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79화 (79/118)
  • [■] 아니! 이건 좀 너무하는 거 아닙니까? [■]

    ─────

    이지혁이 고함 소리에 시선이 앞쪽으로 모였다.

    "…빌어먹을, 끝도 없군."

    이지혁이 한 번 싹 쓸어버렸음에도 금수산 태양 궁전 안쪽에서는 몬스터가 끊임없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게다가 능력자들이 친 방어 라인에 가까이 근접해 있는 몬스터들은 이지혁의 마법에 피해를 입지 않았기에 능력자들이 느끼는 압박은 체감상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우우우웅!

    이지혁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 눈앞에 나와 있는 몬스터들을 대부분 쓸어버렸음에도 여전히 영창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흡!"

    이지혁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마나가 허공으로 솟구치더니, NDF들을 향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아, 씨!"

    서아영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검은 마력을 보며 욕지기를 뱉어냈다. 상황이 상황이니 거부할 수는 없지만, 저 마력을 받아들이면서 겪어야 할 고통을 생각하니 쌍소리가 절로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스으으으.

    마나가 몸으로 흡수되는 소리를 들으면서 서아영은 이를 악물었다.

    "끄윽."

    전신의 뼈가 으스러지고 근육이 터져 나가는 느낌에 서아영이 자신도 모르게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마치 몸 안에 불이 붙은 것 같은 고통이다.

    "아으! 진짜!"

    주변의 NDF들도 하나같이 고통에 겨워하는 모습들이었다.

    "뭐야, 이거?"

    갑자기 이지혁이 쏘아낸 마기가 아군을 덮치더니, 마기를 맞은 이들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에 다른 능력자들도 혼란에 빠졌다.

    "배, 배신인가?"

    최정훈이 쓴웃음을 지었다.

    "배신 아닙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공백을 메워주세요."

    최정훈이 사람들을 진정시키자 NDF들이 하나둘 일어나기 시작했다.

    "내가 언젠가는 저 인간 꼭 죽일 거야."

    입가에 흐른 핏줄기를 닦아낸 서아영이 이를 으드득 갈더니, 양손에 집채만 한 화염구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시커먼 검은빛이 도는 커다란 화염구를 본 이들이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났다.

    "세상에!"

    "저게…… 화염마녀!"

    서아영이 만들어낸 화염구가 얼마나 거대한 위력을 발휘할지 충분히 짐작한 이들은 다들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지혁이야 애초에 이레귤러. 자국의 정보에서도 능력자라고 분류가 되지 않는 규격 외의 인간이었다. 그렇기에 무슨 짓을 벌이더라도 놀라움이 적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서아영은 아니었다.

    지금 이곳에는 과거 서아영과 같은 수준이라 논해지던 이들이 수도 없이 있는 것이다. 아무리 서아영이 동아시아에서는 나름 이름을 날린다고는 하나 세계적으로 볼 때, 톱을 논할 이는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서아영이 보여주는 능력은 그들의 상상을 한참이나 벗어나고 있었다.

    "이 정도였나?"

    이지혁이 나타난 이후로 한국 NDF가 전체적으로 능력치 상승을 했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그 위력이 이 정도에 달할 거라고는 생각해 보지 못했다.

    "차아아아압!"

    입구에서 튀어나오는 몬스터들을 향해 서아영이 불덩어리를 집어 던졌다.

    콰르르르릉!

    화염이 소용돌이치며 몬스터들을 집어삼켰다.

    "거참, 진짜 화려하기도 하지."

    스핏 파이어 윤혁규가 이죽이면서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의 양손에 붉은빛이 어리더니, 이내 앞쪽으로 내밀어진다.

    콰아아아아아앙!

    불꽃의 대포가 몬스터들을 화려하게 구워버렸다.

    "쩝, 같은 화염계라서 영 이거 후달린단 말이야."

    그 자체로는 분명 놀라운 위력이지만, 방금 서아영이 보여준 것에 비한다면 분명 손색이 있었다. 이쪽은 나름 최선을 다한 건데, 서아영은 방금 보여준 것 같은 불덩어리를 계속 만들어내며 집어 던지고 있었다.

    "저 여자도 확실히 괴물인데 말이야."

    플레임 위치의 명성은 결코 과장이 아니라는 듯이 지금의 서아영은 정말 마녀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데도 괴물같이 안 느껴지는 걸 보면 참."

    적당히 남들 보던 거나 보고 살았으면 지금 그 역시도 감탄할 수 있었을 텐데, 이지혁이랑 같이 지내다 보니 웬만한 일에는 놀라지 않는 담력을 키우게 되어버린 윤혁규였다.

    "뭘 중얼거리고 있어요! 빨리 일 안 하고!"

    김다현이 그를 스쳐 지나가면서 쏘아붙이자 윤혁규의 얼굴이 완전히 일그러졌다.

    "아오, 저 모기 같은 양반이 진짜!"

    "일하라고, 인마!"

    박성찬이 그를 앞서 나가며 뒤통수를 툭, 치고 지나갔다.

    "아! 그러다가 힘 조절 잘못하면 사람 죽는다고 몇 번을 말해요!"

    박성찬이 씨익 웃으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으라차아아아!"

    정면에서 달려드는 거대한 코끼리 같은 괴물의 상아를 양손으로 틀어쥔 박성찬이 마물을 그대로 들어 올려 빙빙 돌리더니, 금수산 태양 궁전의 입구를 향해 집어 던졌다.

    쿠웅!

    거대한 괴물에 깔린 마수들이 비명을 질러 댔다.

    "나이스!"

    루드라의 뇌전이 그곳으로 내려앉았다.

    "타는 냄새 좋고!"

    박성찬이 입가를 실룩이며 앞으로 달렸다.

    * * *

    "…뭐지, 저것들은?"

    블라드미르 자이체프는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에 눈을 꿈뻑거렸다.

    조금 전까지 침묵하고 있던 NDF들이 이지혁의 등장과 동시에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날뛰고 있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몬스터를 강아지 다루듯이 집어 던져 버리는 괴력이나, 집채만 한 화염을 장난감처럼 날려 대는 여자, 거기에 몬스터들 사이를 제집처럼 이리저리 누비고 있는 미남.

    그 외에도 NDF에 소속된 이들은 저마다 눈앞에 보이는 저 몬스터들이 무슨 고블린이라도 되는 것처럼 쉽게 상대하고 있었다.

    '약한가?'

    그럴 리가.

    그의 부대원들은 여전히 달려드는 몬스터들을 감당하지 못해서 쩔쩔매고 있었다. 중간중간에 최정훈이 지시를 내려 NDF들을 이쪽으로 지원 보내지 않았다면 이미 방어선이 뚫려서 몰살을 당했을 것이다.

    "용이라도 뜯어먹었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동양의 소국이라고 할 수 있는 대한민국에서 저만한 능력자들이 단체로 등장한다는 것은 뭔가 이상했다.

    대부분의 능력자 강국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곳은 경제력과 인구가 동시에 뒷받침되는 곳이었다.

    충분한 능력자 수를 갖추고, 충분한 지원을 해줄 수 있는 곳일수록 양질의 능력자를 얻을 수 있는 법이다.

    하지만 한국은 인구로 따지자면 소국이라 불러야 마땅하고, 경제적인 부분을 보더라도 이곳에 있는 그 어떤 국가에도 감히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인구는 한국의 두 배이고, 경제력도 배가 넘는 일본의 능력자들도 지금 쩔쩔매고 있는데, 어찌 한국이…….

    "무슨 마법을 부린 건지 모르겠군."

    블라드미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렇다면 저 이지혁이 능력자들의 능력을 높일 수 있다는, 그 근거 없던 소문이 사실이라고 봐야 하는데… 그것 역시 믿을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또 뭘 하는 거지?"

    이지혁이 양손을 휘젓기 시작하자, 그들의 눈이 이지혁에게로 몰렸다.

    "자, 꼭꼭 숨어 계시면 재미가 없잖아?"

    이지혁이 낄낄대며 영창을 시작했다.

    그의 손에서 흘러나온 검은 마나가 하늘로 타고 오르더니, 금수산 태양 궁전의 상공에 거대한 검은 먹구름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아니, 그건 먹구름과는 달랐다.

