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72화 (72/118)
  • [■] 이번 작전에는 이지혁 씨의 자리가 없습니다 [■]

    ─────

    "거, 찝찝하네."

    이지혁은 영 기분이 좋지 않아 자꾸 고개를 까딱거렸다.

    북한에 다녀온 뒤로부터 뭔가 뱃속에 바윗덩어리 하나가 들어앉은 듯 갑갑했다.

    "체한 거 아냐?"

    "…체해?"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넌 안 체해?"

    적어도 근 이천 년 사이에는 체한 적이 없다고 말을 해야 할까?

    베라프에서뿐만이 아니라 그전에도 체한 적이 없다 보니 체한다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알지 못하는 이지혁이었다.

    "뭐, 딱히 먹은 게 없으니 그런 건 아닐 텐데 말이야."

    "흐응?"

    정해민은 태연한 듯 앉아 있는 이지혁이 속으로는 나름 부담을 느낀다는 사실에 놀라워했다.

    "너도 사람인 모양이네."

    "응?"

    "지금 상황 때문에 부담되어서 그러는 거 아냐?"

    "뭔 부담?"

    "…지금 난리 났잖아."

    "나야 내 할 일 다 했는데 부담은 무슨 부담이야? 그러고 보니 먹은 게 없네. 밥 먹어야겠다."

    정해민은 태연히 밥을 찾는 이지혁을 보며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러면 그렇지.

    이지혁이 이런 일로 부담을 느낄 사람이 아니었다.

    "자, 먹을 것 미리 챙겨놨어."

    "응?"

    이지혁은 정해민이 내민 간식들을 보며 화색이 되었다.

    요즘 들어서 사람을 귀찮게 하는 면이 좀 생기기는 했지만, 의외로 이지혁을 잘 챙기는 사람이 정해민이었다.

    김다솜처럼 챙기지 못해 안달인 타입은 아니지만, 은근히 티 나지 않게 이지혁이 배고파할 시점을 미리 알고 챙긴다거나, 이지혁의 입장을 NDF에 전달하는 중간자 입장에 충실했다.

    "먹어."

    "땡큐."

    이지혁은 행복한 얼굴로 샌드위치를 먹었지만, 그처럼 행복하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맛있으십니까?"

    "하나 줘요?"

    "지금 먹었다가는 위장이 폭발할 것 같으니 사양하겠습니다."

    "에이, 오버는."

    최정훈의 눈썹이 꿈틀했다.

    이 사태를 만들어낸 것이 누군데 저런 소리를 태연하게 한단 말인가.

    이지혁이 데리고 온 박용휘는 대한민국 정계를 넘어, 전 세계에 커다란 파동을 일으켰다. 이지혁이 짐작한 부분을 박용휘가 재차 확인해 주었기 때문이다.

    북한의 지도부가 주민들을 희생시켜서 뭔가를 소환하려 한다는 사실이 확인되자 이 사태를 전달 받은 강대국들은 모두가 꽁지에 불붙은 말들처럼 날뛰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이미 두 번이나 마왕이 소환되는 사태를 경험하지 않았던가.

    이제까지의 경험을 바탕으로 본다면, 평양에서 만들어질 게이트는 이제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거대할 것이 빤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처럼 마왕 하나만 떡 넘어오지는 않을 거라는 얘기였다.

    지금까지 넘어온 마왕들이 나름 작은 게이트를 넘느라 너프된 상태였다는 이지혁의 첨언이 더해지자 순식간에 비상 대책 회의가 마련되었다.

    "상황은 어때요?"

    서아영의 물음에 최정훈이 한숨을 내쉬었다.

    "모르겠습니다. 이게 제 선까지 전해지는 이야기가 아니라서."

    심지어 대한민국의 대통령 자격으로 윤영민이 참가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 윤영민의 발언권을 기대하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미국과 중국, 러시아와 독일이 참가한 대표 회의에서 한국의 대통령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참가 좀 해달라고 했잖습니까."

    "귀찮아요."

    이지혁이 파리를 쫓듯이 손을 휘저었다.

    "끄으응."

    이지혁만 참가를 해줬더라면 윤영민의 발언권이 급상승했을 것이다. 아무리 지금의 세계를 이끌어가는 이들의 회의라고는 하나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이지혁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무시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고, 냉정하게 말하자면 이지혁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이지혁이 윤영민의 옆자리만 지켜준다면 윤영민이 얼마나 쉽게 발언을 할 수 있겠는가.

    그렇기에 이지혁을 껄끄러워하는 윤영민이 모든 것을 무릅쓰고 지원을 요청했건만, 이지혁은 자신이 할 것은 다 했다는 말로 깔끔하게 거절해 버리고는 사무실에 눌러앉았다.

    "그래도 대통령님 부탁인데!"

    "에헤이! 자꾸 뭐라고 하네!"

    "끄응."

    최정훈이 가슴을 움켜잡았다.

    위가 아프다! 위가!

    저번에 정인수의 말을 들은 이후로 이지혁이 굳이 할 필요가 없는 일들을 자연스레 요구해 왔다는 사실을 실감한 최정훈이다.

    그래서 그 이후로는 나름 이지혁의 입장을 존중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지금 그가 누리는 권력이나 이익은 모두가 이지혁을 기반으로 형성된 것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확인하기도 했다. 그렇기에 웬만하면 이지혁을 최대한 존중하려고 애는 쓰고 있는데…….

    '뭐가 그리 귀찮아서!'

    그냥 한 번 참석만 해주면 만사형통이건만, 그게 귀찮은 사람이 북한은 왜 혼자 잠입해서 박용휘를 빼왔다는 말인가.

    "변덕이……."

    "네?"

    "아닙니다. 얘들아, 죽 시켜라! 오늘 죽 먹으련다!"

    치졸하게 딴지를 거는 최정훈이지만, 이지혁의 강철과 같은 멘탈에 상처를 주기에는 너무 약한 공격이었다. 이지혁은 최정훈이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도 쓰지 않았다.

    "회의 끝났답니다."

    "가시죠!"

    최정훈이 난데없이 달려들자 이지혁이 뚱한 얼굴로 물었다.

    "어딜요?"

    "어디긴 어딥니까! 청와대죠! 들어야 할 것 아닙니까!"

    "내가 왜 가요?"

    "왜 가다니요? 당연히 가셔야지요."

    "어차피 나야 기다리고 있다가 뭐하라고 시키면 시키는 대로만 하면 그만인데, 내가 왜?"

    댁이 언제 시키는 대로 했다고!

    "그리고 죽 시켜놓은 거 안 먹고 가요?"

    "…죽은 식어야 제맛이죠."

    "쯧."

    이지혁이 한심하다는 듯이 최정훈을 바라보고는 게이트를 열었다.

    조금 더 시간을 끌어도 상관이 없을 것 같기는 하지만, 더 시간을 끌었다가는 최정훈의 숨이 넘어가는 것을 보게 될 것 같았다.

    이지혁과 최정훈이 게이트 안으로 향하자 정해민이 서둘러 뛰어들었다.

    * * *

    우우웅!

    청와대로 나온 이지혁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늘은 총 든 사람들이 없네."

    "그거, 이지혁 씨 때문에 온 사람들 아니라고 하는데 왜 자꾸 그러십니까."

    "혹시 알아요?"

    "에이, 진짜!"

    최정훈이 역정을 냈지만 이지혁은 여유만만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딨어요?"

    "집무실에 계실 겁니다."

    집무실로 향하자 기다리고 있던 비서가 안쪽으로 말을 전하고는 문을 열었다.

    "잠시."

    "네?"

    비서가 정해민을 가리켰다.

    "출입이 허가된 사람은 이지혁 씨와 최정훈 씨뿐입니다. 여기서 기다려 주십시오."

    "……여기서요?"

    청와대에 아는 사람이 없는 정해민이다 보니 이곳에서 기다리는 것이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게 왜 따라와서는!"

    "그럴 수도 있지!"

    이지혁이 짜증을 내고는 비서를 향해 말했다.

    "그냥 들어가게 냅 둬요."

    "하지만……."

    "어차피 나오고 나면 다 말할 건데, 똑같지 뭐."

