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97화 (97/118)
  • [■] 내가 그 꼴을 볼 것 같아요? [■]

    ─────

    조병세는 멍한 시선으로 자신을 지나쳐 앞으로 나아가는 사내의 등을 바라보았다.

    "어……."

    못 보던 이들이다.

    조병세는 지금의 상황이 얼마나 급박한 것인지도 잠시 잊고 앞으로 걸어가는 이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다른 옷차림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이곳에 있는 이들은 모두 전투복을 입고 있었다. 심지어 능력자들조차도 모두가 전투복을 입고 있었다. 지속되는 전투 덕에 본인이 입고 온 옷들은 이미 옛날에 넝마 조각이 되었고, 개인별로 옷을 조달할 수 있는 사정도 되지 않으니 보급이 되는 전투복으로 모두 갈아입은 것이다.

    하지만 저들은 달랐다.

    조금 낡아 보이기는 하지만, 다들 각자의 옷을 입고 있었다. 이 최전방에서 저런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없다. 그건 확언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다른 곳에서 온 이들이라는 뜻인데…….

    그때, 누군가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멋졌어요."

    "…네?"

    "크, 폼나더라구요."

    사내가 싱긋이 웃었다.

    우습게도 그 순간 참 잘생겼다고 생각한 조병세를 두고 사내가 앞서 걸어간 이의 뒤로 빠르게 다가갔다.

    "희생을 염두에 두지 않는 전격적인 작전과 나라의 모든 힘을 동원해서 총력전으로 전방을 지켜낸다라……. 이거, 내가 아는 대한민국이 아닌 것 같은데?"

    "침략받는 데는 전통과 역사가 있는 나랍니다. 왜 이러십니까?"

    "국민들이야 그렇겠지만, 윗대가리들은 사고 터지면 대체 뭐하는지도 제대로 안 밝히고 몇 시간씩 자리에 없는 게 이 나라 아니었어요?"

    "…팩폭 자제하시죠."

    두 사람의 태평한 대화를 들으며 조병세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대체 뭐지, 저것들?'

    지금 여기가 어떤 상황인지는 알고 히히덕대고 있는 것인가? 지금 여기는…….

    "어?"

    조병세의 눈이 커졌다.

    성난 파도처럼 밀려오던 파상 공세가 잦아들어 있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물밀듯이 밀려오던 몬스터들의 걸음이 거짓말처럼 멈춰 있었다.

    어째서?

    몇 달 동안 몬스터들과 싸워온 조병세다. 그런 그가 몬스터들의 습성을 이해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시작하지 않았다면 모를까, 한 번 달려들기 시작하면 공격에 나선 몬스터들이 전멸하기 전까지는 멈추는 법이 없었다. 절대로 말이다.

    하지만 그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몬스터들이 모두 멈춰 섰다. 심지어 인간 측 진형으로 깊숙이 파고든 몬스터들이 주변의 인간들을 두고 뒤로 슬금슬금 물러나고 있었다.

    '지금 내가 뭘 보고 있는 거야?'

    저 기괴하게 생긴 것들의 표정으로 감정 상태를 짐작할 수는 없지만, 확실히 몬스터들이 지금 무언가를 꺼려하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워낙 황당한 상황이 벌어져서일까.

    대지를 지워 버리겠다는 느낌으로 쏟아지던 폭격이 어느새 멈춰 있었다. 귀를 찢을 듯 들려오던 총성도 잦아들었다. 그리고 모두의 시선이 앞으로 나선 두 사내에게 모였다.

    "대통령님과 총리님이 얼마나 고생을 해서 지켜온 건데……."

    "내가 본 것도 아닌데, 고생을 했는지 띵까대며 놀았는지 어떻게 알아요?"

    "고생 안 했으면 상황이 여기서 멈췄겠습니까? 한반도가 없어졌죠."

    "오, 그거… 밑에서 열심히 싸운 이들의 노력을 폄하하는 거예요? 대통령이 다른 사람이었으면 졌다?"

    "그, 그런 거 아닙니다."

    "이 양반, 옛날부터 정치하고 싶은 마음을 엄청 티내더니, 이제 완전히 각 잡았네. 왜요? 입당해요? 다음 국회의원 자리라도 한 번 노리시나?"

    "뽑아만 주신다면 열심히 한 번… 아, 이게 아니고!"

    잘생긴 사내가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이 농담 따먹기나 하고 있을 상황입니까! 일단 저 몬스터들부터 정리해야죠!"

    "내가 왜요?"

    "넹?"

    "내가 직접 그거 다 하려면 내가 미쳤다고 그 긴 기간 동안 개고생해 가면서 가르쳤나. 하려면 직접들 해요."

    "제가 이걸 혼자 어떻게 합니까?"

    "누가 혼자 하랬어요? 같이하면 되지. 지금 다들 오잖아요."

    "쯧."

    사내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뭐, 그러면 그러시든가요. 뒤에 가서 콜라나 드시죠."

    "오?"

    "왜요?"

    "원래라면 그래도 같이 싸워주는 게 기본이라느니, 도와주면 빨리 끝낼 수 있다느니 하면서 엄청 사람을 괴롭히지 않았어요?"

    "그때는 그래야 했던 거고 이제는 굳이 그런 방법을 쓸 필요가 없는 거죠. 마왕이 나온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마수들인데 이 정도야 저희 선에서 정리해야죠."

    "오올~"

    사내, 그러니까 이지혁이 피식 웃었다.

    "그것참, 키워놓은 보람이 있는 대사네요. 진즉에 그랬으면 좀 좋았어요?"

    "진즉에 좀 키워주시지그러셨어요."

    "마나가 없었다니까."

    이지혁의 너스레에 최정훈이 어깨를 으쓱했다. 앞의 마수들을 한 번 쭉 돌아본 최정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조금만 더 늦었으면 진짜 다 죽었겠네요. 생각보다 마수들이 많아요."

    "이걸 막아낸 건 칭찬해 줘야 할 일이긴 하네요. 개판이지만."

    이지혁이 마수들을 보면서 혀를 찼다.

    그가 예상한 것의 두 배가 넘는 마수들이 우글우글 진을 치고 있었다. 지금이야 서로 어느 정도 소모전을 해서 마수가 줄었을 텐데, 그럼에도 이만한 수를 유지하고 있다면 처음에는 얼마나 많은 마수들이 있었다는 건가.

    "마계 마수들을 다 끌고 왔나?"

    "여하튼 뭐, 버텨냈으니 좋은 거죠."

    이지혁도 고개를 끄덕였다.

    '잘도 버텼군.'

    전멸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었지만, 그래도 버텨내 준 것을 보니 기특하고 고맙다. 어차피 완벽한 전력을 만들어 돌아오지 못한다면 전멸하는 시간이 뒤로 미뤄지는 것뿐이라는 걸 알기에 이를 악물고 버텼다.

    미국을 제외한 나라들은 거의가 박살이 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 와중에 한국이 버텨내고 있던 것이다.

    "살아남은 국가가 얼마나 되려나?"

    "지금 정보 받고 있는데, 초토화까지는 안 된 모양입니다."

    "뭔 소리래요?"

    "유럽 쪽은 군대가 거의 무력화되기는 했지만, 민간인들은 피해를 그리 많이 받은 건 아닌 모양입니다. 어떻게 재건이 가능한 수준이라네요."

    "그럼 다행이구요."

    "대신 아프리카랑 중동, 그리고 중국은 영."

    "뭐, 어쩔 수 없는 거니까."

    이지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죽어간 사람들을 생각하면 안타까운 일이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적당히 갚아주면 되겠죠."

    "네, 뭐……."

    조병세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뭐라는 거야, 저 미친놈들이.'

    몬스터들이 공세를 멈춘 것은 만세를 불러야 할 일이지만, 그렇다 해도 그들과 몬스터의 거리는 지척이라 불러야 할 수준이다. 그런 상황에서 태연하게 대화를 하고 있으니, 속이 터질 노릇이었다.

    그럼에도 소리를 지르거나 욕을 할 수 없는 것은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기이한 분위기 때문이었다.

    등장과 동시에 장내를 사로잡아 버린 그 분위기.

    그리고 정점은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였다.

    "NDF다."

    조병세의 몸이 움찔했다.

