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77화 (77/118)

[■] 아, 내가 그 꼰대였구나 [■]

─────

"오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별말씀을요."

최정훈은 주위를 돌아보며 생각에 빠졌다.

'장관이군.'

정예 중의 정예들만 모았다고는 하나 4개국이 모이다 보니 그 수가 적지는 않았다.

'이들이 능력자로 따지면 전 세계에서 5위권 안에 드는 국가 소속이라는 거지?'

새삼 동아시아가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를 실감하는 최정훈이었다.

중국과 러시아야 실제 국방력으로는 2, 3위를 다투는 나라고, 일본은 그 뒤를 바짝 쫓는 나라가 아닌가.

한국도 10위권 안에는 충분히 들 수 있는 나라였다.

그리고 능력자로 한정한다면 어쩌면 지금 여기에 모인 나라가 전부 5위권 안에 들지도 모르는 전력들이다.

'이만한 전력이 북한 하나를 치기 위해서 모였다니.'

어찌 보면 히스테릭에 가까운 반응이다. 하지만 그 반응을 통해 전 세계가 얼마나 마왕이라는 존재를 두려워하고 있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마계와의 문이 열리면 공멸이지.'

그나마 그 사태를 벌이려는 국가가 북한이기에 다행인 일이었다. 북한이 강하기는 해도 미국이나 러시아에서 벌어지는 것보다야 100배는 나은 상황이다. 뭐, 미국이나 러시아가 미쳤다고 그런 일을 할 일은 없겠지만.

"일단은 대기를 하시면 됩니다."

"작전 개시 시간은요?"

"앞으로 세 시간은 더 걸립니다."

"예."

세 시간 뒤에 투입이라…….

최정훈은 담배를 꺼냈다.

"어디서 되는지 아십니까?"

"녜?"

최정훈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이곳이 한국이 아니라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최정훈이 담배를 꺼내자 곽민호도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아마 곧 육군이 진입을 시작할 겁니다. 그와 동시에 상륙이 시작되겠죠."

"그렇군요."

그 이후로 둘은 서로 말이 없었다.

슬슬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었다. 최정훈은 담배를 비벼 끄고는 NDF들이 있는 곳을 향했다.

"기분은 어때요?"

서아영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날 같아요."

"…대답의 적절함은 그렇다 치고, 무슨 기분인지는 정말 잘 알겠습니다."

"남자가 어떻게 알아!"

그럼 그렇게 대답을 하지 말든가. 누가 누구한테 성을 내!

최정훈은 한숨을 내쉬고 다른 이들을 돌아보았다.

다들 얼굴에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지만, 사실 최정훈도 긴장되는 마음을 달래기가 힘들 지경이니 말이다.

나름 멘탈이 좋은 편이라고, 아니, 멘탈 하나만큼은 대한민국의 누구를 데리고 오더라도 상대할 수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최정훈이 이런 꼴인데 다른 사람들이야 오죽하겠는가.

"커피 한잔씩들 하죠."

"…여기가 어딘데 커피를 먹어요?"

"물이랑 믹스커피는 가져왔잖습니까."

"버너가 없는데 물을 어떻게 데웁니까?"

"왜 못 데워요?"

최정훈이 고개를 돌려 서아영을 바라보았다. 최정훈의 시선을 받은 서아영이 부들부들 떨며 입을 열었다.

"아주 기분도 엿 같고 좋은데, 제대로 한 번 태워 드려요?"

* * *

쪼르르륵.

종이컵에 따뜻한 물이 채워졌다.

"흥!"

서아영은 주전자를 몇 개나 데워놓고는 커피를 홀짝이고 있었다.

말은 그렇게 해도 고분고분 시키는 대로 주전자를 데우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등 뒤에서 수군수군대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면 최정훈씨 말은 참 잘 듣는단 말이야."

"그렇지?"

"예전 성격 생각해 보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 막말로 이지혁 씨가 나타나서 가장 수혜 받은 사람이 서아영 부장님 아냐? 그전에야 지랄마녀 소리 들으면서 성질머리 더럽다는 소리는 다 듣고 다녔는데, 이지혁 씨가 나타나서 좀 묻혔잖아."

"확실히 그런 면이 있지. 그런데 내 기억에는 예전에도 최정훈 씨가 말하는 건 대부분 다 들어줬던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그러네?"

과거 NDF가 생기기 이전, KSF 시절에도 서아영은 물론, 최정훈까지도 유명 인사였다.

"예전에는 그래도 최정훈 씨가 제일 합리적이니까 말을 들어준다고 생각었는데, 지금 와서 보면 그게 아닌 것 같다니까."

"아니면?"

"관심 있는 거 아닐까?"

그때,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추운 사람이 있는 것 같은데?"

"…하하하."

김다현은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커피를 홀짝였다. 여기서 입을 더 놀렸다가는 한겨울에 아주 따뜻해질 수도 있었다.

따뜻하다 못해 살가죽이 홀랑 타버리겠지.

따뜻한 커피가 뱃속으로 들어가니 기분이 좀 진정되는 느낌이었다.

"언제 시작한답니까?"

"세 시간 정도 걸린답니다."

"우라질, 오래도 걸리네. 빨리 좀 시작하지."

박성찬이 초조한 듯이 말하자 다들 동의하는 듯이 침묵했다.

매도 빨리 맞는 게 나았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으려니 긴장감이 더 높아지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긴장되는 건 첫 출동 이후로 처음인거 같은데?"

"…그래? 나는 마왕 상대하는 것보다는 이게 백배는 나은 것 같은데."

"…취소하지. 나도 이게 낫다."

적어도 아차 하는 순간에 싸그리 전멸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에 젖어 있진 않아도 되니까 말이야.

"잘해야 돼."

김다현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뭘 그리 딱딱하게 그러냐?"

"…이번 작전에는 이지혁 씨가 없잖아."

"그게 왜?"

"이지혁씨가 빠진 첫 작전에서 실패를 한다고 생각해 봐. 무슨 말이 나오겠냐? 그거도 미국, 중국, 러시아에 일본까지 합류한 작전이잖아."

"음……."

"실패라도 하면 NDF는 이지혁 없으면 아무것도 못한다는 말이 나올걸? 그리고 그게 사실이 되는 거야. 반박의 여지도 없이 말이야."

뒤에서 그 말을 듣고 있던 최정훈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맞다.

NDF는 지금도 전 세계에서 따져 봐도 최상위 능력자 조직이라고 할 수 있지만, 대부분 해외에서는 이지혁이 속해 있는 조직이라는 인지도가 더 높았다.

이지혁이 빠진 NDF는 그 수준은 높을지 모르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여 주력으로 쓰기는 애매한 정예 부대 정도의 취급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런 말 안 들으려면 이번에는 반드시 성공해야 돼."

"말은 쉽지."

박성찬이 혀를 찼다.

"뭔 군대도 안 갔다 온 것들이 전쟁을 쉽게 말하고 있어."

"형님은 다녀오셨습니까?"

"니들이 1111을 아냐?"

"…비밀번호?"

박성찬이 절레절레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모르는 게 때로는 약이 될 수도 있지만, 사람이 사람을 상대한다는 것은 절대 쉬운 게 아니다."

"예."

최정훈은 빙긋 웃었다.

'저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야.'

능력자가 되기 전에 직업군인이었던 아이언 박성찬이다. 그가 있기에 사람들이 조금은 안심을 할 수 있었다. 박성찬 역시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 안다는 듯이 무게를 잡아주고 있었다.

