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78화 (78/118)
  • [■] 이지혁 씨 불러와요! 지금 당장! [■]

    ─────

    "잠시만요!"

    최정훈이 진입을 준비 중인 전방 부대를 향해 다가가 말했다.

    "입구가 좁은 게 문제가 아니라 저 건물에 이 모든 인원들이 들어가야 한다는 게 문제 아닙니까?"

    "예?"

    "만약 건물 안에 폭약이라도 설치되어 있다면 싸그리 다 죽습니다."

    그 말에 일본 측 인원이 비웃음을 흘렸다.

    "여기 사람들이 보통 사람들도 아니고, 그 정도에 압사당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일반인보다는 튼튼하겠죠. 하지만 이 안이 다 터져 나간다면 무사할 수가 없습니다. 건물이 무너지는 게 문제가 아니라 화력을 버틸 수 있냐구요."

    "음……."

    최정훈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계획 변경합시다. 어차피 지금 정찰대를 보낸다거나, 주변을 다시 조사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지체됐으니, 육체형 능력자들을 먼저 들여보내죠.

    작전의 입안을 맡고 있는 미 특수부대 측에서 빠른 의견 교환이 이루어졌다. 크리스토퍼에게 보고가 들어갔는지 무전을 기다리던 그들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최정훈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그럼 빠르게 진입할 사람들을 각출해 주십시오."

    "예."

    이미 시간이 충분히 끌린 상황이라 각국에서 빠르게 사람들을 추려냈다.

    그리고 NDF 측에선…….

    "이거 좀 너무한 거 아냐?"

    박성찬이 입이 댓 발은 튀어나와서 최정훈을 노려보고 있었다. 최정훈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아니, 몸뚱아리 좀 단단한 것뿐인데, 함정일지도 모르는 데로 걸어 들어가라고 하는 건 너무한 거 아니냐고!"

    "하하하하……."

    "웃을 일이 아니잖아! 최정훈 씨, 나한테 무슨 감정 있어요? 감정 있으면 말로 하자구요."

    "에이, 제가 감정이 있어서 박성찬 씨를 밀어 넣는 게 아니잖습니까."

    "맞는 거 같은데?"

    김다현이 슬그머니 박성찬에게 다가와서 말했다.

    "형님, 쪼잔해 보입니다."

    "이 새끼가!"

    박성찬이 울분을 토했지만, 타국의 육체 강화형 능력자들이 속속들이 앞으로 모이자 별수 없다 생각했는지 입을 삐죽였다.

    "여튼 다녀와서 보자고."

    "하하하하."

    "웃지 말아요! 정드니까."

    박성찬은 마지막까지 궁시렁거리면서 앞쪽의 집결지로 향했다. 미국 특수부대가 앞장을 서더니 뭔가 준비할 새도 없이 박성찬을 위시로 한 육체형 능력자들을 이끌고 태양 궁전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던 서아영이 고개를 돌려 최정훈을 보며 물었다.

    "우린 이제 뭐하죠?"

    "…팝콘이라도 튀길까요?"

    "재미없거든요?"

    "긴장을 풀려고 농담한 거죠……."

    "지금 이 상황에서 농담이 나와요?"

    "죄송합니다."

    최정훈은 시무룩한 얼굴로 건물을 바라보았다.

    '을씨년스럽네.'

    류경 호텔을 제외한다면 북한에서 가장 호화롭다고 할 수 있는 건물이다. 외부만 번지르르한 류경 호텔과는 다르게 금수산 태양 궁전은 그 상징성도 있기에 내부도 나름 관리를 철저하게 하는 편이었다.

    저 안에 김일성과 김정일의 시체가 보관되어 있기에 북한에서 가장 신경을 쓰는 건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도 이 어두운 곳에서 보고 있자니 마치 거대한 관을 보는 듯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방금 무슨 소리 못 들었어요?"

    "네?"

    "총소리가 난 것 같은데?"

    서아영의 말에 최정훈이 고개를 갸웃했다.

    "총소리요? 저는 딱히 들은 게 없……."

    탕!

    최정훈의 입이 멈췄다. 그와 동시에 시선이 태양 궁전의 입구로 향했다.

    "저항이 없지는 않을 테니 총소리가 조금 난다고 해도 이상하지는 않을……."

    탕탕탕탕!

    그때, 폭포수 같은 총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연발 놓고 갈기는 거 같은데?"

    최정훈의 이마에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미국이잖습니까! 한국은 점사나 단발이 기본이지만 천조국은 일단 연발 놓고 갈기는 게 기본이죠. 우리처럼 탄피 찾아서 바닥을 길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니까요."

    "그런가요?"

    말을 해놓고도 최정훈은 어이가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 이 폭포가 떨어지는 듯 들려오는 소리는 한두 사람이 갈긴다고 나올 만한 소리가 아니었다.

    저 안에서 지금 뭔가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어, 저기 누구 나온다!"

    그 순간, 활짝 열려진 대문에서 박성찬이 고개를 숙인 채 전력으로 뛰어나왔다.

    "응?"

    저 사람이 저리 제일 앞에서 도망쳐 나올 사람이 아닌데? 무슨 일이 있나?

    최정훈의 의문은 금세 풀렸다.

    박성찬이 사색이 된 얼굴로 고개를 들더니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최정훈 씨이이이이이!"

    "…네?"

    "이, 이지혁."

    "네?"

    "이지혁 씨 불러와요! 지금 당장!"

    "응?"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안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뛰쳐나오기 시작했다.

    "뭐, 뭐야!"

    서아영이 소리를 질렀다.

    아니, 돼지 멱따러 간 사람들이 저렇게 다들 나오면 어쩌자는 건가.

    막 뭐라고 소리를 지르려던 서아영의 입을 안쪽에서 들려온 괴성이 틀어막았다.

    끼에에에에에에!

    카아아아아아아아!

    서아영이 살짝 굳은 얼굴로 고개를 돌려 최정훈을 보며 말했다.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죠?"

    최정훈이 허탈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전쟁에 NDF를 동원한다고 해서 미쳤나 싶었더니, 나름 깊은 뜻이 있는 거였네요. 송정수 총재에게 사과해야겠어요."

    여기까지 와서 전공 분야를 만날 줄이야.

    "빠르게 처리를 한 번 해볼……."

    그 순간, 최정훈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 보니 저 안에 들어갔던 사람들도 대몬스터전에서는 잔뼈가 굵은 사람들일 텐데, 왜 다들 저렇게 꽁지가 빠져라 도망쳐 나오고 있단 말인가.

    특히 박성찬이라면 이제 혼자서 오거도 때려잡을 사람인데?

    "…대체 안에서 무슨?"

    박성찬이 바로 앞까지 달려오더니 다짜고짜 최정훈의 멱살을 잡았다.

    "이지혁! 이지혁 씨 어딨습니까? 당장 전화해서 여기로 오시라고 해요!"

    "네?"

    "아, 지금 저 안에!"

    박성찬이 사색이 되어 금수산 태양 궁전을 가리켰다.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생각을 한 최정훈도 눈을 가늘게 뜨고 태양 궁전을 주시했다.

    잠시 후.

    우지지직!

    쿠릉! 쿠릉!

    중장비로 건물을 때려부수는 소리가 들려오며 태양 궁전이 통째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도망쳐 나온 능력자들이 뭐라고 뭐라고 소리를 지르자 각 진영들에서 나름의 채비를 갖추느라 분주히 움직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이어…….

    콰르르릉!

    천둥이 치는 소리가 들리며 건물의 앞쪽이 통째로 무너져 내리더니, 그 안에서 이형의 모습을 갖춘 괴물들이 둑 터진 제방에서 쏟아져 내리는 물처럼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이런 미친!"

    그 광경이 마치 과거 동일본 대지진에서 검은 물이 밀려오는 모습을 연상하게 했다.

    익숙한 광경이면서 익숙하지 않은 광경이었다.

    최정훈이 소리를 질렀다.

