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86화 (86/118)
  • [■] 제가 이지혁을 만나보겠습니다 [■]

    ─────

    - 그건 또 무슨 참신한 개소리야?

    "말 그대로입니다. 쓰촨성에 핵무기가 다량으로 투하되었을 경우에 한국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되는지를 확인해야 한다구요."

    - 어느 미친 곳에서 중국에 핵무기를 쏘겠어? 같이 죽자는 것도 아니고.

    "중국이요."

    - 썩을.

    그 이상의 설명은 필요하지 않은 듯했다. 하기야 일일이 모든 상황을 설명 들어야 할 정도의 머리라면 국방부 장관이라는 직위까지 올라올 수도 없었겠지.

    - 잠깐만, 잠깐만. 그러니까… 마왕군에게 핵 샤워를 날리겠다는 건가?

    "아마도 그런 것 같습니다."

    - 합리적이군.

    다짜고짜 욕설부터 날아올 줄 알았는데, 꽤나 온건한 반응이었다. 국방부 장관이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

    - 산개 작전이 벌어지고 있는 줄은 알았지만, 그런 식으로 움직일 것이라고는 생각을 못했는데……. 아니, 당연히 생각을 했어야 하는 일인데, 왜 그리 생각을 못했지? 제길.

    "진정하시죠."

    - 일단 정보를 좀 더 받아내는 동시에 보고부터 해야겠네. 자네가 원하는 자료 역시 빠른 시일 내로 넘겨주지. 하지만 그 부분에 있어서는 크게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거야. 우리 쪽에 큰 문제가 생길 지경이라면 북경은 죽음의 땅이 될 테니까.

    "…예."

    최정훈은 낮게 한숨을 쉬었다.

    국방부 장관의 말이 맞다. 핵무기의 영향력은 원형으로 퍼져 나간다. 그게 방사능이 되었든, 뭐가 되었든 말이다.

    직선거리로 보았을 때, 쓰촨성에서 터진 핵무기가 한반도에 괴멸적인 영향을 준다면, 중국 땅 전체가 죽음의 대지가 될 것이다. 아무리 중국이 과격하다고 해도 동반 자살을 시도하지는 않을 테니, 그렇게까지 불안해할 필요는 없었다.

    - 일단 나중에 연락하지.

    "예."

    전화가 끊어지자 이지혁이 뚱한 얼굴로 물었다.

    "뭐래요?"

    "한국보다 중국이 피해가 더 클 테니, 그리 과하게는 하지 않을 거라고 하십니다."

    "뭐, 그야 당연한 거지만."

    "…그런데 진짜 핵무기를 쓸까요?"

    "안 쓸 이유도 없지 않아요? 어차피 못 막는데, 쓸 수 있는 방법은 모조리 써봐야죠. 저는 엄청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데."

    "통합니까?"

    "흐음……."

    이지혁이 볼을 긁었다.

    "사람들은 보통 강함의 개념을 좀 혼동하는 경향이 있더라구요."

    "네?"

    "확실히 마왕은 핵무기보다 강해요. 그런데 그게 핵무기를 맞아도 버틴다는 뜻은 아니거든요."

    "이해가 잘 안 가는데?"

    "총을 든 두 사람이 있다고 쳐요. 그 두 사람이 붙으면 총을 더 잘 쏘는 사람이 이기겠죠.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이긴 사람은 총을 맞아도 안 죽는 건 아니잖아요."

    "아……."

    "마왕은 압도적인 공격력과 방어력을 갖추고 있어요. 그런데 그 육체 자체가 핵무기를 이겨낼 정도로 강하지는 않아요. 핵심은 마력 방어를 뚫고 그 육체에 직접 타격을 줄 수 있느냐의 문제인데……."

    이지혁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그냥 핵을 날리는 단편적인 방법으로는 그게 안 될 것 같다는 말이죠. 마수들이야 전멸하겠지만, 마왕은 못 잡을 것 같은데?"

    "으음……."

    "그래도 뭐, 강대국들이 마왕이나 마수에 대한 연구를 게을리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우리가 모르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요?"

    "인간을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것 같습니다만?"

    "…그럼 어쩔 수 없는 거죠."

    이지혁의 시선도 서쪽으로 향했다.

    '늦어.'

    마족들의 진격이 그의 예상 이상으로 늦었다. 다른 시간을 살아가는 그들이니만큼 느긋하리란 것은 예상했지만, 이렇게까지 느긋할 줄은 몰랐다.

    "이지혁 씨도 이제 바쁘시겠네요."

    분위기가 무거워진 듯하자 최정훈이 말을 돌렸다.

    "왜요?"

    "마법을 가르쳐야 하지 않습니까? 알파와 그 일당 놈들에게 말입니다."

    "…안 그래도 그거 말인데요……."

    "예."

    "이왕 가르치는 김에 다들 같이 배워보는 건 어때요?"

    "우리두요?"

    "애초에 최정훈 씨도 마법 배웠잖아요. 단기 속성 과정이긴 하지만. 이제 마나도 넘치는데, 쓸 수 있지 않나요?"

    "어?"

    최정훈의 표정이 멍해졌다. 그러고 보니 그도 마법을 배운 적이 있었다.

    '다 가르쳐 주고는 '이제 너도 마법을 쓸 수 있다. 그런데 마나가 없으니 지구에서는 못 쓴다'라고 해서 물어뜯어 버리고 싶더랬지.'

    다 이때를 생각하고 가르친 큰 뜻…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뒷발로 소 잡은 격으로 최정훈도 마법을 쓸 수 있게 되기는 했다.

    "다 까먹었는데요?"

    "한 삼일 얻어맞다 보면 다시 생각날 텐데?"

    "혼자서 필사적으로 되살려 보겠습니다."

    "좋은 자세예요."

    최정훈이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러려고 시작한 이야기가 아닌 것 같은데,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알파 쪽과 같이 훈련을 한다 치면 트러블이 발생하지 않겠습니까?"

    "지금이 트러블 따질 땐가요?"

    "아니죠."

    "그럼 해야죠."

    "음……."

    최정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지혁의 말이 맞다. 지금은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할 때다. 이런저런 원한이고 뭐고 다 접어두고 인류를 위해서 움직여야 할 시간인 것이다.

    '문제는 이쪽 인간들도 그런 대인배가 아니라는 건데…….'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게 더 이상했다.

    당장 서아영이 알파나 정민성, 박성찬과 대면한다면 10초 내에 불덩어리를 갈겨 버릴 거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인류의 멸망을 결정짓는 대전이 인간과 마족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벌어지게 될 것이다. 아이러니하지만 말이다.

    RRRRR.

    그때, 이지혁의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흐음."

    이지혁이 액정을 슬쩍 보더니, 무음으로 바꾸고는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여하튼 준비해 주세요. 아무래도 걔들에게만 가르치는 건 좀 찝찝하니까. 그리고 크리스토퍼한테 이야기해서 미국 놈들 중에서도 가르쳐야 할 애들 있으면 뽑아서 보내라고 해요."

    그 크리스토퍼는 지금 당신을 실험용 생쥐로 쓰려고 하는 상황입니다만?

    입이 간질거리지만, 차마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이 이리 고통스러울 줄이야.

    "알겠습니다."

    일단은 알겠다고 해야지, 뭐.

    그때, 저 뒤에서 김다현이 이지혁을 향해 달려왔다.

    "이지혁 씨!"

    다급한 그 표정을 본 최정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무슨 일이지?'

    천성이 느긋한 김다현이 저렇게 급한 얼굴을 할 정도면 보통 일이 아닐 것이다.

    "왜요?"

    "다솜이가 전화 받으래요!"

    "……."

    이 순간, 최정훈은 저 인간만은 반드시 이번 수련에 빼고 가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NDF는 처음부터 이상했는가, 아니면 이지혁 때문에 이상해졌는가.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였다.

    "에이."

    이지혁이 짜증난다는 얼굴로 전화기를 들었다. 주머니 안에 넣어둔 전화기의 액정이 계속 빛을 발하고 있었다. 아마 계속 전화를 한 모양이다.

    "왜?"

