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84화 (84/118)
  • [■] 그럼 싸워 달라고 해야겠죠 [■]

    ─────

    "…이지혁 씨?"

    최정훈은 자신도 모르게 되물었다.

    '뭐가 이상한 거지?'

    알 수 없다.

    눈이 붉게 물든 이지혁을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마력을 사용할 때마다 때때로 이지혁의 눈을 붉게 물들었으니까.

    하지만…….

    이번은 뭔가 느낌이 달랐다.

    저 붉은 눈에서 그를 향한 감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무표정한 얼굴이라 그렇게 느껴지는 건지, 아니면 정말 뭐가 달라진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눈빛만으로 사람의 마음을 알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본능이 그에게 외치고 있었다.

    접근하지 마라.

    저자는 지금까지 네가 알던 '그' 사람이 아니다.

    "이지혁……."

    순간, 이지혁의 몸이 꿈틀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몸을 돌린 이지혁이 무표정한 얼굴로 가만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저래?"

    서아영 역시 뭔가를 느꼈는지 선뜻 이지혁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있었다.

    직감적으로 알아챈 것이다, 저 앞에 서 있는 것에게 접근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걸.

    최정훈이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물러서죠."

    "네?"

    "자극하지 말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물러나요. 지금 당장."

    "왜 그래요?"

    "내가 지금 설명하고 있어야 해요?"

    다급한 최정훈의 말에 서아영은 더 이상 묻지 않고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다른 이들도 최정훈의 말을 따라서 천천히 뒤로 이동했다.

    그 순간.

    이지혁이 무표정한 얼굴로 그들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결코 빠르지 않은 걸음이 이어졌다.

    "오, 오는데?"

    "…빌어먹을."

    최정훈이 사색이 된 얼굴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만약 지금 우려하던 그 사태가 터진 것이라면, 그들은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아니.

    그 정도로 끝날 일이 아니다. 인류는 이제 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제발 아니기를 빌어보았지만, 대답 없이 그들에게 다가오는 이지혁의 행동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죽는 한이 있어도 입을 다물 사람이 아니다.

    그런 사람이 과묵해졌다는 것보다 확실한 증거가 어디에 있겠는가.

    "도, 도망……."

    "소란 피우지 마. 싸그리 다 죽고 싶은 게 아니면."

    등 뒤에서 들려온 냉정한 목소리에 최정훈이 입을 바로 다물었다.

    "오셨습니까?"

    "잘도 살아남았네?"

    에르카나가 가볍게 웃으면서 최정훈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그렇다고는 해도 우리 달링을 그렇게 괴물 보듯 바라보면 내가 가슴이 아프잖아. 같은 인간 주제에 말이야."

    그 말을 남기고 에르카나가 이지혁을 향해 다가갔다.

    그제야 최정훈은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 에르카나는 분명히 같은 사람이라고 했다. 이지혁이 마족이 되었다면 그런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직 이지혁이 완벽하게 마족이 된 것은 아닐 것이다. 지금 에르카나가 이지혁에게 접근하는 것은 원래대로 되돌릴 자신이 있다는 뜻일 거고.

    하지만 최정훈이 안심한 것과는 다르게 에르카나는 바짝 긴장한 듯 조심스레 이지혁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달링, 왜 그러고 있어? 안 어울리게 말이야. 그런 얼굴은 당신한테는 어울리지 않아."

    "……."

    에르카나의 말에도 이지혁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저 천천히 에르카나의 얼굴을 향해 시선을 모았을 뿐이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에르카나라는 생명체를 탐색하듯이.

    "아아, 싫은데. 그런 눈."

    에르카나가 어깨를 으쓱했다.

    "남편이 아내를 바라보는 걸로는 최악이나 다름없는 눈이네. 차라리 평소처럼 귀찮아하는 눈이 훨씬 낫겠어. 그렇게 감정 없는 눈에서는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잖아. 안 그래?"

    에르카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이지혁도 무표정한 눈으로 에르카나를 가만히 바라보며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최정훈은 숨을 죽였다.

    그가 에르카나를 신뢰한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이럴 때 가장 믿을 수 있는 존재가 에르카나라는 것도 사실이다. 그녀가 해결하지 못한다면 누구도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인류가 살아남기 위해 마왕을 응원해야 하는, 기이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얼른 가서 게임이나 하자고. 이제 할 일은 다 했잖아. 안 그래?"

    에르카나가 이지혁의 바로 앞까지 접근해 고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얼굴에 욕구불만이 가득해 보이는데, 정 원한다면……."

    그 순간.

    길게 자라난 이지혁의 손톱이 에르카나의 배를 뚫고 나왔다.

    주르륵.

    에르카나의 입가에서 검은 피가 역류해 흘러나왔다.

    "아아……."

    최정훈의 입이 벌어졌다.

    끝이다.

    그 에르카나마저도 이지혁을 되돌리지는 못한 것이다.

    에르카나는 자신의 배를 꿰뚫은 손톱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가볍게 웃었다.

    "장난이 심하네?"

    "……."

    "자, 이리 와. 혼란스러울 테니까."

    에르카나가 배가 꿰뚫린 그대로 이지혁에게 한 걸음 다가가더니, 그를 그대로 껴안았다. 이지혁은 저항하지 않고 에르카나의 품에 안겨 있었다.

    그 순간, 이지혁의 등 뒤가 살짝 빛난다 싶더니 굳은 표정을 지은 아펠드리체가 나타나 이지혁의 머리에 조심스레 손을 가져다 댔다.

    에르카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눈부신 빛을 머금은 마나가 이지혁의 머리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끄으으으……."

    "착하지."

    이지혁이 몸을 뒤틀려고 했지만, 에르카나가 그를 꽉 움켜잡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

    "금방 끝나. 금방 끝날 거야. 지금은 고통스러워도 깨어나면 나에게 고맙다고 해야 할걸? 마족이 된 당신도 멋지겠지만… 난 싫거든."

    이지혁의 경련이 천천히 가라앉는다 싶더니, 이내 축 늘어졌다. 아펠드리체가 그런 이지혁을 허공에 띄우고는 한숨을 쉬었다.

    "다음은 없어요."

    "그렇겠지."

    에르카나가 대수롭지 않은 듯이 말했다.

    "다음은 없어. 이제는 더 이상 돌릴 수 없지. 하지만 이 바보는 다음에도 좋다고 나설 테고, 그걸로 끝이야."

    에르카나가 눈살을 찌푸렸다.

    "약하기라도 하면 강제로 묶어놓겠는데, 안타깝게도 이 사람은 이미 내 손을 떠났어. 나는 제압할 수 없거든."

    최정훈이 굳은 얼굴로 그들에게 다가와 물었다.

    "괜찮은 겁니까?"

    "응, 괜찮아. 머리는 완전히 흑마력에 절어버렸고, 이제는 간단한 마법만 쓴다고 해도 마족이 되어버리는 몸이 됐겠지. 숨 쉬는 것만으로도 고통이 밀려올 급이지만, 다행스럽게도 마족이 되어 이 세상을 파괴하지는 않을 거야. 너희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모든 것이 완벽하게 괜찮지."

    에르카나는 신랄했다.

    "아니, 다음에는 이 사람을 쓰지 못하게 됐으니, 이제 완벽하게 괜찮다고 할 수는 없겠군. 그래서 어쩔 거지, 인간? 달링이 완벽히 인성을 상실하지는 않았으니, 앞으로 좀 더 애써 달라고 할 셈인가?"

    "에르카나 님."

    아펠드리체가 만류했지만, 에르카나는 멈추지 않았다.

    "하찮은 것들이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잘난 이의 뒤에 붙어서 징징대는 것뿐이겠지. 자, 봐. 이게 그 결과야. 너희 덕에 달링이 이런 꼴이 되었어. 이제 좀 통쾌한가?"

    최정훈은 가만히 이지혁을 바라보다가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이제는 더 전투가 불가능한 겁니까?"

    "가능하다면?"

