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85화 (85/118)
  • [■] 오랜만에 뵙습니다 [■]

    ─────

    정신이상자와 대화를 하다 보니 최정훈의 정신도 이상해지는 기분이었다.

    "전화해서 안 보겠다고 하면 얌전히 물러난다고 맹세하면 그렇게 해주지."

    "제가 맹세한다고 믿으시겠어요? 그렇게 안 봤는데… 최정훈 씨, 순진하시네?"

    이걸 패 죽여 버릴 수도 없고.

    최정훈이 이를 갈며 전화기를 꺼냈다. 여기서 이놈과 계속 말씨름을 할 바에야 차라리 이지혁에게 빨리 전화를 해서 해결을 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마음 한구석에는 이 전화의 결과에 따라 그의 목숨이 오갈 수 있다고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기묘한 대치를 지속할 마음은 없었다.

    죽으면 죽는 거지.

    죽지 않기 위해서 비굴하게 대화를 이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이지혁의 번호를 확인한 최정훈이 통화 버튼을 누르고 스피커폰으로 전환했다.

    몇 번 울리지도 않았는데 바로 전화가 연결되었다.

    - 여보세요?

    "이지혁 씨!"

    - 빨리 말해요. 저 지금 한타 중이에요.

    "…거참, 그놈의 게임."

    최정훈이 막 말을 하려는 찰나에 알파가 소리쳤다.

    "와, 진짜 너무하네. 내 전화는 받지도 않아놓고!"

    - 뭐야? 누구야?

    최정훈이 미친놈 보듯 돌아보았지만, 알파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알파입니다. 반가우시죠?"

    - 알파?

    "네."

    -어, 그러니까… 그 또라이?

    푸웃.

    최정훈은 자신도 모르게 격뿜하며 핸들을 움켜잡았다.

    아오, 사이다!

    알파에게 시달리며 받은 스트레스가 일거에 날아가는 기분이다.

    "말이 좀 심하시네요. 저는 이지혁 씨 만나려고 한국까지 와서 이러고 있는데."

    - 집으로 오면 되는 거 아냐?

    "거기 경비가 너무 철통같아요. 걸리기만 하면 NDF 사무실에서 놀고 있는 능력자들이 신나서 달려올 기세던데."

    - 아, 알았으니까, 용건만 간단히 하자고. 지금 한타 중이라니까!

    알파가 조금은 심각한 얼굴로 최정훈을 돌아보며 물었다.

    "한타가 뭡니까?"

    저놈의 게임이 도움이 될 때도 있네.

    최정훈이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대답을 해주지 않자 알파는 혼란에 빠졌다.

    - 아, 씨! 죽었잖아!

    "…뭔 소린지 모르겠네요. 제 한국어가 아직 부족한가 봅니다."

    - 그래서, 용건이 뭔데?

    알파가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말했다.

    "한 번 만나 뵙고 싶어서요. 그런데 최정훈 씨가 주선을 안 해줍니다."

    "미친! 내가 어떻게 데리고 가!"

    최정훈이 분노를 담아 외쳤지만, 이지혁은 깔끔하게 결론을 내려주었다.

    - 그럼 집으로 와.

    "네?"

    반문한 것은 알파가 아니라 최정훈이었다.

    - 뭐 그리 대단하다고 얼굴 한 번 못 보겠어요. 데리고 와요.

    "헐……."

    알파의 그것 보라는 듯 득의만면한 표정을 보며 최정훈은 알 수 없는 패배감을 느껴야 했다.

    "끄응."

    알파도 알파지만, 이지혁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진짜 데리고 갑니까?"

    - 아, 그 새끼는 선물 사 오라고 하세요. 첫 방문이니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이 미친놈아!

    - 오, 부활했다. 끊어요.

    뚝.

    전화가 끊기자 최정훈은 아무 말 없이 액정을 바라보았다.

    알파가 그런 최정훈을 보며 씨익 웃더니 입을 열었다.

    "제가 운전합니까?"

    "…내가 하지."

    최정훈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과격하게 엑셀을 밟았다.

    그래, 오늘 다 죽자!

    * * *

    "집 좋네요."

    "……."

    "크, 역시 최정훈 씨가 있으니까 일이 편하네요. 설마 검문 한 번 안 할 줄이야. 내가 들어왔으면 보안망을 몇 개나 뚫었어야 하는데."

    "네놈이 그걸 못 뚫을 리가 없잖아."

    "아, 뭐, 그렇기는 하죠. 그런데 그렇게 뚫고 이지혁 씨의 집으로 몰래 잠입했다가는 한 방에 지옥으로 갈 수도 있잖아요. 썩어도 준치라고, 저 사람이 재채기만 해도 저같이 연약한 사람은 뼈마디가 부러진다구요."

    "진짜 그랬으면 좋겠네."

    최정훈이 한숨을 쉬며 벨을 눌렀다. 지체 없이 문이 열리고, 최정훈이 안으로 들어갔다.

    오식이가 그를 맞았다.

    "거북이는?"

    오식이가 자신의 집 쪽을 가리켰다. 대낮에 대자로 뻗어 자고 있는 거북이의 모습을 본 최정훈이 한숨을 쉬었다.

    '이건 뭐, 동물원도 아니고.'

    이러다가 하나하나 계속 추가되겠다.

    고개를 저으며 현관으로 향한 최정훈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에이 씨!"

    익숙한 패배음이 들이며 이지혁이 방 밖으로 걸어 나왔다.

    "아니, 이 새끼들은 이 상황에도 게임을 하고 있나?"

    너는 인마!

    할 말이 참 많은 최정훈이지만, 필사적인 인내로 참아낼 수밖에 없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알파가 넉살 좋게 이지혁을 보며 인사했다.

    이지혁이 쀼루퉁한 눈으로 알파를 보더니 입을 열었다.

    "선물은?"

    "이곳은 동방예의지국 아니겠습니까. 미리 준비했죠."

    알파가 등 뒤에 숨겨둔 쇼핑백을 꺼내 이지혁에게 내밀었다.

    "뭔데?"

    "트레이닝복이요."

    "……."

    최정훈은 이지혁이 입고 있는 트레이닝복을 보고는 알파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걸 센스 있다고 해야 하는가, 센스가 없다고 해야 하는가.'

    미묘하다.

    매우 미묘하다.

    "쭉 보니까, 그 트레이닝복을 즐겨 입으시더라구요. 그래서 비슷한 걸로 사 왔습니다."

    이지혁이 눈살을 찌푸렸다.

    "나 이거 똑같은 거 열 벌 있는데, 이걸 또 사 왔어?"

    "무슨 말씀! 이건 다릅니다."

    "뭐가?"

    알파가 이지혁에게 다가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이건 미제라구요. 물 건너 공수해 왔습니다."

    "오?"

    이지혁이 희희낙락해하며 물건을 받아 들었다.

    '적당히 해라, 이 미친놈들아.'

    알파와 이지혁을 붙여놓았는데 빅뱅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게 더 이상했다.

    장하다, 지구. 잘 버티고 있구나.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 것 같은 이지혁의 반응에 되레 당황한 것은 최정훈이었다.

    저 인간 얼마 전에 알파 때문에 칼빵 맞고 죽을 뻔한 건 생각 안 나는 건가?

    수도(手刀)도 칼이라면 칼이니까.

    "앉아."

    "감사합니다."

    이지혁이 냉장고를 열고 음료수를 꺼내서 테이블 위에 올렸다. 그러고는 컵을 쟁반에 담아 왔다.

    "와, 이런 호사가 있나요. 이지혁 씨에게 뭘 얻어먹을 날이 올 줄이야."

    "내가 좀 예의바르거든."

    최정훈은 귀를 막고 싶은 충동을 이겨내느라 온 힘을 다하고 있었다. 결론이 어떻게 나든 간에 이 끔찍한 꼴을 최대한 빠르게 그만 보고 싶은 마음뿐이다.

    "그래서……."

    음료를 채운 이지혁이 소파에 등을 기대고는 알파를 바라보았다.

    "왜?"

    단도직입적인 질문.

    알파가 머리를 긁더니, 웃으며 대답했다.

    "안부도 안 묻고 바로 용건입니까?"

    "좋아 보이는데 뭐."

    "그렇긴 하지만요."

    "나 게임해야 하니까, 할 말 있으면 빨리하고 꺼져."

