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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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게 대체 뭐지?"
중국의 능력자들을 이끌고 있는 후이펑은 갑자기 달라져 버린 세상에 당황하여 주위를 둘러보았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세상이 변해 있었다.
그저 어두워진 것이 아니다. 조금 전까지 보았던 세상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마치 원래 있던 지형에 CG를 덮어씌운 것처럼 세상이 달라져 있었다. 대지는 검붉게 물들고, 건물들은 뭐라도 씌운 것처럼 바래져 가기 시작했다.
세상이 무채색으로 바뀌어 버린 느낌에 후이펑의 등골에서 소름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공기마저 끈적끈적하게 느껴졌다.
공기 안에서 느껴지는 불쾌한 기운이 폐 속 깊이 빨려 들어왔다가 나간다. 아까부터 머리가 멍하고 뭔가 자꾸 흥분이 되는 것 같은, 기이한 기분이 들었다.
'마계인가?'
작전의 이유는 들었다.
북한 놈들이 마계로 통하는 문을 열려고 한다는 것을.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명령은 절대적인 것이기에 그저 따랐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 후이펑은 그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곳은 이제 더 이상 지구라고 부를 수 없는 곳이 되어버렸다.
후이펑은 전신을 타고 흐르는 전율을 억누르며 그들의 앞에 나타난 절대자를 바라보았다.
…마왕이라는 이름의.
"인간들은 재미있는 무기를 쓰는군."
마왕의 출현과 동시에 아르고라스가 그 자리에 바로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바닥에 처박았다.
"위대하신 존재를 뵙습니다."
"수고했다. 너의 공은 잊지 않을 것이다."
"감읍합니다."
알파가 아르고라스의 모습을 보고는 이죽였다.
"개가 꼬리를 치는 모습 같군."
마왕의 눈이 알파에게로 향했다.
"네가 그 협력자인가?"
"네네, 그렇습니다. 친애하는 마왕님, 인간들의 대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듣던 대로 건방진 자로군."
최정훈은 새로 나타난 마왕의 모습을 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검은 털로 뒤덮인 하반신과 붉은 근육으로 가득 들어찬 상반신.
그리고 인간의 형태를 닮은 붉은 얼굴과 머리 앞쪽과 좌우로 뻗어난 세 개의 뿔.
'악마로군.'
말 그대로 악마의 모습이었다.
너무 전형적인 악마의 모습이라 너무 스트레오한 것이 아닌가 항의하고 싶을 정도였다.
"새로운 세상에 오시어 감동적인 것은 알겠지만, 그래도 할 일은 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기에 있는 이들이 이대로 죽어 나가는 것을 보는 것도 재미가 덜하실 텐데 말이죠."
그 말에 마왕은 미묘한 표정으로 알파를 바라보았다.
"본인의 목숨을 구하고 싶은 것인가?"
"마왕이라는 입장에서 본다면 한없이 나약해 보인다는 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저도 이 세계에서는 좀 먹어주거든요. 이 정도로 죽지는 않습니다."
"왜 너를 죽이지 말라고 당부를 하셨는지 알 것 같군. 그 말이 없었다면 너는 지금 오체분시되었을 것이다."
"크으, 마계의 계약 이행은 철저하군요. 감탄했습니다."
이죽이는 알파를 보며 마왕이 눈을 찌푸렸다.
원래라면 저 하등한 놈이 자신의 앞에서 저런 방자한 모습을 보이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겠지만…….
'계약은 신성한 것이지.'
그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것이 계약 내용에 들어가 있으니 지금 당장은 알파를 죽일 수 없었다.
"조심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계약자여. 우리는 계약을 존중하나 원한 역시 잊지 않는다. 계약의 효력이 다하는 순간, 지옥을 보고 싶지 않다면 그 입을 다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전에 제가 죽을 것 같아서 괜찮습니다. 제 걱정은 안 해주셔도 됩니다."
최정훈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짜냈다.
'어떻게 해야 하지?'
텔레포트도 막혔다. 그리고 이 자리로는 ICBM이 떨어진다. 그리고 그 ICBM에는 핵탄두가 장착되어 있을 것이 빤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이 상황에서 살아 돌아갈 수 있다는 말인가.
"우선 귀찮은 것들부터 처리를 하지."
최정훈이 고민하는 사이, 마왕이 한 팔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우우웅.
그의 팔이 들어 올려진 것과 함께 대지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대지를 움직이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팔에 모여들기 시작한 마력에 대지가 절로 반응하며 들썩이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이나 어마어마한 위력이었다.
'이, 이것이 마왕인가?'
최정훈은 일그러진 얼굴로 마왕을 바라보았다.
마왕이란 존재를 처음 본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확실히 뭔가 달랐다.
'그렇구나.'
순간, 최정훈은 위화감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동안의 마왕들은 지구로 넘어오기 위해서 자신의 힘을 줄인 상태였다. 하지만 지금은 온전한 '문'이 열린 것. 그렇다는 말은 마계에서의 상태 그대로 마왕들이 지구로 넘어온다는 뜻이었다.
리미트가 걸려 있는 마왕들도 단독으로 지구를 멸망에 이르게 할 정도로 강했다. 그런데 힘을 온전히 보존한 채 지구로 넘어온 마왕들은 얼마나 더 강할 것인가.
우드드드득.
팔 근육이 기묘하게 꿈틀거린다 싶더니, 마왕이 손가락을 앞으로 펼쳤다.
"어디 볼까?"
콰아아아앙!
마왕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간 적색의 섬광이 하늘을 뒤덮었다.
콰아아아앙!
콰아아아앙!
세 번의 굉음과 함께 섬광이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그런 후…….
"뭐, 뭐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마왕이 쏘아낸 마력이 ICBM과 만났을 때, 공중에서 핵탄두가 폭발하게 된다면 피폭 범위가 얼마나 될 것인가를 순간적으로 계산하던 최정훈이 멍해질 만큼 말이다.
"어떻게 된 거지?"
최정훈이 의아해할 때, 마왕이 입을 열었다.
"폭탄이라는 건가? 매개를 통해 폭발을 일으키는 거로군. 하지만 폭발이 일어나기 전에 통째로 소멸을 시켜버리면 폭탄이라는 것은 그 가치가 없는 게 아닌가."
알파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보통은 그 '소멸'이라는 단계를 이행할 능력이 없기에 인간은 핵무기를 두려워하는 것이죠. 당신들이 하는 행동을 보니 인간의 힘이 과연 당신들에게 얼마나 통할까 하는 의구심을 버릴 수가 없네요."
"하찮은 인간 따위가……."
알파의 말을 듣고서야 최정훈은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파악할 수 있었다.
'소멸이라니.'
말이야 쉽다만, 그게 어떻게 가능한가.
현대의 과학기술로는 불가능하기에 MD니 뭐니 해서 미사일이 도착하기 전에 공중에서 폭파시키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것인데.
"당신들을 끌어들인 것이 잘한 일인지 조금 의문이기는 하네요. 하지만 뭐, 이미 저지른 일을 돌이킬 수도 없고, 정 상황이 나빠지면 이지혁 씨를 믿는 수밖에 없죠. 마왕을 막는 건 용사에게 맡기고, 저 같은 앞잡이는 그냥 팝콘이나 먹으면서 구경이나 해야겠어요."
"…이지혁?"
마왕의 눈이 꿈틀했다.
"아, 그러고 보니 구면이시겠네요. 저기 계시잖아요. 이지혁 씨."
마왕의 시선이 천천히 최정훈이 있는 쪽으로 돌아갔다. 최정훈은 자신의 몸으로 이지혁을 가리며 이를 꽉 깨물었다.
'빌어먹을 놈.'
