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92화 (92/118)
  • [■] 자, 그럼 시작해 볼까 [■]

    ─────

    "이걸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네."

    이지혁은 연병장에 도열해 있는 이들을 보며 고민에 빠졌다.

    삼천에 달하는 인원 중 천에 가까운 이들이 사라졌다. 그 사실만 보면 매우 실망해야 할 일이었다.

    그렇지만 삼분의 이나 되는 인원들이 목숨을 걸겠답시고 남은 것은 고무적인 일이기도 했다.

    "그래도 이 정도면 많이 남은 것 아닌가?"

    이지혁의 말에 최정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이 목숨을 걸라고 하면 그냥 그런 정도의 의지를 보이라는 뜻이겠지만, 이지혁 씨가 목숨을 걸라고 하면 그건 진짜니까요. 다들 그런 정도의 눈치는 있을 겁니다."

    "…그래요?"

    그걸 감안하면 이만큼이나 남은 것도 대단하다고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정말 대단하다고 해야 할 것은 따로 있었다.

    "알파 쪽 애들은 다 그대로 남아 있는 것 같은데?"

    알파가 킬킬 웃으며 대답했다.

    "어설픈 어중이떠중이들과 비교하시면 저희가 섭하죠. 이쪽은 제대로 각오를 다지고 여기로 왔단 말입니다."

    이지혁이 뚱한 표정으로 말했다.

    "도망갔다가 네 손에 죽을까 봐 그런 건 아니고?"

    "그게 각오라는 거죠."

    부정은 하지 않는 알파였다.

    "여하튼 이제 제대로 시작을 한 번 해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재촉 안 해도 그러려는 중이었어."

    이지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나름 용기가 있는 이들만 남은 것 같은데, 그래도 한마디 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아뇨."

    최정훈이 깔끔하게 이지혁의 말을 잘랐다.

    "안 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사기 진작 차원에서……."

    "이지혁 씨가 말을 하게 되면 사기가 오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떨어지게 될 테니, 차라리 안 하시는 게……."

    "……."

    이지혁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아니! 내가 무슨 깽판 치는 것도 아니고, 좋은 말 한마디 해주겠다고 하는데, 그게 뭐 그리 기분 나쁘다고 사기가 떨어져요!"

    "그럼 제 앞에서 먼저 해보시죠. 그럼 제가 통역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별거 없어요. 그냥 뭐랄까, 죽음을 각오하고 남아준 건 참 고마우니, 저도 최선을 다해서 죽기 직전까지 한 번 몰아붙여 보겠다. 뭐, 그런 거죠."

    "기각!"

    "어째서!"

    "몰라서 묻습니까, 몰라서 물어요? 남들은 다 아는데 왜 이지혁 씨만 모르는 겁니까! 그냥 말을 하지 마세요! 웬만하면 입을 열지 마시라구요!"

    "헐, 악담 보소."

    "악담은 누가 하고 있는데 악담이라는 겁니까!"

    이지혁은 상처받은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자 최정훈이 입에서 불을 뿜을 듯한 기세로 소리쳤다.

    "이 양반이 안 그러다가 갑자기 또 왜 이러신데!"

    "됐어요. 일이나 하죠."

    손을 내저은 이지혁이 인파 사이에 숨어 있던 미하엘을 귀신같이 찾아내 불렀다.

    "이리 와! 이리!"

    "헐……."

    미하엘은 상큼하게 웃으며 자신을 부르는 이지혁을 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저 속 좁은 새끼.'

    분명히 악감정이 남아 있어서 자꾸 자신을 불러내는 것이리라. 그렇지 않고서는 이 많은 인원들 사이에 숨어 있는 자신을 귀신같이 찾아내서 불러낼 리가 없었다.

    "뭐해?"

    "……."

    하지만 지적당한 이상 나가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여기서 버팅기려면 차라리 어젯밤에 도망갔어야 한다.

    "끄으으응."

    앓는 소리를 내며 미하엘이 터덜터덜 걸어 앞으로 나갔다. 사람들이 그에게 길을 터주며 안쓰러운 얼굴로 바라보았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모르겠지만, 이지혁이 그를 불러낸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동정을 받을 여지는 충분했다.

    '그러게 왜 나서서는.'

    자신을 안쓰러워하는 눈빛들을 받으며 미하엘은 깊이 한숨을 쉬었다.

    '저렇게 독한 놈일 줄 누가 알았나?'

    하는 짓이 나름 대인배스러워서 어느 정도 개겨도 괜찮을 줄 알았지, 이렇게 사사건건 사람을 물고 늘어질 줄 알았으면 절대로 눈에 띄지 않았을 것이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단상 위로 오른 미하엘이 처량한 눈으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요즘 자주 보는 것 같지 않아?"

    통역을 전해 들은 미하엘이 이를 갈았다.

    지가 불러놓고는 저게 할 말인가.

    "그러네요. 정말 반갑습니다."

    "음, 뭐, 그리 반가워할 건 아니고."

    이지혁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했다.

    "사실 반갑다기보다는 안타까워해야 할 일이지. 이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나도 잘 모르거든."

    이지혁이 낄낄대며 웃더니 말을 이었다.

    "나도 사실 처음 해보는 일이라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갈지 잘 모르겠어. 그런데 미리 경고는 했으니까, 죽더라도 나를 원망하지 말라고."

    "…잠시만요."

    "응?"

    "마음의 준비 좀."

    미하엘이 가슴을 움켜쥐고 심호흡을 하자 이지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떻게든 빨리 강해지고 싶어 한 것 아닌가?"

    "그렇기는 한데……."

    미하엘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될 수 있으면 안 죽는 선에서 강해지고 싶었는데,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아하니 이러다가 죽을 수도 있겠다 싶거든요."

    "빙고."

    잘 맞췄다는 듯이 박수까지 친 이지혁이 미하엘에게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그 손짓이 마치 악마의 모습 같아서 미하엘이 몸을 떨었다.

    "살 수는 있는 겁니까?"

    "에이, 설마 내가 그렇게 과격하게 하겠어?"

    "네."

    "진짜 눈치는 빠르네."

    재미있다는 듯 웃어 보이는 이지혁을 보며 미하엘이 서글픈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다들 긴장한 얼굴로 이지혁과 미하엘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나 더 심한 걸 하겠다는 거지?"

    지금까지 겪은 훈련도 결코 쉽지는 않았다. 아니, 쉽지 않았다는 수준이 아니라 하루에도 몇 번씩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다고 해야 될 것이다.

    사람이 충격을 받아서 거품을 물고 쓰러지면 앰뷸런스부터 부르고 보는 게 일반적인 반응이 아니던가. 천 명이 넘는 인원이 한 번에 게거품을 물고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다녔는데 희생자가 없다는 것이 되레 신기할 정도였다.

    그런데 여기서 더 나가겠다면, 과연 사람이 버틸 수 있다는 말인가.

    한가득 불안이 몰려왔지만, 더는 도망칠 곳이 없었다.

    '죽기야 하겠어?'

    아니, 생각해 보니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죽기야 하겠어'에서 '한 번 죽지, 두 번 죽냐'로 노선을 변경한 미하엘이 깊게 심호흡을 하고는 이지혁을 향해 한 걸음 다가섰다.

    "준비됐습니다."

    "오!"

    이지혁이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입만 산 놈인 줄 알았는데, 그래도 그 과격하다시피 한 반항 속에는 향상심이 가미되어 있던 모양이다.

    입에 달고 살던 조국이라는 말이 그저 말뿐이 아니었다는 듯이 미하엘의 눈에는 비장한 의지가 어려 있었다.

    "좋군."

    이지혁이 씨익 웃었다.

    "다만, 뒈지더라도 나를 원망하지 말라고. 죽거나 강해지거나 둘 중 하나라고 내가 분명 이야기했으니까."

    "…그러죠."

