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93화 (93/118)
  • [■] 그러니까 우리를 방패막이로 쓰시겠다? [■]

    ─────

    "들어갔다고 합니다."

    "…확인된 겁니까?"

    "확인은 되지 않았지만, 최정훈이 그리 말하고 연락을 끊었으니 별문제가 없다면 지금쯤은 모두 이동했을 겁니다."

    "그렇군요."

    윤영민은 가만히 소파에 등을 기대며 깍지 낀 손을 눈 위에 얹었다.

    낮은 침묵이 회의실을 채웠지만, 송정수는 굳이 입을 열어 그 침묵을 깨려 하지 않았다. 지금 윤영민이 얼마만 한 압박을 느끼고 있는지는 그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힘들겠지.'

    그 역시 느끼고 있는 바이지만, 한국의 정치인들은 이지혁에게 큰 빚을 졌다. 어떤 문제가 있든 간에 협상만 해내면 사태를 해결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마지막을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과 같다.

    다른 국가들이 절벽에서 버텨내고 있다면, 그들은 이지혁이라는 동아줄을 허리에 감은 채 절벽에 서 있는 것이다.

    한데 지금 그 줄이 끊어졌다.

    그러니 몸을 지켜주던 방탄조끼를 벗고 기관총 앞에 선 기분일 것이다.

    "그만한 일을 상의도 없이 결정해서 통보한다라……."

    윤영민이 중얼거리며 눈에서 손을 뗐다.

    "참 이지혁 씨다운 일처리네요."

    "그렇습니다."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는 건 알겠는데, 여기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평범한 인간이고, 버텨내기가 힘들다는 것 정도는 이해해주면 좋겠건만."

    윤영민이 한숨을 쉬었다.

    두 가지 기분이 들었다.

    하나는 이지혁과 그들 없이 마왕을 막아내야 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하는 불안함.

    그리고 또 하나는…….

    "어떤 의미로는 노아의 방주가 파견된 거군요."

    윤영민이 말하자 송정수가 씁쓸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타 차원으로 그만한 인원이 파견되었다는 것은 지구에 남아 있는 이들이 몰살당한다고 하더라도 인류가 멸종하지는 않는다는 뜻이 된다. 능력자 중에는 여자 성비도 상당하니까.

    "그럼 조금은 마음을 놓아도 되겠습니까?"

    "사실……."

    송정수가 난감하다는 투로 말했다.

    "그 사람들이 이지혁 씨 손에서 수련을 받는 건데, 이천에 가까운 인원이 들어갔다고 해도 그중 몇이나 살아 돌아올지……."

    "……."

    윤영민이 이해했다는 듯이 멍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없다고 생각해야겠군요."

    "그렇죠."

    "그럼 결국은 그들이 돌아올 때까지 어떻게든 살아남아 있어야 한다는 뜻인데……."

    윤영민이 앞에 놓인 냉수를 쭈욱 들이켰다.

    "총리님."

    "예, 대통령님."

    "솔직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가능하겠습니까?"

    송정수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그걸 누가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다시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똑똑.

    이번에는 다행히 외부에서 그들의 침묵을 깨주었다.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온 비서가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미국에서 핫라인이 들어왔습니다."

    송정수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냥 전화하라고 하지. 요즘 같은 세상에 그거 도청해서 써먹을 곳이 어디 있다고."

    중국은 박살이 났고, 러시아도 맛이 갔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들이 나누는 대화를 타국이 듣는다고 해도 정치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써먹을 곳이 있을 리 없었다.

    "연결합니까?"

    "네, 연결해요."

    비서가 밖으로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비전에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 반갑다는 말로 시작해야 할까요, 미스터 프레지던트?

    "솔직히 이쪽도, 그쪽도… 서로 간에 별로 반갑지는 않잖소."

    - 틀린 말은 아니군요. 사실 한국으로 연결하는 핫라인을 누를 때마다 심장이 벌렁거리는 느낌입니다. 생각해 보면 좋은 일로는 단 한 번도 연락을 해본 적이 없는 것 같군요.

    "그래서 이쪽도 별로 연락을 받고 싶지 않소이다."

    - 그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 사태가 잘 해결되기만 한다면 퇴역하고 나서 한국에 한 번 찾아가고 싶은 마음이었으니까요. 그때가 되면 기분 좋게 술 한잔할 수 있겠죠.

    "그건 환영이지."

    윤영민이 피식 웃었다.

    매일 얼굴을 마주하는 각료들보다 크리스토퍼가 더 친숙한 느낌이 든다. 아무래도 같이 사선을 건넜다는 동질감과 서로만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허수아비든 실권자든 결국 마지막을 본인이 책임져야 한다는 중압감은 느껴보지 않은 이들은 상상할 수 없는 것일 테니까.

    - 아무래도 상황은 우리에게 웃어주지 않는 모양입니다. 이제는 그들 없이 우리만으로 저 빌어먹을 마족 놈들을 막아내야 합니다.

    "안타까운 사실이지요."

    윤영민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막아낼 수 있을까?

    '막는 게 아니다. 버티는 거지.'

    전쟁이라는 개념은 이미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이 해야 할 것은 극단적인 방어전이다. 총력전의 개념으로 방어선에 모든 것을 투입하는 동시에 언제든 전선을 뒤로 물릴 준비를 해야 한다.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파오는 일이었다. 그리고 더 골치가 아픈 것은 그들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역량을 끌어모아 그 일을 가능케 한다 해도 막아낼 수 있는가는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이야기나 하자고 연락한거요?"

    - 아닙니다.

    "그럼 용건은?"

    그 순간, 비전 너머로 보이는 크리스토퍼의 눈빛은 더없이 가라앉았다.

    - 이 사실을 말씀드려야 하는가를 고민했습니다만…….

    "말하지 않을 거면 연락도 하지 않았겠지. 쓸데없는 이야기로 시간을 낭비하는 건 질색이오. 그걸 내가 좋아한다고 해도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는 것 같군. 말하시오, 미스터 맥클라렌.

    - 그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지혁 씨 등이 자리를 비운다는 이야기를 듣고 대충 시뮬레이션을 해봤습니다. 지금 같은 공세가 이어질 경우 어떻게 될 것인가 말입니다.

    송정수가 미간을 좁혔다.

    "쓸데없는 짓을……."

    때로는 모르는 게 나을 때도 있는 법이다. 해보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겠지만, 그 결과를 듣고 싶지 않은 것이 송정수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의 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음에도 크리스토퍼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 이지혁 씨 일행이 한 달 내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전 세계의 60%는 복구 불가 상태로 파괴됩니다.

    "60%라……."

    끔찍한 수치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희망적인 수치였다.

    그래도 그 정도면 멸망은 아니니까. 지구의 60%를 내주더라도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이득이라고 할 만큼 현재의 상태는 극단적으로 좋지 않았다.

    - 그리고 이지혁 씨가 두 달 내로 돌아온다면 전 세계의 80% 이상이 파괴되고, 석 달 내로 들어오지 않는다면 멸망입니다.

    "……."

    송정수는 눈앞이 암담해지는 것을 느꼈다.

    '석 달이라…….'

    100일.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다. 하지만 그 100일 사이에 인류의 멸망이 결정된다는 것은 너무도 가혹한 일이 아닌가.

    "그렇게나 급작스러운 것인가?"

    - 처음 시뮬레이션을 돌릴 때는 최소 1년 이상의 여유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리 급작스러워진 것이오?"

    - 못 느끼셨습니까?

    크리스토퍼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 이미 저들은 공세로 전환했습니다. 탐색전이 끝난 것이죠. 이전까지 같은 상황이었다면 1년은 물론이고, 최대 3년까지도 버틸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저들이 진심으로 밀고 들어오기 시작한 이상, 1년은커녕 반년도 버티기 힘듭니다. 희망적인 관측이라면 최대 반년까지도 걸어보겠지만…….

    크리스토퍼가 고개를 저었다.

