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100화 (100/118)
  • [■] 진짜 이거 할 거예요?(1) [■]

    ─────

    윤영민은 눈앞의 상황을 보며 쓴웃음을 머금었다.

    조금 우습기도 한 일이었다.

    나름 이 일은 세계의 운명을 결정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전 세계적인 대책 회의가 열려야 하겠지만, 실제로 이 회의에 참여한 것은 한국과 미국, 두 나라뿐이었다.

    범세계적 위기에 대처하는 회의라기보다는 한미 합동참모부 같은 느낌이 아닌가. 물론 그렇다고 하기에는 양쪽 국방부 장관과 한국의 대통령과 총리, 그리고 실질적인 미국의 수뇌가 모인 국가급 회담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유럽 애들은 안 온대요?"

    "자기 쪽 방어하기도 바쁘답니다."

    "그래도 이왕이면 이리로 오는 게 나을 텐데."

    이지혁의 말에 크리스토퍼가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렇기야 하겠지만, 쉽지 않은 일이기도 합니다."

    "왜요?"

    "방어선은 넓게 잡을 수가 없으니까요."

    "응? 그게 무슨 말이에요?"

    "이 넓은 지구에서 삼천이라는 숫자는 정말 먼지 한 톨 정도의 의미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만한 수로 유럽과 미국, 한국을 모두 지키는 건 냉정하게 말해서 불가능합니다."

    "으음……."

    "그들도 그걸 알고 있는 거겠죠. 이쪽 주도로 작전을 펼친다면 사실 미국을 제외한 곳은 포기해야 합니다. 저 역시 미국의 전 영토를 지키겠다는 생각은 없습니다."

    "저는 한국 지킬 건데요?"

    "한국이야 영토가 작으니까요. 그쪽으로 오는 몬스터들이라 봐야 그리 많지 않을 겁니다. 그 정도는 텔레포트를 이용해서 양쪽을 동시 수비하는 게 가능합니다. 하지만 유럽은 넓습니다. 미국만 하더라도 이미 동부를 제외한 도시들은 반쯤 포기 상황입니다."

    "하긴 유럽은 나라도 많으니까요."

    "네, 그렇죠. 동일한 천 명의 능력자라고 하더라도 수십 개 국의 연합체인 그들은 저마다 조국을 지키기 위해 움직일 것입니다."

    "으음……."

    이지혁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자신만 하더라도 한국이 공격당하고 있는데 유럽에 가서 싸울 수는 없을 것이다.

    "이것들이 기껏 교육해 놨더니만……."

    이지혁이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상황은 이해하지만, 다수의 전력을 활용할 수 없다는 것은 아쉬움이 남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이 그의 아래서 움직이지 않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그 전력만으로 유럽을 막아내겠다고 설친다면 그 끝이 어찌 될지가 너무 빤히 보이기에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뭐, 없는 전력이라 생각하고……."

    포기가 빠른 것이 이지혁의 장점이었다.

    "방어선은요?"

    "기본적으로는……."

    크리스토퍼가 비전을 보며 설명을 시작했다.

    "일단 라인을 구축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일전에 바르바체가 제가 원하는 곳은 어디든 게이트를 열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습니다. 바르바체가 연 게이트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이 일반적인 몬스터가 아니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라인 뒤에서 쏟아져 나오는 몬스터를 감당할 수 없을 겁니다."

    "빤한 이야기 접어두고 결론만 가죠."

    크리스토퍼가 고개를 끄덕였다.

    "도시만 보호합니다."

    "음……."

    이지혁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빠져나올 수 있는 이들은 최대한 대피시키고, 포인트가 되는 도시에 방어선을 구축합니다. 내부에서 게이트가 열리더라도 순식간에 이동해서 나오는 몬스터를 족족 잡아내는 체제로 갈 겁니다."

    "호오?"

    이지혁이 흥미롭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서 지켜야 할 도시는요?"

    "미국의 경우는 워싱턴까지 포기합니다."

    "수도를요?"

    "예."

    크리스토퍼의 얼굴에 비장함이 어렸다.

    "워싱턴과 볼티모어를 포기하고, 방어선을 필라델피아와 뉴욕에 집중합니다."

    "그거 딱히 좋은 수 같아 보이지는 않는데……."

    "일단 해안을 끼고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동안 몬스터들이 바다에서 나타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육지를 선호하는 경향을 보여왔습니다. 그러니 바다를 낀다면 막아내야 할 방어 라인을 축소시킬 수 있습니다."

    "음……."

    이지혁이 지도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은요?"

    "한국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해안선을 끼고 줄여서 방어할 수 있는 곳은 한 곳밖에는 없죠."

    "인천?"

    "…부산입니다."

    "헐."

    이지혁이 고개를 돌려 송정수를 바라보았다.

    "괜찮아요? 수도권 포기해도? 복구에 시간이 어마어마하게 걸릴 텐데?"

    "멸망보다야 낫겠지."

    "그리고 부산에 다 때려 박을 수 있어요? 그만한 인구를?"

    "어차피 하루면 결론이 나는 문젠데, 좀 비좁고 답답하더라도 어쩔 수 있겠나?"

    "헐, 이 양반들… 장난 아니네."

    정말 제대로 모든 것을 걸고 싸우겠다는 느낌이었다. 그 비장함에 이지혁마저 얼떨떨할 정도로 말이다.

    "…진짜 이거, 할 거예요?"

    "예?"

    크리스토퍼가 되레 물어왔다.

    "바르바체라는 놈은 거짓말을 잘합니까?"

    "…마족이지만 그렇진 않은 것 같아요."

    "그럼 어차피 오늘 몰고 들어올 것 아닙니까? 그놈들은 자신의 말을 관철시키기 위해서라도 오늘 반드시 결론을 봐야 하는 거죠."

    "으음……."

    "게다가 이 경우, 되레 다른 곳을 포기해 버리는 게 낫습니다. 놈은 인류를 무력화시킨다고 했지, 인류를 멸망시킨다고 하지는 않았으니까요. 놈의 계획에 의하면 민간인들은 살아남을 확률이 높습니다. 차라리 후방이 아니라 앞 쪽으로 빼버리는 게 더 안전한 게 아닌가 싶기는 하지만, 이건 심증만 가지고 실행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서요."

    이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 뭐, 그럼 그렇게 하죠."

    "예. 그리 알고 준비하겠습니다."

    "벌써 움직이고는 있는 거죠?"

    크리스토처가 씨익 웃었다.

    "물론입니다. 반쯤은 결정 나 있는 사항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음, 뭐, 일단은 알겠어요. 그럼 잘 부탁하죠."

    "저희야말로."

    자리에서 일어난 이지혁을 바라보는 크리스토퍼의 눈이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지원해 달라는 말은 하지 않는군.'

    영토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이렇게 한두 개의 도시로 방어선을 줄여 버린다면, 이천에 달하는 미국 측 방어 인원과 서른에 불과한 한국의 방어 인원에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아무리 일반 능력자들과 군의 지원이 있다고는 하나 서른이란 인원이 중심이 되어 부산을 방어해 내야 하는 한국 측의 부담이 적지 않을 터인데, 이지혁은 우는소리를 하지 않았다.

    "아, 대신에……."

    그럼 그렇지.

    크리스토퍼는 최소한의 지원은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지혁을 마주 보았다.

    "일본 놈들 싸그리 끌어다가 우리 앞에 끌어놔요."

    "…네?"

    "섬 새끼들이 자기들만 편하게 구경하는 꼴은 못 보지. 걔들도 다 불러서 이쪽으로 지원시켜요."

    크리스토퍼가 씨익 웃었다.

    "라져!"

    * * *

    "뭐라고 불러야 할까? 둠스 데이?"

    "그거 너무 식상하지 않나?"

    "그렇다고 인류 최후의 날이라고 이름 붙이기에는 네이밍 센스가 너무 없는 것 같고."

    "그럼 퍼스트 임팩트는 어때?"

    "덕내 난다. 저리 가라."

    김다현이 상처받았다는 얼굴로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아 양팔로 무릎을 감쌌다.

