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74화 (74/118)
  • [■] 그만 달달거려야지 [■]

    ─────

    "준비는 다 끝났습니까?"

    "예."

    국방부 장관의 말에 대한민국의 대통령 윤영민은 눈가를 비볐다.

    최근 며칠간은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딱히 그가 해야 할 일이 많다고는 할 수 없지만, 부담감이 그를 짓누르고 있었다.

    '전쟁이라…….'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북한은 이쪽에서 내민 모든 소통의 창구를 거부했다. 문을 꼭꼭 닫아걸은 채 대화를 거부하고 있었다.

    "미국 측은요?"

    "내일 출발할 겁니다. 일단 미국과 일본은 한국을 1차 베이스캠프로 삼아 집결한 다음 휴전선을 넘기로 했습니다."

    "중국과 러시아는 각자 국경을 넘구요?"

    "예."

    "으음……."

    그나마 친북 성향을 띤 중국과 러시아까지 등을 돌렸다면 북한에 더 희망은 없었다.

    하지만 윤영민은 한 가지 의혹을 지울 수가 없었다.

    "어째서일까요?"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이상하지 않나요? 지금까지 북한이 불량 국가니 막장 국가니 하는 말을 들어오기는 했지만, 결정적일 때는 항상 고개를 숙여왔습니다. 미국과 북한의 관계가 최악으로 치달았을 때, 미국에 고개 숙여 빈 것은 북한이었습니다."

    "피그미 소리 들었을 때 말입니까?"

    "그렇죠. 그때만 해도 북한은 납작 엎드려서 바람이 지나가기를 기다렸습니다. 실제로 그들이 전력 차이를 모르는 것도 아니고, 언제나 파국으로 치닫게 될 때는 자신들에게 전쟁의 의사가 없음을 밝혀왔단 말이죠. 그런데 이번에는 달라요. 이번에는 전쟁을 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나오고 있단 말이죠. 정확하게는 전쟁을 하든 말든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확실히 그런 면이 있습니다."

    국방부 장관은 대통령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북한의 반응이라는 것은 사실 대한민국에서는 가장 민감한 문제 중의 하나고, 가장 많이 분석되는 것 중의 하나였다.

    보통 사람들이야 북한이 미친 짓을 한다 치면 '아, 쟤들 원래 그러니까' 하고 넘어가 버려도 그만이지만, 국가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특히나 국경을 맞대고 있는데다가 서로를 주적이라고 표현하는 나라에서는 말이다.

    별것 아닌 사진 하나, 워딩 하나를 가지고도 논문을 쓸 만큼 머리를 싸매야 하는 것이 정부가 해야 하는 일이다.

    그 결과, 나름 북한의 반응에 대한 대응 매뉴얼이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건만, 지금 북한은 그 매뉴얼을 완벽하게 무용지물로 만들고 있었다.

    '마치 일순간에 헤드가 바뀌어 버린 것처럼 말이야.'

    그가 알고 있는 북한의 최고 사령관은 이런 식으로 불통을 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대화는 통하지 않을지 몰라도 반응이 꽤나 즉각적인 사람이었다.

    미국이든 중국이든, 아니면 한국이 되었든 이렇게 찔러 대면 발끈해서라도 입장 표명이 있을 만한데, 도무지 반응이 없었다.

    "지금은 이미 생각하기에는 늦었지만……."

    어차피 기호지세였다.

    그것도 완전히 날뛰는 호랑이의 등에 올라탔다. 미중일러가 움직이는 상황에서 홀로 발을 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제는 그저 의혹이 있든 말든 북한의 수뇌부를 제거해 버리는 수밖에 없었다.

    "일체의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예. 걱정하지 마십시오. 잔뼈가 굵은 이들입니다."

    "군 쪽이야 걱정하지 않습니다. 사병들은 몰라도 장교들은 세계에서 인정받는 것이 우리 국군들 아닙니까. 제가 걱정하는 부분은 그들이 아니라 능력자들입니다."

    "그 부분도 확실하게 신경을 쓰겠습니다."

    "아무래도 원장이 얼마 전에 바뀐 관계로 장악력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으니, 국방부 장관이 많이 도와주세요."

    "예. 걱정 마십시오."

    '별문제는 없겠지.'

    하필 원장이 바뀐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은 우려할 문제였지만, 애초에 KSF는 원장이 하는 일이 크지 않았다. 각 지부장들이 자치적으로 일을 해결하고 있으니, 각 지부장들만 잘 단속하면 될 것이다.

    '애초에 많은 인원이 가는 것도 아니니까.'

    "KSF는 그렇다 치고, NDF는 어떻습니까?"

    "거기야 뭐, 최정훈이가 있으니까 어련히 잘 알아서 하지 않겠습니까?"

    "하기야 최정훈은 믿을 만하죠."

    "인잽니다. 솔직히 생각 같아서는 당장에 임관이라도 시키고 싶습니다."

    "하하하, 그게 쉽겠습니까? 이지혁 씨가 통제 안 될 텐데요."

    "그러니 아쉽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지혁 씨만 아니면 어떻게든 빼오고 싶은 인재입니다. KSF 출신 주제에 방위사와 사이가 나쁘지도 않다는 것도 참 마음에 듭니다."

    "후후후."

    윤영민은 기분 좋은 웃음을 지었다.

    동량이 자라나는 것을 보는 것은 매우 즐거운 일이었다. 특히나 그 동량이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면 아무런 부담 없이 쑥쑥 커가는 모습을 즐길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최정훈은 지켜보기 참 즐거운 인재였다.

    "지금쯤 아마 정신없겠죠?"

    "하지만 간만에 이지혁 씨가 주변에 없는 상황이니, 오히려 즐거워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워커홀릭 기가 있으니 물을 만난 것 아니겠습니까?"

    "그 사람이 있어서 참 다행입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하하하."

    * * *

    "죽을 것 같다."

    최정훈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미 화면이 세 개로 보이기 시작했다. 긴급 처방으로 텀블러에 가득 채운 붕붕 드링크를 사정없이 위 속으로 밀어 넣고 있지만, 이번에는 위마저도 그동안의 학대에 항의하듯 들어오는 음료를 밀어내고 있었다.

    턱 끝까지 내려온 다크 서클을 보면 흑인이라고 착각을 할 정도였다. 그게 아니라면 할로윈 분장이라고 생각을 하든가.

    "괜찮으십니까?"

    부하 직원이 걱정스레 물었지만, 괜찮다고 대답할 여력도 없었다.

    "끄응……."

    손을 휘휘 저은 최정훈이 의자에 등을 기대고는 멍하니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일이 끝이 없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일 자체는 끝이 있는데, 그가 끝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정말 이게 끝일까?

    이 정도로 괜찮은가?

    이렇게만 하면 되는가?

    머릿속에 의구심 제조기라도 들어 있는지 끊임없는 의구심이 그를 괴롭혔다.

    "최정훈 씨."

    "……예?"

    서아영이 보다 못해 말했다.

    "이제 끝나가는 것 같은데, 집에 가서 좀 쉬어요."

    "괜찮습니다."

    "지금 며칠째 철야인 줄은 알아요?"

    "알죠."

    "그러다가 막상 실전에 투입됐을 때 아무것도 못해요. 알고 있죠?"

    "예."

    최정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자신의 상태가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은 누구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부장으로서 하는 명령이에요. 한 시간 내로 마무리하고 들어가서 쉬세요."

    "한 시간이요? 열 시간도 부족합니다."

    "부족한 게 아니라 부족하게 만들고 있는 거겠죠. 지금 보고 있는 그 서류, 아침에도 보고 있던 거 아니에요?"

    최정훈은 대답 없이 서류를 슬쩍 닫았다.

    "뭐가 그리 불안해서 난리예요? 누가 보면 소풍 처음 가는 고등학생인 줄 알겠어요."

    "요즘 고딩들은 소풍 간다고 딱히 좋아하고 그러지 않습니다."

    "실없는 소리 하지 말고 빨리 마무리해요."

    "예."

    최정훈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밖으로 나갔다.

    서아영이 불만스러운 얼굴로 그런 최정훈을 바라보았지만, 그가 뭘 하러 가는 것인지를 알고 있기에 딱히 제지를 하지는 않았다.