    "그래도 기본적인 예의라는 게 있습니다."

    "예의?"

    "…기분 나쁘셨다면……."

    비서가 부드럽게 달래려는 순간, 이지혁이 비서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부탁 좀 드릴게요."

    "아……."

    "대통령님한테는 제가 따로 말씀을 드릴 테니까, 이번에만 좀 양해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비서는 기겁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아는 이지혁은 이런 식으로 타인에게 굽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닌가?'

    생각해 보니 이지혁이 먼저 다른 사람을 건드렸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비서에게 의문을 남긴 이지혁 일행이 안으로 들어갔다.

    대통령 윤영민이 굳은 얼굴로 그들을 환영했다.

    "어서 오십시오."

    "오랜만에 뵙네요."

    "강녕하셨습니까, 대통령님."

    "안녕하세요."

    윤영민의 시선이 정해민에게로 향했다.

    "이쪽 분은?"

    최정훈이 뭔가 말을 하기도 전에 이지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게이트 능력자죠. 이번에 해야 할 일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아야 할 것 같아서 데려왔어요."

    "그러시군요."

    최정훈이 빤히 바라보자 이지혁은 입술에 침을 발랐다.

    "그, 그렇습니다."

    어쩔 수 없이 대통령의 앞에서 거짓말을 하게 된 최정훈이 아연한 얼굴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국가 최고 권력자에게 거짓말을 하다니.

    어디까지 타락을 해야 하는가.

    "앉으시지요. 일단 지금 회의가 끝났습니다."

    "박씨 아저씨는 어디 있어요?"

    "박용휘 말입니까?"

    "네. 기껏 살려서 데리고 왔는데 안 보이니 좀 이상하네요."

    "치료 중입니다."

    "고문하고 있는 건 아니죠?"

    "아닙니다."

    이지혁이 확실하게 말했다.

    "솔직히 저도 그런 쪽으로 반대를 하는 입장은 아니에요. 내가 뭐 이제 와서 인권 운운할 사람도 아니구요. 그런데 그 아저씨들은 적국의 사람이었을지언정 이쪽을 위해서 나름 노력을 해준 사람이에요. 최소한의 대우는 지켜주세요."

    윤영민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인터폰을 들었다.

    "박용휘와 리진철 좀 데리고 와요."

    인터폰을 내려놓고 고개를 드는 윤영민.

    "아무래도 직접 보여 드려야 믿으실 것 같군요. 저는 그런 짓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안 믿은 건 아니에요."

    "하지만 확실한 게 좋은 법이죠."

    조금 시간이 지나자 문이 열리더니, 박용휘와 리진철이 안으로 들어왔다.

    "리지혁 동무!"

    "한국에 사시려면 그 발음부터 어떻게 해야겠어요. 리지혁이 아니라 이지혁이에요."

    "남조선 말은 너무 낯간지러워서."

    "그래도 적응해야죠."

    이지혁이 가볍게 웃고는 건너편 자리를 가리켰다.

    "앉아보세요. 도움이 필요할 것 같으니까요."

    윤영민이 조금 떨떠름한 얼굴로 둘을 훑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국가의 중대사를 얼마 전까지 적국 소속이었던 자들 앞에서 늘어놓는다는 것은 영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지만, 지금 북한의 사정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이 둘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당연히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받는 것이 좋았다.

    "그래서 어쩌기로 했어요?"

    이지혁의 물음에 윤영민이 조금은 비장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와 유럽의 능력자들이 일시에 북한을 칠 겁니다."

    "…UN군급이네요."

    "실제로 UN군입니다. 지시를 미국에서 내린다는 것만 제외한다면 말이죠."

    "흐음……."

    이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그래도 목적이 확실하지도 않은데 그런 식으로 전격적인 움직임이 합의되었다는 게 신기하네요."

    "미국의 주장이 강했습니다."

    "미국이요?"

    "어물쩍하다가 게이트가 열리기라도 한다면 피해는 너희가 입는다는 말이 먹혔죠. 중국이 외교 채널을 통해서 협상을 시도해 보았지만, 북한 측에서 채널 자체를 차단해 버린 것도 영향이 컸던 모양입니다."

    "대충 변명이나 하면서 시간을 끌 줄 알았는데……."

    "여기는 지구 반대편이 아닙니다. 중국에서 비행기를 띄우면 두 시간만에 평양에 도착합니다. 눈 가리고 아웅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죠."

    "그도 그렇네요."

    이지혁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뭐, 개시일이야 준비가 되고 나서겠고."

    "그렇습니다."

    "네, 좋아요. 그럼 저는 뭘 하면 되죠?"

    윤영민이 가만히 이지혁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오해하지 말고 들어주십시오."

    "예?"

    갑자기 이게 뭔 말인가.

    "이번 작전에는 이지혁 씨의 자리가 없습니다."

    "네?"

    이지혁의 눈이 일순 멍해졌다.

    "이번 일은 저희가 알아서 할 것입니다. 이지혁 씨는 그저 평소와 다름없이 생활해 주십시오."

    * * *

    "이게 뭔 소리래요?"

    이지혁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자리가 없다니.

    그가 지구로 돌아오고 나서 처음 겪는 일이었다.

    그동안은 딱히 필요하지 않은 일에도 그를 끌고 다니려고 악을 쓰던 이들 아닌가.

    그런데 이제 와서 자신의 자리가 없다니.

    "갑자기 왜요?"

    윤영민이 조금 곤란하다는 듯이 헛기침을 하다가 고개를 돌려 국방부 장관을 바라보았다.

    대신 설명을 요구하는 그 눈빛에 국방부 장관이 입을 열었다.

    "첫 번째로는 딱히 이지혁 씨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에?"

    "북한의 전력은 그리 강하지 않습니다. 물론 북한이라는 나라가 전 세계에서 20위권 안에 드는 군사 대국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생각은 없지만, 한, 미, 일, 러, 중, 5개국은 전부 전 세계 군사 순위 10위권 안에 드는 나라들입니다. 그 다섯 나라가 합동작전을 펼치는 상황이니, 굳이 이지혁 씨까지 나설 필요가 없다는 것이죠."

    최정훈도 납득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국방부 장관의 말이 일리가 있었다.

    전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나라 넷에 능력자 전력으로는 전 세계 최강이라고 할 수 있는 한국이 함께하는 작전이다.

    북한이 아무리 날고 긴다 하더라도 버틸 수가 없을 것이다. 이만한 연합군의 공격을 감당할 수 있는 나라가 또 있을까 생각될 정도니까.

    "또 하나는… 이건 군사작전이라는 겁니다."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무슨 상관이죠?"

    "지금까지 이지혁 씨가 나섰던 일들은 전부 게이트를 상대하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일은 원천적으로 게이트가 열리지 않게 하려는 군사작전입니다. 분야가 다르다는 거지요."

    "뭐가 달라요?"

    국방부 장관이 쓰고 있던 안경을 살짝 밀어 올리고는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몬스터가 아니라 인간을 상대하는 겁니다."

    이지혁은 여전히 뚱한 표정이었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이지혁 씨는 민간인의 신분입니다. 계약이 되어 있어서 몬스터를 소탕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는 하나, 위급 시 동원할 수 있는 군인이 아니라는 거지요."

    "음……."

    "군사작전에 민간인을 동원할 수는 없습니다."

    "이 나라가 그렇게 그런 부분에서 철저하다고는 생각해 본 적 없는데, 의외로 그런 면이 있나 보네요?"

    "물론입니다. 그리고 타국 역시 이지혁 씨의 참전에 우려를 표해왔습니다. 이건 군사작전이니까요."

    이지혁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뭔 말인지는 알겠어요. 그러니까, 이번 일에는 제가 낄 곳이 없다는 거죠?"

    "그렇습니다."

    "그럼 집에가서 발 닦고 잠이나 자면 되겠네요. 갈게요."

    윤영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이 이렇게 돼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나름 신경 써주신 것 같은데, 제가 감사해야 할 일이죠. 한 번이라도 덜 움직이는 게 제 입장에서도 좋기도 하구요."

    이지혁이 손을 한 번 흔들더니 밖으로 나갔다. 정해민도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슬그머니 일어나더니 이지혁을 따라서 밖으로 나갔다.

