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89화 (89/118)
  • [■] 이 정도면 된 거 아닙니까? [■]

    ─────

    "저 위에 마왕이 타고 있다구요?"

    "본체는 아니고, 괴조의 육체를 매개로 삼아서 현신한 것 같은데 말이죠."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설명을 해주시면 감사할 것 같은데요."

    "부캐라구요."

    "아, 오케오케."

    간만에 듣는 깔끔한 설명에 최정훈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 이게 만족할 때가 아니지.

    "그럼 저 화신이란 걸로 본체의 어느 정도 위력까지 낼 수 있는 겁니까?"

    "무리하면 한 반 정도 힘은 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반이면 해볼 만한 거죠?"

    "우리 중에 마왕의 10%도 감당할 수 있는 이가 없는 것 같은데, 그게 무슨 되도 않는 소리예요? 긍정적인 건 좋지만, 긍정도 정도껏 해야지."

    "…긍정적인 건 좋은 거죠."

    "행복 전도사 같은 소리 하고 계시네요."

    이지혁이 눈살을 찌푸리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뭔 마왕 익스프레스인가. 꼼꼼하기도 하지. 한 발, 한 발 아주 정성껏 날라주네요."

    "…책임감 있는 택배 기사님은 저도 매우 선호하기는 하지만……."

    저런 택배는 받고 싶지 않다는 것이 문제였다.

    최정훈이 이를 악물고는 물었다.

    "방법은요?"

    "음……."

    "방법은 있는 거죠?"

    이지혁도 영 심각한 얼굴이었다.

    흑마력만 쓸 수 있다면 마왕도 아니고 그저 마왕의 화신 따위는 손가락 하나로도 튕겨 버릴 수 있겠지만, 지금은 무리였다. 인류의 마법 역사상 최정점을 찍은 아크 메이지들도 마왕 앞에서는 어린아이에 불과한 것이다.

    일반적인 마법의 이해도 역시 아크 메이지를 아득히 상회하는 이지혁이다. 세월이 깡패고, 나이가 깡패라고, 보통의 아크 메이지가 마법을 연구할 수 있는 기간은 기껏해야 백 년이다. 하지만 이지혁은 그 백 년의 몇 배나 되는 세월을 마법과 함께 살아왔다.

    안 하려 해서 그렇지, 하기로 마음먹은 지금은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마법들을 정립하여 새로운 학파를 창안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러 있는 것이다.

    하지만…….

    "최강의 토끼가 병든 호랑이와 붙으면 어떻게 될까요?"

    "한 끼 식사?"

    "그 꼴이라는 게 문제죠."

    이지혁이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하, 하지만 우리는 토끼 한 마리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는 토끼 군단이라구요."

    "그것참, 위로가 되는 발언이네요. 그런 의미에서 저쪽 옆으로 떨어져서 대기해 주시겠어요, 개미 사령관님?"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최정훈이 털레털레 걸음을 옮겨 한쪽으로 물어나자 이지혁이 한숨을 쉬고는 알파를 돌아보았다.

    "막아봐."

    "저기…… 잠시만요."

    알파가 무척이나 억울하다는 투로 말했다.

    "마왕이 같이 온다는 말은 전 못 들은 거 같은데요?"

    "나도 몰랐어."

    "…뭐, 굳이 잘잘못을 따지자는 것은 아니지만, 엄밀히 따져 볼 때 이건 계약 위반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만?"

    "그래서?"

    와, 말하는 거 보소.

    알파는 억울함이 하늘 끝까지 치솟았지만, 그렇다고 딱히 다른 수가 있을 리 없었다. 여기서 보이콧을 했다가는 한국이 아니라 지구가 멸망하는 꼴을 봐야 한다.

    뜬금없이 마왕과 이지혁이라는 세계 멸망의 쌍두마차를 상대로 세상을 보호해야 하는 포지션에 놓인 알파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나는 악당 쪽 지지자라고.'

    물론 정의의 사도 포지션이 나쁘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개인적인 선호라는 게 있는데 이런 롤을 맡자니 몸에 닭살이 돋아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어쩔 거야, 보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 같은데?"

    "아니, 이상할 것 없어. 달라진 건 없다. 일단 저걸 막아내면 돼."

    "그냥 봐도 심상치가 않은데. 저 미사일에 실린 게 뭐야?"

    "핵."

    "응?"

    "핵. 누클리어."

    "…돌았네, 아주."

    그제야 자신들이 막아야 할 것이 핵탄두라는 사실을 알게 된 알파의 동료들은 황당함에 머리를 내저었다.

    "보스가 벌이는 일이 막장인 게 한두 번도 아니고, 그냥 그러려니 하자고."

    "내 인생의 최악의 선택이 뭔지는 확실하게 알겠군. 저 인간이 꼬드겼을 때 FBI에 신고했어야 하는 건데."

    알파의 동료들은 투덜거리면서도 자리를 잡았다.

    "…저거, 어디서 많이 본 광경 같은데?"

    보면 볼수록 그들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NDF가 막장이 된 이유가 무엇인지가 확연해져 간다. 이상한 놈들이 모여 있어서 막장이 된 것이 아니라 이지혁이 사람들을 이상하게 만들었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지혁 씨!"

    알파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마왕이 저러고 있는 상황입니다. 미사일만 막아내면 확실하게 막을 수 있는 겁니까?"

    "몰라."

    "…네?"

    "시도야 해봐야지. 시도도 안 해볼 수는 없잖아. 안 그래?"

    "그러네요. 아주 빌어먹게 그래요."

    알파는 헛웃음을 흘리고는 고개를 돌려 좀 더 선명해진 미사일을 바라보았다.

    "선빵 금지인데, 이거."

    마왕에게 직접적으로 공격을 가한다면 협정 위반이 확실하겠지만, 마왕의 화신…도 아니라 마왕의 화신이 타고 있는 미사일을 공격하는 것이 과연 협정 위반일 것인가.

    '우겨볼 여지가 있다면 아직 괜찮아.'

    아직은 마왕들과 우호적인 입장을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그게 안 된다면 그의 목숨은 파리 목숨이나 다름없어질 것이다.

    알파는 혀로 입술을 핥았다.

    '아직은 둘 다 필요해.'

    이지혁도, 마왕도 지금은 둘 다 놓을 수 없었다. 적어도 이 지구ㅡ가 순식간에 멸망하는 꼴을 보지 않기 위해서는 둘 사이에서 절묘한 줄타기를 선보여야 하는 것이다.

    "막아보죠. 안 될 것 뭐 있겠나요? 준비해라, 얘들아!"

    "오케이."

    알파의 주변으로 편진을 짜는 이들을 보며 이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막아낼 수 있다면 좋은 거고…….'

    막지 못한다면 날아오는 미사일 위에 올라타 있는 마왕의 화신을 절묘하게 저격해 내야 한다.

    가능성은 한 10%?

    이지혁이 피식거리며 웃었다.

    최근에는 정말 정의의 사도라도 된 기분이다.

    예전에야 넘어오는 것들이 다들 한 끼 식사도 되지 않는 것들이라 딱히 긴장감도 없고 위험 요소도 없었다. 마왕들이 넘어올 대는 위기감이 좀 있기는 했지만, 마음 한편에서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인식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요즘은 아니다.

    까딱하면 세계가 날아간다는 위기감이 가득 차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인류는 착실하게 그 영토를 잃고 있었다.

    그리고 이지혁이 저 미사일을 막아내지 못하게 된다면, 영토 수준이 아니라 인류와 마왕의 균형 축이 완전 박살이 나버릴 것이다.

    "갈겨!"

    알파의 커다란 목소리와 함께 알파 주변의 능력자들이 전신으로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절반 정도가 하늘을 향해 손을 들어 올렸다. 그와 동시에 형형색색의 빛이 하늘을 수놓기 시작했다.

    미사일을 향해 날아가는 에테르들을 보며 최정훈이 소리를 질렀다.

    "공격은 아니죠?"

    "슬로우나 좀 거는 거예요. 진정하라구요. 여기서 핵 터뜨려서 죽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알파가 이죽거리듯이 말했다.

    '이건 좀 문제로군.'

