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99화 (99/118)
  • [■] 이제 첫발 내디뎠네 [■]

    ─────

    최정훈의 눈이 크게 떠졌다.

    "저, 저거?"

    최정훈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모습을 드러낸 체이칸의 표정은 전혀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다른 곳은 변화가 없다고 말할 수 없었다.

    "됐어!"

    최정훈이 주먹을 꽉 움켜잡았다.

    체이칸의 몰골은 그가 상상한 이상이었다. 날개와 붙어 있는 팔 한쪽은 이미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짓이겨져 있고, 커다란 상체는 곳곳이 움푹움푹 파여 푸른 피를 줄줄 흘리고 있었다.

    게다가 육체가 반쯤 그을려 숯처럼 변해 있지 않은가.

    최정훈이 환희에 떨었다.

    "으아……."

    크게 소리를 지르고 싶지만,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 기나긴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드디어 인간이 마왕에게 제대로 된 일격을 먹인, 역사적인 순간을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호오?"

    이지혁 역시 흥미롭다는 얼굴로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내부도 반쯤 작살난 것 같은데?"

    "…이게 끝은 아니겠죠?"

    "뒈지지는 않았으니까 끝은 아니죠."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최정훈의 얼굴에 불안함이 어렸다.

    "그런 거 있잖아요. 공포 영화의 법칙이라고 해야 하나? 강대한 적이 쉽게 쓰러진다 싶을 때는 꼭 함정이 있잖아요."

    "영화 볼 시간은 있었나 보네요?"

    "취업하기 전에……."

    이지혁이 피식 웃었다.

    "이건 영화가 아니니까요."

    이지혁이 눈을 가늘게 뜨고 체이칸의 상세를 살폈다.

    '박살이 났군.'

    예상 이상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예상대로라고 해야 할까.

    마왕을 상대할 수 있는 수준으로 NDF를 키우는 것이 목적이었고, 그 수준이 되었다 싶었기에 이계에서 나온 것이다.

    이지혁의 계산이 맞다면 마왕은 당연히 상대할 수 있어야 한다.

    "생각보다 더 잘 잡는데?"

    이지혁이 씨익 웃었다.

    마왕 정도는 언제든지 잡을 수 있는 전력을 구축해 오기는 했지만, 그래도 마왕을 상대하는 일이 쉬울 리는 없었다. 당연히 고생을 좀 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리 간단하게 잡아내는 모습을 보니, 그동안의 고생이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에 뿌듯함이 몰려온다.

    "저, 저거, 지금 뭐가 어떻게 된 겁니까?"

    정인수가 놀라 묻자 이지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몬스터 잡는 것 처음 보세요?"

    "모, 몬스터요? 저건 마왕이잖아요."

    "바퀴벌레가 크다고 바퀴벌레가 아닌 건 아니죠. 어차피 마족도 몬스터의 일종이고, 마왕도 몬스터의 일종이죠. 지금까지 하던 일인데요, 뭐."

    "…그게 그리 간단하게 정리될 일입니까?"

    "안 될 거 있나요?"

    정인수가 아연한 얼굴로 체이칸을 바라보았다.

    마왕이라는 존재는 지금까지 인류에게 공포의 대상으로 군림해 왔다.

    몬스터들과 격전을 벌이는 와중에도 마왕들이 나서기만 하면 모든 것이 끝이라는 공포가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항상 존재했다. 심지어 목숨을 내놓은 채 후방 교란에 뛰어든 정인수마저도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데 이지혁이 포함되지 않은 NDF만으로 마왕의 구축이 가능하다니.

    "…바라고 바라던 상황인데, 왜 이리 위화감이 드는지 모르겠네요."

    "별거 아니에요. 살충제를 좀 독하게 만든 것뿐이니까."

    "저도 그리 간단하게 생각하고 살 수 있었으면 스트레스를 덜 받을 텐데 말이죠."

    정인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모든 사람들이 이지혁처럼 편하게 생각하고 살 수 있다면 세상이 얼마나 평화로워지겠는가.

    "크윽."

    그때, 그 먼 거리를 격해서 체이칸의 목소리가 똑똑히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 인간 따위가 감히……."

    "아, 식상하다, 식상해."

    이지혁이 닭살이 돋는다는 듯 팔을 벅벅 긁었다.

    "감히, 감히 인간 따위가!"

    체이칸이 뭔가 말을 더 이으려는 듯했으나 몸에 힘이 빠졌는지 그 자리에서 털썩 쓰러졌다.

    '이게 이렇게 되도 되는 건가?'

    정인수는 위화감을 이겨낼 수가 없었다.

    그런 것 있지 않은가.

    상대가 강대할수록 격전은 치열하기 마련이다.

    승부가 엎치락뒤치락하다가 서로 상처를 입고 격전의 끝에서야 겨우 제압하는 과정이 필요한 건데…….

    "이거, 좀 싱거운 거 아닌가요?"

    "그 발언 좀 위험해요."

    "아뇨. 뭐, 우리 편이 고생을 좀 더 했으면 좋겠다든가, 그런 생각으로 한 말은 아니구요."

    정인수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래도 명색이 마왕인데, 너무 쉽게 해결이 되어버리는 것 같으니까요."

    이지혁이 혀를 찼다.

    '너무 쉽게?'

    NDF들이 어떤 훈련을 어떻게 해왔는지를 모르니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최정훈과 정인수의 반응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최정훈은 저들이 어떤 훈련을 해왔는지 알기에 마왕을 잡아내는 것에 순수하게 기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인수는 그저 석 달 동안 사라졌다 나타난 이들이 순식간에 마왕을 때려잡는 걸 봤으니 이상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는 석 달이 아니지만 말이다.

    "뭐, 여하튼 이제 막타 쳐야겠지."

    이지혁이 체이칸을 향해 다가가는 NDF들을 바라보았다.

    "쓰러진 건가?"

    "걸레짝이 된 거 같은데?"

    "진짠가? 저거 가서 마무리해도 되는 걸까?"

    NDF들조차 혼란에 빠져 있는 모습이었다.

    시험에서 항상 30점을 맞던 사람이 어느 날 성적표에 100점이 찍혀 있으면 자신의 능력 향상을 기뻐하기보다는 오류를 의심하는 것처럼 말이다.

    노력을 했다.

    죽을 만큼 노력을 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이렇게 훈련을 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더 편하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노력을 했다.

    그만큼 노력을 했으니 자신감을 가질 만도 하건만, 마왕이란 존재들이 얼마나 강대한지를 아는 NDF가 아닌가.

    이지혁이 싸우는 와중에 그 옆에서 한 팔 거드는 것만으로도 목숨이 몇 번씩 날아갈 경험을 한 그들로서는 지금의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저 새끼가 약한 건가? 마왕 중에?"

    "아니."

    서아영이 딱 잘라 말했다.

    "우리가 센 거야."

    약한 마왕이라는 것이 있을 리 없었다. 아무리 최하위라고 해도 마왕은 마왕. 마왕은 임명직이 아니다. 스스로 그 강함을 증명하고 쟁취한 자들만이 얻을 수 있는 것이 마왕이라는 칭호였다. 그렇기에 약한 마왕이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세진 거지."

    "…제대로 안 강해졌으면 이지혁을 평생 저주하려고 했는데."

    "그 이야기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이제 우리가 힘을 합치면 이지혁이랑 해볼 만한 거 아냐?"

    김다현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 양반이 저 새끼처럼 멍청하게 쏘는 족족 다 맞아줄 것 같지는 않은데? 시작하자마자 우리가 반은 날아갈걸?"

    "…그도 그렇겠다."

    전투에 있어서 이지혁이 얼마나 얍삽하고 야비한지는 이미 충분하게 경험을 한 그들이다. 마왕과는 싸울 생각이 들지만, 이지혁과는 싸우고 싶지 않았다.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이제 정리하자고."

    "음."

    서아영이 저벅저벅 걸어가 체이칸의 앞에 섰다.

    "…어이."

