 있었다.

    '괴물이야.'

    어쩌면 진정한 괴물은 알파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알파라는 괴물을 만들어낸 것이 크리스토퍼였다. 생물학적인 아버지는 아닐지라도 알파가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된 것은 그의 영향이 생물학적 아버지 이상일 것이다.

    크리스토퍼는 그 자신이 만들어낸, 그리고 언젠가는 자신의 목을 물어뜯으러 올지도 모르는 괴물을 보며 이를 꽉 깨물었다.

    "괴물과 괴물의 싸움이로군."

    * * *

    "어떻게!"

    툴레앙의 입에서 분노에 찬 고함이 터져 나왔다.

    그의 목소리는 마왕의 그것답게 소름 끼치도록 높고 거대했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은 전혀 마왕답지 않았다.

    "어떻게 인간이 우리를 이길 수 있는 거냐!"

    "…아, 이거 편하네."

    알파가 귀를 긁었다.

    "쓸데도 없는 통역 마법이라는 걸 배우라고 했을 때는 '이걸 왜 가르쳐 주나, 시간 낭비밖에 안 될 거다'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너희가 지껄이고 있는 것을 듣고 있으니 스트레스가 풀리네. 이거 좋은데?"

    알파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가 자신의 손에 들린 툴레앙의 팔을 슬쩍 보고는 바닥에 던졌다.

    "뭐, 그렇게 흥분할 것 없어. 아직 너에게는 세 개의 팔과 두 개의 다리가 남아 있잖아? 아직 남은 게 많으니 잃어버린 것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고. 욕심을 버려야 하는 법이지."

    알파가 낄낄대며 웃었지만, 툴레앙은 결코 웃을 수 없었다.

    지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지, 인간을 한참 뛰어넘는 그의 지성으로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단 한 명이다.

    단 한 명의 인간이 마왕 둘을 상대로 우세한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아직 승부가 났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런 상황을 만들었다는 것 자체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인간이 어떻게!"

    "아아."

    알파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건 내가 보기에 너희 고정관념이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겠네. 사실 인간이 마족보다 약한 건 사실이지. 그리고 인간이 너희 눈에 하찮게 보이는 것도 이해는 해. 사람에게 바퀴벌레를 존중하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말이야. 다만……."

    알파가 손을 털며 툴레앙에게 다가갔다.

    "바퀴벌레가 사람만 해지면 알게 되지.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생물인지 말이야. 너희는 지금 그걸 깨닫고 있는 것뿐이야."

    알파에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맺혔다.

    * * *

    "아주 적절한 비유로군."

    툴레앙이 이죽거렸다.

    "특히나 인간을 바퀴벌레에 비유했다는 사실이 매우 마음에 드는군. 너희가 매우 혐오하는 벌레라고 하지 않았나?"

    "글쎄, 그걸 뭐라고 해야 할까……."

    알파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사실 바퀴벌레는 징그러운 거지."

    "너희 인간에 비하면 매우 유용한 생물인 것 같은데? 너희보다 더 징그러운 생명은 차원을 통틀어 존재하지 않아."

    "그 징그러운 생명체에 빨대를 꽂아 먹고사는 너희도 참 쓰레기 같은 인생이로군. 자아비판은 좋은 거지만, 자학은 좀 자제해야 하지 않겠어?"

    툴레앙이 살기가 가득 담긴 눈으로 알파를 노려보았다.

    "인간 따위가!"

    "아아, 그래. 마족, 아니, 마왕이라고 해야 하나?"

    알파가 양팔을 쭉 뻗어 기지개를 켰다.

    "나름 몸 풀기 정도는 될 줄 알았는데, 겨우 이 정도인가. 마왕이라는 것들도 별게 없군. 그게 아니면 내가 너무 강해진 거든가."

    "……."

    툴레앙은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냔 말인가!'

    알파의 강함은 그들의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다. 이건 한낱 인간이 낼 수 있는 힘이 아니었다.

    물론 인간 중에서도 이지혁과 같은 별종이 튀어나올 수는 있다. 하지만 이지혁의 힘은 영원한 시간을 손에 넣은 결과였다. 인간이 결코 가질 수 없는 힘을 손에 넣다 보니 밸런스가 깨어진 것이다.

    하지만 알파는 그런 것도 아니잖은가.

    '어떻게?'

    알파의 설명은 핵심을 피해가고 있었다.

    틀린 말은 아니다.

    마족들이 강해지는 속도에 비한다면, 인간이 강해지는 속도는 상식을 초월할 정도였다.

    마나 다루는 법을 익히는 것만으로 인간은 수십 년 만에 천 배 이상 강해지기도 하니까.

    하지만 인간의 성장은 시간의 벽에 막히게 된다. 육체가 노화되고, 뇌가 노화되면서 그 성장이 더뎌지고, 이내 죽음을 맞이한다.

    마족의 입장에서 보면 찰나와도 같은 시간 동안 불꽃처럼 그 힘을 키워 나가다가 충분히 강해지지 못하고 죽는 것이다.

    그러한 시간의 벽을 돌파한 것이 이지혁이었다.

    그는 결코 다른 인간들에 비해 빠른 속도로 강해지지 않았다. 베라프에서 천재라 불리던 인간들에 비한다면 지독할 정도로 습득이 늦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인간 특유의 성장 속도를 기반으로 몇 천 년간 마법을 파고든 결과, 인간의 몸으로 마왕급까지 성장해 버린 것이다.

    마족들은 태생적으로 마나를 베이스로 삼기에 인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강하지만, 인간만큼의 성장 속도를 보이지는 못한다. 되레 인간에 비한다면 성장이 거의 없다고 말해야 할 수준이다.

    그러니 이지혁의 경우는 이해가 가지만…….

    '이 인간은 겨우 반백 년도 살지 못했다.'

    그런데 어떻게 이만한 급에 오를 수 있다는 말인가.

    반백 년 만에 인간이 마왕 이상의 힘을 손에 넣는다고? 어떻게?

    성장한 인간이 마왕보다 강할 수는 있다.

    알파의 말대로 바퀴벌레가 인간만 한 크기가 된다면, 인간은 아무것도 해보지 못하고 학살당할 것이다. 인간뿐 아니라 어떤 생명체도 바퀴벌레를 당해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가 가진 의문은 커다래진 바퀴벌레가 왜 이렇게 강한가가 아니라, 어떻게 바퀴벌레가 이렇게 커질 수 있었는가다.

    "어떻게 그리 강해질 수가 있는 거지?"

    "아아……."

    알파가 한숨을 쉬었다.

    "너무 그렇게 비꼬지 말라고, 얻어걸린 거 아니니까. 나는 이 힘을 얻기 위해서 자존심이고 뭐고 다 버리고 강아지처럼 알랑거려야 했으니까. 뭐, 알고 보니 그게 원래 내 성격에 좀 더 부합했다는 것을 알게 된 건 의외의 성과였지만 말이야. 시대가 이런 시대가 아니었다면 나는 아마 간신이 되지 않았을까? 그게 아니면 1인자에게 구박받으면서도 일은 다 처리하는 2인자가 되었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뭐라는 건가, 인간."