    이지혁은 새삼 능력자들의 문제점 하나를 알 수 있었다. 능력이라는 것은 개개인이 다르게 발현한다. 같은 화염계 능력자라고 할지라도 스핏 파이어와 서아영의 능력은 완전히라고 해도 좋을 만큼 다르다.

    슬로우를 건다고 하더라도 슬로우를 거는 방식이 다 다르다 보니 위력을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 개개인으로서 능력을 발휘할 때야 별문제가 없지만, 지금처럼 일관적인 움직임으로 목적을 이루려 할 때는 계량화가 어렵고, 공격의 방식을 통일하기 힘들다는 단점이 있었다.

    같은 체계로 마법을 익히는 마법사들은 주문의 종류를 통일하는 것만으로 해결 가능한 일이지만, 능력자들에게는 그게 불가능했다.

    지금도 보라.

    빛이 날아가는 것까지야 비슷했지만, 그 효과는 무척이나 다르게 나온다. 새하얀 빛이 거미줄처럼 퍼져서 미사일을 옭아매고 중력처럼 작용해 뒤로 밀어낸다. 어떤 것은 풍선처럼 퍼지기도 하고, 눈으로 보이지 않는 끈끈한 장력을 발휘하는 능력도 있었다.

    그중에서는 시간 축에 개입하는 듯한 능력도 있고 말이다.

    '일장일단이 있군.'

    통일된 능력으로 수치화할 수 없다는 것은 매우 단점이지만, 워낙 다양한 공격이다 보니 저쪽에서 일일이 대처하기가 힘들다는 장점도 있었다.

    그래서 마법과 능력 중 어느 것이 더 효율적이냐고 하면…….

    "마법이지."

    뼛속까지 마법사인 이지혁이다 보니 객관적인 평가가 되지 않고 있었다.

    "느려지고 있나?"

    최정훈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말했다.

    워낙 점처럼 보이고 있는 상황이라 확연히 구분하기가 힘들었다.

    "지금 느려지고 있는 거 맞습니까?"

    "스피드건이라도 가지고 오시죠. 여기서 그게 판독이 되면 사람입니까?"

    스마트워치를 조작한 최정훈이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와 대화하더니, 고개를 격렬히 끄덕였다.

    "줄어들고 있습니다. 속도 줄어들고 있어요."

    "얼마나요?"

    "천에서 구백 정도로 줄었답니다."

    이지혁이 뚱한 얼굴로 알파를 바라보았다.

    "…줄어들기는 했잖아요."

    "바람 방향만 바뀌어도 그 정도는 줄겠다."

    "아, 아직 우리의 모든 능력을 보여 드린 것은 아닙니다!"

    "조금 아쉽기도 하네."

    "왜, 왜요?"

    "너흰 악당이잖아. 나름 세계를 바꾸겠다고 하는 악당 조직이 이만큼 무능하다면 딱히 걱정할 필요가 없는데 말이야."

    "으으!"

    알파가 자존심이 상한 듯 목소리를 높였다.

    "너희 다 들었지?"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영 비딱했다.

    "한국어 몰라."

    "듣긴 했는데 무슨 말인지 몰라."

    "……."

    해석해 줘야 하나?

    그럴 필요까지는 없겠지?

    알파가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2진! 저거 세워 버려!"

    "말은 쉽지."

    투덜거리는 와중에도 모두가 알파의 명령에 다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최정훈이 그 광경을 보며 눈가를 훔쳤다.

    그래도 저기는 입으로는 투덜거려도 말은 잘 들어주는구나. 우리 망할 것들은 말도 잘 안 듣는데.

    상황을 주시하던 2진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전과 같이 손을 뻗어낸 능력자들의 몸에서 빛이 뿜어져 나온다. 투사체가 있는 쪽도 있고, 투사체 없이 즉시 그 힘을 발휘하는 쪽도 있었다.

    어느새 많이 다가와 선명한 모습을 드러낸 미사일이 턱턱거리기 시작했다. 고속으로 방지턱을 밟은 자동차처럼 휘청이고 비틀거리는 미사일의 모습을 보며 최정훈이 주먹을 꽉 쥐었다.

    한 번 휘청할 때마다 미사일의 속도가 눈에 보이도록 줄어들고 있었다.

    "이 정도면 된 거 아닙니까?"

    알파가 소리를 지르자 이지혁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준비해, 알파."

    "라져!"

    "똑바로 세워. 제대로 못하면 네 모가지를 따버릴 테니까."

    "휘유, 그거 무서운 말이네요. 최선을 다해야겠어요."

    이지혁이 가라앉은 눈으로 미사일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양손을 들어 올렸다.

    "이상한 기분이군."

    마법사이되 한 번도 마법사이지 못했던 이지혁이 이 순간 진실로 마법사가 된 듯 마나를 운용하기 시작했다. 육체를 내달리는 마나가 중간중간 박혀 있는 흑마력과 충돌하며 꺼걱댔지만, 무시하고 마나를 밀어 넣는다.

    윤활유 없이 움직이는 12기통 엔진처럼 이지혁의 육체가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터져 나갈 듯이 말이다.

    "끄윽."

    이지혁의 입가에서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 * *

    '아주 제멋대로군.'

    이지혁의 육체는 이미 통제를 한참이나 벗어나 있었다.

    몸을 타고 흐르는 마나에 자극받은 흑마력들이 먹잇감을 노리는 짐승처럼 고개를 처 들고 포효한다.

    이제껏 흑마력이라는 것은 언제나 그의 통제 안에 있는 것들이었다. 아무리 불을 잘 다룬다고 하더라도 불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를 어쩔 수 없는 것처럼, 아무리 흑마력을 잘 다룬다고 하더라도 마력의 운용에 따른 육체의 파괴는 어쩔 수가 없다.

    하지만 이번에는 경우가 달랐다.

    언제나 말 잘 듣는 애완동물처럼 이지혁의 뜻에 따르던 흑마력들이 그의 의지를 배반하고 야생의 들개마냥 이를 드러내며 육체를 물어뜯고 마나를 집어삼키려 들었다.

    통제력의 상실.

    이지혁은 진실로 자신의 육체가 이제는 한계에 도달했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었다. 마나를 다루는 데도 이럴진대, 지금 그가 의지를 가지고 흑마력을 다루게 되면 어떻게 될까?

    절대적인 힘을 중심으로 해석한다면, 그는 이 세계에 온 그날부터 지금까지 단 한순간도 쉬지 않고 약해져 온 것이다.

    "괜찮습니까?"

    알파는 그의 상황을 이해하고 있는지 걱정스레 말을 건넸다.

    이지혁은 그 말을 들으며 자신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세계 최악의 악당이라 불리는 놈이 해주는 걱정이라는 것은 꽤나 참신한 느낌이었다. 절로 헛웃음이 났지만, 알파의 걱정이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다.

    '무겁군.'

    세계가 자신의 어깨 위에 걸려 있다는 느낌.

    단 한 번도 실감하지 못한 그 무게가 요즘 들어 이지혁을 짓누르고 있었다.

    흑마력이라는 것이 이지혁이라는 인간의 얼마나 많은 부분을 지탱하고 있었는지를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든, 때로는 그저 절망밖에는 남지 않아 보이는 상황에서도 흑마력을 운용할 수 있던 이지혁은 절망하지 않았다.

    태생적으로 겁대가리가 없어서 그런 것이라 생각했는데, 흑마력이 겁대가리를 날려 버리고 있던 모양이다.

    현재의 이지혁도 겁대가리 없기로는 세계 제일을 다툴 테지만, 전성기의 그에 비하면 꽤나 겁쟁이가 되어버렸다. 막지 못하면 어찌 되는가를 고민할 정도니까. 예전이었다면 이런 걱정은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준비는?"

    "준비된 남자, 알파입니다. 지금 당장 대통령도 가능합니다."

    "미친놈이……."

    이지혁은 자신도 모르게 낄낄대며 웃었다.

    미친놈이기는 하지만, 이놈 덕분에 상황이 좀 부드러워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알파가 없었다면 아마 지금보다 몇 배나 더 힘든 상황을 겪었을 것이다.