    장담은 못하지만 말이다.

    이지혁이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움켜잡았다.

    "아, 미리 말하는데 말이야……."

    "네?"

    "중간에 마나를 느끼게 되더라도 내가 멈춰 줄 거라고 생각하지는 마. 솔직히 이거, 대충 중간에 멈추면 다시 시작하기가 어려워서 성공하든 못하든 끝까지 가야 하거든?"

    "…잠시만요. 그게 뭔 소립니까?"

    "음, 겪어보면 알 텐데? 일일이 설명하려니까 입이 아프네."

    "……."

    이지혁 같은 떠버리가 입이 아파서 설명을 못한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뭔가 설명을 해주기 애매하다는 뜻이다.

    불안함을 느낀 미하엘은 지금이라도 도망을 가야 하나 고민했지만, 여기서 도망을 친다는 것은 인격 살인을 각오해야 한다는 말과 동일했다.

    "으……."

    자포자기한 미하엘이 이지혁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자신의 머리 위에 올려진 이지혁의 손을 바라보는 미하엘의 눈빛엔 불신과 불안이 가득했다.

    "자, 그럼 시작해 볼까."

    이지혁이 미하엘의 머리 위에 올라가 있는 손을 움찔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아마 죽지는 않을 거야."

    "그것참 다행이군요."

    "그런데 그거 너한테 잘된 일인가는 고민을 좀 해봐야 할 것 같네. 죽지는 않아도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싶은 일일 수도 있거든."

    "…네?"

    "몸은 멀쩡해도 머리가 죽는다면, 그건 산 게 아니니까. 뭐, 여하튼 죽지 않는다는 측면에서는 확실히 이득이잖아. 그렇지?"

    미하엘이 기겁하여 소리를 지르려는 순간, 머리를 움켜잡은 이지혁의 손에서 마나가 흘러나와 미하엘의 육체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기겁하여 주먹을 꽉 움켜쥔 미하엘이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어? 뭐지?'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몸 안으로 마나가 들어오는 느낌이 확연하게 들고 있음에도 육체에 고통이 전혀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허세였나?'

    허세는 아닐지라도, 그냥 미하엘에게 겁을 주기 위해서 한 말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육체로 파고드는 마나의 양은 미하엘이 느끼기에도 지금까지와는 달랐다. 그저 마나가 파고드는 게 아니라 육체의 혈관을 따라 마나가 흐르는 게 확실하게 느껴졌다.

    마치 엄청나게 뜨거운 것을 무작정 삼켰을 때,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것이 몸으로 느껴지듯이 말이다. 평소에는 의식하지 못하던 혈관의 위치 같은 것이 마나를 통해 확연하게 느껴질 만큼 생경한 경험이었다.

    '다르다.'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전까지 마나를 느끼랍시고 이지혁이 하던 짓은 그저 육체 안으로 끔찍한 고통을 주는 마나를 쑤셔 박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지혁이 행하고 있는 일은 그에게 확연하게 마나가 흐르는 경로와, 마나라는 것이 주는 이질감을 느끼게 해주고 있었다.

    '조금 더…….'

    감을 잡을 것 같았다.

    이게 얼마나 무식한 짓인가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불이라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활활 타오르는 불꽃 속에 손을 집어넣는 것과 같은 짓이다.

    그 어떤 방법보다 확실하게 불이라는 물질에 대한 이해도를 높일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 어떤 방법보다 확실하게 피해를 입게 된다.

    그래도 이런 방법이라면 확실히 마나에 대해 느낄 수 있겠다고 생각하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우드드드득!

    매우 이질적인 소리가 들려왔다.

    미하엘이 그 소리가 자신의 다리에서 난 것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던 이유는… 아래쪽에서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육체가 급격하게 쓰러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뭐지?'

    고개를 아래로 내린 미하엘은 볼 수 있었다.

    제멋대로 꺾여 버린 그의 다리. 꺾인 다리의 피부가 터져 나가 피를 분수처럼 뿜어내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끄아아아아아아아아!"

    이제껏 단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한 고통이 찾아왔다. 너무도 생생하게 느껴지는 마나의 흐름과 비례해서 그의 육체가 말 그대로 부서지고 있는 것이다.

    "안 죽어, 안 죽어."

    이지혁이 낄낄대며 미하엘의 몸에 힐을 쑤셔 넣기 시작했다.

    부서진 육체가 순식간에 수복된다. 그와 동시에 다른 곳이 다시 터져 나간다.

    육체가 부서지고 힐로 다시 수복되는 과정이 짧은 시간 안에 수십 번이나 반복되었다.

    "커어억!"

    식도 안에 차오른 핏물 덕분에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비명도 제대로 지를 수가 없었다.

    느껴지는 것은 오로지 고통과 마나뿐.

    그제야 미하엘은 이지혁이 한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죽지는 않아도 정신이 붕괴된다는 말.

    그의 정신이 비명을 질러 대기 시작했다.

    * * *

    고통이라는 것은 묘한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고통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정말 제대로 된 고통을 겪어본 이들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모른다.

    고통이 얼마나 인간을 비참하게 만들 수 있는지를 말이다.

    인간은 고통에 겨워 죽는 것이 아니라,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자살을 택하기도 한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공포스러운 상황인 죽음을 스스로 택할 정도로 고통은 무서운 것이다.

    그리고 지금, 미하엘은 그 사실을 절절하게 실감하고 있었다.

    우드드득!

    꽉 깨문 이가 부러져 나간다. 이의 파편들이 바닥으로 줄줄이 떨어져 내렸지만, 미하엘은 그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고통이 그를 지배하고 있었다.

    목을 놓아 소리를 지르고, 울고불며 매달리고 싶지만, 너무도 큰 고통은 그의 육체를 움직이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눈의 실핏줄이 모두 터져 나가 세상이 붉게 물든다.

    꽉 움켜쥔 주먹의 손톱이 살을 찢다 못해 부러져 나가고 있었다.

    미하엘은 인간이 이렇게까지 극심한 고통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는 단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했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 이지혁이 자신들을 몰아붙인 게 아니었음을.

    그는 정말로 최대한의 여유를 제공하고 있던 것이다.

    "끄으으으으으으……."

    비명을 지르는 것인지, 고통을 참지 못한 육체가 절로 소리를 내는 것인지조차 구분이 가지 않았다.

    하나 확실한 것은… 이 고통이 이대로 지속된다면 높은 확률로 자신이 쇼크사를 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럴 수는 없다.

    이런 개죽음은 바란 적이 없단 말이다.

    반항하기 위해서 몸에 힘을 주려고 했지만, 근육 한 올에도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내장이 끊어지고, 목에서 피거품이 밀려 나온다.

    죽어야 할 만큼 몸이 망가지고 있는데, 끊임없이 육체가 복구되면서 죽지 않는다.

    죽을 수도 없고, 버틸 수도 없다.

    그저 통제를 벗어난 육체에 끊임없이 가해지는 고통을 느끼고 또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

    지옥이 있다면 이러할까?

    미하엘을 또렷한 의식 속에서 살아 있는 채로 지옥을 겪고 있었다.

    고통이 고통을 몰고 와 끝도 없이 그를 괴롭힌다.

    '아아아…….'

    머릿속에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다.

    고통 때문인지, 충격으로 뇌가 파괴되어서인지 알 수가 없다. 그저 멍할 뿐.

    그때, 그의 귓가에 생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병신 짓 하지 마."

    "끄으으으……."

    이지혁의 목소리다.

    병신 짓?

    뭘 해야 한다는 건가?

    나는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은데?

    그때였다.

    머릿속에서 밀려 들어오는 마나의 줄기가 몸의 모공을 통해 바깥으로 흘러나가는 느낌이 생생하게 전해져 온다. 몸을 부르르 떤다.

    느껴진다.

    바깥으로 흘러나간 마나가…….

