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71화 (71/118)
  • [■] 어디서 본 거 같은데, 진짜 [■]

    ─────

    부관의 등에서 식은땀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작금의 상황을 크리스토퍼가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알게 된 것이다.

    "핵 샤워라고 하셨습니까?"

    "과해 보이나?"

    "사실 좀……."

    인류가 핵을 개발한 이후로 전쟁에 핵이 활용된 예는 단 두 번밖에 없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되었던 원폭이 바로 그것이다. 인류는 핵을 개발했음에도 핵이 만들어내는 끔찍한 참상 아래 핵무기를 스스로 봉인했다.

    그런데 핵을 사용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핵 샤워라니.

    북한이라는 나라를 없애 버리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중국과 러시아가 찬성하겠습니까?"

    "할 수밖에 없을 거야."

    그들 역시 미국과 영국에 나타난 마왕의 위력을 생생하게 경험했다. 그런 마왕들이 떼로 쏟아져 나온다면 국토의 일부를 포기할 각오를 해서라도 마왕들을 섬멸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할 것이다.

    "가장 먼저 피해를 받는 쪽이 그들이기도 하니까. 북한에 마왕들이 나타난다면 가장 위험한 것은 중, 일, 한, 러, 4개국이다. 찝찝하더라도 나라가 박살이 나는 것보다야 백배 낫겠지."

    "확실히……."

    "우선은 거부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일이니, 워딩에 특별히 신경을 쓰라고 전해주게."

    "예, 알겠습니다."

    "서두르게."

    부관이 밖으로 나가자 크리스토퍼는 얼굴을 감쌌다.

    '이만큼이나 하고 있는데도…….'

    전 세계적인 공조와 즉각적인 게이트에 대한 배제를 실행하고 있음에도 상황은 점점 나빠져만 가고 있었다.

    이번을 막아낸다고 하더라도 또 다음에는 무슨 일이 벌어지겠는가.

    끝이 없는 소모전 끝에 크리스토퍼는 점점 지쳐 가고 있었다.

    그 순간, 한 가지 생각이 떠오른 크리스토퍼는 인터폰을 들고 말했다.

    "그래서 미스터 리는 지금 뭐하고 있다는가?"

    - 이지혁 말입니까?

    "그래."

    - 지금 딱히 동향에 대해서는 파악해 둔 것이 없습니다. 한국 정부가 이지혁 씨에 대한 정보가 빠져나가는 것에 매우 민감하게 굴고 있는지라.

    "당장 파악해 봐. 아니, 관둬. 파악은 의미가 없지. 내가 미스터 최에게 전화를 해보지."

    이지혁에 대한 것은 최정훈에게 묻는 것이 가장 빠르다고 생각한 크리스토퍼는 인터폰을 끊고 최정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미스터 최, 오랜만이군."

    - 맥클라렌, 오랜만입니다.

    "크리스토퍼로 좋다고 하지 않았나. 자네도 참 고집이 세군."

    - 고집이 센 것이 아니라 초심을 잃지 않는다고 해주시길, 미스터 맥클라렌.

    크리스토퍼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이 친구도 어떨 때 보면 정말 대책 없는 허당 같은데, 어떨 때 보면 이런 칼 같은 면이 있다. 나이가 어린 점을 감안한다면 정말 상대하기가 쉽지 않은 사람이었다.

    '이지혁이랑만 얽히지 않았어도…….'

    아무리 유능한 사람이라도 이지혁이라는 태양이 옆에 있어서야 그 유능함을 내보이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모든 것이 이지혁 때문에 해결된 것으로 보일 테니까.

    "아무래도 좋아. 북한에 대한 소식은 잘 받았네."

    - 그쪽으로 연락이 간 모양이군요.

    "소식 자체는 백악관으로 들어갔지만, 알다시피 프레지던트가 그 꼴이라."

    에르카나 사태를 겪고 난 후, 브루노 대통령은 거의 정신을 놓아버렸다. 당연한 말이지만, 일반인이 감당할 수 있는 상황이니까.

    다만, 대외적으로는 대통령의 건강이 좋지 않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 새로 뽑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미국은 부통령제가 있네, 미스터 최. 한국과는 다르지. 이쪽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그리고 자네도 알다시피 이런 일에는 그 정치인들이 나설 일이 별로 없어."

    - 한국과는 다르군요. 부러운 일입니다.

    "글쎄, 업무가 너무 과중된다는 것을 감안해야지. 나는 차라리 저쪽에서 일을 좀 해줬으면 한다네."

    - 어느 쪽에 공감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이래도 문제고, 저래도 문제인 거야. 그쪽이나 이쪽이나 모두 겪는 딜레마 아니겠는가. 딱히 공감할 필요는 없네. 그보다……."

    크리스토퍼가 깊게 숨을 들이쉬고 말했다.

    "이지혁 씨는 지금 어떤가?"

    - 제 영어가 짧은 것인지 말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만, 무슨 뜻인지는 알겠네요. 지금 아마 오락실에 있을 겁니다.

    "오락실?"

    - 게임 센터라고 해도 이해하실지 모르겠네요. 아케이드 게임기들을 모아둔 곳입니다.

    "거기는 왜?"

    - 건전한 취미라고 할까요.

    "끄응."

    크리스토퍼가 머리를 부여잡았다. 세계가 멸망하니, 멸망하지 않니 하는 판인데 게임 센터라니.

    "그걸 그냥 뒀는가?"

    - 뭐, 어쩌겠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세계가 위험한데."

    - 그게 뭐 새삼스러운 일입니까?

    "으음?"

    크리스토퍼는 예상외의 발언에 고개를 쪽 뺐다.

    - 생각해 보면 좀비 드래곤 사태나 미국의 좀비 사태, 앞서 마왕들이 넘어왔을 때, 전부 막지 못했으면 세계는 진즉 멸망했을 겁니다.

    "……그렇지."

    - 당시에는 힘들기는 해도 어찌어찌 막을 수 있는 일이라고 우리가 생각했을 뿐, 지금 와서 돌이켜 볼 때 이지혁 씨가 없었으면 그때 이미 인류는 끝난 겁니다. 그리고 이지혁 씨는 우리와는 다르게 그 상황이 가지는 심각성에 대해서 잘 알고 있던 거구요. 그러니 의미도 없는 돈 같은 것에 낚인 척하면서 일일이 나서서 모든 일을 해결해 온 거죠.

    "으음……."

    - 그러니 이지혁 씨에게는 이번 일도 딱히 특별할 것이 없는 겁니다. 어차피 막으면 존속하는 거고, 못 막으면 끝나는 거죠. 지금까지 항상 그런 부담에 시달려 오던 사람입니다. 상황을 듣자마자 게임 센터에 갔다는 것은 그만큼 태평하다는 게 아니라, 이번에는 따로 할 일을 찾아야 할 정도로 스트레스가 극심하다는 거죠.

    "그렇겠구만."

    크리스토퍼는 반성할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이지혁에 대한 것은 최정훈에게 물어보는 것이 답이군.'

    그 역시 이지혁이 가지고 있는 능력에 대한 것만을 보았지, 그 능력을 가진 사람이 인간이라는 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크리스토퍼 자신에게 인류의 존속이 달려 있다고 한다면, 그는 그 중압감을 단 한순간도 버텨내지 못할 것이다.

    "그래봐야 인간인 것을."

    인간이란 부담감에 떨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이다. 아무리 신경이 강철로 만들어져 있는 것 같은 이지혁일지라도.

    "그건 걱정이로군."

    크리스토퍼는 이 사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을 이지혁에 대한 걱정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 *

    "안 되지."

    이지혁은 깔끔하게 레버를 조작했다.

    횡 이동에 이은 깔끔한 풍신. 체력이 삼분의 일밖에 남아 있지 않은데 허공에 떴다는 것은 죽는다는 의미다. 깔끔하게 국콤을 밀어 넣은 이지혁이 화면에 뜨는 퍼펙트 표시를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와, 이 형 쩐다."

    "사십 연승이야."

    이지혁은 등 뒤에서 들려오는 찬사에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랬다.

    그는 아직 죽지 않은 것이다. 그의 게임감은 여전히 살아 있다. 베라프로 가기 전에 그가 오락실에 가져다 바친 돈이 얼마던가. 그 돈만 모았으면 지금 웬만한 중형차 한 대는 그냥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인생이란 투자한 만큼 성과가 나오는 것이 아니던가.