    전화를 받은 이지혁이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데이트는 뭔 놈의 데이트야! 지금 나 일하고 있는 거 몰라?"

    이지혁이 전화를 끊고는 다시 말을 시작했다.

    "여튼 그러니까 일단 일정 잡아주시고, 알파 쪽이랑 연락을 좀 해주세요."

    그러자 김다현이 미묘한 표정으로 슬그머니 다시 다가와서 최정훈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저… 최정훈 씨."

    "네?"

    "제가 이지혁 씨 몫까지 일을 할 테니까, 이지혁 씨 퇴근시켜 주시면 안 됩니까?"

    "……."

    저 인간, 저거 왜 저리됐지?

    * * *

    "핵무기요?"

    윤영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미국 측에 연락을 해보니, 미국은 이미 알고 있던 것 같습니다."

    "핵을 사용한다니. 주변국에 말도 하지 않고 핵을 쏘는 게 말이나 됩니까?"

    "말을 하지 않은 게 아닌 모양입니다. 러시아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송정수가 그 말에 혀를 차며 말했다.

    "이제는 정보 공유를 할 가치도 없다는 것이군."

    "으음……."

    윤영민이 침음을 흘렸다.

    이지혁이 힘을 잃은 이후로 그들은 한국이라는 나라의 위상이 어디까지 떨어질 수 있는가를 실감하고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위상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의 지위를 되찾아가고 있다는 것이 맞겠지만 말이다.

    과거 미국과 중국 사이에 껴 줄다리기 외교를 해야 했던 시절로 다시 회귀하고 있는 것이다.

    "…꿀은 다 빨았군."

    윤영민 역시 이지혁이라는 존재 덕분에 그가 얼마나 편하게 임기를 보내고 있었는지를 실감하고 있었다. 달라진 중국과 크리스토퍼 맥클라렌의 태도만 봐도 알 수 있다.

    저들의 말을 빌리자면, 동양의 소국이라는 입지로 돌아가 버린 것이다.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핵무기를 사용한다는 것도 알리지 않다니. 대체 어디까지 무시를 할 셈이지?"

    송정수가 이를 갈았다.

    안타깝게도 외교적으로 얻어맞은 것이나 다름없지만, 마땅히 갚아줄 방법이 없었다.

    '차라리 마왕들이 나타난 것이 다행이군.'

    지금도 이런 처지인데, 만약 마왕들이 나타나지 않은 상황에서 이지혁이 힘을 잃었다면 무슨 결과가 나왔을지 보지 않아도 빤했다.

    지금은 잠잠한 일본까지 날뛰기 시작했으면 나라 꼴이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힘이 필요해.'

    윤영민은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능력의 부족을 절감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는 명색이 일국의 대통령이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움직여 가는 조타수가 바로 그인 것이다.

    힘이 없어 나라가 설움을 받는다면 힘을 키울 수밖에 없다. 지금 당장 키울 수 있는 힘이 없다면, 남의 힘이라도 빌려야 한다.

    "총리님."

    "예, 대통령님."

    "전에 크리스토퍼가 한 제안 말입니다만."

    "예."

    "받아들이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송정수가 말없이 담배를 꺼내 물었다. 윤영민은 회의실 가운데에 놓인 재떨이의 뚜껑을 열었다.

    "안 됩니다."

    "하지만……."

    "냉정해지십시오."

    윤영민이 불만스러운 얼굴로 송정수를 바라보았다.

    "이지혁 씨에게 우리가 은혜를 입은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정치인이 아닙니까. 우리의 판단 하나하나에 국가의 운명이 달려 있습니다. 사사로운 정 때문에 판단을 그르치시는 것 아닙니까?"

    "정상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제가 아니라 대통령님이십니다."

    "예?"

    윤영민기 커진 눈으로 송정수를 바라보았다.

    "이지혁을 넘겨준다고 해서 저들이 우리를 도와줄 것이라는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되레 더 이상 얻어낼 것이 없는 태평양 건너의 소국에서 손을 떼는 것이 더 자연스럽지요. 우리가 국익을 위해서 파렴치한이 될 수 있듯이, 저들도 국익을 위해서는 약속 따위는 종잇조각처럼 찢어버릴 수 있습니다."

    "아……."

    송정수의 말이 맞았다.

    아마도 마음이 급해졌던 모양이다. 그런 기본적인 일조차 생각하지 못하다니.

    "당장 우리는 북한에 스팟을 놔두고 있습니다. 미국은 본토에 생긴 스팟도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데, 태평양 너머에 있는 평양 스팟에 힘을 기울일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미국의 도움을 기대하지 마세요. 아무리 우리의 팔이 잘려 나간다고 해도 제 손톱의 가시만큼도 신경 쓰지 않을 겁니다."

    "…그럼 우린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송정수의 눈이 낮게 가라앉았다.

    "한 번 믿고 갔으면, 끝까지 믿어야 하는 법이죠. 제가 이지혁을 만나보겠습니다."

    * * *

    "…어딜 간다고?"

    "놀이공원요."

    "얼어 뒈지겠는데 뭔 놈의 놀이공원이여!"

    "날 많이 풀렸잖아요."

    "풀려?"

    이지혁은 온통 패딩을 입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가리켰다.

    "풀렸다고?"

    "헤헤."

    김다솜이 혀를 쏙 내밀었다.

    "요즘은 놀이공원에 놀이기구 타러 가는 게 아니에요. 퍼레이드도 보고, 동물들도 보고."

    "아프리카에 데려다 줄까? 리얼한 야생 사자들이 있을 텐데."

    "에이, 그거랑은 느낌이 다르죠."

    막 김다솜의 헛소리를 응징하려는 찰나.

    "그 말이 맞기는 해. 요즘 누가 놀이공원에 놀이기구 타러 가니."

    "…줄 미친 듯이 서 있던데?"

    "가봤어?"

    "뉴스에서 봤는데."

    "아무튼 놀이기구 타러 가는 거 아님. 아무튼 그럼."

    더 이상의 반발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한 정해민의 선언에 이지혁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저번에 놀이공원 갔다가 아무것도 못하고 그냥 왔잖아. 괜히 일만 터지고!"

    "그러니까 가야지! 억울하잖아!"

    "맞아요!"

    이지혁은 양쪽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김다솜과 정해민을 보며 근본적인 의문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너희는 언제 친해졌냐?"

    "……."

    "……."

    그가 아는 가장 앙숙이었던 둘이 이렇게 연합전선을 구축하는 것을 보니, 세상이 많이 변하기는 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갈 거야, 안 갈 거야?"

    "가요, 오빠."

    "그래, 가자, 가."

    어차피 여기까지 나온 이상 안 간다고 했다가는 한참을 시달릴 것이 분명했다. 차라리 속 편하게 한 번 다녀오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

    "어디 갈 건데? 미국 갈 거야?"

    "안 돼."

    "왜?"

    "최정훈 씨가 없잖아. 우리끼리 가면 티켓도 못 끊어. 말이 안 통하는데."

    "너도 의무교육을 12년은 받았을 건데, 왜 영어 한마디를 못해!"

    "넌 해?"

    "…난 12년 다 못 받았어."

    이지혁이 고개를 푹 숙이자 김다솜이 어깨를 두드렸다.

    "괜찮아요, 오빠. 저도 다 못 받았어요."

    "너는 졸업을 아직 못한 거고!"

    투닥대던 이지혁이 상황을 정리했다.

    "그래서 어디 가자고?"

    "용인이지 뭐."

    정해민이 깔끔하게 결론을 내렸다.

    "언제? 내일?"

    "굳이 내일까지 기다릴 것 있어? 오늘 가면 되는 거 아냐? 어차피 놀이기구 많이 안 탈 거잖아."

    "으음……."

    이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에게 놀이기구라는 것은 거의 의미가 없었다. 그런 것으로 스릴을 느끼기에 그는 너무 많은 것을 겪었다. 오식이더러 몇 번 흔들어 달라고 하는 게 훨씬 더 스릴이 있을 것이다.

    "뭐, 그럼 가자."

    "자, 잠깐만요!"