    "…그 얼굴 그렇게 쓸 거면 나 줘."

    "아, 안 돼. 난 얼굴마저 없으면 진짜 인간쓰레기라고."

    "…아는구나."

    윤혁규는 우울한 얼굴의 김다현을 보며 피식 웃고 말았다. 그래도 이놈이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해줘서 분위기가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부산이라……."

    김다현이 손을 번쩍 들었다.

    "왜?"

    "나 부산 출생인데. 부산 사나이여."

    "알았으니, 닥쳐."

    "네."

    깔끔하게 김다현의 난을 진압한 윤혁규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부산에다 방어선을 건설한다고는 해도 워낙 앞쪽에다가 라인을 그어서 그런지, 주변에 보이는 것은 산과 들뿐이었다. 그나마 옆으로 지나가는 도로 정도가 문명의 흔적일까.

    "…부산 관광은 할 수 있을까?"

    "관광은 얼어 죽을!"

    윤혁규가 이를 갈면서 김다현을 노려보았다.

    저 인간도 예전에는 이리 심각하지 않았는데, 하루하루 갈수록 상태가 더 안 좋아지는 느낌이었다.

    "지금 상황에 관광 이야기가 나오냐? 오늘 다 박살 날지도 모르는데?"

    김다현이 고개를 들고 말했다.

    "그러니 오늘이 지날 때까지 살아 있으면 관광해도 되는 거 아냐?"

    "응?"

    "오늘 다 끝낸다는 이야기는, 오늘만 버티면 이긴다는 말이잖아. 그럼 저 빌어먹을 마계도 몬스터도 다 사라질 테니, 이제는 좀 평범하게 살 수 있겠지."

    "…너는 눈에 띄는 게 인생의 목표 아니었냐?"

    "관뒀어."

    김다현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제 지긋지긋해. 그냥 나도 평범하게 회사 같은 곳에 출근이나 하면서 먹고살고 싶다. 돈이야 이제 벌 만큼 벌었으니까."

    "음……."

    윤혁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싸움의 결과에 따라 이긴다고 하더라도 그 돈이 휴지 조각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꿈을 꾸고 있는 사람에게 그건 꿈에 불과하니 어서 깨어나라고 말할 만큼 윤혁규는 모진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마계를 물리친다고 게이트가 사라질까?'

    이지혁의 말에 따르면, 몬스터들은 마계에서 오는 게 아니라고 했다. 확실히 마왕들이 나타난 이후 스팟에서 등장하는 마수들과 그 이전에 등장하던 몬스터들은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다시 말하자면, 마계를 몰아낸다고 해서 몬스터들이 사라진다는 보장이 없다는 뜻이었다. 마계를 몰아내도 이전의 NDF의 삶으로 돌아갈 뿐이지, 전투와 결별된 삶을 살 수는 없다는 거다.

    '그래도 그게 어디야.'

    적어도 죽는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살던 시절로만 돌아갈 수 있어도 바랄 게 없다.

    "이쪽으로 오는 건 맞대?"

    "모르지."

    윤혁규가 어깨를 으쓱했다.

    "알아서 우리한테 찾아올 거라고 하더라고."

    "그럼 차라리 우리가 사람 없는 쪽으로 물러나는 것도 방법일 텐데?"

    "그 이야기도 나온 모양인데, 일말의 가능성만 믿고 민간인을 무방비로 놔두는 건 불안해서 안 되겠다고 한 모양이야. 그게 정상적인 반응이기도 하고."

    "흐음."

    김다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하튼 오늘만 넘기면 이제 다솜이랑 알콩달콩 살아야지."

    "다솜이는 너랑 살고 싶지 않은 것 같던데?"

    "…아냐! 나의 다솜이는 그렇지 않아!"

    "시집보내야지. 언제까지 끼고 살려고 그러냐?"

    "아니, 미친! 이제 겨우 대학 가는 애가 무슨 시집이야!"

    "본인은 의지에 불타는 것 같던데? 솔직히 이지혁 씨면 남편감으로는 괜찮지 않냐? 능력 있지, 돈 많지, 성격……."

    "더럽지."

    "그래, 성격 더러운데… 다른 사람은 몰라도 가족 입장에서는 가장이 성격 더러운 게 또 나쁜 게 아니라서."

    "형은 이지혁 씨랑 가족 되고 싶어?"

    "…아니."

    윤혁규가 고개를 격하게 저었다. 그 인간이랑은 직장에서 얽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혈연이든 학연이든 얽히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 꼴 보느니 내가……."

    김다현이 입을 꾹 다물었다.

    생각해 보니 그럴 확률이 매우 높아서 어설픈 각오는 다지지 않는 게 좋아 보였다.

    '아무려면 어때?'

    오늘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다른 건 아무래도 좋다. 어떤 삶이 이어진다 하더라도 살아 있는 것만으로 그 의미가 있는 것이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나으니까.

    "음……."

    윤혁규가 고개를 돌렸다.

    앞쪽으로 과도한 마나가 모이는 것이 느껴졌다.

    "시작인가?"

    그의 얼굴이 긴장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 * *

    "속 뒤집어지겠네, 진짜."

    "…왜요?"

    서아영이 뚱한 얼굴로 티를 슬쩍 까더니 배를 문질렀다.

    "소화가 안 돼요. 부담이 되기는 엄청 됐나 봐."

    "아니, 갑자기 왜 배를 까요!"

    최정훈이 붉어진 얼굴로 소리치자 서아영이 뚱한 얼굴로 물었다.

    "왜요?"

    "아니, 다 큰 처녀가."

    서아영이 피식 웃었다.

    "뭐, 어때요. 여기 우리밖에 없는데."

    "……."

    최정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여기에 우리밖에 없다니, 자신에게는 그런 걸 보여줘도 된다는 말인가?

    "아저씨 청춘이 90년대 아니었어요? 그때는 배꼽티가 유행하던 시절인데? 눈을 어디다 두고 다녔던 거예요? 변태야?"

    "저는 그때 공부밖에 안 했습니다! 아, 아니, 이게 아니고, 저는 그때 애였다구요. 나이 차 얼마나 난다고!"

    "좀 나기는 하지."

    서아영이 킥킥 웃으며 최정훈을 보았다. 나이 이야기가 나오자 최정훈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오, 어린 척하는가 봐요? 삐친 거 보니?"

    "안 삐쳤습니다."

    "삐친 것 같은데?"

    "안 삐쳤다구요."

    서아영이 최정훈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너무 그렇게 갑갑해하시지 않아도 되요. 가는 데는 순서 없잖아요. 오늘 다 죽을지도 모르는데. 그럼 나이 든 게 억울하지는 않죠. 조금이라도 더 살다가 죽는 거니까."

    최정훈이 코웃음을 쳤다.

    "누가 다 죽는답니까?"

    "…그렇죠. 제가 말실수했네요."

    설령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더라도 오늘은 입 밖으로 꺼내서는 안 되는 말이었다. 정말 모두가 죽을지도 모르니까.

    평소라면 농담이 될 수 있는 말이지만, 오늘만큼은 농담으로도 해서는 안 되는 말이다.

    "전부 다 살 겁니다."

    "……."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게 아니면 그 지옥 같은 수련을 버텨낼 이유가 없죠."

    "음……."

    서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돌이켜 보면 정말 지랄 맞은 시간들이었다. 마나가 몸속을 파고들 때마다 이지혁의 머리통을 날려 버리고 싶은 충동과 혀를 깨물어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만한 고통을 버텨냈는데 그 결과가 이계를 빠져나온 지 3일 만에 몰살이라면, 차라리 그때 혀를 깨물고 죽는 게 차라리 이득이었다는 말이 된다.

    서아영은 그걸 참아낼 자신이 없었다.

    "할 수 있겠죠?"

    "당연한 소리를 하시네요."

    최정훈이 눈살을 찌푸리고 말했다.

    "이기기 위해서 수련한 것 아닙니까. 살기 위해서 고생한 거니까 반드시 살아남아야죠."

