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81화 (81/118)
  • [■] 저 봐, 거북이 대가리 맞다니까 [■]

    ─────

    "허튼수작을 부리는군."

    바라스가는 게이트 안으로 사라진 두 사람을 보며 혀를 내밀어 얼굴을 핥았다.

    타 차원으로 연결이 되어 있는 게이트는 아니다. 그렇다면 어디로 가든 그에게 위험한 곳은 없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딱 하나 거슬리는 것이 있었다.

    '열세 번째 마왕이 배신을 했다면 위험하지.'

    바라스가가 짧은 팔을 들어 비전을 켰다.

    "아흔아홉 번째 마왕을 발견했다. 지원 바란다."

    마계의 마왕들 중 현재 이 세계로 넘어와 있는 마왕은 열을 넘는다.

    그리고 그 마왕들 중에 이지혁에게 사무치는 원한을 가진 이가 못해도 다섯은 될 것이다. 과거 이지혁이 마계를 휘저었을 때, 다들 지독하게 그에게 당한 기억이 있을 테니까.

    코어를 얻은 이지혁이 마왕들을 짓밟는 것을 멈추지 않았더라면 희생은 더더욱 늘어났을 것이다.

    길고 긴 세월 동안 침묵하며 참을 수밖에 없었는데, 드디어 천재일우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과거의 이지혁이라면 아무리 원한이 있다고 해도 참을 수밖에 없었다. 아흔아홉 번째 마왕이자 멸망의 좌는 같은 마왕이라 하더라도 감히 반기를 들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과거 수많은 마왕들이 침묵했던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인간의 몸으로 마계의 정점에 오른 그를 질시하고 경원시하기도 했지만, 반대로 존경을 보이는 이도 많았다.

    딱히 파가 나뉘는 것이 아니라, 이지혁이라는 존재를 겪어본 마왕들은 다들 그런 복합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바라스가는 그중에서도 이지혁에 대한 원한으로 불타는 마왕 중 하나였다.

    "어디, 얼마나 대단한 준비를 했는지 볼까?"

    바라스가는 천천히 발을 떼 그 육중한 몸을 게이트 안으로 밀어 넣었다.

    우우웅.

    이동이 끝나 게이트 밖으로 나오자 그의 눈에 뜻밖의 광경이 들어왔다.

    '여긴?'

    마계화가 되어 있는 지구의 모습이 보인다.

    "마계화라고?"

    마계는 문이라 부르고, 인류는 스팟이라 칭하는 곳.

    지구와 마계를 이어주는 공간.

    "평양이라고 하지."

    이지혁이 담배를 입에 물고는 대답했다.

    천천히 담배 연기를 내뿜는 이지혁의 옆에 퇴폐적인 미색을 뿜어내는 에르카나가 고혹적으로 웃고 있었다.

    "뭐, 예전의 모습은 아니지만."

    "흐음?"

    바라스가는 그 커다란 얼굴을 뒤틀며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잠시 잠깐 사이에 이지혁의 느낌이 조금 변한 것 같다. 조금 전에 보던 이지혁은 모습은 과거와 같을지언정 인간이라는 느낌이 확연히 들었는데, 게이트로 이동한 그 짧은 사이에 이지혁의 느낌이 확 변해 있었다.

    '이해할 수 없군.'

    인간이란 마음가짐 하나만으로 이토록 확연하게 변화할 수 있는 생물인 건가?

    바라스가는 천천히 이지혁을 향해 다가갔다.

    "아흔아홉 번째 마왕, 이제 마계를 네 멋대로 농락했던 죗값을 치를 시간이다."

    "뭐래?"

    이지혁이 귀를 후볐다.

    "거북이는 원래 좀 멍청한 생물이기는 하지만, 상황 파악이 전혀 안 되는 걸 보니 안타깝군. 오래 사는 것 말고는 딱히 장점이 없는데?"

    "마족은 원래 오래 살아."

    "…아, 그럼 하나 남은 장점이 사라지는데?"

    이지혁과 에르카나의 말에 바라스가의 얼굴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여유 부리는 것도 지금뿐이다."

    우우우웅!

    그와 동시에 바라스가의 좌우로 붉은 게이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

    이지혁이 그 광경을 보며 눈을 빛냈다.

    게이트가 잠시 점멸한다 싶더니, 게이트 안에서 두 인형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늘이 크리스마스던가?"

    "크리스마스?"

    "아냐. 엉덩이가 무거우신 마왕들이 셋이나 한곳에 모습을 드러내는 게 신기해서 그러는 거야."

    이지혁이 낄낄대며 웃기 시작했다.

    "아흔아홉 번째 마왕!"

    모습을 드러낸 마왕들이 이지혁을 발견하고는 이를 갈아붙였다.

    "여기에 있었구나! 여기에!"

    "흐음."

    이지혁이 볼을 긁더니 에르카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내가 마계에서 대체 무슨 짓을 했기에 쟤들은 나만 보면 저렇게 이가 부러져라 갈아대는 거지?"

    "달링, 내가 딱 하나 감사하는 게 뭔지 알아?"

    "뭔데?"

    "달링이 힘이 생기기 전에 달링을 미리 만나서 친분을 쌓아놨다는 거야."

    "……."

    "그게 아니었으면 나도 쟤들이랑 같은 꼴을 당했겠지. 다른 건 다 그렇다 치고, 대체 왜 바라스가의 등에다가 꽃을 달아놨던 거야? 그것도 빨간 걸로."

    "진화하라고."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너한테는 말해줘도 이해하지 못할 거야. 여하튼 거북이는 등에 꽃 달면 더 강해지거든. 무척이나 큰 호의였는데, 받아들이는 쪽이 그리 받아들인다니 안타까운 일이로군."

    "등에 빨간 꽃을 달고 돌아다녀야 하는 마왕의 심정은 생각해 본 적 있어? 그거 떼면 죽여 버린다고 했다며?"

    "그랬나?"

    이지혁이 민망한 얼굴로 바라스가를 보며 말했다.

    "이봐, 돌이켜 보니 내가 좀 과했던 것 같기는 해. 미안하다고 해둘게."

    "죽여 버리겠다!"

    "…아니, 진짜 호의였다니까?"

    생긴 게 잘못이지, 생긴 게.

    "누가 그럼 그렇게 생기라고 했나? 파란색 얼룩무늬의 거대 거북이를 보면 누구나 등에다가 꽃을 달아보고 싶은 게 정상이라고. 적어도 이쪽 세계의 상식으로는 말이야."

    한 세계의 상식을 제멋대로 재단하는 이지혁이었다.

    "무슨 소린지 전혀 모르겠어, 달링."

    "미안. 내가 좀 흥분했다."

    이지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입을 열었다.

    "여튼 그 부분에 대해서는 미안하게 됐어. 생각해 보니 너는 확실하게 나한테 원한을 가질 이유가 있는 것 같은데, 다른 애들은 또 무슨 짓을 당한 거야?"

    "…그런 거 따지지 마. 듣고 나면 납득하게 될 테니까. 그냥 시간 낭비야."

    이지혁이 한숨을 쉬었다.

    무슨 짓을 하고 돌아다닌 것이냐, 과거의 나.

    "에, 변명을 하자면… 당시에는 워낙 스트레스가 심해서 어떻게든 풀 방법이 필요했습니다."

    "달링, 리셋되잖아?"

    "…리셋될 때까지 하루를 버티는 게 워낙에 힘들어서."

    "그만하자, 달링. 이제 추한 것 같아. 인간은 참 이상하단 말이야. 우리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데, 인간은 자신을 치장하고 포장한단 말이지. 그냥 달링이 성격파탄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게 그리 힘든가? 인정하고 나면 편해질 텐데?"

    "……."

    이건 조언을 가장한 욕 같은데?

    이지혁이 괴로워하는 걸 본 바라스가가 이를 뿌드득 갈았다.

    "장난은 여기까지다, 아흔아홉 번째 마왕이여. 정말 지독하게도 변하지 않았군."

    마왕들을 앞에도 놓고도 제멋대로 지껄이고 있는 모습을 보니, 과거의 향수가 되살아나는 기분이었다.

