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73화 (73/118)
  • [■] 안 고쳐지면 고치면 그만이지! [■]

    ─────

    "무슨 건물에 창문이 없어! 이거 건축법 위반 아냐?"

    대한민국의 건축법을 다시 쓰는 이지혁이었다.

    "왜?"

    이예원이 묻자 이지혁이 귀를 가리켰다.

    "밖에 무슨 소리 안 들려?"

    "난 모르겠는데?"

    "됐다. 너랑 무슨 말을 하겠냐."

    "응. 할 말 없으면 그냥 기다려. 조금만 더 볼 테니까."

    "…대화를 해주시면 안 될까요?"

    "응. 안 돼."

    이예원이 샤랄랄라거리면서 옷가게로 뛰어가자 이지혁은 깊게 한숨을 내쉬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여기요."

    "예, 손님."

    "여기 창문 있는 데 없나요? 바깥 볼 수 있는 곳이요."

    "창문……. 아, 별관으로 가는 다리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별관?"

    "저쪽입니다."

    점원의 안내를 받아 별관으로 이어진 다리에 들어선 이지혁이 전면 유리로 되어 있는 다리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건물에는 창 하나 없는데, 다리는 전면 유리라니, 어느 놈이 디자인한 거지?"

    현대 건물이란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던 이지혁의 눈에 저 멀리 파란색의 게이트가 눈에 들어왔다.

    "오?"

    위이이이이잉!

    그와 동시에 방송이 나오기 시작했다.

    - 건물 내의 고객님들께 안내 말씀드립니다. 현재 백화점 전면에 게이트가 출현했습니다. 이 지역은 이 시간부로 B급 재난 지역으로 선포되었으니, 고객님들께서는 당황하지 마시고 점원들의 안내를 따라 침착하게 대피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알립니다.

    "오오?"

    이지혁이 놀라서 스피커를 바라보았다.

    "대피하라고?"

    지진이 나도, 건물이 무너져도 백화점에서는 손님들을 내보내지 않는 것 아니었나?

    정 급하면 자기들만 도망가는 건 줄 알았는데, 손님더러 대피하라니.

    "사장이 미쳤나 보네."

    이지혁이 낄낄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다리로 몰려든 인파 탓에 유리창으로 바짝 밀려난 이지혁이 짜증을 부리기 시작했다.

    "아오! 좀 밀지 마세요!"

    "대피하란 말 못 들었어요? 왜 길을 막고 있습니까!"

    "비켜봐요! 좀!"

    "끄응!"

    이지혁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인파를 역주행하기 시작했다. 엄마와 예원이가 보이지 않았다.

    "대체 어딨는 거야?"

    겨우 다리를 뚫고 나와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저 끝에 두 사람이 보였다.

    "엄마, 뭐해? 대피하라잖아."

    "급하게 서두른다고 뭐가 되니? 기다렸다가 사람들 좀 빠지면 가야지."

    "아……."

    이지혁의 천성이 어디서 나왔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은 장면이었다.

    "몬스터들 몰려오잖아!"

    "잘난 아들 뒀다가 어디 써? 이럴 때라도 덕 좀 봐야지."

    말은 맞는 말입니다만…….

    이지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게이트를 열었다.

    "자, 얼른 가. 집으로 가는 길이야."

    "어머? 이게 뭐니?"

    아, 엄마는 게이트 본 적이 없구나.

    이지혁이 피식 웃고는 어머니와 예원이의 손을 잡고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둘을 안전히 집으로 데려온 이지혁이 말했다.

    "그럼 나는 혹시 모르니까 가서 보고 올게."

    "네가?"

    "응. 왜?"

    "네가 자청해서 일을 한다고 하니 이상해서 그런다. 백화점이 많이 힘들었니?"

    ……어머니, 저 제정신입니다. 미친놈 보듯이 그렇게 보지 마세요.

    "아니, 사람들 다칠까 봐 그렇지."

    "아들내미가 사람 같은 말을 해서 참 좋기는 한데, 엄마가 좀 불안하구나. 이번 일 끝나면 집에서 좀 쉬렴."

    "……응."

    대체 그동안 자신이 행동을 어떻게 했기에 엄마가 저런 말을 하는지 절로 반성될 수밖에 없었다. 이지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흐음……."

    백화점 안은 이미 사람들이 다 대피한 이후였다.

    "불은 안 껐네?"

    "고객님!"

    혹시 몰라 백화점 안을 살피던 경비가 이지혁을 발견하고는 후다닥 뛰어왔다.

    "대피하셔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이지혁의 손과 주머니를 살피는 것을 잊지 않는 것을 보니, 직업 정신이 투철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안 훔쳤다고!

    하기야 삼풍이 무너졌을 때도 옷 주워 가던 게 한국 사람이니, 이런 경우에 물건을 노리고 숨는 사람이 없다고 할 수도 없었다.

    "네네, 지금 나갈게요. 1층 열려 있죠?"

    "지상은 폐쇄되었습니다. 지하로 가셔야 합니다. 지하상가 쪽으로 가시면 바깥쪽으로 빠져나가는 길이 확보되어 있습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벙커로 가셔야 합니다."

    "그래요? 그럼 차는?"

    "차량은 지금 타고 나가실 수 없습니다."

    "호오."

    나름 체계적이었다. 하기야 차보다야 목숨이 중요하지. 물론 안 그런 사람도 있겠지만.

    지금 지하 5층까지 가득 찬 차들이 일거에 빠져나가려고 한다면 제대로 대피하기도 전에 게이트가 열려 버릴 것이다.

    "1층 문 좀 열어주세요."

    "고객님, 지금 통제 상황입니다."

    "아, 알아요. 아는데……."

    이지혁이 씨익 웃었다.

    "저 능력자거든요. 일하러 가야죠."

    * * *

    "상황은?"

    "곧 열립니다."

    박수환 대령은 눈앞에 보이는 불그스름한 게이트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게이트 발견된 지 얼마나 됐다고 진행 상황이 저래?"

    "요즘 게이트 변환 속도가 몇 달 전하고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빨라졌습니다."

    "이러다가 나중에는 게이트 생기자마자 몬스터 튀어나오는 것 아닌지 모르겠군."

    그랬다가는 난리가 날 것이다.

    지금 사회가 유지되고 있는 것은 게이트에 대비할 시간이 있기 때문이다. 게이트가 생기고 나서 주변에 진을 치고 사람들을 대피시킬 수 있기에 최소한의 피해로 게이트를 막아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게이트가 바로 열린다면 더 이상 그런 과정이 불가능하다.

    건물 안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정문에서 게이트가 열리더니, 당장 몬스터들이 튀어나온다?

    그럼 그걸로 끝이다. 달아날 수도 없고, 대항할 수도 없다. 먼 곳에 있는 능력자들이 최대한 빠르게 달려오기를 기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세상이 어찌 되려고……."

    박수환은 깊이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나중에 해도 된다. 지금은 눈앞에 있는 일을 먼저 해결해야 한다.

    "준비는?"

    "대충 끝났습니다."

    "대충이 뭐야, 이 새끼야! 니 목숨 걸려도 대충 문제없다고 할래? 제대로 확인하고 주변에 아직 대피하지 못한 사람 없는지 확인하란 말이야!"

    "예, 죄송합니다."

    "그리고… 어? 저거 뭐야?"

    박수환 대령이 지휘부를 꾸리고 있는 3층 건물 옥상 바로 옆 백화점 건물의 1층 문이 열리더니, 그 안에서 트레이닝복을 입은 젊은 놈 하나가 어슬렁어슬렁 기어 나왔다.

    "하……."

    젊은 놈이 바깥으로 나와 깊게 숨을 들이켜더니, 담배를 꺼내 입에 문다.

    "저, 저……."

    박수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확인하라고 했지?"

    "……폐쇄 명령 내렸는데 말입니다."

    "니 대가리를 폐쇄해 버리기 전에 일처리 똑바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잘하겠습니다."

    아래를 지키고 있던 군인들이 우르르 달려가 젊은이를 둘러싸 건물 쪽을 가리켰다. 이곳은 위험하니 지하도로 대피하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애들은 빠릿빠릿하구만. 요즘 새끼들은 정신이 다들 나갔나? 몬스터 나온다는데 밖으로 나와서 뭐하는 거야? 여하튼 정신머리가 빠졌어."