    원래 게임 센터라는 곳은 지역마다 나름의 강자가 있는 법이다. 자신에게 익은 게임기를 선호하는 게이머들은 자신이 가는 게임 센터만을 찾게 되어 있고, 나름 실력이 있다는 이들은 그 안에서 대전을 통해 서로의 안면을 익히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뜬금없이 나타난 이지혁이 학살을 하고 있다 보니 게임 센터도 나름 비상이 걸려 있었다.

    "쟤 어디서 온 거래?"

    "이수 아냐?"

    "이수에서도 그런 사람 없다던데. 창혁이 형한테는 연락이 됐냐?"

    "어, 지금 오신다는데."

    "처발리는 것도 정도가 있지, 이렇게 처발리다 보면 우리 무시당한다. 밟아야 돼."

    물론 실제로 밟겠다는 것이 아니라 게임으로 밟겠다는 뜻이었다.

    요즘은 실력이 있는 게이머들이 BJ로 방송을 해서 돈을 벌기도 하고, 대회를 나가서 상금도 따며 인지도를 알리는 시대다. 예전처럼 동네에서 먹어준다는 걸로 끝나는 시대가 아닌 법이다.

    그런데 다들 나름 이걸로 먹고사는 양반들이 어디서 온지도 모르는 뉴비에게 밟혀 버린다?

    매출액 줄어드는 소리가 귀로 들리는 것 같았다.

    사태를 파악한 이들이 센터 최강자라고 할 수 있는 최창혁에게 전화를 걸어 그를 소환했다.

    "형 아직 멀었어요? 저 새끼 이러다가 가겠어요."

    - 다 왔어.

    "빨리 와야 한다니까! 진짜!"

    - 다 왔다고.

    "아니, 말만 그럴 게 아니라……."

    "왔다고, 인마!"

    문을 열고 들어오며 소리치는 최창혁을 보며 전화를 걸던 이가 전화를 끊었다.

    "진짜로 오셨네요?"

    "다 왔다는데 왜 이렇게 보채!"

    최창혁은 짜증을 확 내더니 게임기를 바라보았다. 파란 트레이닝복을 입은 껄렁껄렁한 남자가 게임기에 앉아서 한쪽 다리를 꼰 채 게임을 하고 있었다.

    "쟤야?"

    "예."

    "뭔데 갑자기 나타나서 게임……."

    최창혁의 눈썹이 꿈틀했다.

    "쟤 처음 오는 애라고?"

    "예, 처음 봤어요."

    "그런데 왜 나는 안면이 있는 것 같지? 이상하네."

    "에이, 저리 특이한 인상인데, 본 적이 있으면 바로 티가 나죠. 모를 리가 업잖아요."

    "그렇지?"

    확실히 인상에 남는 얼굴이기는 하다. 게다가 저런 타입이 게임까지 잘한다면 웬만해서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기억이 가물가물하다는 것은 반대로 말해서 본 적이 없다는 뜻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런데 뭐가 이리 불안하지.'

    화장실에서 뒤를 닦지 않고 나온 기분이었다. 찝찝해서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된다.

    "일단 쟤 좀 어떻게 해주세요."

    "으응."

    상대가 누구든 이대로라면 그들이 이름을 걸고 하는 방송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다. 오락실 사장님에게 장비까지 후원을 받는 대신에 오락실의 홍보를 도맡고 있지 않은가. 그런 그들이 어디서 온지 모르는 놈에게 전패를 했다고 하면 오락실의 위상이 박살이 나는 것이다.

    최창혁은 찝찝한 얼굴로 반대편 오락기에 앉았다.

    일단은 이놈을 꺾고 나서 생각을 해도 된다.

    그런데 그 순간,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어? 왜 일어나요?"

    "내가 일어나는데 뭔 문제 있어요?"

    "아니, 게임하시다가 왜 갑자기 일어나시나 해서요."

    "담배 피우려구요."

    "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는 파란 트레이닝복의 남자를 보며 동생들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저리 가버리면 안 되는데…….

    "다, 담배 피우고 오실 거죠?"

    "왜요?"

    "꼬, 꼭 한판 더 하고 싶어서요."

    "음, 고민 중인데……. 더 붙을 만한 사람도 없는 것 같고."

    "지금 왔어요! 지금!"

    "그래요?"

    트레이닝복 사내가 고개를 빼꼼 내밀어서 건너편이 있는 최창혁을 봤다.

    이렇게 정면으로 얼굴을 보니 저 올라간 눈꼬리가 자꾸 신경 쓰인다. 그냥 하나하나 뜯어보면 괜찮게 생겼다고 할 수 있는 얼굴인데, 저 올라간 눈꼬리가 인상을 다 망치고 있었다.

    "응?"

    최창혁을 유심히 살펴보던 눈꼬리 올라간 남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몰라."

    알 수 없는 말을 남긴 사내가 밖으로 나갔다.

    조금 기다리고 나자 안으로 들어온 남자가 건너편에 앉았다. 컴퓨터에게 맞아 죽어 40연승이 깨져 버릴까 봐 대신 자리에 앉아서 상황을 유지시키고 있던 동생이 자리를 비켜주었다.

    "오, 서비스 감사."

    사내가 건너편에 앉은 것을 본 최창혁이 조금 긴장된 얼굴로 돈을 넣었다.

    '어디서 본 거 같은데, 진짜.'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 * *

    '일단은 게임을 하자.'

    상대가 누구든, 심지어 대통령이라고 하더라도 게임은 이겨야 하는 법.

    남자라는 존재는 모든 곳에서 패배할 수 있지만, 게임에서만은 져서는 안 되는 존재가 아니던가.

    자신의 주력 캐를 고른 최창혁의 주변으로 동생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형, 쟤 횡 이동을 기가 막히게 써요. 타이밍이 쩔어요."

    "콤보 실수도 없어요. 한 번 뜨면 죽는다고 보셔야 해요."

    "알았어, 새끼들아."

    건너편에 앉은 놈이 사용하는 캐릭터는 말 그대로 한 방에 올인하는 캐릭이었다.

    뜨는 순간 캐릭터의 허리가 부러지지는 않을까 걱정되는 딜을 쏟아 넣는 캐릭이지만, 띄우기가 쉽지 않은, 전형적인 '한 대만'을 외치게 되는 캐릭이다.

    하수, 중수들의 대전에서는 무서운 캐릭이지만, 고수급에서야 그 한 대를 맞을 일이 없으니 쓰일 일이 없는 캐릭인 것이다.

    '그런 걸로 40연승을 했다는 말이지.'

    그의 동생들도 나름 잘나가는 BJ들인데다가 최근 나갔던 클랜 배틀에서도 상위권에 입상한 애들이다. 전국구들을 저런 캐릭으로 가지고 놀았다는 것을 보면 방심은 절대 하면 안 된다.

    절대로!

    * * *

    "방심 안 했는데……."

    최창혁은 어느새 45로 바뀌어 버린 연승 숫자를 보며 탄식을 내뱉었다. 그가 앉기 전에 40이었던 숫자가 어느새 45로 바뀌어 있었다.

    "창혁이 형."

    "…야, 저 새끼 뭐냐?"

    "형."

    다른 말 없이 형만 부르짖는 동생들을 보니 할 말이 없었다. 나름 최선을 다했건만, 건너편에 앉은 놈은 무슨 기계 같았다.

    아주 찰나의 틈만 보이면 프레임을 칼같이 계산하고 밀고 들어오는 정확한 딜 캐치에 상대방의 생각을 미리 읽고 있는 것 같은 심리전까지.

    최창혁이 처음 게임을 잡은 이후로 이렇게까지 실력 차라는 것을 실감한 적이 없었다.

    "못 이겨."

    애초에 반사 신경이 인간이 아닌 느낌이다. 최고 난이도로 설정해 오는 보스 캐릭과 붙는 느낌이었다.

    사람이라면 캐치할 수 없을 미약한 틈을 미친 듯이 밀고 들어오는데, 답이 있을 리가 없었다.

    깔끔한 5연패.

    변명의 여지조차 없는 완패였다.

    "쩐다."

    동생들도 이제는 경탄하는 분위기였다.