"일단은 체온을 유지해야겠네요. 막사라도 하나 잡아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여기서 대기시킬 줄은 몰랐습니다. 과연 대륙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말 하다가 잡혀가는 거 아닙니까?"

"…뜻밖의 휴식이네요."

"절대 못 잡아가게 할 겁니다."

저 뒤에서 군인들이 담요를 공수해 오고 있었다.

'빠르군.'

확실히 필요한 게 무엇인지를 알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곽민호가 최정훈에게 다가와 말을 했다.

"방금 돌입했답니다."

"음, 시작이네요."

"예. 이제 한동안은 대기를 해야 하니까, 일단은 담요 좀 덮으시죠. 미리 체력 빼지 마시구요."

"예."

담요를 덮고 뜨거운 커피를 홀짝이자 심장이 천천히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진짜 시작이군.'

지금까지는 반쯤 꿈을 꾸는 듯이 현실감이 없었는데, 돌입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긴장감이 확 들기 시작한다.

전쟁이다.

반백년 만에 한반도가 전쟁의 포화에 휩싸이는 것이다.

"우리 쪽 책임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영 마음이 편치는 않군."

북측의 수뇌부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NDF의 전력이 없다고 하더라도 한미중일러 5개국의 합공을 버틸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하루라도 막아낼 수 있다면 대단하다고 평가해야 할 정도였다. 특히나 미국은 수뇌부 타격이 아니라 휴전선 이북을 지워 버릴 기세로 항공모함을 비롯한 가용한 모든 병력을 끌어모으고 있었다.

너무 과한 거 아니냐는 최정훈의 말에 크리스토퍼는 할 수 있을 때 모든 것을 해두지 않으면 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게 된다는 말로 대답했다.

'맞는 말이지.'

하지만 그 말이 공허하게 들리는 것은 가용할 수 있는 최고의 전력을 두고 왔기 때문일 것이다. 이지혁 없이는 아무리 전력을 끌어모은다고 해도 최상의 전력을 모았다는 기분이 들지 않는 것이다.

'조금 쉬어둘까.'

최정훈은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며 눈을 감았다.

잠을 잘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잠이 오지도 않겠지만, 지금 괜히 잠을 잤다가는 긴장감이 떨어질 수도 있고, 신경이 날카로워진 대원들이 사고를 칠 때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그저 눈만 감고 있는 것이다.

* * *

"최정훈 씨?"

"으음?"

최정훈이 화들짝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언제?'

그저 눈만 붙이고 있을 생각이었는데, 어느새 잠이 들고 만 것 같았다.

눈을 떠보자 주변이 NDF 대원들로 가득했다.

"와, 잘 잔다."

"무슨 신경이 나일론인가?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저렇게 꿀잠을 잘 수가 있지?"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지. 크, 저 여유와 패기! 배워야 하는 건데."

최정훈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이미 다른 이들은 다들 준비를 끝낸 것 같은데, 그만 자고 있던 모양이다.

"시간이?"

"돌입 30분 전입니다."

최정훈이 한숨을 내쉬었다. 브리핑은 이미 몇 번이나 했기에 그 정도 시간이 남았다면 큰 문제는 없었다. 다만, 이 쪽팔림을 어떻게 해야 할 뿐이지.

"많이 피곤했나 보다."

"그럴 만도 하지. 최근에 퇴근하는 걸 거의 못 봤으니까."

"그냥 잠이나 좀 자지."

최정훈이 담요를 밀어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눈이 무거웠다.

곽민호가 최정훈에게 다가와 담배를 물려주었다.

찰칵.

폐 속으로 독한 담배 연기가 들어오자 잠이 확 깨는 기분이었다. 최정훈은 고개를 두어 번 흔들어 잠을 밀어내고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이미 그들뿐 아니라 타국의 능력자들도 모두 집결해 있었다.

'국제 상황이라 그런지, 다르긴 다르구나.'

한국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지금쯤 대가리라고 할 만한 인간이 제일 앞에 서서 일장 연설을 늘어놓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름 국제적인 일이라서 그런지, 그런 꼰대는 보이지 않았다. 설령 하려고 한다 해도 이 다국적군 앞에서 누가 연설을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겠지만 말이다.

"이제 준비하셔야 합니다."

"예."

최정훈은 머리에 몇 번이고 시뮬레이션 한 내용을 다시금 되새김질했다.

이제는 눈을 감으면 평양의 지도가 펼쳐질 정도지만, 몇 번이고 다시 꼼꼼하게 내용을 되뇌고 또 되뇌었다.

'이 정도면 됐어.'

설사 안 됐다고 하더라도 이제는 됐다고 생각해야 한다. 남은 것은 확신뿐이다.

"저기요, 최정훈 씨."

"네."

"이제 그만 들어갈 때 된 거 같은데요."

"슬슬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럼 한마디 안 하세요?"

"네?"

최정훈이 고개를 돌리자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는 대원들이 보인다.

"……아, 내가 그 꼰대였구나."

최정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 * *

"제가해야 하는 겁니까?"

"그럼 누가 하죠?"

김다현이 서아영을 바라보았다.

아, 안 돼.

서아영에게 연설 같은 걸 시켰다가는 '싸그리 다 태워 죽여 버려!' 같은 말이 튀어나올 것이다.

사기는 오르겠네. 그것도 엄청.

'…정인수 소장은 왜 같이 안 와 가지고.'

정인수가 왔다면 넘기고 빠져나갈 수 있었는데, 정인수가 없는 이상 이곳에서 나름 상황을 정리할 만한 사람은 최정훈밖에 없었다. 그 사실이 오늘따라 더욱 서글픈 최정훈이었다.

"흠흠."

피할 수 없으면 해야지.

"사실 저는 뭔가 시작하기 전에 누군가 말을 거창하게 늘어놓고 하는 걸 별로 안 좋아해서 말입니다."

대원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저거, 좋아한다는 말 맞지?"

"저런 건 거꾸로 들으면 된다고 하더라."

아니라고!

자기들이 시켜놓고는 왜 사람을 몰아가고 그래!

억울했지만 여기서 드잡이질을 하기에는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얼른 하시죠."

"…네."

최정훈이 다시 헛기침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사실 이번 일은 대한민국에 있어서는 매우 역사적인 일입니다."

"시동 거는 거 같은데?"

"아, 나는 벌써 잠 온다."

"시작이 제대로 거창한데? 이거 한 시간 각 아니냐?"

최정훈이 입을 꾹 다물었다.

복수할 거다, 이 양반들.

서아영이 손을 번쩍 들었다.

"네."

"너무 긴데요."

"시작도 안 했거든요!"

"길 것 같아서요."

최정훈은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말았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이 양반들 긴장이 많이 풀린 모양이었다. 저리 장난들을 치고 있는 것을 보니 말이다.

"다들 익숙지 않은 일을 하게 된 것에 대해는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일 역시 국민들을 지키기 위한 일의 일환이라는 것은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최정훈은 깊이 심호흡을 하고 말했다.

"작전이 끝나는 시간에 여기 있는 사람들이 모두 다시 모여서 커피 한잔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상입니다."

"오올, 짧은데?"

"자기가 피곤해서 그런 거 아냐? 아니면 아직 잠이 덜 깼다든가?"

"그럴 수도 있겠다."

시키지를 말라고! 시키지를!

최정훈이 나직하게 이를 갈았다. 이 인간들은 가면 갈수록 장난기가 심해지는 느낌이었다.

"최정훈 씨."

"예."

"돌입 10분 남았습니다."