    저 옆에서 최정훈이 사색이 된 얼굴로 달려왔다.

    "어디! 어디 가시는 겁니까?"

    "…요즘 들어 저 양반이 뭔가 유치원 보모 삘이 나는 것 같은데?"

    이지혁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아, 좀! 놀게 내버려 둬요!"

    "노는 건 안 말립니다! 하지만!"

    최정훈이 당당하게 자신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나도 데리고 다니라는 말입니다."

    물론 최정훈의 의도는 미국이나 정부가 이지혁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한시도 눈을 떼지 않겠다는 뜻이지만, 상황을 모르는 이지혁이 보기에는…….

    "요즘 좀 외로워요?"

    "……."

    이지혁이 정해민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야, 소개팅 좀 주선해라."

    "소개팅?"

    "아이돌들 많잖아. 너 친한 애들도 있을 거 아냐. 거기서 그만큼이나 굴러먹었는데."

    "음, 있지……."

    "우리가 만날 무시해서 그렇지, 최정훈 씨 정도면 일등 신랑감이지."

    최정훈의 코가 살짝 들렸다.

    "돈 잘 벌지, 일 잘하지, 잘생겼지."

    "으음……."

    "집에 잘 안 들어가지."

    "으응?"

    "하는 일 위험해서 언제 뒈질지 모르지. 잘 죽으면 국가유공자 돼서 연금 꼬박꼬박 나오지."

    "…신랑감으로는 최고네."

    정해민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최정훈의 표정은 매우 떨떠름했다.

    "그, 그게 정말 좋은 신랑감의 조건입니까?"

    "저러니 아직 장가를 못 간 거야."

    "인정."

    정해민이 피식 웃고는 말했다.

    "하기야 이젠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세상인데, 우리 최정훈 씨 여자 친구라도 한 번 사귀게 도와줘야지. 내가 정말 예쁘고 착한 애로 골라볼게요."

    "아니, 그……."

    최정훈이 뭔가 만류를 하려다가 피식 웃고 말았다.

    "…왜? 소개팅하려고?"

    그 순간, 등 뒤로 싸늘함이 와 닿는다. 최정훈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어, 언제 오셨어요?"

    고개를 돌려보니 서아영이 방실방실 웃고 있었다.

    '눈이 안 웃잖아! 눈이!'

    서아영의 질문을 받은 최정훈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뭐. 최정훈 씨가 소개팅을 한다는 소식이 들려서 축하라도 해줄까 해서 왔죠. 언니가 소개해 준다고?"

    "아, 아니, 내가 언제 그랬어? 나는 그냥 지혁이가 소개해 주라기에 그냥 한 번 알아보겠다고 예의 차 말한 거지, 진짜 소개시켜 줄 생각은 없었어."

    "아, 그렇구나. 그런데 그러면 최정훈 씨가 실망하지 않겠어요? 지금도 이렇게 좋아서 입이 헤벌레~ 하는데 소개 안 해주면 얼마나 실망하겠어요?"

    '헤벌레 한 적 없는데…….'

    변명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지금 어설프게 입을 열었다가는 최정훈이 아니라 최정훈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숯덩이가 될 수 있다는 본능적인 예감이 들었다. 최정훈은 입을 꾹 다물었다.

    "왜 말을 안 해!"

    어? 이게 아닌가?

    서아영이 뭔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최정훈을 노려보자 정해민이 수습에 나섰다.

    "그, 그럼 아영이도 같이 가자. 같이 가서 놀고 오면서 스트레스나 좀 풀면 그만이지."

    "나 놀이공원 안 좋아해."

    "같이 가보면 재밌을 거야."

    "별로 생각 없는데?"

    정해민이 고개를 휙 돌려 최정훈을 노려보았다. 빨리 이 상태를 수습하라는 무언의 압박에 최정훈이 식은땀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가, 같이 가시죠."

    "흐음."

    "부장님이 같이 가주시면 열 배는 더 재밌을 겁니다. 저도 부장님이 안 가시면 별로 가고 싶은 생각이 없네요."

    "그럼 분위기 깨기는 싫으니까, 같이 한 번 가볼게요."

    "탁월하신 선택입니다."

    어찌어찌 수습을 한 최정훈이 이마를 훔쳤다.

    그 모든 사태를 가만히 지켜보던 이지혁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잘 논다, 잘 놀아."

    * * *

    "328지구를 내줘."

    "…국장님, 거긴."

    "시키는 대로 해."

    "예."

    브라운은 매우 불만스러운 얼굴이지만, 크리스토퍼의 말에 이견을 달지는 못했다. 그만큼이나 현재 크리스토퍼 맥클라렌이라는 남자가 가지고 있는 카리스마는 압도적이었다.

    다만, 브라운 역시 이번 일만은 아무 저항 없이 따를 수는 없었다.

    이건 미국이라는 나라의 정체성과 관련되어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었다.

    "정말 괜찮겠습니까?"

    "뭐가?"

    "저는 여전히 알파와 손을 잡는다는 것이 부담스럽습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메스껍고 역겹습니다."

    "그렇겠지."

    "아무리 대의를 위한 일이라고는 하지만, 지금까지 어떻게든 찾아서 제거하려 하던 범죄자의 손을 빌린다니요. 그들의 손에 죽은 동료들은 어떻게 합니까?"

    "그쪽 동료들도 우리 손에 많이 죽었잖아."

    "그것과 이건 다르지 않습니까."

    크리스토퍼는 낮게 웃었다.

    뭐가 다른지 모르겠는데?

    어차피 알파와 크리스토퍼는 양립할 수 없는 존재다. 서로의 이용 가치가 끝나는 순간, 다시 적으로 돌아설 것이다. 그땐 정말 서로를 죽이기 위해서 온갖 수를 다 쓰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알파 역시 나를 죽이지 않았잖아?"

    바로 코앞까지 다가오는 것에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알파는 그를 죽이지 않았다. 마음만 먹었다면 목을 따는 것은 아무 일도 아니었을 텐데도 말이야.

    "필요하니까. 알파도 아는 거야. 아직은 내 능력이 필요하다는 걸. 저 마족들과 싸우기 위해서는 말이야."

    "가끔 잊고 계시는 것 같은데, 알파가 마족들을 이 세계에 불러들인 장본인입니다."

    크리스토퍼는 고개를 저었다.

    "점점 많아지고, 커지고, 과격해지던 게이트. 그리고 마계와의 문이 열리는 순간, 게이트의 출현이 사라졌다는 것은 의미하는 바가 크지. 게이트 자체가 두 세계의 사이에 균열이 생겼다는 뜻이다. 알파가 하지 않았어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마계와의 문이 열렸을 거야."

    "시간이 지나면 사람은 누구나 죽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살인을 저지른 사람에게 '어차피 언젠가는 죽을 사람을 죽였으니 무죄다'라는 궤변으로 변호하지는 않지요."

    "…그건 좀 아픈 대답인데."

    크리스토퍼가 머리를 긁었다.

    확실히 지금 희생되고 있는 이들의 죽음에 알파가 많은 지분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안타깝지만 여긴 법정이 아니야, 브라운."

    "……."

    "정의롭고 싶다면 검사를 하든가 경찰을 해. 우리는 어떤 수를 쓰더라도 반드시 이득을 보고 인류를 지켜야 해. 필요하다면 알파의 발이라도 핥아서 말이야."

    확고부동한 크리스토퍼의 말에 브라운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러니 투정은 나중에 부리자고. 일단은 일이야. 저 빌어먹을 마족 놈들을 해결한 다음에 알파에 대한 처분은 얼마든지 논의할 수 있어. 알겠어?"

    "예."

    "중국 쪽은 어떻게 됐나?"

    "아마 오늘 내로 발사할 것 같습니다."

    "독한 놈들."

    크리스토퍼가 눈을 찌푸렸다.

    핵을 사용하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이미 크리스토퍼도 게이트를 막기 위해서 핵을 사용한 전력이 있지 않은가. 문제는 그 핵의 양이 무시무시하다는 것에 있었다.