    "그럼 싸워 달라고 해야겠죠."

    "인간, 달링이 눈이라도 뜨고 있었다면 지금 너는 내 손에 죽었어."

    "그래도 싸다고 생각은 합니다만……."

    최정훈이 어깨를 으쓱했다.

    "이지혁 씨 하나가 힘든 것이 인류가 멸망하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계산하기 싫어도 계산할 수밖에 없어요. 저는 '당신은 이제 고생할 만큼 고생했으니, 이제는 전 인류가 나서서 당신을 지키겠습니다' 같은 개소리를 입에 올릴 정도의 로맨티스트는 아니라서요."

    "그래서 계속 뽑아 먹으시겠다?"

    "네, 할 수 있다면요."

    에르카나는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최정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서아영은 언제라도 뛰어들 수 있도록 에테르를 잔뜩 끌어 올렸다.

    방금 전의 발언을 감안하면, 지금 당장 에르카나가 최정훈의 머리통을 날려 버린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발언의 옳고 그름은 배제하더라도 에르카나의 앞에서 저런 말을 또박또박 말할 수 있는 최정훈의 담대함에는 그녀마저 질릴 지경이었다.

    "그게 당연하다?"

    "네."

    최정훈이 담담히 대답했다.

    "이지혁 씨가 아니라 제가 그 당사자라고 하더라도 당연히 할 겁니다. 그리고 해야 하는 일이죠."

    "무엇을 위해?"

    "살고 싶으니까."

    "……."

    "저희도, 이지혁 씨도 이기지 못하면 어차피 다 죽습니다. '이제껏 고생했으니, 손 놓고 편히 죽어라'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인간은 마지막까지 발버둥 칩니다. 그게 인간이죠."

    "흐음……."

    에르카나가 지금까지의 흉흉한 기색을 한풀 접고는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너라는 인간은 대화할 가치가 있어. 쓸데없는 미사여구가 없는 점이 마음에 드는군."

    "칭찬 감사드리죠."

    "하지만 안타깝게도 달링은 이 이상은 싸울 수 없어. 설령 본인이 싸우겠다 나서더라도 이젠 너희가 말려야 할 거야. 마계의 침공보다 더 확실한 멸망을 조우하고 싶지 않다면 말이야."

    "…그 정도입니까?"

    "너희에 대해 조사해 보았지. 너희는 파멸로 향해 가고 있으면서도 그걸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더군. 너희의 발전의 원동력이 된 화석연료는 고갈되어 가고 있는데, 너희는 말로는 아껴야 한다고 하면서도 전혀 아낄 생각이 없어 보이던데?"

    "……."

    "달링도 같아. 그래서 무수히 경고했을 텐데? 하지만 어떻게든 될 줄 알았어? 미안하지만 이제 끝이야. 더 이상 달링이 흑마력을 사용했다가는 죽거나 마족이 되겠지. 천 년이 넘게 함께한 나도 알아보지 못할 지경이잖아? 안 그래?"

    에르카나가 자신의 배에 뚫린 구멍을 톡톡, 쳤다.

    "다음에는 이 칼날이 나만을 향하지는 않을 거야. 경고했어."

    에르카나가 몸을 돌리자 아펠드리체가 이지혁과 함께 텔레포트를 시전했다.

    최정훈은 조금은 허망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반은 날아가 버린 서울이 그들을 반기고 있었다.

    "…끝난 건가요?"

    서아영의 질문에 최정훈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네, 끝났죠."

    인류가요.

    최정훈은 굳이 뒷말을 붙이지는 않았다.

    이지혁을 잃었고, 수도의 반이 날아갔다. 이로써 그들이 얻은 전과는 수십 명은 더 있다는 마왕 중 하나를 제거한 것뿐이었다.

    이런 식의 교환이 몇 번만 더 이루어지면, 인류의 도시 중에 남아나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제 인류는 마왕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을 잃었다는 것이다.

    이지혁이 더 이상 싸울 수 없게 된 이상은.

    최정훈은 망연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죠?"

    핵심을 찔러 들어온 윤혁규의 말에 최정훈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도 알지 못하는 것을 답할 수는 없으니까.

    "일단은……."

    저 멀리서 달려오는 방위사 대원들을 보며 최정훈은 낮게 입을 열었다.

    "일단은 복귀하죠. 그러고 나서 생각을 해봐야겠죠.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요."

    상처뿐인 승리.

    그 말보다 지금의 상황을 잘 설명할 수 있는 말은 없을 것이다. 최정훈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 * *

    윤영민은 패닉에 빠져 있었다.

    얼마나 심각한 상태인지, 주변 사람들은 그가 패닉에 빠졌다는 사실조차도 딱히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사람이 극한에 이르면 별다른 변화가 없어진다는 말이 맞는 모양이다.

    보고를 받은 윤영민은 그저 멍하니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지금 이해가 잘 안 가서 그러는데, 핵심만 따로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국방부 장관이 그런 윤영민을 보며 이마를 훔쳤다.

    왜 이해 못하겠는가.

    이 보고를 받는 윤영민이 어떤 심정인지 이해 못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말을 꺼내야 하는 그의 입장 역시 그리 녹록하지는 않았다.

    "서울의 남구는 거의 날아갔습니다. 아래로는 경기도 일부까지."

    "……."

    윤영민은 화면에 뜨는 위성사진을 보며 허탈한 얼굴을 했다.

    서울이 날아갔다고?

    이런 비현실적인 일이 어디에 있는가.

    "다행히 기적적으로 인명 피해는 크지 않습니다. 다만, 삼백만이 넘는 이재민이 발생했습니다. 이들을 당장 재우고 먹이는 일도 쉽지가 않습니다."

    "그렇군요."

    윤영민은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으로는 국방부 장관이 하는 말이 거의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2차 피해는 어떻습니까?"

    행정자치부 장관이 긴장한 얼굴로 대답했다.

    "일단은 안전처의 의견을 들어보아야겠지만, 너무 깔끔하게 박살이 나버린 관계로 2차 피해랄 게 딱히 없습니다. 무너진 폐건물 중 아직 덜 무너진 것들이 마저 무너져 내릴 수는 있겠지만, 출입 자체를 통제하고 있어서……."

    윤영민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도의 반이 날아갔다.

    이건 단순히 도시 하나가 날아갔다고 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다행히 핵심적인 장소는 파괴 범위에 들어가지 않았지만, 이 일이 대체 얼마나 커다란 피해를 가져온 것인지는 계산조차 불가능했다.

    "전쟁이 났어도 이 정도는 아니었을 텐데……."

    윤영민이 허탈하게 웃는 동안 송정수는 가만히 국방부 장관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네."

    "이지혁은 어찌 되었나?"

    국방부 장관이 차마 자기 입으로 대답하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자 송정수가 아연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차라리 서울을 모조리 잃는 한이 있었더라도 지켰어야 하는 건데."

    "죽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앞으로는 전투에 나서기가……."

    "죽은 것과 다를 게 없지. 싸울 수 없는 이지혁은 그저 성격 나쁜 꼬맹이일 뿐이야."

    송정수의 말에 아무도 반박하지 못했다.

    정확히는 반박할 정신이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다들 이지혁이 없는 상황이란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계산하기에 여념이 없었으니까.

    "……타국의 지원은?"

    "여력이 있는 국가가 없습니다."

    "그렇겠지. 어찌 보면 싸게 막았어."

    타국은 아직 마왕 하나를 감당하지 못해서 전 병력을 때려 박고 있는 중이다. 서울의 반을 주고 마왕 하나를 처리했다고 하면, 냉정하게 봤을 때 매우 선방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전과라면 나름 훌륭한 전과지만, 그 누구도 그 결과에 기뻐할 수 없었다. 당장의 결과에 기뻐하기에는 그들이 잃은 것이 너무 컸다.

    "이제……."

    송정수의 말이 핵심을 꿰뚫었다.

    "다음을 어떻게 막아내느냐에 모든 것이 달렸군."

