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83화 (83/118)
  • [■] 딱히 바란 적도 없어 [■]

    ─────

    이지혁은 눈앞에 보이는 마왕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어, 그러니까……."

    이지혁이 눈가에 물음표를 띄우고 고개를 갸웃거리기 시작하자 마왕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나다! 나르시우스!"

    "에, 음……."

    이지혁이 영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자 나르시우스라고 자신을 밝힌 마왕이 이를 갈았다.

    "네놈이 내 영토에서 그 발악을 해놓고도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할 셈이냐?"

    "……죄송하지만, 제가 발악을 한 영지가 하나둘이 아니라서요."

    나르시우스가 손을 들어 자신의 관자놀이를 꾸욱 눌렀다.

    이 인간!

    이 인간이자 마왕인 놈은 그저 대화하는 것만으로도 상대를 미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이성적인 인텔리를 자처하는 나르시우스도 이지혁과 대화를 하다 보면 분노라는 감정에 자신의 몸을 맡기게 된다.

    "너라는 존재는 정말 이해를 할 수가 없군."

    "딱히 바란 적도 없어."

    인간은 영원히 고양이를 이해할 수 없다.

    그저 이해하는 척할 뿐이다.

    인간과 마족도 마찬가지.

    서로를 아무리 알아간다고 해도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에르카나와 이지혁의 관계도 크게 다르지 않다.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할 수는 있어도 근원적인 부분까지 서로 이해할 수는 없다. 인간 남자와 인간 여자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데, 종족이 다른 그들이 서로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판타지였다.

    "마족이 나를 이해해 줄 수 있었다면 내가 그 고생은 안 했을 거야. 베라프의 인간도 나를 이해 못했는데. 그래서 나는 나를 이해해 줄 수 있는 이들이 온 것으로 돌아온 거야."

    "저, 이 심각한 와중에 죄송합니다만……."

    정인수가 얼굴에 피를 철철 흘리면서 살짝 손을 들었다.

    "네?"

    "뭔가 착각하시는 것 같은데, 이쪽 세계의 인간이라고 해서 이해 해드리기에 이지혁 씨는 너무 멀리 나가셨어요."

    "……."

    웬지 서글픈 느낌이 든 이지혁이 고개를 돌려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나는 대체 무엇을 위해서 그리 개고생을 하면서 이 세계로 돌아왔는가.

    "그렇다는데?"

    "닥쳐!"

    "인간은 정곡을 찔리면 화를 낸다고 책에 쓰여져 있더군."

    "닥치라고!"

    "책은 배울 것이 많군."

    나르시우스는 정인수의 머리를 잡은 채 들어 올렸다.

    "그래서 우리와 맞서 싸우겠다는 건가, 아흔아홉 번째 마왕?"

    "흠,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지. 에…… 미안한데, 너 몇 번째냐?"

    "열일곱 번째다, 열일곱 번째!"

    "아오, 마족 놈들은 그냥 이름이나 부르면 되지, 넘버링은 왜 하는 건지 모르겠단 말이야. 부르기도 귀찮게. 아니면 차라리 저지 하나 맞춰서 등번호라도 하고 다니던가.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잖아."

    "그건 뭔 개소리냐! 저지라니?"

    "됐다. 스포츠도 모르는 몰상식한 마족 놈아."

    정인수는 매우 다급한 심정이었다.

    '제가 이놈의 손에 잡혀 있는 건 알고 그리 도발을 하시는 거죠, 이지혁 씨?'

    우리 사이가 그런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이지혁은 정인수가 죽든 말든 상관이 없다는 듯이 마음껏 나르시우스를 갈구고 있었다. 지금 그가 어린아이 손에 들린 메추리알 신세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는 거겠지?

    흥분한 나르시우스가 손가락에만 조금 힘이 들어가도 그의 머리는 알처럼 손쉽게 터져 버릴 것이다.

    "저, 이지혁 씨, 제 생각도 좀……."

    이지혁이 정인수를 보더니 혀를 찼다.

    "아파요? 피가 엄청 나는데?"

    "지금 아픈 줄도 모르겠거든요."

    당장 죽게 생겼는데 아픈 게 대숩니까? 예? 좀! 제발 좀!

    "시체는 잘 챙겨서 국립묘지에 안장해 드릴게요."

    "……그새 농담이 느셨네요?"

    "진담인데요."

    정인수는 빙그레 웃었다.

    저 미친 새끼, 사람을 이렇게 보내는구나.

    "큭큭큭."

    나르시우스가 웃으며 둘을 바라보았다.

    "안면이 있는 사이였나? 하지만 어쩌지? 아흔아홉 번째 마왕이 동료를 챙겼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거든. 너는 저자가 얼마나 냉혹한지 모르고 있구나."

    "어, 사실 그건 좀 오해에 가까워. 나는 동료를 챙기지 않은 게 아니라 이제껏 동료가 없던 것뿐이거든."

    "그럼 이자는 네 동료인가?"

    "으음……."

    이지혁이 볼을 긁었다.

    이보세요, 이지혁 씨.

    제가 그동안 이지혁 씨를 위해서 굴러다닌 게 얼만데, 지금 그걸 고민하십니까.

    "고민하는 것을 보니 별로 상관없는 자인 모양이군. 그럼 죽이고 시작해도 될까?"

    "죽여?"

    이지혁이 피식 웃었다.

    "착각하고 있네."

    나르시우스가 가만히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동료고 아니고, 그런 문제가 아니야, 나르시우스. 내가 온 이상 너는 누구도 해치지 못해."

    "누구도? 지금 내 손에 들어와 있는 이자마저도 말이야?"

    이지혁이 비릿하게 웃었다.

    "내가 지금까지 뭣 때문에 너와 쓸데없는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생각하는 건가?"

    나르시우스는 지체 없이 대답하려 했다. 하지만 정인수가 조금 더 빨랐다.

    "수다쟁이라서."

    "……."

    "……."

    나르시우스는 입을 뻐끔거렸다.

    그리고 이지혁 역시 입을 열었다 닫으며 반박을 하지 못했다.

    "아니, 거……."

    "그러고 보니……."

    나르시우스가 의혹에 가득 찬 눈으로 이지혁을 보며 말했다.

    "예전에도 이랬던 것 같은데. 딱히 다른 것도 없는 것 아닌가?"

    이지혁은 상처받은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수다쟁이라니……."

    정인수가 그를 위로하듯이 말했다.

    "때로는 진실이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만,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올바로 확립하는 것도 중요하죠."

    "됐거든요."

    나르시우스가 한숨을 쉬었다.

    저 인간과 대화만 하면 자신의 페이스를 잃어버리는 기분이었다.

    "이제 그만하지. 대화는 이 정도면 충분해. 네가 아닌 다른 인간과 대화를 해보고 싶던 것뿐이다. 하지만 네가 온 이상 그런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겠군. 이제 이걸로 충분……."

    나르시우스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손이 움직이지 않는다.

    "너……."

    "여하튼 마왕이라는 것들은."

    이지혁이 쯧쯧, 혀를 차면서 뚜벅뚜벅 걸어 정인수에게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손을 뻗어 나르시우스의 손가락을 떼어내고는 정인수를 들쳐 메고 자리로 돌아왔다.

    "수다쟁이?"

    "헤헤, 분위기를 맞춘 거죠."

    정인수가 재빠르게 태세를 전환하자 이지혁이 피식 웃고 말았다.

    "뒤쪽으로 물러나요. 상처 치료받구요."

    "예."

    정인수가 빠르게 물러나자 나르시우스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어, 어떻게 한 거지? 네가 전성기의 힘을 되찾는다고 해도 이런 식으로 나의 몸을 구속할 수는 없을 텐데?"

    "준비했지."

    "준…비했다고? 언제부터?"

    "니가 이 천막에 나타났을 때부터."

    나르시우스의 눈이 흔들렸다.

    그럼 진작부터 이곳에 있었음에도 모습을 숨긴 채 자신을 기다렸다는 뜻이 아닌가.

    "나, 나를 기다린 건가?"

    "당연하지, 멍청아."

    이지혁이 피식 웃었다.

    마수가 날뛰는 것을 처리해 버리고 싶은 마음이야 오죽했겠는가.