    그런데 곧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군인들과 젊은 놈이 뭔가 수군수군하더니 군인들이 몸을 돌려 박수환 쪽을 손으로 가리켰다.

    "……응?"

    저것들이 미쳤나?

    민간인한테 지휘부를 가르쳐 주면 어떡하라는 거지?

    "쟤들 왜 저래?"

    "그러게 말입니다."

    그때, 젊은 놈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박수환이 있는 건물 쪽으로 다가왔다.

    "응?"

    1층으로 젊은 놈이 들어서는 모습을 보고 박수환이 얼굴을 감쌌다.

    "뭔 일이야? 이게 뭔 일이냐고?"

    그래도 정신이 있으면 1층에서 저지되겠지 하는 생각은 그저 박수환의 희망으로 끝나고 말았다.

    끼익.

    옥상 문이 열리더니, 젊은 놈이 능글맞은 얼굴로 나와 박수환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안녕하세요."

    박수환은 이제 체념한 얼굴로 부관을 향해 말했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내가 좀 들을 수 있을까? 응?"

    "저도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미친놈 하나가 미친 짓을 할 수야 있겠지만, 그의 부하들이 단체로 다들 미치지 않고서야 저 인간이 어떻게 여기까지 아무런 제지 없이 올라온단 말인가.

    "누구십니까?"

    부관이 묻자 젊은 놈이 주위를 둘러보고는 말했다.

    "KSF는 아직 안 왔데요?"

    "KSF?"

    아!

    부관은 그제야 상황을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비번이었던 능력자 하나가 쇼핑을 하다가 상황을 보고 합류한 것 같았다.

    "너 KSF 소속이야?"

    "예."

    "이 새끼가……."

    부관이 이를 갈았다.

    아무리 능력자라고는 하나 여기는 지휘소다.

    아무리 능력자들이 KSF 소속이 되는 순간 하사에 준하는 지위를 인정받는다고는 하나, 감히 방위사의 지휘소를 제 맘대로 들락거릴 수는 없는 것이다.

    "너 소속이 어디야? 이 새끼야, 너 상관이 누구냐고?"

    "……상관은 없는데요?"

    "뭐? 상관이 없어? 너 소속이 어딘데?"

    "NDF요. 정확하게 말하면 객원인데요."

    "NDF 객원?"

    이게 무슨 말이지?

    NDF면 NDF지, NDF 객원은 또 무슨 소린가.

    그때, 박수환이 부관의 어깨를 꽉 움켜잡았다.

    "야……."

    "예?"

    "쟤 이름이 뭔지 물어봐바."

    "이름 말입니까?"

    "얼른 물어봐 봐. 내가 지금 걸리는 게 있어서 그래."

    부관이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박수환을 한 번 바라보고는 젊은 놈에게 물었다.

    "너 이름이 뭐야?"

    "이지혁인데요."

    "이지혁?"

    "예."

    "……."

    그러니까, 이지혁이면… 그러니까…….

    "어, 음, '그' 이지혁?"

    "제가 이지혁인 건 맞아요."

    박수환의 손이 살살 떨리기 시작했다. 그가 아는 NDF 소속의 이지혁은 단 한 사람밖에 없다.

    방위사 전체에 절대 상대 금지. 발견 시 정인수 소장에게 직통으로 보고하게 되어 있는 1급 위험인물.

    '저, 저 새끼가 왜 여기에?'

    이게 NDF까지 출동할 일이었나?

    물론 능력자들의 지원을 받기는 해야겠지만, 레벨 4게이트 정도에 이지혁이 온다는 것 자체가 화단 정리하는 데 포크레인이 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진짜 이지혁 씨십니까?"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이지혁인 건 맞다니까요. 그런데 KSF 애들 아직 안 왔어요?"

    "지금 출동 중입니다."

    "에? 방위사는 이미 진을 다 치고 있는데 아직 도착도 안 했다구요?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흔한 일입니다."

    "그게 왜 흔해요? 걔들이 움직이면 더 빨리 움직일 수 있을 건데. 장비도 없이 맨몸으로 오는 애들이 왜 더 늦게 오는 건데요?"

    "제 말이요!"

    박수환이 울분을 토해냈다.

    "이 새끼들이 좀 빨리 출동을 해줬으면 희생 없이 끝낼 수 있던 작전이 한둘이 아닙니다. 그런데 매번 이렇게 미적대며 출동하니까 쓸데없는 희생이 늘어나는 것 아닙니까. 생떼 같은 애들이 의미도 없이 죽어 나가고 있단 말입니다."

    이지혁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래요?"

    "네. 이걸 어떻게 해야 하는데, 방위사 차원에서 항의를 하고는 있는데도 고쳐지지 않습니다."

    "안 고쳐진다고?"

    이지혁이 볼을 부풀리더니 전화를 꺼냈다.

    "안 고쳐지면 고치면 그만이지!"

    * * *

    신임 KSF 원장인 조중구는 요즘 생각보다 한가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KSF라는 중책을 맡은 만큼 바쁠 것이라는 것은 예상을 했지만, 의외로 KSF의 원장은 할 일이 별로 없는 자리였다.

    그가 하는 일이라고는 위에서 예산을 타내 요원들을 지원해 주는 것과 지부에 연락을 해서 일을 처리하게 만드는 것뿐이었다. 가끔 업무가 서로 섞일 때, 타 부서에 협조를 구하는 게 그가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이거, 명예는 있고 할 일은 없는 자리인데.'

    보통 이런 자리를 땡보라고 한다.

    "…진짜 땡보였으면 좋겠는데."

    다른 사람이 보면 땡보일지 모르겠지만, 조중구가 느끼기에는 이 자리는 정말 스트레스가 심한 자리였다.

    좋게 말하면 할 일이 없는 자리고, 나쁘게 말하면 24시간 비상대기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게이트는 낮밤을 가리지 않고 열린다. 물론 게이트 처리에 그가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이지혁 씨는 낮밤이 없지."

    실제로 그가 이 임무를 맡을 때 당부 받은 말은 단 하나였다.

    "심각한 일은 대부분 최정훈 씨가 알아서 하겠지만… 잊지 말게. 자네가 그 자리에 앉은 이유는 이지혁 씨를 관리하기 위해네. 아니! 지금 내 말은 잊게. 그런 생각은 버리고 이지혁 씨를 보필한다고 생각하게. KSF의 전 대원보다 이지혁 씨 하나가 더 중요하니까. 무슨 말인지 알겠나? 내 말 명심하게."

    "무슨 말인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말을 그에게 한 사람은 그의 멘토나 다름없는 송정수 총재였다. 세상 누구보다 존경하는 송정수가 맡긴 임무이니만큼 최선을 다해야 했다.

    다만, 문제는 대체 최선을 다해서 뭘 해야 하는지를 모르겠다는 점이었다.

    처음에는 의욕적으로 나섰다. 이지혁의 취향과 모든 것을 조사하고, 동선을 파악하며 그가 즐길거리를 찾았다.

    긴 시간에 걸쳐 그 모든 것을 파악한 조중구가 내린 결론은 단 하나였다.

    "이 사람은 건드리면 안 되는 사람이란 말이지."

    의욕도 없고, 소유욕도 없고, 권력욕도 없다.

    좋게 말하면 초식남이고, 나쁘게 말하면 동네 한량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힘이 주어진 판이니 뭐가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었다.

    차라리 이지혁이 권력욕이 강해서 뭔가를 해내야겠다는 생각이 강한 사람이었다면 어떻게든 보필하기가 수월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지혁의 가장 큰 장점이자 단점이 욕구가 딱히 없다는 것이었다.

    '요즘 애들은 이해를 못하겠어.'

    조중구에게 그만한 힘이 있다면 이미 나라를 집어삼켰을 것이다. 그런데 그만한 힘을 가지고도 매일 게임이나 하고 띵까띵까하며 놀고 있는 꼴을 보니 속이 뒤집어진다.

    그리고 건드렸을 때, 예상되는 결과도 너무 심각했다.

    '벌집이야.'

