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98화 (98/118)
  • [■] 나 지금 다리가 떨리는데 [■]

    ─────

    "이지혁을 말하는 건가?"

    "그렇지."

    이지혁이 중요하다는 것은 알겠지만, 왕이라 불릴 정도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특히나 이지혁은 자신의 힘을 대부분 상실하지 않았는가.

    지금도 일반 능력자들에 비할 수 없이 강하기는 하겠지만, 이 상황에 대한 열쇠를 쥐고 있을 정도로 강하다고 볼 수는 없었다.

    "힘을 잃었는데도?"

    "멍청한 소리를 하는군."

    알파가 혀를 찼다.

    "맥클라렌, 생각을 해보라고. 저쪽에서 우리에게 위협을 느낄 만한 대상은 이지혁뿐이야. 남은 것들은 귀찮기는 하지만 어떻게든 해결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 우리가 아무리 강해진다고 해도 단독으로 마왕을 처리할 급은 안 되잖아. 하지만 이지혁은 그게 가능하단 말이지. 마왕들의 머리가 바퀴벌레급으로 돌아가기만 해도 이지혁을 최우선적으로 처리하려 할 거야. 예전에도 그랬듯이 말이야."

    "으음……."

    크리스토퍼가 고민에 빠졌다.

    "그럼 너희들이 없어진 후 마왕들의 움직임이 보이지 않은 이유는 이지혁을 포착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건가?"

    "그건 모르지."

    알파가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그놈들의 머릿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도 아닌데, 그런 점을 일일이 어떻게 알겠어? 다만, 그럴 확률도 있지. 하지만 그건 아니라고 봐. 찾던 놈이 없어지면 숨어드는 게 아니라 더 나서서 찾아봐야 하지 않을까? 따로 뭔가 생각이 있었겠지."

    "네가 없는 사이에 바르바체라는 마왕이 다녀갔다. 그는 자신이 대마왕이라고 하더군."

    "최악의 작명인데."

    "본인도 그렇게 말했으니 너무 욕하지 않아도 될 것 같군. 여하튼 그놈이 삼 일 내에 세계를 무력화시키겠다고 했다."

    "삼 일이라……. 며칠이나 지났지?"

    "이제 하루."

    "그럼 이틀이 남은 거로군. 상황이 달라지기는 했지만, 이틀 내에 총공세에 돌입할 수 있다는 뜻이군."

    "아마도. 그러니 너희가 자리를 비우면 미국이 위험해진다."

    "그럼 찐따 같은 네 부하들을 여기에 남겨두든가. 너는 미국을 위해 움직여야겠지만, 인류를 위해서는 여기에 낭비할 전력이 없어. 급한 불은 껐으니, 나는 마왕을 처리하러 가겠어."

    "…이지혁의 주변에 붙어 있으면 마왕들이 몰려올 거라는 건가?"

    "나라면 그렇게 하겠지."

    알파가 눈을 빛냈다.

    "이만큼이나 당했으니 나도 마왕 놈 하나 정도는 붙들고 화풀이 좀 해야겠어. 그전에 당한 것까지 이자 듬뿍 쳐서 말이야."

    "…행운을 빌지."

    "연락책 하나 정도 이쪽으로 끼워두라고. 아무래도 무기 사용이라든가, 즉각적으로 요청을 해야 할 때가 있을 것 같으니 말이야."

    "알겠다. 적당히 골라서 데려가."

    "알겠다."

    알파가 담배를 입에 물고 휘적휘적 걸어 밖으로 나가자, 크리스토퍼가 담배를 입에 물었다.

    '상황이 가면 갈수록 복잡해지는 기분이로군.'

    그래도 비전을 보고 있자니 이제 희망이 좀 생긴 기분이었다.

    "무지막지하군."

    "굉장합니다. 같은 능력자인데 이렇게까지 차이가 날 줄이야."

    돌아온 능력자들은 마치 양 떼 사이에 떨어진 늑대들처럼 날뛰고 있었다.

    몬스터들이 도망을 치는 것은 아니지만, 덕분에 아주 손쉽게 주변의 몬스터들을 곤죽으로 만들고 있었다.

    '이거, 무슨 게임 같은데…….'

    마왕들을 보스라 친다면 몬스터들이 순식간에 사신에서 잡몹으로 위상이 격하되고 있었다.

    "이지혁은 이지혁이군."

    저만한 전력까지는 바라지 않았는데, 불과 세 달이라는 시간 만에 어떻게 저들을 이렇게나 끌어 올렸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뭐, 좋아."

    크리스토퍼가 휘파람을 불었다.

    "알파가 뭐라고 지껄이든 이쪽은 이쪽대로 한 번 해봐야겠지."

    크리스토퍼의 눈에 오랜만에 생기가 돌아왔다.

    * * *

    "이제 좀 살겠네."

    이계에서 생활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여러 리스크를 동반하는 일이다. 생존의 문제가 가장 먼저였고, 그다음에는 기호의 문제가 뒤따랐다.

    이계에도 먹을 것은 있었다.

    하지만 야생에만 던져 놔도 먹을 것을 찾는 것에 곤욕을 치르는 인간이 아니던가. 양념과 조리에 익숙해진 인간은 야생 그대로의 식재료에 반발하기 마련이었다.

    특히나 이지혁은 그런 부분에서 문제가 많았다.

    이 세상으로 돌아오고 제일 먼저 콜라를 찾은 이지혁이다. 그런 이지혁이 제대로 된 음식을 손도 못 대보고 그 오랜 시간을 보냈으니 쌓인 것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이지혁은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커피에서 풍겨 나오는 따뜻한 온기를 느끼며 헤벌쭉 웃었다.

    "역시 커피는 믹스지."

    아메리카노가 맛있다고는 해도 이지혁은 여전히 믹스커피 선호파였다.

    "이 와중에 커피가 입으로 들어갑니까?"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도 먹을 수 있어요."

    "…아, 예."

    저렇게 나오면 할 말이 없다.

    아무래도 극한 상황은 최정훈보다는 이지혁이 몇 배는 더 겪어보지 않았겠는가. 그러니 여기에 딴지를 걸었다가는 역관광을 당하기 딱 좋았다.

    이지혁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 중 하나가 최정훈이 아니던가.

    "그런데… 저대로 둬도 되는 겁니까?"

    "그럼요?"

    "좀 도우셔야 하는 것 아니에요?"

    "제가요? 저걸요?"

    말을 하고 상황을 다시 보니 할 말이 없었다. NDF들은 그동안 쌓인 스트레스를 모두 해소하겠다는 듯이 뒤가 없이 날뛰고 있었으니까.

    "제가 실수한 것 같습니다."

    "저기에 어설프게 발을 걸쳤다가는 지가 할 일 뺏어간다고 욕할 것 같은데."

    '그럴 만도 하지.'

    최정훈이 고개를 내저었다.

    이미 그는 일전의 훈련도 함께한 경험이 있었다. 그는 능력자가 아니기에 전혀 다른 교육을 받았지만, 이전에 이들이 어떻게 훈련을 받았는지 그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이번에는 저번의 경험도 있고, 그냥 방법만 익히는 것이기에 저번처럼 힘들지는 않을 거라던 이지혁의 말은 새빨간 거짓말에 불과했다.

    이번에 이들이 당한 것에 비하면, 저번 일은 훈련소 신병교육대에 불과했다. 나름 힘들고 헤쳐 나갔다는 것에 뿌듯함을 느끼지만, 자대에 가게 되면 '거기가 천국이었구나' 하고 느끼게 되는, 그런 곳 말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정신이 날아갈 만한 훈련을 받으면서 반항도 해 댔지만, 무자비한 철권 독재자 앞에서는 모든 것이 의미가 없었다.

    이제 다들 경험이 쌓이고 능력치가 올라 한데 뭉치면 이지혁을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상황이 왔을 때는 모든 것이 끝나 있었다.

    담장에 전류가 흐르게 만들어놓으면 짐승은 처음 몇 번은 탈출을 시도하지만, 나중에는 담장에 전류가 흐르지 않아도 담장에 다가갈 엄두를 내지 못하게 된다. 딱 그 짝이었다.

