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인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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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어떻게 하냐?"
조지웅이 파랗게 질린 얼굴로 이지혁에게 물었다. 다른 이들은 그저 상황이 심각하다는 생각을 할 뿐이지만, 현역 KSF인 조지웅은 지금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
저 파도처럼 밀려오는 몬스터들에 휩쓸린다면 인간의 연약한 몸뚱아리 따위는 순식간에 산산조각이 날 것이다.
아니, 산산조각 날 몸이라도 남길 수 있다면 다행이었다.
"지혁아."
조지웅이 매달릴 수 있는 것은 오직 이지혁뿐이었다. 이미 상황을 보니 피하는 것은 무리였다. 밖으로 나가는 순간, 표적이 될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이지혁이라도…….'
이게 가능할까?
저만한 몬스터면 한 지부에서 해결할 수 있는 양이 아니다. 적어도 다섯 개 이상의 지부가 총출동하여 포위망을 구축하고, 방위사의 지원을 받아 공습이라도 때려야 할 급이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것도 모르겠다.'
애초에 조지웅은 저만한 양의 몬스터들이 한 번에 몰려오는 것은 들은 적도, 본 적도 없었다.
'어떻게든 NDF의 지원을 받을 수만 있다면…….'
그래도 여기에는 NDF들이 둘이나 있으니 빠르게 지원을 받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있었다. 그전까지 이지혁을 최대한 지원해서 여기를 막아내면…….
조지웅이 생각을 굳히고 이지혁을 바라보았을 때, 그는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꿀꺽꿀꺽.
몬스터가 오든 말든 일단 콜라 한 잔을 원샷한 이지혁이 거하게 트림을 했다.
정해민이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어쩔 거야? 도망칠까?"
"그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인데."
이지혁이 입맛을 다셨다.
"그냥 애들보고 해결하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 다현이한테 전화해서 여기 다솜이가 술 먹고 있다고 하면 3초 내로 도착할 것 같은데?"
"걔들이 노는 게 아니잖아. 한창 바쁠 텐데……. 하기야 걔들은 네가 여기 있는지 모를 테니, 일단 출동은 해야……."
그 순간, 도가윤이 언제 들었는지도 모를 전화기를 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고 완료."
"읭?"
"이지혁. 사고 지점에 존재함. 보고 완료. 출동 자제 요청."
"…그러니까, 서아영한테 전화해서 여기에 내가 있다고 했다고?"
"그러합니다."
"…뭐라는데?"
"잘 부탁함."
"끄으응."
이지혁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하고 그래?"
"이상함. 오류 있음. 내 명령권자는 이지혁 씨가 아님. 나는 서아영 부장의 명령을 따름. 일반적으로 명령권은 서아영 부장에게 있고, 서아영 부장이 하는 명령이 최우선임. 이상 발생 시 최우선 보고."
"…꺼져!"
"임무는 이지혁 씨에 대한 감시. 꺼질 수 없음."
이지혁이 도가윤을 빤히 바라보다가 정해민을 돌아보았다.
"저거, 거의 처음 보았을 때 받은 명령 아닐까?"
"그런 듯."
"근데 아직 갱신이 안 됐나?"
"아영이가… 음, 뭐랄까, 좋게 말하면 사사로운 것에 신경 안 쓰는 호탕한 성격이고, 나쁘게 말하면 생각 없잖아."
"으으음."
이지혁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확실히 한 방에 납득이 되는 설명이다.
"어쨌든 이리된 이상 일 좀 해야겠는데?"
"…너무 부려 먹네, 진짜."
"너도 양심은 좀 있어야지. 사실 너 최근에 그냥 놀고먹었잖아."
"놀고먹다니! 소방관이 출동을 안 하면 좋은 일인 거지, 그걸 놀고먹는다고 하냐? 사고는 애초에 안 나는 게 제일 좋은 거야."
"예이, 예이."
조지웅은 순간 멍해졌다.
이것들은 눈도 없나?
지금 밖에 몬스터들이 저렇게 몰려오고 있는 것이 보이지도 않은가?
"지, 지혁아!"
조지웅이 다급하게 이지혁을 부르며 다가갔다.
"애들이 엄청 불안해하고 있어."
"응?"
이지혁은 뒤를 돌아보았다. 동창들이 하나같이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다. 그들도 이미 달아나기에는 늦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밖으로 나간다면 몬스터들의 표적이 될 것이고, 그렇다고 이곳에 머물러 있는다고 해도 딱히 달라질 것이 없었다. 몬스터들이 건물 이곳저곳으로 들이닥치는 것이 그들의 눈으로도 보였던 것이다.
"지혁아."
최선미와 민예정을 위시로 한 여자들이 이지혁에게 우르르 다가왔다.
"저, 저거 어떻게 할 수 있는 거지? 우리 여기서 죽는 거 아니지?"
"하……."
이지혁이 한숨을 쉬었다.
"사람 목숨이라는 게 그렇게 쉬운 게 아니에요. 죽고 싶다고 죽어지는 것도 아니고."
경험담이라 확실하게 말할 수 있었다.
"몬스터들이 저렇게 몰려오잖아."
"에휴."
이지혁이 한숨을 쉬었다.
하기야 저리 우글우글 몰려오는 몬스터를 보면서도 평정을 유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들은 일반인이 아닌가. 자신들과는 다르게 고블린 한 마리도 상대할 수 없는 사람들인 것이다.
"말만 그렇게 하지 말고, 얼른 손 좀 써봐. 여기만 사람이 있는 게 아니잖아. 이 주변은 아직 대피가 안 된 거 같은데, 시간 끌면 피해가 더 커질 거야."
"네이."
이지혁이 끙,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귀찮기는 하지만 정해민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경고가 내려진 시간과 몬스터들이 들이닥친 시간을 감안한다면, 아직 이 주변은 대피가 완전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일단 저 몬스터들의 웨이브를 저지해야 한다.
"읏차."
이지혁이 허공을 향해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허공에 검은 게이트가 열리면서 오식이가 밖으로 튀어나왔다.
"으응?"
검은 홀이 열리기에 뭔가 잔뜩 기대를 하고 바라보던 동창들은 그 안에서 튀어나오는 작은 강아지를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이게 뭐지? 지금 장난하는 건가?
하지만 이지혁이 더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이지혁의 손에서 뻗어 나간 촉수가 오식이를 관통한다 싶더니, 오식이의 몸이 순식간에 부풀며 신장이 5m는 될 듯한 거대한 오거의 형태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저게 뭐야?"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아!
오거의 형태가 된 오식이가 거대한 하울링을 했다. 하울링이라기보다 이제는 피어에 가까운 그 무엇이었다.
사나운 울음소리를 들은 몬스터들이 일제히 발을 멈추고 오식이를 향해 시선을 집중했다.
'멈췄어?'
지켜보던 이들이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몬스터들을 바라보았다. 그리 거칠게 돌진하던 몬스터들이 마치 짠 듯이 그 자리에 멈춰 버렸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크르르르륵.
흉성을 드러낸 오식이가 그로울링을 하며 몬스터들을 위협했다.
"오, 오거인가?"
이지혁이 오거를 부린다는 것은 KSF 사이에서도 유명했다. 목격한 사람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심지어 이지혁이 오거를 포획하는 순간을 목격한 이들도 있었으니 말해 무엇하겠는가.
하지만 조지웅은 지금 그의 눈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저게 오거라고?"
그도 KSF 소속으로 수많은 작전에 동원되었던 몸이다.
반년 전쯤이야 오거라 하면 일반 능력자들은 감히 상대할 수 없는 초월급 몬스터로 분류되었지만, 요즘은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심심찮게 등장하는 몬스터일 뿐이었다.
그렇지만 단언컨대 저런 오거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일단 저 덩치만 하더라도 일반 오거의 두 배는 넘을 것 같았다.