    밖으로 나온 최정훈이 담배 한 대를 입에 물고는 불을 붙였다.

    '짜증나는군.'

    왜 이렇게 불안해서 안절부절못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인정하기 싫을 뿐이지.

    요원들이 이지혁이 없다는 사실을 불안해한다고?

    사실이지.

    문제는 가장 불안해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최정훈 자신이라는 것이었다.

    '이지혁 씨가 없을 때는 일을 어떻게 해왔는지 모르겠군.'

    과거의 완벽주의자이던 그가 이지혁을 만나면서 미리 계획할 수 없는 일을 너무 많이 만났다.

    그 상황이 이지혁을 통해 해결되어 가는 것을 보며, 완벽한 게획을 수립하지 않아도 이지혁만 있으면 어떻게든 된다는 인식이 자리 잡아버린 모양이었다.

    그러니 이 꼴이다.

    이지혁이 돕지 않는다는 가정으로 계획을 살펴보자 허점이 너무 많고, 위험요소가 너무 많았다.

    그동안 그가 이지혁에게 얼마나 의지하고 있었는지를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통제를 해?'

    최정훈은 쓰게 웃었다.

    통제가 아니라 이지혁이라는 이름과 힘에 기대서 쉽게 온 것이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몸으로 체감을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이지혁이 언제까지 그의 뒤를 봐준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사실 이지혁이 정말로 자신을 배려해 줄 마음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 당장은 의도한 것이든 아니든 그의 후광으로 일하고 있는 게 사실이었으니까.

    최정훈은 담배를 깊게 빨았다.

    "그만 달달거려야지."

    그의 불안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염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서아영이 그래서 그를 집에 들여보내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예전에는 자신이 일을 하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던 사람이 저런 식으로 나온다는 것은 지금 자신의 몰골이 말이 아니라는 뜻이리라.

    "집에 가자."

    붙들고 있는다고 결론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이제는 다 놓고 쉬어야 할 때였다. 정말 이러다가 결행 당일에 과로로 쓰러질지도 몰랐다.

    우우우웅.

    그때, 진동으로 해놓은 폰이 짧게 울렸다.

    "톡인가?"

    이 시간에 톡을 보낼 사람이 없을 텐데?

    최정훈은 휴대폰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이게 뭐지?"

    예쁘게 차려입은 정해민이 이지혁을 옆에 끼고는 V자를 그리고 있는 사진이 NDF 단톡방에 올라온 것이다.

    "헐?"

    최정훈이 놀란 눈으로 휴대폰을 바라보다가 건물 안으로 뛰듯이 들어갔다.

    안은 이미 웅성대고 있었다.

    "어디 가는 거지?"

    "그, 그보다… 이거 보라고!"

    박성찬이 스마트폰을 가득 채운 사진을 내밀며 소리쳤다.

    "추, 추리닝이 아니잖아!"

    "뭐? 진짜?"

    "그거 피부 아니었나?"

    "계절이 바뀌어도 단 한 번도 바뀌지 않던 복장인데, 그걸 벗었다고?"

    사진을 본 이들이 하나같이 경악했다.

    하기야 이지혁을 NDF에서 처음 본 이들은 이지혁이 트레이닝복이 아닌 다른 것을 입고 있는 걸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이, 이리 보니 잘생긴 것 같다?"

    "그렇지? 옷이 날개라더니, 그 말이 왜 나온지 알 것 같아. 나도 옷을 바꿔볼까?"

    "옷걸이가 싸구려라……."

    "뭐, 인마?"

    투닥대는 그들 사이에서 서아영이 고개를 빼꼼 내밀더니 입을 열었다.

    "그런데 진짜 이게 무슨 일이지? 이렇게 차려입고 어딜 가는 거여?"

    "복장은 뭐 거의 상견례 복장인데요?"

    "상견례?"

    쾅!

    그때, 문이 거칠게 닫혔다.

    사람들의 시선이 문 쪽으로 집중되었다.

    "다, 다솜아."

    "……."

    김다솜이 손에 든 도시락을 김다현에게 내밀었다.

    김다현은 떨리는 손으로 도시락을 받아 들었다.

    "사진."

    "으응."

    김다현이 슬그머니 자신의 폰에서 사진을 켜 김다솜에게 내밀었다.

    "근처야."

    김다솜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폰을 넘기고는 밖으로 나갔다.

    쾅!

    문짝이 떨어질 듯 닫히는 문을 보며 최정훈이 천천히 중얼거렸다.

    "퇴근해도 되는 건 맞나?"

    "…일단 대기해요."

    "그렇죠?"

    퇴근은 뭔 놈의 퇴근이냐.

    최정훈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 * *

    "이거, 좀 어색한데……."

    이지혁은 자신이 걸친 옷을 내려다보며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항상 트레이닝복을 입고 다니다가 슈트를 입으니 기분도 그렇고, 몸도 이상했다. 어깨를 올릴 때마다 걸리는 느낌이 영 껄끄럽다.

    다른 걸 입고 가면 안 되냐고 반항을 해보았지만, 어머니의 등짝 스매시와 이예원의 잔소리 앞에 결국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조금만 더 잔소리를 들었다가는 귀에서 피가 났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놈의 지지배는 왜 갈수록 엄마를 닮아가나."

    이예원도 처음에는 폭력적이지 않았던 것 같은데, 이제 걸핏하면 손을 들어 사람의 등짝을 내려친다.

    모전여전이라고는 하지만, 그런 것까지 닮을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러다 시집은 어떻게 가려고?

    '역시 그 수밖에 없나?'

    최정훈의 기분은 생각도 하지 않고 매제 후보에 진득하게 박아놓고 있는 이지혁이었다.

    "흐음……."

    길가에 설치되어 있는 대형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 본 이지혁이 어색함을 느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도 잘났긴 잘났네."

    트레이닝복이 익숙하기는 하지만, 지금 보이는 모습이 아무래도 평소의 모습보다는 1% 정도 더 잘나 보인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불편하기는 하지만."

    외모와 편의성의 중간에서 고뇌하는 이지혁이었다.

    과연 멋있고 편하기도 한 옷은 없단 말인가.

    RRRRR.

    신호음이 울리자 이지혁은 지체 없이 전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 어, 지혁아. 나 창혁인데, 언제 도착하냐?

    "이제 가고 있는데?"

    - ……그래?

    "왜?"

    - 아니, 한 시간이나 늦기에 뭔 일 있는가 했지. 혹시 안 오나 싶어서 말이야.

    "응. 다 와가. 걱정하지 말고 좀 기다려."

    - 그, 그래.

    이지혁은 전화를 끊고는 담배를 입에 물었다.

    "사람을 이리 보고 싶어 하니 안 갈 수도 없지."

    이지혁은 휘파람을 불며 약속 장소를 향해 걸어갔다.

    * * *

    "온대?"

    "응."

    최창혁의 말에 남자들의 얼굴이 살짝 하얗게 질렸다.

    "진짜?"

    "…안 올 이유도 없잖아."

    "그렇기는 하지만……."

    애초에 이지혁이 시작한 동창회였으니, 안 오는 게 더 이상했다. 그 사실을 다 알고는 있지만, 마지막 기대를 저버리지 못한 것이다.

    "매도 먼저 맞는 것이 낫다더니, 차라리 오기라도 일찍 오지."

    "그러게 말이야."

    목소리가 커지며 웅성거리기 시작하자 여자들이 남자들을 비웃기 시작했다.

    "야, 너희 그렇게 지혁이가 무섭냐?"

    "쟤, 뭐래냐?"

    "냅 둬. 여자들이 뭘 알겠냐."

    "니들 진짜 이상하다. 사실 지혁이가 그리 뭐 애들 괴롭히고 다니거나 그런 애는 아니었잖아. 그렇다고 해도 이제 다들 성인인데, 뭐가 그리 겁나서 달달거리고 있는데?"

    그 말에 최창혁이 웃고 말았다.

    "성인이란다."

    "애초에 그런 거 가리는 놈이었으면 걱정도 안 하지."

    "여자들이 뭘 알겠어?"

    "…지혁이가 너희한테 뭘 했는데?"

    최창혁이 가만히 한숨을 쉬더니 입을 열었다.

    "이지혁은 말이야, 그냥 쉽게 말하자면 학교에 존재하는 비선공 몬스터 같은 애야."

