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95화 (95/118)
  • [■] 해야 한다면 바짓가랑이라도 물고 늘어져야죠 [■]

    ─────

    - 투하했습니다.

    비전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말에도 윤영민은 반응하지 않았다. 그답지 않게 핏발이 서 있는 눈으로 죽일 듯이 화면을 응시할 뿐이었다.

    한국 땅에, 정황하게 말하자면 북한 땅에 핵이 떨어졌다. 위성화면이 지도를 비추고 있었다.

    "예상보다 파괴 반경이 적은 것 아니오?"

    송정수의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왔지만, 윤영민의 머리로는 그 말 역시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그저 멍할 뿐이었다. 송정수는 윤영민을 내버려 둔 채 크리스토퍼와 대화를 시작했다.

    - 예상대로의 파괴 반경입니다.

    "이 정도로는 몬스터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줄 수 없을 텐데?"

    - 감수해야죠.

    크리스토퍼는 당연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 한 방에 모든 몬스터를 날려 버릴 생각이라면, 이런 방식으로는 안 됩니다. 수송에 한계가 있고, 만약 가능하더라도 그만한 폭탄이 떨어지면 한강 이남에 있는 병력들 역시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방사능 피폭으로 전멸할 겁니다.

    "으음……."

    공감할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하나 이 정도 타격으로는 굳이 핵을 떨어뜨린 의미가 없지 않소!"

    - 그럴 리가요.

    크리스토퍼가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 우리는 이미 중국을 통해 배웠습니다. 어설프게 화력을 집중했다가 반격을 당하게 되면 이번에는 정말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지금 이지혁 씨도, 알파도 없으니까요. 마왕들의 반응을 감안하여 순차적으로 폭격을 할 것입니다. 일단은 전선 뒤쪽에 있는 몬스터들부터 싸그리 다 지워 버리는 것에 집중할 것입니다.

    송정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라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군."

    여하튼 핵에 관한 통제권은 전적으로 미국에 있었다. 그 미국이 핵을 약하게 여러 번 쏜다고 해서 강하게 쏴달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위력이 강한 핵을 약하게 해달라 할 수는 있어도 약한 핵을 강하게 해달라고 할 수는 없다.

    "개인적으로 몇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소만."

    - 말씀하시지요.

    "까놓고 이야기합시다. 그쪽의 입장에서는 이리 간을 볼 게 아니라 전방이 몰살당하든 말든 그냥 날려 버리는 것이 이득 아니오?"

    크리스토퍼가 신종한 눈으로 송정수를 바라보았다.

    -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이지혁 씨의 지인들이 미국의 보호 아래 있으니 한국이라는 곳이 날아간다 한들 미국은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마련한 것 아니오. 거기에 마왕군 하나와 한국이라면 그 가치를 비교할 것도 없지. 핵 샤워를 통해 한국을 날려 버리며 마왕군을 처리할 수 있다면 그쪽이 이득일 것 같은데?"

    송정수의 말에 크리스토퍼가 눈을 가늘게 떴다.

    - 하시고 싶은 말씀은 제가 지금 한반도에 대량의 핵을 투하하기 위한 실험을 하고 있다는 겁니까?

    "말하자면."

    송정수가 가만히 바라보자 크리스토퍼가 한숨을 쉬었다.

    - 왜 제가 그러지 않아야 하는가에 대한 이유는 저도 찾기가 어렵군요. 지금 이야기를 들으면서 사실 좀 솔깃하기도 했습니다.

    크리스토퍼가 씁쓸하게 입을 열었다.

    - 다만,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일련의 일들은 결코 그런 의도로 시작한 일이 아니라는 것만 알아주시길 바랍니다. 저는 결코 한반도를 지울 생각이 없습니다. 일본과 중국이 반쯤 맛이 간 상황에서 지금 한국만이 동아시아의 유일한 보루입니다.

    송정수가 쓰게 웃었다.

    '유일한 보루라…….'

    중국이 제대로 된 지휘 체계를 갖추고 나서도 그런 평가를 받을 수 있을까?

    한국을 높이 평가해 주고 있는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크리스토퍼의 말에 중국에 대한 견제와 한국에 대한 립서비스가 느껴진다.

    "미국의 명예를 걸고 아니라 할 수 있는 거요?"

    - 물론입니다.

    상황만 된다면 당장에라도 뒤집어질 발언이기는 했다. 정치인에게 진정성을 바라는 건 결코 해서는 안 될 일이니까. 하지만…….

    '굳이 나를 납득시켜야 할 이유는 없지.'

    막말로 지금 크리스토퍼가 한국에 핵을 투하한다 하더라도 자신들은 막을 방법이 없었다. 그러니 굳이 크리스토퍼가 상황을 일일이 설명하며 양해를 구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핵을 투하한다면 송정수와 윤영민도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못할 테니까.

    - 게다가…….

    "음?"

    - 현실적으로 이야기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핵을 투하한다고 해도 한반도를 지도에서 지우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전 세계의 모든 핵을 쏟아부어도 그건 불가능하죠. 아시잖습니까.

    송정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이건 어찌 보면 자살행위에 가깝습니다.

    "무슨 소리요?"

    크리스토퍼가 턱을 긁었다. 그 동작이 조금 신경질적으로 느껴진다.

    - 이해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살상 반경이라는 것은 초토화 반경이 아닙니다. 실제 핵이 최종 병기로서 맹위를 떨치는 것은 살상 반경이 넓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살상 반경이라는 것은 인간이 피해를 입는 반경이지, 몬스터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반경은 아닙니다.

    크리스토퍼의 설명에 맞춰 지도에 핵무기의 폭발 반경이 표시됐다.

    현재 지도에 표시되고 있는 반경은 즉각 사망에 이르는 범위였다. 하지만 이것은 인간을 기준으로 한다. 인간이 아닌 마수라면 범위는 극단적으로 좁아질 것이다.

    '핵을 투하했음에도 실제 살상 거리가 반경 1㎞에 지나지 않는다는 건가?'

    송정수는 그제야 크리스토퍼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 전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핵을 완벽히 계산하여 촘촘하게 북한으로 떨어뜨린다면 절반 정도는 날려 버릴 수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게 전부죠. 그 이상의 효과를 바랄 수는 없습니다.

    "핵마저도 안 된다는 건가."

    송정수는 신음할 수밖에 없었다.

    - 저희의 실험과 계산대로라면 리틀 보이급을 투하했을 때 확실하게 타격을 줄 수 있다고 확정되는 반경은 직경 1㎞ 정도입니다.

    "겨우?"

    송정수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도시 하나를 박살 내고 그 길고 긴 전쟁을 종결시켜 버린 핵무기가 사용되는데도 겨우 1㎞라니!

    - 인간을 상대로 한다면 직경 10㎞ 가까운 효과를 볼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상대해야 하는 것들은 인간이 아니지요. 거리가 조금 떨어지면 전차 하나도 제대로 날리지 못하는 것이 핵입니다. 그런데 몬스터들은 전차보다 단단합니다.

    송정수가 이를 꽉 깨물었다.

    "빌어먹을, 그럼 대체 어쩌자는 말이오!"

    - 상황을 낙관하지 말라는 겁니다.

    "낙관?"

    송정수가 이를 갈았다.

    낙관이라니, 빌어먹을.

    지금 이 상황에서 어느 미친놈이 낙관을 한다고 낙관하지 말라는 말이 나온단 말인가.

    몬스터들이 몰려오는 것을 막다 막다 못해 이제는 자국의 영토에다 핵을 투하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 상황에서 낙관이라고?

    "거창하게 말을 꺼냈으면 효과라도 만들어내란 말이오!"

    - 노력하고 있습니다.

    "노력이 중요한 게 아니지 않소! 우리에게 필요한 건 결과요!"

    송정수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진정하십시오, 총리님."

    "지금 진정하게 됐소!"

    "그만하세요."