    "간단해. 그냥 나를 이렇게 만들어줄 수 있는 자에게 땡깡을 좀 부렸지. 나 좀 세게 만들어 달라고 말이야. 결과는 내가 생각하는 것을 아득히 초월해 버렸지만 말이지."

    알파가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그럼 대체 이지혁은 얼마나 강했다는 거지?'

    지금 그의 힘은 이지혁에게서 나왔다. 마나와 에테르를 적절히 섞어내는 것만으로도 원래 그가 가지고 있는 힘의 수십 배의 출력을 낼 수 있다는 걸 이지혁이 알려줬으니까.

    하지만 이만한 힘을 냈음에도 불구하고 이지혁은 알파의 강함이 충분치 않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이 마왕 놈들도 지금 그의 손에서 벌레처럼 찢겨 나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알파를 이지혁급으로는 여기지 않고 있지 않은가.

    '더구나 과거의 이지혁은 에테르를 다루지 못했다.'

    에테르와 마나의 혼용이 힘을 올려주는 것은 그에게만 작용하는 이점이 아닐 것이다. 정도는 달라도 이지혁에게 수련을 받은 이들은 다들 에테르와 마나를 혼용해서 그 힘을 극대화시켰으니까.

    그렇다면 이지혁 역시 둘을 섞어 쓰는 것만으로 과거보다 강한 힘을 낼 수 있다는 뜻이 된다.

    '몸이 버틸 수 있다면 말이지.'

    일반인에 비한다면 강철과도 같은 알파의 육체도 둘의 융합을 버거워하고 있었다. 그러니 나약해진 이지혁의 몸이 그걸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지혁의 육체는 일반인에 비해 나은 면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까.

    최근 에테르를 활용하게 되면서 나름 강화계의 능력을 손에 넣은 정도이지만, 알파의 육체가 강철이라면 이지혁의 육체는 푸딩수준이었다.

    '그가 전성기였을 때 에테르를 얻었다면 세계의 밸런스가 깨졌겠지.'

    딱히 그럼 어떤 위용을 보여주었을까 궁금하지는 않았다. 호러 영화는 취향이 아니다. 호러도 귀신이 나오는 거나 재미있지, 코즈믹 호러는 지양하는 알파였다.

    "이봐, 나 하나 물어봐도 될까?"

    툴레앙이 가만히 알파를 바라보았다.

    "지금 내가 마왕 둘을 상대로 나름 잘 싸우고 있는 것 같은데, 지금의 나를 과거의 이지혁과 비교하면 어떻지? 나는 이지혁의 수준에 근접했나?"

    툴레앙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이지혁? 아흔아홉 번째 마왕? 네가 지금 아흔아홉 번째 마왕의 힘을 논하는 건가?"

    툴레앙의 반응은 꽤나 격정적이었다.

    "하찮은 인간이 힘을 조금 얻더니 눈에 보이는 것이 없어진 모양이구나. 인간이여, 너는 그저 인간일 뿐이다. 인간으로서 마왕의 위에 오른 그가 얼마나 위대했는지 너는 결코 알지 못한다."

    "참 이상한 사고방식이로군. 인간은 하찮다고 무시하는 주제에 인간의 몸으로 마왕에 오른 이지혁은 마왕으로 인정하는 것인가?"

    "마왕이란 호칭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니까. 심지어 벌레일지라도 마왕의 위에 올랐다는 것은 그 격을 인정받았다는 의미다. 너 따위는 결코 알 수 없겠지."

    "아아, 그래. 그 지고한 마왕의 위에 올라서 하찮은 인간 따위에게 처 발리고 계신 마왕님의 마왕 찬양가는 들을 만큼 들었어. 결론만 간단히 말해주면 좋겠는데 말이야. 그래서 이지혁과 나의 격차는 어느 정도지? 전성기를 기준으로 말이야."

    "너희의 시간으로 따지면 십 초?"

    툴레랑이 낄낄대며 웃었다.

    인간이 아닌 툴레랑의 얼굴이 일그러진 것을 웃음으로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의 감정은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비웃음.

    "너 따위가 십 초를 버틸 수 있다면, 죽어서도 자랑할 만한 수준이지."

    "…너, 지금 나한테 지고 있거든?"

    "그래, 나도 십 초를 버틸 수 없겠지. 하지만 너도 마찬가지야. 너는 진심으로 날뛰는 이지혁을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겠지. 마계가 단 한 사람 때문에 공포에 떨었던 순간이 있었다는 걸 너는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감히 네가 이지혁과 비교되기를 원한다고?"

    툴레랑이 광소를 터뜨렸다.

    "하찮은 인간이여, 고작 그 정도의 힘을 손에 넣었다고 네가 무엇이라도 되는 척하는구나. 인정한다. 나는 너의 힘에 미치지 못한다. 너는 마왕을 능가한 전무후무한 인간으로 남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 너희의 역사가 전해진다면 말이다. 하지만 그뿐, 너는 결코 살아남지 못한다. 내 장담하건대, 너는 뜨는 해를 보지 못할 것이다."

    "이건 또 뭐랄까, 아주 생소하고도 재미있는 협박이로군."

    알파가 피식 웃고는 말했다.

    "하지만 지금 네 걱정을 하는 게 우선 아닐까? 다른 수가 없다면 너는 지금 내 손에 죽을 텐데 말이야?"

    "큭큭큭, 그건 치욕스러운 일이지. 하지만 상관없다. 너 역시 나의 뒤를 따르게 될 테니까 말이야. 바르바체 님께서 네놈들을 단 하나도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

    "…아아, 뭔가 한심한 느낌인데. 마왕이 어쩌고 하면서 엄청 잘난 척을 해 대더니, 결국은 더 센 마왕에게 의지하는 게 너희의 방식인가 보지? 마왕으로서의 자부심은 어디다 팔아먹었나?"

    "큭큭큭큭."

    치욕적으로 들릴 수 있는 말임에도 툴레랑은 화를 내지 않았다.

    "그분과 비교되어 하찮은 놈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지. 인간이여, 지금을 즐겨라. 겨우 하루밖에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동안을 마음껏 누리고 마음껏 즐겨라."

    알파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곧 그분이 나서게 되면 너희는 진정한 절망이……."

    콰드드드득!

    알파의 발이 툴레랑의 머리를 짓밟아 터뜨렸다.

    "말이 많다니까."

    알파가 고개를 저었다.

    다른 마왕 놈은 그새 도주했는지 보이지 않았다. 다 잡은 마왕을 놓쳐 버린 것이지만, 그런 것쯤은 아무래도 좋았다.

    "어이, 대장."

    "음?"

    "저쪽에서도 마왕들이 슬슬 몰려오는 모양인데?"

