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82화 (82/118)
  • [■] 덕분에 이 꼴이 났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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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번 게이트 사태에 대한 대한민국 정부의 대처는 답지 않게 재빨랐다. 무슨 일이 터지든 늑장 대응하는 것으로 유명한 대한민국 행정부가 이번 일에 있어서만큼은 초법적인 움직임마저 감수하며 가장 발 빠르게 움직였다.

    빠르게 계엄령을 선포하고 명령 체계를 대통령에게 일원화시켜 언제든 몬스터들과 싸울 수 있는 준비를 끝마쳤다. 군부대는 오래된 탄약고를 개방했고, 차량 정비를 마쳐 언제 어느 상황이 터져도 전투 병력을 발 빠르게 투입할 수 있도록 세팅을 끝냈다.

    민간인에 대한 대피 역시 완벽한 매뉴얼을 작성하여 희생을 최소로 줄일 수 있게 만들었다.

    송정수가 잠도 자지 않고 설친 결과가 상상 이상으로 좋게 나온 것이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이건 무슨 노인정도 아니고……."

    송정수는 비상대책위의 소파에 늘어져 있는 관료들을 보며 혀를 찼다.

    하지만 저들을 욕할 수는 없었다.

    언제 어떤 일이 터질지 모르기에 안락한 집을 포기하고 모두 이곳에서 철야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 철야가 3일째가 되도록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으면 사람이란 피로에 찌들어 늘어지기 마련이었다.

    "왜 움직임이 없지?"

    미국과 중국, 독일은 지금 험난한 싸움을 치르고 있는 중이었다. 재래식 무기가 거의 무의미한 몬스터들을 상대로 막대한 희생을 감수하고 능력자들과 군대를 투입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가장 가까운 스팟의 곁에 위치한 대한민국은 지금 매우 평화로웠다.

    "…평양은 어떻습니까?"

    "움직임이 없습니다."

    "음……."

    송정수는 조금 황망한 눈으로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세계의 다른 스팟들에서는 지금 몬스터가 풀로 틀어놓은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물처럼 쏟아지고 있는데, 유일하게 평양 스팟만은 매우 고요했다.

    이지혁이 한 번 설쳐서 그런 것인지, 다른 이유가 있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윤영민이 헛기침을 하고는 말했다.

    "좀 너무 여유가 있는 거 같은데요."

    "재경부에 미안하게 말입니다."

    현재 재계 쪽에는 폭탄이 떨어진 상황이나 다름없었다. 세계 경제를 이끌어가는 세 축에 모조리 몬스터 폭탄이 떨어졌으니, 주가가 아주 나이아가라 폭포처럼 급락하는 중인데다 무역물동마저 정지되어 버렸다.

    덕분에 재정부와 외교부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한 식량 수급에 여념이 없었다.

    "그쪽은 완전 전쟁터던데."

    방금 전, 관련 부서를 방문해서 질문을 하다가 바빠 죽겠으니까 나중에 오든지 하라는 차관의 말을 듣고 쫓겨난 송정수가 한숨을 내쉬었다.

    "왜 몬스터가 안 나오는 겁니까?"

    국방부 장관이 뚱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걸 저한테 물으셔도……. 제가 무슨 게이트 전문가도 아니고……."

    "끄응."

    더욱 그들을 황당하게 만드는 것은 차원의 문이 열리면서 더 이상 게이트가 열리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평소라면 게이트라도 좀 열려서 예열해 놓은 병력들을 실전으로 돌릴 수 있을 텐데, 게이트마저 열리지 않으니 KSF와 육군은 계속 의미도 없는 비상대기만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지원 요청은 없습니까?"

    "…네, 없습니다."

    독일이나 미국 같은 경우는 현재 주변국에 정신없이 SOS를 치고 있었다. 독일이 망하면 같이 망하는 유럽의 나라들은 게이트가 열리지 않으면서 생긴 여유 병력을 모조리 독일로 때려 박고, 미국 역시 캐나다와 남아메리카의 동맹국들이 전 병력을 지원하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한국에 지원을 요청하는 국가는 하나도 없었다.

    '우리가 스팟에서 제일 가까우니까.'

    상식적으로 봤을 때, 제일 먼저 쓸려 날아갈 나라가 바로 한국이었다. 그러니 누구도 한국에 병력을 요청하지 않는 것이다.

    "…우린 뭘 해야 하는 겁니까?"

    "그러게요."

    "으음."

    아이러니하게도 현재 대한민국은 블랙 먼데이 이후로 가장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 * *

    "아, 씨!"

    캐릭터가 죽어 나가자 이지혁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리고 최정훈은 그 광경을 보며 허망하게 중얼거렸다.

    "이 상황이 되어서도 게임하는 놈이나, 이 상황이 되어서도 게임 서버 돌리는 회사나……."

    물론 세상이 어떻게 되어도 돈은 벌어야 하는 법이니 서버를 유지하는 회사가 잘못한 것은 없다. 잘못한 것은 저놈인데…….

    '비난하기도 애매하단 말이지.'

    이지혁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다들 멍하니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할 일이 없는데?"

    김다현의 말에 윤혁규가 어깨를 으쓱했다.

    "뭐랄까, 매일 출동해야 했을 때는 진짜 더러워서 못해 먹겠다 싶었는데, 막상 출동 며칠 안 하니까. 이것도 힘들어서 못해 먹겠다."

    "그지?"

    "이러다 실업자 되는 거 아냐?"

    둘의 대화를 들은 최정훈이 고개를 돌려 상석 쪽을 바라보았다. 거울을 가져다놓은 서아영이 아까부터 화장을 했다 지우고, 했다 지우고를 반복하고 있었다.

    "…뭐하세요?"

    서아영이 최정훈을 힐끔 보더니 태연하게 대답했다.

    "어느 메이크업이 가장 잘 먹는지 보고 있어요. 바빠서 못했던 건데, 이 기회에 다 해보려고요."

    "아, 네."

    최정훈은 어색하게 웃고는 담배를 들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

    '적응 안 돼 미치겠네.'

    대원들이 놀고 있는 것이야 이해할 수 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그동안 혹사당한 대원들이니만큼 이 정도의 휴식은 있어야 앞으로 다가올 거대한 싸움에서 버텨내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더 컸다.

    최정훈이 진정으로 적응하지 못하는 것은 그도 일할 게 없다는 점이었다.

    10년 동안 할 일 없는 날을 하루도 겪어보지 못한 최정훈이 아닌가. 일이 없으니 대체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가 평범한 회사원이었다면 출근한 이후 일이 없을 때, 나름의 시간을 보내는 방법을 터득할 수 있었을 텐데, 그는 평범한 회사원이 아니고, 그의 컴퓨터에는 업무를 위한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휴대폰도 마찬가지고.

    '잠이라도 잘까?'

    이럴 때를 위해서 만들어놓은 수면실이지만, 극한의 피로에 쩔어 시체처럼 자는 것이 익숙한 곳이다 보니 멀쩡한 정신에 들어간다고 해서 잠이 올 리가 없었다.

    "끄응."

    최정훈이 대체 뭘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문이 벌컥 열리더니 오만상을 찌푸린 이지혁이 나오며 담배를 물었다.

    "아, 빌어먹을. 이럴 때 왜 게임을 하는 거야, 이 미친놈들이."

    '너도 그 미친놈이야.'

    때로 진실이라는 것은 평화를 위해서 묻히기도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최정훈은 굳이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서 오랜만에 찾아온 평화를 깨려고 하지 않았다.

    "잘 안 되십니까?"

    "서버에 완전 폐인들만 남아서 난이도가 확 올라갔어요. 할 일 없는 인간들."

    '너도 그 할 일 없는 인간이라니까?'

    누워서 침 뱉기를 연속으로 시전하고 있는 이지혁이었다.

    "평양 쪽에 움직임이 없는 이유는 뭡니까?"

    "그걸 왜 나한테 물어요?"

    "현재 지구에서 마계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인간이시거든요."

    "…뜬금없는 전문가행이네요."