    그의 몸 주위에 머물고 있는 마나가…….

    그리고…….

    이 세상을 가득 메우고 있는 마나가 느껴진다.

    마치 공기처럼 마나가 세상에 가득 차 있었다.

    환희.

    고통 속에서 미하엘은 발견할 수 있었다. 아무리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던 마나가 지금 그의 감각에 생생하게 느껴지고 있다.

    감격이 고통마저 희석시키는 느낌.

    '알았어! 알았다고!'

    이 한순간을 위해서 지금까지 고통을 참아왔다는 생각이 들자 눈물이 고일 것만 같았다.

    '해냈다고!'

    정신이 아득해지는 고통은 여전하지만, 그 고통을 통해 마나를 알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자 고통마저 반가울 지경이었다.

    이제 새로운 힘을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멈추지 않지?'

    머릿속으로 밀려 들어오는 마나의 양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있었다. 이미 그는 마나를 생생하게 느끼고 있건만, 어째서 계속 된다는 말인가.

    '아!'

    그때, 미하엘은 기억해 냈다.

    이지혁이 한 말을, 그 말의 의미를.

    그가 마나를 느끼게 되었다 한들 이지혁은 알 수 없다. 느낌이라는 것은 타인에게 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관찰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그렇기에 이지혁은 멈추지 않는다.

    중간에 그가 알아챘다 하더라도 이미 정해진 방식대로 계속할 수밖에 없다.

    그 사실은 차라리 모르는 게 나았다.

    고통이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과 이 고통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른다는 사실을 알아버린 미하엘의 정신이 급속도로 붕괴하기 시작했다.

    모르는 것은 버틸 수 있다.

    하지만 이미 알고 있는 것은 더욱 생생한 법이다.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을 얼마나 더 겪어야 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다.

    "끄으으으으으……."

    그만두라고 외치고 싶다.

    이제 안다고, 그러니까 그만하라고 외치고 싶다.

    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뒤틀린 근육과 성대는 신음 같은 비명만을 흘려낼 뿐이었다.

    억겁 같은 시간이 지나갔다.

    그리고 순식간에 광명이 찾아왔다.

    털썩.

    바닥에 흘러내리듯 땅을 구른 미하엘이 미약한 숨소리만을 흘려냈다.

    "살아 있나?"

    이지혁이 미하엘을 툭툭, 건드리며 물었다.

    그 순간.

    "으아아아아앙아아아!"

    미하엘이 바닥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괴성을 터뜨리며 이지혁에게 달려들었다.

    "죽여 버릴 거야아아아아아아아!"

    피눈물을 줄줄 흘리며 이지혁에게 달려드는 미하엘의 행동은 그 모습 자체만으로 모골을 송연하게 만드는 위력이 있었다. 지켜보던 알파마저 몸을 살짝 떨 정도로 광기가 넘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뿐.

    쿵!

    이지혁에게 달려들던 미하엘이 커다란 굉음과 함께 그대로 바닥에 박혀들었다.

    "쯧쯧."

    이지혁이 혀를 찼다.

    "살아 있네. 그럼 됐지."

    "이 개새끼야아아아아아!"

    "어이쿠."

    이지혁이 놀랐다는 듯 양손을 살짝 들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미하엘의 눈에서 불꽃이 튀어 올랐다.

    "자자, 흥분을 가라앉히라고. 죽을 수도 있다고 경고했어. 그리고 그래도 해보겠다고 한 건 너야. 네가 선택한 걸 남의 책임으로 돌리지 말라고."

    "이……."

    미하엘은 좀체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그보다, 마나는 느꼈어?"

    한참 동안 이지혁을 죽일 듯이 노려보던 미하엘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날 죽이는 것보다 그 감각을 놓치지 않는 게 중요할 텐데? 혹시 그러다 잊어버리기라도 하면 다시 이 짓을 해야 할 텐데, 그건 괜찮은 모양이지?"

    "……."

    이지혁은 혼란스러워하는 미하엘을 보며 쐐기를 박았다.

    "날 죽이고 싶다면 나중에 프레깅이라도 하라고. 지금 네가 나를 죽여 버리면 네 뒤에 있는 이들은 마나를 느껴볼 기회도 없을 것 아냐. 뭐, 지금 표정을 보니, '차라리 그게 축복이다'라고 생각하는 것 같긴 하지만 말이야."

    미하엘이 느낀 고통의 강도는 지켜보는 이들에게도 생생하게 전해졌다.

    얼마나 고통을 느끼는지는 알 수 없지만, 멀쩡한 인간의 몸이 거의 슬라임 수준으로 부서졌다가 다시 회복되기를 반복하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본 사람들로서는 공포에 질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누구도 그런 꼴은 당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자자, 명상해야지. 그래야 착한 어린이지?"

    미하엘이 이를 빠득빠득 갈다가 몸을 돌려서 한쪽 공터로 가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느껴진다.'

    너무 생생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잘 느껴진다' 수준이 아니라 '대체 왜 그동안은 이리 세상에 가득 차 있는 것들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비어 있는 것 같은 공간을 공기가 메우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만으로 세상이 달라지 듯, 마나의 존재를 느낀 미하엘의 눈에는 세상이 전혀 다르게 보였다.

    '이거구나.'

    가슴속 깊이 뿌듯함이 차올랐다.

    해냈다! 나는 해냈다!

    그 빌어먹을 고통을 견뎌가며 드디어 해낸 것이다.

    뭔가 자꾸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말로만 지껄이던 '목숨을 걸어서라도 강해지겠다'는 결심을 비로소 지킨 것 같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충족감이 마약처럼 몸에 새겨진 고통을 지워가고 있었다.

    "뭐, 하나는 된 것 같은데?"

    알파가 뚱하게 물었다.

    "그런데 저거, 저한테 한 방식과 그리 다를 게 없잖습니까?"

    "똑같지."

    "그럴 거면 애초에 그렇게 하시지."

    "한 번에 한 명씩 이만큼이나 되는 마나를 쓴다는 게 보통 일인 거 같아? 여기 이천 명이 있어."

    "…그렇군요."

    알파는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지혁이 미하엘에게 쏟아 넣은 마나는 그가 보기에도 과하다 싶을 정도였다. 그만큼의 마나를 한 사람에게 소비하는 것이 과연 효율성이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과정이었다.

    '손이 떨리고 있군.'

    알파는 이지혁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인간의 몸이 버텨내지 못할 정도의 마나를 지속적으로 공급하면서 다른 쪽으로는 마나를 운용해 힐을 시전하여 육체를 회복시킨다.

    그 아슬아슬한 경계를 계속 오가야 하는 것이다.

    곱절? 아니, 수십 배는 더 힘든 일이다.

    '희생을 각오하고 반 정도는 죽일 방법을 찾으라고 했더니…….'

    뭔가 결심한 듯하면서도 아직 인간에 대한 미련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다.

    이지혁이 인간에 대해 겪은 회의는 알파의 몇 백 배는 될 것이다. 그리고 이지혁이 판단하는 인간에 대한 가치는 알파로서는 차마 상상도 못할 정도로 미약할 것이다.

    당연하다.

    그는 그만큼이나 오랜 세월 동안 인간을 봐왔으니까.

    인간이 태어나 살아가다 죽는 모습만 해도 수백만 명 단위로 지켜봤을 것이다. 어쩌면 몇 억 명의 단위일지도 모른다.

    자극이라는 것은 무뎌지기 마련.

    끝도 없는 인간의 죽음을 겪다 보면 당연하다시피 인간에 대한 가치를 수정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 하든 간에 동일한 결말을 맞게 되는 것이 인간 아닌가. 그런 인간의 과정을 달리하게 만들기 위해서 투자한다는 것은 비효율적인 일이다.

    이지혁은 아마 그 사실을 알파 이상으로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놓지 않지?'