    일점에 핵을 집중할 경우, 생각보다 퍼져 나가는 방사능은 많지 않겠지만, 그래도 국토에 부담을 준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중국이니 할 수 있는 생각이고, 중국이니 할 수 있는 작전이었다.

    "성공했으면 좋겠군."

    만약 이 방법이 성공한다면 미국 역시 LA에 핵무기를 사용하는 것을 심각하게 고려할 것이다. LA를 잃는 것은 뼈아프지만, 미국을 잃는 것보다는 백배는 나으니까.

    "위성들도 일단 그쪽으로 포커스를 맞춰놨습니다."

    "그래, 잘했군. 일단 알겠어. 그리고 이지혁은?"

    크리스토퍼는 재빠르게 화제를 전환했다.

    "현재 한국에 머무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 정부와 NDF가 그를 보호하려는 듯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음……."

    크리스토퍼가 침음을 흘렸다.

    "송정수는 멍청해 보이는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악수를 선택했군."

    "응징합니까?"

    "아니."

    크리스토퍼가 손을 내저었다.

    "일단은 내버려 둬. 지금은 건드릴 때가 아니야."

    브라운은 과격할 정도로 강하게 이지혁을 원하던 크리스토퍼가 한발 물러난 사실을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크리스토퍼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선택이었다.

    '멸망하기 싫으면 건드리지 말라고?'

    이지혁에게 그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었다. 아무래도 이지혁에 대한 정보를 좀 더 구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크리스토퍼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지혁은 지금 뭘 하고 있나?"

    "…놀이공원에서 여자 끼고 놀고 있습니다."

    "……."

    크리스토퍼는 아무 말 없이 시가를 꺼내 끝을 자르고 불을 붙였다.

    "진짜 대가리에 뭐가 들어 있는지 모를 인간이야."

    * * *

    "지금 와서 이지혁 씨를 만난다고 해서 무슨 수가 있겠습니까?"

    송정수가 빙그레 웃었다.

    "물에 빠진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 법이지요."

    "그건 그렇지만……."

    "그리고……."

    송정수가 말끝을 조금 흐리더니, 테이블에 놓여 있는 반쯤 식어버린 커피를 살짝 머금었다.

    "이지혁 씨가 힘을 잃었다고는 하나, 아직 이지혁 씨의 가치는 무궁무진합니다."

    "미국과 같은 짓을 할 생각이십니까?"

    윤영민의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말은 그렇게 해도 이지혁을 좋지 않은 쪽으로 이용한다는 것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대통령감은 아니야.'

    아이러니하게도 윤영민은 과격파의 껍데기를 둘러쓰고 있지만, 천성이 과격한 편은 못 되었다. 오히려 왜 이런 사람이 연일 과격한 발언을 늘어놓았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덕분에 당선이 된 것은 사살이지만 말이다.

    "그럴 의도도 없고, 기술도 없습니다. 미국이면 몰라도 우리가 이지혁 씨를 조사한다고 해서 무엇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안타깝게도 대한민국의 과학기술은 그만한 수준에 오르지 못했음을 대통령님께서도 잘 알고 계실 텐데요."

    윤영민이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었다.

    "현대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보입니다. 그리고 이지혁 씨는 마계와 이계에 대한 정보를 세상에서 가장 많이 쥐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 사태에 대한 돌파구가 나온다면, 그건 이지혁 씨가 알고 있는 지식 속에서 나올 확률이 높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을 알고 있다면 이미 우리에게 말을 해주었을 텐데요. 우리에게 그런 사실을 숨겨야 할 정도로 사이가 나쁘지는 않잖습니까."

    "보물을 쥐고 있는 사람이 그 가치를 모를 수도 있는 것이지요. 저뿐 아니라 각계의 전문가들을 모두 불러 이지혁 씨에게 우리가 필요한 정보가 있는지를 확인해 볼 요량입니다."

    "으음……."

    윤영민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딱히 뭔가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지만, 지금은 송정수의 말대로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한다.

    '딱히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지.'

    윤영민은 허탈하게 웃었다.

    복구 작업이 한창이기는 하지만, 그건 이미 그들의 손을 떠나 있었다. 그리고 현시점에는 파괴된 지역을 정리하는 것 말고는 마땅히 계획을 세울 수도 없었다.

    새로이 지어지는 건물 위로 또다시 마왕이 출현하면 막대한 예산을 날려 버리는 결과가 나올 수도 있었다.

    '주도권을 완전히 잃어버렸으니까.'

    현재 인류가 가진 가장 큰 문제점은 선제공격이 불가능하다는 점이었다. 밀려 나온 마왕군을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가진바 모든 전력을 털어 넣고 있었다.

    그러니 스팟을 통한 마계로의 직접 공격이라든가, 아니면 게이트 자체를 파괴하기 위한 공작은 전혀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이대로는 밀리고 밀리다가 결국 패배하는 결과밖에 나오지 않을 겁니다."

    "다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뿐이지요."

    "으음……."

    윤영민이 무거운 침음성을 냈다.

    "새로운 시도는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중국의 시도 역시 그 일환이지요."

    "…잘도 그런 미친 짓거리를."

    송정수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만 볼 게 아닙니다."

    "예?"

    "이대로라면 결국 밀리고 밀려서 결국은 패배하는 경우밖에는 남지 않습니다. 할 수 있다면 모든 일을 다 해봐야지요. 하나의 스팟을 정리하는 대신에 중국의 영토 반을 잃는다고 해도 이득입니다. 어쨌든 그 방법을 통해 인류는 살아남을 수 있을 테니까요. 성공만 할 수 있다면……."

    말을 하다 말고 송정수가 낮게 웃었다.

    "물론 중국이니까 가능한 일이지요. 가진바 국력에 비해서 국민들을 크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니까요. 우리는 같은 상황에 처한다고 하더라도 결코 시도조차 할 수 없었을 겁니다."

    "동의합니다."

    윤영민과 송정수는 무거운 얼굴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위기가 벌어질 때마다 생각하게 되는 문제로군.'

    민주주의는 가장 합리적이지만, 언제나 가장 효율적일 수는 없는 정치 체계라는 문제가 있다. 평시에는 완벽한 정치 체계인 민주주의가 위급 상황이 되면 빠른 의사 결정과 과감한 선택의 걸림돌이 되는 것이다.

    당연하게요 생각은 할 수 있어도 입 밖으로 꺼낼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송정수는 담배를 꺼내 무는 것으로 답답한 속을 달랬다.

    "그래서 지금 이지혁 씨는 뭘 하고 있답니까?"

    "글쎄요? 뭐, 아마……."

    송정수가 이지혁의 스타일을 감안하여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답변을 내놓았다.

    "게임이나 하고 있겠죠."

    * * *

    "…게임이나 하러 가면 안 되나?"

    "네. 안 돼요."

    "왜! 나도 자유의지가 있는 사람인데, 내 자유의지로 게임하러 간다는 걸 왜 네가 막겠다는 건데?"

    "만날 그렇게 집 안에서 게임만 하고 그러시다 보면 사람이 사회성이 없어져요."

    "게임 안에서도 채팅으로 대화하고 다 하거든? 요즘은 마이크로 서로 말도 해."

    반은 욕이지만.

    얼마나 욕을 많이 먹었는지 이제 귀에서 자체로 욕을 필터링해서 듣는 경지에 올랐다.

    "저 배고파요. 밥 사 주세요."

    "끄응."

    이지혁은 자신의 어깨에 매달리는 김다솜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김다현이 그의 몫까지 일하는 조건으로 빠져나온 길이다 보니 최소한 근무 시간이 끝날 때까지는 김다솜과 데이트를 해줘야 하는 것이 도리였다.

    '그 공사판에서 시간 때우는 것보다는 백배 낫지만.'

    마지막까지 안 된다고 발악하는 최정훈을 집어 던지다시피 하고 도망 나온 길이다.

    문제는…….

    "야! 안 떨어져? 왜 남의 팔을 잡고 늘어지는데?"

    "남의 팔이라뇨? 언니 팔도 아니잖아요."

    "내 팔은 아니지만, 니 팔도 아니잖아. 안 떨어질래?"

    "제 마음인데요?"