    예전에도 저랬지.

    마왕 주제에 마수와 마족들, 심지어 다른 마왕들까지 노리갯감으로 삼으며 날뛰어 댔다. 그 난행에 얼마나 많은 마왕들이 희생되었던가.

    "원한을 되살리려는 생각이었다면 좋은 선택이었다고 해두지. 이제 그만 잠들어라, 아흔아홉 번째 마왕이여. 마계의 역사에 그대의 이름이 영원토록 기억될 것이다."

    "으음……."

    이지혁이 곤란하다는 듯 머리를 긁었다.

    "그런데 나 하나 물어도 되냐?"

    "…시간을 끌 셈인가?"

    "어차피 남아도는 게 시간인 것들이 그리 팍팍하게 굴지 말고."

    "말하라."

    이지혁이 정말 이해를 못하겠다는 듯이 물었다.

    "그런데 너희는 아까부터 왜 자꾸 내 목숨을 니들이 맡아놨다는 듯이 말하고 있냐? 막말로 너희가 나한테 원한이 있는 이유도 죽을 만큼 처맞고, 또 맞고, 또 맞아서일 텐데 말이야. 지금은 뭔 배짱으로 세 명이서 나를 상대하겠다고 하는 거지?"

    "큭큭큭큭."

    바라스가가 나직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미 그대가 과거와는 비할 수 없이 약해졌다는 것은 알고 있다. 불멸성은 사라졌고, 지닌바 그 끝을 알 수 없던 마나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마계의 정보력을 얕보면 곤란하지. 그대 정도는 이제 나 혼자서도 상대할 수 있다. 남은 이들은 열세 번째 마왕을 막기 위해 온 것이다."

    "으음……."

    이지혁이 매우 고민스러운 얼굴로 신음하더니, 에르카나를 돌라보며 말했다.

    "봐, 거북이 대가리 맞다니까."

    "인정."

    에르카나는 어쩐지 부끄러워졌다.

    마족이란 생물은 동족 의식이 거의 없지만, 그래도 같은 마왕이라는 존재들이 저리 멍청할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아무래도 외형부터 육체파 마왕이다 보니 생각이란 것이 없는 모양이었다.

    "저런 머리로 잘도 마왕을 하고 있군. 그래도 보렌차는 상황 파악 빨리하고 도망갔는데 말이야?"

    "…뭐라고 했나?"

    "너, 보렌차한테 아무 말 못 들었냐? 나한테 접근하지 말라는 말?"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바라스가는 정말 이지혁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싶었다.

    "팀킬인가?"

    이지혁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잘 들어라, 거북아. 지금 상황이 예전에 너희가 마왕 하나씩 겨우겨우 넘길 때에 비해 스케일이 커졌다는 건 인정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건 반대급부라는 게 있는 거란다."

    "반대급부?"

    "문을 열었을 때는 좋았겠지. 이제 그냥 쳐들어가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그런데 고위급 마왕 말고는 전혀 뒷생각을 안 한 모양이네. 겁대가리도 없이 나한테 찾아오는 걸 보니 말이야."

    바라스가는 이지혁이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마계의 문이 열린다고 해서 받아야 할 반대급부가 대체 뭐라는 말인가.

    "저 봐, 거북이 대가리 맞다니까."

    "인정한다니까."

    바라스가의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거북이의 머리를 하고 있음에도 확연한 표정을 드러내 보이는 바라스가였다.

    "장난은 끝이다! 너와 놀아주기에 나는 너무 오랜 시간을 기다렸다. 이제 지옥으로 가라, 아흔아홉 번째 마왕이여!"

    촤아아아악!

    바라스가의 등에서 뻗어 나간 촉수가 이지혁을 향해 날아들었다. 머리야 좀 딸린다고는 하나 그 역시 마왕. 촉수에 담긴 힘은 대지를 찢고, 대기를 갈라 버릴 정도였다.

    하지만…….

    "성질 급하기는."

    콰드득.

    에르카나가 날아드는 촉수를 한 손으로 움켜잡으며 이지혁을 보호했다.

    "정녕 배신하겠다는 거냐, 열세 번째 마왕이여!"

    "아냐, 아냐. 배신을 하기는 할 거지만, 지금은 그런 상황이 아냐. 나는 그저 약간 시간을 끌어주는 것뿐이라고. 제대로 준비도 안 됐는데 시작하면 재미가 없잖아."

    "준비?"

    에르카나는 아무 말 없이 다른 손을 들어 이지혁을 가리켰다.

    "살짝 불완전하긴 하지만 말이야, 너희도 봐야지. 너희가 그토록 두려워하던 아흔아홉 번째 마왕, 멸망의 좌의 현신을 말이야."

    고오오오오오.

    그 순간, 이지혁의 육체를 향해 주변의 대기가 빨려들기 시작했다.

    바라스가의 얼굴이 더없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지금 이지혁이 뭔가를 벌이고 있다. 그것도 어마어마한 스케일로.

    대지가 울고, 하늘이 울부짖었다.

    우우우웅.

    그런 후, 바라스가는 보았다.

    이지혁의 발밑이 검게 물든다 싶더니, 이내 바닥에 시커먼 게이트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에르카나가 그 광경을 보며 깔깔 웃었다.

    "친애하는 마왕 여러분… 소개합니다, 다시 돌아온 아흔아홉 번째 마왕을."

    발밑에 열린 게이트를 통해 시커먼 흑마력이 악령처럼 솟구치더니, 이지혁의 몸을 향해 거침없이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 * *

    "지옥이로군."

    크리스토퍼 맥클라렌은 비전을 통해 보이는 세계 곳곳의 모습을 보며 눈두덩이를 문질렀다.

    애리조나의 부대는 괴멸되었고, 독일은 어떻게든 꾸역꾸역 막아내고는 있지만 중과부적이었다.

    제대로 정보가 넘어오고 있지 않은 쓰촨성은 은폐 시도가 있는 것으로 보아 중국 정부에서 제대로 막아내지 못하고 있을 게 빤했다.

    '인류가 이렇게나 무력했나…….'

    전력 차가 확연하게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아무리 인류가 최선을 다한다고 해도 마계의 침공을 막아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 역시 납득하고 있었다.

    자신들에게 남은 것은 끝까지 저항하다가 산화하거나, 아니면 전 스팟에 핵무기를 대량으로 때려 박아 공간 자체의 소멸을 노리는 도박밖에는 없었다.

    만약 후자가 가능했다면 크리스토퍼는 과감하게 시도를 했을 것이다.

    몇 나라가 망하고 세상 몇 곳이 죽음의 지대가 되겠지만, 그걸 감안해야 할 만큼 상황은 좋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시험 삼아 날려본 ICBM들이 깔끔하게 무력화가 되고 있다.

    "빌어먹을 마왕 놈들."

    인류 기술의 정화라고 할 수 있는 핵무기와 대륙간 탄도미사일이 너무도 쉽게 무력화되는 것을 보는 크리스토퍼의 심정은 참혹했다.

    크리스토퍼는 인류가 무능하여 그들을 상대할 수 없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단지 방향성이 다른 것이다.

    인류는 이제까지 단 한 번도 강력한 단일 개체를 상대하기 위해서 기술을 발전시켜 온 적이 없다. 그들이 상대해야 하는 것은 대군이며 국가였다.

    좀 더 많은 사람과 좀 더 많은 지역을 파괴하기 위한 무기를 개발하는 데 중점을 둬온 것이 인간 아닌가.

    '빌어먹을 놈들.'

    이미 각국에서는 이 마왕이라는 전대미문의 생명체를 쓰러뜨리기 위한 기술 개발에 착수한 상태였다. 미국 역시 어마어마한 예산을 때려 박으며 대응 방법 개발에 골몰하고 있었다.

    하지만 크리스토퍼는 그 효용에 있어서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일단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 애리조나에 출현한 마왕이 미국을 반쯤 파괴하고 나서야 개발 성과가 나올 텐데, 그때 나오는 성과가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크리스토퍼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좀 더 예산을 퍼부었어야 한다니까 썩을 놈들이……."