    타오르는 듯, 뇌전이 치는 듯 이글거리며 시커먼 스파크를 튕겨 대며 구름은 서서히 응축했다.

    "…저건 또 뭐야?"

    이지혁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마나가 일제히 몰려들며 구름은 천천히 그 덩치를 불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블라디미르는 눈을 돌려 버렸다.

    '진짜 악마 같군.'

    아군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저 모습만으로는 아군인지 악마인지 구분을 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블라드미르는 성호를 긋고는 자신의 신이 그와 함께하기를 빌었다.

    "물러나!"

    이지혁의 외침과 함께 NDF들이 일제히 몸을 뒤로 빼기 시작했다.

    "빠, 빨리!"

    "저 인간, 또 저지르네! 또!"

    이제는 목숨이 위험해서 물러나면서도 입으로는 악담을 퍼부을 수 있게 된 그들이었다.

    "자자!"

    이지혁이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웃더니, 손을 아래로 내리그었다.

    "선물이다. 잘 받으라고."

    그리고 그 순간!

    검은 구름이 응축을 끝내고는 뒤틀리며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와! 저거, 나 본 적 있는 거 같은데?"

    서아영이 그 광경을 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분명 예전에 본 광경이다. 저거 한 방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생각하면 확실히 이 순간에는 최고의 마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내리꽂아라!"

    이지혁의 외침과 함께 응축되었던 마나가 일제히 폭발적으로 불어나더니, 아래를 향해 그대로 내리꽂히기 시작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

    귀를 찢어내는 듯한 굉음.

    너무나 거대해서 차라리 아무 소리도 없는 정적의 공간에 들어선 것만 같은 기이한 이질감이 전신을 지배한다.

    검은 구름은 검은빛의 창으로 화해서 금수산 태양 궁전 위로 그대로 내리꽂혔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

    허공에 거대한 수도꼭지가 생겨나고, 그 안에서 검은 물이 미칠 듯이 뿜어져 나오는 것을 지켜보는 것만 같았다.

    물과 다른 점이 있다면, 바닥에 닿은 물은 흘러가야 하지만 저 검은 마력은 흘러가지 않고 바닥을 그대로 뚫어내며 아래로, 또 아래로 파고든다는 점이었다.

    마력에 닿은 금수산 태양 궁전이 말 그대로 증발하기 시작했다.

    박성찬이 소리쳤다.

    "저기 김씨 아저씨들 시체도 있을 텐데? 돼지 새끼도?"

    "응, 이제 없어."

    이지혁이 씨익 웃었다.

    박성찬은 그 모습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쓰게 웃고 말았다.

    "그런 거물은 좀 더 뭐랄까, 있어 보이게 죽여줘야 하는 거 아닌가?"

    "귀찮게 뭐하러요."

    이지혁의 눈이 내리꽂히고 있는 검은 거인의 창으로 향했다. 지구를 뚫어버릴 기세로 내리꽂히던 검은 마나의 파동이 천천히 사라져 갔다.

    "죽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이지혁이 낄낄 웃으며 앞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거대한 송곳으로 바닥을 찌른 듯한 깊은 크레이터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 안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면 미션 컴플리트라고 할 수 있겠지만…….

    "아니! 이건 좀 너무하는 거 아닙니까?"

    "호오?"

    이지혁이 안쪽에서 들려오는 음성에 미소를 지으며 크레이터로 바짝 다가갔다.

    이지혁의 눈썹이 꿈틀했다.

    크레이터 한가운데에 마치 언덕처럼 솟아올라 있는 땅이 보인다. 그리고 그 땅 위에 정민성과 아르고라스가 고개를 들어 이지혁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둘의 모습은 조금 달랐다.

    정민성이 입가에서 피를 좀 뿜어내고 있는 정도라면, 아르고라스는 그 생명력을 모두 소진했는지 육체가 거의 잿빛으로 바래 바스라지고 있는 중이었다.

    "와, 그걸 막았어?"

    이지혁이 신기하다는 듯이 아르고라스를 바라보았다.

    그가 약해진 것일까, 아니면 아르고라스가 강해진 것일까?

    "진짜 죽을 뻔했잖아요!"

    "죽으라고 한 건데?"

    정민성의 항의에 이지혁이 이죽였다.

    "그러다가 정말 죽으면 어쩌려고 그랬습니까?"

    "죽으라고 한 거라고. 귀가 막혔냐?"

    최정훈은 우주를 만나는 기분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 둘을 붙여놓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에 대해서는 생각을 안 해봤네.'

    이지혁이 가만히 정민성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인간이 왜 세상을 파괴하는 일에 동조하는 거지? 뇌에 이상이 생긴 건가? 정신병의 일종이라고 하면 이해해 볼 의향이 조금은 있는데 말이야."

    "완벽히 제정신이거든요?"

    "아닌 것 같은데?"

    최정훈은 고개를 젓고 말았다.

    이건 카오스다.

    * * *

    "정신과 의사도 아니신 분이 사람의 정신상태를 그렇게 쉽게 진단하는 것 아닙니다. '진료는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도 들어보지 못하신 것 같군요."

    "아무래도 너, 정신이 제대로 나간 것 같은데?"

    이지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상황에서도 저런 농담이 나오는 걸 보니, 멘탈 하나는 인정해 줄 만하군."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게 다야. 이제 어쩔 거지? 너한테는 더 이상 카드가 없어 보이는데 말이야."

    "카드라……."

    정민성이 바닥에 쓰러져 있는 아르고라스를 슬쩍 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믿었던 악마 놈은 그거 하나 못 막아서 이 꼴이 되어 있으니, 이제 제가 할 수 있는 건 딱히 없겠군요."

    "…엄살은."

    이지혁이 정민성을 노려보았다.

    그가 보기에는 정민성이 가진 힘도 아르고라스에 못지않을 듯했다.

    "뭐, 이것도 인연인데 대화 좀 나눠보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그런다고 게이트가 열릴 시간을 벌지는 못할 텐데?"

    "…이게 무슨 자체 숙성이 되는 과일도 아니고, 마력을 공급 안 하는데 어떻게 열리겠습니까? 마력을 공급해야 할 놈이 지금 잘 익은 고구마가 되어 있는데요."

    "그도 그러네."

    이지혁이 바닥에 쓰러져 있는 아르고라스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정민성은 마나를 다루지 못하니, 이 이상 게이트를 활성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 하고 싶은 이야기는 뭐지? 유언 정도는 들어줄 용의가 있다. 그런데 그 목숨을 연장해 주는 대가는 있어야겠지."

    "아니, 이 와중에 무슨 대화야!"

    서아영이 짜증을 부리자 최정훈이 그녀의 팔을 잡았다.

    "왜요?"

    "가만히 있어보세요."

    최정훈은 냉정하게 사태를 파악했다.

    일단 이번 일은 이렇게 해결이 된다고는 하지만, 앞으로도 이처럼 쉽게 해결된다는 보장은 없었다.

    '하나가 아니야.'

    마음만 먹는다면 북한처럼 일을 처리할 수 있는 나라는 얼마든지 있었다. 아프리카 쪽은 이제 서방의 영향력이 닿지 않는다.

    이번에도 박용휘가 탈출하여 자신들에게 상황을 알리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문이 열리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대화를 통해서라도 정보가 좀 더 필요했다.

    "저 사람들은 아직 제정신으로 돌아오지 않은 것 같은데, 어떻게 되돌려야 하지?"

    "으음, 그게 대화의 선결 조건인가요?"

    "응."

    "…그거 꼭 알려 드려야 하는 겁니까?"

    "말 안 해도 상관없어. 어차피 내가 아는 사람도 아닌데, 뭐."

    말 안 해주면 그냥 때려죽이고 저 사람들이야 어떻게 되든 신경 쓰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찰떡같이 이지혁의 말을 알아들은 정민성이 백기 투항을 했다.

    "그냥 놔두면 원래대로 돌아갈 겁니다. 그것도 지속적으로 공급을 해줘야 하는 거라서요."

    "마나가 아니던데?"

    "이쪽의 능력입니다. 절 너무 쉽게 보시면 안 됩니다."