    힘을 합치면 이지혁을 어떻게 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는 이미 모두가 이지혁의 명령에 몸이 자동적으로 반응하는 상황까지 가버린 후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말 엿 같은 일이지만, 훈련을 거듭하면 거듭할수록 기하급수적으로 강해진다는 것이 느껴지는 게 문제였다. 여기서 반항을 해버리면 이보다 더 강해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들의 발목을 잡았다.

    결국 풀지 못하는 스트레스를 쌓아둔 채 훈련에 훈련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게 오늘 터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다행이군.'

    이계의 시간은 이곳과는 전혀 다르게 흘렀다. 자는 시간도 줄여가며 밀도 높은 훈련을 해오기는 했지만, 그래도 혹시나 이러다가 돌아갔는데 지구가 사라져 있는 상황이 오면 어쩌나 걱정도 많이 했다.

    다행히 최악의 상황은 아니었다.

    타국은 어떤지 몰라도 한국은 민간인 피해가 거의 없이 버티는 데 성공한 것이다. 하루만 늦게 왔다면 상황이 완전 달랐겠지만 말이다.

    "이제 반격만 남은 거죠?"

    "그리 꿈꾸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현실은 별로 달라진 게 없어요. 마수만 있었다면 이미 예전에 인간이 이겼겠죠."

    마왕.

    그들이 목숨을 걸고 훈련을 해야 했던 본질적인 이유. 아무리 마수가 떼로 있다고 하더라도 마왕 하나가 내는 위력만큼은 아니었다.

    토끼가 천 마리 있으면 호랑이보다 훨씬 큰 힘을 낼 수는 있겠지만, 호랑이 한 마리를 이길 수는 없다. 힘의 밀집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마왕은요?"

    "거의 다 온 것 같은데."

    최정훈은 검게 물들기 시작한 건너편의 하늘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흑마력이 뭉치다 못해서 하늘로 치솟고 있는 광경을 보면 데몬스트레이션은 충분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왜 아직 도착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그러니까, 지금 저게 마왕이 오고 있는 증거라는 거죠?"

    "요란하죠?"

    "예, 뭐… 좀 그렇네요."

    "중국 쪽에서 날아오고 있는 것 같은데… 나름 빨리 오긴 해도 시간이 걸리죠. 비행기로 날아와도 몇 시간은 걸리는 거리니까요."

    "…뭔가 현실적이라 좀 이상하네요."

    만화에서 본 마왕들은 텔레포트로 휭휭 이동하던데, 이곳의 마왕들은 날개를 퍼덕거려가며 미친 듯이 날아온다는 게 좀 이상하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고 그랬다.

    "타입이 여러 개라 그래요. 법사형도 있고, 전사형도 있는 거죠. 그나마 헤엄쳐서 안 오는 게 다행이에요."

    "…뭐, 그들도 생물이니까요."

    최정훈이 피식 웃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들에게 마왕이란 불가해의 존재였다. 이지혁이 아니면 막을 수도 없고, 대항조차 불가능했다. 그런데 지금은 마왕이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상대의 유형에 대해 분석할 수 있는 여유를 보일 수 있었다.

    '지옥같이 훈련해 왔으니까.'

    그리고 이제 그 훈련이 과연 효과가 있었는지를 검증할 시간이었다.

    살짝 불안해진 최정훈이 이지혁을 보며 말했다.

    "도와는 주실 거죠?"

    "아, 거참, 그 사람 되게 징징대네."

    "아니, 그래도 마수는 몰라도 마왕은 처음이지 않습니까. 실전에 들어갔는데, 좀 가르쳐는 줘야죠."

    "다 잘할 수 있도록 가르쳐 놨으니까 알아서 할 거예요. 내가 이런 것까지 일일이 나설 거였으면 미쳤다고 그 고생을 해요? 그 많은 것들 가르친다고 진짜 죽을 뻔했구만."

    "으음."

    최정훈이 불안한 눈으로 전방을 바라보았다.

    모든 훈련 자체가 마왕을 상대하는 것에 집중되어 있었지만, 그래도 불안한 것은 불안한 것이었다.

    "저기 오네."

    "네?"

    최정훈의 시선이 이지혁이 가리킨 곳으로 향했다.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에서 새까만 점 하나가 보인다 싶더니, 그 점이 순식간에 거대하게 부풀어 올랐다.

    실제로는 부푸는 게 아니라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지만, 워낙 속도가 빠르다 보니 점이 그 크기를 키우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쟤들은 왜 저렇게 못생겼나 몰라."

    "저쪽도 같은 생각을 하지 않을까요?"

    "…그건 그러네요."

    둘이 그렇게 말을 나누는 동안 어느새 접근한 마왕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쿠웅!

    바닥이 솟구쳐 오른다. 그와 동시에 마왕이 포효하기 시작했다.

    우오오오오오오오!

    마왕이 전해 주는 존재감은 여전히 압도적이었다. 그동안 충분히 대비를 했다고 생각한 최정훈마저도 순간적으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가고 싶다는 마음이 생길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이지혁은 태연하기 짝이 없었다.

    "거, 새끼, 더럽게 시끄럽네."

    * * *

    '빌어먹을.'

    충분한 마음의 준비를 했다고 생각했다. 결국 인류를 구원하는 길은 질 낮은 몬스터들과 드잡이를 하는 게 아니라 마왕을 때려잡는 일이라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지옥 같은 훈련을 버텨 낸 이유도 그게 아니던가.

    훈련을 하는 와중에도 이지혁은 결국은 마왕을 상대해야 한다는 것을 몇 번이나 강조했고, 그들 역시 서로에게 그 사실을 강조했다.

    마왕이라는 말이 입에 붙어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강조하고 또 강조했기에 나중에는 마왕에게 친근감을 느낄 정도였다.

    그만큼이나 준비했는데…….

    김다현은 눈앞에 보이는 이형의 생명체를 보면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장난 아니네.'

    예전에는 몰랐다.

    예전에는 그저 강하다는 것만을 실감했을 뿐이다. 마왕이 눈앞에 있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그를 상대해야 하는 것은 이지혁이었고, 그들은 이지혁이 캐스팅을 마칠동안 잠깐 시간을 끄는 역할을 맡을 뿐이었다.

    하지만 지구에 침략해 온 마왕은 하나둘이 아니었고, 이제는 그들 역시 직접 마왕을 상대해야 한다. 그 사실을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

    "어떡하지?"

    서아영이 불안한 목소리를 냈다.

    "나 지금 다리가 떨리는데."

    "괜찮습니다."

    윤혁규가 그 말을 받았다.

    "저는 지금 싸기 일보 직전이에요. 바지에 지릴 것 같아요."

    "…나는 그 정도는 아닌데."

    "제가 겁이 더 많은 모양이죠."

    김다현이 이를 꽉 깨물었다.

    '내가 강해지기는 한 모양이군.'

    예전에는 전혀 알 수 없던 마왕의 존재감이 지금 그의 영혼을 짓누르고 있었다.

    눈앞에 아무리 높은 산이 있어도 올라보지 않은 이는 산이 높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산행을 여러번 해본 이는 높은 산을 오른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알 수 있다.

    지금 김다현이 딱 그짝이었다.

    이지혁이 산을 오르는 걸 보조만 할 때에는 '아, 이게 힘든 일이구나' 하는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최근 훈련을 통해 보다 강해지다 보니 저만한 상대와 싸운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직감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저거랑 싸운다는 거지?"

    "아마도요."

    '그냥 혀 깨물까?'

    서아영이 허탈하다는 듯이 말했다.

    일전에 봐온 마왕들을 상대로 여러 번 시뮬레이션도 해봤다. 그래서 나름 대응할 수 있는 체계를 갖췄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눈앞에서 마왕을 보니 그 모든 것이 저만치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스쳐도 죽어.'

    마나에 대한 이해가 없을 때는 겉모습과 보이는 위력만으로 상대의 강함을 짐작해야 했지만, 마나가 어떤 것인지 알고 사용할 수 있게 되자 마왕의 육체 안에 잠들어 있는 마나가 얼마나 거대한지를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와, 진짜 인간적으로 저건 너무한 것 아닌가?"

    "인간이 아니잖아."

    "그렇긴 하네."