    - 의미가 없습니다. 대부분의 도시가 파괴된 후 5%도 안 되는 인류가 도망을 다니게 되는 상황이라면 생존의 의미가 없습니다.

    "흐음……."

    - 인류의 생존이라고는 하지만, 원시시대로 돌아가서 돌과 창으로 싸우게 되는 세상이 된다면… 우리는 패배한 겁니다. 지금의 문명과 문화를 보존하는 형태에서 승부가 갈려야 합니다.

    '이미 반쯤은 날아간 것이나 다름없지만 말이지.'

    송정수는 헛웃음을 지었다.

    독일은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그 찬란하던 유산들은 잿더미가 되었다. 마족들은 건물 하나, 인간의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파괴하고 또 파괴했다. 마치 그 모든 것을 철저하게 파괴해야 그들이 승리한다는 듯이 말이다.

    마수들은 거의 의지가 없는 존재라 판명되었으니, 그 모든 것을 지시하는 것은 마족과 마왕들일 것이다.

    "그렇다면 최대한 살아남아야겠군."

    윤영민의 목소리는 공허했다.

    송정수가 가만히 관자놀이를 누르다가 입을 열었다.

    "이보오, 맥클라렌."

    - 네.

    "하나 물어도 되겠소?"

    - 물론입니다.

    "그쪽의 성향이라면 그저 숫자만 시뮬레이션 하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예상 지역도 있을 것 아니오?"

    - 예.

    "마지막에 살아남는 것은 일부 고산지대와 미국이겠지."

    크리스토퍼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지.'

    전 세계 전력의 절반을 가지고 있다고 평해지는 미국이다. 그런 나라에 단 하나의 스팟만이 떨어졌다는 것이 이미 불공평한 일이다.

    그러니 다른 모든 국가가 소멸할 때까지 미국은 버틸 것이다.

    "그럼 한국은? 얼마나 버틸 수 있소?"

    - 연락드린 이유가 그것입니다.

    송정수의 얼굴이 영 좋지 못했다.

    '좋은 말은 아니겠군.'

    냉정하게 말하자면, 이제 한국은 미국에 있어서 가치 없는 땅이 된 지 오래였다. 중국을 견제한다는 명목은 마왕의 강림과 중국의 붕괴로 유명무실해졌다.

    그러니 더 이상은 한국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런 그들이 굳이 연락을 해온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 저희의 계산대로라면 한국은 한 달을 버티지 못합니다.

    "…엿이나 처먹어, 양키 새끼야."

    참지 못한 송정수가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올렸지만, 크리스토퍼는 어깨를 으쓱했을 뿐이다.

    - 진정하시죠.

    "빌어먹을."

    이 상황에 잘도 진정하게 생겼다.

    - 그래서 우리는 한국에 지원을 하기로 했습니다.

    "지원?"

    뜻밖의 말에 송정수가 고개를 들었다.

    - 예. 지원입니다.

    크리스토퍼는 고저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해할 수 없군. 당신들이 우리를 지원해서 뭘 얻는다는 거지?"

    - 이유는 간단합니다. 아프리카의 스팟에서 나온 마수들이 중동으로 이동하기 시작했습니다.

    "……."

    - 명확해졌습니다. 이들은 점령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파괴를 하려는 것이죠. 모든 인간과 문명을 말살하고 나면 살아남은 문명이 있는 곳으로 이동합니다.

    송정수가 눈을 감았다.

    "다시 말하면?"

    - 예. 다른 모든 곳이 무너지면 미국으로 모든 마왕과 마족들이 몰려들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이대로 본토에 단 한 세력만 더 밀고 들어와도 미국도 못 버팁니다. 끝이죠.

    "허허허."

    송정수가 찢어질 듯 부릅뜬 눈으로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를 방패막이로 쓰시겠다?"

    - 방패막이가 아닙니다.

    크리스토퍼 역시 서서히 격양되어 가기 시작했다.

    - 현재 동아시아에는 두 개의 스팟이 활성화되어 있습니다. 지금 가장 위험하고, 시뮬레이션상으로는 가장 먼저 무너지는 곳이 한국입니다. 한국이 밀리고 나면 일본과 중국이 무너지고, 그 병력이 중동으로 합세하고 유럽으로 합세하게 됩니다. 그럼 결과는 간단하죠.

    크리스토퍼는 선언하듯 말했다.

    - 아시아와 유럽을 점령한 이들은 미국으로 밀려 들어올 겁니다. 멸망이죠.

    스산한 공기가 그들을 스치고 지나갔다.

    다른 이들에게서 나오는 멸망이라는 말과 크리스토퍼의 입에서 나오는 멸망이라는 말은 그 무게부터 달랐다.

    송정수는 나직이 침음하다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래서 뭘 어쩌겠다는 거요?"

    * * *

    - 저희가 어찌해야 할 건지는 너무 빤한 일이 아닙니까? 현 상황의 고착화입니다.

    "고착화?"

    - 한쪽으로 힘이 몰리는 순간, 세계는 도미노처럼 붕괴합니다. 두 곳의 세력이 몰려드는 순간, 지금 겨우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중동과 유럽, 동아시아, 그리고 미국이 차례로 붕괴하게 될 것입니다.

    "음……."

    이견의 여지가 없었다.

    한국이 그나마 버티고 있는 이유도 포방부라고 불릴 정도로 어이없이 강력한 지상화력의 힘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의 마족들이 전선에 합류하는 순간 어찌 되겠는가.

    방어선을 물릴 시간도 벌지 못하고 부산까지 일직선으로 뚫려 버릴 것이다.

    - 현재 모든 상황을 시뮬레이션했을 때, 가장 먼저 틀어막아야 하는 곳은 한국이라고 결론이 났습니다.

    "우리가 그만큼이나 위험하단 말이오?"

    - 위험하기로는 더한 곳도 있겠죠. 하지만 지금 한국이 뚫릴 경우, 벌어질 피해가 가장 큽니다. 이미 그곳은 지도의 끝입니다. 마족 놈들이 바다를 건너 이쪽으로 쳐들어오지 않는 이상은 반대 방향으로 가겠죠. 그럼 중국의 스팟과 합류해 중국, 인도를 정리하고, 중동으로 향하고 있는 세력과 합류해 유럽으로 몰려들게 됩니다.

    "…멸망이군."

    땅따먹기 게임을 하는 기분이겠지.

    전략 시뮬레이션을 해도 그렇다.

    어느 정도 동등하거나 전선을 구축하고 있는 상황이면 조금씩 밀리든가 밀든가 하는 상황이 연출되지만, 한곳이라도 뚫리고 전력 차가 기우는 순간, 그때부터는 순회 공연이 시작된다.

    한 덩어리로 뭉친 병력을 감당할 수 없게 되면 남은 것은 도주밖에 없었다.

    그리고 안타까운 사실이지만, 인간은 지구를 떠날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화성으로라도 가야 하나."

    -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니, 아니오."

    송정수가 가라앉은 눈으로 크리스토퍼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가에도 다크 서클이 선명했다. 아마 그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고통을 받고 있을 것이다. 한국만 신경 쓰면 되는 송정수와는 다르게 크리스토퍼는 세계를 신경 써야 하니까.

    "…평소 같으면 무슨 생각이냐고 따졌겠지만."

    이미 저 인간도 자국의 이득 같은 걸 생각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닐 것이다. 조그만 이득을 챙기려다가는 전 세계가 멸망한다. 그리고 그가 아는 크리스토퍼 맥클라렌이라는 사람은 그만큼 멍청한 자가 아니었다.

    대의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공통의 목적을 위해서 이제는 모두가 힘을 합쳐야 할 시간이다.

    "지금은 목적이 뭐든 간에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준다면 감사하다고 머리를 박아야 할 판이겠지."

    - 그런 대접은 바라지도 않습니다.

    "계획은 어떻소?"

    - 함대와 육군을 파견합니다. 함대에 전투기도 적재해서 보낼 생각입니다.

    "예상 이상이로군."

    - 그리고 일본 자위대 측에서도 지원을 할 것입니다.

    "자위대?"