곽민호의 말에 최정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으로부터 10분 뒤, NDF는 중국과 러시아, 그리고 일본의 능력자들과 함께 평양으로 급파됩니다. 현재 한국과 중국의 상륙부대가 평양 인근까지 근접했습니다."

"으음, 예."

"5분 뒤에는 미국의 특수부대와 능력자들이 강하를 시작할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텔레포트를 시작할 테니, 지금부터는 준비를 하고 있어주시기 바랍니다."

"예."

최정훈이 뒤를 돌아보고는 말했다.

"다 들으셨죠?"

"네네."

대원들이 심드렁하게 대답을 했다.

"……."

최정훈은 그 반응을 보며 이상한 감정에 휩싸였다.

'이 일이 끝나고 나서도 저런 반응이 나올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말이야.'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한 사람도… 다치지 말고 만납시다."

나직한 대답이 돌아왔다.

"최정훈 씨, 이제 준비하셔야 합니다."

"예, 알겠습니다."

최정훈은 대원들의 얼굴을 한 번씩 바라보고는 곽민호가 이끄는 대로 텔레포터가 위치한 곳을 향해 걸어갔다.

'이상한 기분이군.'

불안함과 흥분이 공존하고 있었다. 최정훈은 얼굴을 한 번 쓸어내리고는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 * *

"곧 평양으로 요원들이 급파됩니다."

"으음……."

윤영민은 스크린에 뜬 지도를 긴장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지도 내에는 평양으로 근접하고 있는 부대들의 위치가 실시간으로 체크되고 있었다.

"교전은? 교전은 없는 건가?"

국방부 장관이 묵직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아직은 딱히 제대로 된 교전이랄 게 없습니다. 국경 부근에서 산발적 저항이 있긴 했지만, 예상보다 쉽게 뚫어내고 있습니다."

"그래요?"

윤영민의 얼굴이 확 폈다.

"이대로라면 별다른 희생 없이 해결할 수 있겠군요."

"그렇습니다."

그때, 혀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윤영민이 송정수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다른 의견이 있으십니까, 총재님?"

원래라면 국가 기밀이 마구 난무하는 이 회의실에 송정수가 들어와서는 안 되는 것이지만, 이 사태를 본인의 능력만으로 해결하기 힘들다고 판단한 윤영민은 전격적으로 송정수를 총리로 발탁했다.

예전이었다면 송정수도 윤영민의 밑에서 총리를 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을 테지만, 사안이 워낙에 중대하기에 두말없이 총리직을 수락했다.

"대통령님, 북한의 군사력이 어느 정도인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계십니까?"

"…정확하게는."

"물론 연합군의 전력이 압도적이기는 하지만, 보병의 저항조차 없다는 것은 뭔가 이상한 상황입니다."

"으음, 확실히 그렇군요."

"국방부 장관."

"예, 총리님."

"휴전선 쪽 상황은 어떤가. 이상이 발견되지는 않고 있나?"

"쥐 죽은 듯이 조용하답니다."

"이상하군."

송정수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다 말고 바라보자 윤영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을 구한 송정수가 입에 담배를 물고는 불을 붙였다.

"전쟁이 일어났다는 것은 이미 북한 전역으로 전파가 되었을 거란 말일세. 그렇다면 군사력이 가장 집중되어 있을 휴전선 쪽에서 뭔가 움직임이 있어야 한다는 거지. 그런데 아무 움직임이 없다?"

송정수는 고개를 저었다.

"이건 말이 안 되는 거지. 미국 측에 연락을 해보세. 아무래도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는 듯해. 가능하다면 평양으로 진입하는 것도 좀 늦춰야겠어."

"하지만 이제 곧 진입입니다."

송정수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러니까 연락을 해보라는 것 아닌가! 생때같은 목숨들이 개죽음당할 수도 있다는 뜻일세! 못 알아듣겠는가?"

국방부 장관이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는 밖으로 뛰어나갔다.

"으음……."

그 광경을 보며 송정수가 한숨을 내쉬었다.

'얼었어.'

원래 이런 판단은 그가 아니라 국방부 쪽에서 내려야 한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실전을 겪어보지 못한 이들이다 보니 사고가 유연하지 못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겠지.'

이지혁이 그를 이계로 보내지 않았다면, 거기서 지옥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송정수도 지금 저들과 그리 다른 판단을 내리지는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쉬운 일 같은 건 없어. 쉬워 보이는 일만 있을 뿐이지.'

당장이 쉽다면 그 뒤쪽에는 몇 배나 어려운 상황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초조한 마음으로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얼마 지나지 않아서 국방부 장관이 다시 들어왔다.

"…미국 측은 작전시간 변경이 어렵다는 입장입니다."

"어째서?"

"직접 통화하시는 게……."

송정수가 눈살을 찌푸리고는 전화기를 들었다.

"송정수입니다."

- 미 국방부 장관인 보이렉입니다.

"크리스토퍼 맥클라렌 씨 부탁드리오."

-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전쟁 중이오. 실권자와 빠른 연락이 필요하니, 크리스토퍼 맥클라렌 씨와 연결을 해달라고 하고 있는 거요."

- 그건 불가합니다.

"크리스토퍼 맥클라렌 씨한테 집 앞에 검은 게이트가 열리는 꼴을 보기 싫으면 전화 받는 게 좋을 거라고 전하시오. 이 말을 전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그 양반 손에 개박살이 날 것이라 장담하지요."

잠시 수화기 너머로 침묵이 느껴졌다.

- 기다리시오.

윤영민은 송정수의 통화를 들으면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의 국방장관이라면 대한민국의 대통령보다 영향력이 높은 사람이라 할 수 있었다. 그가 직접 통화를 한다고 해도 변변한 말조차 꺼내보지 못할 텐데, 송정수는 아주 쉽게 그를 요리해 대고 있었다.

'연륜과 경륜인가.'

그가 갖추지 못한 것이었다. 이제 곧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야하는 윤영민이기에 질투나 시기는 들지 않았다. 되레 안심하는 마음이 컸다.

'나보다는 훨씬 이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야.'

- 전화 바꿨습니다. 크리스토퍼 맥클라렌입니다. 그쪽은?

"대한민국 총리 송정수입니다."

- 이런, 진짜 거물이 납셨군요.

여유로운 크리스토퍼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조금 전 통화했던 국방부 장관이 애송이로 느껴졌다.

"시간이 없으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북한 쪽의 동향이 심상치 않습니다. 평양 진입을 조금 늦췄으면 좋겠습니다만.

- 어렵습니다.

"어째서죠?"

- 이쪽에서는 이미 대원들이 출발했습니다. 그리고 이건 귀국과 우리가 상의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각국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란 말입니다. 저들은 동맹국이지 우리 측의 명령을 받는 입장이 아닙니다.

"하지만 당신이 마음만 먹는다면 할 수 있을 텐데?"

- 흐음…….

크리스토퍼의 묵직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 송정수 총리님.

"말씀하시오, 미스터 맥클라렌."

- 희생이 있을까 봐 우려하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유와 평화는 희생 위에 피어나는 꽃 같은 겁니다. 지금 단 한순간의 망설임 때문에 시기를 놓친다면 비교도 할 수 없는 희생이 벌어질 겁니다.

"뭔가 정보가 있는 거요?"

- 우리 측에서 가장 꺼려하는 이가 개입했다는 정황이 있습니다. 이지혁급, 아니, 이지혁 이상의 위험인물입니다.

"…그런 자가 있단 말이오?"