    * * *

    "으음……."

    최정훈은 무거운 얼굴로 이지혁의 집 대문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수도 없이 들락거린 집이지만, 오늘만큼 안으로 들어가기가 꺼려지는 것은 처음이었다.

    '충격이 크겠지.'

    최정훈이 받은 충격도 어마어마하지만, 당사자인 이지혁보다 더 큰 충격을 받은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자신의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는 마력을 더 이상 쓸 수 없으니까.

    멀쩡한 사람이 어느 날 더 이상 팔다리를 쓸 수 없게 된 것과 비슷한 기분이 아닐까?

    "으으음……."

    최정훈은 차마 벨을 누르지 못하고 연신 침음을 삼켰다.

    "어휴."

    결국 고개를 확 내저은 최정훈이 벨을 꾹 눌렀다.

    딩동.

    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딩동! 딩동!

    두어 번 눌러도 반응이 없어 다시 벨을 누르려고 하는데, 지잉- 전자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

    보통은 이런 경우, 밖에 누가 왔는지는 확인하고 문을 열지 않는가. 이러다가 도둑이라도 들…….

    최정훈의 생각은 열린 문 뒤로 보이는 오식이와 오식이보다 살짝 큰 거북이를 보고는 완벽히 해소되었다.

    '강도고 도둑이고, 미치지 않고서는 이 안으로 못 들어가지.'

    아니, 들어가는 건 가능할지 모른다. 살아서 나올 수 없을 뿐이지.

    마왕과 오거 로드가 지키는 것에서 이미 이 집은 백악관 경호 레벨을 뛰어넘었다고 봐야 한다. 마계에서도 마왕이 문지기를 하는 곳은 없겠지.

    "안면이 있는 인간인가?"

    '귀엽네.'

    저 껍데기 안에 마왕이 들어 있다는 것은 알겠지만, 동글동글한 모습이 귀엽다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었다. 이지혁은 무시무시하게 생긴 몬스터를 잡아다가 귀엽게 만들어놓는 취미가 있는 모양이다.

    "이지혁 씨를 뵈러 왔습니다."

    거북이가 슬쩍 고개를 돌려 오식이를 바라본다. 오식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거북이도 턱짓을 하며 안쪽을 가리켰다.

    "안에 있다."

    거북이에게 턱짓을 당하는 경험을 누가 해보겠는가.

    이지혁 덕에 참 신기한 경험을 많이 한다고 생각하는 최정훈이었다.

    "그럼."

    둘에게 가볍게 인사를 하고 안으로 들어간 최정훈이 현관문을 열었다.

    '사람이?'

    이상하게도 거실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신을 벗고 안으로 들어간 최정훈이 이지혁의 방으로 향했다.

    타다다닥.

    키보드 치는 소리와 마우스 딸깍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에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상황이 상황인데.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상상보다 잔인한 법.

    문을 열자 그 안에서 게임을 하고 있는 이지혁이 보였다.

    "……."

    최정훈은 조금은 멍한 눈으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아오, 씨!"

    뭔가 잘 안 풀리는지 이지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헤드셋을 책상 위로 던지고는 소리쳤다.

    "적 탑은 탑에 사는데!"

    "……."

    최정훈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인간은 도무지 그의 상식으로는 알 수가 없다.

    * * *

    "……왜 그런 눈으로 봐요?"

    "여러 가지 생각이 들어서요."

    "뭐가요?"

    최정훈은 침대에 걸터앉은 이지혁을 보며 솔직한 그의 감상을 전했다.

    "첫째로 이 상황이 되었는데도 서버를 돌리고 있는 게임 회사에 대한 경의."

    "먹고살아야죠."

    "둘째로 이 상황에서도 게임을 돌리고 있는 이지혁 씨에 대한 놀라움."

    "할 짓이 없으니까."

    이지혁은 마지막까지 당당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라가 엎어질 판인데도 이지혁 씨와 같이 게임을 하고 있는, 전국 어딘가에 있을 잉여 놈들에 대한 한탄이죠."

    "에이, 사람 엄청 줄었어요."

    '그럼 정말 제대로 된 잉여 인간만 남았겠네.'

    심각하지 않아서 좋긴 한데, 이건 다른 의미로 심각한 것 같아서 속이 쓰려왔다.

    이 나라의 미래는 정말 괜찮을까?

    "왜 왔어요?"

    "어쩌고 있나 보려구요."

    "안 바빠요?"

    "예."

    "……안 바쁘다고?"

    "예. 안 바쁩니다."

    최정훈은 정말 바쁘지가 않았다.

    지금 정부는 미친 듯한 업무를 소화하고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상황이 너무 커져 버린 관계로 최정훈은 할 일이 없었다.

    게이트가 열리지 않는데 그가 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평소 같으면 그가 해야 할 피해 보고 같은 것들도 의미가 없었다. 서울이 다 날아갔는데 그가 무슨 용을 빼는 재주가 있어서 피해 보고를 하겠는가.

    윗선에서도 딱히 최정훈에게 뭔가를 요구하지 않았다.

    "할 일도 없고 심심해서 뭐하고 계시나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궁금할 것도 많네."

    이지혁이 쓴웃음을 짓자 최정훈이 한숨을 쉬고는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아니요."

    이지혁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마법을 못 쓰게 됐는데 괜찮을 리가 없죠. 충격이 매우 커요."

    "……그래서 게임하셨어요?"

    "원래 충격이 크면 다른 데 몰두해야 하는 법이죠."

    "솔직한 심정을 듣고 싶습니다만?"

    최정훈의 말에 이지혁이 고민이 된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시원섭섭해요."

    "시원섭섭?"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었다.

    이지혁이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마법을 쓰지 못하게 됐다는 건 안타까운 일이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이 지긋지긋한 굴레에서 벗어나 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거든요."

    "이해할 것도 같습니다."

    "애초에 싸우고 싶어서 싸운 것도 아니고, 이 세계로 돌아오면 마법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평범하게 살아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그 꿈이 반강제적으로 이루어진 상황인 거죠."

    최정훈의 얼굴이 조금 굳었다.

    "하지만 이지혁 씨가 없는 인류는 더 이상 마계에 저항할 수 없게 될 겁니다."

    "그게 좀 걸리기는 하는데……."

    이지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거죠. 내가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정말 없습니까?"

    "흐음……."

    이지혁이 볼을 긁었다. 그의 손가락이 미묘하게 떨리는 것을 최정훈은 놓치지 않았다.

    "사실 아시겠지만, 항상 하기 싫은 일이라도 해야 한다면 제가 마다한 적은 없어요."

    "그렇죠."

    그 점에 있어서는 정말 고마움을 가지고 있다. 입으로는 항상 궁시렁댔지만, 이지혁은 언제나 필요한 곳에 있어주었다.

    "근성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저도 손을 놓치는 않을 거예요. 성격상 뭐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니까. 그런데 제가 근성을 발휘하면 파멸이 더욱 가까워져요. 그러니 어쩌겠어요."

    "……."

    알고 있는 내용이다.

    이미 들은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최정훈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이곳을 찾고 말았다.

    지금의 대화가 이지혁에게 있어서는 더없이 잔인한 것이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손을 놓고 멈출 수가 없었다.

    그마저 놓아버리는 순간에는 모든 것이 끝이니까.

    하지만 이지혁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온 이상, 더는 최정훈도 미련을 붙들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동안 고생하셨습니다."

    최정훈의 말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별말씀을요."

    "일단 NDF 신분은 유지가 될 겁니다."

    "출근하라는 건가요?"

    "당연하죠. 살아도 같이 죽고, 죽어도 같이 죽어야 할 것 아닙니까!"

    "말이 미묘하게 이상한 것 같은데?"

    최정훈이 피식 웃었다.

    "능력 잃었다고 혼자 빠져나가서 잘살겠다는 생각은 버리세요. 싸우지 못한다고 해도 이지혁 씨의 가치는 무궁무진하니까요. 병가 처리 중이었는데, 지금 딱히 아픈 곳은 없어 보이니까 내일부터 출근하시면 됩니다."