    "쉽게 보이는데?"

    이지혁이 이죽거리자 정민성은 끄응,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네네. 상황이 상황이니 쉽게 보신다고 해도 제가 뭐 마땅한 반박거리를 찾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네요. 하지만 이지혁 씨만 오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몰리지는 않았을 겁니다."

    "쓸데없는 말은 집어치우고, 유언이나 남겨. 깔끔하게 보내줄 테니까."

    "전 사람인데요?"

    "그래서?"

    "…박애주의자시네요. 인간이나 몬스터나 차별 없이 대하시는."

    "그런 편이지."

    정민성은 뒤쪽에 있는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숫제 토론회라도 벌일 기세였다. 그 광경을 보고 박성찬이 툴툴거렸다.

    "이러고 있어도 되는 건지 모르겠네."

    그 순간, 미국 측에서 최정훈에게 접촉해 왔다.

    "저자는 알파와 관계가 있는 것이 확실합니다. 알파는 1급 위험인물입니다. 알파와 관련된 정보를 빼내거나 생포하는 쪽을 권장드립니다."

    "말은 해두겠습니다."

    최정훈이 이지혁에게 고개를 돌려 말했다.

    "들으셨죠?"

    "…통역 마법 안 켜놨는데?"

    "좀!"

    최정훈이 한숨을 쉬고는 설명을 했다.

    "뭐, 일단 알았어요. 의미는 없겠지만."

    이지혁이 다시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정민성이 입을 열었다.

    "솔직히 저는 이지혁 씨가 왜 그쪽에 있는 건지 이해가 잘 가지 않습니다."

    "나도 네가 왜 그런 데 있는 건지 이해가 잘 안 가는데?"

    "…제가 여기 이러고 있는 건 당신이 한 짓이죠. 여하튼 간에!"

    정민성은 이지혁의 페이스에 말리지 않겠다는 듯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당신은 세상을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왜 권력자와 일반인들의 개로 살아가고 있는 겁니까?"

    "사료 잘 줘서."

    "아니, 거! 제가 진지하잖아요, 지금."

    이지혁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지배해 봤는데, 별거 없더라고."

    정민성이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해보셨다구요?"

    "응."

    "…아, 그래요?"

    "응."

    정민성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 이게 아닌데. 이건 내 대응 매뉴얼에 없는 대답인데……."

    정민성이 다시 입을 열었다.

    "에이, 그래도 이 세계랑은 다를 수도 있잖아요."

    "뭐, 별다를 거 있겠어? 그거 별거 없어. 어차피 내가 이 세상을 지배한다고 해서 먹는 게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자는 시간이 늘어나는 것도 아냐. 되레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 찡찡대는 놈들 때문에 하루하루가 피곤하고 귀찮기만 하지."

    "어, 음……."

    "그리고 현대에서는 굳이 그럴 필요도 없어. 차라리 돈을 벌어라. 돈만 있으면 웬만한 권력자와는 비교하지도 못하는 삶을 살 수 있거든."

    "…뼈에 새겨야 할 조언이군요. 저 지금 매우 설득되는 기분입니다."

    정민성이 너스레를 떨었다.

    이지혁은 담배를 입에 물었다.

    "할 말은 그게 다인가?"

    "아뇨, 아뇨. 말 끝나면 죽는데, 이걸로 끝낼 수는 없죠. 제 인생 마지막 대화의 결론이 '돈을 벌라'라면 그건 너무 슬픈 일인 거잖아요."

    "그래? 대화를 지속하고 싶다면 추가 정보가 필요하지. 알파는 지금 어디에 있나?"

    "음, 그거… 곤란한 질문이네요."

    "그럼 죽든가."

    "아뇨! 대답하기 곤란하다는 게 아니라 저도 그 인간이 어디 있는지 모릅니다. 그거 그렇게 쉽게 알려주고 다니는 놈이었으면 지금쯤 CIA 지하 고문실에서 5옥타브로 소리를 지르고 있겠죠."

    "일리가 있군. 그럼 네가 생각하기에 내게 쓸 만한 정보를 하나 뱉어봐. 없으면 죽는 거고."

    "으으음, 잠시만요. 고민이 좀 필요하군요. 아, 이런 건 어떻습니까? 여기 말고 다른 데서도 비슷한 프로젝트가 시행되고 있는 곳이 있는데, 거기가 어딘지 이야기하면 일단 연장됩니까?"

    이지혁이 최정훈을 돌아보았다. 최정훈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지혁이 말했다.

    "읊어봐."

    "일단 앤티가 바부다!"

    "뭐, 인마?"

    "아뇨. 나라 이름이라니까요! 나라 이름! 베네수엘라 위쪽에 있는 나라 이름이에요!"

    "…진짜?"

    "그 외에도 기니비사우에도 있습니다."

    이지혁이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에, 그건 나 말고 다른 사람들한테 이야기해. 기억도 못하겠다."

    정민성이 나라 이름을 한창 읊고 나자 미국 측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오케이. 이제 말해봐."

    "단순한 지배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실 이지혁 씨라면 어느 세상에서도 제왕처럼 사실 수 있겠죠. 하지만 지금의 세상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십니까?"

    "왜?"

    "능력자들이 박해당하는 세상이라니, 웃기지 않습니까?"

    이지혁이 김다현을 돌아보며 말했다.

    "너, 박해 받았냐?"

    "아뇨. 뭔 헛소린지 모르겠네요."

    "그렇다는데?"

    정민성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

    "인류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이들이 인류와 같은 대접을 받고만 있어도 그건 역차별인 것이죠. 게다가 겨우 그 정도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 능력자들은……."

    "아아, 됐어."

    이지혁이 정민성의 말을 잘랐다.

    "그건 너희끼리 알아서 하고, 나는 그런 문제에는 관심이 없으니까 말이야."

    "관심이 없다구요?"

    이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잖아. 너희가 힘이 더 있었다면 세상을 지배할 수 있었겠지. 하지만 이리된 건 그냥 너희가 약하기 때문이야. 내가 약해서 벌어진 일을 이런저런 이유를 붙여가며 징징대지 말라고. 듣기 짜증나니까."

    정민성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래서 할 말은 다 했나?"

    "이지혁 씨는 착각하고 계십니다."

    "뭘?"

    정민성의 얼굴에 여유가 피어났다.

    "세상에는 생각보다 저희의 의견에 동조하는 능력자들이 많습니다."

    "그래? 뭐,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뭐 달라질 게 있나?"

    "달라질 게 있죠."

    정민성의 목소리가 점점 더 고조되기 시작했다.

    "모르시겠습니까? 이 세상은 부조리로 가득 차 있습니다. 말이 되지 않는 것들이 너무 많아요!"

    "그렇겠지."

    "세상은 썩어 있고, 지금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권력자들은 자신의 안위에만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이 세계는 점점 퇴보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세상은 개혁이 필요합니다. 이 시대에 능력자가 출현했다는 것은 세상을 바꾸라는 신호인 거죠. 모르시겠습니까?"

    "아, 미안한데… 나는 무신론자라서. 신이 있어도 안 믿어."

    "…이지혁 씨, 그건 무신론자가 아닙니다."

    최정훈의 딴지에 이지혁이 입을 툭 내밀었다.

    "아, 몰라요. 여하튼 안 믿어요."

    이쪽은 신에게도 거부당한 몸이라고.

    "그래서 할 말은 끝났나?"

    "이건 흐름입니다. 썩어 빠진 인류를 정화하고 새로운 인류로 이 세계를 다시 개편하라는 흐름!"

    "어, 아니야."

    이지혁이 코웃음을 쳤다.

    "어디서 세뇌당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사이비 광신도의 연설에 혹할 만큼 이쪽이 줏대가 없지는 않아서 말이야. 할 말 다 했으면 이제 가시지?"

    "당신이 뭘 알아!"

    정민성의 목소리에 광기가 들어찼다.

    "당신이 인간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능력자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알기나 해? 지금도 지하에서 수도 없는 동료들이 죽어가고 있어! 그것도 잔인하게 해체당하면서 말이야. 당신도 지하 고문실에 3일만 있으면 인간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차게 될걸?"

    "뭐, 그렇게까지 열 받지는 않더라고."

