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75화 (75/118)
  • [■] 뭐 문제 있어요? [■]

    ─────

    "끄응."

    최정훈은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없어."

    키가 보이지 않는다.

    하기야 사무실에서 먹고 잔 지가 벌써 일주일이다. 일주일 전에 키를 어디다 뒀는지를 생각해 내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하, 진짜……."

    이 밤에 어디서 택시를 잡아야 한단 말인가.

    거리가 보통 거리도 아니고.

    재수 없는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일주일 만에 퇴근하려고 했더니 차 키를 잃어버릴 줄이야.

    "휴……."

    최정훈은 몸을 돌렸다.

    이렇게 된 이상 그냥 미련없이 퇴근을 포기하고 다시 사무실로 올라갈 생각이었다.

    빵빵!

    하지만 그때, 등 뒤에서 클랙슨 소리가 들렸다. 최정훈은 얼굴을 찡그리고는 고개를 뒤로 돌렸다.

    "응?"

    하얀색 스포츠카가 최정훈 쪽으로 라이트를 밝히고 있었다.

    "뭐해요?"

    운전석 창문이 내려가더니 고개가 밖으로 빼꼼 나온다.

    "키가 없어서요."

    서아영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고 말았다.

    "키가 왜 없어요?"

    "그러게요."

    "그래서 지금 뭐하시는 건데요?"

    "다시 올라가려구요."

    "왜요?"

    "택시 잡기도 애매하고."

    "나참."

    서아영이 한숨을 쉬더니 손짓을 했다.

    "타세요."

    "……네?"

    "타세요. 태워다 드릴게요. 키 좀 없다고 집에 안 간다는 게 말이나 돼요?"

    "아뇨. 그게 아니라……."

    최정훈이 도리질을 했다.

    "지금 차 안 가지고 가면 다시 출근하기도 애매하니까. 그냥 사무실에서 자고 내일 서비스 센터에 전화해서 사람 부를게요."

    "타시라구요. 출근할 때도 태워다 드릴게요."

    "아니, 뭐, 그러실 것까지……."

    "최정훈 씨."

    "네?"

    "제가 타라고 몇 번 말했죠?"

    최정훈은 고개를 푹 숙였다.

    서아영이 저렇게 나온 이상 말은 통하지 않을 것이다. 어쩔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린 최정훈이 터덜터덜 걸어서 보조석 차 문을 열고 안에 탔다.

    '좁아.'

    대형 세단을 선호하는 그에게 서아영의 차는 너무 좁았다. 시트도 딱딱하고.

    이런 차를 왜 타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최정훈이었다.

    "출발할게요?"

    "저희 집 아시죠?"

    "한두 번 가봐요?"

    "네."

    "……."

    "두 번."

    서아영이 한숨을 쉬었다.

    "기억하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네. 그럼 부탁드립니다."

    부우우우웅.

    높은 엔진 음과 함께 차가 앞으로 쭉쭉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노면을 엉덩이로 핥으며 달리는 것 같은 승차감에 최정훈이 얼굴을 찡그렸다.

    '이런 차를 왜 타는지 모르겠네.'

    스포츠카는 좋다. 그런데 대체 서울에 이 차를 타고 달릴 곳이 어디 있다고 이런 걸 돈 주고 산단 말인가.

    "뭐 불만 있어요?"

    "아뇨."

    서아영 앞에서는 불만이 있어도 없어야 한다. 이지혁과는 다른 종류의 불편함이었다.

    '그러고 보면…….'

    최정훈은 고개를 돌려 서아영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처음 보았을 때 솜털이 보송보송하던 능력자 꼬맹이가 어느새 이 바닥에서 알아주는 경력자가 되어 있었다.

    세월이란 게 다 그런 거지만, 오늘따라 그 사실이 어색하게 느껴지는 최정훈이었다.

    "좀 쉬어가면서 일해요."

    "예."

    "예전처럼 우리가 발로 뛰어야 하는 게 아니잖아요. 그거, 일 중독이에요."

    "예. 무슨 말인지 압니다."

    최정훈은 씁쓸하게 웃었다.

    이지혁이 나타나기 전, 열악하던 능력자들의 처우를 개선하고 발 빠르게 대처할 수 있는 기관을 만들겠답시고 얼마나 발로 뛰고 몸으로 굴렀던가.

    이제는 처우도 많이 개선되었고, 전 세계에서 제일 알아주는 능력자 집단에 속해 있음에도 과거의 습관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최정훈 씨가 계속 그렇게 일하면 다른 사람들도 불안해진단 말이에요."

    "……그렇겠죠."

    최정훈은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그렇게 불안해서 그러세요?"

    "네?"

    "단순히 일 때문에 그러는 것 같지는 않은데, 요즘 들어 좀 더 심해진 것 같아요. 뭐가 그리 불안해서 자꾸 봤던 서류를 다시 보고 하는 거예요?"

    "그건 그냥 이지혁 씨가……."

    "그전부터 그랬잖아요."

    최정훈은 대답을 미루고 창밖을 보며 입을 열었다.

    "저희 집 아신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알죠."

    "그런데 이 길은 저희 집으로 가는 길이 아닌 것 같은데요?"

    "맞아요."

    "납치입니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예요."

    "엄청 무서운 이야기군요, 그거."

    하지만 뭐 어쩌랴. 이미 그는 서아영의 차에 타버렸는데.

    한참 동안 차를 몰고 간 서아영이 강변에 차를 댔다.

    창문을 내린 서아영이 선심 쓰듯 말했다.

    "피워도 되요."

    "감사합니다."

    최정훈이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얘기 좀 해요."

    "싫다고 한 적 없습니다."

    서아영이 불만 가득한 얼굴로 최정훈을 바라보았다.

    "최정훈 씨의 문제가 뭔지 알아요?"

    "음, 잘 모르겠습니다만?"

    "엄청 많아요."

    "……."

    보통은 말을 그렇게 시작했을 때는 그런 대답이 나오는 게 아니지 않나?

    뭔가 호응이 이상한데?

    "엄청 많아요. 엄청 많은데, 그중에서 제일 큰 문제는 자기는 남 걱정 하는 티를 내면서 자기가 문제가 있을 때는 남에게 절대 말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음……."

    뭔가 변명을 할 수 없는 정곡이었다.

    "그런데 사람은 보통 다 그렇잖아요."

    "최정훈 씨처럼 심한 사람은 잘 없죠."

    "그렇습니까?"

    최정훈이 어색한 얼굴로 담배를 물었다.

    "말해보세요, 뭐가 문젠지. 최근 들어서 더 달달대는 것 같아요. 이유가 있을 거 아니에요."

    최정훈이 창밖으로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불안하니까요."

    "뭐가요?"

    "지금 이 세상이요."

    서아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는 지금 최정훈이 하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게이트 출현 빈도 자체는 조금 줄었습니다."

    "그렇죠. 요즘은 좀 한가하잖아요."

    "그런데 게이트의 급은 올라가고 있습니다."

    "그래요?"

    최정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쪽은 출동을 잘 안 하니 보통은 모를 수밖에 없죠. 전 세계적으로 평균을 내보면 게이트의 평균 레벨이 2레벨 정도는 올랐습니다."

    "……그렇게나?"

    "최근에 1레벨 게이트 보신 적 있습니까?"

    "아뇨."

    "레벨을 다운시켜도 될 겁니다. 최근에는 2레벨 이하의 게이트는 거의 전멸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요. 이제는 과거의 3레벨 게이트를 1레벨이라 불러야 할 판입니다."

    "음, 상황이 좀 이상해지기는 했네요. 그런데 그게 그렇게 중요한 거예요?"

    "중요하다기보다는……."

    최정훈이 담배 한 대를 더 입에 물었다.

    "그만 피워요. 폐 썩어요."

    "피우라면서요."

    "누가 연 두 대를 빨래요?"

    "……거, 치사하게."

    "치사?"

    서아영의 눈에서 불을 뿜었다.

    "피워요, 피워! 확 폐암 걸려 죽어버려라."

    서아영의 악담을 들으면서도 최정훈은 꿋꿋하게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러고는 빠르게 화제를 돌렸다.