    "…악감정이 많아 보이시네요."

    이지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 나는 좀 겪은 일이 많아서 그 정도 일로 딱히 악감정 같은 건 느끼지 않아. 다만,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빼앗기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을 뿐이야."

    "음……."

    이지혁의 말에 알파가 의외라는 듯이 바라보았다.

    "담대하다고 해야 할지……. 사실을 좀 얻어맞아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왔는데 말이죠."

    "용건을 빨리 말 안 하고 귀찮게 하면 때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에, 그럼 안 되죠."

    알파가 가만히 이지혁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저와 손을 잡으시지 않겠습니까?"

    이지혁이 귀를 후볐다.

    "바쁜 사람 붙들고 뭔 개소리야? 꺼져, 새끼야."

    이지혁이 괜히 시간 낭비했다는 듯이 몸을 일으키자, 알파가 벌떡 일어나더니 이지혁의 팔에 매달렸다.

    "아니! 잠깐만! 뭐라도 좀 더 듣고!"

    "놔! 안 놔? 어디, 비싼 밥 먹고 개소리를 지껄여!"

    "계획이 있다니까요! 방법도 있습니다! 지금이야 의심하시겠죠! 하지만 그 계획을 들으시면 이지혁 씨도 무릎을 탁, 치실 겁니다."

    "너를 탁, 치기 전에 놓는 게 좋을 텐데?"

    "저, 저를 치셔도 좋습니다. 그렇지만 정말 계획이 있다니까요. 이대로라면 인류는 가만히 앉아서 죽을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제가 또 그런 건 못 보는 타입이라."

    "니가 저질렀잖아, 이 미친놈아!"

    "그것도 다 계획의 일환입니다. 설마 제가 아무런 계획 없이 그런 일을 벌였겠습니까?"

    "응."

    "이러지 마시고……."

    알파가 우는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지금 저한테는 이지혁 씨가 유일한 희망입니다. 우리 같이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 노력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와… 내가 살다 살다 이런 개소리는 진짜 오랜만에 듣는 것 같은데?"

    최정훈은 이지혁의 의견에 격하게 동의했다.

    다른 놈이면 몰라도, 어떻게 알파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 수 있는가.

    세상 모두가 세계 평화를 외치더라도 알파만은 저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양심도 없는 새끼."

    최정훈의 말에 이지혁도 고개를 끄덕였다.

    "야, 막말로 니가 악의 축 아니냐? 지금까지 벌어진 일 대부분 니가 저지른 거잖아."

    "오해입니다."

    "어느 부분이?"

    "…악의 축은 아니죠. 제가 대부분 저지른 건 맞습니다만."

    알파가 빙긋 웃자 이지혁이 머리를 감쌌다.

    "인간이란 건 아무리 알고 또 알아도 알 수가 없어. 이런 놈도 인간이라고 설치는데, 어떻게 알아?"

    최정훈은 미묘한 깨소금을 느끼고 있었다.

    '내가 그 심정이었지.'

    이번 일을 계기로 이지혁이 자신 때문에 고통받는 이들의 심정을 십분지 일이라도 알아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러니까……."

    이지혁이 허탈한 얼굴로 알파를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까지 네가 저지른 일은 다 네가 저지른 일이 맞지만, 나름의 의도가 있었다?"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마계의 문을 연 것도 네가 한 짓이 맞지만, 그게 다 같이 죽자고 한 짓이 아니라 그게 인류에게 이롭다고 생각해서 한 일이다?"

    "아주 잘 아시는군요. 역시 이지혁 씨이십니다."

    이지혁이 알파 먹으라고 따라놓은 주스를 들어 벌컥벌컥 마셨다.

    "…그거 제 건데……."

    "너 줄 건 없어, 새끼야."

    이지혁이 머리를 벅벅 긁고는 알파를 노려보았다.

    "아주 신박한 개소리군. 그래, 좋아. 그 개소리가 사실이라고 치자고. 하지만 그게 모두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내가 너한테 협조해야 할 이유는 없잖아. 안 그래?"

    "인류의 평화를 위해서라고 생각하시면?"

    "평화는 얼어 죽을!"

    "아, 죄송! 제가 한국말이 아직 익숙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평화라기보다는 생존이죠, 생존! 이지혁 씨와 제가 힘을 합치면 저 마계 놈들을 몰아낼 수 있거든요. 이대로 시간이 흐른다면 어렵겠지만, 게이트를 빨리 연 덕분에 저희에게 아직 여력이 있지 않습니까? 제 계획에 이지혁 씨가 동참해 주시기만 한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습니다."

    "…계획?"

    "예. 확실한 계획이죠.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들으시면 깜짝 놀라실걸요?"

    이지혁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개소리를 이만큼 들었는데 조금 더 들어주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 좀 더 듣다 보면 귀에서 피가 날지도 모르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대체 무슨 말이 나오는지 알고 싶어졌다.

    "그래서, 그 계획이라는 게 뭔데?"

    알파가 빙긋 웃더니, 입가로 손가락을 가져갔다.

    '아니지?'

    "비밀입니다."

    이지혁이 빙긋 웃었다.

    알파도 이지혁을 마주 보며 웃었다.

    "나가! 이 미친놈아!"

    이지혁이 던진 쿠션이 알파의 머리를 때리고 천장으로 치솟아 올랐다.

    * * *

    "아니, 제 말을 일단 들어보십시오."

    "안 들어! 안 들어, 이 새끼야!"

    이지혁이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와, 또라인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네. 살다 살다 저런 미친놈은 처음 보는데?"

    최정훈도 공감했다.

    비슷한 급의 또라이를 한 명 더 안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하는 짓거리를 보니 저놈이 원탑이다.

    "이게 새어 나가면 안 되는 일급비밀이란 말입니다!"

    알파가 절규했다.

    하지만 그 절규를 듣는 이지혁의 표정은 뚱하기 그지없었다.

    "알았으니 꺼져. 너희끼리 비밀 지키면서 알콩달콩 살라고, 나는 그냥 여기서 게임이나 하다 죽으련다."

    "이지혁 씨가 도와주시면 살 수 있다니까요!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들으십니까? 하, 답답하네, 진짜!"

    "……."

    어안이 벙벙하다는 말을 이럴 때 쓰는 거구나.

    천 년을 넘게 살아온 이지혁이다.

    그동안 그가 보아온 인간 군상 중에 제정신 아닌 놈이 한둘이었겠는가.

    하지만 눈앞의 이 또라이는 그 수준을 넘어섰다.

    세계제일을 뛰어넘고, 역사상 최고를 넘어, 차원제일의 미친놈이 분명했다.

    "들어나 보자."

    사람이 너무 황당하면 되레 침착해진다고 하던가.

    "그래서 내가 뭘 도와주면 되는데?"

    "도와주시는 겁니까?"

    "아니, 도와주려고 해도 뭘 해야 하는지는 알아야 도와줄 거 아냐."

    "그렇죠."

    "보다시피 나는 힘을 다 잃었어. 그런데 내가 대체 뭘 도울 수 있다는 거지?"

    "아니죠."

    알파가 손가락을 흔들었다.

    "저를 속이려고 해도 소용없습니다. 이지혁 씨는 전투 능력을 모두 잃은 게 아니잖습니까?"

    "응?"

    "마족을 통해서 그쪽 메커니즘은 이미 다 파악했습니다. 이지혁 씨는 흑마력을 더 이상 다룰 수 없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일반인이 되어버린 건 아니죠. 그냥 마나를 쓰면 되니까요."

    "…너, 흑마법사가 무슨 뜻인지는 아냐?"

    "남자가 25세가 되기 전에 남자와……."

    "아, 이 미친 새끼야! 진짜!"

    이지혁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세상에, 이제껏 살아오면서 대화를 하며 말리는 날이 오다니.

    왜 하늘은 나를 낳으시고, 이 미친놈을 또 낳으셨다는 말인가.

    이지혁은 모차르트를 질시하는 살리에리가 된 심정으로 알파를 노려보았다.

    천 년을 단련했지만 타고난 천재는 이길 수가 없었다.

    "내가 마나를 쓸 수 있었으면 마족이랑 계약을 했겠냐? 생각을 하고 말을 해!"

    "쓸 수 있죠."

    "응?"

