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91화 (91/118)
  • [■] 사이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

    ─────

    "전원 문제없이 훈련장으로 들어갔습니다."

    "으음."

    보고를 받은 송정수가 얼굴을 굳혔다.

    '시작이로군.'

    실감이 확 났다.

    지금 그 돔 안에 있는 이들에게 인류의 모든 것을 건 것이나 마찬가지다.

    '희망이라는 건가.'

    송정수는 나직하게 웃었다.

    그것참, 덧없는 희망이로군.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시작한 일에 전 세계가 달려들고 있었다. 여력이 조금이라도 있는 국가들은 어떻게든 자신들의 능력자를 참여시키려 안달이었다.

    구성 과정에서 제외된 일본 역시 지금 이 시간에도 외교 채널을 통해 참가를 요청하고 있었다. 미국에다 직접 이야기하라고 끊어버리기는 했지만 말이다.

    "잘되겠죠?"

    윤영민의 말에 송정수가 한숨을 쉬었다.

    "그걸 누가 알겠습니까. 그저 믿을 수밖에요."

    "으음……."

    윤영민도 그걸 모르지는 않았다. 다만, 위로를 받고 싶은 것뿐이다. 송정수가 그런 것을 해줄 사람도 아니지만.

    "이제는 우리가 해야 합니다."

    "예."

    윤영민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빈자리가 이렇게 클 줄이야.'

    이지혁을 위시로 한 이들은 이제 한동안 외부로 나오지 않는다. 실패하면 멸망은 정해져 있다. 그들이 전력을 갖추는 동안 세계가 멸망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어차피 지는 도박에서 운을 노려보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케이스다. 통하면 대박이고, 그 때문에 좀 더 빨리 진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렇기에 이제는 이지혁과 NDF의 도움을 바랄 수 없다. 한반도에 무슨 일이 생겨나더라도 자신들끼리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새삼 그 사실을 실감한 윤영민은 이지혁들의 빈자리가 얼마나 큰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동안 그가 그들의 힘으로 얼마나 쉽게 대통령 직을 해 먹고 있었는지도 말이다.

    '이런 건 안 알려줘도 되는데.'

    윤영민이 낮은 한숨을 내쉴 때, 인터폰이 울렸다.

    "무슨 일이야?"

    인터폰을 받은 윤영민이 묻자 빠른 대답이 돌아왔다.

    - 미국입니다. 크리스토퍼 맥클라렌이 통화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연결해."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전화가 연결되었다.

    - 이런 식으로 다시 연락드리게 되어 매우 유감입니다.

    "아니오. 당신의 연락은 언제나 환영이지. 그래서 무슨 일이오?"

    - 나쁜 소식 하나를 전해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나쁜 소식?"

    - 예. 나쁜 소식입니다.

    윤영민이 깊게 한숨을 쉬었다.

    크리스토퍼의 입에서 나쁜 소식이라는 말이 나왔다면, 그건 정말 나쁜 소식이다. 이 사내는 진중한 면이 있어서 별것 아닌 일로 호들갑을 떨지 않는다.

    "아직 들은 건 아무것도 없는데도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군. 그래, 무슨 일이오? 더 기다렸다가는 말을 듣기도 전에 심장마비로 사망할 판이니, 빨리 말을 해주는 게 좋겠소."

    - 마왕들의 진격 속도가 빨라졌습니다.

    "음, 그건 나쁜 소식 정도로 설명할 말이 아닌 것 같은데."

    송정수가 윤영민의 말을 가로챘다.

    "얼마나, 얼마나 빨라진 거요?"

    - 세 배 이상.

    "썩을."

    송정수가 한숨을 쉬며 소파에 등을 기댔다.

    "그 이상 나쁜 일은 없겠지?"

    - 아쉽지만 있습니다.

    "빨리 말하시오. 지금 그렇게 뜸을 들이고 반응을 볼 때가 아닌 것 같은데!"

    - 게이트가 다시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뭐?"

    송정수의 눈이 흔들렸다.

    이게 뭔 소린가? 게이트라니?

    "우린 그런 보고를 받은 적이 없는데?"

    - 아프리카에서부터 퍼지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현재 유럽 쪽으로도 게이트가 열리기 시작합니다.

    "어디까지 하자는 거지……."

    송정수가 무릎 사이로 얼굴을 묻었다.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그 신은 정말 악질임에 틀림없다. 그게 아니면 인간들이 절망하는 것을 보고 즐기는 악취미를 가지고 있거나 말이다.

    차라리 한 번에 망해 버리는 것이 낫지, 이런 식으로 피를 말리면서 조금씩조금씩 조여오는 걸 지켜보고 있으려니, 죽기 전에 먼저 정신이 나가 버릴 것 같았다.

    "그렇지만 또 포기는 못하는 게 문제군. 끌끌끌."

    송정수가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아, 담배."

    "피우십시오. 그런 건 이제 물어보지 말고 알아서 합시다. 지금 대통령의 권위가 어쩌고 할 시기가 아니잖습니까."

    "권위를 존중해 드리는 말을 해야 할 타이밍인 건 알겠는데, 힘이 없으니 그냥 피우겠습니다."

    송정수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거칠게 연기를 내뿜었다.

    "일단은 KSF에 말을 전해야 할 것 같습니다."

    - 미스터 프레지던트.

    "말씀하시죠."

    - 현재 중국이 붕괴된 이상 아시아의 대표는 한국입니다. 일본은 이미 그 영향력을 잃은 지 오래고, 동남아시아는 분열 중입니다. 한국이 나서줘야 합니다.

    "중국은 회복이 안 되는 겁니까?"

    - 지도부가 완전히 박살이 났습니다. 베이징이 망가진 여파가 너무 큽니다. 살아남은 공산당의 간부들이 명령 체계를 복구하려 애를 쓰고는 있지만, 중구난방입니다.

    "으음, 대책은?"

    - 대만을 통해 재건을 노려보고 있기는 하지만, 중국인들이 대만인들을 일본인들보다 싫어하는 것 같더군요. 한 국가에서 갈라져 나왔으니 괜찮을 줄 알았는데.

    "그런 식견으로 잘도 그 자리에 붙어 있었군."

    청와대가 폭발해서 대통령과 여당이 모두 죽었다고 한들 북한에게 정치를 맡기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 미국이 하려는 짓은 그것과 같았다.

    - 대만이든 잔존 공산당이든 일단 밀어줘야 어떻게 수습이 될 텐데, 자국 내에 모든 힘을 쏟아부어야 하는 상황이라 수습이 어려울 겁니다.

    "일단 알겠소."

    - 네, 그럼.

    전화가 끊기는 소리를 들으며 송정수가 혀를 찼다.

    '미국도 끝나가는군.'

    만약 마왕이 출현하기 전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미국도, 그리고 다른 주변국들도 좋다고 중국에 개입하려 애썼을 것이다. 온갖 변명과 명분을 만들어서 중국을 분할 통치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불가능했다.

    먼 곳의 큰 이득보다는 당장의 생존이 더 중요하다. 미국은 해외에 파견해 둔 병력들까지 자국으로 불러들이며 마왕과의 일전을 대비하고 있었다.

    막아내지 못하면 멸망이다.

    "일단은 최대한 우리끼리 방어하면서 이지혁 씨가 빨리 준비를 끝내주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음, 그렇죠."

    송정수는 묵직한 침음을 흘리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서둘러 주게, 이 사람아.'

    * * *

    "끄으으으으으."

    미하엘은 바닥을 기고 있었다.

    입으로 흙먼지가 쉴 새 없이 들락거렸지만, 지금은 버석거리는 입안의 모래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그의 모든 정신은 그의 몸 안을 돌고 있는 기이한 기운에 집중되어 있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이 감각을?

    몸 안에 불로 만들어진 뱀과 얼음으로 만들어진 뱀이 꿈틀대고 있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차마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각과 고통이 그를 꼼짝도 하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쿨럭!

    겨우 몸 안을 돌던 기운들이 잦아들자 미하엘이 피거품을 물며 힘겹게 양팔로 바닥을 밀어냈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비치 의자에 앉아서 고개를 까딱거리고 있는 이지혁의 얼굴이 보인다.