    "……퇴사 안 되나요?"

    "안 됩니다!"

    그 말을 남기고 최정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딱히 일찍 가서 할 일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지혁의 얼굴을 마주 보는 것이 이상하게 괴로웠다.

    "그렇게 알고 가보겠습니다."

    "마중 안 나가요."

    "바라지도 않았어요."

    최정훈이 몸을 돌려 방 밖으로 나가다 걸음을 멈추었다.

    "이지혁 씨."

    "네?"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

    최정훈이 집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지켜본 이지혁이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고생이라……."

    그의 목소리에 담긴 여운이 방을 떠돌았다.

    * * *

    "할 일이 없는 건 인정한다, 이거예요."

    김다현의 목소리에는 불만이 가득 차 있었다.

    "할 일이 없으니 다른 데다 끌어다 쓰는 것도 이해한다, 이겁니다. 우리가 받는 돈이 한두 푼도 아니고, 그게 다 세금에서 나오는 거니 일이 없다고 해서 사무실에 드러누워 배나 두드리고 있으면 안 된다는 인식 정도는 저한테도 있다구요."

    "…적당히 궁시렁댈래?"

    윤혁규가 한숨을 쉬었지만, 김다현의 말은 멈추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이거 뿐인 건 아닌 것 같은데, 무슨 노가다도 아니고… 왜 이런 일까지 우리가 해야 하는가가 문제라는 거죠. 다른 일도 많잖아요. 특히나 혁규 형 같은 무식한 육체형이랑은 다르게 저는 매우 센스티브한 속도형이란 말입니다. 작업이 저랑 어울리지가 않잖아요, 어울리지가!"

    "그 무식한 육체형한테 처맞아봤냐?"

    그리고 나 육체형 아니거든!

    "사실 좀 돕고는 싶은데, 제 힘은 일반인이랑 그렇게 다를 것도 없거든요. 요즘 들어 회의가 좀 들기는 해요. 예전에는 좀 우아한 것 같아서 좋아했는데, 요즘 자꾸 이런 일에 휘말리다 보니까 영 쓸모없는 존재처럼 느껴진단 말이죠."

    "……한마디만 더 하면 진짜 팰 거다."

    "쯧."

    김다현은 영 불만스러운 얼굴이지만, 괜히 입을 더 떼 윤혁규를 자극하지는 않았다. 윤혁규 역시 이런 일을 하는 것이 반갑지 않기는 마찬가지일 테니까.

    윤혁규가 양손에 에테르를 모으더니, 앞쪽의 앙상한 철골만을 남기고 있는 건물을 날려 버렸다.

    콰아앙!

    "아, 거, 살살 좀 합시다!"

    "살살은 무슨."

    그들은 지금 폐허가 되어버린 건물의 철거 현장에 투입되어 있었다. 적당히 살릴 수 있는 건물이 있다면 살려내겠지만, 모조리 무너져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라 차라리 싹 밀어버리는 것이 복구에 이롭다는 상부의 판단이 내려진 것이다.

    평소라면 중장비가 투입되고, 위급 시라면 군인들이 투입되었겠지만, 상부는 인간 하나하나가 굴삭기 이상의 위력을 내는 KSF와 NDF가 투입되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덕분에 NDF들은 싸그리 철거 현장에 투입되어 스트레스를 풀고 있었다.

    김다현처럼 되레 스트레스를 받는 타입도 있었지만 말이다.

    "으라차!"

    콰르르르르르르!

    거대한 화염이 건물 잔해를 태웠다. 콘크리트까지 녹아내리지는 않았지만, 어차피 재활용도 할 수 없는 각종 폐자재들과 목재들을 태우는 것에는 서아영이 제격이었다.

    "뭐가 이리 넓어?"

    평소에도 넓다고 생각하던 서울이지만, 반쯤 평야로 변해 버리자 지평선이 보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인력으로 하려면 몇 년이 걸릴지도 모르는 작업이지만, NDF와 KSF는 한 명, 한 명이 일반인 수십 명의 몫을 해내며 도시를 빠르게 재정비하는 중이었다.

    "진작에 이쪽으로 나설 걸 그랬나?"

    윤혁규가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적성에 맞는 모양이네요."

    "으음……."

    뭔가 펑펑 터뜨리는 맛도 있고, 생각해 보면 기중기는 출동해야 할 철거 현장을 혼자서 싸그리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NDF 소속으로 받는 돈도 만만치는 않지만… 이거, 시급으로 쳐서 받아도 연봉이 지금보다 몇 배는 더 뛸 것 같다.

    "세상에 철거 현장이 그리 많지 않으니 관두쇼."

    "그렇겠지."

    윤혁규는 폐허가 되어버린 강남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완전 싸그리 박살 났네. 이건 뭐, 강제적인 재분배네, 재분배."

    "나라에서 보상해 주지 않을까요?"

    "이거 보상하면 나라가 망한다."

    "으음, 그렇겠네요."

    넓은 의미의 강남이 아니라 강남 3구의 건물 값만 하더라도 웬만한 나라의 예산만큼은 나올 것이다. 어쩌면 더 될 수도 있고, 그걸 보상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말이 보상이지, 나라에 돈이 있어야 보상을 할 것 아닌가.

    이번 사태로 기업들도 일제히 생산에 스톱이 걸렸고, 주가는 끝을 모르고 폭락하고 있는 중이었다.

    마왕들의 출현과 동시에 추락하던 주가는 이번 사태로 결정타를 맞아 거의 사망 직전에 처해 있었다.

    '의미도 없겠지만…….'

    김다현도 껄끄러운 눈으로 잔해들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돈이 문제가 아니다. 죽고 나면 돈도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까. 생존이 절대명제가 되는 시대가 찾아오고 있는 것이다.

    콰르르르르르!

    "저 아주머니… 스트레스가 엄청 쌓였었나 보네?"

    나라를 불태워 버릴 듯한 기세로 불꽃을 뿜어내는 서아영을 보고 있자니, 성질이 나도 단단히 난 것 같았다.

    "그런데 최정훈 씨는 어디 갔대요?"

    * * *

    "본인의 말로는 더 이상의 전투가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으음……."

    윤영민과 송정수는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정말 더는 무리인가?"

    "그런 것 같습니다. 성격상 엄살은 부려도 빈말은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 이의 입에서 나온 말이니……."

    화상으로 연결이 되어 있는 크리스토퍼가 얼굴을 주물렀다.

    - 이지혁 씨가 더 이상 싸울 수 없다라……. 인류에게는 사형선고나 마찬가지군요."

    "그렇습니다."

    - 한국 측에는 대안이 있습니까?

    "……."

    송정수는 대답 없이 가만히 크리스토퍼를 바라보았다.

    송정수의 반응을 확인한 크리스토퍼가 가만히 욕설을 내뱉었다.

    외교적으로는 결례일지 모르지만, 아무도 그런 크리스토퍼를 탓하지 않았다. 그들 역시 같은 심정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솔직하게 말해봅시다, 미스터 맥클라렌."

    - 말씀하시지요, 미스터 송.

    "미국 측에서는 무슨 준비를 하고 있습니까?"

    - 준비라시면?

    송정수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미 미국 측에서 능력자들에 대한 연구가 비밀리에 이뤄지고 있었다는 것을 모르는 국가는 없소이다. 이 사태를 만들어낸 알파 역시 그 연구의 과정에서 탄생한 괴물 아닙니까!"

    크리스토퍼는 대답하지 않고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숨겨진 전력을 물으면서 교묘하게 미국의 책임을 논하고 있었다.

    - 지금에 와서는 별다른 의미가 없는 말이지요.

    "맞는 말이지."

    냉소적으로 대답하긴 했지만, 송정수도 동의했다. 아무리 일을 저질렀다고는 하나 미국은 현재 인류의 가장 핵심적인 전력이었다. 그들을 제외하고 대마계전을 벌일 수는 없다.