    놓아버리면 편하다. 놓아버리는 순간, 이지혁이 선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몇 배로 불어나고, 들어가는 노력은 몇 배로 줄어들 것이다.

    굳이 지금처럼 벌레 같은 인간의 목숨 하나를 살리기 위해서 끔찍하다고 해도 좋을 만큼의 미세한 마나 컨트롤을 할 필요도 없이 그저 마나를 때려 부어 살아남는 쪽만 건져도 충분하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이지혁이 미하엘을 살리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사서 고생이지.'

    알파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마 그는 평생이 가도 이지혁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이지혁이 그를 이해할 수 없듯이.

    그와 이지혁이 서로 통하는 듯 보이는 것은 서로에게 맞추어 대화를 하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맞지 않은 둘이 있다면, 이지혁과 알파를 꼽아야 할 만큼 둘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뭐, 아무래도 좋은 거니까."

    "응?"

    "아니, 아닙니다."

    알파는 고개를 저으며 뒤로 물러났다. 지금은 이런 생각으로 시간을 뺏을 때가 아니었다. 얼마나 빨리 하나라도 많은 능력자들에게 마나를 익히게 하느냐가 세상의 멸망과 직결된다.

    이지혁이 알파에게서 시선을 떼고는 연병장에 도열해 있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씨익.

    상큼한 미소를 지은 이지혁이 신이 난 악당처럼 나직하게 속삭였다.

    "다음은 누가 할래?"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어갔다.

    * * *

    "상황은?"

    송정수는 초췌해진 얼굴로 물었다.

    "…서울 이북은 대피 중입니다."

    송정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빌어먹을!"

    잠잠하던 평양의 스팟이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딱히 마왕이라 불리는 이들이 나타나 마왕군을 몰고 다니는 것은 아니지만, 끊임없이 솟아나오는 마수조차도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NDF의 빈자리가 너무 커.'

    처음에는 이렇지 않았다.

    하지만 이지혁의 등장과 동시에 한국의 정예 엘리트 능력자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이 모두 NDF로 흡수되었다.

    그러고 나서 차이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한 끗 차이로 NDF 최하위권과 KSF 최상위권이 갈렸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둘의 차이가 하늘과 땅만큼 벌어졌다. 최상위권 KSF 열 명이 달려들어도 하위권 NDF 요원 하나를 잡아내지 못할 만큼 말이다.

    고무적인 일이다.

    어쨌든 특정 능력자들이라도 강해졌다는 것은 전체 전력이 상승한다는 말이니까.

    하지만 이제야 알게 되었다. 대한민국은 NDF에게, 그리고 이지혁에게 너무 과도하게 의존하고 있었다.

    그 둘이 사라진 대한민국은 무주공산이나 다름없었다. 휴전선을 뚫고 내려오는 마수들은 육군으로도, KSF로도 막을 수가 없었다.

    반항하고 저항했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지금까지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강함을 가진 마수들의 앞에서 인간은 너무도 무력했다.

    "지원은? 일본의 지원은 어떻게 됐나?"

    "…힘들답니다."

    "빌어먹을!"

    쾅!

    송정수가 테이블을 거칠게 내려쳤다.

    "필요할 때는 잘도 손을 벌려 대더니, 이제 와 입을 싹 닦겠다는 건가?"

    "그쪽도 도쿄가 날아가면서 국정 혼란이 극심하다고 합니다. 게이트가 열리지 않던 때라면 지원할 수 있겠지만, 지금 국토 곳곳에 게이트가 열리고 있는 상황이라……."

    "서울이 날아간 건 이쪽도 마찬가지야!"

    송정수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마왕의 강림으로 강남이 날아갔다. 그리고 이제는 마수들의 웨이브 때문에 강북까지 내줘야 할 판이다.

    "진정하세요."

    윤영민의 힘없는 목소리를 들으며 송정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흥분한다고 달라질 게 없습니다. 총리께서 제게 하시던 말 아닙니까?"

    "…그렇지요."

    "무작정 막아내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결국 우리는 저들을 막을 수 없을 겁니다."

    "대통령님……."

    "현실을 인정해야지요. 미국도, 중국도 하지 못한 일을 전력이 부족한 우리가 할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저들과 전투를 벌여서 전력을 소모하는 게 아닙니다. 내줄 것은 내주더라도 시간을 끄는 거죠. 그들이 돌아올 때까지 말입니다."

    차분한 윤영민의 말을 들으면서 송정수는 헛웃음을 흘렸다.

    '내가 이 사람의 충고를 듣게 될 날이 오다니.'

    전란과 혼란 중에 성장한 것은 그뿐만이 아닌 모양이다. 윤영민에게서도 이제 한 나라의 대통령으로서의 기품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민간인들의 대피입니다."

    윤영민의 말에 송정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피 상황은?"

    "차량과 철도를 최대한 확보하여 대피 중입니다. 이대로만 간다면 민간인 피해는 없이 전선을 한강 이남으로 물릴 수 있을 겁니다."

    "한강 이남이라……."

    송정수가 쓰게 웃었다.

    거기에는 이제 아무것도 없다. 그저 허허벌판만이 남았을 뿐이다. 강남이 개발되기 이전의 갈대밭으로 돌아간 상황이었다.

    '그것을 전선으로 삼는 의미가 뭐가 있을까?'

    그저 시간을 끄는 것뿐.

    인간을 대상으로 한 전선과는 다르다. 언덕과 지형을 감안하여 공격과 수비를 정할 수 있는 인간들과는 다르게, 마수는 지형을 가리지 않는다.

    넓은 강은 바닥을 기어오르고, 절벽은 뛰어넘는다. 인간처럼 언덕을 오르기 위해 체력을 빼지도 않는다.

    '제길.'

    송정수는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인간은 총이 안 통하는 순간 생태계 최약의 포유류로 전락할 뿐이다. 총이 없는 인간은 토끼 한 마리조차 맨손으로 잡을 수 없다. 총을 든 인간과 길거리를 배회하는 들개 중 마수가 더 쉽게 잡을 수 있는 것은 총을 든 인간인 것이다.

    대전차 화력으로 어떻게든 공격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걸로도 한계가 있었다.

    "…강남 쪽에 미리 대전차 지뢰라도 많이 심어두라고 하게."

    "예."

    "휴우."

    송정수가 얼굴을 감쌌다.

    '얼마나 더 버텨야 하는 거지?'

    이제 겨우 서울을 내주었을 뿐이다. 하지만 송정수는 알고 있었다. 인간의 군대와는 다르다. 한 번 물러나도 다시 전선을 잡을 수 있는 전쟁과는 다르게, 마수에게 등을 보인다는 것은 끝없는 후퇴를 의미했다.

    한강 이남으로 전선을 구축하는 것까지는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거기서도 밀린다면 대체 어디에 전선을 만들어야 하는 것인가.

    "NDF 쪽에서 온 연락은 없나?"

    "예, 없습니다."

    "미국을 통해 들어온 정보도 없고?"

    "미국 쪽에서는 연락이 오긴 왔는데……."

    "왔는데?"

    보좌관이 어두운 얼굴로 대답을 했다.

    "최근 훈련소 내에서 탈주한 인원들이 발생했다고 합니다. 천 명에 가까운 능력자들이 훈련을 포기하고 자국으로 복귀했습니다."

    "허……."

    송정수의 얼굴이 푸들푸들 떨렸다.

    훈련 포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지금 모든 인류가 그들만을 믿고 있는데, 어떻게!

    송정수가 그곳에 있었다면 죽으면 죽었지, 절대 제 발로 걸어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언가 사정이 있을 것이라 이해하고 싶지만, 분노가 치미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지금 훈련을 포기한 그들 때문에 막을 수 있는 인류의 멸망을 막지 못하게 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럴 확률이 아예 없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중국 쪽은 어떤가?"