    "현재의 상태로 보면 게이트는 가면 갈수록 강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능력자들의 출현 빈도는 변함이 없습니다."

    "네."

    "다시 말하자면, 동일한 상황에서 점점 더 강력한 적들을 상대해야 한다는 말이 됩니다. 이제 슬슬 그 균형이 깨질 조짐이 보여요. 이대로라면 얼마 가지 못해서 파탄이 날 겁니다."

    서아영의 얼굴도 굳었다.

    "우리도 강해졌잖아요."

    최정훈이 피식 웃고 말았다.

    "전 세계에 수많은 능력자들과 끝도 없는 게이트 중에서 우리가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될 것 같습니까? 한 줌? 그 이상은 안 될 겁니다."

    서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맞았다.

    대한민국의 국민은 전 세계로 보면 0.1%에 불과하다. 능력자의 수도 그리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능력자 중 0.1%에 불과한 NDF가 전 세계의 게이트 사태에 대응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그래도 이지혁 씨도 있고……."

    최정훈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를 가장 괴롭히는 것이 바로 그 부분이었다. 그는 눈치가 없는 사람이 아니다. 마왕들과의 연이은 격전에서 아펠드리체가 한 말, 그리고 육체로 흑마력을 주입 받은 이들이 말하던 부작용을 생각하면 답은 빤했다.

    '그 이지혁 씨가 한계란 말입니다.'

    영원히 그들을 지켜줄 수호신이라고는 생각한 적 없지만, 그래도 이렇게 빨리 공백이 생겨날 줄은 몰랐다.

    "이지혁 씨도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겠죠."

    "균형은 이미 무너졌습니다. 제 생각대로라면 1년 내에 우리는 더 이상 게이트를 막아낼 수 없게 될 겁니다."

    "다른 사람들은요?"

    "누굴 말씀하시는 건가요?"

    "미국이나 일본이나 그쪽도 비슷한 결론을 내리고 있는 건가요?"

    "그런 모르겠습니다. 그런 쪽으로 대화를 해본 적은 없거든요. 하지만 그들의 결론도 그리 다르지는 않을 겁니다. 왜냐면 이건 눈에 보이는 현상이거든요. 분석이 어려울 것도 없습니다. 아마 지금쯤이면 다른 대책을 찾고 있겠죠."

    최정훈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하지만 그 대책이라는 게 마땅치가 않다는 거죠."

    "음……."

    서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러니까 지금 그 쓸데없는 걱정 때문에 고생 중이라는 거죠?"

    "…쓸데없는 걱정?"

    최정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세계의 멸망이 코앞에 닥쳐 있는 상황인데 쓸데없는 걱정이라니.

    "이봐요, 최정훈 씨."

    "네."

    "최정훈 씨는 슈퍼맨이 아니에요."

    "……."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구분하세요. 최정훈 씨가 하는 일은 세계정세를 걱정하는 게 아니라 당장 오늘 잠잘 시간을 확보하는 거예요."

    "알고는 있습니다."

    "아뇨, 몰라요."

    서아영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는 게 아니라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거죠. 그래도 활용할 수 있는 카드가 있으니 머리를 잘 굴리면 어떻게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죠?"

    최정훈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말이 맞다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당신이란 사람은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는 빤하죠. 하지만 그런 건 윗대가리한테 맡기라구요. 당신이 할 일은 그런 게 아니잖아요."

    "……그렇죠."

    "그리고 만약에 우리가 그 사태를 막지 못해서 세계가 멸망한다고 쳐요."

    "네."

    "뭐 문제 있어요?"

    최정훈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서아영을 바라보았다.

    "문제가 없다구요?"

    "네. 뭐 문제 있어요? 혼자 죽는 것도 아니고, 다 같이 죽는 건데요. 뭐, 인류는 거기까진 거죠."

    "태평한 소리네요."

    서아영이 피식 웃었다.

    "농담 아니에요. 블랙 먼데이 이후로 그런 생각을 안 해본 사람은 없을걸요? 근데 뭐, 막을 수 없는 일이라면 받아들여야죠. 벌벌 떤다고 뭐가 달라지겠어요."

    "……."

    "최정훈 씨가 아무리 능력이 있다고는 하지만, 최정훈 씨가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면 다른 이들 중에서도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거예요. 만약 최정훈 씨가 혼자서 해결할 수 없는 일이라면 지금의 방식은 잘못된 거구요."

    "……그러네요."

    "그러니까 그런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말라구요. 옆에서 보는 사람들만 힘드니까."

    이걸 위로라고 해야 하나?

    최정훈이 떨떠름한 얼굴로 서아영을 바라보았다.

    * * *

    "위로하시는 거 맞죠?"

    "네? 위로요? 지켜보기 짜증나니까 적당히 하시라고 말하고 있는 건데요."

    "끄응……."

    최정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일단은 눈앞에 있는 현안에 집중하실 때 아닌가요? 당장 이틀 뒤면 북한으로 가야 하는데, 지금 전 세계의 평화와 번영에 신경을 쓰실 때가 아닌 것 같은데요."

    "틀린 말은 아니군요."

    확실히 서아영의 말이 맞았다. 당장 바로 앞으로 다가온 현안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먼 미래에 있을 일을 고심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알긴 안다고.'

    알기야 하지만 마음이 그렇지 않으니 문제였다.

    "참 성격 희한해요."

    "끙."

    최정훈이 도끼눈을 뜨고 자신을 바라보는 서아영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예전에는 안 그랬잖아요."

    "네?"

    "처음 봤을 때 무렵에는 일에 쫓기기는 했어도 여유가 있는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사람들도 최정훈 씨를 믿고 일할 수 있던 거구요. 최정훈 씨가 그렇게 중심을 잡아주지 않았으면 다들 못 버텼을 거예요."

    '처음이라고 해봤자…….'

    처음 봤을 무렵에 지부에는 그녀와 최정훈 단둘만이 있었을 뿐이다. 나중에야 인원들이 많이 충원되었지만, 본부가 아닌, 거의 최초의 지부라는 느낌으로 실험적으로 운영되는 단계였다.

    그러니 믿고 일할 수 있을 사람이라 봐야 서아영밖에 없다.

    "그랬나요?"

    "네."

    서아영이 구시렁대기 시작했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네?"

    "쫌생이 같아요."

    최정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말을 해도 어떻게 저렇게 한단 말인가.

    "그리고 늙었어요."

    "이봐요!"

    "얼굴도 못생겨졌어."

    최정훈이 부들부들 떨었다.

    하지만 서아영은 최정훈의 기분 따위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이 감상을 늘어놓았다.

    "기타 치던 교회 오빠가 몇 년 뒤에 다시 봤더니 꼰대가 되어 있는 걸 보는 기분이에요. 그러니 적당히 좀 해주세요. 옆에서 보는 사람들 기분도 생각을 해주셔야 할 것 아니에요."

    "조, 좋게 말해줄 수도 있잖아요! 꼰대라니!"

    "꼰대더러 꼰대라고 하지, 뭐라고 해요?"

    "끄으응."

    최정훈이 진저리를 쳤다.

    아무리 사람이 나이가 들면 아재가 될 수밖에 없다지만, 아직은 아재라는 말을 듣고 싶지 않은 나이였다.

    "반성할게요."

    "제대로 반성 좀 해주세요."

    최정훈은 웃고 말았다.

    '한 방 먹었네.'

    NDF의 소속을 케어하고 위로하는 것은 그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거꾸로 이렇게 서아영에게 케어를 받을 줄은 몰랐다.

    "말 그대로네요. 어떻게든 이번 일부터 잘 처리해야죠. 보통 일도 아니고."

    "흐음……."

    서아영이 불만스럽다는 얼굴로 최정훈을 바라보았다.

    "왜요?"

    "아뇨. 아니에요."

    '밥통.'

    저런 사람에게 뭘 기대하겠는가.

    "준비는 다 끝나셨어요?"

    "준비는 해도 해도 끝이 없다고 하고 싶은데……."

    "하고 싶은데?"

    최정훈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사실은 해도 끝이 없는 게 아니라 뭘 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게이트 관련으로야 전문가지만, 이런 일에서는 문외한이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그도 그렇죠."