    "비선공 몬스터 좋다."

    최선미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기억하는 이지혁은 학교에서 딱히 눈에 띌 만한 짓을 하는 애가 아니었다. 그냥 구석에서 언제나 잠만 자고, 또 자고, 또 자고…….

    '눈에 엄청 띄네.'

    너무 자연스럽게 잠을 자대서 그런가 보다 했는데, 생각해 보니 맨 뒷자리서 항상 자고 있던 것밖에 기억에 남지 않는다.

    "그래도 너희한테 피해 준 건 없는 거 아냐?"

    "피해?"

    최창혁이 손짓을 하더니 누군가를 불렀다.

    "권석아."

    "응?"

    권석이라고 불린 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우리 반에서 등발이 제일 좋다는 이유로 1년 동안 지혁이 앞에서 허리를 펴고 있어야 했던 권석이다. 덕분에 이제 허리를 굽힐 수 없는 몸이 되었지."

    "……."

    "그뿐인 줄 알아? 종혁아."

    "…하지 마."

    "우리 종혁이는 지혁이 컵라면 산다고 하루에도 몇 번씩 담을 넘다 보니 요즘은 프로 파쿠르 선수로 활동하고 있다."

    "하지 말라고."

    박종혁이 눈을 훔쳤다.

    "…이 외에도 희생자가 한둘인 줄 알아? 지혁이 숙제 담당부터 시작해서, 지혁이 물 담당에, 심지어 지혁이 음악 선곡 담당도 있었다고."

    최선미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너희는 덩치도 큰 애들이 지혁이가 시키는 걸 다 했니? 왜 그렇게 당하고 있었어? 그냥 한 번 화내면 될 일 가지고."

    남자들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어떤 아이는 반쯤 눈물을 흘리면서 최선미를 가리키고 있었다.

    "진짜 아무것도 모르네."

    "응? 뭐가?"

    "우리 학교에 왜 일진이 없었는지 아냐?"

    "글쎄?"

    "1학년 때, 3학년들이 남자들을 불러서 돈을 걷어 오라고 한 적이 있었어."

    "응? 그런 일이 있었어?"

    "그래. 그런데 그날로 일진이 사라졌어."

    "왜?"

    "하필이면 그때 데리고 간 애가 지혁이였거든."

    "……."

    박종혁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점심시간에 교실에 왔는데, 맨 뒤에서 엎드려 자고 있는 놈이 있으니까 딱 보고 괜찮겠다 싶어서 데리고 간 거지."

    "그래서?"

    "체육관으로 끌고 가서 돈을 거둬 오라고 했는데, 지혁이가 웃으면서 말한 거지. 얼마를 걷어 오라구요?"

    "……."

    "그리고 3학년들이 고스란히 그 열 배를 뱉어내야 했지. 그걸로 한동안 잘 먹고 잘살더라."

    최선미는 도통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래도 일진인데, 그걸 순순히 줘?"

    "순순히?"

    최창혁이 최선미의 이해를 도와주었다.

    "순순히라면 순순히지. 병원에 입원하고 나서 준 거니까."

    "응?"

    "그 정도까지 맞는 데 한 열흘 걸렸지?"

    "응. 그때, 3학년 민철이 형이 아마 마지막까지 버티다가 하도 맞아서 병원에 실려 갔었지."

    "벼, 병원에 실려 갔다고? 그런데도 고소를 안 당했어?"

    최창혁이 고개를 저었다.

    "외상이 없는데 무슨 수로 고소를 하냐?"

    "외상이 없어? 맞았는데?"

    "이지혁이 잘하는 것 중 하나가 진짜 눈물이 나도록 아픈데, 정말 죽을 것 같이 아픈데, 맞고 나면 상처가 안 남게 하는 거다."

    "…뭐, 그런……."

    최창혁이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그때 3학년들이 얼마나 맞았는지는 진짜 안 본 사람들은 몰라. 기분 나쁘다고 쉬는 시간에 가서 패고, 급식 먹다가 맛없다고 패고, 아침에 나오는데 춥다고 패고, 잠 온다고 패고."

    "뭐 그런 걸로 사람을 패냐?"

    "그러니까 미친놈이지."

    "……."

    "너희는 지혁이가 3학년 교실 가서 그 형들 패는 걸 못 봐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우리 반에 지혁이한테 맞은 애들은 하나도 없는데, 지혁이 이야기만 나오면 경기를 하는 이유가 다 있다고. 까딱하면 나도 그 꼴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너 같으면 태연하게 대할 수 있겠냐?"

    "왜 난 몰랐지?"

    "아무도 말을 안 했으니까."

    "왜?"

    "…너 같으면 그 상황에서 지혁이가 이랬다저랬다 떠들고 다닐 수 있겠냐?"

    "못하지."

    "그래. 그래서 아무도 말 안 했다."

    최선미가 입을 쩍 벌렸다.

    그렇다면 그녀들은 전혀 모르고 있는 와중에 이지혁이 학교를 반쯤은 지배했다는 것 아닌가.

    "형들만 괴롭혔으면 말도 안 한다. 우리 동창 중에 백용기라는 애 있던 거 기억하냐?"

    "…아니."

    "기억 못하는 게 당연하지. 걔가 쉬는 시간에 복도 지나가다가 지혁이랑 어깨가 부딪쳤다고 '조심해, 새끼야'라는, 어찌 보면 평범하고, 어찌 보면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대사를 쳤거든?"

    "응."

    "걔는 정말 조심하고 살더라. 진짜 매사에 조심하게 되더라고. 하기야 나 같아도 길 가다가 어깨 한 번 부딪쳤다고 그 꼴을 당하면 매사에 조심하고 살게 되겠지."

    그 꼴이 대체 무슨 꼴인지 궁금하긴 했지만, 감히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는 최선미였다.

    "니들은 속편하게 학교생활한 거야. 우린 숨도 못 쉬었어."

    "야, 그 꼰대 있잖아, 만식이. 만식이가 학년주임하다가 다른 학교로 전출 간 것도 이지혁 건드렸다가 사생활 까발려지고 협박당했다는 말도 있어."

    "설마, 고등학생인데……."

    "중학생 때부터 고등학생이고 대학생이고 다 때려잡던 앤데, 고등학생이면 선생 정도는 상대할 만하지."

    "…난 이게 대체 뭔 소린지 모르겠다."

    "그니까 대충 말하자면!"

    최창혁이 눈에 불을 켜고 입을 열었다.

    "니들이 생각하는 거랑은 다르게 이지혁은 우리 입장에서 보자면 움직이는 폭탄이나 다름없다고! 괜히 말 한 번 잘못 섞었다가 일주일 동안 갈굼당하고, 빡 쳐서 대들었다가 일주일 동안 처맞는, 그런 인간이었단 말이야!"

    박종혁이 말을 덧붙였다.

    "우리에게 돈은 안 뺏는 게 유일한 장점이지. 그렇다고 돈을 안 뺏은 것도 아냐, 동네 깡패들이 돈 뺏는 곳을 기가 막히게 알아내서 덮치고는 그놈들에게 돈을 뺏고 다녔지."

    "차라리 진짜 일진처럼 굴면 어떻게 신고라도 해볼 텐데, 불법적인 건 저지르지도 않아요."

    "음, 그럼 그냥 안 건드리면 되는 거 아냐?"

    박종혁이 비웃음을 입에 머금었다.

    "넌 물만 먹고 살 수 있냐?"

    "응?"

    "사람이 정말 바른 생활로 살려고 하면 얼마나 힘든지 알아? 이지혁이 어떤 인간이냐면… 집 앞에 폭주족이 지나가는데, 그거 시끄럽다고 자전거 타고 집회하는 데 쫓아가서 바이크 전부 부숴놓은 놈이야."

    "그, 그걸 가만히 둬?"

    "가만히 안 두면?"

    "……."

    "상식이 통하는 인간이면 우리도 이리 안 살지. 그 상식이 안 통하니까 문제인 거 아냐. 걔 성격에 안 거슬리고 사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으응."

    최선미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무슨 말인지 다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이지혁 때문에 그들이 힘들었다는 건 알 것 같았다.

    "…니들 앞에서 할 말이 아니다 싶은 건 이야기도 안 한 거야."