    'NDF?'

    그 단어가 의미하는 바는 무척이나 컸다.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최강의 전력이자, 이 사태 이전에는 세계에서 가장 강한 능력자 세력이라 인정받던 한국의 자랑.

    그리고 자신들이 그토록이나 기다려 온 이들.

    이길 수 없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아무리 격하게 싸운다고 해도 그들이 하는 것이 전선을 유지하고 죽는 날을 조금 뒤로 미루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되지 않는다는 건 모두가 암묵적으로 생각하고 있던 것이다.

    그럼에도 버틸 수 있던 것은 상부가 하는 그 밑도 끝도 없는 말을 믿었기 때문이다.

    * * *

    - NDF만 돌아오면 된다.

    - 수련을 하러 간 그들만 돌아오면 이 상황은 극적으로 바뀔 것이다.

    그 밑도 끝도 없는 말을 믿어야 할 만큼 상황은 좋지 않았다. 처음에는 다들 개소리라고 무시했지만, 전투가 지속되고 정신적으로 지쳐 갈수록 신앙을 찾듯이 그들의 존재를 찾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들이 마침내 돌아온 것이다.

    조병세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뭔가 이상한 감정이 가슴을 간질이고 있었다.

    저 여유로운 태도가 꼴 보기 싫기도 하지만, 그 태도 덕분에 뭔가 안심할 수 있었다. 이제는 더 이상 위험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다리에 힘이 풀린다.

    "야, 이 화상들아!"

    그리고 그때, 그의 의식을 확 일깨우는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저 뒤에서 새하얀 옷을 입은, 아름다운 여자가 이마에 주름을 만들며 뛰어오고 있었다.

    "뒷정리할 동안 먼저 가서 좀 막고 있으라니까, 노가리를 까고 놀고 있어? 여기가 카페냐? 만남의 광장이야?"

    아름다운 얼굴과는 다르게 여자의 목소리는 걸걸하고, 말투는 거칠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조병세는 그녀의 얼굴을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플레임 위치다!"

    "지랄… 아니, 화염 마녀야!"

    어디선가 지랄 마녀라는 말이 나올 뻔한 것 같지만, 이 와중에서도 목숨은 소중한 것인지 즉시 정정이 들어갔다.

    지랄이라는 말이 들려온 곳으로 잠시 고개를 돌린 서아영이 다시 최정훈을 노려보았다.

    "같이 가서 좀 막고 있으라니까!"

    "…막고 있잖습니까."

    "누가 처 놀래요?"

    "거, 사람도 많은데."

    "뭐?"

    "…잘못했습니다."

    최정훈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아니, 나 혼자 얘들을 뭘 어쩌라는 거여?'

    이지혁이 도와주지 않으면 그 혼자 할 수 있는 일이야 빤한데, 홀로 저 많은 마수들에게 달려들지 않았다고 욕을 먹자니 눈물이 핑 돌 것 같았다.

    그 순간, 이지혁이 최정훈의 어깨에 손을 턱 올리더니, 매우 안타깝다는 어투로 말했다.

    "웬만하면 결혼은 하지 마세요."

    "……."

    "내가 해봐서 아는데, 그거 안 좋아. 특히 쟤랑은."

    "뼈에 새긴 충고, 감사드립니다."

    "뭐라는 거야, 이것들이!"

    서아영이 막 발작하려는 순간, 이지혁이 옆으로 슬쩍 물러났다.

    "어디 가요?"

    "비켜줘야 할 거 아니에요."

    "응?"

    서아영이 뒤를 슬쩍 돌아보았다. 저 뒤에서 먼지구름이 일고 있었다.

    "빨리도 오네."

    "뒷정리 다 하고 왔어요?"

    "대전 쪽부터 이쪽까지 빠져나간 애들은 모조리 다 잡고 오라고 했어요. 그런데 생각보다 빨리 끝났나 보네요."

    "책임자가 제대로 확인 안 해보고 그렇게 두고 와도 되요?"

    "어차피 꼼꼼하게 살피는 건 저보다는 다현이가 더 잘해요. 맡겨뒀으니 알아서 잘하겠죠."

    "뭐, 알아서 하시죠."

    이지혁이 낄낄대며 웃었다.

    "아이고, 가르쳐 놓으니 얼마나 편해. 할 것도 없고. 콜라나 빨면서 놀아야지."

    "내가 그 꼴을 두고 볼 것 같아요?"

    "쓸데없는 말은 그만하고."

    이지혁이 정색하고 말을 잘랐다.

    "막아냈다고는 하지만 피해가 어마어마한 것 같은데, 고생한 사람들은 위해서 복수나 좀 해주시죠."

    "말 안 해도!"

    서아영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물러서 있는 마수들을 노려보았다.

    "그러려고 했어요!"

    그리고 그 순간, 먼지구름 속에서 NDF들이 뛰쳐나왔다.

    "다 쓸어버려!"

    되레 이쪽이 마수인 듯 기괴한 함성을 지르며 NDF들이 마수들을 향해 돌진했다.

    서아영 역시 그들의 선두에서 마수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죽엇!"

    그녀의 몸에서 불꽃이 화려하게 피어올랐다.

    * * *

    조병책이 입을 쩌억 벌렸다.

    서아영의 몸에서 피어난 불꽃은 그가 생각하는 능력자가 사용할 만한 불꽃이 아니었다.

    기껏해야 손에서 불덩어리를 날리는 정도로만 생각해 온 조병책에게 지금 보이는 광경은 말 그대로 충격과 공포였다. 불꽃이 산처럼 피어오른다.

    서아영의 몸에서 쭉 뻗어 나간 불꽃이 하늘로, 하늘로 끝없이 솟아올랐다.

    '날개?'

    아래쪽에서 뻗어 나온 불꽃이 백조의 그것처럼 거대한 날개의 형성으로 화한다.

    이 장면을 영화나 만화에서 보았다면 멋있다고 해줄 수 있었겠지만, 가까운 곳에서 그 모습을 직접 봐야 하는 조병책에게 그 광경은 공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사람이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능력자라는 존재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시대도 아니었다. 조병책만 해도 석 달에 가까운 시간 동안 능력자들과 함께 싸우지 않았던가.

    인간의 병기로는 결코 막을 수 없는 몬스터들을 저지해 내는 그들의 능력은 이미 충분할 정도로 알고 있었다.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 서아영이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능력자가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라며 단순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사람이 주변을 모두 뒤덮어 버릴 수 있는 정도의 불꽃을 내뿜을 수 있다면 능력자들은 지금처럼 거리를 돌아다닐 수 없을 것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격리당했겠지.

    순간적이나마 조병책이 몬스터들보다 서아영이 더 위험하다고 느낄 정도의 화력.

    지금 서아영은 그만한 화력을 태연하게 내뿜고 있었다.

    "신났네."

    최정훈이 그광경을 보며 평했다.

    "하기야 그럴 만도 하지."

    지옥 같은 시간이었다.

    말로는 다 형용할 수가 없는, 그런 시간이었다. 그들이 겪은 일을 다 늘어놓자면 대하소설이 한 편 나올 것이다. 그만큼 개고생을 하면서 실력을 늘렸는데, 마땅히 화풀이를 할 곳도 없던 것이 그들의 실정이다.

    그 와중에 뒷일 생각 안 하고 마구 갈길 수 있는 샌드백을 만났으니, 신을 내는 것도 이해 못할 일은 아니었다.

    "으으으으으! 이 개자식들아!"

    "어허이!"

    최정훈이 고개를 푹 숙였다.

    아니, 흥분하는 건 좋은데, 뒤에 듣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NDF 대표라는 사람이 저리 쌍욕을 크게 해버리면 이미지가 어떻게 되느냐, 이 말이다.

    "욕만 좀 안 했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이미 수많은 교정 시도가 무위로 돌아간 상황이 아니던가.

    예전에도 그 강렬한 성격으로 지랄 마녀라 불리던 서아영이다. 그런 이가 이번 훈련으로 악과 독을 한층 더 키웠으니, 이제는 말릴 수가 없었다.