    관리와 보필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최대한 주변에 거슬리는 것을 제거하는 동시에 요청이 있을 때마다 최대한 빠르게 해결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하지만!

    "왜 거주구 밖으로 나가지를 않느냐고!"

    일을 안 만들어줘서 고맙긴 한데, 이건 너무 잉여롭지 않은가.

    바로 그때, 조중구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조중구는 인상을 쓰고는 휴대폰을 잡았다. 업무 관련 전화는 모두 내선으로 걸려오니 휴대폰으로 올 전화는 사적인 전화밖에 없었다.

    마누라가 이 시간에 전화를 할 리는 없으니, 보나마나 친분을 이용하여 뭔가를 부탁하려는 전화일 것이다.

    '에이.'

    조중구가 짜증을 확 내며 전화를 들었다. 하지만 전화기에 찍힌 이름을 본 그는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헐……."

    이지혁이라는 세 글자가 당당하게 그의 휴대폰 액정을 장식하고 있었다.

    "뭐, 뭐야?"

    조중구가 눈을 떨기 시작했다.

    "이, 이 양반이 나한테 전화를 왜?"

    물론 저번에 명함을 주기는 했다. 하지만 정말로 전화가 올 거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혹시 그날이 올 수 있다는 생각은 했지만, 그게 오늘은 아니었다.

    조중구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조심스레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이지혁 씨?"

    - 전데요.

    "예! 예! 말씀하십시오."

    - 제가 지금 백화점 앞이거든요?

    그런데? 어쩌라고?

    마음속에서 튀어 나오려는 말과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을 분리하는 것은 훌륭한 정치인을 꿈꾸고 있는 그가 당연히 사용해야 할 스킬입니다.

    "쇼핑하러 가셨나요?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 게이트가 열렸어요.

    조중구의 눈이 모니터로 돌아갔다. 화면 구석에 있는 게이트 현황 지도를 펼친 조중구가 이지혁이 사는 곳에서 가장 가까운 게이트를 찾았다.

    확대를 해보니 분명 백화점이 있었다.

    "아, 네. 지금 확인했습니다. 게이트에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 게이트가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문제예요. 지금 게이트가 열린 지 한참 됐는데 KSF가 출동을 안 해요.

    "아, 그런 문제가 있었군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지금 연락을 해서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조중구는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처럼 이상한 말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전화를 했나 싶어 가슴 졸였는데, 이 정도면 꽤나 정상적이지 않은가.

    하지만 그의 안심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으신 것 같은데요.

    "네?"

    - 지금 게이트가 열리려고 하는데, 능력자들이 안 온다구요.

    "아… 급박한 상황이군요. 지금 바로 출동시키겠습니다."

    - 아오, 진짜!

    이지혁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조중구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이 미친놈이 갑자기 또 왜 지랄인가.

    - 지금 여기 방위사는 벌써 와서 설치할 거 다 설치하고 준비 다 하고 있는데, KSF는 뭐한다고 아직 안 오냐구요!

    "……."

    - 예산이 부족해서 차를 못 타요?

    "아닙니다."

    - 그럼 걔들은 다 무슨 군장 차고 뛰나? 천리행군으로 목적지까지 도착하는 거예요?

    "아니죠."

    당연히 아니겠지. 능력자가 군장이 왜 필요한가.

    - 그렇죠?

    "그럼요."

    - 그럼 왜 안 오는데요?

    "……."

    니가 그렇게 말을 하면 내가 할 말이 없지.

    조중구가 어버버하고 있자 이지혁의 언성이 높아졌다.

    - 내가 그만큼 일처리를 많이 해줬는데, 이런 거 하나 똑바로 못하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사실 니가 요즘에 하는 것 중에 KSF에 도움이 되는 건 딱히 없잖아.

    말을 하고 싶은 심정은 굴뚝같지만, 그걸 말로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지혁 씨, 그게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일단은 시간을 벌 수밖에.

    - 그래요?

    "저희도 나름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 최선을 다했는데도 해결이 안 된다는 건 결과적으로 능력밖이라는 뜻이잖아요.

    "그렇다고 할 수 있죠."

    - 알겠어요.

    순간, 조중구의 촉이 발동했다.

    이거, 이대로 끊으면 뭔가 거대한 것이 터질 것 같았다. 행정가로서, 그리고 정치인으로서 살아갈 때는 이러한 촉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자, 잠시만요, 이지혁 씨!"

    - 네?

    "전화 끊고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 어쩌다뇨?

    "혹시 다른 데다 전화를 하신다거나?

    - 에이, 뭘 그래요, 번거롭게.

    "아……."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놈은 미친놈이기는 하지만 행동력이 없다는 부분은 간과한 것 같았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이 그의 속을 뒤집어놨다.

    - 뭐하러 전화해요, 입 아프게. 게이트 열고 가면 그만이지.

    "어, 어디로 가신다구요?"

    - 책임자가 있는 곳이죠.

    "제가 책임잔데, 책임자라니요."

    - 능력밖이신데 쪼아서야 되나요. 제일 능력 있는 사람을 찾아가는 수밖에 없죠. 제가 생각하기에는 그러면 해결이 될 것 같아서요.

    설마?

    아니겠지?

    "찾아가려는 분이 혹시?"

    - 청와대에 가면 민원 들어주고 그런다던데?

    "야! 이 미친!"

    - 네?

    "아, 아닙니다."

    조중구는 전화기를 내려놓고 심호흡을 했다. 여기서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는 그의 정치생명이 끝나는 정도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분노한 송정수가 그를 죽이겠다고 달려올 수도 있다.

    "지, 지금 당장 해결하겠습니다. 5분 내로 KSF가 도착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 이번만 어떻게 해서 될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이번만이 아닙니다! 당장 시스템을 뜯어고쳐 문제를 싸그리 해결해 버리겠습니다. 저를 믿어주십시오."

    - 흐음, 그럼 뭐… 한 번 지켜볼게요.

    "감사합니다."

    - 네. 그럼.

    전화가 끊기자 조중구는 전화기를 한동안 노려보다가 바깥으로 외쳤다.

    "지금 이지혁이 있는 곳으로 충동해야 할 지부가 어딘지 알아내서 전화 걸어! 당장!"

    "어디로 겁니까? 지부로? 아니면 지부장에게로 겁니까?"

    "당연히 지부장이지! 지금 그걸 몰라서 물어?"

    당장에라도 재떨이를 날리며 대공분실로 끌고 들어갈 듯한 패기에 비서가 몸을 떨었다.

    "여, 연결되었습니다."

    내선 전화를 힘차게 들어 올린 조중구가 다짜고짜 전화기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야! 이! 반동 노무 새끼야!"

    "낄낄낄낄."

    이지혁이 전화하는 것을 옆에서 들은 박수환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말았다.

    듣는 입장에서 솔직히 거들먹거리는 KSF에게 한 방 먹여줬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기도 하지만, 그가 저런 전화를 받았다면 어떤 심정일까를 생각하니 상대방을 애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됐을 거예요."

    "가, 감사합니다."

    "뭘요. 같이 사는 건데요. 정인수 대령님은 요즘 잘 지내시죠? 아저씨 살 빠졌던데."

    "소장으로 진급하셨습니다. 살은… 요즘 살은 다시 불어서 괜찮으신데……."

    "그런데요?"

    "탈모가……."

    이지혁이 눈가를 훔쳤다.

    아이고, 그 양반. 어쩐지 여기저기 열심히 뛰어다닌다 싶더니…….

    "나중에 한 번 찾아가야겠네요."

    "위로라도 해주시세요?"

    "아뇨. 털 좀 자라게 해주려구요."

    "……네?"

    이지혁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저한테 털 자라게 하는 방법이 있거든요."

    그래서 베라프 귀족 중에는 대머리가 없지. 스킨헤드는 있어도.

    "저, 정말입니까?"

    "네. 왜요?"

    박수환의 눈이 떨렸다.

    인류의 가장 오랜 숙제인 탈모를 해결할 방법이 여기 있었다. 게이트가 열리는 상황과 탈모 해결책을 찾은 상황 중 어느 것이 더 중한지 혼란스러울 만큼 말이다.

    "시간이 되시면 저도 좀……."

    "네? 풍성해 보이시는데?"

    "가발입니다."

