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96화 (96/118)
  • [■] 돌아오기만 하면 개판이야 [■]

    ─────

    "재사격 개시합니다!"

    일순 멈췄던 M-3의 포격이 다시 시작되었다.

    인공위성에서 내려다보는 비전이 순식간에 흙먼지로 뒤덮였다. M-3는 특성상 폭염이나 후폭풍이 그리 크지 않다. 탄두를 폭발시켜 될 수 있는 한 많은 지역을 살상 반경에 넣으려 하는 다른 탄두와는 달리, M-3는 '한 발에 한 놈만 잡아도 좋으니 잡을 수만 있게 해다오'라는 개발 목표를 가지고 만들어진 병기다.

    그 M-3의 포격으로 이만한 흙먼지가 피어오른다는 것이 지금 이곳에 얼마나 많은 포격이 쏟아지고 있는 것인가를 말해주고 있었다.

    "피격됩니다! 타격 완료!"

    부관의 목소리가 찢어지고 있었다.

    그 역시 흥분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수많은 절망을 함께해 온 그가 이성을 잃고 소리를 지를 만큼 지금 M-3가 만들어내고 있는 성과는 대단했다.

    재래식 병기로는 단 한 마리도 제대로 잡아낼 수 없던 마수들을 싸그리 쓸어버리는 수준인 것이다.

    현존하는 모든 M-3를 이곳에 배치하기도 했고, 저 한 발, 한 발이 웬만한 국가라면 허리가 휘청휘청거릴 정도로 돈을 처바른 물건이기는 하지만, 효과가 있다는 게 어딘가.

    M-3를 양산해 낸 결과로 미국이 망한다고 해도 마수들을 막아낼 수만 있다면, 충분히 남는 장사인 것이다.

    죽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지금도 재무부 장관이 보았다면 거품을 물고 쓰러질 만한 탄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빌어먹을, 이 상황에 돈이 무슨 상관이야.'

    돈도 살아남아야 의미가 있는 것이다. 돈을 뭉텅이로 쌓아놓고 있어도 지금은 딱히 쓸데가 없었다.

    결국에는 그런 지폐 쪼가리보다는 자원의 가치가 더 올라가는 시대가 아닌가.

    다행히 미국은 천연자원의 보고라 할 수 있고, 전시 징발을 통해 M-3를 생산해 낼 자원은 무한정 사용할 수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 효과는 강렬했다.

    2차 포격이 끝나고 흙먼지가 가셨다.

    "우오오오!"

    크리스토퍼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양팔을 들어 올렸다. 피 곤죽이 되어서 처음의 형체를 알아볼 수도 없는 마수들의 잔해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됐어!"

    "으아아아아아!"

    "성공! 성공! 빌어먹을! 져 엿 같은 놈들을 민치로 만들어 버렸다고! 으아!"

    작전실 안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이들이 광란하기 시작했다. 과하다 깊은 반응이지만, 그동안 딱히 사용할 수 있는 대처법 없이 물러나고 또 물러나기만 한 것을 감안한다면 이해할 수 있는 반응이기도 했다.

    몇 달이 넘는 시간 동안 일방적으로 얻어맞으며 어떻게 하면 효율적인 동선으로 좀 덜 얻어맞고 도망갈 수 있을까만 고민하던 이들이 처음으로 카운터펀치를 날린 것이다.

    추가적인 전투만 없다면 오늘 밤은 다들 맥주에 절어 침대를 토사물 범벅으로 만들어놓아도 이해해 줄 수 있는 상황이었다.

    "다들 진정해!"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아직 축배를 들기에는 너무 일렀다.

    아무리 기선을 제압하는 성과를 올렸다고는 하지만, 그들은 이제 겨우 일격에 성공한 것뿐이었다. 눈에 보이는 성과를 냉정하게 재단한다면, 미국 내에 존재하는 마수 군단의 1/10을 제압한 것에 불과했다.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것이지만.'

    단 두 번의 포격으로 그만한 마수들을 골로 보냈다는 것은 매우 혁혁한 전과였다.

    "재장전합니다!"

    '이게 아쉽지만.'

    한 발, 한 발의 포격에 강렬한 파괴력을 싣는 것이 목표인 탄이다. 그러므로 지금까지는 없던 개념의 탄이다.

    인마를 대상으로 한다면 좁은 공간에 이만한 충격력을 넣을 필요는 없었다. 이만한 충격력을 한 곳에 집중하느니, 차라리 폭발 반경을 넓히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었으니까.

    전차를 한 방에 날려 버릴 수 있는 탄을 못 만드는 게 아니다. 그렇게 되면 필수적으로 탄의 크기가 커지고, 이동형으로 만들기가 어려워진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헬기에서 발사하는 공대지미사일로 전차를 날려 버리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기 때문에 만들지 않은 것이다. 만들려고 할려면 못 만들 것도 없었다.

    그리고 바로 M-3가 '여건이고 뭐고 다 치우고 일단 마수를 날려 버릴 수 있는 탄을 만들어라'의 결과물이었다. 이동 능력은 0에 가까우며, 포탑을 보호할 방법은 전혀 없었다. 자주포라고 하기에도 우스운 수준이지만!

    '효과가 있으면 됐지.'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그만이라고, 효과가 있으면 그걸로 족했다. 무기 분류도 힘들고, 현대의 무기 체계에 역행하는 무기였지만, 그럼 뭐 어떤가.

    "재장전 시간 좀 줄이라고 해!"

    "탄이 너무 커서 쉽지 않습니다."

    유일한 단점은 탄이 너무 커서 실을 수 있는 수가 한정된다는 것이다. 뒤로 탄 탑재 전용 트럭에 줄줄이 실어놓기는 했지만, 아직 자동 재장전 시스템까지는 갖추지 못했다.

    인력으로 몇 백 킬로그램이 넘는 탄을 재장전하려다 보니, 생각처럼 빠른 장전이 힘들었다.

    나중에 M-3가 양산되어 뿜어져 나오기 시작하면 편대를 나누어 사격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의미가 없었다.

    "마수들의 움직임은?"

    "움직임이 없습니다! 일단은 멈춘 상태입니다."

    "언제 미쳐서 발악할지 모르니, 앞쪽 바리게이트 단단히 쌓으라고 해!"

    "예!"

    크리스토퍼의 눈이 빛났다.

    '할 수 있다!'

    이 순간 인류는 마수들에게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를 손에 넣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직 아니야.'

    그러나 안심할 때가 아니다. 이런 생각은 오늘의 전투를 완벽한 승리로 만든 이후에도 늦지 않았다.

    "우, 움직입니다! 마수들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방향은?"

    "정확하게 M-3를 향하고 있습니다. 가속합니다!"

    "큭."

    크리스토퍼가 주먹을 꽉 쥐었다.

    '생각처럼은 안 되지.'

    인간이라면 관측 장비 없이 탄이 날아온 방향을 알아채기는 힘들 것이다. 탄이 날아온다는 사실도 모르고 폭발에 휘말릴 테니까.

    하지만 마수들은 달랐다. 그들의 동체시력은 인간과는 비교를 불허할 정도였고, 사람이라면 포착하기도 힘든 속도로 날아오는 탄을 눈으로 보고 반응할 수 있는 것이다.

    "바리게이트! 쳐올려!"

    M-3의 사거리는 안타깝게도 겨우 30㎞ 정도.

    마수들이 전력으로 이동한다면 불과 10분 만에 도달할 수 있는 거리다.

    "재장전 끝나는 대로 처 갈기라고 해! 그리고 능력자 부대에 전해! 절대 뒤로 넘어가게 두면 안 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앞에서 막으라고 해!"

    "예!"

    크리스토퍼가 불안한 눈으로 비전을 바라보았다.

    '제발!'

    지금 여기서 인류의 운명이 갈리는 것이다.

    * * *

    크리스토퍼는 의자에 몸을 한껏 기댔다.

    나른해서가 아니라 더 이상은 몸을 지탱할 힘조차 없기 때문이다.

    "…23시 06분 현재."

    부관이 침을 한 번 삼키고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하지만 선명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적군… 전멸했습니다. 다시 알립니다. 적군 전멸했습니다."