- 지금 다 설명드리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건 알아주십시오. 우리 역시 최정예의 대원들은 평양으로 급파하고 있습니다. 귀국의 능력자들만이 위험에 처해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설사 그들이 위험에 처하더라도 지금 평양으로 가는 것이 최선입니다. 부디 국가와 세계를 위한 현명한 결단을!

"…빌어먹을."

송정수는 어깨가 짓눌리는 느낌이었다.

원래라면 판단을 내려야 할 윤영민은 통화 내용을 다 듣고도 빤히 송정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치권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고 개인적으로도 온갖 난관을 헤쳐 나온 송정수지만, 이런 판단을 내리는 것이 쉬울 리가 없었다.

"진행합시다."

- 옳은 선택이오. 그럼.

전화가 끊기가 송정수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담배를 하나 더 꺼내 입에 물었다.

'자유는 시체 위에 핀 꽃이라더니.'

희생이라는 말이 얼마나 큰 무게를 가지는지 알고 하는 말일까?

송정수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이미 결정을 내렸다면 뒤를 돌아보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그의 선택이 수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을지도 모르지만, 통수권자라는 것은 어떻게 하면 사람이 덜 죽는 방향이 어딘지를 고민하는 자리니까.

"그렇지만 뒤처리 정도는 할 수 있는 거지."

"네?"

윤영민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되묻자 송정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휴대폰을 꺼내더니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아, 날세."

'누구와 통화하는 거지?'

"자네는 지금 당장 이지혁 씨 집으로 가서 비상대기를 부탁하게. 응? 죽고 싶지는 않다고? 내가 죽여주리?"

긴장되었던 공기가 이상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사표? 이 새끼가?"

"……."

"사표 받기 전까지 자네는 여전히 내 비서니까, 일단 시키는 건 하게. 뭐? 너 지금 욕했냐, 이 새끼야?"

윤영민이 얼굴을 감쌌다.

'답도 없다, 진짜.'

* * *

"돌입합니다."

최정훈은 긴장된 얼굴로 주위를 한 번 돌아보았다.

다들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무리 긴장을 풀어주려 한다고 해도 당장 전쟁터로 투입되는 상황인데 긴장을 하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예."

곽민호 대령은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로 최정훈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중국에 텔레포터가 많다고는 하나 한 번에 운용할 수 있는 숫자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렇다고 여러 번 갔다 올 만큼 에테르의 양이 많은 것도 아니라 한계치까지 한 번에 투입하는 것으로 결정을 내린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일반인 특수부대가 차지할 슬롯이 없었다.

곽민호는 강력하게 항의했지만, 대동강 유역을 통해 진입한 특수부대들이 평양 근처에 있으므로 굳이 텔레포트를 통해 특수부대를 진입시킬 필요가 없다는 논리에 함락되고 말았다.

그가 아무리 강경하게 나간다고 해도 중국 측이 그의 의견을 들어줄 것 같지도 않고 말이다.

"이런 말은 군사작전을 시행하는 입장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초기에는 최대한 앞쪽에 서지 마시기 바랍니다. 작전을 수행함에 있어서 처음 적군과 조우하는 시점이 가장 위험합니다. 긴장감에 시야가 좁아지니까요."

"예. 명심하겠습니다."

"무사 귀환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국가의 운명이 여러분의 두 어깨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 주십시오."

최정훈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프레셔가 너무 강하지 않은가.

프레셔를 받으면 더 잘하는 사람과 더 못하는 사람이 나뉘지만, 최정훈은 굳이 따지자면 프레셔가 있어야 감각이 살아나는 편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상황에 그런 말 듣고 싶지 않다고.'

그들이 하는 역할이라고 해봐야 별다를 게 없을 텐데 말이다.

저쪽에서 중국의 인민복을 입은 이가 뭐라 뭐라 소리를 치기 시작했다.

"돌입한답니다."

최정훈은 곽민호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등 뒤의 인물들을 돌아보았다.

"비켜요."

박성찬이 최정훈을 슬쩍 뒤로 밀면서 앞으로 나섰다.

"엥?"

"가자마자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는데, 방어도 못하는 양반이 선두에 서 있어봐야 개죽음밖에 더 당하겠어요? 얌전하게 뒤에서 지시나 내려요."

최정훈의 눈이 흔들렸다.

"그게 맞는 말이죠."

김다현이 최정훈의 앞으로 나서자 부잉이 떨어졌다.

"너는 앞으로 나가봤자 피하는 것밖에 못하잖아. 괜히 지켜줄 것처럼 말해놓고 총알받이 만들지 말고, 얌전히 뒤로 오시지?"

"저 새끼, 총알 쏟아지면 최속으로 도망갈걸? 도망 하나는 오지게 잘 가겠네."

"…끄응."

가진 건 빠른 발밖에 없는 김다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NDF 대원들이 슬그머니 최정훈을 둘러쌌다.

최정훈은 아무 말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야, 누가 최정훈 씨 시원한 거 하나 챙겨 드려라. 그래야 나불나불 말 잘할 거 아니냐!"

"나불나불이라니!"

발끈한 최정훈을 두고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최정훈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러고 보니 오래도 됐군.'

이들과 함께 건너온 전장이 한둘이 아니다. 이제는 잘 보지도 못하는 가족보다 훨씬 더 가족 같은 느낌이 난다. 이들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를 일이지만 말이다.

"출발합니다."

텔레포터로 보이는 세네 명의 인원이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최정훈은 턱 끈을 조이고 방탄조끼를 단단히 맸다.

"이거 불편해."

지급 받은 장비를 조이는 이들이 다들 짜증을 냈다. 언제나 프리한 복장을 자랑하던 이들이 국방부 장관의 일갈에 다들 군복과 방탄 장비를 착용하다 보니 영 편치 않은 듯했다.

"박성찬 씨는 이거 필요 없는 거 아냐?"

'그, 그러네?'

머리에 잘 들어가지도 않는 방탄모를 쓰고 있던 박성찬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더니 방탄모를 내팽개쳤다.

"그러고 보니 나 이거 왜 쓰고 있던 거야?"

박성찬의 눈알이 방탄모보다 단단할 것이다.

"형님, 그거도 잘 안 들어가는데 옛날에 특전사 때는 어쩌셨어요?"

"…내피 빼면 들어가, 새끼야."

"에이, 아닌 것 같은데."

어설픈 농담으로 긴장을 풀며 그들은 텔레포트를 기다렸다.

"로딩이 엄청 긴 느낌이 드네."

"차라리 빨리 들어갔으면 좋겠다."

곽민호가 무전을 받으며 소리쳤다.

"진입 10초 전!"

최정훈이 권총을 다시 한 번 점검했다. 쓸 일은 없겠지만, 맨몸으로 가는 것도 이상하다는 판단하에 받은 권총이다.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최정훈이 얼굴을 굳히고는 텔레포터를 바라보았다.

"진입!"

세상이 환하게 밝아졌다.

* * *

"아우우우우."

이지혁은 소파에 늘어져 있다가 기지개를 켰다.

TV에서는 시답잖은 일들만 뉴스에 나오고 있었다. 그가 알기로는 오늘이 작전 결행일인데, 뉴스에서는 그런 말이 전혀 나오지 않고 있었다. 마치 다른 세상인 것처럼 말이다.

"저래도 되는 건가?"

아무리 그래도 500㎞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건데 하나도 말을 해주지 않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작전 시작 전에야 북한 측에 정보가 샐 수 있으니 말을 하지 못한다고 해도 작전이 시작되고 나서는 말이라도 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에이, 모르겠다."

"뭘 몰라?"