    그들이 언제 사람을 상대해 보았겠는가.

    "…미묘한 사건이라 더 그렇습니다."

    "미묘해요?"

    "예."

    최정훈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생각대로 흘러간다면 이번 일은 최초로 능력자와 능력자가 서로의 목숨을 노리고 싸우게 되는 최초의 능력자전이 될 것이다.

    이제까지 전쟁에 능력자가 동원된 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동안은 한 국가가 전쟁에 능력자를 동원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을 깨고 기습적으로 활용한 것이라면, 이번에는 서로가 능력자의 존재를 감안해서 작전을 짜고 있었다.

    "잘해줘야 할 텐데."

    이럴 때면 그 자신이 능력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짜증 났다. 안전한 곳에 숨어서 응원하는 것도 사람이 할 짓이 아니었으니.

    차라리 그도 능력자라면 그들과 함께 싸울 수 있을 텐데 말이다.

    "무슨 생각 하는 건지 알 것 같은데, 사람에게는 각자의 역할이 있는 거예요."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최정훈 씨는 지금까지 누구보다 잘해왔잖아요."

    괜한 공치사에 얼굴이 붉어진다.

    "그렇다고 뭐 나오는 것 없습니다."

    "그런 거 아니에요. 저는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최정훈 씨가 아니었다면 NDF가 지금의 이런 모습이 되지는 못했을 거예요. 아니면 아예 생겨나지도 못했겠죠. 그래서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나올 게 없다니까요. 뭐가 필요하십니까?"

    최정훈이 가벼운 농담으로 흘리려고 하자 서아영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세상 멸망한다면서요?"

    "예?"

    "얼마나 남은 것 같아요?"

    "제 계산대로라면 1년 정도는 남은 것 같은데, 정확하게는 잘 모르겠습니다. 변수가 워낙에 많으니까요."

    '가장 큰 변수가 옆에 있기도 하고.'

    위기에 처한다면 이지혁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그동안 그 많은 사건들을 함께 겪었음에도 최정훈은 아직 이지혁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이지혁의 능력은 이 세계에서는 더없이 유니크하다.

    게이트와 몬스터 활용을 통한 변수는 다른 능력자가 가질 수 없는 무기였다.

    "그래서 한 1년 남았다는 거죠?"

    "……그렇게 안 되게 만드는 게 저희가 할 일 아니겠습니까?"

    "못 막으면요?"

    "그럼 뭐……."

    최정훈이 말끝을 흐렸다.

    "그걸로 다 끝나는 거죠."

    서아영이 빤히 최정훈을 보다가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럼 장가도 못 가보고 죽는 거네요."

    "아……."

    서글픈 미래를 상상한 최정훈이 눈가를 훔쳤다.

    "괘, 괜찮습니다. 저는 독신주의자니까요."

    "강제적 독신주의자?"

    "아니거든요?"

    아직 밖에 나가면 인기 많거든?

    밖엘 못 나가서 그렇지!

    "그러고 보니 최정훈 씨 모태 솔로 아니에요?"

    "……."

    최정훈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여자 손 한 번 못 잡아보고 죽는다니, 그런 미래는 죽어도 싫었다.

    "꼬, 꼭 어떻게든 막아야겠네요."

    서아영이 최정훈을 보며 피식 웃었다.

    "독신주의자라더니, 그래도 장가는 가고 싶은 모양이죠?"

    "물론 저는 독신주의자입니다만…… 평생 연애 한 번 못해본 채로 죽는 건 너무 억울하잖아요."

    "연애야 하면 되죠."

    최정훈이 역정을 냈다.

    "연애는 뭐 저 혼자 합니까? 상대가 있어야 연애할 것 아닙니까. 설사 연애를 한다 쳐도 일주일에 두세 번 퇴근하고 집에 가면 자고 바로 나오는 사람과 누가 계속 사귀려고 하겠습니까. 괜히 남에게 피해 주지 말고 혼자 살아야죠."

    "걱정 안 해도 되요."

    "네? 왜요?"

    "내가 해주면 되잖아요."

    "……네?"

    터덕.

    그 순간, 서아영이 기어를 밀어 넣고 엑셀을 밟았다.

    우우우웅!

    "으아아악!"

    누가 스포츠카 아니랄까 봐 후진도 스포츠하게 하네, 진짜!

    뒤쪽으로 차가 급발진을 하자 몸이 앞으로 확 숙여졌다.

    "사, 살살 좀 몰아요."

    "네. 사고 난 적 한 번도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집까지는 안전하게 모셔 드릴게요."

    "아니! 지금 내 눈에 칼치기하는 게 보이는데!"

    최정훈이 입으로 불을 뿜을 기세로 소리쳤다. 하지만 서아영은 들리지 않는다는 듯 엑셀을 밟으면서 창문을 내렸다.

    바람이 과격하게 창 안으로 몰려들어온다.

    "아,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네?"

    "아까 뭐라고 하셨냐구요."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아닌데, 내가 들었는데?"

    "뭘 들었는데요?"

    "와, 이거 보소."

    최정훈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서아영을 보며 소리쳤다.

    "제가 들었다니까요."

    "그러니까 뭘 들으셨냐구요?"

    최정훈이 입을 꾹 다물었다.

    여기서 말을 먼저 꺼냈다가는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괜히 작업 걸었다고 동네방네 소문이 나도 변명할 수가 없다.

    "아, 아닙니다."

    "쫌생이."

    "뭐라구요?"

    "아니에요, 쫌생이."

    서아영이 엑셀을 꽉 밟았다.

    "으아아아!"

    뭔 놈의 차가 밟으면 밟는 대로 나갔다.

    최정훈은 안전벨트를 꽉 잡고 소리쳤다.

    "과속이에요! 경찰 온다구요."

    "이 시간에 무슨 경찰이에요."

    "안 걸려도 규정 속도는 지켜야죠!"

    "하……."

    서아영이 고개를 젓고 말았다.

    내가 어쩌다가 저런 사람을…….

    * * *

    겨우 집 앞에 도착했을 때, 최정훈은 얼굴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이럴 바에야 그냥 사무실에서 자는 게 나았는데…….'

    이 쿵덕대는 심장을 진정시키다 보면 오늘도 거의 잠을 자지 못할 것 같았다.

    "가, 감사합니다."

    하지만 인사는 해야지.

    "내일 몇 시에 출근하실 거예요?"

    "예? 왜요?"

    "……출근시켜 드린다니까요?"

    "아닙니다!"

    최정훈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생각을 해보니 그런 불편함을 끼쳐 드릴 수는 없죠. 저는 내일 택시 타고 출근할 테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어차피 가는 길인데요, 뭐."

    "괜찮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도 성인인데 출근 하나 제 알아서 못하겠습니까?"

    "최정훈 씨."

    "네."

    "몇 시?"

    "……일곱 시."

    "네. 그럼 내일 일곱 시에 태우러 올게요. 늦지 말고 나오세요."

    최정훈은 웃었다.

    어색하고 서글프게.

    "그러구요."

    "네?"

    서아영이 가만히 최정훈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너무도 어색해서 최정훈은 연신 헛기침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남자가 좀……."

    "……네?"

    "그러니까 없지."

    "무슨 소리를 하고 계신지 저도 알아도 되겠습니까?"

    서아영이 한숨을 푹 내쉬더니 손을 흔들었다.

    "아니에요. 내일 봐요."

    "조심해서 들어가십시오."

    "다음에는 용기 좀 내주시구요."

    "……."

    서아영의 차가 최정훈을 태웠을 때보다 두 배는 빠른 속도로 멀어져 갔다.

    최정훈은 헛웃음을 짓고는 담배를 입에 물었다.

    "이러다 제명에 못 죽지."

    수명이 팍팍 줄어드는 기분이었다. 세상 그 어떤 것보다 이런 상황이 최정훈에게는 더 어려웠다.

    "끄응……."

    최정훈이 고개를 휘휘 젓고는 몸을 돌려 집으로 돌아 들어갔다.

    새삼 이지혁에 대한 생각이 난다.

    그는 하나도 감당 못해서 이 고생을 하고 있는데 이지혁은 주변이 다 여자라고 할 수 있으니, 평소에 그걸 어떻게 버티는 것일까?