    최창혁이 한숨을 쉬었다.

    "이제 졸업해서 다시 볼 일 없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다니."

    "그럼 안 보면 되잖아. 동창회를 안 하면 그만이지."

    "…그러다 길 가다가 만나면 어떻게 하라고? 걔가 얼마나 소심한 줄 알아? 대한민국 땅을 떠나기 전에는 안심할 수가 없다고. 그럴 바에야 정면 돌파를 하는 게 낫지."

    …지금 내가 듣고 있는 이야기가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이 맞나?

    최선미는 웃고 말았다.

    "모르겠다. 지혁이 나름 여자들 사이에서는 인기 괜찮았는데. 생긴 건 멀쩡하게 생겼잖아. 나름 잘생겼다고 해도 될 정돈데……."

    "미친것들."

    최창혁이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이지혁을 겪어본다면 그런 생각은 싸그리 다 날아갈 텐데, 학창 시절의 이지혁을 그녀들의 앞에 보여줄 수 없는 것이 한이었다.

    "그래서 요즘 지혁이는 뭐한대?"

    "능력자라던데?"

    "와, 그럼 돈도 잘 벌겠다. 능력자들이 거의 전문직 이상으로 번다던데."

    "그 나이에 벌써 성공했네."

    최창혁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야, 목숨 걸고 일하는 건데, 언제 죽을지 알고 성공이래? 그러다 훅 가면 다 끝이지."

    "마, 말이 심하다?"

    "심하긴 뭐가 심해. 능력자들, 솔직힌 다 목숨 내놓고 일하는 거지."

    분위기가 살짝 식어갔다.

    * * *

    "새꺄, 그래도 나름 나라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인데,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돼지."

    "나라를 위해서 일하기는 뭔 나라를 위해서 일해. 돈 다 받고 일하는 건데."

    "그럼 군인이나 소방수는 돈 안 받고 일하냐? 돈 받고 일하는 건 다 마찬가지지."

    최창혁은 필요 이상으로 흥분하고 있었다.

    "말이야 바른말이지, 능력자가 생긴 이후로 걔들이 특별 대우 받는 건 사실이잖아. 나는 그 뭐지? 거주구? 그것도 마음에 안 들어. 왜 능력자만 들어가서 살 수 있는 땅이 생기는 건데?"

    조지웅이 최창혁을 빤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거야 같이 어울려 살면 문제가 많이 생기니까 그런 거지. 처음에 생긴 이유가 능력자들이랑 어울려 살던 일반인들이 불안하다고 해서 그런 거잖아."

    "그럼 적당히 아파트나 하나 마련해 주면 그만이지, 땅값 비싼 서울에 그런 동네를 만들어놓는다는 게 말이 되냐? 나는 무슨 마이애민 줄 알았다."

    "…그만큼 투자할 가치가 있으니까 그런 거겠지."

    "에효."

    최창혁이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말이야 바른말이지, 나는 반쯤은 탈락한 인간이니까 그러려니 한다고. 그런데 선미 같은 애들 봐."

    "나는 왜?"

    최선미가 왜 갑자기 자신을 끌어들이냐는 듯이 얼굴을 굳혔다.

    "쟤 봐라. 12년 동안 죽어라고 고생해서 좋은 대학 가고 이제 겨우 졸업 앞두고 있는데, 그래서 대기업 들어간다고 해도 얼마 벌겠냐?"

    "……."

    "죽어라고 16년 동안 공부해서 몇 천 버는데, 능력자 새끼들은 아무것도 한 것 없이 갑자기 능력이 뚝 떨어지더니 몇 억씩 벌어 제끼잖아. 그러니 열이 안 받을 만하냐?"

    "다 운이지, 뭐."

    "그러니까 열 받는다고. 차라리 그 능력이라는 게 열심히 한 사람에게 생기는 거면 나도 이런 말을 안 한다니까. 그런데 그게 아니잖아. 그냥 어느 날 발 닦고 자다가도 생기는 게 능력이라는 거잖아."

    "그렇지."

    최창혁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그러니 사람이 짜증 난단 말이야. 최소한 저 새끼가 나보다 돈 잘 벌고 잘사는 이유가 있어야 할 거 아냐. 그게 학창 시절에 열심히 일을 했기 때문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디에다 돈을 많이 투자했기 때문도 아니고, 심지어 태어나길 금수저 물고 태어나서도 아니라, 어느날 갑자기 자고 일어났더니 떡하니 능력이 생겨서라는 게 사람을 돌게 한다는 거지."

    "으음."

    조지웅은 침음성을 냈다.

    "그런데 그건 스포츠 선수들도 별로 다를 것 없잖아. 걔들도 타고나기를 그렇게 타고나서 그런 거 아냐?"

    최창혁이 기가 차다는 듯이 조지웅을 바라보았다.

    "너는 농구 못하냐?"

    "응?"

    "야구 못해? 축구는?"

    "당연히 할 수 있지."

    "내가 할 수 있는 걸 더 잘하는 거면 아무 말도 안 한다니까. 그런데 너, 불 뿜을 수 있냐? 누구는 집채만 한 거 뿜을 수 있는데, 너는 라이터 불만 한 거라도 뿜을 수 있냐고?"

    "…못하지."

    "그게 문제라고. 누가 더 잘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니잖아. 기회의 문제라고. 기회가 균등하지가 않잖아. 막말로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한다고 해서 조던이 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조던 같은 선수가 되기 위해서 노력을 할 수 있는 기회는 있잖아. 선택이 가능하고. 그런데 능력자는 그런 게 아니란 말이야. 애초에 능력자인가 아닌가로 나뉘어 버린다고. 일반인들은 노력을 한다고 해서 그들이 누리고 있는 것을 같이 누릴 수가 없단 말이지."

    "물론 그렇기야 하지만."

    조지웅은 여전히 인정하지 않는 눈치였다.

    "거꾸로 말하면, 그 사람들도 어느 날 갑자기 능력자가 되어버린 거잖아. 자기가 원해서 그런 게 아니라는 말이야. 능력자가 되는 순간, 자기 의지와는 관계없이 소집되어서 몬스터랑 싸워야 하는 거잖아. 그게 얼마나 스트레스일지는 생각해 봤냐?"

    "돈 많이 주잖아."

    "돈 주면 다 하냐? 돈 주면? 돈 많이 주는데 프랑스 외인부대라도 가서 전쟁이라도 하게?"

    "에이, 그건 좀……."

    조지웅이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그래. 능력자들도 그렇게 쉽게 사는 게 아니라고. 그리고 만약에 능력자들한테 특혜가 주어진다고 생각이 든다면 그런 특혜를 주고 있는 정부를 탓해야지, 왜 엄한 능력자들을 탓하냐, 이 말이지."

    최선미가 조지웅을 보며 피식 웃었다.

    "너, 말 잘한다?"

    "응?"

    "예전이었으면 창혁이 앞에서 그렇게 당당하게 말도 못했을 건데, 너 좀 달라진 것 같다."

    "아, 아냐."

    조지웅이 당황한 듯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너는 요즘 뭔 일 하는데?"

    "응?"

    "보아하니 대학 다니는 건 아닌 것 같고, 하는 일이 있을 것 아냐?"

    "나?"

    "내가 그럼 누구한테 묻고 있는 것 같은데?"

    조지웅이 당황한 듯 여기저기를 둘러보자 최선미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보통은 그런 식으로 능력자들 두둔하는 사람들 보면 가족 중에 능력자가 있거나 자기가 능력자던데?"

    "……."

    "그지? 너냐, 아니면 너희 가족이냐? 대답해 봐."

    조지웅이 한숨을 쉬고는 입을 열었다.

    "나야."

    "흐으?"

    최선미가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그렇지. 어쩐지 열변을 토하더라. 그래서 잘나신 우리 능력자님께서는 얼마나 버시나?"

    조지웅이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조금 전까지는 나름 호의적으로 그를 바라보던 시선이 있었는데, 그 감정이 다 사라진 느낌이었다.

    "너, 언제 능력자 된 거냐?"

    최창혁의 물음에 조지웅이 망설이다 대답했다.

    "이제 1년 됐어."

    "오, 그래?"

    최창혁이 뚱하게 물었다.

    "그럼 한창 재미 좋겠네? 이거저거 특권도 누리시고?"

