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70화 (70/118)
  • [■] 자, 이제 정신 차려야지 [■]

    ─────

    "와우!"

    저승사자가 찾아온 것이라면 매우 경박한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와중에 할 말이 저런 것이라니.

    퍼퍼퍼펑!

    폭음이 좀 뒤에 들린 것으로 보아 저승사자는 아닌 모양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이제 곧 끔직한 고통과 함께…….

    "응?"

    고통이 안 느껴지잖아?

    바로 즉사해서 고통이 없는 것인가를 고민하던 리진철은 목구멍에서 치솟아 올라오는 피를 토했다.

    "우웨에에엑!"

    안 죽은 모양이다.

    그런데 죽지 않았다는 것을 이런 식으로 알아차려야 한다는 것은 꽤나 슬픈 일 아닌가.

    전신에서 느껴지는 격통에 신음하며 리진철이 눈을 떴다.

    "거 봐. 이 아저씨 깡다구가 있다니까."

    "깡다구도 좋지만, 곧 죽을 것 같은데요?"

    "그럼 살려야죠."

    이지혁이 씨익 웃더니 고개를 돌렸다.

    좌우를 살핀 이지혁이 멋쩍은 얼굴로 최정훈을 보고 말했다.

    "아펠 안 왔어요?"

    "아펠드리체 님이라면… 오늘 보지도 못했는데 말이죠."

    "음?"

    이지혁이 볼을 긁더니 리진철을 향해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다.

    "거, 미안하게 됐어요. 나름 구해주려고 왔는데. 남길 말은?"

    "아직… 안 죽… 쿨럭!"

    네놈 면상을 보니 정말 죽을 것 같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자꾸 역류하는 핏덩이 때문에 말을 잇지 못했다.

    "아이고, 피 색깔 좀 봐. 시커멓네, 시커매! 내가 이러고도 안 죽은 사람을 본 적이 없는데."

    멀쩡하게 살아 있는 놈도 화병으로 죽일 수 있는 위험한 놈이었다.

    "그러다 진짜 죽겠습니다."

    그래도 최정훈은 나름 사람이라 이지혁이 죽어가는 리진철을 놀리고 있는 꼴을 보지 못하겠는 모양이었다.

    "와, 저 양반 보게? 이 인간 엄청 싫다고 하더니."

    "싫기야 하지만, 아무리 싫다고 해도 다 죽어가는 인간을 놀리는 것은 기본적인 인성 문제 아니겠습니까?"

    "내 인성이 쓰레기라고?"

    "뭐, 꼭 그런 말은 아니지만… 그렇게 들렸다면 그런 거겠죠. 도둑이 제 발 저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와, 이 아저씨 보게?"

    둘이 하는 짓거리를 보고 있던 리진철이 입으로 피를 꾸역꾸역 토하면서 힘겹게 입을 열었다.

    "차라리… 죽여라, 이놈들아."

    "에헤이, 구해줬더니 보람 없게."

    이지혁이 리진철을 머리를 톡톡, 치더니 싱긋 웃었다.

    "금방 살려줄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봐요. 아펠드리체랑 연락이 안 돼서 문제긴 하지만… 뭐, 치료 마법을 쓸 수 있는 게 아펠드리체만은 아니니까. 아저씨는 치료 마법 아니면 수술해도 죽을 각이라 내가 특별히 불러다 주는 거예요."

    이걸 고맙다고 해야 하는가, 욕을 해야 하는가.

    심각한 고민에 빠져들고 있는 리진철이지만, 이지혁은 그런 그의 심리 상태 따위에는 영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다.

    "네놈들은 뭐네?"

    리진철을 추격하던 이들이 갑자기 나타난 이지혁을 보고는 당황하여 소리쳤다.

    일반적으로 이런 상황이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눈앞에 나타난 것들을 모조리 찢어발겨 버리겠지만, 그들도 눈이 있다 보니 이지혁이 나타나는 것과 동시에 날아드는 에테르들을 일시에 소멸시켜 버린 것을 목격한 뒤였다.

    그들 역시 능력자고, 지금 이지혁이 행한 것들이 얼마나 엄청난 이적인지 정도는 이해할 능력이 있었다.

    "응?"

    이지혁은 자신을 바라보는 이들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아직 안 갔어요?"

    "……."

    "이상하네? 머리가 있으면 지금쯤은 도망을 가야 하는데, 도망을 가지 않는다는 건 머리가 없다는 건데……."

    이지혁이 혀를 차더니 최정훈에게 물었다.

    "죽여도 되요?"

    "왜 저한테 묻습니까?"

    "평소에는 안 묻고 해결한다고 짜증이란 짜증은 다 내더니, 좀 민감한 일이라고 발 빼는 거 봐! 총재 아저씨한테 이야기해서 영재교육시켜야겠네. 좋은 정치인 되시겠어요."

    "끄응."

    욕도 참 다양하고 다채롭게 한다는 생각이 드는 최정훈이었다.

    '어쩔까?'

    살짝 고민되는 최정훈이었다.

    평소였다면 사람을 왜 죽이냐며 난리를 쳤겠지만, 지금 이들을 이대로 돌려보내면 이지혁이… 정확하게 말하자면 남한 측이 리진철을 빼갔다는 것이 기정사실화되어 버린다.

    아무리 말처럼 전쟁을 걸어오지는 않는다고 해도 남북 관계의 냉각화는 막을 수가 없다.

    "음, 일단 이 양반들… 적당한 곳에다 가둬둘 수는 없을까요?"

    "적당한 곳?"

    "좀 멀리 떨어진 곳도 괜찮고, 사람이랑 소통만 할 수 없는 곳이면 아무 데나 괜찮은데요?"

    "아, 적당한 데가 있죠."

    이지혁이 한 손을 적당히 휘젓자 허공에 게이트가 두 개 나타났다.

    "왜 두 갭니까?"

    "하나야 애들 넣을 구멍이구요."

    "하나는요?"

    "그야 뭐, 제 손으로 넣으면 효율이 떨어지잖아요. 제가 뭐, 딱히 힘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마법으로 쟤들을 잡아서 밀어 넣는 건 의외로 굉장히 마력이 많이 드는 일이라서요. 차라리 죽이는 게 더 편하죠."

    "그럼?"

    "대신해 줄 애가 오는 거죠."

    "누구요?"

    "그야 뭐 빤한 걸……."

    그와 함께 곧 게이트 안에서 최정훈이 예상하던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 눈.

    사라처럼 날리고 있는 갈기.

    날카로운 발톱.

    그야말로 야수의 모습을 하고 있는 작은 강아지…….

    "……오식이네요."

    "네."

    게이트에서 나온 오식이가 이지혁을 발견하고는 쪼르르 달려와 다리에 볼을 비볐다.

    "일하자, 일."

    컹!

    이지혁이 주변에 있는 능력자들을 가리켰다.

    "저 양반들 잡아서 저기에 처넣어라. 죽이지는 말고."

    컹!

    오식이가 뭔가를 바라는 듯 가만히 있자 이지혁이 쩝, 혀를 한 번 차고는 오식이의 등에 촉수를 꽂았다.

    "그냥 그 형태로도 할 수 있으면서."

