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94화 (94/118)
  • [■] 강하고 확실한 걸로 말이야 [■]

    ─────

    "도미노라고?"

    "독일을 무너뜨린 마왕군이 동쪽으로 진격하고 있습니다. 오스트리아와 폴란드는 이미 자국을 비운 채 피난길에 올랐고, 우크라이나와 루마니아 접경 지대에 새로운 전선이 만들어지고 있는 중입니다. 이번에 버텨내지 못하면 러시아까지 일격에 뚫립니다."

    "…러시아는?"

    "만약 방어선이 뚫리게 되면 동쪽으로 후퇴하는 방법을 쓸 것 같습니다. 유럽 전체가 무너진다면, 러시아가 전력을 다한다고 해도 방법이 없으니까요."

    "아래에서도 스팟 두 개가 도사리고 있고 말이지."

    "바로 그렇습니다."

    송정수가 눈두덩이를 문질렀다.

    러시아는 사방이 바다와 스팟으로 둘러싸인 상황이다. 다른 곳으로 손을 뻗으려고 해도 뻗을 수가 없다. 상황을 이해하지 않으려 해도 그럴 수가 없는 상황인 것이다.

    '나라 해도 지원할 수가 없겠지.'

    일단은 자국이 가장 중요하니까.

    땅이 넓다는 말은 그만큼이나 방어할 곳이 많다는 말도 된다.

    "후……."

    낮게 숨을 뿜어내 분위기를 환기한 송정수가 입을 열었다.

    "상황이 가면 갈수록 나빠지는군."

    크리스토퍼가 예상한 그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크리스토퍼가 말한 것 이상으로 상황이 좋지 않았다. 정말 이렇게 3개월을 버티는 게 가능한가 싶은 느낌으로 말이다.

    "전방은?"

    "아직까지는 버틸 만합니다만……."

    말끝을 흐리던 이가 설명을 계속했다.

    "미국 측 지원이 큰 힘이 되고 있습니다. 게다가 육상 자위대까지 지원되고 있어서 병력적으로는 큰 문제가 없습니다."

    "음……."

    "일전에 한 번 위기가 닥쳐왔지만, 함포 지원과 미국에서 직접 ICBM을 지원하여 위기를 넘겼습니다. 화력적으로는 모자란 면이 없지만……."

    "다른 문제라도 있는가?"

    참모총장이 한숨을 쉬었다.

    "그들은 지치지 않습니다."

    "……."

    "전선이 고착되면서 피해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마수란 것들은 결코 지치지도 않고, 낮밤도 없다는 점입니다. 시도 때도 없이 몰려오고, 끝도 없이 공격을 해 댑니다. 차라리 처음부터 끝까지 달려들기만 했다면 그들이 전멸하든 우리가 전멸하든 이미 결론이 났겠지만, 그게 아니라 피를 말리고 있으니……."

    송정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래서 상황은?"

    "최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최악이라……."

    "모두가 지쳐 갑니다. 그리고 트라우마 증세가 발현하고 있습니다. 최대한 치료를 해보려고 하고 있지만, 역시나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음……."

    "현재 2교대로 병력을 교대 투입하고 있기는 합니다만, 적이 몰려오기라도 하면 이마저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습니다. 게다가 이제 슬슬 보급의 한계가 오고 있습니다."

    "탄환에 대한 문제는 일본과 미국의 지원이 곧 도착할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게."

    "예."

    "다른 문제는 없는가?"

    참모총장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문제가 너무 많아서 대체 어디부터 손을 봐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솔직히 저도 어디부터 이 사태를 해결해 나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으으음……."

    "가장 큰 문제는 능력자입니다."

    "능력자?"

    "지금은 상황이 많이 나아지기는 했지만, 희생이 너무 큽니다. 전선을 잘못 잡은 대가를 그들이 온전히 치르고 있습니다."

    송정수가 한숨을 쉬었다.

    "미안하네. 우리가……."

    "아니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계획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했으면 저희도 순순히 따르지는 않았을 겁니다. 어찌 되었든 강변에 자리를 잡으면서 저들이 한 번에 달려들지 못하게 하는 효과는 있고, 그 효과가 지금까지 버티게 해준 원동력 중의 하나가 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니까요. 다만……."

    "다만?"

    "그런 식으로 위안하기에는 KSF들의 피해가 너무 큰 것도 사실입니다."

    "흐음……."

    송정수가 어두운 얼굴이 되었다.

    능력자들이 군의 주축이 되고 있는 것은 이제 세계적인 추세나 다름없었다. '인간 대 인간'이 아니라 '인간 대 일반인'의 문제라면 군대가 주도권을 잡겠지만, 몬스터를 상대하는 것에는 아무래도 인간보다는…….

    '그들도 같은 인간이야.'

    송정수가 양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언제부터 이리 생각하고 있었단 말인가.

    정치인들 중에서 능력자들과 가장 가깝다고 할 수 있는 송정수가 이 정도인데, 다른 이들은 얼마나 위화감을 느끼고 있을지 생각도 하기 싫을 정도였다.

    "정신 차려야지."

    최근 피로도가 높아졌다 싶더니, 이런 일까지 생긴다.

    고통을 참아내고 있는 것은 현장뿐만이 아니었다. 송정수도 며칠이나 잠을 안 잤는지 이제는 셀 수도 없을 정도였다. 그나마 송정수는 체력이라도 20대 젊은이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으니 버틸 수 있는 거지만, 윤영민은 말 그대로 정신력 하나만으로 버텨내고 있었다.

    '대단한 사람이야.'

    아마 세상이 달라지고 나서 평가가 가장 바뀐 사람이 윤영민일 것이다. 그저 생각 없는 과격론자 정도로 인식되던 사람이 이만한 능력을 보여줄 줄이야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하기야 본디…….'

    다른 것은 몰라도 의지력과 청렴함에 있어서만큼은 본받을 만한 사람이었다. 되레 부패지수를 따진다면 송정수가 한 수 접어줘야 할 정도니까.

    "괜찮으십니까?"

    지친 얼굴로 보고를 듣고 있던 윤영민이 테이블에 놓인 냉수를 쭉 들이켰다.

    "…괜찮아야죠. 지금 이 상황에 제가 어떻게 안 괜찮을 수가 있겠습니까."

    "대통령님."

    걱정스러운 송정수의 부름에 윤영민은 손을 내저었다.

    "아직 우는소리 할 때는 아닙니다. 알고 계시죠?"

    송정수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다.

    지금도 전선에서는 국민이 죽어가고 있는데, 피곤하니 어쩌니 하는 소리를 지껄일 상황이 아니었다. 전선의 젊은이들이 마수의 손에 죽어간다면, 그들은 스스로 과로로 쓰러져야 한다.

    송정수가 낮은 한숨을 쉬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멀었는가.'

    기약 없는 싸움만큼 사람을 힘들게 하는 것은 없다.

    이지혁들이 언제 돌아올지는 그들도 알지 못한다. 돌아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 이들을 믿고 버티며, 또 버텨야 한다는 것이 송정수의 심력을 갉아먹고 있었다.

    '빨리 좀 돌아와 주게.'

    한 달을 버텨냈다고 해서 잘했다 말할 상황이 아니었다. 장담하건대, 방어선 한 축이 뚫리는 순간, 한강의 전선은 반파될 것이고, 부산까지 밀리는 데 채 삼 일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지금 그들의 싸움은 뚫리느냐, 뚫리지 않느냐의 싸움이다. 저 전선에 그들뿐 아니라 세계의 운명이 달려 있었다.

    "무겁군."

    송정수가 피로에 찌든 눈을 감았다.

    * * *

    D+45.

    "밥이 안 나온다고?"

    최창식은 어두운 얼굴로 말을 하는 소장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이제는 밥도 없대요?"

    "밥이 없는 게 아니라 수송에 문제가 좀 있는 모양이야. 밥이 없을 리가 있나."

    하지만 소장의 얼굴은 영 편치 않았다.

    '정말 식량이 모자라는 건가?'