    윤영민이 단호하게 말하자 송정수가 얼굴을 붉히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추태를 보였소. 미안하오, 맥클라렌."

    - 아닙니다.

    크리스토퍼의 얼굴에도 짙은 음영이 드리워져 있었다.

    '모두가 한계야.'

    이러다 누구 하나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상황은 정말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갈 것이다.

    이제는 최후의 수단까지 활용했다. 아직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한 수준은 아니라지만, 이 방법까지도 효과가 없다면 한강 전선은 최대로 잡아도 열흘이면 붕괴될 것이다.

    그 이후엔?

    답이 없다.

    모든 것을 소진했다. 전선이 뚫리는 순간, 현실적으로 새로운 전선을 형성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마수들은 지치지 않고 인간보다 빠르게 이동한다. 뒤쫓는 이가 도망치는 이들보다 빠른데, 도망쳐서 새롭게 진지를 꾸린다는 것은 그야말로 꿈같은 이야기다.

    과거에 빠르게 결단을 내렸다면 부산을 중심으로 낙동강 전선을 구축할 수 있었겠지만, 이제는 그것도 불가능했다.

    송정수가 가만히 눈가를 문질렀다.

    '이젠 힘들어.'

    할 수 있는 것을 다했다.

    어째서 상황이 여기까지 왔는가 하는 후회는 없다. 정말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건만, 불가항력적으로 밀리고 있었다.

    송정수의 상태를 알아챘는지 윤영민이 입을 열었다.

    "미스터 맥클라렌."

    - 예, 미스터 프레지던트.

    "그쪽이 예상하는 대로 투하 작전이 마무리된다고 하면 상황은 어찌 되는 겁니까? 우리가 이대로 더 버틸 수 있는 동력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크리스토퍼는 대답 없이 고심했다.

    이건 데이터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순전히 그의 전술, 전략적인 감을 믿어야 하는 상황이다.

    - 열흘은 더 벌 수 있을 겁니다.

    "열흘이라……."

    윤영민은 헛웃음을 흘렸다.

    핵까지 투하하고도 열흘이라…….

    어이없을 정도로 적은 시간이기도 하지만, 지금의 상황에서는 더없이 간절한 열흘이기도 했다.

    "열흘, 열흘이라……."

    윤영민이 고뇌하듯 말했다.

    "그 시간이면 세계의 운명이 바뀔 수 있는 시간이라고 보십니까?"

    -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믿어야겠지요, 귀하의 판단을."

    단호한 윤영민의 눈을 보며 크리스토퍼가 미간을 좁혔다.

    '크군.'

    사람이 크다는 느낌을 받는다. 송정수가 대부분의 일을 처리하는 실무자의 느낌이라면, 윤영민은 가장 중요할 때 거침없이 판단을 내릴 줄 아는 지도자라는 느낌이다.

    '나도 위에 한 사람만 더 있었더라면 이리 힘들지는 않을 텐데.'

    개인적으로 본인을 실무자라고 생각하는 크리스토퍼의 입장에서는 송정수가 부러울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결단을 내려줄 사람이 있다는 것은 밑에서 일하는 이들의 부담을 덜어준다.

    평소에는 하는 일이 없다고 욕을 먹는 한이 있어도 지도자라는 존재가 필요한 이유다.

    - 추가 투하는 바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추가 삼 회 이내의 투하 후 마왕들의 반격이 이어지지 않는다면, 투하량을 늘릴 것입니다. 이 점 감안하시길.

    "알겠습니다."

    - 그런 건승을 빌겠습니다.

    비전이 꺼지자 윤영민이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다시 피우게 되었군.'

    입에 담배를 문 윤영민이 바로 불을 붙이지 않고 송정수에게 담배 하나를 내밀었다.

    "여깄습니다."

    송정수는 말없이 윤영민이 내민 담배를 받아 들었다.

    찰칵.

    불이 붙고 금세 회의실에는 매캐한 담배 연기가 타올랐다.

    "이제는 정말 마지막이군요."

    윤영민의 말에 송정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더는 방법이 없는 거죠."

    "잘 될 겁니다."

    "…그럴까요?"

    송정수는 조금은 힘이 빠진 모습이었다. 하지만 윤영민은 송정수를 탓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얼마나 고군분투해 왔는지는 윤영민이 가장 잘 알았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고도 결국은 자신의 손을 떠나 버린 상황을 지켜봐야 하는 그의 심정은 참담할 것이다.

    "우리는 패배할지도 모릅니다."

    "……."

    "하지만 패배한다고 해도 송정수 총리님이 세상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만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어깨를 펴시지요."

    송정수가 나직하게 웃었다. 과정 따위는 필요 없다. 세상은 오로지 결과가 중요하다는 마인드로 살아온 평생이었다.

    그런데 새삼 이런 상황이 되어서야 저런 말로 위로를 받게 되다니, 정말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이었다.

    "아직은 끝이 아닙니다."

    송정수가 이를 꽉 깨물었다.

    * * *

    크리스토퍼는 가만히 눈두덩이를 문질렀다.

    "상황은?"

    "최악입니다."

    부관의 말에 크리스토퍼가 피식 웃었다.

    '다음부터는 이 과정을 빼야겠어.'

    최근 한 달간 상황을 물었다가 희망적인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객관적으로 하는 보고겠지만, 들을 때마다 힘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그래, 또 뭐가 최악인지 들어볼까? 어제 내가 처먹은 스테이크 맛보다 최악이라면 정말 끔찍할 텐데 말이야."

    "…유럽이 붕괴 직전입니다."

    "정정하지. 그건 먹을 만한 스테이크였어."

    크리스토퍼가 얼굴을 마구 문질렀다.

    "빌어먹을 EU놈들. 잘난 체해 대더니 두 달도 못 버티는군. 전선이 어디까지 들어간 거야?"

    "러시아 초입입니다."

    "희망적인 건지, 절망적인건지 모르겠군. 어쨌든 러시아로 들어가기만 한다면 그 넓은 땅덩어리를 가로지르는 데 시간을 소모해야 할 테니까. 그래서 우리의 알파 원께서는 어찌하신대?"

    "그게 지금 상황이 조금 이상합니다."

    "이상하다?"

    부관이 얼떨떨한 얼굴로 말했다.

    "사실 이미 전선은 뚫렸습니다. 당연히 마수들이 러시아로 진격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왜? 진격이 멈추기라도 했나? 그럼 마수 놈들이 적어도 나폴레옹보다는 똑똑한 모양이군. 이 날씨에 그 추운 곳으로 옷 한 장 안 입고 돌진하지는 않는 걸 보니 말이야."

    "개인적으로 현대에 그가 있었다면 이리 밀리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나폴레옹의 포격이 몬스터에게 박힌다면 그렇겠지. 여하튼 그래서?"

    "몬스터들의 진격이 멈췄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놓치고 온 스페인과 포르투갈 아니겠습니까? 사실 아프리카 쪽에 대해 제대로 된 정보는 얻지 못했지만, 대부분의 대도시는 이미 다 파괴되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등 뒤에 영국과 포르투갈, 스페인 등을 놔두고 러시아로 진입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더구나 이탈리아 쪽도 아직 건재하지 않습니까."

    "망한 유럽이 아직 시간은 끌어준다는 건가? 그래, 남아 있는 전력을 모두 모으면 시간은 끌 수 있을 것 같은가?"

    "불가능합니다."

    "빌어먹을 마왕군을 잡아달라는 것도 아니고, 시간이나 끌어달라는 건데 그것도 안 된다는 건가? 그 잘난 유럽의 힘은 어디로 갔냐고!"

    "스팟이 독일에 생긴 것이 컸습니다. 아무래도 의장국이기도 하고 이런 상황에서 가장 믿을 만한 나라였는데, 독일이 반파되고 나서 시작하다 보니 힘을 제대로 모으지 못했습니다. 힘을 모은다고 해도 한계는 있었겠지만 말입니다."