    물론 손이 없는 관계로 팔이나 다리를 물어 던져야 할 테니 저쪽도 그리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마력을 주입당한 오식이가 쑥쑥 자라더니 본연의 모습을 순식간에 되찾았다.

    "이, 이게 뭐야!"

    "왜 갑자기 몬스터가!"

    "당황하지 마라! 한 마리다!"

    확실히 한 마리기는 하지.

    최정훈은 안타까운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한 마리기는 하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이 용 한 마리라든가, 피닉스 한 마리 같은 말을 잘 쓰지 않는 이유는 그 한 마리도 감당할 수 없기에 복수형이 딱히 의미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

    오식이도 이미 그런 존재였다.

    커어어어엉!

    오식이가 능력자들에게 달려들더니, 오른손 왼손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잡아서 게이트 안으로 사람들을 던져 넣기 시작했다.

    "오!"

    이지혁이 게이트로 쏙쏙 빨려 들어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박수를 쳤다.

    "크, 신기할세."

    "뭐가 말입니까?"

    "저렇게 대충 던지는데 어떻게 저렇게 정확하게 들어갈까요? 쟤를 농구시켜야 하는 건데."

    "……."

    그야 사람이랑 같이 농구시키면 샤킬 오닐도 어깨빵 한 방에 탈골돼서 실려 가기야 하겠지.

    근데 그건 반칙이잖아.

    "아아아아악!"

    마지막 한 사람까지 쏙쏙 던져 넣은 오식이가 어깨를 으쓱하고는 이지혁에게로 다가왔다.

    "오냐."

    오식이에게 주입한 마나를 회수하려는 찰나, 오식이가 이지혁의 옆에 있는 리진철을 잡아 들어 올렸다.

    "그건 아니다, 오식아."

    크륵?

    "그건 지지야. 내려놔야지."

    오식이가 얌전히 리진철을 다시 원래 있던 자리로 곱게 내려놓았다.

    그제야 이지혁이 촉수를 꽂아 마나를 회수했다. 다시 쪼그라든 오식이가 작아진 입으로 하품을 하더니, 그 자리에 몸을 둥글게 말고 누웠다.

    일 다 끝나면 데려가라는 듯이.

    '쟤는 지능이 몇일까?'

    어쩌면 사람보다 똑똑하지 않을까?

    매번 생각하는 주제 중의 하나지만, 가면 갈수록 의혹이 짙어지는 최정훈이었다.

    하는 짓은 개 같은데, 개라고 하기에는 뭔가 너무 똑똑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어디로 보낸 겁니까? 이번에도 이계입니까?"

    "에이, 저 많은 애들 이계로 보내려고 하면 나도 힘들어요. 그게 그렇게 쉬운 거였으면 베라프 애들도 벌써 다 넘어왔게요."

    "음, 그렇겠네요. 그럼 어디로 보낸 겁니까?"

    "적도요."

    "적도, 적도라……."

    적도에 뭐가 있더라?

    이지혁과 관련이 있는 적도에 대해서 생각하던 최정훈이 빙긋 웃었다.

    "……설마 거긴 아니겠죠?"

    "아는 데가 거기밖에는 없는데 뭘 어째요."

    "하하하하."

    이 미친놈이!

    격리만 시켜 달라니까 몬스터 섬에다가 사람을 떨어뜨려?

    거기가 지구에서 제일 위험한 곳 아니냐?

    온갖 몬스터들이 우글우글거리는 이지혁의 몬스터 보관소를 떠올린 최정훈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거기에 떨어지느니, 차라리 여기서 죽는 게 나을 텐데.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괜스레 못할 짓을 했다는 생각에 최정훈은 죄책감에 시달렸다. 하지만 죄책감이라는 단어와는 1g도 관련이 없는 이지혁은 이미 관심을 끊고 리진철의 볼을 톡톡, 치고 있었다.

    "자, 이제 정신 차려야지?"

    "……."

    "죽었나?"

    "사, 살아 있다! 이 미친놈아!"

    "헐, 얘 말하는 것 좀 봐?"

    이지혁이 상처 받은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하기야 누구라도 살려준 사람에게 그런 말을 들으면 상처를 받지 않을 수 없겠지만, 저 인간의 경우는 좀 다르지 않은가.

    "기껏 구해줬더니 막말이라니! 이래서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고 하더니!"

    "……."

    "구해주려면 좀 곱게 구해주든가!"

    "내가 곱게 하지 않은 건 또 뭐가 있냐? 이 주변을 날려 버린 것도 아니고."

    "썩을."

    리진철이 바닥이 피 가래를 뱉었다.

    사실 구해준 것은 무척이나 고마운 일이지만, 이지혁을 보면 말이 곱게 나가지 않았다.

    이 인간 때문에 그가 겪었던 고초가 오죽했던가.

    그리고 이지혁에게는 왠지 고개를 숙이지 않아야 한다는 느낌이 강하게 느껴졌다. 이 인간에게 한 번 고개를 숙여 버리면 그때부터는 돌이킬 수 없다는 예감이 든 것이다.

    "그래서 내가 구하지 말자고 했잖아요."

    "…사람을 구한 게 아니라 정보를 구했다고 생각하시죠."

    "흠, 그렇지."

    이지혁이 리진철을 발로 툭툭, 차며 말했다.

    "이왕 이리된 거, 죽기 전에 이야기 좀 해봐. 너, 왜 도망 나온 거야?"

    "간나 새끼……."

    리진철은 이제 더는 항변할 힘도 없었다.

    아까부터 고통은 점점 희미해지고, 눈앞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거기에 자꾸 한기가 드는 것이, 죽음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는 실감이 난다.

    "죽어가는 것 같은데요?"

    "보면 아는 거 뭐."

    최정훈의 말에 이지혁이 시큰둥하게 답했다.

    "그럼 살려야죠."

    "진인사 대천명이라…….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린 것."

    "그거 그렇게 쓰는 거 아닙니다."

    최정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말을 이었다.

    "이 사람이 이대로 죽으면 여기까지 와서 고생한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일단 사람들 오기 전에 빨리 남한으로 데리고 가지요."

    이지혁도 더 이상 귀찮아지는 것은 원하지 않았는지 순순히 게이트를 열었다.

    "가자."

    리진철이 뭔가 반항하려는 것 같았지만, 몸에 힘이 없는지 미미하기 짝이 없는 반응만을 보일 뿐이었다.

    이지혁은 리진철의 명치를 한 번 걷어차 그의 반항을 깔끔하게 제압하고는 게이트 안으로 던져 넣었다.

    그러고는 게이트 안으로 최정훈과 함께 들어섰다.

    이지혁과 최정훈이 안으로 들어서고 나자 게이트가 천천히 닫혔고, 고요해진 공터에는 풀벌레 소리만이 나직하게 울려 댈 뿐이었다.

    * * *

    "쿨럭!"

    게이트에서 나온 리진철이 바닥에 피 한 바가지를 쏟아내자 NDF들이 기겁을 하여 뒤로 물러섰다.

    보통 사람이라면 일단은 달려들어 치료하려고 했겠지만, 갑자기 게이트에서 어디서 많이 보던 인간이 튀어나와 토혈을 해 대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튀어나온 인간이 북한의 능력자라는 것을 안다면 웬만해서는 쉽게 다가갈 수 없을 것이다.

    "얼씨구?"