    크리스토퍼는 웃을 힘도 없었다.

    작전 시간 내내 얼마나 힘을 뺐는지 몸이 액체가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전신의 뼈가 다 물렁해져 몸이 자꾸만 아래로 흘러내린다.

    "…이겼군."

    하지만 이 말만은 해야 했다.

    이겼다.

    크리스토퍼는 비전을 바라보며 웃고 말았다. 어둠에 둘러싸인 대지 아래로 붉고 푸른 피가 가득 흐르고 있었다. 적외선 모드로 변형되어 있는 옆 비전에서는 그 누구도 서 있지 못한 대지가 나오고 있었다.

    마침내…….

    마계가 침공한 이후로 처음으로 인류가 마수 군단에게 반격을 성공한 것이다.

    "피해는?"

    아직 웃을 수 없다고 생각한 크리스퍼의 물음에 부관이 얼굴을 굳혔다.

    "극심합니다."

    "정확하게."

    "동원된 능력자들의 40% 이상이 사망했습니다. 부상자를 포함한다면 전력의 절반 이상이 날아갔습니다."

    "…싸게 먹힌 건가."

    사망자에 비해 부상자가 극심하다 싶을 정도로 적은 것은, 마수들의 공격을 받고 부상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피해내 살아남든가, 몸으로 받고 죽든가였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10%의 부상자들은 운이 좋다고 해야 할 것이다. 죽지는 않았으니까.

    따지고 보면 절망적인 피해였다.

    능력자 전력의 절반 가까이가 날아갔다. 물론 미국의 전 능력자를 이곳에 동원한 것은 아니니 귀로 듣는 것처럼 큰 피해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크리스토퍼는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촛불은 켰다.'

    퍼스트 타입의 M-3만으로도 마수들을 상대할 수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그러니 이 피해는 감수할 수 있는 정도다.

    앞으로 M-3는 미국의 모든 역량을 바탕으로 생산되기 시작할 것이고, 화력이 올라가는 만큼 능력자들의 공백을 메꾸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M-3를 바탕으로 지금 개발되고 있는 신무기들이 추가된다면, 적어도 지상군과 마수들의 싸움에서만큼은 인류가 우위를 잡을 수 있다.

    지금 지리멸렬해 있는 다른 곳의 전장에 M-3를 공급할 수 있다면, 전 세계적인 인류의 반격이 시작될 것이다.

    "시간은 연장됐다."

    크리스토퍼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제 마수들은 막을 수 있다. 마왕이라는 존재들이 남아 있으니 이것만으로 승기를 쥐었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지금까지와 같은 무차별적인 마수들의 웨이브는 저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마왕들이 조금만 이 상황을 지속해 준다면 이지혁들이 돌아올 것이고, 그와 동시에 반격에 나설 수 있을 것이다.

    크리스토퍼가 아는 이지혁이라면 결코 마수들을 막아내는 수련따위는 하지 않을테니까. 그는 언제나 핵심을 파고드는 인물이고, 지금 상황의 핵심은 마수가 아닌 마왕이었다.

    "이지혁과 알파가 마왕들을 맡아준다면, 지상은 싸그리 정리할 수 있다."

    마수들에게 통하는 병기를 개발했다는 것만으로도 상황이 이리 극명하게 바뀔 줄이야. 인간은 역시 무기와 함께 발전해 왔다는 것이 가슴으로 와닿고 있었다.

    "이제는 우리가 공격할 차례지."

    "아, 그건 아니라고 보는데?"

    크리스토퍼의 심장이 발끝까지 떨어졌다.

    순간, 피가 멎고 심장이 오그라든다. 그러더니 멎었던 피가 거꾸로 도는 느낌이었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거칠고 낮은 목소리가 크리스토퍼를 움찔하게 하고 있었다.

    "…누구냐?"

    돌아보지 못했다.

    미처 돌아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폼을 잡기 위해 돌아보지 않고 물은 것이 아니다. 등 뒤에 있는 이를 확인할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크리스토퍼는 등 뒤에 있는 이가 누구인지를 알면서도 물을 수밖에 없었다.

    마왕.

    마왕이 아니면 누가 이런 목소리를 내겠는가.

    마왕이 아니면 누가 펜타곤의 핵심까지 아무 거리낌 없이 들어올 수 있겠는가.

    그들이 대항해야 할 적의 정점이 지금 크리스토퍼의 등 뒤에서 그를 노리고 있었다.

    "좋은 질문이군. 하찮은 인간에게 일일이 대답을 해야 한다는 것은 조금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원하는 것이 있다면 나도 예의를 갖춰야겠지. 물론 짐작하겠지만, 나는 그대들이 마왕이라 부르는 존재다."

    "그렇겠지."

    "하지만 조금 달라."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크리스토퍼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확인해야 한다.

    그의 앞에 존재하는 실재적인 위협이 얼마나 거대한지.

    그리고 그가 왜 이곳에 왔는지 말이다.

    "나는 그저 마왕이라고 할 수 없는 존재다. 인간의 조악한 언어를 바탕으로 나를 설명하자면… 그래, 유치하지만 그렇게 불러야겠군. 대마왕이라고 말이야."

    * * *

    크리스토퍼는 눈앞의 사내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농담은 아니겠지.'

    농담이라고 하기에는 그의 말투가 더없이 진지했다. 그리고 말투를 따지기 전에 지금 그의 눈에 보이는 모습이 너무도 기괴하다.

    신장이 2m에 달하는 거구가 어디서 구한 건지도 모를 슈트를 입고 있었다. 마치 상견례를 위해서 옷을 맞춰 입고 나온 프로레슬링 선수를 보는 것 같은 위화감이었다.

    하지만 우락부락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키가 조금 클 뿐이지, 스스로를 대마왕이라고 밝힌 사내는 오히려 인간보다 샤프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머리 양쪽으로 돋아난 두 개의 뿔이 아니었더라면 어딘가에서 온 키 큰 모델이나 배우라고 생각할 만큼 말이다.

    "대마왕이라고?"

    "조악한 언어이기는 하지만 말이야, 계급에 따라 종속되는 너희와 다르게 우리는 서로에 대한 존중이 존재하지. 내가 다른 이들보다 발언권이 크다고 해서 그들을 강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그들은 그저 나의 말을 존중할 뿐이다."

    "명예직 같은 건가?"

    "흐음, 이래서 인간과의 대화는 어렵단 말이야. 이봐, 인간."

    크리스토퍼의 눈썹을 꿈틀댔다.

    "인간의 나쁜 습성 중 하나는 자신이 알고 있는 개념에 다른 이들의 존재를 끼워 맞추려고 한다는 점이지. 존재하는 현상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꼭 자신의 경험과 이치에 맞추어 재단하려 든다는 거지."

    "…인간을 잘 아는 것처럼 말하는군?"

    "잘 알지, 그것도 아주 잘."

    마왕이 유쾌하게 웃었다.

    "종속과 비종속으로 설명하는 것은 어렵겠지만… 글쎄, 뭐라고 해야 할까? 우리는 너희의 기준으로 설명하자면 그런 존재거든. 음, 뭐라고 해야 할까? 음, 그렇지."

    마왕이 담담하게 말했다.

    "기생충?"

    "…매우 적절하다고 박수라도 쳐주고 싶군. 스스로를 그리 낮출 수 있다니, 과연 대마왕으로서의 자격이 있는 듯해. 인간들 중에 성인이라 불린 이들도 그런 건 하지 못했을 텐데 말이야. 격이 다르군."

    크리스토퍼의 목소리에는 비꼼이 가득했지만, 그 와중에서도 놀람이 묻어나고 있었다.

    스스로를 기생충이라고 말하는 대마왕이라니,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생각해 보면 간단한 문제거든. 우리는 마이너스 마나를 먹고 사는 존재들이지. 그런데 자체적으로 마나를 생성해 내지는 못한단 말이야."

    "그게 무슨 뜻이지?"