거기에 타오르듯 붉게 자라난 털과 보통의 오거보다 몇 배는 더 위엄있게 생긴 저 생김새까지. 도통 일반적인 오거라고는 볼 수 없었다.
'열 배는 셀 것같이 생겼는데?'
물론 생김새로 몬스터의 강함을 재단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겠지만, 그것을 감안하고도 저 오거가 일반적인 오거보다는 강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덩치가 두 배가 넘는데다가 울음소리 한 번으로 저 많은 몬스터들의 말을 일거에 묶어버리지 않았는가.
이건 보통의 오거로서는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지혁이 정해민에게 말했다.
"야."
"응?"
"그런데 몬스터들이 이리 몰려왔다는 것은 게이트가 뚫렸다는 거잖아."
"으응, 그렇겠지?"
"그럼 거기에서 몬스터 막고 있던 방위사랑 KSF 애들 어떻게 됐는지 확인 좀 해봐."
"…응."
정해민이 조금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그런 생각까지는 하지 못했던 것이다.
'은근히 이런 데서 세심하다니까.'
정해민이 돌아보자 도가윤은 이미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방어선 붕괴 시 빠른 후퇴. 피해가 없지는 않으나 우려할 만한 수준은 아님."
이지혁이 눈살을 찌푸렸다.
'방어선 후퇴?'
물론 지금 보이는 몬스터의 수를 감안했을 때, 하나의 게이트에서 미리 예측하지 못한 수의 몬스터가 단번에 몰려나왔다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민간인이 뒤에 있는데 피해가 크지 않을 정도로 깔끔하게 대피했다는 것이 걸렸다.
"방위사는?"
"…방위사 측은 현재 극심한 피해를 입고 복구 중."
이지혁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니까… 아군이고 민간인이고 뭐고 다 냅 두고 무작정 토껴서 자기 목숨만 챙기셨다?"
"……."
도가윤마저 말문이 막혔다.
지금 이지혁의 말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잘들 놀고 있네."
이지혁은 그들을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인간에게 자신의 목숨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라고 하는 것은 명백한 폭력이다.
자발적으로 나서서 자신을 희생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체제가 그것을 강요하는 것은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러니 피해 없이 몸을 빼낸 것은 분명 훌륭한 일이어야 한다만…….
'찝찝하단 말이지.'
최근 KSF의 움직임이 영 그의 생각과는 반하고 있었다.
"일단은 뭐, 알았어."
이지혁의 눈이 가늘어졌다.
일단 그렇다면 지금 눈앞에 있는 몬스터들이 방위사 쪽에 꽤나 피해를 입혔다는 뜻이렷다.
"그럼 뭐, 나도 별수 없지."
사람을 문 개는 살처분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게 개가 아니라 몬스터라고 할지라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자, 그럼 다녀올게."
이지혁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자 정해민이 손을 흔들며 배웅했다.
"조심해서 싸우고 와."
"끄응."
이지혁이 나가려고 하자 김다솜이 쪼르르 달려와 손을 덥썩 잡더니 작게 속삭였다.
"다치시면 안 돼요."
"…어."
도가연이 조금 뚱한 눈으로 둘을 바라보더니, 이지혁의 등에 바짝 붙어서 그를 따라 밖으로 나섰다.
최선미가 정해민에게 물었다.
"같은 NDF 아니세요?"
"맞는데요?"
"그런데 왜 안 나가세요?"
"저는 지원조라서요. 제가 저기 가도 할 게 없어요."
"…그래요?"
"대신 여기서 응원을 해주면 지혁이가 힘이 날 거예요."
"토템이신가?"
아니면 치어리더든가.
뚱한 최선미의 눈을 무시하며 정해민이 창밖에서 몬스터들을 향해 걸어가는 이지혁을 보며 소리쳤다.
"민간인한테 피해 안 가게 해야 해!"
* * *
크아아아아아아아!
"아, 시끄러!"
흉성을 폭발시키던 오식이가 이지혁의 목소리에 찔끔하여 어깨를 좁혔다.
"쯧, 하필 오늘 같은 날 난리야."
다른 날이면 대충 맡겨놓고 놀 수도 있었지만, 오늘은 그가 비번이고 다른 이들은 바쁜 날이었다. 그러니 직접 처리할 수밖에.
"자, 그럼……."
이지혁이 양손을 들어 올렸다.
"인간들도 오늘 동족상잔의 비극이 있을 예정이니, 너희도 동참해야지."
이지혁이 손을 뻗은 허공에 세 개의 시커먼 게이트가 나타났다.
* * *
크르르르르르!
크아아아아아!
무저갱처럼 검은 속을 드러낸 게이트 안에서 거친 울음소리가 흘러나온다.
'뭐, 뭐야?'
조지웅은 긴장된 시선으로 게이트를 바라보았다.
이지혁이 몬스터를 부린다는 소문은 그도 들은바 있었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저 오거만 해도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과 두 눈으로 직접 보고, 두 귀로 직접 듣는 것은 차이가 컸다. 당장 게이트에서 흘러나오는 울음소리만으로도 몸이 쪼그라드는 느낌이다.
"이게 뭔 소리야?"
최창혁도 기겁을 하며 조지웅에게 물었다.
"나도 잘 모르겠어."
짐작은 가지만 확신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최창혁은 창문 밖으로 고개를 빼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를 살폈다.
이지혁의 앞으로 시커먼 게이트가 보이고 있었다.
"저거, 게이트 아냐?"
"맞아."
"왜, 왜 여기 게이트가 생겨 있는 거야?"
"이지혁이 게이트를 다루니까?"
"으응?"
대체 조지웅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 못한 최창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최선미는 그런 것보다는 다른 것에 관심이 더 많은 것 같았다.
"우, 우리 여기 있으면 안전한 거지? 그렇지?"
조지웅은 답을 할 수가 없었다.
이 상화에서 누가 확실한 답을 할 수 있겠는가.
"안전하니까 편히 있어요."
정해민이 최선미를 다독였다.
입술까지 파랗게 질려 버린 것을 보니, 겁을 많이 먹은 듯했다.
"저, 정말 괜찮아요?"
"네."
정해민이 최선미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쟤가 좀 못미덥기는 해도 이런 상황에 한정해서는 믿을 만할 때도 있으니까 걱정 안 하셔도 되요."
'그거 믿을 만하다는 뜻인가요, 아니면 믿지 말라는 뜻인가요?'
애매하다.
"그냥 보시면 돼요."
정해민이 떨고 있는 최선미의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한편, 이지혁은 득달같이 그에게 달려들고 있는 몬스터들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베라프인 듯 베라프 아닌, 베라프 같은 애들인데……."
어디서 많이 본 애들이 가득가득 들어차 있었다. 설사 저 몬스터들이 모두 베라프 출신은 아닐지라도 그가 이 세계에 처음 왔을 때에 비한다면 베라프 출신 몬스터들의 비중이 확 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자료가 왔으려나…….'
자료 부탁한 지가 언젠데 아직 자료가 안 온단 말인가.
요즘 최정훈이 워낙에 바쁘니까 이해는 해야겠지만.
"목마르면 우물 파는 거지."
최정훈이 아니라 KSF 원장에게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을 하며 이지혁이 손을 뻗었다.
"자, 배고프지?"
외딴 섬에 가둬두었으니 그동안 배가 얼마나 고팠을까.
꿩 대신 닭이라고, 평소 먹던 사람은 못 먹을 테니 몬스터라도 먹으면서 배를 채워야지.
종속의 인장이 같은 처지의 몬스터들을 강제적으로 동료라 인식하게 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섬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고 먹히는 아비규환이 벌어졌을 것이다.
쿠오오오오오!
오식이가 연신 피어를 터뜨려 댔다.
'팔자 좋은 놈.'
다른 몬스터들은 쫄쫄 굶고 있는데도 사료 먹어, 공원 가서 소시지 받아먹어.