마왕이란 족속들은 하나같이 이지혁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다. 에르카나 같은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무작정 소환된 것들은 모두가 이지혁을 죽이기 위해 이 세계로 넘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작자들이었다.
그러므로…….
"이지혁? 아흔아홉 번째 마왕?"
그러니 저런 반응이 나오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마왕이 이지혁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헛웃음을 흘렸다.
"과연 아흔아홉 번째 마왕 본인이로군."
으드드득.
이 갈리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온다.
"하지만 저 몰골은 뭐지? 불사이자 공포였던 그 아흔아홉 번째 마왕의 모습은 어디로 간 것인가? 겨우 인간들을 상대로 그런 꼴이 되다니! 한심하고도 또 한심하도다! 마계를 질타하던 그 모습은 어디로 갔느냐, 이 말이다!"
마왕이 분노에 찬 얼굴로 소리쳤다.
"그런 몰골로 살아 있을 바에야 차라리 죽어라. 스물네 번째 마왕, 나 보렌차가 네 길었던 삶을 명예로이 끊어주겠다."
'미치겠군.'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지만, 무슨 뜻인지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왜 저 마왕이란 종자들은 이지혁을 저리 못 죽여서 안달이지?'
그게 단순한 증오라면 이해하기가 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감정은 그가 보기에도 단순한 증오에 머무르지 않았다.
보렌차가 손을 뻗다 말고 천천히 손을 내렸다.
"와 계셨소?"
"달링이 위험한데 언제까지 놀고 있을 수는 없지."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바닥에 검은 늪이 생겨나더니, 에르카나가 천천히 그 모습을 드러냈다.
"에르카나 씨!"
최정훈은 지옥에서 구세주를 만난 기분으로 그녀를 향해 소리쳤다.
"그런 끈적한 부름은 부담스러운걸? 미안하지만 나는 남편이 있는 몸이라서 말이야."
에르카나가 고혹적으로 웃었다.
최정훈은 그 웃음에 당황했지만, 보렌차는 조금의 미동도 없는 얼굴로 나직하게 말했다.
"이 상황에서까지 마계에 반기를 들겠다는 것이오?"
"이상한 소리인걸? 대체 언제부터 마계에 집단의식이 있었지? 자신이 행하고 싶은 것을 행하라. 그것이 마족의 절대명제이자 대의 아니었던가? 나는 그저 우리 달링을 위해 살고 있을 뿐이야."
"후후, 그렇군. 그렇다면 당신과 나는 적이로군."
"그렇다고 할 수 있지. 네가 우리 달링을 해치겠다는 마음을 버리지 않는다면 말이야."
보렌차가 붉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소리쳤다.
"이 세계를 우리의 손에 넣으려 하는 계획을 방해하는 것은 아흔아홉 번째 마왕 쪽이오!"
"그래서?"
"그러니 우리가 양립할 수는 없는 것 아니겠소?"
"음, 뭐, 좋아. 그런데 말이야… 오늘은 그냥 가야겠어. 아무래도 우리 달링의 상태가 영 좋지 않아서 말이야."
"…간다고?"
"응."
"누가 보내준다고 했소?"
"호호호호."
에르카나가 웃음을 터뜨렸다.
"끄윽."
그 웃음소리에 최정훈이 귀를 틀어막고 바닥으로 허리를 굽혔다. 머리가 마구 울리고, 뱃속의 내장이 제멋대로 뒤집어지는 기분이었다.
잊고 있었다.
그녀 역시 마왕이라는 것.
그리고 마계와 현세가 연결이 되었다면, 그녀 역시 자신의 힘을 되찾았을 것이다.
"애송이가 말을 참 예쁘게 지껄이네? 막겠다고? 나를? 네 까짓 게 말이야?"
검고 붉은 기운이 에르카나의 육감적인 몸을 타고 폭풍처럼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마왕의 위엄.
진면목을 드러낸 열세 번째 마왕은 그 힘을 개방하는 것만으로 세상을 진동하게 만들고 있었다.
"큭."
그 거대한 힘 앞에 보렌차마저도 몸을 떨었다.
"흐응?"
퍽!
그 순간, 에르카나가 내뿜어내던 기운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뭐, 네 입장은 이해해. 하지만 지금은 보내주는 게 좋을 거야."
"…어째서?"
"머리가 있다면 생각을 좀 하지? 네가 지금 이 상황을 감당할 수 있을까?"
뭔가 생각하는 듯하던 보렌차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로군. 그 생각은 못했소. 좋아, 오늘은 이만 물러가겠소. 하지만 잊지 마시오, 열세 번째 마왕이시여. 마계의 첫 번째 목표는 아흔아홉 번째 마왕이 될 것이오. 이 세계에서 달아날 수 없다면 그 운명은 이미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요."
"충고는 고맙지만, 네 멍청한 머리가 아는 것을 내가 모를 거라 생각해?"
보렌체가 가만히 이를 갈다가 몸을 돌렸다.
"재회를 기대하지."
* * *
보렌차의 앞으로 거대한 검은 문이 생겨났다. 보렌차는 고개를 돌려 에르카나와 쓰러져 있는 이지혁을 한 번 응시하더니, 이를 드러내 위협하고는 천천히 검은 문 안으로 들어갔다.
아르고라스 역시 보렌차를 따라 문으로 향했다.
"어? 이거 곤란한데……."
알파가 볼을 긁적였다.
"쿨하신 마족님들하고는 다르게 저는 이쪽에 동료들이 있어서 말입니다. 멋지게 '너, 내 동료가 되라'를 외쳐서 영입했는데, 이런 상황에서 혼자 빠져나가면 맞아 죽을 것 같은 예감이 드는군요. 음……."
알파가 최정훈을 보며 말했다.
"여기서 뭐, 더 학살을 하실 계획은 아니시죠? 그럼 제가 동료들을 모아서 빠져나가도 되겠습니까?"
"저 새끼가……."
최정훈이 이를 갈았다.
"그렇지 않으면 싸워야 하는데, 이쪽이고 그쪽이고 별로 싸울 수 있는 상황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됐으니 텔레포트 방해나 그만하지?"
"그건 이미 풀었습니다."
최정훈이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들어 에르카나를 바라보았다.
"한국으로 이동해야겠습니다. 이지혁 씨의 치료가 급합니다."
"치료?"
에르카나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이 최정훈을 바라보았다.
"더 치료할 게 있어?"
"네?"
그 말에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어느새 이지혁의 가슴이 완전하게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어?"
조금 전까지는 그래도 겨우 살을 채워 넣고 있는 느낌이었는데, 언제 저렇게 완벽히 치료가 되었단 말인가.
"흠. 뭐, 좋아. 그래도 저리 차가운 바닥에 달링을 눕혀놓는 건 나도 별로 원하지 않는 일이니까."
우우웅.
에르카나가 게이트를 열었다.
"이 안으로 들어가면 너희 사무실로 가게 될 거야. 나는 좀 더 알아봐야 할 일이 있으니, 달링을 데리고 일단 먼저 한국으로 돌아가."
"…예."
자신이 이곳에서 시간을 지체한다고 해서 상황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최정훈은 사람들을 게이트 안으로 밀어 넣었다. 떨떠름한 얼굴로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는 이들을 지켜보던 최정훈이 에르카나에게 물었다.
"그는 왜 그리 순순히 물러난 건가요?"
"누구? 보렌차?"
"예."
에르카나가 고양이처럼 웃었다.
"궁금한 게 많은 인간이구나. 하지만 멍청해. 물러난 이유야 간단하지. 무서워서야."
"무서워서라……."
최정훈의 머릿속에서 빠르게 전력 계산이 섰다.
"에르카나 씨가 무섭다는 거군요?"
"흠, 역시 멍청해."
"예?"