    하나하나가 서아영 찜 쪄 먹는, 성격 있는 캐릭터들 아닌가.

    "이지혁 씨는 뭐하고 있으려나?"

    새삼 이지혁이 보고 싶어진 최정훈이었다.

    * * *

    "저, 저, 정, 정해민?"

    최창혁의 입이 쩌억 벌어졌다.

    진짜다.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이 작고 귀여운 여자는 분명 TV에서 보던 바로 그 여자였다.

    몇 번이고 눈을 끔뻑이며 자신이 잘못 보지 않았는가를 의심한 최창혁이지만,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지금 바로 그 정해민이 그의 눈앞에서 손을 흔들고 있는 것이다.

    "안녕하세요."

    "네! 네! 안녕하세요!"

    최창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허리를 구십 도로 숙였다.

    "만나 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저도 반가워요."

    정해민이 만면에 미소를 띠고 최창혁에게 손을 내밀었다.

    최창혁은 자신의 앞에 내밀어진 손을 보고 침을 삼켰다.

    이거, 해도 되는 건가?

    저거, 잡아도 되는 손인가?

    살다가 내가 정해민의 손을 잡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최창혁이 몸을 부르르 떨다가 정해민의 손을 덥썩 움켜잡으려는 순간, 정해민의 손이 빙글 돌더니 최선미에게로 향했다.

    최선미가 조금은 떨떠름한 얼굴로 정해민의 손을 잡았다.

    비록 타이밍을 놓쳐 손을 잡지는 못했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정해민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최창혁은 충분히 행복했다.

    하지만 행복이 있으면 불행이 있는 법.

    "가식 적당히 떨지?"

    이지혁은 불행의 상징이었다.

    * * *

    "가식이라니!"

    발끈하는 정해민을 보며 이지혁이 혀를 찼다.

    이미 팬 대응 모드로 전환한 정해민은 만면에 미소를 띠며 은근슬쩍 이지혁을 노려보고 있었다.

    "꼭 이런 데서까지 그래야겠냐?"

    "이런 데가 어딘데! 공적인 자리잖아."

    "참 잘도 공적인 자리다."

    이지혁이 혀를 찼다.

    얘는 왜 TV에 나오거나 모르는 사람들 앞에만 서면 사람이 이상해지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관리한다고 얼마나 더 늘어날 것 같냐?"

    "뭐가 늘어나?"

    "네 연예인 수명. 이제 다된 거 같은데?"

    "죽어! 진짜!"

    정해민이 금방이라도 물어뜯을 기세로 달려들자, 이지혁이 손을 쭉 뻗어 정해민의 머리를 잡고 밀어냈다.

    "그래. 이렇게 하던 대로 해야지."

    "어머, 내가 무슨 짓을?"

    정해민이 손으로 입을 가리고 가식적으로 웃었다.

    "호호호, 죄송해요. 얘가 좀 짓궂어서 상대해 주다 보면 이런 일이 벌어지네요."

    "아, 예……."

    최창혁의 얼굴은 이미 반쯤 썩어 있었다.

    '너무 친하잖아.'

    하느님, 부처님.

    저 이지혁이 정해민과 저런 사이라니…….

    하늘도 무심하시지, 이게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하지 않습니까.

    "안녕하세요?"

    최선미가 환히 웃었다. 얼굴 가득 미소를 띠고 있지만, 정해민은 그 미소 속에 담겨 있는 언짢음을 놓치지 않았다.

    '얘 봐?'

    연예계에서 십 년을 굴러먹은 정해민이다.

    아무리 사회가 감정을 숨기고 겉으로는 웃는 곳이라고는 하지만, 연예계보다 자기감정을 더 숨기는 곳이 있을까?

    연예계에서 너무 오래 굴러먹어 이제 거의 요정을 넘어 요괴 수준에 오른 정해민이 그것을 놓칠 리가 없었다.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가워요."

    "네. 정말 반갑네요. 요즘 한창 바쁘시다고 들었는데, 여기는 어쩐 일로 오셨어요?"

    "그러니까요. 저도 바쁜데, 쟤가 꼭 와서 자리를 빛내 달라고 해서."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쟤?

    그거 나 말하는 건가?

    "내가 언제?"

    이지혁이 솔직하게 반응하자 정해민이 환하게 웃으며 깔끔히 무시했다.

    "저런다니까요. 애가 좀 짓궂은 면이 있죠."

    "아, 그래서 오셨구나."

    최선미가 공격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런데 지혁이랑 무슨 관계가 있으세요? 이런 자리에 따라오시기는 좀 민망했을 것 같은데?"

    정해민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얘 좀 봐?'

    '니가 여길 왜 와?'

    정해민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수없이 지어온 영업용 미소다. 눈앞에 있는 애송이처럼 감정의 흔적을 드러내는 실수는 하지 않는다.

    "친구 사이에 와볼 수도 있는 것 아닌가요?"

    "그렇게 생각하세요?"

    "아!"

    정해민이 입가로 손을 가져가며 놀랐다는 표시를 했다.

    "아, 제가 방해가 됐군요. 정말 죄송해요. 그런 생각을 못했네요. 제가 눈치가 없어서. 그럼 저는 가볼게요."

    "……네?"

    그러자 반응이 터진 쪽은 남자들이었다.

    "어딜 가십니까! 지금 오셨는데!"

    "야! 최선미! 니가 뭔데 해민 씨한테 왔니, 마니야! 비켜!"

    "사인! 사인!"

    "야, 너 나와!"

    순간적으로 쏟아진 비난에 최선미의 얼굴이 미미한 진동을 일으켰다.

    '이 불여시 같은 게…….'

    '넌 한참 멀었단다.'

    정해민이 승리자의 미소를 지으며 어색한 듯 몸을 돌렸다.

    "아, 앉아도 되나요?"

    "그럼요! 이쪽으로 오시죠!"

    "아니, 여기가 편합니다! 넓어요."

    이지혁이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개판이네."

    딱 그랬다.

    분위기가 뭔가 미묘해지고 있었다.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 뭔가 한 번 정리가 되기는 했는데, 그러고 나자 생각이 많아진 사람들이었다.

    남자들은 남자들대로 정해민이 왜 이지혁의 말을 듣고 여기를 왔는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여자들은 여자들 나름대로 정해민의 등장을 경계하고 있었다.

    특히나 최선미는 거의 이를 갈아붙이는 수준이었다.

    '저 불여시 같은 것이!'

    같은 여우과(?)인 그녀는 알 수 있었다. 지금 저 여자가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철저하게 꾸며진 모습이라는 것을 말이다.

    사적인 자리에서 방송용 리액션을 하는 게 그녀의 짜증을 불러왔지만, 그건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앉아 있는 자리가 이지혁의 옆자리라는 것이 그녀의 속을 니글거리게 만들고 있었다.

    말이야 그렇게 했지만, 이지혁이 지금 웬만큼 잘난 인간인지 모를 만큼 그녀는 멍청하지 않았다. 아니, 사실 남자의 가치를 평가하는 것이라면 민예정은 그녀에게 비빌 수준도 아니었다.

    그 나물에 그 밥인 동창들 중에서 배경으로 보나, 직업으로 보나, 인물로 보나 제일 나은 사람이 이지혁이었다.

    그런데 그 이지혁의 옆을 동창들 중 하나도 아니고 어디서 굴러온 딴따라가 차지하고 있으니, 그녀의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그녀를 더 열 받게 하는 것은…….

    "NDF 소속이라고 하셨죠?"

    "네. 아, 네."

    최창혁의 물음에 정해민이 미소를 띠고 답했다.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는 오토매틱으로 자동 장착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최선미가 보기에는 저러다 근육경련이 일어나지 않을까 싶은 걱정이 들 정도였다.

    "연예인 활동도 쉽지 않으실 텐데, 나라까지 지키시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아니에요."

    정해민이 손사래를 쳤다.

    "제가 연예인을 하면서 NDF인 게 아니라, NDF인데 기관에서 배려를 해줘서 연예인도 할 수 있는 거죠. 그래서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활동하고 있어요."

    "아, 역시!"