    서아영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원론적으로는 맞는 말이지만 현실이 그리 녹록치 않다는 것은 그녀도 알고, 최정훈도 아는 일이었다.

    "살아남으면 뭐할 거예요?"

    "…뭘 하냐니요?"

    "그냥 그런 거 있잖아요. 이번 일을 해결한다고 해서 몬스터들과 완전히 관련이 없는 삶을 살 수 있다는 보장은 없지만, 적어도 지금보다는 여유가 생기겠죠."

    "그렇겠죠."

    "그럼 뭔가 해보고 싶은 건 없어요?"

    "…그런 생각은 안 해본 것 같습니다."

    서아영이 피식 웃었다.

    "예전에는 몬스터들 때문에 출동하는 것도 짜증 나고 화났어요. 일이 너무 힘들다는 생각도 엄청 했는데, 지금 돌이켜 보면 그때는 천국이었네요."

    "그렇게 되나요?"

    최정훈이 머리를 긁었다.

    당시에도 퇴근이라는 것은 전설 속의 기린처럼 손에 닿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적어도 지금처럼 자신의 생명이 파리 목숨처럼 느껴진다거나, 이번 싸움에서 지면 인류가 멸망한다는 부담감은 없었다.

    정 안 되면 내일로 미룰 수 있는 정도의 여유는 있었으니까.

    '그렇게 들으니 새삼스럽네.'

    그때의 삶으로만 돌아가도 지금 심정이라면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인생이란 상대적인 것이라더니,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그때로 돌아가면 뭘 해보고 싶으시냐구요."

    "음……."

    최정훈이 깔끔하게 웃으며 말했다.

    "퇴사요."

    "네?"

    "회사 때려치우고 싶은데요."

    "헐……."

    서아영이 멍한 눈으로 최정훈을 바라보았다.

    이 인간은 잘 나가다가 한 번씩 이상한 데로 빠진다니까.

    "회사는 왜요! 뭐 먹고살려고."

    "에이, 어디 가서 일할 데 없겠습니까. 이제 세상이 안정돼서 제 삶을 찾을 수 있는 때가 되면, 그냥 정시에 출근해서 정시에 퇴근하는 삶을 살고 싶네요. 성공이나 책임이라는 것들 때문에 제 자신을 잃어버린 것 같아요."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요."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있었다.

    "그런데 아깝지 않겠어요? 최정훈 씨가 그동안 쌓아놓은 것이 결코 적지 않을 텐데요?"

    "아깝다라……."

    최정훈이 어깨를 으쓱했다.

    "한때는 그런 것에 집착하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이지혁 씨를 알게 되어서 제가 위로 올라갈 수 있는 동아줄을 얻었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죠."

    "동아줄이 썩은 거였어."

    "…정확하게는 동아줄 자체는 튼튼한데, 그 튼튼한 동아줄에 가시가 엄청 박혀 있었죠."

    최정훈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여하튼 그렇게 생각한 시절도 있었는데, 조금씩 제가 위로 올라간다는 게 느껴지면서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어떤 생각요?"

    "그래서 올라가면 뭘 어쩔 건가."

    서아영이 눈에 이채를 띠고 최정훈을 바라보았다.

    "권력을 쓰면서 다른 사람들은 제 마음대로 조종하는 것은 분명히 재미있는 일이기는 한데, 천성이 그래서인지 그런 걸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라구요. 결국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하는 일은 많아지는데, 딱히 좋아지는 게 없다는 걸 알아버렸습니다."

    "…더 올라가면 아랫사람들한테 맡겨놓고 회장님 의자에 앉아서 폰 게임이나 하고 놀면서 살 수 있지 않을까요?"

    "천성이……."

    씁쓸한 최정훈의 말에 서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아무리 생각해 봐도 책상 앞에 앉아서 놀고 있는 최정훈은 상상이 가지 않는다.

    '잘도 정시 퇴근하겠네.'

    일 중독자가 제 일 끝났다고 집에 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없는 일까지 만들어내서 일을 하고 또 할 것이다. 어이없고 불쌍한 삶이기는 하지만, 그건 최정훈이 스스로 만들어낸 고난이었다.

    "그렇게 살 수 있으면 좋겠네요. 취미 생활도 즐기고, 결혼도 하고, 애도 낳고."

    "…결혼은 저 혼자 합니까?"

    "시간이 없어서 그렇지, 시간만 있으면 할 수 있잖아요."

    "저 모태 솔로라니까요. 이상하게 여자는 못 만나겠어요."

    서아영이 빤히 최정훈을 바라보았다.

    "왜, 왜요?"

    "아니, 헛소리를 하니까. 저는 여자 아니에요?"

    "일적으로 엮이는 건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석에서 만나면 그게 안 되더라구요."

    "나랑은 사석에서 자주 봤는데?"

    "……."

    말문이 막힌 최정훈이 딴청을 부렸다.

    "뭔 남자가 그리 말을 자주 돌려요?"

    "말 안 돌렸는데요? 고개 돌렸는데요?"

    "진짜……."

    "죄송합니다."

    최정훈이 쓰게 웃으며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정말 그렇게 살 수 있을까?'

    평범하게.

    일그러져 버린 이 삶을 평범하게 되돌려서 남들처럼 살 수 있을까?

    꿈같은 이야기였다.

    '지금 당장 살아남아야 가능한 이야기이지.'

    아쉬운 것은 살아남을 가능성이 그리 크지 않다는 것이다. 마족들과 인류의 전력 차는 생각 이상으로 컸다.

    이지혁과 알파가 변수를 만들어주기는 하겠지만, 이긴다고 해도 피해 없이 이기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아래에서 그들을 받쳐 줘야 하는 이들은 엄청난 피해를 감수해야 할 것이다.

    아마 대부분은…….

    "뭔 생각을 그리해요?"

    "아뇨."

    최정훈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기에 꿈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가능해 보이는 이야기라면 말하기에 쑥스러운 것이지만, 현실적으로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이야기는 당당하게 말하기 어렵지 않으니까.

    "정말 할 수 있다면 그렇게 살아보고 싶네요."

    "네, 저두요. 저는 돈 많은 남자 만나서 이제 일 안 하면서 살아보는 게 소원이에요."

    "부장님도 돈 많잖아요."

    "최정훈 씨에게 비하겠어요? 미국이나 타국이랑 협상하면서 뒷돈 엄청 받은 거 다 알고 있어요. NDF 애들이 그게 자기들 퇴직금이라고 좋아하는 거 모르죠?"

    "헐……."

    최정훈이 멍한 얼굴로 물었다.

    "그게 왜 자기들 퇴직금이랍니까? 제 돈인데."

    "적당히 안 챙겨주면 위에다 찌를 거라던데요."

    "개새끼들."

    함께 싸워온 전우애는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세상이 아무리 각박하다지만 동료를 찌르다니.

    "그러니 적당히 먹었어야죠."

    "내가 먹은 건 이지혁 씨가 먹은 거에 비하면 새 발의 피도 안 됩니다. 말 그대로 수수료란 말이에요."

    "그것만 해도 거의 기업 총수급이라는 이야기가 있던데."

    "…그 정도는 아니에요."

    "찔려 하는 것 같은데?"

    "……."

    최정훈은 서아영의 눈을 피했다.

    "그러니까 돈 많잖아요."

    "네, 돈 많습니다. 그래서요?"

    최정훈이 삐딱하게 나오자 서아영이 가볍게 웃었다.

    "그럼 됐죠."

    "네? 뭐가……."

    서아영이 했던 말을 다시 떠올려 본 최정훈이 입을 닫았다.

    "살아남으면요."

    "예. 살아남으면."

    둘은 한동안 아무 말 하지 않고 앞을 바라보았다.

    둘 다 살아남는다.

    그게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지는 그들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살아만 남으면……."

    그 순간, 그들의 앞으로 거대한 마나가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제는 마나를 느낄 수 있다는 게 원망스러운 순간이었다.

    "거, 조금만 늦게 와도 될 텐데."

    최정훈이 투덜거리자 서아영이 피식 웃었다.