    서아영이 내뿜은 불꽃이 마치 화염방사기처럼 괴물들을 향해 뿜어졌다. 거대한 화염방사기가 곤충들을 태워 버리듯이 하늘을 뒤덮을 듯 커다란 불꽃이 폭발적인 기세로 뽐어지면서 눈앞의 모든 것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카아아아아아아아!

    괴물들의 고함 소리가 사람들의 귀를 찢었다.

    비명 같기도 하고, 악다구니 같기도 한 그 괴성은 듣는 이들이 바로 귀를 틀어막아야 할 만큼 거대했고, 또한 끔찍했다.

    '비명이라니.'

    조병책은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지금 괴물들이 내지르는 고함은 분명 비명이었다. 그동안 수많은 폭격과 공습은 괜히 한 것은 아니었다. 분명 부족한 전력이지만 훌륭히 싸워왔다. 지금까지 죽인 괴물의 시체를 한곳으로 모은다면 한강을 도하할 수 있는 수준으로 쌓이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단 한 번도 괴물들이 저리 비명을 지르는 것을 들어본 적은 없었다. 괴성과 찢어지는 듯한 고함 소리를 내지르기는 하지만, 몸이 반쯤 날아가 버려도 묵묵히 전진하던 괴물들이 아닌가.

    그런데 비명이라니.

    조병책의 눈에 머리카락이 하늘로 솟구쳐 오른 모습으로 불꽃을 뿜어내고 있는 서아영의 모습이 보였다.

    "죽어! 죽어! 죽어!"

    "……."

    '저 여자랑은 절대 얽히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이 먼저 든다. 하기야 얼마나 성격이 나쁘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능력자이면서도 별명이 지랄 마녀일까.

    "아군이 적보다 더 무섭네."

    "오, 조심해야 돼요. 그런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닙니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조병책이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러자 생전 처음 보는 것 같은 미남자가 그를 보며 싱긋 웃고 있었다.

    "민간인이라 좀 봐주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엉덩이에 불붙는 꼴을 면할 것 같지는 않네요. 예전이면 그렇게까지는 안 하겠지만, 저 아줌마도 요즘 노처녀 히스테리가 장난이 아니라서요."

    "……."

    뭐라 대답해야 할까?

    하지만 사내, 김다현도 대답을 딱히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농담을 건네기는 하지만, 지금의 상황이 그리 녹록한 게 아니라는 것은 그도 알고 있었다.

    "뒤에서 노닥거린다고 욕 퍼먹겠지."

    한숨을 살짝 내쉰 김다현이 고개를 들며 눈을 빛냈다.

    서아영이 한쪽을 완전히 쓸어버리고 있기는 하지만 몬스터들의 수는 그들의 예상을 아득하게 뛰어넘을 만큼 많고, 서아영 혼자 감당할 수 있는 수가 아니었다.

    "혼자 감당하게 할 생각도 없지만 말이지."

    서아영도 그렇지만, 그 본인도 실은 어마어마하게 쌓여 있었다. 아니, 되레 쌓인 걸로 따지자면 서아영 이상일지도 모른다.

    "그 미친놈들 때문에 진짜."

    세상에 또라이는 이지혁과 서아영이 전부인 줄 알았는데, 그런 인간들이 천 명씩이나 있을 줄이야. 알파가 알파의 부하들은 지금까지 김다현이 가지고 있던 인간에 대한 신뢰를 송두리째 망가뜨렸다.

    "쯧."

    그렇다고는 해도 저 마수들의 손에 멸망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망하더라도 그들의 손으로 망하는 거지.

    김다현이 전력으로 앞으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뭐야, 저거? 언제 왔어?"

    뒤에 혹시 남아 있을지 모르는 몬스터들을 다 정리하고 오라는 지시를 해두었는데, 그새 도착한 김다현을 본 서아영이 눈을 찌푸렸다.

    하지만 딱히 뭔가 말을 하지는 않았다.

    김다현이 여기 있다는 것은 이미 모든 일을 다 완벽하게 정리했다는 뜻이다. 그럴 이가 아니었다면 서아영이 굳이 김다현을 콕 집어 일을 시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화염이 닿지 않는 몬스터들에게로 돌진하는 김다현을 보며 서아영이 목소리를 높였다.

    "뭐해! 다 쓸어버리라니까!"

    "라져!"

    NDF들이 호성을 지르며 몬스터들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 * *

    "…뭘 보고 있는 거야? 내가?"

    조병책의 다리가 후들거린다.

    NDF가 도착하는 것이 반격의 시작을 의미한다는 것쯤은 이곳의 모두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실제 그게 가능한가, 가능하지 않은가는 접어두고라도 다들 NDF만 돌아온다면 어떻게든 몬스터들을 막아낼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예상외였다.

    그들이 생각한 것은 막아내는 것이지, 이렇게 몰아붙이는 것이 아니었다. 석 달이나 되는 시간 동안 전선을 유지하면서도 몬스터들을 상대로 공격을 한다는 생각은 해보지도 못했다. 그만큼 전력 차는 압도적이니까.

    하지만 지금 NDF들은 몬스터들을 막아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공격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것도 그냥 공격하는 수준이 아니라 압도적으로 학살하고 있었다.

    "세상에."

    서아영의 불꽃에 스친 몬스터들이 들불 맞은 짚단처럼 타오른다. 저게 그냥 불이었다면 몬스터들의 피부에 옮겨붙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백린탄도 안 통했다고……."

    이미 생물이라는 것에 착안하여 백린탄으로도 공격을 해보았다. 옮겨붙은 불꽃이 모든 것을 태울 때까지 결코 꺼지지 않는다는 백린은 말 그대로의 위용을 발휘했다.

    예상한 그대로 백린은 몬스터들의 몸에 달라붙어 모든 연료를 소진할 때까지 타올랐지만, 몬스터들은 굳이 백린을 끄려고 하지도 않았다. 마치 찜질팩이라도 올린 듯이 느긋하게 불꽃이 꺼지는 것을 기다린다.

    그때, 자연에 존재하는 그 어떤 불로도 몬스터들을 태울 수는 없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그런데…….

    '그럼 저건 무슨 불꽃인데?'

    마치 피처럼 붉은 불꽃이 퍼져 나가며 몬스터들을 순식간에 통구이로 만들어 버린다. 한쪽 상자에 메뚜기들을 가득 담아서 그걸 토치로 지진다고 해도 이처럼 작렬하지는 않을 것이다.

    조병책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서아영뿐만이 아니다.

    다른 NDF들의 화력도 그들이 상상해 본 적 없는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공대지미사일로도 큰 피해를 주지 못한 몬스터들이 짚단처럼 쓰러져 가는 모습은 너무도 이질적이었다.

    '꿈인가?'

    현실이다.

    현실이겠지.

    물론 이게 현실이라는 것을 믿지 못할 정도로 혼란스럽지는 않았다. 그의 정신은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맑았다.

    하지만 그 맑은 정신으로조차 지금 그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할 정도로 지금 눈앞에 보이는 광경들은 충격적이었다.

    전세가 완벽하게 역전되었다.

    인간을 벌레처럼 잡아 찢던 몬스터들이 공포에 질려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성보다는 본능에 좌우되는 마수들이다 보니 자신보다 강한 존재의 힘을 느끼는 모양이다.

    "쯧."

    이지혁이 그 광경을 보며 혀를 찼다.

    "뭐가 마음에 안 드십니까?"

    "마음에 안 드는 건 아닌데……."

    이지혁이 살짝 말끝을 흐리다가 한숨을 쉬었다.

    "겨우 저딴 것들 때문이 죽어야 했던 사람들을 생각하니 영 기분이 좋지 않네요."

    "음."

    최정훈도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딴 것들이라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 말이야.'

    인류의 모든 과학기술과 정념을 모두 끌어모아서 겨우겨우 막아내던 마수들이다. 인류의 입장에서는 저들을 저딴 것들이라고 지칭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고개를 끄덕여야 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다.

    '마왕도 아니고 말이야.'

    예전의 그들이 이곳에 남아 있었다 해도 지금 이리 밀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저들의 뒤에서 지금도 호시탐탐 기회를 보고 있을 마왕들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고생을 해야 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최정훈이 살짝 이를 갈았다.

    "우측에 진형이 붕괴된다. 똑바로 막아. 이들이 퍼져 나가기 시작하면 재앙이 터진다."