    최창혁이 정해민의 고운 마음씨를 보라는 듯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저 등신 같은 게…….'

    이 자리에서 정해민을 띄워주면 어쩌자는 건가. 그 결과가 모두 이지혁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행동이었다.

    '뒤에서 욕이나 하지 말든가.'

    조금 전 이지혁이 없을 때, 그리 신나게 까대더니, 이제 와 되레 이지혁을 띄워주는 짓을 하고 있으니 얼척이 없었다.

    "정해민 씨는 공간계 능력자시죠?"

    "네. 텔레포터예요."

    "와, 그거 정말 희귀한 거 아닌가요?"

    정해민이 배시시 웃었다.

    "사실 별 쓸모는 없어요. 몬스터 같은 건 지혁이 같은 애들이 때려잡는 거고, 저는 그냥 셔틀이에요. 빵셔틀 같은 거요."

    "에이, 셔틀이라뇨."

    "그래도 행사할 때는 좋은 점이 있어요. 먼 데도 한 번에 훅 갈 수 있으니까요."

    이지혁이 뚱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행사 셔틀이네."

    "……."

    "어쩐지 아줌마를 껴준다 싶었더니, 나름 쓰임새가 있었… 아야!"

    테이블 아래서 허벅지를 꼬집어오는 손길에 이지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벌레라도 있었어? 물렸니?"

    "…사람만 한 벌레가 있네."

    "어머? 이쁜 벌레야?"

    "끄응."

    이지혁이 고개를 내젓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반갑습니다, 정해민 씨. KSF 소속의 조지웅이라고 합니다."

    "어머? KSF에서 일하세요? 그럼 어디서 마주친 적도 있겠다."

    "예. 전에 멀리서 한 번 뵌 적이 있습니다."

    "그러셨구나. 만나서 반가워요."

    조지웅이 싱긋 웃었다.

    연예인 정해민도 좋지만, 그에게 아무래도 NDF의 사람들은 다들 동경의 대상이었다.

    물론 그보고 들어가라고 하면 고민할 것도 없이 거절하겠지만 말이다.

    '목숨은 소중하니까.'

    정해민 같은 비전투 요원은 몰라도 몸 쓰는 능력자인 그가 NDF처럼 빡센 곳에 들어갔다가는 첫 출동에 바로 저승길로 직행할 것이다.

    이지혁이나 정해민은 자각이 없는 듯하지만, 지금 NDF와 NDF가 아닌 이들은 차이가 넘사벽이었다. 원래도 대한민국에서 제일 강하다는 사람들을 모아뒀지만, 처음에는 차이가 이토록 심하지는 않았다.

    그도 당연한 것이, NDF에서 가장 약한 사람과 KSF에서 가장 강하지만 안타깝게도 NDF에 한 끗발로 들어가지 못한 사람은 차이가 거의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과거, 대체 왜 저 사람이 NDF에 들어갔냐는 소리마저 듣던 아이언 박성찬이 레벨 4급의 게이트를 혼자서 초토화시킨 일화는 이미 유명했다.

    비결을 묻는 사람들에게 '니들도 이지혁이랑 딱 한 달만 함께 지내봐라'라고 대답한 것은 더 유명하고.

    인사를 끝내고 뒤로 물러서면서 조지웅이 이지혁을 힐끔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사람들이 서아영은 아는데 이지혁은 모른단 말이야.'

    능력자들 사이에서라면 서아영과 이지혁은 더 이상 비교 대상도 아니었다. NDF들의 증언이나 이지혁에 대한 목격담만 따져 보아도 서아영이 감히 범접하지도 못할 위상인 것이 틀림없었다. 의심의 여지도 없는 대한민국 최고의 능력자인 것이다.

    하지만 일반인들에게 공표되기로는 여전히 플레임 위치 서아영이 최강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일반 게이트 작전에 나서지 않아서 그런가?'

    이지혁이 예전의 서아영처럼 게이트 소탕에 참가해서 몬스터들을 쓸어 담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소문을 막으려 해도 막을 수가 없겠지만, 이지혁은 현재 일반적인 게이트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니 평범한 이들은 이지혁의 존재를 알 수가 없었다.

    정부에서 NDF에 대한 말이 퍼져 나가는 것을 단속하고 있기는 하지만, 사람이 어떻게 아는 것을 말하지 않고 살 수 있단 말인가.

    덕분에 KSF 대원들의 가족들을 중심으로 이지혁의 존재가 웬만큼은 알려지고 있지만, 반쯤은 도시 전설 취급을 받고 있다.

    정부 공인 대한민국 대표 능력자인 서아영과는 그 위상에서부터 차이가 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연예인에게도 밀리는 거지.'

    이 자리에 있는 사람이 평범한 동창생들이 아니라 KSF 요원들이었다면 냉정히 말해서 정해민은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했을 것이다. 눈앞에 이지혁이 있는데 누가 정해민에게 눈을 돌리겠는가.

    "그럼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이지혁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정해민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도 갈래."

    "뭔 화장실을 같이 가!"

    "나도 갈래. 혼자 있으면 어색하단 말이야."

    "아오! 씨!"

    이지혁은 짜증을 확 냈지만, 따라오는 정해민을 밀어내지는 않았다.

    그렇게 둘이 문을 열고 사라지자 장내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하……."

    정적을 깬 것은 민예정이었다.

    "뭐? 올 리가 없어?"

    최선미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뭔 입은 청산유수더만, 이제 다시 말해보시지? 와, 이래서 소문이라는 게 생기는 거구나. 나도 진짠 줄 알았네. 대단하다, 최선미?"

    최선미의 얼굴이 부들부들 떨렸다.

    하지만 미리 해놓은 말이 있어서 도통 반격을 할 수 없었다.

    "그만해. 사실 선미 말이 일리가 있었잖아."

    "편드는 거야?"

    최창혁이 최선미를 두둔하고 나서자 민예정이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편드는 게 아니라 그렇게 생각하는 게 상식적이라는 거지. 해가 서쪽에서 뜨는 게 아니라고 했다가 서쪽에서 떠버린 케이슨데, 뭐라고 할 일이 아니잖아."

    민예정은 마뜩찮은 얼굴이었다.

    최창혁이 화제를 돌리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런데 둘이 진짜 무슨 사이일까?"

    화제를 돌리기 위해 꺼낸 말이지만, 그 말이 정곡을 찔렀다. 방 안이 싸늘하게 식어가기 시작했다.

    * * *

    "무슨 사이긴, 그냥 친구 사이겠지."

    "친구 사이에 이런 데를 왜 따라와?"

    "연예인이잖아. 데리고 오면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겠지."

    "그건 지혁이 입장이고, 정해민 입장에서는 친구가 가잔다고 돈도 안 되는 곳에 무료 행사 해줄 이유가 없잖아. 쟤가 이 시간에 행사 한 번 더 돌면 버는 돈이 얼만 줄은 알아?"

    "…그래서 무슨 사이라고 말하고 싶은 건데?"

    최선미가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생각하는 대로 말하기에는 사안이 너무 커진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정해민이라니.

    지금 제일 잘나가는 대세 연예인이 아닌가.

    "써, 썸이라도 타는 거겠지."

    "말도 안 돼!"

    "그 말, 책임질 수 있냐?"

    최선미는 당당했다.

    "냉정하게 생각해 봐. 니들이 아는 여자애더러 같이 오자고 하면 올 사람 있어?"

    "…없지."

    "여자 친구라고 해도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동창회 자리에는 따라오기 싫어할 건데, 그런 자리까지 따라오는 사이면 보통은 넘는다고 보는 게 상식적이지."

    최선미의 말이 합리적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이들은 없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은 사람도 딱히 없었다.

    "착해서 그렇겠지."

    "하?"

    최선미가 비웃음을 흘렸다.

    "너희는 뭐 연예계 이야기하면 더럽다, 온갖 비방이 난무한다면서 까다가 막상 연예인 이야기하면 우리 오빠가 그럴 리 없다, 우리 해민이가 그럴 리 없다, 그러더라? 정신 차려. 쟤는 그 연예계에서 십 년을 버틴 애야. 착해? 쟤가 착하면 세상에 착하지 않을 사람이 어딨겠어?"