    "다 그렇죠. 인생이 드라마 같다면 힘들 게 있겠어요?"

    "…드라마 안 보시죠?"

    "네?"

    "드라마 주인공만큼 힘들게 사는 사람도 없거든요."

    "…진짜 최악이야."

    서아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양손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이제 시작이다.

    내일 해가 뜰 때까지 살아남을 수 있다면 그들의 승리이리라.

    * * *

    "시작입니다."

    "으음……."

    송정수와 윤영민은 심각한 얼굴로 비전을 보고 있었다.

    "크리스토퍼에게 연락을 취하게."

    "예."

    비서가 즉각 움직이는 것을 확인한 윤영민이 낮은 한숨을 쉬었다.

    "막을 수 있겠죠?"

    "그리 믿어야 합니다."

    송정수는 가라앉은 눈으로 화면을 바라보았다.

    '기껏 살았다 싶었더니…….'

    승리의 기쁨을 즐길 새도 없이 마지막 싸움이 시작되고 있었다. 이 하루 동안 인류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생각을 하자 등 뒤로 식은땀이 멈추지 않고 흘러내렸다.

    "군은 최대한 동의했고, 미국으로부터 M-3도 지원받았습니다. 일본으로부터도 병력을 모조리 끌고 왔으니,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막아낼 수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이겠지만, 적어도 후회는 남기지 않을 정도로 최선을 다했다.

    송정수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한계로군.'

    그의 몸도 이제는 한계에 달해 있었다. 지금부터는 정신력으로 버텨야 하는 시기다.

    송정수가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려면 어떤가. 이제 하루 남았을 뿐인데.

    단 하루 동안 모든 것이 결정 난다면, 그 하루를 버텨내고 죽는다 해도 여한이 없었다.

    이글거리는 눈으로 송정수가 입을 열었다.

    "시작하시죠."

    "예."

    윤영민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모든 것을 건 승부가 시작된다.

    * * *

    크리스토퍼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빌어먹을, 긴장되는군.'

    이제 이런 일로 긴장할 때는 지났다고 생각하는데, 좀처럼 안정이 되지 않았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오늘로 모든 것을 결정이 날 텐데, 어찌 긴장이 되지 않을 수가 있는가.

    '오늘을 버텨낸다고 해서 전쟁이 끝난다는 보장은 없지만 말이야.'

    하지만 바르바체의 말대로라면 그들은 반드시 오늘 승부를 보려고 할 것이다. 이지혁의 말대로 바르바체가 자존심 하나는 마계에서도 최고라고 한다면, 자신의 말을 반드시 관철시키려 할 것이다.

    시작부터 총공세로 나오지는 않겠지만, 오늘이 지나기 전에 함락이 되지 않는다면 마지막에는 총공세로 돌아설 확률이 높았다.

    그러니 이쪽도 총력전으로 나서야 한다.

    "다들 힘든 건 안다."

    크리스토퍼의 말에 상황을 주시하던 대원들이 뒤로 돌아 크리스토퍼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상관은 이런 말을 할 사람이 아니다.

    "힘들고 지치겠지. 하지만 모두 마찬가지다. 지금 인류 중에서 편한 마음으로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들 내일이라도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 살고 있는 거다."

    크리스토퍼가 헛기침을 하고는 말을 이었다.

    "그러니 우는소리하지 마라. 차라리 책상에서 죽어라. 오늘만 버텨내면 된다. 못 버티겠으면 끝까지 싸우다가 서서 죽어! 무슨 말인지 알겠냐?"

    "예!"

    "어차피 너희가 아무리 최선을 다한다고 해도 역사는 너희를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남는 것은 미국이라는 이름뿐이겠지. 그래도 뒈질 때는 내가 세상을 구하는 데 일조했다는 생각을 하고 죽을 수 있잖아. 그것보다 끝내주는 게 어딨냐고!"

    크리스토퍼가 열과 성을 다해 소리쳤다.

    "그러니 눈 똑바로 뜨고 신경 하나하나를 곤두세우란 말이다! 무슨 소린지 알겠냐?"

    "라져!"

    "좋아!"

    크리스토퍼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정말 마지막이다.

    인류 역사에 인류의 존망을 건 한판 승부라는게 과연 있었던가.

    '마치 용사라도 된 기분이군.

    크리스토퍼가 피식 웃었다.

    "한국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게이트가 출현한다고 합니다."

    "대기 중인 폭격기들 다 발진시키고 퍼부어."

    "예!"

    "오키나와 쪽에 연락해서 조준하라고 해. 모이면 핵으로 날린다."

    "예!"

    크리스토퍼가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닦았다.

    가지고 있는 화력을 오늘 하루에 모조리 탕진하겠다는 마음으로 아낌없이 퍼부어줄 생각이다.

    어차피 내일은 없으니까.

    "유럽 쪽에서도 연락이 왔습니다. 게이트 출현합니다! 위치는 스페인 쪽입니다."

    "알아서 하라고 해."

    "지원 요청입니다."

    "그거 하나 처리 못할 거면 EU는 왜 만들었대! 지금 당장 우리가 지원해 줄 수 있는 게 없다고 해. 자체 해결하라고!"

    "……예."

    크리스토퍼는 냉정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선택과 집중이다.'

    그들이 지원하지 않는다면 유럽이 어떤 꼴이 될지는 너무도 빤한 일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크리스토퍼는 유럽에 전력을 낭비할 수 없었다.

    어차피 모두가 살아남는다는 희망찬 미래 따위는 책 속에나 있는 것이다. 더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버려야 할 것이 있다면 크리스토퍼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 대가로 그 자신이 지옥으로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이 세상이 지옥이 되는 것보다는 백배 나을 테니까.

    "우리 측은 변화 없나?"

    "게이트 생성 중입니다."

    "그럼 그렇지."

    크리스토퍼가 피식 웃었다.

    작정을 한 모양이었다.

    한국, 유럽, 미국.

    세 지역에 동시에 게이트가 생성되고 있다. 그들이 막기로 작정한 곳을 제대로 노리고 들어오는 것이다.

    '마음대로 되지는 않을 거다, 바르바체.'

    크리스토퍼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들이 이리 나올 것이라는 건 이미 예상을 했다. 그러니 대비도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그들이 군을 노리고 게이트를 통해 마수를 보낼 것이라는 건 빤히 예상할 수 있던 일. 그렇다면 역산을 통해 그들이 나타나는 곳에 화력을 집중하는 것 역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폭격해!"

    "라져!"

    * * *

    "뭔 놈의 힘이 저따위야?"

    이지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새로 열리는 게이트는 이지혁의 생각 이상으로 컸다. 아무리 세상에 균열이 생겨서 게이트를 여는 것이 이전에 비할 바 없이 쉬워졌다고는 하나, 저만한 게이트를 여는 것은 이지혁으로서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마나를 수식으로 활용하여 게이트를 여는 이지혁과는 다르게 저들은 그저 마나를 본능적으로 활용한다. 속도와 힘은 저들이 강할지 모르겠지만, 그런 만큼 낭비가 심하다는 것을 감안해 본다면, 저 게이트를 열고 있는 놈의 힘은 이지혁조차 범접할 수 없을 정도였다.

    전성기의 이지혁이라면 상대해 볼 만하겠지만, 지금의 이지혁으로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하기야 지금 내가 누구를 상대할 수 있겠냐마는.'

    바르바체가 아니라 일반적인 마왕이라도 지금의 이지혁은 상대하기가 힘들었다. 출력이야 마계의 문이 열리기 전과 비교할 수 없이 올라갔다고는 하지만, 부작용이 더 심해진 관계로 그 출력을 활용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냥 이지혁의 목숨 하나로 끝날 문제였다면 그냥 펑펑 써버린 후에 남은 놈들은 다른 이들에게 맡길 수 있겠지만, 부작용이라는 게 단순히 이지혁의 목숨 하나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였다.

    흑마력이 골수에 차올라 마족화가 시작된다면, 이 세상을 멸망시키는 것은 마왕들이 아니라 이지혁이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에르카나의 말대로라면 단순한 마족이 될 수도 없을 것이다.