    "아니라니까."

    조지웅이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나 로스쿨 준비하던 거 알잖아. 그런데 진짜 어느 날 갑자기 발현되어서는 갑자기 몬스터들 상대하고 있는데 좋을 것 같냐? 나도 12년 죽어라고 공부해서 좋은 대학 왔고, 나도 하고 싶은 게 있던 사람인데, 갑자기 발현하고 능력자 특별법 때문에 저항도 못하고 강제로 KSF에 소속되어서 일하고 있는 거란 말이야."

    "흐음?"

    "선배들도 다들 딜레마가 심해. 너희에게 어느 날 갑자기 '앞으로 몬스터들을 상대로 싸우며 사셔야 합니다' 그러면 기분 좋게 그걸 받아들일 수 있겠냐?"

    "나는 기분 째질 것 같은데?"

    "안 겪어봐서 그런 거야. 능력자가 되면 하지 말아야 할 것도 얼마나 많은데."

    "배부른 소리 하고 있네."

    최선미가 짜증 난다는 듯 입을 열었다.

    "누릴 건 다 누리면서 그게 할 말이야? 막말로 회사 생활 하는 사람들은 하고 싶은 것 다 하면서 사는 것 같아? 대신 너는 돈이 있으니 일이 없을 때는 하고 싶은 건 다 하면서 살 수 있잖아."

    최창혁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지."

    "그게 꼭 그렇지가 않다니까?"

    "그럼 너는 능력자 특별법 없어지면 다시 대학으로 돌아가서 원래 하려던 거 할 수 있겠어?"

    조지웅은 바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그 광경을 보고 최선미가 피식 웃었다.

    "꿈? 좋은 말이지. 그런데 대한민국에서 꿈처럼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되는데? 다들 그렇게 살고 싶어도 못 사는 거잖아. 너 하나 특별하게 꿈을 뺏긴 듯이 말하지 말라고. 무슨 말인지 알아?"

    최선미의 목소리에는 날이 서 있었다.

    "누구는 몇 년 동안 죽어라 공부하고 스펙 쌓아도 네가 버는 돈의 반도 못 버는데, 누구는 그냥 능력 하나 생긴 것만으로도 별다른 노력도 없이 쉽게 벌잖아. 안 그래?"

    "그래, 네 말이 맞다."

    최선미가 한 말 중 모두를 인정하는 건 아니지만, 괜히 이런 자리에서 날을 세우고 싶지는 않았다.

    "그럼 이 중에서는 지웅이가 제일 잘 버는 건가?"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이었다.

    "태식이는 장사하면서 엄청 번다고 소문 쫙 났던데, 그래도 지웅이보다야 더 벌지 않겠냐?"

    "야야, 돈 버는 이야기 그만해. 이게 무슨 40대 아저씨들 동창회도 아니고, 우리 나이에 벌써 돈 이야기 해야겠냐? 어차피 여기 있는 애들 중에 태반은 대학생인데, 뭐 벌써부터 돈이야? 앞으로 10년은 더 지나고 해도 되는 이야기잖아."

    "하긴."

    어색한 분위기를 날리기 위해서인지 술이 한 순배 돌기 시작했다.

    "그런데 지혁이는 왜 안 오는 거야?"

    "글쎄?"

    "야, 창혁아."

    "응?"

    "지혁이는 예전이랑 별로 바뀐 거 없더냐?"

    "으음……."

    최창혁이 고민하는 듯하다가 입을 열었다.

    "글쎄, 바뀐 게 뭐냐고 하면 좀 그렇긴 한데, 확실히 예전보다는 뭔가 말이 통하는 느낌이었어."

    "말이 통한다고?"

    "예전에 이지혁은 남의 말에 관심이 없었잖아. 남이 뭐 하는지에도 관심이 없고."

    "그랬지. 혼자서 온 동네 다 왕따시키는 타입이었으니까."

    "그랬는데 이번에는 나름 사람한테 관심을 보이더라고, 날 알아볼 줄은 몰랐어. 알아봤다 하더라도 말을 걸 줄도 몰랐고."

    조지웅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은 변하는 거니까."

    "그래도 이지혁은 안 변할 줄 알았는데 말이야. 걔가 변한 거 보니까 우리가 나이를 먹긴 먹었구나 하고 실감이 가더라."

    "그럴 만도 하지."

    "그럼 긴장 좀 덜해도 되는 건가?"

    왁자지껄한 웃음이 퍼져 나갔다.

    "그런데 그럼 지혁이는 얼마나 버는 거야? 지웅이 정도로 번다고 생각하면 되나?"

    조지웅이 정색하고는 대답했다.

    "나는 이제 1년 차라서 얼마 벌지도 못해."

    "그런데 지혁이도 1년 차 아냐? 실종 됐다가 돌아온 지 얼마 안 됐잖아."

    "지혁이는 1년 차라도 나랑은 다르지. 소속부터 다르단 말이야."

    "응?"

    조지웅이 주변을 둘러보고는 말을 이었다.

    "나는 KSF 소속이고, 지혁이는 NDF 소속이잖아. NDF는 봉급부터 다 달라. 군대로 치면 걔들은 특전사고, 나는 땅개야. 취급도 전혀 다르고, 내가 알기로는 버는 돈 차이도 엄청 크다고 들었어."

    "그래?"

    "…게다가 지혁이는 NDF에서도 특별 취급이라고 들었거든, 모르긴 해도 몇 억은 껌처럼 벌어 댈걸?"

    "우와!"

    최선미의 눈이 빛났다.

    "진짜?"

    "그럼 내가 그런 걸로 거짓말하겠냐? 하는 일이 엄청 빡센 걸로 유명해서 대우도 엄청 잘해주는 걸로 알고 있어. 그래도 지원율이 엄청 낮아. 위험하다는 인식도 많고."

    "여하튼 지혁이가 그만큼 돈을 잘 번다는 이야기잖아."

    "몰라?"

    "뭘?"

    "대한민국 능력자들 사이에서는 이지혁이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어."

    "그 정도야?"

    "나는 되레 니들이 왜 지혁이를 그동안 모르고 있었는지가 더 이상하다. 아무리 일반인들이라고는 하지만, 지혁이 이름을 모를 수가 있나?"

    "우리가 능력자들 하나하나 다 알 수가 없지."

    "서아영 몰라? 플레임 위치?"

    "서아영이야 당연히 알지. 우리나라에서 제일 잘나가는 능력자잖아."

    "그 서아영보다 더 잘나가는 게 지혁이야."

    "진짜?"

    "속고만 살았나."

    다들 놀란 눈치였다.

    플레임 위치 서아영이라고 하면 대한민국은 물론, 전 세계에서도 알아주는 능력자였다. 그런데 그런 서아영보다 더 잘나간다는 말은 대한민국 최고의 능력자라는 말과 같은 의미 아닌가.

    그때, 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안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안녕?"

    * * *

    얼굴을 들이민 이를 알아본 최창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 지혁아, 왔어?"

    이지혁이 최창혁을 빼꼼 쳐다보다가 안으로 들어섰다.

    "좀 늦었나?"

    최창혁이 얼른 고개를 저었다.

    "늦기는. 하하… 일찍 왔네?"

    비록 한 시간 반쯤 늦기는 했지만, 이지혁에게 지각을 타박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학교도 2교시 끝나고 나오던 놈인데.'

    이지혁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가 제시간에 나올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은 좀 일찍 나오려고 했는데, 옷이 영 어색해서 좀 늦었다."

    "오?"

    최창혁이 이지혁을 보더니 환히 웃었다.

    "그러고 보니 쫙 빼입었네?"

    "어울리냐?"

    "어, 어울리지."

    이지혁이 안으로 들어서자 다른 이들도 다들 그를 바라보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조지웅이었다.

    "어, 지혁아. 오랜만이다."

    "…응?"

    이지혁이 조지웅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누구?"

    "……."

    조지웅이 어색하게 웃으며 자기를 설명했다.

    "내가 얼굴이 그리 변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 나 지웅이잖아, 조지웅. 기억 안 나냐?"

    "조지웅?"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하자 조지웅의 얼굴이 썩어 들어갔다.

    분위기가 살짝 어색해지자 최창혁이 서둘러 입을 열었다.