    이지혁이 리타이어한 지금은 더더욱 말이다.

    그러니 굳이 그들의 실책을 물고 늘어질 필요는 없었다.

    "숨겨둔 전력이 있으면 다 꺼내놓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더 밀린다면 인류의 미래는 없습니다."

    - 동의합니다.

    크리스토퍼는 어깨를 으쓱했다.

    송정수의 말은 확실히 맞았다.

    현재 독일은 거의 지도에서 사라진 상황이고, 중국은 영토의 1/3이 날아갔다. 수도 하나가 반파되고 마왕을 잡아낸 한국이 얼마나 남는 장사를 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독일을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는 EU는 현재 독일에 떨어진 마왕군을 막지 못해 속절없이 밀리고 있고, 러시아와 주변국의 지원을 받고 있는 중국도 끝없는 물량 공세로 마왕들의 진격을 막는 것 이상의 일을 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 하지만 미국 역시 여력이 없습니다. 이러다가 정말 동부가 다 날아가게 생겼거든요.

    "으음……."

    송정수는 얼굴을 문질렀다.

    인류가 현재까지 마왕들과 싸울 수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마왕들의 진격 속도가 느리기 때문이다. 그들이 전력을 다해 진격을 한다면 누구도 막을 수 없겠지만, 마왕들은 마치 과거의 군대가 도보로 점령해 나가듯 느릿한 속도로 전진하고 있었다.

    이지혁이 말한, 서로 다른 시간개념이라는 것이 무슨 뜻인지 이제 다들 알 수 있었다.

    - 그리고 설령 그런 것이 있다고 해도 우리가 굳이 그쪽에 그 사실을 밟힐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만?

    "…크리스토퍼."

    - 이지혁 씨를 잃은 한국은 그저 극동의 작은 소국에 불과합니다. 일전에 도쿄가 반파된 일본에 비해 딱히 나을 것도 없는 나라지요.

    송정수의 얼굴이 부들부들 떨렸다.

    딱히 틀린 말이 아니지만, 면전에 대고 이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 지금까지 크리스토퍼가 한국을 우대해 준 것이 이지혁 때문이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지만, 그 이지혁이 힘을 잃었다고 해서 곧장 이런 식이라니.

    - 현실적으로도 그렇습니다. 평양에 있는 스팟이 다시 부활하기라도 한다면 한국은 단숨에 쓸려 나가겠죠. 현재 본토가 침공받고 있는 상황에서 굳이 우리가 그걸 막겠답시고 파병을 보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송정수가 화면 너머로 크리스토퍼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원하는 게 뭡니까?"

    - …원하는 거요?

    "당신 말대로 우리는 힘을 잃었소. 이대로라면 다음번에 마왕이 오기라도 한다면 나라가 멸망하는 것은 순식간이겠지. 그리고 스팟의 위험성 역시 아직은 아무도 알 수 없소. 그렇다면 이쪽을 버리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겠지."

    크리스토퍼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윤영민과는 다르게 송정수는 상대하기가 만만치 않았다. 지금도 그는 사태의 핵심을 꿰뚫고 있었다.

    "미국의 정보력이라면 이지혁이 힘을 잃었다는 것 역시 모르지는 않을 텐데, 굳이 우리와 대화를 할 필요가 있소? 내가 당신이라면 이 대화에 참가도 하지 않았겠지.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 굳이 우리와 대화를 하려한 이유가 있을 텐데?"

    짝짝짝짝.

    화면 너머에서 크리스토퍼가 박수를 쳤다.

    - 옆에 있는 프레지던트에게는 미안하지만, 당신이 왜 대통령이 되지 못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당신 나라의 정치 상황을 보면 충분히 이해가 갈 텐데?"

    - 뭐, 인정합니다.

    크리스토퍼가 어색하게 웃었다.

    - 본론으로 넘어가죠. 확실히 이쪽에는 비장의 무기들이 몇 있습니다. 과학적인 부분이 있고, 능력적인 부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공개할 수준은 아니죠. 그 무기들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본국은 물론, 한국 역시 도와드릴 수 있을지 모릅니다.

    "동해에 항공모함과 핵잠수함도 배치가 되어 있고 말이죠?"

    - 한국의 정보력도 만만치는 않군요.

    크리스토퍼가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 여하튼 그중에서 우리가 가장 심혈을 기울여 마련한 무기는 연구 시설입니다. 능력자들의 능력을 과학적으로 분석하여 일반인들을 능력자로 각성시킨다거나 능력을 따로 빼내 무기물에 정착시킬 수 있는가 하는 연구들을 합니다.

    "그런 걸 말해줘도 되는 거요?"

    - 다음에 나올 이야기를 위해서는 이 정도 정보는 풀어야겠죠. 이걸 알아야 내가 무얼 원하는지 짐작하실 테니까.

    송정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지금 크리스토퍼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고 만 것이다.

    - 이쪽의 조건은 간단합니다. 당신들은 충분히 짐작하고 있을 겁니다.

    "…아뇨. 모르겠는데요."

    낌새를 챈 최정훈이 이를 드러냈다.

    - 모른다구요? 당신들이?

    크리스토퍼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우리 농담하지 맙시다. 이쪽도 바쁘다구요. 비협조적으로 나온다면 차라리 이 시간에 가서 치즈버거나 한 개 더 먹고 현장을 지휘하는 게 낫습니다. 말 돌리지 말고 건설적이고 효율적으로 일합시다."

    최정훈이 죽일 듯한 눈으로 크리스토퍼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크리스토퍼는 빙그레 웃으며 최정훈의 시선을 받았다.

    - 이쪽의 조건은 간단합니다. 당신들이 짐작하듯 말이죠. 이지혁 씨를 넘겨요. 그럼 당신들의 나라를 지켜주겠습니다.

    * * *

    최정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크리스토퍼를 노려보았다.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고 있는 겁니까!"

    그나마 아직 예의를 완전히 잃지는 않은 말투와는 다르게 최정훈은 당장에라도 찢어 죽일 듯한 눈으로 크리스토퍼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크리스토퍼는 여유를 잃지 않았다.

    - 진정하지, 미스터 최.

    "진정?"

    할 말이 없는 것이 아니다. 어이가 없어서 말이 나오지 않을 뿐이었다.

    "이지혁 씨를 넘겨받아서 어쩌겠다는 거죠?"

    - 몰라서 묻는 건 아니겠지?

    "모르겠는데?"

    최정훈이 비협조적으로 나오는 것을 본 크리스토퍼가 헛웃음을 흘렸다. 화면 너머의 크리스토퍼가 시가의 끝을 자르고 불을 붙였다.

    - 이러지 마, 미스터 최. 당신도 알고 있잖아, 지금의 인류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 한다는 걸. 발버둥을 치지 않으면 그저 무난하게 멸망할 뿐이지.

    "도덕을 잃고 살아남아 기뻐하란 말입니까?"

    - 도덕? 아직도 그런 꿈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나? 남아 있는 인류들에게 한 사람을 희생하는 대신 살아남을 거냐고 물어보지. 찬성표가 99프로 정도는 될걸?

    최정훈이 뭔가 반박을 하려는 순간, 크리스토퍼가 말을 잘랐다.

    - 그리고 지금 당신은 내 말에 반박할 수 있는 자격도, 지위도 없어. 당신의 가치는 이지혁과 말이 통한다는 것 하나뿐. 이지혁이 힘을 잃은 지금, 당신은 감히 이 대화에 낄 수도 없다. 옛정으로 그 자리에 있는 것을 허락해 주는 것뿐이니, 입 닥치고 자리에 앉아.

    "이……."

    "앉아."

    최정훈이 막 발악하려는 순간,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총리님!"

    "앉으라고 했을 텐데?"

    최정훈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당장에라도 욕설을 내뿜을 듯 달싹이던 입술이 꾹 다물어졌다.