    "…뭐?"

    "너도 한 열흘쯤 불에 타고 있다 보면 알게 될 거야. 증오라는 것도 뭐랄까, 기대가 있어야 생기는 거라고나 할까?"

    정민성은 할 말을 잃었다.

    이 인간은 도무지 뭐가 통해 먹지를 않는다.

    "에… 뭐, 당신은 그럴 수도 있겠죠."

    정민성은 깔끔하게 포기했다. 애초에 이지혁이라는 인간을 설득할 수 있을 거라고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인간에 대한 기대가 있다는 점에 높은 점수를 주지. 하지만 내가 본 바에 따르면, 지금의 인간이 썩은 게 아니라 인간은 원래 그런 거야. 너희가 지금 있는 이들을 다 몰아내고 너희만의 왕국을 세우면 뭐가 달라질 것 같지? 똑같아. 그렇게 역사는 현실에 대한 염증으로 혁명을 일으키고, 그 이전의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을 반복하지."

    이지혁이 한심하다는 듯 정민성을 보며 말했다.

    "세상에 유토피아는 없어. 유토피아는 꿈에서나 찾으라고, 달변가 씨."

    * * *

    정민성이 가만히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뭐,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혁명을 지지해 온 사람들이 있으니 세상이 이 정도까지는 발전한 것 아니겠습니까."

    "어… 내 생각에는 그냥 과학이 발달해서 그런 것 같네. 과학이 없는 세상은 만 년이 지나도 딱히 의식이란 게 발달하지 않는 것 같더라고."

    "아, 그래요? 그럼 큰일인데……."

    정민성이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이지혁 씨와 대화를 하고 있다 보면 제가 지금 뭘 하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뭘 하긴 뭘 해, 뻘짓이지."

    "으음, 너무 날카롭게 찌르지 마시죠. 아프거든요."

    정민성이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확실히 이지혁 씨의 말이 맞을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이 그리 효율적이지 않을 수도 있고, 역사적으로 본다면 별 의미도 없는 반란일지도 모르죠. 뭐, 그런 건 다 알겠습니다만……."

    정민성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해볼 만큼은 해봐야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아서 말이에요."

    "그럴 기회가 있으면 좋았겠네. 뭐, 억울해할 건 없어. 너처럼 뭔가 해보려다 죽어간 놈들은 내가 꽤 많이 봤거든. 그런데 이뤄져야 할 일이라면 나중에 다른 놈 손에서라도 반드시 이뤄지기는 하더라고. 그러니까 그리도 사명과 꿈이 좋다면 안심하고 가. 나중에 누군가 이뤄줄 수도 있으니까 말이야."

    "죽기는 싫은데요?"

    "죽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지. 유언은 충분히 들었어. 전해 줄 사람은 알파인가?"

    "…뭐라고 전하시게요?"

    "개소리하더라고 해주지."

    "하… 거참, 나쁜 사람이네."

    정민성이 한숨을 푹푹 내쉬더니 이지혁을 보며 말했다.

    "그런데 이지혁 씨도 착각하는 게 있는 것 같네요."

    "뭘?"

    "제가 지금 많이 몰려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요?"

    "아마도."

    "흐음……."

    정민성이 어깨를 으쓱했다.

    "아까도 말씀드렸잖아요. 저를 너무 무시하지 마시라구요. 저 밖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그냥 의식을 잃게 된 거 같으시죠?"

    "아닌가?"

    "땡! 틀렸습니다. 의식을 잃은 게 아니라 의식을 지배당한 거죠. 제가 이렇게 쉽게 수뇌부를 장악할 수 있던 힘의 원동력이 무엇인지는 생각을 해보셨어야죠."

    "의식 장악이라……."

    독특한 능력인데?

    이지혁이 혀를 찼다.

    마법에도 비슷한 효과를 내는 종류의 마법이 있기는 하지만, 이런 식으로 대량의 사람들을 상대로 효과를 보기는 힘들었다. 소수의 몇몇을 세뇌할 수는 있지만 말이다.

    "흐음, 그래서? 나를 세뇌하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에이, 아무리 저라도 그건 무리죠. 저보다 이지혁 씨의 정신력이 훨씬 더 강하다는 거야 저도 아니까요."

    "그럼 뭐가 문제지?"

    "음, 일단 이런 게 가능하죠."

    딱!

    정민성이 손가락을 튕겼다.

    이지혁은 가만히 주변을 돌아보다가 말했다.

    "별것 없는데?"

    "좀 기다립시다! 사람이 성질이 그렇게 급하면 못쓰는 법이죠. 이제 올 때가 됐을 텐데?"

    정민성이 고개를 빼꼼 들었다. 그 아래에서 위가 보일 리가 없건만, 이 상황이 되어서까지 익살맞음을 버리지 않는 정민성이었다.

    "뒤, 뒤쪽에!"

    다급한 목소리를 들은 이지혁이 뒤로 고개를 돌렸다.

    "어우."

    평양을 가득 메우고 있던 사람들이 그들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좀비는 충분히 봤는데 말이야."

    엄밀히 말하면 저들은 살아 있는 사람이지만, 행동거지는 좀비와 그렇게 달라 보이지도 않았다.

    이지혁은 한숨을 쉬고는 정민성을 돌아보았다.

    "그래서… 이걸로 나를 막겠다는 거?"

    "에이, 그럴 리가요. 일단 이건 발을 묶……."

    움찔.

    그 순간, 정민성이 몸을 뒤틀기 시작했다.

    "이런 빌어먹……."

    "응?"

    정민성이 자신의 목을 움켜잡고는 괴로운 듯 몸을 웅크렸다.

    "아이, 씨발! 왜 이럴 때만 나서냐고! 맛있는 건 니가 다 처먹……."

    "뭐라는 거야?"

    최정훈이 고개를 빼 정민성을 주시했다.

    "어엇?"

    그저 장난을 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정민성의 육체가 뒤틀리기 시작한다. 팔이 제멋대로 휘저어지고, 몸 안에 작은 공이 돌아다니는 것처럼 이곳저곳이 부풀어 올랐다.

    머리까지 순식간에 새하얗게 세어버린 정민성이 바닥으로 쿵, 하고 처박혔다.

    "…가지가지 하네."

    경련이 멈춘 정민성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최정훈이 눈을 꿈뻑거렸다.

    아주 잠시 쓰러졌다 일어났을 뿐인데, 정민성의 얼굴이 달라진 것 같았다. 아니, 확연하게 달라져 있었다.

    새하얀 머리와 인상적인 이목구비.

    더 놀라운 것은 그 달리진 모습이 그가 아는 모습과 무척이나 닮아 있다는 것이었다.

    "알파?"

    최정훈의 목소리에 정민성이 머리를 쓸어 올렸다.

    "이거,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지혁 씨, 그리고 최정훈 씨. 친애하는 맥클라렌 씨도 비전으로 보고 계시겠죠?"

    "야, 잠깐만. 통역 마법 좀 켜고. 갑작스럽게 영어로 말하지 말라고."

    "아뇨, 아뇨. 제가 한국어로 말하죠. 맥클라렌 씨 옆에야 동시통역 하나쯤은 붙어 있지 않겠습니까?"

    알파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다시 보니 반갑네요."

    "태연하게 말한다? 그때 다 죽지는 않았어도 반은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사실입니다. 꽤나 대미지가 컸죠. 하지만 이미 저나 이지혁 씨나 서로 알고 있는 사실을 다시 언급할 필요는 없을 테니까요."

    알파가 어깨를 으쓱하자 최정훈이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변장을 하고 있던 건가?"

    "아닙니다."

    알파가 턱을 긁으며 설명했다.

    "이상하네요. 맥클라렌은 제 능력에 대해 알고 있는데, 그쪽에는 제 정보를 제공하지 않은 모양입니다. 이래서 정보국이라는 것들은 효율적인 척하면서도 비효율적이란 말이죠. 정보는 돌아야 그 쓸모가 있는 것인데, 뭐 그리 극비 사항이라고 꼭꼭 감춰뒀나 모르겠군요."

    "알기 쉽게 설명해 봐. 말 꼬지 말고."