    처음 이 세계로 넘어온 마왕이 이지혁의 손에 쓰러졌을 때, 크리스토퍼는 마왕이란 존재가 얼마나 두려운지 실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지혁으로부터 마왕이 앞으로도 이 세계를 노릴 수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줄기자체 마왕을 상대하기 위한 연구 기관과 연구비를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망할 의회 놈들이 제대로 예산을 집행해 주지 않았다.

    머리 위에서 불이 타고 있는 것이 빤히 보이는데, 왜 꼭 발등에 불이 떨어져야 움직인다는 말인가.

    크리스토퍼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정된 예산으로 그들이 개발해 낸 것은 마나 감지기뿐이었다.

    그것도 상용화되어 있는 에테르 감지기와는 다르게 디테일한 마나량을 측정하지 못하고, 위성을 통해서 마치 기압 분포도처럼 거대한 마나의 출현을 감지할 수 있을 뿐이었다.

    '마왕이 어디 있는지는 확실하게 알겠군.'

    하지만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물건이나 다름없다. 마왕들은 출현과 동시에 주변을 철저히 파괴함으로써 자신들의 위치를 확실하게 알려주었으니까.

    "보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크리스토퍼가 고개를 돌렸다.

    "평양! 평양에 고밀도 마나가 출현했습니다."

    "평양에도 마왕이 있으니 다시 나온 모양이지."

    "그게 아닙니다! 수가 여럿입니다!"

    "음?"

    크리스토퍼가 고개를 돌려 비전을 바라보았다.

    마나가 서로 충돌하여 일그러진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으음, 서로 간섭하고 있는 거로……."

    한국과 중국, 그리고 러시아에 정보를 보내주라는 말을 하려던 크리스토퍼가 순간 눈을 크게 떴다.

    '저, 저게 뭐지?'

    처음은 작은 요동이었다.

    하지만 그 요동은 마치 둑에서 물이 터져 나가듯 주변을 휩쓸기 시작했다.

    "뭐야! 뭐야, 저거! 위성 띄워봐! 빨리!"

    화면을 가득 메울 듯 차오르는 거대한 마나의 소용돌이를 보며 크리스토퍼가 기겁을 하여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미 몇몇 마왕의 위치를 추적하고 있는 그들이다. 그런 까닭에 마왕 하나가 어느 정도의 마나를 뿜어내는지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화면에 보이는 마나의 파동은 그들이 알고 있는 수준을 아득하게 뛰어넘고 있었다.

    "대마왕이라도 넘어온 건가? 빌어먹을, 이건 만화가 아니라고……."

    차라리 만화라면 용사라도 있을 텐데, 여긴 용사도 없는 현실이다.

    "위성 잡았습니다."

    "켜봐!"

    지직거리며 뜬 화면을 바라본 크리스토퍼가 기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이, 이지혁?"

    저 양반이 왜 저기 있단 말인가!

    * * *

    "저거!"

    바라스가의 작은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위연호의 발아래 열린 시커먼 문은 보나마나 게이트일 것이다. 그리고 그 게이트가 어디로 뚫려 있는지는 그들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마, 마계!"

    차원을 이동한다는 것은 마왕들에게도 힘든 일이다.

    단순히 힘든 정도가 아니라 두세 명의 마왕이 가진 힘을 모조리 소진해야 겨우 하나의 게이트를 열 수 있을 정도로 많은 마나가 필요하다.

    그렇기에 그들은 아르고라스를 파견하여 이쪽에서도 마계로 통하는 게이트에 호응하도록 만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차원의 균열을 이용하여 반영구적인 문을 열어 마계와 지구를 동화시켰다. 그 동화된 스팟을 이용하여 마왕들은 마계의 마나를 마음껏 이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게 아흔아홉 번째 마왕에게도 적용된다는 것을 생각했어야 하는 건데…….'

    바라스가의 몸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고오오오오.

    이지혁의 발아래에서 솟구쳐 올라온 마나가 마치 악령의 혓바닥처럼 이지혁의 몸을 핥고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지혁은 눈을 감고 가만히 마나를 받아들였다.

    "마, 막아야 해!"

    바라스가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이대로라면 아흔아홉 번째 마왕이 무한의 마나를 가지고 부활하게 된다.

    마계의 핵에 박아 넣은 인으로 가장 순수한 흑마력을 무한대로 공급받던, 그 아흔아홉번째 마왕이 부활하게 된다면…… 마계의 입장에서는 재앙과 다름이 없었다.

    지금이라도! 아직 아흔아홉 번째 마왕이 모든 마나를 흡수하기 전에 막아야 한다!

    하지만 무작정 달려들 수는 없었다.

    그러기에는 이지혁의 앞을 지키고 있는 에르카나의 존재가 너무도 부담스럽다.

    "지상 최대의 쇼가 펼쳐지는데 왜 그리 당황한 얼굴을 하고 있지? 재미있지 않아?"

    에르카나가 깔깔대며 웃었다.

    "그래도 보렌차는 머리가 있던데, 너희는 머리가 없다는 것이 참 안타까운 일이지. 너희 같은 멍청이들이 나와 같은 마왕이라는 것이 창피할 정도야."

    바라스가는 이를 갈았지만, 에르카나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설사 반박할 수 있다고 해도 지금 같은 상황에 그녀와 말싸움을 하고 있을 정신이 있을 리 없었다.

    "아무리 아흔아홉 번째 마왕이 자신의 힘을 찾는다고 해도 이곳은 마계가 아니고, 베라프가 아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예전의 우리가 아니지!"

    "그렇게 생각해?"

    에르카나의 이죽거림에 바라스가는 굳이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것은 그녀가 아니었다.

    '제길.'

    이지혁이 천천히 눈을 뜨고 있었다.

    그의 몸이 허공으로 살짝 떠오른다.

    우웅.

    그리고 공명하듯 게이트에서 검은 마나가 불꽃처럼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바라스가는 그 광경을 보며 잊고 싶던 기억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의 머릿속에 화인처럼 남아 있는 모습.

    비록 복장은 과거와 달라졌지만, 지금 이지혁의 모습은 과거 그가 아흔아홉 번째 마왕이자 멸망의 좌라 불릴 때의 그것과 유사했다.

    그리고 느껴지는 힘조차도 말이다.

    "인간 주제에……."

    이지혁이 천천히 감은 눈을 떴다.

    "기분이 어때, 달링?"

    "뭐랄까……."

    에르카나의 질문에 이지혁이 고심을 하다 대답했다.

    "몸 안에 뭔가 넘치고 있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눈을 뜨면 눈에서 마나가 흘러내릴 것 같아."

    "재미있는 대답이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이지혁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확실히 말이야.'

    과거에는 마나의 부족함을 느껴본 적이 거의 없었다. 그의 마나 수급 능력은 언제나 그가 도달한 경지를 앞서 나갔다.

    풋내기 흑마법사 시절에는 에르카나가 당시 수준을 감안한다면 무한이라고 할 수 있는 마나를 공급해 주었고, 그가 소모하는 마나를 에르카나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 되었을 때는 직접 마계로 가서 마계의 코어에 빨대를 꽂고 몸과 연결하여 무한의 마나를 직접 받아들였다.

    하지만 지구로 오고 나서 전혀 수급할 수 없게 되니 마나를 쓰지 못하는 마법사가 어떤 것인지 제대로 알게 되었다.

    마나를 공급받지 못하는 마법사는 숨을 쉬지 못하는 사람이나, 물과 소화기를 쓸 수 없는 소방관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지구로 돌아와서야 이지혁은 자신에게 공급되던, 끝도 없는 마나가 그동안 어떤 역할을 해왔는지 알게 된 것이다.

    제약 아닌 제약에 묶여 있던 이지혁이 이제야 그 제약을 풀게 되었으니, 그 기분이야 말로 해서 무엇하겠는가.

    "흐음……."

    이지혁은 자신의 몸 안으로 들어차는 마나를 느끼며 길게 심호흡을 했다.

    "나쁘지 않군."

    이 충족감.

    전신에 마나가 가득 들어차는 이 충족감을 느껴본 지가 너무나도 오래되었다.