    '빌어먹을.'

    어떤 수련도 이겨낼 자신이 있었다.

    고통받고 있는 국민들을 생각한다면 그 자신의 고통은 별게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한 달 동안 잠을 자지 말라고 해도 따를 생각이었고, 어떤 굴욕을 겪는다고 해도 참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지혁의 방식은 그의 모든 결심을 싸그리 박살 내놓았다.

    마나라는 것을 익히기 위해서 적어도 무언가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능동적으로 말이다.

    하지만 돔 안에 들어와 그 자신이 한 것이라고는…….

    "아직도 못 느끼나."

    이지혁이 쯧쯧, 혀를 차더니, 한 손을 들어 올렸다. 그와 동시에 미하엘의 머리 위에 찬란히 빛나는 마나의 구름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미하엘이 넋이 나간 듯한 표정으로 그 구름을 바라보았다.

    "히이이익!"

    "아, 안 돼!"

    그의 주변에서 비명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손가락 까딱할 힘도 없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이들이 머리 위에 생긴 마나의 구름을 보더니, 비틀비틀 그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달아나야 하니까.

    하지만 이지혁은 그들의 의지에는 별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다.

    이지혁의 손가락이 아래로 내리그어지자 머리 위의 구름이 하강하기 시작했다.

    "크읍!"

    미하엘이 이를 꽉 깨물었다.

    어금니는 이미 부러져 나갔는지 안쪽이 제대로 맞물리지 않는 느낌이었다.

    이를 꽉 깨물어 버텨내겠다는 의도가 아니었다. 지금 이를 물지 않으면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혀가 잘려 나간다.

    그리고 그 순간, 마나의 구름이 미하엘을 뒤덮었다.

    "끄으으으으……."

    전신으로 마나가 파고드는 느낌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그와 동시에 육체가 마치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몸 안으로 들어온 이질적인 기운이 혈관을 타고 돈다. 팽팽하게 부푼 혈관이 금방이라도 터져 나갈 것 같다.

    "고통을 참으라는 게 아냐! 느끼라고! 몸 안에 뭐가 있는지!"

    말은 쉽지, 이 새끼야.

    할 수만 있다면 당장에라도 저 뻔뻔한 놈에게 달려가서 그 혀를 뽑아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지금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으니까.

    무릎이 꺾인다.

    바닥으로 얼굴이 떨어지는데도 팔이 반응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맨땅에 얼굴을 처박은 미하엘이 바닥을 긁으며 신음하기 시작했다.

    몸 안에서 느껴지는 고통이 얼마나 심했는지, 선 자세에서 앞으로 쓰려져 얼굴부터 착지했음에도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 미약한 고통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지금 그의 몸 안에서 더 큰 고통이 느껴지고 있었으니까.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건가.'

    언제까지!

    하루 종일 마나의 구름을 맞아 바닥을 구르기만 반복하고 있었다. 이러다가 마나인지 뭔지를 느끼기도 전에 그가 먼저 죽을 판이었다.

    이지혁은 바닥을 구르는 이들을 보며 혀를 찼다.

    '어렵긴 어렵지.'

    육지에 사는 이를 바다에 데리고 가 '이게 바닷물이다'라고 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이들 역시 모두가 마나가 어떤 것이고, 어떻게 존재하는가는 모두 이해를 마쳤다.

    하지만 바닷물을 이해했으니 이제 바다에 들어가서 물고기처럼 살라고 하면 어떻게 될까?

    지금 이들이 하고 있는 일이 딱 그 짝이었다.

    아가미가 생길 때까지 입과 코로 바닷물을 계속 퍼붓는 것.

    무식하기 짝이 없는 일이지만, 세대를 거쳐 진화할 필요가 없는 것이 유일한 위안이랄까?

    이 고통을 이겨내고 마나의 끝을 잡는 이들은 반드시 나올 것이다.

    '몸으로 느껴야 돼.'

    아무리 말로 설명해도 의미가 없다.

    불이 뭔지 모르는 이에게 불을 설명한다고 이해할 수 있겠는가.

    불이 어떤 작용을 하는지 모르는 이가 그걸 알고 싶다면 타오르는 불꽃 사이로 손을 집어넣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었다.

    피해는 있겠지만, 효과는 극명하다.

    물론 이지혁은 부작용을 감수하고 효율을 추구하는 이였고, 덕분에 능력자들은 다들 반쯤 죽어 나가는 중이었다.

    "그래도 나름 강단은 있네. 그렇지 않아?"

    이지혁이 자신의 앞에 꿈틀대는 고깃덩어리를 보며 피식 웃었다.

    "알파?"

    알파라는 말을 들은 형체가 꿈틀대기 시작했다.

    * * *

    알파는 인간과 고깃덩어리의 경계를 해매고 있었다.

    그의 육체가 가진 복원력은 평범한 인간을 훨씬 상회한다. 그리고 능력자조차 압도적으로 상회한다.

    하지만 그의 육체는 조금도 복원되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지혁의 그의 육체 안으로 마나를 밀어 넣고 있기 때문이다.

    "저런 애들도 열심히 하는데, 너는 더 열심히 해야지. 네가 원한 거니까. 안 그래?"

    이지혁이 말을 마치는 순간, 알파의 밑에 그려져 있던 마법진이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마법진에서 나온 빛이 알파의 육체를 파고든다.

    이미 죽었다고 해도 전혀 위화감이 없을 육체가 덜덜 떨리기 시작한다.

    그나마 비명을 지를 수 없는 게 다행일 것이다.

    이가 있었다면 이가 모두 부러져 나갔을 것이고, 스스로 혀를 깨물었을지도 모르니까.

    "마나란 건 말이야……."

    이지혁이 알파의 귀라고 생각되는 부분에 속삭이기 시작했다.

    "사실 우리가 쓸 수 없는 거야."

    이지혁이 이죽거렸다.

    "우리는 에테르 생명체거든. 쉽게 말하자면, 우리가 마나를 상용한다는 건… 이산화탄소 덕분에 자라는 나무가 살아남기 위해 뿌리로 걸어 다니고 산소로 숨을 쉬어야 한다는 말과 그리 다르지 않은 말이야."

    이지혀기 알파의 몸을 툭툭, 걷어찼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고 있어? 아니, 들리고는 있나? 입은 남겨둘 걸 그랬네. 미안하군. 이게 조절이 잘 안 되는 거라서 말이야."

    이지혁이 낄낄대며 웃기 시작했다.

    "네 발로 나를 찾아와서 마법을 가르쳐 달라고 했을 때, 이 정도는 각오했을 것 아냐? 설마 시간도 없고 언제 마왕이 세계를 멸망시키려 들 줄도 모르는데, 편안하게 과외받을 생각은 아니었겠지? 응?"

    최정훈이 떨리는 눈으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지금의 이지혁은 뭐라고 해야 할까…….

    이상한 표현이긴 하지만, 마치 물 만난 물고기 같았다. 지금까지 어떻게 참아왔는지가 궁금할 정도로 흉성을 마구 드러내고 있었다.

    "큐어."

    이지혁의 손에 마나가 모여들어 새하얀 빛을 뿜어냈다. 그러자 알파의 몸이 움찔움찔한다.

    이미 안구가 없는데도 이지혁에 손동작에 반응하고 있었다.

    "호오?"

    이것 봐라?

    이지혁이 흥미롭다는 얼굴로 알파를 바라보았다. 적어도 이틀은 더 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빠르게 적응하고 있지 않은가.

    '재능으로 따진다면, 나와는 비교도 안 되겠군.'

    아마 알파가 이지혁 대신에 베라프로 갔다면, 돌아오는 데 백 년도 걸리지 않았을지 모른다. 절대적인 재능으로 따지면 이지혁은 감히 알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수준이고, 이곳에 있는 평범한 능력자들만도 못했다.

    '평범한 게 아니지.'

    지금 저기서 바닥을 구르고 있는 이들 하나하나가 지구의 절대강자들이다. 이지혁이 베라프를 가지 않고 이 세계에 있었다면, 과연 이들급으로 강해질 수 있었을까?