    '다른 게임장에서는 이길 수 있을까?'

    이번에 우승한 팀에 소속되어 있는 이들이 온다고 하더라도 과연 이길 수 있을까 의문이었다.

    최창혁이 대한민국 최고수는 아닐지라도, 최고수라 불리는 사람들과 붙어도 이렇게 속절없는 5연패는 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 지금 건너편에 있는 놈을 비공인 최고수라 여겨야 하는가?

    "영입해 보자."

    "쟤를요?"

    "그래."

    생각은 짧고, 행동은 빨랐다.

    최창혁이 벌떡 일어나서 건너편으로 향했다.

    여전히 한쪽 다리를 꼰 채로 게임을 하고 있는 놈을 보니 뭔가 기분이 이상하다.

    '왜 이리 찝찝하지?'

    게임을 졌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게임을 하기 전부터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했으니까.

    "하하, 안녕하세요."

    "예?"

    "게임 진짜 잘하시더라구요."

    놈의 코가 살짝 위로 들렸다. 헛바람이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뭐, 보통이죠."

    저 씰룩이는 입가와 억지로 웃음을 참고 있는 볼을 보니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릴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래서 말인데, 같이 게임을 해보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같이요?"

    "예. 저희가 작은 길드 같은 건데, 방송도 하고 대회도 나가고 하면서 같이 돈을 벌고 있거든요. 님 같은 실력자시라면 금방 이 바닥에서도 최고가 되실 수 있을 겁니다."

    앉아 있던 놈의 표정이 살짝 뚱해지자 최창혁은 다급해졌다.

    돈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는데 반응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놈은 돈보다는 명예 쪽을 중시하는 사람 같았다.

    그게 아니면 정말 순수하게 게임을 즐기는 타입이든가.

    "같이 나가서 담배 한 대 피우실까요?"

    "음, 네. 근데……."

    이지혁이 뭔가 게임기를 슬쩍 바라보고 있자 최창혁이 그 마음을 알아챘다.

    "아, 연승 때문에?"

    "아뇨. 돈 때문에."

    "네?"

    "500원."

    최창혁이 조금 어설픈 동작으로 주머니에서 500원을 꺼내 건네자 이지혁이 기분 좋은 얼굴로 돈을 받아 챙기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가죠!"

    "……."

    이지혁을 따라 밖으로 나가는 최창혁은 이 일이 쉽지 않을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 * *

    "생각보다 게임을 너무 잘하시던데."

    "그렇죠."

    "아무래도 게임이란 게 그렇잖아요. 이기면 기분 좋고, 지면 짜증 나고."

    "그렇죠."

    "실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실력 있는 사람들과 꾸준히 붙는 것이 최선이죠."

    "그쪽이?"

    '그 정도 실력으로 지금 실력자를 자처하는 거냐'라는 말뜻이 숨어 있다는 것 정도는 누구라도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다.

    나름 강북에서는 최강이라 인정받는 최창혁은 순간 울컥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 컨디션이 영 별로라서."

    "단체로 컨디션이 별로라니, 어제 회식이라도 하셨나 봐요?"

    "그런 건 아니구요."

    최창혁은 매우 어색하게 웃었다.

    하기야 전부 다 처발렸는데 우리가 실력이 있으니 이쪽으로 들어오라고 하는 것도 좀 웃기기는 했다.

    "그런데……."

    이지혁이 최창혁을 가만히 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우리 어디서 보지 않았어요? 얼굴이 낯이 익은 듯한데."

    "예?"

    최창혁도 그리 생각하고 있던 와중이라 반색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아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성함이?"

    "저 최창혁이라고 합니다. 그쪽은?"

    "최창혁? 난 이지혁인데."

    "이지혁… 이지……."

    최창혁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고는 뒤로 슬금 물러났다.

    "전 모르는 이름 같습니다."

    모른다. 몰라야 한다.

    빠르게 이곳을 벗어나는 것만이 그가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다.

    '왜 몰랐을까!'

    생각했어야 하는데!

    동생이 동네에서 이놈을 봤다는 말을 했는데, 왜 몰랐단 말인가.

    "아! 창혁이! 너 창식이 형, 창혁이지?"

    "하하, 사람 잘못 보신 것 같은데. 저는 이만……."

    "에이, 뭘 잘못 봐. 창혁이 맞네. 나 몰라? 나 이지혁이잖아. 동창도 몰라보냐?"

    "하하하하……."

    최창혁이 땀을 삐질삐질 흘리기 시작했다.

    '재앙이다, 재앙이야.'

    동성 고등학교의 살아 있는 재앙, 이지혁을 여기서 다시 마주치게 될 줄이야.

    "오랜만이지?"

    "으, 으응."

    더 이상 발뺌하기 어렵다고 생각한 최창혁이 현실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이지혁에게서 도망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 번 문 놈은 절대 놓지 않는다고 해서 동성의 핏불 테리어라 불리던 놈 아닌가,

    '……창식이, 이 새끼.'

    이곳이 이지혁 출몰 스팟이면 말을 해줬어야 할 것 아닌가. 그럼 이쪽으로는 평생 얼씬도 하지 않았을 텐데.

    "야, 다시 보니 반갑다. 그러고 보니 너… 머리는 괜찮냐?"

    "으응."

    최창혁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등 뒤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야, 창혁이 형이 왜 저리 굽실거려?"

    "글쎄? 아는 사람 같은데?"

    "난 창혁이 형 저러는 거 처음 본다. 막말로 게임으로 붙으니까 승부가 되는 거지, 싸움으로 붙으면 웬만한 애들은 3초 만에 초살 아니냐?"

    "그럼."

    최창혁은 '당장 그 주둥아리를 닥치라' 외치고 싶었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에 저 촐랑거리는 입들에 정권을 박아 넣고 싶었지만, 지금은 참을 수밖에 없었다.

    '누가 누굴 초살시킨다고?'

    싸움이 나면 3초 만에 박살 나는 건 최창혁 자신이다.

    초딩 시절 웬만한 고딩을 패고 다니던 그의 동생이 맞고 돌아왔을 때 얼마나 놀랐던가.

    그리고 그 초딩을 팬 놈이 같은 나이의 중학생이라는 사실을 들었을 때는 또 얼마나 놀랐던가.

    상황이 어찌 되었든 동생이 실신하도록 얻어맞았다는 사실에 분노하여 쫓아갔을 때, 그는 볼 수 있었다.

    체구가 별로 크지도 않은 놈이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실실 웃고 있는 모습을 말이다.

    그 아이스크림을 산 돈의 출처가 동생의 주머니라는 것을 확신하고 달려든 최창혁은 그날 사람이 웬만해서는 기절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알고 보면 창식이는 그래도 초딩이라 살살 맞았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악귀처럼 낄낄거리며 그의 아구창을 후려갈기던 이지혁의 모습은 최창혁에게는 트라우마로 자리 잡았고, 그날 이후로 최창혁은 다시는 누군가와 싸우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랬는데…….

    "넌 좀 덜 컸다."

    "으응?"

    "니 동생은 덩치가 산만 하던데, 너는 왜 이렇게 조그맣냐? 밥 좀 잘 챙겨 먹어라."

    "으응."

    키가 188에 육박하는 최창혁이 조그맣다니.

    하기야 이미 190을 훌쩍 넘은 최창식에 비한다면 작기는 하지만, 그래도 어디서 작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는 아니잖은가.

    "자, 잘 지냈어?"

    "응."

    "너, 그때 실종되고 애들이 걱정 많이 했어."

    "그래?"

    그럴 리가.

    대한독립만세라고 다들 난리가 났지.

    가혹한 압제에서 벗어난 애들은 몬스터가 우리를 구했다고 블랙 먼데이를 찬양하다가 어른들에게 귀싸대기를 맞기도 했으니까.

    "그런 말 들으니까 한 번 보고 싶은데? 얘들이랑 연락되냐?"

    "아니!"

    최창혁은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애들을 불러 모으고 그 자리에 이지혁을 데리고 간다면 최창혁이 아무리 건장하다지만 집단 린치를 피할 수 없었다. 눈에 핏발이 서서 달려들 애들의 모습이 벌써부터 보이는 것 같았다.

    "그래? 아쉽네."

