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90화 (90/118)
  • [■] 드릴 게 그것밖에는 없네요 [■]

    ─────

    준비가 어찌 되어가고 있는지는 관심 밖이었다.

    무관심한 게 아니라 괜히 이지혁이 나서는 것보다는 최정훈에게 맡겨두는 편이 더 효율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나서지 않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지루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게 문제였지만.

    "뭔 대단한 준비를 한다고 시간이 이렇게나 걸리는 거야?"

    미국 내에서 가장 경계하는 범죄 집단과 합동훈련을 하기 위해서 능력자를 파견한다는 것이 미국 측에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질지 전혀 생각하지 않는 이지혁으로서는 사람 몇 이동하는 것에 시간이 끌리는 상황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상하네. 무능한 사람이 아닌데."

    최정훈이 나서서 일을 처리하는데도 시간이 끌린다는 말은 그만큼 일이 쉽지 않다는 뜻이었다. 적어도 이지혁은 최정훈의 능력에 대해서만큼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에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이지혁이 냉장고로 가서 문을 벌컥 열었다.

    "어?"

    콜라가 없다.

    손을 덜덜 떤 이지혁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물도 없네."

    '어머니는 뭐하는가! 냉장고를 비우다니!'라고 속으로만 생각한 이지혁이 배를 북북 긁으며 현관을 향해 쭐레쭐레 걸어 나갔다. 주머니에 든 지갑을 확인한 이지혁이 현관을 열고 밖으로 나와 늘어지게 기지개를 켰다.

    "아우우."

    그러고 보니 요즘 좀 잉여 인간처럼 살기는 했다.

    고정적으로 출근하는 곳이 사라지다 보니 일어나는 시간도 제멋대로가 되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제는 게임도 접속하는 사람이 극도로 줄어서 매치 한 번 잡는 데 사십 분씩 걸리다보니 거의 끊게 되었다.

    TV만 틀면 긴급 방송이 나오고, 자꾸 부정적인 이야기만 하는 특집 프로그램과 다큐멘터리만 나오다 보니 재미도 영 덜하다. 예능은 싸그리 멸종한 것 같았다.

    "세상이 어찌 되려고… 쯧쯧."

    처음에는 마계와 연결되는 스팟이 열렸음에도 세상이 그리 변한 것 같지 않아 이상했지만, 슬슬 그 여파가 나타나고 있었다.

    어머니가 하는 식당은 손님이 뚝 끊겼고, 아버지의 회사는 폭탄이 떨어졌다.

    기본적으로 무역으로 먹고사는 대한민국이다 보니 무역 물동량이 끊긴 것이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그 끝이 무지막지해지고 있는 것이다.

    달려드는 오식이를 뻥 걷어차고 밖으로 나온 이지혁이 코를 쓱 훔쳤다.

    '사람이 없어.'

    원래 능력자 거주구의 거리는 다른 거리보다 한산한 편이지만, 이처럼 사람 그림자도 안 보일 정도로 을씨년스럽지는 않았다.

    아직 대낮이라 그러겠거니 싶어 걸음을 옮긴 이지혁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뭐야? 문 닫았어?"

    집에서 가장 가까운 편의점이 문을 닫았다.

    물건을 모두 뺐는지 가게 안이 휑하다.

    "저번에 저 옆 편의점도 문 닫았던데……."

    이지혁이 눈살을 찌푸렸다.

    주변에 문을 닫은 가게가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경기가 최악으로 치닫다 보니 가게를 유지하기가 힘들어진 것이다.

    "마트까지 가야 하나."

    이지혁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거주구 안에 있는 편의점은 몇 개 되지 않는다. 남은 편의점의 사정도 빤할 것 같으니, 차라리 거주구를 나가서 물건을 조달해 오는 것이 현명해 보였다.

    그 자리에서 게이트를 연 이지혁이 게이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 * *

    "…이건 또 뭐야?"

    대형 마트는 영업을 하고 있었다. 여기까지 망한다면 아마 대한민국이 망한다는 이야기일 테니,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마트 안으로 들어간 이지혁은 자신이 마트에 들어왔는지 가구점에 들어왔는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텅텅 비어 있는 매대들만 진열되어 있는 마트는 황량하다 못해 을씨년스러웠다.

    "코, 콜라는?"

    물은 이미 포기했다. 이런 상황에 물이 있을 리가 없었다. 라면이고, 즉석밥이고 싸그리 다 가져가는 마당에 제일 먼저 확보해야 할 식수가 남아 있을 리 없었다.

    "콜라!"

    이지혁이 벼락처럼 뛰어 탄산음료 코너로 달리기 시작했다. 여기서 구하지 못한다면, 한동안은 콜라는 구경도 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물이야 정수기가 있으니 어찌어찌 해결이 되겠지만, 콜라가 없으면…….

    "있다!"

    이지혁의 눈이 빛났다.

    탄산음료 코너 가장 아래에 소담스레 자리하고 있는 마지막 콜라 한 박스를 발견한 이지혁이 바람처럼 몸을 날려 콜라를 움켜잡았다.

    아니, 움켜잡으려고 했다.

    그 순간.

    이지혁의 손이 막 닿기 일보 직전에 누군가의 손이 콜라를 강하게 움켜잡더니 쭉 끌어당겼다.

    "헐……."

    허무하게 허공을 가른 이지혁의 손이 어색하게 맞부딪쳤다. 이지혁이 눈에 불꽃을 피워 올리며 콜라를 잡은 이를 노려보았다.

    "내 콜라!"

    "내가 먼저 잡았으니 다른 마트나 가보시지."

    "……."

    이지혁의 이마에서 핏대가 솟아올랐다. 하지만 아무리 안하무인인 이지혁이라고 하더라도 상대가 먼저 잡은 물건을 강탈해서는 안 된다는 도덕성 정도는 있었다.

    싸울 때는 살인도 마다하지 않지만, 강도짓은 하지 않는 이지혁이었다.

    "바, 반만 주시면 안 되나요?"

    "반이나?"

    "그럼 삼분의 일만."

    "얼마 주실 건데요?"

    "두 배 드리겠습니다."

    "열 배 주시면 생각해 보죠."

    뭐 이런 날강도 같은 놈이 다 있단 말인가.

    아무리 세상이 세기말에 접어들어서 식량의 확보가 중요하고 식량 때문에 서로 죽고 죽이는…….

    아, 이건 너무 나갔고.

    여하튼 식량이 중요하다고 해도 열 배라니. 대동강 물도 팔아먹을 놈 같으니라고.

    이지혁이 몸을 부르르 떨며 막 한소리를 하려는 찰나.

    "응?"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창식아?"

    "…헐? 형님?"

    이지혁의 손이 천천히 앞으로 내밀어졌다.

    "내놔, 그거."

    "……."

    창식이의 수난이 다시 시작되는 하루였다.

    * * *

    "알바한다고?"

    "네."

    "알바는 무슨 알바야. 너 고3 아냐?"

    "형님, 세상이 이 꼴이 됐는데, 여기서 대학 간다고 무슨 메리트가 있겠습니까. 차라리 산업 전선에 뛰어들어서 한 푼이라도 더 벌어놓는 게 이득이죠."

    "대학 갈 실력이 안 돼서 그런 건 아니고?"

    "…팩폭 자제 좀 부탁드릴게요."

    "미안하다, 야."

    이지혁과 최창식은 사이 좋게 콜라 하나씩을 손에 든 채 담배를 물고 있었다.

    "그런데 왜 여기 물건이 없냐?"

    "안 들어온답니다. 물량이 딸린대요."

    "딸려?"

    "예. 사람들이 사재기를 한 것도 있지만, 애초에 물량이 거의 안 들어옵니다. 공장도 다 멈추고, 생산이 안 되고 있대요."

    "왜?"

    "문제야 뭐 여러 가지가 있겠죠. 원자재 문제도 있고, 인력 수급 문제도 있고… 처음에는 불안해도 계속 일을 하던 사람들이 시간이 가면 갈수록 손을 놓기 시작했거든요."

    "으음……."

    "이번에 핵 떨어진 게 결정타였던 모양이더라구요. 희망이 없다고 생각을 한 거죠."

    이지혁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손을 놓고 지켜봐야 하는 사람들도 고역일 것이다. 차라리 다른 나라가 쳐들어오기라도 한 상황이라면 죽창이라도 들고 싸우겠다고 할 수 있겠지만, 능력자나 군대도 어쩌지 못하는 마왕군을 상대로 평범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형님."