    송정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만큼이나 지원을 해달라고 할 때는 입을 쓱 닦더니, 이제 와?"

    - 자국의 안전을 바라는 것은 모든 이들의 기본 행동 방침이겠죠. 다만, 한국이 뚫리게 되면 일본 역시 끝이라는 사실을 이해한 모양입니다.

    "거기에 만약 이 사태가 해결되면 일본을 지워 버리겠다는 협박까지 얹었을 것이고?"

    - 노코멘트하죠.

    크리스토퍼가 씨익 웃었다.

    '제길.'

    송정수는 씁쓸한 심정을 가눌 수가 없었다.

    이지혁이 힘을 잃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압박해 오던 미국이 이제는 도와주겠답시고 손을 내밀고 있었다. 상황이 시시각각 변하고 요동친다.

    '이런 게 정치라지만 말이야.'

    아무래도 좋다.

    나라에 이득이 될 수 있다면 크리스토퍼가 뱉은 침이 아니라 소변이라도 마실 수 있었다. 지금은 모든 것을 털어내고 웃어야 할 때였다.

    "그럼."

    송정수가 윤영민을 돌아보았다. 결정권은 그가 아닌 윤영민에게 있었다.

    "으음……."

    윤영민이 침음을 삼키고는 입을 열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입장으로서 이유가 어찌 되었든 도움을 주는 미국에 감사드리오."

    - 천만의 말씀이십니다, 미스터 프레지던트.

    "그리고 이왕이면……."

    윤영민이 조금 장난기가 어린 얼굴로 말했다.

    "별 쓸모도 없는 육상 자위대가 아니라 해상 자위대의 지원이 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만?"

    - 해상 자위대 말입니까?

    "함선에 따라서는 한강으로 진입하여 고정 포대로 활용할 수도 있고, 그게 아니더라도 해안선을 바탕으로 공격하기가 좋겠죠."

    - 좋은 의견입니다. 어차피 바닷속에서는 거의 게이트가 열리지 않으니, 가용한 모든 자원을 그쪽으로 지원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일본이 순순히 말을 따를까요?"

    - 미스터 프레지던트.

    크리스토퍼가 얼굴의 수염을 쓸어내리며 피식 웃었다.

    - 그건 우리나라의 특기라는 것을 잊지 않으셨겠지요?

    "좋은 대답 감사드리오."

    - 그럼 요구하신 사항들을 최대한 빨리 들어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 순간, 송정수가 말을 가로챘다.

    "하지만 해로로 이송한다면 시간이 보통 걸리는 것이 아닐 텐데?"

    - 우선적으로 7함대와 8함대가 동해상과 서해상으로 이동할 것입니다. 적재되어 있는 공군 병력만 하더라도 도움이 되겠죠. 육군과 그 외의 가용한 포대 등은 최대한 빨리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알겠소."

    송정수가 납득한 듯하자 크리스토퍼가 굳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 그리고 하나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만.

    "부탁?"

    - 미스터 최로부터 명단이 넘어왔습니다. 대부분이 한국인이더군요. 이들의 신병을 빠르게 확보해 주시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신병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오?"

    - 인류 최후의 보루가 움직이는 원동력이지요.

    인류 최후의 보루?

    그 말이 뭘 의미하는지를 이해한 송정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우리보다는 미국 측에서 보호하는 것이 낫겠지."

    -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마 대부분은 현재 벙커에 있을 테니, 얼마 걸리지 않을 것이오. 남은 인원을 수배하여 항공편으로 이송하도록 하겠소."

    크리스토퍼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의 책상에 올려져 있는 명단을 바라보았다.

    '생각도 못한 것을.'

    확실히 이건 중요한 문제였다. 그저 중요 인물의 지인들을 보호한다는 일차원적인 생각이 아니었다.

    이지혁이 이끌고 들어간 노아의 방주는 누가 뭐라고 해도 이지혁이 핵심이다. 그리고 이지혁의 성향상 NDF에서 그런 것처럼 그들이 지구로 돌아올 때는 그 인원들 모두가 이지혁의 철저한 수하가 되어 있을 확률이 높았다.

    '그런 이지혁의 의욕이 떨어지면 안 되지.'

    이지혁의 지인들이 대부분 사망한 상황이면 이지혁의 성향상 지구를 지켜야 한다는 의욕이 극도로 저하될 확률이 높았다.

    크리스토퍼나 각국 지도자들이 먼저 신경을 써야 하는 일이지만, 그들이 놓친 것을 최정훈이 캐치한 것이다.

    '이래서 최정훈이란 사람을 무시할 수가 없다니까.'

    크리스토퍼는 책상을 톡톡, 두드리며 빙그레 웃었다.

    애송이나 다름없던 녀석이 쑥쑥 커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국적을 초월하여 즐거운 일이었다.

    - 이제 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도 조금 이상하기는 하지만…….

    그의 얼굴에 어색함이 떠올랐다.

    - 낯부끄러운 이야기이긴 하지만, 세계의 운명은 여러분께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

    - 이지혁 씨로 시작한 인연이기는 하지만, 그동안 여러분과 수도 없는 이야기를 나누었죠. 다시 만나지 못하더라도 저와 미국이라는 국가가 여러분께 감사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주십시오.

    "악담 적당히 하시오, 미스터 맥클라렌."

    송정수가 피식 웃었다.

    "우린 안 죽을 테니까 말이야."

    - 그러길 빕니다.

    크리스토퍼가 가볍게 웃었다.

    송정수가 한 번도 보지 못한 부드러운 웃음이었다.

    - 그 말, 꼭 지키시길 바랍니다. 그럼.

    비전이 꺼지자 송정수가 침음을 흘렸다.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말이지.'

    한때는 이 나라의 권력의 정점을 향해 모든 정력을 소비하던 시절도 있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왜 그리 멍청한 짓을 했나 하는 생각부터 든다.

    권력을 잡는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을.

    그 한 줌도 되지 않는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지위를 잡는다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여행이라도 좀 가고 싶군."

    "같이 가도 되겠습니까?"

    "후후후."

    송정수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 보면 대통령님과도 한잔한 지 오래됐군요. 이번 일이 잘 끝나면 같이 술잔을 한 번 기울여야 할 텐데요."

    "일전의 술자리도 제대로 된 자리는 아니었지요."

    송정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를 견제하고 서로를 어떻게 이용해 먹을까를 고민하는 술자리는 이제 신물이 난다.

    "다 내려놓을 수 있는 때가 오면 좋을 텐데."

    "동감입니다."

    둘은 씁쓸한 얼굴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누릴 만큼 누렸으니, 이제 일을 해야 하는 거죠."

    "월급도 받아먹을 만큼 받아먹었으니까요."

    송정수가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비 오는 날의 탁주 한 사발이 더없이 그립지만, 이제 감상에 젖는 것은 끝이다. 그들의 상황은 감상에 빠질 틈도 없을 만큼 바쁘고 다급했다.

    "전선의 문제입니다."

    송정수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현재 한강 이남에 배치되어 있는 전선을 뒤로 슬금슬금 물릴 생각이었지만, 현재 상황에서 미 해군과 일 해상 자위대, 거기에 추가 물자와 육군이 보충된다면 희생을 조금 각오하고서라도 한강에 전선 고착화를 노려볼 수 있습니다."

    "국방부 장관과 상의해야겠군요."

    "아마 동의할 것입니다."

    총력전이라는 것은 원래 그런 거니까.

    가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활용하여 생산하고 싸워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선에서 고군분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생산이 제대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대로 뒤로 밀리기만 한다면 국내의 생산이 제대로 이루어질 리가 없었다. 지금은 해외로부터 탄약과 식량을 대규모로 지원받을 수 있던 한국전쟁 당시와는 그 양상이 다르다.

    이 많은 인원이 낙동강까지 밀리게 된다면, 보급 부족과 생산력 부족으로 말라 죽는다.

    "지킬 수 있다면 지켜봐야죠."

    윤영민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송정수가 천천히 담배 연기를 뿜어냈다.