    "지웅이가 많이 변하기는 했지. 지혁아, 기억 안 나냐? 반에서 선미랑 만날 일이등 다투던 지웅이. 예전에는 공부벌레였잖아."

    "사실 나는 우리 반 애들 얼굴도 잘 기억 안 나는데?"

    …그럼 왜 불렀는데?

    최창혁이 멍한 얼굴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동창회를 하자고 사람을 들들 볶을 때는 언제고, 이제 기억이 안 난다고 하면 어쩌자는 것인가.

    "쟤, 쟤는 지금 능력자로 활동하고 있어."

    "오?"

    이지혁이 흥미가 생겼다는 듯이 조지웅을 바라보았다.

    "진짜?"

    "으응."

    조지웅이 머리를 긁었다.

    보통 어디에 가서 능력자라고 하면 나름 어깨가 으쓱해지기 마련이지만, 이지혁 앞에서 능력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니 뭔가 굉장히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번데기 앞에서 주름을 잡는 느낌이랄까.

    "네 이야기 많이 듣고 있어."

    "내 이야기?"

    "응. 너 NDF에 있잖아. 거기 이야기 우리도 많이 듣거든."

    "그래? 뭐라는데?"

    순간, 조지웅은 말을 잘못 꺼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야 들은 이야기라고 해봐야…….'

    NDF의 이야기는 NDF 소속들이 흘린 이야기를 바탕으로 전파되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NDF에 소속되어 있는 능력자들이 이지혁에 대해 떠들 이야기는 빤했다.

    '악마.'

    그것도 좀 쪼잔한 악마였다.

    "조, 좋은 이야기지."

    "그러니까, 좋은 이야기 뭐냐고."

    "하하하하……."

    조지웅이 어색하게 웃었다.

    '평소에 행실을 좀 바르게 하고 살아야 이럴 때 해줄 이야기라도 있을 것 아냐!'

    파도 파도 괴담밖에 안 나오는데, 뭔 좋은 이야기가 나오겠는가.

    "그런 이야기 있잖아. 미국에서 네가 활약을 했다든가, 중국에서 활약을 했다든가……."

    "흐응?"

    이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생 많이 했지."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면 고생을 한 것은 이지혁이 아니라 이지혁을 맞이한 곳의 사람들인 것 같지만, 굳이 그 이야기를 지금 꺼내서 분위기를 이상하게 만들 필요는 없었다.

    "지혁아, 오랜만이야."

    "응?"

    이지혁이 자신의 옆자리에 앉아서 맥주병을 흔드는 여자를 보고는 다시 고개를 갸웃했다.

    "누구?"

    "기억 안 나? 나 최선미."

    "최선미……."

    이지혁이 돌아가지 않는 뇌를 풀가동해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분명 기억 속에 있는 이름이었는데…….

    "아!"

    뇌 속에서 최선미라는 이름을 기억해 낸 이지혁이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아닌데?"

    "응? 뭐가?"

    "……너 성형했냐?"

    최선미의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내가 기억하는 최선미는 이렇지 않았는데? 뭐랄까, 그러니까, 음……."

    최창혁이 급히 다시 중재에 나섰다.

    "워, 원래 여자들이 졸업하고 꾸미기 시작하면 많이 달라지잖아."

    "그래도 이건 좀……."

    "헤어스타일만 바꿔도 사람이 얼마나 달라 보이는데."

    "그런가?"

    "원래 선미가 예전에는 안 꾸몄잖아. 공부한다고."

    "그렇긴 한데……."

    이지혁이 가만히 최선미를 보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꾸미면 쌍꺼풀이 생기나?"

    "……."

    최창혁이 슬쩍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자, 자, 한잔하자!"

    조지웅이 기겁을 하여 잔을 들었다.

    다른 이들도 어색해진 분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괜스레 목소리를 크게 내며 잔을 들었다.

    "그러고 보니 고3 때 선생님은 뭐하고 계실까?"

    "…아오, 술맛 떨어지게 그 양반 이야기는 왜 꺼내냐?"

    "그래도 궁금하잖아."

    "말도 하지 마라. 나는 아직도 쌤 생각하면 몸이 떨린다. 세상에 그렇게 독한 양반도 없을 거야."

    이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생각해 보면 그 선생님이 좀 과하긴 했지."

    모두의 시선이 이지혁에게로 향했다.

    "안 그래?"

    "응……."

    "그, 그렇지."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모두의 심정은 하나같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니가 그러면 안 되지.'

    동성고의 전설적인 악덕 교사였던 박환규를 신경쇠약에 걸리게 만든 장본인이 이지혁이었다.

    '해도 해도 너무했지.'

    '와! 세상에, 어떻게 학생 눈에서 선생이 불쌍해 보이게 만들 수가 있나.'

    '교사도 사람 할 짓이 아니지. 저런 학생 들어오면 어떻게 하라고.'

    철권통치를 하던 양반이 도저히 감당하지 못해서 차라리 제발 집에 좀 가라고 수업 시간만 끝나면 교실로 바람같이 달려와 이지혁의 짐을 자기가 직접 싸곤 했다.

    집에 가도 할 게 없다고 이지혁이 버팅기기라도 하면 용돈까지 주며 피시방이라도 가라고 하던 이 시대의 참 교육자가 아닌가.

    '지금 생각해 보면 좋은 분이셨지.'

    애들 공부하는 데 방해된다고 자기 돈까지 써가며 방해물을 치우는 사람이었다. 당시에는 강압적인 양반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돌이켜 보면 참 좋으신 분 아닌가.

    모두가 뚱한 눈으로 바라보자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안 그래?"

    "그, 그렇지."

    "응. 그렇지."

    학생의 입장에서 학생인권조례를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만든 이지혁이었다.

    "그 선생님 소식 들은 사람 없어?"

    "그만두셨다던데."

    "응? 교사를 그만두셨다고? 교사는 정년 보장이 되잖아. 그런데 왜 교사를 그만둬?"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서 우리가 졸업하고 바로 그만두셨대."

    "……."

    모두가 마음속으로 애도의 시간을 가졌다.

    이지혁을 만나지 않았다면 아직까지 교사로 잘 먹고 잘살았을 사람이 괜히 이지혁을 만나 밥줄 끊기고 고생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괜스레 눈시울이 붉어지는 느낌이었다.

    "지혁이가 NDF에서 일한다고 했지?"

    "응."

    최선미가 은근 다시 이지혁에게 관심을 보였다.

    "그럼 돈도 엄청 벌겠네?"

    "…월급?"

    "응. 많이 받아?"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얼만지 잘 모르겠는데?"

    "그렇게 많이 받는다고?"

    "아니, 그게 아니라……."

    이지혁이 어색하게 머리를 긁었다.

    "딱히 통장이라든가 이런 걸 확인해 본 적이 없어서 내가 한 달에 얼마 받는지를 잘 모르겠어."

    "……."

    최선미가 미묘한 얼굴로 이지혁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게 말하면 경제관념이 없는 것이지만, 좋게 보자면 대범한 것이다.

    "거기, 우리나라에서 제일 강한 능력자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며?"

    "그렇긴 한데……."

    "그럼 엄청 대단한 사람들 많겠다. 그지?"

    "대단?"

    이지혁이 머릿속에서 NDF의 요원들을 떠올려 보고는 솔직한 감상을 말했다.

    "다들 어디 하나는 모자란 것 같은데……."

    NDF들이 들었다면 그야말로 피를 토할 발언이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지혁은 그런 말을 하면 안 되는 것 아닌가.

    "호호, 농담이지?"

    "진심인데?"

    "……."

    이지혁은 대화의 맥을 끊는 능력이 있었다. 말을 하다 보면 대체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하는지 모를 정도였다.

    조지웅이 아는 체를 했다.

    "그래도 유명하고 멋진 사람들 많잖아. 서아영이라든가."

    "히스테리녀지."

    "……박성찬이라든가."

    "근육 바보."

    조지웅의 입술이 푸들푸들 떨리기 시작했다.

    "아, 아니면 그 있잖아! 김다현! 얼굴도 잘생긴 걸로 유명하잖아. 얼굴만 보면 연예인 씹어 먹는데 NDF 소속이기도 하고! 팬클럽까지 있던데!"

    "걔가 제일 문제야. 시스콤이거든."