    "간단하게 말하자면, 아까 그놈은 제 분신체 같은 겁니다. 저와는 다른 인격과 육체를 가지고 있지만, 제 통제하에 있는 거죠."

    "알기 어렵군."

    이지혁이 무슨 개소리냐는 듯 바라보자 알파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캐릭터는 여전하시네요."

    "아까 그놈도 비슷하던데?"

    "음, 그럼 제가 이지혁 씨에게 영향을 꽤 받은 모양입니다. 사실 태연한 척하지만, 이지혁 씨 같은 사람을 상대해 본다는 건 저에게도 꽤나 충격이었거든요."

    "그 말 하려고 친히 왕림하셨나?"

    "음, 그건 아니죠."

    알파가 씨익 웃으면서 손으로 총 모양을 만들어서 자신의 머리에 대고 쏘는 시늉을 했다.

    "자살하러 온 건 아닙니다. 이지혁 씨에게 드릴 말씀이 있어서 온 거죠."

    "…말 많네, 거참. 아까도 충분히 들었는데, 이젠 네 차례라 이건가? 난 이제 그만 끝내고 집에 가서 발 닦고 자고 싶은데?"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아까 하던 말을 조금 이어서 하는 것뿐이니까요. 이 육체가 가지고 있는 능력에 대해서 말하고 있던 것 같은데, 간단합니다. 정신 지배죠."

    이지혁이 한숨을 쉬었다.

    "이제 됐어."

    이지혁이 허공을 향해 손을 들어 올렸다.

    우우우우웅!

    이지혁의 손에서 검은 마나가 뿜어져 나와 허공에 이글거리는 불꽃의 덩어리를 만들어냈다.

    "교주님께서 친히 왕림하신 건 영광스럽게 생각하지만, 난 이제 지루하거든? 그러니까,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고."

    "제 말을 들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정신 지배라는 건 이렇게까지도 쓸 수 있거든요."

    순간, 알파의 눈이 번쩍인다 싶더니, 그의 눈에서 뿜어져 나온 광채가 주변을 휩쓸었다.

    "응?"

    빛을 정면으로 맞았음에도 아무런 이상을 느끼지 못한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별거 없는데?"

    "물론 이지혁 씨께는 영향을 미치지 못하죠. 하지만 다른 사람은 어떨까요?

    타타타타탕!

    그 순간, 이지혁을 향해 소나기 같은 총알이 쏟아졌다.

    "이크."

    우웅.

    이지혁의 전면에 반투명한 막이 생겨나더니, 날아든 총알을 모조리 튕겨내기 시작했다.

    "미, 미쳤나, 저거?"

    "정신 지배라잖아!"

    상황을 주시하던 미 특수부대원들이 이지혁을 향해 발포를 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이, 이 새끼 왜 이래!"

    곳곳에서 소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능력자들 중 일부가 주변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굉장한데?"

    이지혁은 순수하게 감탄했고, 최정훈은 소리를 질렀다.

    "이지혁 씨를 보호해요! 당장!"

    최정훈의 말이 끝나자마자 서아영과 윤혁규, 김다현과 박성찬이 이지혁의 주변을 둘러쌌다.

    "주변으로 접근하는 놈은 모조리 박살 내버려요!"

    "최정훈 씨도?"

    "지금 장난칠 때예요?"

    최정훈의 말에 박성찬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가슴을 두드렸다.

    "이런 건 나한테 맡겨두라고!"

    이지혁은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이 별거 아니라는 듯이 가만히 알파를 보며 말했다.

    "쇼는 잘 봤다. 하지만 이게 뭐 어쨌다는 거지? 아무리 봐도 저들이 나한테 닿기 전에 네가 먼저 죽을 것 같은데? 전장에서라면 굉장한 능력이겠지만, 여기서는 별 효용이 없는 것 같은데?"

    "아니죠. 정정해 드리자면 저들이 이지혁 씨에게 다가간다고 해도 별다른 피해를 줄 수는 없죠. 그러니 여기까지는 여흥입니다."

    "여흥?"

    "흐음, 일단 어느 정도는 된 것 같으니 설명드리죠. 첫 번째로, 제가 파악한 이지혁 씨의 약점은 간단합니다."

    이지혁의 눈이 가늘어졌다.

    "캐스터라는 거죠. 이지혁 씨와 거리를 두고 싸워서 이길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겁니다. 그 무섭다는 마왕들조차도 말이죠."

    "칭찬 고맙네."

    "그런데 반면에 어이없을 정도로 접근전에 약하더군요. 웬만한 능력자에 비한다면야 맨주먹으로 싸워도 훨씬 강하겠지만, 이지혁 씨가 가지고 있는 능력에 비한다면 육체적인 능력은 아예 없는 거나 마찬가지더라구요."

    "뭐, 태생적 한계라고 해두지. 하지만 최근에는 좀 단단해졌다고."

    "네. 뭐, 그렇겠죠. 그리고 이지혁 씨가 한 가지를 놓치셨네요."

    "응?"

    알파가 빙긋 웃으면서 말했다.

    "말씀드린 거 같던데요. 우리 쪽에 동조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다구요."

    이지혁의 눈가가 살짝 떨렸다.

    "너……."

    "이미 늦었습니다. 거기까지 간 이상은요."

    이지혁이 그 자리에서 곧바로 몸을 돌렸지만, 알파의 말 그대로 이미 늦은 뒤였다.

    푸욱!

    그건 마치 칼로 몸을 찌르는 소리 같았다. 하지만 그건 칼을 쓰는 소리가 아니었다.

    한 사람의 손이 다른 이의 육체를 꿰뚫으며 낸 소리였다.

    이지혁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자신의 가슴을 뚫고 나온 손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누가?'

    고개를 돌리지는 못했지만, 알 수 있었다.

    보통 사람보다 반 배는 더 큰 것 같은 이 손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파가 그 광경을 보며 천천히 박수를 치는 광경이 이지혁의 시야에 들어왔다.

    "말씀드렸잖습니까. 접근전에 있어서 이지혁 씨는 어이가 없을 정도로 약합니다. 그리고 우리 쪽은 생각보다 동조자가 많죠. 마지막으로 이지혁 씨는 안타깝게도 사람을 너무 쉽게 믿는 경향이 있더군요."

    이지혁의 입가에서 핏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고통은 익숙하다.

    이런 고통쯤은 수만 번도 더 겪었다.

    하지만…….

    흐려지는 의식은 딱히 익숙하지 못했다.

    천천히 멀어지는 의식 사이로 이지혁의 귓가에 아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박성차아아아아아안!"

    * * *

    김다현이 분노해 이성을 잃어버린 얼굴로 박성찬에게 달려들었다.

    "이 새끼야아아아!"

    김다현의 눈에 이지혁의 등을 꿰뚫고 들어간 박성찬의 손이 선명하게 보였다.

    김다현이 광속으로 달려들자 박성찬이 이지혁의 몸에서 손을 뽑아내고는 훌쩍 뒤로 물러났다.

    "워워… 진정하라고, 동생."

    "으아아아아!

    김다현의 전력을 다한 정권이 박성찬에게 틀어박혔지만, 흑마력으로 강화된 박성찬의 육체에 타격을 주지는 못했다.

    "쯧."

    박성찬은 김다현의 목덜미를 잡아 뒤쪽으로 집어 던져 버렸다.

    "이 미친놈이!"

    윤혁규마저도 이성을 잃고 박성찬에게 달려들려는 순간, 버럭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호위해!"

    최정훈은 아직 이성을 잃지 않고 있었다. 쓰러진 이지혁을 끌어안은 최정훈이 목소리를 높였다.

    "아직 안 죽었어, 이 새끼들아! 주변 둘러싸고 아무도 오지 못하게 막아!"

    "…예."

    "청와대에 연락해서 정해민 씨더러 다솜이 데리고 오라고 해요! 다른 사람들은 당장 아펠드리체 씨에게 연락해요! 어서!"

    사람들이 순간 주저하자 최정훈이 피 맺힌 고함을 토해냈다.

    "움직이라고, 이 병신 새끼들아!"

    "예!"

    뻥 뚫려 버린 이지혁의 가슴을 짓누른 최정훈이 벌벌 떨리는 목소리로 되뇌었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이 정도로는 안 죽어."