    '정말 마지막 승부로군.'

    이제 남은 것은 하나다. 이지혁들이 돌아오기 전까지 자신들이 버틸 수 있는가, 아니면 버텨내지 못하는가.

    이지혁이 돌아온다고 해서 저들을 반드시 무찌를 수 있다는 보장은 없지만… 그나마 남은 희망은 이것뿐이었다.

    "후후후."

    쓴웃음이 났다.

    하필 자신들이 살아가는 시대에 인류의 존망을 건 싸움이 벌어질 줄이야.

    "인류가 망한다면 외계인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면 핵전쟁 때문이든가요."

    "어느 쪽이든 간에 이 전쟁에서 우리가 살아남는다면 역사의 한 줄을 장식할 수 있을 겁니다. 정치인으로서 그 이상의 영광은 없겠죠."

    "그런 영광 필요 없는데 말이죠."

    송정수가 전화를 들어 국방부 장관을 호출했다.

    그러고는 낮은 한숨을 쉬었다.

    이제 이 회의실 안으로 국방부 장관이 들어올 때까지가 그들의 마지막 휴식이 될 것이다.

    복잡하게 얽혀 들어가는 머리를 식히며 송정수가 눈을 감았다.

    '아무쪼록.'

    들리지도 않을 말이지만, 그래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돌아와 주게.'

    * * *

    D+3.

    "빌어먹을! 쏘란 말이야!"

    대한민국 한강 방어선의 상부를 맡고 있는 이공영 대령은 몰려드는 마수들을 보며 고함을 질렀다.

    "멍청한 대가리 새끼들!"

    개 떼처럼 몰려드는 마수들이 한강으로 꾸역꾸역 밀려들고 있었다. 이쪽 역시 무식하다시피 한 숫자로 방어선을 구축하고 죽어라 화력을 때려 박고 있지만, 위태위태한 전선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생각이 있으면 여기다가 방어선을 만들 생각은 안 했어야지!"

    인간을 상대로 한다면 한강 방어선은 분명 효과가 있을 것이다. 아무리 많은 수가 몰려온다고 하더라도 도하라는 것은 분명 리스크를 감수해야 하는 일이고, 한강 위로 배를 띄우는 순간 표적이 될 것은 분명하니까.

    물론 인간이라면 뒤쪽으로 상륙을 한다든가, 공수부대를 투하하는 식으로 교란을 하겠지만, 저들은 무작정 앞으로 돌진했다.

    일견 생각해 보면 아주 좋은 진지를 구축한 것 같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잠수합니다! 일부 잠수했습니다!"

    "빌어먹을."

    이공영이 지휘봉을 내리쳤다.

    "공습이 곧 올 거다! 조금만 더 버텨!"

    "총알이 안 박히는데, 어떻게 버팁니까?"

    "그럼 뒈지든가, 이 새끼야!"

    부관의 죽는소리에 욕을 내뱉은 이공영이 허탈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제길.'

    강이라는 것은 인간에게는 어떻게든 건너가야 할 것이 되지만, 마수에게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다.

    저 멍청한 짐승들이 그나마 본능이란 게 있어 헤엄이라도 친다면, 어찌 공격해 보겠지만, 강바닥을 걸어 몰려오는 마수들을 상대로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들의 화기는 깊은 강물을 꿰뚫고 바닥에 붙어 있는 마수들에게 피해를 줄 만큼 강하지 못했다. 덕분에 강을 가득 메우고 있는 강물은 마수들에게 보호막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강 건너에 있는 마수들을 향해 공격하다가 놈들이 물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하면 공격할 방법이 사라지는 것이다.

    "젠장."

    이공영은 물가에 몇 겹으로 쳐져 있는 바리게이트를 보며 치를 떨었다.

    그곳에 반쯤 널브러져 있는 KSF들을 보니, 속에서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씨발, 내 생전에 저 능력자 새끼들을 불쌍하다고 생각하게 될 줄이야."

    막을 수 없는 것들이 수면 위로 올라오니 방법이 없었다. 그저 능력자들을 강가에 배치해서 마수들이 육지로 진입하는 것을 막을 수밖에.

    등 뒤에서 쏟아지는 총탄을 피하면서 싸울 수 있을 리 없으니, 저격수를 제외한 일반 개인화기와 분대화기들은 상륙한 마수들을 공격할 수 없었다.

    순수하게 능력자들의 힘만으로 그들을 막아야 하는 것이다.

    "지옥이지."

    이공영이 이를 악물었다.

    할 수만 있다면 작전을 수립한 윗대가리 새끼들을 모조리 잡아서 저 전방으로 밀어 처넣고 싶은 심정이다. 지금이라도 고칠 수 있다면 다행이겠지만, 안타깝게도 이제는 방법이 없었다.

    강 뒤를 가득 메우고 있는 마수들은 그들이 방어선을 물리고 후퇴하는 순간, 보다 빠르게 전진할 것이다. 기껏 갖추어놓은 바리게이트와 진지를 포기하고 평지에서 저들과 맞부딪치는 순간, 대한민국 육군은 역사상 유래 없는 참패를 당하게 될 것이 빤했다.

    그야말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능력자들을 믿고 모든 화력을 강 건너로 쏟아붓는 일 정도였다.

    그런 의미에서 다른 건 몰라도 하나만큼은 인정할 만했다.

    "보급은?"

    "충분합니다! 계속 총탄이 날라져 오고 있습니다."

    "…씨발, 능력이 있다고 해야 할지, 능력이 없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네."

    이만큼이나 되는 화력을 쏟아붓고 있음에도 보급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하루 동안 쏟아낸 탄피만으로도 산을 쌓을 수 있을 정도인데, 그보다 더 많은 탄이 후송되어지고 있었다.

    '보급이랑 생산은 이렇게 잘해주는데, 왜 진지를 이따위로 잡았냐고!'

    대한민국은 이제 총력전 체제로 들어갔다. 가용한 모든 자원을 이용하여 탄을 생산하고, 전방에 쏟아부은 백만이 먹을 음식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피난을 간 인원들의 식량까지 공급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모든 것을 식량으로 바꾸고 있었다.

    '일본과 동남아시아 쪽에서 지원을 받는다는 말도 있던데.'

    외교력과 정치력은 인정하지 않으려야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설마 그 윤영민이 정말 전시에 최적화된 대통령일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그저 입만 산 군국주의자라고 생각했다. 과격파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의 윤영민은 역대 어떤 대통령이 이런 모습을 보일 수 있을까 의심이 들 정도로 최고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군사 상식은 빼고 말이야."

    이공영은 한강물 속으로 자꾸만 파고드는 마수들을 보며 악다구니를 썼다.

    "씨발, 처 갈기란 말이야! 그리고 지금 도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곳에는 빨리 대전차지뢰 매설하라고 해!"

    "예!"

    "공습은! 씨발, 이 공군 새끼들은 폭격기 다 엿 바꿔 먹었데? 언제까지 기다리라는 거야! 포병 연대 새끼들한테도 빨리 이쪽으로 쏘라고 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굉음과 함께 강 건너편이 폭염으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155㎜포가 쉬지 않고 불을 뿜는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곳에서 날아든 포탄이 연신 터지고 또 터진다.

    "…씨발, 포방부."

    저 화력에 투자한 돈으로 병사들을 좀 더 무장시켰으면 이미 세계 최정예 육군이 되었을 텐데.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개인화기보다 포가 더 도움이 된다는 것이 명백한 사실이었다. 이런 일이 벌어질 줄 알고 한 일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건너편이 초토화가 되었지만, 이공영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이제 올라올 텐데."

    요동치고 있는 한강을 보고 있자니, 소름이 돋았다. 저 빌어먹을 마수들을 물속에서 견제할 방법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미사일을 사용할 수도 있겠지만, 물속에서 터지는 미사일은 아무래도 폭발력에 한계를 보인다.

    그런 식으로 화력을 낭비하느니, 차라리 한강으로 접근하는 놈들에게 한 발을 더 먹이는 게 이득이라는 것은 이공영도 동의하는 바였다.