저리 팔자 좋은 오거는 세상을 다 뒤져 봐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울분을 토해야지."
이지혁이 손을 튕기자 검은 게이트가 빛을 뿜었다. 그리고 잠시 후.
게이트 안에서 피 맺힌 울음을 토하는 몬스터들이 끝까지 열린 수도꼭지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처럼 밖으로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크롸롸롸롸롸!
끼아아아아악!
몬스터들의 울부짖음이 세상을 뒤흔든다.
이지혁은 그 광경을 보며 콧노래를 불렀다.
"기분 좋고."
왠지 모르게 지금의 울음소리는 이지혁의 마음을 고조시키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았다. 몬스터들의 울부짖음 소리를 들으면 흥분과 동시에 고향에 돌아온 듯한 편안함이 동시에 찾아오는 기묘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흐음……."
이지혁이 앞으로 쏟아져 나오는 몬스터들을 보고 있을 때, 그의 등을 지키던 도가윤이 입을 열었다.
"방위사, KSF 연락 완료. 현재 이곳으로 지원 중."
"오지 말라 그래."
"…어째서요?"
이지혁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괜히 알짱거리면 얘들만 더 흥분할 뿐이야. 몬스터한테 뜯어 먹히기 싫으면 오지 말라고 해."
"라져."
도가윤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무전을 넣기 시작했다.
"그래도 오겠답니다."
"KSF가?"
"KSF는 대답 보류 중."
"흥."
이지혁은 코웃음을 쳤다. 사실 이런 상황이라면 가장 먼저 달려와야 할 것은 방위사가 아니라 KSF였다. 그런데도 이런 반응이 나오고 있다는 것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썩어 문드러지고 있군."
어차피 직장인데 무슨 의무감을 기대하겠는가. 능력자라면 강제로 징집해서 KSF에 때려 박았을 때부터 이런 부작용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아무래도 좋아."
오면 귀찮을 뿐이지.
이지혁이 그의 앞으로 몰려들고 있는 몬스터들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면 저쪽이랑 얼추 비슷해진 것 같은데?
"하지만 질이 다르단 말이지."
아무렇게나 소환되어 있는 몬스터와 이지혁의 지휘를 받는 군단을 동일시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일단 이지혁의 군단은 지시를 받아 체계적으로 움직였다.
"전술은 하나뿐이지만 말이지."
이지혁이 낄낄대며 웃었다. 그의 손이 앞으로 향하자 대기하고 있던 몬스터들이 사납게 울부짖으며 달려가기 시작했다.
도심의 한가운데서 몬스터와 몬스터들이 서로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피가 끓는 듯한 몬스터들의 울부짖음이 하늘을 가득 메운다.
"저, 저게 뭐냐고!"
최창혁이 기겁을 하여 소리를 질렀다.
이지혁이 생성해 낸 게이트에서 몬스터들이 떼로 나오지 않는가.
그것도 저쪽에 보이는 몬스터들보다 그 수가 더 많아 보일 지경이었다.
"모, 몬스터 천지네."
게이트에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몬스터들이 꾸역꾸역 뿜어지고 있었다.
"무슨 부화장도 아니고……."
최창혁의 목소리에 황당함이 어렸다. 지금 눈에 보이는 광경이 현실인지 의심될 지경이었다.
이지혁이 몬스터를 상대한다기에 화려한 에테르가 뿜어지는 TV 속 능력자 홍보 영상 같은 장면을 기대했는데, 지금 보이는 광경은 몬스터와 악마가 싸우기 위해 서로 이를 드러낸 모습 같았다.
"어, 어떻게 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이들은 다들 벽에 붙어서 몸을 와들와들 떨어 댔다.
정해민이 그런 이들을 하나하나 위로해 주고 있었다.
"괜찮아요, 여러분. 저건 우리 편이에요."
"몬스턴데요?"
"몬스터는 몬스턴데… 착한 몬스터?"
"……."
김다솜이 정해민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 여자는 어떨 때 보면 악랄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머리가 잘 돌아가는데, 이럴 때 보면 바보가 따로 없었다.
"지혁이 오빠가 소환한 거예요."
"그, 그래? 몬스터라는 게 소환도 되는 건가? 그럼 게임으로 치면 지혁이가 테이머나 네크로맨서 같은 거야?"
"…게임?"
이번에는 김다솜의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살면서 RPG 게임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 그녀에게 네크로맨서를 들이댔으니, 이런 반응이 나오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여하튼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요."
최창혁이 조지웅을 돌아보며 말했다.
"내 말 맞지?"
"응, 아마도."
물론 그가 들은 바대로라면 이지혁의 능력은 그게 전부가 아니지만, 지금은 일단 이들을 안심시키는 것이 맞을 것 같았다.
"부, 붙는다."
이지혁이 소환한 몬스터들과 밀려오던 몬스터들이 서로를 향해 질주를 하더니, 이내 충돌하기 시작했다.
콰아아아앙!
무리와 무리가 맞부딪쳤는데 어이없게도 폭음이 터진다.
사방으로 비산하는 몬스터들의 살점이 눈에 똑똑히 들어왔다.
"으으……."
최창혁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흘리고 말았다. 애니메이션이나 영화에서 비슷한 광경을 여러 번 보기는 했지만, 실제 상황은 그 박력이 달랐다.
몬스터와 몬스터가 서로를 물어뜯고, 할퀴고, 짓이긴다.
"카, 카메라 없냐?"
그 와중에 카메라를 찾는 최창혁을 보며 조지웅이 혀를 찼다.
"왜? 이거 찍어둬야지!"
"몬스터 사태는 찍어봐야 팔지도 못해. 판매 금지인 거 몰라?"
"암암리에 다 올라오더만."
"…그건 불법이고."
조지웅은 휴대폰을 들어 전황을 찍어 대는 최창혁을 내버려 두고 전면을 바라보았다.
'장난 아니네.'
지부 하나가 감히 막아설 엄두를 내지 못하고 도주해야 했던 몬스터들이다.
예전 같았으면 이런 일이 있을 수 없지만, 요즘은 게이트의 크기와 게이트의 힘이 반드시 비례하지는 않았다.
더 많고, 더 강한 몬스터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이지혁은 그런 몬스터들을 홀로 상대해 내고 있었다.
'이게 NDF인가.'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한국 최고의 능력자 집단이라고 하더니, 과연 그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실감하는 조지웅이었다.
이지혁만해도 저런데 NDF가 총출동하면 어떤 모습일까?
"으……."
이리 먼 곳까지 자욱한 피비린내가 풍기기 시작했다.
최창혁은 고개를 돌려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몬스터와 몬스터가 서로 어우러져 아비규환을 만들고 있건만, 그 모습을 지켜보는 이지혁은 담담하기 그지없어 보였다.
"흐음?"
이지혁이 턱을 긁었다.
"센데?"
고개를 갸웃하는 이지혁이었다. 계산이 조금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가 계산한 대로라면 이런 박빙의 장면은 연출되지 않아야 했다.
몬스터들이 가진 힘의 차이가 그다지 없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제어를 하고 있으니 저쪽의 몬스터들보다야 더 큰 힘을 발휘해야 한다.
자신이 다스리는 몬스터는 생물이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없고,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 없으니까.
그런데도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것은 이지혁이 생각한 것 보다 저쪽의 몬스터들이 강하다는 뜻이거나…….
"우리 쪽이 약하다고?"
고개를 갸웃하던 이지혁이 중앙에서 날뛰는 오식이를 보며 눈을 찌푸렸다.
"그렇다기에는 쟤는 팔팔한……."
순간, 이지혁이 손뼉을 쳤다.
"아!"
엄청나게 굶었다.
생각을 해보니 이지혁 휘하의 몬스터들은 이 세계에 소환된 이후로 제대로 된 먹이를 먹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러니 비실비실할 수밖에."