    이지혁이 쩝, 입맛을 다시자 최창혁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근데 너는 나이가 몇 갠데 게임이나 하고 있냐?"

    '니는!'

    조금 전까지 게임 센터에서 게임을 하고 있던 사람이 누구더라?

    물론 그 말을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었다.

    뭔가 한 번 거슬리면 죽어라고 물고 팬다고 해서 핏불 테리어 아니던가. 얽히지 않는 것이 최상이고, 얽힌다면 절대 거슬리지 않는 것이 최고였다.

    "요, 요즘 너 KSF에서 일한다며?"

    "어? 뭐, 그렇게 됐다."

    최창혁은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사람일 때도 인간 같지 않은 놈이었는데, 능력자가 되었으니 이제는 또 얼마나 괴물 같을까.

    지금이야 그렇게까지 큰 차이가 나지 않지만 과거에는 덩치 차이가 두 배는 났는데, 그런 최창혁을 낄낄대며 패던 놈이다.

    '몬스터들이 불쌍하네.'

    최창혁은 이지혁을 상대해야 할 몬스터들에게 애도를 표했다.

    "그동안 어디 있었어?"

    "좀 다녀왔어. 별로 재밌는 이야기는 아니니까."

    "응."

    이지혁이 슬쩍 최창혁을 보더니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애들 연락 한 번 해봐."

    "왜, 왜?"

    "동창회 한 번 해야지. 졸업한 지 한참 되었을 거 아냐."

    최창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일단 알았다고 해야 후환이 없을 것 같았다.

    "그, 그런데 애들이 연락이 잘 안 되는데……."

    "잘 모아봐."

    말은 통하지 않는다.

    새삼 그 사실을 깨달은 최창혁은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전화기 줘봐."

    "으응."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최창혁이 내민 폰을 받아 든 이지혁이 자신의 번호를 누르고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자신의 폰이 울리는 것을 확인한 이지혁이 씨익 웃고는 최창혁에게 폰을 돌려주었다.

    "연락해라."

    "으응."

    "그럼 난 간다. 그리고 게임 실력 좀 키워라. 이거 원, 싱거워서."

    "그럴게."

    "간다."

    저 멀리 걸어가는 이지혁을 보면서 최창혁은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았다.

    "오락실을 옮겨야겠어."

    저 미친놈이 출현하는 스팟은 들어가지 않는 곳이 상책이다.

    최창혁은 떨리는 손으로 단톡방에 이지혁의 출현 사실을 올렸다.

    * * *

    "누구?"

    "이지혁이라니까."

    "이지혁?"

    "그래, 이지혁! 핏불 있잖아! 핏불!"

    "헐……."

    반응은 격렬했고, 또 폭발적이었다.

    단톡방에 글을 올리자마자 단톡은 폭주를 하기 시작했고, 톡의 내용을 채 확인하기도 전에 그의 전화기는 진동기라도 된 양 떨어 대기 시작했다.

    "미친! 그동안 안 보이더니 왜 갑자기 나타났데?"

    "저번에 돌아왔다는 이야기 못 들었냐?"

    "누가 그러디?"

    "내 동생이."

    "그러면 말을 해줘야지! 아무 생각 없이 돌아다니다가 만나기라도 했으면 어쩌려고 그랬냐."

    "미안하다."

    평소라면 그에게 이런 말을 하지 않을, 아니, 하지 못할 이들일 테지만, 지금 그들이 느끼고 있는 심정이 어떨지 충분히 이해하는 최창혁이다 보니 기분 나쁜 내색을 드러내 보이지는 않았다.

    그도 같은 상황이라면 똑같이 대응했을 테니까.

    "그래서 뭐래?"

    "야, 나 설명하기 빡세다. 톡으로 하자."

    "얼른얼른."

    "알았다니까."

    최창혁은 전화를 끊고 톡을 열려고 했지만, 전화를 끊기가 무섭게 다시 걸려오는 전화들 때문이 몇 번이나 같은 설명을 하고 나서야 겨우 톡을 열 수 있었다.

    톡방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 핏불? 그 새끼가 왜 갑자기 나타난 건데?

    - 창혁이랑 만났다잖아.

    - 죽은 거 아니었어?

    - 저번에 몇 번 목격담이 떠돌기에 유령인 줄 알았는데…….

    - 아냐. 내가 알기로는 능력자 돼서 KSF에서 일한다고 했어.

    - 헐, 능력자? 걔는 능력자 아닐 때도 개차반이었는데 능력까지 있으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 뭘 어떻게 해. 피하면 그만이지. 한두 번 겪나. 자연재해는 피해 가는 것이다.

    최창혁은 깊은 한숨을 쉬고는 단톡에 글을 올렸다.

    - 근데 지혁이가 동창회하자던데?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 미쳤어?

    - 님, 잠이 덜 깨심?

    - 동창회 좋네, 동창회. 하면 되지, 그까짓 거. 난 오늘부터 동성고 출신 아니다.

    - 졸업장 찢는 중.

    충분히 예상한 반응이었다.

    차라리 이지혁이 평범한 일진이었다면 이런 식의 반응이 돌아오진 않았을 것이다. 그냥 혐오스러워하는 애들이 대부분이었겠지.

    안타까운 일인지 신기한 일인지 모르겠지만, 이지혁은 다른 사람을 괴롭힌 적이 없다. 보통 힘 센 놈들이 하는, 돈을 걷는다든가 신발 등을 뻇어 신는 양아치 짓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되레 그런 짓을 하던 놈들이 이지혁한테 걸려서 개박살이 나다 보니 동성고에는 일진이라는 개념 자체가 사라졌을 정도다.

    결과적으로 보면 이지혁이 참 좋은 일을 한 거겠지만…….

    '의도가 문제야, 의도가.'

    이지혁은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일진을 깬 적이 없다. 그냥 눈에 거슬리고 마음에 안 든다고 걸리는 놈들을 족족 깨다 보니 그 와중에 일진들이 걸려든 것일 뿐이다.

    과속하던 차량이 사람을 치었는데, 알고 보니 치인 사람이 연쇄살인범인 경우라고 할까.

    동성고 출신 학생들 입장에서는 이지혁은 갑자기 출현하는 자연재해 같은 존재였다.

    딱히 누군가에게 악의를 가지고 있지는 않은데, 거슬리면 다 까버리는 존재.

    그게 그들이 기억하는 이지혁이었다.

    - 그래서 뭐라고 했는데?

    - 하자고 했어?

    - 난 안 간다. 분명 말했다. 난 절대 안 갈 거다.

    최창혁은 단톡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한심한 놈들."

    아무리 이지혁이 껄끄럽다고는 하나 사내놈들이 다들 저런 식으로 겁을 내는 모습을 좋게 볼 수는 없었다.

    최창혁은 당당히 그의 의견을 밝혔다.

    - 그래서 연락 안 된다고 함.

    - 굿!

    - 크으, 대처 능력 보소. 사막에다 떨어뜨려 놔도 살아 올 듯.

    - 그나마 다행이네.

    "다행은 무슨."

    이 동네가 네임드 몹의 등장 스팟이라는 것이 확인된 마당인데, 다행이란 말이 잘도 입에서 나오는군.

    "그래도 다행 아냐?"

    "당장 오락실에도 못 오게 생겼는데 뭔 놈의 다행이야."

    "에이, 그래도."

    "하, 이해를 못하는 모양인데."

    그런데 나… 누구랑 대화하고 있는 거지?

    최창혁이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 익숙한 얼굴이 미소 짓고 있는 것이 보였다.

    "히이이이이익!"

    최창혁은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서며 벽에 딱 붙었다.

    이 인간, 아까 간 거 아니었나? 왜 여기 있는 거지?

    빙그레 웃고 있는 얼굴, 아니, 이지혁이 만면에 미소를 띤 채로 그에게로 다가왔다.

    "애들이랑 연락하고 있는 거야?"

    "으, 으응."

    "동창회 하려고?"

    "니가 아까 하자고 하기에… 혹시 몰라서 연락 한 번 해본 거지."

    "연락 안 된다더니?"

    "따로 연락하는 애들은 없는데, 단톡은 있어서 혹시 단톡에 올리면 애들이 연락 받을까 싶어서."

    오늘따라 혀가 청산유수로 움직이고 있었다.