    "그래, 좋아. 망할 몬스터들이 100년이나 지나서 나치에 심판을 내려준 덕분에 유럽이 망할 위기고, 남아 있는 놈들은 시간도 못 끌 만큼 지리멸렬했다, 이 말이로군. 매우 희망적인 소식이야. 그리고?"

    "중국은 반파되었습니다."

    "…거, 아주 듣기 좋은 소리가 이어지는군. 내가 지금 마계 진영 쪽을 잡았다면 신나서 맥주 한 캔 땄겠어. 이제 슬슬 게임이 끝나는 것 같은데?"

    크리스토퍼가 자조적으로 말했다.

    "이만큼이나 악을 썼는데도 주요 전선이 다 박살이 나고 있는 건가?"

    "…국장님은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최선?"

    크리스토퍼가 헛웃음을 흘렸다.

    "최선을 다하고 말고는 중요한 게 아니야. 중요한 것은 우리는 지금 속절없이 밀리고 있고, 이제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거지. 이러다가는 한국과 미국, 두 전선만 남게 될 거야."

    "한국이요?"

    "그래."

    "한국이 더 버틸 수 있다고 보십니까? 가장 상황이 좋지 않아서 유일하게 핵을 투하한 곳이 아닙니까."

    "가장 상황이 좋지 않은 곳이 아니라, 핵이라도 투하하면 버틸 수 있겠다는 희망이 있는 곳이라 그런 거야. 유럽과 중국은 몬스터들 자체도 너무 흩어져 있어서 핵을 투하해도 효과를 볼 수 없다. 애꿎은 사람만 죽어나겠지."

    "…한국에 남은 여력이 있다고 보십니까?"

    "없지."

    "그런데 어떻게 전선을 유지한다는 말입니까?"

    크리스토퍼가 한숨을 쉬었다.

    "남은 건 사람뿐이지. 그런데 그 사람이라는 것이 무서운 거거든."

    "예?"

    "미스터 송은 그리 만만한 사람이 아니야. 저 사람은 쓸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쓸 사람이지. 그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최소 열흘은 더 번다. 그리고 핵을 통해 열흘 정도는 더 벌 수 있겠지. 이십 일이 지났을 때, 여전히 버티고 있을 곳이 몇 곳이나 될 것 같은가?"

    "…없겠죠."

    크리스토퍼가 고개를 끄덕였다.

    "없어, 없다고. 그럼 남는 곳은 한국과 미국뿐이겠지."

    크리스토퍼는 냉정한 눈으로 지도를 바라보았다.

    '예상 이상으로 빠르다고 해야 할지, 예상 이상으로 느리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군.'

    그가 예상한 대로라면 이미 전 세계의 60%는 죽음의 땅이 되었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 전 세계 중 인간이 전멸한 땅은 채 30%가 되지 않았다.

    다만, 크리스토퍼가 예상한 이상으로 전선이 이동하는 속도는 빨랐다. 거의 속수무책으로 털리고 있다고 평가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민간인들을 정리하지 않고 있어.'

    처음 그의 예상과는 다르게 마수들은 마치 점령군이라도 되는 것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민간인들이 눈에 띄어도 지나친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의 진로에 있지 않은 민간인들을 굳이 찾아내 죽이려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류의 멸절을 목표로 할 것이라는 그의 예측과는 매우 다른 움직임이지만, 이 행동이 인류를 상대하는 데는 훨씬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남아 있는 민간인들 따위야 언제든 정리할 수 있을 테니까.

    게다가 몬스터에게는 일반 군인들을 상대로 하는 게릴라 전술 같은 것들이 전혀 통하지 않는다. 기습적인 공격으로 전과를 낼 수 있는 사람과는 다르게, 단단한 갑피로 초월적인 방어력을 자랑하는 마수들에게는 그런 공격이 먹히지 않는 것이다.

    화력이 부족한 민간인들이 마수를 상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정규군이 모두 격파되면 화살은 그들에게로 향할 것이고, 남아 있는 이들은 그저 절망에 떨다가 죽는 것 말고는 다른 수가 없었다.

    '처절하지만 말이야.'

    크리스토퍼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할 수 있는 건 모두 해봐야지. 유럽 쪽으로 연결해 봐."

    "예."

    밖으로 나가는 부관을 보며 크리스토퍼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언제까지 버텨야 하는 거지.'

    그들의 빈자리가 너무 컸다. 이제 인류는 그들의 귀환을 무작정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 * *

    "악취미군."

    에르카나는 눈앞의 사내를 보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퇴폐미 가득한 그 얼굴이 일그러지자 그 모습마저도 고혹적으로 느껴진다. 사내는 그런 에르카나의 얼굴을 보며 낮게 웃었다.

    "칭찬인가?"

    "욕이야."

    "흐음, 칭찬이군."

    에르카나가 짜증을 냈다.

    "알아? 나는 너의 그런 면이 싫은 거야. 증오스럽다고."

    "그것 역시 나쁘지 않지."

    사내의 태도에는 여유가 흘렀다.

    그도 그럴 수밖에.

    모든 것은 사내의 의도대로 흐르고 있었으니까. 사내가 살짝 손을 휘젓자 그의 바로 앞에 반투명한 형태의 구체가 나타났다. 구체가 점점 변하는가 싶더니, 곧 익숙한 형태가 되었다.

    지구.

    사내의 손 위로 지구의 모습이 나타나더니, 이곳저곳이 형형색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꽤나 잘 버티는군."

    "버티게 해준 것 아냐?"

    "물론 그렇지만."

    사내가 미소를 짓자 새하얀 이가 드러났다. 하지만 그 정갈해 보이는 색과는 다르게 보는 이들이 절로 섬뜩하게 느낄 만한 미소였다.

    단순히 감정적인 측면을 넘어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끼게 하는, 그런 웃음이었다.

    "마음만 먹었다면 이미 다들 끝내 버릴 수 있었잖아."

    "물론이지, 에르카나."

    "그런데 왜 시간을 끄는 거야? 악취미야."

    "아니. 이건 합리적인 거지."

    사내가 가만히 손을 뻗어 테이블에 놓인 유리잔을 들어 입가로 가져갔다. 마계의 미주에서 나온 향이 그의 코를 자극했다.

    "인간을 정리한다고 우리가 뭘 얻게 되지?"

    "……."

    "마이너스 에너지는 충만해지겠지.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야. 결국에는 처음으로 돌아가는 거지. 황금 알을 낳는 닭의 배를 갈라 버리는 것처럼 말이야."

    "그새 여기 속담까지 익힌 모양이군?"

    "물론이지. 모든 것은 이해에서 시작하니까. 효율적으로 다루기 위해서는 인간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지."

    "그래서 지금 이런 짓을 하는 건가?"

    "물론."

    사내가 손가락을 튕겼다.

    "인간이란 이들은 무척이나 재미있는 존재이지. 뭉쳐 있을 때는 이 별의 패권을 차지할 만큼이나 강해지지만, 하나하나 따로 떼어놓으면 나약한 짐승에 불과하거든. 그러니 인간을 편히 다루려면 그들이 만들어둔 모든 집단을 해체해 버려야 하는 거지. 국가라든가 그런 것들 말이야."

    "그게 시간을 끄는 이유가 되지는 않을 텐데?"

    "느끼지 못해?"

    사내가 손을 뻗어 허공을 움켜잡았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시커먼 연기 같은 것이 그의 손안으로 빨려들었다.

    "자, 보라고. 유형화될 정도야."

    "음."

    "지금 인간들은 세상에 태어난 이래 가장 큰 절망에 빠져 있지. 그리고 그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을 거야. 그런 이들이 뿜어내는 부정의 에너지는 꽤나 충만하지."

    에르카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냥 쉽게 죽어서는 안 돼. 그건 비효율적인 짓이지. 절망하고 또 절망해서, 살아서 지옥을 겪으면서 서서히 죽어가야지. 그럼 그 죽음은 농익은 술처럼 끝내주는 향을 내기 마련이거든."