    "설명하자면 어려워. 너희의 조악한 뇌로는 이해하기 힘든 개념이니까. 간단히 말하자면, 너희 인간 같은 이들이 내뿜는 마이너스 에너지가 결국에는 차원을 넘어 우리의 원동력이 된다고 생각하면 돼. 시간은 조금 걸리겠지만 말이야.

    '기생충이라는 게 그런 뜻이군.'

    단순히 그들의 피를 빨아 먹겠다는 뜻이 아니었다. 인간이 내뿜는 절망과 증오가 그들의 양식이 된다면, 확실히 그들은 인간이라는 존재에 기생해 산다고 할 수 있을 테니까.

    "그래서? 기생충께서 이곳에는 왜 찾아오신 거지?"

    "바로 그 부분 때문이지."

    마왕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팔을 저어 가슴으로 가져간 채 허리를 숙였다.

    "이것이 인간의 인사법이라고 하더군. 간단히 설명하지. 내 이름은 바르바체. 마계의 마왕, 두 번째 마왕이라 불리는 이다."

    "대마왕은 여럿인가 보군? 두 번째라 하는 걸 보니 말이야."

    "음, 그런 건 아냐. 첫 번째가 있었지. 내 손에 죽었을 뿐."

    "그럼 네가 첫 번째 아닌가?"

    "인간의 고약한 취미에 대해 설명해 줬는데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군. 내가 두 번째 마왕이라 불리는 이유는 내가 두 번째로 세상에 탄생한 마왕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강하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은 줄 세우기는 이미 충분히 경험했으니, 그만해도 괜찮겠어."

    바르바체가 이를 드러냈다.

    "각설하고 말하지. 나는 너희에게 제안을 하러 왔다."

    "제안?"

    "그렇다. 이건 매우 건설적인 제안이겠지. 조금 전 설명했다시피 우리에게는 인간이 내뿜는 마이너스 에너지가 필요하다. 우리가 이 세계를 침공한 이후 세상에는 마이너스 에너지가 넘치고 있지. 너희의 불안과 공포, 그리고 죽어가면서 내뿜는 절망은 역사상 최고라고 해도 좋을 만큼 강렬하니까. 다만……."

    바르바체가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다.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너희를 보호할 필요가 있다. 인간의 개체가 줄어들면 줄어들수록 그들이 생산해 낼 수 있는 마이너스 에너지는 줄어들기 마련이지. 우습게도 우리는 너희에게 더 많은 에너지를 뽑아내기 위해 너희를 보호해야 하지.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나?"

    "흐음."

    크리스토퍼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생충처럼 쉽게 먹고살다가 축산업으로 업종을 변경하겠다는 말로 들리는데?"

    "너희의 개념으로는 그보다 적절한 설명이 없겠군."

    "놀고먹으면서 살던 놈들이 직업을 가지겠다고 하면 도와줘야 하겠지만, 어쩌지?"

    크리스토퍼가 이죽이기 시작했다.

    "나는 너희같이 냄새나는 놈들의 가축이 되느니 그냥 죽는 쪽이 나을 것 같은데?"

    "물론 그리 생각하는 것도 이해하지 못할 건 없다. 인간은 자유의지가 있는 존재니까. 하지만 나 역시 그런 부분을 생각하지 않고 제안하는 게 아니야. 나는 너희를 존중한다. 너희의 삶에 그리 깊이 개입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

    "그 말을 믿으라는 거냐?"

    바르바체가 손가락을 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매우 난감하군. 듣기에 따라서는 매우 우스운 말일 수도 있는데 말이야."

    바르바체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너는 내가 이 땅에 지옥을 만들 거라 생각하겠지. 그렇지 않나?"

    "아마도."

    "물론 이해해. 내가 지금까지 한 말을 바탕으로 하면 나는 너희에게서 마이너스 에너지를 뽑아내야 하는 거고, 그 방법은 너희를 괴롭히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겠지."

    "아닌가?"

    "말은 맞는 말이야. 현실은 좀 다르지만."

    "…이봐, 마왕."

    크리스토퍼가 시가를 꺼내 물었다. 가위를 꺼내려고 했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바르바체가 그의 시가를 자르고 친절하게 불까지 붙여주었으니까.

    "계속해 보지."

    "일단 고맙다고 해두고."

    불을 붙여준 것에 대한 감사를 표한 크리스토퍼가 입을 열었다.

    "너희가 생리적인 혐오라는 단어를 이해할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지금 딱 그런 상황이거든? 나는 지금 말하는 바퀴벌레와 마주 보고 대화를 해야 하는 곤욕을 치르는 중이니까. 요점만 간단하게 말해주면 좋겠는데?"

    바르바체가 흥미롭다는 듯이 크리스토퍼를 보며 말했다.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인간이란 다들 그렇게 겁대가리가 없나?"

    "뭐?"

    "지금까지 내가 대화를 나눠본 인간은 딱 둘이거든. 하나는 너고, 하나는……."

    "이지혁이겠지."

    "맞아, 아흔아홉 번째 마왕이지. 그런데 너와 아흔아홉 번째 마왕은 비슷한 경향이 있는 것 같단 말이지."

    "살면서 그런 심한 욕은 처음 들어보는데? 사과해, 이 새끼야."

    "…미안하군."

    자기가 생각을 해도 과도한 말을 했다 싶었는지 바르바체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의 입장에서는 개미에게 사과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였겠지만 말이다.

    "인간이 보기에도 이지혁이 그런 느낌인 줄은 몰랐다. 나는 인간을 잘 모르니까."

    "생물을 떠나 공통적으로 통용되는 게 있는 거야."

    "공감하지."

    크리스토퍼는 피식 웃고 말았다.

    '마왕과 대화를 하고 있군. 내가 말이지.'

    의외로 말도 통하고, 신사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본성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지금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뭐라고 해야 할까…….

    '이지혁보다는 열 배는 더 말이 통하는 느낌이군.'

    저들이 이지혁이라는 이름만 나와도 이를 갈아붙이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저런 상식인들이라면 이지혁과 융화되기가 힘들었겠지. 인간 중에 똘기 좀 있다는 것들도 감히 이지혁 앞에는 가져다 댈 수도 없으니 말이야.

    "각설하고,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지?"

    "간단해. 우리는 굳이 마이너스 에너지를 만들기 위해서 인간을 괴롭힐 필요가 없다는 말이지."

    "…그게 무슨 뜻이지?"

    "몰라서 묻나?"

    바르바체가 가만히 웃었다. 그의 웃음은 종족을 초월해서 확실한 감정을 전달하고 있었다.

    비웃음. 그의 입가에 걸린 것은 비웃음이었다.

    "너희 스스로 자신을 괴롭혀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상황까지 가고 있는데, 내가 왜 굳이 너희를 괴롭혀야 하지?"

    "……."

    "이봐, 알고 있나? 마계에는 자살하는 생물 따위는 없어. 내가 아는 다른 인간들이 존재했던 곳 어디에서도 이곳처럼 인간이 스스로의 삶을 끊는 곳은 없었지. 자살이라는 것은 여유가 넘치는 인간들의 사치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이곳은 어때?"

    크리스토퍼는 웃고 말았다.

    "여기가 지옥보다 더하다는 건가?"

    "뭐, 꼭 그런 건 아니겠지. 하지만 너희 인간들이 생존하면서 받을 수 있는 고통의 한계라고 해야 할까? 육체를 고문하고 정신을 압박한다면 더 큰 고통은 받겠지만, 지속적인 고통을 통한 마이너스 에너지 생성은 한계가 있는 법이지. 그런데 너희는 너희 스스로 그걸 해내더군. 사회라는 체제로 스스로들의 목을 죄며 말이야."

    바르바체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니 나는 너희가 사회를 만들어 살아가는 것을 인정하지. 대신 조금 우리의 지시를 따라주면 돼. 자네들이 이 상황에 동의하는 순간, 나는 지금 지속되고 있는 침략을 멈추고 자네들과 협상에 들어가도록 하지."

    크리스토퍼는 웃고 말았다.

    "이봐, 마왕."

    "바르바체라고 하지."

    "그래, 바르바체. 한 가지는 알아야 할 것 같은데?"

    "말해보지."

    "뭘 모르는 모양인데, 인간은 모두 반골이야."

    "…반골?"