    "라져."

    귀 바로 옆에서 대답이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최정훈은 가만히 전황을 바라보았다.

    "별 무리 없이 쓸어버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주변에 마왕의 기색이 있습니까?"

    "느껴지는 건 없는데… 뭐, 마왕이 본인을 숨기려고 한다면 나도 잡아내기는 힘들어요. 예전의 내가 아니라서."

    "그렇군요."

    최정훈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지혁이 씨익 웃었다.

    "어쨌든 가르쳐 놓은 보람은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요."

    "보람이 있어야죠."

    그 지옥을 겪었는데 말이다.

    오죽하면 함께 훈련을 받으며 정을 나눈 동료들이 이지혁이랑 같은 곳으로는 죽어도 가기 싫다고 한국으로 단 한 명도 지원을 오지 않았겠는가.

    물론 자국의 일이 가장 바쁘겠지만, 그래도 이곳이 최중요 전선인데 몇몇쯤은 도와줄 줄 알았건만…….

    나름 내부적으로 이곳의 중요도 때문에 지원병을 보내려고 했는데, 모두가 지원 가는 것을 거부했다는 흉흉한 소문마저 돌고 있었다.

    최정훈이 덤프트럭에 치인 개구리처럼 튀어 오르는 몬스터들의 모습에 희희낙락하는 이지혁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렇게 좋으십니까?"

    "이 정도만 해주면 앞으로 내가 손쓸 일이 없겠네요."

    "아쉽지만 벌써 손쓸 일이 생긴 것 같은데요?"

    최정훈의 말에 이지혁이 고개를 들었다.

    * * *

    "뭐라고 했나, 지금?"

    윤영민의 목소리는 격하기 그지없었다. 송정수조차도 이렇게 언성을 높이는 윤영민을 보는 것은 처음일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윤영민을 비난하고 싶지는 않았다. 송정수 역시 할 수만 있다면 웃통을 벗어 던지고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었으니까.

    "이, 이지혁 씨가 도착했습니다! NDF가 도착했습니다!"

    "확실한가?"

    "네. 현재 뚫린 방어선을 통해 후방으로 유입된 몬스터들을 처리하고 전방으로 올라갔습니다."

    "으하하하하하!"

    윤영민은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이 친구는 항상 등장하는 타이밍이 기가 막히다니까!"

    "못된 버릇이죠. 못된 버릇!"

    송정수가 이를 뿌득뿌득 갈았다.

    하루만 일찍 도착했어도 이렇게까지 가슴을 졸일 일은 없었을 텐데, 이 망할 놈은 항상 도착을 해도 이런 상황에 도착을 한다니까.

    "NDF들도 모두 왔나?"

    "그런 것 같습니다."

    "탈락 인원은 없고?"

    "수까지는 확인해 보지 못했습니다. 지금까지 들어온 정보는 이지혁들이 전방에 도착해서 몬스터들을 때려잡고 있다는 것뿐입니다."

    "정보 수집해! 빨리 그쪽으로 비전 준비하고."

    "예, 알겠습니다."

    송정수가 주먹을 꽉 쥐었다.

    '됐어!'

    이지혁이 도착하지 못한다면 결과가 빤하겠지만, 이지혁이 온 이상 지금까지의 모든 계획과 작전은 깔끔하게 폐기할 수 있다. 고생고생해서 만들어놓은 모든 방어 체계가 무용지물로 돌아가는 것이지만, 송정수는 이 상황을 더없이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전황은?"

    "한강을 넘어온 몬스터들은 몰살. 지금은 도강하여 밀어붙이고 있다고 합니다."

    "허허, 참."

    송정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막아내는 것만으로도 대한민국의 모든 전력을 사용해야만 했던 몬스터들이다. 그러고도 결국에는 막아내지 못했다.

    미국과 중국, 일본의 힘까지 끌어다 썼음에도 결국은 밀려 버린 전선이 단 서른 명 남짓한 NDF들이 돌아온 것만으로 공세로 전환하고 있는 것이다.

    '새삼 느끼겠군.'

    이지혁이 있던 시기에 자신들이 그에게 얼마나 의지하고 있었는지 알 것 같다. 이지혁이 없었더라면 국가 비상사태가 몇 번은 터졌을 것이다.

    "망할 친구 같으니."

    "이제 됐습니다."

    이지혁이 돌아왔다고 해서 모든 일이 해결된 것은 아니지만, 윤영민과 송정수는 극한으로 몰렸던 뇌가 순간적으로 여유를 되찾는 것이 느껴졌다.

    극단적으로 좁아졌던 시야가 제자리를 찾고 있었다.

    "이제 반격의 시작이겠죠."

    "이지혁 씨의 성향으로 보건대, 일단 몬스터들을 전부 곤죽으로 만들어놓기 전에는 제대로 된 연락이 오지 않을 겁니다. 일단 우리는 뒤쪽의 혼란을 수습하고 전방의 부상자들을……."

    "저… 대통령님."

    "무슨 일인가! 지금 회의 중인 것 안 보이는가?"

    "전화 왔습니다."

    윤영민이 빠득, 이를 갈았다.

    전화라니.

    물론 이해는 한다. 조금 전까지 최전방이 뚫린 상황이었다. 그 소문이 뒤로도 쫙 퍼졌을 테니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정말 마지막을 준비해야 하는지 궁금해하는 가족들이 전화를 걸어올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받을 때가 아니었다.

    "나중에 내가 따로 전화한다고 하게."

    "그, 그게……."

    "내가 하는 말 못 들었는가? 따로 전화한다고 하라지 않는가. 지금 내가 전화나 받고 있을 때가 아니란 것 모르겠나?"

    "대통령님."

    우물쭈물하는 비서를 보며 윤영민이 한소리 더 하려는 순간, 송정수가 손을 살짝 들어 윤영민을 만류하고는 비서에게 물었다.

    "전화를 걸어온 사람이 누군가?"

    "그, 그게… 이지혁 씨입니다."

    "전화 연결해! 당장!"

    "네!"

    윤영민이 멍한 얼굴이 되었다.

    "전화?"

    전방에서 한참 싸우고 있을 이지혁이 웬 전화라는 말인가.

    의문은 짧았다. 곧바로 전화가 연결이 되었기 때문이다. 연결되었다는 말을 듣자마자 윤영민이 외치듯이 말했다.

    "이지혁 씨?"

    [누구예요.]

    "저 윤영민입니다. 대통령이요."

    [이 번호가 아니었나?]

    건너편에서 이지혁과 최정훈이 쿵닥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대로 연결한 거 맞으니 그냥 말을 하면 된다는 최정훈의 말에 이지혁이 투덜대고 있었다.

    이 급박한 상황에 이게 무슨 짓이냐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저 콩트 같은 상황마저도 반갑기만 했다.

    [지금 전방인데요.]

    "예! 말씀하십시오."

    [폭격 왜 안 해요?]

    "네?"

    [아까부터 폭격이 끊기던데, 화약 아껴요?]

    "아, 그런 거 아닙니다. 뒤섞여 있는 관계로 공격을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상관없으니까 때려 박으라고 해요. 저만큼 뭉텅뭉텅 모여 있는데 얼마나 때리기 좋아요.]

    "알겠습니다."

    윤영민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시선이 향하자마자 국방부 장관이 바로 전화를 들었다.

    "폭격은 다시 시작될 겁니다. 전방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따로 보고 안 받아요?]

    "상황이 상황인지라……."

    [별문제 없어요. 몬스터들이야 뭐 금방 정리할 건데, 마왕들이 언제 나서는지가 문제죠.]

    "한동안 마왕들이 나선 적은 없습니다."

    [저 앞에 세 놈 있는데?]

    "네?"

    [저 앞에 세 놈이 있다구요.]

    "아……."

    윤영민은 할 말을 잃었다. 이지혁이 돌아온 것은 좋은 일이지만, 생각해 보면 이지혁은 저들에게도 위험인물이다. 미국에서 말한 대로라면 저들은 이곳에서 이지혁을 유일한 위협으로 취급한다고 했다.

    그러니 저쪽에서도 마왕급이 나오는 것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럼 지금?"

    [저기에 있기는 한데. 아직 뭐 움직이지는 않아서 그냥 냅 두고 있어요.]