    "휴우……."

    밖으로 나간 이지혁을 바라보며 윤영민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편의점이나 들렀다 갈까?"

    "괜찮아?"

    "응? 뭐가?"

    이지혁이 정해민의 물음에 고개를 갸웃했다.

    "기분 안 나빠?"

    "왜?"

    "좀 그렇잖아. 지금까지는 일 좀 해달라고 난리를 치다가 갑자기 사람 쏙 빼놓고 저게 뭐야."

    "…일을 안 하면 좋은 거 아냐?"

    "그렇기야 하지만……."

    그래도 사람 마음이란 게 어디 그런가.

    정해민은 은근히 이지혁의 눈치를 보았지만,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평소와 다를 것이 없었다.

    아니, 되레 진짜로 북한으로 가지 않아서 좋은 듯 즐거워하는 기색마저 보이고 있었다.

    '얘는 명예욕이나 소유욕 같은 게 없나?'

    보통은 누구라도 그런 상황에서는 미묘한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인데, 이지혁은 그런 게 전혀 없는 모양이었다.

    명예욕이나 소유욕이 없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자존심이란 게 있기 마련인데, 정해민이 그동안 지켜본 이지혁은 귀찮은 것을 극단적으로 싫어하기는 하지만 자존심이 없는 타입은 아니었다. 되레 티는 안 내지만 자존심이 너무 강해서 하지 않아도 될 일까지 사서 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지혁은 너무 평온해 보이니 이상한 것이었다.

    "라면 새로 나왔네? 먹어볼까?"

    "너 진짜 괜찮아?"

    라면을 바리바리 집어 든 이지혁이 뭔 소리를 하느냐는 듯 정해민을 돌아보았다.

    "뭐가?"

    "안 되겠다. 너 따라와."

    "응?"

    정해민이 이지혁을 질질 끌고 편의점 밖으로 나갔다.

    "야, 잠만. 계산 좀 하고."

    * * *

    "잘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통일부 장관의 말에 국방부 장관이 단호하게 말했다.

    "당연한 일인 겁니다."

    "으음……."

    윤영민 역시 여전히 고민된다는 얼굴이었다. 결국 윤영민은 이지혁을 가장 잘 안다고 생각되는 이에게 물었다.

    "최정훈 씨."

    "예, 대통령님."

    "이지혁 씨를 대동하지 않는 선택이 옳았을까요?"

    최정훈은 윤영민의 질문에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이건 그만큼이나 민감한 문제였다.

    이지혁을 대동할 시에 작전의 위험도가 대폭 감소한다는 것은 세 살박이 아이라도 알 것이다.

    하지만…….

    테이블에 놓여 있는 냉수를 들어 벌컥벌컥 들이켠 최정훈이 물 컵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고는 윤영민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옳았다고 봅니다."

    "어째서인가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음?"

    윤영민은 가만히 최정훈의 대답을 기다렸다.

    "첫 번째로는 이지혁 씨는 역시나 민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 점에 있어서는 동감합니다."

    "대한민국이 지금 이지혁 씨에게 많은 부분을 기대고 있기는 하지만, 엄연히 이지혁 씨는 민간인입니다. 군사작전에 민간인을 동원해야 하는 나라라면, 미래는 없는 것이죠."

    "그렇죠."

    "이지혁씨가 가진 힘 때문에 유혹에 시달릴 수는 있습니다. 한 번의 원칙만 깬다면 좀 더 편하게 좀 더 쉽게 갈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원칙을 지켜야 합니다. 한 번이 두 번이 될 것이고, 두 번이 세 번이 될 겁니다. 원칙은 한 번 깨는 것이 어렵지, 두 번째부터는 쉬운 법이죠."

    윤영민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라고 해서 왜 이지혁을 동행시키고 싶다는 유혹에 시달리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이지혁은 만능 키가 아니다. 설사 만능 키라고 할지라도 키는 제 역할이 있는 법이다. 아무 곳에다 가져다 쓰게 된다면 결국 원칙을 무너뜨리게 된다.

    "그리고 두 번째는 국방부 장관님이 말씀하신 대로 이번에 우리가 상대해야 할 상대는… 사람이라는 것이죠."

    "크리스토퍼도 같은 말을 하더군요."

    "물론 저 양반의 멘탈이 강철과 같다고는 하지만, 괴물을 죽이는 것과 사람을 죽이는 것이 같을 수는 없습니다. 지금까지 없던 일이기도 하구요. 사람을 자신의 손으로 해치게 된 이지혁 씨가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도 고려를 해야겠죠."

    "으음."

    윤영민은 최정훈의 말을 듣고서야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중국과 러시아는 이지혁의 참전을 원했지만, 미국과 일본은 이지혁이 이 작전에 함께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중 가장 큰 반대 의견을 낸 곳이 미국이었다.

    지속적인 전투와 부상의 반복으로 인해 이지혁의 PTSD가 의심된다는 것이다.

    현재는 그 증상이 심하지 않으나, 인간과의 전투를 겪고 난 이지혁의 PTSD가 심해진다면, 게이트가 열리는 것 이상으로 인류에게는 재앙이 될 수 있다는 미국의 경고가 윤영민의 마음을 움직였다.

    '확실히 과하기는 했어.'

    딱히 그들이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이지혁은 모습을 드러낸 이후로 지금까지 쉴 틈 없이 끊임없는 전투를 겪어왔다.

    잘 훈련된 베테랑 전투 요원이라고 하더라도 극심한 스트레스를 호소할 만한 상황이다. 그런데 전문적인 군사훈련을 받은 사람도 아닌 일반인이 그만큼의 전투를 소화했으니, 그 여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 방치했어.'

    지금이라도 이지혁을 위한 케어 프로그램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는 윤영민이었다.

    "일단 이번에는 이지혁 씨를 동행시키지 않겠습니다. 이미 타국에는 그리 말을 해두었지만, 내부적으로도 확실히 방향을 정하도록 하죠."

    "예, 대통령님."

    국방부 장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작전 준비는?"

    "KSF와 육군, 공군을 동시에 동원할 생각입니다."

    "해군은?"

    "일본 쪽에서 해군을 동원하기로 했기에 혼선을 피하기 위해서 이번에는 해군을 동원하지 않습니다. 애초에 해상봉쇄를 하는 것도 아니고, 짧게 치고 빠질 일이라 상륙작전 위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렇군요."

    윤영민의 눈가에 불안함이 어렸다.

    '이건 전쟁이다.'

    작전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건 한반도에서 반백 년 만에 벌어지는 전쟁이나 다름없었다.

    작전이 성공하게 된다면 북한의 체제는 완전히 붕괴하게 될 것이다.

    한 국가의 운명을 끊는 일이다. 아무리 특공대를 위주로 한 국지 작전이라고는 하지만, 전쟁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었다.

    반세기 만에 전쟁을 치러야 하는 입장이 된 윤영민의 부담은 이루 말로 할 수 없었다. 그나마 단독 작전이 아니라는 것이 위안이 되기는 했지만 말이다.

    "KSF는?"

    "다수입니다. 혼선을 초래할 수 있으니, NDF만 활용하고 싶습니다."

    "흐음, 그래도 이왕이면 능력자들을 좀 더 많이 동원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국방부 장관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민간인에게 총을 쥐어 주어도 군인과 화력에서는 차이가 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민병대는 정규군과 같은 전투력을 낼 수 없습니다. 명령에 순간적으로 반응하여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타깃으로 보게 만드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대부분의 KSF 대원들은 사람을 발견할 시에 최우선적으로 구조하는 훈련을 받아왔습니다. 혼선이 초래될 것입니다."

    확실히 일리가 있는 의견이었다.

    "국방부 장관의 말이 옳겠지요."

    윤영민은 자신의 한계를 잘 알고 있었다. 그 자신이 대통령이라고는 하나 군사적인 식견이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선택권이 그에게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뿐, 좀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의 의견을 따라주는 것이 그가 선택해야 할 가장 옳은 방안이었다.

    "이번 작전에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운명이 달려 있습니다."

    "네."