    예전에는 너무도 당연했던 것.

    이지혁이 천천히 자신의 가슴에 손을 가져갔다.

    육체 안에서 약동하는 마나가 느껴진다.

    "괜찮아, 달링?"

    "조절하고 있어."

    에르카나가 조금 걱정스런 눈으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이지혁이 마나를 되찾은 것은 세계에 큰 도움이 되겠지만, 반대로 이지혁의 몸은 더 큰 부담을 감내해야 한다는 것과 같다.

    무한의 마나와 불멸의 육체로 대변되는 멸망의 좌.

    그중 무한의 마나는 되찾았지만, 그 반동을 이겨줄 불멸의 육체는 되찾지 못한 상황이었다.

    '일시에 무너지지는 않았네.'

    최악의 상황은 피했다.

    일반적인 인간의 육체라면 이정도 양의 흑마력을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산산조각이 나버릴 것이다. 하지만 이지혁은 별 무리 없이 마나를 수용하고 있었다.

    극에 달한 마력 친화도와 컨트롤, 그리고 에테르로 강화된 육체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거, 부담이 장난이 아닌데?'

    이지혁은 몸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마나를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짜릿한 쾌감까지야 좋다.

    하지만 자칫하다가는 그 쾌감에 휩쓸려 몸이 박살 날 수도 있을 것 같은 상황이다. 아슬아슬한 칼날 위를 걷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이지혁은 자신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이 정도 칼날 위는 수도 없이 걸어왔다. 여분의 목숨이 없다는 것의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지금 당장은 마나를 받아들여 생긴 부작용과 위험보다는 마음껏 날뛸 수 있다는 쾌감이 더 컸다.

    "자, 그럼……."

    이지혁이 씨익 웃으며 마왕들을 바라보았다.

    "누구부터 시작할까?"

    * * *

    장내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어가기 시작했다.

    이지혁이 얼마나 많은 마나를 집어삼켰는지 피부로 느껴진다. 공기를 통해 전해져 오는 파동이 그들의 육체를 절로 뒤로 물러나게 하고 있었다.

    '응축체 같군.'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저 인간이 마나를 끌어 올렸을 때는 마치 몸 전체가 하나의 마정석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족조차 감당할 수 없을 저 고밀도의 마나를 어떻게 인간이 다룰 수 있는지는 아직까지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었다.

    '아무리 나라고 하더라도 저 정도의 마나를 받아들인다면 육체가 붕괴할 텐데…….'

    마계에서 가장 강건한 육체를 가지고 있는 마왕 중 하나인 바라스가라 하더라도 저만한 마나를 몸에 담을 수는 없다.

    흑마력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세상을 파괴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아무리 흑마력을 원천으로 살아가는 그들이라고 하더라도 육체가 받아들일 수 있는 한도를 넘는 흑마력은 더없이 위험하기 마련이다.

    과거의 이지혁이라면 가능할 것이다.

    그의 육체는 불멸이었으니까.

    아무리 흑마력이 육체를 파괴한다고 하나 이지혁의 육체는 부서지지 않았다. 정확히는 부서지는 족족 바로 회복이 되었으니,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흑마력이라고 하더라도 얼마든지 몸 안에 욱여넣을 수 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는 불멸성을 잃지 않았던가.

    연약한 인간으로 돌아가 버린 그라면 저 정도의 마나가 아니라 저 반의반만 육체에 담아도 육체가 분해되어 버리는 것이 맞다.

    그런데 지금 이지혁은 그 연약한 육체에 마왕조차 감당할 수 없는 양의 마나를 담아내는 기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불가해하군.'

    이지혁이라는 존재는 언제나 그들의 상식을 파괴해 왔다.

    인간의 몸으로 마계로 처들어와 마왕의 직위를 따낸 것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고, 하급 마왕의 직위를 따내자마자 마계를 뒤집어엎은 것도 도무지 상식으로는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지혁은 언제나 그 일을 해냈다.

    '그분들이 아흔아홉 번째 마왕이라는 말만 들어도 안절부절못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이군.'

    그 역시 아흔아홉 번째 마왕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는 못하지만, 진정 마계를 지배할 수 있는 최상위 마왕들이 이지혁에 대해 보이는 경계심은 거의 병적이었다.

    그만한 힘을 가진 이들이 왜 이지혁을 그리도 경계하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지금 바라스가는 알 수 있었다.

    이지혁이 진정으로 두려운 점은 그가 힘이 강하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이지혁은 어떤 일이든 결국은 해내고 마는 존재였다.

    누구나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일을 어떻게든 현실로 이루어내는 능력을 갖춘 이가 바로 이지혁이었다. 그런데 그가 마계를 막아내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바라스가는 작은 눈을 가늘게 뜨며 가만히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투둑, 투둑.

    '완전하지는 않아.'

    지금 그가 끌어모은 마나도 어마어마하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과거의 그에 비해서는 많은 손색이 있었다.

    과거의 이지혁은 육체 주위에 도도히 흐르는 마나만으로도 뭇 마왕들을 압도하고 그들이 감히 대적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지금의 이지혁은 그 정도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리고…….

    우드득.

    이지혁의 어깨 부분이 터져 나간다.

    인상을 지푸린 이지혁이 어깨를 어루만지자 육체가 순식간에 다시 복원되었다.

    "후후후."

    그럼 그렇지.

    부작용이 없을 수는 없다.

    "힘겨워 보이는군, 아흔아홉 번째 마왕이여."

    "알면 좀 싸워주지? 이거 유지하는 게 엄청 힘들거든."

    이지혁이 대놓고 엄살을 부렸다.

    아닌 게 아니라 지금 이지혁은 금방이라도 몸이 터져 나갈 것 같은 고통을 견뎌내고 있었다.

    "그 몸으로 우리를 막을 수 있겠는가?"

    "그 입 닥치고 빨리 싸워주면 막을 수 있을 것 같은데?"

    "큭큭큭."

    바라스가가 거대한 앞발을 들어 바닥을 쿵, 찍었다. 가벼운 데몬스트레이션.

    하지만 그 여파는 결코 작지 않았다.

    우드드득!

    바닥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린다 싶더니, 이내 쩌억, 하고 갈라졌다.

    이지혁은 자신의 발밑이 갈라져 오는 것을 보며 짜증을 냈다.

    "너는 수계 능력이라고!"

    "……뭐라는 거야, 저 미친놈이 또."

    예전에도 자꾸 저런 알 수 없는 말을 해서 속을 뒤집어놓더니,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문득 이쪽 세상에서 저 말이 대체 뭘 의미하는 것인지 조사라도 한 번 해봐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바라스가였다.

    물론 여기서 살아 돌아갔을 때의 이야기지만.

    "엉덩이가 무거운 놈들이 아직 안 왔다는 건… 너희는 선발대라는 의미겠군. 뭐, 마계를 완전히 비우고 올 수도 없겠지만 말이야."

    마계는 생산 활동이 필요 없는 곳이다.

    전쟁을 하더라도 전쟁 유지비가 필요하고, 식량이 필요한 인간과는 다르게 마계는 생산과 유지를 위한 인원이 필요하지 않다. 군국주의자가 꿈꾸는, 전 국민의 전투병화가 가능한 곳이 바로 마계인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마계를 완전히 비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마족이 존재하지 않으면 통제가 되지 않는 마수들이 득실득실거리는데다가 연대라는 개념이 희박한 마왕들로서는 서로를 견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덕분에 최상위 극소수 마왕들은 몸을 움직이기가 쉽지가 않다.

    "쯧, 정치는 골치 아프다니까."

    인간들이 들으면 배를 잡을 일이지만 저 마왕들 사이에도 정치질은 존재하기 마련이고, 그 덕분에 먹음직한 먹잇감이 눈앞에 있다고 하더라도 쉽게 전부가 달려들 수는 없다.

    그리고 지금은 그게 유일한 희망이다.

    남아 있는 마왕들이 우물쭈물할 동안 최대한 마왕의 수를 줄여놓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구의 멸망은 기정사실이 되어버릴 것이다.

    발밑이 갈라져 검은 입을 쩌억 벌리는 것을 보며 이지혁은 고개를 저었다.