    "그래, 반골."

    크리스토퍼가 깊이 담배를 빨아들이고는 훅 내뱉었다. 담배 연기가 바르바체의 얼굴을 향해 흘러갔다.

    "인간은 천성적으로 자기 머리 위에 누군가가 존재하는 걸 용납하지 못해. 그래서 누군가를 끌어내리고 자기가 위에 서기 위해서 평생을 바치는 존재들이지."

    "그건 생물의 본능이야."

    "너희는 몰라."

    크리스토퍼가 명백한 비웃음을 띄었다.

    "이건 사파리에서 벌어지는 권력 다툼과는 달라. 우리는 승복할 줄 모르고, 납득할 줄 모르지. 그런데 뭐? 인류적인 입장에서 너희가 우리를 지배하는 것을 인정하고 지금까지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라고?"

    크리스토퍼가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올렸다.

    "엿이나 드시지, 친애하는 마왕 각하."

    바르바체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 뭐, 협상을 거절하는 이유도 이해가 가. 하지만 뭘 어쩔 생각이지? 그럼 그냥 멸망을 선택하겠다는 건가? 나는 너희의 개체수가 줄어드는 게 아쉬워서 이런 제안을 하는 거지, 너희를 굴복시키는 것에 딱히 어려움이 있어서 이러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알 텐데?"

    "인간을 우습게 보지 마."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군."

    바르바체가 서서히 몸을 세웠다.

    "인간이여, 하찮은 인간이여. 그깟 조악한 무기를 믿고 지금 우위라도 잡았다고 생각하는 건가?"

    순간, 크리스토퍼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한 마왕의 위압감은 감히 그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보여주지, 너희가 누구를 상대하고 있는 것인지 말이야."

    * * *

    바르바체의 선언은 공허했다.

    당장에라도 세상을 날려 버릴 것 같은 그 내용과는 다르게 말이 끝났음에도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놀라야 할 타이밍인가?"

    비꼬는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크리스토퍼가 겁이 없다고 해도 이런 상황에서 마왕을 비꼴 만큼 담대하지는 않았다. 그저 순수한 의문이었을 뿐이다.

    "인간은 꽤나 재미있는 것을 가지고 있군."

    바르바체가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는 모니터들을 보며 미소 지었다.

    "그럼 여기서 감상해 보자고, 너희가 지금까지 하던 그대로 말이야."

    바르바체가 옆에 있는 의자를 잡아당기더니, 그 자리에 앉았다.

    "상영회라도 열자는 것 같군."

    "그렇다고 할 수 있지."

    바르바체가 이죽거렸다.

    "재미있는 내용이 될 거야. 강대한 적에 맞서서 고군분투하는 인간이라는 설정은 전형적이지만 흥미로운 주제지."

    "마치 인간처럼 말하는군."

    "내가 조금 더 좋은 시나리오를 알고 있는데, 들어볼 용의가 있나?"

    "얼마든지."

    "적이 정말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면 히어로물에서 아포칼립스물로 변하게 되겠지. 그럼 작품성이 좀 더 올라갈 거야. 예를 들면, 이미 끝났다고 생각한 전투가 끝나지 않았다든가."

    바르바체가 가만히 손가락을 튕겼다.

    '뭘 한 거지?'

    방금 바르바체의 움직임은 위협도, 농락도 아니다. 그는 분명 뭔가를 했다.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공기가 순간적으로 변하는 것을 크리스토퍼는 분명히 느꼈다.

    '빌어먹을.'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것이 이리 공포스러운 일일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괴멸시켰다고 생각한 적진 한복판에 갑자기 문이 나타나면 어떻게 될까?"

    "문?"

    "너희는 스팟이라 부르던가?"

    크리스토퍼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동시에 그의 목이 꺾일 듯이 뒤로 돌아갔다.

    몬스터들이 곤죽이 되어 있는 대지 위로 시커먼 무언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안 돼."

    저곳은 워싱턴의 바로 앞이란 말이다!

    "가, 갈겨! 갈기란 말이야!"

    "예?"

    "저기로 몬스터가 쏟아져 나올 거다! 나오는 족족 박살을 내버리란 말이다!"

    바르바체가 고함을 지르는 크리스토퍼를 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그것도 좋은 방법이지. 그런데 말이야……."

    바르바체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듣고 싶지 않다. 정말 듣고 싶지 않았다. 저자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에 결코 듣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귀를 틀어막을 수는 없고, 들려오는 소리를 막을 수도 없었다.

    "그깟 마수 따위를 막는다고 뭐가 해결이 된단 말이지?"

    무슨 말이 나오더라도 절대 동요하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다. 하지만 지금 그가 들은 말이 상상할 수 있는 내용 중에 가장 최악이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 동요 이상의 것이 찾아왔다.

    절망.

    "너희가 막아야 할 것은 마수가 아닐 텐데?"

    "M-3는? M-3는 어떻게 됐냐!"

    "예?"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부관들이 멍하니 되물어왔다. 그 지독한 절망 속에서 크리스토퍼는 고함을 질렀다.

    "M-3 쪽을 막……."

    하지만 그 고함을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막는다고?

    무슨 수로?

    마수도 아니고, 마왕이 직접 노리고 오는데 무슨 수로 그걸 막는다는 말인가.

    불가능한 일이다.

    크리스토퍼의 몸이 벌벌 떨렸다.

    이제 겨우 희망을 보았는데, 불과 10분도 지나지 않아 다시 지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요동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꺽꺽대는 크리스토퍼를 보며 바르바체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해하기 힘들군."

    "……."

    "어차피 전력 차가 절망적이라는 것은 너도 이해하고 있던 것이 아닌가. 그런데 새삼 공격이 좀 먹혀들었다고 상황이 달라질 거라고 생각했나?"

    크리스토퍼의 눈에 핏발이 섰다.

    "인간이란 헛된 희망을 가지는 존재들이군. 그렇게 희망을 얻고 싶고 생존을 바란다면 내가 내민 손을 잡았어야지."

    바르바체는 멈추지 않았다.

    "스팟이란 게 뭔 것 같나?"

    "…뭐?"

    "너희는 그걸 스팟이라고 부르지. 마계와 이곳을 연결하는 문이지."

    크리스토퍼는 입을 꾹 닫았다.

    다음 그가 할 짓이 무엇인지 예측할 수 있었다. 크리스토퍼는 바르바체가 아무 말을 하지 않았음에도 스스로 최악의 상황을 찾아내는 자신의 머리를 저주했다.

    "그건 말이야, 절벽에 로프를 거는 것과 비슷하지. 처음 한 가닥을 걸기 위해서는 노력을 해야 하지만, 두 번째부터는 어려울 게 없어지지. 처음 걸어둔 로프를 통해 건너편으로 넘기면 되는 거거든. 이렇게."

    바르바체가 다시 손가락을 튕겼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눈으로 보는 것보다 상상으로 맞이하는 지옥은 더욱 끔찍했다.

    "대충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곳들에 문 하나씩만 더 열면 모든 것이 해결되지."

    몇 달 동안을 끌어온 싸움이다.

    어떻게든 상황을 좀 더 좋게 끌기 위해서 영혼을 갈아 넣는다는 심정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그리고 그 결과가 겨우 나왔다고 생각하는 시점에 절망이 강림했다.

    "자, 이제 어쩔 거지?"

    "……."

    바르바체는 마치 크리스토퍼의 절망을 즐기는 듯했다. 결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그는 크리스토퍼의 목을 조이고 있었다.

    "인간을 우습게 보지 말라고 했나? 과소평가하지 말라고 했나?"

    바르바체가 가만히 웃었다.

    "내가 인간을 우습게 보는 것이 아니라 네가 인간을 과대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작은 별에 박혀 왕 놀이를 하고 있으니 스스로가 대단한 것처럼 느껴지는 모양이지? 너희가 지금의 힘을 손에 넣을 수 있던 것은 너희와 맞서 싸울 이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착각하지 마라, 인간. 너희는 나약한 존재들이지."

    크리스토퍼가 입술을 깨물었다.

    얼마나 강하게 깨물었는지, 입가를 타고 진득한 피가 흘러내렸다.