    이지혁은 마족에 대한 증오심이 강렬했다. 그러니 이지혁이 마족이 된다면 그들과 융화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역시 적대시할 확률이 높았다.

    그리된다면 새로운 마왕이 강림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집어 삼키는 파괴신이 강림하게 될 것이다.

    '그 꼴은 또 못 보지.'

    아무리 이지혁이 세계의 구원자라는 타이틀을 듣기만 해도 몸에서 닭살이 돋아나는 타입이라고 하더라도 그것과 이건 다른 문제였다.

    구원자는 되지 못할지언정 파괴자가 될 수는 없다.

    그럼 포지션을 어떻게 잡아야 할까?

    고민이 채 끝나기도 전에 게이트가 기이한 쇳소리를 내며 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거대한 마수들이 울부짖으며 튀어나왔다.

    "일단은 저 새끼들부……."

    콰앙! 콰아아아앙! 콰앙!

    "어?"

    이지혁이 막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는 순간, 마수들이 폭염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폭격이 시작된 것이다.

    "뭔 놈의 반응이 이리 빠르지?"

    마치 여기쯤에 게이트가 열릴 것을 알고 미리 폭격기를 보내놓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머리 위로 비행기들이 자꾸 지나간다 싶었더니, 그게 다 폭격기였나?

    "장난 아니네."

    아마 크리스토퍼나 송정수가 제대로 칼을 간 모양이었다. 하기야 오늘이 지나면 저 화력을 써볼 기회도 없을 테니까.

    콰아아앙! 콰아아앙!

    터지는 폭음을 들으며 이지혁이 눈을 빛냈다.

    "멋진데?"

    마법이 터지는 것과 화력이 터지는 것은 그 맛이 달랐다. 마법이 폭발할 때는 화려한 맛이 있다면, 화력은 뭐라고 해야 할까… 인간의 야만성을 있는 그대로 내보여 준다는 느낌이 있었다.

    볼거리라는 측면이 아니라 카타르시스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화력 쪽의 손을 들어주고 싶은 이지혁이다.

    마법은 지겹도록 보기도 했고 말이다.

    인간의 비밀 병기라던 M-3가 탱크와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 유일하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직립 보행 병기라도 나왔다면 출동하는 순간 눈물을 흘리면서 박수를 쳐줄 용의도 있지만, 미국 놈들은 실용성에만 올 인을 해서 멋을 추구하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었다.

    하지만 그 화력만큼은 확실했다.

    콰아아아앙!

    지금까지와는 다른 종류의 화력이 게이트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고개를 살짝 들어 올리자 그의 머리 위로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가공할 속도로 스쳐 지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뭐가 보여야 싸우지."

    게이트는 이미 흙먼지와 폭염으로 인해 보이지도 않을 지경이었다. 튀어나오던 마수들이 믹서로 갈린 고기처럼 잘 다져지고 바짝 익혀져 햄버거 패티가 된 상황일 텐데도 화력 투사는 멈추지 않았다.

    그곳에 적이 있든 없든 일단 지형 자체를 지워 버리겠다는 악의가 느껴질 정도였다.

    "많이 싸우기는 했나 봐."

    이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없는 사이에 인류가 얼마나 마수들에게 시달렸는지가 여기에서 여실히 보였다. 과도할 정도로 투자되는 화력이 인간이 얼마나 마수를 두려워하고 있는지를 반증한다고 할까?

    "에……."

    이지혁이 전화기를 들었다.

    - 여보세요?

    "근데 이거, 언제까지 하는 거예요?"

    - 폭격이요?

    "예."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최정훈의 목소리에서 한탄이 느껴졌다.

    - 탄 떨어질 때까지 하겠죠.

    "그럼 우린 왜 부른 건데요? 저리 퍼부어 대면 마수는 밖으로 한 발도 못 나오겠는데?"

    - 그야 마왕 상대하라고 불렀겠죠.

    "아!"

    이지혁이 그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건 그냥 이대로 내버려 둬도 되는 건가?

    "다른 곳도 다 이러고 있어요?"

    - 현재 출현한 게이트는 세 곳뿐입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유럽 쪽에 있던 마왕군들도 움직이고 있습니다. 일차전은 마수토벌인 모양입니다.

    "흐음……."

    이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강하기는 하군.'

    그동안의 대몬스터전이 힘들었던 이유는 간단하다. 인류는 단 한 번도 자신이 가진 화력을 제대로 몬스터에게 쏟아부을 수가 없었다. 그랬다가는 몬스터들 때문에 입는 피해보다 인류의 화력 탓에 입는 피해가 더 많을 테니까.

    마수와 마왕 때문에 인간이 도망치고 또 도망친 결과,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대지의 범위가 넓어졌고, 남아 있는 기간 시설이 중요하지 않다는 합의가 이루어진 것이다.

    덕분에 화력을 마음껏 쏟아부을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었다.

    '이거, 거꾸로 생각하면 2차 세계대전 이후로 인류가 이렇게 마음껏 화력을 쏟아붓는 건 처음 아닌가?'

    이미 핵을 사용했다는 측면에서만 보더라도 과학의 정화가 쏟아지고 있는 중이었다.

    상황을 고려하지 않는 가정은 의미가 없지만, 서로 최선을 다 할 수 있다는 가정을 한다면, 인류의 전력은 마계에도 그리 밀리지 않는다는 결과가 나온 것이다.

    마왕만 빼면 말이다.

    "이 정도면 베라프와도 해볼 만하겠는데?"

    이미 대부분의 건물과 기간 시설이 날아갔다는 것만으로도 피해가 극심하기는 하지만, 이런 정도의 피해를 감수한다면… 어쩌면 베라프와도 한판 붙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이지혁이었다.

    다만…….

    "이제 움직여야지?"

    이지혁이 고개를 돌려 한곳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곳.

    하지만 그 시선 너머에 분명히 그가 있었다.

    * * *

    "애쓰는군."

    바르바체는 가만히 눈을 떴다. 인류의 최선을 다한 저항이 그에게도 느껴지고 있었다.

    궁지에 몰린 생물이 하는 발악이랄까?

    바르바체가 피식 웃었다.

    "하지만 부질없는 짓이지."

    바르바체의 손이 허공을 휘저었다.

    그러자 그의 손끝에서 시커먼 마나 덩어리들이 생겨나더니, 세 갈래로 나뉘어 뻗어지기 시작했다.

    * * *

    "와, 잘 탄다."

    김다현은 숫제 영화라도 보는 자세로 터져 나가는 전방의 장면을 감상하고 있었다.

    게이트는 이제 거의 보이지도 않았다. 폭염이 얼마나 심한지,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조차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우리나라가 화력이 이리 좋았나?"

    "화력 덕후잖아. 포방부 몰라?"

    "폭격이 대부분인데?"

    "이제 쏟아질걸?"

    그 말이 무섭게 귀를 찢는 굉음과 함께 전방 전체가 터져 나가기 시작했다.

    "…장난 아니네, 진짜."

    예전에 알파가 인류에 대한 능력자들끼리의 반란을 획책했다는 말을 들은 것 같은데, 지금 보니 그게 얼마나 얼토당토않은 일이었는지를 알 것 같았다.

    마수들도 갈가리 찢겨 나가는 화력을 그들이 감당할 수 있을까?

    '절대 무리지.'

    능력자들의 공격력은 몬스터에 필적한다. 하지만 능력자들의 방어력은 감히 몬스터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평범한 총은 마수들에게는 이쑤시개만도 못한 무기로 전락하지만, 상대가 능력자라면 말이 달라진다.

    아무리 대단한 능력자라고 한들 육체 강화계가 아닌 이상 총에 맞으면 일반인과 동일한 상처를 입는 것이다. 그런데 무슨 수로 인류 전체와 맞서 싸운다는 말인가.

    '그것도 알파 정도 되는 인간이니 할 수 있는 생각이라니까.'

    알파의 가장 큰 문제점은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남들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아니었을까?