    "응?"

    "진짜 이제 망하는 겁니까?"

    "뭘 망해?"

    "세상이요."

    "……."

    창식이의 얼굴에 불안함이 감돌았다.

    "저도 어떻게든 되겠지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요즘은 좀 불안합니다. 사실 지금 여기서 이렇게 일을 하고 있는 것도 과연 의미가 있나 싶구요. 이러다가 돈이 휴지 조각이 되어버리면 이것도 뻘짓이 될 텐데."

    "별걱정을 다 하네."

    "그래도요."

    이지혁이 피식 웃었다.

    "야, 돈이 휴지 조각 되면 제일 병신 되는 건 있는 놈들인데, 걔들이 그 꼴을 두고 보겠냐? 옛날하고는 달라. 나라가 망해도 돈은 안 망할 거다."

    "…설득력 있네요."

    "그리고 안 망해."

    이지혁이 가만히 눈을 빛냈다.

    "망해도 다 같이 망할 거니, 아쉬울 것 없어."

    "그럼 망하는 겁니까?"

    "안 망한다고."

    이지혁이 콜라를 쭉 들이켰다.

    "안 망하게 해줄 테니까, 쫄지 말고 살아. 나중에 돌이켜 보면 '아, 그런 시절도 있었는데' 하고 웃게 만들어줄 테니까 말이야."

    "믿어도 되는 겁니까?"

    "아니."

    이지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말로야 뭘 못하겠어."

    "형님!"

    "상황이야 어렵지. 그런데 뭐,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지 않겠어?"

    "…하늘이 무너졌는데 거기서 솟아난다고 살 수 있는 겁니까? 다른 사람들은 다 죽었을 텐데요."

    "어?"

    이 새끼, 날카로운데?

    순간, 의외로 창식이의 머리가 꽤나 좋은 게 아닌가 하고 고민하는 이지혁이었다.

    이 정도라면 오식이와 좋은 승부가 되겠는데?

    "창식아."

    "예."

    "사람들에게는 각자의 역할이라는 게 있는 거야. 나는 내 할 일을 할 테니, 너도 네 할 일을 해라. 자포자기하고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가는 희망이 생기는 순간 낭비해 버린 시간을 후회하게 될 테니까 말이야."

    "…그도 그러네요."

    "그런 의미에서 콜라 내놓지?"

    "……."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콜라를 앞으로 내미는 창식이를 보며 이지혁이 웃음을 터뜨렸다.

    "됐다, 인마. 뒀다 먹어라."

    "아뇨, 드릴게요."

    "됐어."

    이지혁이 선심 쓰듯 말했다.

    "나는 미국 가서 가져오면 돼. 금방 갔다 오거든."

    "……."

    이지혁이 끙차, 신음성을 내뱉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담배를 비벼 껐다.

    "요즘 학교는 어떠냐?"

    "개판이죠. 수능도 못 칠 거라는 말이 있어서 애들이 제대로 학교도 안 나와요. 정말 나라가 망해가고 있다는 게 실감이 나거든요."

    고3이 학교를 안 나온다면, 그건 정말 망조였다. 지금까지 본 어떤 상황보다 더 와 닿는 망조.

    심각함을 느낀 이지혁이 한숨을 쉬었다.

    "나라가 이 꼴인데 정부는 뭐하는 거지?'

    사실 송정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발에 불이 나도록 뛰어다니며 목이 쉬도록 사태를 진정시키고 있지만, 이미 정부의 개입력에는 한계가 있는 상황이었다.

    대한민국뿐 아니라 전 세계가 같은 꼴이었으니까.

    더구나 중앙정부를 상실한 중국 덕분에 대한민국의 산업 자체가 마비되고 있는 상태였다.

    RRRR.

    그 순간, 이지혁의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흐음……."

    호랑이는 제 말 하면 온다고 그랬는데, 제 말 안 할 때만 전화를 하는 이 사람은 뭐라고 불라야 할까?

    "네, 최정훈 씨."

    - 이지혁 씨, 준비 다 끝났습니다. 사무실로 와주세요.

    "네, 알겠어요."

    전화를 끊은 이지혁이 창식이를 돌아보았다.

    "형 간다."

    창식이가 이지혁에게 새 콜라 한 병을 던졌다. 콜라를 받아 든 이지혁이 피식 웃었다.

    "먹으라고?"

    "드릴 게 그것밖에는 없네요."

    "오냐. 잘 먹을게."

    막 몸을 돌리려는 이지혁을 향해 창식이가 크게 외쳤다.

    "형님!"

    "응?"

    "정말 괜찮은 거죠?"

    이지혁은 대답하지 않고 손을 흔들었다.

    창식이를 뒤에 두고 사무실로 터덜터덜 걸어가는 이지혁은 어깨가 짓눌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런 기분이구나.'

    테라 라트렐에서 그의 앞을 가로막은 이들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세상을 위해 그 앞을 막아서야만 했던 이들이 어리석다고 느꼈다. 하지만 지금 이지혁은 그들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가능해서 하는 게 아니라 해야 하니까 하는 것이다.

    "해야 하니까."

    이지혁이 주먹을 꽉 움켜쥐고는 게이트를 열었다.

    * * *

    "뭐하느라 이렇게 늦었어요?"

    다짜고짜 나무라는 서아영을 보며 이지혁이 인상을 확 썼다.

    "아니, 일처리가 아무리 개판이라도 그렇지, 언제쯤 끝나니까 언제까지 오라도 아니고, 지금 끝났으니까 지금 바로 준비해서 오라고 하는 게 말이나 돼요? 그래놓고 지금 누구더러 뭐라고 하는 겁니까?"

    "그럼 출근을 하시든가."

    "……."

    단박에 모든 논리를 부정당한 이지혁이 멋쩍게 휘파람을 불며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출근해야 하는 직장인으로서의 의무를 집어던져 버린 이지혁이 할 말이 있을 리가 없었다.

    "뭐, 그럴 수도 있지."

    "저 화상, 진짜!"

    "진정하시죠."

    최정훈이 서아영을 만류했다.

    "저 양반이 저러는 게 하루이틀도 아니고."

    "그건 그렇죠. 요즘 잘 못 보다 보니 새삼스레 열이 받네요. 확 뒤집어엎어 버릴까 보다."

    이지혁은 서아영의 악담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서 컴퓨터를 켰다.

    "컴퓨터는 왜 켜요? 이제 바로 갈 건데."

    "쯧쯧쯧."

    서아영의 말에 이지혁이 혀를 찼다.

    "장사 한두 번 하나. 보나마나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아는 거 빤히 강조하면서 애도 알 만한 내용을 또 강조하고 다짐시키고 그러면서 한 시간은 훌쩍 보낼 것 빤한데."

    "…아닙니다."

    사실 그럴 생각이었던 최정훈이 움찔했다.

    '아니, 안 그러면 또 사고 난다고.'

    잔소리를 하면 잔소리하는 상사라고 욕을 먹고, 잔소리를 안 하면 미리 숙지를 안 시켜서 사고 났다고 욕을 먹는 것이 중간 관리직의 비애 아니던가.

    욕을 먹는 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걸 콕 집어서 이렇게 말하는 이가 얄미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뭐, 이지혁이 얄미운 거야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크흐흠."

    헛기침으로 분위기를 환기시킨 최정훈이 입을 열었다.

    "승인이 떨어졌습니다."

    "승인요?"

    "네. 미국에서 훈련을 해도 좋다고 합니다."

    "내가 훈련시키는데 왜 미국이 승인을 해요? 승인을 해도 내가 해야지."

    "어?"

    최정훈이 고개를 갸웃했다.

    듣고 보니 그게 맞는 말인데?

    "이, 일단은 미국 측 인원을 훈련시키는 거니까요. 거기다가 범죄자들이니까. 그리고 미국 영토 내에서 훈련을 하지 않습니까."

    "내가 훈련할 곳이나 알아보라고 했지, 언제 미국에서 해야 한다고 했나? 정 깝치면 애들 다 한국으로 불러요. 어차피 요즘 야구도 안 하던데, 운동장에 밀어 넣고 훈련시키면 되지."

    솔깃한데?

    "이왕이면 조금 일찍 말씀을 해주시지."