    "여하튼 저 거북이 대가리."

    마법사의 바닥을 갈라서 어쩌자는 말인가.

    그리고 애초에 자신은 허공에 떠 있었다고.

    "그 머리로 힘이 세니 주변 것들이 얼마나 고생을 했을지 알겠다. 이제 좀 쉬어라."

    이지혁의 우수에 마나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고오오오오오.

    마나의 파동이 이지혁을 휩쓸고 돌면서 거대한 폭풍이 불어온다. 그의 손에는 얼마나 많은 마나가 모여들었는지, 손 전체가 검게 물들다 못해 손이 아닌 다른 투명한 무언가로 보일 지경이었다.

    이지혁은 팔이 통째로 사라진 것 같은 감각을 느끼면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예상은 했지만, 반동이 너무도 크다.

    과거의 그와 같을 수는 없다. 육체에 전해지는 반동과 피해를 무시하고 고단위 마법을 마음대로 갈길 수 있을 때의 그가 아니다.

    하나의 마법을 쓰면서도 전해지는 반동과 그에 따른 육체의 붕괴를 계산하고 에테르를 끌어 올려 육체를 보호하고 마나로 보호막을 치는 행위를 동시에 해야 한다.

    "밸런스 패치는 적절한 거 같기는 한데 말이야!"

    이렇게 하려면 저쪽 물량도 좀 줄여줘야지. 이쪽 유닛들도 강화해 주든가!

    우우우웅!

    이지혁의 손에서 뿜어져 나간 마나가 허공에 커다란 공을 만들어냈다.

    불길하게 일렁이며 소용돌이치는 마나를 바라본 바라스가의 눈이 떨려왔다.

    '빌어먹을.'

    어떤 이들은 미지의 것을 두려워한다고 하지만, 바라스가는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저 소용돌이치는 마나의 공이 어떤 일을 벌이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바라스가다.

    마왕이라는 이름과는 어울리지 않는 두려움이 그의 육체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일단 한 방!"

    콰아아아아아아아!

    이지혁의 손가락이 까딱하자 소용돌이치던 마나가 일순 앞으로 검은 마력을 방출하기 시작했다.

    둑이 터지듯 마나가 터져 나가며 전방에 있는 모든 것을 휩쓸어 버린다.

    콰아아아아!

    에르카나가 그 광경을 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마왕들 중에서도 이 정도의 파괴력을 뿜어낼 수 있는 이는 존재할 것이다. 최상위급의 마왕들이라면 딱히 놀랍지 않은 일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동일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마왕 중에서도 이만큼이나 야성적인 마력을 뿜을 수 있는 이는 단언컨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아이러니하지.'

    이지혁은 마법사다.

    그것도 인류 역사상 최고라 불려도 되고, 공간과 공격 마법에 관한 한은 역사상 단 한 번도 없던 고지를 홀로 밟은 최고의 마법사다.

    같은 마력을 사용한다고 해도 마법사가 마법을 사용하는 것과 마족이 마력을 사용하는 것은 그 방법이 달랐다.

    마족은 마력을 그 육체의 일부분처럼 사용한다. 인간이 근육을 사용하여 힘을 쓰듯이 마족은 마력을 자유자재로 활용하여 공격한다.

    하지만 마법사는 룬어로 대변되는 시동어를 바탕으로 마력 회로를 배치하여 마치 기계처럼 마력을 순환시켜 결과를 창출해 낸다.

    고위 마법사로 갈수록 마법은 더더욱 정밀하고 완벽한 계산을 필요로 하기 마련이다. 그런 만큼 마법사는 마족 이상으로 마력 컨트롤에 능하다.

    하지만 이지혁은 달랐다.

    그는 마법사임에도 마력을 정밀하게 계산하여 사용하지 않는다. 그저 때려 박을 뿐.

    애초에 정상적인 방식으로 마력을 활용할 수 없던 이지혁은 정밀한 계산을 통해 마력의 활용도를 늘리기보다는 단순한 구조의 마력 회로에 끝없이 마력을 퍼부어 그 위력을 늘리는 방식으로 발전해 왔다.

    그리고 그 결과가 이것이다.

    에르카나는 거칠게 베어 먹은 사과처럼 파여 버린 대지를 보며 몸을 떨었다.

    처음 그녀가 베라프에서 홀로 고독히 떨고 있던 이지혁을 만났을 때, 그가 이런 능력을 갖추게 될 거라고 어찌 예상할 수 있었겠는가.

    어떤 마왕보다도 흉포한 마력으로 눈앞의 모든 것을 지워 버리는 멸망의 상징.

    그가 마침내 다시 돌아온 것이다.

    "끄으으으……."

    바라스가는 날아가 버린 반신을 부여잡고 신음했다.

    "커억."

    그의 하반신은 처참하게 일그러져 떨어져 나갔고, 남은 육체도 반쯤은 손상되어 있었다.

    "하하하……. 쿨럭! 쿨럭! 아이고, 나 죽는다!"

    그 모습을 보며 비웃으려던 이지혁이 입에서 폭포처럼 쏟아져 나오는 피를 토하며 신음했다.

    "공격은 내가 했는데, 피해는 왜 내가 더 큰 것 같냐. 아이고."

    이지혁이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고단위 마법을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그의 육체에 가해지는 부담은 끔찍할 정도로 늘어났다.

    가장 큰 문제는 이제 아무리 휴식을 취하고 치료를 받는다고 해도 완벽하게 회복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마법을 사용하면 할수록 그의 육체는 최대치가 깎여 나가고 있었다. 한 번의 전투를 더 겪을 때마다 능력은 줄어들고, 육체는 점점 더 붕괴할 것이다.

    "더, 더 강해졌……."

    "쯧."

    이지혁이 터덜대는 걸음으로 바라스가를 향해 걸어갔다. 바로 앞에 쪼그려 앉은 이지혁이 바라스가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더 강해진 게 아니라 그때는 내가 봐준 거야. 보이는 마왕들을 다 죽이고 다녔으면 너희가 떼로 달려들었을 거 아냐."

    바라스가가 황망한 눈으로 이지혁을 바라보다가 낮게 웃었다.

    "……지독한 놈."

    "잘 가라."

    콰득!

    이지혁의 발이 바라스가의 머리를 짓밟았다.

    * * *

    "어?"

    이지혁이 멀쩡한 바라스가의 머리를 보며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다.

    "안 부서지네?"

    "……."

    바라스가가 황당하다는 눈으로 이지혁을 올려다보았다.

    "마법사가 내 머리를 밟아 부수겠다니! 그게 무슨 미친 짓거리냐!"

    "아, 그렇지. 너 단단하지?"

    이지혁이 뒷머리를 긁었다.

    "에이, 여기서 머리가 부서져야 폼이 나는 건데."

    영화를 너무 봤어.

    바로 그때, 이지혁의 발에 짓밟혀 있던 바라스가가 다급히 소리치기 시작했다.

    "자, 잠깐만. 거래하자!"

    이지혁이 뚱한 얼굴로 바라스가를 바라보았다.

    "니 입이니까 니 마음대로 말하는 것까진 뭐라고 하지 않겠지만, 이왕이면 거북이와 거래를 해야 하는 인간의 입장도 헤아려 주면서 말을 했으면 좋겠는데……."

    "나, 나는 마왕이다."

    "그래, 마왕 거북이."

    이지혁이 바라스가의 머리를 밟은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재빠르네."

    마왕 하나는 흔적도 없이 소멸했고, 다른 하나는 이미 꽁지가 빠져라 도주한 뒤였다. 마법 한 방으로 이 정도 결과를 낸 거라면 매우 이득을 봤다고 해야겠지만…….

    "쯧."

    이지혁은 자꾸만 울컥울컥 올라오는 핏덩어리를 자연스럽게 뱉으며 말했다.

    "너와 거래를 해서 내가 볼 이득이 없는데, 내가 왜 너하고 거래를 해야 하는 거지?"