    어느 미친 장성 놈이 어뢰를 사용해 보자 해서 한강으로 투입한 소형 잠수함들은 하나같이 고철 덩어리가 되어서 한강 바닥에 수장되었다.

    대체 무슨 생각이면 한강으로 잠수함을 투입하자고 하는 미친 짓거리를 생각할 수 있는지가 의문이었다. 그것도 마수들이 우글우글거리고 있는 곳으로 말이다.

    "제길!"

    해상 자위대가 지원을 오기는 했지만, 당초 한강으로 진입시켜 고정 포대로 활용하자는 계획은 싸그리 폐기되었다. 한강은 이미 죽음의 강이 된 지 오래였다. 철새조차 내려앉지 못한다. 내려앉는 순간, 바닥에서 치솟아 오른 마수들이 개 뗴처럼 달라붙으니까.

    "제기랄."

    강기슭으로 마수들이 솟아오르자 능력자들이 고함을 지르며 공격을 퍼부어 댔다. 형형색색의 에테르들이 마치 불꽃놀이를 하는 것처럼 아름답게 빛을 내뿜는다.

    '지랄 맞군.'

    이공영은 철모를 꾹 내려쓰고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불평이야 하자면 끝이 없었다. 입으로야 욕을 내뱉고 죽는소리를 하지만, 이곳이 뚫리면 대한민국이 사라진다는 것은 그도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전선을 지키고 있는 모두가 알고 있을 것이다.

    소용도 없는 개인화기로 총열이 과열되어 터지도록 탄을 쏟아붓고 있는 이들도 다들 그런 심정일 것이다.

    들고 있는 총으로 피해를 주지 못한다면, 이로 물어뜯어서라도 이곳을 사수한다!

    그것이 이 전선에 있는 이들의 가슴속에 들어찬 사명이었다.

    "갈겨!"

    이공영의 고함과 포화 소리에 파묻혀 들어갔다.

    * * *

    D+5.

    "더럽게 많네."

    대전으로 이동한 최창식은 공장으로 투입되었다.

    그들이 하는 일은 이송된 철붙이를 공장 안으로 나르는 일이었다.

    대부분의 생산은 광양과 포항에서 이뤄지고 있지만, 전선에서 가까운 곳에도 생산 공장이 필요하다는 의견에 따라 포항에서 이송되어 온 고로가 대전에 긴급 설치되었다.

    평시라면 몇 달이 걸릴지 모르는 일이 전시라는 이유만으로 단 사 일 만에 끝나 버린 것이다.

    급하게 설치한 고로인 만큼 안전 문제가 있지만, 그 누구도 그 사실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고로가 터져 사람이 죽어 나간다고 해도 생산이 부족해서 전선이 뚫리는 것보다는 낫다는 암묵적인 공감대가 이루어진 탓이었다.

    "끄으으응!"

    크레인과 지게차가 쉴 새 없이 철광석을 날라댔다. 대부분의 일은 기계가 하고 있었다. 그러니 최창식 등이 해야 하는 일은 쉽게 말해서…….

    "이거 고물상이잖아?"

    산처럼 쌓여 있는 고철을 본 최창식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걸로 탄을 만들어도 되는 거예요?"

    최창식의 질문에 조광수라는, 얼마 전 안면을 튼 40대 남자가 대답을 해주었다.

    "아니면 뭘 어쩌겠어?"

    "그래도 목숨이 걸린 일인데, 좀 더 제대로 된 철로……."

    "어디서 그 철을 가져올 건데?"

    "…어?"

    "이게 우리나라만 치르는 전쟁이면 철광석을 수입해 오겠지만, 지금 무역이 다 막혔잖아."

    "…그렇죠."

    "전기도 부족하고, 조금 있으면 석유도 떨어진다는 말이 있는데, 철광석을 어디서 구하겠어? 우리나라에서 생산하는 걸로는 택도 없어. 지금도 풀로 돌아가고 있다고 하는데, 그걸로는 무리야."

    "그렇겠네요."

    상황이 생각보다 암울하다는 것을 직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조금 있으면 전방에서 쓴 탄피를 회수할 수 있을 테니까 조금 낫겠지."

    "…그거, 진짜 웃긴 이야기네요?"

    "왜?"

    "군대 갔다 온 형들이 그러더라구요. 막상 전쟁 나면 신경도 안 쓸 탄피 하나 때문에 별 난리를 다 친다구요. 그 탄피 하나 없어지면 부대 뒤집어진다면서요?"

    "그렇지."

    "막상 전쟁 나면 누가 그런 걸 신경 쓰냐고 하던데, 전쟁이 났는데도 탄피를 모아서 회수한다니까 웃겨서 그래요."

    "웃긴 것도 많다. 잔말 말고 빨리 날라. 우리라도 일해야지."

    "예."

    들에 진 지게에 고철을 한 짐 쌓아 올린 최창식이 지게를 메고 일어났다. 이걸 트럭으로 옮겨 싣는 것이 그들이 할 일이었다. 지게차나 크레인이 하면 금방 끝날 일이지만, 이곳에 있는 크레인과 지게차들도 현재 한시도 쉬지 못하고 철을 나르고 있었다.

    '엄청 뽑아대네.'

    저만한 철들이 다 공장으로 들어가는데, 그걸 다 소화하고 있다는 것이 신기한 일이었다.

    "전방은 괜찮데요?"

    "지옥이라는 말이 있더라."

    "…씨발."

    "어린놈이 욕지거리는."

    광수 아저씨가 최창식의 엉덩이를 툭, 걷어찼다.

    "이 형은 대체 언제 오는 거야?"

    "형이라니?"

    "…그런 사람 있어요. 돌아오기만 하면 저 빌어먹을 마수들을 한 번에 쓸어버릴 사람."

    "꿈꾸냐? 그게 가능하면 지금 이러고 있겠냐? 미국도 못 막아서 동부부터 중부까지 싸그리 다 털렸다고 하더라."

    "미국도 그 형은 못 이겨요."

    "그래그래,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슈퍼맨이나 손오공만 있었어도 우리가 이렇게 털리고 있지는 않을 텐데 말이다. 제길, 지금이야 이러고 버틴다지만, 조금 있으면 식량에도 한계가 올 텐데…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최창식이 등에 진 고철을 트럭 위로 쏟아냈다.

    '빨리 좀 와, 지혁이 형.'

    * * *

    노동이 노동일 수 있는 이유는 노동에 대가가 지불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경우는 경제적인 대가, 쉽게 말해서 돈이 벌리기 때문에 사람은 노동을 참아낸다.

    돈이 벌리지 않은 일이라고 해도 사람은 물질적인 무언가를 받거나 최소한 정신적인 만족감이라도 있어야 노동을 할 수 있다. 아무 대가 없이 반복되는 노동을 지속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일은 꽤나 끔찍한 일에 속했다.

    "으, 씨, 쇳가루."

    쇳가루를 얼마나 마셨는지, 입에서 신맛이 날 지경이다.

    노동의 강도는 보통이 아닌데, 딱히 수당이랄 게 지급되지 않는다. 그들이 받을 수 있는 보수는 오로지 그들이 일하고 있음으로써 전방에서 마왕들을 막아내는 것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위안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이걸 한다고 무슨 도움이 되는가'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날은 춥고 몸은 떨리는데, 뼛골 시리게 차가운 고철들을 챙겨 옮기는 일을 하고 있으려니, 힘들기도 하고 짜증도 난다.

    "에이, 씨발. 못해 먹겠네."

    콰다당!

    누군가 등에 지고 있던 지게를 바닥에 던져 버리고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를 탓하지 않았다. 한눈에 보아도 이런 일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 같았다.

    "아니, 빌어먹을. 차라리 전선으로 보내 달라고. 왜 내가 이런 일을 해야 하는 거야."

    "최씨, 공익 출신이라면서 전선은 무슨 전선이야?"