    평소라면 이런 식으로 순간적인 변명 거리를 찾아내지는 못했을 텐데 이 모든 것이 자연스레 이루어지는 것을 보니, 과연 인간은 위기에 처하면 초인적인 힘이 나온다는 말이 사실인 모양이었다.

    "그래서 애들은 뭐래?"

    "나, 나온다고 하지."

    "그래?"

    이지혁이 볼을 긁었다.

    "그냥 해본 말인데 나온다고 했으면… 내가 불러놓고 안 갈 수도 없겠네. 일정 정해지면 아까 준 내 전화번호로 연락해."

    "으응……."

    "그리고 잊고 간 말인데, 나중에 창식이한테 NDF로 한 번 들르라고 해라. 그렇게만 말하면 알 거야."

    "응."

    최창혁이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진짜 간다."

    "응."

    이지혁이 저 멀리 걸어가자 최창혁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망했다."

    이지혁은 집으로 터덜터덜 걸어가다가 생각에 잠겼다.

    "나름 다들 잘살고 있네."

    그가 없어졌을 때도 세상은 잘 굴러가고 있었다.

    "흐음."

    이지혁이 슬쩍 고개를 갸웃하다가 인상을 확 썻다.

    "쯧."

    속이 답답하면 해결을 해야 하는 법이다. 이런 식으로 자꾸 도피를 하고 있다고 해결되는 일이 없다는 것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에잉."

    이지혁이 허공을 향해 손을 휘저었다.

    "야."

    이지혁이 자신의 발아래를 향해 말하자 검은 형체가 그림자 안에서 튀어 올라왔다.

    "나 북한 좀 다녀올 테니까, 찾는 사람 있으면 그렇다고 해."

    도리도리.

    "응?"

    그림자에서 나온 도가윤이 고개를 저었다.

    "왜?"

    도가윤은 말없이 이지혁이 만들어낸 게이트 앞에 가서 섰다.

    "같이 간다고?"

    끄덕.

    이지혁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눈으로 도가윤을 바라보았지만, 생각해 보면 억지로 떼놓고 가야 할 이유도 없었다.

    제 몸 하나야 알아서 잘 간수하는 애다.

    마왕에게 달려들고도 살아남았던 사람을 북한이 위험하다는 핑계로 떼놓고 갈 수는 없지 않은가.

    "알아서 해, 그럼."

    도가윤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빤히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이지혁은 두말없이 게이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우우웅.

    * * *

    평양에서 그리 멀지 않은 한적한 야산에 게이트가 열렸다. 혹시 다시 평양으로 돌아와야 하는 일이 있을까 봐 미리 봐둔 포인트였다.

    "와, 씨."

    이지혁은 자신이 지정한 포인트가 그리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으슥한 곳으로 몸을 숨겼다.

    '나름 울창해 보였는데…….'

    멀리서 봤을 때는 울창한 산 같았는데, 막상 근처에서 보자 민둥산이 따로 없었다. 평양의 주변이라 일부러 나무를 깎아둔 것인지, 아니면 북한의 산이 대부분 이런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금수산 태양궁전이 어디래?"

    이지혁이 주위를 둘러보고 있자 도가윤이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더니 뭔가를 누르기 시작했다.

    "몰래 온 건데 물어보면 안 되지."

    이지혁이 저지하려 하자 도가윤은 말없이 휴대폰을 들어 보여주었다.

    도가윤이 내민 휴대폰에 뜬 지도를 본 이지혁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구글신은 위대하신 법이지."

    평양 지도를 이렇게 자세하게 볼 수 있다니, 예전이었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 저쪽인가?"

    이지혁이 지도와 자신이 있는 곳을 비교하고 동서남북을 구분한 뒤,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하얀 외벽을 가진 커다란 건물이 보이고 있었다.

    "뭐 저런 데다 사람을 가둬?"

    하기야 북한에서 사람을 가두는데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있겠는가.

    한국에서 청와대 밑에 감옥이 있다고 하면 난리가 나겠지만, 이 나라는 이상하게도 그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곳이다.

    "가볼까?"

    이지혁이 씨익 미소를 짓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금수산 태양궁전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상한 곳이란 말이야.'

    북한이라는 나라는 언제나 모순적인 곳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자유가 보장되지 않은 나라고, 가장 통제가 많은 나라이기는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모든 통제를 이루기 위한 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일례로 북한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라고 할 수 있는 금수산 태양궁전을 향해 가고 있음에도 딱히 경비 병력을 발견할 수 없었다.

    대로변에서 인민들을 통제하고 있는 당원들이나 몇 눈에 띄었을 뿐이지, 태양궁전의 뒤편에 있는 합장강 너머로는 거의 경비 병력이 존재하지 않고 있었다.

    '뭔가 바글바글하는군.'

    차이가 있다면 일전에 왔을 때는 이 주변으로도 인기척을 찾아볼 수가 없었지만, 지금은 주민들이 대거 보인다는 점이었다.

    리진철이 말한 평양으로 사람들을 모으고 있다는 말이 사실인 것이다.

    "사진 좀 찍어놔."

    도리도리.

    "아, 왜! 사람들이 저러고 있는 걸 보여줘야 할 것 아냐?"

    도가윤이 손을 들어 올려 머리 위를 가리켰다.

    "응?"

    "무인정찰기, 위성, 사진 촬영 가능."

    "……그래?"

    끄덕.

    이럴 거면 스파이들은 왜 필요한 것인가!

    이지혁은 지금까지 그가 봐왔던 스파이 영화들이 다 개구라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본드는 얼어 죽을.

    "가자."

    이리된 이상 빠르게 목적을 달성하고 치고 빠져야 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 뿐이다.

    도가윤이 이지혁의 팔을 잡았다.

    "왜?"

    "내부에 적군 다수. 잠입 시 혼란."

    "그래서?"

    "잠입, 혹은 토벌. 결정 요망."

    "흥."

    이지혁이 내가 그런 것도 생각 못하는 사람으로 보이냐는 듯 손가락을 까딱했다.

    "내가 아무리 파괴 법사라지만, 기본적인 마법은 쓸 수 있는 사람이다, 이거야. 예를 들면……."

    이지혁의 손이 살짝 빛났다.

    "인비저빌리티라든가."

    이지혁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빛이 그와 도가윤을 감쌌다. 그와 동시에 둘의 모습이 시아에서 사라졌다.

    "어때? 안 보이지?"

    "…아군의 위치도 파악 불가능. 수신호 불가능. 음성으로밖에 소통할 수 없음. 비효율적."

    "어라?"

    그러고 보니 둘이 들어가야 하는데 둘이 서로 안 보이면 문제가 심각했다. 도가윤이 평소에야 이지혁을 알아서 잘 따라다니는 편이라지만 그건 눈이 보일 때의 이야기고. 이지혁이 보이지 않는다면 따라올 수 없는 건 당연했다.

    "그럼 뭐, 방법은 하나뿐이지."

    "방법?"

    이지혁은 아주 당당하게 말했다. 어차피 얼굴도 보이지 않는데 거리낄 게 뭐란 말인가.

    "손잡고 가면 되지."

    "……."

    만약 지금 순간의 표정을 볼 수 있었다면 도가윤이 태어나서 가장 격렬한 표정을 짓는 것을 목격했겠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도가윤의 얼굴은 마법으로 인해 볼 수 없는 상태였다.

    "손."

    "거, 거절합니다."

    "시간 없어. 얼른 손."

    도가윤이 어설프게 내민 손을 이지혁이 귀신같이 잡아서 끌고 가기 시작했다.

    "딱 달라붙어 있어."

    "…네."

    * * *

    도가윤이 손을 꽉 잡자 이지혁은 거침없이 아래로 내려갔다. 금수산 태양궁전의 주변에는 나름 경비 병력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인비저빌리티를 건 이지혁과 도가윤을 발견하지 못했다.

    "꽉 잡아."

    "예."

    이지혁은 도가윤의 손을 꽉 잡았다. 손을 놓아서 서로의 기척을 잃기라도 하는 날에는 여기서 영원한 미아가 될 수도 있었다. 내부에 마나가 없는 도가윤은 이지혁이 디텍트를 사용한다 하더라도 어디에 있는지 알아낼 수 없었다.