    실없는 농담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누가 툭, 건드리면 그 자리에서 튀어오를 정도로 전신이 빳빳하게 긴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그들을 바라본 마왕의 시선이 이지혁에게로 꽂혔다.

    "아흔아홉 번째 마왕."

    "여, 오랜만이네. 그런데… 누구더라?"

    "체이칸이다."

    "어, 그래. 체이칸. 들어본 적이… 그래, 아마 있을 거야. 있겠지. 그래도 그리 오래 같은 곳에 있었는데 말이야."

    "여전하군."

    체이칸은 이지혁을 보며 이죽였다.

    "하지만 안타까운 일이군. 네 몸 안에는 흑마력이 단 한 줌도 느껴지지 않는데? 무한의 마나를 바탕으로 숱한 마왕들마저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됐어. 그 레퍼토리 이제 식상해. 너희 마왕들은 개성이라는 게 없어. 어떻게 다 다른 놈들만 모였는데도 다 똑같은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니까."

    그만큼 이지혁이 마계에 군림하던 시절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는 뜻이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동어 반복을 듣는 것만큼 짜증나는 일도 없었다.

    "그리고 오늘 니가 상대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야. 내가 상대해 주고 싶기도 한데, 조무래기는 일일이 상대하지 않기로 이미 마음을 정한 뒤니까. 풀고 싶은 회포가 있더라도 나중에 하자고. 살아남을 수 있다면 말이지."

    "조무래기?"

    체이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쯧쯧."

    이지혁이 그 광경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마족들이 개성이 강한 건 참 좋지만, 그래도 그렇지 얼굴이 박쥐인 건 좀 심하지 않나?"

    정확하게 말하자면 박쥐와는 또 다르지만, 설치류와 비슷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인간의 미적 감각으로 보자면 무척이나 괴이하게 생겼다고 해야 할 것이다.

    "여전히 입은 살았구나."

    "입이 죽으면 결국 죽어, 이 무식한 놈아."

    "이!"

    체이칸이 막 발작하려는 찰나에 이지혁이 손을 들어 서아영 등을 가리켰다.

    "일단은 저쪽부터 처리하고 대화를 좀 더 나눠보지 않으련?"

    "……하?"

    "너희 마왕들이 잘하는 짓거린데, 내가 이렇게 부하를 푸는 상황이 되니까 마치 내가 마왕인……. 아, 나 마왕이지? 미안하다. 워낙 독고다이로 살다 보니까."

    체이칸은 어이가 없었다.

    마계에 있던 시절, 그 어떤 마왕보다도 많은 마수의 군단을 활용하던 자가 바로 이지혁 아닌가.

    이지혁에게 종속의 인이 박힌 마수들은 자신의 몸조차 돌보지 않고 마왕에게 돌진했다. 마왕들의 입장에서 마수들이 아무리 떼로 몰려온다고 하더라도 부담될 것은 없지만, 좀비처럼 달려드는 수억의 마수는 별개의 문제였다.

    게다가 앞쪽에는 마수를 들이밀어 놓고 뒤에서 느긋하게 캐스팅을 읊으며, 마수들이 얼마나 박살이 나던 신경도 쓰지 않고 대단위 마법을 펑펑 날려 대는 이지혁의 전술 앞에 얼마나 많은 마왕들이 피눈물을 뿜었던가.

    그런데 뭐? 독고다이?

    "과거 미화도 작작 좀 해라!"

    "네네, 알겠습니다. 억울하면 고소하시구요."

    이지혁이 고개를 돌려 서아영 등을 바라보았다.

    "뭐해? 빨리 안 때려잡고?"

    우리가요?

    쟤를요?

    하하, 농담도 심하시지…….

    서아영이 생전 처음으로 조금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이지혁에게 눈빛으로 애교를 부렸다.

    "뭔 짓거리야, 더럽게!"

    "이 개새끼야!"

    하지만 서아영의 애교는 처참하게 격침당하고 말았다. 다른 수를 찾아내지 못한 서아영이 이를 뿌득, 갈면서 마왕을 노려보았다.

    "한 번 죽지, 두 번 죽냐! 한판 붙으면 그만이지!"

    "…한 번만 죽어도 문제거든요."

    "너흰 왜 그렇게 불만이 많아!"

    마왕을 상대해야 하는 입장에서 불만이 없으면 그게 더 이상하지.

    김다현은 할 말이 많았다.

    하지만 지금 말을 한다고 서아영이 들어줄 것 같지도 않았다.

    "뭐든 처음이 어려운 거야."

    "…참 위로가 되네요."

    서아영이 막 뭔가 말을 하려는 순간, 체이칸이 그들을 보며 말했다.

    "이 하찮은 인간들을 방패로 쓰겠다는 거냐? 과거의 수많은 마수들에 둘러싸여 거대한 골렘을 움직이던 너의 위용에 비하면 너무도 하찮은 짓이구나."

    "뭐라는 거야?"

    마족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서아영이 고개를 갸웃하자, 이지혁이 친절하게 해석을 해주었다.

    "너 더럽게 못생겼대."

    "어디 튀기다 만 바퀴벌레처럼 생긴 게 그따위 망발을 하고 있어!"

    여자의 얼굴을 지적하는 것 이상의 도발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서아영은 확실히 도발에 빠져들었다. 물론 그 도발은 이지혁이 한 것이지만 말이다.

    "그냥 붙어!"

    "어어어! 부장님! 진정하십시오!"

    "진정은 얼어 죽을!"

    서아영의 양손에서 뿜어져 나온 불꽃이 응축되더니, 순식간에 체이칸을 향해 날아들었다.

    전투의 시작이었다.

    * * *

    "막아낼 수 있을까?"

    송정수는 긴장한 얼굴로 비전을 바라보았다.

    이런 일은 언젠가는 겪어야 하는 일이다. 그들의 진정한 대적자가 마왕이라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은 앞으로의 향방을 가늠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전투라고 할 수 있었다.

    "이지혁 씨는 참가하지 않는 겁니까?"

    "그런 듯 보입니다. 확신이 있는 거겠죠."

    "…확신이요?"

    "아니면 적당히 붙여보고, 안 되겠다 싶으면 나설 생각이든가요."

    이지혁의 성향을 바탕으로 생각해 봤을 때, 전자보다는 후자가 명백히 가능성이 높았다.

    그 순간, 서아영이 뿜어낸 불꽃이 마왕에게 격중했다.

    "헐! 다짜고짜!"

    "저 여자가 일을 저지르는구나!"

    국방부 장관이 기겁을 하여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두 사람을 만류했다.

    "두 분, 진정 좀 하십시오."

    "이게 진정할 상황인가! 마왕이란 말일세! 마왕!"

    "마왕은 마왕이고, 지금 우리는 해야 할 일을 해야죠."

    "그, 그렇지."

    송정수의 얼굴이 다급해졌다.

    어차피 공격은 시작되었고, 이제 곧 저곳은 지옥으로 변할 것이다. 여파가 어디까지 미칠지 모르는 상황에서 근거리에 부대를 남겨두고 있으면 피해가 어디까지 생길지 아무도 짐작할 수 없는 상황이다.

    "무기는 아무래도 좋으니까, 일단 다들 후퇴하라고 해."

    "전선을 파기합니까?"

    "이제 전선 같은 건 무의미하니까 일단은 다들 도망치라고 하라고! 마왕과 이지혁이 붙었을 때 얼마나 어마어마한 충돌이 벌어지는지 다들 알지 않는가!"

    재수가 없으면 기껏 몬스터에게 버텨놓고 아군의 공격 여파에 사망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정인수에게 연락해서 위쪽에 있는 부대들도 아래로 내려오지 말고, 위로 북상하라고 해!"

    "예!"

    국방부 장관이 전화기를 들었다.

    * * *

    "…죽겠네."

    정인수는 너덜너덜한 몸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가 지금 있는 곳은 한강의 이북이었다. 몬스터들의 시선을 끌어 남하를 최대한 늦추겠다는 일념하에 시도된 후방 특작 부대 상륙작전의 책임자가 바로 정인수였다.

    워낙 결과가 빤한 일이라 목숨을 걸고 인류를 수호해 보겠다는 마음을 가진 이들만 지원을 받았고, 정인수도 미련 없이 그곳에 지원을 했다.