    하지만 이지혁은 자신의 역할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해야 할 일은 마수를 막고 사람들을 대피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곳에 나타날 마왕을 제압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사람이 죽어나도, 건물이 무너져도 그저 좌시했다.

    누군가는 비난할지도 모르겠지만, 이게 이지혁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대처였다. 준비가 다 끝나지 않았더라면 정인수가 죽어 나가는 한이 있어도 결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 것이다.

    "내 눈에 보이지 않게 마법진을 그렸다는 건가?"

    "네 눈에 안 띄는게 뭐 어렵다고. 너희, 날 너무 무시하는데… 나 마법사야. 왜 이래."

    나르시우스가 이를 갈았다.

    워낙에 마나를 마족처럼 펑펑 갈겨 대서 때로 잊어버리기도 하지만, 이지혁은 역사상 최강의 마도사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안 하려 할 뿐이지, 하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일반 마도사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고위 트릭을 얼마든지 쓸 수 있는 것이다.

    "큭큭, 당했군. 그래서 이게 전부인가?"

    "여하튼 마왕이라는 것들은."

    이지혁이 손을 들었다.

    "뭐, 원하는 대로 해주지."

    탁!

    이지혁이 손가락을 튕기자 바닥에 지름이 족히 삼백 미터는 될 것 같은 거대한 마법진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형이상학적인 문자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는 마법진의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도 이곳이 지구가 아닌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할 정도로 기괴하고 이질적이었다.

    "죽지야 않겠지. 그래도 명색이 마왕인데. 그렇지?"

    쿠우우우웅!

    마법진이 빛을 뿜어내더니, 거대한 홀처럼 변해가기 시작했다.

    "네 이놈……."

    그리고 나르시우스가 천천히 그 홀 안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나르시우스는 뭔가 말을 더 남기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이내 늪처럼 변해 버린 홀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흐음."

    우우웅!

    나르시우스가 홀 안으로 들어가자 홀이 점점 줄어들더니, 이내 사라져 버렸다. 이지혁이 나르시우스가 사라져 버린 공간을 보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끄, 끝난 겁니까?"

    정인수가 옷가지로 머리를 눌러 지혈을 하며 이지혁에게 다가왔다.

    "오지 마시라니까요. 치료는요?"

    "이 상황에 이 정도 부상으로 징징댈 거면 계급장 떼야죠."

    "거, 이 정도라고 할 수준이 아닌 것 같은데……."

    "괜찮습니다."

    이지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기야 지금 시민들이 죽어 나가고 있는데 명령권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자리를 비울 수 없는 것이다.

    "뭐, 치료야 알아서 하시고, 여기서는 일단 물러나세요."

    "예?"

    "마왕이 이 정도로 쓰러질 리가 없잖아요. 저놈이 좀 재수 없게 생기긴 했어도, 고위급 마왕이에요. 마계에서도 좀 오래 묵은 놈이라 쉽게 볼 놈이 아니죠."

    "지금 어디로 간 겁니까?"

    "에. 공간의 틈새라고 해야 하나, 차원의 틈새라고 해야 하나."

    정인수가 고개를 갸웃하자 이지혁이 씨익 웃었다.

    "뭐,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복귀하게 되는 곳이니 신경 쓰실 것 없어요."

    "복귀요?"

    정인수의 물음에 이지혁이 막 대답을 하려다가 고개를 돌렸다.

    하늘이 갈라지고 있었다.

    마치 허공에서 거대한 눈이 떠지듯 가로로 길게 세상이 갈라지더니, 이내 부풀어 오르며 거대한 원으로 변해간다.

    "저기 오네요."

    이지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니까, 저기로 물……."

    설명을 하려다 고개를 돌려보니 등 뒤에 서 있던 정인수가 저 멀리 달려 도망치고 있었다.

    분명 내가 도망가라고 하긴 했는데, 왜 이리 저 모습이 서글프게 느껴질까?

    "인생 혼자 사는 거지."

    이지혁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들었다.

    "열이 엄청 받았을 건데?"

    아귀지옥에 빠뜨렸으니, 아무리 마왕이라고 하더라도 고생 좀 했을 것이다. 그리고 고생한 만큼 아마…….

    "이지혀어어어어억!"

    갈라진 공간에서 나르시우스가 가공할 속도로 뛰쳐나왔다. 그러고는 이지혁이 있는 곳으로 미친 듯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열 받았겠지."

    이지혁이 씨익 웃고는 양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런데 어쩌지?

    이쪽은 마법사란 말이야. 마법사를 상대로 흥분하는 건 절대 금물이라는 걸 모르지는 않을 텐데?

    "낄낄낄."

    이지혁이 웃으며 양손에 마나를 끌어모았다.

    금기를 범했으면 대가를 치러야지. 그렇지?

    이지혁의 머리 앞쪽으로 마나가 타고 흐르더니, 마법진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 * *

    고오오오오오!

    마법진이 마나를 빨아들이며 공명하기 시작했다. 이지혁은 그 광경을 보며 씨익 웃었다.

    대기 중에 마나가 느껴진다.

    대격변이라도 해도 좋을 변화였다. 일반인들은 이 변화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겠지만, 마나를 사용하는 이들에게 있어서는 이제 겨우 바닷속에서 산소통이 내려와 숨을 쉴 수 있게 된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특히나 이지혁이 느끼는 감회는 남달랐다.

    사용하자마자 대기를 통해서 밀려 들어오는 마나는 그의 육신을 절로 들뜨게 만들었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전능감과 눈앞에 모든 것을 부숴 버리고 싶다는 파괴적인 본능이 머리를 지배하려 든다.

    세상 모든 것이 붉게 물들어 버릴 것만 같다.

    "큭큭큭."

    예전에는 이런 충동에 몸을 맡겨도 문제가 없었다.

    그의 뇌는 언제나 처음으로 돌아갔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단 한 번만 이 충동에 몸을 맡기게 되면, 다시는 되돌리지 못하게 되어버릴 것이다.

    호시탐탐 그의 머리로 밀어닥치는 길을 노리고 있는 흑마력이 아펠드리체가 심어놓은 방어막을 뚫고 그의 뇌를 새까맣게 물들여 버릴 것이다.

    그럼 끝이다.

    그 순간, 이 자리에서는 이지혁과 마왕의 격전이 아니라 마왕과 마왕의 싸움이 벌어질 것이다.

    그럼 누가 이긴다고 해도 이 세상은 끝이었다.

    인간이 마족이 된다는 것은 그저 종족이 바뀌는 것이 아니다. 이지혁이라는 개체가 완벽하게 재정립이 되는 것과 같았다. 사고방식을 비롯해 모든 것이 바뀔 것이다.

    그건 더 이상 이지혁이 아니었다.

    이지혁의 기억과 모든 힘을 가진 채 이지혁이 아닌 존재로 화해 버리는 것이다. 그 마왕이 된 존재가 무슨 행위를 할지는 이지혁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러니 이 충동과 싸워야 한다.

    마계가 지구에 강림하면서 이지혁은 활개 칠 수 있는 발판을 얻었지만, 그 덕분에 더 큰 위험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우우우웅!

    마법진이 공명하며 이지혁의 몸 안에 있는 마력을 빨아들였다. 이지혁이 과할 정도의 마력을 마법진에 쏟아붓고는 손을 앞으로 뻗었다.

    '한심하긴.'

    그의 눈은 어느새 차갑게 가라앉아 이성을 잃고 날아드는 나르시우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른 이들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이지혁에게 있어서 마왕이란 전투에 능숙한 이들이 아니었다. 전투에 능숙한 것으로 따지면 인간이 마왕보다 몇 배는 더 뛰어났다.

    필연적인 결과였다.

    거의 동등한 위치에서 서로 겨루어야 하는 인간에 비해서 마족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개미와 드래곤 정도의 개인차를 가지고 시작한다.

    하위급 마족들은 평생을 수련하고 고련한다고 해도 상위급 마족을 따라잡을 수 없다. 심지어 그들의 삶은 인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길다.

    그러니 하위 마족은 자신보다 능력이 뛰어난 상위의 마족에게 복종하고 감히 배반을 꿈꾸지 않는다.