    '속내야 어찌 되었든 지금 당장은 도움이 되고 있다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

    용서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 말이다.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그렇지만 그게 인간을 죽이는 정당성을 확보해 주지 못하듯이 언젠가는 열릴 마계의 문이었다는 게 알파가 마계의 문을 열어버린 정당성을 확보해 주지는 않는다.

    그런 일이 아니었다면 몇 년은 더 살 수 있던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 건 누가 뭐라고 해도 알파였다.

    이지혁은 혼동하지 않는다.

    마음을 열지도 않는다.

    알파와 손을 잡고 그의 공에 따라서 그의 죄를 사해주겠다는 어설픈 생각 따위는 해본 적도 없다.

    다만, 지금은 이용가치가 있을 뿐.

    세상을 구하기 위해 악마와 손을 잡아야 한다면, 웃으면서 손을 잡을 수 있다. 그리고 세상이 구해지고 나면 가장 먼저 때려잡아야 하는 것은 그 악마가 될 것이다.

    이지혁의 생각은 확고부동하고, 알파 역시 이지혁의 생각을 잘 알고 있다.

    서로를 죽이고 싶어 하지만 서로가 필요하기에 죽일 수 없는, 기묘한 두 사람의 동행이었다.

    이지혁은 고개를 들어 미사일을 바라보았다.

    윤곽이 뚜렷하다. 점으로밖에 보이지 않던 미사일이 이제는 그 형태를 확실하게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확연하게 가까워졌다. 이지혁은 그 광경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재수 없는 면상까지 똑똑히 보이는데?"

    거리가 가까워지고 속도가 급격하게 줄어듦에 따라 미사일 위에서 검은 화신의 모습을 띠고 있는 아락시스의 얼굴도 똑똑히 드러나고 있었다.

    이지혁은 썩소를 지으며 아락시스를 바라보았다.

    * * *

    "인간의 능력이라는 건가?"

    아락시스는 화신의 육체를 짓누르는 압력을 느끼며 흥미로워하고 있었다.

    마력으로는 자신을 이렇게 억제할 수 없을 것이다. 마력은 그의 종이나 다름없으니까. 이만큼이나 수준 낮은 힘으로는 그의 근처에 다가오기도 전에 그에게 종속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하지만 지금 느껴지는 이 힘은 달랐다.

    아주 작고 미약한 힘이지만, 그의 마력에 간섭당하지 않고 확실한 물리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파동이 다른 여러 가지 힘이 조금씩 작용하자 그 힘도 무시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 증거로 그의 사역마가 나르고 있는 미사일의 속도가 급격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원래 그가 의도하던 속도의 절반 정도?

    "재미있군."

    인간의 능력이라는 것도 효율적으로 사용하게 되면 꽤나 쓸모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이야 인간들도 그 힘에 익숙하지 않아 미약하기 그지없는 수준에 머무르고 있지만 말이다.

    이 힘을 제대로 발휘할 수만 있으면 마왕들도 긴장해야 할지 모른다.

    '이 힘을 제대로 사용하게 되는 데만 몇 세대가 흘러야겠지.'

    안타까운 것은 인간에게 그러한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수명이 짧은 그들은 다음 세대에게 힘을 전수하는 데만 해도 한세월이 걸린다. 비효율적이다.

    그리고 아무리 마왕들이 느긋하다고는 하나 이 세계를 정복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릴 리가 없었다. 이제는 곧 이 세계로 본격적인 진군이 시작될 것이다.

    아마 아락시스가 지금 벌이고 있는 일이 그 도화선이 될 것이다.

    아니, 축포라고 해야 하나?

    아락시스가 낄낄 웃으며 아래를 바라보았다.

    "고생이 많군, 아흔아홉 번째 마왕이여."

    아락시스는 바닥에서 그가 있는 쪽을 노려보고 있는 이지혁을 보며 혀를 찼다.

    그 강대한 마력은 모두 어디다 갖다 버리고 찔끔찔끔 마나를 모으고 있는 꼴이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인간이라는 종족의 한계인가."

    이지혁이 지금 모으고 있는 마력도 무시할 정도는 아니었다. 베라프의 아크 메이지라 해도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의 마력을 모으고 있는 중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것조차 안타까운 일이었다.

    마왕조차 경악할 수준의 마력을 마치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마음대로 다루고, 인간의 몸으로 신에게도 육박했다 할 정도의 능력을 갖추었던 과거의 아흔아홉 번째 마왕.

    그 위용을 생각한다면 지금의 이지혁은 그저 한낱 인간, 벌레와도 같은 한낱 인간에 불과했다.

    타인에 대한 안타까움을 느낄 리 없는 마족임에도 절로 아쉬움이 드는 모습이었다.

    "그렇게까지 해서 살아가고 싶은 건가, 아흔아홉 번째 마왕이여?"

    만약 아락시스가 지금의 힘을 잃고 저런 모습이 되었다면, 그 상실감을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지혁은 저런 모습이 되어버린 후에도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 그와 마계에 대항하려 하고 있었다.

    그것은 어쩌면 인간의 저력.

    한없이 슬픈 인간의 모습이었다.

    "그 벌레 같은 목숨을 끊어주지."

    이지혁이 뭔가 중얼거렸다. 비록 먼 거리이긴 하지만, 기이할 정도로 높은 마왕의 청력은 이지혁의 말을 토씨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누가 누구더러 벌레라는 거야, 이 벌레 새끼가."

    "큭큭큭큭."

    그래야지.

    그래야 아흔아홉 번째 마왕이지.

    자신의 육체를 자꾸 제약하려 드는 능력들을 떨쳐 내면서 아락시스가 양손을 들어 올렸다.

    인간의 무기로 이지혁을 벌하는 것 역시 운치 있는 일이지만, 그의 미학에 반하는 일이었다.

    아무래도 이지혁쯤 되는 인간이라면 그의 손으로 직접 보내주는 것이 순리 아니겠는가.

    "후우우우……."

    그의 양손으로 마력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어둡고 검게 타오르는, 불꽃같은 마력들이 하늘로 충천했다.

    "자, 받아보라고, 아흔아홉 번째 마왕이여. 이 정도로 죽지는 않겠지?"

    콰아아아아아아!

    아락시스가 쏘아낸 마력이 마치 레이저 빔처럼 이지혁이 있는 곳으로 날아들었다.

    * * *

    이지혁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선공.

    전혀 예상하지 못한 선공이다.

    "품위도 없이."

    이지혁이 이를 갈고는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지금 이곳에서 저걸 막아낼 수 있는 사람은 그와 알파 정도. 알파 역시 확실하게 막아낼 수 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지혁이 막아내야 한다.

    '하지만…….'

    자신은 더 이상 무한한 마력을 가진 존재가 아니다. 지금 그가 쓰고 있는 마나. 성향이 없는 뉴트럴한 마나의 경우, 흑마력보다 모으는 데 시간이 훨씬 더 걸린다. 육체에 가득 채운 마나를 모두 활용한다 하더라도 아락시스를 떨궈낼 수 있다 확신할 수 없는 노릇이니, 방어에 그 마나를 낭비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손 놓고 있자니 남는 건 죽음뿐 아닌가.

    "알파!"

    이지혁이 소리를 높이자, 알파가 멍한 얼굴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에이, 설마……."

    "막아!"

    "하……."

    알파가 어이없다는 눈으로 이지혁을 한 번 돌아보고는 인상을 쓰며 앞으로 나섰다.

    "이거, 추가 수당은 주는 겁니까? 제대로 지급 안 해주시면 노동부에 신고할 겁니다."

    "그 아가리만큼만 일해주면 연봉은 얼마든지 주지."

    "크, 이런 감사할 데가."

    입은 청산유수처럼 움직이고 있지만, 알파의 얼굴 역시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날아드는 저 빛줄기에 담긴 힘이 얼마나 강대한지는 알고 싶지 않아도 너무 잘 알 수 있었다.

    '막을 수 있나?'

    막아내야 한다.

    알파가 이를 악물고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여유가 조금만 더 있다면 어떻게 게이트를 활용해 보겠지만, 아직 그의 능력으로는 저만한 출력을 감당할 수 없었다. 이지혁에게 마력에 대해 더 배운다면 모르겠지만.