    그런 생각은 전혀 못한 터라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크리스토퍼에게 설설 긴 최정훈이 새삼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그 정도야 당연히 알 줄 알았죠."

    "…제 잘못이네요."

    세상 모든 일의 결론이 자꾸 자기 잘못으로 나는 것 같지만, 최정훈은 딱히 반박할 말을 찾기가 힘들었다.

    "시간 끌지 말고 본론으로 넘어가죠. 그놈의 만담은 상황을 안 가리네, 진짜."

    서아영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하자 주변 사람들도 다들 동조했다. 자신의 의도와는 다르게 다시 시간을 끄는 꼰대 정도로 지위가 격하당한 최정훈이 눈물을 삼켰다.

    '이건 나 때문이 아닌데…….'

    왜 아무도 이지혁에게 직접적으로 불만을 표시하지 않는 것인가. 누가 봐도 이지혁이 말꼬리를 잡은 것인데.

    "여튼 미국 측의 승인이 떨어졌습니다. 대신 미국 측의 정예 대원들과 유럽 쪽 정예 대원들이 같이 훈련을 받을 수 있게 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최정훈이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어쩌시겠습니까?"

    "뒈지고 싶다는데 누가 말려요. 오라 그래요."

    "……."

    최정훈은 말 한마디로 주변 공기를 얼음장으로 만드는 이지혁의 능력에 감탄했다. 그 한마디로 NDF들이 다들 썩은 얼굴로 움찔했다.

    '마지막에 지금이라도 빠질 사람 있는지 물어보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그 과정은 넘어가야 할 것 같았다. 지금 이 분위기에서 물어보았다가는 반은 이탈할 기세였다.

    하지만 최정훈의 계획을 정면으로 박살 내는 사람이 있었다. 분위기 파악에는 소질이 전혀 없는 김다현이 손을 번쩍 들었다.

    "네?"

    "이지혁 씨한테 질문이 있는데요."

    "…아, 그래요?"

    질문받지 마라. 귀찮다고 해줘.

    최정훈의 간절한 바람과는 달리 이지혁은 빙긋 웃으면서 대답했다.

    "왜?"

    "…궁금한 게 있는데, 지금부터 받을 훈련이 많이 힘듭니까? 저번에 받은 훈련 이상으로요?"

    순간, 이지혁이 골똘히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음, 저번에 받은 훈련에 비하면 무척 쉽겠지. 게다가 이미 한 번 받아봤으니까 별거 있겠어?"

    "그렇죠?"

    김다현이 안심했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지혁이 그리 사람을 편하게 해줄 리가 없었다.

    "그런데 저번에 받은 훈련은 내가 이미 해본 것들이라 위험하지 않다고 해도 좋은데……."

    '위험하지 않다고?'

    모두가 살아 돌아온 게 기적이었는데?

    순식간에 일행 전부가 전멸할 뻔한 순간도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런데 그게 위험하지가 않다고?

    아차하면 빠른 전멸이었는데?

    "이번 훈련은 나도 처음 해보는 거나 마찬가지라 좀 위험할 수도 있어. 사실 에테르와 마력을 섞는다는 개념은 이미 활용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게 버프 형태가 아니라 주도적인 활용이 되었을 경우에는 좀 뭐랄까… 음……."

    이지혁이 볼을 벅벅 긁었다.

    "까딱하면 터지지 않을까? 풍선처럼 펑?"

    "……."

    사무실 분위기가 남극처럼 싸늘해졌다.

    "뭐, 그렇게까지야 가겠냐마는, 죽어도 시체야 남기겠지. 몸뚱아리가 다들 단단하잖아?"

    김다현이 빙그레 웃으면서 최정훈에게 물었다.

    "부부장님."

    "네?"

    "저번에 하신 말씀 있잖습니까. 빠지고 싶은 사람은 빠져도 된다는 말. 그 말, 아직 유효합니까?"

    "배 떠났습니다. 다 참가하세요."

    "…썩을."

    탈출할 곳을 찾아내지 못한 김다현이 축 늘어졌다. 아무리 봐도 이건 죽으러 가는 것이나 마찬가진데, 도망칠 곳이 없다.

    "꼭 해야 하는 건가, 이거."

    윤혁규가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자 최정훈이 비장한 표정으로 되받아쳤다.

    "지금 죽으나, 나중에 죽으나 똑같은 거 아닙니까."

    "뭔 개소리여, 그게."

    "아, 이게 아니지. 그래도 이 위기만 넘기면 어떻게든 세계의 멸망을 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지 않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이지혁씨?"

    "그건 좀 미묘한 거 같은데……."

    "…그렇다네요."

    최정훈은 이제 자포자기하는 심정이 되었다. 당사자가 도와주지 않는데 더 이상 뭘 어떻게 하겠는가.

    "여하튼."

    최정훈이 '될 대로 되라'를 외치는 시점에서 이지혁이 입을 열었다.

    "지금보다 강해지기는 하겠지. 지금 우리가 가진 전력의 가장 큰 문제는 마왕을 상대하는 게 아니라 그 아래의 마수조차 제대로 상대하지 못한다는 거야."

    "음……."

    "단일 개체는 어떻게든 할 방법이 생긴다. 물량을 때려 박든, 약점을 공략하든. 하지만 그 단일 개체가 집단 안에 있다면 공략할 방법도 사라져. 인간이 마족들을 상대로 승리하기 위해서는 그 마수들을 공략해 줄 사람들이 필요하다."

    "그게 우리란 말씀이군요."

    "아니. 알파."

    "……."

    "너희는 하는 김에 겸사겸사."

    역사상 이렇게까지 사람들의 의욕을 떨어뜨리는 출정식이 있었을까?

    최정훈은 어쩌면 자신들이 지금 역사의 한 획을 긋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뭐, 그냥 출발하시죠."

    "더 말 안 해요?"

    "당부할 거리는 엄청 많았는데, 생각이 안 납니다. 머리가 텅 비었네요."

    "치매 오셨나?"

    "…생각해 보면 당부한다고 들어줄 사람들도 아니고, 그냥 옆에 붙어 있다가 그때그때 정리하는 게 낫겠네요. 어차피 제가 안 갈 것도 아니고."

    가만히 따져 보면 이쪽에서 트러블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해서 알파 쪽이 가만히 있을 것이라는 보장도 없었다. 아무래도 이쪽은 무늬는 껄렁하지만 정규군에 가깝다면, 그쪽은 진짜 테러와 파괴를 일삼는 범죄자 집단이 아닌가.

    트러블이 생긴다면 그쪽에서 벌어질 것이다.

    "가시죠, 그냥."

    최정훈이 자포자기한 얼굴로 말하자 이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러시든가요. 아, 그런데 나 엄마한테 말 안 하고 왔는데 괜찮으려나? 전화 한 통 해도 돼요?"

    "…네. 뭐, 그러시죠."

    이제 와서 전화하는 시간 끄는 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인류의 미래를 건 비장한 출정식을 생각하고 있던 최정훈의 어깨가 축 처졌다. 그런 그의 어깨를 서아영이 두드려 주었다.

    "어차피 이리될 거 알았잖아요."

    "그렇기는 한데……."

    이지혁과 얽히는 순간에 이미 정상적인 출정식은 날아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충분히 알고는 있지만, 실제 겪으니 속이 쓰려오는 것만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 시간이 조금 지나자 이지혁이 불만 어린 얼굴을 한 채 안으로 들어왔다.

    "아오, 진짜!"

    "무슨 일 있습니까?"

    "엄마가 햄버거 사 오래요."

    "……."

    "놀러 가는 줄 아나, 진짜."

    확실히 범상치 않은 이지혁의 멘탈에는 어머니의 지분이 최소 50%는 되어 보였다.

    '하기야 생각하면 여장부이시지.'

    남자로 태어났다면 대장군으로 세상을 호령했을 분이시다. 그런 사람이니 이지혁처럼 똘기 넘치는 인간을 키워내실 수 있었겠지.

    인류에 지대한 공헌(?)을 한 이지혁의 어머니를 그리며 최정훈이 입을 열었다.

    "게이트 열죠."

    * * *

    "한국 측에서 합류하겠다는 의사를 밝혀왔습니다."

    "유럽은?"

    "가용한 텔레포터를 모두 이용하여 인원들을 보내겠답니다. 아마 곧 도착할 것입니다."

    "가용한 텔레포터? 뭘 그리 많이 온대?"