    그 광경을 지켜보던 알파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러고는 남은 담뱃갑을 이지혁이 있는 쪽으로 집어 던졌다.

    "가시는 길에 평소 좋아하시던 담배 한 대 정도는 물려 드려야 느와르 같지 않겠습니까, 최정훈 씨?"

    최정훈은 이를 꽉 깨물었다.

    분노가 극을 넘어버리자 되레 머리가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최정훈의 눈빛을 본 알파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다른 주머니에서 검은 구슬을 꺼내고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아르고라스를 툭툭, 걷어찼다.

    "쓸모없는 마족 놈. 일어나라, 이제."

    "크으……."

    아르고라스의 몸이 움찔하더니, 겨우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한 방은 버텼군."

    "자칫하면 소멸될 뻔했다. 지독하더군."

    "거의 계산대로였어. 거 봐, 죽지는 않는다니까."

    "…쉽게 말하지 마라, 인간. 정말 소멸될 뻔했다."

    "엄살은."

    알파가 손에 든 구슬을 튕겨 아르고라스의 입에 던져 넣었다.

    까드득, 소리와 함게 아르고라스의 몸이 순간적으로 활력을 되찾았다.

    "위험한 도박이었군."

    "성공했으니 됐어. 이제 너는 네가 할 작업이나 계속해."

    "그러지."

    아르고라스를 뒤로 밀쳐 낸 알파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그러게 잘 좀 보호하지그랬습니까?"

    최정훈이 알파와 박성찬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정신 지배인가?"

    "네?"

    알파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상황 파악을 제대로 못하실 분 같지는 않은데, 왜 그러시는지 모르겠네요. 박성찬 씨는 정신 지배 같은 것을 받을 정도로 나약한 정신력의 소유자가 아닐 텐데요."

    최정훈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럼! 본인의 의지라고? 박성찬!"

    박성찬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시죠, 최정훈 씨. 저는 완벽하게 제정신이니까요."

    "배신한 거냐?"

    "…배신이라니, 나는 처음부터 이쪽이었다고."

    박성찬이 한숨을 쉬었다.

    "이쪽이라고 해서 양심의 가책이 없는 것은 아니야. 그 빌어먹을 꼬맹이 놈은 입으로는 툴툴대도 우리에게는 무척 잘해줬으니까. 하지만 어쩌겠어, 대의가 이쪽에 있는걸. 남자는 사소한 것을 묻어둬야 할 때가 있는 법이지."

    "더러운 주둥아리 놀리지 마라, 이 개자식아!"

    박성찬이 씁쓸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래도 동생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말을 들으니 가슴이 아프기는 하군. 다만, 내가 개인적인 욕심으로 벌인 일이 아니라는 것만은 알아주길 바라지."

    "개소리 작작 하라고 했어."

    박성찬이 양손을 들고는 뒤로 슬금슬금 물러났다.

    "뭐, 아무래도 좋아. 나는 더 이상은 싸우고 싶은 생각이 없으니까 이 정도로 하자고."

    "누구 맘대로?"

    서아영이 불타는 눈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최정훈과 함께 이지혁의 가슴을 누르고 있던 그녀의 손은 이미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서아영이 귀신 같은 얼굴로 박성찬을 노려보았다.

    "나도 이지혁을 아니꼽게 보던 사람이지만, 단 한 번도 이런 식으로 동료를 해칠 수 있다고는 생각해 본 적 없어. 이 개자식아, 지옥 불에 불타게 해줄 테니까 타면서 네가 뭘 잘못했는지 생각해 봐."

    "…이봐, 알파. 나 진짜 죽는다고."

    알파가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양반은 그냥 보내주시죠. 그게 아니면 제가 지금 직접 이지혁 씨의 숨통을 끊으러 갈 수도 있습니다."

    "와봐!"

    최정훈이 서아영의 손을 잡아끌었다.

    "놔봐요!"

    "앉아!"

    "놓으라니까!"

    "닥치고 앉으라고 하잖아! 내 말 안 들려?"

    난데없는 고함 소리에 서아영이 멍한 눈으로 최정훈을 돌아보았다.

    "빌어먹을, 신경 거슬리게 하지 말고 다들 닥치란 말이야!"

    분노한 최정훈의 목소리에 모두가 입을 닫았다. 그들은 단 한 번도 이렇게까지 최정훈이 이성을 잃은 모습을 보지는 못했다.

    "NDF 전원 이쪽으로 와! 임무 전환한다! 개미 새끼 한 마리 이 근처로 보내지 마! 이지혁 씨가 죽으면 우리도 여기서 모두 죽는다."

    살기까지 감도는 목소리에 서아영조차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하고 최정훈이 시키는 대로 순순히 이지혁의 주변을 감쌌다.

    "정해민은 멀었어?"

    스스슷.

    그 말과 동시에 정해민이 질린 얼굴로 이지혁의 바로 옆에 나타났다. 이지혁의 몸에 표식을 박아놓은 정해민은 언제 어디서든 이지혁의 바로 곁으로 텔레포트를 할 수 있었다.

    '표식 하나 낭비한다 싶더니.'

    지금은 그 사실이 더없이 감사한 최정훈이었다.

    "오빠아아아아아!"

    "지혁아!"

    정해민의 손을 잡고 함께 넘어온 김다솜이 기겁을 하여 이지혁에게 달려들었다. 그녀의 손이 새하얀 빛을 내뿜으며 이지혁의 가슴을 틀어막았다.

    "쿨럭."

    이지혁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지고 있었다.

    왜 아니겠는가. 보통 사람이라면 벌써 열 번은 더 죽었어야 할 부상이다.

    김다솜이 필사적으로 이지혁의 가슴팍에 달라붙는 것을 본 최정훈이 다급하게 물었다.

    "살릴 수 있어요?"

    "살릴게요! 살려야 해요!"

    그거면 됐다.

    최정훈이 고개를 들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죽여 버린다, 쓰레기 자식."

    최정훈의 시선을 받은 알파가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최고의 찬사군요. 고생한 보람이 있었어요."

    "아주 멋지게 해냈군?"

    "생각만큼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애초에 이지혁이라는 사람이 나타났다는 말을 들은 그 순간부터 나름 준비를 하기는 했지만, 실제로 만나본 이지혁 씨는 들은 것보다 더하더군요. 그래서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알파가 고생을 알아달라는 듯이 말을 이었다.

    "저 사람이 있는 이상 우리가 무슨 일을 꾸민다고 해도 저지당할 게 빤했죠. 1안은 설득해서 동료로 받아들이는 것. 물론 그건 실패했지요. 2안은 간단하죠. 제거하거나 방해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 보다시피 2안은 성공했죠."

    "잘도!"

    알파가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최정훈을 향해 말했다.

    "그리 화내실 것 없어요. 사실 이 일을 가능하게 만든 건 최정훈 씨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니까요."

    "…뭐?"

    "너무 내돌렸어요. 그리고 너무 풀었죠. 이지혁 씨가 어떤 사람이고, 이지혁 씨에게 어떤 약점이 있는지는 굳이 이지혁 씨를 직접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만큼요."

    최정훈의 머리가 멍해져 갔다.

    '나 때문이라고?'

    "몇 번이나 전투를 직접 보았지만, 저 사람은 직접적 타격에 너무 약해요. 게다가 에테르로 육체를 강화한 후부터는 조심해야 한다는 경계심마저 사라진 것 같더군요. 원거리에서 저격이 오는 것에는 경계가 되어 있지만, 근거리에서 누군가 배신할 수 있다는 것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더라 이거죠. 나라면 다른 이에게 자신의 안위를 맡기고 영창을 하는 미친 짓은 하지 못했을 텐데, 저 사람은 태연하게 저지르더군요. 마치 자신은 죽여도 죽지 않는 불사신이라고 말하는 것처럼요."

    으드득.

    최정훈의 이가 갈려 나갔다.

    "아직 끝난 게 아냐! 이긴 것처럼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지 말란 말이다."

    "물론 그렇죠. 하지만 말입니다."

    알파가 고개를 돌렸다.

    아르고라스가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풀리지 않은 의문이 있지 않습니까?"