    NDF에 대한 환상이 산산이 박살 나는 순간이었다.

    "그, 그럼 멀쩡한 사람은 없어?"

    당황한 최선미가 묻자 이지혁이 고심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조금 흐르자 다른 이들의 머릿속에는 같은 생각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그게 이렇게 생각을 해야 하는 질문이었나?'

    이지혁이 고심 끝에 입을 열었다.

    "그래도 줌마돌 정도면 정상인의 범주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네. 그 아줌마도 정상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은 괜찮아."

    "줌마돌?"

    "정해민!"

    "마, 맞다. 정해민도 NDF지!"

    정해민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순간적으로 왁자지껄한 반응이 터져 나왔다.

    "응?"

    이지혁은 이해할 수 없는 그 반응에 고개를 갸웃했다.

    "왜 이래?"

    "정해민이잖아, 정해민! 그러고 보면 지혁이 너는 정해민 자주 볼 수 있겠다?"

    "거의 매일 보는데?"

    "지, 진짜? 나 사인 좀!"

    최창혁이 입에 거품을 물기 시작했다.

    "사인? 아줌마 사인 받아서 어디다 쓰려고 그러냐?"

    "아줌마라니! 요즘 정해민 인기가 얼마나 대단한데! 안 나오는 채널이 없어. CF도 터지던데."

    "……왜?"

    이지혁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귀엽잖아."

    "예쁘고."

    "노래도 잘하고."

    뚱한 얼굴의 이지혁이 되레 물었다.

    "귀엽고, 예쁘고, 춤도 잘 추고, 노래 잘하면서 어린 아이돌도 많잖아."

    "그걸 다 갖춘 사람은 정해민 말고는 없어. 그리고 나이도 많은 게 아니지. 그 나이에 무슨 아줌마야?"

    "흐으응?"

    열변을 토하는 최창혁을 보며 이지혁은 자신의 생각보다 정해민이 인기가 많다는 걸 알게 되었다.

    "사인 받고 싶다고?"

    "응."

    "직접 받아."

    "응?"

    "지금 오고 있으니까."

    "……그게 뭔 소리야?"

    이지혁이 왜 말귀를 못 알아먹느냐는 듯 인상을 썼다.

    "지금 여기로 오고 있다고."

    "누구? 정해민이?"

    "그럼 누가 오겠냐?"

    "지, 진짜? 정해민이 여기에 왜 오는데?"

    "왜 오긴 왜 와? 내가 불렀으니까 오지."

    최창혁이 멍한 눈으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이걸 믿어야 할지, 믿지 않아야 할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물론 이지혁과 정해민이야 같은 소속이고 아는 사이이기야 하겠지만, 동창회 자리에 부를 만큼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다고?

    그 정해민과?

    "그러고 보니, 왜 늦지?"

    이지혁이 인상을 쓰더니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어딘가로 전화를 건 이지혁이 짜증을 부렸다.

    "왜 안 와?"

    사람들이 긴장한 얼굴로 이지혁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뭔 놈의 스케줄은 스케줄이야? 그래서? 지금?"

    '저거 진짠가?'

    믿을 수도 없고,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냥 오면 되지! 뭔 인적 없는 곳이야! 아오 씨!"

    이지혁이 전화를 끊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데리고 올게. 잠깐만."

    이지혁이 그 말을 끝으로 밖으로 나가 버리자 방 안에는 묘한 침묵이 감돌기 시작했다.

    * * *

    "진짤까?"

    침묵을 깬 것은 최창혁이었다.

    "말도 안 돼."

    최선미가 손을 내저었다.

    "아무리 같은 데서 일한다고는 하지만, 정해민이면 지금 톱스타잖아. 그런 사람이 뭐하겠다고 이런 데에 오겠어."

    "그렇지?"

    "시간도 없어. 지금 걔들이 얼마나 바쁜데. 특히나 정해민은 개인 스케줄까지 소화한단 말이야. 어느 정도 인기 있는 걸 그룹 애들도 과도하게 돌다가 과로로 쓰러지고 하는데, 요즘 한창 잘나가는 애가 돈도 안 되는 일을 한다고? 어림도 없지."

    최선미의 얼굴은 살짝 달아올라 있었다.

    "애초에 걔가 왜 인기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말이야."

    "우린 알겠는데, 넌 왜 모르냐?"

    "너희 눈이 이상한 거거든?"

    최창혁은 피식 웃고 말았다.

    할 말이야 많지만, 여기서 말을 더 꺼내 드잡이질을 하는 것은 결코 현명하지 않은 처사였다.

    "그런데……."

    가만히 사태를 지켜보던 조지웅이 입을 열었다.

    "내가 지혁이가 정해민이랑 친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거든."

    "어?"

    최창혁이 살짝 눈을 크게 떴다.

    "그냥 직장 동료 아니고?"

    "내가 내부 사정을 정확하게는 모르고 풍문으로만 들은 건데… 이지혁이 서아영이랑은 사이가 별로 안 좋고, 정해민이랑은 사이가 좋은 걸로 알고 있어."

    "그게 풍문으로 들을 수 있는 이야기냐? 완전 내부 사정이잖아."

    "KSF에게 NDF의 소속된 사람들은 연예인이나 다름없어. 너희가 연예인 스캔들에 관심 가질 때, 우리는 NDF가 가십이거든. 그러다 보니 별소리가 다 들려온다. 나는 김다현이 무슨 색을 좋아하는지도 알아."

    최선미가 웃고 말았다.

    "야, 그건 나도 알겠다. 흰색이지?"

    "어? 그걸 어떻게 알지?"

    "모르는 니가 바보지."

    최선미가 혀를 찼다.

    "그리고 뭐, 그럼 올 수도 있지.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연예인 처음 봐?"

    최선미의 말에 최창혁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여기 감 없는 사람 하나 더 있네. 누가 가서 감 좀 사 와라."

    "왜? 내가 뭐 틀린 말 했어?"

    "틀렸지. 그것도 제대로 틀렸지.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정해민이 온다고 좋아서 이러는 것 같아?"

    "아냐?"

    최창혁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맞지."

    "……."

    최선미의 얼굴이 썩어가자 최창혁이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니, 그게 아니고. 아니지! 아냐! 그런 것 때문이 아니라니까."

    "설득력이……."

    "아냐! 진짜 실수야!"

    최창혁이 벌게진 얼굴로 필사적으로 항변했다. 이렇게 뜬금없이 본심이 튀어나올 줄이야.

    "무, 물론 좋지. 좋기야 하지! 그런데!"

    "됐어. 뒷말은 안 들어봐도 될 것 같아."

    "아, 아냐! 뒷말이 더 중요한 건데 여기서 끊으면 어떻게 해."

    "이미 들을 말은 다 들은 것 같은데?"

    …마녀.

    최창혁은 여자들의 싸늘한 시선을 느끼며 침을 꿀꺽 삼켰다. 여기서 대응을 조금만 잘못했다가는 아이돌 밝히는 찌질남으로 순식간에 이미지가 고착될 것이다.

    조지웅이 최창혁을 도와주었다.

    "왜 그러냐, 아이돌 좋아할 수도 있지."

    저 새끼가?

    돕는 듯 딜을 넣는 조지웅의 짓거리에 최창혁이 눈을 부릅떴다.

    아이돌 좋아하는 거야 뭐 요새 흠이 될 일도 아니었다.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이 자리에서도 쏟아져 나오는 신인 아이돌들의 이름을 줄줄이 외우고 있는 놈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걸 대놓고 떠들고 다닌다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었다. 특히나 이런 자리에서 여자들이 저렇게 도끼눈을 뜨고 있을 때는 말이다.

    최창혁의 생존 본능이 순간 빛을 발했다.

    "물론!"

    최창혁의 목소리가 커졌다.

    "정해민이 온다는 건 좋은 일이지. 좋은 일인데!"

    최창혁이 최선미를 가리켰다.

    "네 말이 맞잖아."

    "응?"

    최선미가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뭐? 뒷말은 들을 필요 없다는 말?"

    "그게 아니라!"

    최창혁은 어질어질해지는 의식을 필사적으로 붙잡으며 말을 이었다.

    "지금 정해민은 한창 바쁠 때란 말이야.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거라고. 그건 고딩 때부터 아이돌 덕후였던 혁재가 말해줄 거다."