이번 일이 끝나면 게이트를 열어서 섬으로 소 떼라도 보내줘야겠다고 결심한 이지혁이 손을 들어 허공에 수인을 맺었다.
"그건 그때고……."
싸우다 말고 밥을 먹을 수는 없으니 일단은 힘을 좀 내게 해줘야겠지?
우우우웅!
이지혁의 손이 허공에서 휘저어지자 거대한 마법진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가라!"
이지혁이 손을 뻗어내자 마법진이 검은빛을 발하더니, 이내 아군 몬스터들을 향해 날아들었다.
크아아아아아아!
검은빛을 덮어쓴 몬스터들이 저마다 고통에 겨운 비명을 지르더니, 이내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이것들이 버프를 줘도 난리네."
흑마력의 세례를 받은 몬스터들이 눈을 붉게 물들인 채 발작적으로 적 몬스터들을 향해 뛰어든다. 전세가 순식간에 기울기 시작했다.
이지혁은 그 광경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나이 체면이 있지."
그가 조종하는 몬스터들이 자연 발생한 몬스터들에게 밀리는 꼴을 볼 수는 없었다.
그때, 등 뒤에서 누군가 이지혁을 향해 달려왔다.
* * *
"이지혁 씨!"
"아, 깜짝이야!"
이지혁은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헐? 안 바쁘세요?"
"손이 네 개면 바랄 게 없겠습니다."
"모양은 흉하겠지만… 실용적이겠네요."
이지혁은 쓴웃음을 짓는 정인수를 보며 피식 웃었다.
"지금 방위사 쪽이 북쪽 작전 총괄하고 있는 거 아니에요?"
"아니죠."
정인수가 손을 내저었다.
"대북을 왜 저희가 합니까? 저희는 방위 사령부지, 공격 부대가 아닙니다. 그건 다른 사단이 하겠죠."
"오?"
이지혁이 신기하다는 듯이 정인수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군 관련 작전은 다 정인수가 도맡아서 하다시피 해서 그러려니 했는데, 생각해 보니 맞는 말이었다.
방위사는 능력자가 아닌, 몬스터 전담 부대다. 북한에서 몬스터를 부리지 않는 이상 이쪽이 직접 나설 일은 없었다.
"사실 뭐, 일반 군에 비해서 맡겨만 주면 더 잘할 자신이 있기는 합니다만."
"그렇겠죠."
정예군이라고 해봐야 훈련을 열심히 했다는 것 이외에는 이점이 없는 것이다. 실전에 한 번도 투입된 적 없는 타 사단이 매일같이 몬스터를 막기 위해 뛰고 구르는 방위사를 전투력 측면에서 압도할 일은 없다고 봐도 좋았다.
"그래도 저희는 방위 부대니까요."
"공백 시에 대체할 수 있는 부대가 없어서는 아니구요?"
"사실은 그런 측면이 큽니다."
윗대가리들도 방위사를 전력으로 쓸 생각을 안 한 건 아니겠지만, 방위사를 공격용으로 쓰기에는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NDF의 공백을 우려해야 하는 상황에서 NDF뿐 아니라 방위사까지 빠져 버린다면, 거대 게이트 출현 시에 대처가 불가능한 것이다. 아무리 이지혁이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고 보면 윗대가리들은 나름 방위사의 존재 의의를 크게 평가하고 있다는 건데…….'
일선에 있는 KSF 지휘관들이 윗대가리들의 반만 방위사를 평가해도 지금처럼 안하무인적으로 굴지는 못할 것이다.
"…장관이네요. 저거 또 불렀습니까?"
"네. 뭐, 직접 손쓰면 편하기는 한데, 제가 좀 정밀성이 떨어지는 타입이거든요."
"정밀성요?"
"그쪽으로 따지자면 대포 같다고 해야 할까요? 중간중간 덩어리째로 날려 버릴 수는 있는데, 건물 사이사이로 빠져나간 애들을 건물을 안 부수고 때려잡기는 좀 힘든 체질이라……."
베라프에서는 그런 신경을 쓸 필요가 없었다.
죽여야 하는 적군과 보호해야 하는 아군을 구별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몬스터를 이용해서 인간과 싸우는 입장에서는 아군의 피격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인간을 보호해야 하는 입장이 되다 보니 걱정되는 것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저쪽 밀집 구역에 폭발을 일으키면 수많은 몬스터를 일격사시킬 수 있을지 모르지만, 주변의 건물들이 무너질 수도 있었다.
"시가전에 자주포를 동원하지 않는 이유와 같은 거군요."
"그런 거죠."
"확실히 그런 면에서 시가전이 골치 아프기는 하죠."
방위사 입장에서 가장 선호하는 게이트 출현 장소는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특히나 야산 같은 곳에 게이트가 출현하면 그 게이트는 공으로 먹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대충 멀찍이서 듬성듬성 포위망을 형성한 다음, 몬스터 출현과 동시에 미리 방열해 둔 자주포 부대가 화력을 뿌려 버리면 된다.
그럼 나오는 족족 대부분의 몬스터는 잘 익은 몬스터 구이가 되기 마련이고, 끝까지 살아남은 소수는 KSF가 처리하거나 지상용으로 개조한 신궁 같은 것으로 날려 버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몬스터가 도시 한가운데에 나타나면 골치가 아파진다.
일단 대규모 화력의 경우는 사용할 수가 없다. 건물이 버티지를 못하기 때문이다. 무너지는 건물이 아까운 것도 중요한 요소지만, 그 건물이 무너지면서 벌어질 2차 피해가 감당이 안 된다.
도시 하나가 마비되면서 벌어지는 경제적 손실은 물론이고, 혹시 대피 못한 사람들이 있다면 인명 피해도 각오해야 한다.
"흐음, 그런데 광범위 화력이 필요한가는 의문이네요."
정인수의 의문은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의 눈에 보이는 몬스터의 대군만으로도 게이트에 나와 있는 몬스터들 정도는 모조리 쓸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렇게 돌진만 하시나요?"
"네? 그럼요?"
"저 몬스터들은 이지혁 씨의 통제하에 있는 것 아닙니까?"
"맞는데요?"
"그럼 이왕이면 전술이라도 좀 쓰시면 좀 더 피해 없이 효율적으로 제압을 할 수 있을 텐데요. 뒤에서 놀고 있는 애들을 좌우로 돌려서 포위를 한다든가 말이죠. 흔한 망치와 모루죠."
"망치는 여기서 왜 찾으세요?"
"으음……."
정인수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이지혁에게 뭔가를 설명할 때는 좀 더 풀어서, 그리고 좀 더 쉽게 설명해야 하는 것이다. 유치원생에게 뭔가를 설명하듯이.
"쉽게 말하자면, 주변을 포위시켜서 싸우면 좀 더 효율적으로 싸울 수 있다는 거죠."
"아!"
이지혁이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안 돼요."
"네? 왜요?"
"이유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쟤들은 몬스터라서 적이 옆에 있는데 무시하고 지나치게 하는 게 힘들어요. 본능에 반하는 일이라고나 할까?"
"그렇겠군요."
야생마를 길들여 승마용으로 만드는 것에도 수세기가 걸렸는데, 아무리 제압이 되어 있다고는 하나 몬스터를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이 쉬울 리가 없었다.
"둘째는 제 머리가 터져요."
"아……."
"이게 뭐랄까, 쟤들은 사람이 아니라서요. 이리로 가라고 말만 하면 되는 게 아니라 제 생각과 마나로 의지를 부여해야 하는데, 저기 있는 애들이 식별 번호가 있는 것도 아니고, '대충 이만큼은 여기, 다른 대충 이만큼은 저기' 하고 명령을 내리는 게 거의 불가능해요. 가능이야 하다고 해도 제 뇌가 과부하가 걸려서 터질걸요?"
"으음, 그렇겠네요."
정인수는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네."