    "아르고라스가 말하기를, 처음 이지혁 씨가 마나를 쓸 수 없었던 이유는 마나 친화도가 존재하지 않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라고 하던데요."

    "그렇지."

    에테르 기반인 이쪽 세계의 인간이 마나에 친화도가 있을 리가 없었다. 애초에 마나를 느끼지도 못하는데 무슨 수로 마나를 몬 안에 모으라는 말인가.

    "그런데 이지혁 씨는 이천 년이 넘도록 마력을 써왔잖습니까."

    "어, 그러네?"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와, 이거… 생각지도 못한 이야긴데?

    "그럼 그냥 마나도 쓸 수 있지 않을까요?"

    "와……."

    이지혁이 진심으로 놀랐다는 듯 알파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지? 나도 전혀 생각 못한 건데.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네."

    "전직은 사양하겠습니다."

    "구울로 전직시켜 줄 수 있는데?"

    "…사양하죠."

    이지혁이 놀랍다는 듯 알파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사실 그렇다고 해도 내가 큰 전력이 되지는 못할 텐데? 내 몸 안에는 자연적으로 흑마력이 들어 있어서 일반 마력은 충돌을 일으키거든. 결국 몸 밖에서 마나를 연성해야 하는데, 흑마력을 운용하는 것에 비하면 최대 10% 정도의 출력밖에 못 낼걸? 안 해봐서 잘 모르겠지만, 재수 없으면 1% 정도?"

    '이지혁 씨의 1%라…….'

    어느 정도의 수치인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최정훈의 생각으로는 그 정도의 힘으로도 충분히 NDF급은 될 것 같지만, 마왕들을 상대하는 데 있어서는 도움이 안 되는 수준이라고 봐도 좋았다.

    '미묘하군.'

    하지만 알파는 다 알고 있다는 듯 웃었다.

    "아, 뭐, 그 정도야 감안하고 있습니다. 어차피 이지혁 씨를 전력으로 보고 도와달라고 하는 건 아니거든요."

    "응?"

    이지혁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알파를 바라보았다.

    전력으로 보고 도와달라는 게 아니면 자신이 무슨 쓸모가 있다는 말인가.

    "내 입으로 말하자니 좀 쑥스럽지만……."

    "…네?"

    "나는 사실 싸우는 것 빼면 거의 무쓸모에 가까운 인간이라 별로 도움이 안 될 텐데."

    "강렬한 주제 파악이네요. 감동했습니다."

    알파가 낄낄대며 웃었다.

    "제가 이지혁 씨에게 얻고 싶은 부분은 마나 컨트롤 능력입니다."

    "마나?"

    "마나를 다뤄서 해결해야 할 일이 몇 가지 있어요. 다른 자잘한 거야 뭐, 큰 문제가 아닙니다. 하지만 제일 중요한 게 하나가 있죠."

    "뭐?"

    알파가 살짝 뜸을 들이더니 입을 열었다.

    "인류에게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우리 측에 마법사가 없다는 거죠."

    "…니 머리에 개념이 없는 게 아니고?"

    "사실 그것도 좀 문제죠. 하지만 이것보다 중요하진 않습니다. 마나 생명체들을 상대하는 데 마나를 다룰 수 있다면, 전력이 급상승하겠죠?"

    "……."

    이지혁의 머리가 팽팽 돌아가기 시작했다.

    평소 사용하지 않던 뇌가 돌기 시작하자 머리에서 김이 뿜어져 나올 것 같았다.

    "마법?"

    인류에게 마법을 가르친다고?

    "으으음……."

    이지혁은 고개를 젓고 말았다.

    "숙련된 마법사 하나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려서 만들어지는 건지나 알고 있냐? 지금부터 가르치기 시작하면 아마 10년은 걸려야 마수 한 마리 때려잡을 수 있을 거……."

    어라?

    이지혁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최정훈을 바라보았다.

    최정훈이 어색한 얼굴로 대답했다.

    "안 그래도 요즘 마나가 자동으로 충전이 되는 것 같더라구요."

    "십 년?"

    가장 시간 효율이 좋은 차원으로 보낸다면, 그 정도의 시간은 벌 수 있지 않을까?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차원 간의 게이트를 열 수 있는 이지혁이라면, 십 년의 시간은 그리 어렵지 않게 벌 수 있었다.

    인생의 십 년을 수련을 하는 데 모두 바치겠다는 인간이 쉽게 나오지야 않겠지만…….

    "일반인을 보낼 생각은 없습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이미 이지혁 씨를 통해서 마력과 에테르가 공존했을 경우에 시너지가 발생한다는 사실이 증명되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다시 말하면, 능력자들도 몸속에 마나를 쌓을 수 있다는 거죠. 이전이었다면 마나 자체가 없으니 불가능한 일이지만, 지금은 가능하죠."

    이지혁이 감탄한 눈으로 알파를 바라보았다.

    "와, 그게 그렇게 되나? 너 진짜 똑똑하다."

    "저와 이지혁 씨의 가장 큰 차이 아니겠습니까?"

    "근데 싸가지는 니가 좀 더 없는 것 같다."

    "…죄송합니다."

    알파가 어깨를 쭉 펴더니 입을 열었다.

    "어차피 이지혁 씨가 일일이 나서서 하나하나 가르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우선은 현존하는 최강의 능력자에게 마법을 가르쳐야죠. 그리고 시너지가 어떻게 나오는지를 보는 겁니다. 그런 후에 차차 수를 늘려 나가는 거죠."

    최정훈이 침을 꿀꺽 삼켰다.

    이거,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말도 안 되고, 허황된 생각 같지만, 미묘하게 그럴싸했다. 지금 능력자들이 다들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면, 인류의 전력은 급상승할 것이다. 마법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는 아펠드리체나 이지혁만 보더라도 알 수 있는 것이니까.

    "그럼 그 인류 최강의 능력자는 누군데?"

    "당연히 접니다!"

    알파가 가슴을 쭉 내밀며 말했다.

    "이지혁 씨가 무용지물이 되어버린 이상!"

    "무용지물은 좀 심한데……."

    "그럼 이지혁 씨가 무쓸모가 되어버린 이상!"

    "야이 씨!"

    "저는 명실상부한 인류 최강의 능력자이자 최강의 생물이지요. 제가 아니면 누가 그 막중한 책임을 질 수 있겠습니까?"

    "끄응."

    이지혁이 터덜터덜 걸어서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니까 네 말을 정리하자면, 에테르 능력을 갖추고 있는 능력자에게 마법을 가르쳐서 마나와 에테르의 시너지를 일으키게 해보자, 이런 거야?"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와, 이거… 진짜 그럴싸한 개소린데? 그런데 왜 물고 싶지? 상한 떡밥 같은데, 정말 그럴싸하게 상했네."

    이지혁이 머리를 감싸 쥐었다.

    저건 미친놈이다.

    그런데 미친놈이라서 그런지, 다른 사람들은 생각도 하지 못한 일을 잘도 생각해 내고 있었다. 지금 당장은 중구난방이지만, 이걸 어떻게 잘 꿰어보면 재밌는 게 나올 것도 같다.

    마나가 없는 세상일 때야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겠지만, 지금 지구에는 마나가 넘쳐 난다.

    마계와 동화된 스팟이 점점 더 활성화되면서 거의 마계와 동일한 수준의 마나가 유입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이지혁이 어떻게 마나를 느끼게만 해줄 수 있다면, 친화도가 없는 능력자들도 마력을 사용할 수 있을지 모른다.

    베라프에서는 누구도 이지혁을 위해서 그런 수고를 하려 하지 않아서 시도도 못해보았지만 말이다.

    "제가 모르모트가 되어드리죠."

    "하, 씨."

    이지혁이 허탈한 눈으로 알파를 바라보았다.

    "이 아이디어를 가지고 온 게 네놈만 아니었으면 참 기뻤을 텐데."

    "인생이란 게 다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그럼 너는 이 상황을 강제로 만든 거냐? 내가 아직 살아 있고, 마나가 풍족하고 인류가 힘을 덜 잃은 이 상황을?"

    "…그렇게까지 노린 건 아니었습니다. 아무래도 질질 끌다 게이트가 열리면 답도 없다 싶었을 뿐이죠. 아르고라스 놈이 하는 짓을 보니, 동화가 되면 인류가 멸종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싶었거든요."