    바라스가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이미 이지혁이 그의 머리를 밟았을 때, 이지혁에게서 그를 죽이겠다는 의지를 느낀 바라스가다. 쓸데없는 말로 시간을 끌었다가는 꼼짝없이 머리가 부서질 것이다.

    바라스가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네 부하가 되어주마."

    "흐응?"

    "나는 마왕이다. 마왕을 부릴 수 있다는 것은 네게도 엄청난 이득일 텐데?"

    이지혁이 고뇌하는 표정으로 바라스가의 머리에 걸터앉았다. 머리가 너무 커서 약간 불편하지만, 이지혁은 신경 쓰지 않고 고민했다.

    "으으음……."

    에르카나가 다가와 말했다.

    "뭘 고민하는 거야, 달링? 아무리 저놈이 멍청하더라도 마왕을 부하로 부릴 수 있는 기회는 흔한 게 아니잖아. 마족이 아닌 이상 누구도 그런 영광을 누려보지 못했을걸?"

    이지혁이 아무것도 모르는 말 하지 말라는 듯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 거북이잖아! 거북이가 부하면 폼이 안 살잖아!"

    "나는 가끔 달링의 머리를 해부해 보고 싶을 때가 있어."

    "……자주 들은 거 같은 말이네."

    이지혁이 바라스가의 머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

    "야, 그러고 보니 니가 내 부하로 들어오면 동족들이랑 싸워야 하잖아. 그래도 괜찮은 거야?"

    "죽는 것보다는 낫다."

    "오?"

    "어차피 마족은 동등한 개체들이다. 너희가 가지는 연대감 같은 것이 있을 리가 없지."

    "훌륭한 앞잡이의 마인드로군."

    으음, 그런데 뭐랄까…….

    퍼억!

    이지혁이 그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바라스가의 머리를 마구 걷어차기 시작했다.

    "왜! 왜 그러는 것인가!"

    "너 같은 마인드로 친일파 놈들도 나라를 팔아먹었겠지 생각하니 열 받아서 그런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앞잡이 같은 놈."

    이지혁이 바라스가를 보며 고민에 빠졌다.

    확실히 마왕을 부릴 수 있다는 것은 굉장한 이득이다. 오식이 하나만 해도 그에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던가. 그런데 오거 로드도 아니고, 마왕을 부릴 수 있게 된다면 앞으로의 싸움에 크나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거북이를 부리라니! 거북이를! 몬스터 볼에도 안 들어가는 거북이를!"

    이지혁은 뭔가 자존심이 상한 듯 연신 중얼거렸다.

    "달링, 정신 차려."

    "끄응."

    그 수많은 마왕들 중에서 왜 하필 거북이란 말인가.

    일전에 그와 싸웠던 마왕들은 포스가 있었는데, 이건 영…….

    "쯧, 못생기면 어떠냐. 잘 싸우면 장땡이지."

    "……못생기지 않았다."

    그 와중에 항변하는 바라스가였다.

    "뭐, 어쩔 수 없는 내 팔자라고 생각해야지."

    이왕이면 멋들어진 몬스터를 가지고 싶었지만, 애초에 포켓에 들어갈 수준이 아니니 이 정도로 만족해야 했다.

    이지혁의 우수에 검은 마나가 실리기 시작했다.

    "으응?"

    그 모습을 본 바라스가가 눈을 크게 떴다.

    "조, 종속의 인?"

    "왜 당황하고 그래?"

    "마족의 계약은 절대적이다. 굳이 그런 걸 하지 않아도 내가 배신할 일은 없다."

    "뭐, 그럴 수도 있지만……."

    이지혁이 씨익 웃었다.

    "세상에는 예외라는 것도 있잖아. 나는 그런 불확실성은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

    "그, 그게 무슨 소리야!"

    "어차피 배신할 생각이 없으면 인을 찍든 안 찍든 별 상관 없잖아. 너 지금 그러는 거, 나중에 배신할 생각이 있다는 뜻으로 보인다?"

    "으으……."

    바라스가가 치를 떨었다.

    "인간 세계에는 예의도 없는가! 나는 마왕이다. 아무리 포로로 잡혔다고는 하나 최소한의 예의는 갖춰다오."

    "아냐."

    이지혁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너는 포로로 잡힌 게 아니라 노예로 들어오는 거잖아. 포로에게는 제네바조약이 적용되지만 노예에게는 그런 게 없지."

    "제네가 조약이 뭐냐!"

    "제네가가 아니라 제네바. 그리고 너는 알 것 없어."

    이지혁이 우수를 휘저었다. 그러자 허공에 만들어진 거대한 인(印)이 바라스가의 머리로 파고들었다.

    치이이익!

    바라스가의 머리에서 살 타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바라스가가 몸을 뒤튼다.

    "끄으으으!"

    마왕이지만 고통은 참기 힘든지, 바라스가가 신음을 흘렸다.

    "오? 저항하는데?"

    역시나 마왕급쯤 되니 정신과 육체에 제약이 잘 먹히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뿐. 반항할 수 없는 바라스가인 만큼 시간이 좀 더 걸린다 뿐이지, 결국에는 종속의 인을 이겨내지 못할 것이다.

    "크윽."

    바라스가가 반쯤 날아가 버린 팔을 뻗어 머리를 어루만졌다. 이마에 새겨진 인이 만져지자 바라스가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 꼴을 당하는 날이 오다니.'

    기세 좋게 아흔아홉 번째 마왕을 잡겠다고 나선 게 불과 조금 전인데,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이런 꼴이 되니 비참하고 서글픈 심정이었다.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이미 일은 터졌는데.

    "자, 그럼 시험해 볼까? 차렷!"

    "내 몸을 보고 말해라! 내 몸을! 내 몸이 거북인데, 어떻게 차렷을 하느냐!"

    "지도 지 입으로 거북이라고 하네."

    "끄응."

    바라스가는 고개를 격하게 저었다.

    하필이면 이런 또라이를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꼴이 되다니.

    '그냥 죽을 걸 그랬나?'

    이지혁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것이 과연 죽는 것보다 나은 삶인지 심각하게 고민하게 되는 바라스가였다. 종속의 인이 찍힌 이상 이제는 죽는 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겠지만 말이다.

    "자, 그럼 들어볼까? 너, 무슨 지시를 받고 온 거냐?"

    바라스가가 뚱한 얼굴로 대답했다.

    "지시받은 거 없다."

    "계획이라든가 그런 게 있었을 거 아냐?"

    "없다."

    "……."

    이지혁이 머리를 긁었다.

    종속의 인이 찍혀 있으니 바라스가가 그를 속일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렇다면 정말 아무런 명령도 없이 이 세계로 무작정 넘어왔다는 말이 아닌가.

    "……니가 무식해서 안 끼워준 건 아니고?"

    "크아아악!"

    "어디서 소리를 질러! 뒈질라고!"

    바라스가가 힘없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 게 아니라 정말 우리는 받은 지시가 없다. 지구로 연결이 되었으니 넘어가고 싶은 이들은 넘어가서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리고?"

    "급할 것 없으니 천천히 하라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나는 일단 너를 찾아온 것이고."

    "너를?"

    "……주인을."

    이거, 태도가 묘하게 반항적인데?

    종속의 인이 찍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자아가 워낙에 강한 개체이니만큼 태도까지 완벽하게 변하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오식이가 고생하겠네."

    이지혁은 얌전히 집을 지키고 있을 오식이를 생각하며 혀를 찼다. 이 성격 더러운 놈을 데리고 가면 오식이가 얼마나 겁을 먹을까 생각하니 새삼 가슴이 아파왔다.

    "너, 오식이 때리면 나한테 죽는다."

    "오식이?"

    "있어. 오거 로드."

    "……겨우 오거 로드 따위를 아끼는 것인가?"

    "전력이라서 아끼는 것이 아니라, 귀여워서 아끼는 거다."

    "오거가?"

    바라스가가 도무지 이해를 못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 * *

    "귀, 귀여워."

    마당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오식이를 본 바라스가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오거 새끼가 귀엽다는 말을 들어보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귀여울 줄이야. 게다가 저 핑크색에 가까운 붉은 털이 더욱 큰 귀여움을 뿜어내고 있었다.

    "마왕도 귀여움을 아나?"