    "독일에 방어선을 펴다가 텔레포터들이 많이 희생됐습니다. 현재 부상자를 제외하면 가용한 인원이 그리 많지 않다고 합니다."

    "잘하는 짓이네."

    크리스토퍼는 영 마뜩찮다는 얼굴로 비전을 바라보았다. 이번 훈련에 참가하기 위해 선별된 인원들의 목록이 거기 있었다.

    "나도 잘하는 짓이군."

    미국의 자존심이라고 할 수 있는 최정예 요원들을 범죄자 집단이랑 같이 훈련시키는 것이 과연 올바른 일인가 하는 회의가 들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야 한다. 그게 누군가의 바짓가랑이를 물고 늘어지는 일이라고 해도 말이다.

    "이지혁은 우리가 그를 노렸다는 것을 알고 있나?"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최정훈의 말로는 알고 있어도 별달리 신경을 쓸 위인이 아니라는군요. 필요한 이상은 이지혁도 미국을 적대하지 않을 거랍니다."

    "하기야 알파랑도 손잡는 인간이니."

    크리스토퍼가 한숨을 쉬며 손짓을 했다.

    "비전 켜봐. 훈련장은?"

    "지금 알파 쪽이 도착해서 한국 측 인원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주 제판 만났구만."

    크리스토퍼가 이를 갈았다.

    마계의 스팟이 열리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알파는 미국 내에서 도망자 신세였다. 그런데 스팟이 열리자마자 입지가 극도로 상승하더니, 이제는 미국 정부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초거물이 되어버렸다.

    "남는 장사 제대로 했군."

    이걸 노리지는 않았겠지만, 이득은 확실히 챙기는 알파였다.

    크리스토퍼가 비전에 드러난 알파의 모습을 보며 이를 갈았다.

    "이대로 끝나지는 않을 거다."

    그의 눈이 평소답지 않게 이글거리며 타올랐다.

    * * *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 발을 뒤로 빼며 머리 위로 들어 올린 손이 우아하게 호를 그린다. 가슴 앞으로 손을 대고 자세를 낮춘 알파를 보며 이지혁은 순수한 감상을 말했다.

    "지랄하고 자빠졌네."

    "아니, 거……."

    시니컬한 이지혁의 반응에 알파가 허망한 표정을 지었다.

    "이만큼이나 환대를 해드리고 있지 않습니까."

    "그 환대만큼 패고 싶으니까 좀 닥치지?"

    "넵."

    이지혁은 자신 앞에 도열해 있는 알파의 부하들을 보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굉장히 추억 돋는 광경이로군."

    과거 베라프에서 징집병들이 서 있는 꼴이 딱 이랬다. 통일되지 않은 복장과 제멋대로인 자세, 그리고 지금부터 자신들이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혼란스러움이 가득한 집단.

    그나마 다른 점이 있다면, 여기에 있는 놈들은 하나같이 자세가 좀 껄렁하다는 것 정도?

    그리고…….

    "뭔 애새끼들이 거적때기를 입고 있어?"

    무릎까지 내려오는 헐렁한 후드에 찢어지고 쪼그라들어 주름이 자글자글한 바지.

    그리고 아빠 걸 훔쳐 신었는지 제 발보다 두 배는 커 보이는 신발까지… 아주 패션의 극한을 보여주고 있는 놈들이 곳곳에 박혀 있었다. 그나마 좀 얌전하다 싶은 놈들도 난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스트릿 패션이죠."

    "길거리 패션? 미국 놈들은 길에 저리 입고 다니냐?"

    "우리 애들이 좀 자유로운 면이 있어서요. 이지혁 씨도 스트릿 패션의 선두 주자 아닙니까?"

    "내가?"

    "네. 한국에서 그렇게 자랑스레 파란 트레이닝복을 입고 다니는 사람은 이지혁 씨밖에 못 봤는데요?"

    "……."

    이지혁이 최정훈을 돌아보며 말했다.

    "내가 저렇게 보여요?"

    "…솔직히 말씀드려도 됩니까?"

    "아니, 잠깐만. 마음의 준비를 좀 하고."

    이지혁이 심호흡을 하고 고개를 끄덕이자 최정훈이 가감 없는 감상을 이야기했다.

    "그래도 저 사람들은 보고 있다 보면 '아, 자신만의 세계가 있구나'라든가, '그래도 신경 써서 입었네'라는 느낌이라면, 이지혁씨는 동네 노는 형이 라면 사러 가는 복장 같은 차이랄까요. 스트릿 패션이라는 말의 뜻을 생각해 보면 원론적으로는 이지혁 씨가 좀 더 스트릿하지 않은가……."

    "거기까지."

    우울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본 이지혁이 본래의 기세를 회복하고는 인상을 썼다.

    "편해서 입는 거예요! 편해서!"

    이지혁의 주장에 알파가 알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트레이닝복에는 여러 종류와 여러 색깔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줄기차게 파란 트레이닝복만 입고 다니시는 것은 취향을 반영한 것 아니었습니까?"

    "……."

    왜 예로부터 바른말을 하는 사람은 일찍 죽는지 새삼 실감하는 이지혁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이놈의 입을 꿰매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패션 놀음 하러 온 건 아니니 여기까지 하지."

    "네? 패션으로 먼저 화제를 끌어내신 건 이지혁 씨가 아니셨는지."

    "그래서?"

    "그만하도록 하죠."

    알파가 깔끔하게 손을 떼고 물러나자 최정훈이 먼 산을 바라보았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그래서 이놈들이 훈련을 받을 애들인가?"

    "예. 정예 병사들이죠. 이런 말하긴 좀 뭣하지만, 지금이라면 이 인원만으로도 미국 정도는 쑥대밭을 만들어놓을 수 있습니다. 점령까지는 힘들지만, 파괴는 가능하죠."

    "다 등신같이 생겼는데?"

    "생긴 걸로 사람 판단하고 그러시면 안 됩니다. 그건 에……."

    뭐랄까.

    인종차별처럼 문제가 되는 일은 아니지만, 인종차별 이상의 사악함을 본 듯한 느낌이었다.

    "최고 중의 최고만 모은 겁니다."

    "이거보다 많아?"

    "그럼요. 반절도 안 데리고 왔는데요."

    이지혁이 떨떠름한 눈으로 알파를 바라보았다. 여기에 보이는 인원만 해도 천 명에 가까운 것 같은데, 이게 반절이라면 이놈 아래에 이천이 넘는 능력자들이 모여 있다는 말이 아닌가.

    '쟤들, 우리 애들이랑 비슷한 수준인 것 같은데.'

    자세히 보니 인종이고 나이고 비슷한 것들이 없었다. 참 전 세계를 돌면서 쓸 만한 애들만 쏙쏙 뽑아 모아둔 느낌이었다. 대단한 일이다.

    "세상에 나쁜 놈이 이렇게 많다니. 여기에 있는 애들만 싸그리 정리하면 세상에 존재하는 능력 범죄자들의 8할은 처리하는 건가?"

    "에헤이, 그 무슨 겁나는 말씀을."

    "…나도 농담이었으면 좋겠는데, 솔직히 좀 끌리고 있다."

    "진정하시지요. 인간 범죄자가 착한 마족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으음……."

    그 말도 일리가 있었다.

    "NDF분들도 같이 오셨네요."

    "익숙한 얼굴도 보고 아주 좋네."

    서아영이 이죽거리며 말했다. 그녀의 눈은 알파의 부하들 사이에 있는 박성찬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이지혁 씨."

    "네?"

    "이거, 굉장히 힘든 수련이라고 했죠?"

    "네."

    "그럼 수련받는 도중에 사고로 누가 불타 죽어도 할 말은 없겠네요. 몸뚱아리가 단단해서 한 삼박사일은 탈 것 같은데 말이죠."

    "난 상관없어요. 다 뒈지든 말든."

    "그렇죠?"

    서아영이 싱긋 웃었다.

    그러고는 악귀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박성찬을 노려보았다.

    "조심하라고. 마지막 남은 옛정으로 충고해 주는 거니까."

    박성찬은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뭐야, 저 여자. 지금 우리 협박하는 거야?"

    말은 못 알아들어도 기세나 어투야 만국 공통어 아니던가. 서아영이 눈을 부라리는 것을 본 알파 쪽 인원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저 동양인 년이 미쳤나."