    "소발에 쥐 잡았네."

    "쥐라도 잡은 게 어딥니까?"

    이지혁이 쓰게 웃었다.

    저 말을 다 믿을 생각은 없었다. 알파의 꿍꿍이가 이게 전부일리도 없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알파의 생각은 코너에 몰린 인류가 반격을 할 수 있는 실마리라는 것 역시 사실이었다.

    그 실행자가 될 사람이 알파라는 게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해보지."

    "이지혁 씨!"

    최정훈의 격한 외침에 이지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뭐, 물론 마음에 드는 놈은 아니지만, 어쩔 수 없잖아요. 안타깝게도 이놈이 현존하는 최강의 능력자라는 것도 사실이고, 그리고 저놈 성격이면 이미 준비를 대충 마쳐 놨을 것 같은데?"

    "당연히 그러합니다."

    "거 봐요."

    최정훈이 못내 찝찝하다는 투로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나도 이놈에게 그런 능력을 주는 건 영 마음에 안 들어요. 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요. 마계에 멸망하느니, 미친놈이 지배하는 세상이 좀 더 나으니까."

    "으……."

    최정훈도 더 이상은 이지혁을 말리지 못했다. 이지혁의 말에 틀린 점이 없기 때문이다.

    "현명하신 선택입니다. 그럼 저는 일단 협상이 타결된 것이라 알고 준비를 조금 마쳐 놓고 오겠습니다."

    "급하다며?"

    "급해도 할 일은 해야죠."

    알파가 나직하게 말했다.

    "사실 이렇게 간단하게 타결될 줄은 몰랐거든요. 말을 안 들어주시면 삼 박 사 일 밖에서 텐트라도 치고 버틸 생각이었는데."

    "서아영이 잘도 보고 있겠다."

    "지랄마녀는 저도 무섭습니다. 여하튼 그럼 저는 잠시 다녀오지요."

    스슷.

    알파의 모습이 사라지자 이지혁이 천장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뭔 이런 일이 다 있나……."

    "…그러게요."

    둘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 * *

    "이거, 정말 괜찮겠습니까?"

    최정훈은 필사적으로 상황을 정리하려 했다. 그가 저지른 일도 아니고, 어찌 보면 이지혁과 알파가 저지른 일이지만… 이상하게 그가 수습을 해야 하는 모양새였다.

    억울하긴 하지만, 이런 일이 어디 한두 번이던가.

    "글쎄요."

    천하의 이지혁도 이번 일만큼은 답이 안 나온다고 생각했는지 연신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매우 먹음직스러운 떡밥이기는 한데 물고 보니 쉰 떡밥인 것 같은 기분도 들고, 다른 건 다 이해할 수 있는데 은근히 알파만 좋은 일 시켜주는 것 같아서 좀 당한 느낌도 들고…….

    '인류를 위해서'라는 대의명분하에 껄끄러움을 모두 묻어둘 만큼 이지혁은 대인배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르치지도 않을 수 없는 상황 아닌가.

    "끄으응……."

    이지혁은 앓는 소리를 내며 한숨을 쉬었다.

    희망 한 점 없는 상황에서 돌파구를 보았다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다.

    에테르와 마나의 조합은 그가 지구로 돌아와 부족한 마나를 인해 발생하는 파괴력을 채우기 위해 연구하던 것이니까.

    하지만 이지혁은 그걸 다른 이들에게 알려줄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첫째로 이지혁이 연구하던 시점에 이 지구에는 마나가 없기에 알려줄 방법조차 없었기 때문이고, 상황이 여기까지 이르렀음에도 이지혁이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한 건… 이지혁 자체가 다른 이들을 강화시킨다는 개념 자체가 없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모든 문제는 그가 강해지는 것으로 해결되었으니까.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바탕으로 타인을 강화시킨다는 것은 그의 상식에는 없는 문제였다.

    과거에 NDF를 써먹기 위해 수련시킨 적은 있지만, 그것도 귀찮음을 피하고 싶고 희생을 줄이고 싶다는 생각이 컸지, 그들을 성장시킴으로써 자신의 전력을 강화시킨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실제 별 도움이 안 되기도 했고 말이다.

    그러니 다른 이들을 강화시켜서 이 사태를 해결하겠다는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오랜 세월 동안 단독 개체로서 세상을 살아온 이지혁이 가지는 한계였다.

    그걸 알파가 깨우쳐 준 것이기는 한데…….

    "그냥……."

    이지혁이 최정훈을 보며 씨익 웃었다.

    "기분도 엿 같은데, 안 한다고 하고 배 째버릴까요?"

    "……."

    최정훈은 생전 처음으로 이지혁의 개드립에 동조하고 싶은 충동을 받았다.

    아무리 인류를 위해서라고는 하나 알파와 협력을 한다는 사실이 영 꺼림칙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노림수가 있겠죠?"

    "뭐, 그거야 당연한 일이고."

    알파 정도 되는 인간이 그 속내를 모조리 드러내 보일 리는 없었다. 이쪽과는 악연으로 얽힌 사이지만, 알파가 이쪽 세계와 베라프를 통틀어서 이지혁을 제대로 엿 먹인 유일한 인간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

    "노림수가 있다고 하더라도… 안타깝지만 우리 쪽은 선택권이 없는 것 같습니다. 알파가 말한 대로 능력자를 강화시키는 것은 NDF도 할 수 있겠지만……."

    최정훈은 말끝을 흐렸다.

    전체적인 강화는 다른 쪽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지혁의 자리를 대체할 이가 없다는 것이 문제다. 김다현이나 서아영에게 마나를 가르친다고 해서 마왕을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유일하게 가능성이 있는 서아영의 경우는 마나를 가르치기가 지난하다는 문제가 있었다. NDF의 경우에는 이지혁의 마나를 통해 1차적인 강화를 한 적도 있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마왕과 상대할 수 있는 수준까지는 올라서지 못했다.

    단지 이지혁에 앞서 시간을 끄는 역할에 만족해야 했을 뿐.

    그러니 강화되기 이전의 서아영보다 더 강하고 주체적으로 마력을 활용할 수 있을 만큼 지능이 뛰어난 인물이 필요했다.

    '그게 하필이면 알파란 말이지.'

    세상에 정의란 게 없다는 건 이제 새삼 증명할 필요가 없었다. 알파 같은 인간이 세계 최강이라는 것에서 인과응보는 헛소리라는 것이 증명된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끄응."

    이지혁도 같은 생각인지 앓는 소리를 냈다.

    안 하려면 안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지금 당장 알파와 알파 주변에 모여 있는 최상위급 능력자들을 성장시키는 것이 인류를 강화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에이."

    이지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디 가시려구요?"

    "산책요."

    이지혁이 머리를 흔들며 밖으로 나가자 최정훈은 근본적인 의문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보통 손님을 집에 혼자 냅 두고 산책을 가나?'

    이지혁이니까, 뭐.

    어……?

    그런데 지금, 저 양반 혼자 두면 안 되는데?

    최정훈이 벌떡 일어나 이지혁의 뒤를 쫓았다.

    * * *

    크리스토퍼는 시가에 불을 붙였다.

    "후우……."

    뿌연 담배 연기가 실내로 낮게 번져간다. 환기가 잘 안 되는 사무실 안이지만, 지금은 담배를 피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기분이었다.

    "그쪽에서 우리의 제의를 받아들이겠습니까?"

    "안 받으면?"

    크리스토퍼는 되레 반문했다.

    "제이크, 이건 장난이 아니야. 당장 수천만의 목숨이 걸린 거래라고. 저들이 내 제안을 받지 않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아? 이건 제안을 가장한 협박이지. 하지만 저쪽에서는 암담한 와중에 내려온 한 줄기 동아줄같이 느껴질걸?"

    하지만 그 말을 하고 있는 크리스토퍼의 얼굴 역시 밝지는 않았다.

    "제기랄."

    그는 양심이 없는 인간이 아니었다.

    필요에 따라서 양심을 조절할 수 있는 인간일 뿐.

    보통은 냉혈한이나 인간의 감정을 가지지 못했다고 평해지는 이들도 감정이 없는 것이 아니다. 필요에 따라 감정을 배제할 수 있을 뿐.

    그러니 그가 지금의 상황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이지혁이 없었다면 미국이 파멸 직전까지 갈 상황도 몇 번은 있었다.