    최정훈은 입을 다문 채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 그렇죠. 괜히 쫓겨나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는 것보다는 듣기라도 하는 것이 나으니까.

    크리스토퍼가 대놓고 이죽거렸지만, 최정훈은 대답하지 않았다.

    - 자, 그래서 어쩌시겠습니까? 총재님? 대통령 각하?

    크리스토퍼의 질문에 송정수가 대답했다.

    "몇 가지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소."

    - 협조적으로 나와준다면 이쪽도 시간을 할애해 드릴 수 있습니다. 현 인류에게 이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으니까.

    불안한 눈으로 자신을 돌아보는 이들의 시선을 받으며 송정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지혁을 넘겨받아 무엇을 하고 싶은 거요? 제대로 이야기를 좀 해보지. 어설프게 뜬구름 잡는 이야기 말고 말이야."

    - 간단합니다. 실험이죠.

    "실험?"

    크리스토퍼가 고개를 끄덕였다.

    - 말씀하신 대로 우리는 예전부터 에테르에 대한 연구를 해오고 있습니다. 아직은 마왕들을 상대할 만큼의 전과를 얻어내지는 못했지만, 분명 도움이 될 성과가 나올 거요. 다만, 그걸로는 부족하지. 우리는 에테르가 아닌 마나 생명체를 연구하기를 원해. 특히나 가장 압도적인 힘을 갖고 마나를 다루던 인간이라면 연구 가치는 무궁무진하지.

    "차라리 이지혁의 협조를 얻는 것이 더 낫지 않겠소?"

    크리스토퍼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반응은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정민성의 말이 사실이었군."

    최정훈이 나직하게 이를 갈았다.

    세계 각지의 지하에서 지금 능력자들이 무슨 꼴을 당하고 있는 건지나 알고 있냐고 일갈하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 비난하고 싶다면 얼마든지 비난하시지. 하지만 확실한 것은 당신들이 손을 뗀 채 비난하고 있는 사이, 우리는 이 사태를 막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거요. 과연 당신들이 나를 비난할 수 있을까?

    "변명도 아주 엿같이 하시는군."

    최정훈의 말에 크리스토퍼가 미간을 좁혔다.

    막 둘 사이가 격해지려는 순간, 송정수가 입을 열었다.

    "한 가지 이해가 안 가는 것이 있는데, 지금 귀국이 우리에게 협조를 구할 필요가 있소? 그냥 와서 이지혁을 잡아간다고 해도 우리에겐 막을 힘이 없을 텐데?"

    - 능구렁이 같군.

    크리스토퍼는 이제는 완전히 예의를 내려놓고 있었다.

    - NDF가 적극적으로 이지혁을 보호하고 나선다면, 우리도 꽤나 많은 전력을 투입해야 하지. 하지만 거리 문제도 있고, 지금 동부를 장악한 마왕군 때문에 많은 전력을 빼내기는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텐데?

    "음……."

    송정수는 이제 상황을 다 파악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된 거로군."

    납득한 송정수와는 다르게 최정훈은 여전이 이죽거리고 있었다.

    "개 같은 소리를 하는군. 에르카나 씨가 그 꼴을 보고 가만히 있을 것 같아?"

    - 그 마왕 년에게는 우리도 원한이 있지. 아까부터 자꾸 이쪽을 무시하는데…… 우리가 그 정도 생각도 하지 않고 일을 벌이고 있다고 생각하나, 미스터 최?

    "벌레에게 뇌가 있는 줄은 몰랐는걸?"

    찰칵.

    크리스토퍼가 새 시가에 불을 붙이고는 깊이 가라앉은 눈으로 최정훈을 바라보았다.

    - 이보게, 미스터 최. 감정적이 되는 건 이해해. 당신과 이지혁 씨 사이의 관계가 보통 유대를 뛰어넘는다는 것도 이해해. 지금 당신의 반응도 내가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

    "……."

    - 하지만 과한 면이 없는 건 아니야. 자네는 지금 그냥 생떼를 쓰고 있을 뿐이지.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자네와 나, 둘 중 누가 인류를 위해서 애쓰고 있는 것인지 생각할 수 있을 텐데?

    최정훈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 없었다.

    지금 그와 크리스토퍼 중에 누가 더 건설적인가를 따지자면, 결론이 너무 빤히 나왔으니까.

    - 도덕? 그런 건 좋지. 좋은 거야. 하지만 인간에게 필수적이지는 않아. 우리는 이지혁 씨에게 너무 많은 은혜를 입었지. 이만큼이나 도움을 받고 은인의 등에 칼을 꽂는다는 건 개새끼나 하는 짓이라는 것 나도 알고 있어. 하지만 좋다, 이거야. 역사가 세상이 나를 개새끼라고 부른다 해도 상관없어. 나는 내가 쓰레기가 되어서라도 인류를 구원해야겠으니까.

    얼마 전, 최정훈이 에르카나에게 한 말과 일맥상통하는 말이었다.

    최정훈은 새삼 인간이라는 생물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끔찍한 존재인가에 대해 생각했다. 방향만 다를 뿐, 그도 이지혁에게 인류를 위해서 죽어달라고 말하고 있었으니까.

    '뭐가 다를까.'

    어조의 강경함과 수단의 강경함이 다를 뿐이다. 이대로 싸워 나간다면 이지혁의 끝은 소멸 혹은 죽음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최정훈은 이지혁에게 전투를 강요했다.

    부탁이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크리스토퍼는 그보다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고 있을 뿐이다. 대전제 자체는 달라지지 않았다. 인류보다 중요한 개인은 없다고 이미 그가 그의 입으로 에르카나에게 말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최정훈이 혼란스러워하는 기색을 알아챈 송정수가 대신 말을 받았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소. 하지만 이쪽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오. 나라의 입장이라는 것이 그렇게 간단하게 정해지는 것은 아니니까. 이해 부탁하오."

    - 음,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좀 더 빨리 결정해 주길 바랍니다. 우리가 아니더라도 지금 이지혁 씨를 확보하고 싶어 하는 나라는 하나둘이 아닐 테니까. 이미 중국과 러시아가 움직이려 하는 것을 우리가 막고 있소.

    최정훈이 쿡쿡대며 웃었다.

    아주 개판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소이다."

    - 현명한 결정 바랍니다. 우리가 아닌 인류를 위해.

    비전이 꺼지고 검은 화면이 송정수의 눈에 한가득 들어왔다.

    "……빌어먹을."

    송정수가 허탈한 기색으로 소파에 등을 기댔다. 윤영민이 그런 송정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어찌해야겠습니까?"

    "안 됩니다!"

    대답한 것은 최정훈이었다.

    "지금까지 이지혁 씨가 우리에게 해준 것이 한둘입니까? 생각도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하지만 저쪽의 말도 맞네. 이대로는 멸망할 뿐이야.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해."

    "이지혁 씨를 넘긴다고 돌파구가 열린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할 수 있는 건 다 해봐야 하지 않겠나?"

    최정훈의 눈이 번들거렸다.

    "그 할 수 있는 거라는 게 이지혁 씨를 모르모트로 제공하고 나서 미국의 비호를 받는 겁니까? 그게 일국의 대통령이 입에 올릴 수 있는 말입니까?"

    "말조심하게!"

    윤영민이 역정을 내려는 순간, 송정수가 입을 열었다.

    "그런 문제가 아니야."

    "……."

    최정훈이 불타는 듯한 눈으로 송정수를 노려보았다.

    "지금 가장 큰 문제는 우리가 이지혁 씨를 지키려고 마음을 먹는다면, 과연 지킬 수 있느냐야. 크리스토퍼의 태도나 타국의 상황을 감안했을 때, 우리가 내주지 않는다고 포기할 것 같지는 않아."

    최정훈도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건 그도 같은 생각이었다.

    "평양 스팟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될 수 있으면 아직 괜찮을 때 이지혁 씨를 확보하고 싶겠지. 만약 우리가 거절한다면, 그다음에는 바로 무력행사가 시작될 거야. 막을 수 있나?"