    "죽여 버릴까? 저게 변방에만 처박혀 있던 것들이라 우리가 누군지 모르는 모양인데?"

    "나 저 여자 알아. 플레임 위치다."

    "쥐꼬리만 한 명성 하나 믿고 까부는 모양인데?"

    알파 쪽 인원들의 분위기가 고조되어 갔다. 상황이 영 마음에 들지 않은 이지혁이 한마디 하려는 찰나, 알파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

    "내가 이지혁 씨 앞에서 주둥아리 떼지 말라고 했을 텐데?"

    알파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공기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보, 보스."

    "입 한 번 더 떼봐. 그 입을 귀까지 찢어줄 테니까."

    알파가 싱글싱글 웃으면서 말하자 알파 쪽 인원들이 다들 입을 꾹 다물었다.

    '장난 아니군.'

    저리 웃으면서 말하고 있는데 듣는 이들이 공포에 질리고 있었다.

    평소 알파가 저들에게 얼마나 철권으로 통치해 왔는지를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상기시켜 주는군.'

    워낙 자신들 앞에서는 어리벙벙한 모습만 보여온 알파다. 하는 짓이 워낙에 엉뚱해서 그에 대한 경계심도 많이 풀려 있었다. 그러지 않으려고 했는데도 말이다.

    '그럴 리가 없지.'

    그는 알파다.

    미국과 전 세계가 이 시대 최악의 범죄자이자 세계 최고의 위험인물로 지정한 사람인 것이다. 그런 이의 모습이 이게 전부일 리 없었다.

    단순히 이지혁들에게 보여주는 모습이 알파의 진짜 모습이라면, 일개 국가를 능가하는 이만한 병력을 끌어모아 수족처럼 다룰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에이, 못난 모습을 보였네요. 하지만 이 정도는 되어야 인간미가 있다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죠, 이지혁 씨?"

    "…좀 닥쳐 봐."

    "넵."

    하지만 이지혁은 알파의 그런 모습이 전혀 의외가 아니라는 듯이 평소와 다름없는 자세로 대하고 있었다.

    저 둘의 관계는 다른 사람이 이해하기는 너무도 복잡미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야?"

    이지혁이 알파의 뒤로 보이는 커다란 돔을 가리켰다.

    "네, 여깁니다. 제한구역 681. 능력자들에 대한 실험을 위해 미국이 특별히 마련한 실험장이죠. 지도에도 안 나온다구요. 구글이 여기를 어설프게 맵에 올렸다가 공중분해될 뻔한 적도 있었어요."

    "…그래?"

    "네. 돈이 돼서 놔두기는 했는데, 덕분에 지도 사업을 반쯤 접을 뻔했죠."

    이지혁은 새하얀 외벽을 뽐내고 있는 돔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 니가 말하던 곳이 여기야?"

    "네, 맞습니다. 물론 여기가 전부는 아니죠. 미국 내에서만 이런 실험장이 다섯 개는 더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보면 이만한 규모는 흔치 않아도 백 개는 넘을 텐데요, 아마?"

    "…너희도 빡칠 만하네."

    얼핏 보아도 슈퍼볼이 열리는 미식축구 경기장은 비교도 되지 않는 크기였다. 게다가 지하도 있을 테니, 이게 얼마나 큰 공간이겠는가. 이런 공간에서 실험이 벌어졌다면 그동안 희생된 능력자들도 그 수가 결코 적지는 않을 것이다.

    "그도 이리 대놓고 말이야."

    "통제구역이니까요. 그리고 타국에서 이런 것을 시비 걸지도 않으니 거리낄 게 없죠. 다들 크고 작게 실험하고 있으니까요."

    "음……."

    그럼 이놈은 자신들을 생체 실험장으로 쓰던 곳으로 기어 들어가서 훈련을 받겠다는 것 아닌가.

    "강철 멘탈이네."

    "헤헤, 버릇이라 그런지… 저기만 들어가면 정신이 번쩍 들거든요. 훈련 받는 데는 이만한 데가 없죠."

    "…그래."

    이 새끼도 확실히 또라이였다.

    하기야 보통 또라이가 아니니 마계로 통하는 문을 열었겠지.

    새삼 그 사실을 깨달은 이지혁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돌렸다.

    "그래서, 이제 들어가면 되나?"

    "유럽 쪽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최정훈의 말에 이지혁이 불만 어린 표정이 되었다.

    "걔들만 오면 되는 거예요?"

    "일본 쪽도 참가하고 싶다는데… 중국이 반쯤 엎어지면서 동아시아는 현재 구속력을 상실한 상태라 그 몇 안 되는 일본인들을 참가시킨다고 뭔 도움이 될까 싶습니다."

    "왜놈들이 싫어서 그런 건 아니고?"

    "과거사 문제를 꺼내자면 한도 끝도 없지만……."

    최정훈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도쿄가 날아가서 끝도 없이 무너지고 있는 놈들에게 복수심을 불태울 정도로 제가 가혹한 사람은 아닙니다."

    "우리도 서울 날아갔는데 뭐 다른 거 있다고."

    "…어?"

    생각해 보니 그러네?

    "부를까요?"

    "편한 대로 해요. 나야 뭐, 어차피 안에 들어가면 다 똑같으니까."

    알파가 이지혁의 눈치를 슬쩍 살피더니,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부하들 중 일부가 부리나케 움직이더니 이지혁이 앉을 의자와 테이블, 그리고 파라솔까지 가져왔다.

    "……."

    그 와중에 구석에서 아이스커피를 타 온 놈까지 도착하자, 사막 한가운데에 이지혁을 위한 휴양지가 만들어졌다.

    "그럼 냄새나는 유럽 놈들이 도착하실 때까지 여기서 쉬시지요."

    "냄새는 양키의 전유물이 아니던가?"

    "러시아 놈들의 암내를 맡아보시면 생각이 달라지실 텐데요?"

    "…내가 틀렸네. 인정하지."

    이지혁이 커피나 쪽쪽 빨면서 기다리고 있으려니 유럽의 능력자들이 속속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흐음?'

    겁대가리는 한국에다 두고 온 NDF들과는 다르게 유럽의 능력자들은 모여 있는 알파 측의 인원을 보자마자 사색이 되어 그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호랑이를 본 개가 꼬리를 내리듯 시작부터 기세를 완전히 제압당한 모양새였다.

    "쟤들 왜 저래?"

    "아무래도 우리보다는 자주 부딪치니 어떤 놈들인지를 잘 아는 거겠죠."

    "그럼 우리 애들도 자주 부딪치면 저리된다고?"

    "아뇨. 그럴 일은 없겠죠. 우리 쪽은 맞아 죽는 순간까지 입을 쉬지 않는 이들이니까요."

    누구 덕에 다들 그렇게 진화했지.

    겁을 상실한 대신 입을 얻었다고.

    이지혁이 낄낄 웃더니 커피를 쪼옥 빨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그럼 시작해 볼까?"

    이지혁이 박수를 쫙, 치더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는 것을 확인하고는 가볍게 입을 열었다.

    "너희, 다 죽을 각오를 하는 게 좋을 거야."

    "이지혁 씨, 쟤들 한국어 못 알아듣습니다."

    …그런 건 진작 말해줘야지.

    * * *

    모인 인원들을 가만 살펴보니 이천 명은 될 것 같았다.

    이들을 모두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하니 앞이 캄캄한 숫자였지만, 전 세계에서 모인 이들이라고 생각하면 그 수가 그리 많지는 않았다.

    '오히려 적지.'

    이들이 지금보다 두 배 더 강해진다고 해도 인류의 힘에 얼마나 큰 보탬이 될 것인가가 문제였다.

    이들이 지금보다 강해진다고 해서 마왕을 상대할 수 있을까?

    회의적이다.

    하지만 적어도 마왕의 군단 정도는 상대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그게 지상 과제이지만, 이지혁 역시 확실하게 이들이 그 수준까지 올라갈 수 있다고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 역시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이니까.

    "으음……."

    이지혁이 고민에 빠진 듯 보이자 최정훈이 입을 열었다.

    "들어갈까요?"

    "아뇨. 그전에……."

    이지혁이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일 좀 하죠."

    "거기, 확실하게 그리라고!"

    "……."

    텔레포터들이 공수해 온 장비를 들고 바닥을 파내던 이들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게 뭐야?"

    "빌어먹을."