    "그런 눈으로 보지 않아도 돼."

    바르바체가 어깨를 으쓱했다.

    "지금도 충분히 시간을 주고 있는 거니까 말이야. 너희 따위는 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단 삼 일 만에 멸종시킬 수 있다. 그 이상의 시간도 필요하지 않아. 마지막의 마지막 개체까지 찾아 죽이는 데 필요한 시간은 불과 삼 일이지."

    바르바체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원래대라로면 협상은 여기서 끝나야겠지만, 너라는 개체의 결정으로 인간의 운명이 결정 난다는 것은 매우 가혹한 일 같군. 남아 있는 모든 인간을 네가 대표하긴 힘들 것 같으니 한 번의 기회를 더 주지."

    바르바체가 손을 들어 올려 쫙 폈다.

    "오 일. 딱 오 일을 주겠다. 오 일 뒤에 다시 대답을 들으러 오지. 그때도 같은 대답을 할 수 있을지 두고 보지."

    바르바체가 손을 내리고는 태연히 말했다.

    "다만 한 가지는 알아두길 바라지. 나는 매우 신사적인 개체라는 걸 말이야. 내 휘하의 마왕 중에서는 지금이라도 당장 너희를 모두 찢어 죽이자고 하는 놈들이 한둘이 아니야. 우습게도 나는 지금 이 세상의 어떤 지성체들보다 너희의 편이다."

    "오 일이라 했나?"

    "그래, 오 일이다."

    "경고하지, 마왕. 아니, 바르바체."

    크리스토퍼가 씹어뱉듯 말했다.

    "너는 그 오 일의 시간을 인류에게 준 것을 후회하게 될 거야."

    "그리되길 빌지."

    "여유를 부리는 것도 지금뿐이다. 오 일이면 이지혁이 돌아온다."

    이지혁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바르바체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아직도 그딴 쓰레기를 믿고 있는 건가? 기댈 언덕이 없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제 힘 하나 지키지 못하고 망가져 버린 인간에게 기대야 한다면… 인간이란 것들도 빤하군."

    "제멋대로 지껄여 봐. 이지혁이 네 머리를 뜯어서 굴리고 있을 때도 계속 지껄일 수 있는지 궁금하군."

    악밖에 남지 않은 크리스토퍼가 마구 욕을 해 댔다. 베르바체는 그런 크리스토퍼에게서 시선을 떼고는 천천히 문을 향해 걸어 나갔다.

    "인간이란 상종 못할 존재란 말이야."

    "문으로 걸어 나가는 마왕보다는 낫겠지."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크리스토퍼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국장님!"

    "…됐어."

    크리스토퍼는 땀으로 범벅이 되어버린 얼굴을 신경질적으로 닦아냈다.

    죽을 것 같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이대로 눈을 감으면 정말 죽음이란 게 찾아올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오 일이라……."

    크리스토퍼는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오 일이란 시간을 번 것에 기뻐해야 할지, 아니면 오 일이라는 시간 뒤에 찾아올 확실한 멸망을 슬퍼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텅텅 비어버린 뇌는 더 이상 생각하는 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뭐…라도 해야겠지."

    "조금 쉬셔야……."

    "오 일 뒤면 쉬기 싫어도 쉬게 될 거야. 그때까지는 움직여야지. 할 수 있는 건 다 해야 한다! M-3는?"

    부관이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통신이 잡히지 않습니다."

    "……그런가."

    크리스토퍼가 이를 갈았다.

    오 일이라는 시간을 주기는 했지만, 그동안 공격을 멈추겠다는 뜻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 오 일 동안 새로 열린 스팟에서는 몬스터들이 개 떼처럼 튀어나올 것이다.

    "공장은 돌아가고 있겠지?"

    "예!"

    "다음 건조는 언제 끝나나?"

    "다섯 시간에 한 대 꼴로 뽑아내고 있습니다."

    "늦어……. 가용한 방법을 모두 써서 M-3를 최대한 확보해라. 멍청한 마왕님들이 공장을 직접 타격할 생각은 못한 듯하니 말이야."

    "……예."

    모니터들이 이곳저곳을 어지러이 비추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미국뿐만이 아니었다. 유럽과 한국, 그리고 중국.

    그리고 현재 포착하지 못한 다른 곳들에까지 새로운 스팟이 생겨났고, 그 안에서 마수들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충원 병력을 새로운 문으로 보낸다니, 고상하신 분이시군."

    이제는 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각국에 전달해."

    "네?"

    "오 일이다."

    부관이 이를 악물었다.

    오 일만 버텨내면!

    "생존을 최우선으로 한다. 버릴 수 있는 것은 모두 버리라고 해. 그게 설령 타인의 목숨이라고 하더라도 말이야."

    "구, 국장님!"

    크리스토퍼는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우리의 목적은 오 일 동안 최대한 많은 수를 살리는 거다. 그걸 위해서라면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해도 좋아. 일단 남아 있는 핵무기를 다 퍼부어서라도 저 스팟을 저지해."

    "그럼 워싱턴이 날아갑니다."

    "줄줄이 다 날아가는 것보다는 낫지. 도쿄, 서울, 베이징… 그다음은 워싱턴이군. 그래도 우리가 좀 나은 편인가?"

    자조적으로 웃던 크리스토퍼가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이제 더는 안 돼.'

    그의 정신이 무너지고 있었다. 그가 이럴진대 다른 이들은 얼마나 많은 압박과 싸우고 있다는 말인가.

    "씨발, 빌어먹을! 다 뒈지고 나서야 나타날 셈이냐! 오 일만 지나면 인류는 끝이라고! 이 개자식아!"

    크리스토퍼는 허공을 향해 욕을 해댔다.

    예전이라면 이때쯤 나타나 '지금 나한테 한 욕이냐?'며 득달같이 달려들 이지혁이다. 하지만 크리스토퍼의 욕은 갈 곳을 찾지 못했다.

    "…움직여야지."

    크리스토퍼가 힘겹게 시가를 꺼내 입에 물었다.

    '마지막 싸움이다.'

    단 오 일간의.

    * * *

    "뚫렸는가?"

    "역부족입니다."

    국방부 장관의 얼굴은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재미있는 것은 송정수도, 윤영민도 전방이 뚫리고 있는 상황에 전혀 당황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대책은?"

    "후방으로 투입한 공병을 통해 후방 100㎞ 지점에 대형 참호를 건설 중이기는 합니다만, 미봉책에 지나지 않습니다. 금세 돌파당하겠죠."

    "그렇군."

    송정수가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물었다.

    "부산까지 예상 진격 속도는?"

    "이틀입니다."

    "이틀 뒤면 전멸이군."

    상황이 이쯤 되자 급한 마음이 사라진다. 무슨 수를 쓴다 하더라도 저들이 한반도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들을 단 이틀 만에 모두 제거할 거란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탈출하셔야 합니다."

    "어디로?"

    "국외로 나가는 비행기를 준비하겠습니다."

    "멍청한 소리 하지 말자고, 장관."

    송정수가 혀를 찼다.

    "세상 모두가 몬스터 천지인데, 도망가면 어디로 도망간다는 말인가? 어차피 여기서 죽으나 거기서 죽으나 다를 것도 없어. 그나마 이곳이 죽기에는 낫겠지. 내 땅에 묻힐 수 있을 테니까."

    송정수는 씁쓸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다들 그토록 열심히 해주었는데……."

    그 노력에 대한 보상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 못내 안타까웠다. 조금 전 전해져 온 크리스토퍼의 전언에 따르면, 마왕 측이 오 일 내로 인간을 멸망시키겠다고 선언한 모양이다.

    '오 일이라…….'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대한민국은 이틀 뒤면 세상에서 지워질 텐데.

    송정수는 허탈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전방의 대처는요?"

    윤영민이 다급한 어조로 말하자 국방부 장관이 고개를 저었다.

    "항전 중입니다."

    "항전이라……."

    마수들과 거리가 있을 때는 항전이 의미가 있겠지만, 마수들이 근접했을 때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게 없다. 마수와 동료를 함께 날려 버리든가, 아니면 후퇴하는 수밖에.