    "뭐? 훈련 배우면 몬스터들 상대로 뭐라도 할 수 있어? 어차피 총알받이 아니야?"

    "……."

    "차라리 전방에 가면 총이나 잡고 쏘면서 편히 있지, 이게 뭐하는 짓이냐고."

    "거, 말이 좀 심하네. 앞에서 열심히 싸우고 있는 사람들한테 편하다니."

    "내가 뭐 틀린 말 했어?"

    "진정해, 최씨. 왜 갑자기 그리 화를 내고 있어?"

    "빌어먹을, 돌아가는 꼴을 보라고."

    최씨가 바닥을 내려치며 말했다.

    "어차피 다 죽어! 어차피 다 죽는다고!"

    "……."

    "결과야 빤한 거 아냐? 당신들도 눈이 있을 거 아냐? 중국도 못 막았고, 미국도 못 막는 걸 우리가 어떻게 막겠다는 거야? 이 지랄을 해봤자 어차피 죽을 게 빤한데, 왜 이 고생을 해야 하는 건데?"

    "…이봐, 최씨."

    모두가 암묵적으로 꺼내지 않던 이야기였다.

    "막을 수도 있지. 중국 놈들이 못했다고 우리도 못한다는 법이 있나? 그놈들은 못 막았지만, 우리는 막을 수 있을 수도 있지."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요?"

    최씨가 바닥에 침을 딱 뱉고는 말했다.

    "빌어먹을, 우리가 할 수 있을 리가 있나. 미국도 못하는 걸 우리가 어떻게 해? 스팟인지 뭔지가 생겼다고 할 때, 빨리 다른 나라로 도망갔어야 하는 건데."

    사람들이 최씨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윗놈들은 벌써 다 도망갔다고. 내가 아는 놈이 그 쪽에서 일하는데, 이미 초반에 돈 있는 놈들은 다 도망갔다 그러더라고. 나라에서는 괜히 그런 이야기 했다가 불안감 조성할까 봐 쉬쉬하고 숨기고……."

    "이봐, 최씨. 너무 나갔어."

    "나가긴 뭘 나가요? 내가 뭐 틀린 말 했어?"

    최씨는 흥분이 가라앉지 않는지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먹을 거나 제대로 먹나! 내가 군대에서도 이렇게는 안 먹었어! 개밥이나 처먹으면서 이렇게 굴러서 뭐해!"

    다들 공감하는 눈치였다.

    보급에는 한계가 있다. 서울에서 대피난이 이루어지고 난 이후, 대한민국의 재계는 완전히 붕괴했다. 자체적으로 뭔가 만들어서 먹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결국은 국가에서 주도하는 보급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는 단 한 번도 이런 상황에 처한 적이 없다 보니, 전 국민을 먹여 살릴 여력이 없다는 점이었다.

    실제로 그게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이만한 피난민들에게 평소와 같은 식사를 제공하는 것은 무리였다.

    "어차피 죽을 건데, 이 개고생을 하면서 버텨야 하는 이유가 뭐냐고. 빌어먹을, 난 안 할래. 난 그냥 이러다가 죽을 거라고. 어차피 내가 여기서 열심히 한다고 해도 뭐 달라지는 거 없잖아. 우리가 여기서 탄을 보내고 안 보내고가 거기서 뭔 큰 영향을 줄 것 같아? 아닐걸?"

    최씨가 사람들에게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어차피 죽을 건데, 죽기 전까지 일개미처럼 일만 하다가 죽으라고? 나는 사양이야. 나는 이제 갈 거야. 갈 건데……."

    최씨가 은근한 얼굴로 사람들을 살짝 돌아보았다.

    "당신들은 어쩔 거야?"

    "응?"

    "당신들은 여기서 계속 그렇게 쇳가루 마시면서 일할 거야? 나 같으면 그런 멍청한 짓은 안 할 텐데?"

    "…그래도 동원된 건데."

    "망해 자빠질 나라 말을 들어서 뭐해?"

    "그래도……."

    최씨가 혀를 찼다.

    "어차피 다 죽는 건데, 미쳤다고 그 고생을 한다는 거야? 나는 갈 테니, 그럼 당신들은 죽을 때까지 일하라고."

    "이, 이봐, 최씨. 이쪽 바깥은 경찰들이 지키고 있잖아."

    "경찰?"

    최씨가 코웃음을 쳤다.

    "상황이 이렇게 된 마당에 그놈의 경찰이 무슨 상관이야! 사람 데려다 가둘 유치장은 있대? 경찰은 뭔 놈의 경찰!"

    최씨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말했다.

    "그러니까 같이 안 갈 거야?"

    "…같이?"

    "그래, 같이. 내가 당신들이 불쌍해서 그래. 여기서 이 개고생을 하느니, 차라리 같이 가서 편히 살자고."

    "……."

    사람들이 망설이는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서로 말을 안 했을 뿐이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은 그들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루하루 전선은 힘들어져 가고, 결국에는 막아낼 수 없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자포자기하지 않으려고 애를 써도 희망을 걸 곳이 없는 것이다.

    "정말 안 갈 거야?"

    "나는……."

    그때,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어이, 아저씨."

    "응?"

    고개를 돌려 자신을 부른 이를 본 최씨가 눈을 크게 떴다. 그보다 적어도 머리 하나는 더 커 보이는 청년이 인상을 쓴 채 그를 보고 있었다.

    "거, 어차피 해봤자 소용없다 싶어서 일하기 싫은 건 알겠는데요."

    "……."

    "그럼 그냥 혼자 조용히 빠져요. 괜히 일 잘하고 있는 사람들 선동하지 말고."

    "이, 이게……."

    원래는 '이 어린놈의 새끼가'라는 말이 나와야겠지만, 최씨도 상식이 있는 사람이고, 최창식을 보고도 그런 말을 할 용기는 없었다.

    그가 말한 대로 경찰의 영향력이 극도로 줄어든 상황이다. 사람을 잡아간다고 해도 제대로 가둘 곳도 없으니, 정말 격리해야 하는 상황이 아니면 눈을 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최창식 같은 이와 시비가 걸린다는 것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서기에는 자존심이 너무 상하지 않는가.

    "내가 무슨 틀린 말 했어?"

    "틀린 말 아니니까, 가라고.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구요."

    "뭐?"

    "아, 말귀를 못 알아 처먹나?"

    최창식이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최씨를 똑바로 보면서 말했다.

    "아저씨가 한 말을 똑같이 한 사람들이 누군지 알아요?"

    "…응?"

    "일제 시대 때 일제 앞잡이들이 아저씨처럼 말했답니다."

    "……."

    "어차피 광복 올 일 없는데, 일본에 협조하는 게 왜 나쁘냐구요. 그러고는 철저하게 일본 놈이 되려고 애썼다고 그러더라구요."

    최씨는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꼴통인 나도 역사 시간에 그 정도는 배웠는데, 아저씨는 누가 봐도 어디서 공부 좀 했을 것 같이 생겼으면서 왜 그런 걸 모릅니까?"

    "그, 그게 나쁜 거냐?"

    "누가 나쁘다고 했어요?"

    최창식이 파리 쫓듯 손을 내저었다.

    "나는 일제 앞잡이들도 딱히 나쁘다고 생각 안 해요. 그렇게라도 먹고살겠다는데, 뭘 어쩌겠어요. 솔직하게 나도 그 상황이었으면 앞잡이 됐을 수도 있는 거지, 뭐. 나카무라로 살 수도 있었겠죠. 그런데……."

    최창식의 얼굴이 실룩거렸다.

    "최소한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양심에 거리끼는 일이라는 자각은 있어야 할 것 아냐. 죄를 지을 거면 혼자 짓자구요. 괜히 다른 사람들까지 끌어들여서 죄책감 덜려고 하지 말고.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

    '곰같이 생긴 놈이 말도 잘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가요."

    "가라고?"

    "분위기 깨지 말고 저리 가라구요. 오고 싶으면 저 뒤에 가서 담배 한 대 피우고 나서 다시 와요. 아저씨 여기 있으면 지금 분위기 영 안 좋으니까. 얼른 가요. 뭐해요?"