    "와, 나 지금 뭔 생각을 하는 거야?"

    그 시간이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을 보니, 그도 이제 미쳐 가는 모양이었다.

    이지혁이 그 베라프에서 생고생을 한 걸로 이득을 보는 것은 이지혁 본인이 아니라 지구다. 이지혁이 적당한 타이밍에 귀환하지 않았다면, 이미 이 세계는 무너졌을 것이다.

    "나는 개고생을 하고 말이지. 큐어."

    이지혁의 손에서 뿜어져 나간 빛이 알파에게 스며들었다. 그와 동시에 알파의 몸이 빠르게 회복되어 가기 시작했다. 아니, 회복이라기보다는 수복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은 과정이었다.

    "크핫!"

    날아갔던 안면을 되찾은 알파가 핏발이 선 눈으로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렸다.

    "난 여기 있는데? 왜 한 방 먹이려고?"

    "어어… 이지혁 씨, 치료가 제대로 되지 않고 있는 거 같은데요? 아무것도 안 보여요."

    "그래?"

    이지혁이 알파의 눈 쪽으로 큐어를 쏘았다. 그러자 알파가 눈을 몇 번 꿈뻑대더니 이지혁을 보며 씨익 웃었다.

    "아, 이제 보입니다."

    "야, 웃지 마. 너 지금 입술 없다. 좀비가 따로 없어."

    "그래요?"

    알파가 자신의 입가를 더듬더니 인상을 썼다.

    "이거, 다 날아갔다 회복되는 건데, 왜 부러진 이는 안 고쳐집니까? 임플란트비 아낄 줄 알고 좋아했는데."

    "…미친 새끼."

    이지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확실히 이 알파라는 놈의 정신세계는 보통이 아니었다.

    고개를 슬쩍 돌려 바라보니 이지혁의 마나에 얻어맞은 유럽 놈들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바닥을 기고 있었다. 한 놈도 빠짐없이 말이다.

    '적어도 서른 배는 더 쑤셔 박았는데.'

    고통이 정비례해서 서른 배까지 올라가지는 않겠지만, 저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을 것이다.

    어떤 이에게 영혼이 날아갈 것 같은 고통을 받는다면 대개 반응이 어떻겠는가.

    보통은 살점 하나 남김없이 씹어 삼키고 싶을 정도의 적의를 느끼든가, 아니면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발작을 일으킬 정도의 공포를 느끼게 된다.

    하지만 알파는 그 어느 쪽도 아니었다.

    이지혁조차 버티기 힘들다고 생각하는 수준의 고통을 겪었을 터인데,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전혀 잃지 않았다.

    '걸물은 걸물이네.'

    이지혁조차 이만한 고통을 겪었다면 눈을 뜨는 순간 눈앞의 놈을 씹어 먹으려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알파는 숨을 헐떡이고 있을지언정 이지혁에게 전혀 적의를 드러내지 않았다.

    이성적으로 안다고 다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성적으로 아는 것을 완벽하게 할 수 있는 자는 존재하지 않으니까.

    "조금은 칭찬해 줄까?"

    "헐? 주인님?"

    "닥쳐."

    이지혁이 혀를 내밀고 헉헉대는 알파의 얼굴을 짓밟았다. 정이 갈래야 정이 갈 수가 없는 놈이다.

    "흐음."

    손을 들어 시계를 본 이지혁이 입을 열었다.

    "밥 먹고 하자."

    "와우, 유일한 즐거움이 시작되는군요."

    그새 팔다리도 거의 회복을 마친 알파가 몸을 일으켰다. 그러다 바닥을 기고 있는 능력자들을 본 알파가 눈살을 찌푸렸다.

    "엄살들이 심하네. 몸도 멀쩡한 것 같은데."

    "그러게 말이야."

    유럽의 능력자들이 들었다면 피를 토할 말이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들은 지금 중얼거리는 알파와 이지혁의 대화를 들을 만큼의 정신이 없었다.

    "오늘은 메뉴가 뭐냐?"

    "햄버거 아닐까요?"

    "…양키 놈들은 햄버거만 먹고 사나?"

    "오, 미국을 무시하지 마십시오. 스테이크도 먹습니다."

    "자랑이다."

    낄낄대며 걸어가는 두 사람을 지켜보던 최정훈이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이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그리고 이 상황에 내가 왜 그런 걸 신경 써야 하는 건지.

    "어휴."

    * * *

    미하엘은 식탁에 놓여 있는 음식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묽게 쑨 스프도 입으로 넘기기 힘들 텐데, 햄버거라니…….

    이 미친놈들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리 그가 딱딱한 소시지조차 철근같이 씹어 먹는 게르만 민족의 후예라고는 하나, 지금은 도저히 이 고기와 빵을 입으로 넘길 자신이 없었다.

    맥주마저 마다할 판에 이런 걸 어떻게 먹으라는 말인가.

    다른 사람들도 다 같은 생각인 모양이었다.

    모두가 음식을 바라보기만 할 뿐, 차마 손을 대지 못하고 있었다. 그중에는 손이 안 올라가서 손을 못 대는 사람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이대로는 죽어.'

    미하엘의 몸이 덜덜 떨렸다.

    물론 그들이라고 해서 하루 종일 이지혁의 손에 농락당하는 것은 아니었다. 미국과 유렵, 알파 쪽이 번갈아가며 이지혁과 수련을 한다. 남은 조는 각자 명상을 하든가, 어떻게든 마나라는 것을 느끼기 위해서 발악을 해보는 정도가 지금 그들이 하는 수련의 전부였다.

    결국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하루에 1/3만 이지혁과 수련을 한다는 뜻인데…….

    '그것도 못 버티겠어.'

    미하엘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독일은 파괴당하고 있다. 그 상황을 반전시킬 수만 있다면 인육이라도 뜯어먹을 기세로 왔건만……. 인육을 뜯어먹는 게 아니라, 내가 인육이 되어 뜯어 먹히는 꼴이 아닌가.

    '정말 이 방법으로 강해질 수는 있는 건가?'

    이지혁의 지론은 간단했다.

    마나를 느낄 수 없으면 마법을 배울 수 없다. 그러니 다른 모든 것을 젖혀놓고 일단 마나를 느끼는 것이 가장 먼저라는 것이다. 그리고 마나를 느끼는 가장 좋은 방법은 마법을 맞아보는 것이라 했다.

    육체 안에 밀집된 마나가 들어왔을 때가 마나의 존재감을 가장 확실하게 느낄 수 있는 순간이니까.

    이지혁의 지론은 반쯤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육체 안으로 이지혁이 만들어낸, 구름 같은 마나의 무리가 들어오는 순간, 마나가 무엇이고, 그 마나가 지금 내 몸을 어떻게 타고 도는지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반은 틀렸다.

    마나를 느낄 수 있는 것은 그 순간뿐이었다. 그 후 마나가 몸에서 빠져나가면, 마치 꿈을 꾼 것처럼 그전까지 가지고 있던 마나에 대한 느낌이 모두 사라져 버린다.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은 생각했다.

    하지만 그 쉽지 않다는 것이 이런 의미일 줄은 몰랐다.

    몸이 부서지고 짓물러지는 것은 참아낼 수 있다. 뼈가 부러져라 단련을 하라고 해도 얼마든지 할 것이다.

    하지만 이건 단련이라기보다는 연구에 가까웠다. 그것도 대체 혼자서는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암담한 연구 말이다.

    그그극.

    미하엘의 포크가 테이블을 긁었다.

    "제길."

    그 순간, 미하엘의 얼굴 옆으로 새하얀 접시가 쑥 내밀어졌다.

    "음?"

    그의 앞에 놓인 접시에는 김을 뿜어내는 따뜻한 스프가 담겨 있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쿨하게 생긴 동양인이 빙긋 미소를 짓고 있었다.

    "버거보다는 먹기 편할 겁니다."

    "아……."

    "크리스토퍼는 가끔 센스가 없거든요. 식단표를 제멋대로 짰더라구요."