    최정훈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는지, 이지혁이 입을 열었다.

    "정확한 이유는 몰라요. 한 대 처맞고 도망가더니 쫄아서 이쪽으로는 안 오는지도 모르고, 그게 아니면 저쪽 스팟이 접근성이 좋지 않겠죠."

    "접근성이요?"

    "다른 동네로 가야 하는데 게이트가 하나는 한강 옆에 있고, 다른 하나는 에베레스트 꼭대기에 있으면 어느 쪽으로 가실래요?"

    "헐?"

    그런 부분은 생각해 보지 못했다.

    "아니, 만화 같은 거 보면 균등하게 나오잖습니까."

    "만화가가 마계에 안 가봤으니까."

    "…와, 설득력 봐."

    새삼 현장 취재의 중요성을 깨닫는 최정훈이었다.

    이제 만화 한 번 그리려고 마계까지 갔다 와야 하는 시대가 열리는 건가?

    "이지혁 씨."

    "네."

    "이 평화는 언제까지 계속됩니까?"

    "…다른 나라는 지금 피똥 싸고 있다던데, 평화라는 말이 입에서 나오세요?"

    이지혁의 시선이 묘하게 경멸을 담자 최정훈이 손을 내저었다.

    "아니! 우리나라의 평화요! 우리나라의!"

    "세계화 시대에 이게 무슨."

    "자꾸 그렇게 몰아가실 겁니까?"

    최정훈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사실 타국의 상황도 생각보다 심각하지는 않았다.

    몬스터가 출현하면 모든 것이 휩쓸려 나갈 것이라는 예측과는 다르게, 몬스터들과 마왕들은 생각만큼 활동적이지 않았다.

    "글쎄요. 저번에도 말했다시피 마계의 생물들은 인간과는 비교도 안 되는 시간관념을 가지고 있는 것들이라……. 그쪽 입장에서 보자면, 침공을 시작하고 아직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을 거예요."

    "상대적으로 시간에 대한 개념이 길다는 뜻이군요."

    "네, 뭐……. 저쪽에서 꾸물대 준다면 우리가 나이 들어 죽을 때까지 조금도 전진 안 하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겠죠."

    최정훈의 얼굴이 조금 심각해졌다.

    '공격을 멈추라고 해야 하나?'

    이지혁의 말이 사실이라면 굳이 그들을 공격해서 자극하고 있는 지금의 대응이 인류의 멸망을 앞당길지도 모른다.

    "마족들끼리만 있다면 말이죠."

    "네?"

    "있잖아요. 알파."

    알파라는 말을 들은 최정훈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놈이 벌인 일이니 이렇게 미적지근하게 끝나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그렇겠죠."

    최정훈이 본 알파는 이지적인 사이코라는 말이 가장 어울리는 이였다. 보통 그만한 광증이 있는 놈은 이성보다는 충동으로 움직이는 성향이 있기 마련이데, 알파는 완전히 미친놈이면서도 완벽한 계산 아래서 움직이는 족속이었다.

    상대하기에 있어서 가장 까다로운 유형인 것이다.

    천하의 이지혁을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가는 계략을 짰던 알파가 마계와의 문이 열린 이후의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놈은 대체 무슨 꼴을 당했기에 그런 인간이 된 거예요?"

    "그건 제가 아니라 크리스토퍼에게 물어보셔야죠. 대충 듣기로는 미국 쪽 능력자 실험에 동원되었던 인물 같습니다."

    "인체 실험요?"

    "…아마 그렇겠죠."

    이지혁이 혀를 찼다.

    "여튼 그것들은 깨끗한 척은 혼자 다 하면서 뒤로는 온갖 짓을 다 저지른다니까."

    최정훈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는 반미주의자라기보다는 친미주의자에 가깝지만, 이지혁의 말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게 사실이었으니까.

    "여하튼 그럼 일단은 알파를 처리하는 게 우선이 되어야겠군요."

    "가능하다면 그렇게 해야겠지만, 지금까지 종적도 찾지 못했던 놈 아니에요? 이런 혼란기에 그게 가능하겠어요?"

    이지혁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최정훈의 의견은 달랐다.

    "지금까지 알파가 숨어 있을 수 있던 이유는 그 존재가 널리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알파를 반드시 처리하고 싶어 했지만, 반대로 알파의 존재가 타국에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알파는 그들의 치부나 다름없으니까요."

    "…덕분에 이 꼴이 났네요."

    "그렇죠."

    구린 구석을 숨기다 보면 결국에는 일이 크게 터져 버린다. 안타깝게도 이번 사태는 미국이 알파의 존재를 숨기다가 제대로 사고를 친 케이스였다.

    "…뭐, 미국이 알아서 하겠죠."

    이지혁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다시 건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최정훈은 그런 이지혁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 * *

    "…퇴근할까요?"

    "히익?"

    최정훈이 한 말에 다들 고개를 돌려 시계를 바라보았다.

    "다, 다섯 시야!"

    "다섯 시에 퇴근을 한다고? 이런 빌어먹을, 정시 퇴근이잖아!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가 있지?"

    "멸망한다더니, 그 말이 맞는가 봐. 정시 퇴근을 하는 날이 오다니."

    "심지어 '퇴근하세요'도 아니고, '퇴근할까요?'야. 자기도 퇴근을 하겠다는 말이잖아!"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하자 최정훈은 뭔가 가슴이 싸해졌다. 그저 제시간에 퇴근을 하자고 말을 했을 뿐인데 이런 반응이 나오다니.

    그동안 NDF가 얼마나 수라장을 겪어왔는지를 알 수 있는 반응이었다.

    "나는 이제 이게 잘된 건지, 잘못된 건지도 모르겠어."

    "나도."

    마계와의 차원이 융화되면서 세계 곳곳에 스팟이 열렸다. 인류는 한층 더 멸망에 가까워졌지만, NDF는 역사상 단 한 번도 없던 평화에 시달리고 있었다.

    세계 멸망을 담보로 평화를 얻는 것이 과연 옳은가 하는 딜레마에 빠졌지만, 그렇다고 일이 없는데 바쁜 척을 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서아영이 벌떡 일어나더니 소리쳤다.

    "퇴근합시다!"

    "예!"

    부장의 명인데 어찌 거절할 수가 있겠는가. 사람들이 어색한 얼굴로 주섬주섬 짐을 싸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이지혁도 있었다.

    "지혁아!"

    정해민이 이지혁에게 쪼르르 달려왔다.

    "오늘 뭐 할 일 있어?"

    "응?"

    "같이 밥 먹으러 갈래? 사람들 다 같이 가기로 했는데."

    이지혁이 씨익 웃으며 사람들을 둘러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오늘은 집에 갈 거야."

    "그래?"

    정해민이 아쉽다는 듯 말하고는 외투를 챙기러 가자 이지혁이 기지개를 켜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산하게 퇴근을 준비하는 이들을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그러고 보면 한 번도 이렇게 같이 퇴근을 해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오늘 회식 안 합니까?"

    서아영이 귀신같은 얼굴로 대답했다.

    "상황이 상황인데, 일 없다고 회식하러 간다 말하면 위에서 뭐라고 하겠어요? 생각을 하고 말해야지."

    "에이, 부장님도 돈 많이 버시잖아요."

    "니들 식비 감당할 정도는 아니거든? 박성……."

    박성찬 하나 먹이면 파산한다는 말을 하려던 서아영이 입을 꾹 다물었다.

    다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눈치를 챘는지 사무실 안에 미묘한 공기가 감돌았다.

    "그럼 저 먼저 갑니다."

    이지혁이 손을 흔들자 사람들이 이때다 하고 다들 크게 인사를 하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이지혁은 과한 환송을 받으며 사무실을 나섰다.

    * * *

    "흠……."

    날씨가 생각보다 쌀쌀했다. 이지혁은 평소 가지 않던 길로 방향을 틀었다. 오늘은 집으로 바로 가기보다는 조금 둘러보고 싶었다.

    '해가 일찍 지네.'