    "일선은 옥쇄합니다."

    "예?"

    "이선은 무기를 회수해서 후퇴하라고 하십시오."

    "…대통령님."

    국방부 장관이 암담한 어투로 말했다.

    "우리가 물러나는 속도보다 저들이 근접하는 속도가 더 빠릅니다. 부질없는 짓입니다."

    "부질없다구요?"

    윤영민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빌어먹을! 누가 그걸 모른답니까? 알아요! 안다구요! 알지만 해야 할 때도 있는 겁니다. 방법이 없다고 손가락 빨면서 빨리 죽여주길 기다릴 수는 없잖습니까!"

    국방부 장관이 고개를 푹 숙였다.

    "최후의 일분일초까지 싸워야 합니다."

    "지금은 의미가……."

    윤영민이 테이블을 걷어찼다.

    "의미는 무슨 얼어 죽을 의미야! 그딴 것 찾을 시간 있으면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란 말이야! 당신이 그거 하려고 비싼 연봉 받아 처먹으면서 그 자리에 있는 거 아냐?"

    국방부 장관이 이를 악물었다.

    "알아! 안다고! 방법이 없다는 것, 알고 있어!"

    윤영민의 목소리는 마치 절규와도 같았다.

    "그래도 발버둥은 쳐야 할 거 아냐! 그래야 희망이란 걸 꿈이라도 꿔보지!"

    "그만하십시오, 대통령님."

    송정수가 나직한 목소리로 윤영민을 만류했다.

    "이 사람의 잘못이 아니잖습니까."

    윤영민이 송정수와 국방부 장관을 번갈아 보다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

    "이지혁 씨가 지금 당신들 꼴을 봤으면 뭐라고 했을 것 같습니까?"

    이지혁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송정수의 눈이 흔들렸다.

    "그 사람은 자신의 힘을 다 잃고도 마계와 싸워보겠다고 지금 다른 세계에서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겨우 이 정도 위기에 모든 걸 놓아버리고 포기하겠다는 겁니까? 그러다가 그가 돌아오면 뭐라고 할 겁니까? 포기하려는 찰나에 잘 돌아왔으니, 이 사태를 해결해 보라고 말할 겁니까? 사람의 탈을 쓰고 그 말을 할 수 있느냐, 이겁니다!"

    최근 침착함을 잘 유지해 오던 윤영민이 이성을 완전히 잃고 고함을 질러 댔다.

    "부끄러운 줄 아십시오! 지금 이 순간에도 전방의 장병들은 다음 명령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면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한 나라를 이끌어가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뭐하는 겁니까!"

    통렬한 윤영민의 일침에 국방부 장관이 한숨을 쉬었다.

    "…시키시는 대로 해보겠습니다."

    "최선을 다해주세요. 모두 살릴 수 없으면, 한 사람이라도 더 살아야 합니다."

    "명심하겠습니다."

    국방부 장관이 밖으로 나가자 윤영민이 안타까운 눈으로 송정수를 바라보았다. 송정수는 마치 바람 빠진 풍선 같은 꼴이 되어 있었다.

    그저 실망했기 때문에 저러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정말 모든 힘을 다 소진해 버린 것이다. 이지혁이 떠난 날로부터 지금까지 송정수는 잠도 제대로 자지 않고 버텨왔다. 그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긴장감이 끊어지면서 육체마저 힘을 잃어버린 것이다.

    "일어나십시오."

    "…예."

    "아직은 아닙니다. 조국은 아직 당신이 쉬도록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서서 죽으십시오. 땅에 등을 대고 죽는 건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그렇지요."

    송정수가 허허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길어야 삼 일, 짧으면 이틀."

    윤영민이 씹어뱉듯이 말했다.

    "어디 한 번 해봅시다."

    * * *

    "이게 뭔 일이래?"

    정신없이 울려 대는 사이렌 소리에 최창식이 기겁을 했다.

    "아, 아저씨! 이게 뭔 일이래요?"

    "대피하래!"

    "어디로요? 대피소로?"

    "대피소는 뭔 놈의 대피소야! 남하하라잖아! 전방이 뚫렸대!"

    "이런 미친!"

    전방이 뚫렸다!

    그 말이 뭘 의미하는지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대한민국의 모든 전력이 집중되어 있는 전방에서 더 이상 몬스터를 막아내지 못했다면, 이제 대한민국은 몬스터를 막을 수 없는 것이다.

    마수들이 제집처럼 날뛰기 시작한다는 뜻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최창식은 순간적으로 혼란에 빠졌다.

    '남하하라고?'

    몬스터들은 북쪽에서 몰려오니까 남하하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매우 온당한 조치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남하해서 뭘 어쩌자는 건가.

    막을 수가 없는데.

    대전에서 죽는가, 부산에서 죽는가, 정말 운 좋게 제주도에서 죽는가의 차이일 뿐이었다.

    "완전히 뚫린 거래요?"

    "그랬으면 우리도 죽었어. 그놈들이 얼마나 빠른데."

    "그렇죠? 그럼 아직 희망이 있는 거잖아요!"

    허탈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야, 이 새끼야. 지금 전방에 사백만이 있다. 사백만이라는 인간이 바리게이트를 쌓고 있다고. 그 사백만이 죽는 건 쉬운 일인 거 같냐? 그냥 몸으로 시간을 벌고 있는 거야!"

    최창식의 손이 덜덜 떨렸다.

    전방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 상상이 간 것이다. 아마 지금쯤 그곳은 지옥도로 변했을 것이다.

    "거기에 대한민국 인구의 십분의 일이 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싸그리 다 몰살당하고 나면 이제 아래쪽으로 달리기 시작하겠지. 그럼 다 죽는 거야! 죽는 거라고!"

    "……어떻게 해요, 그럼?"

    "어떻게 하긴, 새끼야!"

    길가에 주차되어 있는 차로 달린 소장이 차문을 열고 자동차에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

    "기름 있어요?"

    "미리 빼놨지! 타!"

    "어쩌려구요?"

    "부산으로는 가도 의미가 없어. 어차피 언제 뚫릴지도 모르고, 부산으로 간다고 해서 살아남는다는 보장도 없어. 아마 지금쯤이면 다들 배 타고 있을 거야."

    "배요?"

    "바다는 그래도 안전하니까. 어떻게든 배를 잡아타고 일본으로 빠져나가야 돼. 일본은 아직 몬스터들의 침공을 받지 않았잖아!"

    "여기는 중국이 더 가깝잖아요!"

    "이 새끼야, 중국이 중국 아니게 된 지가 언젠데, 인마! 거기 이미 사람이 없다는 소문이 쫙 깔렸어. 중국 정리한 몬스터들이 이리로 몰려와서 우리 전방이 개박살 난 거잖아! 무슨 속 편한 소리 하고 있어!"

    최창식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아저씨."

    "왜?"

    거칠게 액셀을 밟는 소장을 보며 최창식이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우리 이제 끝난 거예요?"

    "뭘 끝나! 안 끝났어, 아직!"

    "아뇨. 우리 말고 인간이요."

    "……."

    "지금 당장이야 어떻게 도망갈 수 있다고 해도 이제는 막을 수가 없는 거잖아요. 그럼 이제 조금이라도 늦게 죽기 위해서 발버둥 쳐야 하는 거예요?"

    "아, 그 애새끼 진짜!"

    소장이 눈을 부라렸다.

    "야, 이 새끼야! 사람은 누구나 1초라도 더 살려고 발악을 하는 거야! 그거 아니면 미쳤다고 상사 욕 들어 처먹으며 직장에 붙어서 돈 벌어 먹고살겠냐! 어차피 뒈질 거, 빨리 뒈져 버리면 그만인데."

    "……."

    "살아 있는 인간은 어떻게든 발버둥을 쳐야 해! 그게 우리가 해야 할 일이야. 무슨 뜻인지 알아?"

    "예! 알……."

    막 대답을 하려던 최창식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으아아아아아! 아저씨! 저기! 저기!"

    "응?"

    고개를 돌린 소장의 눈에 하늘을 나는 막대기 같은 것이 보였다.

    '뭐지, 저거?'