    "그리고 작전이 실패할 시에 가장 직접적으로 사태를 직면해야 할 곳이 우리라는 것을 잊지 말아주십시오."

    "명심하겠습니다."

    "최정훈 씨."

    "예, 대통령님."

    "NDF를 실질적으로 총괄하고 있는 것은 최정훈 씨입니다. 이번 작전에도 최정훈 씨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알고 계시죠?"

    "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최정훈의 눈이 가라앉았다.

    '어려운 일이야.'

    북한이든, 중국이든, 미국이든, 능력자 전력이라면 어디에도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북한 능력자들은 분명 대인 훈련을 기본으로 받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능력자들은 사람을 상대로 능력을 사용한 경험이 없었다.

    그 부분이 최정훈의 마음을 짓눌렀다.

    * * *

    "진짜 기분 안 나빠?"

    "거참, 성격 이상하네."

    이지혁은 꼬치꼬치 캐묻는 정해민을 보며 인상을 썼다.

    "일을 하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하지 말라고 하는데 왜 내가 기분이 나빠야 한다는 건데?"

    이지혁이 빨대로 아이스 라떼를 휘휘 젓기 시작하자 정해민이 눈을 가늘게 떴다.

    "세상에는 그런 사람이 있어."

    "무슨 사람?"

    "일을 하기 싫어 죽겠는데, 또 자기 없이 일이 돌아가는 꼴은 못 보겠는 거야."

    "……."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뭔 소리야?"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사실 그런 사람들이 굉장히 많아."

    "나는 그런 성격파탄자가 아니거든."

    "그랬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정해민이 묘하게 여지를 남기자 이지혁은 피식 웃고 말았다.

    "네가 성격이 안 좋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런 법이야. 지금까지 네가 해온 것이 있는데 이제 너를 쏙 빼고 일을 진행한다고 하면 누구라도 기분이 좋을 수가 없지."

    "나는 아니네요."

    이지혁이 빨대를 쪽 빨았다.

    정해민이 하고 있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지는 않지만, 이지혁은 정말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기분 나쁨을 느끼지 않고 있었다.

    그가 느끼는 것은 배제된 것에 대한 짜증이 아니라 미묘한 불안함이었다.

    '이리 나올 것을 모르지는 않았을 텐데.'

    정민성 홀로 벌인 일이라면 신경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의도가 무엇이든 모든 계획은 현실의 저항을 이겨낼 수 있어야 이루어질 수 있는 법이니까.

    정민성의 계획은 원래라면 이뤄질 수 없는 일이었다.

    마지막까지 철저히 숨길 수 있었다면 이뤄졌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처럼 모든 것이 까발려진 이후라면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빤했다.

    세계에서 가장 군사력이 강하다고 할 수 있는 네 나라가 동시에 달려드는데, 버틸 수 있다면 북한은 이미 아시아를 정복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꾸 뭔가가 찝찝하단 말이야."

    "뭐가?"

    "바보가 아니어야 하는 놈이 바보처럼 굴고 있으니, 기분이 이상할 수밖에."

    "……뭔 소린지 모르겠네."

    "뭐, 됐고."

    이지혁이 가만히 정해민을 바라보다가 뭔가 생각이 났는지 씨익 웃었다.

    "그러고 보니… 너, 아이돌 하던 건 어떻게 됐어?"

    "요즘 좀 풀려서 할 만해. 신곡도 나와."

    "탄압이 좀 줄었나 봐?"

    "응."

    정해민이 보기에 이지혁은 스스로에 대한 자각이 없는 것 같았다.

    연예계 쪽에서 능력자들에 대한 규제를 풀기 시작한 시점은 이지혁이 윤영민과 조우한 시점과 동일했다.

    대놓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지혁이라는 존재가 사회 전반적으로 가해지던 능력자들에 대한 압박을 제거해 버린 것이다. 이지혁의 위력을 실감한 정치권이 능력자들을 탄압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넓은 범주로 보면 이지혁도 능력자니까.

    능력자를 계속 탄압하려면 이지혁도 탄압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는데, 다른 능력자들은 반발을 하더라도 제압할 수 있을지 몰라도 이지혁이 반발을 하는 순간, 대한민국은 엄청난 소요에 휘말려야 할 것이다.

    '막말로 몬스터만 풀어놔도 나라 망할 텐데.'

    물론 이지혁이야 탄압을 당한다면 탄압을 하는 주체를 제거하는, 간단한 방법을 쓸 확률이 더 높았다.

    나라의 입장에서 보면 다행이지만, 그 주체인 정치인들 입장에서는 그것보다 무서운 일이 없을 것이다.

    "고마워."

    "응?"

    "덕분에 계속할 수 있게 됐거든."

    "…뭔 헛소리야?"

    정해민은 고개를 젓고 말았다.

    저런 부분에서 영 정이 가지 않는다.

    "그런데 그건 왜 물어? 별로 관심도 없잖아. 아이돌."

    이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구로 처음 돌아왔을 때만 해도 그런 부분에 나름 즐거움을 느꼈지만, 지금은 딱히 관심이 없었다.

    처음에야 이쁜 여자애들이 화려하게 뛰어다니니 재미가 있었지만, 자극이란 것은 쉽사리 무뎌지기 마련이고, 매번 그런 것만 보니 흥미가 짜게 식어버린 것이다.

    "재미있는 생각이 떠올라서."

    "응?"

    "나 동창회 가거든."

    "응?"

    "같이 가자."

    "…응?"

    정해민이 영문을 몰라서 고개를 갸웃했다.

    * * *

    NDF는 긴장으로 물들어 있었다.

    다들 딱히 말을 꺼내지는 않았지만, 곧 북한으로 파견이 된다는 사실이 그들을 조여오고 있었다.

    "분위기가 싸하네."

    김다현이 사무실을 둘러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곧 죽으러 가야 할지도 모르는데 분위기가 좋을 수가 있나요."

    "죽긴 누가 죽어요?"

    김다현이 그런 소리 하지 말라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너스레는 좋았지만, 윤혁규는 멈추지 않았다.

    "막말로 이번에는 전투에 동원되는 거잖아."

    "어차피 몬스터를 상대하는 것도 전투잖아요."

    "아니죠. 다르죠."

    윤혁규가 선을 그었다.

    "막말로 이야기해서 몬스터와 싸우는 것은 소방관 개념이지 않습니까."

    "음……."

    "재해가 벌어지는 곳에 투입돼서 재해를 해결하는 거죠.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느낌? 우리가 해외로 파견을 좀 다니기는 했지만, 대체적인 느낌은 다르지 않을 겁니다. 그렇지 않나요?"

    "그도 그렇네요."

    "그런데 이건 아니란 말이죠."

    윤혁규는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이건 우리가 군인이 된 거잖아요. 그것도 쳐들어가는 입장이란 말이에요."

    "어쩔 수 없잖아요."

    "어쩔 수 없어요?"

    윤혁규는 웃고 말았다.

    "다현 씨는 KSF에 처음 등록할 때, 타국에 능력자로서 쳐들어가게 될 거라는 말 들은 적 있나요?"

    "…없죠."

    윤혁규가 그것 보라는 듯 말했다.

    "처음부터 우리가 군인의 역할을 일정 부분 감당해야 한다고 설명이라도 들었으면 이런 기분은 아닐 거예요. 그런데 사정 좋을 대로 써 먹다가 이제는 전쟁까지 하라고 하는데, 누가 좋아하겠어요."

    문이 열리며 안으로 들어온 이가 윤혁규의 말을 받았다.

    "확실히 그건 그렇지."

    최정훈을 본 윤혁규가 고개를 까딱 숙였다.

    "그 부분에 있어서는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최정훈이 깊이 고개를 숙이자 윤혁규가 당황하여 손을 내저었다. 최정훈이 이리 나오니 조금 전에 감정을 담아서 고개만 까딱했던 것이 소심한 짓거리같이 느껴져 얼굴이 달아올랐다.

    "이러지 마세요. 부부장님 잘못 아니라는 거야 저도 알고 있습니다. 우리야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잖아요."

    "…그래서 미안하다는 겁니다."

    최정훈은 한숨을 쉬었다.