    마왕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격이 다른 힘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성장을 하는 것은 맞지만, 격전을 치른다고 해서 힘이 크게 늘어나지는 않는다.

    덕분에 그들은 경험으로부터 배우지 못하고, 스스로의 힘을 갈고닦지 않는다.

    감히 저항할 수 없는 이들로서는 그들이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힘만으로도 전율할 수밖에 없지만, 인간의 몸으로 최초로 그들이 있는 곳에 도달한 이지혁의 눈에는 전혀 다른 모습이 보였다.

    그렇기에 이지혁은 여타 마왕들에 비해서 부족한 힘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초기의 마계에서 버텨낼 수 있던 것이다.

    자신을 향해 거침없이 날아드는 나르시우스를 보며 이지혁은 잔인한 미소를 머금었다.

    "돌진하는 멧돼지만큼이나 상대하기 쉬운 건 없는 법이거든."

    고오오오오.

    이지혁의 앞에 머물던 마법진이 공명하더니, 이내 검은 빛과 함께 수천 줄기의 가시덤불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아!"

    순식간에 눈앞을 뒤덮어 버린 가시덤불을 보고 나르시우스가 속도를 줄이려고 했지만, 이미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 버린 속도로 돌진하던 몸을 멈추는 것은 무리였다.

    콰지지직!

    가시덤불이 그의 육체를 파고들었다.

    강철보다 단단한 그의 육체를 마치 인간의 몸인 것처럼 파고드는 커다란 가시들에 찔리며 나르시우스는 비명을 질러 댔다.

    고통 때문이 아니었다.

    이지혁의 손에 놀아나고 있다는 분노와 굴욕감이 그의 이성을 앗아가고 있었다.

    콰득, 콰드득.

    주변의 가시덤불들이 그를 향해 조여온다.

    "끄으으윽."

    육체를 감싼 가시덤불이 그의 육체를 모조리 터뜨려 버릴 기세로 옥죄기 시작했다.

    '마나를 물리력으로 전환한 건가?'

    이건 소환의 개념이 아니었다.

    소환이라고 한다면 세상의 어떤 물질이라 해도 마왕의 육체를 이렇게까지 짓누를 수 있는 가시덤불 따위는 없을 테니까.

    마나를 바탕으로 이만한 것들을 이미지네이션하여 만들어낸 것이다.

    역사상 최고의 마도사라는 말이 결코 과언이 아니었다.

    마나를 자신의 일부처럼 다루는 마왕들도 이러한 마나 활용에 경지에는 오르지 못했다. 하지만 이지혁은 인간의 몸으로 이 정도의 경지까지 도달하고 만 것이다.

    이지혁이 특별해서인가, 아니면 다른 인간들도 같은 조건이라면 동일한 경지에 도달할 가능성이 있는 것인가.

    나르시우스는 그 점 때문에 인간에게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저 농락하고 죽이고 정기를 갈취하는, 음식 같은 존재에서 가능성을 가진 존재로 인간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크아아아아아!"

    처절하리만치 절규를 토해낸 나르시우스가 사방으로 마나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의 육체에서 뻗어 나간 마나가 제삼의 팔인 것처럼 주변의 가시덤불들을 후려치고 밀어내기 시작했다.

    수십 개의 검은 팔이 돋아나 덤불을 밀어낸다.

    "흐응."

    이지혁이 그 광경을 보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쪽처럼 복잡한 수식을 세우지 않아도 의지만으로 마나를 다루는 마족이라는 개체는 확실히 전투에 특화된 것이 틀림없다.

    다만, 하드웨어는 완벽한데 그것을 다룰 소프트웨어가 버그투성이라 문제인 거다.

    '최상급으로 가면 그것도 아니지만…….'

    이지혁은 사방으로 펼쳐져 있는 마나를 통해 주변을 감시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상하네."

    마왕들이 아무리 개인주의적이라고 해도 새로운 차원으로 넘어 갈 때는 최소한의 명령 체계를 갖추든가, 그게 아니라 해도 정보의 공유 정도는 할 것이다.

    그런데 추가 병력이 없다?

    "뭔 생각을 하는 거지?"

    이미 세 명의 마왕이 그 하나를 감당하지 못하고 일격에 쓸려 나간 상황이다. 반쯤은 방심한 것을 이용했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그들만으로는 이지혁을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고위급이라고 하지만 나르시우스 혼자 이지혁을 상대한다?

    마족이 아무리 머리가 나빠도 취할 수 있는 전략이 아니었다.

    "흐음……."

    이지혁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왜 이런 식으로 일을 벌인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뭐, 내가 없는 사이에 집단 퇴화라도 했나?"

    애초에 이만한 마왕들이 다른 세계로 넘어오는 경우 자체가 마계 역사에도 그리 없던 일이라 마왕들의 행동 패턴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마왕이란 존재는 어떤 차원을 가더라도 하나만으로도 세상의 멸망을 초래할 수 있는 위험한 존재다. 한데 그런 이들이 집단으로 넘어온 상황이니, 대체 어떻게 움직일지 이지혁도 정확한 예상이 힘들었다.

    "……뭐, 이리 병신같이 나와주면 나야 고맙지."

    그 순간, 이지혁이 만들어놓은 넝쿨들을 헤치며 나르시우스가 그 몸을 드러냈다. 전신이 갈가리 찢기다시피 한 마왕이 이성을 잃고 분노에 차 증오를 드러내는 모습은 누가 봐도 그리 유쾌한 광경은 아니었다.

    "이리 나와주면 고맙기는 한데, 고맙기는."

    이지혁의 육체의 주변으로 검은 마나가 천천히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천천히 돌던 마나가 갑자기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그래도 사람 너무 무시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더럽잖아. 안 그래?"

    이지혁이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마왕들이 단체로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이 아니라면, 그가 마계에서 활개 치던 일을 벌써 잊지는 않았을 텐데, 그럼에도 이런 식으로 나온다는 건 그를 무시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특히나 저 나르시우스 같은 경우는 무슨 배짱으로 홀로 그를 상대하겠다고 덤비고 있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흐으음. 뭐, 좋아."

    모르면 물어보면 그만이지.

    팔다리를 다 뜯고 몸통만 남겨놓고 물어볼까, 아니면 목을 뽑아서 물어볼까?

    마족은 생명력이 강하니까 산 채로 회를 치더라도 활어처럼 한동안은 숨이 붙어 있을 테니, 물어볼 시간은 충분하겠지.

    "큭큭큭큭."

    이지혁의 우수에 서린 마나가 손끝에 몰리더니, 긴 손톱을 만들어냈다.

    "산 채로 잡아 찢는 것도 별로 싫어하진 않거든? 큭큭큭."

    이지혁이 그 자리에서 날아올라 나르시우스에게 쏘아져 갔다.

    * * *

    "확실히 그분의 말씀이 맞군."

    보리엘은 광포한 기세로 나르시우스에게 날아드는 이지혁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초반에는 과거의 그와 별로 달라지지 않은 것 같아서 착오가 있는 것은 아닌가 의심했지만, 지금 모습을 보면 확실했다.

    이미 이지혁은 완벽할 정도로 흑마력에 쩔어 있었다.

    지금 보이고 있는 모습이 그것을 증명해 주지 않는가.

    육체를 마력으로 완전히 둘러싼 채 마나를 직접 날려 육체형 전투를 벌이는 것은 과거의 이지혁에게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머지않았군.'

    그의 주인이 말했듯이 이지혁이 변화하는 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럼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다.

    "후후후후."

    "그 웃음소리 영 마음에 들지 않는데, 보리엘?"

    보리엘이 천천히 뒤로 돌았다.

    허공에서 다리를 꼰 채 그를 바라보고 있는 열세 번째 마왕을 발견한 보리엘이 천천히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열세 번째 마왕을 뵙습니다."

    "오랜만이군. 그는 잘 있어?"

    "그분은 여전하십니다."

    "그 성격에 가장 먼저 이 세계로 넘어올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인내심이 있는 모양이야?"

    "그렇습니다. 그러니 아직까지도 열세 번째 마왕께서 하고 계신 장난을 받아주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장난?"

    "인간을 지지하는 것 말입니다. 정확하게는 한 개체겠지만."