    이어서 게이트에서 튀어나온 이지혁이 토혈을 하고 있는 리진철을 보며 혀를 찼다.

    "그래도 피도 토하는 걸 보면 아직 죽지는 않은 모양이네."

    "악마!"

    "마귀!"

    이지혁의 말을 들은 NDF들이 부잉을 해 댔지만, 이지혁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저거 리진철인가, 그 새끼 아냐?"

    리진철에게 가장 감정이 좋지 않다고 할 수 있는 박성찬이 인상을 쓰며 바라보았다. 리진철이 멀쩡한 상황이었다면 당장에 달려들어 박살을 내놓고 싶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피를 토하며 다 죽어가는 반송장에게 폭력을 쓸 수는 없다.

    '그래도 내가 명색이 사람인데.'

    인간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원수라고 해도 이런 상황에서 사람을 함부로 대할 수는 없는 법이다.

    "아, 비켜봐."

    이지혁이 리진철의 옆구리를 발로 쭉 밀어 눕혔다.

    "사람도 아니네."

    박성찬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펠드리체 어디 갔어?"

    "오늘 출근 안 하셨습니다."

    "그래?"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 보니……."

    평소에는 항상 곁에 있어서 생각하지 못했는데, 휴대폰도 쓰지 않는 아펠드리체가 잠적을 하면 찾아낼 방법이 없었다. 지금도 아펠드리체가 이지혁의 집에 있는 것이 아니라면 불러올 방법이 없는 것이다.

    "……어?"

    이지혁이 조금은 당황한 얼굴로 리진철을 바라보았다.

    "야, 회복 마법 써줄 애가 있어야 하는데, 지금 자리에 없다네? 어떻게 하지? 너 죽겠는데?"

    "쿨럭! 쿨럭! 이 종…간나!"

    "욕도 하는 걸 보니 금방 죽지는 않겠지만."

    이지혁이 골치가 아프다는 듯이 머리를 긁었다. 먼 거리를 가야 하는데 오늘따라 차 키가 보이지 않는 듯한 기분이다.

    "영 그러네."

    게이트에서 마지막으로 빠져나온 최정훈이 쓰러져 있는 리진철을 보고는 얼굴을 굳혔다.

    "더 놔두면 진짜 죽겠는데요?"

    "나도 그러려는 건 아닌데, 방법이……."

    대충 상황을 짐작한 최정훈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이러다가 리진철이 죽기라도 하면 얻는 것 없이 고생만 한 꼴이 되어버리지 않는가.

    "회복 마법 말고 다른 방법은 없습니까?"

    "음……."

    이지혁이 고민하는 듯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좀비로 만들까?"

    "……."

    "아니야. 좀비는 지능이 너무 약하니까 문제겠네. 대출 마물로 만들어 버리면 될 것 같은데요? 마력을 좀 퍼부으면 대충 30%확률 정도로 마물로 변환이 가능한데?"

    "70%는 뭡니까?"

    "뒈지는 거죠."

    깔끔한 설명에 최정훈이 빙그레 웃었다.

    그러고는 뒤를 돌아 소리쳤다.

    "빨리 가서 아펠드리체 님 찾아와요! 방송을 때리든지 뭘 하든지 어떻게 하든 찾아오라고!"

    "…이제는 사람 찾기까지 하는구나."

    "이러다 나무에 올라간 고양이까지 내려 달라고 하겠네."

    나름 대한민국 최고 인력들이지만 그 명성에 걸맞은 대접을 전혀 받지 못한 이들은 심각한 자괴감을 느끼는 얼굴로 터덜터덜 밖으로 걸어 나갔다.

    "어? 아니다. 있다. 회복 마법 쓸 수 있는 사람."

    하지만 그들의 발을 잡는 목소리가 있었다.

    "누구요?"

    김다현이 반색하여 소리치자 최정훈이 씨익 웃으며 바라보았다.

    "동생분 어딨나요?"

    * * *

    "싫어요."

    김다솜은 벌레라도 보는 눈으로 리진철을 바라보았다. 인간이 인간에게 어떻게 저런 혐오감을 내보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순간 들 정도였다.

    "그러지 마시고……."

    당황한 최정훈이 어떻게든 달래려고 했지만, 김다솜은 한기를 풀풀 내뿜을 뿐이었다.

    김다현이 갑자기 불러서 오긴 왔는데, 와보니 웬 오랑우탄처럼 생긴 놈을 치료하라는데 황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가 치료 마법을 배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녀의 치료 마법은 이런 데 쓰라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매우 중요한 사람입니다."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이죠?"

    "그렇게 말씀을 하시면……."

    할 말이 없지.

    국가가 하는 일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국민이 일방적으로 그 뜻을 따라야 할 이유는 없다. 특히나 김다솜은 김다현의 동생이기는 하지만 공무원도 아닌 일반인이다. 옆에 간첩이 있다 하더라도 굳이 잡으려 할 필요가 없는 사람인 것이다.

    "나라의 존망이 걸린 일입니다."

    결국 할 수 있는 것은 빤한 대사밖에 없었다. 좀 더 절박하고 창의적인 대사를 발견하지 못한 자신을 한탄하며 최정훈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랑은 상관없어요."

    완고한 김다솜의 철벽을 뚫지 못한 최정훈이 김다현에게 슬쩍 눈길을 주었다.

    "하하, 다솜아."

    김다현이 배턴을 터치하고는 김다솜을 달래기 시작했다.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잖니."

    "……안 어려워?"

    김다솜이 리진철을 빤히 바라보자 김다현도 별생각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뭐지, 이 시체는?"

    이미 죽은 걸 가져다 놓고 살리라고 하는 클라슨데?

    그래도 이건 너무하지 않느냐는 얼굴로 바라보자 최정훈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이, 일억!"

    "일억 주신단다."

    "일억이고 뭐고,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죠. 전 못해요."

    "아니……."

    김다솜이 얼굴을 굳히자 갑자기 방 안에 한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 한기에 쓰러져 있던 리진철마저 움찔움찔할 정도였다.

    "사람 살리려다가 제대로 골로 보내는 각인데?"

    박성찬이 안타깝다는 듯이 혀를 찼다.

    "그러지 마시고……."

    최정훈이 뭔가 끈을 이어보려고 했지만, 김다솜은 한기를 풀풀 풍기는 얼굴로 최정훈을 일별하고는 아예 몸을 돌려 버렸다. 그러고는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오빠!"

    한기를 풀풀 풍기던 표정이 순간 봄날의 햇살을 받은 듯이 사르르 녹는다. 이지혁이 구석에서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 김다솜이 다른 이들을 내버려 두고 이지혁에게로 쪼르르 달려갔다.

    "아! 진짜!"

    이지혁이 화면을 보며 벌떡 일어났다.

    "이놈의 손모가지는 왜 회복이 안 되는 거야!"

    눈이 피로한지 화면을 회색으로 바꿔 버린 이지혁이 누워 있는 자신의 캐릭터를 보며 이를 뿌득뿌득, 갈았다.

    "정글러만 안 왔으면 내가 따는 건데!"

    최정훈은 그 광경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죽어가는 사람을 두고 게임을 할 수 있는 멘탈도 보통 멘탈이 아니었다. 평소에도 보통 인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럴 때는 특히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건지 뇌를 열어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된다.