"여러가지 다 해봤는데, 이게 효율이 제일 좋더라구요."
"닥돌이 말입니까?"
"인간은 이런 경우 앞 열이 죽어 나가면 공포심에 의욕이 떨어지기 마련인데, 몬스터는 눈앞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으면 흥분해서 더 날뛰는 경향이 있거든요. 그러니 시간이 가면 갈수록 흉포해지죠."
이지혁이 앞쪽을 가리키더니 손가락을 튕겼다.
카아아아아아아아!
그와 동시에 몬스터들이 괴성을 질러 대더니, 앞쪽의 몬스터를 타 넘고 밀어내며 앞으로 미친 듯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저렇게요."
정인수가 그 광경을 보며 몸을 떨었다.
'공습이라도 해야겠지.'
이지혁이 움직이는 몬스터의 군단이 인간을 향한다고 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정인수는 가장 올바른 방법이 뭔지 알고 있었다.
2차 피해고, 경제적 손실이고 모두 무시한 채 이지혁이 있는 주변으로 전술핵을 퍼부어 버리는 것이다.
그럼 몬스터는 모조리 작살날 것이다.
이지혁이 작살날지는 모르겠지만.
'어렵겠지.'
이지혁을 잡으려면 초반에 잡아야 한다.
이지혁으로서는 뭔가 이상하다 싶으면 게이트를 열고 다른 지역으로 날아가 버리면 된다. 청와대나 백악관을 제집처럼 드나드는 이지혁을 상대로 폭격은 무의미했다.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정인수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아무리 대한민국의 국토를 지키기 위해서 모든 상황을 상정해야 하는 방위사라고는 하나, 이지혁을 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궁시렁대고 짜증을 내기는 하지만, 지금까지 수도 없이 세계와 대한민국을 구해온 이지혁이 아닌가.
정인수의 기억에 만약 이지혁이 나서지 않았으면 대한민국의 멸망으로 이어질 수 있는 사태가 최소 다섯 번은 넘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만큼이나 나라를 구해온 사람을 상대로 한 전투 시뮬레이션이라니.
정인수는 한숨을 쉬었다.
요즘 너무 바빠서 신경이 날카로워진 기분이었다.
"그건 그렇고, 전진이 더딘 듯한 기분이 드는데……. 쟤들 뭐하는 겁니까?"
뭔가 아까부터 기세에 비해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는 느낌이 들더니, 이유가 있었다.
앞쪽에서 몬스터를 쓰러뜨린 이지혁의 부대가 쓰러진 몬스터들을 뜯어먹고 있었다.
"…배고픈가 보네."
"……."
저걸 동족상잔이라 불러야 하는가.
동족이라기에는 뭐랄까… 지구에 사는 모든 생물이 서로를 동족이라고 부르지는 않듯이, 몬스터들도 서로를 동족이라 인식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말이다.
"보는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네요."
"있는데요?"
"네?
최창혁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창밖을 보았다.
"저, 저게 뭐야?"
이지혁이 부리는 몬스터들이 건너편의 몬스터들을 뜯어먹고 있었다.
"히익!"
물론 몬스터가 몬스터를 먹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니었다.
동물도 서로를 잡아먹지 않는가.
문제는 그 뜯어먹는 광경이 너무도 적나라하고 그로테스크하다는 데에 있었다. 팔다리를 잡아 뽑아 뜯어 먹는다든가, 아니면 쓰러진 몬스터 하나에 수십 마리의 몬스터들이 달려들어서 카니발을 벌인다든가.
'청소년 관람 불가네.'
아니면 제한 상영가로 풀어야 할 것 같았다. 이 광경은 성인이 보기에도 정신건강에 극히 해로웠다.
담이 크다는 소리를 듣고 다니는 최창혁도 지금 속이 울렁거리는데, 보통 사람들이야 오죽하겠는가.
"새, 생각하던 거랑은 뭐가 많이 다르네."
"으응."
조지웅도 최창혁의 의견에 동의했다.
이지혁의 전투라기에 뭔가 화려하고 멋진 것을 기대했다. 영화에서 나오는 히어로물 같은 전투를 기대했는데, 눈앞에 보이는 것은 괴수 대제전이니 위화감을 느낄 만도 했다.
"이지혁은 항상 이렇게 싸우는 건가?"
"그래."
"…이렇게라니."
최창혁이 멍하게 말하자 조지웅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별것 아닌 일이라고 하지 않았나?"
"……."
"이지혁은 대한민국에서도 가장 특별한 능력자야. 반면에 우리는 맨몸으로 저리 몰려오는 몬스터와 맞서야 하지. 오줌을 지리고 넋이 나가는 것을 신고식처럼 치러야 한다고."
"……."
"능력자가 쉽게 산다고 생각하지 마. 법만 아니었으면 나는 몇 번이고 도망갔을 거야. 우리가 받고 있는 특권이라는 것들을 모조리 반납하는 대신에 일반인으로 살 수 있게 해준다면 90% 넘는 능력자들이 KSF를 그만둘 거야. 그걸 아니까 정부에서도 특별법이니 뭔가를 만들어서 강제하는 거잖아."
"미안하다."
최창혁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화면으로 보는 것과 실제로 보는 것의 차이는 컸다.
최창혁은 죽으면 죽었지, 저 몬스터들의 앞에 서고 싶지는 않았다.
오늘 갑자기 그에게 능력이 발현되어서 KSF에 들어가라고 하면 어떤 기분일까?
어제까지였다면 즐거운 마음에 받아들일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약간의 특권을 위해서 포기해야 하는 것이 너무 많은 것이다.
"보통 일이 아니구나."
최창혁의 말에 다른 이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몬스터가 이리 무서운 존재일 줄은 생각도 못한 그들이었다.
"저건 또 뭐하는 거지?"
그때, 그들의 눈에 거대한 검은 구름 같은 것을 허공에 응집시키고 있는 이지혁의 모습이 보였다.
"세상에……."
* * *
그건 마치 지옥에서나 볼 수 있는 광경 같았다.
먹구름?
그것과는 또 다르다.
먹구름이 가지는 어둠과는 다른 칠흑이었다.
바라보기만 해도 불길하고, 볼수록 사람의 마음을 조여오는 느낌이 절로 들 만큼 음울한 검은색.
인간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연기가 허공으로 치솟아 오르더니 검은 구름 떼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야, 지웅아."
"응?"
"쟤 우리 편은 맞지?"
"…그럴걸?"
최창혁이 이지혁의 모습을 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근데 기분상으로는 저쪽을 공격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조지웅은 아무 말 없이 이를 꽉 깨물었다. 지금 그도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분명 이지혁은 인류를 위해서 싸우고 있는 것인데, 그것을 알고 지켜보면서도 이지혁에게서 불길함을 느껴야만 했다.
'게다가 나는 같은 능력잔데도 말이지.'
지구에 몬스터와 능력자가 출현하면서 증명된 것 중 하나는 히어로물의 비현실성이었다.
실제 세상에 히어로가 출현하게 되면 대중들이 어떤 식으로 반응할까 하는 것은 언제나 있어온 명제였다.
어떤 이는 환호할 것이라 했고, 어떤 이는 배척 받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결론은 너무도 쉽게 났다.
인간은 능력을 가진 자를 우상화하기보다는 능력을 가진 자를 시기하는 것을 더 즐겼다.
특히나 그 인간이 태생적으로 능력을 타고났다면 시기는 더 깊어진다는 것이 통설이었지만…….
'그게 다가 아니구나.'
조지웅은 느끼고 있었다.
그 역시 능력자라고 할 수 있는데, 지금 이런 기분이 느껴진다는 것은… 단순히 질투나 시기가 능력자에 대한 배척의 원인이 아닐지도 몰랐다.
공포.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공포.
마치 길거리에 호랑이가 어슬렁거리고 있는 것을 그저 지켜보고 있어야 하는 기분.