    "아, 그럼 지금 몬스터들을 상대하는 와중에 전화를 하시는 겁니까?"

    여유 보소.

    [아뇨. 저는 노는데요.]

    "네?"

    [논다구요.]

    너무도 당당한 그 발언에 윤영민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다른 사람들은요?"

    [열심히 싸우고 있네요.]

    "이지혁 씨는요?"

    [노는데요?]

    "아……."

    윤영민의 눈가가 꿈틀꿈틀하기 시작했다.

    '아, 원래 이런 놈이었지.'

    이지혁을 너무 간절히 원하다 보니 뇌에서 보정 작용이 일어난 것 같았다. 헤어진 첫사랑을 너무 그리워하다 보면 뇌 속에서 첫사랑의 모습이 본래와 다르게 미인으로 변화하듯이 말이다.

    머릿속에서 그래도 나라와 인류를 위해서 피 흘리며 싸우던 전사라는 이미지가 살짝 박혔는데, 통화를 시작한 지 1분 만에 그 모든 이미지가 날아가고 사람 속을 뒤집어놓던 이지혁의 모습이 다시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그, 그래도 괜찮습니까?"

    [고생 엄청 많이 하셨나 봐요. 상황 판단이 안 되시네. 괜찮으니 내가 이러고 있지, 안 괜찮으면 이러고 있겠어요?]

    건너편에서 '그래도 그렇지, 대통령님께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부터 시작해서 온갖 말이 다 쏟아지고 있었다.

    윤영민은 가만히 눈을 감고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었다.

    [대통령이 뭐 별거라고!]

    [그래도 국가의 원수 아닙니까?]

    [원수? 그거 나쁜 거 아니에요?]

    [야, 이 무식한 인간아! 한국에서 제일 높은 사람이라고!]

    [나는 한국 안 살아도 되는데?]

    [그래도 연장자 아닙니까! 연장자!]

    [헐? 이 동네에서 나보다 오래 산 생물이 없을 텐데, 연장자는 무슨 얼어 죽을 연장자여! 내가 이천 살이 넘었어!]

    [죄송합니다, 영감님.]

    둘이 투닥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윤영민의 입에서 숨길 수 없는 한숨이 새어 나오고 말았다.

    '괜찮을까?'

    정말 이런 인간들에게 인류의 미래를 맡겨도 되는 건가?

    소설 같은 거 보면 인류의 미래를 등에 짊어진 이들은 진중한 영웅이던데, 왜 현실에서는 이런 잡것들이 인류의 미래를 등에 지고 있다는 말인가.

    신이 있다면, 이건 신이 잘못된 것이다.

    [어디까지 이야기했죠?]

    "아, 폭격이요."

    물론 거기가 아니지만, 윤영민은 쓸데없는 이야기로 시간을 낭비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시간이 오래 걸려요. 가용한 화력은 이쪽에 다 때려 박아주세요.

    "아무리 여러분이 강해졌다고는 하나 폭격에서 무사하기는 힘들 겁니다."

    [그건 이쪽에서 알아서 할 테니까, 로테이션 돌리려고 하지 말고 가용한 병력 모두 동원해서 초토화시킨다는 느낌으로 공격하세요.]

    "옆에서 국방부 장관이 듣고 있으니 곧 조치될 것입니다."

    [네. 뭐, 수고하세요.]

    "아! 잠시만요! 잠시만요, 이지혁 씨!"

    [네?]

    "상황은 어떻습니까! 오늘부로 전방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겁니까?"

    [위협?]

    코웃음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런 것들을 위협이라고 하는 것도 웃긴 거죠. 폭격을 해달라는 건 괜히 여기서 힘 다 뺐다가 마왕들이 습격이라도 하면 귀찮아지니까 그런 거지, 폭격 같은 거 없어도 해결은 할 수 있어요.]

    "그럼 뒤를 대비해도 괜찮겠습니까?"

    [오늘 내로 한반도에 마수들 씨를 말려 드릴 테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뒷일이나 잘 처리하세요.]

    "예. 그리고 가족분들에게도 이지혁 씨가 돌아왔다고 말을 전해두겠습니다."

    [네, 그러세요.]

    그 순간, 비전이 켜졌다.

    전화를 끊으려던 윤영민이 고개를 들어 비전을 보았다.

    "……."

    화면에는 어디서 구해왔는지 야전침대 위에서 담배를 입에 물고 콜라에 빨대를 꽂아놓은 채로 드러누워 전화를 하고 있는 이지혁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콜라 맛있으신가요?"

    [네? 아, 보고 계시는구나. 크, 이계 생활을 하면 이게 문제라니까. 다른 차원을 정복해서 콜라 공장을 세우든 해야지, 어디만 가면 콜라도 없고, 햄버거도 없고, 맛있는 음식도…….]

    "네, 알겠습니다."

    인류의 구원자를 상대로 불경하게 말을 잘라 버린 윤영민이 대충 말을 마무리하고는 전화를 뚝 끊었다.

    화면 속에서 이지혁이 전화를 몇 번 두드리더니, 다시 드러누워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보였다.

    "괜찮을까?"

    이래도 괜찮은 건가.

    저 인간을 눈 빠지게 기다려 온 시간이 모조리 부정되어 버리는 것 같은 느낌에 윤영민은 가슴이 아파왔다.

    '어쩌다가 저 양반이…….'

    이지혁은 뭐라고 해야 할까.

    난 자리가 너무 티가 나서 없으면 한없이 그리운데, 막상 보기 시작하면 속이 터져서 차라리 그냥 없을 때가 나았다 싶은 사람이었다.

    쉽게 말하면, 이렇든 저렇든 짜증이 나는 상대라는 뜻이다.

    "좋군요."

    송정수의 말에 윤영민이 힘없이 대꾸했다.

    "돌아와서 좋기는 한데, 왜 이리 속이 타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래도 적응기가 필요한 듯싶습니다."

    "적응기라……."

    송정수가 낄낄 웃었다.

    "물론 이지혁이 오자마자 듬직한 모습을 보여준다면 그것도 좋겠지만, 저는 저 모습이 좀 더 믿음직한 듯싶습니다만?"

    "…피곤하시군요. 좀 쉬시는 게……."

    "그게 아니라 이지혁이 굳이 나설 필요가 없는 상황이라는 겁니다. 전장의 한가운데서 콜라나 빨고 있으면 될 정도로 유리한 상황이라는 뜻이죠."

    "예? 그게 그렇게 됩니까?"

    "그만큼이나 NDF들을 확실히 단련시켜 돌아온 것이겠지요. 저것 보십시오. 지금 이지혁은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은데 전선을 밀어 올리고 있지 않습니까."

    송정수의 말에 새삼 무언가를 깨달은 윤영민이 고개를 급히 돌랴 다시 비전을 바라보았다.

    "화면 돌려봐요! 앞쪽으로! 어서!"

    * * *

    비전이 급격하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비전이 채 고정되기도 전에 화면 안에서 이지혁이 사라졌다는 것만으로도 윤영민은 마음이 안정되는 것을 느꼈다.

    '이것도 병인데…….'

    이지혁을 그렇게 느끼는 윤영민이 잘못된 건지, 아니면 윤영민이 그렇게까지 느끼도록 만든 이지혁이 잘못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둘 중 하나는 잘못되어 있었다.

    그리고 화면이 앞쪽을 가리키자 윤영민의 입이 쩌억 벌어졌다.

    "카아아아아아아아!"

    몬스터가 지르는 괴성이 아니었다.

    이건 서아영이 지르는 괴성이었다. 서아영은 이제 시집갈 미련 따위는 완전히 버렸다는 듯이 발악을 하면서 불꽃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냥 보고 있는 것만으로 전신에서 땀이 주르륵주르륵 흘러내리는 불꽃을 말이다.

    예전의 서아영도 보고 있으면 이불이 필요 없을 정도로 불을 뿜어내기는 했다.

    하지만 지금 서아영은 뭐라고 해야 할까, 불꽃계열의 능력자라기보다는 인간 방화범 같았다.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불꽃이 급격하게 그 세를 불려 이내 집채만 해지고, 그 집채만 한 불꽃이 이내 십여 층 건물을 뒤덮을 만큼 거대해진다.