    체이칸이 고개를 들어 서아영을 바라보았다. 종족이 다르고 생김이 다르기는 하지만, 체이칸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감정이 무엇인지는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절망과 분노.

    서아영은 그제야 실감했다.

    잡아냈다.

    정말 마왕을 잡아낸 것이다.

    "인간 주제에……."

    "뭐라는 거야?"

    서아영이 고개를 돌려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인간 주제에'래."

    이지혁이 해석을 해주자 서아영이 피식 웃었다.

    "그 인간 따위에서 처 발린 느낌이 어때?"

    체이칸이 이를 드러냈다. 서아영의 말을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그 어감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듯했다.

    "인정하지. 나는 너희에게 패했다. 하지만 이건 마족이 너희에게 패한 것이 아니다. 그저 너희의 수에 내가 당한 것뿐이다."

    "해석."

    "씁."

    이지혁이 귀찮다는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지만, 이번에도 고분고분 해석을 해주었다.

    해석을 들은 윤혁규가 피식 웃었다.

    "마수 떼로 죽어라고 들이밀던 놈들이 할 말은 아닌 것 같군. 그럼 우리가 정정당당하게 일대일로 싸워주기를 바랐나? 이만한 인원 앞에서 당당하게 튀어나와서 일갈하던 놈이 끝은 구차하기 짝이 없네."

    "그건 통역 안 할래. 너무 길어."

    "와……."

    윤혁규가 황당하다는 듯 바라보았지만, 이지혁은 '어쩌라고?'라는 얼굴로 배를 쭉 내밀었다.

    원래 그런 인간인테 말을 섞어 뭐하겠는가.

    윤혁규가 고개를 저었다.

    "이제 끝내자고."

    "음."

    서아영의 말에 김다현이 검을 들고 앞으로 나섰다.

    "…한 건 하나도 없는 놈이 막타 치는 것 보소?"

    "한 게 없으니까 막타라도 쳐야 할 거 아냐! 이게 뭐 경험치 주는 것도 아닌데, 막타 좀 치면 어때!"

    김다현이 바들바들거리며 소리를 질렀다. 다들 반쯤은 불쌍하다는 얼굴로 김다현을 바라보았다.

    "왜왜! 뭐, 뭐!"

    "쳐라, 쳐. 막타."

    김다현이 검을 뽑아 들고는 체이칸을 향해 다가갔다.

    체이칸이 숨을 헐떡이면서 김다현을 노려보았다. 인간에게 당한 최초의 마왕이 된다는 굴욕감이 그를 참을 수 없게 만들었다.

    "너희는 모두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분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분이 하신 말씀대로 너희는 삼 일 이내에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지옥에서 똑똑히……."

    "뭐래!"

    서걱!

    어이없을 만큼 쉽게 목이 베였다.

    몇 번은 내려쳐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김다현조차도 황당하다는 얼굴로 검과 잘려진 체이칸의 목을 번갈아 보다가 이지혁을 돌아보았다.

    "시, 신검?"

    "…마검이라고, 등신아."

    이지혁이 부연해 주었다.

    "마족들은 마나 생명체다. 뭐, 몸이 쇳덩어리로 만들어져서 그리 단단하겠냐? 마나로 몸을 항상 보호하고 있으니 공격이 안 먹히는 거야. 마나를 잃은 마왕은 조금 단단하기는 해도 생물의 범주다. 그만한 칼로 썰었는데 멀쩡할 수는 없지."

    "아!"

    김다현이 지독한 위화감에 몸을 떨면서 바닥에 떨어진 체이칸의 머리를 바라보았다.

    "…마왕 하나 잡았네."

    "그러게."

    이게 현실인가 긴가민가하다.

    하지만 그런 그들을 이지혁이 깔끔하게 현실로 돌려세워 주었다.

    "이제 시작이겠네."

    "시작?"

    "현실은 잔혹한 법이지. 설마 앞으로도 마왕이 하나씩 나타나서 너희에게 목을 내밀어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겠지?"

    "……."

    "마왕은 승리를 위해서는 자존심도 접는 존재들이다. 아마 이제는 떼거리로 나타나겠지."

    떼거리라고?

    이제 겨우 하나 잡았는데?

    서아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둘이면 위험하고, 셋이면 필패다. 화력을 집중하지 못한다면 타격을 입히기가 쉽지 않았다.

    "뭐, 그래도 지금은 기뻐해야겠지. 봐."

    이지혁이 뒤를 가리켰다.

    분분히 후퇴를 해 이제 검은 무리 정도로 보이는 군인들이 목을 빼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켜낸 거다."

    서아영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리고 정신이 어질어질 하다. 순간적으로 몸에 있는 모든 힘을 끌어 썼기 때문이기도 하고, 긴장이 풀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제 첫발 내디뎠네."

    마족과 인간. 그 긴 전쟁의 끝으로 향하는 첫발이 이제야 내디뎌진 것이다.

    * * *

    "잡았다고?"

    "잡았답니다!"

    "으아아아아아!"

    윤영민은 체통도 잊고 탁자 위로 뛰어 올라갔다. 순간, 이성이 날아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탁자 위로 뛰어오른 그의 옆에 터질 듯한 근육을 자랑하는 송정수가 상의를 찢어버리고는 함께 있다는 것이다!

    "빌어먹을 마왕 새끼들! 꼴좋다!"

    이 광경이 뉴스라도 탄다면 전 국민이 국가 지도부에 대해 심각한 회의를 가질지도 모르겠지만, 그 기쁨만큼은 확실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지혁이 잡았나?"

    "이지혁은 손도 안 댔답니다."

    "크하하하하! 빌어먹을! 대체 뭘 하고 온 거야!"

    송정수가 탁자에서 뛰어내려 바닥을 쾅쾅, 내려치더니, 벌떡 일어나 국방부 장관을 콱 끌어안았다.

    순간, 허리가 아작 나는 느낌을 받은 국방부 장관이 도리질을 쳤다.

    "저, 저 죽습니다, 총리님! 총리님!"

    "허허허허! 이런 기쁜 날에 죽는 것이 대순가?"

    대수지, 이 양반아! 미쳤어?

    욕이 반쯤 입 밖으로 튀어나왔지만, 국방부 장관은 필사적으로 욕구를 짓눌렀다. 얼마 전이었다면 생각도 하지 않고 질러 버렸겠지만, 이제는 출세라는 것을 다시 고려할 여유가 생긴 것이다.

    사라졌던 미래가 그의 앞으로 다시 돌아왔다.

    "…진짜 해낼 줄이야."

    "그럼 진짜 해내지, 가짜로 해낼 줄 알았습니까!"

    "무작정 기다리기는 했지만, 정말 돌아오기만 하면 해결할 수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저놈들이 얼마나 무지막지했습니까."

    "큭큭큭, 그래봐야 몬스터죠. NDF는 몬스터 처리의 전문가들 아닙니까!"

    송정수가 감회가 남다르다는 얼굴로 연신 허벅지를 내려쳤다.

    '예전에는 반대도 했는데…….'

    KSF에서 NDF를 분리한다고 했을 때, 굳이 그런 식으로 또 하나의 기구를 만들어서 예산을 낭비할 필요가 있냐는 말을 했던 송정수다.

    아무래도 같은 여당이다 보니 적극적으로 막아서지는 않았지만, NDF 창설에 매우 부정적인 것은 사실이었다. 특정 엘리트 집단을 따로 분화하여 기구로 만든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NDF가 구원자로 다시 돌아오는 모습을 보니, 여러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지금 그들은 뭘 하고 있다는가?"

    "남아 있는 몬스터의 잔당들을 처리하고 있답니다."

    "으음, 처리라……."

    그 말의 울림이 이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처리라니.

    지금까지는 막아내는 것만으로도 국가의 전력을 투입해야만 했던 몬스터들을 '처리'한다니.

    송정수는 자꾸만 실없이 흘러나오는 웃음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군요."

    윤영민의 말에 송정수가 고개를 저었다.