    최창식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런 것 아니라니까. 우리가 잃은 것이라 해봐야 서울밖에 더 있는가. 서울에서 무슨 식량이 나온다고 서울 잃었다고 밥이 없겠는가."

    "그렇긴 한데……."

    "쌀이 창고에서 썩어나던 나라네. 한동안 밥이 모자랄 일은 없어."

    "음……."

    최창식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르긴 해도 그러려니 해야지 뭐. 안 그럼 어쩌겠는가.

    "그럼 굶어야 하나?"

    "전투식량은 있으니, 그거 하나씩 챙겨 들게."

    최창식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거, 맛없던데……."

    "그래도 그거라도 먹을 수 있으니 다행이지."

    "음, 그렇죠."

    심정적으로는 동의하기 힘들지만, 지금은 그렇다고 해야 한다. 사람들의 눈빛이 무척이나 좋지 않았다.

    식량이 떨어지는 순간, 세상은 아비규환이 될 것이다. 어설픈 생존욕이 아니라 정말 '먹지 못하면 죽는다'에 몰린 사람들이 무슨 일을 벌일지는 안 봐도 빤했다.

    "…슈퍼라도 가야 하나."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직 화폐가 통한다는 것이다. 편의점과 마트 등도 물건의 수급에는 애를 먹고 있지만, 물건이 있긴 했다.

    최전선에서 막아주고 있는 덕분에 그들의 삶도 나름은 유지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얼마나 갈지 모르지만.

    "정말 우리 괜찮은 걸까?"

    등 뒤에서 넋 나간 소리가 들려왔다.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 많이 의기소침해진 최씨가 입을 열었다.

    "정말 우리 이대로 다 죽는 건 아닐까? 이대로 말이야."

    최창식이 한숨을 쉬었다.

    "아저씨, 사람은 다 한 번은 죽어요."

    "이건 개죽음이잖아."

    "세상에 의미 있게 죽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

    최씨가 멍한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진짜 언제까지 이래야 하는 거지?"

    "얼마 안 남았어요."

    "네가 어떻게 알아?"

    "쯧."

    최창식이 왜 모르냐는 듯이 물었다.

    "아니, 아저씨들은 NDF도 몰라요?"

    "NDF 모르는 한국인이 어디 있어. 다 알지."

    "지금 걔들이 다 이거 해결하러 갔잖아요."

    "…도망간 거 아냐?"

    "에이 씨!"

    최창식이 짜증을 냈다.

    "그 양반들 데리고 간 사람은 후퇴를 모르는 인간이라니까! 또라이라서 도망도 안 가요."

    "그, 그래?"

    "네. 그러니까, 그 양반들이 돌아올 때까지만 버티면 돼요. 그다음에는 결론이 나겠죠."

    "결론?"

    "저놈들이 다 죽든가, 우리가 다 죽든가."

    "……."

    살벌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은 최창식이 기지개를 켰다.

    "가요. 전투식량이라도 먹어야지. 먹어야 일하죠."

    * * *

    D+50.

    "상황이 영 좋지 않습니다."

    크리스토퍼는 지도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마왕군의 이동을 실시간으로 표시하고 있는 지도를 보며 크리스토퍼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진척은?"

    "30% 정도라고……."

    "생각보다는 잘 버티고 있군. 이제 50일이 지났는데 30%라……."

    "면적의 의미입니다. 면적이 아니라 세력의 의미로 본다면……."

    "알아. 그러니까 그 정도로 하자고. 자네 똑똑한 건 나도 아니까, 그렇게 자꾸 자신의 똑똑함을 증명하려 하지 않아도 돼. 때로는 그냥 멍청하고 싶으니까 말이야."

    "예."

    크리스토퍼가 시가를 자르고는 천천히 불을 붙였다.

    "제길, 더럽게 바쁠 줄 알았는데."

    마왕군이 국내에서 날뛰고 있는 상황이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저 전선을 계속해서 바꾸면서 후퇴하고, 은근히 병력을 밀어 넣어 마왕군이 서부로 향하지 않게 하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연락도 없나?"

    "예."

    "제기랄, 소식이라도 한 번 전해 주면 이리 답답하진 않을 텐데… 그것들, 설마 다 죽은 거 아냐? 다른 차원에서 실력을 쌓고 온다는 게 말이나 되냐고?"

    "국장님……."

    "제기랄!"

    시가를 들고 있는 크리스토퍼의 손이 떨렸다.

    그가 얼마나 막중한 부담감을 느끼고 있는지는 그 본인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알지 못할 것이다.

    "한계가 오고 있어."

    지도를 바라보는 크리스토퍼가 초조한 얼굴로 손톱을 물어뜯었다.

    "한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크리스토퍼가 지도 바로 앞으로 걸어가더니,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이대로는 안 돼. 이대로는 버틸 수가 없어. 이제는 다른 방법이 필요한 시점이야."

    "하지만 가용한 방법이……."

    "마왕들의 동향은 어떻게 됐지?"

    "움직임이 딱히 포착되지는 않고 있습니다."

    "그래?"

    크리스토퍼가 미간을 좁혔다.

    지난번 사태 이후로 마왕들이 보이지 않고 있다는 것은 확실히 생각할 거리를 만들어주었다.

    "그럼 도발을 한 번 해보자고."

    "예?"

    "강하고 확실한 걸로 말이야."

    크리스토퍼가 미소를 지었다.

    * * *

    D+60.

    "더는 버티기가 힘듭니다."

    "버티기가 힘들다고?"

    국방부 장관의 말에 송정수가 얼굴을 굳혔다.

    "어째서인가?"

    "…피해 누적이 너무 큽니다."

    "어느 쪽의 피해가 크냔 말일세."

    송정수의 얼굴에 짜증이 묻어났다.

    평소 같으면 정당한 보고에 짜증을 내는 송정수를 탓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의 얼굴을 보고도 탓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연일 계속된 격무 때문인지, 송정수의 얼굴은 정상적인 사람의 몰골이 아니었다.

    '빌어먹을.'

    말이 머리로 잘 들어오지 않는다고 생각한 송정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잠시."

    "예."

    "조금만 기다리게."

    회의실 한쪽에 마련되어 있는 화장실로 향한 송정수가 세면대에서 물을 틀어 얼굴을 씻었다.

    '쓰러질 수도 있겠어.'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이계에서의 경험으로 보통 인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체력을 얻은 송정수이지만, 연일 계속되는 격무는 그런 그마저도 지치게 만들고 있었다.

    '이대로는 다른 사람들도 못 버텨.'

    체력의 차이를 이해하고 있다 보니 그간 업무량을 적당히 조정할 수 있었다. 윤영민이 맡고 있는 일은 그의 반의반도 안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윤영민은 폐인 가까운 몰골이 되어 있었다.

    '제대로 잠을 잔 게 언제지?'

    중간중간 잠깐씩 눈을 붙이고는 있지만, 일주일 내에 취한 잠을 다 합쳐도 채 열 시간이 되지 않는 느낌이었다. 그 자신이야 어찌어찌 버틴다지만, 다른 이들은 누적된 피로로 인해서 거의 좀비와 다를 바가 없었다.

    더욱 큰 문제는 사람이란 건 체력이 떨어지면 판단력도 떨어지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큰일 나겠군.'

    한 번의 판단이 대세를 바꿀 수가 있는 상황이다. 수많은 가지처럼 뻗은 선택지들 중 무엇을 선택하는 것이 가장 옳은 방법인가를 순간적으로 가려내야 하는 상화에서 이런 식으로 머리가 흐려지는 것은 최악의 결과를 불러낼 수도 있었다.

    얼굴로 흘러내리는 물기를 수건으로 닦아낸 송정수가 머리를 휘젓고는 밖으로 나왔다.

    "미안하네."

    "아닙니다."

    "그래, 계속 이야기를 해보지. 더 이상은 버틸 수가 없다고?"

    "예."

    찰칵.

    담배에 불을 붙인 송정수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뭐가 문제인가?"

    "문제가 되지 않는 부분을 찾는 것이 먼저일 것 같습니다."

    국방부 장관이 한숨을 내쉬었다.