    어차피 자식도 없고, 마누라도 없다. 자신 한 몸 희생해서 다른 사람들이 더 살 수 있다면 얼마든지 희생하겠다는 마음으로 온 곳이다.

    하지만 이곳은 또 다른 지옥이었다.

    개인화기를 들고 몬스터들을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들은 도발과 도주를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먼저 파견된 다섯 부대는 이미 전멸했고, 그들의 부대가 마지막으로 남아 있었다.

    "소장님."

    "왜?"

    "저 새끼들, 움직임이 좀 이상합니다."

    "응?"

    정인수가 고개를 살짝 내밀어 저 멀리 보이는 몬스터들의 무리를 응시했다.

    "어?"

    몬스터들이 다들 멈춰 있었다.

    앞쪽이 미친 듯이 전투를 치르는 동안 뒤쪽이 이상할 정도로 평화로웠던 게 한두 번은 아니지만, 이번에는 경우가 좀 달랐다.

    '평화롭다'가 아니라 마치 정지 화면인 것처럼 움직임이 아예 멈춰 있었다.

    "뭔 일이 벌어진 거지?"

    그리고 그 순간.

    콰아아아아아아앙!

    "뭐야! 씨발, 폭격이야? 말도 안 해주고?"

    "아, 아닙니다! 저거!"

    바닥에서부터 하늘 끝까지 치솟아 오른 거대한 화염의 용을 본 정인수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서아영."

    세상에 수많은 능력자가 있지만, 저런 짓을 할 수 있는 이는 세상에 단 하나뿐이었다.

    지랄 마녀 서아영.

    그녀가 돌아온 것이다.

    "그, 그럼 이지혁 씨가 복귀한 거구나!"

    "으아아아아아!"

    "살았다! 살았어!"

    기쁨에 취한 이들이 괴성을 질렀다.

    이곳에 온 이상 그들에게 남은 것은 죽음뿐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지혁이 돌아왔다면 살아남을 확률이 생긴 것이다.

    감정을 최대한 죽이려고 했지만, 그게 어찌 마음대로 되겠는가.

    그리고 그 대가는 컸다.

    "모, 몬스터들이 이리로 옵니다! 어그로 끌렸어요!"

    "튀어! 얘들아, 튀어라! 총질하지 말고 그냥 튀어! 어떻게든 살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가는 정인수의 입가에 희망이 피어올랐다.

    * * *

    이지혁의 목적은 아주 간단했다.

    지금 상태로는 도무지 마왕에게 타격을 줄 수 없는 이들을 단련시키고 또 단련시켜서 어떻게든 마왕을 상대할 수 있는 급으로 만드는 것이 이지혁의 목적이었다.

    세상의 어떤 일이든 목적을 세우는 것은 간단하지만, 그 목적을 이루어가는 방법을 마련하는 일이 문제였다.

    하지만 이지혁에게는 그 방법 또한 마련되어 있었다.

    마나.

    에테르에 익숙해진 이들이 마나마저 다룰 수 있게 된다면, 그 효용이 극히 늘어날 것이라는 게 이지혁의 계획이었다.

    문제는 그 마나라는 것이 생각만큼 쉽게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능력자들은 마나를 배움에 있어서 한 가지의 이점과 한 가지의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단점은 그들은 살아 생전 한 번도 마나라는 것을 느껴본 적이 없다는 점이다. 애초에 세상의 베이스가 마나인 베라프에서는 갓난아기라도 기본적으로 마나에 익숙했다.

    사람은 비록 느끼지는 못하지만, 공기를 항상 접하면서 살지 않는가. 그와 마찬가지로 베라프 인들은 마나를 항상 접하면서 산다. 아무리 마나에 대해 의식을 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친화도 자체가 다른 것이다.

    이지혁이 강제로 마나를 주입하여 마나에 대한 감을 잡았다고 하지만 주변에 존재하는 마나를 자신의 의도대도 활용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장점은 아주 간단하다.

    마나를 익히고, 마나를 통해서만 강해질 수 있는 베라프 인들과는 다르게, 지구의 능력자들은 이미 에테르를 통해 육체를 강화한 상태였다.

    덕분에 보통의 베라프 인들이 마나가 역류하면 바로 즉사하는 것과는 다르게 지구의 능력자들은 웬만한 충격에는 버틸 수 있었다.

    그게 모든 문제의 시작이었다.

    * * *

    서아영의 양손에서 에테르가 뿜어져 나온다. 에테르는 형질 변환을 거쳐 불꽃으로 화했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육체 안에 잠재되어 있던 마나가 밖으로 튀어나오며 불꽃에 증폭을 걸고 스스로도 불꽃으로 화하기 시작했다.

    불꽃과 불꽃이 충돌하며 제어가 잘 안 될 정도로 거대한 불꽃이 그녀의 손을 타고 돌았다.

    "큭!"

    육체가 한계에 몰릴 때까지 화력을 증폭하고 또 증폭한다. 그녀가 이지혁에게 배운 것은 두 가지. 마나를 통해 에테르를 증폭시키는 방법과 육체가 부서지기 직전까지 그 고통을 참아내는 것이었다.

    서아영이 고함과 비명이 뒤섞인 듯한 소리를 냈다.

    이지혁의 교육은 아주 간단했다.

    '자세히 설명해 준다고 니들이 알아나 듣겠냐'라는 명쾌한 논리를 들이대기는 했지만, 서아영의 생각에 이지혁 역시 이 과정이 정확히 어떠한 메커니즘을 지니는지 확실히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하지만 무언가를 배움에 있어서 이해도가 반드시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걸 이지혁은 증명해 냈다.

    그저 에테르를 사용하게 하고, 마나를 통해 그걸 증폭시키는 감각을 온몸으로 '이해'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이미 육체에 흑마력을 받아들여 그걸 바탕으로 에테르를 강화해 본 적이 있는 서아영에게 그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어려운 것은 에테르를 증폭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증폭의 여파로 찾아오는 고통을 감내하는 일이었다.

    요령을 알면 증폭은 할 수 있다. 자체적으로 에테르를 증폭시키기까지 걸린 시간은 의외로 길지 않았다.

    하지만 과도하게 중폭하면 육체가 그 반동을 이기지 못해 붕괴하고, 어설프게 증폭한다면 이 고생을 해가며 마나를 익히는 의미가 없었다.

    육체가 붕괴하기 직전의 그 선을 찾아내 아슬아슬한 수준으로 줄타기를 하는 것이 그들이 익힌 요령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훈련의 결과가 나오고 있다.

    "으아아아아아앗!"

    서아영의 양손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꽃이 어마어마한 수준으로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서아영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빌어먹을, 더럽게 아프네.'

    양손에서 시작된, 마치 전기로 지지는 듯한 격한 통증이 전신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이지혁의 말대로라면 육체가 뿜어져 나오는 힘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 반, 에테르와 마나의 충돌로 입는 손상이 반이라고 했다.

    으드드득.

    이가 갈려 나간다.

    원형 복원에 가까운 이지혁의 치료 마법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NDF들은 다들 틀니를 끼워야 했을 것이다. 그 정도로 고통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럼에도 버틸 수 있는 이유?

    콰콰콰콰콰콰!

    타오르던 불꽃이 마치 제트엔진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꽃처럼 격렬히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힘이 강해지는 것이 느껴지는 정도가 아니라, 확연히 눈에 보인다.

    NDF를 가장 절망하게 만들었던 것이 무엇일까?

    이지혁의 괴롭힘?

    아니면 마계의 침공에 대한 공포?

    천만에.

    장담하건대, NDF를 가장 괴롭힌 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무력감이었다.

    그들은 언제나 최전방에서 싸워왔다. 타국이 처리하지 못한 일들에 앞장섰고, 인류에 닥친 최고의 위기 앞에서 희생을 강요당했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그들이 직접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모든 일들을 해결하는 것은 결국 이지혁이고,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이지혁을 돕거나 그가 처리하지 못한 뒤치다꺼리를 하는 것이었다.

    마치 히어로 만화에 나오는 지구방위대처럼 말이다.

    미사일을 쏘고 폭격을 해 대지만, 적에게 아무런 피해를 입히지 못하고 그저 시간이나 끄는 존재.