    "성 단위로 병력이 분산되어 있어서인지, 각 성 단위로 체계가 잡혀가고 있습니다."

    "그나마 다행이로군."

    "…하지만 지휘체계가 없어진 것은 타격이 큽니다. 게다가 대륙간 탄도미사일 등은 이미 발사 체계가 불분명해진 상황이라 지상 병력과 공군만으로 대항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속절없이 밀리고 있습니다. 체계가 잡히는 곳은 그저 아직 마수들이 도착하지 않은 곳뿐입니다."

    "땅이라도 넓어서 다행이군."

    한쪽이 당하는 동안 다른 쪽의 체계를 잡는다는 것은 한반도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걸 해내고 있다는 점이 중국의 저력일 것이다.

    '하지만 결국 시간문제지.'

    마수는 점령군이 아니다.

    가장 큰 문제는 바로 그것이었다. 마수들은 병력을 유지하기 위해 보급이 필요하지도 않고, 겨울에 떨지도 않는다. 무엇보다 식량을 소비하지 않는다.

    그저 파괴하고 나서 이동하고, 다시 파괴하기를 무한히 반복할 수 있었다.

    너무도 불공평한 일이다.

    방어하는 입장에서는 식량과 휴식이 반드시 필요한 반면, 공격하는 쪽은 더 강한 힘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힘을 발휘하기 위한 제약이 없었다.

    "중국 쪽 마수들의 이동 경로는?"

    "쓰촨성 스팟에 나타난 마수들은 북경을 거쳐 러시아로 북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언제 이쪽으로 방향을 돌릴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럴 일은 없겠지. 여기에 다른 스팟이 있으니까 말이야."

    차라리 지능 없는 짐승이라면 어떻게 상대할 방법이라도 마련해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마수들 사이에 마족들이 섞여 있다 보니 군대가 아닌 이들이 의지를 가지고 움직이는 참사가 벌어지고 있었다.

    "버텨보세. 버텨보면 되겠지."

    미국이나 유럽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이미 오세아니아와 아프리카는 인간이 살 수 없는 땅이 되었다.

    오세아니아는 말 그대로 마수에게 점령당해 인간이 발 디딜 수 없는 땅이 되었고, 아프리카는 땅이 넓어 인간이 멸종되지는 않았지만 외부로부터의 접근 자체가 불가능해졌다.

    육로로 들어가면 마수의 밥이 되고, 공중으로 다가가면 마족들에게 격추된다.

    다른 스팟이 열린 곳도 그리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특히나 아시아는 무려 두 개의 스팟이 열리지 않았는가. 그 미국조차도 동부의 민간인들을 피신시키고 땅을 버리고 있는 실정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더 필요한 거지?"

    송정수가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잡아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이지혁이라는 희망만 가지고 버티기에는 상황이 너무도 좋지 않았다.

    * * *

    "비켜요! 비키라고!"

    "아! 여기, 줄 선 거 안 보여요! 새치기하지 말아요!"

    "나오라고!"

    아비규환이었다.

    상황이 최악까지 치닫자 마지막으로 버티고 있던 인간의 존엄성은 급격히 사라져 갔다. 생존을 위해서는 법도, 도덕도 필요 없다는 것을 깨달은 이들은 타인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 엄마."

    이제 갓 중학교에 올라간 최지혜는 울먹이는 얼굴로 엄마를 찾았다.

    인파가 끝도 없다.

    대피소에 마련된 정류장으로 나라에서 징발한 버스와 트럭들이 끊임없이 몰려들고 있었다. 아직 대피하지 못한 이들을 실어 나르려는 것이다.

    대피가 완료되어 가고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반대로 말해 여기 남겨져 있는 사람들은 그만큼이나 대피가 늦었다는 소리도 된다.

    "아, 비키라고, 이 씨발 놈아!"

    "뭐, 이 새끼야?"

    언제 등 뒤에서 마수 떼가 몰려올지 모른다는 압박감이 사람들을 날카롭게 만들었다. 여기저기서 욕설과 싸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실제로 대피 중의 다툼으로 사상자가 발생하고 있었다.

    "어, 엄마?"

    최지혜는 패닉에 빠진 얼굴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그와 함께 대피소로 온 어머니가 보이지 않는다. 당황한 그녀가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못했다.

    '길을 잃으면 움직이지 말랬어.'

    어설프게 찾아다니다가 미아가 된다고 했다. 그러니까 이 자리에 이렇게…….

    "지혜야!"

    "엄마!"

    자신을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은 최지혜가 짐을 들고는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정류장을 향해 쭉 늘어서 있는 줄 앞쪽에서 어머니가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이리 와! 이리! 어서!"

    "엄마!"

    눈물을 줄줄 뿌리며 최지혜가 그녀의 어머니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 누군가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너, 어디 가니?"

    "저, 저기 엄마가 있어요."

    "그래서?"

    "엄마한테 가야 하는데……."

    그녀의 앞을 가로막은 험상궂은 얼굴의 남자가 소리를 빽! 질렀다.

    "이런 씨발! 여기 다 줄 서 있는 거 안 보여? 니가 저리 가면 줄 서 있는 사람 중 하나는 죽으란 거야, 뭐야?"

    "네?"

    "저 뒤로 가."

    "엄마가 저기……."

    "가라는 소리 안 들려? 이게 확! 진짜!"

    기겁을 한 그녀의 어머니가 줄을 이탈하여 최지혜에게 달려왔다. 그녀를 꽉 끌어안은 어머니가 연신 남자에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아니, 죄송이고 나발이고, 저 뒤로 꺼지라고! 확 죽여 버리기 전에!"

    "…아이와 같이 가게 해주세요. 제가 엄마예요."

    "그래서 뭐? 아줌마도 뒤로 갈래?"

    최지혜가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감당할 수 없어 자리에 주저앉았다.

    "얼씨구?"

    사내가 어이없다는 듯 웃더니, 험악한 어조로 말했다.

    "됐고, 당장 뒤로 꺼져. 다 쳐 죽이기 전에! 사람 인내심 시험하나, 진짜!"

    두 모녀가 서로를 부둥켜안고 통곡을 시작하자 사내가 짜증 난다는 듯이 발을 들어 올려 모녀를 걷어차려 했다.

    그때였다.

    "야, 이 씨벌 놈아!"

    * * *

    사내가 등 뒤에서 들려온 욕설에 헛웃음을 지었다.

    "하, 씨발."

    여하튼 세상이 미쳐 돌아가니, 사람들도 미친 모양이었다. 분명 자신에게 한 것 같은 욕설이 아닌가.

    "아주 그냥 성질 좀 죽이고 살려니까 사람을 미치게 자꾸 시비 거네. 어느 새끼야!"

    몸을 돌린 사내는 자신의 분노가 순식간에 차게 식는 것을 느꼈다.

    "난데?"

    "헐……."

    고개를 돌린 그곳에는 사내보다 머리통 하나는 더 있어 보이는 남자가 서 있었다.

    '내 키가 180인데…….'

    그런데 왜 얼굴이 안 보이고 턱이 보이지?

    농구 선수인가?

    하지만 그냥 농구 선수라고 하기에는 저 태산만 하게 벌어진 어깨와 튼튼한 팔다리를 설명할 수 없었다. 얼마나 튼튼한지 팔뚝이 웬만한 여자 허리만 한 느낌이었다.

    '사람인가?'

    보통 사람은 아닌 게 분명했다.

    거기에…….

    "죄송합니다."

    뭔가 대화가 오가기도 전에 사과를 했다. 이건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저 인간의 얼굴을 보면 사과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뭔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잘못한 게 틀림없었다.

    제발 사과하게 해주세요.

    뜬금없이 사과를 받은 남자, 이지혁조차 인정한 인상파 고등학생 창식이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아저씨."

    "예?"

    "아저씨는 뼈가 두 개예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부러져도 쓸 거 하나씩 따로 챙겨놨냐고."