    그리고 그, 도무지 생물에게는 쏴서는 안 될 것 같은 불꽃이 마수들을 뒤덮고 있었다.

    그동안 전방에서 마수들에게 죽어 나간 사람이 얼마던가.

    마수라고 하면 생으로 찢어서도 맛있게 먹어줄 수 있을 것 같은 윤영민조차 순간적으로 저 불꽃에 휘말리는 마수들이 불쌍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소리는 지르고 있지만 다행히 입에서 불을 뿜지는 않는 게 위안이라면 위안이랄까.

    한데 서아영뿐만이 아니었다!

    콰아아아앙!

    콰아아아아아앙!

    불꽃이 뒤덮고 있는 좌측에서는 순간순간 강렬한 굉음이 터지고 있고, 굉음이 터질 때마다 몬스터들이 피 곤죽이 되어 뒤로 쏘아지고 있었다.

    그 굉음의 주인공은 바로 스핏 파이어 윤혁규였다.

    "…와, 씨, 진짜… 이거, 같이 싸우기 짜증 나네."

    다른 전장이었다면 그가 가장 눈에 띄었을 것이다. 그의 손이 일으키는 폭발은 반칙 수준이었으니까.

    이지혁이 가르쳐 준 익스플로전 마법과 자신의 능력을 조합해내는 데 성공한 윤혁규는 걸어 다니는 폭탄마로 전직하는 데 성공했다.

    그 폭발은 남녀노소, 인간과 몬스터를 가리지 않았다. 지금도 그랬다.

    가볍게 맺은 인을 중심으로 마나가 물려든다. 그리고 그 몰려든 마나에 그의 에테르가 밀려 올라가며 순식간에 거대한 충격력이 발생한다.

    콰아아아아아아앙!

    그의 앞쪽을 막고 있던 몬스터 몇 마리가 폭발에 휘말리며 마치 삽으로 쳐 날린 개구리처럼 뒤로 튕겨 날아갔다. 그리고 그 몬스터들을 미처 피해내지 못한 다른 몬스터들도 튕겨 나간 몬스터들과 부딪치며 순식간에 아수라장을 만들어냈다.

    '이 정도면 참 잘하고 있는 건데…….'

    하지만 옆에서 인간 불꽃쇼를 행하고 있는 서아영에 비한다면 아무래도 손색이 있었다.

    능력적 손색이야 그리 크지 않다고 해도 보이는 것의 차이는 너무도 컸다. 이걸 다른 사람들이 본다면 윤혁규는 서아영의 사이드 메뉴 정도로 보일 것이다.

    함께 싸우는 능력자가 이렇게 든든한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무척이나 환영할 만한 바이지만, 윤혁규는 뭔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진한 아쉬움을 느꼈다.

    '컨셉이라도 좀 달랐으면…….'

    저기 봐라.

    건너편에서 벼락을 뿜어내고 있는 루드라 같은 경우에는 강하고 약하고를 떠나서 능력을 사용하는 모습이 확실하게 눈에 띄지 않는가.

    저리 파직파직거리며 공격을 해 대니, 눈이 가지 않으려야 가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원래 수수한 영웅은 인기가 없는 법이고, 윤혁규는 아무래도 능력의 볼거리가 부족했다.

    '아주 난리도 아니네.'

    그러고 보니 커다란 불꽃을 중심으로 벼락이 떨어지고, 눈보라가 몰아치고, 몬스터들이 사방으로 튕겨 나가지를 않나, 거대한 폭발도 터진다.

    앞에서 싸울 때는 몰랐는데, 잠시 한 발 물러나 보니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 * *

    "개판이군."

    송정수가 혀를 찼다.

    "하지만 확실히 효과가 있습니다."

    "효과가 있는 정도가 아니라 학살을 하고 있군요."

    송정수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는 이지혁이 이들에게 뭔가 새로운 것을 가르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여지없이 빗나갔다. 이지혁은 이들에게 새로운 것을 가르친 게 아니라 가진 능력을 강화하는 법을 가르친 것이다.

    불꽃 마녀라 불리던 서아영은 자신의 화염을 한층 더 키워서 돌아왔고, 다른 이들의 능력도 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해졌다는 것이 눈으로 보일 정도였다.

    예전의 NDF라면 이만한 몬스터들을 이지혁 없이 막아낼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NDF들은 이지혁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음에도 몬스터들을 밀어내다 못해 아주 씨를 말리고 있었다.

    한 폭의 지옥도를 보는 것 같은 광경의 비전 바로 아래 작은 모니터에 이지혁의 모습이 나타났다.

    "끄으응."

    어디서 구한 것인지, 선글라스까지 끼고 콜라를 쪽쪽 빨아 먹는 이지혁의 모습을 보니 신음이 절로 나왔다.

    '뭔가 잘 돌아가고 있으니 할 말도 없고.'

    물론 쉬고 싶은 심정이야 이해한다.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 배워야 하는 이천 명과 그 이천 명을 모조리 가르쳐야 하는 이가 있다고 할 때, 누가 더 고생을 했을지는 자명한 일이다.

    이곳에서는 3개월의 시간이지만, 차원 너머에서는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흘렀을 테니, 그동안 누리지 못한 휴식을 누리고 싶은 마음이야 얼마든지 이해한다.

    반백수와 공직을 오가는 정치인인 송정수는 쉴 때 쉬지 못한다는 게 얼마나 사람을 힘들게 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다만!

    거, 어차피 고생한 김에 조금만 더 고생하고 남들 쉴 때 같이 쉬면 얼마나 모양이 나오겠는가.

    정 손을 쓰기 싫으면 뒤쪽에서 뒷짐 지고 서 있어도 뭐라고 할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다. 되레 제시간에 도착해 줘서 고마워하면 고마워했지!

    그런데 그 잠깐을 못 참아서 어디서 야전 침대까지 공수해 와 드러누워 뒹굴대고 있으니, 사람이 열이 받는 것이다.

    남들을 앞에서 목숨 걸고 싸우고 있는데 무슨 해변에 선탠하러 온 사람마냥 드러누워 있으니… 어찌 보기가 좋냐, 이 말이다.

    "끄응, 저 인간이 끝까지……."

    "…비치 체어를 안 가져온 게 어딥니까. 그나마 야전 침대로 만족해 주고 있다는 것을 다행이라 여깁시다."

    "끄으으응."

    송정수가 가슴을 쳤다.

    지금까지 해낸 것이나 눈앞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에 비하면 저런 모습은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할 것이다. 문제는 이지혁은 그 작은 부분으로 지켜보는 이의 가슴을 아주 박살을 내놓는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지금도 그렇다.

    콜라를 처먹으려면 그냥 처먹으면 되지, 그걸 굳이 유리컵에 따라서 하트 모양 빨대로 쪽쪽 팔아 처먹을 필요까지는 없지 않은가.

    거기에 선글라스까지 있으니, 이건 전장에서 콜라를 퍼먹는 것인지, 아니면 몰디브에서 모히또를 처먹는 것인지 구분이 안 갈 지경이었다.

    "힘들었겠지요."

    "훈훈하게 몰아가려는 생각 하지 마십시오! 누군 안 힘들었답니까! 힘들었다고 저러는 놈이 어딨습니까!"

    "…거, 포장 좀 하자니까."

    "포장이 되어야 포장을 하죠! 애초에 불량품인데, 포장 잘한다고 불량품이 우량품이 됩니까!"

    송정수가 씩씩거리기 시작했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에 저곳으로 뛰어가서 앞에 싸우는 동료들이 보이지 않느냐고 일갈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송정수의 근육들이 금방이라도 터져 나갈 듯 약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그랬다가는 폭포처럼 쏟아지는 이지혁의 반격에 제대로 말 한마디 해보지 못하고 심장마비에 걸릴 만큼 쇼크를 먹게 될 것이다.

    "조금만! 조금만 더 진중했더라도! 인류를 구한 영웅 대접을 받을 텐데!"

    "…본인이 딱히 그런 대접을 원치 않는 것 같은데 어쩌겠습니까."

    윤영민이 웃고 말았다.

    '그것도 어찌 보면 대단한 일이지.'