    인류를 위해서 새로운 능력을 갖춘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지만, 이겨낼 수만 있다면 지금보다 몇 배는 더 뛰어난 능력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들이 들은 설명이었다.

    전 세계가 마왕의 위협 아래 노출되어 있는 상황이지만, 그중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곳을 고르라면 누가 뭐라고 해도 유럽이었다.

    베이징이 날아가고 LA가 죽음의 도시가 되어버린 아시아와 미국도 그 피해가 적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터키와 독일을 통째로 잃은 유럽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특히나 유럽은 미국처럼 군을 회피시키거나 중국처럼 지역군에게 맡기는 형식이 아니라 독일이라는 유럽의 중심축을 구하기 위해서 전 유럽군을 전선에 투입했기에 그 피해는 막대하기 그지없었다.

    이대로라면 유럽의 붕괴도 얼마 남지 않은 상황.

    그래서 목숨을 버린다는 각오로 지원을 했는데…….

    "누가 허리 드나!"

    가운데 있는 놈이 알아들을 수 없는 한국어로 소리치자 그 옆에 선 허우대 멀쩡하게 생긴 놈이 각국의 언어로 번역하여 따라 소리치기 시작했다.

    "빌어먹게 친절하네, 저 새끼."

    대충 영어로만 해도 알아들을 텐데, 일일이 모국어로 해석해 주자 기분이 아주 끝내준다.

    "왜 우리가 땅을 파야 하는 거지?"

    "제기랄! 알 게 뭐야!"

    비장한 마음으로 이곳에 왔건만, 그들에게 떨어진 일은 어처구니없게도 땅을 파는 일이었다.

    손에 들린 삽을 바라보는 미하엘의 얼굴은 사정없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이 순간에도 그들의 조국은 무너지고 있었다. 국토의 절반이 날아갔고, 국민들은 난민이 되어 주변국으로 흩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조급한 마음을 어쩔 수 없는 상황인데, 훈련을 받는 것도 아니라 삽질부터 하라니.

    "이런 제기랄!"

    바닥으로 삽을 내려친 미하엘이 허리를 쭉 폈다.

    "어쩌려고?"

    "나는 이런 일을 하러 온 것이 아니야. 이런 짓을 해야 한다면 차라리 독일로 돌아가겠어. 가서 싸우다 죽는 게 낫지. 국민들이 신음하고 있는 상황에 이게 뭔 뻘짓이냔 말이다."

    "진정해, 미하엘. 저자가 누군지 몰라서 그러는 거야?"

    "…빌어먹을."

    미하엘의 눈에 파라솔 아래에서 음료를 쭉쭉 빨고 있는 자의 모습이 들어왔다.

    이지혁.

    어느 순간 갑자기 등장해서 전 세계에 그 이름을 떨친, 사기적인 능력자.

    그 이전에 가장 유명하고 가장 악질적이라고 불리던 알파의 명성을 순식간에 뛰어넘고, 전 세계에 경계 대상 1호로 떠오른 악마였다.

    '농담이 아냐.'

    지금까지 해낸 일만 보더라도 그가 차원이 다른 능력자라는 것은 안다.

    일반인들은 모호한 개념만 가지고 있지만, 능력자인 그들은 이지혁이 해낸 일들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인지 알고 있었다. 대적할 방도가 없다고 불리던 알파조차 이지혁의 앞에서는 순한 양이 되지 않는가.

    "그래서 뭐!"

    눈 밖에 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으로 버티기에는 그의 마음이 너무 급했다.

    미하엘은 성큼성큼 걸어서 이지혁을 향해 걸어갔다.

    "이봐요!"

    최정훈이 노한 얼굴로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미하엘을 보며 눈을 찌푸렸다.

    "반동분자가 나타난 모양인데요."

    "용기 있는 자는 항상 있기 마련이죠."

    둘이 뭐라고 중얼거리는지 알아듣지 못한 미하엘이 이지혁을 보며 말했다.

    "우리가 왜 이런 짓을 해야 합니까?"

    "어느 나라 말이에요?"

    "……영업니다, 이지혁 씨."

    "아……."

    미하엘이 친절하게 영어로 말해주었지만, 한국어가 아닌 말은 동양 스타일과 서양 스타일로만 구분할 수 있는 이지혁에게는 허사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아오, 통역 마법을 다시 켜든 해야지."

    흑마력처럼 편히 쓸 수 있는 힘이 아니라 쓸데없는 마법을 다 해제했더니, 말이 안 통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뭐래요?"

    "이 일을 왜 해야 하냡니다. 이제 실시간으로 번역해 드릴게요."

    "필요하니까."

    최정훈이 번역을 해주자 미하엘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마왕을 상대하기 위한 기술을 익힌다고 해서 온 길이다. 그런데 땅을 파라고? 죽인 마왕을 땅에 묻기 위해서? 빌어먹을. 이게 대체 무슨 짓이야! 난 이런 짓 더 못하겠다."

    "그럼 가."

    실시간 번역을 들은 이지혁이 손을 휘휘 젓자 미하엘의 얼굴이 멍해졌다.

    "뭐라고?"

    "가라고. 귓구멍 막혔어? 가라고."

    이지혁이 파리 쫓듯 손을 내저었다.

    "텔레포터 하나 불러서 얘 집에 보내줘요."

    "알겠습니다."

    상황이 애매하게 돌아가자 미하엘이 당황하여 소리쳤다.

    "이런 일을 계속 시키고 있으면 나뿐 아니라 다른 이탈자도 나타날 거다."

    "그럼 걔들도 가라고 해."

    이지혁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이지혁이 이런 식으로 나오자 말문이 막힌 것은 되레 미하엘이었다.

    "우릴 가르쳐야 하는 거 아니냐?"

    "뭐래?"

    이지혁이 한숨을 쉬었다.

    "별 거지 같은 것들이 배우고 싶다고 하기에 끼워줬더니, 헛소리하고 자빠졌네. 나는 너희 없어도 상관없으니까 이러쿵저러쿵할 거면 그냥 가라고."

    이지혁이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쳤다.

    "불만 있는 것들은 지금 다 가! 귀찮으니까!"

    좌중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최정훈의 통역을 들은 이들 중에서는 당황하는 이들도 있고, 대놓고 불만 어린 시선으로 이지혁을 노려보는 이들도 있었다. 매우 다양한 반응이 나왔다.

    하지만 재미있는 것은 그런 반응을 보이는 이들은 전부 유럽과 미국 쪽이라는 것이다.

    알파가 데리고 온 이들과 NDF들은 이지혁의 말에 관심도 주지 않았다.

    "저도 가도 됩니까?"

    김다현이 손을 들고 묻자 최정훈이 손가락으로 엿을 날렸다. 시무룩해진 김다현이 다시 삽을 들고 땅을 파기 시작했다.

    미하엘은 상황이 애매해진다는 것을 느끼고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납득할 수 있는 설명과 확실한 계……."

    덥썩.

    그때, 누군가가 미하엘의 뒷목을 움켜잡았다.

    "거참, 말 많다니까. 너 프랑스 인이냐?"

    미하엘이 자신의 목을 잡은 자를 확인하고는 사색이 되었다.

    '아, 알파.'

    새하얀 머리를 휘날리며 그를 바라보고 있는 알파를 보자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이지혁이 알파보다 강할지는 모른다. 하지만 지금까지 들어온 바에 의하면, 이지혁은 괴짜였다. 하지만 알파는 아니다. 그는 정말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그를 벌레처럼 짓뭉개 버릴 수 있는 악마 중의 악마였다.

    "도, 독일인이다."

    "오, 침략당하는 나라의 난민이로군. 그럼 그런 반응이 이해가 안 가는 게 아니지. 아쉽긴 하지만 말이야, 네가 프랑스 인이었다면 안심하고 죽여 버렸을 텐데."

    "……."

    알파가 씨익 웃으면서 이지혁에게 말했다.

    "어쩔까요? 이 새끼의 대가리를 뽑아서 저 위에 걸어놓으면 애들 불만이 싹 사그라들 것 같은데. 그런 방식도 선호하십니까?"

    "아, 좀 꺼지라고 해. 안 그래도 사람 많아서 정신없어 죽겠는데. 한 백 명이면 될 일을 왜 이리 크게 벌여서 사람 귀찮게 만드냐고."

    "…따지고 보니 제 탓이네요."

    알파가 '앗, 뜨거라' 하는 눈으로 고개를 슬쩍 돌렸다.