    사내가 살짝 고개를 숙이더니, 카트를 밀며 사람들에게 스프를 나눠 주기 시작했다.

    쨍그랑.

    포크를 내려놔야겠다고 생각하자마자 손이 그냥 벌어져 버린다. 미하엘은 테이블 위로 널브러진 포크를 정리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스푼을 잡았다.

    '먹자.'

    먹어야 한다.

    먹지 않으면 버틸 수 없다. 체력이 깎이고 깎여서 결국은 리타이어하게 될 것이다.

    "와, 스프도 있었네. 왜 나는 안 주지?"

    태평한 소리를 늘어놓다가 이지혁에게 포크로 얻어맞고 있는 알파를 보니 모든 걱정이 다 우습기만 했다.

    "…내가 포기하면 할 사람이 없어."

    여기는 인류 최후의 보루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그들이 포기하면 더 이상 뒤는 없다. 미하엘은 그 막중한 부담감을 느끼면서 기계적으로 스프를 목구멍 안으로 밀어 넣었다.

    '해야 해.'

    미하엘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힘은 전혀 들어가지 않지만, 그렇게라도 의지를 다지지 않으면 내일 아침에는 도저히 눈을 뜰 수 없을 것 같았다.

    스프를 마구 입안에 밀어 넣어서 그런지, 자꾸 기침이 나온다. 그리고 기침이 나와서 그런지, 자꾸 눈가가 흐려진다.

    "제길."

    스프 그릇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 숟가락질이 어려워지자 미하엘은 스프를 그릇째로 들고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내일은 성공한다!"

    채앵!

    테이블로 던지듯 스프 그릇을 내려놓은 미하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숙소로 향했다.

    "흥."

    이지혁이 그 광경을 보며 낮은 코웃음을 날렸다.

    "입은 살았네."

    하지만 이상하게 자꾸 미소가 지어진다.

    "웃으시는 겁니까?"

    "밥이나 처먹어."

    "넵."

    이렇게 또 하루가 가고 있었다.

    * * *

    "빌어먹을."

    미하엘은 이를 갈며 이지혁을 노려보았다.

    명상을 하며 마나를 느껴보라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미하엘의 귀에는 개소리로 들릴 뿐이었다.

    그의 눈에 보이는 이지혁은 천 단위의 인간을 짓누르며 고통 주고 즐거워하는 인간일 뿐이었다.

    '생각해 보면 무시무시한 말이지만.'

    왜 이지혁, 이지혁이란 말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려왔는지 알 것 같았다.

    지금 이지혁의 앞에서 바닥을 기고 있는 알파 측 인원들만 보더라도 아주 쉽게 이지혁이라는 이름이 전 세계로 퍼져 나가게 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아무리 공격을 피하지 않고 몸으로 받아내고 있다고는 하나 한 인간이 어떻게 천 명이나 되는 능력자들을 일시에 무력화시킬 수가 있는가.

    '가능할 리가 없지.'

    보통의 능력자라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지혁은 손짓 하나로 그걸 자연스레 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이 미하엘을 더욱 초조하게 만들고 있었다.

    '저만한 능력을 갖추고 있음에도 마왕을 상대할 수가 없다는 말인가?'

    이지혁이 마왕을 쓰러뜨릴 수 있다면, 그들은 굳이 이런 훈련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저 이지혁조차 마왕을 상대할 수 없기에 그들이 강해져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수련으로 정말 강해질 수 있을까?'

    강해진다 하더라도 벌써 5일이 다 되어가도록 감도 못 잡고 있는 이들이 대부분인데, 대체 언제 마나를 익히고 이지혁만큼 강해진다는 말인가.

    적어도 그들 삼천이 이지혁 하나는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해져야 미래를 도모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이지혁의 손짓 한 번에 픽픽 나가떨어지는 능력자들을 보고 있자니, 과연 그게 가능한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답답하군.'

    조금이라도 진전이 보인다면 희망을 가지고 버텨보겠건만, 아무도… 그뿐 아니라 아무도 진전을 보이지 못하고 있으니, 마음이 다급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엄청 노려보는데요?"

    최정훈의 말에 이지혁이 피식 웃었다.

    "그러게요."

    이지혁이 딱히 저 남자에게 못할 짓을 한 건 없는 것 같은데, 아까부터 대놓고 증오를 표하고 있었다.

    "괜찮을까요?"

    "냅 두세요."

    "그래도……."

    "반에도 꼭 한 명씩 있죠, 저런 애들이."

    그리고 수많은 조직에도 한 명씩은 있기 마련이다.

    고분고분 말을 따르지 않고 언제나 반쯤 삐딱선을 타며 반항을 하려는 이들. 그 반항하는 자세만으로 자신이 지금 타인의 말을 들으며 순종하지 않고 있다는 위안을 얻으려는 이들.

    저런 이들의 특징은 결코 선은 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 이지혁이 미하엘을 건드리게 되면 그냥 기분 나쁘게 노려봤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구박하는 좀생이가 되기 마련이었다.

    물론 그런 취급을 받는다고 해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이지혁이기는 하지만…….

    "건드릴 필요 없어요. 저런 애들은 절대 위험을 감수하지 않거든요."

    "네?"

    "진짜 뒤집어엎을 놈들은 오히려 조용한 법이죠. 기다리거든요. 저리 티를 안 내구요."

    "흐음……."

    이지혁의 말에 모두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저 미하엘이라는 자가 큰일을 벌일 사람은 못 된다는 것 하나만큼은 동의할 수 있었다.

    만약 그가 진짜 무언가 제대로 반기를 들 생각이었다면 저리 어설프게 시선을 끌지는 않을 것이다.

    "악당은 못 되는 거죠."

    입만 살아 있는, 말 그대로 입만 살아 있는 몰골로 알파가 주절거렸다.

    "저런 타입은 건드리면 건드린다고 징징대고, 냅 두면 냅 둔다고 징징대죠. 그런데 막상 징징 이상을 하느냐 싶으면, 그게 또 아니라서요. 오히려 그 징징에 주변이 어떻게 반응하는가가 중요한데……."

    알파가 고개를 갸웃했다.

    "잘 안 보여서 주변이 어떤지는 모르겠는데, 최정훈 씨가 대신 좀 봐주시면 안 될까요?"

    "니 할거나 해, 이 미친놈아."

    "열심히 하고 있잖습니까."

    이지혁이 한숨을 쉬었다.

    저 주둥아리를 뭉개놔야 하는 건데.

    전신으로 마나를 받아들여 육체가 남아나질 않고 있는 알파이지만, 고통에는 아주 익숙하다는 듯이 태연하게 입을 열고 있었다.

    "입만 살았네."

    "아, 버릇이 되어서 그럽니다."

    "버릇?"

    알파의 입이 미소를 그렸다.

    "실험을 받는 와중에 입으로 지금 느끼고 있는 것에 대한 피드백을 해주지 않으면 실험을 멈춰주지 않던 사이코 같은 양키 놈들에게 당하다 보니, 이런 순간에는 입이 살아 있으면 뭐라도 이야기하고 싶은 강박이 든단 말이죠."

    "그 양키가 네 사랑하는 조국 놈들 아닌가?"

    "빙고. 그렇습니다."

    "그런데도 잘도 애국이 어쩌고 하는군."

    "에이, 일탈을 한 등신들이 조금 있다고 해서 나라 전체를 나쁘게 보는 건 좋지 않은 겁니다."

    "그 실험장을 만든 게 나라 아닌가?"

    "그래서 윗대가리들을 다 죽여 버리려고 했죠. 대통령은 등신이 되었고, 크리스토퍼를 제외하면 딱히 죽이는 게 이득도 아니라서 내버려 뒀지만요."

    "이득이 아니라니?"

    "거, 병신이 위에 있으면 알아서 나라 말아먹는데, 왜 굳이 걔들을 죽여서 똑똑한 애들이 그 자리에 치고 들어가게 해야 합니까? 그럼 안 되죠."

    "으음……."

    "윗대가리가 병신이면 나라 말아먹는다는 건 아주 잘 알고 계실 텐데요? 실례지만 조국이?"