    하늘 위로 노을이 깔리고 있었다.

    붉게 물든 노을이 아름답다. 새삼 '이런 것도 보지 못하고 살아왔구나' 하는 기분이 든다.

    천천히 산책하듯 걷던 이지혁의 귀에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응?"

    길가의 덤불 아래서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지혁이 덤불 아래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어?"

    작은 새끼 고양이 하나가 몸을 웅크린 채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손을 뻗자 잠시 경계하던 고양이가 이내 이지혁의 손가락을 핥아온다.

    "배고프냐?"

    손을 뗀 이지혁이 조금 빠른 걸음으로 근처에 있는 편의점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편의점에서 물과 일회 용기. 고양이가 먹을 만한 참치 캔을 챙긴 이지혁이 빠른 걸음으로 다시 덤불을 향했다.

    "있어?"

    고개를 아래로 들이밀어 보자 새끼 고양이가 아직 그 자리에 있었다.

    "배고프지?"

    이지혁이 씨익 웃고는 그릇에 참치를 담고, 다른 그릇에 물을 부어서 고양이에게 내밀었다.

    "먹어라."

    살짝 경계하는 듯한 눈으로 이지혁을 바라보던 고양이가 배고픔을 이기지 못했는지, 슬그머니 그릇으로 다가와 참치를 먹기 시작했다.

    "잘 먹네."

    이지혁은 흐뭇한 얼굴로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담배를 한 대 문 채 밥 먹는 모습을 지켜본 이지혁은 고양이가 물까지 비우고 나자 빈 그릇을 안쪽으로 쭉 밀어 넣었다.

    "날 추운데 얼어 죽으면 안 되는데……."

    이지혁이 손을 뻗자 이제는 고양이가 경계하지 않고 얌전히 그 손을 받아들였다. 머리를 쓰다듬자 갸르릉거리는 것이,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이지혁은 가만히 고양이를 쓰다듬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천히 공원 쪽으로 향하자 덤불 아래에서 까만 머리가 나와서 그가 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들어가. 춥다."

    말을 알아듣는 것인지, 야옹거리던 고양이가 쏙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지혁은 피식 웃고는 공원으로 가 벤치에 앉았다.

    아직 이른 시간인 탓인지 공원에는 사람들이 꽤나 많이 나와 있었다. 엄마 손을 잡고 나온 아이들은 코를 훌쩍이면서도 집에 가자는 엄마의 말을 거부한 채 드론을 날린다거나 흙장난을 하며 놀고 있었다.

    공원 외곽을 돌며 운동을 하는 어른들도 있고, 목줄을 차고 산책을 나온 강아지들도 보인다.

    평화롭다.

    이지혁은 눈앞의 광경을 보며 가만히 미소 지었다.

    이 세상은 아름답다.

    베라프에서 절절히 실감할 수 있었다. 그가 인간이어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인간이 쌓아 올린 문화와 문명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이 지구는 분명 아름다운 곳이었다.

    하지만…….

    이 세계가 아름다운 것은 이지혁이 이곳에 존재하기 때문이 아닐까?

    자신이라는 존재 의식 없이 이 세계만 존속한다면 그게 이지혁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죽음으로 세계를 지킨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죽은 자는 무(無)로 돌아갈 뿐이다.

    그런데 죽은 자에게 남아 있는 세계를 지켜냈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멍청한 짓이다.

    그리고 이 세계에는 멍청한 인간이 너무 많았다.

    다른 인간을 구하기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불속으로 뛰어드는 멍청이들이 있고, 가족을 지킨답시고 총을 드는 얼간이도 너무 많다.

    내가 아닌 다른 것을 지키기 위해 나를 희생하는 이들이 많다.

    마지막 순간에 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허무?

    아니면 아쉬움?

    그게 아니면 후회?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지혁은 웃으면서 그 상황을 받아들일 자신이 없었다.

    그는 수없는 세월을 살아온 존재.

    끝없는 세월 동안 타인들과의 관계를 배제하고, 연명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의 삶을 살아온 이였다.

    그러니만큼 이지혁은 자기애의 결정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이 세계를 위해 희생한다?

    "웃기는 소리."

    내가 있어야 세계도 있는 것이다.

    이지혁은 머릿속으로 파고드는 상념들을 지우려 애썼다.

    "쓸데없는 말을 들어서 그래."

    죽어야 한다면 함께 죽는 것이 낫다.

    살 수 있다면 함께 사는 것이 더 낫고.

    누군가는 희생을 하고, 누군가는 그 희생을 담보로 살아간다는 것은 미담으로 전해질지언정 끔찍한 행위에 불과하다.

    "무슨 생각 해요?"

    "아! 깜짝이야!"

    등 뒤에서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이지혁은 경기를 일으켰다.

    "인기척 내고 왔는데……."

    "……."

    얘는 진짜 전생에 무슨 닌자였나?

    어떻게 자신의 등 뒤로 전혀 눈치채지 못하게 접근할 수 있는 거지?

    이지혁을 암살하겠답시고 숨어들었다가 반경 100m 이내에도 접근하지 못하고 죽어 나간 어쌔신들이 지금 이 광경을 봤다면 억울해서 눈도 감지 못했을 것이다.

    김다솜이 빙긋 웃으며 이지혁의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따라왔어?"

    김다솜이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는 아니에요. 여긴 제가 자주 산책하러 오는 곳이거든요."

    그러고 보니 이곳은 김다솜의 집에서 가까운 것 같다.

    이지혁은 한숨을 쉬며 김다솜을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깊게 하세요. 처음 불렀을 때도 모르시던데."

    "…그래?"

    그럼 이번에는 김다솜이 대단한 것이 아니라 이지혁이 얼이 빠졌던 것이라 하자.

    "별생각 안 해."

    "그래요?"

    이지혁이 되레 물었다.

    "요즘 어때?"

    "뭐가요?"

    "게이트가 열렸다는 건 다들 알잖아. 보도가 되었을 테니까. 이제 인류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 달라진 건 없어?"

    "네."

    김다솜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달라진 건 별로 없어요. 여전히 아침에는 지하철이 붐비고, 학교에서는 선생님이 잔소리를 하고, 예원이는 여전히 자고."

    "고년이!"

    쿡쿡 웃던 김다솜이 이어 말했다.

    "별다른 건 없어요. 여전히 그런 하루죠. 지금 보고 계시는 것처럼요."

    이지혁이 뚱한 얼굴로 말했다.

    "아직 세상이 어떻게 되는지 잘 몰라서 그런 건가?"

    "아니요."

    김다솜이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아니에요. 다들 알고 있어요. 이제는 끝이라는걸요. 보도도 은근히 그런 내용을 넣고 있고, 지금 노력은 하고 있지만 마땅한 대책이 없다는 말도 나오더라구요."

    이지혁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런데 어떻게 그리 아무렇지도 않을 수가 있지?"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에요."

    "응?"

    "처음 게이트가 열린 날은 세상이 눈물바다였어요. 워낙 많은 사람이 죽었으니까요. 그 이후로도 희생은 계속됐죠."

    "익숙해졌다, 이건가?"

    김다솜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사람을 잃는다는 건 아무리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거예요."

    이지혁은 김다솜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익숙해지지는 않는데 담담하다?

    김다솜이 가만히 이지혁을 바라보며 말했다.

    "처음 게이트가 열린 날 이후로 저도,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다들 알고 있었어요. 언젠가는 이런 날이 닥칠지도 모른다는 걸요."

    "……."

    "세상은 언젠가 멸망한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은 빤했어요. 그래도 사는 거잖아요."

    "…그렇지."

    "내일 세상이 멸망한다고 하면 저도 집에서 놀겠죠. 한 달 뒤에 멸망한다고 해도 놀 거예요. 그런데 1년 뒤에 멸망한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하죠? 10년 뒤에 멸망한다고 하면요?"

    "으음……."

    이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이 멸망한다고 해서 모든 것을 놓을 수는 없어요. 그 시간까지도 우리는 살아가야 하니까. 그러니까 쓸데도 없을지 모르는 공부를 하고, 내일을 준비하는 거죠. 기적이 일어났을 때, 포기했던 삶이 돌아올지도 모르니까."