"내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휘하 마왕들에게 두려움을 줄 정도는 아니야. 그가 두려워한 것은 내가 아니라 달링이지."
"…예?"
최정훈은 에르카나의 말을 좀체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의식도 없이 누워 있는 이지혁이 뭐가 두렵다고 마왕쯤 되는 이가 저리 물러난단 말인가.
"인간은 이해하지 못할 거야. 그러니 일단 우리 달링부터 옮기는 게 어때?"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최정훈이 이지혁을 들쳐 업었다. 그러자 김다솜과 정해민이 그의 좌우로 바짝 붙었다. 이지혁과 함께 게이트로 향하던 최정훈이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완전하게 파괴되어 버린 평양과, 그곳에 내려앉은 새로운 세계.
'완패로군.'
씁쓸함이 밀려왔다.
* * *
세상 모든 것이 발아래에 있다.
마음만 먹으면 모든 것을 파괴할 수도, 모든 것을 그의 지배하에 둘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기뻐할 수 없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뿐이고, 세상을 모두 파괴할 수 있는 강대한 힘을 손에 넣었음에도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손에 넣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죽음.
영원한 안식.
세월이 흐르면서 말라비틀어진 정신은 아직까지 미쳐 버리지 못했음을 한탄하게 만들고, 앞으로도 미칠 수 없음을 저주하게 한다.
세상을 멸망에 빠뜨릴 자.
마계의 오롯한 마왕.
신의 대적자.
그 모든 칭호와 권위를 손에 넣었음에도 그는 조금도 기뻐할 수 없었다.
"이천? 삼천?"
이제는 시간개념마저 모호하다.
이 세계에서 보낸 시간은 역사를 통해서 대충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그뿐. 이 세계가 아닌 마계에서 보낸, 억겁 같은 시간은 이 세계의 역사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대체 얼마나 오랜 세월을 살아온 것일까?
인연을 맺은 인간은 하나같이 개미처럼 죽어 나간다.
잠시 고개를 돌렸다 다시 바라보면 멀쩡히 살아 있던 인간이 어느새 백골이 되어 썩어가고 있다.
무한한 시간.
그리고 무한한 외로움과 무한한 고통.
그의 육체는, 그리고 정신은 불멸의 것이지만, 그의 영혼은 점점 갉아 먹혀가고 있었다.
쌓아 올린 옥탑.
이지혁은 그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눈을 감고…….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것도 이룰 수 없는 비참한 절망에 빠진 채.
"심심해 보이네."
귓가로 들려오는 마왕의 속삭임.
이지혁은 고개를 들어 마왕을 바라보았다.
에르카나.
그녀는 시작부터 끝까지 그와 함께했다. 인간이 아닌 마족이기에 그녀 역시 이지혁과 같은 영겁의 세월을 살아간다.
하지만 그녀는 마족. 그녀는 마왕.
인간인 그가 느끼는 감정을 근본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존재였다.
"이래서야 시체와 별로 다를 것도 없겠는걸? 물론 나는 시체가 된 달링도 사랑하겠지만 말이야."
"……."
"흐음, 생기가 다 빠져나간 것 같네. 이래서 살아 있는 존재는 활력이라는 게 중요한 거지. 달링, 내가 아주 재미있는 것을 알아왔는데… 흥미가 있어?"
귀찮다.
모든 것이 귀찮고 공허하다.
"꺼져, 죽여 버리기 전에."
이곳은 살아 있는 것들의 출입이 금지된 곳.
죽음이 허락된 존재들이 발을 들일 수 없는 곳.
유한성의 찬란함에 눈이 멀어버린 이지혁이 살아 있는 모든 것에게 죽음이라는 공평한 행복을 누리게 만들어주는 그만의 성이었다.
"까칠하긴. 나쁜 남자가 좋긴 하지만, 오래 같이 살기는 힘들다던데?"
에르카나가 깔깔 웃더니 이지혁의 머리 위로 올라와 앉았다.
"자꾸 그렇게 틱틱대지 마. 당신이 정말 흥미를 가질 만한 걸 가져왔다니까? 어쩌면 이 말을 듣고 나서 당신이 너무 기뻐하며 나를 안고 바로 침대로 향할지도 모르지."
"…꺼지라고 했어."
"정말? 후회할 텐데."
이지혁의 손에 마나가 모이기 시작했다.
오랜 인연을 함께해 온 마족이기에 그래도 웬만큼은 사정을 봐주고 있지만, 이 이상 그를 귀찮게 한다면 살려둘 이유가 없었다.
이미 그에게는 인연이라는 말이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하게 된 지 오래였으니까.
이지혁이 마나를 모으는 걸 알아챈 에르카나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찾았어."
"……."
"당신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을."
이지혁의 감겨 있던 눈이 천천히 떠졌다. 공허와 허무로 물들어 있던 그의 눈에 천천히 생기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돌아간다고?"
"응, 달링. 빨리 잘했다고 칭찬해 줘."
"그 말이 거짓말이면 죽어도 죽지 못하게 만들어주지. 말해봐라, 에르카나. 내가 나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이 뭐지?"
"음, 이건 좀 설명이 힘든데……. 쉽게 말해서 지금까지 달링은 마법적인 힘으로 원래 세상에 돌아갈 방법을 찾아왔잖아."
"그래."
"달링 정도 되는 마도사가 이 오랜 세월을 연구해 왔는데도 방법이 찾아지지 않는다는 것은, 반대로 말하면 시작부터가 잘못된 걸 수도 있다는 거지. 마법적인 문제가 아니라, 신성이 개입되어 있다면?"
"…신성?"
"라트렐."
이지혁의 얼굴이 보기 싫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 제멋대로 지껄여 대는 신이라는 년이 그동안 나를 막아서고 있었다는 건가?"
"정답."
에르카나가 기특하다는 듯이 박수를 쳤다.
이지혁이 천천히 옥좌에서 일어났다. 수십 년 동안 그의 육체 위에 쌓여 있던 먼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럼 말해봐. 라트렐을 찢어 죽여 버리면 되는 건가?"
"흐응, 그건 별로 추천하고 싶지 않은 방법이야. 신이라는 존재는 반유체와 다름없어서 물리력으로는 죽일 수 없거든. 그러니 그냥 신의 힘을 이용할 수 있는 매개체를 손에 넣는 쪽을 추천할게."
"매개체?"
"그래. 당신도 들어본 적 있을 거야. 라트렐의 눈."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라트렐의 눈?"
"데라 라트렐에 있는 라트렐의 신물이야. 라트렐의 힘이 모여 있는 종교적 물품이라고 하는데, 내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그 눈을 이용하면 차원 너머의 세상을 볼 수 있다고 해."
"그렇군."
이지혁은 에르카나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차원은 무한의 변수.
단순히 차원에 균열을 내 몸을 옮길 수 없는 까닭은 그 안에서 영원한 미아가 되어버릴 확률도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이지혁이라고 하더라도 마나가 공급되지 않는 세계에서 미아가 된다면 영겁의 세월 동안 홀로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몸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차원 너머의 세상을 확인하고 넘어갈 수 있다면, 정확한 차원을 골라 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 라트렐의 눈이라는 것은 어디에 있지?"
"데라 라트렐에 있다니까. 그런데 달링, 조심해야 해. 라트렐의 눈은 라트렐의 신물이니까 세상 전체가 달링을 막으려고 할 거야. 그리고 라트렐 역시 당신을 막아서겠지."
이지혁이 웃음을 터뜨렸다.
처음에는 조용하게.
하지만 그 웃음은 이내 광소가 되어 그의 성을 쩌렁쩌렁 울리기 시작했다.
"막아? 나를 막는다고?"
이지혁의 발이 떨어졌다. 수십 년 만에.