    혹도 하나 더 붙었다는 것이다.

    김다솜과 티격태격하는 정해민을 보며 이지혁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얘들아, 세계가 멸망하고 있단다.'

    이 세계의 인간들은 도무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베라프의 인간들은 이지혁이 출현함과 동시에 전 세계가 동시에 전시체제로 들어가서 아이, 여자 할 것 없이 한 몸으로 그를 막겠답시고 달려들었다.

    이지혁의 입장에서는 매우 황당한 일이지만, 그들은 이지혁을 막아내는 것이 미래를 위한 유일한 희망이라는 듯이 몸을 아끼지 않고 앞을 막아섰다.

    당시에는 그 짓거리가 불로 뛰어드는 부나방처럼 느껴졌지만, 지구에서 완전 반대되는 결과를 보고 있으니 속이 답답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너희는 걱정도 안 되냐?"

    "뭐가?"

    "마왕군이 쳐들어오고 있잖아."

    "걱정되지."

    정해민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내가 걱정한다고 해서 뭐 달라질 게 있나? 안절부절못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게 있었으면 내가 지금 만보기를 차고 뛰고 있겠지. 그런데 그게 아니잖아."

    "으음……."

    "뭔 대처가 되어야 뭘 어떻게 해보지. 이게 핵폭발 같은 거면 방공호라도 들어가 보고, 전쟁 같은 거면 총이라도 들어보겠는데, 무작정 언제 쳐들어올지도 모르는 마왕들을 기다리면서 준비만 해야 하는 일인데, 덜덜 떨면서 준비하나 평소처럼 아무렇지 않게 준비하나 다를 게 없잖아."

    말은 맞는 말인데…….

    누가 들어도 말은 참 맞는 말이라는 게 문제다.

    "그러니 그냥 평소대로 사는 거야. 지금 안 그래도 발전소 문제 때문에 전기가 부족하다는 말도 있어서 조금 있으면 이런 것도 못하게 될 확률이 높아. 즐길 수 있을 때 즐겨둬야지."

    "으으음……."

    말로는 여자를 이길 수 없다는 이야기가 왜 나왔는지 실감하는 이지혁이었다.

    "그래서 우리 뭐 먹으러 가요?"

    "끄으으응."

    무한한 시간과 영원히 재생되는 몸을 바탕으로 천하태평함의 극치에 올라본 이지혁조차 이들에게는 당할 수 없었다.

    '하기야 나라고 별다를 게 있나.'

    뭔가 의욕적으로 움직여 보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알파 쪽이 준비가 되기 전에는 할 수 있는 것이 딱히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현재 최전방, 그러니 미국, 중국, 유럽에 존재하는 국가들을 제외한다면 다들 지금 이지혁들과 비슷하게 손가락만 빨고 있었다.

    최대한의 지원을 쏟아부어 본국까지 여파가 미치는 것을 막고 싶은 것이야 모두가 비슷한 심정이겠지만, 그 지원이라는 것도 애매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병력을 보내봤자 일거에 털리고, 능력자들도 마왕과 마왕군 앞에서는 딱히 힘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지원을 한다는 것이 자국의 병력들을 총알받이로 들이미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는 것을 다들 알고 있기에 지원 역시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되레 너한테 묻고 싶은데?"

    "뭘?"

    정해민의 물음에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정말 이러고 있을 수밖에 없는 거야? 우리가 지금 손을 놓고 있는 것은 냉정하게 말해서 마왕들에 대한 공략법을 전혀 알지 못해서 그런 거잖아."

    "음……."

    "마왕을 물리칠 수 있는 방법만 안다면 우리도 이렇게 손 놓고 있지는 않겠지. 어떻게든 마왕을 물리치려고 최선을 다할 거야. 그런데 현 시점에서 마왕을 쓰러뜨릴 방법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건 너 하나뿐이잖아."

    "방법이야 간단하지."

    이지혁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놈들이 무슨 방사능이나 독 같은 것도 아니고, 그냥 생물인데 방법이야 다른 게 있겠어? 더 강한 힘으로 찍어 눌러 죽여 버리면 되는 거지."

    "그게 안 되니까 이런 거 아냐!"

    정해민이 소리를 빽! 질렀다.

    "더 강한 힘을 낼 수 있으면 걱정도 안 하지. 마왕이 우리보다 센 건 당연한 일인데, 더 강한 힘을 어디서 구해?"

    "있잖아."

    "응?"

    "마왕이라고 해도 다들 너희 생각처럼 강한 건 아냐. 전성기의 나에 비하면 발톱의 때만도 못한 애들도 많거든."

    "……그게 뭔 의미가 있어?"

    그 발톱의 때의 발톱의 때만도 못한 게 현생 인류들인데 말이다.

    "인류는 이미 파괴력적인 측면에서는 마왕을 뛰어넘었어. 마왕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한 번의 공격으로 핵무기의 파괴력을 낼 수 있을까? 그런 정도였으면 지구가 지금까지 남아 있지도 못하지. 화력적인 측면이라면 전 차원을 통틀어서 지구를 능가할 곳이 없을 거야."

    "그런데 왜 마왕은 못 쓰러뜨려?"

    "안 맞아주니까."

    이지혁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핵 펀치를 가지고는 있는데, 그 펀치가 너무 느려 터져서 안 맞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잖아. 지금 인류가 딱 그래. 파괴력은 있는데, 그 핵무기를 마왕에게 명중시킬 방법이 없는 거지."

    "맞기만 하면 되는 거야?"

    "마법 방어를 뚫어야 한다는 난점이 있기는 한데, 아무리 실드를 친다고 해도 그 정도의 고에너지 반응을 맨몸으로 때우는 건 확실히 힘들지. 타격이 있을 거야, 그것도 확실한 타격이. 인류가 가지고 있는 핵무기를 잘만 활용한다면 가능성이 아주 없는 건 아닌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위이이이이이이이잉!

    사방에서 사이렌이 울려 퍼지며 대피 신호가 뜨기 시작했다.

    "시작하는 모양이네."

    이지혁이 혀를 차며 말했다.

    "그런데 그 소중한 무기를 저런 식으로 낭비하면 일말의 가능성마저 날아가는 거지."

    이지혁이 서쪽을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정해민과 김다솜은 영문을 몰라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 * *

    중국 인민해방군의 중앙 군사 위원회 국방부장 쉬청[?成]은 굳은 얼굴로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준비는 다 됐겠지?"

    "완벽합니다."

    "으으음."

    쉬청은 마왕군을 실시간으로 찍고 있는 위성 카메라를 바라보며 이를 뿌득 갈았다.

    "빌어먹을 잡놈들."

    저 망할 놈들 때문에 이제 중국은 자국의 영토에 핵무기를 다발로 투하하는 세계 최초의 국가가 될 것이다.

    "주석께서는?"

    "발사 시기와 방법은 일임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쉬청은 지휘봉을 바닥에 강하게 내려쳤다.

    "저 미개한 것들에게 중화의 힘을 보여주어야겠지. 이 세계로 들어온 것이 얼마나 무모한 짓이었는지도 말이야."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쉬청이 예정된 발사 시각을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들어 시계를 바라보았다.

    '30분 남은 건가?'

    상부로부터 두려움이 없는, 참 군인이라는 평가를 받는 쉬청이지만, 이런 상황에서조차 떨리지 않을 수는 없었다. 지금까지의 인류 중에서 핵무기의 발사 버튼을 눌러본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이런 상황에서 긴장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더구나 그 핵무기가 향하는 것이 자국의 영토라면 더더욱 말이다.

    '빌어먹을.'

    게다가 쉬청에게는 더욱 화가 나는 이유가 있었다.

    왜냐면 그가 바로 쓰촨 출신이기 때문이다.

    지금 쉬청은 국가과 인민을 위해서 그가 태어난 곳을 지도에서 지워야 하는 입장에 있었다.

    '조국을 위해서.'

    쉬청이 떨리는 가슴을 퉁퉁, 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그가 결정한 일이 아니다. 주석을 포함한 중앙 군사 위원회에서 내린 결정이다. 그러니 그는 그저 그들의 의견을 따르면 된다.