'보통의 능력자에게는 그런 기분을 느끼겠지.'
그럼 일반인이 이지혁을 보면 어떤 기분을 느낄까?
현실에서는 볼 일이 없는 악마를 실제로 보는, 그런 기분이 아닐까?
능력을 갖게 되어 어떻게든 저항이라도 해볼 수 있는 조지웅이 이런 기분을 느끼고 있는데, 최소한의 저항마저도 불가능한 보통의 인간이 이지혁에게 어떤 느낌을 받을지는 보지 않아도 빤했다.
'저 녀석처럼 말이야.'
최창혁이 질린 얼굴로 이지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그를 지배하고 있던 이지혁에 대한 질투라든가 하던 감정은 어느새 모조리 날아간 얼굴이었다.
"사, 사람이 아냐."
"어머, 그거 실례되는 말이에요."
정해민이 최창혁의 말에 딴지를 걸고 나섰다.
"…네."
"지혁이가 저래 보여도 매우 인간적이란 말이에요."
"그래요?"
"얼마나 인간적인데요. 먹을 것에 환장하고, 그리고 에……. 노는 거 좋아하고, 게임 좋아하고, 엄마 잔소리에 고통 받고."
듣고 보니 그거 진짜 인간적이네.
얼마나 인간적으로 들리는지, 마치 내 이야기를 하는 줄 알았네.
게임 좋아하고, 노는 거 좋아하고, 엄마 잔소리에 고통 받는다는 것은 일기장에 써도 될 정도로 완벽한 최창혁의 이야기였다.
"그런 애를 그런 눈으로 보는 건 실례예요. 지혁이가 제일 민감하게 반응하는 부분이기도 하구요."
"…그래요?"
최창혁이 의외라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알고 있는 이지혁이라는 사람은 민감함이라는 말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대부분의 일을 그러려니 하고 넘기는 것이 이지혁의 캐릭터와 맞았다.
"물론 뭐, 짐작이기는 하지만."
정해민이 은근슬쩍 한 발을 빼자 최창혁이 뚱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여신님께 무슨 불경한 짓을.'
상황이 아무리 급한 상황이라지만 저 정해민에게 눈을 흘기다니,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뭐하려는 거지?"
그때, 조지웅의 목소리에 최창혁은 다시 고개를 돌려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 * *
"…조금 있으면 방위사 지원 부대가 도착할 겁니다. 그때까지는 조금 참으시는 게……."
"뭐하러요."
이지혁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일단 저 시체를 어떻게 치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방위사가 없으면 저 정도의 몬스터를 이지혁이 감당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하지만 아직 이 주변에 사람들이 있는 상황에서 사태가 끝났다는 오판에 사람들이 튀어나올 확률이 있는데, 방위사가 완전히 점거를 하지 않은 상황이라면 사람들의 안전을 확보하는 데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
"그런 건 걱정 마세요."
"네?"
"싹 치워 드릴 테니까."
이지혁이 씨익 웃더니 천천히 허공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정인수가 조금 멍한 눈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사람이 날고 있는데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안 드는 것이 되레 이상할 지경이었다.
'이지혁 씨니까 뭐.'
이제는 저 양반이 돌을 황금으로 바꾼다고 해도 놀랄 일은 없을 것이다.
순간, 허공에 몸을 띄운 이지혁의 몸에서 폭풍 같은 마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정인수는 방금 전 떠올린 생각을 취소해야 했다.
이지혁의 전신이 검은 마기로 뒤덮이는 것을 보니, 또다시 놀라움이 찾아온다. 그리고 그 놀라움 이상으로 몸을 짓누르는 것 같은 공포가 그를 파고들었다.
딱, 딱, 딱.
아래턱이 절로 떨리면서 이가 부딪치고 있었다.
이지혁의 마기를 뿜어내자 몬스터들의 움직임이 멈췄다. 아군들은 고개를 조아리며 신음성을 토해냈고, 적이라고 할 수 있는 몬스터 떼들은 전신을 부들부들 떨면서 멍하니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이지혁이 손을 앞으로 쭈욱 밀었다. 그와 동시에 허공에 떠올랐던 구름 같은 마기가 사방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으응?"
정인수가 묘한 눈으로 마기를 바라보았다. 그동안 이지혁이 대단위 마법을 펼치는 것은 여러 번 보았지만, 이번 같은 경우는 보지 못한 듯싶었다.
일단 저 느릿느릿한 속도가 익숙하지 않다.
느릿느릿 밀려가던 마기가 몬스터들을 향해 내려앉기 시작했다.
"꿇어라."
이지혁의 눈이 붉게 빛났다.
그와 동시에 마기가 몬스터들의 몸으로 스며들기 시작한다.
"어?"
정인수는 몬스터들의 반응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마기를 접한 몬스터들이 괴로운 듯 전신을 뒤틀기 시작한다. 공격을 하던 이지혁의 몬스터들도 기겁을 하여 뒤로, 또 뒤로 물러섰다.
카아아아아아아!
듣는 사람의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비명성이 들려온다. 서로 다른 종류의 몬스터들이 제각기 비명을 지르면서 뭐라고 형용할 수 없을 만큼 괴이한 소리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먹을 만큼 먹었고, 이제 굴복했으니… 잘 먹히겠지."
이지혁이 씨익 웃었다.
기세가 남아 있는 몬스터들은 복종시키기 어렵지만, 공포를 느낀 몬스터들을 제압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끼에에에에에엑!
비명과 절망.
몬스터들이 그 자리에서 뒹굴며 발악을 해 댔다.
거대한 몬스터 떼가 일제히 굴러 대자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대지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으아아아!"
정인수가 그 자리에 엎드렸다. 너무 심하게 흔들려서 서 있는 것도 힘들었다.
'건물 무너지는 거 아냐?'
헬조선 건물들에 내진 설계가 제대로 되어 있을 리가 없었다. 이 정도 흔들림이면 고층 건물이 무너진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고, 이내 흔들림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끼이이이.
몬스터들이 낮은 울음소리를 내며 하나하나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주변의 몬스터들을 덮쳐 쓰러뜨린다.
"응?"
조금 전까지 이지혁에게 대항하던 몬스터끼리 내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다만, 팽팽하게 수가 나뉜 것이 아니라, 다수와 소수의 싸움인 탓인지 상황은 순식간에 정리가 되었다.
남은 몬스터들은 움직임을 멈추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끝."
이지혁이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서더니 손을 휘저었다.
몬스터들의 한가운데에 거대한 게이트가 생겨나더니, 게이트 주변의 몬스터들이 우르르 안으로 몰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음……."
이지혁이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족히 몇 만은 될 듯한 몬스터들이 우르르 질서정연하게 게이트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뭐, 뭘 어떻게 한 겁니까?"
"잡아먹었죠."
"네?"
"이제 우리 편이에요."
정확하게 말하면, 이지혁의 노예라고 할 수 있었다.
과거였다면 그보다 힘이 떨어지는 몬스터들에 대해 종속의 인을 찍는 것은 별다른 조건이 필요하지 않은 일이지만, 지금은 예전만 못하니 이런 식으로 정신을 굴복시켜 두어야만 좀 더 수월하게 일을 진행할 수 있었다.
번거롭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렇습니까?"
정인수가 게이트 안으로 점점 사라져 가는 몬스터들을 보면서 허탈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이건 좀 너무하는군.'
방위사와 KSF가 전력을 다해 막으려고 했지만 뚫려 버린 몬스터 떼였다.
천운으로 이지혁이 이쪽에 있어서 쉽게 해결한 것은 참 다행이지만, 되레 너무 쉽게 해결해 버린 면이 있다 보니 허탈한 기분이 드는 것은 그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건 그렇고, 빨리 오셨네요?"
"…사무실에 있다가 소식 듣고 전력으로 왔습니다. 이지혁 씨가 여기 계신 줄 알았으면 안 와도 될 걸 그랬나 봅니다."