    "……보통 사람은 못 그러죠."

    "그런데 왜 깝쳐?"

    사내는 순한 양이 되어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아, 내가 깝쳤구나. 다시는 깝치지 말아야지.

    잘 모르겠지만, 이 남자가 깝쳤다고 하면 깝친 게 맞는 것 같다. 아니라고 했다가는 정말 뼈가 똑똑 부러질 기세였다.

    "아저씨."

    "네."

    "상황이 아무리 급하고 짜증나도 사람답게 굴어야지. 아냐?"

    "네, 맞습니다."

    "처 맞기 전에 저 뒤로 가요."

    "…뒤로요?"

    "왜? 위로 보내줘?"

    머리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있는 것이라고는 하늘뿐. 산 사람이 하늘로 갈 수는 없으니, 무슨 뜻인지는 너무 빤했다.

    "아뇨. 뒤로 가겠습니다."

    "쯧."

    불한당 같은 사내를 쫓아낸 창식이가 울고 있는 최지혜의 등을 쓰다듬었다.

    "괜찮아, 괜찮아. 오빠가 해결했어."

    하지만 창식이의 얼굴을 본 최지혜는 더 크게 울음을 터뜨렸다. 어린아이도 아니고, 중학생마저도 얼굴만으로 울게 할 수 있다는 것이 최창식의 대단한 점이었다.

    "……썅."

    뭔가 기분이 확 나빠진 최창식이지만, 양아치에게도 최소한의 지켜야 할 도리는 있는 법. 중학생, 그것도 여중생에게 화를 낼만큼 막돼먹지는 않았다.

    '나중에 지혁이 형이 알면 맞아 죽겠지.'

    이상하게 그런 부분에서는 철저한 이지혁이었다. 지가 남 괴롭히는 건 생각도 안 하고 말이다.

    "오빠는 나쁜 사람이 아니란다."

    "오빠 아닌데? 아저씬데?"

    "……."

    최창식은 심각하게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그냥 나중에 처 맞을까?'

    잘하면 이지혁을 만나기 전에 그가 죽든가, 이지혁이 죽든가 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으니, 여기서 화를 내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고민을 하던 최창식에게 최지혜의 어머니가 연신 고개를 숙여왔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뇨, 뭐……."

    최창식이 헤벌레 웃으며 뒷머리를 긁었다.

    다른 사람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들어본 적은 잘 없는 것 같다. 가끔 후배들에게 담배를 나눠 주거나 지나가던 애들에게 용돈을 좀 빌릴 때 듣기는 했지만, 그런 말에는 진심이 담겨 있지 않았다.

    '이것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네.'

    그 성격 더러운 이지혁이 게이트 사태를 해결하면서 사람들을 돕고 다닌다기에 미쳤나 싶었는데, 이 말을 듣고 보니 이지혁이 왜 그런 일을 하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은 기분이었다.

    물론 이지혁이 그 일을 하는 것과 이건 아무런 상관이 없지만.

    "조심하세요. 얼른 가서 줄 서세요."

    "괜찮을까요?"

    "네?"

    "저희… 다들 괜찮을까요? 괴물들이 막 몰려온다고 하던데?"

    최창식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왜 자신에게 이런 말을 묻는 걸까?

    최창식이 뭔가 안다고 생각해서 묻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저 누군가에게라도 묻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겠지.

    전쟁과는 다르니까.

    민간인이라는 이름으로 공격을 피해 갈 수 있는 전쟁과 다르게, 이건 인간과 마수가 서로 멸종해야 끝나는 싸움이었다. 그 누구도 예외가 없다.

    마지막에 누가 서 있는가로 승부가 결정 나는, 지독한 싸움이다.

    "솔직히 잘 모르겠지만……."

    고민을 하던 최창식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했다.

    "잘 도망다니세요."

    "네?"

    "잘 피하고, 잘 도망가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으시면 됩니다. 그럼 마지막에는 우리가 이길 테니까. 그때는 평화로워질 거예요."

    "우리가 이긴다구요?"

    "네. 사람이 이겨요."

    "어떻게요? 지금 다들 도망만 치고 있는데."

    최창식이 씨익 웃었다.

    "지금이야 그렇지만, 나중에는 다를 거예요. 절대로 지지 않는 인간을 하나 알거든요."

    "네?"

    어머니가 어리둥절해하자 최지혜가 대신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음, 무슨 말이냐 하면……."

    최창식이 고민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세상에는 상또라이가 좀 있거든?"

    "……네."

    "그런데 그중에서도 제대로 된 또라이가 있다는 말이야. 그러니까 예전에 내가 게임을 하는데, 건너편에 그 또라이가 와서 덤비더라고. 물론 게임으로."

    "네."

    "한 백 판 이겼나? 그런데도 씩씩대면서 끝까지 덤비다가 마지막에는 결국 한 판 이기더라고."

    "네."

    "그다음에 그 또라이가 어떻게 했는 줄 아냐?"

    "……아뇨."

    "전원을 끄더니, 게임기를 들어 던져 버렸어."

    아이가 아연한 얼굴로 최창식을 바라보았다.

    "다시 하면 질 것 같으니까, 지가 마지막에 이겼다는 걸로 끝내 버린 거지. 오락실 아저씨가 미친 듯이 쫓아가는데, 좋다고 웃으면서 도망가더라."

    "미친놈이네요."

    "응, 미친놈이지. 그런데 그 미친놈이 지금 마수들과 싸우고 있거든?"

    "……."

    "어떻게든 이길 거야. 그리고 어떻게든 이기는 걸로 끝을 내버릴 거야. 그 또라이는 그런 인간이니까."

    최지혜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최창식이 빙그레 웃었다. 그 웃는 얼굴도 무섭기는 마찬가지이지만, 조금 전보다는 덜 무서운 것 같았다.

    "자, 버스 온다. 저거 타야지?"

    "네."

    최창식은 앞을 가로막고 있는 이들을 밀어내고 모녀를 앞쪽으로 안내했다. 두 사람이 버스에 타는 것까지 확인한 최창식이 가만히 뒤로 나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손을 흔드는 아이에게 마주 손을 흔들어주며 최창식이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어떻게 좀 해봐요, 지혁이 형."

    그의 목소리는 어쩐지 공허했다.

    * * *

    "…씨발."

    이지혁의 입에서 욕이 흘러나왔다.

    마지막 도전자는 결국 일어나지 못했다. 이천하고도 육십팔 명중에 천팔백 명만이 살아남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알파가 태연한 얼굴로 위로를 건넸지만, 지금 이지혁은 알파의 말을 들어줄 기분이 아니었다.

    "꺼져."

    "진정하시라구요."

    "제길."

    잘해보려다가 벌어진 사고라고는 하지만, 며칠 사이에 그의 손으로 이백이나 되는 사람을 죽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떠한 변명으로도 그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솔직히 이해 못하겠네요."

    이지혁이 사나운 눈으로 알파를 돌아보았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지혁 씨는 저쪽 세계에서 수십만 단위는 우습게 학살을 자행한 것 아닌가요? 거기에 비하면 지금 여기서 죽은 사람은 한 줌에 불과한데, 뭘 그리 가책을 느낀다는 듯이 화를 내는 겁니까?"

    "……."

    "스스로를 인정하시죠. 당신은 인류 역사상 다시없을 악당이자 학살자입니다. 그런 분이 이러시니, 솔직히 좀 당황스럽습니다."

    "그래, 고맙다."

    이지혁이 한숨을 쉬었다.

    틀린 말은 아니다.

    데라 라트렐에서 그가 일격에 죽인 수만 해도 오십만은 넘어갈 것이다. 그런데 이제 와 이백이 그의 손에 죽었다고 양심이 찔리는 척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건 가식이니까.

    이지혁이 스스로를 납득시키려 했지만, 최정훈은 그리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적 백만을 죽이는 것과 아군 백을 죽이는 게 같을 수가 있습니까?"