    등 뒤로 다가와 소리치는 부하의 목소리를 들으며 알파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더럽게도 몰려오는군."

    "저들도 총력을 다하겠지. 오늘 모든 게 결정이 난다면 말이야."

    알파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마족과의 싸움이 끝난다고 해서 모든 게 끝나는 건 아니야. 되레 그때부터 시작이지."

    "알아, 대장."

    "목적을 잊지 마. 이건 그저 거쳐 가는 단계에 지나지 않아. 우리는 더 높은 곳으로 간다."

    "물론이지. 그러니 모두가 대장을 따르고 있는 거잖아? 그 지랄 맞은 성격을 받아내면서 말이야."

    "…지랄 맞은 성격이라……. 이지혁을 경험하고도 그런 말이 나오는 모양이군."

    그 말에 부하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NDF는 다 사이코 놈들이야. 어떻게 그런 인간이랑 하하호호 하면서 지낼 수가 있는 거지? 빌어먹을, 소름 돋는군."

    "큭큭큭큭."

    알파는 슬쩍 뒤로 눈을 돌렸다.

    그곳에는 머리가 깨진 툴레랑의 시체가 놓여 있었다.

    '바르바체라는 놈이 그렇게 강하다는 거로군.'

    알파가 가만히 입술을 핥았다.

    기꺼움이 몰려오고 있었다.

    "재미있어지겠어. 아주 말이야."

    "그전에 일단 눈앞에 놓인 문제부터 해결해야겠지. 애들 모여 있어."

    "알겠어, 알겠다고. 너희는 날 부려 먹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 모양이군."

    투덜거리며 알파가 걸음을 옮겼다.

    이 싸움을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은 그에게도 없었다. 마왕들의 힘을 감안한다면 지금도 승산 없는 전쟁을 하고 있다는 것이 맞는 소리일 것이다.

    그럼에도 알파는 웃을 수 있었다.

    '세상은 지옥이 되었지만, 예전 우리가 있던 곳에 비하면 여긴 천국이지.'

    알파가 새하얗게 웃었다.

    * * *

    "갈겨!"

    정인수는 목이 터져라 외쳤다.

    그가 목소리를 높인다고 해서 탄이 빨리 나가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정인수는 근성론을 혐오하는 자였으니까.

    낙후된 장비와 체계를 정신력으로 극복하라는 선배들의 가르침에는 학을 뗀 정인수다. 그런 쌍팔년대 사고방식이 도태를 부른다는 신념으로 살아온 정인수다.

    하지만 지금 정인수는 눈을 부라리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지휘관은 항상 침착, 냉정해야 한다고 생각하던 그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다만…….

    '그래서 뭐 어쩌라고!'

    지금 같은 상황에서 침착할 수 있다면, 그건 그 사람이 대단한 것이지 흥분하는 사람이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 없었다. 인류의 운명이 결정지어지는 전쟁인데, 어떻게 흥분하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

    "갈기라고!"

    "예!"

    게이트는 끝도 없이 늘어나 있었다. 그리고 게이트에서 나오는 마수들은 개미굴에서 적을 향해 튀어나오는 개미들처럼 새까맣게 밀려 나오고 있었다.

    '빌어먹을, 마계에는 마수들이 얼마나 많은 거야?'

    폭격이 계속되고 있었지만, 마수들을 모두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폭격만 가하는 것이 아니라 중간중간 전술핵까지 떨어뜨리고 있는데도 워낙 게이트를 통해 나오는 개체 수가 많다 보니 그 많은 마수들을 모두 감당하지 못하고 있었다. 폭격 지대를 빠져나오는 마수들을 향해 포격을 가하고는 있지만, 그것 역시 한계가 있었다.

    "밀립니다!"

    "큭!"

    정인수의 눈이 앞쪽으로 향했다.

    앞쪽 라인에 바리게이트를 친 KSF들에게 부담이 가중되어 갔다.

    '빌어먹을, 원래 능력자들은 탱커로 쓰는 게 아니란 말이다.'

    과거 몬스터들만 상대해도 됐을 때는 능력자들이 공격을 맡고 바디 벙커를 낀 일반 군인들이 바리게이트를 쳤다. 능력자들의 육체가 일반인에 비해서 그리 강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 역할이 거꾸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일반인들은 단 1초도 마수들의 공격을 막아낼 수 없기에 능력자들을 앞으로 들이밀 수밖에 없었다.

    '회피 찍은 도적을 탱시키는 느낌이지만.'

    그렇다고 마법사를 탱시킬 수는 없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 아닌가. 그래도 나름 정인수가 생각이 없지는 않았다. 전방에 거대한 장갑차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장갑차는 마수들의 갑피를 뚫을 수가 없어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다고 판단되어 전열에서 이탈했지만, 정인수는 그 장갑차를 바리게이트로 썼다. 무게가 25톤 이상이나 되기 때문에 적당히 버티는 수준은 되었다.

    살짝 띄워서 배치해 놓은 장갑차들 사이로 능력자들이 오갈 수 있게 해 항상 전선에 노출되는 부담을 줄이겠다는 계획이었다. 물론 마수들이 진짜로 들이밀기 시작하면 25톤의 장갑차가 공깃돌처럼 허공을 날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종이 방패라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는 게 정인수의 판단이었다.

    콰아앙! 콰아아앙!

    바리게이트 앞쪽에 매설해 놓은 대전차지뢰가 펑펑 터져 나가고 있었다. 그 폭발에 휘말린 마수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지만, 정인수의 얼굴은 그럴수록 더더욱 어두워졌다.

    지뢰라는 건 1회용 병기다.

    마수들이 모든 지뢰를 밟아버리면 그 이후로는 추가 매설이 불가능하다. 그 순간부터 공세는 더욱 거세어질 것이다. 정인수는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연발로 처 갈기라고!"

    "탄이 모자랍니다!"

    "지금 정해민 씨가 죽어라고 탄 날라주고 있으니까, 그냥 갈기라고! 공장에서 생산되는 대로 태평양을 격해서 탄이 오고 있다고 했잖아!"

    "예! 알겠습니다!"

    콰아앙!

    그래도 희망은 있었다.

    '통하긴 통하는군!'

    미국에서 지원해 준 M-3가 마수들을 상대로 적절한 효력을 발휘해 주고 있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었다. 일전의 지상군은 마수들을 저지하는 역할은 수행할 수 있어도 직접적인 타격을 줄 수는 없었다.

    1개 대대가 한 곳으로 화력을 집중해야 겨우 한 마리 잡을 수 있을까 말까였는데, 쏘면 쏘는 대로 잡아주는 무기가 있다는 것이 이리도 힘이 될 줄 몰랐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인데 말이야.'

    과거의 전쟁은 탄을 명중시키는 것이 중요했다. 모든 공격을 완벽하게 막아내는 장갑 따위는 존재하지 않으니까. M-3의 존재 가치는 단순히 화력에 있지 않았다. 전술을 발휘할 수 있는 매개체가 있다는 것이 더없이 중요한 일이었다.