    "여전히 우리가 최악의 상황이라는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다만, 이제는 반격을 할 수 있는 수단이 생긴 것뿐이지요. 만약 마왕들이 몰려들기라도 한다면, 지금이라도 한반도를 버리고 탈출해야 할 겁니다."

    "음……."

    좋은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들뜬 윤영민의 심정을 완전히 진정시키지는 못했다.

    "이제 좀 나라가 정상적으로 돌아갈 것 같군요."

    "처리해야 할 문제가 산적해 있습니다. 일단 다른 건 몰라도 식량 문제가 제일 큽니다."

    "…예, 그렇지요."

    식량이라는 말이 나오자 윤영민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나름 생산이 끊이지 않게 유지한다고 노력은 했지만, 한계는 극명했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이토록이나 식량의 자급자족이 안 되는 곳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생산율이 이제 오를 겁니다."

    "문제는 그 생산이 소비로 이어지기까지의 간극이 있다는 겁니다. 지금 당장 국민들을 먹일 쌀이 없어요."

    "…헐, 그래요?"

    윤영민과 송정수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그들의 눈에 어느새 생겨난 검은 게이트에서 나오고 있는 이지혁이 들어왔다.

    "이지혁 씨!"

    "으하하하핫! 자네 왔구만!"

    윤영민과 송정수가 동시에 이지혁에게 달려들어 그의 손을 꽉 잡았다.

    "뭐 대단한 사람 왔다고 이리 환대를 다 해주시고 그래요."

    "대단하지! 대단한 사람이 왔지. 건국 이래 대한민국에서 자네보다 대단한 사람이 누가 있었겠는가."

    "공치사가 너무 심하시네요."

    "뭐하냐! 가서 커피 타 와!"

    총리님, 저 국방부 장관인데요?

    순식간에 커피 심부름꾼이 되어버린 국방부 장관이 떨떠름한 얼굴이 되었지만, 너무 기뻐하고 있는 송정수를 보고 있자니 항의하는 것도 바보처럼 느껴졌다.

    '그냥 가자.'

    묵묵히 커피를 타러 나가는 국방부 장관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고생했네, 정말 고생했어!"

    "네. 뭐, 좀 힘들기는 했죠."

    "그래그래, 고생했지!"

    송정수가 마치 몇 년 만에 시골을 찾아온 손자 보는 듯한 눈으로 이지혁을 대했다. 정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을 본 이지혁이 부담스러움에 슬그머니 뒤로 물러났다.

    "뭐, 그렇게까지는 아니구요."

    "그래."

    윤영민이 뒤쪽에 소외되어 있는 최정훈을 보며 말했다.

    "잘 다녀왔네."

    "예. 보고드리러 왔습니다."

    "음, 그래."

    최정훈이 가볍게 브리핑을 했다.

    "수련을 하러 갔던 NDF 전원 사고 없이 무사 복귀했습니다."

    "그래, 고생 많았네."

    윤영민이 장하다는 듯이 최정훈의 등을 팡팡, 두드렸다.

    "그런데 식량이 부족하다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 그게……."

    이지혁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대한민국 라면 공장에 쌓여 있는 라면들만 다 풀어도 전 국민이 일 년은 먹고사는 것 아니었어요?"

    "아니라네."

    송정수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의외로 라면이라는 것은 유통기한이 짧은 음식이네. 불과 육 개월이면 못 먹는 음식이네. 다시 말하자면, 평시에도 시중에 깔려 있는 라면은 육 개월이면 소진된다는 거지."

    "…엄청 먹네요."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송정수가 한숨을 쉬었다.

    "평시에는 밀가루라든가, 여러 가지 음식들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정세가 이리되다 보니 수입되던 식자재들이 더 이상 들어오지 않고 있네. 그래서 내수로 자급해야 하는데, 자급률이 떨어지다 보니……."

    "그러니까, 먹을 게 없다는 거잖아요."

    "간단히 말하자면 그렇지."

    너무 간단히 줄인 경향이 있지만, 이지혁은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던가.

    "그럼 먹을 걸 구해오면 되겠네요."

    "어디서 구한다는 말인가. 지금 세계가 다 같은 상황이네. 게다가 석유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해서 수입이 된다고 하더라도 컨테이너선을 굴릴 만한 석유가 없네."

    "그걸 왜 우리가 구해요?"

    "그럼?"

    이지혁이 피식 웃었다.

    "이래서 사람이라는 것은 역사를 배워야 하는 거죠."

    "역사?"

    "예."

    이지혁이 조금은 장난기가 어린 어조로 말했다.

    "식량이 없었을 때 우리 조상님들이 항상 쓰던 방법이 있잖아요. 그게 얼마나 됐다고 벌써 다 잊었어요."

    "…예?"

    윤영민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조상님이라니?

    "원래는 중국에 써야 하는 방법이지만, 중국이 저 꼴이 됐으니 최근에 벌어진 역사를 반복해야겠네요."

    "아, 설마……."

    "네."

    이지혁이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깁 미 쪼꼴렛을 다시 외칠 때가 됐네요."

    * * *

    "좋았어!"

    크리스토퍼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구축 성공! 구축 성공입니다!"

    "큭!"

    환희를 말로 표현하는 것이 이리 힘든 일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크리스토퍼는 화면에 비치는 광경을 보며 가슴을 마구 두드렸다.

    "빌어먹을 알파 놈 같으니라고!"

    어디 쓸래야 쓸 수도 없던 놈이 이리 제구실을 해주는 날이 올 줄이야.

    몬스터들에 대한 정리만 끝나면 바로 한국으로 합류하겠다던 알파의 계획은 어디선가 나타난 마왕 덕분에 제지되었다. 마왕이 나타난 것을 확인한 알파가 전장에 합류했고, 능수능란한 솜씨로 마왕을 구축해 낸 것이다.

    "왜 항상 저런 성격 더러운 놈들만 실력이 확실한 건지 모르겠다니까."

    이지혁도 그렇고, 알파도 그렇고 말이다.

    알파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마왕의 머리를 밟은 채 뭔가를 지껄여 대고 있었다.

    객관적인 시선으로 봤다면 정말 양아치나 할 짓이겠지만, 상대가 상대다 보니 정의의 사도처럼 보이고 있었다.

    "하기야 요즘 시대가 어떤 시댄데."

    애들이 보는 히어로물에서도 이제 슬슬 성격 더러운 히어로들이 대세를 점하고 있지 않은가.

    말 잘 듣고 착한 히어로의 시대가 갔다는 것을 느끼며 크리스토퍼가 어깨를 들썩였다.

    성격이 좋든 나쁘든 상관없다.

    고양이는 하얗든 검든 쥐만 잘 잡으면 되는 것이다.

    "하루 만에 무려 두 마리나 잡아냈다고!"

    한국에서도 출현한 마왕을 잡아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심지어 이지혁이 없이도 마왕을 잡아냈다지 않은가.

    겨우 오십도 안 되는 NDF만으로 마왕을 잡아냈다는 소식은 이곳의 상황보다 더한 희소식이었다.

    '희망이 생긴 거다.'

    낙관을 하지 않으려고 애를 써보지만, 눈앞에 새하얀 길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크리스토퍼는 자꾸만 들썩이는 어깨를 진정시키기 위해서 노력했다.

    여기서 너무 기뻐하는 모습을 보여도 좋지 않다. 그를 지켜보는 수많은 이들의 긴장이 풀어질지도 모르니까. 마왕이란 것들은 그 행동 패턴을 예측할 수가 없다. 지금 당장 수십의 마왕이 어딘가로 출현할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러니 긴장이 풀리는 것은 막아야 한다.

    '조금 쉬고 싶은 건 사실이지만…….'

    너무 오랜 기간 긴장을 유지하고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다 접어둔 채 한숨 자다가 일어나고 싶지만, 처리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일차적인 전쟁이 끝났다고 해서 할 일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전투를 준비해야 하고, 희생을 수습해야 한다. 무너져 버린 M-3 편대도 다시 쌓아야 하니,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자, 힘내서 움직여……."

    그 순간, 크리스토퍼의 전화가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음?'