    "닥쳐."

    뭔가 울컥한 이지혁이 알파에게 쑤셔 박는 마나량을 더욱 늘렸다.

    "끄으으, 와… 이거, 장난 아니네요. 그런데……."

    알파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야 그냥 이렇게 버티기만 하면 된다지만, 이지혁 씨는 괜찮으세요? 지금 이 많은 이들을 동시에 제압할 만한 마나를 운용하는 거잖아요. 몸이 남아나지 않을 텐데?"

    "고양이 쥐 생각해 주네."

    이지혁이 피식 웃었다.

    '그래도 내가 마법을 헛으로 배우지는 않았네.'

    알파가 말한 대로였다. 지금 그는 베라프의 대마법사들이 봐도 입을 쩌억 벌릴 만큼의 마나를 운용하고 있었다. 이대로 대마법사로 전직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말이다.

    물론 이걸로 마왕에게 달려들어 보기는 턱도 없겠지만.

    베라프의 아크 메이지 열 명이 마왕 하나를 감당할 수 있을까?

    조우한 지 10초 만에 머리가 땅에 굴러다니게 될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지혁은 일반 아크메이지 두세 명의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수준에 불과했다.

    마법사로서는 입지전적이지만, 그가 본래 가지고 있던 힘에 비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했다.

    다른 이들이 감탄하는 것과는 달리 마법의 수준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실감하게 된다. 일반적인 마법을 익히는 것으로는 개인이 마왕에 대항할 방법이 없다는 걸.

    일반인이 검술을 아무리 극한까지 익힌다고 해도 탱크를 상대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게다가 지금 그의 능력은 돔 주변에 깔아둔 마법진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라, 실전으로 들어가면 그 위력이 몇 배나 반감될 것이다.

    아크 메이지를 찜 쪄 먹는 아펠드리체가 본체로 온다고 하더라도 마왕의 상대가 안 될 텐데, 그가 마왕을 상대한다는 것은 칼 물고 앞으로 엎어지는 것과 별다를 것이 없는 짓이다.

    '그러니 이들을 키워야 하는 건데…….'

    이지혁은 머리가 아파지는 것을 느꼈다.

    가능성이 얼마나 될지는 몰라도 아주 손을 놓는 것보다는 백배는 낫다 싶어서 시작한 일이건만, 5일이 지나도록 아무런 진전이 없으니 이지혁도 답답했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해.'

    그가 생각하기에는 이게 가장 좋은 방법이지만, 통하지 않는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마인드로 몰아붙이며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그들에게는 이제 여력도, 시간도 없다.

    멸망의 카운트다운은 이제 거의 끝나간다. 본격적인 마족의 침략이 시작되면 인류는 한 달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미치겠군."

    자꾸 초조해진다.

    "너무 그렇게 신경 쓰지 마세요."

    역시나 입은 살았는지 알파가 이지혁을 위로했다.

    "이제 곧 다들 알게 될 테니까요, 마나가 어떤 건지."

    "너라도 좀 알았으면 좋겠는데?"

    "에이, 사람 너무 무시하신다."

    알파가 몸을 슬쩍 일으켰다.

    "5일이나 당했는데 모를 리가 있나요. 지금은 적응도를 올리는 과정인 거죠. 친화도라고 해야 하나? 여하튼 몸이 마나에 익숙해지려면 이 방법이 제일 좋은 건 맞는 것 같네요."

    "호오?"

    이지혁이 알파의 손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미약하긴 하지만, 알파의 손으로 마나가 모이고 있었다.

    '대단하다고 해야 하나.'

    이지혁은 그저 알파가 마나를 느끼기를 바랐다. 마나의 운용법은 그다음에 가르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알파는 그 과정을 건너뛰고 스스로 마나의 운용을 터득하고 있는 것이다.

    대단한 재능이었다.

    "이 방법이 좋기는 한데… 한 가지 조언드릴 게 있는데, 괜찮을까요?"

    "응?"

    "마나에 관해서 제가 입을 뗀다는 게 뭐랄까, 굉장히 건방진 것 같아서요."

    "말해봐."

    이지혁은 자신에게 사람을 가르치는 재능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애초에 이지혁이 흑마법사가 되기 전에는 마나를 제대로 다룰 수도 없었으니까.

    오히려 이제 겨우 마나를 느끼기 시작한 알파가 이들에게는 훨씬 좋은 스승이 될 수도 있었다.

    "조언은 간단합니다. 아무도 안 죽고 모두가 마나를 익혀서 즐겁게 하하호호거리면서 나갈 생각입니까?"

    "……."

    알파의 낮은 목소리에 이지혁이 미간을 좁혔다.

    "하고 싶은 말은 그게 다인가?"

    "위기가 아니었습니까? 인류가 멸망할 만한 위기요. 그런데 이렇게 미지근한 방법으로 이들을 가르치려면 인류가 열 번은 더 망할 겁니다."

    "그래서?"

    "확실하게 가시죠. 반쯤은 죽어도 상관없잖습니까. 마나량을 늘려서 정말 죽기 진전까지 몰아붙여야 합니다. 그러다 죽으면 어쩔 수 없는 거구요."

    "여전히 입은 살았군."

    하지만 마음이 끌리는 것만은 분명했다.

    이지혁도 이런 식으로는 끝이 없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었으니까.

    "제가 마나를 느끼기 시작한 게 가장 큰 증거죠. 저는 이들 중 가장 많은 마나 세례를 받았으니까요."

    "알았으니 닥쳐 봐."

    고민하던 이지혁이 한숨을 쉬었다.

    다수를 위해 소수를 희생한다는 것은 언제나 그가 가장 혐오하는 사고방식 중 하나였다. 아무리 이리 극한으로 몰린 상황이라도 선택하고 싶지 않을 만큼 말이다.

    "방법을 바꾸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좋은 선택입니다."

    "그렇다고 네가 말한 것처럼 하겠다는 건 아니고."

    "그럼?"

    알파가 살짝 의문 어린 눈으로 바라보자, 이지혁이 눈앞에 쓰러져 있는 알파의 부하들을 가리켰다.

    "일단 얘들 좀 치워봐. 그리고……."

    이지혁이 고개를 돌려 미하엘을 바라보았다.

    "쟤 좀 데리고 와봐."

    "오우!"

    알파가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과연. 새로운 방식을 빙자한 불만 세력의 척살은 예로부터 권력을 가진 이들이 가장 즐겨 쓰던 방법이죠. 그야말로 병법의 교본이라고 할까?"

    "넌 좀 닥치고."

    이지혁이 미하엘을 가리키며 손짓을 했다.

    이지혁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던 미하엘의 눈이 가볍게 떨렸다.

    "이리 오라고. 네 차례니까 말이야."

    최정훈의 통역을 들은 미하엘이 굳은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이지혁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오기 시작했다.

    비장한 얼굴의 미하엘을 보며 이지혁이 가만히 속삭였다.

    "강해질 수 있다면 죽어도 좋은가?"

    * * *

    미하엘의 눈동자가 급격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지혁은 그런 미하엘의 반응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왜? 답답해하고 있던 것 아닌가? 이런 방식으로는 강해질 수 없고, 시간낭비일 뿐이라 생각하고 있었잖아. 아냐?"

    "……."

    실시간으로 해석을 해주는 최정훈의 말을 듣고 난 미하엘은 허를 찔린 듯한 모습이었다.

    '뭐, 이런 놈이 다 있지?'

    보통은 그런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 많은 이들 앞에서 소리를 내 말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지혁은 대놓고 모두가 들으라는 듯이 말하고 있었다.

    "어떻게 생각해?"

    "뭘 말입니까?"

    "이런 훈련을 계속하는 것으로 과연 너희가 강해질 수 있을까?"

    미하엘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 이지혁이라는 놈은 예측이 불가능한 인간이었다. 그런 인간 앞에서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조심스럽다.

    '이곳은 법이 통하는 곳이 아니니까.'