    박수환이 모자와 가발을 벗어 보여주자 이지혁이 눈을 찌푸렸다.

    "훌륭한 민두노총이시네요."

    "……정회원입니다."

    "네. 뭐, 그건 나중에 하기로 하고… 이제 슬슬 게이트가 열릴 시간도 됐고, 약속한 5분도 된 것 같은……."

    말을 하기가 무섭게 저쪽 도로에서 미친 듯이 질주하는 버스가 보이기 시작했다. 얼마나 밟아대고 있는지 아스팔트에서 흙먼지가 일 정도였다.

    "오!"

    이지혁이 그 광경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세상은 쪼면 다 되기 마련이었다.

    안 되는 게 어딨나! 대한민국에서.

    하청 직원들이 들었으면 당장 돌을 던질 생각을 한 이지혁이 폭주하듯 달려오는 버스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어우, 저 인간!"

    버스 안에서 그 광경을 본 KSF 강동 지부 지부장이 입에서 쌍욕을 내뱉었다.

    "귀신은 뭐하나, 저 인간 안 잡아가고!"

    "……그러게나 말입니다."

    * * *

    KSF 강동 지부장 우명식은 바득바득 이를 갈며 건물 위를 바라보았다.

    "저 화상."

    방금 전 원장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생각하면 이가 갈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제시간에 도착 못하면 껍데기를 벗겨 버리겠다니. 지금이 뭐 5공화국도 아니고, 그게 KSF 원장이라는 사람의 입에서 나올 말인가.

    저번에 처음 봤을 때는 점잖아 보이던 사람인데, 어디서 이런 패기를 숨기고 있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아니, 모를 일은 아니지.'

    원인이 저기 있는데.

    한 단어가 끝날 때마다 반복되는 이지혁, 이지혁, 이지혁.

    그저 전화를 한 통 받았을 뿐인데 이지혁이라는 단어로 귀에 못이 박힌 듯한 기분이 든다.

    "아니, 지가 우리한테 왜 상관인데!"

    NDF 일로 공사다망하실 텐데 어찌나 오지랖이 넓으신지, KSF의 출동 시간까지 걱정을 해주시고 있지 않은가.

    너무 감사해서 절로 이가 갈릴 지경이었다.

    "시간 아직 한참 남았구만!"

    "지부장님! 게이트 열리는 것 같은데요?"

    "야! 씨! 너는 뭔 타이밍이!"

    "네?"

    "아냐, 인마!"

    우명식이 끓는 속을 달래며 게이트를 바라보았다. 푸른빛이 거의 남지 않은 게이트를 보니 열리는 것도 순식간일 것이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원래대로 출발했으면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게이트가 열렸을 것이다.

    "야야! 빨리 차 세우고 애들 배치시켜! 빨리!"

    "예, 알겠습니다."

    끼이이이익!

    버스가 날카로운 브레이크 소음과 함께 멈춰 섰다. 기우뚱하고 기울었던 버스가 제자리를 찾자 문이 열리더니 요원들이 우르르 뛰어내렸다.

    우명식은 요원들이 배치되는 모습을 보고는 밖으로 나와 건물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늦으셨습니다."

    박수환의 뚱한 목소리에 우명식이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입을 열었다.

    "뭐, 제시간에 도착한 거죠. 게이트는 아직 안 열리지 않았습니까."

    "그나마 다행이네요. 조금만 더 늦었으면 아주 좋은 꼴 보셨을 텐데 말입니다."

    "그러게요. 아쉽네요."

    "뭐요?"

    박수환과 우명식이 서로를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최정훈과 서아영이 빠져나간 뒤에도 견원지간 같은 방위사와 KSF의 사이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아니, 어찌 보면 좀 더 나빠진 것 같기도 했다.

    적어도 최정훈이 있던 때는 이렇게 대놓고 서로를 향해 이를 드러내 보이지는 않았으니까.

    "…이기는 편 우리 편."

    "크흠!"

    "크흐흠!"

    이지혁의 앞에서 추태를 보였다고 생각한 것인지, 헛기침을 뱉은 둘이 이지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반갑습니다, 이지혁 씨."

    "누구세요?"

    "저는 강동 지부장 우명식입니다."

    "아, 그러세요? 그런데……."

    이지혁이 뚱한 얼굴로 말을 덧붙였다.

    "요즘 강동 지부는 일이 엄청 많은가 봐요? 엄청 늦게 오시네?"

    "…일이 조금 있습니다."

    "인원이 부족하면 다른 데다 지원을 요청해서 보충을 받으시면 될 텐데. 매번 이런 식으로 늦는다고 하시는데,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우명식이 가만히 박수환을 노려보았다.

    저놈이 꼰지른 게 아니고서야 매사에 관심이 없는 것으로 유명한 이지혁이 이런 사실을 알고 있을 리 없었다.

    "전체적으로 인원 부족이라……."

    "인원이 부족하다니? 요즘 NDF가 죽어라고 파견을 가고 있는 것 같던데, 그래도 인원이 부족해요?"

    순간, 우명식의 입이 아교라도 칠한 듯이 달라붙었다.

    사실 뭐 그리 부족한 것은 아니었다. 조금 일찍 움직이려 하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방위사가 완전히 진형을 짜고 나서 현장에 도착하는 게 더 움직이기 편한 면이 있기에 지금까지 암묵적으로 조금 늦게 도착하고 있었다.

    '이제 와서 그게 조금 더 늦어지고 있기는 하지만.'

    사람은 관성이라는 게 있어서 늦다 보면 조금씩 더 늦어지기 마련이다.

    보통 그렇게 해서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에는 조율을 해주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지만, 방위사는 국방부의 소속이고 KSF는 청와대의 직속이기에 방위사 측의 불만이 KSF나 청와대로 직접적으로 전달되지는 않고 있었다.

    "에, 그게……."

    이지혁의 눈썹이 살짝 치켜져 올라갔다.

    "알겠어요."

    "네?"

    "인원이 부족하다는 건 잘 알겠다구요. 그런데 인원이 부족해서 제시간이 출동을 못했다는 건 이전에도 출동이 있었다는 말 아닌가요? 마지막으로 출동한 시간이 언제예요?"

    "……."

    이지혁의 말에 우명식이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아저씨."

    "예, 이지혁 씨."

    "아니면 제가 인원 필요 없게 만들어 드려요? 딱 일주일이면 제가 이 정도 게이트는 혼자서도 씹어 먹게 만들어 드릴 수 있는데? 그럼 인원이 부족하다는 소리는 안 나오겠죠?"

    우명식의 등 뒤로 땀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이지혁이 평범한 KSF 요원을 지옥으로 밀어 넣어 NDF급으로 만들어냈다는 일은 아주 유명한 일화였다.

    어찌 보면 인생 역전이나 다름없는 좋은 일이다. 능력자들은 그만큼이나 능력을 키우는 것이 어려웠으니까. 자연적인 성장 이상을 바랄 수 없는 것이 능력잔데, 이지혁은 단숨에 다른 능력자들의 랭크를 바꿔 버린 것이다.

    하지만 지금 KSF에서 그것을 원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암암리에 이지혁에게 수련을 받은 NDF들이 무슨 꼴을 당했는지 소문이 퍼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게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하나였다.

    '그럼 NDF로 승격될 거 아냐.'

    그동안 NDF가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지는 아주 유명했다.

    온 동네, 아니, 전 세계에 일이 터졌다고 하면 제일 먼저 불려가서 갈려 나가는 것이 NDF였다.

    반쯤 세뇌라도 됐는지 크게 불만이 터져 나오고 있지는 않지만, 분명 NFD가 하는 일들을 보고 있으면 목숨이 열 개라도 부족했다.

    그러니 누가 NDF로 승격하려고 하겠는가.

    가끔씩 NDF의 요원이 부족하다고 해서 심사를 한다고 하면 병가를 내거나 앓아눕는 이들이 대부분이고, 추천을 하겠다고 하면 집까지 찾아와서 울고불고 난리를 피워 대기가 일쑤였다.

    "앞으로는 꼭 정시에 도착하겠습니다."

    "흐음."

    이지혁은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제가 원래 잔소리하는 걸 별로 안 좋아하는데……."