    "전원 대형 갖춰요!"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는지 다들 재빠르게 움직였다.

    "후퇴는?"

    "불가!"

    후퇴?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들의 뒤에는 이지를 상실한, 오백만이라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여기서 물러난다는 것은 그들을 모두 몬스터 밥으로 던져 주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아무리 그들의 국가가 아니라고는 하나 다른 이들 역시도 다들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오백만이라는 압도적인 수 앞에서 태연할 수 있는 이가 누가 있겠는가.

    "절대 뚫리면 안 됩니다. 막아요!"

    최정훈은 눈을 돌려 김다현을 바라보았다.

    "라져."

    김다현이 앞쪽으로 튀어나가며 진영을 정비하기 시작하자 최정훈은 뒤로 달려 나가 무전기에 입을 가져다 대고 소리쳤다.

    "이지혁 씨 연결해 주세요! 지금 당장!"

    * * *

    "먹을 거 좀 없어?"

    "없어."

    "냉장고에 먹을 거 없냐고!"

    "내가 어떻게 알아!"

    "너희 집 냉장고에 뭐가 있는지를 니가 모르면 누가 알아!"

    "으으……."

    "가서 보면 될 걸 왜 오빠를 귀찮게 하고 그러는지 모르겠네요."

    "넌 또 왜 끼어들어?"

    "그런데 이 야밤에 먹어도 돼요? 살찔 텐데?"

    "나 요즘 활동 열심히 하고 있어서 좀 먹어도 돼. 칼로리 소비가 엄청 나거든."

    "…배는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은거 같은데?"

    "너 죽을래?"

    정인수는 조금 황망한 얼굴로 셋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 순간 숙소 애들이 다 자서 혼자 눈뜨고 대기타는데 심심하다는 이유로 정해민이 쳐들어오더니, 그걸 또 귀신같이 알고 김다솜이 쳐들어왔다.

    그러고는 이 꼴이다.

    '인기가 좋으시네.'

    생각해 보면 이상할 것이 없다.

    이지혁 정도면 남편감으로는 일등 신랑감이었다.

    '생각해 보니 정말 그렇네.'

    돈 잘 버는데 집안에 신경을 그리 쓰지 않는 타입이다. 이지혁 같은 인간이라면 결혼하는 순간 통장을 던져 주고 게임이나 하면서 할랑할랑하게 살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결혼했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 정보를 들은 것 같은데?

    혼란스러워하는 정인수를 두고 세 사람이 티격태격을 계속 이어 나가고 있었다.

    우우우웅.

    그 순간, 정인수의 휴대폰이 울렸다.

    "정인수입니다."

    - 이지혁 씨, 거기 있나?

    "예. 지금 같이 있습니다."

    - 지금 당장 작전실로 와주게! 지금 당장!

    가타부타 말은 없지만, 정인수는 그 목소리만으로 상황이 얼마나 급박하게 돌아가는지 파악할 수 있었다.

    '일이 틀어졌군.'

    "지금 바로 이동하겠습니다."

    - 서둘러 주게.

    "예."

    정인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지혁 씨."

    "네?"

    둘 사이에서 한숨을 쉬고 있던 이지혁이 정인수의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아무래도 일이 틀어진 것 같습니다. 청와대로 가야 합니다."

    "흐음."

    이지혁이 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죠."

    "오."

    순순히 일어나 주는 이지혁을 보며 정인수가 반색했다.

    "상황의 심각성을 아시는 모양이군요."

    원래대로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에도 군소리를 붙이는 게 이지혁의 스타일 아니던가. 국가 중대사에 대한 심각성을 알아준다는 것만으로도 감격스러운 정인수였다.

    "…어디로 가든 여기보다는 낫겠죠."

    "……."

    이지혁의 말에 정인수는 이제 숫제 머리채를 잡을 기세로 싸우고 있는 두 사람을 보았다.

    '나름 세계 평화에 이바지하고 있는 건가?'

    덕분에 이지혁이 순순히 나섰으니 감사패라도 수여해야 할 판이었다.

    "어쨌든 가시죠."

    "네."

    이지혁이 손을 휘저어 게이트를 열었다.

    막 게이트 안으로 몸을 옮기려는 순간, 방문이 열리더니 익숙한 얼굴이 안으로 들어왔다.

    "달링."

    이지혁이 들어온 이를 보고는 인상을 썼다.

    "너희, 어디 갔다 온 거야?"

    그동안 모습이 보이지 않던 에르카나와 아펠드리체가 방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두 사람의 등장에 김다솜과 정해민의 싸움도 순간 멈췄다.

    에르카나는 답지 않게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달링, 여기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냐."

    "뭔 소리야?"

    "시작됐어."

    이지혁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뭐라고?"

    "문이 열리고 있어. 이제 이 세계는 곧 마계와 소통하게 될 거야."

    "잠깐만."

    이지혁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직 북한 측에서 문을 열지는 않았잖아. 그런데 벌써 문이 열리고 있다고?"

    에르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시작되는 거야. 아무도 막을 수 없어. 마계와의 문이 지금 열리고 있어."

    * * *

    이지혁의 얼굴이 더없이 차게 굳었다.

    마계.

    그 이름이 주는 중압감은 이지혁마저 짓누르고 있었다.

    '문이 열리면 끝장이다.'

    세계가 지옥으로 화할 것이다.

    "마계와 지구 사이의 게이트를 연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닐 텐데? 거기에 필요한 에너지를 보급하는 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균열."

    "균열?"

    "원래대로라면 이 지구와 마계 사이에 문을 여는 것이 힘들겠지. 하지만 지금은 차원의 벽을 강제로 열어야 하는 상황이 아니잖아. 잊었어? 이 세계는 이미 금이 갔어. 그 금을 벌리는 것 정도는 그리 어렵지 않아."

    "…일리가 있는 말이군."

    이지혁이 고개를 돌려 다른 이들을 바라보았다.

    "먼저 가요."

    "이지혁 씨."

    "금방 따라갈 테니까, 먼저 가세요."

    자리를 비켜 달라는 뜻을 알아들은 정인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알고 있어요."

    "그럼."

    정인수가 정해민과 김다솜까지 데리고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자 이지혁이 둘을 돌아보았다.

    "뭘 하고 있던 거야?"

    "나름 막아보려고 했어. 그게 불가능했을 뿐."

    "…말도 안 하고?"

    아펠드리체가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지금 이지혁 씨의 몸이 어떤 상황인지 모르지는 않잖아요?"

    "……."

    "말을 하면 또 무리하셨겠죠. 지금 미국에 있는 이들과 함께 차원의 문을 닫으려는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쪽의 힘이 너무 강해요. 대체 누가 이런 짓을 하고 있는 건지 의심이 들 만큼이나요."

    "으음……."

    순간, 이지혁의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그렇게 강하다고?'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일단은 최선을 다해봤지만, 더 이상은 차원의 틈이 벌어지는 것을 억제할 수가 없어요. 이제는 결단을 내려야 할 시점이 왔어요."

    "결단?"

    아펠드리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세계는 이제 끝났어요. 마계의 식민지가 되겠죠. 그전에 이 세계를 버리고 탈출해야 해요."

    "세계를 버리고 어디로 가라고?"

    "물론 베라프죠. 몰라서 묻는 건 아니죠?"

    이지혁이 피식 웃었다.

    "거기와 마계가 뭐가 다르지? 차라리 내 입장에서는 마계가 좀 더 편안한데?"

    "농담을 할 상황이 아니에요."

    아펠드리체의 얼굴은 더없이 심각했다.

    "단순히 이 세계 때문이 아니에요. 알고 있죠? 당신의 몸은 이미 임계점에 도달했어요. 더 이상 힘을 쓰다가는 정말 악마가 되고 말 거예요."

    "……."

    "맞서 싸우는 것도 좋죠. 하지만 맞서 싸우다 보면 이 세계에 진정한 마왕이 강림하게 될 거예요. 그럼 이 세계는 마계의 손에 멸망하든가, 당신의 손에 멸망하든가 둘 중 하나의 결말을 맞이하겠죠."