    크리스토퍼가 불안한 눈으로 전화를 바라보았다. 그가 이런 전화, 저런 전화를 다 상대해 준다면 하루 종일 전화만 받아야 할 것이다.

    그가 개인적으로 지니고 다니는 전화기는 업무용이 아니다. 가족이나 정말 중요한 전화만 받기 위해서 따로 들고 다니는 전화기였다.

    그런 전화가 울렸다는 것은?

    "…어?"

    액정에 뜬 이지혁이라는 이름을 본 크리스토퍼가 반가움 반, 불안함 반이 뒤섞인 얼굴로 전화기를 들었다.

    '이거, 받아야 하나?'

    이지혁이 한 전화를 무시할 수는 없지만, 이 타이밍에 걸려온 전화에는 왠지 모를 불안함이 느껴진다.

    '여하튼 내가 가족들의 신병을 책임지고 있으니까.'

    전화를 할 이유도 충분하고, 전화를 받아야 할 이유도 차고 넘친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한 기분이 든단 말인가.

    "끄응."

    크리스토퍼가 앓는 소리를 내고는 전화를 받았다.

    "예, 크리스토퍼 맥클라렌입니다."

    [와, 오랜만이에요.]

    "귀환을 축하드립니다, 이지혁 씨. 돌아오자마자 한 건 하셨다더군요."

    [아, 고마워요. 저는 뭐, 딱히 한 게 없어요.]

    "이지혁 씨가 모두를 잘 교육시켜 주신 덕분이죠. 이지혁 씨가 아니었다면 인류는 끝장이 났을 겁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순간, 크리스토퍼가 불안함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 * *

    "무, 물론이죠."

    사실이다.

    이지혁이 없었다면 인류는 끝장이 났을 것이다.

    그런데 이 발언 자체는 그냥 공치사 삼아 한 것인데 이리 꼬투리를 물고 들어오는 것을 보니, 덜컥하고 뭔가 내려앉는 것 같았다.

    [제가 좀 도움이 되기는 한 모양이네요.]

    "그, 그렇죠?"

    [저는 별로 그런 생각을 안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까지 말을 해주시니 참 고맙네요.]

    "아, 아닙니다. 당연한 일인 거죠."

    크리스토퍼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이지혁이 뭔가를 노리고 있다는 것은 아무리 눈치가 없는 사람이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요.]

    "예……."

    [인생이라는 것은 기브 앤 테이크 아니겠어요?]

    "그, 그렇죠?

    [가는 것이 있으면, 오는 것이 있어야 하는 법이죠.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주는 관계는 언젠가는 파탄이 나기 마련이거든요. 세상살이가 다 그런 거잖아요.]

    뭔가 장황해지기 시작했다.

    "물론입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면 제가 미국에다 뭘 많이 퍼주기는 했는데, 뭘 받은 적은 없는 것 같아서요.]

    니가 가져간 돈이 얼마인지는 알고 말하는 거냐?

    거짓말 좀 보태면 국방 예산이 너 때문에 휘청거리고 있다. 그런데 뭐? 받은 게 없어?

    물론 이지혁 혼자 전 미군이 달려들어도 하지 못할 일을 해준 것은 맞지만, 받은 게 없다는 식으로 나오니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그가 해준 일에 비하면 적은 돈일지 몰라도 개인이 가지기에는 너무도 어마어마한 돈을 받아낸 이지혁이 아닌가.

    "그, 그렇죠."

    하지만 생각을 그대로 말로 내뱉을 수 없는 것이 크리스토퍼의 입장이 아니던가.

    이제 이지혁이 없어도 단독으로 마왕을 구축할 수 있는 힘을 갖추었고, 이지혁은 과거만 한 위상이 없는 상황이기는 하지만, 이번 일을 통해 이지혁이 가진 가능성을 또 한 번 확인한 크리스토퍼로서는 이지혁과의 관계를 경색시킬 수 없었다.

    '에이, 빌어먹을.'

    '가져갈 것 있으면 다 가져가라'라는 심정으로 크리스토퍼가 경쾌하게 말을 꺼냈다.

    돈이고 사람이고, 지금 그런 게 뭐가 중요하냐. 일단은 살아남는 게 우선이지.

    "네, 그렇습니다. 사실 저희가 해드린 것이 없는 것도 사실이지요. 혹시 바라시는 것이라도 있습니까?"

    [뭐, 꼭 바라는 게 있는 건 아니구요,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제가 뭘 바라고 말을 꺼낸 것 같네요.]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맞잖아, 이 새끼야!

    크리스토퍼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꼭 해주시고 싶으시면… 그냥 뭐, 다른 건 됐고…….]

    "예."

    [밥 좀 주세요.]

    "네?"

    크리스토퍼가 멍한 얼굴로 되물었다.

    "식사 대접을 한 번 해달라는 뜻입니까?"

    [네. 뭐, 제가 큰 걸 바라는 것은 아니구요, 그 정도면 될 것 같아서요.]

    "아……."

    크리스토퍼가 기분 좋게 웃었다. 뭔가 대단한 걸 바라는 줄 알았는데, 그 정도라면 얼마든지 해줄 수 있었다.

    세계를 구한 영웅에게 식사 대접 한 번 정도는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가 아는 가장 비싼 레스토랑으로 모실 용의가 있었다.

    "하하하하, 물론이죠. 제가 사겠습니다. 언제쯤 오시겠습니까?"

    [제가 갈 일은 없을 것 같구요, 보내주시면 돼요. 아니다. 그거 가져오려면 제가 가야겠네요. 언제쯤 준비가 될까요?]

    "준비는 지금 당장이라도 가능합니다."

    [네? 그게 바로 준비가 된다구요?]

    크리스토퍼가 입을 다물었다.

    이건 밥을 사달라는 사람이 할 대사가 아니었다.

    "…밥 달라고 하신 것 아니었습니까?"

    [네, 밥이요. 그런데 먹을 사람이 좀 많아요. 돌아와 보니 이 양반들이 정치를 어떻게 했는지 밥이 없다잖아요.]

    "아, 그러니까 한국에……."

    [네.]

    "식.량.을 원조해 달라는 말씀이신 거죠?"

    [네, 밥이요.]

    '야, 인마! 누가 그걸 밥 사달라는 식으로 말하냐! 물론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게 그건 아니잖아!'

    속으로 노성을 지르면서도 크리스토퍼는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산을 마쳤다. 다행히 식량은 여유분과 재고분이 충분했다. 중부 공업지대는 박살이 났지만 농업지대는 잘 돌아가고 있고, 수출이 끊긴 만큼 창고에 식량이 거득거득 쌓여 있었으니까.

    '뭐, 이걸로 생색을 낼 수 있으면 그걸로 좋겠지.'

    "지원하겠습니다. 어느 정도면 될까요?"

    [전 잘 모르겠네요. 실무적인 부분은 따로 상의하시구요. 여하튼 밥은 주신다는 걸로 알고 있을게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와, 생각보다 엄청 호탕하시네요.]

    "재고가 있으니까요. 그리고 이지혁 씨가 원하신다면 제가 굶어서라도 내드려야지요."

    [음, 이리 나오니 좀 미안해지는데……. 여하튼 잊지 않을게요.]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자세한 부분은 제가 위쪽과 상의해서 결정하겠습니다."

    [네. 제가 가지러 가야 하니까, 결정되면 말씀해 주세요. 그런데 이쪽도 좀 급한 거 같으니까, 서둘러 주시면 고맙겠네요.]

    "그럼 일차적으로 밀가루와 고기류를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가져가시죠."

    [그럼 그리해 주세요.]

    "예. 그럼."

    전화를 끊은 크리스토퍼가 피식 웃었다.

    '그래도 이 정도로 털린 게 다행이지.'

    이지혁이 해달라고 하면 간도 빼서 줘야 할 판이었다. 남는 식량으로 해결할 수 있으면 오히려 남는 장사였다. 앞으로의 상황을 위해서도 이지혁이 해줘야 할 게 많았다.

    '알파를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은 이지혁뿐이니까 말이야.'