    "제기랄!"

    다른 수가 없다면 몸으로 부딪치는 수밖에.

    알파의 육체에서 흘러나온 푸른 에테르가 그의 육체 주위에 일곱 개의 사람 머리만 한 공을 만들어냈다. 에테르의 집약체라고 할 수 있는 공을 말이다.

    "이거, 아무리 봐도 손해 보는 건데……."

    알파가 양다리를 바닥에 박아 넣듯 고정하더니, 양손을 앞으로 쭈욱 내밀었다.

    일곱 개의 에테르 볼이 진형을 갖춘다 싶더니, 서로의 에테르를 교환하며 커다랗고 투명한 방패를 만들어냈다.

    "으아아아아아아!"

    그리고 그 순간, 알파가 만들어낸 방패에 아락시스가 뿜어낸 마력이 정면으로 충돌했다.

    "꺄아아아아아아악!"

    바닥에 통째로 뜯겨 날아갈 듯 요동친다. 하늘과 땅이 뒤집어지는 것 같은 충격에 서아영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굴렀다.

    '막았나?'

    이성이 돌아오자 첫 번째로 든 생각은 그녀가 살아 있다는 것이었다. 그 말인즉, 마력이 그녀를 휩쓸고 지나가지 않았다는 건데…….

    고개를 들어 상황을 살피니 여전히 알파가 에테르 방패로 끝없이 밀려오는 마력의 섬광을 막아내고 있었다.

    콰아아아아아아!

    비스듬히 기울인 방패로 날아드는 마력을 허공으로 튕겨내고 있던 알파가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 제기랄! 이거 오래 못 버팁니다! 못 버틴다구요!"

    "알았으니 닥쳐!"

    이지혁이 신경질적으로 소리치고는 양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막아?"

    아락시스의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지더니 섬광의 출력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 * *

    이지혁에게 막혔다면 이리 화가 나지는 않을 것이다. 이지혁을 죽이려고 한 일격이 아니었으니까. 적당히 자신의 무력감을 느끼며 절망할 수 있도록 위력을 조절한 일격이었다.

    하지만 그 일격을 막아낸 이가 이지혁이 아니라 다른 이라면 말이 달라진다.

    아락시스는 분노에 차 마력을 증가시켰다.

    일순간에 마력을 집중시켜 날려 버릴 수도 있겠지만, 그건 아락시스의 미학에 어긋났다.

    물에 빠진 벌레가 가라앉기를 기다리듯이 아락시스는 아주 천천히 마력량을 늘려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우드드득.

    섬뜩한 소리와 함께 알파의 팔이 기괴한 방향으로 꺾였다.

    "아이고! 저 죽는다구요!"

    저 주둥아리만 어떻게 하면 참 비장해 보일 텐데 말이다.

    인류의 최전선에서 마왕을 상대하고 있는 용사로 보기에 알파는 과도할 정도로 경박하고 솔직했다.

    "어떻게 좀 해주세요! 이 정도면 된 거 아닙니까! 초과 수당을 한참 받아도 수지타산이 안 맞는다구요! 노동부에 제소할……."

    "거참, 말 많네."

    이지혁이 눈살을 찌푸렸다.

    애초에 알파는 저런 거나 막으라고 데리다 놓은 것이 아니었다. 확실하게 마왕의 움직임을 봉쇄하라고 데려다 놓은 건데, 방패막이나 하고 있으…….

    "응?"

    이지혁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생각해 보니 아무리 마왕이 날고 기는 재주가 있어도 제자리서 저만한 마력을 발출하는 와중에 이동을 하지는 못할 것 같은데?

    사람이 풀스윙을 하면서 이동할 수 없듯이 말이다.

    "오호라?"

    방법은 다르지만,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나름 목적을 달성한 알파였다. 그리고 이지혁은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이지혁의 육체에서 마나가 부풀어 오른다. 순간, 정신을 잃을 것 같은 아찔한 고통이 느껴졌지만, 혀를 깨물어 아득해지는 의식을 되살렸다.

    '진짜 장난 아니네.'

    고통에는 세상 누구보다도 익숙하다고 자부할 수 있는 이지혁이지만, 최근에 그가 느끼고 있는 고통은 그런 그마저도 학을 뗄 만큼 강렬했다.

    하지만 우는소리를 할 수는 없다.

    이지혁은 전신의 마나를 양손으로 끌어모았다. 마나가 이동하는 통로를 따라서 고통이 전염되어 왔다.

    "못해 먹겠네."

    "진짜 못해 먹겠는 건 이쪽이란 말입니다! 어떻게 좀 해주세요!"

    이지혁은 알파의 말을 무시하고는 허공에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거도 생각해 보면 비효율적이란 말이야.'

    숨을 쉬거나 손을 움직이는 것처럼 마나를 활용하는 마족과 다르게 인간인 이지혁은 마나를 쓰기 위해서는 반드시 법칙이 필요했다.

    이지혁의 앞에 거대한 마법진이 그려지는 모습을 본 아락시스가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호오?"

    본 적이 없는 형태의 마법진이다.

    '창조의 영역까지 들어선 건가?'

    이상할 건 없었다. 이지혁은 역사상 최강이라 할 수 있는 아크 메이지니까. 흑마법이 아니라 일반 마법이라 하더라도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지혁이 그동안 사용해 온 흑마법들은 누가 가르쳐 준 것이 아니었다. 그저 이지혁이 스스로 만들어 사용한 것들이다. 그 이전에는 이지혁처럼 흑마력을 다룰 수 있던 이가 없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

    '괴이하군.'

    아락시스는 이지혁이 만들어낸 마법진을 주시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문양의 마법진은 마나의 흐름조차도 내보이지 않고 있었다.

    마나에 대한 이해도라면 이지혁은 마왕조차 아득히 능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봤자겠지만.'

    아무리 이해도가 높고 마나를 잘 다룬다고 하더라도 본인이 다룰 수 있는 마나의 총량이 저래서야 아무 소용이 없었다.

    화신에서 끌어낼 수 있는 최대의 마나를 뽑아낸 아락시스가 마력을 날려 대자 알파의 육체가 바닥으로 틀어박히기 시작했다. 꼿꼿이 세우고는 있지만, 그 몸이 바닥을 뚫고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쿨럭!"

    알파는 더 이상 여유를 부리지 못했다. 입에서 폭포처럼 쏟아져 나오는 피가 그의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 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이지혁 씨!"

    등 뒤에서 당황한 최정훈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이지혁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직, 아직이다!

    "죽어라!"

    아락시스가 뿜어내는 마력의 섬광이 한층 더 커진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 이지혁이 알파의 앞으로 뛰어들었다.

    "해제해!"

    "큭!"

    알파가 방패를 소멸시키는 것과 동시에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지혁은 방패가 사라지는 순간, 마법진에 마나를 때려 박았다.

    "으아아아아아!"

    그와 동시에 마법진이 급격한 변화를 일으키더니, 투명한 벽 같은 것을 만들어냈다. 아락시스가 뿜어낸 섬광이 벽에 부딪친다.

    그런 후…….

    "뭐야?"

    아락시스의 얼굴에 당혹이 어렸다. 이지혁이 만들어낸 마나의 벽에 부딪친 그의 마력이 튕겨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도 정확하게 그를 향해!

    "아?"

    출력을 올려 짓눌러 버리려고 했지만, 화신인 그의 몸은 더 이상의 마나를 만들어낼 수가 없었다.

    "이런 어이없는!"

    그가 뿜어낸 마력의 섬광이 고스란히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이지혀어어어어어억!"

    스스스슷.

    섬광에 격중된 아락시스의 육체가 재로 화했다.

    "해치웠나?"

    상황을 지켜보던 서아영이 크게 소리를 질렀다.

    "아니! 아직 미사일이 남아 있어요! 저게 더 큰 문제입니다!"

    이지혁 역시 그 사실을 잘 아는지, 지체 없이 또 하나의 마법진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으라차!"

    허공에 그려진 마법진이 거대한 게이트를 만들어낸다. 동시에 바닥으로 하강하던 미사일이 게이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후우."