    마계가 쳐들어오는 상황에서 그것을 막아야 할 사람이 이 지구의 입장에서는 더 큰 위협일지도 모른다. 그 아이러니를 느끼며 이지혁은 쿡쿡, 웃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지?"

    "당신이 아는 사람을 모두 데리고 가면 돼요."

    "……."

    이지혁은 아펠드리체의 말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당신이 지구에 미련을 끊지 못하는 이유가, 이 세계를 사랑하기 때문은 아니지 않나요? 지구에 있는 이들 중 당신과 연관이 있는 사람들을 버릴 수 없어서죠."

    이지혁은 아무 말 없이 아펠드리체를 바라보았다.

    "그러니 그들을 모두 데리고 가면 돼요. 당신의 힘이라면 베라프 안에서도 나름의 위치를 잡을 수 있을 거예요. 다른 이들이 침범하지 못하는 당신들만의 왕국을 건설해도 되겠죠. 살아만 있다면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니까."

    이지혁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네가 드래곤이니까 가능한 생각이야."

    "뭐가 다르죠?"

    "내게 관련된 사람을 모두 모은다고 치자. 그럼 그 사람들의 가족은 어떻게 할 거지?"

    "……."

    "내가 그들의 관계를 끊어버리고 그들만 피신시킨다면 그들은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을까? 불가능한 일이지. 그럼 그 사람들이 연관되어 있는 사람들도 모두 데려가야 해. 하지만 연관되어 있는 사람들은 다른 관계가 없을까?"

    아펠드리체는 대답하지 못했다.

    할 말이 없어서라기보다는 이지혁이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봐, 도마뱀."

    이지혁이 이죽거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너와 나는 영원히 평행선에 서 있을 수밖에 없는 거야. 드래곤의 사고방식으로는 인간을 이해할 수가 없지. 우리는 홀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야.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다면, 그 순간부터 우리는 서로의 영향을 받지. 그걸 억지로 잘라낼 수는 없는 거야."

    "군체라는 건가요?"

    "다르면서도 비슷한 말이군. 여하튼 너희들이 말하는 것처럼 나와 관계있는 사람들을 옮겨서 내 세상을 유지하려 한다면, 대한민국을 통째로 옮겨야 하는 상황까지 가버릴 거야. 그럴 능력은 없잖아?"

    에르카나가 한숨을 쉬었다.

    "달링, 지금 말싸움을 할 때가 아냐. 상황은 이미 심각해졌고, 이제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 아무리 그게 힘든 일이라고 하더라도 다른 대안이 없잖아."

    "대안은 언제나 있지."

    이지혁이 씨익 웃었다.

    "항상 나는 그런 생각을 했거든."

    "응?"

    "세상에 운석이 떨어져서 멸망을 한다고 하면 억울할까?"

    "……."

    "아니면 전염병이 돌아서 사람들이 하나도 남지 않고 모두 죽게 된다면 그게 억울할까?"

    에르카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같이 죽는다면 억울할 것도 없지."

    "세상과 운명을 같이하겠다는 거야? 당신이 그런 로맨티스트인 줄은 몰랐는걸?"

    "그거랑은 달라."

    이지혁은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알량한 정의감이나 의식 같은 게 아닌 거야. 너희의 입장에서 보자면 자포자기 쪽에 오히려 더 가까울지 모르지. 나는 너무 오래 살아왔어. 그래서 이제는 단순히 살아남기 위해서 내 부분들을 잘라내는 선택지로는 가고 싶지 않은 거야. 사는 것에 큰 미련이 없으니까 말이야."

    "……."

    "비참하게 사느니 차라리 당당하게 죽겠다는 말로 포장하기에는 좀 저열한 것 같기는 하지만, 뭐 어때. 이제 곧 나의 저열함을 평가할 사람들도 다들 사라질 것 같으니, 이 정도는 괜찮잖아?"

    "달링."

    "거기까지."

    이지혁이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는 알겠어. 그리고 왜 그런 말을 해주는 건지도 알아. 마지막까지 나를 생각해 준 너희들에게는 고마워하고 있어. 이건 진심이야."

    이지혁의 얼굴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진지했다.

    "하지만 하나는 기억했으면 좋겠군. 나는 인간으로 죽기 위해서 지구로 돌아온 거야. 이제 와서 내가 인간이 아닌 존재로 살아가기 위해서 이 세계를 버리고 베라프로 돌아갈 거라고 생각하는 건 나를 너무 이해하지 못한 생각이지."

    이들에게 이해를 바라지 않았다.

    그가 베라프에서 지구로 돌아오기 위해 그 수많은 고행을 겪을 때도 이들은 단 한 번도 이지혁이 왜 그래야 하는가를 이해하지는 못했으니까.

    '어쩌면 잘못된 건 내 쪽일지도 모르지.'

    이들에 비하면 인간이라는 건 참 불편한 생물이다. 자신 하나만을 위해 살아갈 수 있는 마족이나 드래곤에 비한다면 인간은 스스로를 세움과 동시에 타인과의 관계를 유지하지 못한다면 만족을 느끼지 못하는 생물이니까.

    이천 년에 달하는 시간 동안 타인과의 관계를 염원해 온 이지혁에게 이제 와서 관계를 소모하고 다시 그 삶으로 돌아가라고 하는 것은 사형선고와 다르지 않았다.

    "쿨한 죽음과 찌질한 삶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면, 나는 쿨하게 죽겠어. 물론 너희가 보기에는 의미가 없는 자살로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이지혁이 볼을 긁었다.

    "인간으로 태어나 다른 이들의 수십 배를 살아오고 마지막은 자살로 마무리한다면, 그것도 괜찮은 죽음이겠지. 그렇지 않아?"

    "모르겠어, 달링.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그래, 쉽지 않겠지."

    이지혁은 쿡쿡 웃었다.

    마족 주제에 인간을 구하려고 애쓰고 있으면서도 인간인 이지혁이 다른 이들과의 관계를 유지하려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에르카나도 참으로 마족답지 못하면서도 마족다웠다.

    "복잡한 말은 치우자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하나야. 마계가 지구로 쳐들어오든, 신들이 이 세상으로 쳐들어오든 결론은 같아. 지구는 내 구역이야. 거기를 흙발로 짓밟으려 하는 놈이 있다면 내 허락을 받아야지."

    이지혁이 낄낄대며 웃었다.

    "그러다 보면 뭔가 방법이 생길지도 모르잖아? 시간을 너무 끌었군. 나는 간다."

    "달링!"

    "이지혁 씨!"

    이지혁은 그들을 향해 한 번 싱긋 웃어주었다.

    "질척거리지 말자고. 우리에게는 그런 게 어울리지 않으니까 말이야."

    그 말을 남기고 이지혁은 게이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에르카나도, 아펠드리체도 그런 이지혁을 잡을 수 없었다.

    우우웅.

    이지혁이 들어간 게이트가 소멸되자 둘은 한동안 말없이 게이트가 사라진 공간을 바라보았다.

    "…결국은 예상대로 되었군요."

    "그러네. 달링이 고집불통인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 상황에서까지 고집을 부릴 줄은 몰랐어."

    "그런 사람이니까요."

    "그래, 그런 사람이지."

    그들의 사고방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그들이 이지혁이라는 사람에게 끌리는 것 아닌가.

    "아아, 입장 곤란하네. 이래 봬도 나는 마왕이란 말이지. 마계에서 쳐들어오는데 달링과 함께 거기에 맞서 싸우면 배신자 소리를 듣고도 남을 텐데."

    "그런 거 신경 쓰는 타입이셨나요?"

    "물론 신경 안 쓰지."

    에르카나가 고혹적으로 웃었다.

    "뭔 말을 하는 건지는 모르겠어. 사실 내가 저 사람과 오랜 세월을 같이하기는 했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이해 못할 때가 많다니까. 그래도 뭐 어쩌겠어? 달링이 한다면 따라가야지. 너는 어떻게 할 건데?"