    크리스토퍼가 가만히 비전을 바라보았다. 마왕의 머리를 짓밟고 있는 알파의 모습을 보니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예전의 알파도 미국이라는 나라로 제어하지 못했다.'

    정확히 말해 예전에는 잡아낼 수 없던 것이고, 이제는 정말 제어할 수 없는 수준이 되고 말았다. 이지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알파가 마음먹고 세상을 뒤집었을 때 누가 말릴 수 있을까.

    불가능할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늑대를 막자고 호랑이 새끼를 키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지.'

    인간의 적은 언제나 인간이다.

    크리스토퍼는 그 진리를 잊지 않고 있었다.

    * * *

    "크르르르륵."

    보다주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자신의 머리를 밟고 있는 알파를 올려다보았다.

    밀렸다.

    패배했다.

    수에 밀린 것이 아니다. 실제로 주변의 인간들은 그와 알파의 전투에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초반에는 그의 앞을 막아섰지만, 알파가 등장한 이후로는 그저 구경만 했을 뿐이다.

    인간과의 일대일 대결에서 마왕인 그가 패배한 것이다. 심지어 지금 그의 육체는 산산조각이 나 있지만, 알파는 별다른 상처도 없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자신들에 비한다면 찰나와 같은 시간을 살아가는 것이 인간 아니던가. 그런데 그런 인간이 마왕을 이길 수 있는 무위를 쌓아 올리다니. 아무리 인간의 잠재력이라는 것이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라 하더라도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 길고 길던 베라프의 역사에서도 인간이 마왕을 이긴 적은 없었다. 그 강대하던 백마도사들조차 수와 세력의 힘으로 마왕을 상대하려 했을 뿐, 스스로의 힘을 앞세워 마왕과 싸울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지혁이 인간임에도 인간을 뛰어넘은 마왕으로 인정받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하단 말이지?"

    "구차하네."

    알파가 보다주의 머리를 꾹꾹 밟았다.

    "이기고 지고에 이유가 어딨어? 내가 너보다 더 강하니까 이긴 거지. 그 정도도 이해 못하는 저렴한 머리인가? 응?"

    보다주는 허탈한 심정을 어찌할 수 없었다.

    영겁에 세월을 살아온 그의 삶의 마지막이 이런 꼴일 줄이야. 단 한 번도 이지혁이 아닌 다른 인간에게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 보다주였다.

    "인간 중에서는 한 번씩 돌연변이가 나온다더니."

    "뭐, 그건 맞는 말인데, 나는 자연발생 돌연변이가 아니라서 네 말이 좀 애매하긴 하네."

    "…무슨 의미이지?"

    "인간이란 그런 거거든. 기술과 지식을 쌓으면 어떻게든 활용해 보려고 하지. 에테르라는 새로운 장난감을 손에 넣은 인간이 그걸 그냥 두고 볼 리가 없는 거지."

    "……."

    "물론 네 저렴한 머리로는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말이야. 이해해 달라고 할 생각도 없어. 너는 그냥 죽으면 돼."

    "자, 잠깐!"

    "구차하다니까."

    "그런 게 아니다."

    보다주가 이를 악물었다.

    "생각났다! 너는 협력자가 아니냐!"

    "응?"

    "우리가 이 세계로 올 수 있도록 문을 연 것이 너였지! 그런데 왜 이제 와 이런 짓을 하는 거냐?"

    "오?"

    알파가 흥미롭다는 듯이 보다주를 바라보았다.

    "아주 멍청이는 아니었네. 그런 걸 기억하고 있는 것을 보니 말이야."

    "…어째서!"

    "하지만 멍청하다는 것에는 변화가 없어. 정말 내가 이 지구가 멸망하기를 바라서 너희를 이곳으로 끌어들였다고 생각하는 건가?"

    알파가 이죽였다.

    "마왕이란 놈들은 참 멍청하단 말이야. 자신들이 누군가를 이용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해도 자신들이 누군가에게 이용당할 수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더군. 쓸데없이 오만해."

    "크으윽."

    보다주가 소리쳤다.

    "네 오만함 역시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나를 이겼다고 네가 마왕을 이길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마라. 이제 너희들이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진정한 공포가 시작될 것이다. 그분이 나서기 시작하면……."

    콰드득!

    알파의 발이 보다주의 머리를 밟아 터뜨려 버렸다.

    "어, 미안."

    알파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나는 자기는 힘도 없는 주제에 괜히 잘난 체를 하는 걸 못 버티거든. 몸에 살짝 힘이 들어가 버렸네. 그렇게 쉽게 터질 줄 알았나."

    발에 묻은 피를 바닥에 쭉쭉 문질러 닦은 알파가 뒤를 돌아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마왕 놈들이 그렇다는데?"

    "킥킥킥킥."

    알파의 부하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꼭 자기가 뭐 좀 된다고 생각하는 놈들은 죽어도 말이 많더라구요."

    "한두 번 본 것도 아닌데, 그냥 이해하시죠."

    "그럴까?"

    알파가 비릿한 웃음을 남겼다.

    보다주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고 있다. 상위급의 마왕이라는 것들은 그냥 마왕들과는 차원이 다른 힘을 가지고 있다는 건 그도 이미 들은 바였다.

    과거, 마왕을 동시에 열도 넘게 상대할 수 있던 이지혁조차 최상위급의 마왕들과는 승부를 장담할 수 없었다고 했으니까.

    막상 붙었다면 불멸 속성을 가지고 있는 이지혁이 패했을 리는 없겠지만, 이지혁의 목숨이 오직 하나였다면 이긴다고 장담할 수 없는 수준이라 했다.

    그렇다면 그 강함은 어마어마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는소리를 할 수는 없지."

    이 세상은 정화되어 가고 있었다. 그가 원하는 만큼 무너지지 않아서 아쉽기는 하지만, 이 정도면 과거 세상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들은 모두 쓰러졌다고 봐야 한다.

    그 철옹성 같던 미국의 체계조차 이만한 위기를 맞은 것만으로도 크리스토퍼의 단일 독재가 벌어지고 있었다.

    '진짜는 위기에서 드러나는 법이지.'

    이 세계가 얼마나 취약한 것이었는지는 증명이 됐다. 이제는 이 무너진 세상 위에 새로운 세계를 건설해야 한다.

    "일단은 저 더러운 마족 놈들을 우리의 세계에서 몰아낸 다음에 말이지."

    알파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킹을 모시러 가볼까?"

    알파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 *

    "죽었다라……."

    바르바체는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보고를 들었다.

    "둘이나?"

    "예, 그렇습니다."

    "흐음……."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마왕이라고 해서 불멸의 존재는 아니니까. 영생과 불멸은 다른 개념이다. 그들은 수명의 제한을 거의 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지만, 존재의 소멸은 피할 수 없었다.

    그들이 부여받은 것은 무한에 가까운 수명이었지, 과거의 이지혁처럼 불사의 권능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흥미로운 것은 마왕들을 죽인 것이 인간이라는 점이었다.

    인간.

    '이곳의 인간들은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군.'

    개인이 가진 강함으로 비교했을 때, 이곳의 인간들은 감히 베라프의 마도사나 기사들을 따라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베라프의 마도사들은 단 한 번도 마왕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적이 없었다. 그들이 수천 년 동안 해내지 못한 업적을 이곳의 인간들은 단 하루 만에 두 번이나 해낸 것이다.

    "놀랍다고 해야 할까?"

    바르바체가 콧노래를 불렀다.

    "너무 쉬우면 재미가 없지."

    마왕이 당했다고 해서 분노가 인다든가, 슬플 리는 없었다. 그들은 같은 종족으로 얽혀 있다고는 하나, 근본적으로 볼 때 스스로 완전한 생명체 들이다.

    무리를 짓지 않고 홀로 살아간다. 필요한 것은 추종할 이들이지, 동반자가 아니었다. 다른 마왕이 죽었다고 해서 슬퍼한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기분이 어때?"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바르바체가 고개를 돌렸다.

    "왜? 내가 흥분이라도 하길 바랐나?"