어머니가 과일을 들고 나오면서 묻자 이지혁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지금 전쟁 났잖아."

"어디? 중동에?"

"중동은 무슨 중동이야. 우리나라가 북한에 쳐들어갔는데."

"…꿈꿨니?"

이렇다니까.

사실을 말해도 믿지를 않으니 할 말이 없을 수밖에.

"지금 특수부대랑 NDF랑 돼지 목 따러 갔잖아. 미국이랑 일본이랑 중국이랑 러시아랑."

"얼른 들어가서 자라."

거 봐! 이거 봐!

사람이 말을 하는데 믿지는 않는다니까?

이지혁은 툴툴대며 사과 하나를 입에 물었다.

"엄마는 아들을 너무 못 믿는 거 같아."

"아들이 말이 안 되는 소리를 하니까 그런 거 아니겠니? 너 지금 뉴스 보고 있는 거 아니야? 그런 일이 있었으면 뉴스에서 난리가 났지."

"한국 언론이 그렇지, 뭐."

"한국이야 그렇다 치고, 네 말대로라면 미국이나 다른 나라 언론들이 가만히 있겠니?"

"…내가 꿈꿨나?"

어머니의 말을 듣고 있다 보니 확실히 이상한 느낌이었다. 타국 언론에서라도 보도가 되었다면 한국 언론이 좋다고 번역해서 가져다 썼을 텐데, 그런 기미도 전혀 없다는 말 아닌가.

"좀 이상하긴 하네."

딩동.

그때, 누군가 초인종을 누르는 소리가 났다.

"뭐지?"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 밤 아홉 시가 넘었는데 이 시간에 그의 집을 방문할 사람이 누가 있단 말인가.

"으응?"

이지혁이 자리에서 일어나 인터폰을 받으며 말했다.

"신문 안 봐요."

- 시, 신문 아닙니다.

"우유 안 먹어요."

- 우유 아닙니다!

"알로에 안……."

- 이지혁 씨! 접니다! 정인수란 말입니다.

"엥?"

이지혁이 비전을 보았다. 확실히 정인수가 어설픈 자세로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 시간에 웬일이세요?"

-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넵, 들어오세요."

다른 사람이라면 예의도 모르는 인간이라고 하며 엉덩이를 걷어차 주겠지만, 정인수라면 말이 달랐다.

문을 열고 인터폰을 끈 이지혁이 천천히 걸어 밖으로 나갔다.

"으아아앗! 야! 나야, 나! 처음 보는 것처럼 왜 이래!"

으르르르르!

오식이가 괜한 정인수를 괴롭히고 있었다.

"된장 바른다?"

끼이이잉.

어떻게 저렇게 말을 찰떡같이 알아들을까?

오식이가 꼬리를 내리고 구석으로 물러나자 이지혁이 정인수를 맞았다.

"야밤에 보니 더 반갑네요."

"하하하,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들어오세요."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정인수가 과일 바구니를 들고 집 안으로 들어오자 어머니가 반갑게 정인수를 맞아주었다.

"어서 오세요. 커피 한잔하시겠어요?"

"군인은 커피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호호호, 재미있으신 분이네요."

"감사합니다."

이지혁이 정인수를 보며 피식 웃었다.

"군인인 건 알겠는데, 지금은 퇴근하신 거 아니에요? 이 시간까지 군복을 입고 돌아다니는 건 좀 아닌 것 같은데?"

"임무 중이라……."

정인수가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도 이 시간이 이런 복장으로 이지혁의 집을 방문하고 싶지는 않았다. 까야 하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커피가 나오고 어머니가 자리를 비켜주자 정인수가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이지혁 씨."

"예."

"에, 다름 아니라… 아무래도 오늘 밤에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비상대기를 해주시면 안 되겠느냐는 말이 나와서 말입니다."

"넹?"

이지혁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끼지 말라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제는 끼는 것도 아니고… 비상대기를 하라구요?"

"…죄송하게 됐습니다."

정인수가 한숨을 쉬었다.

송정수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이지혁이 언제든 나설 수 있어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미 이지혁에게 '너는 이번 작전에는 낄 일이 없으니까 집에서 편히 쉬어라'라는 워딩이 나가 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니 누군가는 총대를 메고 우리가 지금 말을 번복하고 있다고 이지혁에게 설명을 해주어야 하는데, 아무도 그 일을 맡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전화로 하기에는 사안이 찝찝하고, 그렇다고 송정수가 직접 찾아올 수는 없었다. 송정수는 지금 한시도 자리를 비울 수 없으니까.

그래서 비서진들을 통해 말을 전한 것인데, 비서진들이 하나같이 거품을 물며 나는 못하겠다고 드러누워 버리니 대안이 없었다.

결국 이지혁에게 이런 말을 전해도 별 피해가 없을 것 같은 사람을 찾고 또 찾다 보니 나온 사람이 정인수였다.

군인인 그에게 국가정책에 대한 전달자 역을 맡기는 것이 이상하기는 하지만, 정인수 이상의 적임자가 없다는 판단하게 국방부를 통해 명령이 내려온 것이다.

"그런데 그걸 왜 소장님이 말씀하세요?"

"…그러게 말입니다."

정인수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이래서 사람은 맞는 옷을 입어야 하는데…….'

국방부에서 대(對)이지혁 최종 병기라 평가를 받아 2계급 특진을 할 때도 기분이 싸했다. 명목상은 방위사를 총괄시키면서 그에 걸맞은 직위로 상승을 시킨 것이지만, 실제로는 '소장 자리 줄 테니 저 미친놈 좀 어떻게 해봐라'라는 뜻인 것을 모르지는 않았다.

'그때 확실하게 거절을 했어야 하는 건데.'

그분이 말씀하셨듯이 그도 사람인데 먹은 게 있으면 부탁 하나 안 들어줄 수 없는 노릇이다.

당시에는 방위사의 비효율적인 운영에 불만이 극에 달해 있었고, 직위와 실권을 손에 넣기만 한다면 부하들의 희생을 줄일 수 있겠다는 생각에 눈 딱 감고 받아들인 직위건만, 이런 식으로 쓸 데없는 일에 불려 다닐 줄 알았다면 거절을 했어야 했다.

하지만 이제 와 그런 생각이 다 무슨 소용인가.

"여하튼 위쪽의 입장이 그렇습니다. 찝찝한 기분이실 거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이 가지만, 워낙 사안이 중대하다 보니 일관된 입장을 유지하는 게 힘들다는 것을 감안해 주십시오."

이지혁이 일그러진 얼굴로 대답했다.

"알았어요."

"오!"

생각 외로 빠르게 납득을 해주지 않는가.

이지혁이 말을 하고는 천천히 휴대폰을 꺼냈다.

정인수의 얼굴이 불안함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 * *

"그, 어디다가 전화를 하시려는 거죠?"

"국방부 장관이요."

다행이다.

그래도 대통령이나 송정수에게 직접 전화를 하는 건 아니니…….

아니, 이게 아니지.

어차피 지금 그 사람들 다들 더 같이 있는데! 누구한테 전화를 하든 그게 무슨 상관인가.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아니요. 그냥 언제까지 대기를 해야 하는지 물어보려구요. 작전이 얼마나 걸리고 언제쯤 종료 예정인지 저는 전혀 모르니까. 언제까지 대기를 타야 하는 건지 알아야 뭐, 대기를 하든 말든 계획을 세울 것 아니에요."

그러고 보니?

정인수는 다짜고짜 이지혁을 찾아가서 대기 타고 있으라는 말을 전하도록 시킨 상관을 욕했다.