    이지혁이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바로 옆에 탈진해서 골골대고 있는 알파와 마찬가지로 이지혁도 남은 힘이 없는지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최정훈이 이지혁과 알파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갔다.

    "해치운 겁니까?"

    "…뭘요?"

    "마왕! 마왕 말입니다!"

    "그거 분신 같은 거라니까."

    이지혁기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본체에는 아무 타격 없어요. 한동안 사용할 수 있는 마나량이 줄어들고 체력도 약해지긴 하겠지만, 몇 달 내로 원래대로 돌아올 거예요."

    "그럼 핵은요?"

    "이계로 날렸죠."

    "오!"

    뭔가 해결이 되었다는 느낌에 최정훈이 탄성을 질렀다.

    "다행이네요. 그럼 이제 다 끝난 거죠?"

    "여긴 끝났죠. 이제 열여섯 발 남았네요."

    "그럼 그건 어떻게 합니까?"

    "어떻게 하고 말고도 없어요. 일단 한동안은 아락시스, 그놈이 개입을 더 하지는 못할 테니까 그냥 핵미사일만 열여섯 발 남은 거죠."

    "……."

    최정훈은 이걸 좋아해야 하는지, 아닌지 애매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상황이 더 나아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열여섯 발의 핵이 남아 있는 상황이 아닌가.

    "혹시……."

    "무리."

    이지혁이 단호히 손을 저었다.

    "힘들고 자시고를 따질 시간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지만, 지금 이 상태로는 마나를 모을 수가 없어요. 모은다고 해도 그만한 마력을 사용할 수 있으려면 최소 열 시간은 지나야 하거든요."

    "으음……."

    최정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이지혁은 많은 것을 했다. 그런 이지혁에게 더 노력해 보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저 인간은 살아 있습니까?"

    "에……."

    바닥에 머리를 처박은 채 꿈틀대고 있는 알파를 본 이지혁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뭐, 죽지는 않은 것 같네요. 어이."

    "…말시키지 마십시오. 고소할 겁니다."

    이지혁이 알파의 꼴을 보고 낄낄 웃었다.

    "왜 웃습니까?"

    "나는 지금까지 싸움이 끝나고 나서 누가 나보다 더 다쳐 있는 걸 거의 못 봤거든. 근데 그걸 눈으로 보니까 그런 기분이 드네."

    "어떤 기분요?"

    "나만 아니면 돼."

    "……."

    알파가 꿈틀하더니 몸을 일으켰다. 그의 머리에서 흙먼지가 우수수 떨어졌다.

    "팔만 멀쩡했으면 진짜."

    뒤로 완전히 꺾여 있는 그의 양팔을 보니 아이가 가지고 놀다 버린 관절 인형을 보는 기분이었다.

    "그거 재생은 되겠지?"

    "그 정도야 이쪽이 알아서 합니다. 그런데… 이게 끝입니까?"

    "응."

    "그럼 미국에 날아오고 있는 핵은 어쩌구요?"

    "마왕이 돕지 않는 상황이면 요격할 수 있는 거 아냐?"

    "…말은 쉽지만."

    알파가 가만히 고심하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하나씩 있는 것 같습니다."

    "소스는?"

    "제 머릿속이죠."

    "…머릿속에서 소식을 만들어내는 것도 대단한 능력이네. 말해봐."

    "일단 좋은 소식은 다행히 사역마들은 살아 있다는 겁니다."

    "응?"

    이지혁이 이게 뭔 소리를 하느냐는 듯 알파를 바라보았다.

    "나쁜 소식은 사역마들이 살아 있다는 거죠."

    "알아듣게 좀 말해봐."

    알파가 코를 긁으려다 자신의 팔은 지금 둘 다 쓰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는 한숨을 쉬었다.

    "그 아락시스인가 하는 놈이 힘을 잃는 동시에 사역마들도 모두 힘을 잃었다면, 지금쯤 하늘을 날던 핵이 모두 바닥으로 추락했을 겁니다. 운이 좋으면 불발이 나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지금쯤 다 터졌겠죠."

    "아……."

    이지혁이 그건 생각 못했다는 듯 입을 슬며시 벌렸다.

    까딱했으면 이지혁의 손으로 지구에 핵 샤워를 쏟아부을 뻔했다.

    "나쁜 소식은?"

    "나쁜 소식도 사역마가 살아 있다는 거죠. 대충 막 떨어지지 않는 대신에 인구가 많은 도심으로 착실하게 이동하는 중일 겁니다."

    "과연."

    일리가 있다는 듯 손뼉을 친 이지혁이 대답했다.

    "좋아. 그럼 그 핵은 각국에 맡기고 우린 집에 가자."

    "…네?"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제 없어."

    "아니, 잠시만요. 이지혁 씨, 그럼 미국은요?"

    "내 알 바 아니지."

    알파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니, 우리는 여기까지 날아와서 이 고생을 하고 도와줬는데, 지금 한국은 미국을 외면하겠다는 겁니까?"

    "니가 언제부터 미국 대표였다고 외교질이야! 도움받고 싶으면 정식 외교 채널로 연락하라 그래."

    "그럼 안 올 거잖아요."

    "…잘 아네."

    "그러지 말고 이번만 좀 도와주세요. 그럼 서로 빚은 없는 걸로 하자구요."

    "뭐, 그것도 나쁘지 않지. 그럼 내가 도와주는 대신에 이번 일에 대해서는 서로 빚진 게 없는 거다?"

    "예!"

    "정해민!"

    이지혁이 크게 부르자 정해민이 요원들 사이에서 쪼르르 달려 나왔다.

    "응?"

    "집에 가자."

    "응?"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들이 모두 황당하다는 얼굴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왜? 나 마나 없다니까. 그리고 어차피 그 미사일이 미국에 도달하는 데도 열 시간 이상 걸리잖아."

    "그, 그렇죠."

    "그러니 좀 자고 온다는 거지. 참고로 내가 크리스토퍼라면 지금쯤 전투기 출격시켰을 거야. 아마 태평양 한가운데서 터지게 되겠지. 그럼 혹시나 폭파 못 시켜서 미사일이 육지에 도달할 것 같은 상황이면 전화하라고."

    이지혁이 알파를 향해 손을 흔들더니, 싱긋 웃었다.

    "가자."

    "어? 음!"

    정해민이 이지혁의 손을 잡고 텔레포트를 시전했다. 사라지는 이지혁의 모습을 보며 알파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지금 나 사기당한 거야?"

    "아니, 보스. 내 생각인데, 그냥 보스가 멍청한 것 같아."

    "그래?"

    "뭐, 매번 있던 일이니까. 우리도 가자."

    "으음."

    당황하는 알파를 보며 최정훈은 어쩌면 저 인간을 상대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 * *

    "왜 돌아가려고 하는 거죠?"

    공허한 말이다.

    돌아가는 이유 같은 건 이미 한참 전에 잊어버렸다. 이제 그에게 남아 있는 것은 돌아가겠다는 의지뿐이다.

    이유가 없는 일에서 이유를 찾는 것만큼 한심한 일은 없다.

    하지만 이 도마뱀은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합리성과 이성으로 똘똘 뭉친, 드래곤이라는 생명체는 모순투성이인 인간을 이해할 수 없으니까.

    이해시킬 필요도 없다.

    잘못된 건 이쪽이니까.

    아마도 지금 그녀가 보기에 이지혁은 죽기 위해서 온 힘을 다해 절벽으로 기어 올라가는 사람처럼 보일 것이다. 이해할 수 있을 리 없다.

    "꺼져."

    "나는 라트렐의 사도예요. 이대로 당신을 보낼 수 없다는 걸 잘 알 텐데요?"

    "그래서 나를 막겠다고?"

    "…해야 한다면."

    낮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아주 낮은 웃음. 하지만 그 웃음이 점점 커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커다란 광소가 되어 들판을 가득 메웠다.

    옆에서 지켜보자면 재미있는 광경이다.

    거대한 드래곤.

    그 길이만 해도 300m에 달하는 에이션트 드래곤 앞에 너무도 작아 마치 벌레처럼 느껴지는 이지혁이 서 있다.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지혁도, 아펠드리체도 알고 있다.