    지금 그가 보기에도 인류의 화력은 피와 살로 이루어진 이들이 감당할 수 있을 정도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알파는 대체 무슨 수로 인류와의 전쟁을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한 걸까?

    '지금에 와서는 크게 의미가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말이야.'

    다만, 한 가지 여전히 찝찝한 점은… 알파라는 놈이 그리 간단히 자신의 의도를 꺾으려 들지 않을 거라는 점이었다.

    그가 수련 과정에서 지켜본 알파는 매우 집요했고,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는 육체가 갈가리 찢겨 나가는 고통 정도는 웃으면서 받아들일 수 있는 놈이었다.

    그런 놈이 과연 공동의 적으로 인한 일시적인 휴전이 끝난 이후에도 지금처럼 그들과 함께 웃고 떠들면서 과거의 목적을 잊으려 들 것인가.

    '절대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이지혁과 알파는 나름 비슷한 면이 있지만, 극단적으로 다른 부분이 존재했다. 이는 성격이나 목적의 문제가 아니다. 김다현이 보기에 이지혁은 증오라는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이지혁은 인간을, 그리고 세상을 증오하지 않는다. 자신이 겪은 그 모든 고통조차도 누군가를 원망해서 풀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다.

    객관적으로 본다면, 이지혁은 그 누구보다 오랜 시간 지옥과도 같은 고통을 겪었다. 이지혁이 베라프를 멸망시켜 버린다고 해도 이견을 제시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이지혁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쏟아진 불행을 타인에게 돌리지 않은 것이다.

    이지혁의 궁극적인 목표가 외부에서 자신을 휘두르는 것에 시달리지 않고 백수로 잉여롭게 사는 것이라는 점만 봐도 명확하다.

    하지만 알파는?

    알파의 모든 행동의 기저에 깔려 있는 근본 원인은 분노와 증오다.

    자신을 실험체로 쓴 미국 정부와 인류에게 자신이 당한 만큼 돌려주겠다는 것이 알파의 목적이었다. 그러니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고 해도 다른 이들이 받아들이는 느낌이 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아무리 알파가…….

    그 순간, 김다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화력?'

    인류는 지금 모든 화력을 쏟아붓고 있다.

    마계와의 싸움을 승리로 이끌지 못한다면 뒤가 없으니까. 그 뒤에 화력을 보존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모든 화력을 소진한 인류를 상대로 알파가 반기를 들기 시작한다면?

    '미친!'

    막을 방법이 없다.

    김다현의 눈동자가 떨리기 시작했다.

    냉정하게 따져 보면, 지금 인류가 입은 피해는 극심하기 짝이 없었다. 인구의 70%가 날아간 상황은 아니어도, 화력의 30%가 날아갔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없는 상황이니까.

    반면에 알파는?

    자신의 세력을 보존한 채 더 강해졌다. 그도 강해졌고, 그의 부하들도 이지혁의 조련을 받아서 과거와는 비할 수 없을 만큼 강해졌다.

    과거에는 알파의 세력만으로 인류를 상대한다는 것이 얼척이 없는 일이었지만, 지금은?

    오늘 이 전투가 끝나고 모두가 저마다의 전력을 잃어버리는 상황이 된다면, 알파와 인류의 격차는 더 줄어들게 된다.

    "에이!"

    김다현이 격하게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돼.'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알파의 세력은 겨우 천 명 정도다. 그 정도로 인류 전체를 상대할 수는 없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뭔가 가슴속에 계속 거슬리는 느낌만은 완전히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아직도 알파가 왜 마계의 문을 여는 데 협조했는가는 확연히 밝혀지지 않은 문제였으니까.

    '이지혁 씨는 왜 그놈을 그대로 두는 거지?'

    아무리 알파가 지금 꼭 필요한 전력이라고는 하지만, 그만한 위험인물과 손을 잡는 이지혁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놈은 언제고 뒤통수를 칠 놈이 아닌가.

    "둘 다 이해를 못하겠어."

    알파쯤 되니까 뻔뻔하게 이지혁에게 손을 내밀 수 있고, 이지혁쯤 되니까 알파가 무언가 노림수가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손을 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다들 서로 노리고 있는 게 있으니 당연한 일이라고 하기에는 무언가 인간미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사람 아닌 것들 같으니."

    김다현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뭘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어?"

    "결국 이 상황이 어찌 흘러가더라도 내 노력과는 별개로 머리 위에 있는 천상계 인간들의 결정 하나에 운명이 뒤바뀔 거라는 사실을 자각한 소시민의 한탄?"

    "뭐래, 이 병신이?"

    "아니……."

    칼 같은 윤혁규의 평가에 김다현이 시무룩해졌다.

    "아니, 그냥 좀 센치하네."

    "지금 머리 복잡한 게 너뿐만은 아니야. 다들 티를 안 내고 있을 뿐이지. 분위기 망치니까 티 좀 내지 말라는 말은 안 할 테니까, 그냥 할 수 있는 것만 해."

    "알겠어."

    윤혁규가 김다현을 가만히 보며 가볍게 웃었다.

    '또라이라니까, 진짜.'

    눈앞에서 게이트가 열렸다. 그리고 그 게이트에서는 마수들이 파도처럼 밀려나오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제정신이 박힌 인간이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런 부분이 김다현이 재미있는 점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어?"

    "왜?"

    "저거 뭐야?"

    김다현의 말에 윤혁규가 눈을 가늘게 떴다.

    '뭘 보라는 거지?'

    그러나 시선을 집중하자 곧 그게 보이기 시작했다.

    "…어?"

    폭격은 여전히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 부분에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폭격이 쏟아지지 않는 주변에 시커먼 무언가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게이트?"

    그 시커먼 것이 무언인가는 너무도 잘 아는 윤혁규였다. 중앙에서 폭격을 받고 있는 게이트 말고 새로운 게이트가 셋이나 새로 생겨났다.

    "저, 저!"

    그리고 게이트가 생겨나기 무섭게 마수들이 뿜어져 나왔다.

    "…그럼 그렇지."

    윤혁규가 한숨을 쉬었다.

    "뭐가 이리 쉽나 했네."

    "우리는 마왕이나 상대하면 되는 거 아니었어?"

    "계획대로만 흐를 것 같으면 야근하는 직장인이 어디에 있겠냐? 다 정시 퇴근해서 저녁 있는 삶을 살겠지."

    "형은 칼퇴근했잖아."

    "시끄러."

    윤혁규가 손을 털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서지 말라고 했잖아. 일단 명령 있을 때까지는 자리를 지켜야지."

    "지금이 나서야 할 때 같은데?"

    "그냥 앉아."

    "응?"

    김다현이 진지한 눈으로 말했다.

    "체력을 보존하는 것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이야. 괜히 답답하다고 별것도 아닌 일에 나서서 힘 빼지 말라고. 어차피 조금 지나면 물 마실 힘도 없도록 부려 먹힐 테니까."

    "음……."

    그 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윤혁규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뭘 어떻게?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은 오만하기 짝이 없지."

    "……."

    "지금까지 우리가 없어도 세 달이라는 시간 동안 방어선을 지켜온 사람들이야. 이 정도는 감당할 거야."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새로 생겨난 게이트를 향해 포격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쩌는데?"

    윤혁규가 놀라 고개를 뺐다.

    게이트가 생긴 지 얼마나 됐다고 그새 탄착군을 형성한다는 말인가. 세 달이라는 농도 깊은 전쟁 속에서 한국 포병의 실력이 비약적으로 향상된 모양이었다.

    '하기야 그 세 달이 그냥 세 달이 아니었겠지.'

    그들은 나름 지옥을 겪고 나왔지만, 이들 역시 지옥을 겪은 것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무려 세 달이라는 시간 동안 NDF의 지원 없이 마수를 상대한다는 것이 어디 보통 일이겠는가.

    과거 레벨 5 몬스터 한 마리 때문에 국가비상사태가 걸리던 한국이다. 그런 이들이 레벨 5 몬스터 따위는 우습게 찜 쪄 먹을 만한 마수들이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오는 게이트를 막아내 온 것이다.