    누군가 허공으로 긴 쇠파이프를 던진 것 같은데, 그게 빙빙 돌며 이쪽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잠깐. 저거… 파이프가 아닌데?'

    파이프라고 하기에는 너무 크다. 이윽고 자신들 쪽으로 날아오는 것이 뽑혀진 전신주라는 것을 알아챈 소장이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아아아악!"

    급격하게 핸들을 틀면서 브레이크를 밟는다. 차가 그대로 스핀하며 빙글빙글 돌았다.

    콰콰쾅!

    바닥에 떨어진 전신주가 네 동강이 나며 튀어오른다. 그중 하나의 덩어리가 최창식이 타고 있는 차의 트렁크로 정확하게 떨어졌다.

    차가 허공으로 튀어 오른다.

    한 바퀴 거꾸로 돌아 천장부터 바닥에 떨어진다. 최창식은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감쌌다.

    쿵!

    "으으……."

    안전벨트를 매고 있음에도 전신이 다 으스러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 아저씨?"

    옆에 축 늘어져 있는 소장을 보고 기겁을 한 최창식이 허공에 매달린 채 손을 뻗었다. 다행히 숨은 쉬고 있었다.

    "나, 나가야 돼……."

    하지만 최창식은 한 가지를 더 알 수 있었다.

    아무 이유 없지 전신주가 뽑혀서 허공을 날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아무리 힘이 좋은 인간이라도 멀쩡한 전신주를 뽑아 집어 던질 수는 없다는 것도 말이다.

    쿠오오오오오오!

    카라라라라라라라!

    저 멀리서 끔찍한 짐승의 표호 같은 것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5년 전부터 사람들에게 익숙해진 몬스터들의 하울링이다.

    "쿡쿡쿡."

    최창식은 낮게 웃었다.

    "씨발,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집에서 처 놀다가 죽을걸."

    괜히 성실하게 일했다 싶다.

    처음에 이럴 바에야 집에 가서 발 닦고 잠이나 자다가 죽는 게 낫다고 말하던 그 사람의 말이 맞았다.

    "…씨발, 이만큼 열심히 살았는데……."

    그 마지막이 겨우 이거라니.

    최창식의 눈에 저 멀리서 광란의 질주를 하고 있는 몬스터들이 보였다. 저들의 속도를 감안한다면 눈 깜짝할 사이에 그의 앞에 당도해서 그를 차째 집어삼킬 것이다.

    "그래, 씨발! 와봐!"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한 최창식이 악을 쓰며 소리를 질렀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죽는 그 순간까지 당당하고 싶었다.

    마수들이 차 바로 앞까지 뛰어 들어왔다. 마치 지옥에서 흘러나오는 것 같은, 소름 돋는 괴성을 지르면서 말이다.

    최창식은 눈을 감았다.

    '끝이구나.'

    이게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좀 웃기기도 했다. 마지막 죽는 몰골이 영 멋지지가 않다. 죽음은 영화 같은 것이 아닌 모양이다.

    그때, 최창식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뭔 여기는 돌아오기만 하면 개판이야."

    * * *

    "흐으으으윽!"

    눈물이 자꾸 흘러나왔다.

    그러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의 아버지는 항상 그에게 말했다.

    남자는 죽는 순간에 진정한 모습이 드러나는 법이라고 말이다.

    '아빠, 나는 진짜 남자는 못 되는가 봐.'

    언젠가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이 온다면 당당하게 죽으리라 생각했다. 마수들이 그의 배에 이빨을 틀어박는 순간에도 그 대기리에 총알을 박아 넣어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죽음이 조금이라도 더 가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건 그저 바람일 뿐이었다.

    "으아아아악!"

    사람이 산 채로 반으로 찢겨 나가고, 휘두른 꼬리에 얻어맞은 사람은 탁구공처럼 바닥을 튀며 단숨에 숨이 끊어졌다.

    조병책은 무릎을 움켜잡았다.

    "으흐흐……."

    지금이야말로 그 어떤 때보다 더 열심히 총을 갈기고 수류탄을 던져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몸이 그의 마음처럼 움직이지를 않았다.

    아니.

    움직이지 않는 것은 마음일지도 모른다.

    '다 끝났어.'

    중앙이 뚫렸다.

    전선이 워낙 넓어서 모든 곳이 뚫린 것은 아니지만, 이 전선에서 석 달에 가까운 시간 동안 공방을 해온 그들은 알고 있었다.

    한 곳이 뚫리면 모두 죽는다.

    마수들이 앞뒤로 들이닥치기 시작을 하면 대처할 방법이 없었다. 아무리 소수라고 해도 말이다. 극단적인 방어를 위해서 그들은 뒤쪽을 무방비로 비웠다.

    상대가 사람이라면 등 뒤에 특작 부대를 조금 투하하는 것만으로도 전선이 붕괴될 정도로 극단적인 포진이었다. 처음에는 이 정도까지 극단적이지 않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전투가 반복될수록 포진이 조금씩 수정되어 갔다.

    살아남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오늘 마침내 중앙이 뚫리고 말았다.

    뚫린 곳은 불과 몇 미터에 불과하지만, 그 몇 미터가 그들의 운명을 바꿔놓은 것이다.

    중앙을 뚫어낸 마수들의 일부는 그대로 전선을 통과해 치달리기 시작했고, 또 다른 일부는 좌우로 포진한 군인들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전혀 대비하지 못한 측면을 공격받은 효과는 굉장하다고 할 수 있었다. 석 달 동안 잘 버텨오던 이들이 손도 써보지 못한 채 학살당하고 있었다. 한강을 기준으로 중앙에서 좌우로 학살의 폭이 커져 가고 있었다.

    "끝났다고……."

    이걸로 한강 전선은 붕괴한 것이다. 그리고 이제 대한민국이 붕괴할 차례다. 이 몬스터들은 이 한반도에 살아남아 있는 모든 생물들을 죽이기 시작할 것이다. 벌써부터 죽음의 땅이 되어버린 북한처럼 말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희생조에 지원할걸.'

    마수들의 후방으로 들어가 희생하는 역할이라도 했으면 이리 비참하게 죽지는 않았을 텐데. 죽음이라는 게 조금은 더 의미 있었을 텐데.

    비록 그곳에서도 지금처럼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찢겨 죽었겠지만, 그래도 내가 찢겨 죽는 시간만큼이라도 공세를 늦출 수 있다는 보람이라도 있었을 텐데.

    다리에 힘이 풀려 도망조차 치지 못한다는 사실이 조병책을 더없이 고통스레 만들고 있었다.

    "으아아아아아! 이 개새끼들아!"

    투투투투투!

    총을 마구 갈겨 댄다.

    주변에 누가 있고, 지금 이 총구의 건너편에 누가 있는지는 신경 쓰지 않았다.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동료? 차라리 그의 총에 죽는 쪽이 좀 더 평화로운 죽음일 것이다. 지금 마수의 손에 허리가 반으로 갈라진 채 꿈틀대며 죽어가는 이들에 비하면, 총에 맞아 죽는 건 차라리 존엄사였다.

    "흐으으, 흐으으으……."

    조병책은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었다.

    "다 끝났다고!"

    안다.

    이제 다 끝났다.

    이제 무슨 수를 쓴다고 해도 마수들을 막을 수가 없다.

    저 마수들의 흉포함과 잔인함을 감안한다면, 한반도에는 앞으로 며칠간 지옥도가 펼쳐질 것이다. 그런 후, 아무도 살아남지 못하겠지.

    이미 거대한 공동묘지가 되어버렸다는 소문이 도는 중국처럼 말이다.

    "크크크크."

    조병책이 총을 지팡이 삼아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전선이 한눈에 들어왔다.

    쾅! 콰아앙! 콰앙!

    이 순간에도 강 건너에는 포격이 쏟아지고 있었다. 폭격기가 계속해서 하늘을 날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포탄들이 쏟아지고 있다.

    하지만 그 포화 속에서도 진격은 멈추지 않는다. 말 그대로 몬스터들이 밀물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씨발."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선택은?