    대통령의 자리에 올라본 윤영민은 알 수 있다. 사람들의 시선을 모은다는 것은 은근한 쾌감과 막대한 부담을 동반하는 것이다.

    그 역시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는 언행에 거침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대통령의 자리에 오르고부터는 말 한마디, 한마디를 조심하게 되었다.

    그의 말이 기록으로 남고, 그 한마디가 사람들의 평가에 오르내리게 된다는 것을 알면 인간은 그리 쉽게 자기 본연의 모습을 내보일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이지혁은 대한민국의 대통령이라는 자리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실질적인 위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담이라는 게 전혀 없다는 듯이 행동하고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아무리 힘들더라도 전 세계의 이목과 역사적 이목이 집중될 것이 빤한 이런 상황에서는 나름 근엄한 모습을 보이려 애쓸 텐데도 말이다.

    '대단하다고 할 수밖에.'

    그 방향이 옳고 그름을 떠나서 일단 저런 자세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지혁을 대단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타인의 시선 따위는 정말 눈꼽만큼도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니까.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잘된 일인데 말이지.'

    송정수가 말했듯이 이지혁이 저러고 있다는 것은 굳이 그가 나설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윤영민은 그것에 납득한 반면, 처음 그 말을 꺼내며 여유롭던 송정수는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결국 이지혁의 페이스에 말려들어가 욕지기를 내뱉고 있었다.

    '그러니 차라리 다행이라고…….'

    그 순간이었다.

    "접근합니다."

    "응?"

    "레이더 측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뭔가 레이더에 잡히고 있습니다. 크기는 거대합니다. 전투기 이상. 현재 전선을 향해서 빠르게 이동하고 있습니다."

    "비행체인가?"

    "그렇습니다. 비행체입니다. 하나가 아닙니다!"

    송정수와 윤영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좋게 생각하면 마수들 중 비행체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그건 아닌 듯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전선을 향해서 빠르게 이동할 존재를 꼽으라면 하나뿐이었다.

    "비전! 비전으로 잡을 수 있나?"

    "시도해 보겠습니다."

    중앙의 화면이 전환되고, 하늘 높은 곳에서 찍은 광경이 나타났다.

    "저건가? 줌인 가능한가?"

    화면이 앞쪽으로 쭈욱 당겨지며 비행하고 있는 존재의 모습이 드러났다.

    "큭."

    박쥐와 뱀을 반쯤 섞어놓은 듯 그로테스크한 생물의 모습이 윤영민의 눈에 틀어박혔다. 전체적인 생김새는 박쥐에 가깝지만, 가까이 보면 볼수록 인간의 형태가 보였다.

    "…마왕."

    마수들과는 확연하게 구분되는 형태였다. 그동안 숨죽이듯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마왕들이 하나씩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처음으로 모습을 보인 마왕이 지금 NDF들을 향해 광속으로 날아들고 있었다.

    "이지혁은!"

    그들이 레이더로 잡아낸 상황이라면 이지혁도 당연히 느꼈을 것이다.

    고개를 들어 화면을 확인한 윤영민의 다리에 힘이 풀렸다.

    이지혁의 고개는 분명 마왕이 날아오는 쪽을 향해 돌아가 있었다. 하지만 그의 몸은 전혀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꼬아진 다리를 까딱거리며 콜라를 내린 이지혁이 비장한 어조로 소리치는 것이 보였다.

    "커피! 커피 가져와요!"

    "에라이! 미친놈아!"

    참지 못한 송정수가 지휘봉을 화면으로 집어 던졌다.

    * * *

    "빌어먹을 놈들, 빨리도 왔군!"

    입으로는 욕을 내뱉고 있지만, 크리스토퍼의 얼굴에 몇 달 만에 여유라는 것이 생겨나고 있었다.

    "밀어냅니다! 아니, 학살합니다!"

    "좋아!"

    크리스토퍼가 주먹을 불끈 쥐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M-3가 전파되어 이제 더 이상 마수들에 대한 저지력을 잃은 상황이었다. 가용한 모든 병력을 워싱턴 앞에 모아서 처리하고 있지만, 한계가 극명했다.

    이제 정말 끝인가 포기하려는 타이밍에 저놈들이 나타난 것이다.

    "타이밍하고는!"

    이지혁과 몇 달 함께 어울리더니, 못된 것만 배워서 온 모양이었다.

    정말 상황이 극한으로 몰려서 이제 더는 안 될 것 같은 상황에 등장하는 것은 이지혁의 특기였다.

    그에 대해 혹자는 이지혁이 영웅의 자질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지만, 그가 보기에는 그냥 게을러 터진 것뿐이었다.

    시간을 질질 끈 덕분에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 일이 허다하지 않았던가.

    신속 정확을 모토로 삼아 폭주하는 피자 배달 오토바이처럼 상황을 해결하는 미국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대응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저 새끼들은 또 왜 저래?"

    이지혁에게 교육을 받으러 간 인원 중에는 미국 정부에서 파견한 정예 요원들도 있었다. 능력과 애국심을 기준으로 최상의 요원들을 선발했다.

    전력이 극도로 낮아질 것을 감안하고 천 명에 달하는 인원들을 배치했다. 크리스토퍼는 그들이 알파의 부하들 이상으로 성장해서 돌아올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애새끼들 하는 짓이 왜 저러냐고."

    미국의 정예는 말 그대로 정예였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대부분이 사관학교에 준하는 교육을 받아 절도가 남달랐다. 임무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걸 수 있는 이들이 대부분이고, 타인에게 모범이 되는 자세를 고수하도록 교육받았다.

    그런데…….

    "으아아아아! 씨발, 내가 니놈들 때문에!"

    "다 죽여! 이 개같은 것들!"

    악을 쓰며 몬스터들을 찢어발기는 대원들에게서 타의 모범이 되는, 절도있는 자세 같은 것은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가 없었다. 되레 옆쪽에서 얌전히 몬스터들을 썰어 대고 있는 알파의 부하들이 더 인간적으로 보일 지경이다.

    '뭐, 뭔 일을 당한 거야?'

    말 그대로 울분이 차올라 있는 것이 눈에 여실히 보이고 있었다. 어디에선가 받은 스트레스를 몬스터들에게 모두 쏟아붓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스트레스의 근원이 무엇인지는 생각할 필요도 없겠지만.

    "와, 상상 이상이더라고."

    크리스토퍼가 고개를 돌렸다. 잠시 못 본 사이에 몇 년은 팍 늙은 듯한 얼굴이 되어 있는 알파가 소파에 앉아 한숨을 쉬고 있었다.

    "돌아왔군."

    "그래. 무사히 말이야, 무사히."

    알파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빌어먹을. 크리스토퍼, 네 돼지처럼 살찐 얼굴이 이토록이나 반가울 줄이야. 다시 못 돌아올 수도 있다는 생각만 한 삼만 팔천 번은 한 것 같아."

    "…여하튼 환영한다."

    "그래, 환영해야지. 말로만 하지 말고 담배 한 대 주지? 급하게 오느라고 편의점도 못 들렀다고."

    크리스토퍼는 품 안에든 궐련을 알파에게 집어 던졌다. 알파가 말없이 담배를 받아 들고는 손가락을 비틀어 불을 붙였다.

    "휴, 이제 좀 살 것 같네. 강제 금연은 사람이 할 짓이 아니야. 빌어먹을, 지는 피우면서 좀 나눠 주면 덧나나."

    저 항상 능글능글하던 알파마저도 악담을 퍼부을 정도로 훈련이 가혹했던 모양이다.

    "이제 완전히 돌아온 건가?"

    "아마도 그럴 거야. 급한 불만 끄고 다시 돌아가야 한다면 전원이 탈주할 테니, 다시 돌아가지는 못하겠지. 빌어먹을."

    알파가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몸을 숙였다.

    "이봐, 진정해."

    "빌어먹을, 크리스토퍼. '진정해라'가 아니야. 나는 지금 파티라도 열고 싶은 심정이라고. 니가 나한테 저지른 그 모든 일들을 이제는 다 용서해 줄 수 있을 것 같아. 실험소에서 너희가 내게 한 일들은 아무것도 아니었어. 이제 그 정도는 크리스마스 캐롤을 부르면서 받아줄 수 있다고. 제기랄, 이계로 넘어간 지 삼 일 만에 거기가 천국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지, 진정해, 알파."