    에르카나는 태연해 보이는 바르바체를 보며 고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네가 그럴 리가 없지. 나는 죽음이 다가오는 게 어떤 기분인가를 묻고 있는 건데?"

    "죽음?"

    바르바체가 비웃음을 띄었다.

    "나와는 거리가 먼 말이군."

    "그리 생각하는 것도 본인의 마음이겠지. 하지만 잊지 마. 달링이 돌아왔어. 너에게 죽음을 안겨주기 위해서 말이야."

    "이지혁이라……."

    바르바체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돌아왔겠지. 그러니 갑자기 마왕들이 죽어 나가는 것 아니겠어? 이지혁의 개입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지."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이레귤러가 인간을 이끌고 있다는 것은 무척이나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다만……."

    바르바체가 이죽이기 시작했다.

    "돌아오지 않았다면 저열하게나마 살아남을 수 있었을 텐데, 그 기회를 자기 발로 차버린 것은 어리석다고 하지 않을 수 없겠군."

    바르바체가 몸을 일으켰다.

    "네게 보여주지, 에르카나. 이지혁이 수천수만 조각으로 찢겨 죽는 모습을 말이야."

    "네가 그 꼴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가끔은 뭐라고 해야 할까?"

    바르바체가 눈을 찌푸렸다.

    "너는 인간이 아니라 마족이지. 이성이 있다면 내가 지금의 아흔아홉 번째 마왕에게 패할 가능성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정도는 이해하고 있을 텐데?"

    "그렇게 생각해?"

    "너의 그 맹신에 가까운 믿음이 어디서 나오는지 모르겠군. 이지혁이 아무리 강했다고 하나 그건 과거의 일이야. 지금의 이지혁은 그저 조금 강한 인간에 불과하다. 내 말이 틀렸나?"

    "맞아."

    에르카나가 입술을 천천히 문질렀다.

    "지금의 달링이라면 나도 1초 만에 죽일 수 있어. 아쉽지만 그건 사실이지."

    "그런데도 너는 내가 이지혁의 손에 죽을 것이라 믿는 건가?"

    "물론이지."

    "어째서?"

    에르카나가 깔깔 웃었다.

    "너무 당연한 걸 묻는군. 네가 만날 달링은 지금의 달링이 아닐 테니까. 달링은 필요하다면 필요한 만큼 강해지는 사람이거든."

    "…단순한 믿음일 뿐인가?"

    에르카나가 눈을 빛냈다.

    "그 믿음의 원천은 감정이 아니라 이성이야. 나는 그를 천 년이 넘게 지켜봐 왔어. 그러고 나서 결론을 내린 거야. 그는 항상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것들을 당연하다는 듯이 이뤄왔거든. 같은 이야기를 또 해야 할까?"

    "그걸로 됐어."

    바르바체가 으르렁대며 말했다.

    "그럼 내가 증명해 주지. 그는 겨우 인간일 뿐이라는 걸 말이야. 그리고 혹여 이지혁이 과거의 힘을 모두 되찾는다고 해도 내 상대는 아니야. 설마 내가 그가 두려워서 피했다고 생각하지는 않겠지?"

    "아니었어?"

    "날 너무 도발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바르바체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

    "약속한 시간은 삼 일이다. 이제 하루가 남았어. 내일 이 별은 마계에 종속될 것이다. 그리고 생각이 바뀌었어. 네 앞에서 이지혁을 죽이는 것은 너무 빤한 일 같군. 이지혁이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몰골이 되어 영원의 고통 속을 헤매게 해주지. 그게 너에 대한 형벌이다."

    "흐응."

    에르카나가 입술을 핥았다.

    "해볼 수 있으면 해보시지."

    "후후."

    바르바체는 몸을 돌려 천천히 걸어갔다.

    그런 바르바체의 뒷모습을 쳐다보는 에르카나의 눈빛이 조금 전과는 다르게 떨려오고 있었다.

    '할 수 있는 거지, 달링?'

    그가 상대해야 할 적은 너무도 강대했다. 지금까지 그가 상대해 온 이들이 무색할 만큼 말이다.

    * * *

    "엄마!"

    "아이고! 지혁아!"

    "오빠아아아아!"

    미국으로 날아간 이지혁은 크리스토퍼의 안내를 받아 가족과 재회했다. 박선덕은 이지혁을 보자마자 그를 끌어안고는 등짝을 두들겨 댔다.

    파앙! 파앙! 파앙!

    등에서 스파이크 때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사람 몸을 저절로 뒤틀어 버리는 충격을 느끼며 이지혁은 왜 어머니가 젊은 시절 배구 선수의 길을 걷지 않았는지 안타까워 할 수밖에 없었다.

    "야, 이 썩을 인간아! 왜 이리 늦게 왔어!"

    "그래. 몇 달 만에 보는 오빠한테 하는 말치고는 아주 더러운데, 니가 하는 말치고는 아주 온건하구나."

    "뭐라는 거야!"

    "…아니, 뭐, 그냥. 미안하다, 미안해."

    이지혁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

    저 인간을 누가 데리고 갈 것인가.

    하나뿐인 동생이 노처녀로 늙어가는 처참한 미래를 막기 위해서는 인류가 멸망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순간 생각한 이지혁이었다.

    "이, 이제 괜찮은 거니?"

    "음……."

    이지혁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급한 불은 껐는데, 아직 안전하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야. 솔직히 말하면, 아직도 우리가 좀 많이 불리해."

    박선덕이 안타까운 눈으로 이지혁을 보며 그의 어깨를 주물렀다.

    "그래, 우리 아들. 고생이 많구나."

    "난 별로 고생한 것 없는데 뭐."

    "오빠, 그럼 우리 이제 여기서 나가도 되는 거야?"

    "아니."

    이지혁이 딱 잘라 말했다.

    "아직은 여기가 제일 안전할 거야. 답답하더라도 조금만 더 참아. 이제 곧 결판이 날 테니까."

    "으응."

    굳은 얼굴로 말하는 이지혁을 보니 더 이상 투정을 부려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 인류가 얼마나 몰려 있는지는 이예원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 이제 바로 또 가야 하는 거니?"

    "아니. 뭐, 오늘은 딱히 할 일도 없으니까 여기서 자고 내일 가지, 뭐."

    "그래, 잠 자고 가. 밥이라도 해주고 싶은데, 여기서는 밥을 할 수가 없구나."

    "에이, 밥은 무슨 밥이야."

    이지혁이 너스레를 떨었다.

    박선덕은 몇 달 만에 보는 아들에게 밥 한 끼 해 먹이지 못한다는 사실이 못내 가슴에 걸렸는지 자꾸만 눈가를 훔쳤다.

    "그래, 희망은 있니?"

    "…에?"

    "…아빠다."

    "아! 아부지! 언제부터 계셨어요?"

    "방금 얼굴 보고도 못 알아본 것 같은데."

    "여기 계실 줄 몰라서 그랬죠."

    네 가족을 모두 여기로 보내놓고 내가 여기 있을 줄 몰랐다고 하면, 나는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까?

    "아, 그러니까… 근데 뭘 물으셨죠?"

    "됐다."

    "당신은 좀 나와봐요."

    박선덕이 과격하게 남편을 밀어내고는 이지혁의 손을 잡고 안으로 질질 끌고 들어갔다.

    "들어가자. 몇 달 만에 아들이 왔는데, 내가 세워놓고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예원아! 가서 간식거리 좀 가져와라."

    "응, 엄마."

    어머니에 손에 질질 끌려가며 이지혁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뭔가 따뜻하네.'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 * *

    어둠이 내려앉고 모두가 잠에 드는 시간이 되었다. 안쪽에 있는 방을 받은 이지혁이 말 그대로 몇 년 만의 샤워를 마치고는 침대에 드러누웠다.

    "끄으으으."

    아무리 생각해도 침대는 인류가 만든 최고의 발명품 중의 하나였다. 바퀴 따위에게 밀리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다.