    사내가 술을 입가에 가져가 한 모금 머금었다.

    "그렇게 죽어야 할 이들이 죽고 나면 이 세계를 에너지의 생산 공장으로 만들어내는 거지. 그럼 우리는 영원히 굶주리지 않게 되겠지."

    "마계의 것만으로는 부족한가?"

    "몰라서 묻는 것은 아니겠지?"

    사내가 희게 웃었다.

    "우리는 마나만으로 살 수 있지. 하지만 마나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것도 사실이야. 너는 마계에서 만족하나? 그렇다면 어째서 베라프로 손을 뻗었지?"

    "……."

    "너 역시 같았어. 이제 와 다른 말 하지 말라고. 내가 이상한 것이 아니라, 네가 이상해진 것이니까. 뭐, 좋아. 짧은 시간 이상해질 수는 있어. 시간이 지나면 너도 예전으로 돌아오겠지. 그 누구보다 아름답고 고혹적이었던 그때로 말이야."

    에르카나가 깔깔대며 웃었다.

    "어이가 없군."

    "어떤 점이?"

    "미안하지만, 난 이제 예전으로 돌아가지 않아. 아니 이제는 돌아갈 수가 없게 되어버린 거야."

    "나약해졌군."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난 내가 마음에 드는데? 지금의 나는 예전 끝도 없는 허기에 굶주렸을 때보다 몇 배는 편안하거든."

    "에르카나."

    사내의 눈이 불타올랐다.

    "내가 너를 죽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지 마."

    "그런 생각은 안 해. 다만, 한 가지는 알아줬으면 좋겠군. 진지하게 충고하지. 너는 지금 실수하고 있는 거야."

    "실수?"

    사내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 * *

    "내가 실수를 하고 있다고?"

    "물론이지."

    "충고를 해준다면 고맙게 받아야겠지. 친애하는 에르카나가 나를 걱정해서 해주는 말일 테니 말이야."

    "생각이 바뀌었어. 그만두지."

    사내가 모호한 미소를 머금었다.

    "재미없는 대화 따위는 그만두자고, 우리에게는 영원에 가까운 시간이 남아 있어. 내가 너의 말을 궁금해하지 않고 이대로 오백 년쯤 묵혀둔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까?"

    "그런 점이 싫다는 거야."

    에르카나가 이를 드러냈다.

    "좋아, 이야기해 주지. 어차피 네 삶도 얼마 남지 않았을 테니까 말이야."

    "말했을 텐데? 나, 그리고 너에게는 영원에 가까운 시간이 남아 있다고."

    "아니, 얼마 안 남았어. 너는 승리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놓치고 있는 거야. 곧 달링이 돌아올 테니까 말이야."

    "…아흔아홉 번째 마왕 말인가?"

    이지혁의 존재가 언급되었음에도 사내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과거 이지혁이라는 이름만으로도 신경질적인 모습을 보이던 그의 모습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나를 흥분하게 만들 생각이었다면, 안타깝지만 실패했다고 해두지. 이제 그 이름은 내게 자극을 주지 못해."

    "자극 같은 걸 주고 싶은 생각은 없어."

    에르카나가 이죽였다.

    "그저 네게는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을 뿐이야.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봐온 사이인데, 그 정도는 말해주는 게 예의잖아?"

    "이지혁을 너무 믿는군."

    사내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거의 신앙의 영역이 아닌가? 마족 주제에 신앙을 가지다니, 이건 놀랄 일이로군."

    사내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과거 아흔아홉 번째 마왕이자 멸망의 좌라 불리던 이지혁이라면 그에게도 부담스러운 상대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과거의 이지혁이라도 지금은 내 상대가 되지 못해."

    "그래? 지나간 일이라고 잘도 지껄이는군. 달링이 온다는 소식에 꽁무니를 빼던 네 모습이 아직 선한데 말이야."

    "그때 그와 내가 충돌했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모르지는 않을 텐데?"

    "좋은 변명이야. 남자의 변명이 조금 추하다는 것을 뺀다면 받아들여 줄 만해."

    사내가 이를 갈았다.

    "그때의 이지혁이라고 하더라도 지금의 나를 막을 수는 없어. 모르지는 않겠지? 이건 마계의 권력 다툼이 아니야. 그가 내 건너편에 서는 순간, 그는 마계의 적이 된다. 그럼 전 마계를 상대해야 하는 거야."

    "참으로 안타깝고 가슴 아픈 일이지만, 우리 달링은 그런 걸 신경 쓰는 사람이 아니지. 그냥 눈앞에 있는 건 다 때려잡는 타입이라고. 그런 부분이 미칠 듯이 사랑스럽지만 말이야."

    사내는 가만히 에르카나를 노려보았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어."

    "돌이킬 수 없어진 건 너야. 너는 너무 많은 시간을 줬어."

    "……."

    "다른 이들이라면 이 말을 듣는 순간 진격 속도를 높이겠지. 그리고 달링이 돌아오기 전에 모든 것을 정리하려 할 거야. 하지만 너는 아니지. 너의 자존심이 그걸 허락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 너는 자신의 죽음을 알면서도 그 죽음을 맞이하게 되겠지. 너를 죽이는 건 달링이 아니라 네 자존심이야. 잊지 마."

    사내가 이를 갈았다.

    "그 인간 따위가 나를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에르카나? 본인의 힘조차 모두 잃어버린 그 인간 따위가?"

    "하나 기억나게 해줄까?"

    "…뭐지?"

    "달링이 처음으로 마계에 와서 마왕이 되겠다고 선언했을 때, 전 마계가 비웃었어. 지금 네가 달링을 비웃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수준으로 말이야. 하지만 그 결과는 어땠지?"

    "……."

    그는 입을 열 수 없었다.

    그를 비웃던 마왕 중 하나가 그였기 때문이다.

    인간에 불과한 이지혁이 마왕이 되겠답시고 마계를 뒤집기 시작했을 시점 그와 다른 마왕들은 이지혁의 무모함을 비웃었다. 바로 그를 응징하지 않은 것은 지루하기 짝이 없는 마계에서 하나의 여흥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이지혁은 그들의 예상을 깨고 얼마 되지 않은 시간만에 마왕의 자리까지 올라섰다. 그리고도 멈추지 않고 마왕들을 발 아래 굴복시켜가며 마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발 아래 두었다.

    마왕들이 그의 앞에 굴복했고 또한 수많은 마왕들이 그를 두려워했다.

    그리고도 멈추지 않은 이지혁은 결국 마계의 핵까지 접근해 자신의 인을 박아넣으면서 영원히 마르지 않는 마나를 얻어내는데 성공했다.

    멸망의 좌의 탄생이었다.

    '기분 나쁜 기억을.'

    사내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마왕이란 마족을 의미하지 않는다.

    마수이건 엘프건 그에 합당한 능력을 갖춘 이라면 누구라도 마왕이 될 수 있다. 인간이 마왕이 됐다하여 마계가 모욕을 받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인간 출신의 마왕이 마계의 가장 깊은곳으로 처들어가 그들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핵에 빨대를 꼽고 마나를 제 멋대로 갈취하는 것은 마왕들의 굴욕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 때는 그를 막을 수가 없었다.

    이지혁은 당시에는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존재였다. 죽지 않고 소멸되지 않으며 멈추지 않는다.

    보통 마왕이라면 육체에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존재 자체가 소멸해버릴만큼의 마나를 펑펑 들이 뭇고도 재생하는 육체, 그리고 그 육체가 초당 수천번은 붕괴하는 고통 속에서도 전혀 흔들리지 않는 정신.

    의욕만으로 막을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저 힘만 있다면 어떻게든 해보겠지만 안타깝게도 당시의 이지혁은 마왕인 동시에 역사상 단 한번도 없었던 아크메이지였다.