    "게임하세요?"

    "하, 이 짓도 못해 먹겠다."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낸 이지혁이 마우스를 내팽개치며 밖으로 나가자 김다솜이 찰싹 달라붙어 그를 따랐다.

    "다, 다솜 씨!"

    최정훈도 김다솜을 따라가며 징징대기 시작했다.

    "한 번만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사람 하나 살린다고 치고."

    "살린다고 치는 게 아니라 진짜로 살리는 거잖아요."

    "그렇죠. 사람 살리는 거죠! 그게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그 시간에 119에 전화를 하세요."

    "매우 건설적인 방법입니다만……."

    그걸로 해결이 된다 싶으면 이러고 있겠냐고!

    저 인간이 능력자라 워낙에 바퀴벌레 같은 생명력을 가지고 있어서 아직까지 숨이 붙어 있는 거지, 의사가 보면 '아이코. 장례식장으로 가는 길은 이쪽입니다'를 외칠 만한 상황이었다. 화타가 살아 돌아온다고 하더라도 의학으로는 답이 없다.

    최정훈이 아무리 의술에 대해 문외한이라고 하더라도 그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 증거로 수십 명이나 되는 NDF들 중에서 지금 119에 전화를 거는 사람이 아무도 없지 않은가.

    "중요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우리 쪽 공격했던 사람 맞죠?"

    "네?"

    "지혁이 오빠한테 욕도 막 했다던데?"

    "그, 그런 말은 어디서 들으신 겁니까?"

    "우리 오빠한테요."

    김다현, 이 썩을 놈!

    김다솜의 한기가 풀풀 풍겨나는 반응의 원인을 알아낸 최정훈이 나직하게 이를 갈았다.

    "이지혁 씨……."

    결국 기댈 곳이 이지혁밖에 없는 최정훈이 다시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불렀다.

    "왜요!"

    최정훈이 살짝 눈을 감았다.

    게임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이쪽에서 풀지 말란 말입니다.

    "저… 저 인간 꼭 살려야 하는데요."

    "살려요."

    "그러려면 김다솜 씨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응?"

    이지혁이 김다솜을 슬쩍 보더니 피식 웃었다.

    "그러고 보니 너도 회복 마법 배웠구나. 이제 완전히 힐러 취급이네."

    "오빠한테 쓸 마나도 부족해요."

    깔끔한 김다솜의 발언이지만, 이지혁은 곤란해하는 최정훈의 얼굴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서 좀 살려줘라."

    "마나 부족한데……."

    "아펠한테 말해서 좀 나눠 주라고 할 테니까, 일단 목숨은 좀 붙여줘 봐. 그래도 내가 고생해서 데리고 온 놈인데, 저리 죽어버리면 그것도 문제야."

    "네!"

    김다솜이 몸을 획 돌려 안으로 걸어가자 최정훈은 미묘한 심정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냥 다 때려치울까?'

    오늘따라 하늘이 서글프게 보이는 최정훈이었다.

    * * *

    "쿨럭!"

    몇 번이고 피를 토한 리진철이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옷은 피투성이가 되어 있지만, 그마나 안색에 핏기가 돌아오고 있었다.

    "됐어요."

    김다솜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이지혁을 향해 뛰어갔다.

    "……."

    멀어지는 김다솜의 뒷모습을 보던 리진철이 허탈한 듯 말했다.

    "치료사인가? 한국에는 없다고 들었는데?"

    "그건 중요한 게 아니죠."

    최정훈이 리진철의 말을 잘랐다.

    "우리는 많은 걸 투자했습니다, 리진철 씨. 이제는 그 보답을 받아야 할 시간입니다. 지금 북한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듣고 싶은데요?"

    "…여기서는 말할 수 없다."

    리진철이 주위를 둘러보고 말했다.

    그러자 박성찬이 인상을 쓰며 리진철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지금 우릴 의심하는 거냐?"

    "아니."

    리진철이 쓴웃음을 머금고 고개를 저었다.

    "내 말이 그리 들렸다면 오해라고 해두지. 나는 지금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내가 하는 말을 듣고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지위에 있지 않다고 말하고 있는 거다."

    "……."

    최정훈의 얼굴이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군 통수자나 국방 통수권자가 필요하다. 보통 문제가 아니야."

    "군 통수자?"

    리진철의 발언에 뭔가를 예감한 최정훈이 얼굴을 굳혔다.

    "전쟁급입니까?"

    "이쪽에서 생각이 있다면 그리될지도 모르지."

    "…기다리십시오. 지금 당장 국방부 장관… 아니, 우리가 가죠."

    최정훈이 이지혁을 보며 말했다.

    "게이트 부탁드립니다. 아무래도 상황이 심각한 것 같으니까요."

    "흐응."

    이지혁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게이트를 열었다. 청와대로 가는 게이트가 열리자 박성찬이 리진철 옆에 바짝 붙었다.

    "이 새끼를 어디로 데려가려고? 괜히 테러라도 저지르면 감당할 수 있어? 너무 순진한 거라고, 지금!"

    박성찬의 말에 최정훈이 아차 싶은 얼굴로 리진철을 바라보자 이지혁이 간단하게 결론을 내렸다.

    "그럼 아저씨가 옆에 붙어 있다가 뭔가 한다 싶으면 패요."

    "…라저."

    박성찬이 씨익 미소를 짓고는 리진철의 옆에 바짝 붙었다. 리진철은 영 부담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남조선 놈들은 과격하구만기래."

    니가 할 말은 아니지.

    * * *

    "청와대로 열면 돼요?"

    최정훈은 조금은 불안한 느낌에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리진철이 워낙에 겁을 주어 급하게 서두르긴 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 모든 것이 리진철과 북한 측이 짜고 치는 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일단은 좀 기다려 주십시오."

    자신이 독단적으로 움직일 수 없다고 생각한 최정훈은 이지혁에게 눈길을 주었다.

    하지만 이지혁에게 아이 컨택을 바라는 것은 무모한 짓이었다.

    "왜 사람을 느끼하게 보고 그래요? 소름 돋게."

    "끄으응."

    최정훈이 한숨을 푹 내쉬고는 박성찬을 바라보았다.

    "이 새끼는 내가 잘 잡고 있을 테니, 얼른 다녀오십시오."

    "크……."

    같은 사람인데 왜 이리 반응이 다른가.

    누군는 찰떡같이 알아먹는데 누구는 저러고 있으니, 속이 터지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럼."

    최정훈이 밖으로 나가자 이지혁이 리진철을 보며 말했다.

    "아저씨, 뭐 꾸미고 온 거예요?"

    "……방금 전에 저 숨넘어가는 것 못 봤습네까?"

    예전에는 이지혁에게도 반말을 틱틱 내뱉던 리진철이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존댓말이 절로 나왔다. 게다가 방금 전에 이놈의 성격이 얼마나 더러운지 톡톡히 실감하지 않았던가.

    '일부러 안 고쳐 주고 시간 끈 걸 거야.'

    그동안 저질렀던 일에 대한 대가가 돌아온다는 느낌을 받자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른다는 공포감이 엄습했다.

    "그럼 뭔 일을 꾸미는 건 아니라는 거잖아요?"

    "그렇습네다."

    "그렇다는데요?"