    "흐응."

    에르카나가 고혹적인 미소를 짓고는 입을 열었다.

    "너희가 뭘 꾸미고 있는 건지 대충은 알겠지만, 그게 정말 제대로 된 방법일 거라고 생각해?"

    "저는 그저 수족일 뿐입니다. 손은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마족 주제에 충성심이라니. 웃기지도 않는군."

    에르카나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고는 몸을 돌렸다.

    "종족에 대한 예의로 한 가지 경고하지. 그건 파멸로 가는 길이야. 차원의 문제도 아니고, 단순히 상처 입는 정도로는 끝나지 않는 일이지. 라트렐이 왜 달링을 그토록이나 경계했는지를 잊지 마. 그는 인간이었을 때도 마왕을 넘어서는 힘을 가졌던 이야. 그가 마족이 된다면… 마왕이 아니라 그 이상이 되어버릴지도 모르지."

    "…확실히 전하도록 하죠."

    그 자리에서 퍽, 꺼지듯 사라진 보리엘을 보며 에르카나가 입술을 핥았다.

    "뭐, 그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겠지만 말이야."

    * * *

    "아오! 미치겠네!"

    김다현은 쌍소리를 내뱉었다. 아무리 잡아 죽이고 밀어내도 몰려오는 괴물들의 수는 끝이 없었다. 마치 이곳에서 몬스터들이 리젠되는 것처럼 죽여도 죽여도 몬스터의 수가 줄지 않는 것 같았다.

    "광역기 몇 개 있으면 소원이 없겠네, 진짜."

    스피드형인 김다현은 이런 식으로 단단한 갑피를 갖춘 대형 몬스터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빠르게 움직인다고 해도 본인이 가진 파괴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물리적으로 따지자면 속도를 힘으로 전환할 수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김다현은 그 속도를 버틸 수 있는 육체를 가지지 못했다. 그가 최고 속도로 달려들어 몬스터에게 바디 샷을 날리면, 몬스터는 곤죽이 되겠지만 김다현도 곤죽이 될 것이다.

    대인전에서는 다른 능력자들을 찜 쪄 먹을 수도 있는 김다현이지만, 이런 식의 잡몹들에게는 큰 힘을 발휘하기가 힘들었다.

    반면에.

    콰르르르르르르르르!

    거대한 불꽃의 헤일이 몬스터들을 집어삼킨다.

    불꽃은 마치 그래픽으로 만든 쓰나미처럼 높고 거대한 파형을 이루며 몬스터들을 집어삼켰다.

    크아아아아아아!

    카아아아아아악!

    그 거친 형태와는 다르게 불꽃으로 이루어진 파도가 물리력이 있을 리 없다. 하지만 그 어떤 물리력보다 더 강한 화력이 모든 것을 대체했다.

    화염의 파도에 휩쓸린 몬스터들이 순식간에 재로 화해 그 자리에 쓰러진다.

    "와, 나 이거 폼페이 다큐에서 본 거 같아."

    용암이 모든 것을 휩쓸어 재로 이뤄진 미이라만 남겨 버린 폼페이처럼 몬스터들은 저항조차 하지 못한 채 한 줌의 재가 되어버렸다.

    "…진짜 금수저 쩌네."

    아무리 김다현이 S급 능력자라고 할지라도 저런 걸 보고 있으면 태생적으로 능력의 차이가 나는 게 너무 불공평하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아무리 강해져도 할 수 없는 일을 서아영은 너무도 쉽게 해낸다.

    "금수저는 니가 금수저지."

    윤혁규가 피식 웃으며 김다현의 앞으로 걸어 나간다.

    "그럼 부장님은?"

    "다이아몬드 수저."

    "……."

    "너도 저쪽 KSF 애들이 보면 불공평의 상징이나 다름없으니까… 징징대지 말고 해야 할 일이나 똑바로 해, 레스큐."

    "구급대원이 되려고 수련한 게 아닌데."

    김다현이 한숨을 쉬며 몸을 돌렸다. 윤혁규는 징징대는 김다현을 보며 쓴웃음을 머금었다.

    '성격이 저래서 다행이야.'

    나르시스트라 누구보다 빛나야 하는 사람이 바로 김다현이었다. 스스로가 화려하게 활약을 하지 못하니 배가 아픈 모양이다. 하지만 NDF의 입장에서 보면 어쩌면 서아영보다 더 중요한 사람이 김다현일 수도 있었다.

    서아영이나 윤혁규의 역할은 누구라도 대체할 수 있다. 조금 위력이 줄어들고 시간이 더 걸리기는 하겠지만, 비슷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은 많았다.

    하지만 김다현과 같은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은 NDF 중에서는 아무도 없었다.

    지금도 그랬다. 저 많은 몬스터들을 헤치며 혹시 남아 있을지 모르는 사람들을 찾고 구해내는 것은 그들 중 누구도 감히 시도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NDF는 군인이라기보다 구조대에 가깝다. 몬스터들이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제압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이곳에 자리한 이들 중 가장 필요한 이가 김다현이라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본인 하나만 빼고.'

    히어로 영화 중독자인지, 저놈은 자신이 직접 나서서 때려 부수고 해결하지 않으면 성이 풀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자신의 위치를 자각한다면 차기 부장 후보로도 충분할 것인데.

    "성격이 저래서야……."

    윤혁규는 혀를 쯧쯧, 차고는 앞으로 나서서 양손을 모았다. 이내 그의 양손에 붉은 불꽃이 어리기 시작했다.

    "피해 보는 것은 이쪽이라고."

    정확하게 분류했을 때, 서아영은 화염계 능력자고, 윤혁규는 폭발계 능력자다. 하지만 하필이면 화염 폭발이다 보니 겉으로 보면 비슷한 능력자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옆에서는 산만 한 화염덩어리들을 펑펑 날려 대는데, 뒤에서는 조그마한 폭발이나 일으키고 있으니, 누가 봐도 마이너 카피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실질적으로는 김다현보다 윤혁규가 몇 배로 피해를 보고 있는 것이다.

    - 쓸데없는 소리 말고 빨리 정리나 해요.

    이봐, 이봐.

    아무리 최정훈이라고 해도 서아영한테 이럴 수 있겠냐고!

    "한다구요! 해요!"

    윤혁규가 궁시렁거리면서 몬스터들을 향해 양손을 뻗었다.

    * * *

    콰아아아아앙!

    서아영은 전황을 주시했다. 조금이라도 밀리는 곳이 있으면 그쪽을 지원하는 것이 최정훈이 정한 그녀의 역할이었다. 일단은 다른 NDF들이 방어선을 만들면 그 방어선이 밀리는 곳만 딱딱 지원해 달라는 뜻이었지만…….

    "망할! 다 밀리잖아!"

    몬스터는 끝이 없고, 인간의 체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양손으로 불덩어리를 만들어 눈에 보이는 곳마다 모조리 다 쏘아내면서 서아영이 스마트워치를 향해 소리쳤다.

    "멀었어요?"

    - 승인 떨어졌대요! 시작할 겁니다.

    "뭐 이리 오래 걸려!"

    이래서 선빵이 중요한 거구나.

    공격이 받은 지 한참이 지났는데 제대로 반격 한 번을 하기 위해서는 승인을 받아야 하는 곳이 너무 많았다. 대통령이 결단을 내린다고 해서 바로 이루어지는 일도 아니라는 사실이 서아영을 짜증 나게 만들었다.

    "이러니 남침당하고 바로 부산까지 밀리지!"

    짜증을 쏟아낸 서아영이 막 소리를 지르려는 찰나에 하늘에서 쌔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게 무엇인지를 직감한 서아영이 소리를 질렀다.

    "다 쓸어버려!"

    머리 위로 폭격기가 스쳐 지나가며 아래로 포탄을 투하하기 시작했다.

    콰콰콰콰쾅!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굉음과 함께 서울시가 폭염에 휩싸였다.

    "빌어먹을."

    최정훈은 서울의 한가운데서 피어오르는 화염 폭발을 보며 나직하게 이를 갈았다. 설마 대한민국의 수도에 자신의 손으로 폭격을 하게 되는 상황이 벌어질 줄이야.