    "막아내겠습니다."

    "NDF는 확실히 강하지. 하지만 미군과 한국군을 비교한다면 결과는 너무 빤해. 지금 동해에 항공모함이 들어와 있는 이유가 우릴 지켜주기 위해서라고 생각하지는 않겠지?"

    "……전력 자체는 우리가 밀릴지 모르나 이건 전쟁이 아닙니다. 확보전이죠. 비행기로 사람을 납치해 갈 수는 없습니다. 결국에는 능력자나 특수부대로 상륙을 해야 할 텐데, 그 이후로는 단순해집니다."

    "일리가 있군."

    지키려고 한다면 이쪽에도 이점이 있다.

    그 부분은 확실히 이해했다. 하지만 송정수는 그게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지혁 씨를 지킨다고 우리에게 무슨 이득이 있지?"

    "총리님!"

    버럭 화를 내는 최정훈을 보며 송정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건 개인적인 친분이나 인도주의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야. 단순히 국익을 위해서도 아니네. 어떻게든 돌파구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인류는 여기서 끝이란 말일세."

    "……."

    "의리를 지키고 멸망하겠다는 건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봐야 한다는 크리스토퍼의 말도 틀린 건 아니야."

    최정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하는 건가?"

    "엿 같아서 나가려고 합니다."

    "이보게, 최정훈이."

    최정훈이 바닥에 침을 뱉고는 몸을 돌렸다.

    "머리 잘 굴려서 뭐가 이득인지 잘 알아보십시오. 저는 의리를 지키고 멸망하겠습니다."

    "자꾸 아이처럼 굴 텐가? 이건 소꿉놀이가 아니야! 육십억 인류의 목숨이 달려 있는 현실이란 말일세!"

    "그러니 그 현실, 두 분이 잘 생각해 보십시오. NDF는… 아니, 저는 절대로 그런 선택은 못합니다. 저를 죽이고 데려가시든가요."

    쾅!

    문이 거칠게 닫히자 송정수가 낮은 한숨을 쉬었다.

    "꽤나 똑똑하다고 생각한 친군데, 왜 이제 와 저리 멍청하게 구는 건지 모르겠군."

    "아직 머리보다 가슴이 뜨거울 나이 아닙니까. 자신도 머리로는 알고 있을 겁니다."

    "머리보다 가슴이 뜨겁다라……."

    송정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의 가슴속에는 이미 불꽃이 꺼지고 없는 모양이다. 이런 것으로 계산을 하고 있는 것을 보니.

    "힘들군."

    송정수가 쓸쓸한 눈빛으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폐 속으로 밀려 들어오는 담배 연기가 오늘따라 더없이 씁쓸했다.

    * * *

    "미친 영감들."

    최정훈은 역정을 내며 청와대를 빠져나갔다.

    찰칵, 찰칵!

    라이터를 몇 번이나 켰지만, 이상하게도 불이 잘 붙지 않았다. 최정훈은 열려 있는 차창 밖으로 라이터를 던져 버리고는 핸들을 내려쳤다.

    "으아아아아아아!"

    클랙슨 소리와 함께 고함을 지르고 나자 속이 좀 풀리는 기분이었다.

    화가 나서 참을 수 없는 것은 크리스토퍼나 송정수나 다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인다는 것이었고, 가장 용서할 수 없는 것은 그 말도 안 되는 소리에 혹하고 있는 자신이었다.

    혹하고 있던?

    아니.

    솔직히 말하면 지금도 혹하고 있다.

    인류를 위해서라는 미명하에 머릿속에서 빠르게 계산을 굴리고 있던 자신이 용서가 되지 않는다.

    '사람이면 차마 할 수 없는 짓이야.'

    그럼에도 그 할 수 없는 짓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을 보면, 최정훈 자신은 인간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게 아니면 그 무엇보다 인간적이든가.

    최정훈은 혼자 키득키득 웃었다.

    이런 상황에서 은인이고 뭐고 가장 이득이 되는 상황을 계산하고 있는 걸 보니, 참 인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은망덕하고 이기적인.

    최정훈은 차를 길가에 댔다.

    그러고는 불을 붙이지 못한 담배를 입에 물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이대로 차를 몰고 가다가는 사고를 낼 것 같았다. 차량 유동량이 극히 줄어버린 도시지만, 지금은 차선대로 따라가는 간단한 일도 할 자신이 없었다.

    "나도 쓰레기야."

    눈을 감고 자조하는 최정훈의 귓가에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찰칵.

    라이터를 켜는 소리.

    본능적으로 담배를 빨아 당긴 최정훈은 폐 속으로 넘어오는 담배 연기를 느끼며 서서히 눈을 떴다.

    그러고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누군가 담뱃불을 붙여주었다. 그 사람이 지나가는 행인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분명 안면이 있는 사람일 거라 생각했다.

    최정훈의 예상은 정확하게 적중했다.

    라이터를 든 채 그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사람은 분명 아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대체 왜 그가 지금 여기에 있단 말인가.

    "반가워요, 미스터 최. 좀 타도 될까?"

    타도 되냐고?

    최정훈은 허탈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거리에서 이자를 만난 이상 최정훈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거부한다고 해도 그는 언제든 보조석에 앉을 수 있었다.

    "…요즘 한국에 눌러앉았나? 자주 보는군."

    "뭐, 비즈니스 아니겠습니까?"

    보조석 문을 두어 번 열어본 그는 문이 잠겨 있자 유리를 통통, 두드렸다.

    최정훈은 한숨을 쉬며 문을 열어주었다. 문을 열고 차에 탄 그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더니,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남의 차에서 담배를 피우는 게 예의는 아니지만, 불 빌려줬으니 그걸로 퉁치자구요."

    "한국어가 엄청 유창해졌군."

    "아무래도 한국은 지금 제가 가장 관심이 있는 나라니까요. 조금 원활한 대화를 위해서 공부를 좀 했죠."

    최정훈은 피식 웃고 말았다.

    저 넉살은 봐도 봐도 적응이 되지 않는다. 저 사람 좋은 얼굴을 한 놈이 세계 최악의 범죄자라는 사실은 더더욱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내게는 무슨 볼일이지, 알파?"

    알파가 빙그레 웃으며 최정훈을 바라보았다.

    * * *

    "강변이라… 재미있는 곳이군요."

    "…뭐, 이쪽은 지금 일반인들이 들어올 수 없는 곳이니까. 얼마든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거야."

    최정훈은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리 창을 올리고 왔다고 해도 그가 알파와 만났다는 사실을 상부 쪽에서 파악했을 확률이 반은 넘을 것이다.

    지금 당장은 모르더라도 나중에 알게 될 확률도 있다.

    발각될 위험을 알면서도 굳이 알파를 데리고 이곳까지 온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어차피 선택권이 없다는 것.

    이 가까운 곳에서 알파를 마주한 이상, 이미 그의 목숨을 알파에게 저당잡힌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대체 왜 알파가 자신을 찾아왔는지 확인하고 싶다는 욕망이었다.

    "본론으로 들어가지?"

    "아, 그전에… 선물입니다."

    "선물?"

    알파는 품 안에서 작은 손수건 같은 것을 꺼내 최정훈에게 내밀었다.

    '손수건?'

    정확하게는 손수건을 준 것이 아니라 그 손수건 안에 뭔가가 둘둘 말린 채 들어 있었다. 최정훈은 떨떠름한 얼굴로 알파에게서 손수건을 받아 들어 폈다.

    "아, 이 미친 새끼!"

    손수건 안에 들어 있는 것을 확인한 최정훈이 기겁하여 소리쳤다.

    "에헤이, 흥분하지 마십시오."

    하지만 알파는 최정훈의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낄낄대며 웃었다.

    손수건 안에는 사람의 손가락이 들어 있었다.

    자른 지 얼마 안 된 듯한 손가락 다섯 개.

    최정훈은 차마 손가락을 던지지 못하고 다시 손수건을 쌌다.