    '나중에라도 내가 세상을 구했다는 말은 못하겠네.'

    이들이 버텨주지 않았더라면 자신들이 활약할 순서는 오지 않았을 것이다. 새삼 국가의 저력을 느끼면서 윤혁규가 입을 열었다.

    "우리 측이 생각보다 강한 건지, 저쪽이 생각보다 약한 건지 모르겠네."

    "약한 거야."

    "응?"

    "저쪽이 약해. 우리가 왔을 때 건너편에 쌓여 있던 몬스터들 생각해 봐. 그 정도가 단번에 밀려왔으면 저만한 화력으로는 감당 못할 거야."

    "…그럼 거기에 몰려있던 마수들이 거의 대부분이었다는 건가?"

    "그럴 리가."

    김다현이 입가에 비웃음을 담았다.

    "이제 몰려오겠지."

    우우우웅! 우우웅!

    기이한 공명음과 함께 그들의 눈앞에 수십 개의 게이트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끝내주네."

    윤혁규는 그제야 실감했다.

    마왕과 맞서 싸운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말이다. 지금처럼 그저 한 마리의 마왕을 잡아낸다고 해서 끝나는 싸움이 아니었다.

    '저쪽도 총력전이었지.'

    가용한 병력은 모두 쏟아낼 게 분명했다.

    '거꾸로 말하면, 저쪽도 필사적이라는 거다.'

    마왕 하나에도 인류의 전멸을 각오해야 하던 것이 불과 일 년 전이라는 것을 떠올려 보면, 짧은 시간 내에 인류가 마족에 대처하는 법을 익혀냈다고 평가해도 될 것이다.

    다만, 저 많은 게이트를 눈으로 보고 있으려니, 그 노력이 제대로 효과를 발휘할지 의문이었다. 천하의 윤혁규조차 아연해질 정도의 게이트 수였으니까.

    그 순간, 김다현이 고개를 위로 젖혔다.

    "떨어지는 모양인데?"

    "뭐가?"

    "핵."

    "응?"

    그 순간, 눈부신 빛이 윤혁규의 눈으로 쏟아졌다.

    "아, 씨!"

    너무도 강렬한 빛 때문인지 눈가에서 눈물이 멈추지 않고 흘러 나왔다. 한참 동안 눈을 깜빡이던 윤혁규가 겨우 눈을 뜨고 본 것은 만화에서나 보던 거대한 버섯구름이었다.

    "…저거 뭐냐?"

    "핵이잖아."

    "저 거리에서?"

    "어."

    윤혁규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야, 우리 이 정도 거리면 방사능 피폭되는 거 아니냐? 도망가야 하는 거 아냐?"

    "형은 좋겠다."

    "왜?"

    "생각이 없어서."

    김다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사능 처 맞고라도 살 수 있으면 다행이지. 어디 나중을 생각해?"

    김다현이 이지혁이 준 검을 뽑아냈다. 스르릉거리는 소리가 윤혁규의 귀에 오싹하게 울렸다.

    "지금 말 많이 해둬."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김다현이 환하게 웃었다.

    "아마 내일은 대화할 수 없을 테니까. 둘 다 살아남는 건 너무 과한 바람 아냐?"

    낄낄대며 앞으로 걸어가는 김다현을 보며 윤혁규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난 내일도 너랑 놀 거야, 이 새끼야.'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말이었다.

    * * *

    "타격은?"

    송정수가 목소리를 높였다.

    "제대로 들어갔습니다."

    "아군의 피해는?"

    "거리 계산 제대로 하고 날렸습니다. 군대는 뒤쪽으로 물러나 있는 상황이라 별문제 없을 겁니다. 능력자들은 저 정도 열기로 타격을 받지 않습니다."

    "능력자라고 해서 딱히 육체적으로 우월한 건 아니잖은가?"

    "그래서 KSF들을 후방 배치한 것 아니겠습니까? 최대 전력을 앞쪽에 배치하면서 말입니다."

    "으음……."

    국방부 장관의 설명에 송정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강한 전력을 최전방에 배치한다는 발상이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전문가가 아닌 그가 나설 여지는 없었다.

    괜히 전력을 보존한답시고 약한 전력부터 앞에다 세우다가는 도미노 식으로 무너진다는 것이 사령부의 설명이었다. 잘 이해가 가지는 않지만, 그들이 그렇다는데 비전문가인 그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그래도 위험해 보이지 않는가."

    "직접 타격이 아닙니다. 거리 계산해서 뒤쪽에 투하한 겁니다. 그런 문제는 이쪽에서 신경 쓰고 있으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음, 알겠네."

    송정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의 불협화음에 비하면 지금은 서로에 대한 신뢰가 바탕에 깔려 있었다. 적어도 월권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만 지키면 최악은 피한다는 것이 송정수의 생각이었다.

    "맡기겠네. 최선을 다해주게."

    "예.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반드시 좋은 결과를 남긴다는 보장은 없지만, 적어도 후회는 남기고 싶지 않았다.

    "민간인들은?"

    "대피소에 모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일단은 해안을 중심으로 뒤로 밀어두었습니다."

    "…잘도 그런 명령을 들어주고 있군."

    "시민 의식의 승리겠죠."

    송정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포격 제대로 하라고 전하게. 분명 이대로 끝날 놈들이 아니야."

    "예. 명심하겠습니다."

    송정수는 화면을 바라보며 얼굴을 굳혔다.

    '할 수 있는 건 다 한다.'

    그게 무엇이든 말이다.

    * * *

    "바글바글하네."

    최창식은 몰려 있는 사람들을 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대피소는 이미 사람이 들어갈 곳이 없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거나 외부에 쳐놓은 임시 천막 안에서 불안에 떠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천막 안까지도 가지 못해 길가에 앉아 있었다.

    대한민국의 그 많은 인구를 이 안으로 다 때려 박았으니, 수용 시설이 부족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쯤 되면 불만이 터져 나올 만도 한데, 이상하게도 아무도 불만을 토하지는 않았다.

    '다들 아니까.'

    지금은 불편을 논할 때가 아니었다. 생명의 위기 앞에서 불편이라는 것은 소소한 문제가 되어버리기 마련이니까.

    소문이라는 것은 그 어떤 것보다 빨랐고, 아무도 출처를 모르지만 오늘 벌어지는 전투가 인류의 운명을 좌지우지한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다.

    철없는 아이들이 때때로 불만을 토했지만, 어른들의 신속한 진압으로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아는 것이다.

    지금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이를 악물고 버티는 것뿐이라는 걸 말이다.

    저 멀리서 은은하게 들려오는 폭격 소리가 사람들을 움찔하게 만들고 있었다.

    "뭐든 간에 결론이 좀 났으면 좋겠는데."

    최창식이 한숨을 쉬었다.

    죽는 것보다야 어떻게든 전쟁을 유지하면서 살아남는 것이 더 좋다는 것을 누가 모르겠는가.

    하지만 이제는 죽든 살든 결론이 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 정도로 지치고 말았다.

    쾅!

    폭음 소리가 가까워지면서 사람들의 시선이 한쪽으로 쏠렸다. 천둥소리처럼 울리는 폭음에 아이들이 울음을 터뜨렸다.

    '지혁이 형.'

    최창식이 불안이 가득 담긴 눈으로 전방을 바라보았다.

    '이길 수 있는 거지?'

    * * *

    "유럽은?"

    "막아내고 있습니다."

    "그래도 밥값은 해주는군."

    아직 제대로 된 공세가 쏟아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전초전의 개념이지만, 그 전초전이 지금까지의 어떤 상황보다 격렬하다는 것이 문제였다.

    "뒤를 보지 말고 퍼부어."

    "예!"

    폭염으로 뒤덮여 버린 게이트들을 보면서 크리스토퍼가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아직 마왕들이 나서지 않았다.'

    그렇다면 자신도 능력자들을 보존해야 한다. 자국의 영토에 지금 핵이 몇 발째 떨어지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이 정도면 전방에 있는 이들은 심각한 피폭을 각오해야 하겠지만, 크리스토퍼는 그 사실을 무시했다.