    등으로 느껴지는 푹신푹신함과 공기에서 느껴지는 따뜻함이 이지혁의 육체를 노곤노곤하게 녹여내고 있었다. 밀려오는 피로를 느끼며 이지혁은 눈을 감았다.

    '정말 이제는 얼마 남지 않았네.'

    모든 것이 다 얼마 남지 않았다.

    마계와의 결전도 이제 곧 승부가 날 것이고, 이지혁의 육체도 이제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다.

    두 가지 운명이 결정 난다.

    지구의 운명과 이지혁의 운명.

    전자는 그 결과가 명확하지 않지만, 후자는 결과가 빤히 정해져 있었다. 마족을 상대로 이기든 지든 이지혁은 앞으로 한 달 이상을 살 수 없을 것이다.

    '그걸로 됐어.'

    살 만큼 살았다. 아니, 너무 살았다.

    그 생의 대부분을 즐거움이 없는 삶으로 채웠다는 안타까움은 있지만, 더 살지 못한다는 아쉬움을 가지지는 않기로 했다. 그건 너무 뻔뻔스러운 일이니까.

    '이젠 좀 쉬고 싶기도 하고.'

    몸이 붕괴하는 만큼 정신도 붕괴하고 있었다. 눈을 뜨고 있다는 것이 고통스럽다는 기분을 최근에 느끼기 시작했다.

    휴식이 아니라 안식이 필요하다.

    이지혁은 씁쓸하게 웃었다.

    '정리가 안 되는군.'

    자신의 삶은 무엇이었을까?

    평범하게 살던 그가 우연히 베라프로 끌려간 덕분에 보통 인간은 상상도 하지 못할 삶을 겪었다. 수많은 고통과 고뇌로 점철된 삶이지만, 딱히 나쁘다고 평하고 싶지는 않다. 그래도 마지막에는 돌아왔고, 해야 할 것들을 했으니까.

    이제 이지혁에게 남은 것은 찝찝하게 죽고 싶지 않다는 소망 하나였다.

    삶을 지속해 나가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억지로 삶을 이어 나가려 하다가는 그가 스스로 가족들을 죽이게 될 것이다. 이지혁이 마족이 되는 것보다 끔찍한 상황은 없을 테니까.

    '조금만 더 버텨내.'

    마족들을 모두 몰아낼 수만 있다면 자신은 웃으면서 죽을 수 있다. 비록 자신은 없겠지만 평화가 돌아온 세상에서 그의 가족과 친인들은 다시 삶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이 세계로 돌아왔을 때는 자신을 위한 삶을 살겠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 자신을 위한 삶이 꼭 이기적인 삶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혼자 살아온 시기가 너무 길다 보니 이런 당연한 것도 잊고 있던 모양이다.

    이지혁이 눈을 감았다.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세상을 지켜낸다. 그리고 깔끔하게 생을 마무리한다. 얼마 남지 않은 삶을 이렇게만 마무리할 수 있다면 그 이상의 여한은…….

    "없을 리가 있나."

    살고 싶다.

    더 살고 싶다.

    그토록 오랜 시간을 그토록 고통받으면서 지쳐 버렸다고 생각했지만, 생의 마지막이 다가온다는 것은 너무도 두려운 일이었다.

    죽음이 두려운 게 아니라 지금의 삶이 끊긴다는 것이 두려웠다. 초연하다고 생각했는데, 초연해지려고 노력했는데, 그게 잘 안 된다.

    똑똑.

    막 감정이 격해지려는 순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지혁이 얼굴을 마구 주무르고는 입을 열었다.

    "네. 안 자요."

    * * *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 들어올 사람을 기다렸다.

    이곳에서 그를 찾아올 사람은 빤했다.

    어머니거나 예원이거나.

    예상은 틀리지 않았고,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어머니였다.

    "아직 안 잤니?"

    "응."

    "왜 아직 안 잤어? 일찍 좀 자지."

    "잠이 잘 안 와서."

    어머니가 한숨을 쉬더니 이지혁의 침대 건너편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

    "엄마는 이 밤에 왜 안 자고 왔어?"

    "나도 잠이 잘 안 오는구나."

    "그래도 좀 자야지."

    어머니가 희미하게 웃었다.

    "아들내미가 당장 내일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엄마가 잠이 오겠어?"

    "에이."

    이지혁이 어색한 얼굴로 대답했다.

    "내가 뭘 어떻게 되긴 어떻게 돼."

    "엄마한테 거짓말하지 마."

    "…아니라니까."

    박선덕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내일부턴 또 싸우러 가야 하는 거지?"

    "……."

    "내가 들었다. 너 옛날만큼 힘이 없다며? 그런데도 싸우러 가야 하는 거니?"

    이지혁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에, 그게……."

    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

    "내가 좀 약해진 건 사실인데, 얘들이 워낙 무능해서 내가 빠지면 뭐가 되지를 않네. 알잖아, 엄마 아들 능력자인 거."

    어머니는 대답 없이 가만히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 이지혁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자식이 사지로 나간다는데, 그걸 어느 부모가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효도 한 번 못했네.'

    이지혁은 영 불안한 얼굴을 하고 있는 박선덕을 보면서 속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몇 천 년 만에 다시 만난 가족인데, 이제 곧 헤어져야 할 판이다.

    이지혁이 다시 전장으로 나가야 한다는 사실만으로 저리 걱정이 깊은 박선덕인데, 이지혁의 몸이 이제 시한부나 다름없다는 것을 알면 얼마나 힘들어할 것인가.

    이지혁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에이, 너무 걱정하지 마, 엄마. 내가 뭐 하나 맡아서 제대로 처리 못하는 거 본 적 있어? 이번에도 별일 없을 거야. 그러면 한국으로 돌아가서 벌어놓은 돈으로 알콩달콩 살면 돼."

    "말이야 쉽지, 이놈아. 저것들을 어떻게 이기니?"

    "못 이기면 다 같이 끝나는 건데, 아쉬울 건 뭐 있어? 다 같이 죽으면 억울한 것도 아냐. 나는 죽는데 남이 살아야 억울한 거지."

    "놀부 같은 게."

    "…엄마가 이리 낳았잖아."

    "웃기지 마. 너 어릴 땐 엄청 착하고 귀여웠거든? 크면서 이상해진 거지."

    "그럼 엄마가 그리 키운 거네!"

    "입 안 다물어?"

    이지혁이 입을 삐쭉 내밀었다.

    세상은 팩트를 논하는 사람에게 너무 가혹했다.

    "…엄마는 그래. 네가 왜 나서서 그래야 하는지 머리로는 알겠는데, 납득이 안 돼."

    "엄마."

    "그냥 너도 좀 평범해서 괜히 앞에 나서서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들어."

    이지혁이 입술을 잘근 씹었다.

    최근 들어 그가 자주 하던 생각이다.

    그때, 베라프로 끌려가지만 않았어도 지금 그는 불안에 떨기는 하겠지만 이런 부담을 느끼지는 않고 있을 것이다.

    세상의 운명이 그에게 달려 있다는 부담감, 그리고 그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불안함.

    강철같이 단련된 멘탈이 아니었다면 이미 벌써 쓰러져도 몇 번은 쓰러졌을 것이다.

    "뭘 어쩌겠어."

    이지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상황이 이런데 뭐. 내가 하고 싶지 않다고 안 해도 되는 상황이 아니잖아."

    "…그렇긴 해도."

    "어차피 해야 할 일이면 웃으면서 해야지. 그래야 마음이라도 편할 거 아냐. 그러니까 엄마도 너무 걱정하지 마. 엄마가 그리 걱정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내 마음이 안 편해."

    "그래."

    이지혁의 말에 박선덕은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납득은 가지 않지만, 그녀가 이런다고 해서 이지혁의 선택이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달라져서도 안 된다. 그러면 전장으로 나가는 아들의 마음이라도 가볍게 해줘야 한다는 것을 그녀 역시 알고 있었다.

    "지혁아."

    "응?"

    "엄마는 네가 지금이라도 못하겠다고 손을 털어버려도 괜찮아."

    "에이, 엄마. 그러면 다 죽어."