    "들었어?"

    "……."

    "나는 불만이 있는 놈을 좋아하지. 그런 놈들이 결국 세상을 바꾸거든. 현재에 만족하고 따라가는 이들은 결코 세상을 바꾸지 못하지. 너 같은 놈들이 잘만 풀리면 혁명가가 되는 거고, 개혁가가 되는 거지. 나는 그런 이들을 좋아해. 알아?"

    미하엘이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너한테는 하나 부족한 게 있지. 그게 뭘까?"

    미하엘은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을 할 정신이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잔인하고 끔찍하다는 범죄자가 바로 옆에서 그를 위협하고 있는데 정신이 있을 리가 없었다.

    "힘이 없어."

    알파가 익살맞게 웃었다.

    "힘이 있어야 혁명도 하고, 개혁도 하는 거야. 힘도 없이 불만만 늘어놓는 이가 있다면, 그건 그냥 반골이 되는 거지."

    뒷목을 잡은 손이 그의 목을 천천히 조여왔다.

    "여기에 있는 놈들치고 지금 상황에 만족스러운 이들은 없을 거야. 그래도 다들 군말 없이 따르는 이유가 뭘 것 같아? 네가 잘나서 너 혼자 불만을 가지는 거 같아?"

    "……."

    "자, 그럼 어떻게 할까? 나는 본보기를 보이는 걸 아주 선호하는 편인……."

    퍽!

    그 순간, 알파의 얼굴에 신발이 틀어박혔다.

    "헐."

    알파의 얼굴에 박힌 신발이 만화처럼 천천히 바닥으로 스르륵 내려갔다.

    "시간 끌지 말고 삽질이나 해."

    "…거, 애들 앞에서 체면도 있는데!"

    "체면 진짜 없애줘?"

    "지금 당장 삽질하겠습니다."

    알파가 바닥에 내려놓은 삽을 들고 쭐레쭐레 걸어가자 미하엘도 슬그머니 이지혁의 앞에서 물러났다.

    '저 새끼, 진짜 또라이구나.'

    세상에 별놈이 다 있다지만, 설마 알파의 얼굴에 신발을 던질 수 있는 놈이 있을 줄이야. 미국 대통령도 그런 짓은 간 떨려서 못할 것이다.

    "야!"

    물러나려는 미하엘을 이지혁이 불렀다.

    "넵?"

    "신발 가져와!"

    "예!"

    미하엘이 바닥에 떨어져 있는 신발을 주워 이지혁에게 슬그머니 내밀었다.

    "가서 삽질해."

    "네!"

    불만은 깔끔하게 봉합되었다.

    다른 불만이 있던 이들도 조용해졌고, 대부분은 치밀어 오르던 불만을 깔끔하게 안으로 밀어 넣었다.

    '튀지 말자.'

    알파에게 맞아 죽든 이지혁에게 맞아 죽든, 둘 중 하나에게는 맞아 죽을 기세였다.

    각국의 능력자들을 통제하는 이들이 조용히 주변으로 상황을 전파했다. 일단은 입도 떼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하라는 명령이 전해지자 삽질 속도가 두 배는 빨라졌다.

    "다 됐나?"

    이지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대한 돔 주변으로 커다란 마법진이 생겨나고 있었다.

    "흠……."

    흑마력을 통제할 수 있는 상황이면 이런 번거로운 방법을 쓸 필요가 없겠지만, 지금 그는 마력을 최대한 적게 효율적으로 사용해야 하는 상황이다.

    돔 주변으로 상시 마법진을 구축하려면 예전 방식으로 직접 마법진을 그리는 것이 제일 좋았다.

    "거기 삐뚤어졌잖아! 이 새끼들아!"

    이지혁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상황 감독을 맡고 있던 NDF들이 우르르 달려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땅을 덮고 다시 파기 시작했다.

    "빨리빨리 일하라고!"

    소리치는 이들과 재촉하는 이들, 그리고 거대한 돔과 허리를 피지 못하고 일하는 노예… 아니, 능력자들.

    알파는 그 상황을 간단히 평했다.

    "피라미드가 이렇게 건설된 거구나."

    "너도 일해, 새끼야!"

    "넵넵! 분부대로."

    알파가 거칠게 땅으로 삽을 박아 넣었다.

    * * *

    적당히 땅이 파진 것을 확인한 이지혁이 허공으로 몸을 띄워 올렸다. 의자째로 공중으로 둥둥 떠오른 이지혁이 아래를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애매한 것 같은데……."

    나름 잘 파지기는 했지만, 워낙 많은 이들이 삽질을 하다 보니 깊이가 들쭉날쭉했다. 깊이를 일정하게 맞추면 효과는 더 강해지겠지만…….

    "그걸 언제 하고 있냐."

    인간 포클레인이나 다름없는 능력자들을 이만큼이나 데리고도 작업이 한참이나 걸렸다. 중장비를 동원한다고 해도 이지혁이 원하는 퀄리티를 내려면 삼사 일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아쉬운 것은 아쉬운 대로 넘기기로 마음먹은 이지혁이 손을 내저었다.

    "다 나오라고 해요."

    이지혁의 말을 들은 최정훈이 크게 소리를 질러 사람들을 마법진 밖으로 빼냈다.

    "흐음."

    의자 위로 올라가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던 이지혁이 천천히 손을 휘젓기 시작했다. 육체 속으로 밀려 들어오는 마나를 조심스레 컨트롤하여 아래로 흘려보낸다.

    그러자 이지혁의 마나가 커다란 돔을 완벽하게 감싼 마법진에 흘러 들어간다.

    "와……."

    마법진에서 칠색의 광채가 흘러나오는 것을 보는 이들이 다들 탄성을 질렀다.

    저 마나가 흐르는 길을 그들이 삽으로 한 삽, 한 삽 퍼 올렸다는 것을 생각하면 울화가 터지는 일이지만, 그와는 별개로 지금 그들의 눈에 보이는 광경이 아름답다는 것 역시 사실이었다.

    미식축구 경기장을 몇 개는 합쳐 놓은 크기의 돔 주변으로 거대하기 짝이 없는 마법진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지혁의 마나를 받은 마법진이 오로라처럼 빛을 뿜어냈다.

    "오오."

    자신들이 한 짓이 그냥 뻘짓이 아니었다는 것만으로도 능력자들은 감탄한 모양이었다.

    저 마법진이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뭔가 하고 있지 않은가.

    "호오."

    알파가 빛나는 마법진을 보며 눈을 빛냈다.

    '확실히 다르군.'

    저 안에서 뭔가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은 알겠다. 하지만 정확하게 무엇이 벌어지고 있는지 판별할 수는 없다.

    힘이라는 것은 다들 비슷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마나를 기초로 사용하는 이지혁의 마법은 그들의 능력과는 전혀 궤를 달리하고 있었다.

    '이거지.'

    알파가 가만히 입술을 핥았다.

    능력이라는 측면에서 인류는 한계에 도달해 있었다. 물론 앞으로 시간이 흐르면 능력이 더 발전할 여지는 있을 것이다. 당시에는 최고의 컴퓨터였던 286 컴퓨터가 지금 보면 대체 뭐하는 물건인지 모르겠다 싶을 정도로 구식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십 년쯤 시간이 흐른다면, 지금 능력자들의 수준이 다들 애들이 장난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능력이 발전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간이 없다.

    마족들은 그들이 느긋하게 능력을 키우도록 시간을 주지 않을 것이다.

    일정 이상 수준에 오른 이들이 자신의 능력을 1% 증가시키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이룬 것을 한 번 더 이루는 만큼의 노력이 들기 마련이다.

    하지만 바닥에서 시작하는 이들은 일정 수준까지는 적은 노력만으로도 올라갈 수 있다.

    알파가 노리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들이 지금 가지고 있는 능력치를 상승시키는 것보다는 새로운 능력으로 이미 가진 능력과의 시너지를 내는 편이 효율이 훨씬 높았다.

    그가 지켜본 바대로라면 이지혁의 마법은 이 세계의 능력 이상의 가치가 있었다.

    '쉽지는 않겠지만 말이야.'

    세상에 쉬운 일이 있을 리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되새기며 알파는 허공에 떠서 눈을 감고 있는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눈을 감은 이지혁이 이리저리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아마도 저 손끝에서 마나가 뿜어져 나오고 있는 것이겠지.