    마법에 대한 이해는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마족들과 마왕들마저 아득히 초월해 있었다. 그런 이를 상대로 어찌 싸우라는 말인가?

    '이길 수야 있었겠지.'

    단판의 승부에서 이지혁을 찢어죽이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지혁은 재생하고 또 재생한다. 가진 마나를 모두 쏟아부어 그를 박살내고 나면 남은 것은 지쳐버린 자신과 처음으로 돌아가 멀쩡해진 이지혁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길 수 있다는 말인가?

    "이제는 아니야."

    사내가 으르렁대듯이 말했다.

    "네가 하는 말이 일리가 있다는 것은 나도 인정하지. 내가 이지혁을 두려워했다는 것도 일정 이상은 인정해야겠지. 그걸 인정하지 않으면 내가 거짓을 말하게 되는 거니까. 하지만!"

    사내의 눈이 뱀처럼 표독스레 변해갔다.

    "이지혁에게 있어서 더 이상의 영광은 없을 거야. 한때나마 마계에서 가장 강대한 자의 이름을 얻었다는 것, 인간에게는 그 이상의 영예는 없겠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지금의 초라한 모습은 기억에조차 남지 않게 해줄 테니까. 그가 내 앞에 나타나면… 약속하건대, 그는 다시는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낼 수 없게 될 거야."

    에르카나가 그런 사내를 비웃었다.

    "지껄이기는 잘하는군. 잘 들어. 너에게 있어서 달링은 의미가 있는 존재일지 모르겠지만, 아마 달링은 네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할걸? 각인조차 되지 못한 상대에게 집착하는 네 모습은 지켜보기 무척이나 역겨워."

    "에.르.카.나."

    "휘유, 무서워라. 나는 목소리 까는 남자는 별로더라."

    에르카나의 입은 미소를 띠고 있지만, 그녀의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기억해. 너는 지금의 선택을 죽는 순간 후회하게 될 거야."

    "그 충고 명심하지."

    "흠."

    에르카나가 몸을 돌렸다.

    "어딜 가는 거지?"

    "네 얼굴을 보고 있으면 속이 좋지 않아. 뭐, 좋아. 내가 저지른 짓이니 그에 따른 대가라면 받아들이지. 네가 만들어놓은 그 곰팡내 나는 곳에 처박혀서 지나가는 바퀴벌레나 세는 게 네 얼굴을 보고 있는 것보다는 건설적일 것 같거든."

    "큭."

    손을 흔들며 멀어지는 에르카나를 보고 있던 사내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지혁.'

    그 이름이 나올 때마다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다. 그의 길고 긴 삶 속에서도 이만큼이나 그를 분노하게 한 이는 단언컨대 존재하지 않았다.

    '내게 얼마나 더 많은 수치를 안겨줄 생각인가.'

    가만히 그의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마족 하나가 슬그머니 그의 앞에 고개를 조아리고 입을 열었다.

    "가장 존귀한 마왕이시여, 그 간악하고 사악한 아흔아홉 번째 마왕이 돌아오기 전에 인간들의 세계를 정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정리?"

    "그는 인간입니다. 그가 돌아왔을 때 이 세계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수준이 되어 있다면, 그 의욕이 떨어지지 않겠습니까? 그럼 그를 좀 더 쉽게 처리할……."

    콰득!

    순간, 마족의 머리가 터져 나갔다.

    찡그린 눈으로 마족을 바라보던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바닥을 구르던 마족의 시체가 재가 되어 사라졌다.

    "건방진."

    그의 얼굴이 노화를 머금는다.

    에르카나가 착각하고 있는 것이 하나 있다.

    그는 이지혁이 돌아올 것을 모르고 진격 속도를 낮춘 것이 아니다. 되레 이지혁이 돌아올 상황을 만들어주기 위해서 급하게 진행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맞았다.

    그가 돌아올 세상이 없다면 그와 조우할 수 없을 테니까.

    "돌아와라, 이지혁."

    그가 겪은 수치는 그저 이 지구를 파괴하고 그의 농장으로 만드는 것으로 풀리는 것이 아니었다. 이지혁을 직접 맞이해 그의 목을 자르고 그 피를 마시고서야 풀릴 수 있는 깊고 깊은 원한이었다.

    사내가 가만히 혀를 꺼냈다.

    샤프해 보이는 외모와는 다르게 섬뜩한 푸른빛을 띤 뱀의 혀가 입 밖으로 나와 그의 입술을 핥았다.

    "빨리 돌아오는 게 좋을 거야. 내 인내심에는 한계가 있으니까."

    마왕들을 풀어놓는 것만으로도 이 세상은 단 3일 이내로 멸망시킬 수 있다. 이미 7할에 가까운 마왕들이 이 세계로 넘어온 상황이니까.

    하지만 그는 인내했다.

    이것은 축제다.

    상처받은 마계의 자존심을 되살리고 새로운 영역을 손에 넣는 축제. 그 축제의 피날레는 이지혁의 피로 장식될 것이다.

    사내는 아무도 없는 어둠 속에서 낄낄대며 웃었다.

    * * *

    "해야 한다면 바짓가랑이라도 물고 늘어져야죠."

    "총리님."

    "그냥 하는 말이 아닙니다."

    송정수의 눈은 아직 빛을 잃지 않고 있었다. 그 눈빛을 본 윤영민은 희망과 우려를 동시에 가질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뭘 더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송정수가 희망을 잃지 않은 것은 고무적인 일이지만, 지금 상황에서 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건 윤영민도 이미 인지하고 있는 일이었다.

    여기에서 시간을 더 끌어야 한다면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불가능했다.

    단호하고 독기 어린 송정수의 얼굴을 보니, 가면 갈수록 희망보다는 우려가 더 커졌다. 귀신같은 얼굴을 한 송정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단 1분이라도 시간을 더 끌어야 합니다."

    "이해는 하고 있습니다. 다만, 실질적인 방안이 없지 않습니까."

    "방안이라……."

    송정수의 얼굴에 독기가 찼다.

    "시간을 끌 수 있다면 목숨이라도 던져야죠. 어차피 여기까지 온 이상 방법은 만들기 나름입니다."

    "총리님?"

    "더 많은 사람이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희생이라도 치러야 합니다."

    윤영민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뭘 할 생각인 겁니까?"

    송정수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

    "후방에 병력을 투하합니다. 어차피 전선에는 도움이 안 되는 이들이니까요."

    공기가 싸늘하게 식어가기 시작했다.

    * * *

    "후방이요?"

    윤영민의 눈이 더 커질 수 없을 만큼 치켜떠졌다.

    지금 이게 무슨 뜻인가.

    후방이라니.

    물론 윤영민이 후방이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몰라서 당황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당황한 이유는 지금 송정수가 마수들의 뒤쪽에 인력을 투하하겠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제정신인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상대하는 것이 마수들이 아니라 인간이었다면 후방 강습은 훌륭한 선택지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하지만 마수를 상대로 하는 그들에게 후방 교란 따위는 의미가 없었다.

    끊어야 할 보급로가 없고, 혼란시켜야 할 지휘 체계가 없다. 지금 후방에 인원을 투하한다는 것은 불구덩이 속에 사람을 집어 던지겠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예."

    하지만 송정수는 단호했다.

    "잠시만요, 총리님."

    윤영민은 그가 해야 할 절차가 뭔지 이해하고 있었다. 일단은 송정수가 미치지 않았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지금 후방에 인원을 투입하겠다고 하신 겁니까?"

    "들으신 대로입니다."

    "무얼 위해서요?"

    "몰라서 물으시는 건 아니겠죠?"

    단호한 송정수의 반응에 윤영민이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진심이십니까?"

    "예."

    송정수는 대화의 여지가 없다는 듯이 딱 잘라 말했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이제는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은 모두 써야 한다구요."

    "하지만 그건……."

    윤영민은 차마 말을 더 잇지 못했다.