    '좋아한다는 말이군.'

    저 말은 반대로 해석하면 된다.

    "그런데 지부장님."

    "예."

    "늦게 도착하면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는 것 알고 계시잖아요."

    "민간인 대피는 철저하게 하고 있습니다."

    "군인은요?"

    "네?"

    "군인은 사람 아니에요? 그건 뭐 모래로 만들었나?"

    "……."

    "내가 조금 편하겠다고 사람이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을 방치한다는 건 이해가 잘 안 가는데요. 아닌가요?"

    "그 말이 맞습니다."

    우명식의 얼굴이 더없이 딱딱하게 굳었다.

    초등학생도 알 수 있는 일이건만, 왜 딱히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문제였다.

    이지혁은 가만히 우명식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분화되고 있군.'

    시기가 그리 오래 지나지도 않았는데 능력자들의 의식 사이에서 인간에 대한 개념이 바뀌고 있었다. 그들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말이다.

    이상한 일은 아니다.

    베라프도 그랬으니까.

    마법과 신성력을 가진 이들은 그들이 우월한 인종이라 믿었고, 능력이 없는 일반인들을 노예나 가축처럼 부렸다.

    조금이라도 힘이 있다면 특권 의식을 가지게 되는 게 사람이다.

    아무런 능력의 차이가 없는 인간들도 돈과 권력으로 계급을 나누는데, 선천적인 능력으로 구분이 되기 시작하면 얼마나 심한 간극이 생기겠는가.

    그 부분에 대한 대책은 지금 누구도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되레 이용하려는 세력이 있을 뿐.

    '알파.'

    이지혁의 머릿속에 알파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지금 그에게 알파는 손가락 하나로 죽여 버릴 수 있는 피라미에 불과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신경이 쓰이는 걸까?

    '그런 놈들은 언제나 큰일을 벌였지.'

    그의 오랜 삶에서 얻어진 경험에 의하면, 알파 같은 존재는 반드시 사건을 일으켰다.

    그래서 이렇게 신경이 쓰이는지도 모른다.

    이지혁은 고개를 젓고 말았다.

    알파가 뭔가를 꾸민다면 죽여 버리면 그만이다. 이지혁에게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독심과 힘이 있었다.

    '여하튼 말을 해두긴 해야겠어.'

    강동 지부만 이렇다는 보장은 없었다.

    최정훈 같은 일반인과 함께 섞여 활동하는 NDF는 그나마 나은 편이다. 그럼에도 NDF 역시 얼마 전에 분열의 조짐을 보이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다른 지부도 강동 지부와 크게 다르지 않은 의식의 변화를 겪고 있다고 봐야 했다.

    "게이트 열립니다."

    이지혁의 생각이 거기서 멈췄다.

    대비도 좋지만, 지금은 일단 눈앞의 일을 먼저 해결해야 한다.

    "전 대원 위치 사수! 몬스터 출현과 동시에 격발한다."

    박수환이 명령을 내리자 싸늘한 긴장감이 등줄기를 타고 돌기 시작했다.

    '너무 잊어버렸나?'

    일반적인 게이트 작전에 참가 안 한 지가 꽤 되어서인지 이상하게 향수가 느껴진다.

    그리 재미있는 광경도 아닌데 말이다.

    곧 게이트가 일그러지더니, 그 안에서 시커먼 몬스터들이 밖으로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발사!"

    투투투투투투!

    개인화기와 지원화기가 동시에 불을 뿜는다. 어떤 것이 나오든 관계없다. 어차피 몬스터니까.

    "오, 펠드릭이네."

    마(馬)형의 몬스터였다.

    이쪽 세계에서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페가수스쯤 될까? 날개가 달리지는 않았지만, 날개가 달린 것 이상으로 기동력이 좋아서 가끔 오크 같은 지능이 있는 종족들이 잡아서 길들이기도 하는 몬스터였다.

    "에? 저건 이즈카?"

    이지혁이 펠드릭의 뒤로 뛰쳐나오는 뱀의 형상을 한 거대한 몬스터를 보고 피식 웃었다.

    오랜만에 보니 반가운 느낌이었다.

    "폴트와 에카……."

    이지혁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눈에 익다.

    게이트에서 나오는 것들이 다들 눈에 익다.

    몬스터이니 눈에 익는 것이 당연하다고?

    그럴 리가 있나!

    지금까지 게이트에서는 이지혁이 알고 있는 몬스터의 출현 빈도가 3할을 넘지 않았다.

    베라프에서 본 몬스터들과 비슷한 놈들이 출현하기는 했지만, 미묘하게 느낌이 달랐다.

    하지만 지금 이지혁의 눈에 보이고 있는 것들은 하나같이 모두 잘 아는 몬스터들이었다.

    "메이드 인 베라프인가."

    이지혁의 목소리가 딱딱하게 굳었다.

    이것이 우연이라면 별 상관이 없겠지만, 만약 우연이 아니라면 게이트에서 뭔가가 벌어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확인해야겠어."

    이지혁이 굳은 얼굴을 하며 난간 위로 올라섰다.

    "이, 이지혁 씨?"

    우우우웅!

    그 순간, 이지혁의 우수에 검은 마나가 뭉치더니,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으응?"

    그리고 곧 그 검은 마나는 거대한 낙뢰를 만들어내며 바닥으로 내려쳤다.

    콰아아앙!

    콰아아앙!

    단 두 번에 낙뢰만으로 게이트에서 나오던 몬스터들이 싸그리 숯이 되어버렸다.

    "세상에……."

    박수환이 그 광경을 보고는 입을 쩌억 벌렸다. 말로만 듣던 이지혁의 힘은 그가 생각했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강했다.

    거기에다 범위 설정도 완벽하지 않은가.

    게이트를 둘러싸고 있던 군인들은 단 한명도 피해를 입지 않았다.

    "저는 먼저 가요!"

    이지혁이 그렇게 말을 하더니 검은 게이트를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가자,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하던 우명식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이럴 거면 왜 불렀는데?"

    이 미친놈아.

    * * *

    우우웅.

    갑자기 게이트가 열리자 최정훈이 조금은 떨떠름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이 양반은 이제는 제 문 열 듯이 게이트를 열고 다니는구만.

    "아이고."

    이지혁이 게이트에서 나오며 허리를 두드렸다.

    "그거 마나 좀 썼다고 몸이 욱신하는 거 보면, 나도 이제 다 됐네."

    "…나이도 있으신데, 몸 좀 챙기셔야죠. 보약이라도 한 재 해드립니까?"

    "됐어요. 최정훈 씨가 뭔 돈이 있다고."

    "……."

    결혼 정보 회사에서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은 이 시대의 능력남 최정훈이 일순 가난한 월급쟁이로 화하는 순간이었다.

    '나도 돈 있거든?'

    너만큼은 아니지만.

    물론 이지혁의 통장에 쌓여 있는 금액을 생각하면 어디서 돈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겠지만, 최정훈도 또래에서는 나름 성공한 축에 속했다.

    물론 애초부터 금수저 물고 태어나서 떵떵거리고 사는 인종들에 비한다면 불우이웃인 것도 맞지만.

    여하튼!

    "무슨 일이십니까?"

    "사무실도 못 와요?"

    "…오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뜬금없이 나타나셔서……."

    "흐응?"

    이지혁이 똥한 눈으로 바라보자 최정훈이 어색하게 머리를 긁었다.

    "사실 지금 한창 긴장된 분위기인데다가……."

    최정훈이 가까이 다가와 이지혁의 어깨에 손을 두르고는 밖으로 슬금슬금 끌고 나왔다.

    "사실 지금 분위기가 그리 좋지가 않습니다."

    "뭐 그리 대단한 거 한다고."

    "전쟁이라니까요."

    "그러니까, 뭐 그리 대단한 거 한다고."

    "……."

    최정훈은 이지혁을 빤히 보며 '그런 너는 언제 전쟁해 봤냐'라는 말을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해봤겠지.'

    생각해 보면 저쪽 동네야 중세 시대라니까 전쟁이야 일상이나 다름없는 일 아니었을까?

    일이 년 살다 온 것도 아니고, 거기서 천 년씩이나 살았는데.