    그때마다 이지혁의 도움을 구한 것은 다름 아닌 크리스토퍼 자신이었다.

    "역사는 알아줄 겁니다."

    "그래, 역사에 다시없을 개새끼로 말이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지 않습니까?"

    "제이크."

    크리스토퍼가 담배를 깊게 빨아들이고는 천천히 내뱉었다. 그러고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세상에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은 없어. 보통 그건 변명일 뿐이야. 방법은 항상 있지. 하지만 그 방법을 실행하는 것이 힘들고 귀찮을 때, 사람들은 항상 어쩔 수 없다고 말하지."

    깊게 심호흡을 내쉰 크리스토퍼가 씹어뱉듯 말했다.

    "그러니 잊지 말라고. 위안하지 마. 이 일을 하는 놈이라면 자기가 저지르고 있는 일이 얼마나 엿 같고 용서받지 못할 일인지 절대 잊어서는 안 돼. 대의명분에 함몰되는 인간은 괴물이 된다. 괴물은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파멸시키지."

    "그런데 그것도 자위의 일종 아닌가? 나는 아직 괴물이 되지 않았다는 자위 말이야."

    크리스토퍼의 고개라 천천히 돌아갔다.

    익숙하면서도 익숙하지 않은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수도 없이 들었고, 수도 없는 영상과 자료를 통해 접했지만, 그 얼굴을 직접 본 적은 없는 자.

    코드네임 알파.

    미국과 그가 낳은 괴물이자 최악의 능력자인 알파가 어느새 비어 있는 소파를 차지한 채 다리를 꼬고 있었다.

    알파가 찡그린 채 얼굴 앞으로 손을 흔들었다.

    "이봐, 맥클라렌. 실내에서 담배를 피우는 건 네 마음이겠지만, 예산이 빠듯한 것도 아닐 텐데, 공기청정기 정도는 가져다 두라고. 그게 아니면 내가 다음에 올 때 선물로 사 들고 올까?"

    그토록 찾고 싶어 했고, 그토록 죽이고 싶어 했던 인간이다. 그런데 그렇게 찾을 때는 나타나지 않더니, 지금처럼 최악의 타이밍에 등장하여 그의 속을 끓이고 있었다.

    "반갑다고 해야 하나?"

    "물론 나도 반갑지. 나를 이렇게나 열렬히 그리던 사람이 있는데 말이야. 설령 여자가 아닐지라도 감동적인 일이지. 안 그래?"

    알파가 낄낄대며 웃었다.

    크리스토퍼는 섣부르게 움직이지 않았다.

    지금 주변에 도움을 청하려 한다면 알파가 움직일 것이다. 그건 좋지 못했다.

    그리고 현재 이곳에 있는 전력만으로 알파를 상대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있었다.

    "텔레포트도 가능했나?"

    "오, 그런 정보는 없던 모양이군. 미 정보국도 별로 대단할 것 없다는 것은 매우 극비 정보일 텐데, 이걸 이렇게 나 같은 범죄자 놈에게 말해줘도 되는 건가?"

    "그리고 네놈의 혓바닥이 윤활유라도 바른 것처럼 잘 돌아간다는 것도 정보에 추가해야 할 것 같군. 우리 애들은 이런 디테일한 부분은 잘 체크하지 않는단 말이야."

    "직접 뛰는 국장이라니, 가슴 아픈 일이군."

    크리스토퍼는 천천히 시가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태연해 보이는 동작이지만, 크리스토퍼의 움직임은 알파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 느릿하기 그지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이는 세계제일의 광인이자, 그가 관련되어 있는 프로젝트 판도라가 낳은 부작용이었기 때문이다.

    "네놈이 그냥 죽었더라면 이런 꼴을 안 봐도 되었을 텐데."

    "큭큭, 원래 악당은 쉽게 죽지 않는법 이야, 맥클라렌. 그래서 너도 살아 있잖아. 안 그래?"

    "기막히고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예시로군."

    크리스토퍼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원하는 게 뭐지? 귀하신 분이 여기까지 왕림하신 이유가 있겠지? 나는 바쁜 사람이니 용건만 간단히 해주기를 부탁하지. 너 말고도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아서 말이야."

    "흐음……."

    알파가 재미있다는 듯이 웃고 말했다.

    "피차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으니 이야기하지. 첫 번째로, 두더지도 아닌데 빛도 못 보며 살고 있는 내 친구들을 석방해 주지 않겠어?"

    "들을 가치도 없는 개소리로군."

    "아냐, 아냐.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고, 맥클라렌. 지금 너희에게 그들은 식량을 축내는 버러지 같은 거잖아? 그런데 그들을 석방하는 순간, 그들은 인류해방전단의 훌륭한 전사가 될 거라고. 이리 봐도, 저리 봐도 남는 장사지."

    "그건 내가 결정하는 거겠지. 그래서 두 번째는?"

    "적당히 넓고 훈련하기 좋은 장소를 수배해 줬으면 좋겠어. 아프리카 쪽으로 알아봐도 되긴 하지만, 거긴 안타깝게도 에어컨이 안 나오더라고."

    순간, 크리스토퍼의 눈이 가늘어졌다.

    훈련할 수 있는 장소?

    "그것도 일단은 알겠어. 그래서 또 있나?"

    "있지. 그것도 가장 중요한 내용이 남아 있어. 이지혁에게서 손을 떼. 다른 건 이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지."

    "이봐, 알파."

    크리스토퍼는 피식 웃고는 시가를 꺼내 끝을 잘라냈다. 그런 후, 시가에 구석구석 불을 붙인 크리스토퍼가 입을 열었다.

    "싸우는 사이에 정이라도 들었나? 아니면 니가 겪은 일을 이지혁이 겪지 않게 하겠다는 인도주의의 발현인가? 네가 이지혁을 감싸야 할 이유는 도통 모르겠는데?"

    "필요하니까."

    알파는 간단히 설명을 마쳤다.

    "그리고 이건 부탁이 아니라 경고야. 협박이라고 해도 좋아, 크리스토퍼. 네놈이 이지혁 주변에 붙여놓은 놈들은 지금쯤 모조리 마계가 아니라 지옥에서 지옥불이 얼마나 따뜻한지 측정하고 있을 거야. 이지혁을 건드린다면 너 역시 같은 꼴이 되게 해주지."

    알파가 으르렁대듯 말했다.

    * * *

    "이해할 수가 없군."

    크리스토퍼는 알파의 위협을 정면으로 받으면서도 태연함을 유지했다. 하지만 그건 겉모습일 뿐.

    알파가 보통의 범죄자라면 크리스토퍼는 꿈쩍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아는 알파라는 자는 말 그대로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알 수 없는 이였다.

    그저 기분이 내키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지금 이곳을 폭파시켜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을 이가 바로 알파였다.

    이지혁이 그 파괴력과 예측 불가성 중 파괴력에 좀 더 포인트가 쏠려 S급 위험인물로 분류되었다면, 알파는 과격성과 예측 불가성에 좀 더 포인트가 쏠려 있었다.

    당당하지 않은 모습을 보인다면 순식간에 먹힌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비꼬았고, 태연한 모습을 가장했다.

    하지만 지금 크리스토퍼의 속은 썩어 들어가는 중이었다.

    "왜 이지혁을 감싸는 거지?"

    "말했을 텐데? 필요하니까."

    "…그가 왜 필요한가? 그는 이제 모든 힘을 잃었을 텐데?"

    "흠, 맥클라렌도 감이 많이 떨어졌군."

    알파가 키득대며 웃었다.

    "경고하지, 맥클라렌. 아무리 봐도 당신의 그 머리도 이제는 다된 모양이야. 나이가 들어서 판단력이 흐려졌다는 것을 본인은 잘 모르는 경우가 많지. 늙으면 사람은 언제나 예전에 자신이 하던 방식이 옳다고 여기기 마련이지. 거기서부터 문제가 발생하는 거야. 오, 친애하는 맥클라렌. 이제는 늙어버린 내 친구여."

    알파는 가만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크리스토퍼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알파의 접근에 주변을 지키던 이들이 일제히 일어나 크리스토퍼의 앞을 가로막으려 했지만, 크리스토퍼가 손을 들어 그들을 만류했다.