    "아, 알았네."

    최씨가 떨떠름한 얼굴로 털레털레 한쪽으로 사라지자 최창식이 고개를 내저었다.

    "별사람이 다 있네, 진짜."

    "오, 학생. 진짜 말 잘하던데?"

    "…말을 잘해요?"

    입만 열면 예원이에게 털리기 바빴는데, 말을 잘한다라…….

    '그 마녀 같은 애 옆에 있다 보니 나도 레벨이 좀 올랐나?'

    최창식이 실실 웃을 때, 저 옆에서 관리소장이 그들 쪽으로 달려왔다.

    "빨리도 오네."

    저 아저씨 분명 어디 짱 박혀서 놀다가 소식 늦게 듣고 오는 것일 테지.

    최창식이 낄낄거리면서 지게를 다시 지려고 하는데, 소장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여기 최창식 씨가 누구예요?"

    "어?"

    자신을 찾는 목소리에 최창식이 고개를 돌렸다.

    "저요?"

    최창식의 얼굴이 의문으로 물들었다.

    "안 갑니다."

    최창식이 뭔 소리를 하냐는 얼굴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뭔가 알 수 없는 훈장을 잔뜩 단 군복을 입은 군인이 그를 보며 이해하기 힘들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안 간다구요?"

    "네. 안 가요."

    최창식이 코웃음을 쳤다.

    "남자가 쪽팔리게 나만 혼자 여기서 빠져나가라는 게 말이 돼요?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온 줄이나 아세요?"

    "…이봐요, 학생."

    "아뇨, 됐어요."

    최창식은 더 이상 들을 말이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최창식을 군인이 잡았다.

    "지금 뭔가 오해하고 있는 모양인데, 우리가 지금 뭔가 나쁜 짓을 하려는 게 아닙니다. 이건 원래 말하면 안 되는 거지만, 최창식 씨는 이지혁 씨의 지인으로 분류되어 특별 관리가 되는 겁니다."

    "알아요."

    최창식이 어깨를 으쓱했다.

    나라에서 자신을 찾아온다면 그거 말고 이유가 있을 리가 있나.

    "아는데요, 안 간다구요."

    "…아니, 왜 안 간다는 겁니까? 최창식 씨뿐 아니라 이곳에 있는 가족분들까지 모두 쉘터로 옮겨 드린다니까요. 그것도 한국에 있는 쉘터가 아니라 미국에 있는 쉘터로 가는 겁니다."

    "아, 거참."

    최창식이 짜증을 냈다.

    "말도 안 통하는 데 가서 뭐하라고 미국으로 보낸데요?"

    "……."

    "그리고 아저씨도 잘 알아두세요."

    살짝 심호흡을 해 숨을 고른 최창식이 굳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나라가 이 모양인데, 나 혼자 잘살자고 도망가는 건 할 짓이 아닌 겁니다. 특히나 저처럼 건장하고 남들 2인분은 할 수 있는 놈은 그러는 거 아니에요. 제가 괜히 거기 껴 있었다가는 나중에 지혁이 형이 머리를 깨놓으려고 할 겁니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여자들이나 잘 챙겨요."

    혀를 차며 최창식이 밖으로 나갔다.

    "지혁이 형을 그렇게 모르나. 쯧."

    * * *

    "허참."

    강군명 대령은 자리를 박차고 나간 최창식을 보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어떻게 합니까?"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지가 싫다는 데 뭘 어쩔 거야? 납치라도 할래?"

    "그래도 상부에서 내려온 명령 아닙니까. 그것도 그냥 상부가 아니라 파란 집에서 지시한 내용인데, 당사자가 싫다고 안 데리고 갔다는 보고를 어떻게 올립니까?"

    "마, 그럼 니가 납치하든가!"

    "……."

    답도 없는 상황에 가슴을 친 부관이 연락을 넣기 위해 밖으로 나가자 강군명 대령은 담배를 입에 물고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다 제 살길만 찾을 줄 알았지."

    그런 게 아니라니.

    강군명은 넋 나간 사람처럼 실실 웃었다.

    "세상에 별놈 다 있다니까."

    한 방 먹기는 했지만, 오늘처럼 기분 좋게 얻어맞은 건 참 오랜만인 것 같았다.

    윗대가리들에게는 깨지겠지만, 이런 일이라면 얼마든지 욕을 들어먹을 수 있었다.

    "허."

    담배를 꺼내 입에 문 강군명이 불을 붙였다.

    '어려서 그런가?'

    그가 최창식과 같은 케이스였다면 저렇게 쿨하게 박차고 나갈 수 있었을까?

    자신할 수 없었다.

    세상이 언제 뒤집어질지 모르는 상황. 아니, 이미 뒤집어질 만큼 뒤집어진 상황에서 마지막까지 목숨을 보장해 준다는데 누가 단호히 거절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미군의 쉘터에다가 이지혁의 지인이라는 입장으로 보호받으러 가는 것이면, 모르기는 해도 지금 이곳에 있는 것보다 열 배는 더 나은 삶을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깔끔하게 뿌리치다니.

    바보인지, 장부인지 모를 선택이었다.

    '이지혁 주변 사람들은 다 그런 건가?'

    부관이 안으로 들어왔다.

    "뭐래?"

    "…그럼 놔두랍니다."

    "응?"

    당장 찾아오라고 한 것치고는 너무 쿨하게 포기하는 것 아닌가?

    "뭐가 어찌 된 거야?"

    "당장 윗선은 난리가 났는데, 이게 긴급 사안이라서 총리실에 바로 보고가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총리님꼐서 그냥 놔두라고 했답니다. 명단에는 들어 있지만 그런 경우는 어쩔 수 없다네요."

    "거참."

    이쪽이고 저쪽이고 치가 떨릴 정도로 깔끔하다.

    "…저 청년의 말이 맞지."

    쪽팔리는 일이다.

    국민 하나하나가 살아남겠다고 최선을 다하고 있는 상황에서 특정 몇몇을 구하겠다고 이러고 있는 것은 차마 할 짓이 아니었다.

    그 사람들이 대통령이나 총리의 가족들이 아니기에 순순히 명을 따르는 것이지, 만약 그들의 지인을 빼돌리라는 말이 나왔다면 강군명은 항명을 저질렀을지도 모른다.

    "어린 녀석한테 하나 배우고 가는군."

    기분 좋은 미소를 지은 강군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나도 내 일을 하러 가야지."

    전선으로 복귀할 시간이었다.

    * * *

    D+15.

    "엄마, 여기는 또 어디야?"

    이예원은 어머니의 손을 꼭 잡았다. 텔레포터를 통해 도착한 곳은 그녀가 생전 처음 보는 곳이었다.

    "나도 모르겠다. 엄마 손 꼭 잡고 있어. 큰일 날 수 있으니까."

    긴장한 얼굴의 어머니가 이예원의 손을 잡고 반대편 손으로 그녀의 등을 쓸어내렸다.

    "미국인 것 같은데."

    "…그건 알지."

    김다솜도 불안한 눈치였다.

    청와대 벙커에 있던 그들에게 이동 명령이 떨어진 것은 최근이었다. 뭔가 제대로 물어볼 틈도 없이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었고, 이지혁의 가족과 김다솜은 깔끔하게 미국으로 옮겨졌다.

    "이밖에도 더 많은 사람들이 올 겁니다."

    그들을 안심시키려는 듯이 정부에서 나온 이가 말을 건넸다.

    "이 일은 저희가 아닌 미국의 요청으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건 알겠는데, 왜 우리가 이쪽으로 와야 하는 건가요?"

    이지혁의 어머니인 박선덕은 여전히 경계의 눈치를 풀고 있지 않았다.

    세상이 하루아침에 뒤집어지고, 아들내미도 연락이 잘 안 되는 상황이니,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몰랐다.

    "이곳이 대한민국보다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그 대답은 옆에서 들려왔다.

    "누구?"