    그게 아니더라도 심심하면 몬스터와 싸우던 이지혁이니, 전투에 대한 거부감이 없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거보다 이지혁 씨가 있으면 안 된다는 게 더 큽니다."

    "왜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NDF에 소속되어 있는 이들은 다들 이지혁 씨에게 의존을 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도 자꾸 이지혁 씨가 눈에 띄게 되면 혹시나 말은 저렇게 해도 같이 가주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될 겁니다."

    "제가 왜요?"

    "그러니까요."

    최정훈이 싱긋 웃었다.

    "그러니 괜히 눈에 띄지 않는 게 좋습니다. 그래서 사무실 비워도 제가 아무 말씀 드리지 않은 것 아니겠습니까. 출근 안 하셔도 됩니다."

    "네, 뭐……."

    이지혁이 머리를 긁었다.

    출근하라고 닦달을 받은 적은 많지만, 하지 말라는 말을 들은 건 처음이라서 그런지 기분이 이상했다.

    "근데 그런 것 때문에 온 건 아니구요."

    "네."

    "좀 알아보고 싶은 게 있는데… 바쁘신 건 알겠지만, 이게 좀 찝찝한 문제라서……."

    "흐음?"

    최정훈이 무거운 얼굴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이지혁이 찝찝하다고 한 일은 하나같이 큰일로 발전했다. 그러니 그냥 넘길 일은 아니었다.

    "말씀하시죠."

    "최근 게이트에서 나오고 있는 몬스터들에 대한 정보가 필요해요."

    "몬스터요?"

    최정훈이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이지혁은 굳이 그 이유를 설명해 주지는 않았다. 아직 확실하지도 않은 일로 괜히 걱정거리를 만들 필요는 없으니까.

    자신이 느끼는 것도 그저 찝찝함일 뿐, 만약 그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해서 이 지구에 얼마나 큰 파장을 일으킬지는 아직 미지수였으니까.

    "네, 몬스터요."

    "정보라……. 어떤 정보를 원하시는 겁니까? 정보의 종류에도 여러 가지가 있으니까요."

    "영상 정보였으면 좋겠어요. 아니면 사진도 괜찮아요. 일단 제가 눈으로 보고 판별을 해야 할 것 같아요. 어차피 거기다가 뭐라고 적어놓는다고 해서 제가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으니까요."

    "그렇겠죠."

    아무리 같은 몬스터라 하더라도 이지혁이 알고 있는 이름과 지구에서 붙인 이름은 다르다. 그러니 문서로는 어떤 종류의 몬스터들이 오고 있는지 확인하는 게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아마 KSF 쪽에 데이터베이스가 만들어져 있을 겁니다. 한국 쪽만 파악하면 됩니까?"

    "타국에도 협조 요청을 해서 받아주세요."

    "으음, 그럼 시간이 좀 필요합니다."

    "예. 그리 급하지는 않아요."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위쪽에 건의를 해서 타국 정보까지 받아내겠습니다."

    "네."

    이지혁이 그렇게 말을 하고는 손을 흔들었다.

    "그럼 저는 갈게요."

    "……."

    "왜요?"

    "아니, 어쩐지 야자 도망가는 학생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요."

    "에이, 학교 다닐 때 저는 야자 안 했어요."

    "헐? 왜요? 그때는 야자가 없었나?"

    "집에 가라던데요?"

    "누가요?"

    "선생님이요."

    "……."

    최정훈은 안쓰러움과 안타까움이 가득 담긴 눈으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대체 이 인간은 어떤 학창 시절을 보낸 것일까?

    아니, 이지혁을 안쓰러워할 일은 아니다. 그가 안쓰러워해야 하는 것은 이지혁이 아니라, 이지혁과 함께 학교를 다닌 학생들이겠지.

    이지혁을 지도해야 했던 선생님들도 그렇고.

    '그래도 지금처럼 막무가내는 아니었겠지. 그래도 그때는 일반인이었으니까.'

    "그러고 보면 저도 참 사람 됐네요."

    "네?"

    "그때는 무슨 생각으로 그리 살았는지 모르겠어요. 하하하."

    아니었나?

    설마 예전이 더 했다는 말을 하는 건 아니겠지?

    양심이 있으면 사람이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그치?

    물어볼 수가 없다.

    무슨 대답이 나올까 무서워서 차마 물어볼 수가 없었다.

    최정훈은 어색한 웃음으로 상황을 얼버무렸다.

    그러던 찰나였다.

    "너 언제 왔어?"

    "응?"

    이지혁이 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몸을 돌리자, 정해민이 방긋방긋 웃으며 쪼르르 달려오고 있었다.

    "어디 갔다 왔냐?"

    "나? 방송 갔다 왔지."

    "……방송?"

    "응."

    "야! 이 지지배야! 지금 전쟁을 하느냐 마냐로 난린데, 너는 거기서 방송이나 하고 있냐? 정신이 있어, 없어!"

    "전쟁은 전쟁이고, 방송은 방송이지!"

    "헐, 얘 말하는 것 좀 봐."

    최정훈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어색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보통 저런 상식적인 것을 지적하는 건 이지혁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하는 법인데, 이지혁이 다른 사람의 상식을 지적하고 있지 않은가.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 하는 거 몰라? 지금 물이 아주 꽉꽉 들어찼단 말이야."

    "왜? 아예 모터를 돌리시지?"

    "그러고 있어."

    정해민이 허리에 손을 올리고는 말했다.

    "그리고 너, 말조심해. 요즘 나 엄청 잘나가거든? 나 잘못 건드렸다가는 너한테 백만 안티가 붙을 거야."

    "다 오라 그래."

    "……그럼 아무도 안 오겠지만."

    저 인간은 진짜 백만 명이라도 때려잡을 사람이었다.

    "근데 물이 들어왔다고?"

    "요즘 방송가에서 능력자돌들 밀어주고 있거든. 저번에 말했잖아."

    "호오?"

    이지혁이 신기하다는 듯이 정해민을 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왜 상관이 없어? 나도 능력자돌인데."

    "…넌 능력자 아줌마지."

    부들.

    순간적으로 정해민이 미약한 진동을 일으켰다.

    최정훈은 그 진동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거, 시동 걸지 마시고!"

    "뭐 틀린 말 했어요? 솔직히 얘가 나이가 몇인데 아이돌이에요? 줌마돌이지."

    "그… 아이가 그 아이가 아닙니다!"

    "그래요? 그런데 뭐, 상관있나? 사실은 사실이지."

    점점 달아오르는 정해민의 얼굴을 본 최정훈이 특단의 대책을 내놓기 시작했다.

    "이, 이거 보십시오."

    "응?"

    스마트폰으로 포털사이트를 연 최정훈이 기사들을 보여주었다.

    "거 보십쇼! 요즘 핫하지 않습니까?"

    "…호오?"

    정말 기사를 검색해 보니 엄청 많은 수의 기사들이 올라와 있었다. 제2의 전성기니 뭐니 하면서 띄워주는 기사들을 본 이지혁이 솔직한 감상을 이야기했다.

    "언플 아냐?"

    "히끅!"

    정해민이 딸꾹질을 했다.

    "찔리냐?"

    "아, 아니야! 언플 아냐!"

    기사를 보며 잠시나마 의기양양한 얼굴이 되었던 정해민이 당황하여 손을 내저었다.

    최정훈도 지원사격을 개시했다.

    "언플이라 쳐도 이만큼 반응이 있으니 언플이 되는 겁니다. 댓글 수 보십시오. 이만큼이나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보고 있잖습니까."

    "오?"

    댓글 수 순위권에 랭크되어 있는 기사를 본 이지혁이 조금 놀랐다는 얼굴로 최정훈의 폰을 받아 들더니, 몇 가지를 눌러보았다.

    "…다 악플인데?"

    "히끅!"

    "귀여운 척 좀 그만했으면 좋겠다. 나이 먹고 고생한다. 솔직히 이쁘지도 않은 게……."

    "으, 으아아아아아아앙!"

    이지혁이 손을 뻗어 정해민의 입을 틀어막았다.

    "진정해. 그냥 있는 댓글 읽은 것뿐이니까."

    "으읍."

    입이 틀어막힌 정해민이 부들거리며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원래 악플이 달려야 대세인 법입니다. 아이돌의 숙명 같은 거지요."