    어느새 사무실 안에 있는 사람들이 다들 최정훈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쪽에서 결코 참가하지 않겠다고 했으면 참가하지 않을 수도 있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번 일에 빠진다면 득보다 실이 너무 많다고 판단했습니다."

    김다현이 손을 들었다.

    "예, 말씀하세요."

    "타국의 능력자들은 다 참전하나요?"

    "그쪽도 정예부대들이 다들 참가하기로 했습니다."

    "그럼 뭐, 어쩔 수 없네요. 우리만 안 하겠다고 버팅길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요."

    최정훈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확실히 그런 면이 있습니다. 그러니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해를 해주시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때, 묵묵히 최정훈을 바라보고 있던 박성찬이 묵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해야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다만……."

    박성찬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모였다.

    "이건 몬스터 퇴치가 아닙니다. 목숨을 걸고 전쟁을 하러 가는 일이죠. 그런데 그 전쟁에 대한 참여가 우리의 동의 없이 결정되었다는 측면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겠습니다."

    최정훈이 얼굴을 굳혔다.

    "실제로 최전방에서 싸워야 하는 것은 우립니다. 그런데 왜 이런 사태는 우리를 제외하고 결정이 나는 겁니까?"

    "…제외한 것이 아니죠."

    최정훈이 어물어물하자 김다현이 입을 열었다.

    "뭘 제외했다는 거예요? 최정훈 씨가 갔다 왔잖아요."

    박성찬이 코웃음을 쳤다.

    "최정훈 씨가 우리를 대표할 자격이 있나?"

    "왜 없어요? 부부장님인데."

    "그래?"

    박성찬이 주변을 둘러보고 말했다.

    "다들 동의하나?"

    대답은 미온적이었다. 다들 최정훈에 대해서는 나쁘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지만, 그 부분에 있어서는 쉽게 최정훈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좀 민감한 문제이기는 하죠."

    윤혁규의 말에 김다현이 눈살을 찌푸렸다.

    "왜 이래요? 그동안 같이 고생했잖아요."

    "그야 그렇지만."

    육혁규가 조금은 미안한 얼굴로 최정훈에게 말했다.

    "사실 부부장님은 NDF의 대표지, 우리의 대표는 아니잖아요."

    "…그렇긴 합니다."

    최정훈은 윤혁규가 하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바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NDF에 소속되어 있을 때, 최정훈은 그들을 대표할 자격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NDF가 아니라면, 일반인인 그는 능력자들을 대표할 수 없는 것이다.

    개가 고양이를 대표할 수 없듯이.

    "그 부분에 대해서는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워낙 급박한 상황이었는데다 마땅히……."

    "뭐, 우리 쪽에서도 딱히 대표라고 할 사람이 없었다는 건 인정하지만, 다음부터는 그런 경우에 급한 대로 부장이라도 데리고 가라고."

    "급한 대로 말이죠."

    박성찬의 말에 최정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 급하게 하겠습니다."

    "그럼 더 좋고."

    서아영을 데려가서 능력자들의 대표를 시킨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빤했다.

    "그래서, 작전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세부 지침은 아직 나오지 않았습니다. 일단 시기는……."

    최정훈이 살짝 목소리를 낮췄다.

    "삼 일 뒤가 될 겁니다."

    "삼 일이라……."

    박성찬이 고래를 저었다.

    "너무 촉박한 것 아닙니까? 우리도 나름 준비할 시간이 필요한데."

    "북한 측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계속 시간을 끌 수는 없습니다."

    "그도 그렇군요."

    대충 상황이 일단락된다 싶자 최정훈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된 것에 대해서는 사과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정말 여러분의 도움이 없이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최정훈은 그들의 반응을 이해했다.

    하루아침에 전쟁터에 끌려가야 하는 사람들로서는 기분이 좋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지혁 씨는요? 안 보이시는데?"

    "이지혁 씨는 이번 작전에 참가하시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고요하던 사무실이 일순 술렁이기 시작했다.

    "…참가하지 않는다구요?"

    "예. 그렇게 결정 났습니다."

    "왜요?"

    "일단은 상부 측의 판단이라고 해두겠습니다."

    요원들의 눈에 의혹이 어렸다.

    이지혁이 KSF에 들어온 이후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작전에 제외된 적은 없었다.

    매번 싫다 싫다 하면서도 그가 나서야 한다 싶은 일이면 어떻게든 끼어들어서 상황을 정리해 왔던 이지혁이다.

    죽겠다고 말은 하지만, 이지혁이 함께 움직여 주는 것에서 그동안 얼마나 위안을 받았던가.

    요원들의 얼굴이 어두워지자 서아영이 혀를 찼다.

    "뭐야? 이지혁 씨 없으면 아무것도 못해?"

    "……."

    "그 양반 없었을 때도 우리는 잘해왔어. 그런데 이제 와 이지혁 씨가 없으니 겁이 난다고 말하기 쪽팔리지도 않아?"

    "누가 겁난답니까?"

    윤혁규가 발끈하자 서아영이 씨익 웃었다.

    "그래, 그래야지."

    서아영이 다시 바라보자 최정훈이 입을 열었다.

    "결행은 삼 일 후입니다. 그전에 교육이 있기는 하겠지만, 각자 마음을 다잡아주십시오."

    낮은 한숨이 어디선가 새어 나왔다.

    * * *

    "나 왔어."

    오식이가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는 이지혁에게 꼬리를 쳤다.

    "너, 여기 있었어?"

    목줄을 매놓아도 소용이 없다 보니 요즘 오식이는 NDF의 앞과 이지혁의 집을 제멋대로 오가고 있는 중이었다.

    최정훈이 오식이가 이렇게 마음대로 돌아다니다가 사고라도 나면 어떻게 하냐고 딴지를 걸어서 쇠사슬로 목줄을 만들기고 했지만, 와이어로프로도 감당이 안 될 애를 쇠사슬로 묶을 수가 있겠는가.

    결국 오식이는 자유를 손에 넣었다.

    이지혁은 오식이가 사람을 해치지 않도록 나름 금제를 해둔 상태여서 불안할 것은 없지만, 다른 이들은 집 앞에 오거가 있다는 사실을 탐탁치않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지금이야 다들 익숙해져서 그러려니 하지만, 모습은 이래도 오거인 것이다.

    "오식아."

    이지혁이 오식이를 번쩍 들어서 한쪽 무릎에 올려두었다.

    컹?

    지금까지 이런 적이 없었는데 이지혁이 뭔가 다정하게 굴자 오식이가 영문을 몰라서 고개를 갸웃했다.

    "너, 집에 갈래?"

    커엉?

    "내가 생각을 해봤는데, 너도 여기서 사는 게 좀 힘들지 않냐? 간다고 하면 보내줄게."

    오식이의 고개가 획획 돌아갔다.

    "시험하는 거 아냐. 나중에 패지도 않을 거야."

    하지만 오식이는 여전히 필사적으로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집에 가기 싫어?"

    컹!

    "왜?"

    오식이의 발에 땀이 차기 시작했다.

    말도 못하는데 뭘 어떻게 설명을 하라는 말인가.

    아무리 종속의 인이 찍혀 있어서 심령으로 어느 정도 소통은 된다고는 하지만, 디테일한 감정이나 상황을 전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게 되면 종속의 인이라 불리겠는가, 텔레파시지.

    "내 생각인데……."

    오식이는 이지혁의 말에 귀를 쫑긋 세웠다.

    "너는 몬스터잖아. 우리 눈에는 괴물이나 다름없지. 지금 네가 이런 모습을 하고 있으니까 사람들의 거부감이 덜한 거지, 네가 본모습으로 돌아다니고 있으면 당장에 난리가 날 거야. 그지?"

    컹.

    "네 본모습을 알고도 놀라지 않는 이들이 있는 세계에서 살아가는 게 너한테도 좀 더 즐겁지 않을까?"

    커엉!

    "아냐?"

    컹!

    "…여기가 나아? 왜?"

    오식이가 가만히 이지혁을 바라보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응?"

    컹!

    오식이가 이지혁의 무릎에서 뛰어내리더니 고갯짓을 했다.

    "따라오라고?"

    컹!