    이지혁은 가만히 김다솜을 바라보았다.

    얘가 이렇게 생각이 깊은 애였던가?

    "무섭지는 않아?"

    "엄청 무섭죠. 하지만 무서울 때 무섭다고 자꾸 생각하면 더 무서워지는 거랬어요. 무서울수록 사람은 어깨를 펴야 한다고 하셨거든요."

    "누가?"

    "어머니요. 블랙 먼데이 때 돌아가셨어요."

    "……."

    그렇구나.

    이지혁은 벤치에 등을 기대며 이제 어두워지고 있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 세상은 여전히 아름답다.

    노을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다.

    고양이가 귀여워서도 아니다.

    내일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이들이 있기에 이 세상은 아름다웠다.

    '조금 일찍 알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익숙한 세상을 원하는 게 아니라 모두가 살아가는 세상을 원했다는 걸 말이다.

    이지혁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덕분에 편해졌어."

    "네?"

    "가자, 바래다줄게."

    이지혁이 싱긋 웃고는 김다솜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 * *

    "저, 운동하고 가야 하는데요?"

    "운동 안 해도 돼. 어린 게 뭐 벌써부터 운동이야?"

    "안하면 살찌는데."

    "괜찮아. 살 좀 쪄야 돼."

    "…통통한 편이 좋으세요?"

    "취향은 그쪽인데."

    "집에 갈게요."

    이지혁은 자신이 뭔가 말실수를 한 것을 깨달았다.

    "토, 통통이 좋은 거야. 퉁퉁이 아니라!"

    "네, 알겠어요."

    뭔가 다짐한 듯한 김다솜을 보며 이지혁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 말 때문에 김다솜이 뚱뚱해진다면, 김다현이 그를 죽이겠다고 달려들지도 모른다.

    "아냐. 지금이 제일 좋은 것 같아."

    "정말요?"

    "응."

    "네. 그럼 이렇게 유지할게요."

    이지혁은 한숨을 쉬었다.

    "그래. 그럼 운동할 거지?"

    "아니요."

    "…운동한다더니?"

    "지금 가실 거잖아요. 그럼 그냥 집에 갈래요."

    생글생글 웃는 김다솜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불편하면서도 편해지는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지혁은 김다솜을 집까지 바래다주고는 천천히 몸을 돌려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조금 가벼워진 것 같긴 하네.'

    * * *

    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서자 바라스가와 오식이가 그를 맞았다.

    오식이는 이미 사회의 쓴맛을 보았는지, 바라스가의 한 걸음 뒤에서 부동자세가 되어 이지혁을 맞이하고 있었다.

    "끄응."

    이지혁이 한숨을 내쉬고는 바라스가를 보며 말했다.

    "괴롭히지 마라."

    "이제 그럴 일 없다."

    거북이 주제에 거드름을 피우는 얼굴을 하다니! 거북이 주제에!

    보고 있자니 위화감이 극심했다.

    "바라스가."

    "말해라, 인간."

    "인간?"

    "…말씀하시죠, 주인."

    태세 전환 보소.

    "마왕들은 많이 넘어왔나?"

    "그렇지 않다. 현재 넘어온 마왕들은 소수에 불과하다. 아마 동향을 살피고 있는 마왕들이 대부분일 거다."

    "너희 개념으로 보자면 동향 살피는 데만 한 천 년 정도는 쓸 수도 있는 거 아냐?"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어째서?"

    "그대에게 원한이 있든 원한이 없든, 그 어떤 마왕도 그대가 노화로 죽을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려 들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 내가 뭘 그리 잘못했다고."

    "큭큭큭."

    바라스가가 낮게 웃었다.

    "더구나 네가 나를 쓰러뜨렸다는 소문이 퍼지고, 네가 원래의 힘을 반쯤이라도 되찾았다는 말을 듣는다면… 이 세계로 몰려올 마왕들이 더 늘어나겠지. 마왕이란 그런 존재들이니까."

    이럴 때는 마왕들의 성향을 알고 있다는 것이 새삼 싫어지는 이지혁이었다.

    "알겠다."

    "그리고 주인."

    "왜?"

    "…이런 육체가 되고 나니 허기가 진다. 밥을 다오."

    "…사냥해 처먹어."

    "인간을 먹어도 되는 것인가?"

    "너, 거북이탕이라고 들어봤냐?"

    "으음……."

    바라스가가 소리를 질렀다.

    "이 몸으로 사냥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냥감이 있는 곳으로 향하는 데만 하루가 꼬박 걸릴 것이다. 그래도 괜찮은가! 정말 괜찮으냔 말이다!"

    "누가 상전인지……."

    이지혁이 고개를 젓고는 창고로 가 오식이 사료 한 포대를 바라스가에게 가져다주었다.

    "먹어봐."

    "이게 뭔가?"

    "…밥이다, 밥."

    바라스가가 인상을 썼다.

    "인간은 식료를 이상하게 포장하는군."

    "밥도 안 처먹는 마왕 주제에 타 차원의 식문화를 비판하지 마시고 그냥 처드시지?"

    "으음……."

    바라스가가 입으로 포대를 쭉 찢더니, 그 안에 든 사료를 한 입 베어 물었다.

    "흐음, 음식의 맛은 표현하기 어렵지만, 영양은 꽤 높은 편이군. 우선은 이런 식재로 만족하겠지만, 좀 더 나은 음식을 먹고 싶다."

    "…그래."

    그냥 줘본 건데 설마 먹을 줄이야.

    개 사료 먹는 오거에 이어 개 사료 먹는 마왕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 * *

    "왔니?"

    "응."

    안으로 들어가자 어머니가 한창 음식을 차리고 있었다.

    "오늘은 좀 늦었구나. 어디 들렀다 왔니?"

    "공원에 잠깐 나가 있었어요."

    "그래, 얼른 씻어라. 밥 먹자꾸나."

    "응."

    이지혁은 옷을 벗어 세탁 바구니에 던져 놓고는 샤워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식탁에 차려진 진수성찬을 본 이지혁이 입을 열었다.

    "오늘 엄청 푸짐하네."

    "오랜만에 다들 같이 먹는 거니까."

    어머니가 말을 하자마자 방문이 열리더니, 이예원이 빠른 걸음으로 나왔다.

    "오빠!"

    "응?"

    "다음에 출동할 때 실수인 척하고 우리 학교 건물 좀 날려주면 안 돼? 이 미친 학교는 이 상황에서도 휴교를 안 해!"

    "…어느 쪽이 미친 것인지를 생각해 보지 않으련, 사랑하는 동생아?"

    "와, 숙제 내주는 거 보고 깜짝 놀랐잖아. 완전 극혐."

    극혐이라는 단어가 생긴 것을 이 오빠는 매우 다행으로 생각한단다. 그 단어가 아니라면 너를 보는 내 기분을 어떻게 설명하겠니.

    이지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식탁에 앉았다.

    "예원아, 가서 아버지 모시고 내려와라."

    "응."

    이예원이 위로 올라가자 이지혁이 어머니를 보고 물었다.

    "아버지도 와 있어?"

    "그래. 오늘 내가 불렀다. 같이 밥 먹자고."

    "흐음……."

    뭔가 가족회의 같은 분위기가 나기 시작했다.

    이지혁은 간만에 식탁에 모두 둘러앉은 가족들을 바라보았다.

    해가 진 저녁.

    따뜻한 밥.

    모두가 앉은 식탁.

    '바라던 건 이게 다였어.'

    베라프에서 끝없는 외로움에 사무쳐 어찌할 바를 몰라 했을 때, 그의 머리를 가득 채우던 그리움의 대상은 바로 이 식탁이었다.

    그토록 원하고 또 원하던 것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지혁은 묘한 감흥을 느꼈다.

    "안 먹니?"

    "먹어."

    아버지가 음식을 드시는 것을 확인한 이지혁이 숟가락을 들었다.