"흐음, 그런데 아직 KSF는 도착도 안 했네요."
"아무래도 KSF는 지부가 딱딱 나뉘어 있기 때문에 이런 일에 즉각적인 지원이 힘듭니다. 본부에서 총괄 통제를 하기는 하지만, 보통 이런 경우에는 타 지부의 지원이 아니라 NDF에 지원을 요청하니까요. 그런데 오늘은 NDF가 출동 못하는 상황 아닙니까."
정인수가 KSF를 비호해 주는 걸 보니 헛웃음이 나왔다. 처음 보았을 때 최정훈과 서아영을 까대던 그 정인수라고 생각하니 더 그랬다.
"그렇게까지 보호 안 해주셔도 되는데……."
"억울할 만한 상황이기는 하니까요. 요즘 들어서 KSF가 빠릿빠릿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번 경우에 한해서는 불가항력입니다."
"방위사가 지금 도착했으면 말이 바뀌었을 수 있나요?"
"으음, 어조는 달라졌을지 모르지만, 그리 크게 바뀌지는 않았을 겁니다."
"뭐, 그럼 인정해야죠."
이지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도 잔소리를 하는 것은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다만, 이대로 계속 KSF가 같은 모습을 보일 경우에는 딱히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저,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
"네."
"객관적으로 방위사와 KSF가 붙으면 어떻게 돼요? 방위사가 처리할 수 있나요?"
정인수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하다가 되물었다.
"이지혁 씨는요? 포함해서 생각해야 합니까?"
"저는 빼야죠."
"그럼 방위사 병력만으로는 대등할 수 있을 것 같고, 대한민국 국군을 동원한다는 가정이라면 압살입니다."
"그 정도예요?"
정인수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군이 능력자를 필요로 하는 이유는 군인이 가지고 있는 화기가 대부분 몬스터를 적이라 상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개인화기가 육체를 완벽하게 파괴할 수 있게 된 이후로 화기는 화력의 극대화보다는 정확도와 연사력에 중점을 두고 발전해 왔죠."
"네."
"하지만 능력자들이라고 해도 특정 몇몇을 제외한다면 몸에 탄이 박히지 않는 일은 없습니다. 스나이퍼까지 갈 것도 없이, 일반적인 화망만으로도 고개도 내밀지 못하게 될 겁니다."
"으음……."
이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그럼 다행이구요."
'다행?'
정인수가 막 의문을 표하려는 순간, 이지혁이 하나 더 물었다.
"NDF는 출발했대요?"
* * *
"출발이야 모레 아닙니까?"
"그럼 아직은 여기에 있겠네요."
"그렇죠."
"흐음……."
아직 작전일이 남았는데 출동까지 막아대는 것을 보면 나라에서도 이번 일을 매우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봐야 했다.
"그럼 여기 정리 부탁드릴게요."
"정리라고 해도……."
정인수가 쓴웃음을 머금었다.
몬스터의 잔해는 거의 남아 있지도 않았다.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검붉고 푸른 피가 잔뜩 고여 있는 대지뿐이었다.
이지혁이 소환한 몬스터와 제압한 몬스터들은 이미 다들 게이트 안으로 사라져 있었다.
'청소라도 해야 하나.'
사실 제일 중요한 일이야 아직 건물에 남아 있을지 모르는 사람들을 찾아서 귀가시키는 것과 서류 정리 정도겠지.
그리고 왜 방어선이 뚫렸느냐는 욕을 먹고 보고서를 써야 하는 문제도 남아 있었다.
"여하튼 수고하셨습니다."
"네. 뭐, 그럼."
이지혁이 손을 흔들고는 옆쪽에 있는 건물로 향했다.
"어디 가세요?"
"아, 오늘이 동창회라서요."
"네?"
정인수가 멍청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수고했어."
정해민이 빙긋 웃으면서 이지혁의 어깨를 토닥였다.
"수고는 무슨."
김다솜은 말없이 다가와 이지혁에게 음료 잔을 내밀었다. 잔을 받아서 원샷을 한 이지혁이 캬, 하는 감탄을 내뱉었다.
"일하고 나서 먹는 탄산이 짱이지."
최선미가 아직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그럼 이제 끝난 거야?"
"응."
"그럼 우리 집에 가도 돼?"
"그렇긴 한데……."
이지혁이 돌아보자 조지웅이 설명을 대신했다.
"일단은 이 주변은 통제되어 있을 테니까, 곧 도착할 방위사의 안내를 받는 편이 나을 거야."
"그렇다는데?"
"으응."
최선미는 여전히 불안한 얼굴이었다.
"이제 몬스터 없어. 그만 쫄아도 돼."
최선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이렇게 심약한 성격인지는 그녀도 처음 알았다. 옆에서 계속 다독여 주던 정해민이 아니었다면 쇼크로 발작을 일으켰을지 모를 일이었다.
"…해민 언니 고마워요."
그러다 보니 지금까지 까칠하게 굴던 것이 다 미안해질 지경이었다.
"무슨 그런 말을 해요. 당연한 거죠."
정해민이 싱긋 웃었다.
'천사야, 천사.'
연예인이면서 마음도 이리 곱다니. 거기에 얼굴 예쁘지, 노래 잘하지, 착하지, 춤 잘 추지…….
뭐 하나 빠질 게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팬클럽 가입해야지.'
그게 아니면 개인 팬 페이지라도 만들어서 활동하면 좋을 것 같았다.
우유 빛깔 정해민이라든가…….
그때, 이지혁이 입을 열었다.
"근데 너."
"응?"
"얘들이 불안해하면 대충 바깥쪽으로 텔포나 시켜주지, 왜 여기서 놀고 있었어?"
"어차피 곧 해결할 건데 뭐. 귀찮게."
"그래?"
빠득.
최선미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주먹이 꽉 쥐어졌다.
'테, 텔포?'
그러고 보면 정해민은 텔레포트 능력자가 아닌가. 마음만 먹으면 여기에 있는 사람들을 다들 안전 구역으로 대피시키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귀, 귀찮아?'
고작 그딴 이유로 사람들이 이리 공포에 떨고 있는 것을 그냥 방치했단 말인가.
"…귀찮긴 하지."
이지혁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하고는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다.
"분위기가 이런데 동창회 더 하는 건 좀 그런 것 같으니까, 나중에 다시 놀자."
"으응."
"그럼 간다."
이지혁이 밖으로 나가자 정해민과 김다솜이 그 뒤를 따라 나섰다.
"안녕히 계세요."
동창들이 멍하게 손을 흔들었다.
문이 닫히고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폭풍이 지나갔네."
"그러게 말이야."
* * *
밖으로 나온 이지혁은 집 쪽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저 멀리 무장한 군인들이 뛰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잘하려나?'
군인들을 보고 있으려니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NDF들도 이지혁과 함께 움직이지 못하는 것에 부담을 가지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이지혁도 NDF들을 그냥 보내려니 영 물가에 애들을 내놓은 것처럼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지혁아."
"응?"
정해민이 웃으며 말을 했다.
"우리 모레 어디 놀러 갈까? 나 그날 스케줄 비는데. 일단 비상대기라."
"…비상대기가 어딜 놀러 가요!"
이지혁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김다솜이 딴지를 걸었다.
"나야 어디서든 대기할 수 있거든? 전화만 받으면 대기하는 건데?"
"큭."
확실히 맞는 말이었다. 텔레포터가 대기 장소를 정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 그래도 원칙이라는 게 있는 거죠."
"신경 쓰지 말고 학교나 가세요."
"네. 나이 먹고 졸업하셨으니 좋으시겠네요."
"뭐?"
이지혁은 둘의 싸움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내가 걱정이 많은 건지, 이것들이 태평한 건지.'
서글픈 하루가 지고 있었다.
* * *
작전 당일.