    "보급의 문제, 병력의 문제, 진지의 문제…….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당장 후퇴했을 겁니다. 이제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후퇴를 하든가, 거기서 모두 죽든가 둘 중 하나입니다."

    "후퇴하면 대안은?"

    "대전에 새로운 진지를 구성합니다."

    "이보게."

    송정수는 막 국방부 장관을 나무라려다가 그의 눈에 짙게 배어 있는 다크 서클을 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내가 자네 상급자는 맞겠지?"

    "예? 물론입니다."

    "그럼 가게."

    "네?"

    "가서 세 시간만 자고 오게."

    "…총리님?"

    "이런 말을 하면 기분이 나쁘겠지만, 자네는 지금 정상적인 판단이 안 되는 상황이야."

    "저는 멀쩡합니다."

    "물론 멀쩡하겠지. 자네에게 이상이 생겼다는 게 아니라 과로라고 하는 걸세. 가, 가서 딱 세 시간만 자고 와. 이 옆에 수면실이 있네. 이러고 있는 시간도 아까우니, 당장 가서 세 시간을 자란 말이야."

    "제가 빠지면 지휘 계통에 혼란이 옵니다."

    "내게로 다 돌려."

    "하지만!"

    "그만."

    송정수가 국방부 장관의 말을 막았다.

    "자네의 능력을 의심하는 게 아닐세. 다만, 지금은 수면이 필요하다는 거야.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나?"

    국방부 장관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잠이 쉽게 오겠습니까?"

    "눕는 순간 잠이 오기 마련이지. 이미 한계니까. 패배해서 죽나, 잠을 못 자서 죽나, 죽는 건 매한가지이니 그냥 좀 자게. 난 지금 이렇게 낭비할 시간도 아깝다네. 세 시간 뒤에 다시 보고 듣지. 알겠나?"

    "…예."

    "그럼 나가봐."

    비척비척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는 국방부 장관을 보며 송정수가 한숨을 쉬었다.

    '다들 한계야.'

    이제껏 버텨온 것도 대단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처음 미국이 예상한 것 이상으로 한국은 잘 버티고 있었다. 물론 전방의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아가고 있지만 말이다.

    "사람이니 어쩔 수 없지."

    쉬지 않고 싸우고 있는 것은 그들뿐만이 아니다. 전방의 병력들 역시 제대로 된 휴식을 보장받지 못한 채 두 달째 싸우고 있었다.

    체력도 체력이지만, 두 달 동안 무자비한 살육의 현장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는 점도 문제다. 심리학 상담을 받을 수 있도록 최대한 지원을 하긴 했지만, 상담이 끝나자마자 총을 들고 전선에 바로 합류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어떠한 심리 치료도 의미가 없었다.

    이미 프레깅과 아군 살해가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자포자기하여 총기 난사를 하는 경우도 허다하고, 맨몸으로 몬스터들에게 돌격하는 사례도 나타나고 있었다.

    '그러니 방어선을 물리자는 말도 틀린 말은 아니지.'

    더 유리한 상황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곳을 탈출해 나간다는 심리적 안정성을 주고 싶은 걸 거다. 병사들은 '이곳이 뚫리면 우리는 모두 죽는다'와 '우리 뒤에 있는 이들도 모두 죽는다'는 중압감을 안고 싸우고 있을 테니까.

    "KSF의 피해도 심각한 모양입니다."

    "오셨습니까?"

    송정수가 고개를 들어 바라보자 윤영민이 회의실 안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참모본부 쪽에서 연락이 왔는데, 능력자들의 피해가 너무 커서 전열을 유지하는 것이 한계에 다다랐다고 하는군요."

    "…알고 있습니다."

    송정수가 한숨을 쉬었다.

    그만큼 저쪽으로 연락하지 말라고 했는데, 또 어느 놈들이 핫라인으로 들어간 모양이다. 윤영민이 핫라인을 적극 활용하라고 말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대통령도 사람이다.'

    자신들은 하나의 보고를 하는 거지만, 여기저기의 보고가 쌓이다 보면 윤영민은 하루에도 수백 통의 핫라인을 받아야 한다. 낮밤 없이 쏟아지는 보고에 조금의 틈도 나지 않는다.

    최근 들어 송정수가 핫라인을 다 잘라 버렸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연락을 하는 이들이 있었다.

    송정수는 아닌 것은 절대 아니라고 하는 사람이지만, 윤영민은 여지를 주는 사람이기에 송정수를 기피하는 것이다.

    "대책이 필요합니다."

    "알고는 있습니다만."

    송정수가 한숨을 쉬었다.

    그 대책이라는 것이 고민한다고 나오는 것이면 이리 고생도 하지 않을 것이다.

    '한정된 물자라는 말이 이리 와 닿을 줄이야.'

    자원과 재화에는 한계가 있다는 말. 그 빤한 말이 실제적으로 와 닿고 있었다.

    병력이 모자라면 보충을 해야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은 더 이상의 병력이 없었다.

    이건 컴퓨터 게임이 아니다. 병력이 모자란다고 무작정 생산할 수도 없었다. 일반 병력이라면 대충 가용한 인원에게 짧은 군사훈련을 시키고 전열에 처박는 식의 미친 짓을 통해 숫자라도 보충할 수 있겠지만, 능력자라는 건 훈련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미 한 번 병력이 한계에 달해 일본과 미국에 지원을 받은 상황이다. 그런데 여기서 또 어떻게 능력자들을 짜낸다는 말인가.

    기가 막힌 점은 이미 한강 전선에는 중국의 능력자들도 일부 들어와 있다는 것이다. 한국 전선의 중요함을 이해한 각국에서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병력을 짜내서 지원하고 있었다.

    중국 산동성의 자치부에서도 한국 전선을 유지하기 위해서 없는 와중에 능력자들을 보내주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여기서 더?

    대체 뭘 더 해야 한다는 말인가.

    송정수가 얼굴을 감싸 쥐었다.

    "빌어먹을, 대체 언제 오는 거야!"

    콰앙!

    불안이 극에 달하자 이지혁에게로 화살이 돌아갔다.

    "그들을 탓해서는 안 됩니다."

    "알고는 있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그들은 세계의 운명을 어깨에 짊어지고 있다는 중압감과 싸우고 있을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들을 탓해서 되겠습니까?"

    '빌어먹을, 무슨 정인군자도 아니고.'

    송정수가 깊이 한숨을 쉬었다.

    알고는 있다. 알고는 있지만, 원망할 대상이 하나쯤을 필요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는 떠나면서 우리에게 가족을 부탁한다는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떠난 사이에 대한민국이 어떻게 될지 예상을 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하지 않고 떠난 그의 마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겠지요."

    송정수가 소파에 등을 기댔다.

    '하지만 더 이상은 방법이 없어.'

    버티고 버텼다.

    할 수 있는 것을 모두 했고, 민간인들을 강제로 징발하여 보급을 위해서 활용하고 있다. 총력전의 개념으로 모든 산업구조를 전투용으로 교체하고 대체하여 돌리고 있는 것이 지금 대한민국의 상황이다.

    '이긴다고 해도 문제다.'

    산업구조가 완전히 박살 났다. 이대로는 전쟁이 끝난다고 해도 예전의 영화를 찾으려면 몇 십 년이 걸려야 할지 모를 판이다.

    문제는 거기까지라도 가면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대책이 필요한데, 대책이."

    윤영민이 한숨을 쉬었다.

    "이리 우는소리를 늘어놓을 시간이……."

    그 순간,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안으로 들어온 이가 다급하게 말했다.

    "미국입니다."

    "연결해."

    비서가 나가기도 전에 비전에 크리스토퍼의 얼굴이 나타났다.

    - 꼴이 말이 아니시군요.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요?"

    윤영민이 비전 건너편으로 나타난 크리스토퍼의 얼굴을 보며 나직하게 웃었다.

    자신들은 그나마 사람 몰골을 유지하고 있는데, 크리스토퍼는 그사이 몇 년은 삭아버린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겠다.

    '그렇겠지.'