    "…뭐?"

    "쯧쯧, 그 영민하신 분이 충격을 많이 받으신 모양이군요. 퍼즐이 안 맞지 않습니까? 처음부터 저는 이럴 생각이었다구요. 그럼 이지혁 씨가 이곳까지는 와야 했습니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시겠어요?"

    알파가 한곳을 가리켰다.

    알파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돌려보니, 그곳에는 무수한 사람들이 있었다.

    '오백만.'

    최정훈의 몸에 소름이 돋았다.

    잊고 있었다.

    박용휘가 한 말을 말이다.

    마계의 문을 열기 위해서 학살을 하려 한다고.

    "아, 안……."

    "늦었죠."

    콰아아아아아앙! 콰아아아아아앙!

    최정훈은 허망한 눈으로 눈앞에서 벌어지는 거대한 폭발을 바라보았다.

    평양시 자체가 붕괴하고 있었다. 도시를 거대한 화염의 폭풍이 그대로 뒤덮었다.

    "으으으으으……."

    최정훈의 몸이 벌벌 떨렸다.

    저 안에 있는 수많은 이들의 목숨이 지금 한순간에 날아가 버린 것이다.

    "알파아아아아아아아아!"

    분노로 정신이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았다. 할 수 있다면 당장에 저 씹어 먹을 놈의 육체를 갈가리 찢어버리고 싶다.

    "시작해."

    알파의 말이 끝나자 아르고라스가 움직였다.

    "흡족하군."

    그의 손이 좌우로 펼쳐지자 이제는 화염과 연기로 불타는 대지가 되어버린 평양에서 흐릿한 검은 기운이 아르고라스에게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아주 흡족해."

    아르고라스가 입이라 짐작되는 곳을 말아 올렸다.

    "애초에 모든 작전과 방어가 이지혁이 존재한다는 것을 기본으로 해서 구상된 게 잘못된 겁니다. 전술의 기본도 망각할 정도로 당신들은 스스로 서지 못했어요. 뭐, 그게 이제는 당신들이 진화에 뒤처졌다는 증거이기도 하니까 탓할 수는 없는 일이죠."

    알파의 이죽임이 들려온다.

    아르고라스에게로 빨려들던 검은 마나가 그의 몸을 한 번 훑고는 검은 게이트로 밀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최정훈의 눈이 떨렸다.

    막아야 한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확실한 사실은 저 상황을 저대로 내버려 두면 마계로 향하는 문이 뚫려 버린다는 것이다.

    '마, 막아야 해!"

    "막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걸 막아야 해! 막으라고!"

    최정훈의 고함 소리에 얼떨떨해하던 이들이 일제히 검은 게이트를 바라보았다.

    "저 마족 놈을 죽여!"

    우우우웅!

    대답은 없었다.

    에테르를 끌어 올려 아르고라스에게 날리는 것으로 대답이 돌아온다.

    "이런."

    알파가 양손으로 크게 원을 그렸다.

    그러자 아르고라스의 알파의 앞에 커다란 게이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게이트?"

    "반쪽짜립니다. 흉내는 내봤는데, 저는 못하겠더라구요. 대신에 이 정도는 가능하죠."

    날아든 에테르들이 전부 알파가 만들어낸 게이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세계 어딘가에서 터졌겠죠. 다른 이들이라면 여파가 두려워 못할 짓이지만, 저는 뭐… 상관없거든요."

    "이런 미친 새끼!"

    최정훈이 막 말을 이으려는 순간, 알파가 손을 들어 올렸다.

    "늦었습니다. 이제 보시죠, 세상이 바뀌는 순간을."

    검은 게이트가 웅웅대며 공명하기 시작했다.

    * * *

    최정훈의 눈이 떨리기 시작했다.

    세상이 바뀐다고?

    "…마, 막아야 하는데……."

    하지만 최정훈은 직감했다.

    저건 막을 수 없다.

    이지혁이 없는 이상 저 상황을 되돌릴 수 있는 무력을 그들은 보유하지 못한 것이다.

    아니, 그 이전에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지?'

    저 검은 게이트를 통해서 마계와의 완전한 통로가 열리는 것인가?

    최정훈이 이를 악물었다.

    마왕 하나만으로도 괴멸 직전까지 이르렀던 세계다. 이지혁이 없었다면 분명히 세상은 이미 멸망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런데 마왕들이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문이 열린다면?

    끝장이다.

    무슨 수를 써도 그들을 막아낼 수는 없을 것이다.

    최정훈이 결연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마… 그쪽 생각대로는 되지 않을 겁니다."

    알파가 얼굴에 이채를 띠고 최정훈을 바라보았다.

    "비장의 수라도 있나요?"

    "……."

    최정훈은 대답하지 않고 무전기를 들어 올렸다.

    "다 보고 계시죠?"

    - 예.

    "시작됐나요?"

    - 이미 그쪽으로 발사되었습니다.

    "빨리도 알려주네요.

    - 알아서 몸을 빼내십시오. 이 이상은 제가 어찌할 수 없습니다.

    "그러죠."

    최정훈은 피식 웃고는 무전기를 바닥에 던져 버렸다. 이제는 더 이상 무전을 할 일이 없을 것이다.

    "탈출 준비!"

    동행한 텔레포터들이 각자 맡은 이들을 향해 달려갔다.

    아직 알파의 정신 지배에서 온전히 풀려나지 못한 이들이 방황하고 있었다.

    "이런, 이런."

    그 광경을 본 알파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쪽으로 탄도미사일이라도 날아오고 있는 모양이군요. 뭐, 그 정도도 예상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요? 그렇다면 저를 너무 쉽게 보신 겁니다."

    알파가 씨익 웃으며 말하자 최정훈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아는 것과 막는 것은 차이가 있는 법이지."

    "아, 뭐… 그건 그렇죠. 그래서 하는 말인데요……."

    알파가 볼을 긁더니 천진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왕이면 그 쫄깃한 심정을 같이 느껴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그 순간이었다.

    각자 배정된 위치로 향하던 중국인 텔레포터들이 달려가던 자세 그대로 그 자리에서 픽픽 쓰러지기 시작했다.

    "왜, 왜 그래!"

    쓰러진 이들의 미간에는 작은 구멍이 나 있었다.

    "저격수……."

    순간적으로 상황을 파악한 최정훈이 소리쳤다.

    "정해민 씨 보호해! 둘러싸! 당장!"

    지금 이곳에서 정해민을 잃게 된다면 무슨 일을 당할지 빤하다.

    다행스럽게도 정해민은 이지혁의 옆을 지키고 있고, 다른 이들은 그런 이지혁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이라 현재의 자리를 지키기만 하면 되었다.

    최정훈이 이를 갈았다.

    "음, 뭐랄까……."

    알파가 조금은 쑥스럽다는 어투로 입을 열었다.

    "현대 화기를 사용하는 것이 능력자로서의 정체성을 해친다고 주장하는 이슬람 원리주의자 같은 양반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저는 결과만 좋다면 수단은 아무래도 좋다는 주의라… 굳이 저격총을 사용하는 걸 꺼리지 않는 편입니다. 그래서 미리 다들 배치해 뒀죠."

    "…이 새끼!"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면 곤란하죠. 핵폭탄을 떨궈놓고 혼자 유유히 빠져나가려고 하는 쪽이 더 치사한 것 아닙니까? 적어도 여기서 같이 재로 화하더라도 세계를 지켜내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쪽이 좀 더 극적이지 않겠습니까? 또 모르죠. 핵폭탄이 잘 떨어져서 지금 세계를 구할 수 있다면, 역사책에 최정훈 씨의 이름이 실릴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세계를 구한 용사라면서 말입니다."

    알파는 낄낄대며 웃더니 고개를 저었다.

    "물론 지금의 세계라면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 자체를 은폐하려고 들겠지만 말입니다. 북한이 핵실험하다가 나라 전체가 날아갔다는 식으로 둘러대기 딱 좋은 상황 아닙니까? 여러분은 북한의 핵실험을 막으려다가 죽은 게 되겠죠. 급이 떨어지기는 하지만, 국가유공자는 되겠네요."

    "이 상황에서도 말이 잘도 나오는군."