"막을 수 있다면 막아보라고 해. 그 세계 자체를 무너뜨려 버릴 테니까."
멸망의 좌가 천천히 발을 떼기 시작했다.
* * *
이지혁은 천천히 눈을 떴다.
'천장?'
익숙한 천장이 보인다.
그의 집.
이지혁은 고개를 돌려 주변은 확인했다. 김다솜과 정해민이 의자에 앉아 졸고 있고, 머리맡에서 그의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졌다.
"어디 갔다 나타난 거지?"
"언제나 곁에 있었어요."
"쯧."
이지혁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아펠드리체를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새삼 궁금해진 건데 말이야."
"예."
"라트렐은 왜 나를 막은 거지?"
"……."
"그녀의 입장에서는 내가 그 세계에서 빨리 사라져 주는 것이 차라리 나았을 텐데, 신탁까지 내리면서 내 앞을 막아선 이유가 이해가 가지 않아. 라트렐의 눈을 내가 가지고 갈까 봐 막아섰다기에는 신물 하나 때문에 희생이 너무 크잖아."
"그분의 뜻을 그 누가 짐작할 수 있겠어요."
"라트렐과 가장 가깝다고 할 수 있는 너도 모른다는 건가?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너는 성녀보다 되레 라트렐의 의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존재잖아."
"신은 설명하지 않아요."
"……."
"그저 지켜볼 뿐이죠."
"개소리하고 있군."
이지혁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럼 끝까지 지켜볼 것이지, 막아서긴 왜 막아선 건지 모르겠단 말이지."
아펠드리체는 가볍게 웃었다.
"그래도 당신은 결국 그분의 뜻을 이겨내고 이 세계로 왔잖아요. 그럼 된 거 아니에요?"
"누가 뭐래? 그냥 궁금하다는 거지."
"그렇게 궁금하다면 직접 만나서 물어보는 건 어때요? 그분이라고 해도 당신의 접견을 거부하지는 않을 텐데. 베라프로 가시겠어요?"
"헛소리."
이지혁이 막 뭐라고 쏘아붙이려는 순간, 문이 열리더니 최정훈이 안으로 들어왔다.
더없이 굳은 얼굴의 최정훈을 보며 이지혁이 눈을 찌푸렸다.
* * *
"상황은?"
"이보다 나쁠 수 없습니다."
"…그런 것치고는 멀쩡해 보이는데?"
이지혁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나름 불은 잘 들어오고 있는 것 같으니 전기가 끊긴 것도 아니고, 주변이 조용한 것으로 보아 몬스터들의 웨이브가 벌어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최악이라…….
"이지혁 씨, 이런 말을 드릴 때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이제 겨우 깨어나셨는데 이런 말을 드리는 게 매우 죄송하기도 합니다만… 지금 당장 청와대로 가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흐음……."
이지혁이 볼을 긁었다.
"그래. 뭐,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는 봐야죠. 갈게요."
아펠드리체가 이지혁의 어깨를 지긋이 눌렀다.
"겉이 회복됐다고 속도 회복된 게 아니라는 건 몸으로 느끼고 계시죠? 지금 무리했다가는 영원히 회복할 수 없게 될지도 몰라요."
이지혁이 피식 웃었다.
"그래서 정양을 하면 회복이 되기는 한단 건가?"
"……."
아펠드리체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거짓말을 할 수 없는 그녀로서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얌전히 침대에 누워서 죽는 걸 기다리는 취미는 없네요. 그래서 말인데……."
이지혁이 씹어뱉듯 말했다.
"알파와 박성찬은 어디로 갔지?"
"…파악이 안 되고 있습니다."
"그래요?"
이지혁이 가슴팍을 어루만졌다.
"제대로 한 방 먹었네."
알파가 말한 대로 이지혁이 근접전에 약점을 보이는 것은 사실이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근접이든 원거리든 가진바 능력에 비해서 방어에는 별다른 소질도 없고, 능력도 없었다.
죽지 않았으니까.
무슨 공격을 당해도 어차피 원래대로 회복이 되었기에 굳이 방어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그런 약점이 자연히 생겨났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이지혁의 육체가 완전했다면 박성찬 따위에게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세계로 넘어온 초기에 비하면 마나는 꽤나 많이 모았지만, 반대로 육체는 너무도 나약해졌다.
에테르로 강화된 것과는 다른 문제다.
지각, 육감, 본능.
상대의 공격을 예측하고 피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방어기제가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허약해졌다.
'죽어가고 있군.'
그토록이나 바라던 상황이 다가오고 있건만, 이지혁은 순수하게 기뻐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지금 죽음을 받아들이기에는 이 세계에 닥친 위기가 너무도 컸다.
홀로 조용히 죽음을 맞이하고 싶던 것이지, 지구를 동반자로 데리고 죽을 생각은 아니었다.
"일단 가보죠.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이지혁 씨."
"예?"
"문이 열린다는 건 정확하게 무슨 의미입니까?"
"음……."
이지혁이 볼을 긁으며 대답했다.
"동화되는 거죠."
"동화?"
"차원과 차원 사이에서 접점이 생겨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지구와 마계 사이에 공통으로 이동할 수 있는 포인트가 여러 곳 생겨나게 되는 거죠. 완전히 합쳐지지는 않지만 말이에요."
"…공통 지대를 통해 서로 이동할 수 있게 되는 거군요."
"왜요?"
"이미 그런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최정훈의 굳은 얼굴을 본 이지혁이 낮은 한숨을 쉬었다.
* * *
"쏴! 쏘라고! 쏘란 말이다!"
애리조나 피카초 피크 주립공원은 빽빽하게 들어찬 군부대로 가득했다.
하지만 그 군부대를 구성하고 있는 이들의 얼굴에는 절망과 공포만이 가득했다.
"어, 어디서 저만큼이나 밀려나온 거야! 어디서!"
몬스터들.
세상을 뒤덮을 만큼 끝도 없는 몬스터들이 어슬렁어슬렁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지금까지 몬스터들의 출현을 한두 번 본 것은 아니지만, 지금 그들이 보고 있는 몬스터들은 이전에 겪은 존재와는 분명 달랐다.
첫째로, 과거 이 세계에 등장한 몬스터들은 인간만 보면 광기에 물들어 공격을 해왔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서 보고 있는 몬스터들은 그들을 발견했음에도 그리 급하지 않다는 듯 느긋하게 전진하고 있었다.
둘째로…….
그 수가 전혀 달랐다.
사막의 지평선을 가득 메우고 있는 몬스터들을 보고 있자면, 전투에 대한 의욕 자체가 사라진다. 아무리 공격을 퍼붓는다고 해도 과연 저것들을 막아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또 하나는…….
"이곳의 인간들은 아주 재미있는 무기를 쓰는군."
콰앙! 콰앙!
떨어지는 포탄을 보며 쉰세 번째 마왕 골디베라는 긴 촉수를 내리 뻗었다.
"화약인가? 어떻게 화약으로 이런 위력을 낼 수가 있는 거지? 과연 놀랍군. 이대로 내버려 둔다면 인간들이 언젠가는 마계마저 압도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될 수도 있다기에 헛소리라고 생각했건만……."
"인간의 가능성은 우리의 생각 이상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런 것 같군."
골디베라는 날아드는 포탄을 낚아챘다.
"충격을 받으면 폭발하는 건가? 아무리 봐도 마법적인 흔적은 없는 것 같은데, 이런……."
콰아앙!
촉수에 잡혀 있던 포탄이 터져 나가자 골디베라는 미묘한 얼굴이 되었다.
"…아닌 것 같군."
무슨 조화를 부린 건지 모르겠지만, 확실한 사실은 인간의 기술이 그들을 능가하는 수준이라는 것과…….