    총구를 입에 박아 넣고 갈기는 것이다. 그럼 고통 없이 죽을 수 있다. 괜히 지금처럼 공포에 덜덜 떨면서 바지에 오줌을 지리는 것보다는 몇 배는 더 깔끔하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조병책의 눈에 뿌연 습막이 차올랐다.

    "아버지이이이!"

    왜 이럴 때 남자는 죽음으로 말한다는 그 말이 잊혀지지가 않는단 말인가.

    그 하나 이곳에서 발악한다고 해도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데.

    알아줄 사람이 있다고 해도 그 역시도 얼마 지나지 않아 몬스터들에게 갈가리 찢기는 운명에 처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항전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알고 있다.

    이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객기에 불과하다.

    하지만…….

    "여기다, 이 개새끼들아!"

    투투투투투투투.

    조병책이 총을 갈기기 시작했다. 마수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확모여드는 게 느껴진다.

    "뭘 봐, 이 새끼들아!"

    조병책은 입으로 침을 줄줄 흘리면서도 총을 놓지 않았다.

    죽는다.

    그래, 무슨 수를 써도 죽는다.

    그러니… 어차피 죽을 거라면 쪽팔리게 죽지는 말아야 할 것 아닌가!

    "일어나!"

    조병책이 목이 찢어져라 소리쳤다.

    "대가리 땅에 처박고 떨고 있으면 저 새끼들이 살려주기라도 한대? 쪽팔리니까 일어나서 갈기란 말이야! 죽을 때 죽더라도 1초라도 시간 끌라고! 한 명이라도 더 도망가게!"

    그의 운명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그가 어떻게 죽느냐에 따라 누군가의 운명은 바뀔 수 있다. 단 1초라도 좋다. 단 1초라도 시간을 끌 수 있다면, 그 1초 때문에라도 사는 사람이 생길지 모른다.

    그리고 이곳에 있는 이들이 1초씩만 시간을 번다면, 수백, 수천이 살아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인도주의자 납셨네, 씨발.'

    조병책이 흐흐 웃었다.

    죽어도 가기 싫은 군대였고, 죽어도 오기 싫은 전선이었다. 하필이면 나이가 맞아서 군대에 끌려온 사이에 몬스터들이 몰려든 것뿐이다.

    사명감?

    그런 건 없다.

    애국심?

    내가 죽을 판인데, 빌어먹을 애국심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지금 그를 지탱하고 있는 것은 거창한 책임감 같은 것이 아니라 순전히 오기였다. 어차피 죽을 것, 꼴사납게는 죽지 않겠다는 오기가 그의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그런 오기에 감화되었는지 참호에 몸을 처박고 있던 이들이 하나둘 머리를 빼기 시작했다.

    "죽는다고! 어차피 죽어! 떨고 있는다고 살 수 있을 것 같아? 그럴 거면 총알이라도 하나 더 쏘고 죽어, 이 새끼들아!"

    얽히고설켜 편제가 제멋대로가 되어버린 이들이지만, 이곳에서만 두 달 동안 함께 싸워온 동료들이다. 조병책이 나서서 총을 갈기기 시작하자 하나둘 호응하는 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전우애, 쩔어주네."

    조병책이 킥킥 웃었다.

    이렇게 한마음으로 싸우면서 엄청난 힘이 생겨서 적을 쓸어버릴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에서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

    "으아아아아아!"

    능력자 하나가 맨몸으로 마수들에게 돌격한다. 그들에게 접근시키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씨발, 그렇게 빨리 움직일 수 있으면 차라리 도망을 가, 이 미친 새끼야!"

    여기서 자신들을 조금 더 오래 살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전력으로 따지자면 그들 전부보다 저 능력자 놈 하나가 더 우월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 놈이 조병책들을 살리겠다고 몬스터들 사이로 뛰어들고 있었다.

    어차피 결국에 모두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 말이다.

    '저 능력자 새끼들은 다 또라이야.'

    능력이라는 게 생겨서 나름 편하게 먹고사는 줄 알았더니, 전쟁이 나자 가장 전방에서 맨몸으로 몬스터를 상대로 총알받이 짓이나 하고 있다.

    제정신으로는 버틸 수 없어서 마약을 입에 달고 살고, 진통제를 물처럼 퍼마시면서도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조병책은 그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능력자라면 절대 그렇게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조국이나 다른 이들을 위해서 목숨을 건다는 것은 얼마나 이해할 수 없는 짓이냐, 이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았다.

    '내가 물러서면 모두 죽는다.'

    그 중압감이 그들을 움직이게 하고 있는 것이다. 어차피 그들이 막아내지 못하면 모두 죽는다. 그러니 막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다음 생에는 평범하게 태어나라, 병신들아."

    다음 생이란 게 있다면 말이지. 그리고 아마 다음 생에는 인간으로 태어날 수 없을 것 같은데? 아무래도 곧 인류는 전멸할 테니까. 그럼 바퀴벌레로라도 환생할 수 있을까?

    싱거운 생각을 하며 조병책이 탄띠에 걸려 있는 수류탄을 뽑아 던졌다. 그동안은 몬스터가 이만큼 근접할 일이 없었기에 쓸 일이 없던 물건이다.

    이것뿐만이 아니다. 참호 앞쪽에 매설해 놓은 크레모아도 아직 한 번도 터뜨려 본 적이 없었다.

    "사실 존나 해보고 싶었다."

    조병책이 낄낄 웃으면서 크레모아 쪽으로 다가갔다.

    이미 탄창은 텅텅 비어버린 지 오래였다. 남아 있는 크레모아까지 터뜨리고 나면, 그들은 더 이상 저항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크레모아 스위치까지 다가간 조병책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앞쪽을 막고 있던 능력자가 어디선가 날아온 발톱에 긁히며 사지가 분해되고 있었다.

    "……병신."

    여기는 병신 천지다.

    적당히 탈영을 해도 될 것을, 상황이 이만큼이나 됐으면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을 가도 될 것을.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욕을 하며 우는 놈들은 있어도 달아나는 놈들은 하나도 없다. 이게 대한민국 육군의 기상인지, 아니면 반복된 세뇌 명령의 성과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무려면 어때."

    도망치든 아니든 다 죽을 텐데.

    그래도 억울하지는 않다. 모두 다 같이 죽을 테니까.

    조병책이 낄낄 웃으며 소리를 질렀다.

    "여기다! 여기다, 이 새끼들아!"

    고함 소리를 들은 마수들이 그에게로 일제히 시선을 모았다.

    "이쪽으로 오라고!"

    몸을 완전히 드러낸 채 고함을 지르는, 이 연약한 생명체를 본 마수들이 이쪽을 향해 우르르 뛰어오기 시작했다. 조병책은 그 광경을 보며 툴툴 웃었다.

    "살면서 이리 인기 있어본 적은 처음인 것 같은데."

    한참을 웃던 조병책이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크레모아 스위치를 꾹 눌렀다.

    다시 한 번 꾹.

    "뭐야?"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흐흐흐."

    내가 그렇지, 뭐.

    꼭 중요할 때 이런다니까.

    마지막으로 한 방 먹여주겠다는 생각은 불발로 끝나고 말았다. 덕분에 조병책은 아무런 방비책 없이 몰려드는 몬스터들을 맞이해야 했다.

    이제 몸이 찢기겠지. 아니면 통째로 마수들의 뱃속으로 빨려 들거가게 되거나.

    어느 쪽이든 죽음은 확실하다.

    "씨발! 터지라고!"

    조병책이 울부짖으며 스위치를 마구 내려쳤다. 내려치고 또 내려치고! 다시!

    콰아아아아아앙!

    그리고 거대한 폭발이 그의 앞에서 일어났다.

    "…어?"

    크레모아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큰 폭발.

    그 거대한 폭발을 바라보며 조병책이 헤, 하고 입을 벌렸다.

    덥썩.

    그 순간, 누군가가 그의 머리를 움켜잡았다.

    "깡은 죽이네. 멋졌다."

    낮은 목소리.

    조병책의 머리를 잡고 한 번 흔든 사내가 앞으로 나서더니, 이죽이듯 소리쳤다.

    "반격의 서막이다! 이 새끼들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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