    이지혁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보자 박성찬이 거칠게 콧김을 뿜어냈다.

    "저 새끼 말을 믿습니까? 빨갱이 새끼들 말을 어떻게 믿으라는 말입니까?"

    "헐, 빨갱이래! 아저씨, 시대가 어느 시댄데 빨갱이래요!"

    "빨갱이 맞잖습니까."

    "아저씨, 그러다가 잡혀가요."

    "…그건 한국 사람한테 빨갱이라고 하니까 문제가 되는 거고, 얘들은 빨갱이 맞잖습니까!"

    "어?"

    그런가?

    "그런데 개보고 개라고 하면 기분 나쁘잖아요."

    "개보고 개라고 하는데 기분이 왜 나빠요? 갠데."

    "어?"

    어디서부터 말이 꼬였지? 이게 아닌 것 같은데…….

    이지혁이 고민을 하든 말든 박성찬은 계속 열변을 토해냈다.

    "이 새끼들이 뒤통수를 얼마나 잘 치는 줄 아십니까. 앞으로는 평화 협상 벌이면서 뒤로는 함정 파견해서 우리나라 공격하는 놈들입니다. 그런 놈들 말을 어떻게 믿으라는 말입니까!"

    "…그렇다잖아요."

    이지혁이 뚱한 얼굴로 바라보자 리진철이 한숨을 쉬었다.

    "그쪽이 믿든 안 믿든 그건 내가 알 바 아닙네다. 나는 그냥 정보를 가지고 왔을 뿐이고, 그 정보를 듣고 어떻게 움직일지는 이쪽에서 판단하면 됩네다."

    "그렇다는데?"

    이지혁이 좌우로 고개를 돌리자 정해민이 다가와 그의 고개를 잡아 가운데로 세웠다.

    "사람이 줏대가 있어야지!"

    "응?"

    그때, 최정훈이 다시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청와대로 게이트를 열어주십시오."

    "싫은데요?"

    "네? 갑자기 왜?"

    "사람은 줏대가 있어야 한대요."

    "그게 아니잖아!"

    이지혁의 등짝을 마구 때리는 정해민을 보며 최정훈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런 건 제발 우리끼리만 있을 때 하자.

    황당하다는 듯이 둘을 바라보고 있는 리진철이 눈에 들어오자 최정훈은 부끄러움을 숨길 수가 없었다.

    국가의 치부가 드러나고 있었다.

    * * *

    우우웅.

    게이트가 열리는 모습을 바라보는 대통령 윤영민의 얼굴은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매번 보던 모습이다 보니 이제는 새롭지도 않다. 저 안에서 튀어나올 인간에 대한 부담감이 있어서 그렇지.

    "오랜만이에요."

    게이트에서 나와 밝은 얼굴로 손을 흔드는 이지혁을 보니 이제 겨우 나았다고 생각했던 위장병이 도지는 기분이 들었다. 위염에서 끝나주면 좋겠는데, 급속 위궤양이 번지는 느낌이 생생하게 들었다.

    '준비성이 철저해야 하는 법이지.'

    윤영민은 미리 준비해 둔 약을 삼키고는 부드러운 미소로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세요, 이지혁 씨."

    "넵."

    이지혁은 게이트에서 나와 주위를 둘러보았다.

    "으음?"

    무장한 병력들이 게이트를 향해 일제히 총구를 들이밀고 있었다. 검은색의 방탄복과 헬멧을 쓴 기동대를 본 이지혁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제가 뭘 잘못했나요?"

    "이지혁 씨 때문이 아니니 고정하시지요."

    국방부 장관이 당황하여 설명했다.

    "상대의 의도를 알 수가 없어서 그럽니다. 이지혁 씨가 옆에 있으니 별일이야 있겠냐마는, 그래도 만전을 기하는 게 좋지요."

    "흐응."

    이지혁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게이트에서 두 사람이 마저 나오고 이지혁이 게이트를 닫았다.

    "최정훈입니다.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대통령님."

    "어서 와요."

    "이쪽이 북한에서 넘어온 리진철 대좌입니다."

    "음……."

    윤영민이 가라앉은 눈으로 리진철을 바라보았다.

    "그쪽이 나를 보고 싶다고 했다면서요?"

    리진철은 피식 웃고 말았다.

    "남조선은 너무 허술한 곳 아닌가? 통수권자를 보고 말한다고 했다고 바로 대통령이 나오다니. 공화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군."

    "이놈이!"

    국방부 장관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윤영민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손을 저어서 그를 진정시켰다.

    "괜찮아요."

    "하지만 대통령님!"

    고개를 내저은 윤영민이 리진철을 보며 말했다.

    "북한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대한민국은 합리성을 중시합니다. 한시라도 급한 일이라면 대통령이 직접 나서는 일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죠. 그러니 그 급하다는 말을 들려주시겠습니까?"

    리진철이 가만히 윤영민을 바라보다가 자세를 바로 하고는 거수경례를 했다.

    "실례했습네다. 조선민주주의 공화국 인민 무력 여단 제1대대장 리진철 대좌입네다. 대한민국의 대통령 각하를 뵙게 되어 영광입네다."

    "윤영민입니다. 일단 앉으실까요?"

    윤영민이 가리키자 리진철은 두말없이 그 자리에 앉았다.

    "자, 이제 이야기를 들려주시지요. 무슨 일입니까?"

    리진철이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는 입을 열었다.

    "믿기 힘든 이야기가 되겠지만, 제가 하는 말은 모두 사실입네다."

    "일단 이야기를 듣고 나서 판단하고 싶은데요."

    "북에서 지금……."

    리진철이 깊은 한숨과 함께 말을 이었다.

    "대량 학살을 시도하고 있습네다."

    "네?"

    윤영민의 눈이 흔들렸다.

    * * *

    "준비는?"

    "차질 없이 준비되고 있습네다."

    정민성은 기분이 좋은지 콧노래를 불렀다. 창밖으로 보이는 어두운 세상이 그의 마음에 쏙 든다.

    "정말 재미있는 도시란 말이지, 평양이란."

    전력이 부족해 모든 불을 껐지만 광장 한가운데에 있는 김일성과 김정일의 동상을 비추는 불빛은 결코 꺼지지 않고 있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도시 한가운데서 홀로 빛나고 있는 금색의 두 동상은 괴기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 모습을 권위의 상징이라는 듯이 자랑스레 보이고 있을 만큼 이 나라는 정상이 아니었다.

    "순순히 모이고 있네?"

    "당의 이름으로 지시를 내려두었으니 거부할 수는 없을 겁네다. 게다가 오는 이들에게 식량을 나눠 준다는 미끼까지 뿌려두었습네다."

    "쓰레기 같은 나라."

    그저 사람을 모으는 것뿐이건만 이리 골머리를 썩어야 하다니.

    다른 나라라면 인력과 차량을 동원하여 수송해 버리면 그만이겠지만, 이 나라에는 그만한 사람들을 수송할 차량이 없고, 그 차량을 움직일 수 있는 기름도 부족했다.

    철저한 움직임도 예산이 있어야 가능한 법이다. 결국 할 수 있는 것은 당원들을 풀어 각지에서 사람들을 인솔해 오는 방법뿐이었다.

    "그나마 겨울이라 다행입네다. 식량이 부족하다 보니 다들 자발적으로 나서서 모여들고 있습네다."