    최창혁은 멍한 얼굴로 둘이 나간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최선미가 그 광경을 보고는 비웃음을 흘렸다.

    "왜? 속이 상해?"

    "…가는구나."

    "응? 가다니?"

    최창혁은 여전히 반쯤은 넋이 빠져 버린 듯한 얼굴로 대답했다.

    "정해민도 화장실을 가는구나."

    "뭐라는 거야, 이 미친놈이!"

    "…이슬만 먹고 살 줄 알았는데……."

    "이슬만 먹어도 나올 건 나오지! 무슨 외계인이냐!"

    다른 이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말에 공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오, 온다."

    밖에서 투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응?"

    이지혁은 바로 들어오지 않고 창문 쪽에 서서 담배를 물었고, 정해민은 잔소리를 하면서 그 옆자리를 지켰다.

    담배를 피우는 내내 뭐라고 잔소리를 늘어놓던 정해민이 이지혁이 툭툭대며 반격을 하자 발끈하여 달려들었다.

    이지혁이 머리를 잡아 밀어내자 우앙대며 우는 걸 보니…….

    "…잘 어울리네."

    최창혁이 씁쓸하게 말했다.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부정할 수 없었다.

    저건 이미 보통의 친구 사이라고 할 수가 없는 단계였다.

    "그러게."

    조지웅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출근하면 할 말이 많을 것 같다. 이지혁과 정해민을 직접 보고, 같이 이야기도 나누고 왔다고 하면 다른 능력자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살 수 있을 것이다.

    "누구는 능력자인데다가 정해민이랑도 잘되어가는 사이인데, 누구는……."

    최창혁이 우울한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번 대회에서는 반드시 우승해야 한다고 하던 동생들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깟 게임.'

    안구에 습기가 차오르고 있었다.

    인생이란 어쩌면 이렇게도 불공평하단 말인가.

    누구는 저리 잘나가는데, 누구는 편의점에서 최저임금이나 받으며 일하고 있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다른 동창이 저렇게 잘나간다면 축하해 줄 수 있었다.

    사나이 최창혁. 그렇게 쪼잔한 인간이 아니었다.

    "그런데 왜 하필 이지혁이냐고."

    동창들 중에 유일하게 망했으면 좋겠다고 빌던 인간이 제일 잘나가다니. 블랙 먼데이 때 실종되었다는 소리를 듣고 안타깝게 생각한 자신이 바보가 된 느낌이었다.

    "왜 이지혁만 저리 잘나가지?"

    조지웅이 피식 웃고는 말했다.

    "이지혁이니까 저리 잘나가는 거 아닐까?"

    "응?"

    "저런 타입은 성공하든가, 패망하든가 둘 중 하나잖아. 우리는 겁이 있으니 쉽게 도전을 못하는 거지만, 지혁이는 좋게 말하면 두려움이 없고, 나쁘게 말하면 겁대가리가 없잖아."

    "…그렇지."

    지나가던 용 문신 아저씨들이 자기 신발을 밟고 갔다고 열 명 사이로 뛰어들던 이지혁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맞기도 엄청 맞았지만, 결국에는 다 때려잡았었지.

    보통 사람이라면 열 명을 상대할 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싸우려고 들지는 않을 것이다.

    "잠깐만, 이건 그냥 성격이 더러운 거 아닌가?"

    "…무슨 상황을 생각하고 말한 건지는 모르겠는데, 일단 공감이 간다는 게 큰일이군."

    조지웅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들어오는 거 같은데."

    "응, 그러네."

    이지혁이 담배를 끄고는 가게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정해민도 그 뒤에 바짝 붙어 이지혁을 따라왔다.

    문이 열리고 이지혁이 들어서자 방 안에 다시 어색한 공기가 가득 찼다.

    대부분은 눈앞에 보이는 상황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분위기 왜 이래?"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최창혁이 눈치를 주자 최선미가 입술을 잘근 깨물더니 입을 열었다.

    "근데 무슨 사이야?"

    "응?"

    "너랑 정해민 씨."

    최창혁이 '오오!' 하며 최선미를 바라보았다.

    그냥 눈치를 한 번 준 것뿐인데, 이런 돌직구를 날릴 줄이야.

    장하다, 최선미.

    어버버대거나 최소한 얼버무리려는 모습은 보일 줄 알았지만, 이지혁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직장 동료."

    "헐."

    이지혁의 대답에 입을 쩌억 벌린 것은 정해민이었다.

    그리고 그 광경이 최창혁에게 또 충격을 주고 말았다.

    '아, 아니겠지.'

    아니어야 한다.

    적어도 이 관계는 이지혁이 정해민에게 매달리고 있는 관계여야 한다. 정해민이 뭐가 아쉬워서 이지혁 같은 성격파탄자에게 매달리겠는가.

    "그냥 직장 동료야?"

    "응? 뭐?"

    "아냐."

    정해민이 아무 말 없이 눈앞에 놓인 맥주를 쭉 들이켰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다른 이들의 입에서 다들 탄식이 흘러나왔다.

    '이건 아닌데…….'

    여러 가지 의미로 이건 아니었다.

    "하하하, 해민 씨. 제가 술 한 잔 따라 드리겠습니다."

    최창혁이 분위기 전환을 시도하자 정해민이 상큼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어머, 저 술 안 먹어요."

    "……."

    그럼 방금 댁이 마신 것은 물이요?

    아직 저 잔에 채 거품이 다 꺼지지도 않았건만,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그, 그러시군요. 그럼 콜라라도."

    "괜찮아요. 제가 따라 마실게요."

    최창혁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철벽녀네.'

    최선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런데 지혁아."

    조지웅이 입을 열자 이지혁이 그쪽을 바라보았다.

    "응?"

    "너희 이번에 뭐 작전 하나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던데, 이런 데 나와 있어도 되는 거냐? NDF 전부 비상 걸렸다던데……."

    "아, 그거?"

    이지혁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괜찮아, 나는."

    "왜?"

    "나는 이번 작전이랑 관계없거든. NDF에 잉여가 딱 두 마리가 있는데, 하나는 나고, 다른 하나는……."

    이지혁이 슬쩍 돌아보자 정해민이 눈을 부라렸다.

    "나는 아니거든?"

    "…그렇다고 합니다."

    "너야 그럴지 몰라도 나는 이번에는 능력이 타입이 안 맞아서 그런 거라고! NDF에 나보다 중요한 사람이 어딨어?"

    "최정훈."

    "…그 아저씨는 빼고."

    아무리 정해민이 텔레포트 능력자라고는 하지만, 최정훈보다 더 중요한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정해민도 인정하는 바였다. 그녀가 보기에도 NDF는 최정훈이 없으면 돌아가지 않았다.

    "자자, 한잔하자고."

    최창혁의 말에 다들 잔을 들었다.

    "위하여!"

    "위하여!"

    이지혁이 소주를 마시고는 눈을 찡그렸다.

    "너, 술 잘 못 먹는구나?"

    "이 동네는 술이 왜 이리 맛이 없는지 모르겠다. 한 번씩 짜증 나면 넘어가서 술만 가득 챙겨 오고 싶은 심정이라니까."

    베라프의 술을 가져와서 팔면 떼돈을 벌 것이다. 이미 돈을 벌만큼 벌어놨으니 굳이 그럴 필요는 없겠지만 말이다.

    "얘, 지혁아."

    민예정이 어느새 옆으로 다가와 술을 들어 이지혁의 잔에 따라 주었다.

    "응?"

    "일은 안 힘드니?"

    "힘드냐고?"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힘이 든다고 하기도 뭐하고, 힘이 들지 않는다고 하기도 뭐했다.

    "남의 돈 빨아먹는 것치고 편한 일이 뭐 있겠어?"

    "그게 일주일에 6일 노는 사람이 할 말이야?"

    "…하루를 일해도 힘든 건 힘든 거야."

    "게으름뱅이."

    민예정의 얼굴이 꿈틀했다.

    발제는 그녀가 했는데 자연스레 화제를 가져가 버리는 정해민의 능수능란함이 그녀의 기분을 뒤틀리게 만들었다.

    "너는 보통 무슨 일을 하는데?"

    "나?"