    그 역시 중앙 군사 위원회의 소속이기는 하지만, 따져 보면 결국 중앙 군사 위원회는 주석의 말을 포장하여 전달하는 것이 전부인 기관이니까.

    왜 연합 사령부 참모장이나 로켓군 사령원이 아니라 그가 이런 역할을 맡아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도 있지만, 주석이 그리하라고 명한다면 따라야 한다.

    '군인들에게 막대한 권력을 맡기기는 쉽지 않으셨겠지.'

    이런 전시 상황에서도 권력에 대한 견제가 들어가는 것을 보면 인간이란 아무리 역사가 흐른다고 해도 권력에 대한 욕구를 내려놓을 수 없는 것 같았다.

    인류의 명맥이 지속된다면, 천 년이 지나도 암투와 권력 싸움은 계속될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본질이자 본성이니까.

    "국방부장님."

    "왜?"

    "미국에서 핫라인이 들어왔습니다. 크리스토퍼 맥클라렌 국장입니다."

    "크리스토퍼……."

    쉬청이 나직하게 이를 갈았다.

    세계 최강 패권의 미국이 그동안 얼마나 중국을 견제해 왔던가.

    정치, 군사, 경제적으로 지난 십 년간 중국은 미국의 압박을 이겨내는 데 모든 역량을 집중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연결해."

    하지만 아무리 꼴 보기 싫은 놈이라고 보지 않을 수는 없다.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사람은 미국의 대통령이 아니라 크리스토퍼라는 말이 나올 정도니까. 그는 이 긴급한 정국에서 전 세계의 키를 주무르는 자였다.

    곧 비전에 크리스토퍼의 얼굴이 나왔다.

    "오랜만이오."

    크리스토퍼가 조금은 난감한 얼굴로 쉬청을 바라보았다.

    - 미안하지만 귀국의 주석과 직접 연결을 할 수는 없겠소?

    "당신이 미국의 대통령이라면 건의해 볼 만한 일이지. 하지만 당신은 대통령도 아닌데 감히 중국의 주석과 독대를 하겠다는 거요?"

    통역의 말을 전달받은 크리스토퍼가 한심하다는 얼굴로 쉬청을 바라보았다.

    - 나는 대통령은 아니지만, 결정권을 가지고 있소. 당신이 결정권이 있는 자라면 얼마든지 대화하겠지만, 그냥 허수아비라면 굳이 대화를 나눌 필요도 없을 것 같은데?

    "중화인민공화국의 국방부장이 허수아비라면, 세상에 허수아비가 아닌 자가 어디 있는가!"

    쉬청이 흥분해서 소리치자 크리스토퍼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렇다면 대화할 가치가 있겠지. 잘 들으시오, 국방부장. 당신들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아무런 효과가 없는 발악에 불과하오. 그리고 그 발악에 쓰이는 다수의 핵무기들은 인류가 가지고 있는 마지막 보루요. 지금 당장 작전을 중지하기를 권고하오.

    "들을 가치도 없는 이야기군."

    쉬청은 깔끔하게 크리스토퍼의 말을 잘랐다.

    "이건 내정간섭이오, 맥클라렌."

    - 지금 그런 걸 따질 수 있는 상황이라면 나도 기분 좋게 욕을 먹어드리지. 하지만 지금은 내정간섭이고, 개뿔이고 따질 때가 아니오. 당신들의 그 멍청한 짓거리를 어떻게든 막아야 하는 상황이지.

    쉬청이 눈을 찌푸렸다.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는 해봐야 아는 일이지."

    - 당신과 내가 모시는 신이 같다면 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오.

    "신?"

    - 인류의 신, 과학이지. 시뮬레이션 결과, 당신들의 방식으로는 마왕군은 처리할 수 있을지 모르나 마왕을 감당할 수 없어. 그리고 마왕이 살아남는다면 마왕군 따위는 아무래도 좋은 것이지. 언제든 복원되고 보충될 테니까.

    "미지의 존재를 무슨 수로 과학적으로 분석한다는 것인가. 미국은 마왕의 시체 표본이라도 가지고 있는 모양이지?"

    - 없소. 하지만 우리에게는 마왕의 전투 데이터가 있지.

    "그깟 책상 놀음은 귀국에서나 하시오, 맥클라렌. 그렇게 마왕에 대해 잘 아셔서 지금 자국의 영토를 유린하고 있는 마왕군에게 LA를 내주셨나?"

    맥클라렌이 한숨을 쉬었다.

    - 전투의 승산이 없을 때는 물러나는 것도 한 방법이지. 우라돌격은 결코 좋은 전술이 아니라는 것을 당신도 알 텐데? 물량전이 특기인 나라이다 보니 핵도 물량으로 쏟아내려는 것인가?

    "비꼬고 싶다면 다른 방법을 가져오시오."

    -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하오.

    "천하태평하군."

    쉬청이 이를 갈며 말했다.

    "너희 서양 놈들이 거들먹거리는 것에는 이제 질렸어. 너희는 언제나 말만 번지르르하지. 이제 시대가 바뀌었어. 너희가 세계를 주도하던 시절은 갔다. 이번 사태는 그 상징적인 일이 될 것이야. 너희가 손도 대지 못하던 마왕군을 우리가 격파할 테니까. 그러니 손가락이나 빨면서 기다리도록 해."

    - 동서양의 파워 게임에는 관심이 없소. 나는 그저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을 함께 극복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거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소?

    "모르겠는데?"

    쉬청이 이죽거리자 크리스토퍼가 눈을 가늘게 떴다.

    - 나뿐만이 아니오. 동서양을 따질 거라면 언급해 주지. 이지혁 역시 이러한 작전이 별 효과를 보지 못할 거라 평하고 있소. 그는 동양인이지, 당신과 같은.

    "빵즈 새끼가 떠드는 말 한마디로 중화의 국책을 바꾸라는 것인가? 당신,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아는 거요?"

    - 이지혁이 어떤 인물인지 모르지는 않을 텐데? 지금 국적 때문에 그의 말을 근거 없는 헛소리라 취급하겠다는 것은 아니겠지? 귀국의 의식 수준이 그것밖에 안 되는 거요?

    "닥치는 게 좋을 거요. 그게 아니라면 우리의 의식 수준을 제대로 알게 될 테니까."

    크리스토퍼는 난감하다는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마치 원시인과 대화하는 기분이다. 단순히 의식이 저열하고 말고를 떠나 이미 답을 정해놓고 면피성 발언을 늘어놓는 이와 대화가 될 리 없었다.

    - 그래서 결국 강행하겠다는 거요?

    "국가에서 정한 일이오. 당연히 강행해야지. 그쪽이 이쪽에 간섭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겠지?"

    크리스토퍼는 차가운 눈으로 쉬청을 바라보았다.

    - 그래서 결정 권한이 있는 이를 대면하게 해달라고 한 거요. 잘 들으시오, 국방부장. 당신이 지금 한 말과 행동이 어떤 여파를 가지고 올지 잘 생각하는 게 좋을 거요. 이 순간부터 우리 미합중국은 중화인민공화국에 어떠한 지원도 하지 않겠소. 당신들의 일은 이제 전적으로 당신들이 해결해야 할 것이오.

    쉬청이 이죽거렸다.

    "언제는 도와준 것처럼 말하는군. 그쪽이 우리에게 한 것은 압박과 제재밖에 없던 걸로 기억하는데? 간섭하지 않겠다면 우리는 편하지."

    - 나는 분명히 경고했소. 이 영상은 증거로 남을 것이오. 역사가 당신을 어떻게 기록할지 잘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거요. 뭐, 역사가 계속 기록될 수 있을 때의 이야기지만 말이지.

    뚝.

    비프 음과 함께 영상이 끊어졌다.

    "썩을 양키 새끼!"

    쉬청이 지휘봉을 화면을 향해 집어 던졌다.

    "언제까지 그리 잘난 체를 하는지 두고 보자."