    "…어차피 같은 인간인데요?"

    "인간이 죽은 게 아니라… 동료가 죽은 겁니다. 그걸 이해 못하니 니가 사이코패스인 거야, 이 미친놈아!"

    최정훈의 마지막 말투는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알파마저 양손을 살짝 흔들며 뒤로 물러날 정도로 말이다.

    "워워, 진정하라고. 시비 걸고 싶은 생각은 없었으니까."

    알파는 화제를 전환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

    "남은 이들은 이제 다들 마나에 익숙해졌습니다. 그럼 이제 마법을 배워야 하는데, 이론서라도 외울까요?"

    이지혁은 도열해 있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다들 증오가 섞인 얼굴로 이지혁을 노려보고 있었다. 당위성은 이해하지만, 그 고통만은 결코 잊을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그나마 평온한 얼굴을 하는 이들은 NDF 정도일까?

    하지만 NDF들의 얼굴에는 증오 대신 초조함이 배어 있었다.

    알파의 말투에도 초조함이 배어 있었다.

    마나를 느끼는 데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소모되었다는 걸 그도 알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지혁은 태연했다.

    "재촉하지 마."

    조금 전에 비해서는 확실히 여유를 되찾은 모습이었다.

    "이제는 바쁠 게 없으니까."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람이 픽픽 죽어 나가고 있을 텐데 바쁠 게 없다니. 이제야 제가 아는 이지혁 씨 같네요."

    "네가 사람 죽는 걸 걱정하다니,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겠군."

    이지혁이 이죽거리고는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알파의 앞에 거대한 게이트가 나타났다.

    "…게이트?"

    "시간은 얼마든지 있어. 이제는 얼마든지 있지."

    이지혁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지옥에서 단련시켜 주지. 그러니 걱정하지 말라고. 너희가 고통 속에서 구를 시간은 아직 얼마든지 남아 있으니까 말이야."

    "…시간 축이 다른 겁니까?"

    "잘 아네."

    "그럼 왜 처음부터 이걸 안 쓰시고?"

    이지혁이 손을 내저었다.

    "우습게도 말이지, 지금 이 세계가 가장 마나가 충만한 세계거든. 마계라는 밀도 깊은 마나의 대지와 연결이 되다 보니, 여기는 내가 아는 최고의 마법 대륙인 베라프마저 능가하는 마나의 보고라고."

    알파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납득이 간다.

    "여기서 하지 못하면 어디서도 할 수 없다는 거군요.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빙고."

    이지혁이 한숨을 쉬었다.

    "생각보다 오래 걸리기는 했지만, 이 정도면 세이프야. 이제는 진짜 본론으로 들어가야 할 시간이지."

    이지혁이 게이트를 가리켰다.

    "통역이요."

    "네."

    한 번 심호흡을 한 이지혁이 외치기 시작했다.

    "여기로 들어가! 이 안으로 들어가면 다른 세계가 있다! 아마 거기서 돌아올 수 있는 수는 이 중의 반쯤 될 거다! 그리고 이곳을 빠져나왔을 때!"

    이지혁이 잠시 뜸을 들이고는 말을 이었다.

    "너희는 나를 죽일 수 있을 만한 능력을 갖추게 될 거다."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

    가장 선두에 있는 이들부터 하나씩 거침없이 게이트 안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이지혁에게 알파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사실 이지혁 씨를 죽이고 싶어서 들어가는 건 아닐 겁니다. 그건 알아주세요."

    "…더럽게 고맙네."

    새로운 차원으로 향하는 이들을 바라보는 이지혁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고 있었다.

    * * *

    "처음부터 이런 방법을 생각하셨던 겁니까?"

    알파의 말에 이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대답해 줄 필요는 없지만, 대답하지 않아야 할 이유도 없다.

    "시간이 없으면, 그 시간을 늘려 버리면 그만이지."

    알파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 다른 차원에는 시간이 다르게 흐른다는 것은 이지혁의 사례에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왜 그런 생각을 못했지?'

    알파는 스스로가 명석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절대적인 지식과 지혜의 측면에서 본다면, 이 지구에서 자신 이상의 머리를 가진 사람은 몇 되지 않을 것이라 자부해 왔다. 그리고 그 자부심은 그저 오만이 아니었다.

    각종 실험을 통해 어느 정도는 증명된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알파는 조금 전까지 그런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 사람은 굉장히 똑똑한 것이 아닐까?'

    절대적인 현명함은 알파에 미치지 못한다고 해도 위기 상황을 해결하는 능력과 압박 속에서도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은 그 이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하튼 요주의라니까.'

    "표정이 엄청 언짢아 보이는데?"

    "아니, 아닙니다."

    알파가 손을 내저었다.

    "예상 이상의 해결법을 확인해서 즐거울 뿐입니다. 그런데 저 차원 안의 시간 비는 어떻게 되는 거죠?"

    "글쎄? 한 100대 1 정도 아닐까?"

    "…무지막지하군요."

    "나는 부족한 것 같지만……."

    이지혁이 혀를 찼다.

    시간 비가 가장 우월한 차원으로 가는 것이 좋겠지만, 그것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차원에 따라 인간이 버틸 수 있는 곳이 있고, 버틸 수 없는 곳이 있었다.

    시간 비가 1,000대 1인 곳이 있다 하더라도 그곳에 공기가 없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곳에 있는 이들이 버틸 수 있는 차원, 그중에서도 원주민이 없어서 괜한 트러블이 벌어지지 않을 수 있는 차원을 찾아가야 한다.

    그 조건을 만족시키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제 저 안으로 들어가면 본격적인 수련이 시작되는 겁니까?"

    "그렇지."

    "쉽지는 않겠죠?"

    이지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모르겠네."

    "모른다구요?"

    "음, 원래 마법이라는 것은 불완전한 것이라… 위험성을 내포하거든. 그래서 원래 마법을 익힌다는 것은 돌다리를 두들겨 건너야 하는 것이란 말이야."

    "그렇군요."

    "그런데 돌다리를 두들겨 건널 시간이 없으면, 그게 썩은 나무다리라고 해도 전력으로 건너야겠지. 그러던 와중에 재수 없으면 빠지는 거고."

    알파는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는 안전하게 배울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그 방법을 쓸 수 없으니 얼마나 힘들어질지는 본인도 모른다, 이 말씀이시군요."

    "그렇지."

    "그럼 저는 빠져도 됩니까?"

    "당장 기어 들어가는 게 좋을 텐데."

    "에효."

    알파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게이트 쪽으로 향했다. 알파가 가까이 다가오자 상황을 보고 있던 알파의 부하들이 우르르 게이트 안으로 몰려 들어갔다.

    "괜찮을까요?"

    최정훈이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어왔다.

    "뭐가요?"

    "저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이 세계와의 연락은 완전하게 끊겨 버리는 것 아닙니까?"

    "어라?"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 보니 그러네?

    "최악의 사태로는 돌아왔더니 이 세계가 이미 없어져 있는 일도 벌어질 수 있겠네요."

    "그러게요."

    이지혁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건 미처 생각 못한 일이다.

    "연락책이라도 하나 놔둘까요?"

    "그런데 연락책을 두면 다른 차원과 교신이 가능한 겁니까?"

    "에이, 당연히 안 되죠."

    그럼 연락책이 왜 필요한건데, 인마!

    최정훈이 얼굴을 일그러뜨리자 이지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뭐, 진인사 대천명이라고, 그건 하늘에 맡겨야죠."

    "……."

    최정훈이 불안한 눈으로 게이트로 걸어 들어가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보통 일이 아닌데, 이거.'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 세상을 완전히 놓아버리고 떠난다는 사실이 불안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최정훈은 한숨을 쉬며 전화를 들었다.

    "얼마나 걸리는 겁니까?"