    모두 죽는 것보다는 낫다.

    훗날의 역사가 그를 어떻게 평가할지는 모르겠지만, 역사상 최악의 개새끼로 각인될지언정 기억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다.

    "M-3 추가 배치는 어떻게 되고 있나?"

    "출고되는 대로 끌어 올리고 있습니다. 계속 충원 중입니다!"

    "서둘러!"

    "예!"

    공장에서 나오는 M-3는 시험이고 뭐고 없이 바로 전선으로 합류하는 중이었다. 사활을 걸고 미국의 모든 국력을 모은 결과, M-3가 말 그대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불과 하루 만에 손실한 M-3를 모두 보충하는 것은 물론, 그 세 배에 가까운 숫자가 쌓여졌다. 그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 충원하는 중이다.

    '마왕에게도 통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크리스토퍼를 안타깝게 하는 것은 무슨 수를 쓰더라도 마왕을 견제할 수 있는 수단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이다. 어떻게든 마왕을 일반인들이 상대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했다면 능력자들에게 쏠리는 부담을 줄여줄 수 있을 텐데…….

    "조무래기나 맡아주는 느낌이군."

    크리스토퍼는 히어로 영화를 좋아하지 않았다.

    군경은 들러리가 되어버리고, 특정 몇몇 놈이 나타나서 모든 일을 해결하고 가장 중요한 전투를 한다는 것에 비웃음을 흘리던 크리스토퍼다.

    영화에서 까불던 악당들은 대부분 대물저격총 하나로 해결할 수 있다. 괴물이라는 것들 중 폭격을 맞고 멀쩡한 존재는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런 놈들을 어쩌지 못한다고 호들갑을 떨어 대는 영화를 보니, 재미가 있을 리가 있나.

    하지만 지금 크리스토퍼는 자신이 그 영화 안에서 조무래기나 맡는 무능한 경찰이 된 기분이었다. 도와줄 수 있는 방법도 없이 그저 히어로의 활약을 기대할 수밖에 없는 무능한 군경 말이다.

    비참하고 화나는 일이지만, 현실이 그러했다.

    "그리고 그 믿어야 하는 히어로가 저놈이라는 것은 완전 그리스 비극이지."

    화면에 잡힌 알파의 모습을 보면서 크리스토퍼가 한숨을 쉬었다.

    능력이야 인정한다.

    능력이야 인정한다만… 아무리 다크 히어로가 대세인 세상이라고 해도 그 어둠의 밀도가 너무 심하지 않은가.

    다크 히어로는 성격 나쁜 주인공이지, 범죄자가 아니란 말이다. 인류 최악의 범죄자를 믿어야 하는 상황이라니… 아무리 적의 적은 아군이라지만, 이건 너무 심한 시나리오였다.

    "상황은?"

    "게이트에서 나오는 족족 잡아내고 있습니다. 한국 역시 제대로 방어해 내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지원한 M-3가 효력을 톡톡히 발휘하는 중인 듯합니다."

    "다행이군."

    NDF와 미국의 능력자들이 복귀하면서 생긴 새로운 이득은 물자의 이동이 자유로워졌다는 것이다. 그들이 없었다면 미국에서 생산된 M-3를 배편으로 이동하는 데만 보름 이상의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하지만 대용량을 다룰 수 있는 텔레포터들의 복귀 덕분에 M-3를 출하하는 동시에 전장과 한국으로 이동시킬 수 있었다.

    "다만, 유럽은 백병전 단계로 넘어갔습니다."

    "…곧 박살 나겠군."

    살짝 죄책감이 느껴졌다. 유럽에 어느 정도만 지원을 했더라도 지금처럼 밀리는 상황이 발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선택과 집중을 할 수밖에 없다.

    "모두가 살아남을 수 없다면, 살 사람이라도 살아야지."

    크리스토퍼가 막 입을 열려는 순간,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이더에 이상한 것이 잡혔습니다."

    "뭐?"

    "여, 여기!"

    크리스토퍼가 깜짝 놀라 바뀐 화면을 보았다. 폭격 지대 뒤에서 새빨간 점들이 수백, 수천 단위로 다가오고 있었다.

    "저게 뭐야?"

    "비행체 같습니다!"

    "비행?"

    크리스토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몬스터들 중에서 하늘을 나는 형태의 몬스터가 없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거의 그 모습을 보이지 않아서 마계 쪽에는 지상형 생물이 대다수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식으로 나타나다니.

    지상에서 벌어지는 2차원적 전투와 하늘이 전장으로 편입된 3차원의 전투는 그 대응의 방식이 전혀라고 해도 좋을 만큼 다르다.

    "공군 당장 투입하고, 지대공 화력 배치해! 분대화기 앞으로 밀어서 화망 구성하고! 당장!"

    "예!"

    크리스토퍼의 말에 모두가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직… 아직은 아냐."

    크리스토퍼가 초조한 얼굴로 능력자들의 투입 시기를 재기 시작했다.

    * * *

    "발악하는군."

    "그러게 말이야."

    검은 그림자들이 전장의 한 켠에서 인류와 마수들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바르바체 님은 대체 무슨 생각이신 거지?"

    "그분의 깊은 뜻을 누가 알겠는가."

    같은 마왕이라고 하지만 바르바체는 그들과는 격이 다른 존재였다.

    그들이 아직 마왕이라 불릴 수 없던 시절, 그리고 존재하기도 전부터 그는 마왕이었고, 마왕들의 두려움을 사는 자였다.

    "인간 따위 모조리 쓸어버리면 그만일 텐데, 이런 식으로 시간낭비를 하시는 이유를 모르겠군."

    "부의 에너지를 많이 모아야 한다셨지."

    "큭."

    거대한 전갈과 비슷한 형상을 한 이가 고개를 내저었다.

    "볼툼, 나는 이해할 수가 없어. 부의 에너지를 모아야 한다면 더없이 잔인하게 인간을 죽여 버리면 그만이잖아."

    "그래서는 지속적인 에너지를 얻을 수 없지."

    "그럼 다른 세상을 침공하면 되는 거야. 베라프라든가 말이야."

    "…그것도 그렇군."

    에너지가 넘쳐 나고 있었다.

    '이 전투가 끝나면 우리는 더 강해질 것이다.'

    그들은 마나로 이루어진 생명체들이다. 마나의 밀도가 얼마나 깊은가에 따라 그 힘이 달라진다. 이 세계의 인간들이 뿜어낸 에너지가 그들의 마나를 강화시켜 주고 있었다.

    이 여세를 몰아갈 수 있다면, 베라프로 통하는 문을 여는 것도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 그들의 오랜 숙원이었던 베라프의 멸망 역시 머지않은 것이다.

    "이곳의 인간들이 우리에게 참 많은 것을 주는군. 그럼 그 대가로 고통 없는 죽음을 선사해 줘야겠지?"

    "…잔인하게 죽인다고 하지 않았나?"

    "고민이군.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할 것 없어."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마왕들이 가만히 고개를 돌렸다. 백발의 인간 하나가 그들을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고민은 이쪽에서 해야지. 나는 전갈 튀김은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

    "…네놈!"

    마왕들의 눈초리가 사나워졌다.

    그들의 편에 섰다가 배신한 인간.

    알파가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예전에 홍콩에서 전갈 튀김을 한 번 먹어본 적이 있는데, 그거 진짜 별로였어. 나는 새우튀김은 좋아하는데, 전갈 튀김은 그 맛이 아니더라고. 마치 바퀴벌레를 튀겨 먹는 느낌이었지. 그래서 고민인데, 음……."

    알파가 방긋 웃었다.

    "해결책을 찾았다. 팔다리를 잘라 버리면 새우와 비슷한 모양이 되겠지. 맛은 어쩔 수 없다 쳐도 생리적인 혐오감은 좀 줄일 수 있을 거야. 그러니……."

    알파의 양손에서 새하얀 기류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팔다리, 잘라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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