    알파는 자신을 막으려는 사람들이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듯이 그들을 무시하고는 크리스토퍼에게 바짝 다가와 말했다.

    "이봐, 맥클라렌. 이제는 제대로 작동 안 하는 그 머리를 필사적으로 굴려보라고. 자네의 판단 하나 때문에 세상이 망할 수 있다는 걸 잊은 모양이군. 이지혁이 모든 힘을 잃었다고 생각하나? 그는 지금이라도 마음만 먹으면 세계를 날려 버릴 수 있어."

    "……."

    "그는 힘을 잃은 게 아니라 더 이상 쓰지 못하는 거야. 그 둘의 차이를 모르나? 어차피 이 꼴을 당할 바에야 다 같이 죽겠다고 이지혁이 마음먹는 순간에 지구는 마계가 아니라 이지혁의 손에 멸망하게 될 거야. 그리고 마계도 같이 망하겠지."

    말을 하던 알파가 고개를 갸웃했다.

    "생각해 보니… 이거, 해피엔딩 같은데? 인간과 마족들이 모두 없어진 세상에서 마수와 동물들은 다들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알파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지구의 입장에서는 해피엔딩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절대 그런 꼴을 당하고 싶은 생각이 없으니까. 괜히 물귀신처럼 사람 끌어들여 죽지 말고 대가리에 줄기세포라도 심는 게 어때? 파릇파릇한 세포가 좀 생기면 지금 멸망해 버린 당신의 판단력도 조금은 돌아올 테니까 말이야."

    알파가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려 다시 소파에 가 앉았다.

    "일단 담배부터 좀 끊어. 그게 뇌세포를 파괴한다고 하더라고."

    "…충고 고맙군. 하지만 나는 판단력이 떨어진 게 아니라 충분한 준비를 끝낸 것뿐이야."

    "보통 판단력이 없어진 것들이 그런 말을 하지. 잘 생각해. 네가 정말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마족들은 슬금슬금 전진해 오고 해답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초조함에 이성을 잃어버린 건지 말이야. 언제나 극에 몰린 인간은 자신의 판단이 이성적이라고 믿기 마련이거든. 너 같은 멍청이들 때문에 역사는 항상 후퇴해 왔지."

    알파는 손가락으로 총을 만들어 크리스토퍼를 쏘는 시늉을 했다.

    "생각 같아서는 지금 당장 네놈을 죽여서 세상을 밝고 아름다운 사회로 만들어 버리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네 대체제가 마땅하지 않단 말이지. 그것만 아니었으면 너를 땅 밑으로 끌고 가서 내가 겪은 재미난 일들을 다 겪게 해줄 텐데 말이야."

    크리스토퍼가 혼란스럽다는 얼굴로 알파를 바라보았다.

    "이 모든 것은 네가 만든 세상이 아닌가."

    "맞아. 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지금 너희가 넘겨짚고 있는 게 아냐. 하나는 말해주지. 나는 세상이 멸망하는 걸 원하지 않아. 저 징그러운 마족 놈들이 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도 원하지 않지."

    "그럼 왜 마계의 문을 열었지?"

    "같은 대답을 두 번 하는 건 별로 즐기지 않아. 그냥 그렇게만 알고 있으면 돼. 정 듣고 싶다면, 내가 아니라 최정훈에게 들으라고. 그가 더 이상 당신을 상대해 줄지는 의문이지만 말이야."

    알파가 낄낄대며 소파에 등을 기댔다.

    "여하튼 내 요청은 전부 승인되는 거겠지? 미국은 돈이 많은 나라잖아. 예산 조금만 투입하면 내가 아주 끝내주는 결과를 가져다줄 거야. 역사에는 어쩌면 능수능란한 크리스토퍼가 미친개를 잘 길들여 이용했다고 쓰여질지도 모르잖아? 응? 배 나온 대머리 아저씨에서 인류를 구한 영웅이 될 기회야!"

    "대머리 아니야, 이 자식아!"

    "…가발 아니었어?"

    "닥쳐."

    크리스토퍼가 씩씩대다가 짜증이 난다는 듯이 시가를 물었다.

    "하나만 대답해 봐."

    "얼마든지."

    "네가 진짜 하고 싶은 것이 뭐지? 도무지 네놈이 원하는 게 뭔지 이해가 안 가서 그런다."

    "그런 걸 말해 달라고 하다니, 정말 크리스토퍼도 다됐구만. 안타까운 일이야. 그래도 예전의 당신에게는 카리스마라는 것이 있었는데 말이야."

    유들유들한 얼굴로 비꼬아대는 알파의 얼굴에 당장에라도 총알을 박아 넣고 싶은 심정이지만, 크리스토퍼는 인내하고 또 인내했다.

    "뭐, 어려울 것도 없으니 말해주지. 내가 원하는 건 우리 신인류가 주도권을 쥐는 거야. 그런데 그게 꼭 너희 구인류의 멸망을 뜻하지는 않는단 말이지. 관대하신 알파께서는 당신들의 생존권 역시 존중해.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당신들이 모조리 없어진다면, 우리끼리는 이 문명을 유지하는 것도 힘들 테니까."

    "으음……."

    "그러니 그런 눈으로 보지 말라고. 내가 마음을 먹었다면 굳이 이 세상을 여기까지 몰고 올 필요도 없었어. 너희를 모조리 패망시키는 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야. 그 뒤에 이지혁이라는 이레귤러와 상대해야 하는 게 문제였을 뿐이지."

    "그래서 이지혁을 무력화시킨 건가?"

    "하? 내가? 개 같은 소리 하지 마. 내 계획에서도 이지혁은 좀 더 활약을 해줬어야 돼. 그가 저리된 것은 그를 개처럼 부려 댄 너희 덕분이지. 안 그래?"

    짙은 담배 연기가 퍼져 나갔다.

    "…정신이 좀 드는군."

    "이래서 민주주의와 의회정치가 인류가 낳은 문화의 꽃이라는 거야. 인간은 혼자서는 병신이 되기도 하거든. 그걸 인간 스스로 인정하고, 병신에게 '너 지금 병신이야'라는 것을 알려주는 체계를 만든 거지. 멋지고 훌륭해."

    크리스토퍼는 입술을 꽉 깨물고 입을 열었다.

    "좋아, 승인해 주지. 네가 원하는 건 다 해주겠다."

    "국장님!"

    "시끄러워!"

    기겁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요원들을 한마디로 입 다물게 만든 크리스토퍼가 알파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해주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인데, 너와 손을 못 잡을 것도 없겠지. 대신 반드시 성과를 내야 할 거야."

    "성과하면 나지. 맨바닥에서 여기까지 왔잖아? 네 탄환을 피해가며 말이야. 안 그래, 내 오래된 친구?"

    "큭큭."

    크리스토퍼는 낮은 웃음으로 긍정했다.

    가장 상대하기 싫은 인간이지만, 거꾸로 따져 보면 그게 알파의 능력을 역설적으로 증명해 주고 있었다.

    "연락책을 보내. 준비 상황을 수시로 전해주지."

    "매우 고맙군."

    알파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잠시."

    크리스토퍼가 주변에 눈짓을 했다. 그러자 불만스러운 얼굴을 한 이들이 모두 밖으로 나갔다.

    알파가 그 광경을 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남자에겐 관심 없어, 맥클라렌."

    "헛소리 지껄일 시간이 있는 모양이군. 묻고 싶은 게 있다. 대체 너와 이지혁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응?"

    "이지혁이 너를 돕겠다고 나섰다는 건가? 얼마 전까지 너희는 서로 죽이지 못해서 안달하던 관계 아니었나?"

    "그렇지."

    "그런데 어떻게 그리 아무렇지도 않게 협력할 수 있는 거지? 아무리 공동의 적이 있으면 뭉칠 수 있다지만, 사람이란 건 그런 게 아니잖나."

    "쯧쯧."

    알파는 되레 크리스토퍼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혀를 찼다.

    "이봐, 네가 꼭 가야 하는 길이 있는데, 그 길을 거대한 바위가 막고 있다면 어쩔 거야?"

    "부수겠지."

    "그래. 부수거나 터널을 뚫어야지. 절대 그 바위를 증오하지는 않는단 말이야. 옆으로 치우는 데 성공했다면 바위를 장식물로 쓸 수도 있고, 아니면 석재로 활용할 수도 있는 거지. 바위는 거기 있었을 뿐인데, 왜 바위에 화를 내야 하지?"