    "밀립니다!"

    전방에 배치한 장갑차들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알아, 새끼들아!"

    밀리는 건 당연한 것이다. 애초에 밀릴 수밖에 없는 일이었으니까.

    "후방에 장갑차 2열 배치하고, 상황 봐서 KSF 애들 뒤로 밀라고 해! 저격 부대는 뭐하는 거야!"

    "갈겨 대고는 있습니다만……."

    코끼리도 한 방에 잡을 수 있는 대물저격총조차 마수들에게는 큰 효용이 없었다.

    "버텨내야 해! 여기서 못 버티면 정말 끝장난다!"

    "예!"

    정인수가 초조함을 담고 전방을 바라보았다.

    '힘들다는 건 모두가 알아.'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다. 힘들다고 포기하면 누군가 대신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모두의 목숨을 위해서 모두가 버텨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하루만……."

    지그시 깨문 입술에서 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

    콰아앙!

    머리 위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비행형 몬스터들을 잡기 위해 출동한 전투기들은 마치 장난감처럼 터져 나갔다. 지상에서 벌어지는 격차보다 하늘 위의 격차가 몇 배는 더 심각했다.

    화력이야 전투기들이 압도한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마수들의 기괴한 움직임을 전투기들이 잡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수들은 어느 정도 공격을 받는다고 해도 완전히 리타이어하는 것이 아니지만, 전투기들은 방어력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예 존재하지를 않았다.

    몸으로 부딪쳐 오는 마수들에게 회피 기동이 통할 리가 없다. 플레어도, 회피도 의미가 없었다. 그저 포착이 되면 얼마나 시간을 끌다가 추락하는가만 남을 뿐이었다.

    '안 되는데…….'

    정인수가 절박한 심정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하늘이 뚫리게 되면 남는 것은 학살밖에 없다. 자신들이 구성하는 화망으로는 공중에서 공격하는 마수들을 막아낼 수 없을 것이다.

    머리 위에서 공격하는 마수까지 상대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면, 그 이후로 어찌 될지는 불을 보듯 빤했다. 순식간에 진형이 와해될 것이다.

    안 그래도 밀리고 있는 상황에서 그리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너무 빤하지 않은가.

    "빌어먹을, 위쪽 지원해!"

    "방법이 없습니다."

    "상부에 연락해서 헬기라도 출동시키라고! 천궁 준비시키고!"

    "…안 통합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빌어먹을."

    어차피 쉽지 않은 길일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런 식으로 변수가 생길 줄은 몰랐다.

    저걸 어떻게 막아내야 한단 말인가.

    "대체 어떻게 하란 거야!"

    정인수가 고함을 지르는 동안에도 전투기들은 맥없이 추락하고 있었다. 전투기 대상의 공중전을 상정하고 개발된 전투기들은 서로를 잡아내고 무력한 곳을 폭격하는 것에는 확실한 능력을 발휘했지만, 동등한 능력과 앞도적인 방어력으로 무장한 비행형 마수들 앞에서는 그저 무능력한 고철 덩어리로 전락하고 말았다.

    마지막 전투기가 추락하는 광경을 본 정인수의 눈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세계 어느 국가에도 당당하게 내세울 수 있을 대한민국 공군이 궤멸하는 순간이었다.

    "…제길."

    막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딱히 방법이 없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정인수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고 말았다.

    이제 저 마수들이 방향을 바꾸어 그들 쪽으로 달려들거나 그들을 지나쳐 시가지로 난입하게 된다면, 말 그대로 현실에 지옥이 열릴 것이다.

    "아오, 짜증나."

    그때, 정인수의 등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이, 이지혁 씨!"

    돌아가신 아버지가 살아 돌아와도 이처럼 반갑지는 않을 것이다. 정인수가 기겁을 하여 이지혁에게 달려들었다.

    "어, 어떻게 좀 해주세요!"

    "내가 무슨 도깨비 방망이도 아니고, 문제만 생기면 어떻게 해달래요!"

    "…방법이 없으니까!"

    "에이, 진짜."

    이지혁이 혀를 찼다.

    원래의 이지혁이라면 이 순간에 독설을 내뱉었겠지만, 이번에는 그 정도로 그칠 수밖에 없었다. 떨어진 전투기 안에는 사람이 타고 있고, 그들은 최선을 다하다 죽었다.

    그런 이들을 모욕할 수는 없는 법이다.

    "힘쓰면 안 되는데……."

    이지혁이 쩝, 입맛을 다셨다.

    저만한 마수들이야 그 혼자서도 상대할 수는 있지만,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생각하면 마나를 최대한 아껴야 하는 법이다. 일이 잘 풀려 지금 쓴 마나를 보충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정신력의 소모는 보충할 길이 없다.

    이곳에 자리를 깔고 누워 잘 수 없는 이상은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도 없고.

    "어쩔 수 없지, 뭐."

    이지혁이 양손을 천천히 벌렸다.

    그와 동시에 그의 양손에 자리한 드래곤 하트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뭐, 뭐지?'

    정인수는 기이한 느낌을 받으며 기겁을 했다.

    주변의 모든 것이 이지혁을 향해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바람이 부는 것도 아니고, 그 흔한 흙먼지 하나 일지 않았다. 그럼에도 세상이 이지혁에게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이게 마나라는 건가?'

    바람 한 점 없는 곳에서 이지혁의 머리카락이 허공으로 치솟아 올라 흔들렸다.

    이지혁의 눈동자가 새하얀 섬광을 토해낸다 싶더니, 그 순간 이지혁이 양손을 허공으로 들어 올렸다.

    * * *

    "전멸했습니다."

    "…제기랄."

    송정수가 이를 갈았다.

    어떻게든 상황을 유지해야 하건만, 공군이 궤멸하고 만 것이다. 공군이 무능하다고 질타할 상황이 아니었다. 육군도 능력자들의 지원 없이 몬스터와 싸웠다면 지금쯤 공군과 같은 꼴이 되었을 것이다.

    되레 추가 지원을 받을 수 없는 상태에서 용감하게 출격해 전장의 불꽃으로 산화한 이들을 칭찬해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감정은 감정이고, 이성적으로 본다면 최악의 위기가 일어나고 있었다.

    "어, 어떻게든 막아야 하는데! 자위대는 어떻게 됐나! 자위대에서 공군을 지원하기로 했지 않은가!"

    "이미 출격했습니다! 다만, 비행형 마수들의 출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라… 출격에 시간이 걸립니다. 동해를 뚫고 와야 해서 5분은 더 걸립니다."

    "빌어먹을, 그 시간이면 지상이 개박살이 난단 말일세!"

    송정수가 비명을 질렀다.

    "NDF는!"

    "이탈할 수 없습니다! 마왕과 교전 중입니다!"

    "방법이 없는가?"