"이 정도로는 우리를 막을 수 없을 텐데 말이야."
그 순간, 하늘 위에서 기이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쇳덩어리가 하늘을 날고 있는 것인가?"
골디베라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마법도 아닌데 어떻게 저럴 수가 있는 거지? 인간이란 정말 괴이한 존재로군."
"뭔가 떨어집니다."
"흐응?"
콰아아아아앙! 콰아아앙!
폭격기가 몬스터들의 상공에서 폭탄을 투하하기 시작했다. 지형 자체를 바꿔 버리겠다는 듯이 끝없는 폭탄으로 물량전을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
만약 아래에 있는 것이 인간의 부대였다면 이미 전멸했겠지만, 안타깝게도 포탄을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이 아니었다.
"…따끔하군."
골디베라는 포화를 헤치며 씨익 웃었다.
"재미있군, 재미있어. 인간을 정복한다기에 시시한 싸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 정도면 여흥거리 정도는 되겠어."
"그리고 이 세계에는 열세 번째 마왕과 아흔아홉 번째 마왕도 있습니다. 그들이 우리를 적대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흔아홉 번째야 그렇다 치고, 열세 번째마저 우릴 적대한다는 건가? 흐음, 하기야 오래 함께 살기도 했으니 그 머리에 이상이 생긴다고 해도 별일은 아니지."
골디베라는 반수쯤 핏덩어리가 된 마수들을 보며 감탄했다.
"굉장하군. 이 정도면 아크 메이지가 펼치는 광역 살상 마법에 필적하는 수준이로군. 인간이 이 수준까지 올라올 줄이야. 마법이 없어도 이만한 파괴력을 낼 수 있다는 건가? 인간이란 정말 놀라운 존재군."
"애초에 아흔아홉 번째 마왕도 인간이지 않습니까."
"그건 제외하자고. 놈은 재앙이잖아."
콰앙! 콰아아아앙!
쏟아지는 폭격 속에서 골디베라가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곧 골디베라의 촉수가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쇄애애애액!
하늘 위로 끝도 없이 뻗어 나간 골디베라의 촉수가 상공의 폭격기들을 움켜잡았다.
콰드득!
반으로 갈라진 폭격기들이 하늘에서 아래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콰아앙!
"가진바 위력에 비해 방어력은 형편없는 수준이로군. 이래서야 재미를 느낄 틈이나 있을까?"
골디베라가 고개를 돌려 그들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육군을 보며 혀를 내밀었다.
"시험해 봐야겠군."
* * *
"맙소사."
불타오르는 도시를 보며 독일의 수상 게오르크 슬리크는 절망에 빠진 얼굴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유럽 최강을 자부하던 그들의 군대와 능력자들은 갑자기 변해 버린 뮌헨에서 나타난 몬스터들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지금까지 그들이 상대하던 몬스터들은 그저 나약해 빠진 잡졸뿐이었다는 것을 알려주듯 강철과 같은 피갑과 강력한 발톱으로 무장한 몬스터들이 시를 제멋대로 헤집고 있었다.
"대피! 대피시켜야 합니다!"
'대피?'
비서관의 말에 게오르크는 웃고 말았다.
어디로?
어디로 대피해야 한단 말인가.
저 몬스터들을 막지 못한다면 세상에 그들이 살아갈 수 있는 곳은 단 한 곳도 남지 않게 될 것이다.
유럽이 점령될 것이고, 아프리카와 아시아가 저들의 손에 떨어질 것이다.
바다라도 건너야 할까?
그럼 저 몬스터들이 따라오지 않을까?
이미 미국에도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 인적이 없는 무인도로 국민을 옮기기라도 하란 말인가?
"전 부대를 집결시켜."
"각하!"
"연합에 도움을 요청하고, 여기서 막아낸다!"
"하지만 그래서는 피해가……."
"도망친다고 해서 피해를 줄일 수 있는 상황인가? 지금 우리는 독일의 생존이 아닌, 유럽, 더 나아가 세계의 생존을 모색해야 하네!"
게오르크의 단호한 목소리에 비서관이 얼굴을 굳히며 부동자세로 대답했다.
"명을 따르겠습니다."
"우리는 유럽의 맹주다. 그것을 자처하는 우리가 적 앞에서 꽁무니를 뺄 수는 없는 노릇이지. 막아낸다."
게오르크가 입을 꾹 다물었다.
'이런 식으로 원죄를 갚게 될 줄은 몰랐는데…….'
독일의 국민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마음속 부채를 이런 식으로 청산하게 될 줄은 몰랐다. 의도한 바도 아니고,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일도 아니지만 말이다.
"썩을 마족 놈들! 인간을 우습게 보지 마라! 게르만의 혼을 보여주지!"
* * *
"도, 도망쳐야 해."
쓰촨성 청두는 이미 잿더미로 화해 있었다. 유서 깊은 도시는 그 흔적마저 남아 있지 않았다.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크게 파여 버린 크레이터와 잿빛으로 바래져 반 이상 부서져 버린 건물들뿐이었다.
그 건물들이 지금 불타오르고 있었다.
"흐응."
예순두 번째 마왕, 아락시스는 그 광경을 보며 환희에 몸을 떨었다.
"나는 말이야, 이 문명이라는 것이 파괴되는 순간이 무척이나 재미있다고. 목숨을 빼앗으면 하나의 흔적을 사라지게 하는 것이지만, 문명이라는 것은 수천수만 년 동안 이어져 온 인간의 흔적을 모조리 없애 버리는 것이니까."
낄낄대며 웃는 아락시스의 눈에 대규모의 부대들이 근접하는 것이 보였다.
"흥."
코웃음을 친 아락시스가 자신에게 달려들고 있는 인간 능력자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하지만 직접 목숨을 뺏는 것도 그리 싫어하지는 않는단 말이지."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은 아락시스가 천천히 인간들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굳이 찾아갈 생각은 없지만, 찾아오신다면 맞아드려야지."
아락시스의 손에서 긴 손톱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검붉게 물들어 있는 손톱은 마치 인간의 혼을 빨아들일 것처럼 요사롭게 빛나고 있었다.
"비명을 지르라고, 즐거운 비명을 말이야."
핏발 선 눈으로 자신에게 달려드는 능력자들을 보며 아락시스는 환희에 떨었다. 농도 깊은 증오와 죽음에 이른 인간이 내뿜는 고통은 그들에게 마약과도 같았다.
"적당히 하라고 하긴 했지만……."
느긋하고 천천히 즐기고 싶지만, 이렇게 굳이 찾아오는 이들까지 살려 보낼 필요는 없지 않은가.
아락시스는 그를 위해 마련된 진수성찬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각별하다면 각별한 만찬이었다.
세계 곳곳에 열려 버린 문으로 마왕과 마족들, 그리고 마수들이 넘어오고 있었다.
절망의 시간이 시작된 것이다.
* * *
우우웅.
청와대로 게이트가 열리고, 이지혁이 그 안에서 나왔다. 이어 최정훈을 위시로 한 아펠드리체와 정해민, 김다솜이 뒤따라 모습을 드러냈다.
"뭔가 한산한 것 같은데?"
"국가 비상사태니까요."
"그럼 청와대에 사람이 없는 거예요?"
"아마 지금은 재난 센터에 가 계실 겁니다."
"어? 그럴 리가 없는데?"
"…예?"
"원래 대통령은 무슨 일이 있어도 관저에 있는 거 아니에요? 시간도 점심인데, 밥도 먹어야죠?"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지금 상황이 어떤 상황인데……."
"머리하러 가셨나?"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하자 최정훈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최정훈은 이지혁을 무시하고 앞으로 걸어갔다. 얼마나 자주 들락거렸는지 이제는 여기가 제2의 직장인 것 같았다.