    아무리 사람의 목숨이 최우선이라고는 해도, 저 건물이 무너지며 생기는 재산의 피해만 따져 봐도 한두 푼이 아니었다.

    몬스터들은 무찌르면 그만이지만, 이곳에 사는 이들은 그 이후로도 살아가야 한다. 이런 식의 파괴가 계속되다 보면, 결국은 몬스터가 아니더라도 현재의 삶을 유지할 수 없어 무너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다른 수가 없었다.

    끝도 없이 밀려오는 마수들은 인력으로 막아낼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NDF의 대원들 한 명, 한 명이 폭격기 이상의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해도, 기름을 채우고 포탄을 다시 충전하면 언제든지 폭격을 재개할 수 있는 폭격기와는 다르게 NDF들은 사람이다.

    체력이 떨어지고 에테르의 용량이 한계를 보이게 되면, 힘겹게 유지하고 있는 방어 라인이 일순간에 붕괴할 가능성이 있었다.

    "한강 쪽으로 들어오고 있는 전함들은 어떻게 됐어요?"

    - 지금 북상 중입니다.

    "왜, 서울 다 날아가고 나면 오지!"

    그나마 욕을 하지 않은 것이 최정훈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인내심이었다.

    - 스커드 날아갑니다.

    "예?"

    최정훈이 고개를 들어 바라보자 저 하늘 끝에서 뭐가 번쩍하더니, 엄청난 속도로 이쪽을 향해 날아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와, 폭격 좀 해달라고 했더니 미사일까지 날리네?

    진짜 여길 사막으로 만들어 버릴 기세였다.

    그런데…….

    "저거, 이쪽으로 오는 거 같……."

    최정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저 미사일이 잘 날아오다가 급격하게 각도를 꺾어서 바닥으로 떨어지는 신기술을 장착한 것이 아니라면, 아무리 봐도 탄착 위치가 여기 같은데?

    "아니, 빌어먹을. 누굴 죽이려……."

    스슷.

    그 순간, 최정훈의 옆에 나타난 정해민이 다짜고짜 손을 뻗어 뒷덜미를 움켜잡고는 텔레포트를 시전했다.

    콰아아아아아앙!

    말 그대로 폭음이 터지며 주변이 그대로 날아갔다.

    "와, 씨, 승천하는 줄 알았네."

    먼 건물 옥상으로 위치를 옮긴 최정훈이 스마트워치에 대고 욕을 퍼붓기 시작했다.

    "아니! 빌어먹을, 누구 죽일 일 있냐고!"

    - 오류가 있던 모양입니다.

    "오류는 지랄! 사람 죽고 나서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진짜 한 번 해볼래요?"

    - 사과는 나중에 드리겠습니다. 일단 현장에 집중을.

    이 새끼, 내가 누군지 반드시 찾을 거다.

    최정훈이 치를 떨고 있는 와중에도 상황은 급박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제기랄.'

    죽여도, 죽여도 상황이 달라지지 않는다. 날아가 버린 몬스터들 때문에 비어버린 공간을 뒤쪽에서 밀려 들어오는 몬스터들 순식간에 채워냈다.

    "포병 부대 멀었어요?"

    - 진입이 쉽지 않습니다. 버려진 차량과 대피하는 사람들 때문에 근접이 쉽지 않습니다.

    "K-9 사거리가 40㎞가 넘는데!"

    - 스펙상 사거리잖습니까. 그리고 정밀도가 떨어지면 팀 킬이 일어납니다.

    "제기랄."

    다급한 마음에 재촉하기는 했지만, 이들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사실은 최정훈 역시 알고 있었다.

    '도와줄 때가 됐는데…….'

    상황이 여기까지 이른 근본적인 원인은, 이지혁이 그들을 전혀 지원하지 않고 있다는 데 있었다.

    물론 이지혁이 지금 마왕을 상대하고 있다는 것은 최정훈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굳이 직접 와서 지원을 해주지 않는다고 해도, 몬스터 군대나 하다못해 오식이만 보내줘도 지금보다는 상황이 훨씬 나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지원이 오지 않고 있다는 것은 뭔가 좀 이상했다.

    "밀리나?"

    최정훈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저쪽 한끝에 검은 마나로 이루어진 것 같은 불꽃과 검은 가시덤불들이 하늘을 가득 메울 기세로 뿜어지고 있었다.

    '진짜 서울을 날려 버릴 기세네.'

    그 크기와 웅장함으로 따지자면 서아영의 불꽃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저 하늘에서 보이는 능력들에서는 서아영의 능력에서는 느낄 수 없는 불길함이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이지혁이 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생각할 수도 없다.

    이지혁이 지는 순간, 모든 싸움은 끝난다. 인류는 그것으로 패배한다. 그러니 애초에 이지혁이 진다는 가정은 할 필요가 없다. 최정훈의 모든 작전은 이지혁이 어떤 상황에서도 마왕들을 상대로 승리한다는 가정하에 이루어져 있었다.

    "지진 않겠지?"

    최정훈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이지혁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아는 이지혁이라면 마왕 따위 이빨로 물어서라도 뜯어 먹고 올 놈이다.

    - 대피 거의 완료됐습니다. 죄송하지만, 생존자 측을 확실히 점검해 주십시오.

    "몬스터가 저리 설치는데, 사람을 어떻게 찾으라는 겁니까!"

    - 힘든 건 이해합니다. 하지만 그게 우리 일이죠.

    "제길."

    이 재수 없는 놈이랑 대화를 나누느니 빨리 정인수가 부상을 치료하고 복귀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때, 하늘에서 최정훈의 몸을 날려 버릴 것 같은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뭐, 뭐야!"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기이한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뭐지, 저게?"

    이지혁과 마왕이 싸우고 있는 모습이다. 하지만 그 양상이 지금까지 최정훈이 본 것과는 너무 달랐다.

    "…이지혁 씨."

    최정훈의 입에서 허탈한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 * *

    "크하하하하하핫!"

    양손에 마력의 손톱을 1m나 뽑아낸 이지혁이 나르시우스를 향해 돌진했다.

    "이 미친놈이!"

    나르시우스가 고함을 지르며 자신에게 달려드는 이지혁을 맞았다. 아무리 그가 부상을 입은 상태라고는 하나 이지혁은 마법사다. 전사에게 마법사가 거리를 좁히다니, 이건 더할 나위 없는 굴욕이었다.

    "이지혀어어어어억!"

    나르시우스가 전신에서 마기를 풀풀 뿜어내며 돌진해 오는 이지혁을 향해 몸을 날렸다.

    죽인다.

    저 건방진 인간의 목을 산 채로 뜯어내 버릴 것이다.

    나르시우스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온 마나들이 주위로 몰려든다 싶더니, 이내 단단히 뭉쳐 그의 몸을 갑주처럼 둘러싸기 시작했다.

    콰드드득.

    육체가 갑주로 둘러싸이자 나르시우스가 지금보다 두 배는 더 빠른 속도로 이지혁에게 돌진하기 시작했다.

    "큭큭큭큭."

    그 광경을 보며 이지혁은 뒤틀린 웃음소리를 흘려냈다. 잔뜩 핏발이 서 붉게 변해 버린 눈 속에서 눈동자가 뒤룩뒤룩 움직이며 나르시우스의 움직임을 쫓는다.

    "정신 사나운데?"

    날파리처럼 날뛰지 말라고.

    이지혁이 우수를 앞으로 내뻗자 시커먼 촉수가 뿜어져 나와 나르시우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큭?"

    나르시우스가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촉수를 보며 움찔했다.

    피할까?

    하지만 여기서 피한다면 기세에서 밀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내 결심을 굳힌 나르시우스는 양손으로 줄기줄기 마기를 뿜어내며 촉수를 향해 그대로 날아들었다.

    기합성을 지르며 나르시우스의 우수가 날아드는 촉수를 쳐낸다. 하지만 촉수는 마치 연체동물처럼 나르시우스의 손을 피해내며 그의 육체를 향해 독사처럼 그 머리를 들이밀었다.

    콰득! 콰득!