    "그렇군."

    정민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참으로 썩어버린 곳이란 말이지. 그런데 이런 썩은 땅이기에 이런 계획이 가능하다는 것이 참 재미있군. 마치 그분의 강림을 위해 준비되어 있는 땅 같군."

    북한 이상으로 처참한 나라는 의외로 많이 있었다.

    북한은 사상의 자유가 존재하지 않고 김씨 일가에 대한 압제가 문제일 뿐이지, 경제력으로 따진다면 의외로 그리 뒤떨어지지 않는 국가였다.

    아프리카만 보더라도 기아로 죽어가는 인간이 널려 있는 나라는 흔하다. 하지만 이곳처럼 인간들이 국가에 완벽히 통제되는 국가는 지구상에 단 한 곳뿐이다.

    그렇기에 이 땅이 그들의 계획을 실현하기에는 최적의 위치인 것이다.

    "쓸모도 없는 인간들이 자신의 목숨으로 새 시대를 연다면 그것만큼 가치 있는 죽음도 없겠지."

    "그렇습네다."

    "문제는 없겠지?"

    "……."

    "대답은?"

    부관이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입을 열었다.

    "리진철의 행방이 묘연합니다."

    "음?"

    정민성의 미간이 꿈틀했다.

    "행방이 묘연하다고? 애들을 풀어서 뒤를 쫓았지 않네? 그런데 남한으로 넘어갔다는 것도 아니고, 행방이 묘연해?"

    "리진철을 쫓던 아이들도 모두 사라졌습네다. 무전도 남기지 못할 만큼 순간적으로 벌어진 일입네다."

    "……이지혁이군."

    정민성은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비벼 껐다.

    그 외에 다른 가능성은 생각할 수 없었다. 그들이 심혈을 기울여 키워낸 능력자들을 일순 사라지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지혁 말고는 없었다.

    "그럼 이미 남한으로 넘어갔다고 봐야겠군. 이지혁이 데리고 갔을 기야."

    "괜찮겠습네까?"

    "이미 벌어진 일을 그들이라고 막을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리고 여기서 정확하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리진철도 알지 못해. 그럼 남한에서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게 될 것이고, 그 느려 터진 놈들이 대책을 세웠을 쯤에는 이미 모든 일이 끝난다."

    "과연… 그렇습네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정민성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제일 엮이고 싶지 않은 놈과 엮이게 되었군.'

    강하고 약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이지혁은 정말로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르는 이다. 변덕이 워낙 심해서 하루아침에 갑자기 평양에 나타나 모든 것을 뒤엎어 버릴 수도 있는 사람인 것이다. 게다가 그럴 능력마저 충분했다.

    "흐음……."

    정민성이 얼굴을 주무르고는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일정을 좀 당겨야겠어. 서두르라고 전파하라."

    "알갔습네다."

    "돼지 새끼는?"

    "기쁨조와 마약에 절어 있습네다. 지금이면 바닥을 기어서 돼지처럼 울게 할 수도 있습네다."

    "좋군."

    정민성인 미소를 지었다. 한때나마 인민들의 위에서 그들의 고혈을 빨아먹던 벌레를 자신의 손으로 그리 만들었다는 것이 그에게 만족감을 주고 있었다.

    "돼지 새끼는 돼지처럼 살아야 하는데, 아직까지 저렇게나마 살려둬야 한다는 것이 안타깝군. 저놈이 있어야 할 곳은 돼지우린데 말이야."

    "눈이 너무 많지 않습네까."

    "안다 하지 않네."

    다른 눈들만 없었어도 이미 살려두지 않았을 것이다.

    "준비를 서두르라."

    "예!"

    부관이 밖으로 나가자 정민성은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둠이 내려앉은 도시에 보이는 거대한 동상.

    "무덤 같구만기래."

    그리고 이제 곧 무덤이 될 것이다.

    이 평양이라는 도시가 통째로 말이다.

    정민성은 낮게 웃으며 곧 무덤이 될 도시를 바라보았다.

    * * *

    "잠시만요. 지금 대량 학살이라고 하신 겁니까?"

    윤영민은 아직 자신이 가는귀가 먹지 않았다고 확신했다. 그러니 그가 들은 것이 잘못되었을 리는 없다.

    그럼에도 확인을 해야 하는 이유는 그가 들은 것이 워낙에 충격적인 내용이기 때문이었다.

    "예, 그렇습네다."

    리진철이 조금은 우울한 얼굴로 윤영민을 바라보았다.

    "밑도 끝도 없이 이게 무슨 소립니까?"

    윤영민은 국방부 장관과 통일부 장관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들도 전혀 영문 모르는 소리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금시초문입니다."

    "저 역시."

    "으으음……."

    윤영민이 침음을 흘렸다.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들어보려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북한과 관련하여 허위 사실을 유포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수준이니까.

    심지어 북한에서 탈북한 이들조차도 먹고살기 위해서 북한에 대한 거짓말을 지어내 방송에서 떠들어 대고 있는 수준이니, 북한이라는 나라에 대한 말은 반쯤 걸러들어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었다.

    하지만…….

    '목숨 걸고 탈출한 사람이다. 거기에 북한에서 저 사람을 받아들일 시에 전쟁까지 불사한다고 경고를 했다는 건 분명히 뭔가 있다는 것이다.'

    심심하면 전쟁에 불바다 운운하는 북한이기는 하지만, 이번에는 분명 뭔가 달랐다. 지금까지 북한이 한 사람 때문에 전쟁을 언급한 경우는 없었다.

    역대급 거물이었던 황장엽이 탈북하여 한국으로 온 상황에서도 전쟁은 언급하지 않던 북한이다.

    그렇다면 이 남자가 황장엽 이상의 가치가 있다는 뜻일 건데…….

    '그렇다면 믿지 않을 수도 없고…….'

    윤영민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믿기 힘드신 것 이해합네다. 하지만 이건 사실입네다."

    "으음……."

    "현재 북한은 인민들을 평양으로 모으고 있습네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네까."

    윤영민의 시선을 받은 통일부 장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사실입니다. 현재 북한은 주민들을 평양으로 집합시키고 있습니다. 당대회와 식량 배분이 그 이유라 하고는 있지만, 정확한 의도는 밝혀지지 않은 상황입니다."

    "그렇군요."

    윤영민의 안색이 평온을 찾았다.

    "리진철 대좌라고 했지요?"

    "예, 대통령 각하."

    한국에서는 이제 각하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고 정정을 해줘야 하는가를 살짝 고민하던 윤영민이 일단은 접어두고 할 말을 이었다.

    "북한에서 학살을 시도한다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건 저도 정확하게 알지 못합네다."

    "음……."

    윤영민이 고개를 저었다.

    "목숨을 걸고 탈출하여 그 사실을 알리러 온 의기는 높이 사겠습니다. 하지만 확실한 이유와 증거가 없다면, 우리도 쉽게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각하!"

    "물론 북한의 김씨 일가가 그동안 수많은 학살을 자행해 왔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체제가 안정된 지금, 그들이 자국의 주민을 학살해야 할 이유를 저는 도통 짐작할 수 없습니다. 역사상 수많은 학살자가 있었지만, 그들이 주민들을 학살하는 건 정권의 유지라는 명확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북한의 주민들이 혁명을 시도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이유도 없이 학살을 한다는 것은 제 상식으로는 도무지……."