    식사는 별다른 이야기 없이 진행되었다.

    화기애애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딱딱하지도 않은, 그야말로 평범한 가정의 평범한 식사였다.

    음식을 다 먹고 나자 어머니가 식탁을 치우고는 과일을 깎아 마루로 가지고 나왔다. 온 가족이 소파 앞에 둘러앉았다.

    그러고는 어머니가 조용히 이지혁을 불렀다.

    "지혁아."

    "응, 엄마."

    "무슨 일을 하려는 거지?"

    "……."

    어머니는 가만히 이지혁을 보며 말했다.

    "너는 내 자식이고, 내가 너만 보고 산 세월이 이십 년이다. 아들내미가 뭔가 결심을 하고 있다는 걸 모를 만큼 엄마는 어리숙하지 않아."

    어리숙은 뭔 소리인가.

    눈치로 따지면 누가 박순덕 여사를 따라가겠는가.

    "별거 아냐."

    이지혁이 손을 내저었지만, 어머니는 눈을 풀지 않았다. 그러자 지금까지 가만히 있던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아들."

    "…예."

    "뉴스를 보니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는 모양이더구나. 많이 심각하니?"

    아버지의 말에 이지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심각해요."

    "으음……."

    "하지만 생각하시는 것처럼 뭔가 일이 바로 터지지는 않을 거예요. 막을 수 없는 것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는 거죠. 차라리 한순간에 다 벌어졌다면 대처하기도 쉬울 텐데 말이에요."

    공평한 죽음.

    그 앞에서 할 수 있는 대처라고는 기도밖에는 없었다. 신도 존재하지 않는 이 지구에서 누가 그 기도를 들어줄지는 의문이지만.

    "그래, 그렇구나. 그럼 네가 또 나서야 하겠네."

    "……."

    "상황이 심각해지면 너는 항상 거기에 있었지. 그리고 항상 상처를 입고 돌아왔다."

    아버지는 오늘따라 다른 사람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걸 좋게 보지 않아. 내 자식을 다치게 만들고 내가 살아남는 걸 원하는 아비는 아무도 없을 거야.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니?"

    "예."

    아버지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안 그런 척하지만 너는 책임감이 넘치는 아이였지. 지금도 네가 아마 이 세상을 구원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을 거다. 하지만 그전에 아버지 말을 기억하거라."

    "……."

    "나는 네가 네 목숨으로 구원한 세상에서 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런 세상이 있다면 차라리 내가 부숴 버릴 거야."

    "힘도 없는 양반이!"

    어머니가 딴지를 걸자 아버지가 헛기침을 했다.

    "언젠가는 이런 때가 온다는 걸 다들 알고 있었다. 그러니 너도 너무 부담 갖지 말거라."

    이지혁은 대답하지 않고 한숨을 쉬었다.

    하기야.

    그도 그의 가족이 없는 세상에서는 살아 있는 것이 고문당하는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오죽하면 신과 싸워가며 죽기 위해 이 세상에 왔겠는가.

    '그래도 사는 게 나아.'

    살아 있으니 결국 이 오랜 세월이 지나서라도 가족을 다시 보고, 이 세계를 만끽하고 있지 않은가.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어요."

    "그래, 아들. 말로는 전하기가 힘들다. 그래도 아버지가 무슨 기분인지는 네가 알 거라고 믿는다."

    "예."

    어머니가 가만히 이지혁의 등을 쓸어내렸다.

    "불쌍한 녀석. 실종되었다가 돌아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쉬지도 못하고 매번……."

    "으……."

    이야기가 신파로 흐르려고 하자 이지혁이 몸을 부르르 떨고는 손을 내저었다.

    "저, 저 들어가서 쉴게요."

    "오빠! 학교 좀 부숴주……."

    "니 턱을 부숴버리기 전에 그만하는 게 좋을 텐데?"

    "쳇."

    이예원의 청탁을 깔끔하게 거절한 이지혁이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이른 저녁이라 잠이 오지는 않지만, 이지혁은 불도 키지 않고 침대에 털썩 누웠다.

    "…미치겠네."

    얼굴에 뭐라도 달려 있는가.

    오늘 만나는 사람마다 다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딱히 죽겠다는 건 아니라고……."

    그런 걸로 해결이 될 수 있는 상황이라면 차라리 더 쉽겠지. 가부의 결정이 확실하니까. 하지만 지금의 문제는 그리 쉽게 해결할 수가 없었다.

    이지혁이 가만히 눈을 감았다.

    세상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을 희생한다는 것은 이지혁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그런 일을 할 생각도 없다.

    하지만…….

    "마계에는 노을이 없다고."

    그리고 베라프의 노을은 이 세계만큼 아름답지 않다. 그러니 이대로 이 세계가 멸망하게 내버려 둘 수는 없다.

    입술을 지그시 깨문 이지혁이 한숨을 쉬었다.

    말이야 쉽지만, 이 압도적인 전력 차를 메울 방법이 없었다.

    한 가지는 생각해 두었지만, 그래도 병력이 모자란다.

    과거, 이지혁이 마계를 종횡할 수 있던 이유는 그가 마왕들을 압도할 수 있던 탓도 있지만, 병력에서도 결코 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크리스토퍼를 한 번 만나봐야 할 것 같은데……."

    미국을 다녀오는 것이 맞을 것 같았다.

    옷걸이에 걸려 있는 외투를 걸친 이지혁이 막 게이트를 열려는 순간.

    위이이이이이잉!

    급작스레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다.

    "헐."

    이지혁이 쪼르르 달려가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지금까지 이곳에서 사이렌이 울린 적은 없던 것 같은데?

    게이트도 열리지 않는 상황인데, 뭔 놈의 비상사태라고 사이렌까지 울린단 말인가.

    거실로 뛰쳐나간 이지혁이 TV를 켰다.

    "왜 그러니?"

    "잠시만요."

    화면이 나오기 시작하자 어머니가 손으로 입을 가렸다.

    "저, 저게 왜 저러니?"

    "하……."

    그의 전화기가 미친 듯이 울리기 시작했다.

    완전히 부서져서 폐허가 되어버린 광화문을 보며 이지혁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리 좀 하자, 망할 놈들아."

    누구인지도 확인하지 않고 전화를 받은 이지혁이 담담하게 말했다.

    "지금 갑니다."

    그러고는 전화를 끊었다.

    뭐, 빤하지. 최정훈 아니겠는가.

    외투도 걸쳤겠다, 이지혁이 몸을 돌려 현관으로 향했다.

    "지혁아!"

    어머니의 떨리는 목소리를 들은 이지혁이 고개를 돌려 빙긋 웃으며 말했다.

    "다녀올게요."

    * * *

    콰아아아앙!

    마치 폭격이라도 맞은 것 같았다.

    반세기가 넘도록 단 한 번도 외부의 공격에 노출되지 않은 도시가 지금 연이은 폭발에 그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위이이이이잉!

    도시 곳곳에서 울리는 사이렌 소리가 사태의 급박함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엄마! 엄마!"

    "민수야!"

    무너지는 건물과 뒤집히는 바닥.

    서울 시민들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침략 앞에 무력하기만 했다.

    검은 연기와 타오르는 불꽃이 인류가 세워 올린 문명이 얼마나 허약한 토대 아래 발전하고 있었는지를 증명하기라도 하듯이 거칠게 도시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준장님! 도로가 가로 막혀 구급대가 진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B46으로 몬스터가 밀려 들어옵니다!"

    정인수는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알아! 이 새끼들아!"

    정인수의 눈에 핏발이 섰다.

    '빌어먹을, 이런 식으로 쳐들어오면 어떻게 방비를 하란 말이야!'

    상식.

    적이 침공하기 위해서는 외각으로부터 접근해야 한다. 그러니 외곽으로부터 방어 체계를 마련하면 된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그 상식이 통하지 않았다.

    북한은 휴전선으로 남하할 것이고, 일본이나 중국은 해군 전력을 통한 강습을 노릴 것이다. 하지만 이 몬스터들은 어느 순간 갑자기 그들의 심장에 떨어졌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말이다.