    "응, 너. NDF에서 일하면 보통 KSF랑은 다른 일 할 거 아냐."

    다들 민예정과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사실 궁금한 것 중 하나였다. NDF가 해외에서 활동을 한다는 소문은 무성했지만, NDF의 직접적인 활동에 대한 언론 보도는 철저히 통제되고 있었다.

    사실 마왕이랑도 싸웠고, 이지혁이 막지 못했으면 세계는 이미 멸망했다는 말을 언론을 통해서 보도할 수는 없지 않은가.

    사실을 알고 있는 언론들도 자체적으로 통제를 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알권리를 논하기에 지금의 세계는 너무도 위태했다.

    "몬스터 때려잡지."

    "그럼 KSF랑 별로 다를 것도 없잖아?"

    "좀 센 몬스터 때려잡는 거지. 뭐, 다를 것 있겠어?"

    이지혁이 피식 웃었다.

    "오올."

    다른 이들에게는 그 말이 겸양의 말로 비춰진 모양이지만, 이지혁은 진심으로 한 말이었다.

    그냥 지역과 상대가 조금 다르다는 것뿐이지, 이지혁이 하는 일과 다른 능력자들이 하는 일은 근본적으로 별 차이가 없었다. 몬스터가 쳐들어오면 때려잡는 일로 묶어 설명이 가능했으니까.

    "그렇구나."

    민예정은 슬쩍 미소를 지었다.

    "그럼 다음에 몬스터 잡으러 갈 때, 나도 데려가 주면 안 돼?"

    "응?"

    "궁금해서. 보고 싶거든."

    이지혁이 정해민을 돌아보았다.

    "안 될걸? 민간인 통제라."

    "지혁이 너는 거기서도 힘이 좀 있다고 들었는데, 네가 한다고 해도 안 돼?"

    자존심을 살짝 긁는 말이었다. 이지혁이 살짝 달아오른 얼굴로 대답했다.

    "당연히 안 되지."

    "에?"

    "내가 뭐라고."

    이지혁이 후비적후비적 귀를 파고는 입으로 훅 불었다.

    "하지 말라는 건 안 하면 되는 거다. 괜히 한다고 설쳤다가는 피해만 본다. 그래놓고 나중에 왜 하지 말라고 한 걸 했냐고 하면 할 말도 없는 거야."

    "…으응."

    이거, 안 통하네.

    민예정이 방법을 바꿨다.

    "그럼 나 그 안에 한 번 들어가게 해주면 안 돼?"

    "그 안?"

    "능력자 거주구."

    "응?"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거기가 무슨 관광특구도 아니고, 건물밖에 없는 곳인데 굳이 들어가 보려는 이유가 뭐란 말인가.

    "이상한 소리네. 거기서 뭐 보려고?"

    "궁금하잖아."

    "거기가?"

    "응. 너희야 매일 들어가니까 잘 모르겠지만, 우린 못 들어가니까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니까."

    이지혁이 코웃음을 쳤다.

    "야, 막상 그 안에 들어가면……."

    쾅!

    그 순간, 문이 거칠게 열렸다.

    깜짝 놀라 문을 돌아본 이지혁의 눈에 익숙한 사람의 얼굴이 들어왔다.

    "다, 다솜아?"

    * * *

    이지혁의 눈이 멍해졌다.

    다솜이가 여길 왜 온단 말인가.

    혹시라도 아는 사람이 있어 따라왔나 싶은 마음에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다들 '대체 저 여자는 누구지?'라는 얼굴로 김다솜을 바라보고 있었다.

    문 안으로 머리를 슬쩍 들이민 김다솜이 이지혁과 정해민을 발견하고는 가만히 그 둘을 바라보았다.

    "추, 춥다."

    "누가 창문 열었냐?"

    방 안에 한기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쟤는 조상 중에 설녀가 있나?'

    왜 왔는가가 문제가 아니라 시선과 분위기만으로 온도를 내려 버리는 걸 보면 에테르 측정을 해봐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여, 여긴 왜 왔어?"

    김다솜은 아무 말 없이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고는 저벅저벅 걸어와 민예정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으……."

    패기에 짓눌린 민예정이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고, 김다솜은 태연하게 이지혁의 옆자리에 앉았다.

    "응?"

    김다솜이 잔을 내밀자 이지혁이 자신도 모르게 맥주를 들었다.

    "쟤 미성년자야."

    "아……."

    정해민의 말에 이지혁이 맥주를 내려놓고 콜라를 들어 김다솜의 잔에 따랐다.

    꿀꺽꿀꺽.

    김다솜이 아무 말 없이 콜라를 원샷하고는 테이블에 잔을 쿵, 내려놓았다.

    그 패기에 천하의 이지혁마저 움찔하고 말았다.

    "무, 무슨 일로 왔어?"

    "그냥요."

    "그, 그래?"

    전혀 대답이 되지 않는 말이지만, 대답이 되고 있었다.

    이지혁은 차마 더 물어볼 엄두를 내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냥이라면 그냥 그런 거겠지.

    괜히 여기서 더 물었다가는 목이 떨어질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 목이 떨어져 나갈 분위기 속에서도 꿋꿋한 사람이 있었다.

    "여긴 왜 찾아왔데?"

    "……."

    김다솜과 정해민의 사이에서 불꽃이 튀었다.

    "아, 뜨거."

    괜히 그 사이에 있던 이지혁이 자신도 모르게 뒤로 몸을 젖혔다. 저 불꽃같은 시선들 사이에 있으려니 뭔가 뜨거운 것이, 도무지 참아낼 수가 없었다.

    "애가 이런 자리 오는 거 아냐. 동창회에 학교 다니고 있는 애가 오면 되겠니?"

    "남의 동창회에 오신 분한테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은데요."

    "나는 지혁이가 오라고 해서 온 거지. 꼭 와달라고 하는데, 어떻게 안 올 수가 있겠어."

    "내가 언… 아야!"

    옆구리를 꼬집힌 이지혁이 입을 닫았다.

    평소 같으면 이 여자가 사람 잡는다고 난리를 쳤겠지만, 오늘은 정해민의 기세도 만만치 않았다.

    '난 이래서 여자가 싫어.'

    아펠드리체부터 시작해서 에르카나, 정해민에 김다솜까지. 그의 주변에 있는 여자치고 멀쩡한 사람이 없었다.

    집에 있는 엄마와 예원이까지 생각해 보니 그의 주변에 있는 여자들이 이상한 것인지, 아니면 세상의 모든 여자들이 다들 이상한 것인지 구분이 안 갈 지경이었다.

    이지혁이 무슨 생각을 하든 말든 김다솜과 정해민의 신경전은 계속되고 있었다.

    "오란다고 오는 사람이 더 이상한 것 아닌가요? 사람이 염치가 있으면 자기가 갈 자리와 안 갈 자리는 구분을 해야죠."

    "난 너랑은 달라서 어디든 가면 환영 받는 사람이라서 말이야."

    "자부심이 있으시네요. 그 자부심이 자신만의 것이라는 걸 알면 더 좋은 사람이 될 텐데."

    "이미 충분하거든?"

    "그리고 여기 있는 사람들이 다 지혁이 오빠 친구들이면 나이 차이가 너무 나는 것 아니에요?"

    빠득.

    정해민의 이 갈리는 소리가 너무도 선명하게 들렸다.

    정해민이 가장 민감하게 생각하는, 나이에 대한 부분을 김다솜이 정확하게 찌르고 들어온 것이다.

    안 그래도 자꾸 이지혁이 아줌마라고 해서 부들거리고 있던 참인데, 나이가 더 어린 김다솜이 그런 말을 하니 제대로 열이 받는다.

    "…나 어리거든?"

    "네, 그러시겠죠. 지혁이 오빠보다는 나이가 많지만요."

    "요즘은 그런 거 아무도 신경 안 써. 지혁이만 봐도 아펠드리체 님이라든가, 에르카나 님이라든가 그런 할머… 아니, 그런 분들이랑도 잘 지내잖아."

    심지어 그중 하나랑은 결혼도 했고.

    아, 생각하니 또 열 받네.