    그럼 결국 광역 디스펠을 걸어야 하는데, 갑자기 태양궁전 한중간에 모습을 드러낸 사람이 무슨 꼴을 당할지야 안 봐도 빤한 일이다.

    물론 이지혁이 있는 이상 몸에 바람구멍 뚫릴 일이야 없겠지만, 일이 무척이나 힘들어질 것은 빤했다.

    이지혁은 입을 꾹 다물고 금수산 태양궁전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런 식의 잠입은 그의 취향은 아니지만, 인질이 있는 이상 소란을 벌이는 것은 좋은 수단이라 볼 수 없었다. 마음을 먹는다면 이 건물 자체를 날려 버리는 것은 일도 아니다. 하지만 박용휘가 어디 있는지 모르는 이상 최대한 소란을 피우지 않고 잠입을 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하지만 세상 일이 다 그렇듯 언제나 마음먹은 대로는 일이 풀리지 않는 법이다.

    RRRRR.

    "히익!"

    이지혁은 주머니로 빛살처럼 손을 집어넣어 울리는 전화기를 무음으로 전환했다.

    매너 모드나 무음으로 미리 바꿔놨어야 하는 건데…….

    "무슨 소리네!"

    경비를 보던 군인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이지혁은 도가윤을 확 끌어당기고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뭔 소리 나지 않았네?"

    "손전화 소리 같았습네다."

    "손전화? 여기 아무도 없는데 무슨 손전화 소리가 난단 말이네!"

    "…죄송합네다."

    상관으로 보이는 자가 콧김을 뿜으며 주변을 돌아보더니 소리쳤다.

    "경계 확실히 하라. 주민들이 이쪽으로 오지 못하게 진즉에 차단을 해놨는데, 누가 들어오기라도 하면 너네들도 다 모가지란 것 잊지 말라!"

    "명심하겠습네다."

    "가보라!"

    "예!"

    이지혁은 주변을 둘러쌌던 군인들이 멀어지자 한숨을 쉬며 도가윤의 등을 두드렸다.

    "응?"

    뭔가 열기가 뿜어져 나오는 느낌이 든다.

    "너, 어디 아프냐?"

    이지혁이 어림짐작으로 도가윤의 이마가 있는 쪽을 훑었다. 불덩어리같이 달아오른 도가윤이 느껴지자 이지혁이 나직하게 혀를 찼다.

    "아프면 쉬든가. 뭐하러 따라 들어와서……."

    "아, 아픈 거 아닙니다."

    "쉿! 조용히 말해야지."

    "……네."

    이지혁은 달아오른 도가윤의 어깨를 움켜잡고 안쪽으로 이동했다.

    "일단 들어가자. 안쪽이 더 안전하겠다."

    "……."

    도가윤은 말없이 이지혁을 따라 걸었다.

    금수산 태양궁전 안으로 잠입한 이지혁은 주변을 둘러보며 혀를 찼다.

    "돈으로 처발랐네."

    밖에서는 인민들이 굶어 죽고 있는데 이 안은 휘황찬란하다는 말로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입구에 있는 신발 자동 소독기는 한국에서도 본 적 없는 물건이었다.

    "이러니 애들이 굶어 죽지."

    북한의 메커니즘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물론 한국이라 해서 모든 사람이 부유하게 사는 것은 아니다. 지금도 끼니를 걱정하고 있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그들에게 좀 더 많은 예산을 부과한다면 기아를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다만, 다른 것은 보자면, 한국에서는 그 이외의 예산이 돌아가야 할 곳에 돌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이곳처럼 죽은 지도자를 신성화하기 위해서 막대한 예산이 들어간다면 폭동이 일어날지도 몰랐다.

    "아닌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음."

    "아냐. 혼잣말이야."

    이지혁은 앞으로 나갔다.

    "손."

    "응?"

    "내부. 손 놓아도 됨."

    "길 잃으면 어쩌려고 그래."

    "잘 따라갈 수 있음."

    "그러다 사라지면 찾지도 못한다니까. 여기는 한국이 아니야. 전화한다고 경찰 아저씨가 와서 집 찾아주는 곳이 아니라고.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꼭 붙어 있어."

    "……."

    "알았어?"

    "네."

    도가윤이 고분고분해지자 이지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지하로 내려가는 길을 찾았다.

    리진철의 말대로라면 이곳 지하 어디인가에 박용휘가 잡혀 있을 것이다.

    "귀찮게."

    박용휘에게 딱히 의리가 있어서 구하러 온 것은 아니다. 다만, 리진철이 말을 하는 것보다는 박용휘가 직접 말을 하는 것이 파급력이 더 클 거라고 생각해서일 뿐이었다.

    증인이 하나라도 더 늘어나면 국가적으로 움직여야 할 구실이 생겨나게 될 테니까. 그리고 미국에 협조를 구하기도 쉬울 것이다.

    "이쪽인가?"

    이지혁이 아래로 이어진 계단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흐음?"

    위쪽은 삐까번쩍했는데, 지하로 내려가자 조명도 어두컴컴한 것이 치장하지 않은 티가 났다.

    아무리 이곳에 막대한 예산을 퍼부었다고는 하지만, 북한의 사정상 보이지 않는 곳까지 치장하기는 무리였던 모양이다.

    "겉만 번지르르하네."

    하기야 북한인데 겉이라도 번지르르 한 것이 어디인가.

    이지혁은 계단을 찾아 아래로, 또 아래로 내려갔다. 지하 삼층까지 내려오자 더 이상 내려가는 계단을 찾을 수 없었다.

    "흐음."

    이지혁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누군가가 갇혀 있다고 하기에는 너무도 평범한 모양새였다. 그리고 딱히 누군가를 감시하는 사람도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곳에 누군가가 갇혀 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옮겼나?"

    "찾는 것?"

    이지혁이 도가윤의 말에 대답했다.

    "이 밑에 사람이 갇혀 있다고 했는데 말이야. 없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사고를 한 번 쳐서 옮긴 모양이야."

    "잠시."

    "응?"

    도가윤이 멀어져 가는 기색이 느껴졌다.

    "여기서 길 잃으면 집에 못 간다. 멀리 가지 마라."

    도가윤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이지혁은 혀를 차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래도 지하도 만들어놓고, 건물은 제대로 올렸네."

    저번에 류경호텔의 안쪽이 거의 폐건물이라고 들은 것에 비하면, 이 정도면 지하도 나름 신경을 쓴 것이라고 봐야 했다.

    하기야 그들에게는 신이나 다름없는 이들의 시체가 모셔져 있는 곳이니 오죽 신경을 썼겠는가.

    죽은 이들의 위상이 현 정권의 안정에 영향을 주는 괴이한 상황이다 보니 신경을 쓸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여기."

    "응?"

    도가윤이 이지혁을 불렀다.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걸어가자 발소리를 들은 도가윤이 입을 열었다.

    "공간. 아래 쪽."

    "문장으로 확실하게 말을 해봐."

    "…아래쪽에 공간이 있어요."

    "기둥 뒤에?"

    "아.래.쪽.에."

    "그래그래."

    이지혁이 아래를 두드렸다.

    퉁퉁대는 소리를 들은 이지혁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모르겠는데?"

    "……."

    도가윤에게서 말이 없자 이지혁이 어색하게 웃었다.

    "농담을 농담으로 못 받네."

    "아재."

    "헐."

    살아온 날로 따지면 아재라는 말이 되레 칭찬이라고 받아들여야 하는 이지혁이지만, 묘하게 기분이 나빴다.

    "공간이 있다는 건 알았는데, 이걸 어떻게 들어가지? 흐음."

    부숴 버리면 간단한 일이지만, 눈에 띄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소리를 막는다고 하더라도 순찰이라도 돈다면 발각되는 것은 순식간일 것이다.

    "벽을 넘을까나?"

    이지혁이 바닥에 손을 댔다.

    우우웅.

    벽에 커다란 검은 문이 생겨났다.

    "공간은 내 특기니까."

    이지혁이 씨익 웃고는 문으로 뛰어들었다. 도가윤 역시 이지혁이 뛰어드는 기색을 느꼈는지 지체 없이 문 안으로 몸을 던졌다.

    우웅.

    천장에 생겨난 문을 통해 바닥으로 내려온 이지혁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제 좀 분위기가 나는데?"