    후방에는 마수밖에 없다. 그런 곳에 병력을 보내자는 것은 그들을 마수의 먹이로 던져 주자는 말과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런 일이 용납되겠습니까?"

    "용납되지 않으면요?"

    눈을 똑바로 뜨고 바라보는 송정수의 압력 앞에 윤영민은 침음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이제 온전히 버틸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할 수 있는 건 모두 해야죠."

    "이미 핵이 떨어지기로 한 상황인데……."

    "그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송정수가 이를 뿌득 갈았다.

    "핵이 떨어지는 곳으로 병력을 파견하자는 겁니까? 그건 미친 짓입니다."

    "압니다, 안다구요!"

    송정수의 목소리가 격해졌다.

    "그렇게 해서라도 시간을 벌어야 한단 말입니다. 단 5분이라도 시간이 더 필요하다구요. 그게 안 되면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해가 안 가십니까?"

    "하지만……."

    "팔을 떼내야 한다면 팔을 떼주고, 다리를 떼줘야 한다면 다리를 떼줘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시간을 끌어야 하는 상황입니다."

    윤영민은 영 마뜩찮은 표정이었다.

    "할 말이 없군요."

    해서는 안 된다고 가슴이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머리는 이것 말고는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 역시 이해하고 있었다.

    "자국민을 마수의 먹이로 내줘야 한다니……."

    이러려고 대통령이 된 것은 아니었다.

    그가 대통령이 된 것에는 분명 자신의 영달을 위한 마음도 존재했다. 하지만 그건 국가의 이득과 자신의 이득이 합치되었기 때문이다. 국가에 피해를 주면서까지 스스로의 이익과 명예를 탐할 생각은 없었다.

    이런 일을 자신의 손으로 지시해야 하는 상황이 올 줄 알았다면, 그는 결코 대통령 따위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멍청하게."

    윤영민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모두가 안일했다.

    몬스터가 생겨나고 세상이 변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을 감안했어야 하는 건데, 조금씩 변하는 세상을 보면서도 대책을 세울 생각은 하지 않고 당장 눈앞에 떨어지는 이득에 눈이 멀어버렸다.

    그 대가를 지금 치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건 너무 과하지 않은가.'

    단 5년의 방심이 멸망과 직결되는 상황이라니.

    "총리님……."

    "더 말씀하실 것 없습니다."

    송정수는 단호했다.

    "해야 하는 일이면 하는 겁니다. 이유가 무엇이고, 그 대가가 무엇이든 간에 해야 할 때는 해야 합니다. 하지 않고 죽는 것보다는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보는 게 나으니까요."

    윤영민은 더 이상 송정수를 말릴 수 없었다.

    아니.

    결국은 그가 했어야 할 말을 송정수가 먼저 해주었기에 다행이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나는 쓰레기야.'

    윤영민의 허탈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 * *

    D+80.

    "…빌어먹을."

    최창식은 멈춰 버린 공장을 보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뭘 어쩌라는 거야."

    언젠가는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켜서 공장이 멈출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최창식의 예상은 빗나갔다. 공장을 멈춘 것은 사람들의 폭동이 아니라 철이었다.

    철광석이 더 이상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전방에서 모아오던 탄피도 공급이 끊겼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쯧."

    정문 밖으로 깨진 유리창들이 보인다.

    "그런다고 뭐가 달라진다고."

    식량이 제대로 보급되지 않은 지가 벌써 일주일 가까이 된다. 사람들은 분노와 불안을 참지 못해 주변 건물 유리창을 때려 부수고 공공 기관들을 습격하기 시작했다.

    차마 민간인들을 상대로 발포를 하지 못한 군경들은 바리게이트를 쌓은 채 지휘 본부를 보호할 뿐이었다.

    한편으로는 계엄 상황에서도 민간인들에게 발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 나라의 발전을 말해주는 것 같지만, 그 발전이 무색하게도 이제는 정말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곳에 제대로 보급이 되지 않는다는 말은 이제 전방으로 모든 전력이 집중되고 있다는 뜻이거나, 아니면 전방에도 제대로 보급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어느 쪽이든 결과는 다를 게 없으리라.

    '너무 늦었어.'

    최창식은 반쯤 상황을 체념했다. 그동안은 이지혁만 돌아오면 어떻게든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상황이 너무 좋지 않다.

    소문이란 것이 참 무서운 게, 방송도 제대로 되고 있지 않은데 사람들은 이미 중국이 다 무너졌고, 중국을 무너뜨린 마왕군이 이쪽으로 합류하고 있다는 말을 전하고 있었다.

    심지어 북한 쪽에 이미 몇 발의 핵이 투하되었지만 몬스터들에게는 핵이 딱히 큰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마저 들려온다.

    반쯤은 걸러 들어야 하는 말이겠지만, 그런 말이 돈다는 것 자체에 의미가 컸다. 사람들이 슬슬 희망을 놓고 있다는 뜻이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 중국조차 마왕군을 막지 못했다면, 한국이 할 수 있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다들 불안한 건 알겠지만…….'

    군중심리라는 것은 무서운 측면이 있다. 평소에는 개미 한 마리 잡지 못할 것 같은 사람들이 분노한 사람들에게 끼어드는 순간, 당연하다는 듯이 화를 내고 목소리를 높인다.

    마치 분노 바이러스가 있어서 전파되듯 말이다.

    "괜찮을까나, 정말."

    시청 쪽으로 몰려가는 사람들의 행렬을 보며 최창식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 * *

    "상황이 안 좋대, 엄마."

    "…나도 들었다."

    박선덕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뭐하는 건지…….'

    고개를 들자 유리로 만들어진 천장 위로 하늘이 보인다. 그들이 현재 들어와 있는 곳은 미국의 쉘터 중 하나다. 이곳에는 한국의 주요 인물들이 피난을 와 있다.

    주요 인물들이라고 해서 권력자의 가족이거나 그런 것이 아니라, NDF 요원들의 가족들이 우선적으로 쉘터로 이송되고 있는 실정이었다.

    쉘터에 입소한 후 그녀에게도 또 데려와야 할 사람이 있는가 하는 질문이 돌아왔지만, 박선덕은 고개를 젓고 말았다.

    함께 있어줬으면 좋겠다 싶은 친척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녀가 가볍게 내뱉은 한마디 때문에 누군가는 이곳에 들어올 수 없게 될 것이란 부담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린 언제 나가는 거야?"

    "그러게."

    이예원이 끄응, 하고 신음을 흘렸다.

    '이게 감옥이지.'

    처음에는 이곳에서의 생활도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일단 기본적으로 음식은 잘 나왔으니까. 입에 좀 안 맞는 면은 있지만, 그래도 나름 신경 쓴 밥이 나오는데다가 무슨 수를 썼는지 한국 방송도 나오게 만들어놨다.

    개인실은 호텔방과 비슷한 급이었고, 짐을 들고 오지 못했음에도 어느 정도 생활이 가능했다. 옷이라도 공수받을 수 있었다면 훨씬 나았겠지만, 지금이 그런 걸 바랄 상황은 아니잖은가.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지하 공동은 대한민국의 지하 쇼핑몰들을 떠올릴 만큼 크고 넓지만, 그곳에 거주하는 시간이 한 달을 넘어 두 달이 되어가다 보니 답답함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잠깐 나가는 것도 안 되나?"

    "위험하다잖아."

    "안 위험한 곳이 어딨어. 어차피 지금 상황도 최악이라던데."

    이예원의 목소리가 살짝 떨려 나왔다.

    미국은 합리적인 곳이라더니, 이곳의 사람들은 전황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되레 자체적으로 보도 방송을 만들어서 전 세계의 전황을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그 설명대로라면…….

    '다 끝이야.'