중간중간 청와대를 지키고 있는 경호원들도 전혀 그들을 제지하려 하지 않았다.
되레 그들에게 달려와 소식을 전해준다.
"지금 대통령님과 각료분들께서 오고 계십니다. 대기실에서 조금 기다려 주시길 바랍니다. 일정에 착오가 있던 점 다시 한 번 사과드립니다."
"괜찮습니다."
최정훈이 대답을 했지만, 그들은 최정훈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가만히 이지혁의 대답을 기다렸다.
이지혁은 최정훈을 한 번 돌아보고는 입을 열었다.
"아뇨, 괜찮아요. 그보다 콜라나 한 잔 주세요."
"준비해 뒀습니다. 그럼."
고개를 숙이며 경호원이 물러나자 이지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이것이 권력의 힘."
"크윽."
최정훈이 쓰라린 패배감을 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현 시점에서, 아니, 현 시점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와 이지혁이 같은 대접을 받을 수는 없는 것이다. 중요도가 다르니까.
그런데 꼭 그런 부분을 이렇게 콕 집어서 이야기해야 하냐고!
"그렇게 장난을 치실 만큼 좋은 상황이 아닙니다."
"누가 뭐래요?"
이지혁이 휘파람을 불었다.
"끄응."
최정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앞장서서 대기실로 향했다. 간식거리와 음료가 세팅되어 있는 대기실에 들어서자 이지혁이 재미있다는 듯이 말했다.
"이런 걸 챙길 정신이 있는 걸 보니, 한국은 아직 괜찮은 모양이네요."
"현재 밝혀진 스팟 중에서 북한 쪽이 가장 조용합니다."
"흐음……."
이지혁이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그가 기절하고 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이미 이야기를 들은 후였다. 스팟을 통해 마왕과 마물들이 넘어온다면, 보렌차가 숨을 죽이고 있으니 다른 마물들도 감히 경거망동하지 못하는 것이리라.
벌컥.
이지혁이 음식에 손을 대기도 전에 대통령 윤영민이 다급한 얼굴로 뛰어 들어왔다.
"오셨습니까, 이지혁 씨! 깨어나셔서 다행입니다."
"못난 꼴을 보였네요. 죄송하게 됐어요."
"천만의 말씀이십니다. 드리고 싶은, 그리고 듣고 싶은 말이 많지만, 대화를 나누기에 적당한 때는 아니군요. 현재 상황에 대한 브리핑부터 들으시죠. 이쪽으로."
윤영민이 깔끔하게 상황을 정리하고 입을 열자 이지혁이 조금은 놀랐다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이 아저씨… 이런 캐릭터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가끔 있기 마련이다.
평소에는 얼빠진 듯 보이다가 정말 심각한 상황이 되면 각성한 듯이 움직이는 사람이.
윤영민이 그런 타입이라는 것이 의외지만, 국가와 세계의 입장에서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이지혁은 두말없이 윤영민을 따라 회의실로 들어섰다.
회의실 안으로 들어온 이지혁이 이미 착석해 있는 송정수 비롯 여러 장관들과 인사를 나눌 틈도 없이 불이 꺼지더니, 전면 비전에 화면이 켜졌다.
"현재 밝혀진 바대로라면 마계와의 문이 열린 곳은 모두 여섯 곳입니다. 북한, 중국, 인도, 독일, 미국, 그리고… 콩고입니다."
송정수가 심각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물론 이것은 현재 밝혀진 사항일 뿐, 아프리카 같은 경우에는 이미 제대로 국가의 역할을 하고 있는 곳이 거의 없습니다. 타국과 연락이 되는 곳도 거의 없습니다. 그러니 실제로 문이 열린 곳은 이보다 많을 수도 있습니다."
이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섯이든, 여섯이 아니든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여섯만으로도 이 세계를 파괴하기에는 충분하다. 단 하나의 문만 열리더라도 세계가 감당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아프리카 쪽으로는 핵무기를 직접 투하해서 무력화시키고 있습니다만, 다른 쪽은 인구가 많은 지역이라 대량 살상 무기를 투하하기는 힘든 실정입니다."
"흐음……."
이지혁이 볼을 긁고는 말했다.
"크리스토퍼 씨는 뭐래요?"
"안 그래도 지금 연결 중입니다."
곧 비전의 한쪽에 크리스토퍼의 얼굴이 나타났다.
지금까지 여러 사태를 함께 뛰어넘어 오다 보니 나름 얼굴이 익은 크리스토퍼다.
하지만 오늘처럼 표정이 좋지 않은 크리스토퍼를 보는 것은 결단코 처음이었다. 미국의 대통령이 에르카나에게 제압당했을 때도 크리스토퍼가 저런 얼굴을 하지는 않았다.
"살 빠지셨네요."
- …삼 일 후엔 좀비가 될지도 모릅니다, 미스터 리.
"저런."
이지혁이 혀를 찼다.
- 일단 미국으로 오셔서 이 지랄 맞은 놈들부터 어떻게 처리를 좀 해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좀비 사태 때도 심각하기는 했습니다만, 이번에는 차원이 다릅니다. 미국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본토가 직접적 타격을 받은 적이 없는 국가입니다. 적이 국가 내부에 침투했을 때 이토록이나 무력한 국가였는지, 저도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그래서 경험이 중요한 거죠. 좋은 경험 한다고 생각하세요."
- 좋은 경험을 써먹을 일이 있다면 좋을 텐데, 써먹기도 전에 나라 망하게 생겼습니다.
크리스토퍼는 충분히 우는소리를 했는지 본론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 이지혁 씨,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네에."
- 현재 여섯 개의 스팟이 발견되었고, 그곳에서 마수와 마왕, 그리고 마족이 출현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알아요."
- 상황이 이 이상으로 심각해질 가능성이 있습니까? 마왕들은 얼마나 더 넘어오는 겁니까?
이지혁이 으음, 침음성을 내더니 대답했다.
"전원이 다 넘어오지는 않을 거예요. 넘어올 수도 없구요."
- 확실합니까?
"전쟁을 한다고 해서 전 병력을 적국에 투입하지는 않잖아요. 게다가 마왕은 단순히 야전 사령관이 아니라… 이 세계로 말하자면 수상이나 대통령 같은 존재이기도 해서 영토를 모두 비우고 넘어올 수는 없어요. 많아봐야 반이나 넘어오겠죠."
- 그 반이라는 건 정확하게 어느 정도의 전력입니까?
"저번에 보셨던 마왕들 기억나시죠?"
- 그걸 잊을 수가 있습니까?
"대부분이 걔들보다 딱 두 배 정도는 강할 거예요."
- 멸망이군요.
크리스토퍼는 무감각한 목소리로 평을 내렸다.
엄살을 피우는 것도 아니고, 너스레를 떠는 것도 아니었다. 이지혁이 말한 것을 바탕으로 계산을 한다면, 인류는 그들을 막아낼 힘이 없다고 봐야 한다.
"일반적으로는 상대할 수 없다고 봐야죠."
- 문을 닫을 수는 있습니까?
"차원의 뒤틀림을 해결할 수준의 물리력을 가하는 게 쉬울지 모르겠어요. 이건 사실 저도 처음 겪는 일이라……. 정확하게 핵폭탄으로 타격을 하게 되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는데, 그 주변은 마왕들이 지키고 있을 테니, 그것도 쉽지 않겠죠.
- 그렇군요.
크리스토퍼 역시 평양의 게이트에 나타난 마왕이 ICBM을 무력화시키는 것을 지켜보았다.
- 그렇다면 이지혁 씨, 미국의 입장을 대변해서 한 가지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네, 말씀하세요."
- 희망은 있는 겁니까?