    "예술적인 측면을 따진다면, 너희 인간들을 감히 마족과 비교조차 될 수 없다. 우리의 미학적인 관점으로 보면 너희의 삶은 모노톤과 같다."

    "근데 니들은 생긴 게 흉측하잖아!"

    "크아악! 종족의 상대성이라는 것도 모르는 건가! 우리가 보기에는 인간이 더 괴물같이 생겼단 말이다! 털도 없이 흉측하고 민둥민둥하게 생겨서는!"

    "……너도 털 없거든?"

    "끄응."

    바라스가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서 이제 나는 뭘 하면 되는 거냐?"

    집을 올려다본 바라스가가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자신이 거할 곳을 찾았다.

    "뭘 하긴 뭘 해. 일단 집 지켜야지."

    "집?"

    바라스가의 눈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마왕에게 시킬 일이 고작 집 지키는 거라고? 지금 나와 장난하자는 것인가?"

    이지혁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기지개를 켜며 대답했다.

    "나중에는 다른 것도 시킬 거야. 일단 나는 좀 쉬어야 하니까 집이나 지키고 있어."

    "이 좁은 정원에는 내 몸 하나 뉘일 곳이 없다."

    "그건 걱정 안 해도 돼."

    이지혁이 손을 뻗어 바라스가의 몸에 촉수를 꽂았다.

    "으음?"

    순간, 육체에서 마나가 빨려 나가자 바라스가가 기겁을 하여 저항하려 했다. 하지만 그의 몸은 의지와는 다르게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크윽!"

    이게 종속의 인의 효과인가?

    바라스가의 육체가 점점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이내 강아지만 한 크기로 줄어들었다.

    "오, 싱크로율이 올랐네. 더 비슷해졌어."

    이지혁이 마음에 든다는 듯이 고개를 연신 끄덕이더니, 집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럼 난 한숨 잘 테니까 집 잘 지켜라."

    "끄응."

    이지혁이 현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가자 바라스가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이런 꼴이 될 줄이야.'

    죽는 것보다야 낫다지만, 죽지 않기 위해서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 많았다.

    크르르.

    "크르르?"

    바라스가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오식이가 그를 향해 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이를?

    저 오거 새끼가 지금 나한테 이를 드러낸 건가?

    "아, 이게 그거로군."

    하등동물들은 일단 계급부터 정해야 한다고 하더니, 바라스가가 작아지자 한 번 해볼 만하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오냐! 내가 마왕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보여주마!"

    붉은 눈을 흉흉하게 빛내며 바라스가가 그 짧은 다리를 재빨리 움직여 달려들자 오식이의 눈이 휘둥그렇게 변했다.

    깽?

    "닥쳐!"

    시끄러움에 짜증이 폭발한 이지혁이 나와서 신발을 집어 던지기 전까지 오식이는 그 몸으로 마왕의 냉엄함을 체험해야 했다.

    아무리 작아지고 마나를 빼앗겼다고는 하나 마왕은 마왕이었다.

    * * *

    집 안으로 들어온 이지혁은 입가를 움켜 잡았다.

    "우웨에에에엑!"

    바닥으로 무너진 이지혁이 검붉은 피를 폭포처럼 토해냈다.

    "으……. 엄마한테 야단 맞겠네."

    이지혁이 손을 튕겼다.

    "클린!"

    간단한 마법이 펼쳐지고, 바닥에 흩뿌려진 피가 깨끗하게 사라졌다.

    "할 짓 없으면 청소 업체나 하고 살아도 되겠는데?"

    '당신의 집 안 먼지를 분자 단위로 제거해 드립니다'로 광고하면 수요가 좀 있을 것 같았다.

    우우웅.

    순간, 이지혁의 뒤쪽에 공간이 일렁이더니, 아펠드리체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남의 집에 벨도 안 누르고 들어오는 건 인간의 예의에 어긋난다고."

    "여기 우리 집이기도 하잖아요."

    "아, 그랬지."

    이지혁이 실없는 농담을 던졌지만, 아펠드리체의 눈은 이지혁의 육체에 고정되어 있었다.

    '심각해.'

    제 형체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한 번의 전투가 이어질 때마다 이런 식의 손상이 반복된다면, 앞으로 얼마나 남은 걸까?

    전대미문의 일이라 아펠드리체도 정확하게 얼마나 걸리지는 판단하기가 어렵지만,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거라는 사실은 누구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아펠드리체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이쪽으로."

    그녀가 손을 뻗어 이지혁의 팔을 잡아 침실로 이끌었다.

    "대낮부터 너무 화끈한 거 아냐?"

    "원해요?"

    "죄송합니다."

    이지혁이 꼬리를 말자 아펠드리체가 한숨을 쉬었다.

    이럴 때마저도 농담을 할 수 있는 여력이 있다는 것은 이지혁의 장점이기도 하지만, 상황을 너무 낙관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화가 날 때도 있었다.

    "인간들은 왜 마음에도 없는 말을 입에 올리는지 모르겠어요."

    "으음."

    거, 마음에 아주 없지는 않습니다만.

    이지혁은 튀어나오려는 말을 입안으로 꿀꺽 삼키고는 순순히 아펠드리체를 따라서 침실로 향했다.

    침대에 이지혁을 눕힌 아펠드리체가 그의 머리맡에 앉고는 천천히 머리 안으로 마나를 밀어 넣기 시작했다.

    "끄윽."

    이지혁의 몸이 벌벌 떨린다.

    '아프겠지.'

    전 차원을 통틀어 고통에 가장 익숙한 이를 고르라면, 아펠드리체는 주저 없이 이지혁을 고를 것이다. 수많은 세월 동안 그는 고통받는 것에 너무도 익숙해져 있었다.

    손톱을 뽑아내고 그 안에 송곳을 찔러 넣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만큼의 고통에 대한 내성이 있는 사람이 지금 전신을 벌벌 떨며 고통을 참아내고 있었다.

    '무엇을 위해서.'

    과도한 흑마력의 운용으로 인해 그녀가 쳐둔 뇌 쪽의 보호막이 모두 부서져 있었다.

    뇌를 잠식하고 있는 흑마력을 밀어내고 다시 그 안에 그녀의 마나를 채워 넣는 작업.

    육체 안에서 흑마력과 백마력이 충돌하여 내부를 헤집는 것은 어떤 고문보다 큰 고통을 동반한다.

    하지만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대로 내버려 둔다면 이지혁은 불과 하루도 버티지 못하고 마족이 되어버릴 테니까.

    그것을 막는 것만이 이 지구에서 아펠드리체의 유일한 존재 가치였다.

    "참아요."

    이지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얼마나 주먹을 꽉 쥐었는지, 손톱이 주먹을 파고들어 피가 침대를 흥건히 적실 정도였다.

    우우우웅.

    마나가 끊임없이 이지혁의 머리로 밀려 들어간다. 아펠드리체의 얼굴 역시 창백해지고 있었다.

    마나가 없는 세계.

    마계와 차원이 연결되면서 흑마력이 아닌, 아펠드리체가 쓸 수 있는 무속성의 마나도 어느 정도 유입이 되기는 했지만… 마나의 바다라고 할 수 있는 베라프와 비교할 수는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작업은 아펠드리체에게도 막대한 부담을 안겨주는 일이었다.

    겨우 이지혁의 머릿속에 가득 찬 흑마력을 밀어내고 정순한 마나를 잔뜩 밀어 넣어 보호막을 만들어놓은 아펠드리체가 무거운 표정으로 이지혁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얼마 버티지 못할 거야.'

    이대로 시간이 덧없이 흐른다면, 이 세계는 진정한 마왕의 강림을 지켜봐야 할 것이다.

    아펠드리체의 눈에 슬픔이 배어났다.

    인간의 몸으로 타 차원에 말려 들어가 한없이 고통만 받다가 이제 겨우 원래의 세상으로 돌아왔는데, 그 끝이 마족이 되는 거라니.

    '이 세계에 신이 없어서 다행이야.'

    이 세계에도 신이 존재했다면, 아펠드리체는 그 신의 앞에서 소리쳤을지도 모른다.