    촉수들이 몸의 곳곳에 박혀들지만, 나르시우스의 갑주를 뚫어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게 목적이 아니었다는 듯이 뱀처럼 미끄러져 나르시우스의 몸을 휘감아온다. 나르시우스는 자신의 몸을 짓누르는 촉수들을 후려치며 소리를 질렀다.

    "빌어먹을! 자꾸 이런 식이냐!"

    아까부터 자꾸 사람을 귀찮게 하는 방향으로 싸우고 있었다. 시원하게 격돌하지 않고, 자꾸 방향을 바꾸고 끊임없는 견제가 들어오고 있었다.

    "크아아아악!"

    고함을 지른 나르시우스가 촉수들을 무시하고 이지혁에게로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때, 이상한 광경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뭐지?'

    분명 몸을 뒤로 빼거나 블링크를 통해 거리를 벌릴 거라고 생각했건만, 이지혁이 오히려 그를 향해 정면으로 달려들고 있었다.

    '하찮은!'

    인간 주제에 지금 마왕과 정면 승부를 하겠다는 건가.

    마왕들은 이지혁에게서 달아나지 않는다. 모두가 감히 그를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고, 두려움에 떨면서도 결코 그를 상위급 마왕이라고는 인정하지 않는다.

    기회가 있기 때문이다.

    이지혁과 거리를 좁힐 수만 있다면, 그의 육체에 일격을 박어 넣을 수만 있다면 이지혁을 영원히 파괴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재생?

    물론 과거의 이지혁은 타격을 받아도 원상복구가 되는 불멸성을 띠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어쨌다는 말인가.

    백 년이면 백 년! 천 년이면 천 년 동안이라도 복구되는 족족 파괴해 버리면 된다.

    이지혁이 대단한 점은 그걸 허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주변을 수도 없는 소환수와 마수들로 채우고, 에르카나와 수족이 되어준 마족들로 채워 단 한 타임을 벌어냈다.

    그 단 한순간을 극복하지 못하여 마왕들은 이지혁의 손아래 줄줄이 무릎을 꿇은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지혁의 주위에는 마계를 뒤덮어 버릴 듯하던 마수의 군단도 없고, 에르카나도 없었다.

    그런데 대체 뭘 믿고 나르시우스 자신을 향해 달려들고 있다는 말인가.

    화가 머리끝까지 차오른 나르시우스가 광소를 터뜨리며 이지혁을 향해 마력탄을 뿜어냈다.

    "이지혀어어어억!"

    줄기줄기 날아드는 마력탄을 보면서도 이지혁은 돌진을 멈추지 않았다.

    "끄으으으아아!"

    이지혁의 양손에서 생겨난 마력의 손톱이 길게 자라나더니, 그를 향해 날아드는 마력탄들을 그대로 베어버렸다.

    콰아아아아아아앙!

    허공에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이미 폭격이 떨어진 도시이건만, 그 이상의 충격이 일어나고 있었다.

    '어디?'

    폭격으로 발생한 폭연 탓에 잠시 이지혁을 놓친 나르시우스가 눈을 부릅떴다.

    "누굴 찾아?"

    하지만 찾을 필요가 없었다. 목소리는 바로 그의 등 뒤에서 들려왔으니까.

    "큭!"

    나르시우스가 순간적으로 뒤를 향해 손을 휘둘렀다.

    푸욱!

    하지만 미처 손이 채 휘둘러지기도 전에 이지혁의 스틸레토가 나르시우스의 등을 후벼 팠다.

    "끄으으윽……."

    배를 뚫고 나온 다섯 개의 긴 손톱을 보며 나르시우스가 몸을 떨었다. 그저 칼날이 육체를 파괴한 것이 아니다.

    칼날을 통해서 이지혁의 마력이 그의 몸 안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마치 몸 안에 쇠꼬챙이를 쑤셔 박고 전기를 연결한 것처럼 끔찍한 고통이 나르시우스의 전신을 벌벌 떨게 만들었다.

    "네 피는 푸른색인가?"

    서걱!

    섬뜩한 소리와 함께 이지혁이 나르시우스의 몸에 박힌 손톱을 그대로 가로로 그어버렸다. 나르시우스의 옆구리에 다섯 개의 선이 생겨나며 푸른색의 피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마족 놈들에게는 '네 피는 무슨 색이냐'는 말을 할 수 있어서 좋아. 사람처럼 획일적이지 않거든."

    "이, 이노오옴!"

    "시끄러워."

    콰득!

    이지혁의 손톱이 고함을 지르는 나르시우스의 얼굴에 그대로 틀어박혔다. 발성 기관이 파괴된 나르시우스는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마족의 강인한 생명력은 그 상태에서도 나르시우스의 생명을 붙여주었지만, 일순 의식을 잃은 나르시우스는 동력을 잃고 바닥으로 추락했다.

    이지혁은 나르시우스의 얼굴에 손톱을 박아 넣은 그대로 아래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큭큭큭."

    쿠웅!

    나르시우스와 이지혁의 육체가 바닥에 박혀들며 사방으로 흙먼지가 비산했다.

    나르시우스의 얼굴에서 손톱을 뽑아낸 이지혁이 손톱에 맺힌 피를 혀로 핥았다.

    부족하다.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

    "끄으으……."

    곤죽이 되어버린 얼굴이 복구되자 나르시우스가 겨우 의식을 되찾아 이지혁을 노려보았다.

    대체 저 손톱에는 얼마나 많은 마력이 농축이 되어 있기에 마왕인 자신의 육체를 종잇장처럼 갈라 버린다는 말인가.

    "…인간을 알고 싶다고 했던가?"

    서걱.

    이지혁의 손톱이 그어지자 나르시우스의 다리가 떨어져 나가며 피를 뿜어냈다.

    다시 한 번 그어지고, 또 그어진다.

    양팔과 다리가 모두 잘려 버린 나르시우스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내가 인간이 얼마나 잔인한지 말해줄 수 있을 것 같은데? 큭큭큭큭."

    이지혁의 눈은 완전히 검게 물들어 있었다.

    나르시우스는 그 광경을 보며 몸을 떨었다.

    그가 그랬다.

    이지혁은 지금 전성기의 반도 되지 않는 힘만을 갖추고 있을 뿐이라고 말이다. 거기에 불멸성이 없는 이지혁 따위는 너의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자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한 수준이었다.

    그동안 무슨 짓을 했는지, 이지혁의 근접 전투 능력은 몇 배나 더 늘어 있고, 마력의 운용 능력은 과거와는 비할 수도 없는 수준이었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과거 전성기의 이지혁과 상대한다고 해도 이 정도로 일방적으로 밀리지는 않을 것이다.

    "궁금하다는 눈이군?"

    이지혁이 씨익 웃으며 나르시우스의 배에 천천히 손톱을 박아 넣었다.

    "네놈들 덕분이지. 제한된 마나를 이용해서 마왕들과 싸워야 하는 경험이 없었다면 여기까지는 오지 못했을 거야. 부족할 게 없을 때는 몰랐는데, 정밀함이라는 건 꽤나 필요한 요소더군."

    "……."

    나르시우스가 뭔가 말을 하려는 순간, 이지혁이 그의 말을 끊었다.

    "짐작 못한 건 너뿐일 텐데? 아마 카이란은 알고 있었을 거야. 그놈이 너를 내게 보냈겠지?"

    "……."

    이번에는 나르시우스가 입을 닫았다.

    어떻게 아는 걸까?

    "카이란이 왜 널 내게 보낸 것 같아? 나를 죽이라고? 그놈이 정말 네가 내 상대가 안 된다는 걸 짐작하지 못했을까?"

    "나, 나는……."

    "큭큭큭."

    이지혁이 광기에 찬 웃음을 흘리며 천천히 나르시우스의 목을 그었다.

    "그러니까 너는 죽는 거야. 마계든 지구든 멍청한 놈은 남에게 이용만 당하다 죽기 마련이거든."

    "끄르륵."

    목구멍으로 피가 차오른다. 나르시우스는 필사적으로 목을 파고드는 이지혁의 칼날을 피하려 했다. 하지만 이지혁은 그의 몸을 짓누른 채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의 목을 그어 나갔다.

    마치 그 감촉을 음미하듯이 말이다.

    "걱정하지 마. 그놈도 곧 보내줄 테니까 말이야. 낄낄낄낄."