    송정수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전력은 이미 총가동되고 있었다. 공중의 상황에 대처할 여유 병력이 없었다.

    막 절망에 빠진 말을 내뱉으려던 송정수의 귀에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저, 저기!"

    "음?"

    화면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군의 한가운데서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온다.

    "클로즈업해!"

    화면이 앞쪽으로 쭉 빨려 들어가며 빛을 뿜어내고 있는 이지혁의 모습이 잡혔다.

    "이지혁!"

    "이지혁 씨!"

    허공을 바라보고 있던 이지혁이 양손을 허공을 향해 들어 올렸다. 눈부신 빛과 함께하는 이지혁의 모습은 지금까지와는 너무도 다른 모습이었다.

    평소에는 악마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마법을 활용하던 이지혁이 지금은 마치 빛의 수호신 같은 형태를 보이고 있지 않은가.

    송정수가 초조한 얼굴로 양손을 움켜잡았다.

    * * *

    이지혁의 몸에서 뿜어져 나간 빛이 하늘로, 또 하늘로 치솟기 시작했다.

    '저거, 지금까지랑은 양상이 조금 다른데?'

    그리고 이지혁은 힘을 잃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송정수의 얼굴에 의문이 어렸다.

    이지혁이 자신의 힘을 잃었다는 사실 때문에 한국이 얼마나 궁지에 몰렸던가. 나중에야 이지혁이 가지고 있는 마나에 대한 정보와 이해도가 능력자들을 강화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다시 그 위상을 되찾은 것뿐이다.

    실제로 일전의 전투에서도 이지혁은 전혀 힘을 보태지 않았다. 그걸 이상하게 여기지 않은 것도 이지혁이 힘을 잃었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이지혁은 빛을 내뿜고 있다. 당연히 일반인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능력을 되찾았나?'

    "평소와는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만?"

    윤영민의 말에 송정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평소의 모습과는 달랐다. 이지혁의 능력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어떤 능력이라 해도 항상 검은 기운을 내뿜었다.

    '이지혁과 흰빛이라니, 이렇게 어울리지 않는 것도 없을 거야.'

    항상 사악한 검은빛을 내뿜던 이지혁이 아닌가. 그런데 새하연 빛이라니…….

    송정수는 심각한 눈으로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이지혁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빛이 허공으로 날아든다. 그러더니 허공에서 뭉쳐 들기 시작했다.

    빛이 뭉친다는 표현은 조금 이상하지만, 사실이 그랬다. 뿜어져 나간 빛은 이지혁의 머리 위쪽 허공에 집결하여 빛나는 거대한 원형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마치 빛을 뿜어내는 태양처럼 말이다.

    '…저게 뭐지?'

    지금까지 이지혁이 보여주던 전투의 방식과는 확연하다고 해도 좋을 만큼 달랐다.

    송정수의 궁금증을 풀어주겠다는 듯이 그 순간 이지혁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늘로 들어 올린 손이 좌우로 쫙 펴지자, 허공의 뭉쳐 있던 빛들이 사방으로 쫘악 펼쳐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아아아아아아아.

    순간, 송정수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마치 누군가가 합창이라도 하는 듯한 소리와 함께 허공에 뭉쳐 있던 빛들이 날아드는 비행형 마수의 떼를 향해 쭉 뻗어지며 그들의 육체를 비추기 시작했다.

    카아아아아악!

    크아아아아아악!

    빛에 닿은 비행형 마수들이 기괴한 비명을 지르며 마구 몸을 뒤틀었다. 빛을 봐서는 안 되는 뱀파이어들이 빛에 노출되어 연기를 뿜어내며 타들어 가듯이 몬스터들의 육체가 짙은 연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저, 저게 뭐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상황에 송정수가 당황하기 시작했다.

    * * *

    "쿨럭."

    이지혁이 헛기침을 했다.

    "아오, 씨."

    메스꺼움이 배 속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흑마력을 받아들였을 때 받는 느낌을 이지혁은 평범한 마나를 받아들이면서 느끼고 있었다.

    그만큼이나 지금 이지혁의 몸이 흑마력에 동화되었다는 뜻일 것이다.

    "효과 죽이네."

    이지혁이 타들어 가는 비행형 마수들을 보며 헤, 입을 벌렸다. 지금 그가 사용한 마나는 평소 흑마법을 사용할 때 쓰던 마나량의 십분의 일도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마계에서 넘어온 마수들이 픽픽 추락하고 있었다.

    이지혁은 그 광경을 보며 심각한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 대체 그 인간들은 얼마나 무능했다는 거야?"

    흑마법을 베이스로 마수들을 상대하는 것보다 일반 마법이나 백마법을 베이스로 상대하는 것이 훨씬 쉽다. 다만, 이전까지 이지혁은 일반 마법을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

    사용하기가 어렵기도 했고 말이다.

    그래서 알지 못하던 사실인데, 막상 백마법을 사용해 보니 마수들이 별것 아닌 공격에도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대마법사는 얼어 죽을."

    그럼 그 대마법사라고 뻐기던 놈들은 이만큼이나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도 마수와 마왕을 제대로 감당 못해서 벌벌 떨고 살았다는 말인가.

    갑자기 베라프에서 지낸 시간에 회의감이 밀려드는 이지혁이었다.

    "…이해 못할 건 아니지만 말이야."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 이지혁이 한숨을 내쉬었다.

    직접적인 타격이 들어가는 것도 좋고, 마수들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결정적인 문제가 하나 있었다.

    '잘 안 죽네.'

    흑마법을 이 정도로 퍼부었으면 깔끔하게 죽어야 할 것들이 아직 죽지 않고 발악하고 있었다.

    효과는 즉각적이지만, 살상력이 부족하다. 그리고 마력의 특성 때문인지 광역 마법은 쉽게 활용할 수 있지만, 단일 개체에게 많은 마력을 쏟아붓기가 힘들었다.

    대규모 전투에서 지원의 형태로는 최상이지만, 마왕을 잡아낼 만한 화력을 낼 수 없다는 것이 단점이었다.

    "뭐, 적당히 섞어 쓰면 되겠지."

    이지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광역으로 쓸어버리는 거라면 지금의 그보다는 서아영이 더 잘할 것이다. 그는 그저 본인이 할 수 있는 것만 하면 된다. 예를 들면 시간 끌기라든지 말이다.

    과아아아앙!

    귀를 찢는 소음과 함께 전투기들이 쇄도하기 시작했다. 이지혁의 마법에 맞아 헤롱대는 마수들을 향해 전투기가 날린 미사일들이 정확하게 격중되며, 하늘이 마치 불꽃놀이를 하는 것처럼 폭염으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콰콰쾅! 콰콰콰쾅!

    폭음을 들으며 이지혁이 미간을 좁혔다.

    "여하튼 저 쪽발이 새끼들이 진짜."

    빨리빨리 좀 올 것이지, 늦게 와서 한국 공군이 전멸하는 상황을 만들어 버리지 않았는가.