    그가 처리해야 할 정보량을 생각하면 눈을 감았다가 뜰 시간도 없을 것이다.

    윤영민은 결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크리스토퍼쯤 되는 사람이니까 어떻게든 버텨내는 것이지.

    "무슨 일입니까?"

    하지만 안쓰러운 것은 안쓰러운 것이고, 일은 일이었다. 지금은 쓸데없는 생각을 떠올릴 시간마저도 줄여야 한다.

    - 한 가지 허락받고 싶은 일이 있어 연락드렸습니다.

    "허락이라고 하셨습니까?"

    송정수의 얼굴이 급격하게 굳어갔다.

    그가 그들에게 허락을 구할 만한 일은 없다. 굳이 있다면 한반도에 투입된 병력을 다시 가져가는 것 말고는 없다. 하지만 그래서는 한반도의 전선이 완전 붕괴되고 말 것이다.

    지금도 미국과 일본의 지원으로 겨우 버티고 있는 상황이다. 항공모함에서 전투기가 지원되고, 후방에 마련된 주한미군 진지에서 폭격기가 날아드는 상황이 아니라면 이미 전선은 한 달 전에 뚫렸을 것이다.

    "병력은 못 드립니다."

    - 그게 아닙니다. 안타깝지만 그들을 데리고 온다고 해서 이쪽 상황이 나아지지도 않습니다. 항공기로 수송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나름 도움이 되겠지만, 그 많은 물자를 항공기로 수송할 만큼 여력이 있는 상황도 아닙니다.

    "그럼 뭘 허락받고 싶다는 거요? 이런 상황에 우리가 허락을 내려줘야 할 일이 있소?"

    크리스토퍼는 잠시 심호흡을 한 뒤에 이글거리는 눈으로 씹어뱉듯 입을 열었다.

    - 한반도에 핵을 투하하고 싶습니다.

    "이런 미친!"

    송정수의 눈가가 파르르 떨려왔다.

    * * *

    "지금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요? 핵이라니?"

    - 말 그대로입니다.

    "한반도를 지워 버리고 싶다는 거요?"

    - 진정하시지요.

    크리스토퍼가 살짝 손을 들어 송정수를 만류하는 시늉을 했다. 평소라면 그 동작 하나에도 여유와 익살이 넘쳤겠지만, 지금 크리스토퍼는 그 손을 들어 올리는 동작 하나도 힘겨워하는 것 같았다.

    "이미 핵을 썼다가 무슨 꼴을 당했는지 잘 알지 않소! 그런데 또 핵을 쓴다고? 괴물들의 손에 죽을 바에야 자살을 하겠다는 거요?"

    - 그때와는 상황이 매우 다릅니다. 이해하고 계실 텐데요?

    크리스토퍼가 부연을 시작했다.

    - 일단 마왕들의 움직임이 감지되지 않고 있습니다. 예전이었다면 전투기나 폭격기 등이 마수들의 주변에 접근하는 순간 마왕의 손에 박살이 났을 텐데, 개전 시작 후 두 달 동안 단 한 번도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이에 우리는 두 가지 가정을 하고 있습니다.

    크리스토퍼가 시가 끝을 잘랐다.

    - 마왕들이 모두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거나, 아니면 마왕들이 지금 사태에 개입할 수 없거나.

    "으음."

    송정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가장 우려하던 마왕들의 활동이 잦아든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애초에 두 달이면 한반도가 무너지고, 세 달이면 인류가 전멸할 것이라고 예상한 것도 마왕들의 활동을 감안하고 세운 시뮬레이션이 아니던가.

    '그러고 보면 희망적이지도 않군.'

    마왕들 없이 마수들만 상대하고 있는데도 이미 한계에 도달하고 있었다. 최전선에서 모두가 열심히 해주었기에 두 달은 버텼다고 자찬하고 싶지만, 실제로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럼 핵공격을 하더라도 마왕들이 나서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시는 거요?"

    - 그렇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저번과 같은 사태가 벌어진다면, 인류는 정말 멸망하오. 이번에는 막아줄 존재도 없지 않소?"

    이지혁이 있다면 시도해 볼 만한 일이다. 하지만 이지혁이 없는 이상, 삐끗한다면 세계가 핵 샤워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 그래서 나름 방법을 강구해 봤습니다. 우리가 파고들어야 할 점은 저들이 현대 무기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떨어진다?"

    - 네, 그렇습니다. 그들은 미사일로 날아오는 핵무기가 위험하다는 인식은 하고 있지만, 폭격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니 예전과 같은 방법으로 돌아가야죠.

    "으음……."

    일리가 있었다.

    지금도 한강 상공은 폭격기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 폭격기들은 딱히 제지를 받고 있지 않았다. 비행형 마수가 이상하리만큼 보이지 않고 있어서 무주공산이 된 하늘을 폭격기들이 누비고 있는 상황이다.

    - 역사상 유이한 인류의 핵공격은 투하였죠. 그 방법을 다시 사용하자는 겁니다.

    "리틀 보이 말이군."

    - 예, 그렇습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제 유이한 것은 아니었다. 중국이 쏘아올린 핵미사일들이 전 세계에 떨어졌으니까. 그걸 공격이라고 하기에는 뭐하기도 하지만.

    "가능하겠소?"

    - 가능성은 반반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대로 아무것도 안 하면 열흘을 버티기가 힘들 겁니다. 한국 전선도 마찬가지이고, 이쪽 본토도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어디 한 군데만 뚫려도 미래가 없다는 것은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렇지."

    송정수가 담배에 불을 붙이자 크리스토퍼도 시가에 불을 붙였다. 꼼꼼하게 불을 붙이지 못해 어설프게 불붙은 시가를 몇 번이고 빨아서 연기를 낸 크리스토퍼가 짜증 어린 얼구로 연기를 빨아들였다.

    '한계군.'

    정신적으로 몰려 있는 것은 자신들만이 아니었다. 크리스토퍼 역시 미치기 일보직전인 것 같았다. 문제는 그런 자가 입안한 저 맛이 가버린 계획 말고는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이 없다는 점이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가뭄의 단비처럼 들리는 이야기였다.

    병력으로 메울 수 없다면 화력으로 메워야 한다. 그리고 인류가 가진 최대의 화력은 누가 뭐라고 해도 핵이었다.

    핵무기로 상대를 타격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더없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불가하오."

    - 어째서입니까?

    "전선에는 우리 군인들도 있으니까. 자국민이 있는 곳에 핵을 떨어뜨릴 수는 없소.

    - 아니요.

    크리스토퍼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 핵이 향하는 곳은 전선이 아니라 전선의 뒤편입니다. 가능하다면 경계를 절묘하게 계산하여 한강 이북까지를 타격권 안에 넣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게 가능한 일이오?

    - 물론입니다. 첫째로 우리는 폭격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탄착 지점을 정확하게 형성할 수 있습니다. 오차가 1~2㎞ 정도 날 수는 있겠지만, 그 정도는 미리 계산할 수 있는 영역이죠. 그리고…….

    크리스토퍼가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다.

    - 지금 상황에서 큰 규모의 핵을 투하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러닌 생각하시는 것처럼 피해가 크지는 않을 겁니다. 기껏해야 전술핵무기급이겠죠.

    '기껏해야 전술이라…….'

    하고 싶은 말이야 너무 많지만, 딴지를 거는 것도 문제다. 가장 큰 문제는 대안이 없다는 것이다. 저 미친 소리가 달콤하게 들릴 만큼.

    "그런데 그걸 왜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오?"

    - 모르기 때문입니다.

    "모른다?"

    - 마수들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이미 우리는 북한에 생존자가 없다고 파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생존자라는 것이 부재한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은 아니니까요. 핵이 투하되는 순간, 살아남은 생존자는 모두 사망하고, 한동안 북한은 죽음의 땅이 되겠죠. 그리고…….

    크리스토퍼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 솔직하게 말해 대미지 컨트롤은 가능하지만, 방사능의 영역까지 모두 컨트롤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전방의 병력들이 일정 이상의 피해를 입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허허허허."

    송정수가 웃고 말았다.