    "저는……."

    아펠드리체의 눈이 가만히 가라앉았다.

    "아직 해야 할 게 남아 있습니다."

    그녀의 얼굴이 결연해졌다.

    * * *

    "이게 대체 뭐냐고!"

    최정훈은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금수산 태양 궁전 전체가 마치 거대한 게이트로 화해 버린 것 같았다. 그 안에서 몬스터들이 끝도 없이 밀려 나왔다.

    '본 적도 없는 것들인데.'

    그들이 일반적으로 봐오던 몬스터들과는 그 형태조차 달랐다. 끔찍한 이형의 괴수들이 밀려 나오고 또 밀려 나왔다. 각국의 최정예들이 막아내고 있음에도 속절없이 뒤로 밀려날 만큼 끝이 없는 웨이브였다.

    "이지혁 씨랑은 연락됐어요?"

    앞쪽으로 화염을 뿜어내던 서아영이 발작적으로 외쳤다.

    "곧! 곧 올 겁니다!"

    "젠장! 그 말만 몇 번 듣는 거야!"

    서아영의 분노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도 지금 발끝이 저릿저릿한 기분인데, 막상 저 몬스터들을 상대하고 있는 이들의 심정은 어떻겠는가.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거지?'

    최정훈은 작금의 사태를 이해할 수 없었다.

    금수산 태양 궁전에 마침 게이트가 열린 것인가, 아니면 박용휘가 말한 대로 저 안에서 문이 열린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혼란은 가중되었지만, 답을 줄 사람은 없었다. 밀려오는 몬스터들을 막아내며 뒤쪽에 있는 이지를 상실한 오백만의 사람을 지켜내는 것이 지금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응?"

    그때, 무너진 금수산 태양 궁전 안에서 한 사람이 천천히 걸어나왔다.

    * * *

    "누, 누구지?"

    최정훈은 심각한 얼굴로 그 광경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지금 이 순간에도 금수산 태양 궁전에서는 몬스터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몬스터의 웨이브를 헤치며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이 태연하게 걸어 나오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라도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저자가 무슨 이지혁도 아니고…….'

    최정훈은 얼굴을 굳혔다.

    지금 걸어 나오는 사람이 그가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특별히 인연이 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안면은 분명 있는 사람이었다.

    북한 내에 있음에도 전혀 북한 사람 같지 않은, 이상한 인간.

    정민성이 천천히 몬스터들 사이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여어."

    정민성도 최정훈을 발견했는지 손을 흔들었다.

    "이거, 오랜만에 뵙습니다?"

    여유가 넘치는 그의 행동에 자신도 모르게 욕지기를 내뱉고 만 최정훈이었다.

    '저 인간은 대체 뭐지?'

    어떻게 인간이 몬스터들 사이에서 저렇게 태연하게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처음 봤을 때부터 뭔가 이상한 느낌을 주던 놈이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인사라도 나누자는 건가?"

    "음?"

    정민성이 주변을 둘러보더니 씨익 웃었다.

    "아, 그러네요."

    딱!

    정민성이 손가락을 튕기자 그들을 향해 몰려들던 몬스터들이 거짓말처럼 일제히 멈춰 섰다.

    "뭐야?"

    "…뭔 일이 벌어지는 거지?"

    몬스터들을 밀어내고 있던 NDF 대원들과 다른 나라의 능력자들이 당황하여 주위를 둘러보았다.

    정민성은 그 광경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자, 이제는 대화를 하기에 적당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최정훈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보면 볼수록 느낌이 비슷하군.'

    뭔가 이지혁의 능력에 여유를 더한 것 같았다. 몬스터를 다루는 것이나, 저 느글느글함이나.

    "네가 북한을 장악한 것인가?"

    "음, 시작부터 일 이야기입니까? 최정훈 씨는 그래도 예의와 낭만을 조금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워커홀릭이라니… 실망입니다. 물론 먹고사는 일이 걸렸으니 이해는 합니다만……."

    정민성이 빙긋 웃었다.

    "그래도 제가 여유를 조금 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떠십니까? 커피라도 한잔하시겠습니까? 케냐에서 좋은 블렌딩이 들어왔는데 말이죠."

    최정훈은 이를 갈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평양으로 수많은 부대들이 집결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저 여유는 뭐란 말인가.

    "…상황을 굉장히 낙관하고 있는 모양이군."

    "천만에요."

    정민성이 패배했다는 듯 양손을 들어 올렸다.

    "제가 아무리 통뼈라 해도 이런 강대국들이 한 번에 몰려들어오는 것을 막아낼 수는 없죠. 정신적으로는 이미 그로기 상태입니다. 이제 제게 남은 미래는 알카트라즈에 갇혀서 변태 같은 간수에게 희롱당하는 것뿐이겠죠. 아니면 24시간 내내 CCTV가 설치된 감방에서 볼일 보는 것마저 생중계되는 삶을 살게 되든가요. 어느 쪽이든 달갑지는 않지만 말이죠."

    낄낄대며 웃는 정민성을 보는 최정훈의 심정은 뭐라 표현하기 힘든 것이었다.

    '기이하군.'

    무척이나 이상한 상황이었다.

    방금 전까지 몬스터와 격전을 벌이던 곳에 홀로 나타나서 분위기를 완전하게 휘어잡고 있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정민성의 언행 하나하나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 모든 게 네가 계획한 것인가?"

    "음……."

    정민성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고 할 수도 있고, 아니라고 할 수도 있죠. 이게 정확하게 누가 했다고는 말하기가 힘드네요. 제가 한 것이기도 하고, 그가 한 것이기도 하죠."

    "그? 저 안에 있는 놈을 말하는 건가?"

    "큭큭큭큭."

    정민성이 놀랐다는 듯이 웃었다.

    "이봐요, 최정훈 씨. 엄청 딱딱하게 나오는 줄 알았더니, 무척이나 재미있는 농담도 할 줄 아시네요. 설마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물은 건 아니죠? 정말이라면 좀 실망할 것 같은데?"

    '역시나.'

    최정훈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예상하던 일이지만, 그게 사실이라는 것을 재확인하는 과정이 그리 유쾌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동안의 데이터베이스가 쌓여 있어서 행동 패턴이 어느 정도는 예측이 되는 북한 수뇌부와는 다르게 지금 북한을 장악한 이들은 그 행동이 전혀 예측이 되지 않았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완전한 미지수라고 할 수 있었다.

    박성찬이 이를 갈았다.

    "뭐하는 겁니까, 최정훈 씨!"

    최정훈은 박성찬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시간이 필요해.'

    지금 있는 전력만으로 눈앞의 몬스터 대군을 상대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은 이미 증명된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지금 평양으로 접근하고 있는 부대들이 다들 자리를 잡고 지원할 수 있을 때까지 시간을 끄는 것이 이득이었다.

    "…몬스터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는데요?"

    "그렇죠?"

    아니, 사실 이득인지 아닌지 모르겠다. 지금 이 순간에서도 금수산 태양 궁전에서는 끝도 없이 몬스터들이 밀려나오고 있었으니까.

    "이해할 수가 없군."

    최정훈이 소리쳤다.

    "그래도 너는 인간 아닌가!"

    "…흐음?"

    "몬스터들로 뒤덮인 세계를 만들어서 어쩔 셈이지? 세상의 멸망이라도 바라는 건가? 같이 죽자고? 이 일로 너희가 얻는 이득이 뭐지?"

    "음음."

    정민성이 콧소리를 내더니 입을 열었다.

    "일단 몇 가지를 정정해야 할 것 같은데 말이죠. 우선 첫째로, 나는 당신들 같은 인간이 아닙니다."

    "…뭐?"

    정민성이 과장스럽게 팔을 휘저었다.

    "아아, 그렇다고 제가 무슨 악마라든가, 마족이라든가 그런 건 아니에요. 저는 정상적인 인간이죠. 다만, 음……."

    정민성이 손을 들어 최정훈을 가리켰다.