    "딱히 뭐, 급박하다고 느껴지는 상황은 아니군요."

    알파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미국은 몰라도 중국이나 러시아에서 쐈다면 이미 탄이 꽂힐 때가 되었을 것 같은데……. 재미있네요. 하기야 그렇게 쉽게 스위치를 누를 담력이 있었다면 세계는 이미 진즉 멸망했겠죠. 하지만 반대로 보면 그렇게 눌러야 할 때 제대로 누르지를 못하니까 주도권을 미국에 넘긴 채 질질 끌려 다니는 겁니다. 그렇지 않나요, 미스터 맥클라렌?"

    알파가 낄낄대며 웃어젖혔다.

    "오랜만의 재회인 것 같은데, 이런 식으로 인사를 하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지 않습니까? 목소리라도 들려주시죠."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상황에서 그가 크리스토퍼와 대화할 수 있는 매개체를 넘겨줄 수 있을 만큼의 정신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픽픽 쓰러져 나가는 텔레포터들과 정신 지배를 당한 이들의 발악에 주변 상황은 극도로 혼란스러웠다.

    "ICBM이 오고 있다고! 여기서 빠져나가야 해!"

    여기저기서 상황을 정리하려는 시도가 벌어졌지만, 실효를 거두는 이는 없었다.

    최정훈의 얼굴이 초조함으로 물들었다.

    '이대로라면 쉽지 않아.'

    이미 저격당해 쓰러진 텔레포터의 수가 이미 반수를 넘었다. 그렇다는 말은 이 중의 반은 이곳에 남아야 한다는 뜻이다.

    정해민을 보유하고 있는 한국은 그래도 어느 정도는 빠져나갈 수 있겠지만, 아무리 정해민이라고 해도 NDF 전원을 데리고 탈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서아영이 최정훈을 향해 씹어뱉듯 말했다.

    "일단 빠져나가요."

    "하지만……."

    "살 사람은 살고 봐야죠. 이러다가 폭탄 떨어지면 우리 다 죽는 거 아니에요?"

    "그렇습니다."

    "엄한 사람 죽이지 말자구요. 일단 해민 언니더러 다른 사람들 데리고 한 번 이동시키라고 하고, 이지혁 씨 쪽으로 다시 넘어와서 남은 사람 데리고 한 번 더 가면 되는 거잖아요."

    최정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서 그 말을 들은 정해민도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지혁 씨를 가장 먼저 탈출시키고 싶긴 하지만…….'

    김다솜이 필사적으로 치료를 해서인지 이지혁의 가슴에 뻥 뚫렸던 구멍은 이제 어느 정도 메워져 있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이지혁을 1순위로 탈출시켜야 한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정해민이 이곳으로 돌아올 방법이 없었다.

    "언니! 빨리!"

    "알았어!"

    정해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한쪽으로 갔다. 정해민을 보고하고 있던 이들이 그녀를 둘러싸고 움직였다.

    "부장님, 가십시오."

    "저 남을 거예요."

    "만약에 사태에 대비하려면 부장님은 지금 가셔야 합니다."

    "최정훈 씨나 빠져나가요."

    "말싸움할 시간이 없다니까! 당장 안 가?"

    최정훈이 화를 내자 서아영이 움찔하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알았어요."

    "…난 이런 데서 안 죽어. 그러니까 빨리 가. 시간 끌면 끌수록 내가 죽을 확률도 올라가는 거야."

    "알았다구요!"

    서아영이 정해민 쪽으로 달렸다.

    서아영까지 옆에 붙어 손을 잡은 것을 확인한 정해민이 텔레포트를 발동했다.

    "……."

    정해민의 눈이 흔들렸다.

    "아, 안 돼?"

    어째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 되죠."

    알파가 얄미울 정도로 손가락을 까딱까딱 내젓고 있었다.

    "아까부터 말하는 건데, 저를 너무 쉽게 보시네요. 저는 이 상황을 벌써 몇 달 전부터 계획하고 또 계획했단 말입니다. 그쪽의 대응 방식은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당연히 대처는 해두었죠. 여기서는 텔레포트를 할 수 없습니다."

    최정훈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애초부터 능력자들을 그저 몬스터를 상대하는 용도로만 생각한 것이 당신들의 약점입니다. 우린 처음부터 전쟁을 준비했죠. 능력자의 능력과 그 활용에 있어서는 당신들은 절대 우리에게 미치지 못합니다."

    "그래서 같이 죽자는 거냐, 이 개자식아!"

    "음, 조금 다른데요."

    알파가 볼을 긁으며 말을 이었다.

    "지금 당장 같이 죽자는 건 아닙니다. 그리고 같이 죽자는 것도 아닙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저는 살고, 여러분은 죽겠죠. 하지만 그게 핵폭탄 때문은 아닐 겁니다."

    알파의 어조는 확신에 차 있었다.

    "안심하라고 말하는 게 조금 이상하기는 하지만, 여러분이 핵폭탄 때문에 죽을 일은 없을 겁니다."

    최정훈은 알파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무엇을 믿고 저리 확신에 찬 어조로 말한단 말인가.

    "맥클라렌은 자신의 말만 떨어지면 핵이 날아올 것이라고 믿고 있는 모양이더군요. 하지만 아쉽게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습니다. 이야기했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미 전쟁을 준비했다구요."

    "…스파이?"

    "아뇨, 아뇨. 능력자 감지 센서가 있는데 그런 짓은 못하죠. 조금 아날로그한 방법입니다. 그냥 발사 장소가 있는 곳을 현재 무력으로 점거하고 있을 뿐이죠. 말했잖습니까, 생각보다 우리에게 동조하는 이들이 많다구요. 그들이 지금 다 어디에 있겠습니까?"

    최정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알파가 정말 오래전부터 이 순간을 만들어왔다는 것을 실감한 것이다.

    왜 그가 1급 위험인물인지, 크리스토퍼 맥클라렌이 왜 알파에게 그리 집착했는지 알 것 같았다.

    이지혁이 지뢰라면, 이 인간은 정밀 폭탄 같은 자였다.

    "그러니 생각보다 발사된 탄수는 그리 많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몇 발 안 되는 핵탄두라면… 뭐, 적당히 버틸 수 있겠죠?"

    "…네 능력이 그 정도라고 말하는 건가?"

    "아뇨, 아니요. 아닙니다."

    알파가 낄낄 웃으며 말했다.

    "최정훈 씨는 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것 같군요."

    "…뭐?"

    "문이라는 건 말입니다, 이쪽과 저쪽을 연결하는 겁니다. 단순히 거기에 그치지 않고 세계가 동화되어 버리는 거죠. 여기에 문이 열리면 이곳에서 모든 마족들이 나올 거라고 생각하시지만, 여기는 열쇠 같은 겁니다. 곳곳이 연결되는 거죠. 그리고 이곳이 연결되면 어떻게 되냐면 말입니다……."

    순간, 알파의 등 뒤에서 공명을 일으키던 게이트가 천천히 부풀어 올랐다.

    그러고는 세상을 검게 뒤덮기 시작했다.

    "이곳이 마계가 되는 겁니다. 바로 이곳이요. 흐하하하하하하핫!"

    알파가 광소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최정훈의 귀에는 그 웃음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대지가 흑갈색으로 물든다.

    하늘은 검푸른 색으로 뒤덮여 간다.

    달은 붉게 뜨고…….

    하늘에는 별이…….

    '별?'

    반짝이는 무언가가 그들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도 엄청난 속도로.

    직감적으로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챈 최정훈이 파랗게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

    "빠, 빠져나가야 해! 여기는!"

    ICBM이 떨어진다.

    하지만 텔레포트를 할 수 없는 이상은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

    최정훈이 마지막을 직감하는 순간, 낮고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간이란 건 꽤나 호들갑스럽군. 이쪽 세상이든 베라프든 동일하게 말이야."

    무슨 말인지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단 한 번도 들은 적 없는 언어였으니까.

    하지만 최정훈은 직감할 수 있었다. 그저 곁에 있는 것만으로 숨이 막혀오는 이 거대한 존재감은 이미 몇 번이나 느껴보았다.

    '마왕.'

    정체를 알 수 없는 또 하나의 마왕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