    괴수의 등장과 동시에 펑펑 터져 나가는 모습을 보여주어 괴수가 얼마나 강한가를 시청자들에게 납득시키는 존재.

    안타깝지만 NDF가 맡은 역할은 그 이상이 되지 못했다.

    그 사실만큼 NDF를 화나게 한 것은 없을 것이다.

    그들을 버티게 만든 원동력이 그것이었다.

    그들 역시 이지혁이 허풍은 쳐 대도 없는 말을 하지 않는다는 정도는 알았다. 이 모든 과정을 버텨내 마나를 완벽하게 다룰 수 있게 된다면, NDF들만으로도 마왕을 처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그 말 한마디가 지옥 같은 수련을 버틸 수 있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 결과를 증명할 시간이었다.

    서아영의 손에서 뿜어진 불꽃이 체이칸의 전신을 휩쓸었다.

    최정훈이 자신도 모르게 입을 쩌억 벌렸다.

    서아영의 불꽃은 이제 익숙하다 못해 딱히 위험하다고 느끼지도 못할 지경이지만, 오늘 서아영이 쏘아내는 불꽃은 확실히 뭔가 달랐다.

    독기라고 해야 할까?

    그동안의 서아영도 그리 얌전한 성격은 아니지만, 입바르게 말하자면 지랄 맞았지만… 오늘 서아영이 뿜어내는 불꽃에는 그동안의 울분이 모조리 녹아 있는 느낌이었다.

    '어마어마하군.'

    제아무리 마왕이라고는 하지만, 저 불꽃에 타격을 받지 않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였다.

    "쯧."

    하지만 이지혁은 못마땅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흥분했군."

    "네?"

    "마왕을 상대로 하는데 저런 광범위 공격이 왜 필요하냐는 거죠. 화력은 한쪽으로 집중시켜도 타격을 줄 수 있을까 말까인데, 몬스터들 휩쓸 듯이 공격을 해대면 답이 안 나오는 거야 빤한 일인데."

    이지혁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혀를 찼다.

    "쟤는 예전부터 저게 안 되더라. 뭐든 크게만 만들면 다 되는 줄 안다니까."

    가혹할 정도로 엄격한 잣대를 들이미는 이지혁이었다.

    "그럼 타격이 힘든 겁니까?"

    "쟤 혼자라면 그렇겠지만……."

    이지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하나가 아니잖아요."

    "아!"

    그 순간이었다.

    체이칸이 불꽃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얼음덩어리들이 쏟아졌다. 마치 얼음으로 만든 운석이 떨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얼음과 불이 시야를 가리는 동안, 김다현이 체이칸의 등 뒤로 파고들었다.

    "으라차!"

    콰아아앙!

    김다현의 다리가 체이칸의 등을 격하게 걷어찼다.

    그런 후에…….

    "끄아아아아!"

    그 반동으로 김다현이 허공을 날았다.

    "아……."

    "저 등신."

    이지혁이 낄낄대며 웃었다. 강철을 걷어찬다면 보통 다리가 부러지는 선에서 끝나겠지만, 마왕의 방어력이라는 것은 감히 강철에 비할 바가 아니다. 물리법칙을 무시하는 반탄혁에 김다현이 이를 악물었다.

    "뭐, 저런 게 다 있어?"

    막 욕을 내뱉으려는 최정훈을 막은 것은 이지혁의 무심한 한마디였다.

    "시선은 잘 끌었네."

    그리고 그 순간, 스핏 파이어 윤혁규가 마왕의 바로 앞으로 치달았다.

    "으아아아아!"

    그의 양손에 모인 불꽃이 대포처럼 터져 나간다. 순간적인 폭발이 체이칸의 육체를 그대로 휩쓸었다.

    콰아아아아앙!

    폭발과 동시에 체이칸의 몸이 마치 끈 떨어진 연처럼 허공을 날았다.

    "루드라아아아아!"

    "알고 있어!"

    바닥으로 떨어지기 전에 루드라의 벼락이 체이칸의 육체를 강타했다.

    귀를 찢는 듯 날카로운 고성과 함께 새하얀 뇌전이 체이칸의 육체로 파고들었다.

    전기로 지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체이칸의 육체에서 스파크가 마구 튀어 올랐다.

    쿠우웅!

    허공을 날던 체이칸의 육체가 커다란 폭음과 함께 바닥에 추락했다.

    "…통했나?"

    최정훈이 바짝 긴장한 얼굴로 체이칸을 바라보았다.

    이 일격으로 끝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타격이 있는가, 아닌가는 중요한 문제였다.

    타격이 있다면 싸움의 방식에 따라서 이길 수 있는가 없는가가 나뉘겠지만, 이렇게까지 하고도 타격이 없다면 NDF만으로는 마왕을 상대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이 그동안의 수련이 효과가 있었는가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순간일지도 몰랐다.

    그때, 체이칸이 바닥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후우."

    낮은 숨소리가 떨어지는 바늘 소리도 들릴 것처럼 고요한 대지로 흘러간다.

    "예상외로군."

    체이칸이 목을 툭툭 꺾었다.

    "인간들 주제에 이토록 농도 깊은 공격을 할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이지혁을 제외한 인간들은 그저 허수아비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인간에게서 조심해야 할 것은 무기 종류뿐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오늘 그 상식이 깨지는군. 인간들이 만들어낸 그 어떤 무기보다 강한 공격이었다."

    이지혁이 피식 웃었다.

    "핵도 맞아본 적 없는 놈이 잘도 지껄이는군."

    대인이나 특정 지역에 한한 파괴력이라면 이들의 공격이 핵을 능가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다. 그래봐야 인간이지. 너희가 내게 타격을 준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흔아홉 번째 마왕, 잔재주를 충분히 부렸으면 이제 나서는 게 어떤가? 아니면 내 손에 네 부하들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걸 지켜볼 셈인가?"

    이지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인도주의적인 마왕이로군. 싫지는 않은데 조금 역겨운데?"

    "……."

    "그렇지만 멍청해."

    "뭐라?"

    이지혁이 이죽이기 시작했다.

    "워낙 오랜만에 처 맞아보다 보니 본인의 육체 상태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모양이군. 허세는 그만 떨지그래?"

    "무슨 소……."

    그 순간, 체이칸의 한쪽 무릎이 휘청거렸다.

    "음……."

    덜덜 떨리는 다리를 보며 체이칸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박쥐와도 같은 그의 얼굴이 한껏 이를 드러내며 분노하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이지혁이 그 광경을 보며 낄낄 웃었다.

    "그만큼 처 맞으면 마왕이라도 타격이 있는 게 당연하지. 뭐하냐, 얘들아! 마왕님 아프시단다!"

    이지혁의 말을 들은 NDF들이 실실 웃으며 체이칸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 * *

    "통하네."

    "통하는데?"

    "때리면 아픈 모양인데?"

    서아영의 입에서 참을 수 없는 웃음이 터지기 시작했다.

    "맞으면 아파야지."

    그건 너무 당연한 일이다. 생물인 이상 공격을 받으면 타격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 당연한 이치를 비껴간 것이 마왕들이었다. 지금까지는 아무리 공격을 하고 또 공격을 해도 마왕들은 전혀 타격을 받지 않았다.

    그 사실이 그들을 절망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지금 NDF들은 마왕이 자신들의 공격에 타격을 받은 것을 직접 눈으로 확인한 것이다. 비록 그 타격이라는 것이 생명에 지장이 있을 정도로 심대한 것은 아니지만, 그동안은 그 미약한 타격조차 주지 못했다.

    그런데 오늘 드디어 그들이 마왕에게 타격을 주는 것에 성공한 것이다.

    "낄낄낄낄."

    서아영은 마치 이지혁처럼 웃었다.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마왕이 휘청거릴 정도의 타격을 입혔다고 해서 현재의 상황이 유리해진 것은 아니다. 마왕들의 회복력과 맷집을 알고 있는 그녀도 이 정도로 뭔가 달라진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절대에 가까운 방어력을 가지고 있는 마왕들에게 공격이 통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서아영은 그동안의 지옥 같은 수련에서 받은 스트레스가 모두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이 순간! 오직 이 한순간을 위해서 그들은 혀를 깨물고 싶은 고통을 참아냈던 것이다.

    "통하잖아. 그치?"

    윤혁규가 고개를 끄덕였다.