    대화도, 상황도…….

    그 모든 주도권은 이미 이지혁에게 있음을 말이다.

    "너는 나를 막아왔지. 천 년, 이천 년… 지금에 와서는 얼마나 되는 세월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

    "마지막까지 그 의지를 관철하겠다는 의기는 높이 사지, 어쩌면 불행한 자여. 스스로는 이성적이라 생각하지만, 신의 뜻에는 그 이성을 사용하지도 못하는 불쌍한 생명체여."

    순간, 아펠드리체의 입가에서 낮은 불꽃이 일었다. 이지혁의 말은 확실히 그녀를 거슬리게 만들고 있었다.

    "무엇을 묻고 무엇을 알려 하는가. 너의 의지는 어차피 라트렐에게 종속되어 있는 것.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려 하지 않는데, 네게 이성이란 것은 무슨 의미가 있지? 너는 네 자신이 아닌 다른 곳에서 답을 구하려 하지 않는가."

    "나는!"

    아펠드리체가 소리쳤다.

    "당신을 막아선 것은 내 의지예요."

    "어째서?"

    이지혁이 피식 웃었다.

    "너는 나를 막을 이유가 없다. 왜냐면 나를 막아야 하는 이유는 실체가 없기 때문이지."

    "……."

    "네가 나를 막아서는 이유는 라트렐이 나를 이 세상에 멸망을 가져올 자라 말했기 때문이다. 모든 이유와 근거는 그것뿐이지. 그 망상 같은 말을 듣고 따르는 주제에 지금 의지라는 말을 쓰고 있는 건가? 단 한 번도 네 의지로 살아본 적 없는, 병신 같은 도마뱀 년이?"

    이지혁의 말투는 가면 갈수록 거칠어져 갔다.

    "적어도 네가 그동안 나를 막아온 것에는 뭔가 이유가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게 그 병신 같은 신탁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화도 안 나더군. 정말 필요할 때는 신에게 결정을 맡겨 버리는 것들이 인간을 하등 종족쯤이라 여기고 살았다는 거잖아. 이 빌어먹을 도마뱀 년아, 인간에게는 자유의지라는 게 있다고. 네가 얼마나 잘났다고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건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어."

    이지혁이 히죽 웃었다.

    "왜 돌아가려고 하냐고?"

    물어 뭐하는가, 답이야 빤한데.

    이유는 존재하지 않지만 답은 있다.

    "내가 돌아가고 싶으니까."

    스스로의 의지가 아니라 법칙으로 살아가는 드래곤은 절대 이해하지 못하겠지.

    이지혁은 가볍게 웃으며 아펠드리체의 코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러니까 꺼져. 인간은 변덕스러운 존재거든. 내게 있어서 너는 언제나 증오스럽기 짝이 없는 적이었다. 하지만 인간은 미운 정이란 것도 있어서 말이야. 적어도 지금 내 손으로 너를 쳐 죽이고 싶지는 않으니, 순순히 물러난다면 그 가치 없는 목숨은 붙여놓도록 할 테니까."

    아펠드리체가 황금색 눈동자로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눈앞의 이 미약해 보이는 생명체가 마음만 먹으면 1초도 걸리지 않아서 그녀를 찢어발길 수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자를 막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이 그녀가 부여받은 임무이고, 신탁이었다.

    하나…….

    '어째서 막아야 하는가.'

    의문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이지혁에게 라트렐의 눈이 들어가면 안 된다. 그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왜 들어가서는 안 되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녀의 신은 언제나 해야 할 일을 알려줄 뿐, 설명해 주지 않는 존재였으니까.

    그렇다면…….

    신의 완전성에 기대 이유조차 알지 못하는 일을 그저 믿고 따라야 하는 것인가? 아무런 의심도 의문도 없이?

    아펠드리체의 몸이 황금색의 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녀의 육체가 점점 줄어들더니, 인간의 형상으로 화해 이지혁의 앞에 나타났다.

    "인간의 몸으로 폴리모프하는 것은 네가 가장 경멸하는 일 아니었나?"

    "…마지막일 테니 서비스라고 해두죠."

    아펠드리체가 가만히 이지혁을 보며 말했다.

    "가세요."

    "흠?"

    전혀 의외의 말이 흘러나오자 이지혁이 조금 당황한 눈으로 아펠드리체를 바라보았다.

    "가라고?"

    "예. 가세요."

    "라트렐의 의지를 어기겠다는 건가?"

    "글쎄요. 모르겠어요. 이게 과연 그분의 의지를 어기는 건지, 아니면 더 큰 뜻으로 그분의 의지를 받드는 건지 말이에요."

    "알 수 없는 소릴 하는군."

    "당신은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마음을 바꾸지 않겠죠.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이별하게 되겠죠. 나의 죽음이라는 형태로."

    "……."

    "하지만 제가 그분께 받은 명에는 당신을 감시하라는 것도 있어요. 감시는 목숨이 붙어 있어야 할 수 있는 거죠."

    "큭큭큭큭."

    이지혁이 낮게 웃었다.

    이건 거의 치팅인데?

    "궤변 좋군. 그 궤변을 라트렐도 이해해 줬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이지혁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옆을 스치고 지나가는 이지혁을 아펠드리체가 잡았다.

    "하나 물어도 되나요?"

    "…이쪽도 서비스하지."

    "당신의 세계로 돌아가면 뭘 하고 싶은 거죠?"

    "믿을지 안 믿을지는 네 자유지만 말이야……."

    이지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런 거 없어."

    아펠드리체는 여전히 알 수 없다는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이지혁은 더 이상은 대답해 주지 않고 그저 걸어갔다.

    이해할 수 없겠지.

    이해할 수 없을 거야.

    나도 나를 이해 못하겠는데, 네가 나를 어떻게 이해하겠어.

    이지혁의 눈에 저 멀리 첨탑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첨탑의 꼭대기에는 이지혁이 가장 원하는 것이 존재하고 있었다.

    라트렐의 눈.

    테라 라트렐에 멸망의 좌가 강림하는 순간이었다.

    * * *

    "끄으으으으."

    이지혁은 전신을 뒤틀었다.

    억지로라도 자려고 했지만, 잠에 들 수가 없다.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눕는 그 순간부터 그의 육체가 조금씩 뒤틀리기 시작했다. 이불을 부여잡고 신음하던 이지혁이 끝내 몸을 일으키고는 거칠게 얼굴을 훔쳤다.

    "빌어먹을."

    이러다가 약이라도 먹어야 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고통이 조금도 가시지 않고 있었다.

    '한계야.'

    다른 사람이라면 이미 천 번은 더 죽었을 것이다. 그만큼이나 이지혁의 육체는 한계에 달해 있었다. 단순히 고통의 문제가 아니라 육체 자체가 더 이상은 현상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담배를 꺼내 입에 문 이지혁이 힘겹게 불을 붙였다.

    "매우 엿 같은데."

    "동감이에요."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이지혁은 몸을 돌리지 않았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누구인지 알고 있으니까.

    자신의 목을 부드럽게 감싸 안는 손길이 느껴진다.

    "치료 좀 해봐."

    "이젠 불가능하다는 거, 당신도 알고 있죠?"

    "고통이야 좀 가시겠지."

    아펠드리체는 자신의 팔 안에서 떨고 있는 이지혁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서럽거나 두려워서 떠는 것이 아니다. 그저 고통이 너무 극심해서 몸이 절로 떨리고 있는 것이다. 마약성 진통제도 듣지 않는 말기 암환자처럼 이지혁은 하루하루 버틸 수 없는 고통을 감내하고 있었다.

    "다른 방법도 있어요."

    "이젠 없어."

    "방법은 언제나 있어요."

    아펠드리체의 양손에서 새하얀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빛이 이지혁의 육체 안으로 파고든다.

    '안 좋아.'

    힐을 시전하고 있지만, 육체가 복원될 기미가 전혀 없었다. 치료 마법이라는 것은 외부의 마나를 바탕으로 인간의 회복력을 극대화시키는 마법이다.