    "흠……."

    "내게 있어서 이지혁이란 자연재해 같은 거야. 그냥 그런 사상을 가진 이가 거기에 있어서 치운 것뿐이지. 그런데 내가 왜 그곳을 막고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그에게 증오를 표해야 한다는 거지? 이 글로벌한 사회에 어울리지 않는 사고방식이로군. 그래서 네가 낡았다는 거야."

    "좋아."

    맥클라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야 이해하겠어. 그런데 이지혁은 왜 너를 찢어 죽이지 않는 거지? 힘을 잃어 그럴 수 없다면, 적어도 협력은 하지 않아야지."

    "좋게 말해주자면,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 타협을 해준 거지."

    "실제 이유는?"

    "넌 개한테 물렸다고 개를 죽이나?"

    "…응?"

    "집 앞을 지나던 개가 달려와 네 발을 살짝 깨물었다고 해서 개를 죽이나? 보통은 엉덩이를 걷어차는 수준에서 끝나기 마련이지. 그런 거야. 내가 그를 함정에 빠뜨린 건 그의 입장에서는 그 정도의 일 같더군. 물론 엉덩이를 걷어차 주지 못해서 짜증이 났을 수는 있어. 아마 지금쯤 내 엉덩이를 노리고 있겠지. 나 역시 그 정도는 맞아줄 생각이고."

    "죽을 뻔했는데?"

    "…멍청한 소리. 이지혁에게 있어서 죽음이라는 건 우리의 죽음과 같은 의미를 가지지 못해. 너는 대체 그에 대해 뭘 알고 있는 거지? 그는 인간으로 따지자면, 이미 수천 번이 넘도록 존재의 소멸을 경험했어. 네가 개에 물린 횟수보다 그가 죽었던 횟수가 더 많을 거야."

    크리스토퍼는 말문이 막혔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은데, 그게 또 그럴싸하다.

    이지혁에게는 어쩌면 알파에게 죽을 뻔했다는 사실 자체가 별것 아닌 상황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너는 위험해."

    크리스토퍼가 알파에게 해야 할 말 같았다. 하지만 실제로는 알파가 크리스토퍼에게 그 말을 하고 있었다.

    "너는 최대한 이지혁과 엮이지 마. 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니까. 말은 위험하다고 하면서 그가 왜 위험한지 전혀 몰라. 내 단언하건대, 지금 인류가 가장 걱정해야 할 것은 마족이 아니라 이지혁일 거야."

    "…어째서?"

    알파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 작자는 인간인 것 같지만, 인간이 아니야. 차라리 마족이 인간에 더 가까울 거야. 말해줘도 너는 이해 못해. 그러니 그냥 손을 떼면 돼. 내 말 명심해. 네 손으로 세계를 멸망시키고 싶지 않다면 말이야."

    알파는 그 말을 남기고 천천히 밖으로 걸어 나갔다.

    크리스토퍼는 아무 말 없이 문밖으로 나가는 알파의 등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 * *

    "그래서 이러고 있다고?"

    "네."

    최정훈의 손에 이끌려 현장으로 나온 이지혁은 건설 노동자로 변한 NDF 요원들을 보고는 낄낄대며 웃었다.

    "천직을 찾은 것 같은데?"

    윤혁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거, 생각보다 힘듭니다."

    "응. 알아요."

    "일 좀 하시죠? 월급 받잖습니까."

    "안 받아도 된다고 하는데 자꾸 주는 걸 어떻게 해요. 나는 이제 좀 평범하게 살고 싶단 말이에요. 그런데 안 빼주는데 어떻게 하냐구요."

    "이 사람, 누가 데리고 왔어!"

    느긋하게 차 조수석에 앉아서 빨대로 콜라를 쭉쭉 빨아대는 이지혁이었다.

    한창 먼지를 먹으며 일하고 있던 윤혁규에게는 그 모습이 그렇게 꼴 보기 싫을 수가 없었다.

    "부부장님이 데리고 왔잖아요."

    뒷좌석 창문이 내려가더니, 김다현이 머리를 쏙 내밀었다.

    "넌 왜 거기 있어?"

    김다현이 멋쩍게 웃었다.

    "아니, 뭐, 저는 딱히 도움도 안 되고, 할 짓도 없으니까……. 사실 옆에서 폭탄 펑펑 터지는 현장에 저같은 게 끼어 있으면 은근히 방해가 되는 게 또 사실이기도 하고."

    "나와라, 뒈지기 싫으면."

    "…네."

    김다현은 두말없이 차에서 내렸다. 조금 더 차 안에 있다가는 윤혁규가 차동차째로 김다현을 날려 버릴 기세였다. 그럼 김다현은 둘째 치고, 최정훈이 심장마비에 걸릴 것이다.

    "거기, 뭐해요?"

    현장 시찰을 돌던 서아영이 노닥거리고 있는 셋을 발견하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일 좀 해요! 일 좀!"

    "죄송합니다, 부장님."

    "일 시작한 지 며칠 됐다고 이렇게 농땡이 치는데! 제가 같이 안 간 현장에서 얼마나 놀고 다녔을지 눈에 훤하네요! 사람들이 한동안 좀 편히 쉬었으면 열정적으로 일할 줄도 알아야지."

    "…죄송합니다."

    이지혁이 서아영을 바라보다가 깨달음을 얻은 듯이 말했다.

    "와, 이게 부장쯤 되는 사람들이 꼰대짓하는 게 나이가 먹어서가 아니구나. 자리가 사람 만드네."

    "뭐예욧?"

    서아영이 이를 빠득빠득 갈았다.

    "보급관인 줄."

    "당신 군대도 안 갔다 왔잖아!"

    "갔다 왔는데? 한 열댓 번?"

    "으……."

    논리에서 밀리기 시작한 서아영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최정훈은 대체 왜 저 밉살맞은 인간을 현장에 데리고 왔단 말인가.

    일 좀 하라니까 '이제 힘도 없는데 이런 고사리손으로 무슨 도움이 되겠냐'는 말을 잘도 지껄여 대지를 않나, 그럼 저기 가서 서류 작업이라도 좀 하라니까 자기는 '머리가 나빠서 글도 잘 모르는 까막눈'이라고 하지를 않나.

    곧 죽어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시간을 때우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는 이지혁이었다.

    "어휴, 저 화상."

    서아영은 이를 빠득 갈았지만, 그 이상으로 이지혁을 다그치지는 않았다.

    그동안 이지혁이 얼마나 고생을 했고, 그 대가가 얼마나 큰지 모를 서아영이 아니었다. 아무리 마녀라 불리는 그녀지만, 지금 이상으로 이지혁에게 뭔가를 요구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 솔직한 심정으로는 좀 더 푹 쉬게 해주고 싶다.

    눈에만 보이지 않으면 말이다.

    차라리 안 보이는 곳에서 쉬기라도 하면 그동안 고생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고 느끼겠건만, 저렇게 현장 한가운데에 차를 가져다 놓고 보조석에 누워서 콜라나 쪽쪽 빨아대고 있는 모습을 보니 울화가 치밀었다.

    구석에 가서 놀라고! 구석에 가서!

    최정훈 씨는 왜 차를 저기다가 대준 거야!

    "아악!"

    하늘을 향해 소리를 내지른 서아영이 꼴도 보기 싫다는 얼굴로 고개를 돌리더니 반대쪽으로 걸어갔다.

    "쯧쯔."

    이지혁이 혀를 차며 그런 서아영을 바라보았다.

    "저것도 얼른 시집을 가야지."

    노처녀 히스테리가 더 심해지기 전에 말이다.

    최정훈이 차로 다가와 운전석에 탔다.

    "잘 쉬고 계십니까?"

    "나름 편안하기는 한데, 왜 제가 여기서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건지는 모르겠네요."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지는 법이죠. 그래도 같은 식군데, 얼굴 보고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집에서 게임하면서 돈 버는 꼴이 배알 꼴려서는 아니구요?"

    "…약간."

    최정훈이 씁쓸하게 웃었다.

    이지혁을 굳이 이곳에 끌고 온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말 한 그대로 아무리 능력을 더 이상 발휘할 수 없다고는 하나 NDF에서 나간 것이 아닌 이상 일은 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기도 하고, 다른 의미에서는 이지혁이 노는 꼴을 지켜보기 짜증난다는 것도 있다.