    저 미국 놈들은 좋게 봐줄래야 좋게 봐줄 수가 없다. 계획대로라면 이미 중국이 미국 이상의 영향력을 전 세계에 발휘하고 있어야 한다. 갑작스러운 블랙 먼데이만 아니었더라도 이미 그렇게 되었을 것이라 쉬청은 확신하고 있었다.

    오랜 시간 동안 서양에 내주었던 패권국의 위치를 다시 찾을 기회였는데, 갑작스러운 변화에 세계의 흐름이 고착화되어 버린 것이다. 그 일만 아니었다면…….

    "뭐, 됐어."

    이번 일은 그들이 세계의 패권을 다시 가지고 온다는 상징적인 장면이 될 것이다.

    미국조차 국토를 유린하는 마왕군들을 어쩌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과감한 시도로 마왕군을 몰아낼 수 있다면, 세계의 주도권을 일순 중국으로 끌어올 수 있다.

    주석도 동의하는 바였다.

    "국방부장님, 시간이 되었습니다."

    "후우."

    쉬청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품 안에 손을 넣었다. 주석에게 양도받아 온 열쇠가 그 안에 있었다. 발사 스위치를 열기 위한 열쇠.

    비상시국이라도 핵 발사 스위치를 개방하기 위해서는 서로 다른 세 사람이 가진 열쇠가 모두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 쉬청의 품 안에는 그 세 열쇠가 모두 들어 있었다.

    '겉치레는 이제 됐어.'

    세계는 이미 약육강식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조약과 동맹은 무의미하다. 이제는 어느 나라가 더 힘이 있느냐가 살아남는 기준이 될 것이다.

    "주석궁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뭐라고 하시는가?"

    "예정대로 시행하라십니다."

    "으음."

    쉬청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주석궁이라…….'

    이 중차대한 시기에 발사 장소가 아니라 주석궁 아래에 있는 지하 벙커 지휘소에서 연락이 온다는 것은 조금 불만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자신은 가장 안전한 곳에 숨어서 상황을 지켜보겠다는 뜻이었으니까.

    '맹장만 장군은 아니지.'

    주석이 맡은 위치는 그만큼이나 무거운 것이라 스스로를 설득하면서 쉬청은 가슴 안에 든 열쇠를 꺼내 스위치 홈에 꽂아 넣었다.

    세 개의 열쇠가 모두 돌아가자 스위치를 덮고 있던 커버가 열리기 시작했다.

    "후우우우."

    쉬청이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아냈다.

    이미 발사에 관한 모든 조정은 끝났다. 이제 이 붉은 스위치를 누르기만 하면 수십 발의 핵무기가 중국 국토 안으로 떨어질 것이다. 쉬청은 그 사실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다.

    쉬청이 살짝 떨리는 손을 스위치 위에 올렸다. 그저 스위치 위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을 뿐인데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댔다.

    이 스위치가 가지는 의미를 생각한다면 너무도 당연한 반응이다.

    "후욱!"

    쉬청이 크게 심호흡을 하고 외쳤다.

    "발사 준비!"

    "준비!"

    깔끔한 복명복창이 돌아오자 쉬청이 눈을 질끈 감았다.

    "발사!"

    살짝 둔탁한 압력이 느껴진다 싶더니, 스위치가 너무도 어이없을 만큼 쉽게 눌러졌다.

    "……전탄 발사 완료!"

    쉬청의 몸이 부르르 떨려왔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

    도합 열여덟 발의 핵폭탄이 쓰촨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 * *

    "발사됐습니다."

    "…미친놈들."

    크리스토퍼는 화면에 보이는 핵무기의 이미지를 보며 이를 갈았다.

    "대체 무슨 사태가 벌어질 줄 알고 저런 짓을 하는 거지?"

    마왕군에게 핵무기를 투하한다고 마왕을 잡아낼 수 있을 리 없었다. 마왕의 출현을 벌써 두 번이나 눈앞에서 목격한 크리스토퍼의 결론이다.

    아무리 강한 무기라 하더라도 적중시키지 못한다면 의미가 없다. 조종간이 나간 대포가 아무런 쓸모가 없듯이 말이다. 텔레포트를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마왕에게 저런 무기들이 소용 있을 리가 없었다.

    마왕에게 핵을 활용하겠다면 근거리에서 폭발시켜야 한다.

    로켓으로 추진하는 방식으로는 핵무기가 마왕의 지척에도 도달할 수 없다. 그전에 다 터져 나가거나, 아니면 마왕이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릴 것이다.

    "빌어먹을 짱깨 새끼들."

    항상 저 새끼들은 골칫덩어리였다.

    사고는 러시아가 더 치지만, 러시아 놈들은 그나마 상식이라는 게 있고 말이 통한다.

    하지만 중국 놈들은 필요할 때는 고개를 숙이지만, 자신들이 조금이라도 우위를 잡았다고 하면 이제까지 받은 모든 것을 돌려주겠다는 듯이 개처럼 달려든다.

    그러니 중국을 상대하는 것은 언제나 피곤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번에는 도를 넘었다는 것이 문제지만 말이다.

    "상황은?"

    "고고도 지났습니다. 쓰촨으로 떨어질 것입니다."

    "제길."

    "타국에서 핫라인이 빗발치고 있습니다."

    "그렇겠지. 일단 놔두라고 해."

    크리스토퍼는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핵확산방지조약을 근거로 어떤 국가에서 핵무기를 발사할 경우, 타국은 그 국가를 핵으로 공격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핵을 자국으로 쏜 상황이라 공격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다가 미국의 대응을 물어오는 것이리라.

    "자기 나라를 자기 손으로 박살 내겠다는데, 우리가 왈가왈부할 일은 없지."

    문제는 저 핵이 어떤 작용을 할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핵을 맞은 마왕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만일 저 핵이 마왕군의 진격을 촉발하는 요소라도 된다면 중국은 스스로 세계를 멸망시키게 될 것이다.

    "…위성 집중시켜. 경과를 봐야 한다."

    "예!"

    크리스토퍼는 손을 가슴에 모았다.

    신은 없다.

    그런 것쯤은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신앙의 힘을 빌리고 싶었다.

    "제발."

    실패하리란 것을 빤히 알고 있으면서도 성공을 빌어야 하는 처지였다. 자신의 처지가 우스워 크리스토퍼는 헛웃음을 지었다.

    * * *

    예순두 번째 마왕, 아락시스는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호오?"

    나른하던 차에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인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지각이 그에게 고속으로 다가오고 있는 무언가를 발견한 것이다.

    "재미있는 짓을 하는군."

    아락시스는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안 그래도 지루해 죽을 것 같았는데, 이런 식으로 사건을 벌여준다면 오히려 환영이었다.

    진격 속도의 조절.

    이 세계로 그를 파견한 상위 마왕들이 내건 명령 중의 하나였다. 마왕은 동등하지만, 또한 동등하지 않다. 그들은 마왕으로서 모두 같은 권리를 가지지만, 힘의 차이가 현격한 이상 결코 같은 권리를 행사할 수는 없었다.

    그들이 그에게 원하는 것을 따르지 않는다면 아락시스는 더 이상 마왕일 수 없게 될 것이다.

    죽은 자는 마왕일 수 없으니까.

    그렇기에 참아왔다. 당장에라도 이 세계를 모조리 불덩어리로 만들어 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있었다.

    마왕 중에서는 참을성이 매우 부족한 편인 그이지만, 인간과 마왕은 서로 시간의 기준이 다르다.

    최대한으로 친다면 몇 백 년은 이곳에서 꼼짝하지 않을 만한 인내심 정도는 있다.

    그런데 울고 싶은데 뺨 때려 준다고, 인간들이 직접 그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겠다고 나선 것이다.

    "기특하게도 말이야."

    아락시스는 더없이 즐겁다는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날아드는 것들이 지표로 도달하기까지의 시간은 인간을 기준으로 3분 정도.

    매우 짧은 시간이기도 하고, 끔찍할 정도로 긴 시간이기도 했다. 아락시스는 어떻게 해야 이 공격에 가장 즐겁게 대응할 수 있는가를 고심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저게 핵이라는 거로군."

    아락시스가 가만히 입술을 핥았다.