    극단적으로 말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지혁이 자신의 머리통을 날려 버린다고 해도 그걸 단죄할 수 있는 사람이나 단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이곳에서 지금의 상황을 지켜보는 이들조차도 그저 눈을 감고 묵인해 버릴 것이다.

    그런 절대권력을 가진 이 앞에서 자신의 의사를 피력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권력자의 변덕에 따라서는 그게 아무리 옳은 말이라고 하더라도 목숨이 날아갈 수 있으니까 말이다.

    대체 어떤 대답을 해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동안 그의 가슴속에서 슬며시 끓어오르는 것이 있었다.

    "정답은 모르겠지만……."

    미하엘이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제 의견을 묻는다면, 불가능하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호오?"

    이지혁의 미소가 짙어졌다.

    "어째서?"

    "효과가 없으니까요."

    미하엘이 그 증거를 보라는 듯이 슬쩍 고개를 돌려 쓰러져 있는 알파의 부하들을 응시했다.

    "이만한 이들이 이만큼 노력하고도 그 가능성조자 보이지 않는다면, 이 방법으로는 안 된다고 봐야죠. 다른 방법으로 될지 안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이 방법으로는 절대 불가능할 겁니다."

    이지혁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비슷한 생각이야. 가능이야 할 것 같은데, 이걸로는 시간이 너무 걸릴 것 같단 말이지."

    이지혁이 순순히 동의를 하자 미하엘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자는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그래서 하는 말인데, 뭔가 획기적으로 바뀌어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 이대로는 죽도 밥도 안 되겠어. 그러니까 말이야……."

    이지혁이 씨익 웃었다.

    "물었잖아, 강해지기 위해서라면 죽음을 감수할 수 있겠냐고. 좀 더 과격하고 확률 높은,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대신에 버텨내기만 한다면 반드시 강해질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걸 선택하겠나?"

    "……."

    미하엘은 바로 대답할 수가 없었다.

    이지혁은 그에게 선택을 강요하고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그 선택을 바로 내릴 수는 없을 것이다.

    "…의미가 없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어째서?"

    "제 의견이 다른 모두의 의견을 대표하지 못하니까요."

    이지혁이 피식 웃었다.

    "도망치는 것 하나는 제대로군."

    그 명백한 비웃음에 미하엘의 얼굴이 뻘겋게 달아올랐다.

    "내가 묻고 있는 건 다른 사람의 의견이 아니라 네 의견이야. 그런데 왜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지? 자기의 목숨을 걸 수 있는 가를 타인이 결정해 줘야 하는 건가? 그건 좀 슬픈 이야긴데?"

    비릿하게 웃는 이지혁을 보며 미하엘이 몸을 떨었다.

    하지만 그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이지혁이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정신을 차린 이들과 명상을 하던 이들이 모두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무슨 대화가 오가는지 알아먹은 놈들도 있겠지."

    최정훈이 과연 이 말을 통역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할 때, 이지혁이 지체 없이 말했다.

    "너희가 결정해. 나는 모르겠다. 너희가 결정해서 하겠다는 놈만 남아. 내일 이 시간까지 말이야. 문은 열어두지."

    이지혁이 저 멀리 보이는 정문을 가리켰다.

    "갈 놈은 가."

    사람들의 시선이 정문으로 향했다.

    "안 말릴 테니까."

    이지혁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뚜벅뚜벅 걸어 숙소로 향했다. 광장에 남아 있는 이들이 그런 이지혁의 등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 * *

    "화끈하시네요."

    "……."

    이지혁은 능글능글하게 웃는 알파의 얼굴을 보며, 세상에 폭행 사건이 왜 벌어지는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왜 짜증이 나지?'

    타인의 얼굴만 보고 짜증이 나는 경험은 굉장히 오랜만이다. 과거 그가 극단으로 사이가 안 좋던 시절의 아펠드리체 정도만이 그에게 이런 경험을 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런데 딱히 원한을 많이 쌓지도 않은 알파가 이지혁에게서 이런 반응을 이끌어낸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대단한 일이었다.

    알파는 한 손에 든 아메리카노를 이지혁의 앞에 내려놓고는 건너편에 앉았다.

    이지혁이 낮게 한숨을 쉬고는 알파가 건넨 아메리카노를 들어 한 모금 머금었다.

    싸한 커피향이 코끝을 감돌자 마음이 좀 진정되는 느낌이었다.

    "어중이떠중이를 걸러낸다는 건 아주 좋은 선택이죠."

    "네 부하들도 포함된 이야기 아닌가?"

    "에이, 아니죠. 저희 쪽은 아무도 도망가지 않습니다. 도망간다고 해도 미래가 없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거든요?"

    "도망가면 네 손에 죽을까 봐 그러는 건 아니고?"

    "이런, 이런. 저는 평화주의자입니다. 그렇게 쉽게 살인을 하는 사람이 아니죠."

    낄낄대며 웃는 알파를 보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자신이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는 말을 농담으로 할 수 있다는 게 알파가 얼마나 잔혹무비한 인간인지 말해주고 있었다. 보통 사람이 그런 농담을 하게 되면 농담이 아니라 진실이 되어버리니까.

    "그런데 말이죠."

    알파가 가만히 이지혁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왜 그리 미적지근한지 알 수 없네요."

    "응?"

    "이지혁 씨 말입니다, 이지혁씨."

    "흐음."

    알파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고 있다. 이지혁이 지금 하고 있는 행동이 매우 미지근하다는 것은 이지혁도 동의하는 바이니까.

    "제가 아는 이지혁 씨는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네가 아는?"

    "네. 꽤나 오래 지켜봤죠. 이지혁 씨와 처음 만난 이후로 단 한순간도 눈을 뗀 적이 없으니까요."

    "……."

    "제가 아는 이지혁 씨는 희생에 둔감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은 가리지 않았죠. 그런데 요즘 이지혁 씨를 보고 있으면, 이지혁 씨가 아니라 마하트마 간디라도 보고 있는 느낌이더군요."

    "…파괴신이라는 뜻으로 들리는데?"

    "농담이 아닙니다."

    알파가 답지 않게 정색한 얼굴로 말했다.

    "언제부터 그렇게 인도주의자가 되셨는지 도무지 이해를 못하겠네요. 세상 모든 사람을 구하실 생각입니까? 그것도 희생 없이?"

    이지혁은 언짢은 표정으로 묵묵히 알파의 말을 들었다.

    "그건 용기가 아니라 만용입니다. 아니, 사실 멍청한 짓이죠. 가능하지도 않은 일에 정력을 소모하는 것처럼 멍청한 짓이 없는 겁니다."

    "알아."

    "그런데 왜 이러시는지 모르겠네요."

    알파가 냉정한 얼굴로 말했다.

    "제가 이지혁 씨를 존중하는 이유는 이지혁 씨가 열쇠이기 때문입니다. 이 상황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이지혁 씨가 주도적으로 움직여 줘야 합니다. 그걸 위해서라면 저도 기꺼이 이지혁 씨의 신발을 핥을 용의가 있죠. 다만……."

    "……."

    "지금의 이지혁 씨는 리더가 아닙니다."

    알파의 말은 확고했다.

    "희생을 줄이는 방법을 선택했다 하더라도 확실한 비전을 가지고 있다면 이런 식으로 말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제가 아는 이지혁 씨는 귀찮음이 가득할지언정 일단 해야 하는 일이다 싶으면 어떻게든 해내는 사람이었습니다. 주변을 몰아치든, 자신이 직접 나서서 깽판을 치든!"

    알파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그런데 지금 모습은 뭡니까? 이미 끝난 게임을 붙들고 있는 사람처럼 흐리멍덩해서는 '어차피 인류는 멸망할 거지만, 그냥 손 놓고 있기도 뭐하니 뭐라도 해보자'라는 마음이 그냥 드러나지 않습니까."

    이지혁은 가만히 알파를 바라보았다.

    매우 건방진 말이긴 하지만, 그 말이 이지혁의 마음을 정확하게 찌르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런 식으로는 안 됩니다. 모든 힘을 다 쏟아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 아닙니까."

    "알아."

    "안다구요?"