    "이게 뭔 짓을 하려고……."

    이지혁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가만히 오식이의 뒤를 쫓았다. 오식이는 뒤를 힐끔거리면서도 잘도 뛰어갔다.

    "너 어디 가는 거야?"

    점점 외각지로 나간다 싶더니, 오식이가 능력자 거주구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헐?"

    목줄 안 하고 돌아다녀도 그러려니 했더니, 이게 이제 보니 온 동네늘 다 돌아다니고 있었다. 능력자 거주구 밖으로는 이지혁도 잘 다니지 않는데, 저 조그만 몸으로 얼마나 쏘다녔는지 길을 가는 데 거침이 없었다.

    "하기야."

    생각을 해보면 베라프에서의 오거는 100㎞가 넘는 영역을 가지는 생물이다.

    아무리 몸이 작아졌다고는 하나 기본적으로 영역 동물인 오식이가 자신의 영역을 파악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었다.

    '내가 너무 무심했구나.'

    혼자 이런저런 곳을 돌아다니면서 얼마나 외로웠을까.

    이지혁은 자신의 처지와 오식이의 처지가 비슷한 면이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이라도…….

    "응?"

    하지만 전혀 예상 밖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컹! 컹!

    도착한 곳은 외각지에 위치한 공원이었다.

    "어머! 메리 왔네."

    "메리야! 이리 와봐!"

    이지혁은 오식이를 반기는 사람들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가.

    공원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사람들이 오식이에게로 몰려들더니, 안아 들고 쓰다듬기 시작했다.

    "간식 먹으러 왔구나. 자, 여깄다."

    오식이가 자신에게 떨어지는 간식들을 좋다고 먹어 치웠다.

    "얘는 진짜 입맛이 까다로워."

    "주인이 사람 먹는 거 먹여서 키우는가 봐. 강아지 간식은 입에도 안 대잖아."

    "소시지 킬러야, 소시지 킬러."

    "……."

    허허허.

    사람들이 주는 소시지를 받아먹는 오식이를 보며 이지혁이 허탈하게 웃었다.

    저기, 오식아.

    너는 오거란다.

    지금 니 앞에 있는 사람들은 베라프에서면 니 밥이야. 밥이라고.

    어떻게 밥이 주는 간식을 먹고 애교를 떨어 댈 수가 있는 거냐!

    이것을 적응이라 해야 하는가!

    "꺄아아아! 귀여워!"

    젊은 여성들은 오식이를 찍느라 정신이 없었다.

    "근데 얘는 종이 뭐지?"

    "잡종이겠지."

    "잡종이 이렇게 귀여워?"

    "원래 섞인 애들이 크면 안 귀여워서 그렇지, 새끼 때는 귀여워."

    이보세요들.

    걔 나이가 이백은 넘었어요.

    이지혁은 뭔가 부들부들하는 느낌을 억누르며 오식이를 바라보았다.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인 오식이는 더없이 행복해 보였다.

    그야 밥 주지, 간식 주지, 이뻐해 주기까지 하니 싫을 리가 없지.

    다른 개들을 데리고 산책을 나온 이들도 하나둘 오식이에게 모여들어 쓰다듬었다.

    "참 이상한 게, 우리 개는 내가 다른 개 만지는 걸 엄청 싫어하는데, 얘는 만져도 가만히 있다니까. 사이가 엄청 좋은가 봐."

    그게 아니라 뒈지기 싫은 거겠죠.

    목줄에 끌려서 오식이의 바로 앞까지 다가온 개가 오줌을 지리기 시작했다.

    본능적으로 포식자를 알아본 개들은 차마 도망도 가지 못하고 바짝 굳어서 오식이의 눈치를 살피기 바빴다.

    "…이게 뭐야?"

    저 썩을 놈!

    내가 방금 전까지 그렇게나 걱정해 주었는데, 알고 보니 이런 데서 왕처럼 살고 있었구나!

    어쩐지 심심하면 사라진다 했다!

    지금까지는 NDF와 집을 오가느라 중간에 엇갈린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한참이나 사람들과 놀고 나서야 오식이가 쫄래쫄래 걸어서 이지혁에게로 다가왔다.

    컹!

    "그래, 봤다."

    니가 나보다 낫네.

    어휴.

    이지혁은 오식이를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는 사람인데도 아직 이 세상에 완전히 적응하지 못했건만, 오식이는 몬스터임에도 이 세계의 일원이 되어 살아가고 있었다.

    이건 오식이가 적응력이 좋은 것이겠지만…….

    "그래서 여기가 더 편하다고?"

    컹!

    "하기야……."

    따져 보면 힘들게 사냥할 필요도 없고, 앉아서 밥 받아먹는 여기가 짐승의 입장에서는 더 편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동물원처럼 가둬두는 것도 아니고, 지 가고 싶은 곳은 다 다니고 있으니.

    "그래도 뭔가 아쉽지 않냐? 지역이라도 좀 산 같은 곳으로 바꿔줄까?"

    오식이가 깔끔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래, 산은 심심하지."

    나름 그래도 오거 로드라고 할 수 있는 오식이건만.

    베라프로 돌아가면 전설적인 오거로 이름을 날릴 것이고, 다른 오거들을 지배하여 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 뭐하나, 소시지도 없는데. 그치?"

    컹.

    "그래, 집에 가자."

    뭔가 지금까지 자신이 하고 있던 고민이 다 쓸모없이 느껴졌다.

    오식이에게 더 어울리는 곳이 베라프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도 없었다. 그곳으로 돌아가는 것이 훨씬 더 자연스럽다.

    하지만 자연스러움이 꼭 이로움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식이도 그것을 알고 있는지, 베라프보다는 이 지구를 택한 것이다.

    "그래도 오거 가오가 있지, 사람한테 꼬리쳐서 간식 얻어먹는 건 좀 심하지 않냐?"

    오식이가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렸다.

    "…그런 거 없구나."

    하기야 짐승한테 뭔 가오가 있어.

    밥 주면 주인이지.

    이지혁은 바닥에서 쫄쫄거리는 오식이를 잡아서 머리 위로 올렸다.

    "집에나 가자."

    * * *

    이지혁은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도 없나?"

    오늘 따라 집 안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요즘 다들 뭐하느라 그리 바쁜지 모르겠네."

    아펠드리체와 에르카나는 요즘 얼굴 보기가 굉장히 힘든 느낌이었다.

    그리고 아펠과 에르카나야 그렇다 치고, 어머니는 또 어디에 있는 것인가.

    "가게 가셨나?"

    실내에 불을 켜고 나서 샤워를 마친 이지혁이 냉장고 안에 든 콜라를 꺼내 컵에 따랐다.

    "크!"

    시원하게 한잔하고 나니 속이 시원해지는 느낌이다. 이 콜라 한 잔을 먹는 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던가.

    지금 그가 누리고 있는 것들은 공짜로 얻은 것이 아니다. 너무나 많은 대가를 치르고 나서야 얻어낼 수 있던 것들이다.

    한데 그 사실을 가끔은 잊어버리고 만다.

    '적응을 하기는 했네.'

    이 모든 것들이 당연하게 느껴지는 것을 보면, 확실히 그도 이 세상에 적응했다고 볼 수 있었다. 처음 이 세계에 돌아왔을 때는 콜라 한 잔에 눈물을 흘렸고, 평범한 옷을 보고도 감동했는데 말이다.

    '익숙해졌다고 해서 소중하지 않다는 건 아니야.'

    따져 보면 지구로 돌아오고 나서 이지혁은 오히려 베라프에서보다 더 바쁘게 살고 있었다.

    베라프에서 겪은 일들은 막대하지만, 무한의 시간이 주어져 있기에 다급한 적이 없었다. 이번에 안 되면 다음에 하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세계에서는 한 번의 실패가 모든 것의 끝을 의미한다.

    "한 번의 실패라……."

    이지혁이 가만히 콜라 잔을 바라보고 있을 때 현관이 열리더니, 어머니가 안으로 들어왔다.

    "언제 왔니?"

    "좀 전에."

    "일찍 올 거면 말을 좀 해주지. 엄마가 먼저 와서 밥 차렸을 텐데."