    "당신과는 다른 인간일 뿐이죠."

    "다른 인간?"

    "여기서는 최정훈 씨와 저 미국분들이 좀 다르다고 해야겠네요."

    최정훈은 멍청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말하는 것이 무슨 뜻인지 모를 리가 없었다.

    "능력자 신인류설이라도 주장할 생각인가? 고리타분한 구논리로군."

    "아아, 이건 곤란하죠. 그래도 최정훈 씨는 제가 그중에서는 나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사람을 무시해도 되는 겁니까? 그리고 그런 주장을 시작한 건 이쪽이 아니죠. 그쪽이 먼저란 말입니다."

    "이쪽?"

    "네. 그쪽에서 우리를 차별한 것이지, 우리가 그쪽을 차별한 것이 아니죠. 지금도 보세요. 전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곳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자리에 있는 평범한 인간이 있나요?"

    "……."

    "특수부대와 능력자라……. 정규군이 아닌 능력자를 최전선에 투입한다는 것 자체가 능력자들을 보통 인간과는 다르게 보고 있다는 것 아닙니까?"

    정민성의 이죽거림에 최정훈은 대답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상황은 너무도 명백했다.

    아무리 전력이라고는 하나 이들은 민간인이 아닌가.

    "뭐, 이젠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라서 다들 이상하다고 생각도 하지 않았겠지만 말이죠. 이 세계는 능력자들에 대한 차별이 그만큼이나 만연해 있죠. 사실 뭐, 그 정도는 그냥 우리 쪽에서도 이해할 만한 부분이에요. 진짜 깊은 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아시면 깜짝 놀라실걸요?"

    "깊은 곳?"

    정민성이 아이처럼 웃었다.

    "왜 그러세요, 아마추어같이. 능력자라는 것은 인류가 경험하지 못한 미지의 케이스잖아요.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이유는 호기심이 왕성하고 연구하길 좋아하기 때문이죠."

    최정훈의 얼굴이 점차 딱딱하게 굳어갔다.

    "한국에서는 안 그런 모양이죠? 타국의 지하실에는 지금도 아마 능력자들이 몇 백 단위로 쌓여 있을걸요? 지금쯤 피부를 벗겨보면 어떻게 반응할까를 연구하고 있을지도 모르죠. 낄낄낄."

    "헛소리!"

    최정훈이 막 격양된 반응을 보이려는 찰나에 정민성이 손을 들어서 말을 막았다.

    "자신이 모르는 일이라고 해서 없는 일이 아니라는 것쯤은 아실 텐데요. 아니면 최정훈 씨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일이니까 결코 아닐 거라는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의 소유자신가요?"

    "……."

    "그게 아니라면 인류라는 것들이 매우 도덕적이기 때문에 그런 일은 결코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계시는 겁니까?"

    최정훈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 세상에 가장 도덕적이지 않은 존재가 인간이라는 것은 반문할 필요도 없는 사실이니까.

    "그것 보십시오."

    최정훈이 대답하지 못하자 정민성이 낄낄대며 웃었다.

    "그러니 우리는 실제 세상에서 그런 일들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을 서로 감안하고 침묵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의식적으로 배제하면서 말이죠. 그 와중에 피해를 보는 것은 우리들뿐이죠."

    "그래서? 그래서 세상을 멸망시키겠다는 건가? 부조리가 존재하니까 리셋이라도 해볼 생각인가?"

    "아니죠."

    정민성이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설명을 이었다.

    "이쪽에도 나름 계획이라는 게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 그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최정훈은 정민성과 대화를 하며 인이어로 보고를 받았다.

    '대충은 다 모이고 있는 것 같은데…….'

    평양으로 들어오고 있는 부대들이 다들 집결하고 있었다. 하지만 최정훈은 공격 명령을 내릴 수가 없었다.

    '이지혁 씨는 멀었나?'

    이런 상황에 서 이지혁이 자리에 없다는 것은 너무 심한 부담이었다.

    "계획이라고?"

    "그것까지 일일이 말해 달라는 건 사실 좀 과한 처사라는 걸 모르시지는 않겠죠?"

    최정훈이 막 대답을 하려는 순간, 정민성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기다리시는 분은 아직 오지 않으신 건가요? 저도 슬슬 기다리기가 지루해지는데 말입니다."

    "…알고 있었나?"

    "이런, 이런."

    정민성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쪽은 그쪽을 매우 높이 평가하고 있는데, 그쪽은 저를 너무 무시하시네요.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무시하려던 의도는 없었지만, 그렇게 느꼈다면 나 역시 안타깝군."

    "사과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이겠습니다. 사과도 받았겠다, 한 가지는 더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 물어볼 것이 있다면 물어보시죠."

    그러자 최정훈은 진짜 궁금하던 것 하나를 생각해 냈다.

    "문은 이미 열린 것인가?"

    "네?"

    정민성이 등 뒤의 몬스터들을 돌아보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아아, 이걸 보고 말씀하시는 거군요. 하지만 최정훈 씨, 스케일이 생각보다 작으시네요. 이 정도로 마계를 논하시면 안 됩니다. 이건 그저 문이 열리기 전에 작은 뒤틀림 때문에 튀어나온 것들일 뿐이에요. 진짜 문이 열리면 이런 잡쓰레기들이 아니라… 진짜 무시무시한 것들이 나올 거라구요. 저도 도망가야 할 정도로 무서운 것들이 말이죠."

    "…마왕인가."

    "휘유, 이름만 들어도 몸이 오싹해지네요."

    정민성이 너스레를 떨고는 말했다.

    "그래도 아쉬울 건 없잖습니까. 당신은 행운아라고 할 수 있죠."

    "행운아?"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을 그 두 눈으로 볼 테니까."

    "……."

    "그런 눈으로 보지 마시죠. 저는 악당 같은 게 아닙니다. 되레 인류애가 넘쳐 나는 인간이라고 할 수 있죠. 인간은 지금 진화의 기회를 잡은 겁니다. 그러니 그 기회를 놓치지 말고 잡아야죠. 새로운 천 년을 위해서 말이죠."

    낄낄거리던 정민성이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 * *

    "빵!"

    정민성이 손을 내리자 최정훈을 위시로 한 이들이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큭큭큭."

    정민성은 그 광경을 보며 재미있다는 듯이 웃어 댔다.

    "이래서 인간이란 재미있는 존재라니까. 그렇게 겁을 먹고 있으면서도 허세를 부릴 수 있다는 게 참 재미있지 않아요?"

    최정훈은 더 이상 눈앞의 정신병자와 대화를 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가 보기에 정민성이 있어야 할 곳은 이곳이 아니라 심처에 위치한 능력자 전용 정신 병동이었다. 그런 곳이 없다면 만들어서라도 이놈은 당장 세상에서 격리할 필요가 있는 미치광이였다.

    "이런, 이런."

    정민성이 고개를 휘휘 저으며 말했다.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멀쩡한 제정신이니까요. 그럼에도 당신 눈에 내가 미쳐 보인다면, 그건 내가 미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 미쳐 돌아가고 있는 거겠죠."

    "…할 말은 그게 다인가?"

    "조금 남았는데, 마저 들어줄 용의는 있어요?"

    "하……."

    문득 이지혁이 적이 되면 저런 느낌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까지 이지혁과 같은 편에서 싸울 수 있었다는 것을 감사하는 마음이 절로 들었다.

    '그 양반이 깐죽거리기 시작하면 뒷목 잡고 쓰러질지도 모르겠네.'

    최정훈이 뭔가 대답을 하기 전에 미군 측에서 누군가가 나서 물었다.

    "너는 알파와 무슨 관계지?"

    '알파?"

    순간, 최정훈의 눈이 번뜩였다.

    알파라면 그때 그놈을 말하는 건가?

    알파라는 말을 들은 정민성이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에, 이거…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을 수도 있고, 관계가 없다고 할 수도 있는데… 어떻게 대답을 해드려야 할지 조금 애매하네요."