    "쯧."

    저들이 웬만큼만 마수를 상대해 줬더라도 이지혁이 이처럼 마나를 낭비할 일은 없었겠지만… 이미 이리되어 버린 것,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마나를 낭비하든, 낭비하지 않든 지금의 이지혁은 마왕급을 일대일로 상대할 수는 없었으니까.

    "상대야 쟤들이 하겠지, 뭐."

    이지혁이 고개를 돌려 한창 격전을 벌이고 있는 NDF들을 바라보았다.

    * * *

    "으아아아아아!"

    김다현의 검이 아무바젤의 목을 가르고 지나갔다.

    콰득!

    검이 정확히 목에 박혀들었지만, 단단한 마왕의 육체는 아무리 마검이라 하더라도 쉽게 자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큭!"

    하지만 성과는 있었다.

    안쪽으로 3㎝가량 잘려진 목에서 시퍼런 피가 콸콸 흘러나온다.

    "이 벌레 같은 놈이!"

    콰아아아앙!

    아무바젤이 휘두른 손이 바닥을 뒤집어 올리며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주먹으로 바닥을 내려친 것뿐인데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마냥 주변이 들썩였다.

    "와, 씨……."

    훌쩍 뒤로 물러난 김다현이 이마에 흘러내린 땀을 닦아냈다.

    "저거 맞았으면 즉사했겠지?"

    "아쉽군."

    윤혁규가 입맛을 다셨다.

    "시끄러운 놈 하나 사라지는 거였는데."

    "와! 형, 진짜 그건 아니다. 내가 형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좀 닥쳐라, 인마."

    윤혁규가 태연하게 김다현과 대화를 나누지만, 지금 상황이 그리 녹록한 것은 아니었다.

    '되레 죽을 맛이지.'

    윤혁규가 손을 풀었다. 후드득거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마음이 좀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빌어먹을, 대체 몇 놈이 오는 거야?"

    이미 전선으로 합류한 마왕이 넷이다. NDF가 아무리 강해졌다고는 하나 마왕 넷을 동시에 상대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아니, 냉정하게 말해서 무리였다.

    하지만 지금은 힘들고 어렵다고 해서 하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이다. 어떻게든 해내야 한다는 것이 맞았다.

    "재수도 없지, 빌어먹을."

    윤혁규가 바닥에 침을 탁, 뱉었다.

    "이 빌어먹을 놈들이."

    "…뭐라는 건지 모르겠네."

    마왕이 뭐라고 지껄이고는 있었다. 하지만 윤혁규는 그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동화책 같은 곳에서 보면 악마는 인간의 말을 하던데, 왜 저놈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제 말로만 지껄이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하기야 쟤들은 우릴 유혹할 생각이 없을 테니까.'

    단순히 다 싸잡아서 죽이고 마이너스 에너지를 강탈하려 드는 마왕들에 비한다면, 이야기책에 나오는 악마들은 정말 신사적인 놈들이었다.

    적어도 그들은 인간과 대화를 하고, 계약과 계략을 통해 영혼을 받아가려는 놈들이지 않은가.

    "무식한 마족 놈들보다야 백배는 낫지."

    윤혁규가 입술을 핥았다.

    '자, 어찌한다?'

    김다현이 홀로 고군분투를 하고 있지만, 윤혁규는 할 수 있는 것이 한정되어 있었다.

    윤혁규의 파괴력은 NDF 내에서도 최상위다. 단일 개채에게 한 방 먹이는 것으로 따지면 아마 NDF 최고일 것이다. 이리 들으면 무척이나 강한 듯이 들리지만, 아쉽게도 윤혁규는 사거리가 무척이나 짧은 근접형 능력자였다.

    어설프게 한 방 먹이러 들어갔다가는 윤혁규의 뼈와 살이 순식간에 분리되고 말 것이다. 아니, 뼈와 살이 사라지고 말 것이다.

    김다현은 속도가 있어서 저 아무바젤이라는 마왕의 공격을 피해낼 수 있지만, 윤혁규는 그 정도의 회피력을 가지지 못했다. 덕분에 김다현이 지금 죽어라고 아무바젤의 틈을 만드는 중이었다.

    예전이었다면 파리가 앵앵대는 수준이었겠지만, 이지혁에게 마검을 받아 공격력을 보완한 김다현은 벌이 앵앵대는 수준으로 아무바젤을 귀찮게 할 수 있었다.

    그 김다현에게 시선이 쏠린 동안 통렬한 한 방을 꽂아 넣는 것이 윤혁규의 임무였지만…….

    "빌어먹을… 더럽게 신경 쓰네, 저 새끼. 무식하게 생겨 가지고."

    얼굴은 두어 번 도발해 주면 지옥 끝까지 돌진하게 생겨 가지고 하는 짓은 여우같았다. 김다현을 쫓는 와중에도 결코 윤혁규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아무바젤이었다.

    덕분에 김다현이 계속 아무바젤의 시선을 끌어야 했고, 그 결과…….

    '느려지고 있어.'

    눈에 확연히 보일 만큼 김다현이 지쳐 가고 있었다.

    무리도 아니다.

    살짝만 스쳐도 죽는다는 압박감을 이겨내며 그 앞에서 곡예를 펼쳐야 하는 사람의 정신력이 얼마나 빨리 소모되겠는가. 아무리 김다현이 겁대가리를 상실한 놈이라고 해도 버티는 데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이대로 시간이 더 지나면 결국 김다현이 피할 수 없게 되는 순간이 올 것이다.

    그 사실을 직감한 윤현규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모험이 필요하다.'

    저 마왕이라는 놈은 아무래도 스태미나라는 개념이 없는 모양이었다. 힘을 소모해도 김다현의 몇 배는 더 소모하고 있을 텐데, 전혀 지치는 기색이 없었다. 이대로라면 결과는 빤하다.

    "야! 다현아! 이쪽으로!"

    결단을 내린 윤혁규가 김다현을 불렀다.

    "허억!"

    순식간에 아무바젤의 곁에서 멀어져 윤혁규의 옆에 나타난 김다현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허억! 허억!"

    아무바젤의 시선이 이쪽으로 꽂힌다.

    "크아아아! 이 쓰레기들!"

    아무바젤이 달려들기 시작하자 김다현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야, 나 잡고 뛸 수 있냐?"

    "그게 뭔 소리야, 형?"

    "나를 뒤에서 잡고도 그만한 속도 낼 수 있냐고."

    "…그야 무리지."

    "반은 나오냐? 속도?"

    "반까지 줄지는 않을 거야. 그런데… 설마 지금 나보고 형 들쳐 메고 저 새끼 주변을 알짱대라는 소리는 아니지?"

    "바로 맞췄다."

    "씨발… 이래서 어제 시간 났을 때 휴식을 할 게 아니라 정신병원 가서 검진부터 받았어야 하는 건데."