    그들이 힘을 앞세워 이 세상을 정복해 나가는 점령군이라고는 하지만, 이 세상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를 무시할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았다.

    되레 마왕급 정도 된다면 인간과 지능을 비교하는 게 실례일 정도였다.

    이 세계에서 가장 조심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이미 충분할 정도로 알고 있었다.

    핵무기.

    단일 충격량으로는 마왕의 공격조차 능가하는, 인류가 만들어낸 무기의 꽃.

    어찌 저열한 인간에게서 저런 무기가 나올 수 있었는지 놀랍기 짝이 없는, 그야말로 상식을 초월하는 무기였다.

    '정면으로 맞는다면?'

    소멸.

    그게 아니더라도 소멸에 준하는 충격을 받게 될 것이 빤했다. 그러니 정면으로 맞받는 것만큼은 피해야 한다.

    문제는 저 무기는 너무나도 느리고, 맞아주고 싶다면 이곳에서 낮잠이라도 한숨 자야 한다는 것이다.

    피하는 것은 너무도 쉽다.

    "그러니 그건 재미가 없고."

    아락시스는 고민에 빠졌다.

    저 무기를 피하는 것은 너무도 쉽다. 하지만 그래서야 이 지루함이 좀 더 길어질 뿐이다.

    '진격은 조심스레 하라고 했지만…….'

    순간, 아락시스가 무언가 방법을 찾아냈는지 기묘한 얼굴로 웃기 시작했다.

    "어디 보자, 하나, 둘, 셋… 열여덟인가?"

    아락시스가 한 팔을 허공으로 들어 올렸다. 그러자 그의 팔에서 검은 액체 같은 것이 주르륵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바닥으로 방울방울져 떨어지던 검은 액체가 순식간에 부풀어 오르더니, 이내 커다란 새의 형상으로 화하기 시작했다.

    크롸롸롸롸롸롸롸롸.

    거대한 와이번과 비슷한 형상을 띤 검은 괴조들이 비명을 지르며 악다구니를 쓰기 시작했다.

    아락시스는 그 광경을 보며 키득대며 웃었다.

    "나는 대처법을 모르겠으니, 너희에게 물어보면 되겠지. 자, 이걸 어떻게 막을 셈이지?"

    아락시스의 주변을 포위하듯 활개 치던 괴조들이 일제히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그러더니 생물이라면 절대 낼 수 없는 속도로 하늘을 향해 솟구치기 시작했다.

    "신관, 신관이라는 것을 제거해야 한다고 했는데……. 음, 그 신관이라는 게 뭔지를 모르겠군. 두 번째 방법은……."

    아락시스가 머리를 긁었다.

    "역시나 나르시우스 놈이 죽어버려서 불편하단 말이야. 그놈이 있었으면 이런 것쯤은 단숨에 해결했을 텐데."

    마족 중 최고의 지성체라고 할 수 있는 나르시우스가 이지혁의 손에 죽은 것은 매우 뼈아픈 일이었다.

    워낙에 자존심이 강한 놈이라 혼자서 이지혁에게 달려드는 미친짓을 범하기는 했지만, 놈이 가진 지식과 학구열은 마왕들의 입장에서는 편리한 사전을 끼고 다니는 듯한 효과를 주었다.

    그런데 그 나르시우스가 덜컥 죽어버렸으니, 생소한 상황을 마주했을 때 조언을 구할 만한 이가 없어져 버린 것이다.

    '혹시나 우리가 실패한다면, 나르시우스의 부재가 무척이나 큰 역할을 하는 것이겠군.'

    아락시스가 한숨을 쉬었다.

    "역시나 아른아홉 번째 마왕이라고 해야 하나? 그 꼴이 되어서도 아픈 곳을 곧잘 찔러 들어오는군."

    지난 과정이야 나르시우스가 그 자신과 이지혁의 전력을 오판한 결과물이라고 해야겠지만, 그럼에도 그 일에 이지혁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애초에 이지혁이 아니었다면 그 나르시우스가 그런 멍청한 짓을 저지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지혁은 언제나 예상외의 상황과 예상외의 결과를 가져오는 이레귤러였으니까.

    "뭐, 어쩔 수 없지."

    신사적인 방법을 모른다면, 다른 방법을 쓸 수밖에.

    "잡아라."

    아락시스가 허공으로 손을 들어 올리고는 주먹을 꽉 움켜잡았다.

    카아아아아악!

    괴조들은 아락시스를 향해 날아드는 핵탄두들을 향해 정확하게 날아들었다. 같은 발사지에서 발사된 것이 아닌, 중국 전역에서 날아드는 핵탄두임에도 불구하고, 괴조들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정확하게 핵탄두들을 찾아내고 있었다.

    카아아아!

    마침내 가공할 속도로 쏟아지는 탄도미사일을 발견한 괴조가 괴성을 내뿜으며 날아들었다.

    콰드드득!

    괴조의 발톱이 탄도미사일의 옆면을 그대로 파고든다. 뒤쪽에서 뿜어져 나오는 추진 불꽃이 요동쳤지만, 미사일을 파고든 괴조의 말은 요지부동이었다.

    괴조들이 미사일에 단단히 발톱을 고정시키고는 날갯짓을 했다. 바닥으로 급강하하던 미사일들의 궤도가 천천히 뒤틀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이내 날아오던 방향 그대로 미사일들이 머리를 돌려 가속하기 시작했다.

    * * *

    "궤도! 궤도 어그러집니다!"

    "뭐?"

    크리스토퍼는 기겁을 하여 자리에서 일어났다.

    "빌어먹을."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사태가 벌어졌다.

    실패할 것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문제는 어떻게 실패하는가였다.

    실패하는 과정에서 최상의 결과는 중국이 원한 대로 핵탄두가 마왕이 있는 곳에 떨어져서 마왕군과 함께 산화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차선은 저번 평양 사태처럼 공중에서 핵폭발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최악의 사태는 탄도미사일의 궤도 자체가 일그러져 다른 곳에 핵무기가 떨어지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사태가 벌어지고 있었다.

    "제기랄! 궤도 예측해! 어서! 빨리!"

    크리스토퍼가 모니터를 향해 달려가며 소리쳤다.

    "민간인이 있는 곳에 떨어지나? 북경에 떨어지는 것은 아니겠지?"

    북경 쪽으로 핵탄두가 떨어진다면, 중국이라는 나라는 일시에 마비가 되어버릴 것이다.

    정치적으로 냉랭한 사태를 유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런 세상에서 국가 간의 공조는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모를 크리스토퍼가 아니었다.

    만약 중국이 무정부 상태가 되어버린다면, 세계를 지탱하는 한 축이라 할 수 있는 동아시아가 완전히 괴멸 상태로 빠져들 우려가 있었다.

    "구, 국장님!"

    "어디야! 어디로 떨어지나?"

    "이건 직접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뭐?"

    반문할 시간도 없이 메인 비전에 지도가 뜨더니, 붉은 선이 이곳저곳으로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이게 뭐야?"

    크리스토퍼는 넋을 잃고 지도를 바라보았다.

    뒤틀린 것이 아니다.

    궤도가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중국에서 발사되어 중국으로 떨어지던 탄도미사일들이 그 방향을 바꿔 전 세계를 향해 일제히 날아오르고 있었다.

    세계 각지로 핵무기들이 발사되고 있었다.

    "궤, 궤도가……."

    크리스토퍼가 지도를 바라보는 짧은 순간에도 궤도가 이리저리 일그러지고 있었다.

    "착탄 지점 확정이 안 됩니다!"

    "궤도 수시로 변합니다. 착탄 지점이 반경 1,000㎞ 범위로 변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합니까, 국장님!"

    크리스토퍼조차 말문이 막힐 지경이었다.

    "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어디로 떨어질지도 모르는 열여덟 발의 핵무기가 전 세계를 향해 날아든다. 그 참담한 상황에 크리스토퍼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런 개새끼들아아아아아!"

    크리스토퍼의 절규가 방 안을 쩌렁쩌렁 메워 나갔다.

    인류의 멸망을 가속화시킬 최악의 한 수가… 인류를 향해 그 이를 드러내며 날뛰기 시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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