    "그런 상황에서 핵을 투하하자고 하고 있는 거요?"

    - 다른 방법이 있습니까?

    "……."

    - 턴은 넘겨 드렸습니다. 결정하느냐, 마느냐는 순전히 이제 그쪽에 달린 겁니다.

    송정수가 이를 갈았다.

    '같이 죽자는 건가?'

    그가 결정해서 실행한다면, 성공하든 실패하든 그 책임은 온전히 그 자신에게만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크리스토퍼는 책임을 이쪽으로 떠넘기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까지 책임을 넘기려 하는 크리스토퍼가 증오스럽기도 하지만, 반면 상황을 모두 알면서도 선뜻 결정할 수 없는 자신을 돌아보면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지도 이해할 수 있었다.

    살아남아 역사의 죄인이 될 것인가,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명목하에 한반도가 마수로 뒤덮이는 것을 지켜볼 것인가.

    선택이 쉽지는 않은 문제였다.

    "그렇다면……."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윤영민이 입을 열었다.

    "내가 선택을 하면 그대로 시행되는 거요?"

    "대통령님!"

    - 그렇습니다."

    윤영민이 송정수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시행하시오."

    "각하!"

    얼마나 놀랐는지 이제는 쓰지 않아야 할 단어까지 입에서 튀어나오고 있었다. 송정수가 기겁을 하여 윤영민을 말리려고 했지만, 윤영민은 단호했다.

    "구차하게 살아남는 방법과 단호하게 죽는 방법이 있다면, 나는 구차하게라도 살아남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피해는 있겠지만, 전멸보다는 100배 낫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하지만 그에 따른 비난을 어떻게 감당하시려 합니까?"

    "비난이요?"

    윤영민이 싱긋 웃었다.

    "이런 시기에 대통령이 되었다는 것이 참으로 즐겁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이제는 그 대가를 치러야죠. 저는 아무것도 모르고 대통령이 된 사람입니다. 세상이 이리 변할 것이고,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이만큼이나 막중한 책임을 요구하는 자리인 줄 알았다면 얼씬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

    "실제로도 지금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제가 아니라 총리님이시지요. 경선에서 비열한 수작질과 선동으로 치고 올라간 저를 인정해 주시고 대통령으로 받아들여 주시고 게시잖습니까."

    "으음……."

    "이제 그 빚을 갚아야 할 시간이지요. 깜냥이 안 되는 인간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죄를 받아야 합니다. 저는 제가 대통령으로는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런 일이 터지는 것을 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입니다. 이런 저라도 총알받이는 할 수 있습니다."

    - 역사가 계속된다면… 한국은 몰라도 미국은 당신을 세계를 구한 결단을 내린 자로 기억할 것입니다.

    "그건 꽤나 듣기 좋은 소리로군요."

    윤영민이 희게 웃었다.

    "그리 결정이 났으니 시도해 주시오. 가능하다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주면 좋겠군요."

    - 명심하겠습니다.

    협상에 한참의 시간이 걸릴 것이라 생각한 크리스토퍼는 깔끔하게 결론을 내린 윤영민을 살짝 존경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만큼이나 핵이라는 것은 무서운 것이었다.

    인류가 개발해 놓고도 그동안 좀체 사용하지 못할 만큼 말이다. 핵을 사용할 수 있는 자는 인류의 권력에 정점에 달한 자들이다. 그런 이들조차도 현실적, 심리적인 이유로 꽁꽁 싸매 봉인해 두던 핵이 아닌가.

    현재 미국 역사상 가장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크리스토퍼조차도 망설여야 할 만큼 사용이 어려운 것이 핵이었다. 자국민이 피해를 받을지도 모르는 상황에 과감한 결단을 내린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 프레지던트께서 한 결단이 인류를 구원할지도 모릅니다. 존경을 표합니다.

    "쓸데없는 공치사는 됐소. 이왕 결정 난 것이니, 빨리 시행해 주시오.

    - 알겠습니다. 투하 시점은 차후 통보하겠습니다. 그럼.

    비전이 꺼지자 윤영민이 낮게, 아주 낮게 한숨을 쉬었다.

    "대통령님."

    "담배 한 대 주시겠습니까?"

    송정수가 빤히 바라보다가 가만히 담배 한 대를 꺼내 윤영민에게 내밀었다. 윤영민이 담배를 받아서 입에 물자 송정수가 불을 붙여주었다.

    "끊은 지가 오 년은 된 것 같은데……."

    윤영민이 씁쓸하게 말했다.

    "오늘은 피워야 할 것 같군요."

    "…그러십시오."

    "그런 눈으로 보지 않으셔도 됩니다. 지금 모두가 그 나름의 짐을 지고 싸우고 있는 중 아닙니까. 한국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가장 큰 짐을 지어야 할 겁니다. 게다가 이번 결정으로 모든 것이 잘 풀린다면 좋은 일이겠지요."

    "사람이란 건……."

    "압니다. 잘 해결되고 나면 나중에는 굳이 그때 핵을 투하해야 했느냐는 말이 나올 것이고, 희생자가 생긴다면 저는 증오의 대상이 되겠지요. 모르고 한 일은 아닙니다."

    윤영민이 재를 털며 자리에 앉았다.

    "알고 있어도 해야 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지금이 그럴 떄일 뿐입니다."

    송정수가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가 저 자리에 있다면 저리 과감하게 결정을 내릴 수 있었을까?

    아니, 절대 불가능할 것이다.

    처음으로 송정수는 저 자리에 앉은 것이 자신이 아니라 윤영민이라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주 망하라는 법은 없군.'

    최악의 시기에 어설픈 대통령이 자리에 앉아 있다고 생각했기에 굳이 총리 자리를 맡아가며 국정을 운영해 왔다. 하지만 그의 생각이 틀린 것이다.

    "문제는 이제 우린 마지막 수단도 사용했다는 겁니다. 이게 통하지 않거나, 통하더라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면 정말 더는 방법이 없어집니다."

    "…그렇겠죠."

    송정수가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창밖 세상은 그리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제 곧 달라지게 될 것이다.

    '이 사람아, 이제 한계네. 제발 좀 돌아와 주게.'

    이지혁이라는 남자의 빈자리가 너무도 크게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 * *

    D+65.

    "먹을 게 없다구요?"

    "아니, 없는 게 아니라 보급이 잘 안 되고 있는 거겠지."

    "그 말이 그 말 아닌가요?"

    "……."

    최창식은 대답을 하지 못하는 소장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솔직하게 좀 말씀해 주실 수 없나요?"

    "뭘… 말인가."

    "진짜 보급이 잘 안 되는 건가요, 아니면 식료품이 떨어지고 있는 건가요?"

    "그게……."

    소장이 우물쭈물했다. 주변의 사람들도 다들 날카로운 눈으로 소장을 응시하는 중이다.

    "아저씨들도 눈에 힘 풀구요. 소장님 잘못도 아니잖아요. 진실을 알고 싶은 거면 이런 식으로는 안 돼요."

    최창식의 말에 다들 서로를 마주 보더니 고개를 살짝 숙였다.

    "모르겠네, 사실 나도."

    "모른다라……."

    "일단 오늘은 공급이 어렵고, 내일쯤 다시 보급이 시작될 거라는 말을 들었을 뿐이네."

    "소장님도 모른다는 거네요?"

    "그렇지."

    "으음……."

    최창식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렇다면 소장만 탓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하기야 뭘 알겠어.'

    그가 보기에도 소장은 이곳에서 일하는 이들을 관리하는 책임이 있을 뿐이지,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에 대해 빠삭한 정보를 가지고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저 자신들보다는 상부와 더 자주 접촉하는 사람이기에 정보라도 조금 있는가 생각했을 뿐, 최창식이 보급을 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그런 사정을 이 작은 공장의 소장에게까지 일일이 설명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보급이 잘 안 될 이유가 없지.'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후방에 폭탄이 떨어진 것도 아닌데 잘되던 보급이 갑자기 어려워질 이유가 없었다.

    "소장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난 잘 모른다니까."

    "사실 말고 생각이요."