    "헛고생한 건 아니네요."

    이어 김다현이 불만스레 말했다.

    "나는 안 통하던데?"

    "……."

    "……."

    모두가 김다현에게서 슬쩍 고개를 돌렸다.

    능력의 특성상 김다현은 파괴력이 그리 높지 못하다. 강한 속력은 강한 파괴력을 동반하기 마련이지만, 김다현이 진심으로 최고 속도로 갖다 박는다면 마왕은 그저 아프고, 김다현은 산산조각이 날 것이다.

    "뭐, 그냥 날아다녀."

    "응?"

    "시선 분산이라는 거지."

    "…모기 새끼처럼?"

    '그것참 적당한 표현이군'이라고 말했다가는 김다현이 죽자 사자 달려들 것 같아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제길, 나는 대체 뭘 한 거지?"

    김다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태생적인 한계라고 해야 할까?

    능력이라는 것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이상 누군가는 자연히 겪어야 할 일이었다.

    그때, 이지혁이 김다현을 불렀다.

    "어이."

    "음?"

    김다현의 고개가 이지혁에게로 돌아갔다.

    "네?"

    "이리, 이리로."

    "에?"

    난데없는 부름에 김다현이 미심쩍은 얼굴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보통은 사람이 부르면 무슨 일인지를 고민해야 하지만, 이지혁이 부르면 정말로 '무슨' 일인가를 고민하게 된다.

    '저 인간이 또 왜 부르는 거지?'

    이계에서 겪은 수많은 수련들은 김다현에게 이지혁이란 인간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을 안겨주었다.

    "왜, 왜요?"

    이지혁이 김다현을 바로 앞까지 부르더니, 한 손을 휘저었다.

    "에이 씨! 또 때리려……."

    방어 자세를 취하던 김다현이 이지혁의 앞에 시커먼 홀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건 때리려는 각이 아닌데?'

    이내 이지혁이 홀 안으로 손을 쑥 집어넣더니 그 안에서 휘황찬란하게 생긴 기다란 검을 꺼냈다. 검은색의 검신이 딱 봐도 불길한 기운을 뭉클뭉클 뿜어내고 있었다.

    "능력이 딸리면 템이라도 써야지."

    "헐? 이게 뭐예요?"

    이지혁이 머리를 긁었다.

    "이게 이름이 뭐더라? 데… 데, 어쩌고였는데."

    "데스 소드!"

    "…닥쳐."

    지옥 같은 작명 센스를 들으며 이지혁이 좌절하는 순간, 체이칸이 그 광경을 보고 신음을 흘렸다.

    "데로드릭."

    "아, 맞다! 그런 이름이었지."

    "이 미친놈! 마계의 신병이 어디로 갔는가 했더니, 네게 있었구나!"

    "아니, 마계에 있었어."

    이지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마계에 유지되고 있던 그의 아공간 안에 있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어찌어찌 베라프까지는 가져갈 수 있었지만, 아티팩트가 통과할 수 없는 차원의 벽을 넘지 못해 남겨두고 온 것이다.

    그 벽을 마왕 놈들이 친절히 깨주셨으니 잘 이용해야지.

    "이게 엄청 좋은 템이거든. 마왕 놈들이 신줏단지 모시듯이 하던 신검… 마검? 여하튼 그런 칼인데, 알다시피 내가 법사 계열이다 보니까 쓸 일이 없어서 짱박아 뒀던 거야."

    "…전설템이 드롭됐는데 클래스가 안 맞았던 거군요."

    "그렇지! 딱 그거야."

    체이칸이 분노하여 소리쳤다.

    "드롭이라니! 이 미친놈이 다른 마왕을 때려잡아 뺏은 것도 드롭이냐?"

    "그거야말로 드롭이지, 병신아. 나는 인간이고, 너희는 마왕이잖아. 인간이 마왕을 때려잡아서 칼이 떨어졌으면, 그게 드롭 아냐?"

    "…음?"

    체이칸이 혼란스러워하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니 저들의 입장에서는 그보다 더 확실한 드롭이 없었다.

    "여하튼 저 병신은 무시하고, 이 칼이 죽여주는 칼이거든? 흑마력으로 강화는 못하니까 효율의 백 프로는 발휘 못해도 오 할 정도만 나와도 마왕의 피부 정도는 가를 수 있을 거야."

    "오!"

    김다현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이지혁이 들고 있는 칼을 바라보았다.

    "백 프로 발휘할 수 있는 방법은 없나요?"

    "어, 있긴 한데… 그게 영혼의 계약이라고 해야 하나? 악마에게 영혼을 저당 잡히는 대신에……."

    "굳이 출력이 높을 필요는 없겠죠."

    깔끔하게 성능을 포기한 김다현이 검을 받아 들고는 이리저리 휘둘러 보았다.

    "그냥 장식용 칼 같은데?"

    "찔러보면 안다."

    이지혁의 말에 김다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인간은 사람 골려 먹는 게 취미이긴 하지만, 맞는 말로 사람을 골려 먹는다.

    굳이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사람이 빡이 쳐 돌아버리게 만들 수 있는 인간이니, 이 상황에 자신을 엿 먹이자고 수작질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야이, 마왕 놈의 자식아! 이제 각오해라."

    "…아니, 그 정도는 아니고."

    "죄송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쓸 거면 그 얼굴 나 주지.

    비굴하게 헤헤대는데도 빛나는 김다현의 얼굴을 보며 이지혁이 한숨을 쉬었다.

    "하찮은 인간들 따위가!"

    이지혁이 체이칸의 말을 들으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니, 저것들은 저게 레퍼토린가?'

    이지혁에게 처 발린 걸 벌써 잊은 건 아닐 테고, 인간에게 얻어맞은 게 방금 전의 일이다. 그런데 저런 뻔뻔한 대사가 잘도 나온다.

    '사람이 개미에게 물렸다고 '하찮은 개미 따위가'라는 대사를 치지는 않을 텐데 말이야.'

    참 어쩔 수 없는 스트레오 타입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이지혁이 입을 열었다. 굳이 통역할 필요는 없는 대사였다.

    "이러다가 다른 놈이라도 오게 되면 박살 나는 거 알지?"

    "예."

    "빨리 조져."

    "라져."

    서아영이 불타는 듯한 눈으로 체이칸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가능할까요?"

    최정훈이 넌지시 물어오자 이지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뭐, 모르는 거죠. 아무리 대미지가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전투 경험에서 압도적인 차이가 날 테니까요. 스포츠든 격투기든, 펀치력에서 승부가 나지는 않잖아요?"

    "그렇죠."

    "다만, 뭐랄까……."

    이지혁이 씨익 웃고는 말했다.

    "텔레폰 펀치라도 한 방 들어가면 이길 수 있는 화력을 보유했다는 게 중요한 거죠."

    이지혁의 말에 최정훈이 고개를 돌려 서아영을 바라보았다.

    '정말 가능할까?'

    오직 그것만을 위해서 준비해 오기는 했지만, 아직도 긴가민가한 게 사실이었다.

    인간이 인간의 힘만으로 마왕을 이길 수 있을까?

    이미 이지혁이 그 선례를 보여주기는 했지만, 이지혁은 이레귤러와 같다. 그 오랜 시간과 불멸의 육체가 아니었다면 이지혁 역시 그만한 경지에 도달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지혁이 아닌 다른 인간은?

    스스로를 단련하고 힘을 합치는 것만으로 마왕에게 도달할 수 있을까?

    최정훈은 긴장된 눈으로 서아영들을 지켜보았다.

    이건 단순히 누가 이기고 지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이란 종족의 마왕에 대한 도전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스타트는 다시 서아영의 몫이었다.

    "핫!"

    서아영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불꽃이 대지를 뒤덮기 시작했다. 이지혁이 그 광경을 보며 고개를 젓고 말았다.

    "쟨 진짜 저거 어떻게 안 되나?"

    "사람마다 잘하고 못하는 게 있기 마련이니까요. 대신 몬스터들 상대할 때는 최고이지 않습니까?"

    "조무래기 잘 잡아서 뭐해요, 보스를 못 잡는데. 그냥 양학캐네."

    "…랩업만 잘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다음 스테이지로 못 넘어가는데, 뭔 놈의 랩업이에요."