    하지만 그중에서 가장 큰 이유는…….

    '여기라면 함부로 못 들어오겠지.'

    크리스토퍼가 어찌 나올지 모른다는 점.

    그리고 송정수와 윤영민도 상황이 이리 흐르면 어떤 식으로 나올지 알 수 없었다.

    정치인이라는 인간들은 교활할 때는 뱀보다 더 교활하다. 그런 이들을 친분과 지금까지의 관계를 바탕으로 판단할 수는 없었다.

    '설마 그러지 않겠지' 하는 생각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만약의 상황에 대해 대비를 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아무리 그들이 막 나간다고 하더라도 NDF가 모두 모여 있는 이곳으로 쳐들어와 이지혁을 데리고 가지는 못할 테니까.

    '집 쪽도 경호해야 하는데…….'

    물론 이지혁의 집 앞에는 NDF가 단체로 몰려가도 상대가 안 될지 모르는 어마어마한 수문장이 둘이나 있지만, 막아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애초에 쳐들어오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우선이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이지혁을 생체 실험 대상으로 넘기려 딜을 했다는 것을 이지혁이 알게 된다면 좋은 꼴은 못 볼 테니까.

    '설마 알파 쪽에 붙는 것은 아니겠지?'

    머릿속에서 착착 진행되는 지구 멸망 시나리오를 되새기던 최정훈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설마 그렇게까지야 되겠는가.

    "저 심심한데."

    "노트북 하나 사 드리죠."

    "와이파이도 안 되는데, 노트북을 사서 뭐해요."

    "이동식 와이파이 사 드리겠습니다. 요금도 제가 내드리죠."

    "…저 그냥 사무실로 출근하면 안 돼요?"

    "당연히 안 됩니다."

    "여기서 제가 할 짓이 없는데……."

    "원래 할 짓이 있어서 출근하신 건 아니잖아요. 장소만 바뀌었다고 생각하세요."

    "컴퓨터가 없다고!"

    "노트북 사 드린다구요!"

    "그게 노트북이랑 데스크톱은 맛이 다르다니까! 마우스도 제대로 둘 곳 없는데, 여기서 게임을 어떻게 해요!"

    "출근했는데 게임하면 어떻게 합니까!"

    "내가 할 게 없는데, 게임이라도 해야지!"

    그냥 잡혀갔으면 좋겠다.

    세상을 위해서도 그게 옳지. 빌어먹을.

    최정훈이 뒷목을 부여잡고 한숨을 쉬었다.

    '진정하자.'

    이지혁이 이러는 게 하루 이틀 일은 아니잖은가.

    "끄응……."

    새삼 이지혁이 어떤 인간인지를 실감한 최정훈이 연신 한숨을 쉬어 댔다.

    자기는 이지혁을 지켜보겠다고 이런 노력까지 하는데 그걸 알아주지 않으니 야속하기도 하고, 그렇다고 대놓고 '지금 미국이랑 우리 정부가 너를 노리고 있어서 내가 지금 널 지켜주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을 했다가는 나라가 날아갈 것 같은 예감이 들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최정훈이 담배를 꺼내 물었다.

    "마왕들은 어때요?"

    "현재 활동하고 있는 이들 말고 추가적으로 뭔가가 나오지는 않고 있습니다."

    "활동하고 있는 이들은요?"

    "LA는 이미 반파되었고, 독일 쪽은 나라 전체가 거의 없어졌습니다."

    "…아이고, 이제 벤츠는 못 사겠네."

    "그건 뭐, 해외에도 공장이 있으……. 그게 중요한 게 아니죠."

    최정훈이 다시 정신을 차리고 말을 이었다.

    "우선 마왕을 막을 수가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별수를 다 써보고 있지만, 마왕의 진격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LA 같은 경우는 근처에 근접했을 때부터 전 시민을 대피시켰고, 독일 역시 수상의 결단으로 국민들을 해외로 탈출시킨 상황입니다. 군대와 능력자들이 고군분투하고 있기는 하지만, 마수들을 어느 정도 밀어내고 나면 마왕이 나서서 뒤집어엎는 상황이 계속 반복 중이라."

    "으음……."

    이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누가 나선다고 해서 막아낼 수가 있을 리 없었다.

    "중국은요?"

    "그게 좀 이상합니다."

    "네?"

    "…원래 중국하면 인해전술이지 않습니까?"

    "그렇죠."

    "그런데 중국 측이 현재 군대를 뒤로 물리고 국민들을 대피시키고 있습니다. 사천 자체를 비워 버릴 기세로 말입니다."

    "그게 왜 이상해요?"

    "다른 나라라면 정상적인 반응이겠지만, 중국은 닥치고 우라 돌격을 할 줄 알았거든요."

    "그건 러시아 아닌가요?"

    "…성향이 비슷하니까요. 사람의 목숨을 초개처럼 버리길 강요한다든가, 국가에 대한 애국심을 비정상적으로 강조한다든가."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긴데, 그거? 아저씨, 빨갱이에요?"

    "에헤이! 무슨 큰일 날 소리를!"

    최정훈이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주변을 바라보았다. 이상하게 저 멀리서 마티즈 한 대가 지나가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다.

    은은하게 돋아 오르는 소름을 진정시키며 최정훈이 입을 열었다.

    "여하튼 지금 중국의 움직임이 정확하지 않습니다. 정보도 별로 없구요."

    "으음……."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하다가 말했다.

    "그런데요."

    "네?"

    "중국이 왜 그러는지 이유를 알 것 같은데요."

    "오?"

    최정훈이 눈을 크게 뜨며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이 인간은 한 번씩 똑똑한 모습을 보여줘서 그를 감탄시키곤 했다.

    "이유라는 게?"

    "날리려는 거 아니에요?"

    "날려요? 어딜요?"

    "쓰촨성을요."

    "……."

    최정훈의 눈이 멍해졌다.

    "네?"

    "미국이야 LA를 자기 손으로 날릴 수는 없고, 독일도 마찬가지일 거 아녜요. 게다가 독일 같은 경우는 주변국에도 피해가 가니까 필사적으로 막을 거고."

    "…그렇죠."

    "근데 중국은 그런 눈치 안 보잖아요. 이래도 답이 없고, 저래도 답이 없으면… 그냥 영토 좀 내준다고 생각하고 처 날려 버리면 그만 아니에요? 베이징도 아니고, 쓰촨성이면 해볼 만한 작전 같은데?"

    정리해 보자.

    그러니까, 그럼 지금 중국이 하려는 게?

    "자국 영토 내에 핵무기를 처박아서 마왕군을 쓸어버린다는 겁니까?"

    "합리적이잖아요."

    "이, 이미 평양 사태 때 마왕에게 핵무기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 증명되었지 않습니까?"

    "그때는 한 발이었고."

    이지혁이 혀를 찼다.

    "말씀하셨잖아요. 중국의 장기는 뭐다?"

    "…인해전술."

    다른 말로 하면 물량전.

    가지고 있는 핵을 모조리 쓰촨성에 집중에서 타격한다면?

    '이거, 궁금해지긴 하는데?'

    마왕군에 핵무기를 쓴다는 발상을 안 해본 나라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여러 가지 제약이 있었다. 무엇보다 이미 발출된 핵무기가 아무 쓸모 없이 무력화된 전적이 있기도 하고, 자국에 핵무기를 사용한다는 것은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오염을 감수한다는 말인가요?"

    "일본도 안 엎어졌는데요, 뭐."

    "후쿠시마……."

    일본이 후쿠시마를 잃는 것과 중국이 쓰촨성을 잃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큰 타격일까?

    "아마 지금쯤 준비하고 있지 않을까요?"

    "어, 어음."

    최정훈의 고개가 자신도 모르게 서쪽으로 향했다.

    휴대폰을 든 최정훈이 번호를 누르더니, 가만히 통화가 연결되기를 기다렸다.

    - 무슨 일이야?

    "장관님, 최정훈입니다."

    - 무슨 일이냐고.

    "…쓰촨성에서 핵무기가 대량으로 터질 경우, 한국에 미치는 영향이 어떤가를 알아보려면 어디로 연락해야 합니까?

    - …뭐?

    전화기 너머로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진중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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