    "밥이야 내가 차려 먹어도 된다니까."

    "그래도 일하는 우리 아들내미 밥은 내가 먹여야지."

    "그러다 엄마 없으면 나는 어떻게 밥 먹어. 내가 혼자 차려먹는 버릇해야지."

    어머니의 눈이 꿈틀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응?"

    "혼자 차려 먹다니! 장가를 가서 밥상 받아먹으면 그만이지!"

    "자, 장가?"

    이지혁의 머릿속으로 순간적으로 에르카나가 떠올랐다.

    '가긴 갔는데, 엄마.'

    물론 에르카나에게 정상적인 밥상을 받아먹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마족과 인간은 식성부터가 다른 것이다.

    "장가가도 내가 밥을 차려 먹어야지."

    "마누라 놔두고 니가 왜 밥을 차려!"

    "…예원이 시집가도 밥 차려 주라고 할 거야?"

    "아니지. 그건 지가 차려 먹어야지.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마누라한테 밥상을 받아먹겠다는 소리야?"

    "엄마, 말이 좀 이상한데, 그거."

    "시끄럽다."

    어머니는 단호했다.

    "일단 내 자식이 편하면 돼."

    무한한 자식 사랑에는 존경을 표하지만… 어머니, 그래도 잣대는 비슷하게라도 들이대셔야죠.

    "나는 바라는 거 없어."

    "응?"

    "이제 돈도 벌 만큼 벌었고, 너희들도 클 만큼 컸어. 이제 네가 장가가서 손주 낳는 것만 보면 여한이 없다."

    "…여한이 있으시겠네, 울 엄마."

    "그러니 빨리 장가부터 가라. 넌 어차피 돈도 많은 애가 뭐하러 시간을 끌어? 빨리 장가가서 애나 낳지."

    "장가는 혼자 가나?"

    어머니가 이지혁을 타박하기 시작했다.

    "니 주변에 굴러다니는 것들이 다 여자다! 여자! 그것도 어디서 이쁜 것들만 골라서 데리고 다니는 것이 그게 할 말이냐?"

    "에이, 걔들은……."

    "원래 다 '오빠오빠'하다가 '여보여보' 되는 거야."

    이지혁은 조금 뚱한 얼굴로 고민을 시작했다.

    따져 보면 이 세계에서 결혼을 한다는 것이 그에게 용납이 되는 일일 것인가.

    그때, 이지혁의 주머니에서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 * *

    "응?"

    자신에게 걸려올 전화가 있었던가?

    한동안 작전에서는 배제된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그에게 연락이 올 일이 없었다.

    그와 관련된 사람이라 봐야 다들 NDF소속이고, 그들은 지금쯤 작전 준비로 여념이 없을 것이 분명하니 지금 전화를 할 사람이 없을 텐데?

    액정에 뜬 이름을 본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으응?"

    액정에 뜬 최창혁이라는 이름을 확인한 이지혁이 씨익 웃으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어, 지혁아. 난데.

    "응, 그래. 무슨 일이야?

    - 그 동창회 말인데…….

    "응."

    - 하기로 했거든?

    "아, 그래?"

    이지혁은 신기한 심정이었다. 물론 동창회를 하면 재미있기는 하겠지만, 정말 하겠다고 나설 줄은 몰랐다.

    그도 눈치가 있는 사람이고,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동창들이 그를 꺼린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다.

    '이상하게 말이야.'

    딱히 자신은 누구를 괴롭힌다거나 한 적이 없는데 왜 꺼리는 것일까?

    여하튼 그런 상황에서 동창회를 하겠답시고 먼저 연락을 한 것을 보니 기특했다.

    "동창회를 한다고?"

    - 어. 응.

    "호오, 재밌겠네. 언제?"

    - 아마도 내일이나 모레쯤 하게 될 것 같은데, 아직 정확하게 시간이 정해지지는 않았어. 정해지면 말해줄게.

    "응, 알았어."

    이지혁이 피식 웃고는 전화를 끊었다.

    "웬일이래?"

    "……지혁아."

    "응?"

    어머니가 그를 불렀다.

    "너 동창회 가니?"

    "응. 애들이 한 번 보자고 하네. 내가 워낙에 인기가 많잖아."

    "그렇게 입고?"

    "……."

    이지혁의 고개가 아래로 내려갔다.

    "안 돼?"

    어머니의 얼굴이 푸들푸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따위로 입고 애들 앞에 나서겠다고?"

    "어머니, 이 옷은 독일 명가 A사가 만들어낸 최고의 기능성 옷으로서……."

    "엄마의 최고로 처맞아볼래?"

    "죄송합니다."

    이지혁의 입이 툭 튀어나왔다.

    나름 편의성과 기능성, 그리고 디자인을 모두 만족시킨 옷이건만, 왜 이해를 해주지 않는단 말인가.

    그때, 문이 열리더니 예원이가 안으로 들어왔다.

    "응? 오빠 어디 간데?"

    "동창회 간단다."

    "와! 재밌겠다. 그런데 우리 여사님은 또 왜 그렇게 심통이 나 계셔?"

    "……이거 입고 간단다, 이거."

    어머니가 이지혁의 옷을 쭉쭉 잡아당겼다.

    "훗, 최고의 원단으로 만든 기능성 옷을 얕보지 마시죠. 이 정도로는 늘어나지 않습니다."

    "자랑이다."

    이예원이 벌레를 보는 듯한 눈으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그걸 입고 동창회에 나가겠다고?"

    "왜?"

    "오빠는 동창회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오랜만에 애들 만나는 자리?"

    "쯧쯧쯧쯧."

    이예원이 손가락을 까딱까딱 했다.

    "동창회라는 것은 헤어진 남자 친구를 다시 만나는 것과 같은 거야."

    "남자 친구 맞잖아?"

    "오빠 입장에서는 여자 친구지."

    "헤어진 여자 친구?"

    "그래. 헤어지는 그 순간부터 누가누가 더 잘사나 배틀이 시작된다. 현실에서야 새우깡에 소주 마셔도, 남자 친구가 볼 것이 확실한 인스타나 페북에는 스테이크 써는 모습이랑 명품 가방을 올려야 하는 거야."

    "……."

    "그리고 이왕이면 여행지나 비싼 저녁을 근사한 와인과 함께 먹는 사진을 올리는 것도 좋지. 지금 더없이 행복하다는 듯이 말이야!"

    "어, 어째서?"

    "그래야 내가 너랑 헤어지고 나서도 더 잘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으니까! 그건 자존심의 문제야!"

    이지혁은 혼란에 빠졌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린가.

    "굳이 그래야 할 이유가 있나?"

    "나랑 헤어졌는데 쟤가 더 잘살면 열 받잖아."

    "……그래."

    굳이 이해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았다. 이해의 영역이 아니었다.

    "동창회도 똑같아. 학교에서야 다들 비슷비슷하지만, 사회에 나가고 나서는 누가 더 잘사는가의 경연장이라고."

    "동창회가 그런 거야?"

    "당연하지! 아니면 이미 끊어진 인연인데 뭐하러 다시 봐?"

    이지혁은 한탄할 수밖에 없었다.

    동창회라는 유서 깊은 문화가 이렇게까지 매도를 당하다니. 전국의 총동문회들이 들으면 학을 뗄 발언이었다.

    "그런데 그따위로 입고 가겠다고?"

    "나는 그 꼴 못 본다."

    "절대로!"

    마치 한 사람이 말하는 것 같았다.

    "그게 어디 동네 노는 형이나 입고 다니는 패션이지!"

    "백수도 아니고, 그게 뭐니? 네가 직장이 모자라니, 돈이 없니? 번듯하게 잘살면서 그렇게 입고 다니면 사람들이 무시한다. 넌 차도 없잖아. 다른 애들은 다 차 타고 나올 텐데."

    "……내 친구들 대학생이야."

    "요즘은 대학생들도 차 다 탄다."

    이지혁은 더 이상은 버틸 수가 없었다.

    "그, 그럼 저번에 다솜이랑 같이 쇼핑했던 옷으로 입고 갈게."

    "안 돼."

    이예원이 단숨에 이지혁의 말을 잘랐다.