    "역시."

    그 말로 충분했다.

    미국 측이 무전으로 뭔가를 보고하기 시작하자 정민성이 인상을 썼다.

    "아니, 내가 관계가 없을 수도 있다고 했는데 이런 식으로 나오는 겁니까? 와, 황당하네."

    정민성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했다.

    "뭐, 이제 시간을 끌 만큼 끌었으니까, 저는 들어가 보겠습니다. 저 안쪽에서 세계를 뒤집어엎을 작업을 계속할 예정이니, 여러분께서도 저를 저지하기 위한 작업을 계속해 주시면 됩니다. 어느 쪽이 이기느냐에 따라 미래가 다이내믹하게 바뀔 것 같다는 예감이 드는군요."

    정민성이 이죽이다가 몸을 돌렸다.

    "아, 그리고……."

    그대로 가버릴 듯하던 정민성이 다시 빙글 하고 최정훈 쪽으로 몸을 돌리더니 입을 열었다.

    "혹시 이지혁 씨 오시면 미리 말 좀 해주실래요? 나도 그 양반은 무섭거든요. 왔다고 하면 바로 도망갈 생각이니까요."

    "…끝까지 사람을 놀리겠다는 건가?"

    "아니, 진심으로 무섭다니까."

    정민성이 낄낄대며 웃었다.

    "이지혁 씨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모르는 건 제가 아니라 되레 그쪽 같네요. 조심해요. 우리 손이 아니라 그 사람 손에 아작이 날 수도 있으니까. 하기야 이리 말해봤자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도 못하겠지만."

    "거기 서!"

    최정훈이 뭐라고 말을 하려 하자 정민성이 고개를 뒤로 돌렸다.

    정민성의 눈빛을 받은 최정훈이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지금까지의 장난기 어린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섬뜩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는 정민성이 거기에 있었다.

    "말이 안 통하시는 분이네요. 이미 말했을 텐데요. 이제 대화는 끝났다고."

    정민성의 말과 동시에 몬스터들이 천천히 그들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어차피 역사라는 건 피가 흐르는 법이죠. 훗날의 역사에 기록될 피가 제 피가 될지, 아니면 여러분의 피가 될지는 당신들이 어떻게 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자, 용사 여러분. 마왕의 레이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번 던전은 지하 3층까지로 구성되어 있으며, 1층은 우선 잡몹부터 처리하는 게 정석이겠죠. 저는 치팅 플레이는 좋아하지 않으니, 저와 대화를 나누고 싶다면 지하 3층까지 오시면 됩니다. 그럼 이만!"

    정민성이 과장되게 인사를 하고는 몸을 돌려 금수산 태양 궁전 안으로 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멈춰 섰던 몬스터들이 다시 그들을 향해 밀려오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아직 뭐 하나 명쾌하게 해결된 것도 없는데 저리 들어가 버리면 어떻게 한단 말인가!

    "TOT 준비됐어요?"

    "지금 갈깁니다!"

    콰앙! 콰앙! 콰앙!

    꾸역꾸역 밀려 나오는 몬스터들을 향해 쏟아지는 포탄의 비를 보며 최정훈은 이를 꽉 깨물었다.

    "오냐! 곧 거기까지 가주마!"

    * * *

    "…지진이라도 난 줄 알았네."

    건물이 통째로 흔들리기 시작하자 정민성은 고개를 휘휘 저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이러다가 건물이 무너진다고. 북한의 기술을 믿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저 몬스터들의 하중을 견디고 있는 것만 해도 이미 충분히 무리하고 있는 거라고. 내 말 듣고 있어, 마족?"

    아르고라스는 정민성의 말을 들으며 입매를 일그러뜨렸다.

    "나 역시 수많은 세월 동안 인간을 보아왔지만, 너처럼 경망스러운 인간을 보는 것은 이번이 두 번째다."

    "오, 그 말은 첫 번째가 있다는 건데… 그럼 그 첫 번째는 역시나?"

    "물론. 그를 인간으로 봐야 하는가의 문제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말이지."

    아르고라스는 정민성에게서 시선을 떼고는 눈앞에 보이는 검은 게이트로 손을 뻗었다.

    그곳에서는 오싹오싹한 마기가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으드드드득.

    곧 뭔가 우그러지는 소리와 함께 정민성의 뒤쪽에서 공간이 뒤틀리더니, 그 안에서 몬스터들이 튀어나와 밖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여섯 개째인가? 이러다 보면 그냥 문을 안 열어도 세상은 알아서 멸망할 것 같은데?"

    아르고라스가 고개를 저었다.

    "재미있군. 침략자인 나는 이 세계의 역략을 꽤나 높이 평가하고 있는데, 너는 이 세상을 나약하게만 바라보니 말이야."

    "너는 인간을 전력으로 평가하는 거고, 나는 인간을 인간으로 평가하지. 인간은 너희 마족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탐욕스럽고 잔인하고 끔찍한 생물이지만, 때때로 어이없을 만큼 약한 면도 있거든."

    "…모순적인 말이로군."

    "뭐, 그럴 거야. 인간이란 원래 모순덩어리니까."

    아르고라스는 고조되어 가는 게이트를 보며 키득대며 웃었다.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된다."

    "에에, 뭐, 그건 알겠는데… 그 조금을 버티기가 어렵다니까?"

    "되레 밀어붙이고 있는 거 아닌가?"

    "하?"

    정민성이 어이가 없다는 듯 아르고라스를 쳐다보고는 말했다.

    "내가 말하지 않았나? 인간이 얼마나 잔혹한 존재인지 말이야."

    "무슨 말이지?"

    정민성이 빙긋 웃었다.

    "만약 여기서 상황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면 세상을 위한다는 명분하에 이곳에는 핵이 떨어지게 될 거야. 아마 한두 발이 아닐 텐데? 샤워하듯이 핵을 맞으면 저 위를 꽉 채우고 있는 몬스터 따위는 순식간에 날아가 버리고 말겠지. 그리고 아마 우리는 죽는 줄도 모르고 재로 변해 버릴걸?"

    "자료를 통해 그 핵이라는 것의 위력은 충분히 알고 있다. 하지만 이곳에 핵을 떨어뜨린다면 다른 곳도 무사하지는 못할 텐데?"

    "천을 위해서라면 백쯤은 과감하게 희생시킬 수 있는 게 인간이라는 거지. 그래서 잔혹성으로 따지면 너희 마족들은 감히 인간을 따라올 수 없다는 거야."

    "칭찬인지 욕인지 모르겠군."

    아르고라스는 혀를 찼다.

    인간의 잔혹성은 이미 아흔아홉 번째 마왕을 통해서 질릴 만큼 경험한 뒤였다.

    "그리 걱정할 것 없어. 이제 얼마 안 남았으니까."

    "나도 딱히 걱정하진 않아. 이렇게도 안 되면 그냥 죽으면 그만이지. 괜히 일만 그르치고 살아남으면 잔소리 듣기가 짜증날 뿐이야."

    아르고라스가 미간을 좁혔다.

    확실히 이 인간은 특이한 인간이었다.

    "네가 몇 번째 인격이라고 했지?"

    "멍청한 소리를 하는군. 인격에 순서가 어딨어?"

    "여러 육체로 인격을 분화시켜 놓는다니, 인간 주제에 마족도 상상할 수 없는 짓을 태연하게 벌이는군. 네 본체는 어디에 있나?"

    "글쎄? 그쪽에서는 이쪽을 파악할 수 있는데, 알다시피 나는 분체라서 말이야. 손이 머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는 없는 법이잖아. 그 정도 생각도 못하는 건가? 응?"

    "…손 정도는 죽여도 괜찮을 것 같은데……."

    "큭큭큭큭."

    정민성은 아르고라스의 말에 배를 잡고 웃었다.

    "물론 날 죽인다고 해서 별문제가 있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내가 죽는다면 너 역시 무사하지는 않겠지. 컨트롤을 해줄 사람이 없잖아? 그렇지?"