이지혁은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입을 닫았다.
주머니를 뒤적거린 이지혁이 담배를 빼 물자 최정훈이 불을 붙여주었다.
깊숙이 담배 연기를 빨아들였다 뱉은 이지혁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희망이라는 게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네요. 저들을 물리칠 가능성이 있는 거냐고 묻는 거라면, 사실 솔직하게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밖에 말씀드릴 수가 없어요."
- 그렇군요.
"하지만 가능성이 없다고 해서 얌전히 목을 빼주고 마음대로 하라고 할 생각은 아니잖아요?"
- 물론입니다. 발악밖에 안 된다면, 그 발악이라도 제대로 하는 게 인류에 대한 예의겠죠.
"그럼 뭐, 희망이니 가능성이니 이런 말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한 번 설쳐 보는 거죠."
- 듣고 싶던 말입니다. 현재 저희가 가지고 있는 정보는 한국 측에 모두 넘기겠습니다. 국제적 공조가 필요합니다.
"협조할게요."
- 예. 그럼 대응 체계가 잡히는 대로 다시 말씀 나누도록 하죠.
크리스토퍼가 화면에서 사라지자 이지혁은 담배를 비벼 끄고는 새 담배를 입에 물었다.
"뭘 그리 연이어서 피워 대?"
"음……."
잔소리가 들려왔지만, 지금은 담배라도 피우지 않고는 이 답답한 속을 풀어낼 수가 없었다.
'우려하던 일이 정말 터졌군.'
입버릇처럼 문이 열리면 인류의 멸망이라고 말해왔다. 그건 절대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막겠다는 의지의 표명과도 같았다. 그런데 결국 그토록 막고 싶어 했던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북한에 대한 정보는요?"
"마물들이 평양을 가득 메우고 있다는 것은 확인되었지만, 이상하게도 움직이지 않고 있습니다."
국방부 장관의 말에 최정훈이 정보를 보탰다.
"그리고 타국에 나타난 몬스터와 마왕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스팟 주변은 초토화가 되었지만, 그 이후로는 큰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럴 거예요."
이지혁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뭔가를 꾸미는 겁니까?"
"아뇨. 그거보다는……."
이지혁은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를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그들은 영생자와 같으니까요."
"…예?"
"뭔가를 꾸미는 것도, 다른 일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에요. 움직이고 있는 거죠. 그런데 그게 느릴 뿐이에요."
"느리다구요?"
"백 년을 사는 인간과 수십만 년을 살아가는 마족의 시간개념이 같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저들의 시간개념대로라면 침략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니까. 움직이는 데 하루가 걸릴지, 수백 년이 걸릴지 모르는 거예요. 우리는 상륙작전을 벌이면 점심 먹고 움직일지, 아니면 바로 움직일지로 몇 시간이 갈리지만, 저들은 몇 백 년이 갈리는 거죠."
"이해가 잘……."
이지혁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영원한 세월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문이 열리고부터 지금까지의 시간은 그야말로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대로 머무른 채 몇 백 년 동안 움직이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 아닙니까?"
최정훈만이 이지혁이 한 말을 이해한 듯했다.
"그랬으면 좋겠지만, 베라프에 마왕이 강림했을 때나 이 지구에 마왕이 강림했을 때를 감안한다면 그렇게까지 시간을 끌어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할 거예요. 저들도 타 차원에서는 그리 여유롭게 쉬려고 하지 않더라구요."
"으음……."
최정훈이 도무지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게다가 저쪽은 마음만 먹으면 대륙을 통째로 날려 버릴 수 있다구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안고 사실 수 있어요?"
"무리죠."
최정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물었다.
"그럼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이지혁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어쩌긴 뭘 어째요. 이제 싸워야죠."
그것도 제대로.
* * *
대책 회의는 별 소득 없이 끝났다.
"흐음."
청와대를 나온 이지혁은 게이트로 다른 사람들을 보내주고 자신은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에 다들 두말없이 이지혁을 보내주었다. 그들 역시 지금 이지혁이 받는 압박감이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 이해한 것이다.
"별 이상은 없네."
이지혁은 눈에 들어오는 풍경들을 보며 솔직한 감상을 내놓았다.
멸망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음에도 세상은 딱히 변한 것이 없었다. 여전히 길에는 네온사인이 가득하고, 길은 차들로 가득했다. 지나가는 이들도 세상의 멸망보다는 당장 직장에서 치이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듯 바삐 걸어가고 있었다.
평범한 일상.
평범한 세상.
이러한 일상에 균열이 가 있다.
세상은 점점 파괴되어 갈 것이다.
수건 끝이 물에 빠진 것처럼.
지금 당장은 빠진 부분만 젖어 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수건 전체가 물을 빨아들이게 될 것이다.
조금씩, 조금씩.
이지혁은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세상의 모습을 그 두 눈에 새겨 넣었다.
'나 때문인가?'
이지혁은 자신이 지구로 돌아온 것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라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만약 자신이 없었더라면 마계가 이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을까?
답이 없는 문제라는 것은 알고 있다.
이지혁이 아니더라도 차원은 점점 균열이 커지고, 결국에는 마계가 이 세상을 지배했을 수도 있다. 자신이 만약 조금만 돌아오는 것이 늦었더라면 이 지구가 이미 마계의 지배하에 있는 상황이 벌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럼 돌아오자마자 또 미친 듯이 싸워야 했겠지.
또 한편으로는 이지혁이 돌아오지 않았더라면 이 세계는 이대로 평화를 유지했을지도 모른다.
'알 수 없는 일이지.'
그럼에도 마음 한 켠이 무거운 것은 어떤 식으로든 지구가 위기에 처한 것이 자신과 관련이 있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전처럼 그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확신이 없다.
이지혁이 지금과 달리 모든 것을 갖추었을 때도 마계 전체와 맞서 싸울 수는 없었다.
그런데 당시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해진 지금에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멸망이라…….'
이지혁은 가만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쉽게 입에 올리던 말이지만, 그게 정말 현실로 다가올 수 있다는 생각을 하자 절로 심각해지는 기분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네?"
어깨 위로 느껴지는 감촉에 이지혁이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 어깨 위로 올라가지 말라고 했잖아."
"그래?"
"머리에도 올라가지 마!"
"치, 재미없어."
에르카나가 툴툴대더니 이지혁을 보며 싱긋 웃었다.
"왜 그렇게 울상을 하고 있어? 달링답지 않게."
"답지 않게라……."
그렇게 느낄 만도 하지.
이전의 이지혁은 세상이라는 개념에는 딱히 관심이 없었으니까.
에르카나가 보기에는 궁극의 이기주의자처럼 보였을 것이다. 자신의 일이 아니면 관심조차 주지 않는, 그런 타입 말이다.
"세계가 달라졌잖아."
"그래?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이 세계나 베라프나 별다를 게 없는 것 같은데? 좀 신기하기는 했지만, '인간은 그냥 인간이구나' 하는 감상밖에는 남지 않았어."
"그럴지도."
어쩌면 베라프가 이지혁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 아니라 이지혁이 베라프를 배척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피부색이 다르다고 마귀 취급을 받고 끝도 없이 배신당했지만, 마법을 익힌 이후에는 원한다면 피부색을 바꾸고 노화를 꾸며 그들에 한데 섞여 살아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지혁은 그 방법을 선택하지 않았다.
나는 이 세계의 사람이 아니라는 마음으로 그들을 거부한 것은 이지혁이었던 것이다.
"지금에 와서는 쓸데없는 이야기지만 말이야."
"응?"
"아무것도 아니야."
이지혁은 고개를 휘휘 저었다.
"마기가 넘치고 있어. 느끼고 있지?"
"그래."
이지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이 변해가고 있었다. 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말이다.