    전쟁에 대한 것을 전혀 모르는 이예원도 지금의 상황이 최악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어느 순간 더 이상 대치 구도조차 유지하지 못할 만큼의 선을 넘어버리면 정규군이 연쇄적으로 붕괴되기 시작할 것이고, 그러면 이제 술래잡기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목숨을 건 술래잡기가 벌어질 것이다. 마수들이 살아남은 사람들을 쫓기 시작할 테니까.

    "이 인간은 대체 언제 오는 거야!"

    이예원이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이젠 힘들다고, 제발."

    망할 오빠.

    제발 좀 꺼져 달라고 빌 때는 옆에 찰싹 붙어서 집 밖으로도 잘 나가지 않더니, 이제는 좀 필요하다니까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청개구리를 삶아 처먹었나.

    "…좀 빨리 좀 오지."

    박선덕이 한숨을 쉬었다.

    이지혁을 보고 싶은 것은 그녀도 다르지 않지만, 이지혁이 돌아오기를 무작정 바랄 수 없는 것이 그녀의 마음이기도 했다.

    "그만해."

    "엄마!"

    "네 오빠가 돌아와서 저 몬스터들이랑 피 흘리며 치받고 싸우면 좋겠니?"

    "……."

    이예원이 입을 꾹 닫았다가 항의하듯 말했다.

    "다른 방법이 없잖아. 이제 오빠 말고는 저걸 막을 수 있는 사람이 없다잖아."

    "왜 네 오라비가 그걸 해야 하니?"

    "엄마는. 힘이 있는 사람이 하는 거지. 오빠에게 힘이 있으니까."

    "그래?"

    박선덕의 얼굴이 영 불편했다.

    "힘이 있다고 해서 꼭 가장 앞에 서서 피 흘리면서 싸워야 해? 이 사람들이 네 오빠에게 뭘 해줬다고 당연히 앞에서 싸워 그들을 지켜줄 것을 바라는 건지 난 잘 모르겠다."

    "…엄마."

    "세상이 원래대로 돌아가면 참 좋은 일이지. 그런데 그게 네 오빠가 고통받아야 가능한 일이라면, 난 차라리 여기서 다 죽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이예원은 입을 꾹 닫았다.

    박선덕의 말은 과격하기는 하지만,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모두가 이지혁을 바라고 있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신의 아들이 어서 돌아와 앞에서 피 흘려주길 바라는 이들에게 누가 고운 눈길을 보낼 수 있다는 말인가.

    "그래도 엄마… 오빠도 아니까 간 거잖아. 자기 아니면 답이 없다는 걸."

    "그게 더 문제야."

    박선덕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눈을 찌푸렸다. 그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걔는 지가 무슨 슈퍼맨인 줄 알아."

    * * *

    "슈퍼맨?"

    "그래, 슈퍼맨. 몸뚱아리가 강철로 만들어져서 아무리 맞아도 멀쩡한 사람."

    박선덕이 눈살을 찌푸렸다.

    "네 오빠는 내가 낳았어. 그냥 평범한 애란 말이야. 그런데 사람들은 자꾸 네 오빠를 슈퍼맨으로 몰아가잖니. 지금 이 상황을 네 오빠더러 해결하라고 하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니? 당치도 않은 이야기지!"

    박선덕은 열이 오르는지 손부채질을 했다.

    "평소에는 그리 잘났다고 거들먹거리던 사람들이 위기에 처하니까 사람 하나 붙들고 어떻게 좀 해달라고 하는 꼴을 보고 있으려니… 내가 속이 뒤집어진다, 내가!"

    "진정해, 엄마."

    이예원은 괜한 말을 꺼냈다 싶었다. 안 그래도 갇힌 곳에 살다보니 요즘 부쩍 신경이 예민해진 박선덕인데.

    "오빠가 어디 그럴 사람이야? 자기 살길은 다 찾을 사람이니까 그렇게 극단적으로 생각 안 해도 돼."

    "니년은 속이 편하지, 속이!"

    박선덕은 한숨을 쉬고는 의자에 앉았다. 그러고는 머리가 지끈거린다는 듯 관자놀이를 손으로 꾹꾹 눌렀다.

    "네 오빠는 겉으로는 한없이 무신경해 보여도 속은 섬세하기 짝이 없는 애야. 지금도 자기가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세계가 망한다는 중압감에 시달리고 있을 텐데."

    "오빠가?"

    "그래!"

    "그건 아닌 것 같은데……."

    "한 배에서 나왔다는 게 어찌 제 오빠를 저리 모르누."

    이예원의 입이 툭 튀어나왔다.

    '엄마가 오빠를 모르는 거지.'

    그녀가 아는 이지혁은 이런 일로 부담감을 느낄 사람이 아니었다. 귀찮아했으면 귀찮아했지. 다 같이 망하면 공평하니 괜찮다고 할 사람이 바로 이지혁이 아니던가.

    "그리고 사실 오빠가 아니면 대안이 없잖아."

    박선덕은 대답하지 않았다.

    한 사람에게 매달려서 구원을 바라야 할 세상이라니.

    '차라리 망하는 꼴을 보는 게 낫지.'

    그 책임을 짊어져야 할 이가 얼마나 큰 부담과 고통에 시달려야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하고 고민하는 이가 세상에 얼마나 되겠는가.

    다들 당연하다시피 이지혁의 책임과 역할을 강요하고 있었다.

    지금도 그 중압감과 싸우고 있을 아들을 생각하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괜찮을 거예요."

    가만히 대화를 듣고 있던 김다솜이 입을 열었다.

    "그렇게 약한 사람 아니니까요."

    박선덕이 김다솜을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렇겠지.'

    강하기는 한없이 강한 아이다. 하지만 이들이 모르는 것이 있다.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내구력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특히나 이지혁처럼 힘들다는 것을 겉으로 표현하지 않는 이들은 한계까지 버티고 버티다가 결국에는 부러져 버린다.

    지금까지 버텨온 만큼 부러질 때의 충격은 다른 이들의 몇 배는 더 클 것이다.

    '인석아.'

    박선덕은 이지혁을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두 달이 넘는 시간 동안 연락 한 번 없는 자식이다. 밥이라도 챙겨 먹고 있는지 왜 신경이 쓰이지 않겠는가. 밖으로 나갈 수도 없는 쉘터 안에서 자식의 무사귀환만을 바라다 보니, 속이 타들어 가는 심정이었다.

    "너무 늦는 것 아니니?"

    답답한 마음에 박선덕이 묻고 말았다.

    김다솜이 고개를 저었다.

    "오래 걸릴수록 좋은 걸 거예요."

    "왜?"

    "그만큼이나 제대로 준비하고 있다는 뜻이니까요. 뭔가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그분 성격에 안 되는 이들을 붙들고 시간을 끄시지는 않을 거예요."

    "…그건 그러네."

    본인의 자식이기는 하지만 이지혁이 성격 급한 것이야 이제는 완전 오피셜 수준이니 굳이 논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지혁이 오빠가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는 걸 다행이라 생각해야 할 거예요. 가능성이 점점 더 높아지고 있다는 뜻이니까요."

    "음……."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한다면 박선덕은 역정을 냈을지도 모른다. 남의 일이니 그리 속편하게 말할 수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김다솜은 오히려 박선덕보다 더 속이 탈 수도 있는 상황이다. 그녀의 하나뿐인 오빠가 이지혁과 함께 가지 않았는가.

    이지혁이 없어도 남편이 있고 이예원이 남아 있는 박선덕과는 다르게 김다솜은 김다현이 돌아오지 못한다면 정말 세상에 혼자 남게 되는 것이다.

    "그래, 네 말이 맞다."

    박선덕이 안쓰럽다는 얼굴로 김다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가 김다솜을 위로해 줘야 할 상황인데, 되레 그녀가 위로를 받고 있다. 겉으로는 여리여리해 보이지만 속은 참 강한 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믿고 기다리자꾸나. 오겠지. 지각은 해도 결석은 안 하는 애가 지혁이거든."

    "…딱 이해가 가는 스타일이네요."