    타국으로부터의 침략을 전제로 전략을 짜고 전술을 운영하던 현 국가 방비 체계로는 이 상황에 대처가 불가능했다.

    '이게 마왕의 힘인가.'

    정인수는 이지혁과 상부가 누누이 말해오던, 마왕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들을 물리쳐야 하는 NDF나 이지혁과는 달리 민간인의 피해를 줄이고 방어해야 하는 정인수의 입장에서 마왕은 다른 의미의 재앙으로 다가왔다.

    언제 어디서나 나타나서 게이트를 통해 마수를 소환하고, 그 스스로도 세상을 파괴해 버릴 수 있는 존재.

    이 비상식적인 기동성은 방어를 하는 입장에서는 손쓸 수 없는 재앙과도 같았다.

    "어쩌란 말이야, 빌어먹을!"

    마왕이 연 게이트는 지금까지 그들이 상대해 오던 일반적인 경우와는 전혀 달랐다. 그 안에서 쏟아지는 마수들은 개인화기로는 저지조차 불가능했다.

    그런 게이트가 도심 한복판에 여러 개 열려 버리니, 방위사 입장에서는 미치고 팔짝 뛸 수밖에 없었다.

    "미치겠네, 진짜!"

    정인수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NDF 쪽은 아직 멀었어?"

    "비상소집했습니다! 지금 바로 온다고 했습니다!"

    "제기랄!"

    NDF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다. 그들도 사람인데 24시간 대비를 하고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게다가 이번에는 아무런 기미도 없이 갑자기 게이트가 열리지 않았는가.

    게이트가 생겨난 후, 열리기까지의 시간을 감안하고 출동 체계를 잡아두었다. 이런 상황에 바로 출동하지 않는다고 그들을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콰아아아아아앙!

    도시가 다시 폭발한다.

    으드득.

    정인수는 그 광경을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

    "이 개새끼들이!"

    마수들은 서울을 제집인 양 누비고 있었다. 그리고 그 광경을 바라보는 정인수는 끝없는 무력함을 느끼고 있었다.

    '할 수 있는 게 없어.'

    일반적인 화기로는 저 몬스터들을 잡아낼 수 없다. 그렇다고 저 몬스터들을 잡겠답시고 서울 시내 한복판을 폭격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방위사는 대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대피 상황은 어떻게 됐어?"

    "도로가 너무 막혀서……."

    "이런 빌어먹을! 차 타고 빠지지 말고 걸어서 나가라 하라고! 지하철 전부 뺐어?"

    "예! 뺐습니다!"

    "지하철 선로에 차량 없다는 것 주지시키고, 애들 투입해서 시 외곽지로 빼내라고 했잖아, 이 새끼야! 빨리 안 움직여? 니가 한숨 한 번 쉴 때 사람이 열 명씩 죽어 나간다고!"

    "당장 시행하겠습니다!"

    미칠 듯이 뛰어가는 부관을 보며 정인수는 자신의 머리를 움켜잡았다.

    "이지혁 씨!"

    이런 상황에서 믿을 사람은 이지혁밖에 없다.

    매번 이지혁에게만 기대는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이지만, 지금 그런 것을 따지고 들 때가 아니었다.

    사람이 죽어 나가고 있는데!

    "KSF 도착했습니다!"

    "전방으로 투입하지 말고, 후방으로 투입해!"

    "예?"

    "그거 조금 온다고 해결될 상황 아니니까, 차라리 뒤쪽으로 투입해서 사람들 원활하게 대피시키게 만들라고! 뒤쪽 건물을 다 때려 부숴도 되니까, 대피로 완벽하게 확보하라고 해!"

    "아, 알겠습니다."

    정인수가 나직하게 이를 갈았다.

    일반적인 능력자들이 앞으로 나서봤자 총알받이가 될 뿐이었다. 지금은 차라리 효율이 높은 곳에다가 인력을 투입하는 것이 나았다.

    정인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퍼엉! 퍼엉!

    "으아아아아악!"

    비명과 포화 소리가 귀를 파고든다.

    쉬운 결정은 아니다.

    KSF가 뒤로 빠지는 동안 앞을 막고 있는 이들은 그의 부하들이다. 효율을 위해서 자식 같은 부하들을 희생양으로 내준다는 것이 쉬운 결정일 리가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소총을 들고 전방으로 뛰어들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NDF는 멀었어?"

    "지, 지금 다 왔답니다!"

    "이 씨발 새끼들! 언제 오냐고! 언제!"

    "아! 왔어요!"

    정인수의 머리가 위쪽으로 과격하게 젖혀졌다.

    패스 드리프터 김다현이 등에 서아영을 업은 채 공중을 질주하고 있었다.

    "빨리 좀 오라고, 씨발!"

    정인수는 반가움과 분노를 섞어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서아영은 정인수의 말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김다현을 재촉했다!

    "저기! 저쪽에 사람들이 쫓기고 있어! 저기로!"

    "라져!"

    김다현도 두말없이 서아영이 시키는 대로 달렸다.

    "더럽게 많네!"

    서아영이 거칠게 소리쳤다.

    "여기가 어디라고, 이 잡놈들이!"

    바닥에 내려서기도 전에 서아영이 양손을 들어 올렸다.

    콰르르르르르르!

    서울 하늘에 거대한 화염의 태양이 떠올랐다.

    도망치던 이들이 목숨이 위험하다는 생각마저 잊고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볼 만큼이나 압도적인 모습이었다.

    "뒈져랏!"

    서아영이 손을 앞으로 뻗자 하늘에 떠오른 집채만 한 화염이 바닥으로 낙하하기 시작했다.

    콰아아아아아아!

    그리고 화염이 바닥에 닿는 동시에 거대한 소용돌이가 일면서 사람들의 뒤를 쫓던 몬스터들을 집어삼켰다.

    "싸그리 구워주마!"

    "아, 좀 기다려요! 지금 내려간다고!"

    목 뒤에서 화염이 작렬하는 느낌에 기겁을 한 김다현이 전력을 다해 바닥으로 내려서 서아영을 내려놓았다.

    RRRR.

    바닥으로 내려서자마자 울리는 스마트 워치에 서아영이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으려고 했지만, 액정에 뜬 정인수라는 이름을 보고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왜요?"

    - 다른 사람들은 어쩌고 둘만 왔어요! 지금 둘이서 막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잖아!

    "누굴 등신으로 아나! 기다려요!"

    서아영이 전화를 끊고 휴대폰을 꺼내 어딘가로 톡을 보냈다.

    "온다."

    그러자 김다현의 가슴 어림이 빛나기 시작하더니, 스슷- 하는 소리와 함께 정해민의 손을 잡은 이들이 단체로 그들의 앞에 나타났다.

    "……빌어먹을."

    도착한 이들이 주변을 둘러보고는 다들 침음성을 흘려냈다.

    무너져 버린 건물들.

    어떻게 꺼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는 거대한 불꽃들.

    그들이 살고 있는 터전이 지금 무너져 내리고 있는 것이다.

    "난 한 번 더 갔다 올게."

    "그래! 언니! 부탁해!"

    정해민이 남은 인원을 데리러 텔레포트를 하자 서아영이 크게 목소리를 높였다.

    "저 새끼들, 싸그리 다 죽여 버려!"

    "……뭔 구호가 이래!"

    "난 좋은 것 같은데?"

    NDF들 역시 눈에 분노를 담고 몬스터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지혁 씨가 올 때까지만 버티면 돼!"

    "개소리! 난 그전에 저 새끼들 다 죽여 버릴 거야!"

    * * *

    "휴우……."

    정인수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상황은 여전히 좋지 않지만, NDF가 온 이상 한숨은 돌렸다고 할 수 있다.

    '안심할 때는 아니야.'

    막아내는 것이 이기는 것이 아니다. 정인수를 정말 괴롭게 만드는 것은 이걸 막아낸다고 끝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마왕들이 존재하는 한, 그리고 마계와의 연결이 지속되는 한 이런 일은 언제든지 다시 벌어질 수 있다. 전 세계 어느 곳도 안전하지 않다.