    "그게 아니었으면 넌 이미 지옥에 있을 것이다."

    "마족 주제에 지옥을 믿는 건가? 그것참, 블랙코미디로군."

    단 한시도 쉬지 않는 저 주둥아리를 찢어버리고 싶었지만, 아르고라스는 극한의 인내심을 발휘했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그의 임무는 끝난다.

    마침내 이 세계와 마계를 잇는 완벽한 문이 열리는 것이다. 그럼 이 세계로 마왕들이 자유롭게 강림할 수 있게 된다.

    아무리 아흔아홉 번째 마왕이 있다고는 하나 더 이상 불사가 아닌 몸으로는 그 마왕들을 막아낼 수 없을 것이다.

    "열세 번째 마왕 역시 그 죄를 받아야 하겠지."

    수만 년간 노려오던 베라프를 상대로도 해내지 못한 업적을 바로 그 아르고라스가 쌓아 올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너는 이 작업이 굉장히 힘들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왜 이리 간단하게 되어버리는 거지? 우리가 실제로 북한을 목표로 잠입을 시작한 것도 얼마 되지 않잖아?"

    "없기 때문이지."

    "뭐가?"

    "빌어먹을 신관 놈들과 드래곤이 말이다. 음기를 정화할 수 있는 존재가 없는 세상인데, 인간은 베라프에 비해 별다르지 않게 많고 하나하나는 더 음험하다. 당연히 이 세계에서는 마이너스 에너지가 가득 찰 수밖에 없지. 내가 그 에너지를 이용하지 않았더라면 곧 그 에너지 자체만으로도 이 세상은 파멸했을 것이다."

    "도통 그놈의 음기니 마이너스 에너지니 하는 말이 뭔 말인지 모르겠단 말이야. 마족 놈들이 하는 말은 알아들을 수가 없어. 어쨌든 간에 이제 곧 열린다는 말이지?"

    "그렇다."

    "음, 뭐, 그럼 나는 이제 과자나 먹으면……."

    쿠우우우웅!

    자리에 누우려던 정민성이 화들짝 놀라 그 몸을 일으켰다.

    "뭐, 뭐야? 핵폭탄인가?"

    "아니."

    아르고라스가 고개를 저었다.

    "적어도 핵인가 뭔가 하는 것보다 더 무서운 존재가 왔다는 것만큼은 확실하군. 인간, 네가 나설 때다. 아흔아홉 번째 마왕이 나를 막아서지 못하게 발목을 잡아라."

    "…발목? 그냥 죽여 버리라고 해야 폼이 나지."

    "네 주제에?"

    아르고라스가 낄낄대며 웃었다.

    "오만한 인간이여, 그 나약한 육체와 마력으로는 감히 눈조차 마주 보지 못할 이가 바로 아흔아홉 번째 마왕이다. 지금은 비록 과거의 영광을 차마 입에도 담지 못할 만큼 나약한 자가 되어버렸다고는 하나, 과거의 편린만 남아 있다 하더라도 너는 감히 그를 감당할 수 없다. 이미 두 명의 마왕이 그것을 증명했지."

    "네네, 알겠습니다."

    "발목을 잡아라. 시간을 끌어.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너는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는 걸 그 두 눈으로 보게 될 것이다."

    정민성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밖으로 나가면서 입술로 혀를 핥았다.

    '그건 두고 봐야지.'

    그 새로운 세상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말이다.

    * * *

    우우웅.

    게이트에서 이지혁의 모습이 나타나자 윤영민이 반색을 하며 소리쳤다.

    "이지혁 씨!"

    "네네."

    이지혁이 귀찮다는 듯 윤영민의 인사를 흘리고는 송정수를 향해 물었다.

    "상황은요?"

    "최악."

    송정수가 비전을 가리켰다. 금수산 태양 궁전에서 파도처럼 몰려나오는 몬스터들의 모습이 보였다.

    "음……."

    이지혁이 그 광경을 보고는 침음을 흘렸다.

    "일단 확인이 필요하네. 이게 마계로 통하는 문이 열린 것인가, 아니면 다른 현상인가?"

    "아직 문이 열린 건 아니에요. 문이 제대로 열렸다면 저런 잡몹들이 튀어나오지는 않을 거예요."

    "그럼 다행이라고 봐야 하는가?"

    "다행이라……."

    이지혁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문이 거의 열려가는 여파로 공간이 일그러져 곳곳에 게이트가 출현하고 있는 상황으로 보이는데요."

    "…불행이구나."

    송정수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의 의견이 필요하네. 이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애들 다 철수시켜요."

    "으음?"

    "전부 철수시키고, 저기로 핵폭탄을 갈겨 버려요. 게이트고 뭐고 다 날려 버리게."

    "그게 불가능하니까 하는 말일세."

    "왜요?"

    이지혁이 이해를 못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송정수가 비전을 돌리라는 신호를 보냈다. 송정수의 신호를 받은 비서관이 비전을 돌리자 상공에서 찍은 사진이 보였다.

    "여기부터네. 금수산 태양 궁전 앞쪽으로 보이는, 이 거뭇거뭇한 것들이 다 사람일세."

    "사람?"

    이지혁의 미간이 좁아졌다.

    "대피시키면 안 돼요?"

    "이지를 상실했다고 하는구만. 그리고 이 많은 인원을 다 대피시키려면 적어도 여섯 시간 이상은 필요할 걸세."

    "끄응."

    이지혁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몇 명이래요?"

    "오백만."

    이지혁이 말없이 담배를 꺼내 물고는 손가락을 튕겨 불을 붙였다. 이지혁이 담배를 무는 것을 본 이들도 하나같이 담배를 꺼내 물었다.

    "더럽게 됐네."

    이지혁이 혀를 찼다.

    아무리 그가 사람 목숨을 그다지 귀하게 여기지 않는 이라고는 하지만, 오백만의 목숨을 일거에 희생시키자고 주장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저쪽으로 피해가 안 가게 핵을 쓰는 방법은 없어요?"

    "…정밀폭격이면 몰라도 정밀 핵 같은 건 들어본 적도 없네. 핵배낭을 활용한다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그걸 들고 저 안으로 잠입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뭐가 문제겠나."

    "그것도 그렇네요."

    이지혁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것도 미리 예상하고 깔아놓은 건가?'

    "게다가 우리나라는 핵이 없지 않은가. 미국이나 중국, 러시아에서 결정해야 할 일이지."

    "솔직히 말해봅시다. 하나쯤 숨겨놓은 거 없어요?"

    "없……."

    송정수가 바로 대답을 하려다가 조금 껄끄러운 면이 있는지 윤영민을 돌아보았다.

    "어, 없습니다."

    "그렇다는데?"

    이지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남들 다 가지고 있는 핵 하나 안 숨겨놓고 그동안 뭐한 거예요?"

    "그게 가지고 싶다고 가질 수가 있는 거면 이 고생도 안 하지."

    "하기야."

    이지혁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을 느꼈는지 더 이상은 윤영민을 몰아붙이지 않았다.

    "끄응, 그럼 별수 없이 저 안으로 들어가서 직접 때려 부숴야 한다는 건데……."

    "할 수 있겠나?"

    "뭘 빤한 걸 묻고 그러세요. 할 수 있든 할 수 없든 내가 가야 한다는 거잖아요."

    "…그렇지."

    "이럴 거면 처음에 빠지라고 하지를 말지."

    "사태가 이렇게 될 줄 우리가 알았나……."

    "그거도 예측 못하시는 양반들이 국가수반이라고 앉아 계시네요."

    "끄응."

    참 바른말만 하는데… 저 조동아리가 얄밉게 느껴지는 건 그들이 이제는 바른말을 듣고 싶지 않은 지위와 나이가 되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저 바른말 하는 조동아리가 정말 얄미운 조동아리라서 그런 건지 고민되는 송정수였다.

    "쯧, 여하튼 결론은 빤하네요."

    이지혁이 손을 휘저어 게이트를 열었다.