    당신의 피조물에게 너무 가혹한 것이 아니냐고 말이다.

    그녀 역시 이지혁에게 완전히 떳떳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녀가 하려는 모든 것은 이지혁을 위한 선의에서 비롯되었다는 것만은 자신할 수 있었다.

    "정말 어쩔 셈이에요?"

    이지혁이 힘겹게 눈을 떴다.

    "같은 말 반복하지 말자고."

    "…내가 아는 당신이라는 사람은 이렇게 대책 없이 무작정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그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돌아가겠답시고 발버둥 친 사람이 당신 아니었어요?"

    "그랬나?"

    "베라프의 인간들보다 더 나약하던 시절에도 당신은 나에게 끊임없이 저항했어요. 내 목을 쥐어뜯어 주겠다면서 화내고 소리치던 당신답지 않아요."

    "미쳤었네."

    이지혁이 고개를 저었다.

    인간 주제에 드래곤에게 그런 말을 하다니.

    그의 뇌가 정말 재생이 제대로 되고 있었는지가 의문이다.

    "잘도 살려뒀네?"

    "…못 죽인 거예요."

    그 말투에서 느껴지는 깊은 빡침에 이지혁은 잠시 눈을 감았다.

    하기야 아펠드리체의 입장에서 보자면 개미가 '너 죽여 버리겠다'고 삿대질하며 소리치는 것이나 다름없게 보였겠지.

    그나마 개미는 백만이 모이면 사람 하나야 우습게 죽일 수 있겠지만, 인간은 백만이 모여도 드래곤 하나를 감당할 수 없다. 특히나 당시의 이지혁 같은, 아무 능력이 없는 개체라면 더더욱.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봐, 아펠드리체."

    "네."

    "하나 궁금한게 있는데, 이제는 대답을 해줄 수 있잖아?"

    "말씀하세요."

    "너, 왜 나를 돌본 거지?"

    "……."

    이지혁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말했다.

    "네 말대로 나는 죽지도 않아. 그냥 내버려 둔다고 해서 어디서 사고를 당하지도 않지. 그런데 왜 너는 나를 굳이 잡아들인 거지? 그렇다고 방치한 것도 아냐. 이유가 뭐야?"

    "말씀드렸잖아요, 그분의 명령이었다고."

    이지혁이 눈살을 찌푸렸다.

    "라트렐, 그 망할 년이 나를 보호하라고 했다고?"

    "예."

    "어째서?"

    이지혁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은 불멸이다.

    죽지 않고, 변하지 않는다. 차라리 암석 덩어리는 풍화되기라도 하지만, 자신은 전혀 변화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자신을 보호해야 한단 말인가.

    "당신은 우리 세계에서는 이레귤러니까요. 당신의 행동 하나하나는 세계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와요. 만약 당신이 조금만 더 똑똑해서 거기서 총기를 만들기만 했어도 세계의 역사가 달라졌을 거예요."

    "그거 욕이지?"

    "…여하튼 당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들은 당신의 생각 이상으로 우리에게는 위협이 됐어요. 게다가 당신은 그 지식을 현실로 옮길 수 있을 만큼 무한한 시간을 가지고 있었죠. 그러니 좋게 말하자면 보호한 거고, 나쁘게 말하자면 가둬둔 거죠."

    "흐음……."

    이지혁이 묘한 표정으로 아펠드리체를 바라보았다.

    "그게 전부가 아니겠지?"

    "……."

    "드래곤은 거짓말을 하지 못하지. 하지만 굳이 모든 진실을 말하지도 않아. 그렇지?"

    "예."

    아펠드리체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이지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 상황이 되어서까지 숨기겠다는데, 할 말이 없네."

    아펠드리체는 묘한 슬픔이 담긴 눈으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뭐, 됐어. 그런 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이지혁은 아펠드리체를 보며 얼굴을 굳혔다.

    "이제 진짜 중요한 이야기를 해보자고, 아펠드리체."

    "말씀하세요."

    이지혁이 더없이 진중한 눈으로 말했다.

    "차원의 문을 닫는 방법에 대해 알고 있나?"

    * * *

    "흐음……."

    사내는 아주 흥미로운 눈으로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파괴되고 있는 세계 곳곳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느려 터졌군."

    기껏 마왕들을 이 세계로 불러들였는데, 이런 식으로 느긋하게 시간을 끌어댈 줄이야.

    너무 빠르게 세상이 멸망해 버릴까 봐 망설여 왔는데, 안타깝게도 마왕들은 그의 생각만큼 빠르지도, 과격하지도 않았다.

    "뭐, 우리 입장에서는 나쁘지 않잖아. 그렇지?"

    "…뭐가 나쁘지가 않다는 건지 모르겠군. 내가 보기에는 네 머리만큼이나 나쁜 상황 같은데?"

    정민성이 사내를 보며 이죽거렸다.

    "그 정도면 괜찮군."

    하지만 사내, 알파는 정민성의 이죽거림을 여유로이 받았다.

    "쳇."

    알파가 말려들지 않자 정민성이 짜증난다는 듯이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뭘 어쩔 셈이야?"

    "무슨 뜻이지?"

    "세상을 이리 만들어서 어쩌겠다는 거냐고. 우리야 공로를 인정받아 살아남을 수 있다지만, 이대로 시간이 조금 더 흘러 버리면 우리 말고는 모두가 죽을 거야. 그렇다고 우리가 마계에서 일정한 지위를 인정받은 것도 아니잖아. 마족들의 애완동물이 되는 것은 사양이라고."

    "그건 걱정할 것 없어. 저쪽의 미적감각으로 보면 우리가 꽤나 징그러워 보이는 모양이더라."

    "그런 뜻이 아니잖아. 귀가 썩었나?"

    "큭큭큭."

    알파는 어깨를 으쓱했다.

    "계획이란 것은 무의미한 거야. 언제나 모든 계획은 변수를 만나기 마련이지. 그러니 일단은 저지르고 보는 게 중요해."

    "말과 행동이 좀 일치했으면 좋겠는데?"

    정민성이 한숨을 내쉬었다.

    오랜 시간을 함께했지만, 그에게도 알파는 미지의 존재였다. 그 머릿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정민성은 알파를 신뢰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언제나 결과로 모든 의혹을 해소시켜 주었으니까. 계획을 주저리주저리 떠들지는 않지만, 마지막에는 납득할 수 있게 만드는 사람이 바로 알파였다.

    그러니 이번에도 뭔가 계획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계획이 너무 늦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마계와의 문을 연다는 것이 이런 의미인 줄 알았더라면 정민성은 알파를 말렸을 것이다. 말릴 수 없었다면 적어도 동조는 하지 않으려 했을 것이다.

    아무리 그가 알파의 지배하에 있다고는 하지만, 그의 자유의지가 작용하는 시간 동안에는 그의 계획을 망치기 위해 움직일 수 있으니까.

    정민성은 알파가 보고 있는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봐, 알파."

    "음?"

    "넌 내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준다고 했지."

    "물론이야."

    "설마, 그 새로운 세상이 인간이 모두 멸망한 세상은 아니겠지? 그런 걸 보고 싶었으면 그냥 내가 마계로 넘어가는, 아주 편한 방법도 있었다고, 설마 그 생각을 못해서 상황을 이렇게 만든 건 아니겠지?"

    "…똑똑한데? 그 이야기를 좀 미리 해주지그랬어."

    "이 썩을 인간이!"

    끝까지 알파가 장난을 치자 정민성은 발끈하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알파가 손을 내저었다.

    "흥분하지 말라고."

    알파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간이 없는 세계 따위가 의미 있을 리 없지. 내가 원할 리도 없고."

    "……."

    "기다려. 재생이란 것은 파괴가 선행되어야 가능한 거니까. 결국 세상을 손에 넣는 건 우리라는 사실은 의심할 필요 없어. 모든 것은 결국 순리대로 흐르기 마련이지. 크하하하하!"

    기괴하게 웃는 알파를 보며 정민성의 두 눈동자에 미약한 공포가 어리기 시작했다.

    세상을 태워 버릴 불꽃이 이곳에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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