    "…이거, 다시 붙일 수 있는 건가?"

    "죽은 손에 붙인다고 별 의미는 없을 텐데요?"

    "죽였다고?"

    "네."

    최정훈이 멍한 얼굴로 알파를 바라보았다. 최정훈의 시선이 무엇을 뜻하는지 짐작한 알파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시죠. 저도 시체의 손가락을 뜯어 오면 최정훈 씨가 기뻐할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닙니다. 네크로필리아는 아니니까요. 그건 최정훈 씨를 미행하던 놈들의 손가락입니다. 미 정보국 소속의 능력자들이죠."

    "미 정보국?"

    "네. 뭐, 새삼스러운 이야기는 아니잖아요?"

    최정훈이 가만히 손수건을 다시 폈다. 확인해 보니 확실히 동양인의 손가락은 아니었다. 미 정보국에 서양인만 있지는 않겠지만…….

    "…크리스토퍼인가?"

    "빙고."

    알파가 박수를 쳤다. 그 모습이 자신을 놀리는 것 같다고 생각한 최정훈이 말없이 창문을 열고 손가락을 손수건째 밖으로 던져 버렸다.

    "어? 그거 사체 유기 아닙니까?"

    "경찰도 없는데 얼어 죽을."

    "확실히 화끈한 면이 있으시네요."

    최정훈은 한숨을 쉬고는 입을 열었다.

    "농담은 이걸로 충분해. 네가 갑자기 여기에 나타났다는 것도 이제는 충분할 만큼 받아들였으니까. 이제 그만 본론으로 들어가는 것은 어떨까?"

    "음, 그렇죠. 하긴. 당신이나 나나 시간이 그리 많은 사람은 아니니까요."

    "…미안하지만 난 요즘 시간이 남아돌아."

    "…사실 저도 그렇습니다. 할 일이 없네요."

    묘하게 동질감이 느껴지는 대화가 오갔다.

    "용건만 간단히. 이 나라에서 배운 말이죠. 사실 저 같은 수다쟁이에게는 별로 마음에 드는 말이 아니지만요."

    "나도 원래 딱히 좋아하는 말은 아니었는데, 당신 때문에 좋아질 것 같군. 그래서?"

    "음, 간단합니다. 수다쟁이는 수다쟁이와 놀아야 하는 법이죠. 이지혁 씨와 대화를 좀 하고 싶은데요."

    "응?"

    이게 무슨 뜬금 없는 소리란 말인가.

    "이지혁 씨와?"

    "네. 전화를 했는데 안 받으시더라구요. 문자도 남겨봤는데 연락도 없고."

    최정훈이 황당하다는 눈으로 알파를 돌아보았다.

    "전화를 했어요?"

    "저 이래 봬도 문명인입니다. 전화 정도야 언제든지 하죠."

    "전화번호는 어떻……."

    최정훈은 말을 하려다 그만두었다. 알파 정도 되는 위인이 전화번호 하나 못 알아낼 리가 없다.

    "끙."

    태연하게 자신에게 접근해 이지혁과 연결해 달라는 알파의 의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냥 죽여."

    "워워, 진정하세요, 미스터 최. 나는 폭력주의자가 아닙니다."

    "아니라고?"

    최정훈의 눈이 살기를 품었다.

    "너 때문에 지금까지 죽은 사람이 몇인지나 알고 있어? 네놈이 마계의 문을 열어젖힌 덕분에 인류는 지금도 폭주 기관차처럼 멸망으로 달리고 있어. 그런 주제에 뭐?"

    알파가 피식 웃었다.

    "그래서 제가 그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인류는 아무 문제 없이 번영하는 겁니까?"

    "……."

    "아니란 거 알고 있죠? 시간이 얼마가 걸릴지는 모르지만, 어차피 마계의 문은 열렸을 겁니다. 이지혁 씨를 착실히 소모시켜 가며 버틴다면 조금 더 버텼을지는 모르지만, 결과가 달라지지는 않아요. 내 덕분에 이지혁 씨가 조금 더 쌩쌩할 때 문을 열게 된 걸 감사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까?"

    "아주 엿 같은 논리 잘 들었어."

    "천만에요."

    답답한 마음에 최정훈은 담배를 입에 물었다. 라이터가 없다는 걸 눈치챘을 즈음, 알파가 태연하게 그의 담배에 불을 붙여주었다.

    기분 더럽게 말이다.

    '아주 쌍으로 엿을 먹여주는군.'

    송정수와 크리스토퍼가 했던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듣기에는 엿 같은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리 틀리지도 않았다.

    알파가 일을 저지르지 않았더라도 언젠가 문은 열렸을 것이다. 시간을 조금 더 번다고 지금의 상황의 눈에 띄게 달라질 리가 없었다. 조금 더 연명하는 것뿐.

    "넌 대체 뭘 원하는 거야?"

    "네? 무슨 말씀이시죠?"

    "너도 인간이잖아."

    "…음, 그렇죠."

    "네놈의 엿 같은 논리는 잘 알아. 네놈이 무슨 꼴을 당했는지를 생각하면 동정이 가지 않는 것도 아니야.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너는 인간이잖아. 세상이 엿 같으니 마족에게 바치겠다는 것은 중2병 걸린 애새끼도 하지 않을 생각이라고."

    "매번 말하지만, 저는 인도주의자라구요. 인류애가 넘치는 캐릭터죠."

    "지껄인다고 다 말이냐."

    최정훈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이 미친놈과 대화를 나눠야 하는 자신의 상황이 더없이 처량하게만 느껴졌다. 그냥 엑셀을 밟아 도망가 버릴 것을, 뭣한다고 굳이 이놈을 차에 태웠단 말인가.

    "너무 그렇게 생각하지 마시죠. 말씀 그대로 저도 인간인데, 설마 인류가 망했으면 좋겠다 싶어서 그런 짓을 했겠습니까? 기회를 잡은 것뿐이죠."

    "기회?"

    "네. 일발역전의 기회요. 이지혁 씨를 제외하면 제가 마계와 마족에 대해서 가장 먼저 알았을걸요? 그러니 대비를 한 것에 불과하죠."

    "마계의 문을 연 게?"

    "모든 것을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그건 다 필요한 과정이었다는 걸 믿어주시면 좋겠네요."

    알파가 낄낄대며 웃었다. 자신도 황당하다는 듯이 말이다.

    "믿어주지."

    "와, 이렇게 쉽게 믿어줄 줄은 몰랐는데……. 제 부하라고 할 만한 놈들도 다 안 믿더라구요."

    "그래. 믿어줄 테니, 가서 일 봐. 난 죽어도 너를 이지혁 씨에게 데려가지는 않아."

    "왜? 내가 이지혁 씨를 죽이기라도 할까 봐?"

    "……."

    알파가 순간 사람이 바뀐 것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최정훈에게 바짝 붙어 말했다.

    "힘을 잃은 이지혁 따위는 관심도 없어. 죽일 가치도 없지. 만약 내가 그를 죽이려고 마음먹는다면, 그가 힘을 되찾은 후일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이지혁 씨가 힘을 되찾으면 감히 너 따위가 상대나 될 것 같아?"

    "아… 그건 그렇죠."

    알파가 현자 타임이 온 얼굴로 시트에 몸을 기댔다.

    "그러니 연결 좀 해줘요. 이거, 인류를 구하는 일이라구요."

    "…또라이 같아서 더 해주기 싫어지는데."

    "그럼 이렇게 합시다."

    "음?"

    "내 전화는 안 받아도 최정훈 씨 전화는 받을 거 아니에요. 그러니 최정훈 씨가 전화를 해서 나를 데려가도 되냐고 물어보는 거예요. 멋진 생각이죠?"

    "이지혁 씨가 미쳤……."

    "조심해서 말해야 합니다. 그 양반이면 그러라고 할 것 같기도 하죠? 낄낄낄."

    순간, 최정훈은 웃고 있는 알파의 입에 주먹을 틀어박아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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