    김다솜이 낮게 웃었다.

    가벼운 미소로 박선덕을 안심시킨 김다솜이 슬쩍 고개를 돌려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쉘터 내에서 유일하게 자연광을 받을 수 있는 휴게실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많이 몰려 있었는데, 그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어둡기 그지없었다.

    '힘들겠지.'

    이곳에 있는 이들은 적어도 몸만큼은 외부의 사람들보다 훨씬 편할 것이다. 하지만 제 손톱에 박힌 가시가 가장 아픈 법이다. 타인이 나보다 더 고통스럽다고 해서 내가 받고 있는 고통이 사라지지는 않는 법이니까.

    '올 거죠?'

    확신이 점점 바람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너무 늦지 않게 그들이 돌아올 거라 믿으면서 김다솜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 * *

    "상황이 어디까지 간 거야? 빌어먹을!"

    크리스토퍼의 얼굴은 거의 사람의 몰골이 아니었다.

    "어디까지 밀렸냐고 내가 묻고 있잖아!"

    "이제 곧 워싱턴입니다."

    "맙소사."

    크리스토퍼가 얼굴을 감싸 쥐었다.

    워싱턴이 뚫리게 되면 볼티모어와 필라델피아, 그리고 뉴욕까지가 일직선으로 박살 나게 된다. 실질적으로 미국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 파괴되는 것이다.

    "더 막을 방법은 없나?"

    "핵을 투하하고 있습니다. 속도 자체는 많이 줄었습니다. 가진 걸 몽땅 털어놓고 있으니, 아직은 포기할 때가 아닙니다."

    "빌어먹을."

    마왕군이 중부 사막지대를 통과할 무렵에 크리스토퍼는 처음으로 자국 본토 내에 ICBM을 갈겼다. 핵을 본토에 투하한 것이다. 한국에 떨어뜨린 전술핵과는 차원이 다른 진짜 핵무기가 크리스토퍼의 손으로 미국에 떨어졌다.

    효과는?

    없다고 말할 수도, 있다고 말할 수도 없는 상태.

    분명 상대에게 타격을 주고는 있지만, 괴멸적인 피해는 주지 못하고 있었다. 저지력을 발휘하고는 있지만, 완전히 막아내지는 못했다.

    "막을 수 있나? 확실하게 말해!"

    "지, 지금은 무리입니다! 하지만 M-3가 배치되고 있으니 곧 효과를 볼 수 있을 겁니다."

    크리스토퍼가 허탈한 얼굴로 시가를 잡았다.

    우득.

    하지만 너무 힘을 준 덕인지 시가가 그대로 부러져 나갔다.

    "효과가 있어야 하는데……."

    인류도 놀고 있지만은 않았다.

    상황이 급격하게 나빠지기 전에 이미 크리스토퍼는 대(對)마수용 병기의 개발에 들어갔다.

    조건은 두 가지.

    효과가 있을 것. 그리고 저지력이 있을 것.

    그 두 가지만 충족시킬 수 있다면 효율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한 대, 한 대를 만들어내는 대에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갔지만, 지금 돈 따위는 땅바닥에 굴러다니는 휴지 조각만도 못했다. 수치상으로 표시되는 돈은 이제 의미가 없다. 개발을 해낼 수 있는가 해낼 수 없는가의 문제가 있을 뿐이다.

    그렇게 만들어낸 것이 바로 M-3였다.

    전차라고 하기에는 방어력이 형편없고, 자주포라고 하기에는 쓰는 탄의 종류가 다르다. 최소한의 이동 요건을 갖추고 말 그대로 화력에 모든 것을 집중한 이동형 포대에 가까웠다.

    이걸 대체 어떤 무기로 분류해야 하는지는 아직도 정해지지 않고 있었다.

    하기야 무기 체계가 뭐가 중요하겠는가.

    그들이 그동안 파악한 것은 탄이 터지면서 사방으로 유탄을 뿌리는 방식이나 고압의 열과 충격력으로 상대를 타격하는 인마 살상용 탄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나마 대전차탄이나 철갑탄 등은 마수들이 맞은 척이라도 해주고 있었다.

    그 부분을 최대한 활용하여 만들어낸 것이 이번에 배치되는 마수 전용탄들과 M-3였다.

    "통해야 할 텐데."

    만약 통하기만 한다면 최악의 상황은 면한다고 할 수 있었다. 더 이상 남아 있는 능력자들을 갈아 넣거나 엄청난 부담으로 다가올 핵의 투하를 자제할 수 있었으니까.

    마왕급을 막아낼 것이라고는 기대조차 하지 않는다. 그러니…….

    "M-3 배치 지역으로 몬스터들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제길."

    예전이었다면 예측한 방향으로 정확하게 들어와 주는 놈들을 멍청하다 비웃을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그런 상황이 아니었다. 되레 단순히 전진만을 반복하는 저 마수들에게 지독한 공포마저 느껴지고 있었다.

    이번에도 못 막아낸다면?

    '다를 것도 없지.'

    지금까지 항상 막으려는 시도와 실패가 반복되고 있을 뿐이었다. M-3에 마지막 희망을 걸기는 했지만, 그 희망이라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지는 이미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유럽과 중국은 이미 끝났다.

    모든 지역이 점령당해야 끝나는 게임이 아니다. 정규군이 힘의 대치에서 밀리고 와해되는 순간, 남는 것은 정리뿐이다. 이미 승부는 기우는 것이다.

    인간을 상대로 써볼 수 있는 유격전은 통하지 않는다. 모든 힘을 쏟아부어서 패배했다면 다른 수가 없었다.

    이미 유럽과 중국도 본토에 핵을 쏟아붓고 있었다. 하지만 그 핵으로도 저지에 한계가 있다. 이대로 승리한다고 해도 방사능 오염과 피폭이라는 두 번째 괴물과 싸워야 한다.

    '정말 끝인가?'

    크리스토퍼는 절망 어린 눈으로 비전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너무 늦었다.

    정규군이 대부분 와해되어 버린 상황에서 이지혁들이 돌아온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받쳐 줄 병력이 없다. 그렇다면 그들만으로 싸워야 하는데, 불과 이천밖에 안 되는 수로 어떻게 저 많은 마수들과 싸운다는 말인가. 마왕도 어마어마하게 남아 있는데.

    "준비됐습니다."

    모니터로 보이는 붉은 점들이 사격 예측 지점을 향해 점점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자체 사격 명령은 내려져 있겠지?"

    "현장에서 조율할 겁니다."

    "제발!"

    크리스토퍼는 기도하는 심정으로 비전을 바라보았다.

    단 한 번도 신이 인간을 수호한다고 믿은 적이 없다. 그리 생각하기에는 그는 너무도 많은 것을 보았다. 이 세계에 신은 없다. 설령 있다고 해도 그는 적어도 인간의 편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신앙이라는 모호하고 제멋대로인 것에 기대야 할 만큼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정규군이 있든 없든 워싱턴 라인이 뚫린다면 미국은 끝이다.

    "타격합니다!"

    부관의 말에 크리스토퍼는 눈을 감고 말았다.

    "명중합니다, 앞쪽 라인에 정확히."

    "그야 뭐……."

    사실 몬스터들은 움직이는 표적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였다. 산개도 없고, 뭉쳐서 이동하는 그들을 정밀 사격 장치의 보조로도 맞추지 못한다면 M-3를 개발한 놈들을 모조리 총살시켜야 할 테니까.

    "효과가……."

    부관이 목소리를 높였다.

    "효과! 효과 있습니다!"

    "음?"

    크리스토퍼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비전! 인공위성으로!"

    상공에서 찍은 사진이 눈에 들어온다. M-3의 포격이 떨어졌다 짐작되는 곳에 곤죽이 되어버린 마수들의 사체가 늘어져 있었다.

    "되, 된다!"

    크리스토퍼는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가능성이 있다!

    이걸로 인류는 희망을 손에 넣은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이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