    "그도 그러네요."

    최정훈이 어깨를 으쓱했다.

    모로 가든 서울만 가면 되지 않는가.

    이지혁은 서아영에게 더 많은 것을 바라고 있지만, 최정훈이 생각하기에 서아영이 단독으로 마왕을 구축할 필요는 없었다.

    '팀으로 움직일 수 있으면 그걸로 된 거지.'

    서아영이 대인 능력이 떨어지면, 대인 능력이 강한 사람이 보완해 주면 된다.

    '예를 들면…….'

    "으라라라라랏! 내가 간다아아아아!"

    너 아냐!

    다현아, 진정해라. 갑자기 왜 그러니?

    김다현이 검을 번쩍 들어 올린 채 가공할 속도로 체이칸을 향해 돌진했다.

    불을 향해 뛰어드는 불나방의 모습도 저리 위태롭지는 않을 것이다. 그냥 김다현 하나만 보면 저 어정쩡한 자세마저도 멋지게 보정해 주는 외모의 효과가 쩔지만, 샷을 뒤로 땡겨 잡으면 히어로 영화가 순간적으로 코미디 영화로 바뀌는 효과가 있었다.

    '저거, 죽는 거 아냐?'

    저러다가 반격이라도 당한다면 한 방에 뼈와 살이 분리될 텐데?

    "크아아아아!"

    타오르는 불꽃 속에서 고함을 지른 체이칸이 고개를 돌려 자신에게 쇄도하는 김다현을 포착했다.

    "헐?"

    순간적으로 눈이 마주친 김다현이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직감하고는 몸을 격하게 꺾었다.

    "으라차아아아!"

    김다현의 몸이 옆으로 획 비틀어내는 것과 동시에 김다현이 있던 자리로 검은 마나가 솟구쳤다.

    콰드드득!

    마치 검은 그림자처럼 치솟아 올라간 나무뿌리가 김다현이 있던 자리를 움켜잡았다.

    "히익!"

    김다현이 그 광경을 보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단 0.1초만 늦게 움직였어도 그는 지금쯤 배를 뚫고 나오는 자신의 내장을 감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잘한다."

    이지혁이 그 광경을 보고 혀를 찼다.

    "정신 안 차려!"

    그가 고함을 지름과 동시에 윤혁규가 움직였다.

    "쏟아부어!"

    "라져!"

    윤혁규가 마왕의 정면을 향해 섰다.

    "장난은 끝이다, 빌어먹을 마족 놈아."

    인간이 마왕을 처리하기 위해서 취해야 할 전술은 무엇일까?

    틈을 노린다?

    연계를 통해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공격을 퍼붓는다?

    아니다.

    기본 화력 자체가 마왕보다 약하고 다수인 그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선택은 바로 퍼붓는 것이다. 끝도 없이 퍼붓고 또 퍼부어서 반격의 여지조차 주지 않고 한 방에 마왕을 눕혀 버리는 것이다.

    이미 어떻게 마왕을 상대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시뮬레이션을 끝도 없이 했다. 결정적인 틈을 만들 필요도 없다. 확실하게 이것만 먹히면 쓰러뜨릴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 공격이 없기 때문이다.

    그저 기관총으로 전차를 상대하듯이 퍼붓고 또 퍼부어서 어디 하나가 뒤틀리도록 만드는 수밖에 없다.

    그러니!

    "퍼부어!"

    윤혁규의 양손이 빛을 발함과 동시에 온 세상이 무지갯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에테르와 마나의 향연이 체이칸의 육체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 * *

    콰아아아아앙!

    거대한 폭발이 세상을 휩쓸기 시작했다.

    "큭!"

    최정훈이 불어오는 폭풍에 몸을 휘청였다. 2파가 오기 전에 이지혁이 손을 뻗더니, 최정훈의 앞에 실드를 쳤다.

    "거, 그러니까 좀 멀리 떨어져서 보면 될걸."

    "…더 멀리요?"

    이미 500m가 넘는 거리가 있는데, 여기서 더 멀어지면 뭘 보라는 말인가.

    안전을 위해서는 더 떨어지는 게 맞겠지만, 최정훈은 자신만 안전한 곳에 서서 동료들의 싸움을 지켜볼 만큼 태연한 성격이 되지 못했다.

    "그럴 수는 없죠."

    이지혁이 굳은 표정을 짓는 최정훈을 보면서 혀를 찼다.

    "손해 보는 성격이라니까."

    최정훈이 뒤에서 지켜보기만 한다고 뭐라 할 사람은 이곳에 아무도 없었다. 되레 저 승부의 여파에 최정훈이 다치기라도 하면 자책할 사람이…….

    '자책은 안 하겠네.'

    대신 같이 있었으면서 대체 뭐한 거냐고 이지혁을 달달 볶으려 들 사람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자리를 지키려고 하는 사람이 최정훈이었다.

    '그러니 사람들이 따르는 거겠지만.'

    처음 최정훈을 보았을 때의 인상은 유능한 엘리트 관료였다. 어느 시대 어느 곳에 태어났어도 자신의 능력만으로 위로 올라갈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최정훈에 대한 이지혁의 평가였다.

    너무 깨끗하지만은 않아서 윗선과 각을 세우지도 않고, 둥글둥글 모두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자신의 잇속도 결코 놓치지 않는 타입.

    그러면서도 능력은 능력대로 있고, 일에 대한 열정도 있는 사람.

    그런 이들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반드시 위로 올라간다.

    그런데 최근의 최정훈은 단순히 그런 평가에 머무르지 않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왕이라도 될 셈인가?'

    이지혁이 가만히 웃었다.

    포용력을 갖추기 시작한 능력자는 사람을 끌어모으기 마련이다. 만약 이런 시대가 아니었다면 혁명의 주체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긴 못할 것도 없지.'

    왕은 없는 시대이지만, 지도자는 존재하는 시대다. 지금이야 그런 것을 신경 쓸 때가 아니지만, 마계의 침공을 막아내게 된다면 이 짙은 상처를 봉합할 사람이 필요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최정훈이 나서야 할지도 모른다.

    이지혁은 그런 생각을 하며 피식 웃었다.

    '나도 참 별걱정을 다 하는군.'

    예전에는 전혀라고 해도 좋을 만큼 미래라는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미래에 대해서 관심이 가는 것을 보니, 이 세상을 지키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긴 한 모양이었다.

    그의 육체는 더 이상 버티기가 힘들어진 상황이다.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고 하더라도, 정작 본인은 새로운 세상을 누릴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지혁은 미래를 보고 있었다.

    그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라도 몬스터와 마계가 없는 인간만의 세상을 누릴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러려면 이겨야지.'

    태연한 얼굴과는 다르게 이지혁 역시 조금은 긴장하며 상황을 지켜보았다. NDF가 그의 지원 없이 마왕을 상대할 수 있는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인간이 마왕을 전혀 상대할 수 없는 것과 인간의 힘만으로 마왕을 상대할 수 있는 것은 그 대응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을 달라지게 만들 테니까.

    콰아아아아앙!

    폭음이 귀를 찢고, 에테르와 마나의 폭풍이 전장을 집어삼켰다.

    * * *

    "저게 뭐야?"

    정인수 소장이 기겁한 눈으로 전장을 바라보았다.

    "저런 건 처음 봅니다."

    그렇겠지.

    그들은 눈으로 식별할 수 있는 곳에서 핵이 떨어지는 것도 지켜본 사람들이다. 하지만 핵이라는 것은 한 번의 폭발이 거대하게 벌어지는 것이고, 지금 보고 있는 것은 마치 뭐라고 할까…….

    "불꽃놀이 같네요."

    "적당한 표현이네."

    그 형상은 전혀라고 해도 좋을 만큼 다르지만, 형형색색의 폭발이 마구 피어오른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었다. 화려하기 짝이 없는 폭발을 바라보며 정인수는 눈을 비볐다.

    "저거, 능력자들이 저지르고 있는 짓 맞지?"

    "그런 것 같습니다."

    "…뭔 몸에다 핵이라도 장착하고 돌아왔나?"