    "생각이라……."

    소장이 불안한 눈으로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폭동 같은 건 안 일으켜요."

    최창식의 말에 소장이 움찔했다.

    "상식적으로 폭동을 일으키려고 해도 어디 뺏을 게 있어야 일으킬 것 아니에요. 이미 마트고 편의점이고 식품이 없다는 걸 다 아는데, 그런 거 해서 뭐해요. 비누나 샴푸 털 것도 아니고."

    "그렇겠지."

    소장이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느꼈는지는 모르겠지만, 얼마 전부터 배급이 점점 줄고 있었거든."

    "잡곡이 나온다든가."

    "그래, 그랬지."

    소장이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 생각인데… 생산이 완전히 멈춘 것은 아닐 거야. 그런데… 창고의 재고가 떨어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은 좀 들더라고."

    "재고요?"

    "쌀이라든가 이런 것 있잖아."

    최창식이 조금 멍한 얼굴로 소장을 바라보았다.

    "쌀이 떨어져요?"

    이게 무슨 황당한 소리라는 말인가.

    "아니, 이 일이 있기 전만 해도 쌀이 창고에서 썩어난다고 농가 지원을 해야 하니, 쌀 보관료가 몇 조니 하는 말을 해 대더니, 쌀이 떨어졌다구요?"

    "그때야 무역이 돌 때니까."

    소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당시만 해도 쌀이 뭐 그리 중요했나. 빵 먹는 게 반이고, 면 먹는 게 반이고 그랬지. 그런데 지금은 쌀이 아니면 먹을 게 없지 않은가."

    최창식은 말문이 막혔다.

    "전투식량이 어쩌고 하지만, 그거야 전방에 있는 애들 이야기고… 애매하게 뒤쪽에 있는 곳까지는 돌릴 수가 없는 거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제 겨우 서울을 잃은 것뿐인데 식량이 없다뇨."

    "그래서 그냥 추측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리고 이유가 잘못됐다고. 서울이 없어져서 식량이 사라진 게 아니라, 무역이 중지되어서 식량이 없는 거야. 그동안 우리나라에 식량을 수출하던 국가들이 거래를 다 멈췄지 않은가."

    "아……."

    "물론 다 떨어지지는 않았겠지. 그래도 우리도 농사짓는 사람들이 한둘도 아니었는데, 설마 두 달 사이에 식량이 떨어지기야 하겠어?"

    "그러니까요."

    "문제는 식량을 가진 사람들이 그걸 팔려고 하겠냐는 말이야."

    "왜 안 팔아요?"

    "자기들도 먹어야 할 것 아냐. 지금 이런 상황에서 내가 돈이 있다고 식량을 살 수 있다는 보장이 없는데, 누가 그걸 돈 받고 팔려고 하겠어."

    "……."

    최창식은 순간 말문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그런 식으로는 생각을 전혀 해보지 못했다.

    "아니, 보통 다른 나라들이 전쟁한다고 식량이 없다는 이야기는 못 들어봤는데?"

    "어떤 전쟁도 이처럼 전 세계가 말려 들어가지는 않지. 보통은 전선만 문제고, 뒤쪽은 문제가 없는 경우가 많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가 않잖아."

    "……."

    "전 세계가 다 말려 들어간데다 지금은 안전하다고 할 수 있는 곳들도 언제 문제가 생길지 모르지. 그리고 애초에 세계적인 전쟁이 벌어지던 시기에는 우리처럼 수입에 식량을 의존하지 않았으니까. 전쟁이 이리 전면전으로 길게 벌어지는 것에 대해서도 대비를 안 하는 편이고."

    "그럼 어떻게 해야 해요?"

    최창식이 멍청하게 묻자 소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뭐 알겠나. 다만, 정부가 생각이 있으면 곧 해결책을 내놓겠지. 식량을 강제 징발한다든가, 뭐 다른 수를 내든가."

    "…와, 골치 아프네."

    최창식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안 그래도 요즘 들어 나라가 망해간다는 것이 피부로 느껴지고 있었는데, 이제는 피부가 아니라 속살까지 뼈저리게 절감되었다.

    '식량도 없으면 이제 어떻게 버텨야 한다는 거야?'

    최창식은 불안함이 엄습해 왔지만 애써 그런 티를 내지 않았다. 사람들이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위기에 몰릴수록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그 상황이 급박하면 급박할수록 일상에서의 서열은 파괴되기 마련이었다.

    우습게도 멀쩡한 사회였다면 군대도 갔다 오지 않은 애송이 중의 애송이라고 무시받았을 최창식이 지금 이곳에서는 은연중에 사람들을 이끌어가는 처지였다.

    "식량 보급이 내일부터 재개된다는 건 확실한 거죠?"

    "…확실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일단은 그렇게 말했네."

    "그럼 기다려 보죠."

    "이봐, 창식이."

    "에이."

    최창식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손을 저었다.

    "무슨 말 하고 싶은지는 알겠는데요, 우리가 길길이 날뛰었다가 내일 식량이 떡하고 들어오면 우리 꼴만 우스워지는 거예요. 아시잖아요."

    "그래도 먹고사는 문젠데, 이게."

    "상황이 상황이니 이해할 수 있는 건 이해해야죠. 저도 학교에서 급식이 안 나온다고 하면 교장실 쫓아가서 안 그래도 없는 머리 다 뽑아버리겠지만, 지금이 그런 상황은 아니잖아요."

    "그렇긴 하지."

    "사람들 전부 다 열심히 하고 있는데 우리가 괜히 거기에 초치지 말자구요. 내일까지 기다려 보고, 그래도 보급이 안 나온다 싶으면 그때 가서 난리를 쳐도 안 늦어요."

    다들 수긍하는 눈치였다.

    "그럼 오늘 당장은 어떻게 하는가?"

    "다들 식량 조금씩 꿍쳐 둔 건 있잖아요. 오늘은 그거 먹자구요."

    불만이 가득한 눈으로 그를 보는 이들도 많지만, 굳이 입 밖으로 내지는 않을 듯했다.

    화를 내고 발악을 한다고 해서 뭔가 해결될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고, 괜히 문제를 일으켰다가는 거리를 순찰하는 총 든 헌병들이 뛰쳐 들어올까 겁이 나기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일도 보급이 안 되면 정말 큰일 날 텐데.'

    그나마 내일은 보급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다들 참는 것이지, 앞으로도 계속해서 보급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게 된다면 폭탄이 터지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움켜쥐고 일을 하며 버티는 이들에게 보급이 안 된다는 말은 버티고 버텨서 굶어 죽는다는 소리와 다를 게 없을 테니까 말이다.

    "일단은 밥 먹으러 가죠."

    "가져온 밥이 없는데 뭘 먹나? 마트도 다 텅텅 비었는데."

    "제가 라면 좀 빼놓은 게 있으니까. 오늘은 다들 라면 끓여 먹죠. 소장 아저씨, 화력 좋은 버너 같은 거 있어요? 많이 끓여야 할 텐데?"

    "식당에 국 끓이는 렌지 있을 거야."

    "그럼 준비해 달라고 좀 해주세요. 저는 사람 몇 데리고 가서 라면 가지고 올게요."

    "그래주겠나?"

    최창식은 씨익 웃고는 몸을 돌렸다. 그가 말을 하기도 전에 몇 사람이 그의 옆으로 따라붙었다.

    쿨하게 돌아서기는 했지만, 최창식의 얼굴은 결코 밝지 않았다.

    '정말 이제는 한계네.'

    요즘 들어 이곳저곳에서 소요가 일어나고 있다는 소리가 들려온다. 어제는 저쪽에서 시위를 하던 이들이 진압을 당했다든지, 오늘은 아래쪽의 공장이 징집당한 이들의 소요로 불이 났다든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이해할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국가적 비상사태에 한 사람의 힘이라도 모아야 하는 판국에 도움을 못 줄망정 시위를 한다는 것이 이해가 안 가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오죽 답답하고 힘들었으면 그랬겠냐는 생각도 들었다.

    최창식조차 나빠져만 가는 상황과 답답한 현실에 짜증을 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창식아."