    윤영민이 말끝을 흐리자 통일부 장관이 그 말을 받았다.

    "2000년대 이후로 북한은 반동분자라고 분류된 사람들을 처형하기보다는 노동 교화형을 내려 노동력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예외가 있다면 주 권력층이지요. 권력을 가지고 있다가 숙청당한 이들이야 총살도 당하고 바주카포를 맞아 죽기도 하지만, 일반 주민들에 대해서는 그러한 식의 과격한 처형은 하지 않는 편입니다. 그런 북한이 갑자기 노선을 바꾸었다면 뭔가 계기가 있어야 할 것인데, 지금 그런 계기가 보이지 않습니다."

    리진철의 얼굴이 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럼 제가 왜 이곳에 있겠습네까? 제가 그대로 그곳에 있었다면 편히 살았을 것 아닙네까!"

    "음……."

    리진철의 심정은 이해하지만, 명확한 증거가 없는 이상 그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그때, 이지혁이 리진철을 보며 입을 열었다.

    "아저씨."

    "…네?"

    이지혁과 말을 하는 것도 껄끄러운지 리진철이 살짝 구겨진 얼굴로 대답을 했다.

    "그럼 이번에 우리가 나오자마자 일을 벌인 것도 그런 낌새를 알아챘기 때문이에요?"

    "반은 그렇고, 반은 그렇지 않습네다."

    "그건 또 뭔 말이래요?"

    "위에서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는 생각은 했습네다. 실제로 평양으로 몬스터가 몰려온다고 하면 일단은 인민들을 대피시키는 것이 정상적인 방향 아닙네까?"

    "…그렇죠?"

    "하지만 군인들은 끌어모으면서도 인민들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게 했습네다. 공화국이 정상적인 국가가 아니라는 것은 우리도 알고 있습네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지금까지 없던 경우입네다. 심지어 전쟁 중에서도 인민들이 대피할 자유는 주던 곳이 공화국입네다."

    "돼지 새끼가 미쳐서 그런 것 아니에요?"

    "…수령 동지도 그렇게까지 대책이 없지는 않습네다. 그래서 이상하다고 생각을 한 것입네다."

    "그래요?"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북한이야 뭔 짓을 해도 이상하지 않은 나라다 보니 딱히 위화감 같은 것을 느끼지 못했는데, 북한 주민 입장인 리진철에게는 그게 이상하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여튼……."

    리진철이 이지혁의 말을 끊고는 설명을 이어갔다.

    "이상한 낌새가 있다는 것은 미리 알고 있었습네다. 그래서 총참모장 동무께서 거사를 서두른 것입네다."

    "그 아저씨, 참 좋은 아저씨였는데……."

    이지혁이 혀를 차며 손을 앞으로 모으자 리진철이 버럭 화를 내며 소리를 질렀다.

    "살아 계십네다! 죽은 사람 취급 하시지 마시라요!"

    "헐, 살아 있어요?"

    보통은 죽어야 정상인데.

    "어? 이게 살아 있으면 안 되는데?"

    "카악!"

    리진철이 발작을 하려 하자 박성찬이 그의 어깨를 꾸욱 눌렀다. 리진철에게 악감정이 많은 박성찬도 이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할 말이 하나밖에 없었다.

    "네가 좀 참아. 원래 저런 놈이잖아."

    "그래도 그렇지, 너무하지 않습네까!"

    "이해해, 이해해. 우리도 오죽 당했겠냐."

    "크으……."

    이지혁의 존재 하나로 남과 북이 하나되는 순간이었다.

    윤영민은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어쩌라는 거지?'

    실제로 북한에서 주민들을 학살하는 게 확실하다고 해도 문제였다.

    '북한으로 쳐들어가기라도 하란 건가?'

    감정적으로야 당장에 쳐들어가서 뒤집어엎어 버리고 싶지만, 그는 명색이 대한민국의 대통령이었다.

    북한 땅으로 군대를 파견하는 순간, 전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아무리 학살을 막겠다는 명분이 있다고 해도 전쟁은 쉽게 시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거기에 따른 희생은 누가 감당하라는 말인가.

    게다가 전면전이 벌어져 있는 상황에서 게이트가 열리기라도 한다면, 남과 북이 공멸하는 사태가 벌어지지 않을 거라는 보장도 없었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북한에서 학살이 벌어지든, 벌어지지 않은 자신들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생각의 정리를 끝낸 윤영민이 리진철을 보며 말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습니다. 현재 북한 고위층에서 주민들을 학살하려는 움직임이 있고, 그걸 알리기 위해 철책을 넘으셨다는 말이군요."

    "예, 그렇습네다."

    "잘 알았습니다. 그럼 남은 문제는 저희끼리 상의를 하겠습니다."

    윤영민의 말투에서 부정적 어조를 읽은 리진철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각하, 저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네다! 정민성이 고위층을 장악하고 무슨 일을 벌이려고 하고 있단 말입네다! 최근에 최고 수령 동지의 모습을 본 적이 있으십네까? 이미 당권은 그에게 넘어간 지 오래입네다."

    "정민성?"

    통일부 장관은 윤영민의 눈길에 난색을 표할 수밖에 없었다. 웬만한 사람들이야 파악하고 있으려 노력한다고 하지만, 로동당에 소속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들의 이름을 모조리 기억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거꾸로 본다면 통일부 장관이 알지 못할 만큼 미미한 존재기도 하다는 뜻이었다.

    "중요 인물은 아닌 것 같습니다."

    "흐음, 북한이야 원래 그런 나라니까."

    백두혈통이라는 웃기지도 않는 이름으로 불리는 김씨 일가가 아니라면 권력 구도가 일 년에도 몇 번씩 바뀌기도 하는 곳이 북한이었다.

    권력이 최고 수령의 총애로 결정되는 곳이기에 전혀 예상을 하지 못한 인물이 순간적으로 당권을 장악하기도 하는 곳이었다.

    "그 정민성이라는 자가 당권을 장악했다고 하더라도 그가 학살을 일으켜야 할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새로운 세상을 연다고 했습네다."

    "그야 정권 교체를 원하는 이들이 원래 하는 말이구요."

    윤영민이 이제 됐다는 듯 손을 저으려는 순간, 이지혁이 입을 열었다.

    "새로운 세상?"

    "그렇습네다."

    그나마 이지혁이라도 관심을 가져 준 것이 반가운지 리진철이 반색을 하며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학살, 새로운 세상이라……."

    이지혁이 턱을 벅벅 긁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생각나는 것이 있다는 게 이렇게 짜증 나는 상황도 있구나."

    이지혁의 볼에서 심술보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귀찮은 일이 시작되었다는 예감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온 것이다.

    "짐작 가는 바가 있으십니까?"

    가만히 입을 닫고 있던 최정훈이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야 감히 그가 대화에 참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는 하지만, 이지혁이 입을 열면 그가 받아주는 것이 기본이었다.

    이지혁과 대화를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게이트를 열려고 하는 것 같은데?"

    "게이트요?"

    "네? 뭐?"

    이지혁이 설명하기가 귀찮다는 듯 고개를 휙휙 저었다.