    그 순간, 이지혁이 눈을 번쩍 떴다. 그와 동시에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이지혁의 손끝이 새하얗게 빛난다 싶더니, 마법진에서 뿜어져 나오던 칠색의 광채가 수십 미터 이상 솟구쳤다.

    번쩍!

    "호오?"

    알파가 신기한 듯 마법진을 바라보았다.

    마법진에서 뿜어져 나온 빛이 마치 물결이라도 된 것처럼 순환하더니, 이내 커다란 구형으로 솟구쳐 올라 돔을 감쌌다.

    마치 돔 밖에 마나로 만든 더 커다란 돔이 생겨난 듯한 느낌이었다.

    '보인다.'

    알파가 가만히 눈을 빛냈다.

    지금까지는 존재하는 줄만 알았지, 한 번도 보고 느껴본 적이 없는 마나라는 존재가 확실히 유형화되어 움직이고 있었다.

    '신기하군.'

    이 상황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마치 공기 중에 산소에만 색깔을 입혀 산소가 유동하는 것을 관찰하는 것처럼, 전혀 느끼지 못하던 기운이 지금 알파의 눈앞에 드러나 있었다.

    "이게 마나입니까?"

    허공에서 천천히 내려오던 이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보기 좋으라고 이렇게 해주신 겁니까?"

    "아닌데?"

    이지혁이 정색하며 말했다.

    "저건 그냥 뭐랄까… 부작용이라고 해야 하나, 곁가지라고 해야 하나?"

    "예?"

    "마나를 많이 모으다 보니까 지들끼리 부딪치면서 이펙트가 생긴 것뿐이야."

    "엥?"

    알파가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이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쉽게 말하면, 이제 이 안은 다른 곳보다 마나 농도가 한 다섯 배에서 열 배 정도로 증가했다고 보면 돼. 그만큼의 마나가 뭉쳐 있다 보니 이상 현상이 벌어지는 거고."

    "아……."

    그제야 알파는 이 뻘짓의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런 걸 미리 좀 말씀해 주시면 반발이 없었을 것 같지 않습니까?"

    "넌 미리 말하는 모양이지?"

    "안 하죠."

    귀찮아서 그런 걸 어떻게 하나.

    "애들이나 집어넣어."

    "옙!"

    알파가 과장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으로 나섰다.

    "신사 숙녀 여러분!"

    알파의 목소리에는 묘하게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힘이 있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이제 드디어 여러분은 제대로 된 수련을 받게 됩니다. 불만이 있으셨던 분들도 다들 불만을 접으시고 안으로 들어가 주시기 바랍니다."

    알파가 한쪽 끝을 가리켰다.

    "거기서부터. 응. 그래, 거기."

    지목당한 유럽 쪽이 서로의 얼굴을 응시하다가 이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거, 좀 찝찝한데……."

    마법진의 경계에서 마치 동그란 분수처럼 마나가 흐르고 있다. 허공에 투명한 막이 생긴 것 같기도 하고, 비가 오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사람이라면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게 꺼려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비켜."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망설이자 미하엘이 과감하게 앞으로 나섰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 이러는 와중에도 저 마족 놈들은 차근차근 영토를 넓히고 있다고."

    미하엘이 이를 꽉 깨물고 마나의 소용돌이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후웁."

    깊숙이 심호흡을 했지만, 별다른 이상은 생기지 않았다.

    "들어와. 문제없어."

    그러자 다른 이들도 용기를 내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정면에 있는 커다란 문을 통해 몇 백이나 되는 인원들이 줄줄이 돔 안으로 이동했다.

    "용기가 있다고 했잖습니까."

    "그리고 넌 죽이려 했고."

    "본보기는 언제나 필요한 법이죠. 동의하실 텐데요?"

    "효율을 끌어내기에는 좋은 방법이지. 다만……."

    이지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굳이 좋은 효율은 필요 없어. 저쪽이 열심히 하겠다고 달려들면 오히려 내가 피곤하거든."

    "저들을 가르쳐서 마왕을 막아내셔야죠."

    "아니."

    이지혁이 피식 웃으며 알파를 바라보았다.

    "좀 이상한 이야기네. 나는 분명 너를 가르치러 온 건데 말이야."

    "…그게 그렇게 되나요?"

    "곁다리에 신경 쓸 생각은 없어. 나는 너만 조질 테니까."

    "환호해야 할지, 아니면 비통해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살아남았을 때 환호하면 돼."

    이지혁의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챈 알파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거, 진짜 장난이 아닌 것 같은데요."

    둘이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 미국과 유럽의 능력자들이 모두 돔 안으로 들어가고, 이제 알파의 부하들이 돔 안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헤이, 보스! 우리 먼저 간다고. 데이트 잘하고 와."

    "넌 입을 찢어 죽일 거야."

    알파가 유들유들하게 대답을 하고는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그럼 본격적인 수련을 시작하기 전에 하나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말해봐."

    "이지혁 씨가 보시기엔 제가 마법을 익히게 된다면 마왕과 싸울 수 있겠습니까?"

    이지혁이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장난해?"

    "역시 그렇죠?"

    "니가 숨겨놓은 패를 모조리 까면 모르겠군. 그럼 상대할 수 있을 것도 같고."

    "에이, 저 숨겨둔 것 없습니다. 낱낱이 까발렸다구요."

    "그럼 망한 거지. 굳이 배울 필요도 없겠는데?"

    "…요즘은 비밀 있는 남자가 대세죠."

    이지혁이 피식 웃고는 알파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기어 들어가."

    "넵! 명령대로."

    알파가 뒤를 따르고 나자 NDF들이 이지혁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저희도 갑니까?"

    "물론."

    "끙."

    결론이야 빤한 것을 뭐하러 물어봤나 모르겠다. 터덜터덜 걷는 걸음으로 NDF들까지 모두 돔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 남은 것은 이지혁과 최정훈뿐이었다.

    "정말 괜찮겠습니까?"

    "이제 와 무르자고 하면 폭동이라도 일어날걸요? 무를 생각도 없지만."

    "어쩌면 지금 이지혁 씨는 세계 멸망의 열쇠를 저 정신병자에게 넘겨주는 일을 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거 재미있네요."

    이지혁이 키득키득 웃었다.

    "농담이 아닙니다."

    "저는 농담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양이죠?"

    최정훈이 이지혁과 눈을 맞추었다.

    확실히 이지혁의 눈은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았다.

    "범죄자든 또라이든 쓸 수 있는 건 모두 써야 하는 거죠. 국토가 침범당하고 있을 때는 교도소 문도 여는 법이니까요."

    "그렇기는 하지만……."

    "했던 이야기 자꾸 다시 하면 재미없으니까, 여기까지만 하죠."

    이지혁이 손을 휘휘 젓고는 돔 안으로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문제는 없는 거죠?"

    "문제요?"

    "이만한 인원이 다 저 안에 박혀 버려도 괜찮나요? 나름 각국의 전력을 싸그리 다 모아온 거 같은데."

    "괜찮습니다."

    최정훈이 단정하듯 말했다.

    "지금은 게이트가 열리지 않고 있는 시기이니까요. 사실 쓸 만한 능력자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쓸데가 없는 상황입니다. 마왕들에게 돌리자니 개죽음이고, 그렇다고 다른 일을 시키자니 게이트가 안 열려서 할 일이 없는 수준이죠. 어차피 사람들을 남겨봐야 삽질 말고는 할 것도 없을 겁니다."

    "흐음."

    이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게이트가 발생하지 않는 이상 병력 공백은 그리 우려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럼 정말 한 번 제대로 조져 볼까?"

    이지혁이 어깨를 휘휘 졸리면서 돔 안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최정훈이 걱정이 가득 담긴 얼굴로 그런 이지혁과 돔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여기가 인류 최후의 요새일지도 모르겠군.'

    이 안에서 농성할 계획은 없으니 요새라는 말은 어색할지도 모르지만, 이 돔이 인류의 마지막 희망이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이지혁이 뭔가를 해주지 않는다면 세상은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다.

    '믿습니다.'

    돔 안으로 들어가는 이지혁을 따라 최정훈도 달리기 시작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여기서 결판이 날 것이다.

    "근데 설마… 저도 하는 건 아니죠?"

    "왜 아니겠어요."

    "……."

    갑자기 회사로 복귀하고 싶은 생각이 무럭무럭 돋아나는 최정훈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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