    문제는 이런 상황에 대비할 수 있는 기술이 그들에게는 없다는 것이다.

    능력자들을 넓게 펼쳐져 방어 라인을 친다고 하면 각개격파가 되어버릴 것이고, 그렇다고 그들을 24시간 내내 대기시켜 놓을 수도 없다. 사람이니까.

    NDF들이 제 컨디션을 유지하지 못해서 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희생만이 늘어날 뿐이다. 그런 식으로 조금씩 갉아 먹히다 보면 언젠가는 막을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진다.

    "마왕을 잡아야 해."

    사태의 해결책을 생각하던 정인수는 한 가지 결론에 다다랐다.

    이 모든 일이 벌어지는 이유는 마왕 때문이다.

    텔레포트로 방어선 자체를 무력화시켜 버릴 수 있는 마왕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들이 만들어놓은 방어기제들이 무쓸모가 되어버린 것이다.

    마왕이 없어서 이런 식의 게이트가 열리지 않는다면 몬스터들은 육로나 해로로 한국으로 진입할 수밖에 없고, 미리 확인만 할 수 있다면 민가에 접근하기 전에 미사일과 폭격으로 박살이 날 것이다.

    "마왕! 마왕만 잡으면……."

    "흐음……."

    등 뒤에서 들려온 낮은 목소리에 정인수의 몸이 돌처럼 굳어버렸다.

    "인간이라는 것들은 역시 재미있군. 개미는 감히 드래곤을 잡을 생각을 하지 못하는 법인데, 인간은 그런 생각을 한단 말이지. 아니, 개미는 드래곤이라는 존재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는 건가?"

    정인수의 고개가 천천히 뒤로 돌았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압도적인 존재감.

    힘이 아니다.

    우리 안에 갇혀 있는 햄스터가 밖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사자를 보면 어떤 느낌을 받을까?

    그 사자가 자신을 공격하려는 의지가 없다고 해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굳어버릴 것이다.

    그저 그곳에 있는 것만으로 심장이 멎어버릴 것 같은, 압도적인 존재감을 뿜어내는 이가 그곳에 있었다.

    "일단은 긴장 좀 풀지?"

    마족.

    정인수가 처음 느낀 점은 눈앞에 보이는 이는 자신들이 알고 있는 악마라는 존재의 전형 같다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어쩌면 인류도 언젠가 마계와 접촉을 한 적이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두 번째로 느낀 것은 지금 마왕이 하고 있는 말을 그가 알아듣고 있다는 점이었다.

    "너무 걱정할 것 없어. 나는 대화를 하고 싶은 거니까. 그렇지 않으면 굳이 그대들의 사고와 언어 체계를 바탕으로 이렇게 대화를 시도하지는 않겠지?"

    정인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네가 이곳의 책임자인 것 같더군. 인간은 참 재미있단 말이지. 우리는 마왕 아래 모든 이들이 평등하지. 하지만 인간은 그 무리 아래에서도 나름의 체계를 나누더군. 베라프에서도 그렇고 말이야. 나는 인간의 그런 점이 흥미로워. 예를 들어서 지금 네가 책임자인데, 네가 없어지면 순식간에 다른 이가 통제를 시도한단 말이야. 어디 한 번 볼까?"

    마왕이 천천히 정인수를 향해 손을 뻗어 왔다.

    * * *

    마왕의 손이 바로 얼굴 앞까지 다가왔음에도 정인수는 저항할 수 없었다. 아니, 저항할 수 없다기보다는 저항을 하는 것이 무의미했다.

    어떤 저항을 하더라도 눈앞에 있는 이 존재는 그의 목숨을 주머니 속의 물건 꺼내듯이 취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 그런 존재에게 저항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리고 저항을 하려 해도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고양이를 보고 굳어버린 쥐처럼 정인수는 전신을 경직시킨 채 그저 자신에게 다가올 운명을 기다리는 것밖에는 할 수 없었다.

    "후후후."

    마왕은 앞으로 뻗은 손을 천천히 다시 회수했다.

    "그래도 공포라는 것은 느끼는 걸 보니 방어기제는 잘 작동하고 있군. 나는 인간이라는 것들이 가끔은 겁대가리가 없는 생물같이 느껴진단 말이지."

    정인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리고 싶었다.

    손이 뻗어오는 그 짧은 순간 동안, 수십 번의 주마등을 겪었다. 폭싹 늙어버리지는 않았는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마왕은 그런 정인수의 반응을 즐기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그걸 미소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다.

    "놀랄 것 없다, 인간. 내가 대화를 하러 왔다고 말했을 텐네. 너희 인간들과 다르게 우리는 거짓말을 즐겨 하지 않지. 그리고 너는 내가 굳이 속일 가치를 느낄 만큼 대단한 자가 아니다."

    마왕의 말을 들은 정인수는 화조차 낼 수 없었다.

    그 말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마왕의 입장에서 보면 그는 선두에 선 개미 정도로 보일 것이다. 그가 사라진다고 해도 새로운 개미가 선두에 설 것이다. 인간의 입장에서는 많은 것이 달라지겠지만, 그가 보기에는 달라질 것이 없겠지.

    굴욕적이기는 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었다.

    "뭘 원하는 거지?"

    "말했잖아. 대화."

    "어떤 대화? 그쪽과 내가 대화를 나눌 일이 있는가?"

    "그건 내가 결정하는 거겠지?"

    마왕이 흥미롭다는 듯이 정인수를 바라보았다.

    "우선 내가 묻고 싶은 것은 너희 인간의 사고방식이다. 나는 인간이 꽤나 지능이 높은 동물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가끔은 그 지능을 전혀 활용하지 못하고 멍청한 짓들을 해 대더군."

    "……그걸 안다면 좀 더 쉽게 말해주면 좋을 것 같은데?"

    "지금 같은 경우도 그렇지. 너는 무엇을 믿고 그리 뻣뻣하게 나오는 거지? 내가 마음만 먹으면 네 목숨을 순식간에 없애 버릴 수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을 텐데?"

    정인수는 최대한 담담하게 대답하려 애썼다. 누군가 맡긴 일은 아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가 인류를 대표하고 있다는 자각이 일었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 무도한 침략자들에게 비굴한 모습을 보일 생각은 없었다.

    "뻣뻣하지 않으면 애완동물처럼 키워주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그건 이쪽에서 사양하고 싶은데. 물을 것 빨리 묻지. 너 같은 놈과 대화를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역겨워서 토하고 싶은 심정이니까."

    마왕의 눈이 가만히 정인수를 응시했다.

    "내가 인간을 재미있어 하는 점이 바로 이런 점이지. 너는 내가 어떤 고문을 한다고 해도 결코 내게 고개를 숙이지 않겠지?"

    "알긴 아는군."

    "큭큭큭, 하지만 나는 단숨에 네가 나에게 굴복하게 만들 수 있지."

    정인수가 대답없이 마왕을 노려보았다. 해볼 테면 해보라는 뜻이었다.

    "오해하지 마. 나는 네게 어떠한 위해도 가하지 않을 테니까. 그럴 필요도 없지."

    마왕이 손을 슬쩍 들어 올렸다. 그러자 그의 손끝에 시커먼 마기가 맺히기 시작했다.

    "너는 지금 이곳에서 먼지가 되어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내게는 굴복하지 않겠지. 하지만 그 먼지가 되어 사라지는 이들이 네가 아니라면 어떨까?"

    마왕의 손이 천천히 옆으로 향했다.

    정인수의 눈이 흔들렸다.

    그의 손이 향한 곳에는 아직 대피하고 있는 사람들과 그들을 보호하고 있는 정인수의 부하들이 있었다.

    "어때? 여전히 같은 생각인가? 너는 내게 절대 고개를 숙이지 않을 생각이겠지? 안 그래?"

    "그, 그만둬!"

    "큭큭큭큭."