    "그래요?"

    이지혁은 뚱한 얼굴이었지만, 뭐, 바쁘게 다닌다고 하니 그걸 굳이 파고들 필요는 없어 보였다.

    "그래서 잘나가냐?"

    "나 요즘 좀 잘나가."

    "…그래. 끝물인데 열심히 해야지."

    "누가 끝물이야!"

    이지혁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조금 더 골려 먹고 싶었는데, 실제로 잘나간다고 하니 할 말이 없었다.

    "근데 니가 잘나가면 같은 데 있는 애들은 짜증 안 내냐? 아줌마가 인기 차지한다고?"

    "나 아줌마 아니라고! 내 나이가 몇인데 아줌마야!"

    "그 나이면 아줌마지."

    "이이이!"

    정해민이 분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도끼눈을 뜨고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지혁이 누군데 그런 눈길에 쫄겠는가.

    "뭐, 아무래도 좋은데… 으음……."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너도 작전 참가하는 거 아냐? 왜 너는 노냐? 다른 사람들은 지금 작전 계획 검토한다고 정신없는 것 같던데?"

    "나는 상관없어."

    "왜?"

    "어차피 여기 있는 사람들 한 번에 옮기지도 못하거든. 그리고 타이밍상 군인들이랑 같이 가야 하고, 다른 외국의 능력자들도 같이 움직여야 하는 일이야. 텔포 쓸 일이 없대."

    "그래? 그래도……."

    "그리고 나 마커 찍어야 갈 수 있잖아. 북한에 찍어둔 마커가 없어서 의미가 없대."

    "아!"

    이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좌표만 있으면 아무 데나 갈 수 있는 자신과는 달리 정해민의 능력은 자신이 갔던 곳에 표식을 남겨야 이동할 수 있었다.

    "택시와 지하철의 차이 같은 건가?"

    "응?"

    "아니다. 그럼 너는 이번 작전에 참가 안 하는 거야?"

    "배웅이야 하는데, 솔직히 내가 가서 할 일이 뭐가 있겠어? 치어리더할 것도 아니고."

    "…치어리더는 어린애들이 해야지!"

    "야! 자꾸 나이 가지고 그럴래? 내 나이면 어디 가서 어리다는 소리 들어! 니가 이상한 거야."

    "네, 알았어요. 아주머니."

    "으으으!"

    부들대는 정해민을 보고 피식 웃던 이지혁의 고개가 갸웃했다.

    "흠? 이거, 그럼 너는 시간이 남는다, 이거지?"

    "시간이 남는 건 아니지. 행사 다니느라 바쁘거든."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이지혁이 깔끔하게 물러나자 되레 정해민이 애가 닳았다.

    "무, 무슨 일인데?"

    * * *

    "아니, 뭐, 바쁘다는 사람 데리고 뭐할 생각은 없으니까, 그냥 신경 쓰지 마."

    "그, 그렇게까지 바쁘지는 않아."

    "바쁘다며?"

    "…물론 바쁘긴 하지. 물론 바쁘기는 한데, 그렇게 막 시간이 아주 안 날 정도로 바쁘지는 않거든."

    "그래?"

    이지혁이 뚱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자 정해민이 손을 내저었다.

    "지, 진짜야."

    거짓말이다.

    지금 그녀는 말 그대로 눈코 뜰 새도 없었다.

    물이 들어왔을 때 노를 저어야 한다는 것은 그녀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소속사의 사장도 그녀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었다.

    연예인으로 살다 보면 운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무명이나 다름없던 애가 어느 날 직캠 한 번 잘 떠서 대스타가 되어버리기도 하고, 인기 절정이던 스타가 별것 아닌 스캔들 한 방에 훅 가버리기도 한다.

    거꾸로 말하면 연예인이란 언제 어떻게 이미지가 바뀌어 버릴지 알 수 없는 직업이다. 그러니 벌 수 있을 때 벌어서 노후를 대비해야 하는 것이다.

    이미 한 번 훅 가본 적이 있는 정해민은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고, 이번에 들어온 물이 영원할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밀물이 들어오면, 썰물이 빠지는 법.

    그녀는 바다에 둑을 쌓아 밀물을 가둔다는 심정으로 지금 발에 불이 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뭔데? 뭔 일인데?"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이는 법.

    "아냐. 바쁘다는데 굳이 뭐 나랑 놀아줄 필요 있겠어?"

    "응? 놀러 갈 거야?"

    그녀의 귀가 쫑긋쫑긋하기 시작했다.

    "가서 일 봐."

    "어, 어디 갈 건데?"

    "가서 일 보라니까. 바쁘신 몸이 뭔 그런 일까지."

    "가자. 나도 가자. 응? 가자!"

    "…진짜 바쁜 건 맞냐?"

    "아냐! 나 안 바빠."

    밴에서 대기하고 있던 매니저가 기겁을 하여 소리를 질렀다.

    "해민 씨!"

    "왜요!"

    "이번 주에 스케줄 비는 시간 없다는 것 알고 계시잖습니까. 오늘 여기도 꼭 들러야 한다고 그래서 겨우 시간 만든 겁니다. 시간 더 내면 펑크 납니다."

    "나라고 하지 뭐."

    "해, 해민 씨, 이러시면 안 돼요."

    "아, 몰라요. 저 빼고 스케줄 가라고 해요."

    매니저가 입에 거품을 물었다.

    최정훈은 그 광경을 보며 매니저에게 묘한 동질감을 느껴야 했다.

    '사는 게 다 그렇지.'

    이게 을의 인생 아니겠는가.

    서글픈 현실은 그들을 수탈하는 갑은 실제로 갑도 아니라는 것이다. 갑이면 갑질을 해야지, 왜 뻘짓을 하냐고!

    "그, 그래서, 왜 오신 건데요?"

    최정훈이 얼른 말을 돌렸다. 이러다가는 정말 정해민이 스케줄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이지혁 옆에 붙어서 게임이나 하는 꼴을 봐야 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든 것이다.

    "아참!"

    정해민이 밴의 문을 열었다.

    "도시락 좀 사 왔어요. 또 제대로 드시지도 못하고 일하고 계실까 봐."

    밴 안에는 도시락이 담긴 박스가 가득 실려 있었다.

    "크, 해민 씨!"

    최정훈이 감격에 찬 얼굴을 했다.

    "저 혼자 쏙 빠진 것 같아서 죄송하기도 하고, 이 근처에 시켜먹을 데도 없는데 또 제대로 밥도 못 먹고 있을까 봐요."

    "…부정은 못하겠습니다."

    "제가 다 옮기기는 좀 그러니까, 사람 몇 명만 좀 불러주실래요?"

    "다 옮기다뇨. 돈을 낸 사람이 짐을 옮기는 법은 없습니다. 여기 편히 계시죠. 옮기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할 겁니다."

    최정훈이 폰을 꺼내 톡을 보내자 얼마 지나지 않아 시커먼 장정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튀어나오더니, 도시락을 싸그리 쓸어가 버렸다.

    "뭐 며칠 굶었나?"

    이지혁이 혀를 찼다.

    돈도 많이 버는 양반들이 도시락 하나에 저 난리라니.

    "도시락 때문에 저러는 게 아니라, 정해민 씨가 도시락 사 줬다고 찍어서 SNS에 올리려고 하는 겁니다."

    "어? 저 그거 알아요. 그거 관종이라고 하는 거죠?"

    "…아닙니다."

    "뭐, 여하튼 그럼 가볼게요. 관련 자료 준비되면 연락 주세요."

    "예."

    "어, 어디 가? 말을 해달라니까! 응? 응? 시간 뺄 수 있다고!"

    매니저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해, 해민 씨!"

    "저 지혁이 집에 들렀다 갈 테니까, 오후 스케줄 취소해 주세요."

    "저녁에 화보 촬영 있단 말입니다!"

    "네. 취소해 주세요!"

    팔랑거리며 이지혁을 따라서 종종걸음으로 달려가는 정해민을 보면서 매니저는 얼굴을 감쌌다.

    최정훈이 말없이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다 그런 거지, 뭐.

    * * *

    "동창회?"

    "응."