    "예."

    옆에서 최씨 아저씨가 은근슬쩍 물어왔다.

    "어제 공장에 전기 끊기지 않았냐?"

    "그랬죠."

    "이번 주 들어서 지금 몇 번째냐, 이게?"

    "한 세 번은 된 것 같은데요? 요즘은 가정집 쪽으로는 밤에만 잠깐 들어오는 수준이잖아요. 여기가 무슨 북한도 아니고."

    "…담담하려고 애는 쓰는데, 자꾸만 불안하다."

    최창식이 한숨을 쉬었다.

    "저도 그래요, 아저씨."

    "그래? 나만 불안한 거 아니지?"

    "다들 불안해요. 그래도 참는 거죠."

    "…그래. 그렇다니 좀 위안이 된다."

    축 처진 최씨 아저씨의 어깨를 보면서 최창식은 이를 꽉 깨물었다.

    '이제 한계야, 형.'

    전방에서는 오늘도 사람이 죽어 나가고 있다. 후방에서 편하게 일이나 하고 있으면서 우는소리를 하고 싶지는 않지만, 힘든 것을 억누르는 것도 이제는 한계였다.

    이대로 상황이 더 나빠지지 않고 고착화된다고 해도 뒤에서 버티는 이들 역시 언젠가는 한계에 도달할 것이다.

    '전방은 훨씬 더 하겠지.'

    두 달 동안 지속되는 전투라니. 그건 정말 상상도 하기 힘든 일이었다. 당장 오늘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두 달 내내 느껴야 한다는 것 아닌가.

    육체적인 고통도 고통이지만, 정신적인 고통이 어마어마할 것이다.

    "너, 저번에 누가 돌아오기만 하면 이 상황이 다 끝날 거라고 하지 않았냐?"

    "…네, 그랬죠."

    "그거 믿어도 되냐?"

    최창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사람이에요. 그럴 사람이구요. 시간이 더 걸리면 걸릴수록 확실하게 준비를 해서 오는 거겠죠."

    "진짜지?"

    "에이, 저만 말한 거 아니잖아요. 저번에 윗대가리들이 저 데리러 온 거 보셨잖아요."

    "그랬지."

    "그러니까 조금만 더 버텨보자구요. 그러면 곧 형이 올 테니까요."

    "그렇게만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지만……."

    슬며시 말끝을 흐리는 최씨였다.

    최창식의 말만 믿고 힘을 낼 수 있는 상황은 아닐 것이다.

    그저 모든 것을 놓아버리지 않을 미약한 희망 정도나 될까?

    '다 끝난 뒤에 돌아와 봐야 소용이 없단 말이야.'

    언제나 절묘한 시기에 나타나던 이지혁을 생각하니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제발 이번에도 이전처럼 다 끝나 버리기 전에 도착해 주기를 최창식은 빌고 또 빌었다.

    * * *

    "갈겨! 갈기라고!"

    귓가에 들려오는 날카로운 목소리를 들으며 두경식은 욕지기를 내뱉었다.

    '빌어먹을, 갈겨야 한다는 거 모르는 사람 없으니까, 좀 닥치라고!'

    지금 신병들 데리고 전쟁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이곳에 있는 이들은 하나같이 두 달이 넘도록 이 전선에서 목숨을 걸고 있는 자들이다. 그런 이들에게 사소한 것 하나하나 지시를 내리는 게 자꾸 신경에 거슬렸다.

    '제길.'

    지휘관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다. 잘못된 것은 지휘관이 아니라 그런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서 불만과 짜증을 느끼는 본인의 마음 상태다.

    두경식은 심호흡을 했다.

    그가 잡은 MG-50의 손잡이가 차갑게만 느껴진다.

    "이 새끼야, 뭐해! 갈기라고!"

    두경식이 핏발이 선 눈으로 소리치는 이를 돌아보았다.

    "뭐야?"

    "빌어먹을, 좀 쫄지 말고 제대로 명령 내리란 말입니다. 아직 강변에도 도달 못한 거 안 보입니까?"

    "사거리 이내잖아!"

    "여기서 갈겨봐야 생채기도 안 난단 말입니다. 상사면 상사답게 좀 침착하십시오. 지휘를 내리시는 분이 그렇게 쫄아서 달달대는데, 뭘 믿고 싸우겠습니까?"

    "뭐? 지금 말 다 했어, 이 새끼야?"

    두경식은 다시 고개를 돌려 전방을 바라보았다. 등 뒤에서 악을 쓰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신경도 쓰지 않았다.

    '병신 같은 게.'

    이해는 한다. 이해는 할 수 있다.

    이 지옥 같은 전장에서 두 달이나 굴러먹었으니 제정신이 아닌 것이야 다들 똑같을 테니까. 잘난 듯이 소리치기는 했지만, 저 몬스터들이 강변에 도달하는 순간부터는 두경식도 이성을 잃고 난사해 대기 시작할 것이다.

    '몇이나 죽였을까?'

    두경식이 흐흐대며 웃었다.

    몬스터들을 얼마나 죽였냐고?

    아니.

    이성을 잃은 상태에서 처 갈겨 아군의 등을 갈아버린 것이 몇 번이나 될까가 고민의 요소였다.

    그런 두경식이 아직도 MG-50을 잡고 있어야 할 만큼 지금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화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지금!'

    두경식이 이를 악물고 방아쇠를 당겼다. 거치대에 고정되어 있는 MG-50이지만, 이렇게 갈겨 대기 시작할 때면 그의 몸을 통째로 뒤흔들어 버리는 느낌이 난다.

    덜덜 떨리는 팔을 느끼면서 두경식이 고함을 질렀다.

    "죽어어어어어어어!"

    제대로만 격중된다면 강철판도 가볍게 뚫어버리는 MG-50이지만, 두터운 갑피를 가진 몬스터들을 상대할 때는 화력의 부족을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저들은 하나하나가 전차 이상의 방어력을 갖추고 있다. 전차가 다가오는데 MG-50 같은 대공화기로 상대하려 드는 미친놈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두경식은 그 미친 짓을 해야 했다.

    그나마 그는 나은 편이다.

    그의 곁으로는 K-3이나 K-2 같은 분대나 개인화기로 그 미친 짓을 해야 하는 이들이 있었다. 아무런 쓸모가 없는 짓 같지만, 백 명이 한 몬스터에게 개인화기를 갈겨 대면 충격은 주지 못할지언정 저지력이라는 것이 발생한다. 아무리 대미지가 크지 않다고 해도 이만한 총탄의 세례가 선사해 주는 운동력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저지력이 발생하는 순간.

    피슝!

    깔끔한 소음과 함께 몬스터의 벌려진 입으로 저격이 날아든다.

    크아아아아!

    '갑피는 강해도 육체 내부까지 강할 수는 없다'는 기본적인 상식은 몬스터들에게도 어느 정도는 적용되었다. 물론 상대적으로 약하다는 개념일 뿐, 육체 내부라고 해서 지구에 사는 생물처럼 나약한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눈을 노려! 눈을!"

    '알아, 빌어먹을!'

    말이야 쉽지, 이게 무슨 저격총이라도 되는 줄 아는 건가?

    이만한 대형 화기로 상대의 눈을 노리라는 게 말처럼 쉬우면 이미 몬스터들을 싹 쓸어버렸겠지.

    욕지기가 흘러나왔지만 억지로 짓누른 두경식이 손가락이 부러져 나갈 만큼 힘을 주며 총구를 돌려 댔다.

    한강에서 몬스터들이 개미 떼처럼 몰려나오기 시작했다.

    몇 번이 아니라 몇 십 번, 몇 백 번을 보아온 광경이지만, 볼 때마다 머리털이 쭈뼛쭈뼛 서는 광경이었다. 저들은 수도 없이 공격을 해 댄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적응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흔한 공격일지라도 단 한 번만 제대로 막아내지 못하면 목숨이 위험하다는 중압감은 조금도 사라지지 않는다.

    "으아아아아아!"