    뭔가 더 말을 하려던 알파가 입을 닫고는 가만히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좀 닥치고 있어."

    이지혁이 의자에 몸을 한껏 기대고는 담배를 입에 물었다. 담배에 불을 붙인 이지혁이 알파의 아메리카노 위로 손을 가져갔다.

    차라라랑.

    이지혁의 손에서 얼음이 우수수 떨어지더니, 알파의 컵을 가득 채웠다.

    "시원한 거나 한잔 먹고 진정하지."

    "이지혁 씨."

    "거기서 니가 좀 더 설치기 시작하면, 내가 너를 날려 버릴지도 모르겠다 싶어서 하는 말이야."

    "……."

    알파가 두말없이 이제는 아이스가 되어버린 아메리카노를 들어 쭉 들이켰다.

    "욕을 먹어도 할 말이 없기는 하지만 말이야."

    이지혁이 한숨을 쉬었다.

    알파가 말한 것처럼 자신이 이 상황을 비관적으로 보고 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고 보면 최근 한 달 정도는 전혀 자신답지 못했다는 기분이 든다.

    '내가 이렇게 조용하고 우울한 인간이었나?'

    알파가 주도권을 가져가 버린 것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이지혁 스스로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희망이 없다라…….'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하기야 객관적으로 본다면 이지혁이 무슨 짓을 하더라도 마계의 침공을 막아내기는 힘들었다. 방법이 있다면…….

    '아니, 없어.'

    이지혁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

    다른 방법 따위는 없다.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알파의 말대로 이곳에 있는 인원을 어떻게든 마족의 대항마로 키워내는 것뿐이다.

    그 어떤 수를 써서라도.

    "확실히 그 말은 맞는 것 같아. 내가 언제부터 인도주의자였는지 모르겠군."

    "이제라도 아시게 돼서 다행입니다."

    "방법을 바꾸지."

    "그럼 탈출하려는 인원을 모두 잡아두겠습니다."

    "아니."

    이지혁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놔둬. 어차피 여기서 포기하고 발을 빼야 하겠다고 생각하는 놈이면 이제 못 버텨."

    "흐음."

    알파는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눈치이지만, 이지혁의 말을 존중하는 듯했다.

    "그보다……."

    "네."

    이지혁이 알파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너, 정말 원하는 게 뭐야?"

    알파가 어색하게 웃었다.

    "원하는 것이라뇨? 인류의 생존이지요."

    "입에 발린 소리 적당히 하고."

    알파는 이지혁의 말에 어깨를 으쓱했다.

    "안 믿으신다면 어쩔 수 없지만요. 사실 제가 뭘 노리는가가 중요한 게 아니잖습니까? 지금 이지혁 씨와 저의 목적이 일치한다는 것이 중요한 거죠."

    "말은 잘하는군."

    "그게 중요한 겁니다, 그게."

    알파가 빙그레 웃었다.

    "중요한 건 지금을 버텨내는 거죠. 미래는 나중에 가서 이야기해도 됩니다."

    이지혁이 가만히 알파를 보다가 속삭이듯 말했다.

    "이 일이 해결되고 나서도 네가 살아 있을 것 같아?"

    "누구나 희망은 품을 수 있는 거죠."

    두 사람의 눈이 허공에서 날카롭게 얽혀들었다.

    * * *

    "흠……."

    이지혁은 자신의 눈빛에도 굴하지 않는 알파의 반응을 보며 나직하게 미소를 지었다.

    "여하튼 겁대가리가 없다니까."

    "그런 특성도 없으면 이지혁 씨와 대화 못하죠."

    "입도 살았고."

    "그것도 꼭 필요한 특성입니다."

    이지혁이 한마디도 지지 않는 알파를 보며 피식 웃었다.

    "뭐, 좋아."

    알파가 무엇을 꾸미고 있든 간에 지금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맞다.

    필요하다면 악마가 아니라 누구와도 손을 잡아야 하는 것이 이지혁의 입장이니까.

    "다만, 좀 더 나서줘야겠어."

    "저는 지금 제 코가 석 잔데요."

    "너 하나 강해진다고 해결할 수 있는 사태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겠지?"

    "그도 그렇지만요."

    알파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렇지만, 귀찮은 건 사실이죠."

    "나도 귀찮아."

    "끄응."

    알파가 어깨를 으쓱했다.

    "뭐, 좋습니다. 이지혁 씨가 바라시는 거라니, 제가 해드려야죠. 다만,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말해봐."

    "진짜 저와 손을 잡으실 생각은 없습니까?"

    "……."

    이지혁은 대답없이 가만히 알파를 바라보았다.

    알파는 이지혁의 반응에 부연을 시작했다.

    "물론 이지혁 씨가 권력이나 재물에 별로 관심이 없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원하신다면 세상 모든 것을 발아래에 둘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 그런 것을 위해 움직인다는 것만큼 코미디가 없겠죠. 다만……."

    알파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이지혁 씨도 알고 계실 것 아닙니까. 이 세계는 부조리합니다."

    "모든 세계는 다 부조리해."

    "그렇죠, 물론 그렇죠."

    알파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인류가 세상에 나타난 이후로 단 한 번도 세상에는 부조리가 사라진 적이 없습니다. 이 세계도 그랬고, 이지혁 씨가 존재하던 세상에서도 그랬겠죠. 사람이라는 존재는 원래 그런 거니까요."

    "잘 아는군."

    "하지만 저는 그걸 바꿀 수 있습니다."

    알파의 눈이 빛났다.

    "합리적인 세상으로의 변화는 인류가 항상 추구해 온 것이죠. 인간은 느리지만 점진적으로 합리적으로 변화해 가고 있습니다."

    "……."

    "이제껏 성공하지 못했다고 앞으로도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는 건 말이 안 되는 거죠. 이지혁 씨가 왜 동참하지 않으려 하는지도 알지만, 그것 역시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겁니다. 안 그런가요?"

    이지혁이 가만히 알파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똑똑한 놈이 힘까지 가지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지."

    "헤헤. 뭐, 그리 똑똑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요. 권력을 가진 놈들이 멍청한 거죠."

    "그런데 그 변화는 누구를 위한 거지?"

    "……."

    "대다수가 힘들어지고 소수만이 즐거워지는 사회를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나?"

    "이지혁 씨가 공리주의자인 줄은 몰랐네요. 약육강식은 세상의 이치 아니겠습니까?"

    "물론 그렇지."

    이지혁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은 약육강식이다. 그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현대사회로 접어들면서 강함의 척도가 무력이 아니라 재력과 권력으로 변화했을 뿐, 이 세상을 이루는 근본 가치가 약육강식이라는 것은 이지혁도 인정하는 바였다.

    "위기가 찾아왔기에 정체되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능력자가 출현한 이상 인류의 계급 변화는 자연스러운 흐름이죠. 되레 제가 아니라 다른 이들이 들고일어나게 된다면, 흘려야 할 피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겁니다."

    짝!

    알파는 가볍게 박수를 치고는 이지혁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지혁 씨가 반대편에 선다면, 그 피해는 더더욱 커지겠죠."

    "피해가 커? 아닐걸?"

    "에이, 이러지 마세요."

    알파가 빙글빙글 웃었다.

    "물론 이지혁 씨가 진심을 다해서 저와 제 주변인들을 제거하려 든다면 막을 수 없겠죠. 하지만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을 막을 수는 없는 겁니다. 둑을 쌓고 보를 만든다고 해도 흘러내리는 물을 멈출 수 없는 이상은 언젠가는 넘치게 되죠. 그리고 그때는 상상도 못할 피해가 생길 겁니다."

    "흠……."

    이지혁이 고개를 뒤로 젖혔다.

    틀린 말은 아니다.

    이미 능력자와 일반인 사이의 골은 메울 수가 없을 정도로 벌어졌다.

    지금은 마계가 침공해 왔기에 힘을 합쳐 싸울 뿐이지, 외부의 적이 없어지는 그 순간, 서로를 향해 이를 드러내게 될 것이다.