최소한 브리핑은 할 수 있는 정보는 줘야 할 것 아닌가.

이 야밤에 이지혁을 찾아가라는 말에 욕이나 하면서 브리핑 준비를 하지 않은 그도 잘못이 있지만 말이다.

"지, 지금 바로 제가 알아보고 말씀을 드리면 안 되겠습니까?"

"그러실래요?"

"네. 제가 바로 확인하고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뭐, 그러세요."

이지혁의 허락이 떨어지자 정인수는 서부의 총잡이처럼 휴대폰을 뽑아 들고는 전화를 걸었다.

"정인수입니다. 이번 작전에 대한 자료가 필요합니다. 지금 당장 제 PC로 보내주십시오."

현관을 열고 밖으로 나가면서 전화를 걸었다.

"네?"

정인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니, 누가 기밀인거 몰라서 물어보는 줄 아십니까? 기밀 지키시려다가 진짜 국가 재난 사태 불러오고 싶으세요? 이지혁 씨 관련 사안이라고 상부에 보고하면 승인 바로 떨어질 테니까 빨리 허락 받으시고 파일 보내 달란 말입니다."

정인수가 역정을 내자 오식이가 귀를 쫑긋쫑긋 세웠다.

정인수는 오식이에게서 슬금슬금 물러나며 전화를 계속했다.

"1분 늦어지면 청와대로 이지혁 씨가 쳐들어갈 확률이 1%씩 올라간다고 전해주십시오."

전화를 끊은 정인수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못해 먹겠네.'

위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이 나라가 얼마나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되고 있는지를 알게 된다. 시스템은 허울일 뿐이고, 실제 모든 것은 최상부를 장악한 몇 명의 입김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평소에는 그런 식으로 국정이 운영되어도 별문제 없겠지만, 급박한 상황이 닥치면 문제가 생긴다. 여러 부서와 여러 사람이 동시다발적으로 움직여서 사안을 해결해야 하는데, 다들 윗사람의 지시를 기다리며 우물쭈물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만 해도 그렇다.

건국 이래 초유의 사태라고 부를 수 있는 상황이다. 자의로 타국의 영토를 침범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니까.

그렇다면 완벽한 시스템의 통제하에 움직여도 제대로 일이 될 수 있을까가 의심스러운 상황인데, 최상층을 제외한 이들은 대체 상황이 뭔지도 알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우우우웅!

'…이런 건 또 더럽게 빠르다니까.'

보나마나 빤하지. 이지혁이라는 이름이 나오자마자 윗선에서는 보고도 다 듣지 않고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라고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

당장 대통령급부터 이지혁 노이로제에 걸려 있는데 그들이 무슨 통뼈가 있어서 이지혁 관련 사안에 고민을 하고 말고 하겠는가.

단지 이런 빤한 일에 보고를 하고 허락을 받는 불필요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 짜증날 뿐이었다.

가방에 든 노트북을 꺼내서 메일로 날아온 자료를 확인한 정인수가 빠르게 노트북을 든 채로 집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이지혁 씨……."

그새 마루에 있던 이지혁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반쯤 열린 방문을 따라서 이지혁의 방으로 다가간 정인수가 컴퓨터를 켜고 앉아 있는 이지혁의 뒷 침대에 걸터앉았다.

"뉴스 보십니까?"

"……와, 그래도 관련 사안이 하나라도 기사로 올라와 있을 줄 알았는데, 진짜 하나도 안 올라왔네요. 보도 통제 쩝니다."

"극소수 부대만 움직이는 작전이니까요. 이번에 기밀이 유출 되면 목을 쳐버리겠다는 국방부 장관님의 엄포도 한몫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 청와대 쪽에서 언론통제도 했을 거구요."

"그 양반들이 그렇게 빠릿한 사람들이었는지 처음 알았네요."

정인수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들이 아니라 송정수가 빠릿하게 움직인 것이다. 윤영민에게는 그럴 만한 능력이 없다는 것은 웬만한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다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되는 거예요?"

작전 계획서를 슬쩍 본 정인수가 난감하다는 듯이 말했다.

"일단 계획대로라면 작전 종료 시점은 내일 오전 6시입니다. 그전까지는 아무래도……."

이지혁이 심각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럼요."

"네?"

"내일 출근 안 해도 되는 거예요?"

"……."

정인수는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난감했다.

* * *

우우웅.

환한 빛이 사그라들자 익숙하지 않은 지형이 눈에 들어왔다. 최정훈은 가만히 심호흡을 했다.

그들 외에도 타국의 능력자들이 속속들이 도착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많은데?'

NDF가 수가 가장 적은 것 같았다. 저들은 최상위 부대에서도 정예를 따로 뽑아서 왔다고 하는 것 같은데, 전원이 온 NDF보다 수가 많다니.

한국이 능력자 풀에서는 타 강국에 비교도 되지 않는다는 말이 왜 나오는 건지 알 수 있었다. 하기야 이지혁의 등장 이전에는 한국에서 내세울 만한 능력자는 서아영 하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이전에는 미국의 누구, 한국의 누구라는 식으로 마치 능력자들을 히어로인 것마냥 띄워주기도 했던 거 같은데.

'이지혁 씨가 등장하고 나선 다 흐지부지됐지.'

능력자 탄압 정책이 실행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이지혁 같은 이가 두 명 있어서 서로 반목하기라도 했다면 나라 하나 작살나는 것은 일도 아닐 테니까.

"이제 어떻게 해요?"

서아영의 물음에 최정훈이 고개를 돌렸다. 지금은 잡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일단 대기합니다. 미국 쪽 특수부대가 이쪽을 이미 점거하고 있을 겁니다. 그들의 지시를 따라서 주석궁으로 진입합니다."

"주석궁이요?"

"금수산 태양 궁전이요. 이미 브리핑 몇 번이나 했잖아요."

"아, 네. 그렇죠."

잤네, 잤어.

최정훈이 한숨을 쉬고는 두리번거리며 작전을 설명해 줄 이를 찾았다. 아니나 다를까, 검은 위장을 한 미군 특수부대원들이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미스터 최?"

"예. 최정훈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은 굳이 말하지 않았다. 최정훈 역시 지금은 그런 게 궁금하지 않았다.

"어찌 됐습니까?"

"현재까지는 이상이 없습니다. 그래서 잠시 대기합니다."

"네?"

"…이상이 없어서 문젭니다."

그제야 최정훈은 고개를 들어 저 멀리 보이는 평양을 바라보았다.

'뭐지?'

암흑의 도시를 보는 것 같았다.

평양은 원래 전력 공급이 원활하지 않은 도시라 밤이 되면 거의 불을 끄기는 하지만, 일전에 방문을 했을 때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우리가 와 있다고 불을 좀 켠 거였나?'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도 애매했다.

그저 어둡다는 수준이 아니라 완전히 암흑으로 물들어 있는 느낌이다. 저곳에서 사람들이 움직일 수는 있을까 하는 느낌이 들 정도로 말이다.

"주변 경계 병력도 전무합니다. 도시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파악하지 못해서 움직이기 난감합니다."

"작전 계획은요?"

"바로 돌입입니다. 이미 강습부대들도 평양으로 거의 근접했습니다. 그들이 돌입하는 시점에 맞춰서 우리 역시 돌입할 것입니다."

"음……."

그렇다면 강습부대들도 이 상황에 당황하여 멈춰 섰다는 뜻이 된다.

"미국 측은 수송기를 통해서 병력을 파견한다고 하지 않았나요?"

"현재 평양 상공에서 회유 중입니다."