    하지만 이지혁의 몸은 지금 밑 빠진 독과 같았다. 아무리 물을 퍼붓고 퍼부어도 빠져나가기만 할 뿐, 물이 차오르지 않는다. 생명력이 바짝 말라 버린 이지혁의 육체는 아펠드리체의 마법으로도 복원하지 못하고 있었다.

    "좀 낫군."

    하지만 고통을 줄여주는 효과는 있었는지, 이지혁의 입에서 낮은 탄식이 새어 나왔다.

    "얼마나 남았지?"

    "…정말 듣고 싶어요?"

    "물론이지."

    아펠드리체의 몸이 살짝 떨려왔다.

    이 남자는 언제나 이런 식이다.

    언제나 감당하지 못할 고통을 겪고 있으면서도 태연한 척,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행동하고 움직인다.

    그 모습이 하나의 존재로서의 완전성을 의미한다고 생각될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자는 타인, 다른 생명에게 자신을 맡기지 못한다.

    홀로 온전히 감당해야 하는 존재.

    '그토록 혐오하던 존재.'

    드래곤. 마족.

    불멸에 가까운 시간을 살아가면서 외부가 아닌 스스로에게서 해답을 찾는 존재들.

    이지혁이 가장 경멸하는 존재들이건만, 지금 이지혁은 그들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너무도 오랜 세월을 살아왔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말이다.

    "…모르겠어요."

    "몰라?"

    "내일, 아니, 오늘 당장이라도 숨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아요. 사실 지금 당신이 대체 어떻게 살아 있는 건지도 이해가 안 갈 수준이에요."

    "엄청 무서운 말을 매우 태연하게 하는군. 반 좀비나 마찬가지라는 뜻이잖아."

    "좀비라면 차라리 나을 정도?"

    "…고맙네."

    이지혁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딜 가려는 거죠?"

    "그런 말을 들었으니 놀고 있을 수는 없지. 움직여야 해."

    "죽을 거예요."

    "어쩔 수 없지."

    "알죠? 방법이 있다는 것."

    이지혁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당신, 예전에 내게 말했었죠. 스스로 생각하고 움직이지 못하는 존재가 나 같은 존재라고."

    "그랬지."

    "내가 보기에는 지금 당신도 똑같아요. 당신은 스스로 이성적으로 생각을 해서 움직이고 있다고 착각할지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에 당신은 대의에 함몰되어 있을 뿐이에요. 이 지구를 지켜야 한다는 대의에요. 그게 당신이 비웃던 신의 말씀과 뭐가 다르죠?"

    "……."

    "왜 지켜야 하는지 이유를 정확히 댈 수 있나요? 그 이유를 당신이 정말 납득하나요? 아니겠죠. 그건 이유 없이 목적만 있는 것이니까. 모르겠어요? 내가 예전에 하던 짓을 당신이 그대로 쫓고 있는 거예요. 당신에게는 이 세계를 지켜야 할 이유도, 이 세계와 함께 산화해야 할 이유도 없어요."

    낮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지혁이 얼굴을 주무르자 아펠드리체가 그녀답지 않게 힘 빠진 어투로 말했다.

    "인간이면 인간답게 당신 스스로를 걱정하라구요. 모든 인간이 자신이 최우선인 것 아니었어요? 지구고 뭐고 당신에겐 딱히 의미도 없잖아. 아니에요? 이 세계가 소중하다는 말 따위는 집어치워요. 그럴 리가 없으니까!"

    아펠드리체의 눈에 독기가 차올랐다.

    * * *

    "당신도 알고 있겠죠? 당신이 이 지구를 생각만큼 소중히 여기고 있지 않다는 걸 말이에요."

    "……."

    "당연한 일이죠. 당신에게 있어서 이 세계란 그저 잠시 스쳐 지나온 세계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당신은 베라프 인이에요. 이젠 그걸 인정해야 하지 않나요? 처음 지구로 돌아왔을 때 느낀, 그 꿈같은 감정은 이미 다 사라졌을 텐데?"

    "그렇지."

    부정하지 않는다. 아니, 부정할 수가 없다.

    그녀가 말하는 내용이 모두 맞다는 것은 다른 누구보다 이지혁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지구로 돌아오기만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긋지긋한 인연의 끈은 그를 결코 놓아주지 않았다.

    '아니, 놓아주지 않은 게 아니지.'

    그건 풀 수 없는 것이었다.

    몇 천 년을 이어온 인연과 악연이 지구로 돌아온다고 해서 없던 것처럼 사라질 리는 없으니까.

    처음 지구로 돌아와 느낀 해방감과 행복감도 이제는 무뎌질 대로 무뎌졌다.

    그럼 알게 된다.

    이십 년을 살아온 세상과 수천 년을 살아온 세상.

    그가 속해 있는 곳이 어디인지를.

    이방인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지구로 돌아왔건만, 그는 여전히 이방인인 것이다.

    "지구에 의미를 두는 것은 당신의 미련일 뿐이에요."

    "알아."

    "지금이라도 원한다면 베라프로 돌아갈 수 있어요. 그곳이라면 당신의 힘을 되찾을 수 있어요. 그렇다면 그런 육체의 손상쯤이야 순식간에 복구할 수 있겠죠."

    "그럴지도 모르지."

    "그런데 뭘 망설이는 거죠? 세계는 이미 균열이 갔어요. 당신이 원한다면 수백 명의 사람을 이주시키는 것도 어렵지 않아요. 그런데 왜 이곳에서 망설이고 있는 거죠?"

    이지혁이 피식 웃었다.

    "그에 대해 몇 번이나 설명한 것 같은데."

    "이해를 못하겠으니까."

    "이해를 바라지도 않아."

    이지혁이 눈을 찌푸렸다.

    "그리고 한 가지는 틀렸어."

    "틀렸다구요?"

    "내가 그 세계에서 불사신일 수 있는 것은 이 지구가 무너지지 않았을 때지. 지구에 내 영혼을 고정하고 넘어갈 수 있었으니까."

    "아……."

    "지구가 멸망하면 내 영혼도 사라진다. 그리고……."

    이지혁이 낮게 한숨을 쉬었다.

    "지금 넘어가면 내 육체는 지금 상태로 고정돼. 그렇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나아."

    아펠드리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지만 흑마력만 있으면……."

    "나는 신의 힘에 도달했다 불린 마도사야."

    이지혁이 씁쓸히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결코 신은 아니지. 할 수 없는 건 할 수 없는 거야. 불가능한 일에 매달릴 생각은 없어."

    "당신은……."

    "그만하자고, 아펠드리체."

    "……."

    "이런 말 하긴 머쓱하지만, 나는 고집쟁이야. 아무리 누가 뭐라고 한다고 해서 생각을 바꾸거나 할 일은 없지. 그러니 사람 너무 불편하게 만들지 말라고."

    "구제불능이네요, 당신."

    "그렇지?"

    이지혁이 가만히 웃으며 아펠드리체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손을 뻗어 그녀를 잡아 당겨 끌어안았다. 아펠드리체는 순간적으로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지혁을 밀어내거나 하지는 않았다.

    "생각해 보면 내 인생에서 가장 오래 함께한 사람은 너였지."

    "지금이라도 알아주니 고맙다고 해야 하나요?"

    "이상하네. 내 머릿속의 너는 항상 강아지 같았는데, 오늘은 좀 고양이 같군."

    "인간이 변하듯 드래곤도 변해요. 특히나 나 같은 드래곤은요."

    "아쉬운 일일지도."

    이지혁이 가만히 아펠드리체의 등을 쓸어내렸다.

    "너와는 악연뿐이었지."

    "……."

    "그래도 언젠가는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고마워, 아펠드리체."

    "당신……."

    아펠드리체가 뭔가 말을 하기 전에 이지혁은 그녀를 밀어냈다. 그러고는 다시금 쿨한 얼굴로 돌아가 말했다.

    "그럼."

    손을 흔든 이지혁이 밖으로 나갔다. 아펠드리체는 차마 그를 쫓아 나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왜 다시는 보지 못할 것처럼 말하는 거예요.'

    * * *

    "떨어졌다구요?"

    "네."

    침통한 어조로 대답을 하는 최정훈이었다.