    '지금 당장 중요한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능력자와 비능력자 간의 갈등은 인종의 문제처럼 시간이 흐른다고 하여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백인과 흑인의 차이가 인종의 차이라면, 능력자와 비능력자의 차이는 인간과 원숭이의 차이와 비슷했다.

    거의 새로운 종의 출현인 것이다.

    "인류는 이미 그 동력을 잃었습니다. 이제는 새로운 세상을 향해 나아갈 때죠."

    "나는 인간이다만?"

    "능력이 있는 인간이죠. 이지혁 씨가 이미 에테르를 다룰 수 있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

    "이지혁 씨만 도와주면 희생을 줄일 수 있습니다. 역사가 이지혁 씨를 어떻게 평가할까요?"

    이지혁이 귀를 후비더니 입으로 훅 불었다.

    "미안하지만, 나는 그런 걸 신경 쓰는 타입이 아니라서 말이야.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내가 알 게 뭐야."

    "……."

    "그리고 내가 보기엔 너희나 보통 인간이나 도움이 안 되는 건 마찬가지야. 기르는 개가 서로 싸운다고 해서 더 큰 개 편을 들 것인가, 더 작은 개 편을 들 것인가를 고민하나? 보통은 둘 다 혼내고 구석으로 처박아두지."

    "…이왕이면 저희가 큰 개였으면 좋겠네요."

    "뭐, 좋을 대로."

    알파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이지혁 씨 역시 머리가 복잡하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정 저희 편을 들지 않으실 거라면, 저쪽 편이라도 들지 말아주세요. 이지혁 씨가 역사의 흐름에 관여한다는 것은 완전히 치트나 마찬가지니까요."

    "그런데 난 도무지 너를 이해할 수가 없다."

    "뭐가 말입니까?"

    "난 이제 힘도 없는 허수아비일 뿐이야. 게다가 마왕이 한창 쳐들어와서 인류가 망하느냐, 마느냐를 놓고 싸우는 와중에 나중 일을 생각하고 싶냐?"

    알파가 한숨을 쉬었다.

    "잘 아시면서 왜 그러십니까?"

    알파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더니 이지혁에게 튕겼다. 담배를 받아 든 이지혁이 불을 붙이고는 깊게 빨아들였다.

    "당장의 일만을 생각하는 이들은 세상을 바꿀 수 없는 법이죠. 그러니 지금 당장의 일을 생각하면서도 미래에 대한 대비를 해야 하는 법입니다. 그리고… 허수아비요?"

    알파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지금도 이지혁 씨가 마음만 먹으면 저 정도는 손가락 하나로 눌러 죽일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코끼리가 다리가 부러졌다고 그 틈을 타서 공격을 하는 고양이는 없는 법이죠."

    "코끼리가 쥐새끼가 된 정도의 변화일 텐데?"

    "개미 입장에서는 쥐나 코끼리나 감당 안 되는 건 마찬가집니다."

    "흠……."

    이지혁이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이라는 건 꽤나 낙천적인 이들 같아. 지금 같은 상황에서도 미래를 생각할 수 있다니 말이야."

    "그래서 인간인 거죠."

    알파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팔다리가 잘린다고 해도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웃으며 팔을 내밀 수 있습니다. 인류가 거의 전멸한다고 해도 이길 수만 있다면 언젠가는 지금의 문화를 복구할 수 있겠죠."

    "……."

    "이건 마지막에 누가 서 있는가의 싸움이니까요. 그래서 말씀드린 겁니다. 지금 하나를 더 살리는 데 신경 쓰지 마세요. 어차피 강해지든 강해지지 않든 대부분 죽을 테니까요."

    이지혁이 인상을 썼다.

    피할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차마 마주 보고 싶지 않던 현실을 지금 알파가 그의 얼굴로 들이밀고 있었다.

    "이지혁 씨가 아끼는 NDF들도 대부분 죽을 겁니다. 마족이라는 건 그런 거잖아요. 안 그래요?"

    "그렇지."

    "그런데 뭘 망설이고 있는 겁니까?"

    이지혁이 가만히 눈을 감았다.

    모두가 무너진다. 모두가 사라진다.

    알던 이들, 대화를 나누던 이들, 살을 섞고 혼인을 했던 이들, 그리고 정을 주었던 이들.

    모두가 사라지고, 또 사라진다.

    남은 것은 오직 그 하나.

    홀로 남는다는 것이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일인지를 이지혁보다 잘 아는 이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야."

    "…예?"

    "마지막에 누군가가 남기만 한다면, 우리가 이긴다. 그건 잘 알고 있어. 그런데 말이야……."

    이지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렇게 얻은 승리가 무슨 의미가 있지?"

    "……."

    "웃기는 이야기지. 내게 있어서 인류가 존속한다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냐, 이거야. 내가 죽고 나면 인류가 멸망하든 잘살든 그게 무슨 상관인데?"

    "시니컬하군요."

    "함께 살지 않을 거라면 혼자 살아남을 생각은 없어. 나는 마지막에 홀로 서 있느니, 같이 죽을 거야."

    문득 이지혁의 얼굴에 장난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쌓이고 쌓인 것이 뻥 뚫린 듯한 얼굴을 한 이지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이거네."

    기지개를 쭉 켠 이지혁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왜 답답했는지 알 것 같다. 그동안 왜 나답지 못했는지 알 것 같아."

    "…예?"

    "희생이고 뭐고, 누가 살고 죽고, 그런 걸 신경 쓰는 게 이상했던 거지. 인류가 살든 죽든 그게 나랑 뭔 상관이야?"

    부담을 떨쳐 버린 듯이 이지혁이 낄낄대며 웃었다.

    "그래, 그거지. 다 같이 죽거나, 다 같이 살거나. 그게 내가 바라던 거였는데 상황이 상황이라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네. 나는 인류의 구원자도 아니고, 희망도 아닌데 말이야."

    "…아니, 저……."

    "제대로 깽판이나 놓으면 될 일인데, 괜히 고민했네. 덕분에 시원해졌다. 고마워."

    "고맙다구요?"

    알파가 황당한 얼굴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의 대화에서 왜 저런 결론이 나온단 말인가.

    "이제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것 같다. 그동안 나답지 않게 너무 심각했던 모양이야. 오늘을 꿀잠 자겠네. 그럼 간다."

    "아니, 잠깐만요. 잠깐……."

    "아, 그렇지."

    그 순간, 이지혁이 빙글 돌더니 갑자기 알파의 얼굴을 그대로 걷어찼다.

    "꺄울!"

    하늘을 붕 날아 벽에 처박힌 알파가 코피를 쭈르륵 흘리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이지혁이 씨익 웃더니 대답했다.

    "재수 없어서 한 대 깠다. 내일 남은 애들 전부 연병장에 집합시켜 놔."

    "…이지혁 씨?"

    "간다."

    이지혁이 담배에 다시 불을 붙이더니, 콧노래를 부르며 숙소 쪽으로 향했다. 그 과정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알파가 멍한 얼굴을 하더니, 이내 너털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여하튼, 예측할 수 없는 인간이라니까.'

    어찌 되었든 간에 이지혁이 기운을 되찾은 것은 다행이다. 그가 알고 있던 이지혁이라는 인물은 저런 식으로 처져 있는 것이 어울리지 않았다. 목숨을 걸고 싸우는 와중에도 욕을하고 이죽거리는 것이 이지혁다운 일이었다.

    "슬슬 조각은 다 갖춰졌군."

    알파는 이제껏 볼 수 없던 얼굴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길고 긴 안배가 이제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가 필요한가?"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으며 알파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그는 이 계획의 마지막 열쇠가 될 거야."

    "이해할 수 없군."

    "멍청한 네 머리로는 알 수 없겠지. 마족, 너는 그저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되는 거야."

    아르고라스는 키득대며 웃는 알파를 바라보며 눈을 찌푸렸다.

    '인간이라는 것은 마치 혼돈 같군.'

    이지혁도, 알파도… 마족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확실한 건 하나.

    이 두 인간의 움직임이 세상을 크게 뒤흔들 것이다. 마계도 마찬가지로 말이다.

    아르고라스는 들썩이는 알파의 등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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