"시간을 끈다고 뭐가 달라질 것 같지는 않은데요. 정찰병은 들어갔나요?"

"예. 지금."

최정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가 야전 사령관도 아니고, 결정은 상부에서 할 것이다. 그가 할 일은 상부의 지시에 따라서 NDF를 지휘하여 신속하고 희생 없이 작전을 마무리하는 것뿐이었다.

'그건 그렇고, 왜 나한테 오는 거지?'

크리스토퍼가 따로 말을 해두었는지 저 미군도 서아영을 제끼고 그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있었다. 범세계적인 유명 인사가 된 기분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부담감이 뿌듯함을 넘어선다.

"알겠습니다. 그럼 일단은 대기를 하고 있으면 되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그렇게 십여 분 정도 시간이 흘렀을 때 명이 떨어졌다.

"돌입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지금으로부터 5분 뒤에 돌입합니다."

"예."

최정훈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리는 것도 일이구만.'

수많은 국가와 병력들이 손을 맞추려다 보니 시간이 더 걸리는 것이야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뭔가 비효율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지혁을 등에 업고 그동안 상부 지시 따위는 싸그리 무시하고 오로지 효율만을 추구해 온 부작용일지도 몰랐다.

'오늘따라 잡생각이 많은 것 같은데…….'

최정훈은 그 자리에서 살짝 뛰며 몸을 풀었다. 그가 몸을 움직일 일이 몇이나 있겠냐마는 버벅거려서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주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된다.

"돌입합니다."

"가죠."

최정훈의 말에 NDF들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최정훈의 뒤를 따랐다. 그들이 텔레포트해 온 포인트에서 금수산 태양 궁전으로 가기 위해서는 평양을 가로질러야 한다. 우회해서 돌아가는 방법도 있지만, 굳이 산길을 통해 가면서 시간을 더 끌 필요가 없다는 판단이었다.

시가전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은 부담이지만, 어느 국가도 평양 주변의 야산에 무엇이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까딱해서 지뢰밭에라도 들어서게 된다면 시가전에서 입는 피해보다 몇 배나 되는 피해를 입을지도 몰랐다.

선두가 빠르게 산을 내려가기 시작하자 박성찬이 선두를 따라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다른 이들도 박성찬을 따라서 산을 내려갔다.

"평양에 진입하면 저격 포인트가 많아집니다. 성찬 씨를 필두로 해서 육체형 능력자 분들은 저격이 시작될 시에 잘 막아주시기 바랍니다."

"…몸빵하라는 거죠?"

"빙고."

"…씨발, 몬스터든 사람이든 누구를 상대하든 간에 하는 일이 바뀌지가 않으니 문제군."

"하하."

박성찬의 너스레에 최정훈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건물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자 최정훈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이제 진짜 시작이다.

팽팽한 긴장감이 그들을 잠식하기 시작할 때, 갑자기 선두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뭐지?"

최정훈이 전방을 주시할 때, 미군 군복을 입은 한 사람이 빠르게 달려오더니 그의 팔을 잡고 말했다.

"잠시 선두 쪽으로 와보셔야겠습니다."

"네?"

"어서요."

최정훈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를 따라나섰다. 박성찬이 두말하지 않고 그의 뒤로 따라붙었다.

그뿐 아니라 각국의 대표쯤 되는 인원들도 다들 이끌려 선두로 향하고 있었다.

"뭔 일이 벌어지는 거지?"

이건 계획에 없던 일이다. 그렇다면 계획에 없음에도 일행을 멈춰 세워야 할 만큼의 문제가 발생했다는…….

선두의 인파를 뚫고 맨 앞쪽으로 나온 최정훈의 입에서 욕지기가 튀어나왔다.

* * *

사람.

사람이었다.

최정훈은 자신의 눈을 가득 채운 끝도 없는 인간의 인파에 넋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500만이 모였다는 말은 들었다.

말이 500만이지, 그 수가 보통인가.

평양이라는 도시를 가득 메우고도 남는 수가 500만이라는 수의 인간이다.

"이게 다 무슨……."

평양에 500만 인파가 접근해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게 리진철이 말한 학살 때문인지, 아니면 이들을 인간 방패로 쓰기 위함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지 못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최정훈은 지금 한 가지만큼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이게 뭐냐고!"

지금 그의 눈앞에 보이는 인파는 다들 정상이 아닌 것 같아 보였다.

넋을 잃은 듯 초점이 무너진 눈으로 그저 서 있기만 한 사람들.

마치 혼이 빨려 버린, 좀비와 같은 모습이었다.

영화에 나온 좀비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들에 대한 공격성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는 것.

으드득.

최정훈이 이를 갈았다.

오백만이다.

무려 오백만이나 되는 사람들이 이 꼴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 황망한 상황에 천하의 최정훈마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한단 말인가.

"이지가 전혀 없는 것 같습니다."

꽉 쥔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딱히 북한의 주민들을 동포라든가 한 민족이라고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니다. 북한의 주민이 아니라 다른 어떤 나라에서 같은 일이 벌어졌더라도 최정훈은 똑같이 분노하였을 것이다.

이건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잃은 짓이기에.

"어느 미친놈이 이런 짓을!"

최정훈이 소리를 지르자 앞쪽에서 사람들을 검사하던 군의관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약물 쪽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럼?"

"무슨 수로 사람들을 이리 만든 건지는 저도 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최정훈에게는 그 소리가 이상하게 멀게 느껴졌다.

'사람을 뭐라 생각하는 거지?'

각국의 책임자들이 한곳에 모여 있음에도 이 비상식적인 사태에 어찌 대처해야 할지를 몰라 하고 있었다. 어찌 보면 무능함을 증명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지만, 500만이라는 인파가 모두 이지를 잃고 식물처럼 서 있는 꼴을 봤는데 즉각적인 판단을 내린다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이다.

카메라를 통해 상황을 전송했으나 크리스토퍼 역시 마땅한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 이게 뭐야, 씨발.

위성사진이나 정찰기 등으로 촬영한 사진을 보았을 때, 사람들에게 이상하게 생기가 없어 보인다는 느낌을 받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이런 몰골일 줄은 단 한 번도 상상한 적이 없었다.

크리스토퍼 역시 이 사태에 어떤 대책을 내놓아야 할지 몰라 일순 망설였다.

바로 그때, 최정훈이 움직였다.

"우회합니다."

- 미스터 최?

"움직이지 않는다면 굳이 대처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버려 두고 갑시다."

- …정론이로군.

최정훈은 빠르게 냉정을 되찾고 있었다.

이들이 이렇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원인은 분명 수뇌부 쪽에 있을 것이다. 이들을 원래대로 되돌리고 싶다면 이곳에서 시간을 보낼 게 아니라 한시라도 빨리 수뇌부를 타격해야 하는 것이다.

"의식이 없어서 버티고 있을 뿐이지, 거의 탈진 상태일 겁니다."

군의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리 쪽 조직에 괴사가 일어나고 있는 이들도 있습니다. 하루만 더 방치한다면 희생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겁니다."

"들으셨죠?"

최정훈의 말에 타국의 대표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러시아 대표는 뭔 말이냐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 같았지만, 쟤는 스킵하고.

"우회합니다. 인도주의적 차원이 아니라 효율을 위해서입니다. 이 많은 인원들을 쓸어가며 전진한다면 시간 낭비가 극심할 테니까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오케이."

방향이 정해지자 계획은 순식간이었다. 그 순간에 바로 우회로가 짜였고, 전방의 미군 특수부대부터 순차적으로 이동을 하기 시작했다.