    "일단 가볼게요."

    "부탁하겠네."

    "그리구요."

    이지혁이 그답지 않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미리 미국이랑 말을 맞춰두세요."

    "뭘 말인가?"

    "상황이 여의치 않게 돌아간다 싶으면 그냥 날려요."

    "…핵을?"

    "네."

    송정수가 더없이 굳은 얼굴로 이지혁을 보며 말했다.

    "자네와 NDF들의 목숨을 보장할 수 없음에도?"

    "어차피 마계와 차원이 연결되면 다 죽어요. 최소한의 희생으로 미래를 도모할 수 있다면 그걸 선택해야죠."

    "너무 쉽게 말하는구만."

    "결정하는 자리라는 건 원래 그런 거예요. 모르지는 않으시겠죠?"

    대본이라도 읊는 듯 편히 이야기하는 이지혁을 보며 송정수는 무거운 침음성을 삼켰다.

    "약속하지. 만약 상황이 돌이킬 수 없어진다면, 자네의 목숨 따위는 절대 고려하지 않고 북한을 세상에서 지워 버리겠네."

    "간만에 듣는 시원한 말씀."

    이지혁이 씨익 웃더니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윤영민이 떨리는 목소리로 송정수에게 말했다.

    "총재님, 진심이십니까?"

    "그곳으로 가고 있는 이가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하고 하는 말이오. 우리가 호응하지 않으면 안 되겠지."

    마지막의 마지막이라면 고려의 가치도 없는 일이다.

    이지혁 한 사람의 목숨보다는 전 세계의 운명이 더 중요하니까.

    하지만 송정수는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는 씁쓸함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상황이……."

    부디 이지혁이 이 상황을 빠르게 해결해 주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크리스토퍼 연결해 주게."

    * * *

    우우웅!

    게이트 밖으로 나온 이지혁은 미친 듯이 몰려드는 몬스터들의 웨이브를 보면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오, 지구에서도 내가 이런 광경을 보는구나."

    이런 건 마계에서나 볼 수 있는 광경인 줄 알았는데 말이야.

    베라프에서도 보기가 힘든, 진귀한 광경이었다.

    안타까운 점은 저 광경이 지금 이지혁의 세계를 파괴하기 위해서 벌어지는 상황이라는 것뿐.

    "이지혁 씨!"

    게이트를 열고 나타난 이지혁을 본 최정훈이 반색을 하며 이지혁을 향해 달려왔다.

    "왜 이리 늦으셨습니까!"

    "아니, 그게 오지 말라고 했던 사람들이 할 말이에요? 사람이 양심이 있어야지, 양심이! 누가 들으면 내가 당연히 와야 되는 자리에 안 오고 놀다 온 줄 알겠네!"

    이지혁의 깐죽거림을 들으며 최정훈은 이상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역시나 이쪽이 진짜 같다니까.'

    저쪽 사이비 깐죽도 사람을 빡 치게 만들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이쪽에서는 제대로 된 내공이 느껴진다.

    그토록이나 반갑게 느껴지던 사람이 순간적으로 꼴 보기 싫어지게 만들 수 있는 능력은 아무나 갖출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여하튼 상황이 이렇습니다."

    "에라이!"

    이지혁이 성질을 냈다.

    "그 잘났다는 나라들이 다 처모여 있으면서 이거 하나 처리 못하고, 대체 뭐하는 거예요?"

    "…죄송."

    최정훈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순간적으로 이지혁의 말을 통역해 들은 각국의 지도부들도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먼 산을 바라보았다.

    "으이구, 잘한다, 잘해."

    이지혁이 혀를 차고는 손을 휘젓기 시작했다.

    생각 같아서는 삼박 사일 동안 잔소리를 늘어놓고 싶은 마음이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마계로 통하는 게이트는 열리고 있는 것이다.

    "앞쪽 막아요."

    "네?"

    "내 앞쪽을 막으라고! 지켜요!"

    "예!"

    이지혁이 뭘 할 것인지를 깨달은 최정훈이 빠르게 지시를 내렸다.

    지금까지 이지혁이 이런 식으로 주문을 영창할 시간을 벌 때는 마왕이 강림했을 때뿐이었다. 그러므로 이런 지시를 한다는 것은 이지혁이 현재의 상황을 마왕의 강림급이라 보고 있다는 의미였다.

    최정훈은 무전을 통해 타국에도 협조를 구하고는 이지혁의 앞쪽을 두텁게 쌓았다.

    "앓느니 죽지!"

    이지혁이 영창을 시작하며 손을 천천히 휘저었다. 그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마나가 허공으로 몰려 올라가며 하늘에 거대한 마법진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저게 뭐지?"

    이지혁이 주문 쓰는 것을 본 적이 없는 다른 나라의 능력자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이지혁의 행위를 바라보았다.

    앞쪽에서는 몬스터들이 게걸스레 달려들고 있고, 한쪽에서는 허공에 괴이한 문양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흔히 볼 수 없는 일이고,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광경이기도 했다.

    "끄으으으……."

    이지혁의 몸을 타고 마나가 흘러나왔다.

    이어 입가에서도 핏줄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최정훈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몸이 못 버텨.'

    예전에는 이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서아영이 육체에 흑마력이 흐를 때는 지옥 같은 고통이 느껴진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이지혁은 너무도 쉽게 마법을 써 댔기에 이지혁과 능력자들의 몸에 마나가 다르게 작용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했다.

    하지만 이제는 이지혁이 고통스러워하는 것이 너무도 확연하게 보였다.

    "으라차아아아!"

    이지혁이 기합성을 뿜어내더니, 몸에서 검은 마나가 마치 타오르듯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견갑골에서 흘러나온, 불타오르는 듯한 검은 마나가 거대한 날개의 형상을 만들어내고, 전신이 검은 마나에 뒤덮였다.

    "…씨발, 저게 제대로 된 악마지."

    박성찬이 이지혁의 모습을 보며 치를 떨었다.

    전신이 검은 불꽃으로 둘러싸인 이지혁의 등 뒤로 족히 10m는 될 듯한 검은 불꽃의 날개가 피어올랐다.

    그 모습만 보면 몬스터들과 싸우는 게 아니라 몬스터들의 대장쯤 되어 보였다.

    고오오오오오!

    마법진이 뒤틀리기 시작하더니, 허공에 거대한 마나의 구름이 응축되기 시작했다.

    "뒈져라!"

    이지혁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펴자 응축된 마나가 쭈욱 펼쳐지더니, 아래로 마나의 덩어리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쿠웅!

    작은 마나 덩어리가 몬스터들을 향해 떨어진다.

    그런 후…….

    콰아아아아아아앙!

    바닥에 떨어져 몬스터와 접촉한 마나는 순간 폭발을 일으키며 거대한 기의 소용돌이를 만들어냈다. 소용돌이 안으로 빨려 들어간 몬스터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조각조각 분해되어 피 보라로 화했다.

    "와, 씨……."

    서아영이 그 광경을 보며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녀의 화염에도 전혀 피해를 입지 않던 몬스터들이 그냥 죽는 것도 아니고, 말 그대로 분자 단위로 분해되고 있었다.

    '저 인간은 대체 얼마나 강한 거야?'

    예전에는 나름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지혁을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대체 이지혁이 어느 수준에 도달해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콰아아아앙!

    콰아아아아앙!

    수십 줄기의 마나 덩어리가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금수산 태양 궁전을 말 그대로 지도에서 지워 버리고 있었다. 그리고 태양 궁전의 주변을 채우고 있던 몬스터들도 깔끔하다고 해도 좋을 만큼 완벽하게 지워지고 있었다.

    "맙소사."

    이지혁의 이름만 들어 알고 있던 타국의 능력자들은 손을 늘어트린 채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미친. 혼자서 공습이라도 하는 것인가?"

    인간이 어떻게 저런 능력을 보일 수 있단 말인가.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할 광경이었다.

    "정신 안 차려?"

    이지혁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자 다들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직 안 끝났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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