    정해민이 끓어오른 화딱지를 가라앉히기 위해서 일단 잔에 든 맥주를 원샷했다.

    "……."

    이지혁은 두 사람의 갑작스러운 신경전에 당황했지만, 다른 이들은 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들어와서 자기들은 신경도 안 쓰고 투닥대기 시작하는 여자애라니.

    그것도 말하는 것을 들어보니 지금 이지혁을 두고 정해민과 싸우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속이 뒤집히는데…….

    '여신인가?'

    최창혁은 입을 쩍 벌릴 수밖에 없었다.

    정해민만 해도 일반인이 보기에는 눈이 돌아갈 만한 미모였다. 앙증맞은 귀여움은 그야말로 독보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 나타난 여자는 정해민과도 차원이 달랐다.

    '한국에 저런 애가 있었나?'

    저 여자애가 연예계에 데뷔를 한다면 이쁘다는 배우들이 싸그리 머리를 박아야 할 클라스였다. 저런 애가 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고 있었는지도 의문이었다.

    새하얀 피부와 선명한 이목구비가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왜……."

    왜 이지혁의 주변에만 저런 사람들이 모인단 말인가. 대체 이지혁은 전생에 무슨 업적을 쌓았기에!

    최창혁이 깊은 한숨을 쉬자 조지웅이 이해한다는 듯이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냥 인정하면 편해져."

    "…닥쳐. 나는 인정 못해."

    둘이 대화하는 순간에도 정해민과 김다솜은 서로를 잡아먹을 듯이 투닥대고 있고, 이지혁은 그 사이에서 멍한 얼굴로 콜라를 홀짝이고 있었다.

    "별거 없네."

    이지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예전 자신의 삶이 요즘 들어 흐려지는 것 같아서 한 번 되짚어보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막상 동창들을 봐도 딱히 반가운 기분이 들거나 하지는 않았다.

    "애는 집에나 가지?"

    "나이가 들면 잠이 없어진다더니, 그 말이 맞는가 봐요? 아직 그러고 계신 것을 보면?"

    "내가 나이가 많아서 잠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일을 하다 보니까 잠을 제대로 못 자는 거거든?"

    "누가 일하랬나?"

    "뭐?"

    이지혁은 손가락을 들어 올려 귀를 막았다.

    '이러다 죽지.'

    얘들은 왜 이렇게 사이가 좋지 않을까?

    그래도 초반에는 나름 잘 지냈던 것 같은데 가면 갈수록 사이가 좋지 않으니, 참 큰일이었다.

    "에잉."

    이지혁이 고개를 저어버렸다.

    그 순간, 그의 등 뒤에서 빈 잔이 앞으로 스윽 내밀어졌다.

    "…이러지 마."

    너까지 왜 이러니?

    이지혁은 등 뒤에서 잔을 내미는 도가윤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러다가 내가 제명에 못 죽지.

    그리고 제명이 못 죽는 사람이 또 하나 있었다.

    최창혁의 볼이 푸들푸들 떨렸다.

    저 여자는 또 뭔가.

    "지웅아."

    "응?"

    "여기가 동창회 자리니, 아니면 쟤 소개팅 자리니?"

    "음, 네가 지금 열이 받는 심정은 이해한다만……."

    "한다만?"

    "제일 열 받고 있는 사람은 네가 아닌 것 같으니까 그 정도는 이해해 줘도 괜찮겠다."

    "응?"

    조지웅의 말에 뒤를 돌아보니 여자들이 다들 귀신같은 얼굴로 이지혁을 노려보고 있었다.

    "…쟤들은 왜 열 받은 거냐?"

    "여자들만큼 복잡한 존재가 어딨겠냐?"

    이지혁이 여러 여자에 둘러싸여 있는 모습이 꼴 보기 싫은 사람도 있을 것이고, 이 자리를 빌어 이지혁과 잘해보려고 했는데 도무지 찔러 들어갈 틈이 없으니 화가 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확실한 것은 분위기가 급격하게 나빠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러려고 동창회 했나, 자괴감이 드네."

    조지웅이 피식 웃었다.

    "그래도 지혁이 같은 애는 쉽게 볼 수 있는 애가 아니다. 나는 나름 근처에 살고 능력잔데도 얼굴 보기 힘든 애야."

    "그리 바빠?"

    "아니. 집에서 안 나와."

    "……."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잉여롭다고 해야 할지.

    "…다 때려치우고 집에 가자."

    꼴을 보아하니 오늘 제대로 된 동창회를 하는 것은 이미 물 건너간 뒤였다. 굳이 시간을 내 이지혁 쟁탈전을 감상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때, 최창혁이 전혀 생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위이이이이잉!

    "응?"

    최창혁이 놀란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사이렌이 울리고 있었다.

    '민방윈가?'

    그럴 리가 없다. 해가 졌는데 뭔 놈의 민방위 훈련을 한단 말인가.

    하지만 지금 들려오고 있는 사이렌 소리는 응급차나 소방차에서 나오는 사이렌 소리와는 전혀 달랐다.

    얼굴을 굳힌 최창혁이 소리쳤다.

    "야, 뉴스 봐봐! 무슨 일 있나."

    아이들이 다들 다급하게 폰을 꺼내서 인터넷을 켰다.

    우웅, 우웅.

    하지만 채 인터넷을 켜기도 전에 재난 문자가 속속들이 도착하고 있었다.

    "응?"

    이지혁이 급격하게 돌아가는 상황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아!"

    조지웅이 휴대폰을 보고는 입을 열었다.

    "큰일은 아니네. 아니, 이게 큰일이 아닌 게 아니구나. 지금 게이트 중 하나에서 작전하다가 실패해서 몬스터들이 방어선을 뚫고 나왔대."

    "헐, 그거 난리난 거 아니냐?"

    "음, 난리지.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제압이 되겠지. 그래도 다행이다. 나는 북한에서 핵이라도 쏜 줄 알았어. 요즘에 북한이 분위기가 안 좋잖아."

    "응, 그렇지."

    대화를 하다가 문득 최창혁은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뭔가 찝찝한 기분이 그를 감싸고돈다.

    "야."

    "응?"

    "그 몬스터가 탈출한 지역이 어디래?"

    "대연동이라는데?"

    "응, 대연동이구나."

    그러니까, 대연동이면…….

    최선미가 사색이 된 얼굴로 소리쳤다.

    "여기?"

    "아, 어디서 많이 들어봤다 싶었더니, 여기가 대연동이구나."

    조지웅이 머쓱하게 웃었다.

    "하하하, 괜찮아. 능력자들이 괜히 있는 것도 아니고, 밖으로 안 나가고 제자리만 지키면 별일 없을 거야. 지금 아마 분주히 잡으러 다니고 있겠지."

    "야, 포털 메인 화면이 온통 대피 권고야.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가라는데?"

    "…그래?"

    "지역 대피 떴어. 당장 가까운 대피소로 들어가래! 일반 건물이 아니라."

    조지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상황이 장난 아닌 모양이다. 빨리 대피소로 가자."

    "그, 그래야겠지?"

    무척이나 심각한 상황이라는 것은 다들 알고 있었지만, 이런 일을 처음 겪은 것도 아니었다.

    블랙 먼데이 이후로 게이트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이들에게 대피 경험 정도는 다들 한두 번씩은 있는 것이다.

    "침착하게 가야 할 것 같은데……."

    창밖에는 이미 대피소로 달리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네. 사람들이 엄청 다급하게 달려간다. 저러다가 사고 날 텐데."

    무슨 좀비 영화를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아무리 긴급대피가 떴다고는 해도 저렇게까지 급하게…….

    "근데 저거 뭐냐?"

    "응?"

    최창혁의 말에 조지웅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다시 안으로 넣고는 질린 얼굴로 입을 열었다.

    "지혁아."

    "응?"

    "모, 몬스터가 떼로 달려오는데?"

    "뭐, 얼마나 많다고."

    "거의 영화 수준이야."

    "응?"

    이지혁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으응?"

    저 멀리 도로를 새카맣게 매우며 질주해 오고 있는 몬스터 떼가 보인다.

    이지혁이 그 광경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동창회는 무슨."

    동창회는 동창회다.

    몬스터와의 동창회라 그렇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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