    "와, 동창회라니. 이게 무슨 낭만적인 말이야?"

    정해민이 킥킥 웃었다.

    "너는 그런 거 안 해봤냐?"

    "응. 나는 친구 없어서 아무도 연락 안 해."

    참 슬픈 이야기를 해맑게 웃으면서 말하는 정해민이었다.

    "그런 건 보통 우울한 이야기 아닌가?"

    "왜?"

    "…친구가 없다며?"

    "아, 나는 사교성이 없어서 친구가 없는 게 아니라 연습생 생활을 일찍 시작해서 학교를 잘 못 간 거야. 친구라고 할 만한 애들은 다 이쪽 계열 애들이거든. 학교에는 친구가 없어."

    "그렇겠다."

    학창 시절부터 연습생을 했다면 대체 연예계에서 몇 년을 굴렀다는 말인가.

    생각해 보면 정해민도 아이돌계의 살아 있는 화석이라고 불릴 만했다.

    "그래서?"

    "응? 뭐가 그래서야?"

    "그래서 나갈 거야?"

    "오라는데 안 갈 이유는 없잖아?"

    "옷은 샀어?"

    이지혁은 가족들과 같은 이야기를 하는 정해민을 빤히 바라보았다. 왜 자신의 가족들이 정해민을 좋아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코드가 맞는 것이다.

    "너 우리 가족이랑 같은 말을 한다?"

    "설마 그걸 입고 나갈 생각은 아니지?"

    "왜? 그러면 안 되나?"

    정해민이 이지혁을 빤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물론 그게 네 트레이드마크와도 같다는 건 알고는 있지만, 아무리 슈퍼맨이라고 해도 바지 위에다가 팬티 입고 동창회에 나가지는 않을 것 아냐."

    "……."

    "자리에 맞는 옷이 있는 법이지."

    "끄응, 벌써 백화점 갔다 왔어."

    "오구오구, 착하다."

    정해민이 손을 뻗어 이지혁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무리 손을 뻗어봐야 뒤통수밖에 닿지 않지만.

    "그런데 그걸 나한테 왜 이야기하는 거야? 혼자 가려니 떨려서 그래? 누나가 같이 가줄까?"

    "어."

    "그래, 니가 원한… 응?"

    "가자."

    "…으응?"

    정해민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의 동창회에 자신을 데리고 간다는 말인가.

    "나를?"

    "응."

    "내, 내가 거기에 가서 뭐하는데?"

    "예원이가 그러던데……."

    "응."

    "동창회는 전쟁이라더군."

    "으응?"

    "누가누가 더 잘살고 있는가를 겨루는 사회인의 자존심 대결?"

    "으으으응?"

    정해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게 뭔 소리야?

    동창회라는 것은 예전의 친구들이 만나서 하하호호하며 즐거운 추억을 되살리는, 그런 자리 아니었던가?

    "보통 동창회에서는 예전의 추억이나 이야기하는, 그런 자리라던데……."

    "안 그래도 그 말도 해봤는데……."

    "응."

    "학교에서 추억이 뭐가 있냐던데?"

    "……."

    "그냥 뭐, 선생님이나 까고, 그 자리에 없는 친구나 까고, 이리저리 술안주로 씹으면서 시간이나 때우는 거지, 막말로 그렇게 이야기할 게 많고 즐거운 친구들 같으면 지금도 연락하고 있지 굳이 동창회를 해서 만나야 하느냐고."

    "예원이가 아직 고등학생 아닌가?"

    "맞아."

    "요즘 고등학생들은 시니컬하구나."

    "걔만 그런 거 아닐까?"

    "으음……."

    이예원의 모습을 떠올린 정해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예원이 좀 시니컬한 면이 있었다.

    "그런데 그거랑 나를 데리고 가는 거랑 무슨 상관이야?"

    "여자 친구도 데리고 가면 좋대."

    순간, 정해민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여, 여자 친구?"

    "생각을 해보니까 말이야……."

    "으응."

    "다솜이를 데리고 가려니 고등학교 동창회에 고등학생을 데리고 가는 건 좀 이상하고."

    "…다솜이?"

    정해민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그렇다고 아펠을 데리고 가자니, 그것도 좀 이상하고."

    "아펠드리체 님."

    "그렇다고 에르카나를 데리고 가면 애들이 다 걔 본다고 말도 제대로 못할 건데……."

    "……."

    "가윤이는 데리고 가도 어차피 밖으로 안 나올 거고. 안 그래?"

    이지혁의 그림자에서 하얀 손이 불쑥 튀어나오더니, 손가락으로 OK를 그렸다.

    "그러니 데리고 갈 사람이 너밖에 없다."

    "……."

    "그러니까, 같이 갈래?"

    "안 가."

    "응? 아까는 같이 간다고 했잖아."

    "안 간다고!"

    "안 가면 안 가는 거지,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이지혁이 버럭 하자 정해민이 흥, 하고 코웃음을 지르더니 고개를 돌려 버렸다.

    "됐다. 그럼 어쩔 수 없지. 다른 애 데리고 가야겠다."

    "누가 안 간대?"

    이지혁이 멍한 얼굴로 정해민을 돌아보았다.

    "…안 간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아니면 내 귀가 옹이구멍인가?

    안 간다는 말을 두 번은 들은 것 같은데…….

    귀신이 있어서 내 귀에다 대고 말을 하고 간 건가?

    "이, 일단은 스케줄 봐야 하니까 너무 기대는 하지 말고."

    "…응."

    따지고 싶은 말은 많지만, 어쩐지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언젠데?"

    "아직 몰라."

    "날짜도 안 정해졌는데 나보고 스케줄을 맞추라는 거야?"

    "…그래서 내가 가기 싫으면 가지 말라고 했는데."

    "하, 진짜 사람 귀찮게 하네. 알았어. 그럼 날짜 정해지면 말해줘."

    이지혁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 정 그렇게 바쁘면 안 와도 된다니까? 내가 다른 애랑 가면 되는데 굳이 시간 뺄 필요 없어. 바쁘다는 사람 괜히 불러서 고생시키는 것 같아서 내가 민망하니까."

    "안 바빠."

    "…바쁘다며?"

    "안 바쁘다면 안 바쁜 줄 알면 되지, 무슨 남자가 그렇게 말이 많아?"

    "…눼."

    이지혁은 입이 댓 발은 튀어나왔지만, 지금은 왠지 져줘야 할 것 같았다.

    그동안의 삶에서 그도 마법 쓰는 것만 배운 것은 아니란 이 말씀!

    "그럼 그렇게 알고 있을게."

    "하, 진짜 귀찮은데."

    아니, 귀찮으면 오지 말라고!

    누가 억지로 오라고 했냐고!

    입에서 혀는 열심히 움직였지만, 차마 입술이 열리지 않았다.

    "너, 운 좋은 줄 알아. 현역 아이돌 데리고 동창회 가는 게 어디 쉬운 건지 알아?"

    "…줌마돌이겠지."

    "꺄아아아악!"

    등짝에 뭔가가 찰싹찰싹거리기는 했지만, 어머니의 스파이크를 맞으며 자라난 이지혁에게 정해민의 앙탈 따위는 안마 축에도 끼지 못했다.

    그의 등짝은 이미 철판 같은 방어력을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여하튼 그렇게 알고 있으면 되는 거지?"

    "너, 너무 크게 기대하지는 말고."

    이지혁은 고개를 젓고 말았다.

    왜 안 어울리는 짓을 하고 난리야?

    "그런데……."

    "응?"

    정해민이 조금은 진지해진 얼굴로 물었다.

    "너, 이번 작전 정말 안 따라가?"

    "내가 안 따라가는 게 아니라 오지 말래."

    "왜 오지 말라는 건데?"

    "민간인이라서 군사작전에는 끼면 안 된데. 뭐, 그러시다는데 내가 뭘 어쩌겠냐?"

    "그래서 진짜 안 따라가려고?"

    "응."

    정해민이 고개를 갸웃했다.

    "넌 원래 그런 거랑 상관없이 니가 해야겠다 싶으면 다 무시하고 하고 싶은 대로 하잖아. 지금 너 삐친 거 아냐?"

    이지혁이 한숨을 내쉬었다.

    여자들의 사고방식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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