    "모르죠."

    "…네?"

    이지혁이 뭘 그런 것을 자꾸 묻느냐는 듯이 최정훈을 보았다.

    "이게 무슨 단기 속성 과정이나 수능 준비도 아니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를 동안 가르쳐 보고, 되든 안 되든 붙어야 하는 상황은 아니잖아요."

    "그렇긴 하죠."

    "백 년이 걸리든, 천 년이 걸리든 이 정도면 해볼 만하겠다는 답이 안 나오면 안 돌아와요."

    "……."

    최정훈의 얼굴이 굳었다.

    이 인간, 진심이구나.

    처음에는 '다른 방법이 없으니 한 번 해보자' 정도였던 것 같은데, 지금의 이지혁은 정말 이 일에 사활을 걸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게 아니라면 여기에 있는 이들에게서 가능성을 보았든가.

    어찌 되었든 지금까지는 될 대로 되라는 느낌으로 움직이던 이지혁이 의욕을 찾았다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이 양반은 이래야지.'

    투덜거리고, 짜증내고, 의욕이라고는 일절 찾아볼 수 없지만, 그래도 벌어진 일은 반드시 해결하고 마는 사람이 이지혁이 아니었던가. 이지혁이 이런 모습을 되찾자 최정훈도 힘이 나는 것을 느꼈다.

    '제길, 많이도 의지하고 있었군.'

    아울러 단순히 그에게 해결을 바란 것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많은 도움을 받고 있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일단은 그럼 연락을 하겠습니다."

    "네."

    이지혁이 고개를 끄덕이자 최정훈이 전화를 들고 돔 밖으로 나갔다.

    돔 안에는 마나가 가득 차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이곳이 원래 극비 실험장으로 운용되던 곳이기 때문인지 여하튼 전파가 잘 통하지 않았다.

    이지혁은 전화를 하러 밖으로 나가는 최정훈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는 이들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의 주변에는 어느새 NDF들이 다가와 있었다.

    "저기 들어가면 저번에 한, 그런 수련을 하는 겁니까?"

    김다현의 물음에 이지혁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이제는 그런 식으로는 답이 안 나온다. 완전히 새로운 것을 갖춰야 해."

    "반 죽겠군."

    "반만 죽으면 다행일 것 같은데, 그냥 죽을 수도 있겠네."

    다른 이들은 한 번씩 피거품을 토한, 마나를 느끼는 과정에서도 우는소리 한 번 하지 않은 NDF들이 이지혁과의 수련이라는 말에 두려움을 표하고 있었다.

    "쟤들은 지금까지 받은 수련이 제일 빡세다고 생각할 것 아냐?"

    "…아마 그렇겠지?"

    "내가 한국에 태어난 게 잘못이지. 외국에서 태어났으면 적어도 죽기 전까지는 편하게 살았을 텐데."

    이지혁이 엄살을 피우는 NDF들을 보며 퉁명스레 말했다.

    "하기 싫으면 들어가지 말든가."

    "씨발, 그게 쉬우면 말도 안 하지."

    서아영이 표독스럽게 말했다.

    "여기까지 와서 손 털어버리면 그게 제일 병신 되는 건데."

    "그럼 들어가면 되고."

    이지혁이 손을 쭉 뻗어 게이트를 가리켰다.

    "쓰읍."

    서아영이 불타는 듯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갈 거야. 들어갈 건데, 그전에 하나 물어도 돼요?"

    "넵."

    "저기 들어갔다 나오면 정말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거예요?"

    "흠……."

    이지혁이 대답하기 곤란하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자 서아영이 이를 갈았다.

    "죽어라고 훈련하고 고생했는데, 별 도움도 못 되고 잘난 몇 놈이 해결하는 상황의 들러리가 되기는 싫거든요. 이왕 할 거면 정말 확실하게 강해질 수 있게 해줘요."

    "후회할 텐데?"

    "후회는 이미 당신을 끌어들인 순간부터 지금까지 하루에 수십 번씩 하고 있어!"

    "쿡쿡쿡쿡."

    이지혁이 씨익 웃었다.

    "그러고 보면 처음에 그런 이야기를 했던 것 같은데……. 나 데리고 가면 후회할 거라고 말이야."

    "…그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서아영이 머리를 휘휘 저었다.

    "아무래도 좋아요. 결국 당신 덕분에 지켜낼 수 있던 것이 많았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

    "음……."

    "그러니 하나는 약속해 줘요."

    서아영이 이지혁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이번만 참아내면 정말 모두를 지킬 수 있는 거죠?"

    "……."

    가장 이런 말을 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 서아영이었다. 그런 서아영이 저런 말을 하는 것을 보니, '지금 상황이 심각하기는 심각하구나' 하는 실감이 확 든다.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까?

    이지혁은 사람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서 거짓말을 하는 걸 혐오한다. 냉정하게 말한다면, 이번 수련을 마친다고 해도 이 인원만으로 마계를 막아내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약속하지."

    저들 역시 이지혁에게 진실을 듣고 싶어 묻는 게 아니리라.

    뭣도 모르고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는 다른 이들과는 달리 이미 게이트 안의 삶을 한 번 겪어본 이들은 저 안에서의 수련을 버텨낼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한 것이다.

    그것을 알고 있기에 이지혁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힘은 얻게 될 거야. 활용에 따라서는 세상을 구할 수 있는 힘이 될 수도 있겠지."

    서아영은 가만히 이지혁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어요."

    서아영이 고개를 돌려 모두를 바라보았다.

    "빠질 사람?"

    "……."

    "없으면 됐어. 가자. 징징대지 말고 깔끔하게 가는 거야."

    서아영을 필두로 한 NDF들마저 게이트로 향했다. 모든 이들이 게이트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을 본 이지혁이 가만히 눈을 감았다.

    '되든 안 되든 이게 마지막이다.'

    확률 낮은 도박에 모든 것을 거는 심정이었다. 이걸로도 해결이 되지 않는다면, 그들에게는 시간도, 가능성도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제길."

    이지혁은 머리를 가득 채우는 불안한 상념을 떨쳐 버렸다.

    그러고는 그를 향해 뛰어오는 최정훈을 바라보았다.

    "뭐래요?"

    "…버텨보겠답니다."

    최정훈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에 대해서 동의하는 것 같더라구요. 막는다고 해서 딱히 다른 방법이 생기지 않는다는 걸 알았는지, 반드시 성공해서 돌아와 달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누가요?"

    "크리스토퍼와 송 총리님입니다."

    "쯧."

    이지혁은 혀를 찼다.

    뭐랄까.

    SF 영화에서 보는 장면 같았다.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 마지막 시도를 하는 결사대와, 그들을 믿을 수밖에 없는 남아 있는 인류? 그런 느낌?

    '영화는 질색이야.'

    이지혁이 짜증 어린 얼굴로 게이트를 향하기 시작했다.

    "가요."

    "네."

    최정훈이 이지혁의 뒤를 따라 걷다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

    "이지혁 씨."

    "네."

    "할 수 있는 거죠?"

    "신파 찍을 생각 없으니, 들어가기나 해요. 내가 할 수 있다고 하면 할 수 없는 게 할 수 있어지기라도 한대요?"

    "그래도 듣고 싶은 겁니다."

    "안 되도 되게 해드릴 테니까, 들어가요."

    "…믿습니다."

    이지혁은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면서도 마지막까지 자신을 바라보는 최정훈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못해 먹겠군."

    기대를 받고 의지처가 되는 것은 그의 역할이 아니었다. 그는 미움을 받고 공포의 대상이 되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니까.

    이지혁이 가만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가 눈에 담으려는 것은 실험장 내부가 아니라 이 세상이었다.

    '버티라고.'

    반드시 돌아올 테니까.

    이제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이유와 각오로 이지혁이 타 차원을 향해 천천히 그 발을 내디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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