    나르시우스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눈을 뜬 채 천천히 의식을 잃어갔다.

    그의 몸이 서서히 굳어가기 시작하더니, 이내 마나로 화해 으스러지기 시작했다.

    "하아아……."

    이지혁이 나르시우스의 몸에 직접 손을 박아 넣고는 마나를 빨아들였다. 이제 마나의 수급은 그리 어렵지 않지만, 이만큼이나 정순한 마나는 대기를 통해 빨아들이는 게 쉽지 않았다.

    한껏 마나를 빨아들인 이지혁이 몸을 부르르 떨고는 고개를 들었다.

    마왕은 처리했지만 아직 마수들이 남아 있었다. 이지혁이 양손을 천천히 앞쪽으로 뻗었다.

    "이쪽으로……."

    우우우웅!

    그의 양손에 검은 마나가 맺혔다.

    "오라고."

    허공을 향해 마나가 날아든다. 그러고는 서울의 정중앙 상공에 거대한 마법진을 그려내기 시작했다.

    * * *

    "이. 이겼나?"

    허공에 나타난 마나를 본 최정훈이 쾌재를 불렀다. 저 마법진은 누가 봐도 아래에 있는 몬스터들을 노리고 있었다. 마왕을 상대로 하는 것이라면 저쪽으로 마법진을 그릴 필요가 없을 것이다.

    최정훈의 예상대로 마법진은 점점 그 크기를 키워 나간다 싶더니, 검은빛을 뿜어내며 빛나기 시작했다. 마법진의 가운데에 흑색의 공간이 생겨나더니, 이내 점점 몸집을 키워갔다.

    아래쪽을 향해 열린 듯한 거대한 게이트가 서울 상공에 생겨났다.

    최정훈은 그 광경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뭘 하려는 거지?'

    대단위 마법을 쓴다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겠지만, 지금까지 이지혁이 보여주던 마법의 모습과는 조금 다른 것 같았다.

    대량 살상 마법을 쓸 때, 이지혁은 저런 식으로 게이트를 여는 것이 아니라 마나를 응축해 날리는 것을 선호했으니까.

    하지만 그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뭐, 뭐야?"

    세상이 뒤집히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작은 먼지, 그다음은 작은 자갈.

    무게가 작은 것부터 시작하여 도시가 점점 위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아주 천천히, 중력이 아래에서 위로 전환되는 것처럼 가벼운 것들부터 천천히 허공으로 떠올라 상공을 가득 덮은 게이트를 향해 빨려 들어가는 것이었다.

    "서, 설마?"

    아니겠지?

    제정신 박힌 놈이면 할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지혁이 제정신 박힌 놈이 아니라는 것은 최정훈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정해민 씨!"

    "네?"

    "지금 여기에 있는 사람들 전부 밖으로 빼내요! 지금 당장!"

    "예!"

    이유는 필요 없다.

    사태의 심각성은 정해민도 이미 충분히 자각하고 있었다. 최정훈이 그렇다고 하면 그런 것이다.

    하늘에 보이는 검은 게이트가 마치 악마가 벌린 거대한 입처럼 세상 모든 것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 * *

    "저거 뭐야?"

    윤혁규는 멍한 시선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마치 하늘에 거대한 구멍이 뚫려 버린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구멍으로 뭔가 가공할 인력이 작용하고 있었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건물의 잔해들이 천천히 허공으로 떠오르더니, 느릿하게 구멍을 향해 빨려 들어가기 시작한다.

    "…블랙홀이라도 생긴 건가?"

    물론 지구에 저만한 블랙홀이 생겨났다면 이미 윤혁규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결과가 같다면 현상도 그리 다를 것이 없었다.

    자신의 몸이 허공 쪽으로 들썩이기 시작하는 것을 느낀 윤혁규가 기겁을 하며 바닥으로 납작 엎드렸다.

    "와, 아니지! 아니겠지!"

    이 주변의 민간인은 이미 대부분 대피한 뒤라 민간인에 대한 피해가 생길 일은 없겠지만…….

    "아니! 우리는 아직 대피 안 했다고!"

    저 구멍을 누가 만들었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바보가 아니라면 저 구멍이 이지혁의 짓이라는 건 누구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아직 이쪽이 대피하지도 않았다고!

    "아니, 씨발!"

    자신의 몸이 허공으로 떠오르는 것을 직감한 윤혁규가 유영하듯 바닥을 잡고 앞으로 기어 나가기 시작했다.

    살면서 이렇게 순간적으로나마 무중력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인가.

    여기까지였으면 참 좋은 경험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제 곧 이 중력 상태가 뒤집힐 것이다.

    "으아아아!"

    외벽을 붙들고 건물에 몸을 딱 붙인 윤혁규의 눈에 부서진 건물의 파편들이 허공으로 솟구치는 모습이 들어왔다.

    일순 게이트가 웅웅댄다 싶더니, 갑자기 폭풍이 몰아치듯 세상의 모든 것들이 게이트를 향해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마치 거대한 토네이도가 주변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듯이 말이다.

    "우와아아아아악!"

    건물 외벽의 움푹 들어간 부분에 손을 박아 넣은 윤혁규의 발이 허공을 향해 치솟았다.

    "으아, 씨발!"

    보통 사람이라면 절대 이렇게 하늘을 향해 떨어지는 기분을 느껴보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진귀한 경험을 만끽하기에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았다.

    크르르?

    마수들의 고개가 허공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시작은 작은 마수들부터였다.

    크롸라라라라.

    마수들이 허공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한다. 괴성을 지르며 다리를 허우적거리지만, 중력이 뒤바뀌는 것에 저항할 수 없었다. 비행형 마수들은 이미 일찌감치 게이트 안으로 빨려 들어간 뒤였다.

    퍼억! 퍼억!

    허공으로 치솟은 마수들이 건물의 잔해와 여기저기 부딪치며 자기들끼리도 마구 처박는다. 대형 마수들도 천천히 허공으로 떠올랐다.

    "와……."

    윤혁규가 그 광경을 보며 입을 쩌억 벌렸다.

    당장 그에게도 위험이 가해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장관은 장관이었다.

    건물의 잔해와 마수들의 뒤엉켜 거대한 토네이도를 이루며 게이트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우드득.

    그 순간, 윤혁규의 고개가 획 돌아갔다.

    "…아니지?"

    그가 잡고 있는 건물의 외벽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알아차린 윤혁규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아, 안 돼!"

    차라리 강한 물리력이 작용한다면 맞서볼 수라도 있겠지만, 인력 앞에서는 저항의 무의미했다.

    인간이 아무리 날뛴다고 해도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막아낼 수는 없듯이 말이다.

    건물의 외벽이 통째로 뜯어져 나가며 윤혁규의 몸이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

    "으아아아아아아아!"

    절망 어린 윤혁규의 눈이 자신을 빨아들이는 검은 게이트로 향했다.

    저 안에 뭐가 있을까?

    알 수 없는 일이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저 안으로 빨려 들어가면 절대 좋은 꼴을 보지는 못할 것이다.

    그의 옆으로 고래만 한 크기의 마수들이 허우적거리며 비명을 질러 대고 있었다.

    "사, 살려줘어어어어어!"

    비명을 지르고는 있지만, 윤현규도 알고 있었다.

    누가 이 상황에서 그를 도울 수 있겠는가.

    "와, 비명 봐."

    아… 있었다.

    김다현이 바람 같은 속도로 날아와 윤혁규의 옆에서 함께 빨려 올라가고 있는 몬스터의 몸에 들러붙었다.

    "아, 이거… 컨트롤이 영 안 되는데……."

    "기, 김다현!"

    "에헤이. 거, 손 뻗지 말고 가만히 좀 있어요. 물에 빠졌을 때 허우적대다 보면 구조대랑 같이 죽는다는 건 알고 있잖아요. 거, 손 내립시다, 손."

    "야, 이 미친놈아! 이 상황에서 그런 말이 나오냐! 빨리 살려줘!"

    "이 상황이니까 하는 말이지."

    김다현이 고개를 젓더니 윤혁규의 뒤쪽으로 날아들었다. 그러고는 윤혁규의 뒷덜미를 움켜잡고 그대로 허공을 걷어차며 아래쪽을 향해 몸을 틀었다.