그리고 곧 눈으로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놈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이 세계는 순식간에 사라지게 될 거야. 달링, 이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어."
"……."
"달아나든가, 싸우든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해."
이지혁은 가만히 에르카나를 바라보았다.
"너는 어쩔 셈이지?"
"나?"
이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계에서 네가 내 편이 되었던 것과 이건 다르잖아. 그건 내부 권력 투쟁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건 외부와 싸우는 문제야. 네가 나를 돕는다면 그들 역시 너를 용서하려 하지 않을 텐데?"
에르카나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기 시작했다.
"이제 와 그게 무슨 이야기야? 그럼 내가 그런 걸 계산하고 지금껏 달링을 도왔다고 생각하는 거야? 달링, 나는 마족이야. 그리고 욕망의 마왕이기도 하지.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행할 뿐이야."
이지혁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그러면 네게 남은 건 소멸뿐일 텐데?"
"상관없어."
"…보통은 그런 걸 상관없다고 말하지 않지."
"달링은 모르는구나."
"뭘?"
에르카나가 고혹적으로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열세 번째 마왕이야. 그리고 욕망의 왕이지. 하지만 의외로 순정파라고. 달링이 없으면 나도 사는 의미가 없어. 달링 없이 다시 지루하기 짝이 없는 삶을 이어가는 것도 내게는 별 메리트가 없거든."
"그거, 뭔가 굉장한 말 같은데 그걸 그리 담담하게 말하면 안 되는 것 아닌가?"
"응? 뭐가 잘못됐나?"
이지혁은 한숨을 쉬었다.
마족들은 분위기도 모르고, 무드도 모른다니까.
그런 점이 좋기는 하지만.
"그래서 결국에는 싸우기로 정한 거야? 베라프로 도망가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 않았어? 저번에 달링이 한 말이 뭔 소린지는 이해했지만, 그건 변명이라는 것 알지?"
"알아."
"달링이 원하는 몇몇이라면 얼마든지 옮겨 갈 수 있어."
"흐음."
이지혁은 볼을 긁었다.
인류 멸망의 위기에 가족을 포함해 지인과 함께 다른 세상으로 도주하는 영웅이라…….
"그런 건 어디서도 못 들어봤는데 말이야."
"혼잣말하지 말고 대화를 해."
이지혁이 키득키득 웃고는 대답했다.
"그것도 하나의 방법일지는 모르지. 그런데 그게 딱히 좋은 건지는 모르겠다. 내가 이미 겪어봐서 아는데, 사회를 아는 이들이 거기에 적응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야. 역병이 도니 아마존 밀림에 가서 가죽 한 장 걸치고 생존하라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으니까."
"달링이 있으면 되잖아. 외부적 위협에서는 안전해질 텐데."
"인간은 문명 없이는 살 수 없어."
아무리 마법으로 편리함을 추구한다고 해도 그것만으로는 인간을 채울 수 없었다.
"특히나 예원이 같은 애는 그 동네에서 살라고 하면 반쯤 돌아버릴 거야."
"그래도 살아 있는 게 낫지 않아?"
이지혁은 웃고 말았다.
"욕구가 충족되지 않는 인간이 그저 살기만 하면 어떻게 되는지, 너는 이미 충분히 보지 않았나?"
"…흐응."
에르카나는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이지혁에게 불멸성이 없었다면, 아마 수천 번은 더 미쳤을 것이다. 에르카나의 입장에서는 이지혁이 왜 그렇게 고통스러워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제야 조금 감이 잡히는 모양이다.
'인간이란 불편한 존재군.'
홀로 살아갈 수 있는 마족과 다르게 인간은 자신이 아닌 다른 인간을 필요로 하고, 그와 동시에 문명과 문화를 원하는 존재들이다. 그 많은 것이 충족되어야 비로소 하나의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남은 결론은… 이제 싸우는 수밖에 없는 거네?"
이지혁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렇지."
"자신 있어?"
"자신이야 없지. 자신은 없는데……."
이지혁이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 마계가 쳐들어왔다고 해서 꽁무니를 빼고 도망가는 것도 내 스타일은 아니잖아."
"그렇지. 우리 달링은 무식하고 용감하기로는 마계제일이니까."
"그거, 욕 같은데?"
에르카나가 빙긋 웃었다.
"게다가 상황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잖아."
"그렇지."
이지혁이 씨익 웃었다.
"원래 화와 복은 같이 오는 법이지. 단순히 싸우기만 해도 되는 상황이라면 꽤나 편안해진 것도 사실이니까."
"몸 생각도 좀 해, 달링."
"내가 마족이 되면 너는 좋은 것 아냐?"
"마족이 된 달링에게는 관심이 없어. 나는 지금의 인격을 가진 달링이 좋은 거지, 달링이란 이름을 덮어쓴 마족에게는 관심이 없거든."
"흐음."
이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 역시 맞는 말이었다.
"그런데 요즘 마왕들은 부지런해진 모양이네?"
"달링이 저지른 일이 그만큼 많으니까. 원한을 가진 마왕이 세트로 있다고 해도 이상한 건 아니잖아?"
"그렇긴 하지."
이지혁은 한숨을 쉬었다.
이래서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지혁이 고개를 돌리고 입을 열었다.
"그냥 나오지?"
"큭큭큭."
우우웅!
순간, 공간이 일그러지더니, 마치 거북이와 같은 형태를 띤 괴수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야, 이거… 도시 한복판에서 저런 거 보니까 엄청 이질적인데?'
"찾았다. 아흔아홉 번째 마왕!"
"말하는 거북이라……. 동물원에 넣어두면 떼돈 벌겠군."
"나를 잊었다고 하지는 않겠지?"
"물론. 그 특이하고 기묘한 모습을 잊을 수는 없지. 그러니까 네 이름이… 어… 이름이……."
이지혁이 뭔가 말을 몇 번이나 하려다가 다물었다.
"아, 안 되겠다. 아무리 봐도 이건 저작권에 걸릴 것 같아."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군. 나는 바라스가다! 일흔 한 번째 마왕이지! 네놈을 다시 만나는 순간을 얼마나 고대했는지 모를 것이다."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뭘 했니?"
"잊은 거냐!"
바라스가는 불규칙적이고 날카로운 이가 마구 돋아나 있는 입을 쩌억 벌리더니 소리쳤다.
"네놈에게 받은 굴욕! 그리고 치욕! 그걸 잊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큭큭큭, 이제야 다시 만나게 되었군. 그것도 과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약해진 너와 말이야."
"흐음……."
이지혁이 볼을 긁었다.
꽤나 쌓아두었던 마나가 부상을 입고 몸을 회복하는 와중에 반 이상 날아가 버렸다. 아무래도 치료 마법은 흑마력과는 극상성이었으니까.
지금 상태로는 과거에 넘어왔던 마왕들도 상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완전한 상태로 넘어온 마왕들을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나는 안 보이는 모양이지?"
바라스가가 에르카나를 보며 이죽였다.
"설마 저를 막으려 드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열세 번째 마왕이시여."
"그러면 안 돼?"
"그분이 과연 당신을 용서하실까요? 수천 갈래로 영혼이 찢겨 영겁의 시간 동안 고통에 빠질 생각이십니까?"
"모르는 모양인데……."
에르카나가 이를 드러냈다.
"달링이 없으면 살아 있어도 내 삶은 그것과 별로 다르지 않아."
"…하지 마. 창피하다고!"
이지혁이 에르카나를 만류하고는 게이트를 열었다.
"자, 그럼 위대하신 마왕이시여."
비웃음.
"원한을 풀고 싶으시다면 이 안으로 따라오시길. 나는 이곳이 파괴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니까."
이지혁이 에르카나의 손을 잡고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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