    "그래."

    박선덕의 눈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괜찮아."

    "……."

    이지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박선덕을 바라볼 뿐이다.

    박선덕도 말없이 그를 바라보다가 가만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들."

    "응."

    "엄마가 아는 아들은 그렇게 의지가 강한 사람이 아냐."

    "……."

    "학교 가는 것도 싫어하고, 노력하는 건 더 싫어하고, 대충대충 인생 살다가 막상 닥치면 벼락치기로 어떻게든 하려던 사람이 우리 아들이지."

    "어, 엄마. 팩트를 멈춰줘."

    "그런 아들내미가 요즘 들어 자꾸 믿음직해진 것 같아서 엄마는 불안하고 불만스럽다."

    "…으응."

    "네가 원래 내 아들로 돌아오는 대가가 멸망이라면, 엄마는 기쁘게 받아들일 거야. 무슨 말인지 알지?"

    "응."

    "그래, 얼른 자거라."

    박선덕이 일어나나서 방 밖으로 나가자 이지혁이 침대에 풀썩 누웠다.

    "이건 응원인가?"

    낮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 * *

    "엄마."

    방 밖으로 나온 박선덕을 이예원이 맞았다.

    "들었니?"

    "응."

    "할 말 있어?"

    "아니."

    '할 말 있어'가 '불만 있어?'로 들리는 것은 이예원이 민감하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왜? 엄마가 못할 말 했니?"

    "아냐, 엄마."

    이예원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박선덕의 말을 들을 덕분에 이지혁이 정말 손을 놓아버린다면 세상이 지옥이 될 것은 눈에 보듯 빤한 일이니까.

    자식이라고는 하지만 이미 이지혁은 박선덕의 손을 떠난 지 오래였다. 그는 이제 주변인의 의견으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아닌 것이다.

    "걱정하지 마, 이년아. 그런다고 네 오빠가 손 놓고 놀 사람 아니니까."

    "엄마, 말이 다른데?"

    박선덕이 한숨을 쉬었다.

    "청개구리 같은 놈이라서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는 게 네 오빠다."

    그 말에는 확실히 동감할 수밖에 없었다. 이지혁은 어릴 적부터 그랬으니까.

    "그럼 더 열심히 하라고 일부러 그렇게 말한 거야?"

    박선덕의 눈이 살짝 날카로워졌다.

    "엄마, 화낸다?"

    "…응. 미안, 엄마."

    박선덕이 낮게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아무리 사람이 부담에 강하다고 해도 저런 부담감을 누가 이겨내겠어."

    "그건 그렇지."

    "그런데 지혁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 보면, 지혁이는 그런 부담을 당연히 이겨내고 당연히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해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으음."

    크리스토퍼도, 최정훈도, 그리고 다른 모든 사람들도 이제는 이지혁을 상수라 생각하고 있었다. 과거 초반에 이지혁이 무슨 사고를 칠까 봐 벌벌 떨던 사람들이 말이다.

    인간에 대한 평가는 경험을 통해 바뀌기 마련이다. 결국 이지혁이 모든 최악의 사태를 해결한 것도 사실이고, 뒤로 갈수록 자신의 최선을 다해온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니 모두가 이제는 이지혁을 믿고 있다.

    우습게도 말이다.

    "모두가 네가 당연히 최선을 다해주고 네가 해결해 줄 것이라고 믿는다고 말하면, 그 사람은 힘이 날까?"

    "…나는 부담스러워서 못 살아."

    "그래. 네가 그러면 네 오빠도 그래야지. 한 배에서 난 것들인데, 네 오빠라고 뭐 그리 대단하겠니."

    "그래도 오빠는 어쩔 수가 없잖아."

    "어쩔 수가 없으니까……."

    박선덕이 한숨을 쉬었다.

    "누군가는 괜찮다고 말해줘야지. 네가 꼭 이 일을 해결해서 모두를 구해주는 건 아니라고 말이야."

    이예원이 가만히 박선덕을 바라보았다.

    "그럼 마음이라도 좀 편할 테니까."

    "으응."

    어려운 이야기였다. 이예원이 이런 일들을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오빠는 좀 편해진 것 같아?"

    "모르지. 그러길 바랄 뿐이지."

    "으응."

    "그러니 괜히 오빠 방 앞에서 알짱거리지 말고 따라와. 들어가서 잠이나 자."

    "잠이 잘 안 와, 엄마."

    "왜? 세상에 너처럼 걱정 없이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된다고 네가 잠이 안 와?"

    "엄마는!"

    이예원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말은 맞는 말이지."

    "나도 걱정은 좀 있거든!"

    이예원이 입을 꾹 다물었다.

    이지혁이 돌아오기만을 바라던 그녀다. 하지만 막상 이지혁이 돌아오니 이제 실감이 났다. 정말 이제 모든 것을 결정지을 시간이라는 것이 말이다.

    인류의 운명이 곧 결정 난다는 것을 아는 소수 중의 하나가 된 느낌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으면 응원이라도 해야지."

    박선덕이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 잘하라고 기도드려."

    "응. 그럴게, 엄마."

    박선덕은 가만히 고개를 돌려 굳게 닫혀 있는 이지혁의 방문을 바라보았다.

    '지혁아, 힘내라.'

    아들이 얼마나 힘이 들고 얼마나 부담스러울지 그녀가 모두 알지는 못할 것이다.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이지혁을 이해하는 것뿐이었다.

    * * *

    "얼굴을 뵈니 더욱 반갑습니다."

    크리스토퍼의 말에 이지혁이 피식 웃었다.

    "우리가 언제부터 이런 사이였는지 이상하네요."

    "그렇습니까? 저는 꽤 오래됐다고 생각하는데요?"

    "그게 이상하다구요."

    크리스토퍼나 최정훈이나 자신 때문에 머리를 감싸 쥐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 무슨 살아 돌아온 아버지 보듯 하고 있으니 우습기 짝이 없었다.

    언제부터 그가 이리 신뢰받는 인간이었던가.

    "상황은 어때요?"

    "물론 최악입니다."

    크리스토퍼의 말에 이지혁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좀 더 참신한 표현은 없어요?"

    "절벽 끝에 몰렸다? 뒈지기 일보 직전이다?"

    "…됐어요."

    바랄 걸 바라야지.

    크리스토퍼가 굳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상황이 그리 좋지는 않습니다. 이번에 마왕 둘을 잡아내기는 했지만, 지금까지 확인한 마왕의 수는 최소 30이 넘어갑니다."

    "…잘못 본 거 아니에요?"

    "확인된 수만 언급드린 겁니다. 얼마나 더 있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이 새끼들이 왜 여기서 정모를 하고 지랄이지? 그 넓은 마계를 놔두고."

    이지혁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마왕 하나 잡았다고 좋아했던 게 바로 어젠데, 오늘 이런 말을 듣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희망은 있습니다. 일단 전력의 격차는 확연하게 줄어들었으니까요."

    "대가리들이 어디 몰려 있는지는 확인했어요?"

    "그게 잘……."

    "쯧."

    이지혁이 영 도움이 안 된다는 얼굴로 바라보자 크리스토퍼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하기야 어디 있는지 안다고 해도 텔레포트가 기본 스킬인 그놈들을 몰아넣을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오늘이 바르바체가 약속한 3일째입니다."

    "…그놈이 왔다 갔어요?"

    "예. 그리고 3일 내로 인류를 무력화시키겠다고 약속하고 갔습니다. 오늘이 그날이구요."

    "흐응."

    이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오늘 일이 터져도 제대로 터진다는 말이네요?"

    "아마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으음……."

    이지혁이 담배를 입에 물었다.

    다른 놈이면 몰라도 바르바체는 자기가 한 말을 반드시 지킬 놈이었다. 그럼 오늘을 넘기지 않을 것이다.

    "인류의 운명이 결정 나는 날이라……."

    그 무거운 어감에 다들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뭐, 어쨌든 깔끔하게 끝날 테니, 그거 하난 좋네요."

    이지혁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럼 대책을 논의해 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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