    "와, 이거 무리!"

    잠깐 아래로 쑥 내려간다 싶더니, 이내 공중으로 붕 떠올라 다시 빨려 들어가기 시작한다.

    "아, 씨발! 똑바로 하라고! 다 죽는다, 인마!"

    "누가 이런 상황을 겪어봤어야 알죠. 거참, 엄살은 진짜. 꽉 잡아요."

    김다현이 한 팔로 윤혁규를 감싸고는 옆쪽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의 다리에서 뿜어져 나온 에테르가 허공을 밀어낸다.

    달리기라기보다는 거의 헤엄에 가까운 자세로 발악을 하던 김다현이 헐떡이기 시작했다.

    "추, 출력이 딸리는데……."

    "그럼 어떻게 해?"

    "저쪽으로 한 방 갈겨요!"

    "응?"

    "작용, 반작용도 몰라요? 저쪽으로 있는 힘 다 끌어모아서 한 방 갈기라구요! 그 반동으로 멀어져 보게!"

    "알았어!"

    윤혁규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게이트를 향해 몸을 돌려 에테르를 모으기 시작했다. 한 줌도 남길 생각이 없다. 어차피 여기서 벗어나지 못하면 죽는 것이다.

    "아직! 아직 조금만!"

    윤혁규가 가만히 아래쪽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뭘 기다려요!"

    "온다!"

    자신들 쪽으로 날아오는 거대한 괴수를 향해 윤혁규가 있는 에테르를 모조리 끌어모아 터뜨렸다.

    콰아아아아아앙!

    허공에서 터뜨린 거대한 폭발의 반동으로 윤혁규와 김다현의 몸이 쏘아낸 살처럼 튕겨 나가기 시작했다.

    "아오! 허리야! 이 양반은 적당히란 것도 몰라!"

    "있는 힘 다해서 하라며, 인마!"

    겨우 인력의 반경에서 벗어난 두 사람이 겨우 바닥에 착지하고는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건물 잔해와 몬스터로 이루어진 검은 토네이도가 한 점 남김없이 게이트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와,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윤혁규 씨! 괜찮아요?"

    저쪽에서 최정훈이 달려오고 있었다. 다른 인원들도 다 모였는지, 최정훈과 함께 그들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어떻게 다 모였어요?"

    "정해민 씨가 힘 좀 썼죠."

    "우리만 개고생한 거야? 나부터 좀 구해주지!"

    하지만 정해민은 그가 하는 말이 들리지 않는지, 게이트를 바라보며 몸을 떨고 있었다.

    "저거, 어떻게 되는 거예요?"

    "글쎄?"

    이지혁이 만든 것이니 그가 알아서 하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저건 스케일이 너무 크지 않은가.

    몬스터들뿐 아니라 그나마 멀쩡하던 건물들까지 손으로 잡아 뜯은 듯 해체되며 하늘로 빨려 올라가고 있었다.

    이 정도면 청소를 넘어서 정화의 레벨이다.

    "거, 거의 다 빨아들인 것 같은데?"

    마지막 남은 잔해와 마수들이 게이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게이트가 우웅- 하고 진동하더니, 이내 짙은 검은색의 마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어?"

    게이트에서 뿜어져 나온 마기가 한쪽으로 몰려간다. 아래로 쏟아지듯.

    다들 그 마기가 향하는 곳에 누가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스케일 쩌네."

    "뒈질 뻔하고도 그런 말이 나와요?"

    "뒈지는 건 뒈지는 거고, 스케일이 쩌는 건 사실이잖아."

    "하……."

    김다현의 타박에도 윤혁규는 꿋꿋했다.

    고오오오오오!

    끝도 없을 것 같던 마나의 줄기가 천천히 가늘어지자 다들 끝을 직감했다.

    우우우웅.

    게이트가 공명한다.

    "저… 저기요."

    그때, 서아영이 손을 번쩍 들었다.

    "왜요?"

    "저거, 마수들 기 빨아들이는 거야 우리가 한두 번 본 것도 아니니 대충 어떻게 될지 알 것 같은데……."

    "네."

    "건물 파편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서아영의 말에 최정훈이 멍한 얼굴로 위를 바라보았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

    눈치 빠른 몇몇은 이미 뒤쪽으로 슬금슬금 물러나거나 정해민의 옆에 딱 붙기 시작했다.

    "이, 일단 우리 좀 물러날까요? 여기도 위험해 보이는데?"

    "그, 그럴까요?"

    그리고 그 순간.

    퍼어어엉!

    게이트가 비명을 지르듯 부풀어 오르더니, 게이트 안에서 부서진 건물의 잔해들이 마치 포탄처럼 사방으로 터져 나왔다.

    "으아아아아앗! 김다……."

    윤혁규가 황급히 김다현을 찾았지만, 이미 김다현은 저 멀리 점이 되어 있었다.

    "저 개새끼!"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어야지, 저만 살겠다고 저리 도망을 가나!

    "달려어어어어!"

    사람들이 전력을 다해 게이트를 등진 채 달리기 시작했다.

    콰앙! 콰앙!

    콘크리트 파편들이 바닥과 부딪치며 폭음을 울려 댄다. 마치 작은 유성이 쏟아지는 것만 같았다.

    "이게 메테오지, 메테오! 아주 마법을 쓰고 자빠졌네!"

    "마법 맞잖아요!"

    "아니, 그런 뜻이 아니잖아!"

    살면서 누가 건물 파편의 비를 보겠는가.

    윤혁규는 오늘 참 진귀한 경험을 많이 한다고 느끼며 죽어라고 달렸다. 바로 뒤에서 퍽퍽! 소리가 들려온다.

    거의 네발로 달리다시피 전력을 다해 건물 파편의 사정권에서 멀어진 윤혁규가 바닥에 드러누워 거친 숨을 토해냈다.

    "아, 죽겠다. 진짜 죽을 것 같아……."

    "…와, 이건……."

    어느새 그의 옆으로 다가온 김다현을 보며 윤혁규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너… 너 죽인다, 진짜!"

    김다현이 윤혁규를 무시하고는 입을 열었다.

    "이건 막아도 막은 게 아닌 것 같은데……."

    최정훈도 어두워진 안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눈에 완전히 초토화가 되어버린 서울의 모습이 보였다. 재난 영화의 등급이 아니다. 고층 건물은 모조리 쓸려 나갔다.

    눈에 보이는 것은 반쯤 잘려서 흉물스러운 철근을 드러내고 있는 앙상한 건물의 잔해들뿐이었다.

    "…다 날아간 건 아니겠지만."

    적어도 이 일대는 한동안 다시 사람이 살 수 없을 것이다. 피해가 너무 극심하다. 그나마 최대한 빠르게 움직여서 민간인의 피해가 크지 않다는 것이 유일한 위안거리였다.

    최정훈은 눈앞에 보이는 광경을 보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천문학적이군.'

    피해는 아마 추산도 불가능할 것이다.

    한 나라의 수도가 반 정도는 아예 재개발을 위해 불도저로 밀어버린 것처럼 날아가 버렸다.

    런던을 잃은 영국이 그 힘을 잃었듯이, 이만한 피해를 입은 한국도 예전의 모습을 되찾지는 못할 것이다.

    단 한 명의 마왕.

    여럿도 아니고, 단 한명의 마왕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승리하긴 했지만 잃은 것이 너무 컸다.

    "이지혁 씨는?"

    하지만 그렇다고 넋 놓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지금 그가 해야 할 것은 이지혁의 신병 확보였다.

    "저쪽 같은데요."

    김다현이 가리킨 곳을 바라본 최정훈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으로 걸어갔다.

    "김다현 씨는 부상자들 좀 옮겨주세요."

    "예."

    한참 동안 건물 잔해를 헤치며 앞으로 나아간 최정훈의 눈에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며 서 있는 이지혁의 모습이 들어왔다.

    '뭐지?'

    조금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으며 최정훈이 이지혁을 불렀다.

    "이지혁 씨?"

    이지혁의 고개가 천천히 이쪽으로 돌았다.

    움찔.

    최정훈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완벽하게 붉게 물든 눈으로 이지혁이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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