    그만큼 스트레스를 받았으니 다들 사이코로 전직했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닥치고 시작해! 아니면 우리 둘 다 죽어!"

    "아오! 빌어먹을!"

    김다현이 윤혁규를 반쯤 들쳐 메듯 업더니, 앞쪽으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쓸데없는 데서 창의력이 좋아! 이 미친 인간아!"

    * * *

    "빌어먹을!"

    서아영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확실히 마왕을 상대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한 번의 승리를 거두었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마왕의 수는 거의 줄지 않았으니까.

    서아영은 서서히 몸이 무거워지는 걸 느꼈다.

    피곤해서?

    아니다.

    서아영은 인류 최후의 날을 버텨내야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이제야 비로소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중압감은 그녀의 상상 이상이고, 그 중압감이 점점 그녀의 몸을 무겁게 만들었다.

    '이놈을 처리한다고 해도 앞으로 몇이나 더 상대해야 하는 거지?'

    전력 자체가 저쪽이 더 강한데, 수마저 저쪽이 많다는 것은 사기적인 일이었다. 약소국이 강대국을 상대해야 할 때 느끼는 딜레마를 서아영은 지금 이 순간 고스란히 체감하고 있었다.

    이들을 처리한다고 해도 저쪽은 여유 전력이 있지만, 이쪽은 서아영 등이 죽어버리면 대체할 수 있는 존재가 없었다.

    퉤!

    바닥에 피가래를 뱉어낸 서아영이 이를 갈았다.

    "썩을 마왕 새끼들. 생긴 것도 엿 같은 것들이."

    곤충과 비슷한 얼굴을 한 마왕이 그녀를 보며 입을 열었다.

    "겨우 그 정도인가?"

    "난 너희 말 못 알아듣는다고, 이 새끼들아."

    "아, 실례. 너희의 지능을 생각하지 못했군."

    서아영이 순간 놀라 마왕을 바라보았다.

    "우리말을 할 줄 알아?"

    "언어 정도 익히는 거야 너희 시간으로 한 시간이면 충분하지. 너희의 저열한 머리와 비교하지 말아줬으면 좋겠군."

    "메뚜기 같이 생긴 놈이!"

    서아영이 이를 갈았다.

    모 특촬물 주인공처럼 생긴 놈에게 무시당하는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메뚜기가 인간을 저열하다고 까면 이런 기분일까?

    "쉽게 흥분하고, 쉽게 화를 내는 것이 인간의 특징인 것 같군. 이런 생물체가 세계의 주도권을 가진다는 것은 참 슬픈 일이야. 인간이란 무척이나 재미있는 생물이란 말이지."

    "메뚜기도 충분히 재미있어."

    "그런 점이 특히나 재미있지."

    마왕이 얼굴을 뒤틀었다.

    "저항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인가? 이해할 수 있는 머리가 없는 것인지, 아니면 이해하려 들지 않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군."

    "내 불꽃 아래 새까맣게 타버린 니 친구도 비슷한 말을 지껄였을 것 같은데? 너도 같은 꼴이 되고 나서 그런 말이 나올까?"

    "확실히 그건 불행한 일이었지."

    메뚜기 마왕, 볼로낙은 더듬이를 움직이며 서아영을 위협했다.

    "하지만 그건 너희가 수로 밀어붙인 결과가 아니던가. 지금 네 주변에 너를 도와줄 사람은 없는 것 같은데, 같은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너희의 지능이 딸린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 정도 계산도 못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는데… 이건 좀 실망스러운 결과군."

    "입 하나는 진짜 잘도 돌아가는군. 혀도 없는 게 말이야."

    서아영이 양손으로 불꽃을 내뿜었다.

    말은 의미가 없다. 시간을 지연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효과가 없다.

    그리고 시간을 지연한다는 건 이쪽의 손해였다.

    '다른 쪽들은 더 위험하겠지.'

    서아영이 이리 밀리는 상황이라면, 다른 쪽은 보지 않아도 빤했다.

    '많이도 몰려왔네, 썩을 새끼들.'

    이 작은 한국이라는 땅에 다섯이나 되는 마왕이 투입되었다는 것이 전력 차 때문인지, 아니면 저들이 이곳을 확실하게 밀어버리기로 결심한 덕분인지 알 수가 없었다.

    서아영이 알 수 있는 것은 다섯이라는 마왕이 전해 주는 압박감뿐이었다. 마수라도 없으면 어떻게 해볼 수 있을 것 같은데, 마수들을 상대하느라 일반 능력자들과 군이 모두 묶여 있는 상태에서 NDF만으로 다섯이나 되는 마왕을 상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불평해 봐야 달라지는 것은 없지만 말이다.

    "절망스러운 얼굴이군."

    "…뭐?"

    "이미 알고 있다는 얼굴이야. 너희에게 승산은 없다는 걸 말이지."

    "메뚜기 새끼 주제에 사람의 얼굴을 읽을 수 있다는 듯이 말하지 마."

    "가능한 일이지. 너희도 강아지의 얼굴을 보고 그들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은가."

    "내가 꼬리라도 쳤나? 없는 꼬리라도 본 모양이군?"

    "의미 없는 저항이다."

    볼로낙이 손을 들어 서아영을 가리켰다.

    "너도 이미 알고 있다. 머리로 이해하고 있지. 결코 우리를 막을 수 없다는 걸 말이다. 이미 전력 차에 대한 분석은 끝났겠지. 너희의 저항이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도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

    "그런데도 의미 없는 저항을 하는 건가? 쓸데없이 피해를 늘리는 결과밖에는 되지 않는다."

    서아영이 피식 웃었다.

    "병신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뭐라고?"

    "그래서 그게 뭐 어쨌는데, 이 메뚜기 새끼야."

    서아영이 흘러내린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피에 젖어 엉망이 된 머리가 힘없이 뒤로 넘어간다.

    "저항하는 게 의미가 없다고? 저항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거다. 현실적으로 무엇 하나 바꿀 수 없다고 해서 정말 손을 놓아버리면 바뀔 가능성도 없어지는 거지. 네 눈에는 멍청하고 무모하게 느껴질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내가 너 편하라고 포기해 줘야겠냐? 개소리 지껄이지 마."

    서아영이 이를 갈았다.

    "몸이 부서지고 살점 하나만 남아도 나는 너희에게 굴복할 생각은 없어. 죽는 그 순간까지 너희 벌레 새끼들을 처 잡아 죽일 거다. 그게 인간이라는 거야, 이 새끼들아."

    볼로낙이 고개를 모로 꺾었다.

    "그게 인간이라……."

    "그래. 그게 인간이다."

    "인간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군. 하지만 하나는 알겠다. 너희는 굴복하지 않는다는 거군."

    "그거라도 알았으니 다행이군."

    "그래. 그럼 죽으면 되겠군. 그 만신창이가 된 육체를……."

    그 순간, 서아영의 옆 공간이 열리기 시작했다.