    혁재라 불린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활동 시기에 대세 아이돌은 수면 시간도 거의 보장되지 않는다고 봐야지. 거기에 정해민급이면 정말 바쁠 거야.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전국을 누벼야 할 타이밍이지."

    최창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빤한 이야기 하려고 이렇게 시간을 끈 거야?"

    "아, 아니, 그게 아니고……."

    최창혁은 최선미에게 말리지 않으려 빠르게 말을 했다.

    "그만큼 바쁜 상황에서 여기에 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안 되지. 아까부터 내가 말했잖아."

    "그래. 그러니까, 여기에 오는 거라면 그만큼 지혁이랑 친근하다는 이야기잖아."

    "응?"

    "이런 부탁을 들어줄 정도라면 보통 사이가 아니라는 거지. 그런 생각 안 해봤냐?"

    하지만 최선미는 한숨을 쉬었다.

    "여기에서 그런 걸 짐작 못하고 있을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을 것 같아?"

    "그, 그렇게 되나?"

    조지웅이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최창혁이 가만히 최선미를 보며 입을 열었다.

    "한 사람."

    "…그래, 하나 있네."

    목소리에 한숨이 묻어 나온다.

    "그런 정도야 다 짐작하고 있는 거지. 그러니까 안 올 거라고 하는 거잖아. 정해민이 뭐가 아쉬워서 지혁이랑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겠냐?"

    "에이, 그건 아니다."

    "응?"

    최선미의 말에 제동을 건 것은 민예정이었다. 학창 시절에도 둘이 앙숙이더니, 오늘도 최선미의 말에 딴지를 걸고 나선 것이다.

    "지혁이가 뭐가 어때서?"

    "…어떻다니?"

    "결혼 정보 회사에다 지금 집어넣으면 두말할 것 없이 S급 나오는 거 아냐? 그 나이에 억이 넘는 연봉이잖아."

    "억대 연봉이 뭐 그리 대단한 거라고."

    "대단하지. 그리고 니 말대로 대단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지혁이 나이에 억대로 버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으음……."

    최선미가 분하다는 얼굴로 한발 물러섰다. 이번에는 민예정의 논리를 이길 수가 없었다.

    "나이 어리지, 국가 공무원이지, 연봉 높지, 그만하면 뭐, 얼굴도 잘생겼지."

    최창혁이 손을 들었다.

    "이의 있습니다."

    "기각합니다."

    "쳇."

    최창혁은 부글거리는 얼굴로 부잉을 했다.

    "그래. 그럼 뭐, '얼굴 괜찮지'로 수정할게. 근데 여하튼 그 정도면 나름 상급 아닌가? 정해민이랑 만난다고 해도 딱히 꿀릴 게 없는 것 같은데?"

    "…그래도 급이 있지."

    "되레 아이돌이 지혁이랑 어울리기에는 좀 급이 낮은 거 아냐? 걔들이야 한철이잖아."

    "한철 동안 남들 평생 벌 돈 벌잖아."

    "그래도 NDF 소속에 이제 20대인 남자만 할까."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NDF."

    최선미가 끝까지 인정하지 않자 민예정이 코웃음을 쳤다.

    "너는 그렇게 생각하지만, 정해민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인데? 지금 온다잖아."

    "안 와."

    "지혁이가 거짓말을 했다고?"

    "보나마나 좀 와달라고 해서 시간 내본다는 말을 알았다는 말로 들었을걸? 쟤 타입을 보니 말귀를 착착 알아먹을 것 같지는 않은데?"

    "으음……."

    이번에는 민예정이 한발 물러섰다.

    둘의 싸움을 보며 음료수를 홀짝대던 최창혁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왜 우리가 이런 걸로 말을 하고 있어야 하는 거지?"

    "그럼?"

    "지금 데리러 갔다고 했으니까 오든 안 오든 금방 결판날 거 아냐. 조금만 기다리면 되는데,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미리부터 이렇게 싸우냐?"

    "너 여자 친구 없지?"

    "…왜?"

    "알 것 같아서, 왜 없는지."

    "팩트 폭력 하지 마라!"

    최창혁이 발끈 해서 소리쳤다.

    "어차피 니들도 남자 친구 없잖아?"

    "니가 그걸 어떻게 알아? 뒷조사라도 했어?"

    "스토커."

    최창혁은 이런 순간에는 그냥 때리는 대로 맞는 것이 훨씬 낫다는 진리를 그 몸으로 실감했다.

    "그런데 왜 이리 늦지?"

    "지금 전화로 이야기하고 있다니까, 정해민이 시간이 안 난다고 하고 있겠지. 그래도 연락은 하는 사이 같으니까 남자들은 조금만 말 섞어줘도 자기한테 관심 있는 줄 아는 게 문제라니까."

    "팩트 폭력 하지 말라고!"

    욕은 이지혁이 먹고 있지만, 이상하게 자신이 기분이 나쁜 최창혁이었다.

    말을 듣고 있다 보니 저 속에 숨겨두었던 흑역사가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왜? 찔리냐?"

    "바늘 수준에서 끝내자, 쇠꼬챙이 들고 오지 말고.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잔인하냐?"

    최창혁은 최선미의 의견에 동조했다.

    이성적으로는 모르겠지만, 감성적으로는 최선미의 편을 들고 싶었다. 사촌이 땅을 사도 배가 아픈 법인데, 좋게 생각하지 않던 동창이 성공해서 잘나가는 연예인을 옆에 끼고 온다는데 그걸 축하해 줄 만큼 최창혁은 대인배가 아니었다.

    "모르는 거라니까."

    최선미와 최창혁은 민예정의 말을 깔끔하게 무시했다. 하지만 민예정에게도 지원군이 있었다.

    "아니, 내가 듣기로는 둘이 친하다고 했다니까."

    조지웅이 눈치도 없이 끼어들었다.

    "친하다고 이런 자리까지 같이 나오냐? 이런 데 따라올 정도면 친한 게 아니라 날 잡아야지."

    "넌 풍문으로 들었다면서 뭘 그리 확신하냐?"

    조지웅이 불만스러운 얼굴을 했지만, 여론은 이미 기울고 있었다.

    그때, 창밖으로 이지혁이 터덜터덜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어? 저기 지혁이 온다."

    "…혼자 오는데?"

    최선미가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거 봐."

    "야, 이건 모양 제대로 빠진다."

    얼핏 보이는 얼굴이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최선미의 말대로 된 모양이었다.

    최선미가 민예정을 돌아보며 코웃음을 쳤다.

    "뭣도 모르면서 아는 척하기는. 니가 그러니까 남친이 없지."

    "사돈 남 말 할래? 너는 성격 더러워서 없는 거잖아."

    "뭐?"

    최선미와 민예정이 눈에 불을 뿜는데, 그 순간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잠깐만!"

    "응?"

    "저, 저 뒤에 누가 온다. 따라오는데?"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 창밖으로 향했다.

    "어? 저, 저거?"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의 여자가 도도도 달려오더니, 이지혁의 소매를 붙잡았다.

    이지혁이 짜증을 부리며 소매를 당겼지만, 여자는 소매를 움켜잡은 채 놓아주지 않고 이지혁의 옆에서 나란히 걸었다.

    "정해민 맞는 거 같은데?"

    "키가 엄청 작다."

    "정해민 호빗이잖아."

    "…지, 진짠 거 같은데? 저 얼굴 작은 거 봐. 저건 일반인 얼굴이 아니야."

    최창혁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이게 뭔 개소리야?'

    정해민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지금 제일 잘나가는 아이돌인 정해민이었다. 그런 사람이 할 짓이 없다고 이지혁의 동창회 자리에 따라오겠는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 일이 지금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드, 들어오는데?"

    모두가 긴장된 얼굴로 문 쪽을 바라보았다.

    '아니겠지.'

    잘못 봤겠지.

    설사 제대로 봤더라도 아니어야지.

    문이 드르륵, 소리를 내며 열리더니, 얼굴에 짜증을 한껏 실은 이지혁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 뒤로…….

    '천산가?'

    배시시 웃는 얼굴을 한 정해민이 들어와 손을 흔들었다.

    "안녕하세요?"

    최창혁의 하늘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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