    정인수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NDF가 지옥 같은 수련을 하고 돌아올 것이라는 건 정인수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가 목숨을 내다 버리는 짓이나 다름없는 후방 교란 작전에 참여한 것도 그들이 돌아오기 전에 조금이라도 시간을 더 끌려는 생각에서였다.

    어차피 모두가 죽을 것이라 여겼다면 조금이라도 더 살 수 있는 방법을 선택했겠지만, NDF만 돌아오면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다는 확신이 있기에 목숨을 걸 수 있던 것이다.

    '그런데 이건 예상을 한참은 벗어난 것 같은데?'

    돌아오기만 하면 상황을 뒤집을 수 있다고 생각을 하긴 했지만, 저렇게 압도적인 화력을 뿜어낼 것이라고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일반인 중에서는 NDF와 가장 많은 작전을 시행해 본 사람이 바로 정인수다. 그렇기에 능력자들이 어느 정도의 힘을 보유하고 있는지에 대한 이해도가 가장 높다고 할 수 있었다.

    이해도가 높기에 오히려 상상이 제한된 건지는 몰라도 지금 정인수가 보고 있는 장면은 그가 아는 이들의 힘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차라리 이지혁 씨가 싸우고 있다면 이해가 가는 장면인데…….'

    화려한 폭발 속에서 넘실거리고 있는 화염의 존재만 봐도 저 폭발이 누가 일으킨 것인지는 명백했다.

    "상상 이상으로 강해져서 돌아왔네."

    정인수가 씨익 웃었다.

    문득 피로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면도날처럼 바짝 조여놓은 신경이 이제 좀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와 동시에 전신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긴장이 풀린 건가?'

    불과 두 시간 전까지만 하더라도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품고 있던 정인수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언제 죽을지 몰랐다.

    마수들로부터 어그로를 끌고 달아나기를 반복하는 일은 썩은 동아줄을 메고 백층 건물에서 번지점프를 반복하는 일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운이 아주 좋아야 살아남을 수 있는 일을 몇 번이고 반복하다 보니 정신이 피폐해져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저희 임무… 이제 끝난 것 같은데요."

    "그렇지. 이제 복귀하면 되겠네."

    "그런데 어떻게 복귀하죠?"

    "아……."

    정인수의 얼굴이 멍해졌다.

    '복귀는 생각도 안 해봤는데?'

    어차피 다 죽는다는 생각으로 투입된 작전이다. 작전의 성공이 최대한 어그로를 끌고 죽는 것이었으니까. 그러니 복귀 계획이 있을 리가 없었다.

    "해로로 갈 수 있을까?"

    "얼어 죽습니다. 보트도 없어요."

    "그럼 중국으로는?"

    "중국이 여기보다 더 위험한 것 아니었습니까? 거기는 거의 붕괴 상태라면서요?"

    "어……."

    어떡하지?

    정인수가 머리를 벅벅 긁기 시작했다.

    "그… 본부에 전화해서 헬기 요청하면 이쪽으로 데리러 오지 않을까?"

    "한 5일 뒤쯤에는 오겠네요. 그때까지 저희가 살아 있다면 말이죠."

    부관의 시니컬한 대답에 정인수는 할 말을 잃었다. 하는 족족 부정적인 대답이지만, 그 말이 전부 다 사실이라는 점이 정인수를 더욱 괴롭게 만들었다.

    '이제 겨우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저 싸움에서 누가 이기든 그들에게 결과는 좋지 않을 것이 빤했다. NDF들이 마왕을 이겨낸다면 마수들이 NDF들을 피해 이쪽으로 도망쳐 올 확률이 높고, NDF들이 마왕을 이기지 못한다면 경직되어 있는 마수들의 움직임이 다시 활발해질 것이다.

    이리 가도 죽고, 저리 가도 죽는다.

    원래 죽는다고 생각하고 온 자리이지만, 살 수도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가 사라지는 과정은 무척이나 더러운 기분을 선사했다.

    "이게 뭐냐고……."

    정인수가 일그러진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런데 소장님."

    "왜?"

    "이지혁 씨 전화번호는 가지고 계시죠?"

    "…그건 가지고 있지."

    "폰 챙겨 오셨습니까?"

    "응."

    정인수가 얼떨떨하게 대답을 했다.

    군에서는 일차적으로 무전기를 사용하는 것이 원칙이다. 도청의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그들은 인간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므로 도청의 위험에서 자유로웠다. 그럼 그냥 휴대폰을 쓰는 것이 이득이었다.

    "그럼 그냥 전화해서 데리러 오라고 하면 안 됩니까? 그 양반… 막 이동할 수 있잖아요."

    "헐……."

    정인수가 놀란 눈으로 부관을 바라보았다.

    이 새끼, 천잰데?

    떨리는 손으로 전화기를 든 정인수가 이지혁의 번호를 눌렀다.

    제발 폰을 가지고 있기를 빌면서 말이다.

    통화 연결음이 울리고 정인수가 긴장된 얼굴로 전화기를 귀에 가져다 댔다.

    [여보세요?]

    "이, 이지혁 씨! 접니다! 저예요!"

    [오! 오랜만이에요, 정인수 대령님.]

    이제 소장이에요. 승진에 승진을 거듭하고 있다구요. 그런데 이러다가 또 특진하게 생겼습니다.

    "돌아오셨군요."

    [네. 뭐, 좀 걸리긴 했지만요.]

    "이제 금방 돌아오신 분께 제가 부탁 하나를 드려야 할 상황이라 무척 송구스럽습니다."

    [네? 부탁이요?]

    "예……. 저희가 지금 강 건너편에 있거든요. 그런데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마수들이 이쪽으로 몰려오기 시작하면 다 죽을 상황이라."

    [거기 왜 있어요?]

    "…임무 때문에."

    [아, 그 후방 교란인가 뭔가에 투입되셨구나. 정 대령님 정도면 나름 핵심 지휘관 중의 하난데, 그런 일에 투입되셨어요?]

    "그렇게 됐습니다."

    핵심이니 투입이 된 것이다. 그만큼이나 중요한 일이었으니까.

    [그래서요?]

    "정말 죄송하지만, 이쪽으로 혹시 게이트를 열어주실 수 있나 싶어서요."

    [아, 뭐, 어려울 건 없는데, 제가 거기가 어딘지 몰라서 게이트를 열기가 힘든데요? 이쪽에서 보이는 곳이면 어렵지 않겠는데.]

    "그쪽에서 보일 겁니다. 저희 지금 산꼭대기거든요. 거기서 보이는 제일 높은 봉우리 쪽으로 게이트를 열어주시면 됩니다."

    [음, 잠시만요. 여긴가?]

    저 옆 봉우리에 뭔가 시커먼 것이 만들어지는 것을 본 정인수가 다급하게 말했다.

    "거기 아닙니다. 옆쪽입니다."

    [그럼 여기네.]

    우우우웅!

    자신의 바로 앞에 시커먼 홀이 생겨나는 것을 본 정인수는 눈물 나도록 기쁘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었다. 말 그대로 정말 눈물이 나도록 기뻤다.

    "감사합니다."

    [얼른 넘어오세요.]

    "예!"

    전화를 끊은 정인수가 소리쳤다.

    "들어가! 어서!"

    정인수의 지시를 받은 이들이 게이트 안으로 우르르 들어갔다. 마지막 남은 한 사람까지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정인수도 다급하게 게이트 안으로 뛰어들었다.

    세상에 확 밝아진다.

    게이트에서 나온 정인수는 야전 침대를 가져다 놓고 누워 있는 이지혁과 그 옆에서 반가운 얼굴을 하고 있는 최정훈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정인수 준장님!"

    "이제 소장입니다."

    정인수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승진하셨습니까?"

    "건국 이래 저만큼 승진을 빨리한 군인도 없을 겁니다."

    그게 목숨 값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정인수가 뭔가를 막 더 말하려고 하는 순간, 최정훈의 시선이 획 돌아갔다.

    "아……."

    폭염이 가시며 천천히 체이칸의 육체가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최정훈이 긴장한 얼굴로 주먹을 꽉 쥐었다.

    '통해라!'

    이만한 화력을 뿜어냈음에도 통하지 않는다면, 인류는 결코 마왕을 상대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간절함을 가득 담은 최정훈의 눈이 가라앉는 흙먼지 사이로 보이는 체이칸의 모습을 더듬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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