"미국 측 능력자들은 도착했습니까?"

"B1지점으로 강하에 성공했습니다. 곧 합류할 것입니다. 합류 지점이 달라진 관계로 시간이 조금 걸리고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최정훈은 얼굴을 굳히고 그들을 재촉했다.

지금은 이렇게 시간을 끌어도 좋을 정도로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다. 당황스러운 마음은 알겠지만, 지금은 스스로의 임무에 집중해야 할 때였다.

"갑시다."

"예."

최정훈은 우회로로 돌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어둠 속에 묻혀 침묵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자니 절로 입술을 질끈 깨물게 된다.

'대체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지?'

리진철과 박용휘의 주장이 현실성이 너무 떨어진다고 생각했는데, 이곳의 상황을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었다. 이런 짓을 하는 놈들이라면 현세에 마계를 강림시키는 것도 결코 이상하지 않다.

'무엇을 위해서?'

다만, 최정훈은 이들이 뭘 노리는 것인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현세에 마계를 강림시킨다고 해서 그들이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모르겠다."

지금은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 곧 알게 될 것이다.

최정훈은 위시로 한 부대들은 평양을 크게 우회하며 나아갔다. 앞에 무엇이 있을지 모르게 때문에 진격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지만, 착실하게 금수산 태양 궁전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이상하군.'

최정훈은 문득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저항이 너무 없어.'

이미 경계 병력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은 들었다. 하지만 저 많은 인원에 대한 감시 병력조차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 문제였다.

최정훈은 눈살을 찌푸렸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지?'

평양은 이미 죽음의 도시 같았다. 살아 있는 이들의 흔적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영화에서나 나오는 전염병으로 모든 사람이 사라져 버린 도시가 있다면 딱 이런 느낌일 것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곳에서라면 이미 죽었을 사람들이 아직은 살아서 의식이 나간 채 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다는 것뿐이다.며칠이 더 지난다면 저 사람들 중 살아남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서두른다고 서둘렀지만, 작전의 시행일이 너무 늦었다는 아쉬움이 자꾸 남았다.

"저기 보입니다."

최정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금수산 태양 궁전.

저 지하에서 뭔가가 벌어지고 있었다. 이지혁의 말에 따르자면, 딱히 경계 병력이 가득하다거나 안쪽에 방어 체계가 굳건하지는 않은 듯했다.

'굳건해도 상관없지.'

지금 평양 쪽으로 착실하게 진격하고 있는 병력들을 빼고 이 자리에 있는 전력만 하더라도 웬만한 강국 하나를 순식간에 박살 내버릴 수 있는 전력이었다.

아무리 북한 측에서 철저히 준비를 한다고 해도 이만한 전력을 막아낼 수는 없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한 건가?'

금수산 태양 궁전 앞에 위치한 김일성과 김정일 부자의 동상만이 유일하게 불이 밝혀져 있었다.

그 광경이 더없이 을씨년스럽게 느껴졌다.

"대기."

짧은 음성과 함께 지휘를 맡고 있는 미국 측에서 손을 들어 올렸다.

"입구가 좁습니다. 동시에 진입이 불가합니다. 가장 앞은 저희가 뚫겠지만, 그 뒤를 따라오실 분들을 정해야 합니다."

미묘한 침묵이 오고 갔다.

국가의 명예와 생존에 대한 욕구, 그리고 합리성에 대한 의심.

짧은 시간 동안 상황을 정리한 엘리트들이 저마다 자신의 의견을 내놓기 시작했다.

"여기서 다시 소수를 뽑아서 뒤쪽에 포진시키는 것은 어떻습니까?"

"지휘 체계가 붕괴됩니다."

"그럼 일단 수가 많은 쪽을 들여보내는 것이?"

"의외의 사태가 벌어졌을 경우, 수가 많으면 대처가 힘듭니다."

아무래도 여러 나라가 모이다 보니 의견이 합리적으로 모이지 못했다.

'제길.'

최정훈은 답답한 상황에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대로라면 이미 전투가 벌어졌어야 하고, 금수산 태양 궁전에 대한 돌입은 승리 후 누려야 할 보상이나 최종 타깃을 손에 넣는 의미가 되어야 했다.

하지만 평양 내에서 어떠한 전투도 벌이지 못하다 보니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NDF가 앞장서서 가는 건 어떻습니까? 아무래도 단일 조직으로서의 힘은 NDF를 능가할 곳이 없지 않겠습니까?"

미국 측에서 최정훈에게 의견을 타진해 왔다.

"음……."

최정훈이 인상을 썼다.

미국 측은 합리적인 의도로 말을 한 것이다. 이미 그들이 선두에 서기로 한 이상, 뒤쪽에 따라올 이들의 희생이 그들의 희생보다 클 일은 없을 테니까.

'그래도 찝찝하네.'

출발 전에 곽민호가 한 말이 그의 의견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희생이 있어야 한다면 희생을 감수해야겠지만, 굳이 앞에 서서 타국의 총알받이 역할을 맡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게 이기적인 생각이라고는 해도 말이다.

"우리는……."

"우리가 앞장을 서겠습니다."

그 순간, 최정훈의 말을 끊고 나서주는 이들이 있었다. 최정훈이 반색을 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오!'

일본 측 인원들이 나서고 있었다.

하기야 저들은 어떻게든 실적을 올려야 하는 입장이다. 평화유지군이라는 이름으로 그저 따라오기만 해서는 당위성을 얻어낼 수 없을 테니까.

"확실히 소수군요. 그리고 일본 측은 자위대 소속이니 이런 일에는 적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저희는 민간 단체랑 별 차이가 없어서 이런 군사작전은 조금 부담스럽거든요."

최정훈이 자연스레 뒤로 빠졌다.

"그렇다면 그 뒤는 저희가 받치겠습니다."

일본이 나서자 중국 측도 바로 뒤따랐다. 당국으로 돌아갔을 때, 일본이 나서서 활약하는 것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는 말이 나오면 목이 날아갈 이들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러시아 대표는…….

"왓?"

"야, 누가 러시아 통역 좀 데리고 와라."

"예."

이런저런 상의 끝에 가장 마지막 자리를 차지하게 된 최정훈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애를 써야 했다.

"마지막?"

서아영이 불만스럽다는 듯이 말했지만, 다른 대원들은 희희낙락하고 있었다.

"크, 역시 부부장."

"사나이 최정훈!"

최정훈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여러분, 저를 비겁자라고 욕해도 괜찮습니다. 사실이니까요. 낄낄낄낄."

"비겁해야 오래 사는 법이죠!"

안타깝게도 NDF에는 국가에 명예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위험하게 만들겠다는 대인배가 존재하지 않았다. 이런 이들을 국가의 대표랍시고 보내야 했던 송정수의 고뇌가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개죽음당해 봤자 연금도 제대로 안 나옵니다. 바퀴벌레처럼 살아남아서 벽에 칠할 때까지 잘 먹고 잘살면 됩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물론이죠."

"자, 조용. 이제 진입 시작합니다. 명목상으로는 후방에서 덮쳐들면 몰살이라 우리가 후방을 지킨다고 했으니, 뒤쪽 경계 잘해주시구요. 장난 아니고, 진짜로 그럴 수도 있습니다."

"예."

최정훈은 자신이 말을 하고도 조금은 불안한 눈으로 금수산 태양 궁전을 바라보았다.

'저 안으로 이 인원들이 다 몰려들었다가 폭파라도 당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오싹한 느낌에 최정훈이 앞쪽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