    "음?"

    갈라진 공간 안에서 걸어 나온 이지혁이 서아영을 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 고작 저거 하나 처리 못해서 이러고 있어?"

    "…니가 하든가."

    "하, 진짜 무능해 빠져 가지고는."

    서아영이 이를 갈았다.

    이 새끼는 아군인가, 적군인가.

    숨을 할딱거리는 서아영을 보며 이지혁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이지혁을 반갑게 맞은 것은 서아영이 아니라 볼로낙이었다.

    "아흔아홉 번째 마왕이로군."

    "어? 너, 가면 라이……."

    서아영이 손을 들어 이지혁의 입을 틀어막았다.

    "저작권, 이 새끼야. 어디 큰일 날 소리를."

    "아, 그렇지."

    이지혁이 머리를 긁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메뚜기, 오랜만이다?"

    "…잘도 살아남았군. 이제 그만 그 긴 명줄을 놓을 때도 되지 않았나? 이제는 불멸도 아니잖아. 너는 죽고 싶어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너희만 안 쳐들어왔어도 벌써 편히 죽었어. 왜 사람 쉬는데 쳐들어와서는 난장판 만들어놓고 지랄이야? 곱게 죽지도 못하게."

    "미안하다고 해야 하나?"

    이지혁이 손을 내저었다.

    "됐다. 메뚜기와 대화를 하고 있다 보니 내 인권이 무너지는 느낌이라 너하고는 말 안 하련다."

    "…네놈."

    "근데 나 하나 물어도 되냐?"

    볼로낙은 대답 없이 가만히 이지혁을 노려보았다.

    "예전부터 궁금했던 건데, 너희도 눈이 있으니 자기 얼굴은 볼 수 있잖아. 그런데 너는 니 얼굴 보면 무슨 생각이 드냐?"

    "인간의 기준을 우리에게 대입하지 않아줬으면 좋겠군."

    "그래서 니 얼굴 니가 보면 잘생겼냐고."

    "……."

    대답이 없는 볼로낙을 보며 이지혁이 눈가를 훔쳤다.

    "그래. 너희가 왜 항상 그렇게 악에 받쳐 있는지 알겠다. 하긴 내가 너처럼 생겼으면 집 밖으로 못 나오는 은둔형 외톨이가 됐거나 자살했을 텐데, 꿋꿋하게 잘 살아줘서 형이 고맙다."

    "이……."

    서아영은 황당한 얼굴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아니, 이 새끼는 어떻게 싫어하는 것만 쏙쏙 골라서 사람을 괴롭히지?'

    조금 전까지 여유롭게 그녀를 상대하던 메뚜기가 갑자기 부들대는 꼴을 보니, 이지혁의 대단함이 새삼 느껴졌다.

    누군가를 이리 열 받게 하는 포인트만 꼭꼭 집어내지 않는가.

    "이리 와봐."

    이지혁이 부르자 서아영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에게 다가갔다.

    "꼬라지하고는."

    곳곳에서 피를 흘리며 할딱이는 서아영을 보며 이지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고는 손을 들어 서아영의 머리를 잡았다.

    "왜!"

    "잠만."

    이지혁이 뭔가를 중얼거리자 서아영의 육체로 새하얀 빛이 파고들기 시작했다.

    "응?"

    고통이 가시고 힘이 차오른다.

    "이, 이거 뭐야? 힐이야?"

    "어."

    이지혁이 고개를 끄덕이자 서아영이 눈을 크게 떴다.

    "언제 힐러로 되셨대? 클래스가 흑마도사 아니셨어? 이게 뭔 게임도 아니고… 듀얼 클래스도 되나?"

    "듀얼이 아니라 전직이다."

    "아……."

    이지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흑마력이 가득가득 차 있을 때는 할 수 없었지만, 이제 흑마력을 억제하고 마법사로 전직한 그가 힐을 쓰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자, 이제 열심히 싸워."

    "이게 끝이야?"

    "그럼 뭐?"

    "가, 같이 싸워준다든가?"

    이지혁이 황당한 눈으로 서아영을 보며 말했다.

    "뭔 큰일 날 소리를 하고 있어? 나 전직했다니까. 나는 그냥 이제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지치고 힘들고 다쳐서 더 이상은 못 싸우겠다 하는 애들 일으켜서 다시 싸우게 만들 거야. 주유소라고 할 수 있지."

    "…그거, 엄청 사악하게 들리는데?"

    "괜찮아, 괜찮아. 다 너희를 위한 거야. 내가 설마 너희 잘못되라고 그러겠냐. 오빠가 다 너희 생각해서 치료해 주는 거니까 고맙게 생각해."

    "이 또라이 새끼."

    이지혁은 서아영의 입에서 욕이 터져 나올 것을 짐작했는지, 얼른 손을 흔들더니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우웅, 하는 소리와 함께 게이트가 사라지자 그 자리를 바라보던 서아영이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볼로낙과 눈을 마주쳤다.

    "…그렇게 됐어."

    "너희도 고생이 많구나."

    순간, 마왕과 인간 사이에 있을 수 없는 교감이 생겨났다.

    서아영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결코 교감할 수 없어야 하는 인간과 마왕이 서로를 동정하게 만드는 저 인간의 존재란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어쨌든 체력은 꽉 채웠네.'

    볼로낙을 상대하느라 순간적으로 떨어진 체력이 다시 올라왔다는 것만으로도 상황이 많이 좋아졌다고 할 수 있었다. 과거에 이지혁이 닥치고 마왕을 때려잡아 주는 것보다 좋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런 식의 지원도 꽤나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조금은 상황이 나아진 것 같은데, 메뚜기 씨?"

    "그럼 뭘 망설이고 있지?"

    "망설여?"

    서아영이 피식 웃었다.

    "내가 지금……."

    "아, 잠깐만."

    다시 게이트가 열리더니, 그 안에서 이지혁이 불쑥 나왔다.

    "……."

    "아, 싸우는데 죄송. 내가 뭐 하나를 안 하고 가서."

    "응?"

    서아영과 볼로낙이 다시 멍청한 얼굴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이래서 늙으면 죽어야 한다고 하는가 보네. 자꾸 깜빡한다니까. 잠만."

    이지혁이 손을 휘젓자 새하얀 기운이 서아영의 몸을 감쌌다. 육체에 활력이 넘치는 것을 확인한 서아영이 놀란 눈으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아마 한 한 시간은 내 몸이 아닌 듯이 싸울 수 있을 거야."

    "이, 이런 것도 있어? 진즉에 좀 써주지."

    "대신 수명이 깎여. 한 십 년은 날아가지 않을까?"

    "……."

    "뭐, 그래도 죽는 것보다는 낫겠지. 그럼."

    게이트 안으로 사라지는 이지혁을 보며 서아영이 이를 뿌드득 갈았다.

    그 광경을 보며 볼로낙이 고개를 내저었다.

    "변한 게 없네, 저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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