    층 하나가 바뀌었을 뿐인데 음산함이 절로 느껴졌다. 이지혁은 빛도 잘 들지 않는 어두운 복도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이래야 재미있는 법이지.

    이지혁이 주변을 둘러보며 걸음을 옮겼다.

    "이게 민낯이라는 건가?"

    위로 보이는 화려함 아래에 이런 음침한 속을 숨기고 있었다. 그야말로 북한의 모습 같……다기에는 북한은 겉으로도 그리 화려하지 않으니, 적절한 비유가 아닌 듯했다.

    "인기척 좀 찾아볼 수 있어?"

    "……."

    "고개 끄덕하지 말고 말로 대답해. 안 보이잖아."

    "네."

    "그래. 그럼 부탁할게."

    이지혁은 앞서 나가는 도가윤의 기척을 느끼며 뒤로 따라붙었다.

    "에레트 측정 마법이라도 만들든지 해야지."

    마나 디텍트로 모든 것이 해결되던 베라프에서라면 이럴 필요가 없을 테지만, 이곳에서 그는 일반인과 그리 다를 것도 없었다. 에테르로 이루어진 이곳의 인간은 마나 디텍팅에 감지되지 않는다.

    예전 각종 기술들을 닥치는 대로 배울 때 암살이나 레인저 수업 등을 받기는 했지만, 어디론가 잠입하는 스파이 수업은 받은 적이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도가윤은 확실히 이지혁에게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이쪽으로."

    도가윤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곳은 커다란 철문 앞이었다.

    "여기?"

    "네."

    "건너편에 사람이 있다고?"

    "네."

    이지혁은 철문을 보며 턱을 긁었다.

    "확실히 누군가 갇혀 있을 것 같은 비주얼이기는 한데 말이야. 그런데 건너편에 있는 게 갇혀 있는 사람은 맞는 거지? 괜히 들어갔다가 경비라도 만나면 골치 아파진다."

    "갇혀 있는 사람인지는 확실치 않음."

    "그래?"

    "다만, 숨소리가 미약함. 금방 숨이 끊겨도 이상하지 않……."

    "들어간다."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이지혁은 눈앞에 보이는 철문에 게이트를 만들고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끄응."

    철문을 넘어온 이지혁이 본 것은 공중에 매달려 있는 한 사람이었다.

    양쪽으로 묶여 있는 손은 얼마나 오랫동안 조여져 있었는지 로프가 살을 파고들어 거의 뼈가 드러나 있고, 그 아래로 늘어진 육체는 성한 곳을 찾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사람이 이런 상태로 아직 숨이 붙어 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교묘하게 겉만 조졌구만."

    장기와 내부 근육이 상하지 않도록 조심해서 고문한 흔적이 역력했다. 고문에는 일가견이 있는 이지혁이 아니던가.

    조심을 했다고는 하나 워낙에 출혈이 심하고, 고문을 받은 지가 오래되어 체력이 많이 떨어져 있어 보인다.

    인기척에 공중에 매달려 있던 사람이 서서히 눈을 떴다.

    "리지혁 동무."

    "아저씨, 살 빠졌네요. 상처만 치료하면 훈남 되겠어요."

    "…훈남이 뭐드래?"

    "잘생긴 남자?"

    공중에 매달려 있는 상황에서도 박용휘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내래 꼴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디?"

    "에이, 그전에 뚱뚱하던 모습보다야 훨씬 낫죠. 지금은 나름 카리스마가 있잖아요."

    "…숨넘어가기 전에 나부터 좀 내려주시라요."

    "네."

    이지혁이 손가락을 튕기자 상처 입은 몸을 매달고 있던 로프가 잘리며 박용휘가 아래로 떨어졌다. 바닥으로 떨어지던 박용휘가 둥실 떠오르더니, 이지혁의 바로 앞으로 날아들었다.

    "진철이가 남조선에 도착한 모양입네다."

    "아저씨 살려내라고 하더라구요."

    "…용케도 그 말을 들어주었네."

    "변덕이라고 해두죠."

    이지혁은 지체하지 않고 게이트를 열었다. 더 말할 게 없는 것은 아니지만, 박용휘의 상세가 워낙에 심각해 보여서 일단 치료부터 받게 해야 했다.

    그때, 철문이 천천히 열렸다.

    * * *

    이지혁은 열리는 문을 바라보았다.

    다급하게 열리지 않고 천천히 열리는 문.

    그리고 그 뒤에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의 남자가 서 있었다.

    "다시 뵙습니다."

    인민복을 입은 남자가 이지혁을 보고는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죄인을 가둬둔 곳에 사람이 침입한 상황이지만, 사내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은 듯했다.

    "저 아세요?"

    이지혁도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지혁 씨를 모를 수 있겠습까? 능력자들의 별이시며, 조선의 별이신 분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서울분 같으신데?"

    이지혁이 가만히 정민성을 바라보았다.

    정민성의 목소리에서는 북한 특유의 억양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맡고 있는 일이 일이다 보니 억양에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뭐 그리 당당한 일은 아닌 모양이죠?"

    "정답입니다."

    능글능글하게 웃는 정민성을 보고 있으려니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다.

    "우리, 어디서 보지 않았나요?"

    "저번에 파티장에서 뵌 적이 있죠."

    "그게 아닌 것 같은데?"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하자 정민성이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아니면 그전에 북한에 오신 적이 있던 모양이죠."

    "흐음……."

    이지혁은 분명 이전에 정민성을 본 적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말하지 않으려는 이의 입을 강제로 열게 할 재주는 없었다.

    "뭐, 좋아요. 그렇다 치고."

    이지혁이 게이트 안으로 박용휘를 밀어넣었다.

    "가서 치료하라고 해."

    도가윤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그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고 있으면서도 정민성은 제지를 위한 움직임을 일체 보이지 않았다.

    "안 막아요?"

    "누구를 말입니까?"

    "내가 지금 저 사람을 데리고 가면 안 되는 것 아닌가?"

    "물론 안 되는 일입니다만, 이지혁 씨가 하는 일을 막을 용기는 제게 없습니다."

    "이상한 사람이네."

    "누구나 목숨은 하나뿐인 법이죠."

    "에이,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요?"

    "자비로운 분이시니 죽이지야 않겠죠. 하지만 죽을 만큼의 고통을 감내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인간으로서 당신의 건너편에 섰던 사람이 아직 없었으니 다들 그 사실을 모르는 것뿐이겠죠."

    "정말 잘 아는 것 같은데……."

    이지혁의 입가가 뒤틀리기 시작했다.

    이런 식의 일방적인 정보의 쏠림은 그가 딱히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상대는 그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데, 자신은 상대에 대해 전혀 모른다면 기분이 좋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흐음, 뭐, 좋아요."

    딱히 기분이 좋은 상황은 아니지만, 그걸로 걸고넘어질 일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이곳은 북한이니까.

    "그럼 저 갈게요. 가도 되죠?"

    "물론입니다. 하지만 그전에……."

    "보내주려면 깔끔하게 보내주지, 꼭 그렇게 말하고 나서는 사람 괴롭히더라."

    "괴롭힐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그게 아니라……."

    "네?"

    정민성은 부드럽게 미소를 짓고 나서 입을 열었다.

    "커피 한잔 어떻습니까? 좋은 게 들어왔습니다."

    "……엥?"

    * * *

    전망은 무척이나 훌륭했다.

    "……여기, 거의 폐허라고 들었는데? 흉물이라고."

    "사실입니다."

    류경호텔의 꼭대기층 라운지는 꽤나 잘 꾸며져 있었다. 류경호텔이라는 선입견을 배제한다면, 국내 호텔의 라운지라고 생각될 만큼 세련된 모습이었다.

    "다만, 국빈급을 대접할 곳은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최상층만 따로 정비를 한 것입니다. 얄팍한 수작이지만, 이 나라에서는 그게 최선이니까요."

    "그러네요."

    이지혁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평양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그런데 무슨 생각이죠?"

    원래라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냥 남한으로 넘어갈 생각이었지만, 정민성이 이지혁의 흥미를 끌었다.

    그 상황에서 유유자적하게 커피를 권하는 사내라니.

    "별생각은 없습니다. 그저 대화를 나눠보고 싶던 것뿐입니다."

    "대화?"