    참으로 놀라운 일이지만, 크리스토퍼는 생전 처음으로 알파에 대해 연민을 느끼게 되었다. 하나하나 말을 내뱉는 알파의 표정이 너무도 리얼해서 굳이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듣지 않아도 알파가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알 것 같았다.

    "그 새끼는 악마야. 진짜 악마라고."

    "…이봐."

    "저기 건너편에서 폼 잡고 있는 마수들이나 마왕들은 그 새끼에 비하면 진짜 인간적인 거야. 차라리 저쪽이랑은 대화가 통할 것 같다고. 내가 여기서 이러느니, 차라리 마왕들과 진솔한 대화를 시도해 보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고민을 몇 번이나 한 줄 알아?"

    "진정하라고. 내가 보기에 네게 지금 필요한 것은 담배가 아니라 정신과 의사 같은데. 밖에 대기하고 있으니 불러줄까?"

    "아니, 관두겠어. 상담을 받다 보면 의사가 미칠지도 모르니까. 큭, 보드카 한 병 원샷할 수 있으면 소원이 없겠군."

    알파가 비전을 보며 말했다.

    "네 자랑스러운 병사들도 아마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중일 거야."

    "그래서 그런지 다들 네 부하들과 비슷해져 버린 것 같군."

    "아냐. 이지혁에게 동화된 거지. 빌어먹을 스톡홀름 신드롬이라는 게 정말 있더라고."

    알파가 끔찍하다는 듯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확실하게 전력을 갖춰 왔겠지? 그 고생을 했다고 하니 결과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우는소리하지 말라고, 크리스토퍼. 세계 경찰의 위상은 어디다 팔아먹은 거야?"

    "파업하기 직전이니 좀 도와줘. 죽겠다고 정말."

    알파가 피식 웃었다.

    "생전 네가 그렇게 우는소리를 하는 것은 처음 보는 것 같군. 역시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쓸데없는 소리는 집어치우자고. 지금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너희의 전력이야. 몬스터들을 상대할 전력이야 당연히 갖춰 왔을 거고, 마왕들을 상대할 수 있나?"

    "마왕이라……."

    크리스토퍼가 소파에 등을 기대고는 한숨을 쉬었다.

    "칠십에 가까운 마왕 중에 이 세계로 넘어올 수 있는 마왕은 오십에 가깝다고 하더군. 이건 내가 그전에 그들과 접촉하면서 들은 정보와 일치해."

    "흐음."

    "그 오십을 동시에 상대해야 한다면 그냥 접시 물에 코 박고 죽어버리는 것이 낫겠지만, 그게 아니라 각개격파를 시도해 볼 수 있다면, 해볼 만은 할 것 같아."

    "그 정도인가?"

    크리스토퍼가 주먹을 꽉 움켜잡았다.

    말이 쉬워 각개격파지, 과거에는 미국의 전력을 동원하고 한국의 지원을 받아 이지혁을 전면에 내세워서야 한 마리씩 겨우 잡을 수 있던 것이 마왕이라는 존재였다.

    마왕 하나 때문에 세계가 멸망할 뻔한 일도 몇 번이나 벌어졌다. 그런데 그 마왕을 지금 보유하고 있는 전력만으로 상대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발전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건 이지혁도 못하던 일인데……."

    "정보가 느려. 마지막쯤에 이지혁은 마왕 정도는 동시에 열도 상대할 수 있었을 거야. 마나를 무한으로 사용할 수 있는 이지혁은 마왕 중에서도 최상위의 마왕이라고. 인간의 육체가 한계에 다다랐기에 더 이상은 마나를 사용하지 않는 것뿐이지."

    "으음……."

    "하지만 뭐, 그리 실망할 건 없어. 우리가 받은 훈련은 그 이지혁이 없어도 마왕을 상대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었으니까. 완벽하게 이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알파가 비전을 가리켰다.

    "보시다시피 몬스터 정도야 찜 쪄 먹을 수 있을 정도지."

    "과연."

    크리스토퍼는 빠른 계산을 하기 시작했다. 알파가 얼마나 힘들게 고생을 하고 돌아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나중에라도 얼마든지 위로해 줄 수 있었다.

    지금 그가 해야 할 것은 돌아온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파악하고,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었다.

    알파가 말한 정도의 전력이 확실하다면, 이 전력만으로도 반격을 준비할 수 있었다.

    '희망은 생겼군.'

    M-3는 공격력만큼은 능력자를 상회할지 모른다. 하지만 방어력이 형편없었다. 마왕이나 마수가 M-3를 직접 타격하려 든다면 막을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능력자들은 방어력이 균형 잡혀 있다. 이들을 전방으로 내세우고 M-3를 통해 뒤쪽을 타격할 수 있다면, 전세를 단번에 역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머리 굴러가는 소리가 들리는데?"

    "그게 내 일이니까."

    "쓸데없는 짓거리 하지 말라고, 크리스토퍼. 자네는 너무 옛날 사람이야."

    "무슨 뜻이지?"

    "지금도 전력과 전력의 맞부딪침으로 상황을 이해하고 있잖아. 그게 아니라니까. 이건 쉽게 말하자면, 서바이벌이야."

    "서바이벌?"

    "그래, 서바이벌. 자네가 아무리 좋은 상황을 만들어낸다고 하더라도 마지막에 하나의 마왕이 남는다면 자네가 준비한 모든 전력은 무용지물이 되어버리는 거지. 과학으로 마왕을 막을 수 있겠나?"

    크리스토퍼가 입을 다물었다.

    "그러니 쓸데없는 짓이라는 거야. 우리는 이해하고 있는 걸 왜 너는 이해 못하지? 마왕과 마수들을 한 덩어리로 묶어서 전력화시키지 마. 이건 쉽게 말하면, 해충 박멸 같은 거야. 우리는 살충제고 마왕은 바퀴벌레지. 살충제가 다 떨어질 때까지 마지막 한 마리를 처리하지 못하면 여기는 끝이야. 두 달만 지나도 바퀴벌레로 우글거리게 되겠지."

    알파가 눈을 빛냈다.

    "그러니 이제부터 너는 시키는 일만 잘하면 되는 거야. 지금 중요한 것은 저것들을 정리하는 게 아니라, 마왕들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족칠 수 있느냐거든."

    "나더러 네 명령을 들으라는 건가?"

    "…미친 소리 하고 있네."

    알파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나도 명령을 받아야 하는 입장인데, 네가 내 명령을 들을 일이 뭐가 있겠어. 명령을 내리실 분은 하나뿐이지. 지금은 남한에 계신 위대한 수령 동무 말이야."

    "납득은 가는군."

    크리스토퍼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현실이군.'

    그동안은 이들만 돌아온다면 어떻게든 반격을 할 수 있다는 희망 하나로 버텼다. 하지만 이제는 그 희망이 현실이 되어버렸다. 이제 어설프게 부풀려 버린 것들의 거품을 빼고, 이들을 어떻게 활용하여 이 위기를 탈출해 나갈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시점이었다.

    비전을 바라본 크리스토퍼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불꽃이 튀고, 뇌전이 튀고 있었다. 그가 생각한 것 이상의 전력이 돌아온 것만은 분명했다.

    "마법을 익힌 건가?"

    "이지혁이 생각하던 것과는 방향이 좀 다른 모양이지만, 어쨌든 마나를 활용하는 방법은 확실하게 익히고 왔지."

    "그렇군. 그럼 이제 마왕만 조지면 되는 거군."

    "그렇지."

    알파가 가만히 비전을 보며 말했다.

    "여기만 정리하고 한국으로 넘어간다."

    "한국?"

    "그렇지."

    "한국은 왜 간다는 거지? 그쪽 몬스터들을 정리하겠다는 건가?"

    알파가 눈살을 찌푸렸다.

    "크리스토퍼, 한때는 너도 빠릿빠릿한 머리를 가진 시절이 있었지. 그게 지금 나를 슬프게 하는군. 너는 너무 늙어버렸어."

    "그냥 대답만 해. 화 돋우지 말고."

    "거기에 킹이 있잖아, 이 멍청아."

    "음?"

    크리스토퍼가 미간을 좁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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