최정훈은 긴장한 얼굴로 전면을 바라보았다.
'이거, 괜찮은 건가?'
공습을 한다고 하기에 당연히 헬기라든가 드롭 십을 통한 공중 강하 같은 것을 생각한 최정훈이었다. 하지만 국군이 선택한 루트는 그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물론 크기는 커서 사람이 다 탈 수 있었으니까 불만이 없기는 한데 말입니다."
현장을 총괄하고 있는 곽민호 대령이 최정훈을 보며 설명을 했다.
"기본적으로 육로를 통한 작전은 휴전선을 뚫고 전진하는 순간, 적에게 대처를 할 수 있는 네 시간을 주게 됩니다. 아무리 빠르게 평양으로 쾌속 진격을 한다고 해도 한계가 극명하죠."
"네. 그건 이해했습니다만……."
"그리고 수송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북한 측에서 가장 신경을 쓰는 것이 대공 화망입니다. 전투기야 격추가 어려우니 폭격 정도는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목표를 정확하게 제거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렇겠죠."
"게다가 현재 평양에는 일반인들이 우글우글대고 있습니다. 오백만이 넘는 인원들이 야숙을 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하니, 도저히 폭격을 할 수가 없습니다."
최정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을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면 이걸 위해서 사람들을 저리 깔아놓았는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너무 많은 이들이 평양에 몰려 있었다.
"북한 인구가 이천만 정도밖에 안 된다고 하는데, 평양에만 오백만이라니."
"엄청나게 모아댄 거죠. 하지만 다시 말해 총력을 쏟아부어 모았음에도 그 정도밖에 모이지 않았다는 말도 되는 겁니다. 북한 정권의 힘이 그만큼이나 미약해졌다는 뜻이죠. 김일성이 생존해 있던 시절이라면 천만 이상이 모였을 겁니다."
"과연."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위로가 되지는 않았다.
"그러니 가장 최선은 수로입니다. 대동강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러지 못하고 대충 상륙한다고 하더라도 남포에서 도로를 탈 수 있다면 불과 50㎞에 불과합니다. 단번에 평양으로 진격할 수 있습니다."
최정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비행기나 헬기를 통해 평양으로 가는 것이 합리적으로 보였지만, 군사 전문가의 의견이니 그보다는 더 잘 알 것이다.
"타국은 어찌 움직이는 겁니까?"
"중국과 러시아는 육로와 수로로 부대를 나누어 진격하기로 했습니다. 아무래도 점령군이 필요할 테니까요. 그리고 일부는 항공으로 이동할 겁니다."
"으음……."
최정훈이 침음성을 냈다.
한국은 육로를 선택하지 않았는데 중과 러가 육로를 선택했다는 부분이 마음에 걸렸다.
"당연한 겁니다. 북한의 육군 전력은 대남으로 집중되어 있습니다. 탈북을 시도하는 사람이 왜 휴전선을 넘지 않고 압록강을 넘겠습니까?"
"그도 그렇네요."
최정훈은 동의를 표하고 고개를 들어 옆을 돌아보았다. 망망대해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럼 저희는 지금 평양으로 가고 있는 겁니까?"
"네? 아닙니다. 저희는 지금 중국으로 가는 겁니다. 목적지는 칭다오입니다."
"칭다오요?"
"예."
"아니, 조금 전에는 상륙부대가 평양으로 직접 간다고 하시더니, 저희는 왜 중국으로 갑니까?"
곽민호가 빙그레 웃었다.
"이게 국제 공조라는 것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한국 내에서는 평양으로 바로 침투할 수 있는 루트가 없지만, 중국이라면 다르죠. 중국군은 평양 쪽에 마크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텔포 능력자를 통해 한 번에 넘어갈 수 있습니다."
"아!"
최정훈은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상륙 병력들을 텔레포트로 옮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게 가능했다면 비행사들은 다 굶어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NDF는 전원을 다 옮긴다고 해도 그 수가 많지 않으니 가능한 것이다.
"중국 측의 능력자들도 있지 않습니까."
"중국 인구를 감안하시면 중국에 텔레포트 능력자들이 몇이나 되는지 추정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겠죠."
단순히 인구수 대비 텔레포터를 한국 인구에 비해서 추정한다면 20명이 넘는 텔레포터가 있다고 봐야 한다.
'이러니 정해민 씨가 나설 일이 없는 거구나.'
한국에서야 그 쓰임새가 너무 많아서 탈인 정해민이지만, 국제적으로 보자면 흔하디흔한 텔레포터 중 하나일 뿐이었다.
다른 능력자들은 아무리 능력이 애매하다고는 해도 수가 모이면 모일수록 도움이 될 수 있지만, 텔레포터는 옮겨야 하는 수를 충족하는 순간 잉여 인간이 되어버린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 최정훈이었다.
"…그럼 저희가 평양으로 가장 먼저 진격하게 되는 겁니까?"
"아니요."
곽민호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스스로를 과소평가하지 마십시오. 미중러 전부가 현재 NDF를 동맹이 보유한 최고의 전력이라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런 분들을 다짜고짜 투입시킬 수는 없지요. 육군과 상륙부대가 떨어지고, 화망을 무력화시키고 나면 미국의 강습부대와 함께 평양으로 진격할 것입니다. 그때, 평양으로 들어갑니다. 미국을 제외한 타국의 능력자들 중 최정예들이 함께할 것입니다."
최정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말입니다."
"예."
"제가 알기로 최정훈 씨는 비능력자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렇죠."
"그런데 꼭 현장에 가셔야겠습니까?"
최정훈은 쓴웃음을 머금고 뒤를 돌아보았다.
의자에 앉아서 대기하고 있는 이들의 얼굴에 불안함이 가득했다.
'왜 안 그렇겠냐마는…….'
소방수더러 불을 끄는 것이나 마찬가지니 전쟁에 나가서 싸우라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어쩌면 자기만족일지는 모르겠지만, 최정훈은 뒷자리에 거들먹거리며 앉아서 이들에게 지시를 내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방해가 된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정 그러시다면."
곽민호는 더 이상 최정훈을 다그치지 않았다. 이미 최정훈이 현장에 들어가는 것은 합의가 된 사항이다. 노파심에 한 번 더 의향을 물어봤을 뿐이지, 그에게는 최정훈을 강제할 수 있는 권한이 없었다.
"제가 현장에 들어간다고 해서 별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현장에서만 할 수 있는 일이 있지 않겠습니까?"
곽민호가 빙그레 웃었다.
"분명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많겠지만, 머리로 아는 것과 현장에서 직접 뛰는 것은 다른 문제지요. 목숨이 걸린 일인데도 자처하시는 것을 보니, 왜 NDF하면 최정훈이라는 이름이 가장 먼저 나오는지 알 것 같습니다."
'이지혁이라는 이름이 가장 먼저 나오겠죠.'
현실은 현실이니까 말이다.
최정훈은 저 멀리 보이는 땅을 보며 침을 삼켰다.
"중국인가요?"
"예. 우리뿐 아니라 러시아 측에서도 이쪽을 통해 들어갈 겁니다. 그리고 일본에서도 일부 능력자들이 파견되었습니다."
"일본이요?"
"생색내기죠. 그 새끼들이야 다른 나라의 일에 낄 수만 있으면 무슨 짓이든지 하는 놈들 아닙니까. 자위대를 파견할 수가 없으니 능력자라도 보내서 차근차근 명분을 쌓는 거죠."
"미국에서 허락한 겁니까?"
"아마 그렇지 않겠습니까?"
최정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들지 않는 행보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일일이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나중에 이지혁 씨더러 백악관에 한 번 다녀오라고 해야겠네.'
백악관에 들어가서 햄버거 사 오라고 발악하는 이지혁을 생각하며 최정훈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라도 긴장을 날려야 했다. 이제 곧 그들은 북한으로 들어갈 테니까.
작전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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