    "또 왜?"

    "흥. 김다솜이 보는 눈이 좀 있기는 하지만, 동창회는 그런 자리가 아니야."

    "……."

    "걔가 산 거라 봐야 빤하지. 보나마나 중저가 메이커로 꾸몄겠지. 그러면 안 되는 거야."

    "그럼?"

    "누가 봐도 비싼! 누가 봐도 '와, 저건 돈 좀 줬구나! 얘 좀 잘사나 보네?' 할 수 있는 그런 옷으로 쫙 빼야지. 명품으로!"

    "……."

    이지혁은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꼬, 꼭 그래야 하는 거야?"

    대답은 어머니에게서 나왔다.

    "아들."

    "응?"

    "솔직히 엄마도 그런 거 별로 안 좋아해. 말이 명품이지, 그 돈 주고 옷을 사는 게 말이 되니? 난 그런 거 싫다."

    "그렇지?"

    이지혁이 화색이 되었다.

    "하.지.만."

    "으응?"

    어머니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내 새끼가 무시당하는 꼴은 더 못 본다."

    "……."

    이걸 모정이라고 해야 하는 것인가, 허영심이라고 해야 하는 것인가.

    두 가지가 미묘하게 섞여 있는 그 갈림길 사이에서 이지혁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준비해."

    "뭐, 뭘?"

    "쇼핑 간다."

    "……."

    아무래도 동창회는 취소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 * *

    "우리 집에 이런 차가 있었나?"

    이지혁이 집 앞에 세워진 검은 세단을 보고는 놀라서 말했다.

    "아버지 차잖아."

    "아빠가 차를 타고 다녔어?"

    "그럼 회사는 어떻게 나갔다고 생각하는 거니?"

    "아……."

    "너네 아빠도 한때는 잘나갔어."

    그러자 아버지가 헛기침을 했다.

    "여보, 나 지금도 전이랑 크게 차이가 없는데."

    "예전에는 돈도 잘 벌어왔단다."

    "여보, 나 지금도 예전처럼 벌고 있어요."

    "이제 출발해야지. 그런데 너희 아버지 어디 가셨니?"

    좌절한 아버지가 보닛을 부여잡는 것을 본 이지혁이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 숙인 남성이여.

    이지혁은 고개를 저으며 차에 올랐다.

    네 가족이 같이 차를 타고 이동하는 것은 이 세계로 돌아온 이후로 처음인 것 같았다.

    '묘한 기분이네.'

    예전에 학교를 다닐 때 아버지가 차를 태워주던 생각이 난다.

    학교를 가기 싫어하는 이지혁의 귀를 잡아끌어 차에 억지로 태우고 등교를 시키던 어머니와 이지혁을 학교 앞까지 데려다 주던 아버지.

    '나름 평범한 일상이었는데 말이야.'

    세상에 괴물들이 나타나면서 많은 것이 뒤틀어졌다. 이지혁의 가족은 그리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영향을 받지 않을 수는 없었다.

    * * *

    백화점에 가서 주차장에 차를 댄 후, 가족들이 차에서 내렸다.

    "으음, 그럼 나는 이 주변에 있을 테니, 쇼핑 끝나면 전화해요."

    "같이 안 가세요?"

    이지혁의 물음에 아버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쇼핑은 질색이야."

    저두요.

    어머니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허락하자 아버지가 날아갈 듯한 걸음으로 반대쪽으로 걸어 나갔다.

    "크윽."

    배신자.

    혼자 살겠다고 빠져나가다니.

    "너는 이리 와."

    이지혁의 뒷목을 움켜잡은 어머니의 손은 우악스러웠다. 장난꾸러기라고 말하기에도 민망할 만큼 미친 아들내미와 정신 나간 딸내미를 두 손으로 키워냈다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손이었다.

    "끄응."

    이지혁은 백화점으로 끌려 들어가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 *

    "예쁘네."

    "오!"

    어머니는 반색을 했고 이예원은 감탄한 얼굴이었다.

    "남자는 옷발과 머릿발이 반이라더니."

    평소에 트레이닝복만 입고 다닐 때는 그냥 동네 노는 형처럼 보였는데, 슈트를 입혀놓으니 확실히 인물이 사는 느낌이었다.

    "미친 듯이 불편한데?"

    하지만 이지혁은 오만상을 써 댔다.

    뭔가 갑갑하다.

    팔을 들어 올릴 때도 뭔가 걸리적거리는 느낌이 드는 것이, 영 불편했다.

    "그냥 새 트레이닝복이나 사면 안 되나?"

    "집에서도 트레이닝하게 만들어줘?"

    "……잘못했습니다."

    어머니는 그 이후로도 이지혁에게 몇 벌이나 되는 슈트를 입히더니, 결국 이지혁이 탈진하기 직전까지 가서야 겨우 한 벌을 골랐다.

    "얼마요?"

    물론 숫자를 잘못 들은 것은 아니다.

    이지혁의 청력을 감안한다면 말을 잘못 들을 리가 없었다. 문제는 그 숫자가 귀로는 들어오는데, 도무지 뇌로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네, 고객님. 삼백삼십만 원입니다."

    "……."

    이지혁은 부드럽게 웃으면서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어머니께 한 음절씩 끊어서 확실하게 말을 했다.

    "안 사!"

    "……그, 그럴래?"

    어머니도 가격을 듣고는 혼이 조금 나갔는지 이지혁의 말에 동의를 해주고 있었다.

    "어, 엄마, 생각해 보니 오빠가 입기에는 좀 올드한 것 같아. 여기 원래 아저씨들 입는 브랜드잖아."

    "그래?"

    이지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매장 밖으로 나왔다. 옷 쪼가리가 삼백만 원이라니, 백화점이라는 곳은 대체 얼마나 무시무시한 곳이란 말인가.

    "이제 가면 돼요?"

    "아니."

    어머니가 단호하게 말했다.

    "명품은 모르겠지만, 슈트는 사야 된다!"

    "그래, 오빠. 저건 너무 비싸다. 어차피 옷장에 넣어놓고 몇 번 입지도 않을 건데. 그지?"

    "그렇긴 한데……."

    이지혁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고 보니 너 전에 오백만 원짜리 백 사지 않았던가? 지는 오백짜리 백을 들고 다니면서 오라비에게는 삼백짜리 옷이 아깝다고?

    물론 옷을 살 리도 없겠지만, 뭔가 기분이 미묘해지고 있었다.

    "하하하, 비싸지? 그렇지?"

    "끄응."

    이지혁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

    통장에 수백억을 쌓아놓고 있으면 뭐하나, 알맹이는 그냥 서민인데.

    의식 개혁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비싼 옷을 살 일은 평생 없을 것 같았다.

    그 이후도로 악전고투 끝에 겨우 옷과 셔츠, 넥타이와 구두를 장만한 이지혁이 완전히 퍼져서 헉헉댔다.

    "가, 가자. 제발 집에 가자."

    이곳은 지옥이었다.

    왜 창문도 없고, 시계도 없는가.

    이만한 건물에 창문 하나 안 만들어놓으면 환기는 어떻게 한단 말인가.

    사람이 왜 공황장애에 걸리는지를 실감한 이지혁이 사정을 했다.

    "집에 가자아!"

    "잠깐만, 이것 좀 보고!"

    "기다려 봐! 애가 왜 이렇게 보채니!"

    여성복 코너에 온 것이 실수였다.

    잠깐만 보고 가자는 그 말에 속아서는 안 되는 것이었는데, 아직 경험치가 부족한 이지혁은 두 여인의 술수에 그대로 말려들었고, 두 시간째 같은 곳을 돌고 있었다.

    "이러려고 온 거지?"

    "아니야, 아니야. 오빠 옷 사러 온 거야."

    "그런데 왜 내 옷보다 네 옷이 더 많은 것 같지?"

    "오해야, 오해."

    이지혁이 이를 갈았다.

    애초에 동창회니 뭐니 했던 것도 다 핑계였구나. 가증스러운!

    이지혁이 빽! 소리를 지르려는 순간, 밖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응?"

    뭐지?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향하다가 한 가지를 깨달았다.

    "아, 여기 창문 없구나."

    망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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