    접근하는 몬스터들을 향해 불을 뿜던 총구가 아래쪽에 설치해 둔 방지턱에 부딪치며 더 이상 아래로 내려가지 않는다. 아군의 등에 총질을 하지 않기 위해 따로 설치한 방지턱에 총구가 걸린 것이다.

    '제길!'

    1차 방어선이 뚫렸다는 뜻이다. 바로 턱 밑으로 칼끝이 들이밀어진 기분이지만, 엿 같은 기분을 최대한 무시하고 공격할 수 있는 몬스터들을 향해 총구를 돌렸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믿는 것뿐.

    "가자!"

    순간, 아래쪽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온다.

    KSF와 타국의 능력자들이 몬스터들을 막기 위해 달려들고 있었다. 바리게이트를 뛰어넘으며 앞으로 달려가는 능력자들을 보니, 속에서 뭔가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지금 뒤에서 총이나 갈겨 대고 있으면서도 미쳐 버릴 것 같은 공포와 중압감을 느끼고 있는데, 저들은 맨몸으로 몬스터들에게 돌진하고 있었다.

    '제기랄.'

    고백하자면 그 역시 능력자에 대한 혐오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입대 이전에는 능력자들이 아무 노력 없이 얻은 힘을 가지고 너무 쉽게 살아간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곳에 오고 나서 그런 생각은 완벽하게 깨졌다.

    '절대 저렇게 되고 싶지는 않아.'

    이 뒤에서 공격을 하는 것도 힘들다. 힘겹다 못해서 한 번씩은 총구를 돌려 뒤에 있는 놈들을 다 쏴죽이고, 자신의 입에도 총구를 틀어박아 방아쇠를 당겨 버리고 싶은 충동을 몇 번이고 느꼈다.

    그런데 그 정도도 아니라 눈앞에서 달려드는 몬스터를 맨몸으로 막아야 한다니……. 그건 차마 사람이 할 짓이 아니었다.

    '저들이 아니면 못해.'

    그는 할 자신이 없었다.

    그렇기에 처음에는 능력자들에게 부정적이던 이들도 지금은 다들 그들의 노고를 인정하고 있었다. 위기의 상황이 닥치자 아이러니하게도 벌어진 상처가 봉합되고 있는 것이다.

    "뭐하는 거냐고!"

    이건 마치 컴퓨터 게임 같았다.

    몰려드는 적들을 죽어라고 쏴대고는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저지할 수 있는 몬스터의 수는 줄어든다. 아니, 그가 저지하는 양은 변함이 없지만, 그가 세운 방어선을 뚫고 들어오는 몬스터의 양이 점점 더 많아져 갔다.

    보통 게임에서는 이러다가 라이프가 떨어져 게임이 오버된다.

    하지만 이건 게임이 아니다.

    열심히 했다고 해서 '다음에 잘하면 되지'로 끝내 버릴 수 있는 게임이 아닌 것이다. 끝나는 것은 게임이 아니라 그의 목숨이고, 세계의 운명이었다.

    그 중압감을 누가 이해할 수 있겠는가.

    "빌어먹을, 이러다가 다 죽는다고! 뭐하는 거야!"

    콰콰콰쾅!

    그가 고함을 지르는 순간, 강 건너편으로 TOT가 작렬했다. 일제사격이 떨어지며 강 건너가 일순 매캐한 흙먼지의 폭발을 일으킨다.

    아울러 귀를 찢는 소음과 함께 그의 머리 위로 공기를 찢는 항공기의 파공음이 들려온다.

    폭격이 시작된 것이다.

    콰콰콰쾅! 콰콰쾅!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폭격이 떨어지는 시점에는 세상이 멈춘 듯한 느낌을 받는다. 너무 커다란 폭음이 가까이서 터지기 시작하면 귀가 멍해지고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그와 동시에 세상이 느리게 흘러가는 듯한 느낌마저 받게 된다.

    이제는 익숙하기까지 한 위화감을 느끼며 두경식이 총을 마구 갈겼다.

    "대응이 항상 늦어, 이 병신 새끼들!"

    화를 내지 않으려 해도 않을 수가 없는 상황이다. 벌써 두 달째 공방을 이어 나가고 있는데, 공격이 이루어지고 나서 제때에 폭격이나 포격이 이루어지는 경우를 거의 보지 못했다.

    공군과 포병이라는 것이 일반 보병처럼 적을 발견했다고 해서 바로 공격을 시작할 수 없는 병과라는 것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두 달이나 이 짓을 해 먹었으면 적어도 반응 속도라도 빨라져야 할 것 아닌가!

    "안 돼, 안 된다고!"

    두경식이 절망 어린 비명을 질렀다.

    뿌연 흙먼지 사이로 몬스터들이 이동하는 것이 보인다. 그만큼 포격을 해 대고 폭격을 퍼부었음에도 쓰러진 몬스터는 많지 않아 보였다.

    '강해지고 있는 거야.'

    이해할 수는 없지만, 몬스터들은 하루하루 강해지고 있었다. 전에는 결코 버틸 수 없던 급의 공격을 이제는 가벼운 경상 정도로 버텨낸다.

    바닥에 진득하게 피가 흘러내려 대지가 검게 물들고 있지만, 그 검은 대지 위에 몬스터들이 서 있다는 것이 중요했다.

    두경식의 눈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더 어떻게 하라는 거야…….'

    폭격을 하고, 포격을 하고, 거기에 능력자들까지 총동원해서 막아서고 있음에도 몰려드는 몬스터들의 수는 하루하루 지날수록 더더욱 늘어나고 있었다. 평양의 스팟에서 몬스터가 끊임없이 증원되고 있었다.

    저들 역시 몬스터들을 공장에서 찍어내는 것은 아닐진대, 마계라는 것은 대체 얼마나 거대한 곳이기에 저만한 마수들이 저리 수도 없이 나온다는 말인가.

    전 세계에 존재하는 맹수를 모두 합친다고 하더라도 이 한 곳에 몰려 있는 마수들의 수만큼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세상에는 열 개에 가까운 스팟이 더 존재했다.

    '우린 정말 이길 수 있는 건가?'

    근본적인 의문.

    공포와 좌절 앞에서 정신이 무너진 것이 아니라, 지금 그는 그 어느 때보다 냉정했다. 그 냉정한 정신이 묻고 있었다.

    정말 이길 수는 있는 건가?

    이만큼이나 해 대고도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아니, 상황은 가면 갈수록 나빠지고 있었다.

    '대체 무얼 위해서 이렇게 싸워야 하는 거지?'

    결론은 하나뿐이다.

    그들은 싸우고 또 싸워서 모든 힘을 다 빼고는 결국 패배할 것이다. 그걸 알고 있으면서 그는 지금 정신이 붕괴될 압박을 이겨내며 싸우고 또 싸우고 있었다.

    이렇게 싸워서 남는 게 뭔가.

    결국엔 죽을 텐데.

    차라리 빨리 패배하는 것이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코에서 피가 흘러내린다.

    한 손을 들어 흘러내리는 코피를 쓱, 닦아낸 두경식이 충혈된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갈겨 버릴까?'

    어쩌면 그가 지금 편해지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총구를 뒤로 돌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 곳이 붕괴하는 순간 방어선은 연쇄적으로 붕괴하게 될 것이고, 방어선이 붕괴한다면 모두가 편해질 것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전부 엎드려! 당장! 하던 거 놓고 엎드려! 떨어진다!"

    떨어진다고?

    뭐가 떨어진다는 말이지?

    생각은 길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보니 이쪽의 지휘를 맡고 있던 상사가 바닥에 팔꿈치와 발끝만 대고 얼굴을 가린 채 엎드려 있었다.

    '설마?'

    익숙한 광경이다. 신교대에서 그도 몇 번이나 취해본 자세이니까.

    시작은 미약한 빛이었다.

    뭔가 저 멀리서 번쩍하는 것이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리 크지 않고, 그리 대단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오해였다.

    빛이 미약하고 작아 보인 것은 그 빛이 발생한 곳이 워낙에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 멀고 먼 곳에서 하늘을 향해 무언가가 솟구치기 시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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