    "네. 말 그대로 대화입니다. 천하의 이지혁 씨와 대화를 나눠본다는 것도 제게는 무한한 영광이지요."

    "비꼬는 건가요?"

    "비꼬는 걸로 보이십니까?"

    이지혁과 정민성의 눈이 마주쳤다.

    이지혁은 그가 진심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네요."

    "딱히 고민하실 거리는 아닙니다. 그저 이지혁 씨와 커피 한잔 마시고 싶던 거지요."

    "전 남잔데요?"

    "……저도 그런 취향은 아닙니다."

    빙긋 웃어 보인 정민성이 입을 열었다.

    "사실 우리 능력자들의 입장에서는 이지혁 씨보다 존경스러운 인물이 없습니다. 이지혁 씨의 존재가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반응이 없었을 뿐이지, 이지혁 씨가 적극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게 된다면… 이 세계에는 일대 혁명이 일어날 겁니다."

    "북한에서 혁명이란 말을 들으니 기분이 요상하네요."

    정민성은 대답하지 않고 커피를 마셨다.

    "드시죠."

    "설탕 좀 주세요. 쓴 게 싫어서."

    커피에 각설탕을 넣고 나서야 이지혁은 커피를 들어 마셨다.

    "괜찮으신가요?"

    "입이 쓰레기라 비싼 것과 비싸지 않은 걸 구분할 미각이 없어요. 그냥 달달하면 다 맛있는 거죠."

    "아쉽군요. 좋은 커피인데 말이죠."

    "본론이나 말해보시죠."

    "본론이요?"

    "그냥 잡담이나 하고 커피나 한잔 마시고 가라고 저를 여기로 데리고 오지는 않았을 것 아니에요?"

    "그렇다고 하면 화내실 겁니까?"

    "화는 내지 않겠지만, 시간 낭비하고 싶은 생각도 없으니 집에 가서 발 닦고 잠이나 자려구요."

    정민성이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 감당하기 힘든 분이시군요."

    "어느 면에서? 저는 지금 매우 고분고분하다고 생각하고 있는데요."

    "확실히……."

    정민성이 얼굴에 쓴 안경을 잡아 내렸다. 안경을 접어 바닥에 내려놓은 정민성이 고개를 들어 이지혁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이지혁 씨."

    "네?"

    "이지혁 씨는 지금의 세상을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뭔 소리래요?"

    "지금의 세상이 이치에 맞다고 생각하십니까?"

    "뭔 소리를 하려는 건 줄은 모르겠는데……."

    이지혁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안타깝게도 당신이 생각하는, 이치에 합당한 세상이라는 것은 인류가 세상에 출현한 이후로 단 한 번도 이루어진 적이 없는 개념이에요."

    "……."

    "유토피아니 뭐니 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고 한 사람은 역사상으로도 수도 없이 많았어요. 이곳뿐만이 아니라 다른 곳 또한 똑같았죠. 그런데 결과가 뭔지 알아요?"

    "실패했다고 말하고 싶으신 겁니까?"

    "아뇨. 그저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역전이 있었을 뿐이에요. 새로운 개념이 세상을 지배하기 시작하면, 또 그에 따른 부작용이 나타나죠. 물론 그 과정이 발전을 이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이지혁의 꽤나 시니컬한 자세를 고수했다.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확연한 변화라는 것은 의외로 잘 일어나지 않는 일이라는 거죠. 이것만 바꾸면 세상이 확 달라질 거라고 믿는 것은 그냥 자기 자신의 생각에 함몰되어 있는 사람의 망상일 뿐이에요."

    "과연."

    정민성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입니다. 과연 이지혁 씨로군요."

    정민성은 진심으로 감탄했다는 투였다. 하지만 그 어조가 미묘하게 비꼬는 것만 같이 들리는 이지혁이었다.

    "할 말 없으면 그만 가봐도 될 것 같네요."

    "하지만 말입니다, 이지혁 씨."

    이지혁은 대답 없이 정민성을 빤히 바라보았다.

    "세상을 바꿔온 것은 언제나 그런 멍청이들이었습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심정으로 자신의 몸을 던져 댄 멍청이들 덕분에 세상은 여기까지 발전한 거죠."

    "그래서 계란으로 바위를 쳐보시겠다?"

    "무모한 짓이기는 하지만……."

    정민성은 빙긋이 웃었다.

    "요즘 바위는 바위가 아니죠. 그리고 저희도 단순한 계란은 아닙니다."

    이지혁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 좋네요. 그래서……."

    이지혁이 가만히 정민성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알파는 잘 있나요?"

    "……."

    정곡을 찔렸다는 듯이 움찔하는 정민성.

    이지혁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말을 이어갔다.

    "뭔가 익숙한 느낌이 난다 싶었더니, 아니나 다를까네요. 당신이 하던 말을 어디선가 들었다고 생각했어요. 과연이라고 해야 할까."

    "그는 잘 있습니다."

    "여전히 생각은 바뀌지 않았나요?"

    "그의 생각이 바뀌는 것은 아마 이 세상에 인간들이 모조리 사라진 이후일 겁니다."

    "선택되었다는 선민의식은 막을 방법이 없죠. 보통 그런 생각을 하는 인간들은 다들 정신병자니까요. 안타깝게도 저는 의사가 아니라서 정신병자를 고치는 법은 알지 못하거든요. 단 한 가지밖에."

    이지혁의 얼굴이 낮게 가라앉아 가자 정민성이 넌지시 물었다.

    "그 방법이 뭔지 물어도 될까요?"

    "간단해요. 죽으면 미친놈이든 정상인이든 다 똑같은 법이죠."

    "……그거 매우 무서운 말이군요. 당신의 입에서 나왔다는 것이 더더욱."

    이지혁은 굳은 얼굴을 풀지 않았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그게 미친 짓이라는 건 모르지 않을 거라고 봐요."

    "보기에 따라서는 그렇겠죠."

    "나는 솔직히 나서서 뭔가를 하려고 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지금 세상에 나름 만족하고 사는 사람이에요. 내 생활이 조금이라도 침범된다는 느낌이 들면 전력으로 나서서 박살을 내버릴 테니까 그런 줄 알아요."

    "기억하겠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지금 당장 여기를 다 박살 내버리면 속이 편할 것 같지만……."

    이지혁이 고민된다는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무슨 보모도 아니고, 언제까지 혼자서 다 맡아서 할 수는 없는 노릇이죠. 그리고 댁들이 이렇게 움직이고 있다는 것도 나 혼자 날뛰면 어떻게든 막아낼 자신이 있으니까 그러는 거겠죠?"

    "오햅니다. 저희는 정말로 이지혁 씨와는 적대하고 싶지 않습니다."

    "정말 오해였다는 걸 알려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오늘은 일단 물러날 거예요. 내가 여기서 혼자 난동을 부리게 되면 결과적으로 내 입지를 줄이게 될 테니까. 하지만 경고하건대, 멈추지 않으면 난 다시 올 거예요. 그리고 그때는 이번처럼 말만으로 끝나지는 않을 거라고 전해요."

    "전하라구요?"

    "알파에게."

    "……알겠습니다."

    이지혁은 그 말을 남기고 손을 휘저었다.

    바로 옆에 게이트가 생겨나자 이지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피 잘 얻어 마셨어요. 다음에도 같이 한잔할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저도 즐거웠습니다."

    이지혁과 정민성의 눈이 서로 마주쳤다.

    "경고예요."

    이지혁은 그 말 한마디를 남기고는 게이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정민성은 이지혁이 들어간 게이트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긴장된 몸을 늘어뜨릴 수 있었다.

    "물 한 잔."

    "예."

    대기하고 있던 웨이터에게 물을 주문한 정민성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북한의 텅 빈 건물들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경고라……."

    이지혁의 본격적인 개입은 모든 일을 틀어버릴 수 있는 변수다. 하지만 이 일은 반드시 진행해야 하는 일이었다.

    "대기하고 있던 자들에게 모두 대기 풀라고 전해. 목표는 돌아갔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곧 다시 돌아오겠지. 그때는 정말 피할 수 없는 싸움이 될 거야."

    단순히 그들뿐만이 아닌, 세상을 건 싸움이 시작될 것이다.

    정민성이 창밖을 보며 나직한 웃음을 터뜨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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