    마왕이 손을 살짝 당기더니, 사람들에게로 손을 쭉 뻗었다.

    "그만하라고오오오오!"

    정인수가 고함을 지르며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폭음은 들려오지 않고 나직하게 웃는 마왕의 웃음소리만이 들려왔다.

    "이래서 인간에게 관심을 끊을 수가 없어."

    마왕이 천천히 손을 내렸다.

    "종족이라는 것은 특성을 의미하지. 네 저열한 머리로도 알아 들을 수 있게 풀어서 말해주자면, 모든 종족에게는 공통된 의식이 있다는 말이지. 단순히 생물학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이 아니라 같은 목적의식을 공유해야 같은 종이라고 할 수 있는 거지."

    마왕이 발 아래를 지나고 있는 개미를 가리켰다.

    "저런 군집체는 군집의 안위를 제 목숨 이상으로 생각하지. 그래서 전투가 일어나면 죽을 것을 알아도 맞서 싸운단 말이야. 알이 보호되고, 여왕이 무사하면 자신이 죽어도 군집은 유지가 되니까. 군집 생활을 하는 단일 개체는 같은 종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안위를 같은 종족의 안위보다 우선시하기 마련이고."

    마왕은 낮게 가라앉은 눈으로 정인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너희 인간은 종잡을 수 없어. 같은 인간인데 어떤 인간은 자신을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시키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어떤 인간은 타인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종잇장처럼 찢어버리지. 대체 너희는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거지? 어떻게 같은 종족 같은 인간인데도 그리 다를까?"

    마왕이 흥미롭다는 눈으로 정인수를 바라보았다.

    "심지어 같은 사람인데도 상황과 시기에 따라 전혀 다른 선택을 내리기도 하지. 너희 인간에 비하면 우리 마족은 무척이나 순수한 존재야. 우리는 철저히 개인주의적이고 파괴적이지. 자신의 쾌락과 이득을 위해서만 움직이거든. 그런데 너희는 한 인간이 동시에 학살자가 되기도 하고, 성자가 되기도 하더군."

    마왕이 뒤쪽을 가리켰다.

    "방금 인간에 역사를 보았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학살자가 채식주의자이면 동물보호론자였다는 것에서는 실소가 나오더군. 너희는 혼돈, 그 자체야. 그 어떤 종족보다 질서를 숭앙하지만 실제로는 가장 질서와는 거리가 멀지."

    정인수가 쓴웃음을 머금었다.

    "마왕 중에서도 인텔리가 있을 줄은 몰랐군. 철학과를 전공해 볼 생각은 없나? 좋은 점수가 나올 것 같은데."

    "인간의 사상은 나와는 별로 맞지 않더군."

    마왕이 어깨를 으쓱했다.

    "세상 모든 것은 관점에 따라 달리 보이는 법인데, 스스로를 어떠한 법칙에 따라 규정하려는 그 의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 너희의 철학은 결국 자기변명일 뿐이야. '우리는 원래 이렇기에 이런 것이다'랄까? 그저 철저한 면피지. 스스로가 제어할 수 없는 존재들이라는 것을 인정하면 될 것을 온갖 말을 붙여서 면피를 하려 들지."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그런데 어쩌죠? 저는 무식한 군인이라 그런 말을 들어도 개가 짖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는데?"

    정인수가 이죽거렸다.

    그때, 정인수의 눈에 기이한 광경이 들어왔다.

    그의 부하들이 소총을 들고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정인수는 눈빛으로 그들을 만류했다.

    '하지 마! 이 미친놈들아!'

    소총이라니.

    이쑤시개를 들고 전차와 맞서는 쪽이 차라리 승률이 높을 것이다. MG-50을 입안에 처박고 갈긴다 해도 상처 하나 안 날 놈을 상대로 개인화기가 무슨 의미란 말인가.

    "음, 그리고 하나가 더 있군. 너희는 매우 이성적인 존재를 자처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참 멍청하단 말이지. 충동이 이성을 넘어서는 일이 너무 잦아. 그렇지 않은가?"

    "……의리라고 해두지. 하지만 너에게는 이 상황이 개미가 달려드는 것 이상의 의미는 없을 텐데?"

    "인간이라고 해서 자신에게 적의를 가지고 달려드는 개미를 그저 귀엽게만 봐주지는 않잖아?"

    "피해를 입지 않았다면 내버려 두기도 하지."

    "인간은 그런 모양이군."

    마왕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하지만 난 아니야."

    파국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정인수는 볼 수 있었다.

    폭죽 터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그의 부하들의 머리가 일제히 터져 나가는 모습을 말이다.

    "……."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너무도 비현실적인 광경이니까.

    그의 머리가 이 상황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부정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

    하나씩 바닥으로 쓰러지는 이들의 모습을 보며, 정인수는 아득해지는 의식을 되돌리려 애써야 했다.

    흥분해서는 안 된다.

    흥분한다고 달라질 것은 없다.

    그는 현재 서울의 방어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이고, 이 자리에서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끌어 마왕이 다른 곳에 시선을 돌리지 못하게 잡아두어야 한다.

    그러니 흥분은…….

    "이 개새끼야아! 죽여 버리겠어!"

    정인수가 권총을 뽑아 쥐고 마왕에게 달려들었다. 의미 없는 짓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이딴 권총을 아무리 쏘아댄다고 해도 저 마왕에게는 간지럽지도 않으리란 것 역시 알고는 있었다.

    인정할 수밖에 없다.

    저 마왕의 말이 맞다.

    인간은 아무리 이성적이려고 해도 결국에는 그 이성을 온전히 따를 수 없다는 것을 지금 정인수가 증명하고 있었다.

    마왕은 달려드는 정인수의 머리를 움켜잡고는 바닥에 내리찍었다.

    쿵!

    콘크리트에 머리가 처박히며 피가 터진다.

    정인수는 아찔하게 흐려지는 정신을 다잡으려 이를 악물었다. 마왕이 정인수의 머리를 잡은 채 그대로 그를 들어 올렸다.

    "보라고."

    그의 몸이 천천히 돌아간다.

    "이것이 너희가 처한 상황이다."

    불타오르는 도시.

    침략의 대가는 쓰디썼다.

    인류는 이들에게 저항하지 못한다. 면역조차 없는 적을 상대로 싸우는 것은 무리였다.

    "대항자가 없는 세상에서 왕처럼 살아온 대가를 치러야지. 너희는 너무도 쉽게 살아왔다. 나약한 자들을 희생하고 짓밟으며 오롯이 섰지. 우리가 하는 것은 특별한 것이 아냐. 너희가 이 세계에 저질렀던 짓을 그대로 갚아주는 것뿐이지."

    "큭큭큭……."

    마왕의 얼굴이 처음으로 살짝 변했다.

    '웃어?'

    이런 상황에서?

    "……개소리 해 대는군. 너희가 하는 건 그냥 쾌락 살인일 뿐이야. 네가 한 말을 그대로 돌려주지. 그저 죽이고 싶어서 죽이는 주제에 이런저런 이유를 가져다 대는 것을 보니, 웃기지도 않는군."

    "……이거, 정곡을 찔렸는걸?"

    마왕이 환히 웃으며 정인수를 자신의 얼굴 바로 앞으로 들이댔다.

    "그래, 나는 너희가 증오스럽다. 그러니 죽이는 거지. 지금부터 내가 얼마나 많은 너희의 동족을 죽이는지 그 두 눈으로 똑똑히 보는 게 좋을 거다. 아니, 아니지. 머리가 날아가 버린 인간은 뭘 볼 수가 없겠지?"

    마왕이 막 정인수의 머리를 부숴 버리려는 찰나에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손에 힘 주면 니 머리도 같이 날아갈 거야."

    "……."

    마왕의 고개가 천천히 뒤로 돌았다.

    "이게 누구야?"

    그의 등 뒤에서 팔짱을 끼고 있는 이지혁을 발견한 마왕의 입에서 기쁨과 두려움의 목소리가 동시에 배어 나왔다.

    "반갑군. 아흔아홉 번째 마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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