    사람 좋게 생긴 백인 노인이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가 가까이 다가와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네자, 통역이 재빠르게 그의 말을 전하기 시작했다.

    "만나 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박선덕 씨. 저는 크리스토퍼 맥클라렌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을 이곳으로 초대한 장본인이지요."

    "맥클라렌?"

    박선덕이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얼핏 들어본 것 같기는 한데?

    "모르실 겁니다. 이지혁 씨와 저는……."

    "아! 그 켄터키 할아버지 닮았다고 한 사람? 지혁이가 만날 욕하던."

    크리스토퍼가 통역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통역이 웃으며 말을 전했다.

    "이지혁 씨가 평소 칭찬을 많이 하셨답니다."

    "하하하, 그래?"

    기분 좋은 미소를 짓는 크리스토퍼의 등 뒤에서 통역이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이 일을 하다 보면 가끔은 전하지 말아야 할 말도 생기기 마련이었다.

    "왜 이곳으로 우리를 데리고 온 것이죠?"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대한민국보다는 이곳이 더 안전합니다. 그리고 지금 대한민국은 여러분을 케어할 여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부득이 이쪽으로 모시게 된 것입니다."

    "……."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자신을 바라보는 박선덕을 보며 크리스토퍼가 양손을 들어 올렸다.

    "아닙니다, 미세스 박."

    "뭐가 아니라는 거죠?"

    "저희는 당신들을 이용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는 알겠지만, 그게 아니라는 사실은 알아주십시오."

    하지만 박선덕은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를 지우지 않았다.

    "아드님의 이야기는 들으셨겠죠?"

    "뭔가를 하러 갔다는 건 알아요."

    "그가 돌아왔을 때, 어머니와 가족들이 이미 죽고 없다는 상황을 맞닥뜨리게 하고 싶지 않은 겁니다. 여러분을 위한 인도주의적 행위가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라는 점을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군요."

    "아들의 짐이 되지는 않을 거예요."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제 이름을 걸고 약속드리죠."

    진중한 크리스토퍼의 목소리에 박선덕이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사실 저는 당신을 어떻게 할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네?"

    "…그 강아지가 이지혁 씨의 애완동물인가요?"

    이예원의 발치에서 발로 뒷목을 긁고 있는 귀여운 강아지를 본 크리스토퍼가 몸을 움찔했다.

    "네. 개까지 아세요?"

    '개라…….'

    그러니까, 저게 오거 로드인 거로군.

    저 솜털 같은 강아지가 마음만 먹으면 이곳에 있는 사람과 능력자들을 순식간에 다 날려 버릴 수 있다. 그리고 크리스토퍼가 보기에도 아까부터 오거 로드는 이지혁의 가족들의 곁에서 전혀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 철두철미한 사람이 조치를 취해놓지 않을 리가 없지.'

    "그리고 그 거북이가?"

    "…얘는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네."

    그러니까, 저게 마왕이라는 거지?

    오식이의 옆에서 느긋하게 일광욕을 하고 있는 거북이를 본 크리스토퍼가 헛웃음을 흘렸다.

    '이 둘만으로도 웬만한 국가 하나의 전력은 넘겠군.'

    생각해 보면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지금 미국이 전력을 다 한다고 해서 마왕 하나를 확실하게 잡을 수 있다는 확신을 할 수가 없으니까.

    이지혁이 어느 정도 제약을 걸어두었다고는 해도 이 마왕 하나만으로도 미국의 반은 날려 버릴 수 있을 것이다.

    '이만한 이들이 지키고 있는데 수작질을 하라고?'

    크리스토퍼는 한국이 그의 제안을 거절한 것에 다시 한 번 감사했다.

    오식이의 존재까지야 어떻게 알고 있었다지만, 저 마왕의 존재를 놓쳤다. 만약 그들이 강제로 이지혁을 확보하기 위해서 움직였다면, 미국은 지금쯤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안쪽에 식사와 쉴 곳을 마련해 두었습니다. 하루 쉬신 다음에 지하 쉘터로 이동하게 되실 겁니다."

    "저번에 그런 데인가요?"

    "장기간 계셔야 할지도 모르니, 그때보다야 조금 열악할 겁니다. 하지만 그때보다 더 안전할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더 많은 이들이 이곳으로 오게 될 겁니다."

    "더 많은 사람이요?"

    "이지혁 씨뿐 아니라 그곳으로 간 이들의 가족을 될 수 있으면 수용하려 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돌아오지는 못하겠지만요."

    크리스토퍼가 낮은 한숨을 쉬었다.

    "제가 너무 바쁜 관계로 오래 있지는 못하겠습니다. 다른 의문점이 있으면 이 사람이 잘 설명해 줄 겁니다. 그럼."

    옆에 있던 부관을 툭 밀어 넣은 크리스토퍼가 고개를 푹 숙이더니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따라붙는 비서에게 말했다.

    "각종 편의를 모두 봐드려. 실수가 있어서는 안 돼."

    "…이런 긴급 상황에 말입니까?"

    "너는 최악의 상황이 뭔지 알고 있나?"

    "인류가 멸망하는 것 아닙니까?"

    "아니!"

    크리스토퍼가 씹어뱉듯 말했다.

    "최악의 상황은 우리가 기어코 이 상황을 해결하고 인류를 존속시켰는데, 그 세상에 나와 이지혁 씨가 같이 있는 경우다."

    "…예?"

    "그런데 내가 지금 그 인간의 가족들을 제대로 돌보지 않는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나? 이제 마족이고, 마수고 다 없어지고 평화로워진 세상에 할 짓 없어진 그 인간과 원한을 맺는다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인지 생각해 본 적 있나?"

    "생각은 안 해봤지만, 상상하기 싫은 경우라는 것만은 확실하게 알 것 같습니다."

    "그거라도 이해하니 다행이군."

    크리스토퍼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지금만 보고 살자고는 하지 말게. 미래가 있어야 현재가 있는 것이지."

    "…확실히 케어하도록 하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크리스토퍼가 차에 올랐다.

    '차라리 그리 욕이라도 먹을 수 있는 상황이 온다면 좋겠지만 말이야.'

    너무 늦지 않게 그가 돌아오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 * *

    D+25.

    "상황은 어떤가?"

    "…최악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윤영민과 송정수는 굳은 얼굴로 보고를 받았다.

    "중동이 무너졌습니다."

    "…중동이?"

    윤영민이 의외라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만약 무너진다면 그곳이 제일 마지막일 거라고 생각했다. 다른 중요 구역과는 달리 중동은 나라와 나라의 거리가 멀고 발전된 곳이 확실하게 나뉘어 있으니까. 한 국가를 완전하게 쓸어버린다고 하더라도 이동에는 시간이 걸릴 텐데?

    "어째서?"

    "…대탈주가 벌어진다 싶더니, 순식간에 지휘 체계까지 붕괴했습니다. 중동이라는 지역이 '아직 존재하는가'라고 물으신다면 그렇다고 하겠지만, 그곳이 '유의미한 가치를 가지는가'라고 물으신다면 아니라고 해야겠지요."

    "중국처럼 되었다는 말이군."

    "그나마 중국은 낫습니다. 군벌들이 있으니까요. 현재는 나름 잘 싸우고 있는 중입니다."

    "…그 나라도 보통 나라는 아니지."

    심심하면 정복을 당하고, 심심하면 정복을 하며 인류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싸우고 또 싸워온 이들이다.

    흔히들 대륙의 기상이라고 하며 중국인들의 행태를 비웃기도 하지만, 지금만큼은 그 대륙의 기상이 제대로 본을 보이고 있었다.

    중앙이 무너졌지만 각 지역들이 자체적으로 군을 흡수하고 성별로 방어 병력을 쌓아 올리고 있었다. 너무 넓은 영토와 중앙의 지시대로 즉각 대응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최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 유럽은?"

    유럽이라는 말이 나오자 긴장감이 주변으로 내려앉았다.

    최근 유럽의 상황이 영 좋지 않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점이었으니.

    "…도미노처럼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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