    이지혁은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방어 체계도 무력화시켰고, 속도도 개미 기어가는 속도로 날아가는 탄두인데… 그걸 못 막았다고?"

    "…안타까운 사실이지만, 이지혁 씨의 생각과는 다르게 세계는 고르게 발전하는 곳이 아닙니다. 막아낼 수 있는 곳이 있고, 막을 수 없는 곳이 있죠."

    "그래서 몇 발이나 떨어진 건데요?"

    "다섯 발입니다."

    "위치는?"

    "인도, 아프리카, 유럽, 러시아."

    "왜 네 곳이에요?"

    "아프리카에 두 발 떨어졌거든요."

    "피해는?"

    최정훈이 침중한 어조로 대답했다.

    "예상보다 피해는 크지 않은… 아니, 모르겠습니다. 집계가 안 돼요. 러시아는 사람이 없는 쪽으로 떨어져서 별일 없는데, 뉴델리와 아프리카에 떨어진 탄으로 얼마나 죽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유럽은?"

    "터키 쪽으로 떨어졌습니다."

    "됐어요. 그만 들을래요."

    이지혁이 낮게 한숨을 쉬었다.

    그가 깨어 있었다고 해도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마나가 없는 이지혁은 S급 능력자만도 못하다. S급 능력자를 수십 명은 보유하고 있을 인도와 유럽에서 막아내지 못했다면, 그 역시 막을 수 없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속이 부글거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알파는요?"

    "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이지혁 씨의 예상대로 미국은 두 발의 핵을 태평양에서 요격했습니다."

    "미국처럼 했으면 안 되나요?"

    "예상 이상으로 괴조의 힘이 강했습니다. 본체에 타격이 있었으니 괴조도 나약해졌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일반적인 전투기나 미사일로는 타격이 어려웠습니다."

    "음……."

    이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막기 싫어서 막지 않았을 리는 없으니까.

    "…여파는요?"

    "끔찍합니다."

    최정훈조차 아연한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중국과 인도, 그리고 터키까지 마비되었다고 봐야 합니다. 특히나 중국이 무력화되면서 동아시아에 출현한 두 개의 스팟에 대한 통제권이 완전히 날아갔다고 해도 좋을 정도입니다. 더는……."

    "못 막겠지."

    "예."

    이지혁이 담배를 꺼내 물었다.

    "윗대가리들은 뭐래요?"

    "…딱히 방법이 있을 리가 없잖습니까."

    "그도 그렇겠네요."

    이지혁은 가만히 담배를 빨아들였다.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

    "알파에게 연락해요."

    "알파에게 말입니까? 뭘 하시려구요?"

    "원하는 걸 줘야죠."

    "…이지혁 씨."

    "그만. 거기까지만 해요."

    이지혁은 더는 들을 필요가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는 알겠지만, 이젠 더 시간이 없어요. 이제 곧 정찰을 마친 놈들이 몰려나오기 시작할 거예요."

    "그럼 우리 쪽도 같이 가겠습니다."

    "…안 가려고 했어요?"

    "솔직히 좀 고민하긴 했습니다. 그놈들은 이지혁 씨 밑에서 안 굴러봐서 그리 쉽게 배운다는 말을 하는 거죠."

    "알파가 미국에 훈련 장소를 섭외해 놨다고 하니까, 거기로 가죠. 지원자 뽑아줘요."

    "지원자를 뽑으면 아무도 안 갈 겁니다."

    "헐……."

    "하지만 가자고 하면 모두가 가겠죠. 그런 인간들입니다."

    "…그랬죠."

    이지혁은 씁쓸하게 웃었다.

    '재미는 있었어.'

    NDF 때문에 온갖 고생을 하기도 했지만, NDF 때문에 재미도 많았다. 잃은 것과 얻은 것을 비교하자면, 얻은 것이 더 많다고 해야 할 것이다.

    "쓸데없이 시간 끌지 말죠. 전원 집합시키고 미국으로 넘어가요. 지금 당장."

    "라져!"

    최정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하는 최정훈을 보며 이지혁은 씁쓸한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하늘이 맑네.'

    지구에 돌아와서는 좀처럼 볼 수 없던 맑은 하늘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 *

    "갈 거야?"

    "네."

    "흠, 이런 위기 상황에 혼자만 살겠다고 도망가다니. 드래곤이라는 건 내 생각보다 뼈대가 약한 생물이었던 모양이군."

    "도망가는 게 아닙니다."

    아펠드리체가 확고한 의지를 담은 눈으로 에르카나를 응시했다.

    "여기서는 더 이상 희망이 없어요. 그럼 다른 곳에서 방법을 찾아봐야죠."

    "그래, 그게 맞는 말이겠지. 드래곤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말이야……."

    에르카나가 고혹적으로 웃으며 아펠드리체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그녀의 목을 움켜잡았다.

    "네가 무슨 속셈인지는 모르겠지만, 너희 뜻대로 풀리지는 않을 거야. 영악한 도마뱀. 나는 달링처럼 순진하지 않아서 네가 그저 순수한 뜻으로 이 세계로 넘어왔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달링에게 뭘 원하는 거지?"

    "그건 제가 물을 말이에요."

    "…응?"

    아펠드리체는 에르카나에게 목을 잡히고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은 되레 에르카나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당신이야말로 무슨 꿍꿍이죠? 이지혁 씨를 사랑해서 이 세계로 왔다는 말을 제가 믿을 것 같나요?"

    "안타까운 일이야. 마족이 사랑을 논하는데, 드래곤이 그걸 부정하는군. 세계가 거꾸로 돌아가."

    "나는 마족을 믿지 않아요. 특히나 당신 같은 마족을 결코 믿지 않죠."

    "피차 어차피 다른 속셈이 있다는 건가? 재미있네. 호호호호!"

    에르카나의 손톱이 아펠드리체의 목을 살짝 파고들었다.

    "내가 왜 너를 살려주는지 알아?"

    "모르죠."

    "너는 달링에게 해를 끼칠 생각이 없으니까."

    "……."

    "하지만 기억해. 아펠드리체, 멍청한 드래곤이여. 네가 달링을 위하겠다고 한 짓이 결국에는 달링의 목을 조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야."

    "제가 그렇게 멍청해 보이나요?"

    "응."

    "…충고 고맙네요."

    우우우웅.

    에르카나가 아펠드리체의 목을 놓아주자 아펠드리체가 게이트를 열었다.

    베라프로 향하는 게이트.

    "다시 뵐 거예요."

    "솔직히 나는 네 면상 따위는 다시 보고 싶지 않은데?"

    "그건 저도 마찬가지라고 해두죠."

    아펠드리체가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자 천천히 게이트가 닫혔다. 에르카나는 그 광경을 보며 나직하게 이죽거렸다.

    "건방진 년."

    드래곤이라는 것은 영 믿을 수 없는 생명체다. 언제 그들과 사이가 틀어져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이젠 한계로군."

    그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게이트가 확산되는 것을 막아내 왔지만, 이제 더 버티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지혁의 몸은 급격하게 나빠지고, 밀려드는 흑마력은 그녀의 통제를 벗어나 세상에 스팟을 늘릴 것이다.

    그러면 끝.

    세계의 멸망이 코앞에 와 있었다.

    "아아, 재미없네."

    모든 것을 걸어 시도한 행동이 무위로 돌아가는 것은 역시나 유쾌하지 못한 일이다.

    "…죽기 전에 바로 언데드로 만들면 이성은 유지할 수 있을까?"

    안 되겠지.

    그것 역시 죽음이니까.

    어떤 방법으로도 이지혁의 죽음을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한 에르카나의 어깨가 축 처졌다.

    "아직 아니야. 아직은 포기할 때가 아니야. 방법은 언제든 있어."

    "아니, 이제 그 방법은 없어."

    에르카나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녀의 등 뒤에서 들린 목소리는 너무도 익숙한 이의 것이었다. 덜덜 떨리는 몸을 애써 돌리자 그곳에는 그녀가 아는 가장 강대한 존재가 자리하고 있었다.

    "내가 왔으니까."

    에르카나의 다리에서 힘이 풀렸다.

    세계 멸망의 초읽기가 시작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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