    "그, 있잖아요. 지금까지 마왕들이 어떻게 왔는지, 그 메커니즘을 모르진 않을 것 아닙니까?"

    "…모르는데요?"

    뚱한 이지혁의 시선이 향하자 최정훈이 고개를 슬쩍 돌렸다.

    모르는 걸 어떡하라고.

    그렇게 잘 알면 좀 가르쳐 주지.

    "죽음이에요."

    "…네?"

    "게이트를 열기 위해서는 막대한 에너지가 필요하죠. 저 같은 경우는 마나를 통해서 게이트를 열지만, 에너지는 마나만 있는 게 아니거든요. 마족들은 인간들이 죽을 때 내뿜는 마이너스 에너지를 그 동력으로 활용할 수 있어요. 지금까지 마왕들이 소환될 때는 다 그전에 큰 사고들이 있었어요."

    "아!"

    "하지만 사고로 죽일 수 있는 사람은 한계가 있기 마련이죠. 제대로 상황을 갖추고 미리 준비를 한 다음에 마이너스 에너지를 한계까지 뽑아내면, 한 사람의 죽음으로도 수십 명의 죽음을 대체할 수 있기 마련이죠. 그런데 음……."

    이지혁이 뭔가 고민하는 듯하자 최정훈은 가만히 그의 고민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지금 여기에 있는 사람 중 누구도 이지혁이 고민하는 영역에 대한 지식은 없으니까.

    "그 하는 짓거리가 여기서 보면 사이비 종교나 별다를 게 없어서 대규모로는 이루어지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북한이면 그것도 가능하겠네요."

    "그럼 어떻게 되는 겁니까?"

    "어찌 되긴 뭘 어찌 돼요."

    이지혁이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마계랑 문이 열리고, 인류 멸망이지 뭐."

    "……."

    그런 이야기 그리 담담하게 하지 말라고!

    최정훈은 주변 분위기가 차갑게 식어가는 것을 느꼈다.

    * * *

    윤영민은 이지혁과 최정훈의 대화를 이해하지 못했는지 고개를 갸웃했다.

    "마계와 문이 열려요?"

    "그런 것 같습니다."

    대답을 해줄 수 있는 사람도 최정훈 말고는 없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확실이 윤영민이 이해하기에는 너무도 난이도가 높은 말이었다. 최정훈도 정확하게 그 개념을 이해하지는 못하고 있었으니까.

    "마왕에 대해서는 알고 계십니까?"

    "물론이죠."

    정확하게는 알지 못하지만, 게이트에서 출현하는 몬스터 중 끝판왕이라는 개념은 있었다. 덕분에 미국이 뒤집어엎어질 뻔했고, 영국은 수도를 잃었다. 런던이 날아간 덕분에 영국은 지금 타국의 원조 없이는 국가 체제를 유지하기도 힘들 지경이다.

    "그 마왕들이 살고 있는 세계입니다. 몬스터가 우글거리고 마왕들이 데굴거리고 있는 땅이죠."

    "그곳과 연결이 된다는 말입니까?"

    "네. 그러니까, 이지혁 씨의 말을 토대로 한다면……."

    평양으로 모이고 있는 인구와 이지혁의 말을 토대로 효율을 계산한 최정훈이 어색하게 웃었다.

    "북한의 계획대로 흘러갈 경우에… 물론 북한이 정말로 학살을 통해 마계와의 문을 열려고 한다는 가정하에서지만, 여하튼 북한의 계획대로 흘러갈 경우에는 마왕이 한 다스째 나오는 상황도 벌어질 수 있겠네요."

    "그냥 다스도 아니고 원 플러스 원의 특가 상품처럼 튀어나올 수도 있어요."

    "…왜 이럴 때 세일한답니까?"

    이지혁이 겁을 주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이지혁은 허풍을 치거나 거짓말을 한 경우가 없다. 언제나 진실만을 말했다.

    그런데 그 진실이 사람이 귀를 틀어막고 싶게 만든다는 것이 문제지.

    "제가 대표로 물어보는 겁니다만……."

    "넹?"

    "이지혁 씨가 생각하시는 규모로 게이트가 열리게 될 경우에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어떻게라니?"

    "그 여파가 어찌 되냐는 거죠."

    "어, 음……."

    이지혁은 뭔가 고민하려는 듯 손을 올리다가, 곧 고민할 것도 없다는 듯이 손을 내렸다.

    "뭘 어찌 돼요. 세계 멸망이지."

    "……."

    "아니다. 멸망까지는 안 가겠다. 걔들도 인간이 필요하기는 할 테니까. 그럼 전 인류의 가축화가 이루어지는 역사적인 순간이 되겠죠."

    차라리 멸망한다고 해라.

    "그거, 음……."

    윤영민도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장난스러운 대화 같지만, 그 안에 든 내용은 호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대, 대책은 있는 겁니까?"

    윤영민은 이지혁을 보며 말했다. 지금까지 막장 직전까지 치달은 상화이야 수도 없이 많았지만, 언제나 이지혁이 결국에는 해결을 해주지 않았던가.

    "게이트가 열리게 되면……."

    "예."

    "자살하는 게 차라리 속 편할 거예요."

    "……."

    이지혁은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부연을 했다.

    "마왕이라는 애들이 하나같이 제정신은 아닌 애들이라서요."

    "확실히 그렇죠."

    최정훈이 이지혁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눈빛 뭐죠?"

    "아닙니다."

    최정훈이 다시 고개를 반대로 돌렸다.

    눈앞에 그 확실한 증거가 있지 않은가.

    이 인간도 마왕이다. 그리고 에르카나도 마왕이다.

    그가 아는 두 마왕이 모두 정신 나간 것들이니, 귀납적 추정으로 다른 마왕들도 다 또라이라고 생각한다 해도 무리가 없었다.

    '이런 것들이 쏟아져 나오는 거군.'

    그나마 최정훈은 이지혁의 동료로서 바라보고 있는 것이지만, 이지혁과 적이 된다고 생각했을 때는 이 인간이 얼마나 대책이 없을까?

    "막아야 합니다."

    최정훈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건너편에서 이지혁 씨가 한 다스로 쏟아져 나오는 거라구요."

    "…자살할까?"

    윤영민이 침울하게 말을 뱉었다.

    "이 양반들이!"

    모두가 패닉에 빠진 상황에서 그나마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고 있던 통일부 장관이 입을 열었다.

    "아직 그들이 노리는 것이 무엇인지가 확실하지 않습니다. 저자의 말대로 정민성이라는 자가 당권을 장악했다고 하더라도 북한은 김씨 일가가 황제나 다름없는 곳입니다. 돼지… 아니, 최고 수령이 동의하지 않았다면 그런 일은 벌어질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래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지금도 폐쇄된 국가에서 황제처럼 군림하고 있는데, 왜 굳이 인류를 지옥으로 몰아가야 한단 말입니까."

    "으음……."

    확실히 그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어찌하는 게 좋겠나?"

    "흐음……."

    지금까지 상황을 듣고 있던 비서실장 박두진이 침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북한이 무엇을 꾸미고 있는지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있지 않은 이상 움직인다는 것은 무리입니다."

    "하지만 그러다가 저자가 말한 사태가 벌어지게 된다면 큰일이지 않은가."

    "그건 범국가적인 사태로 취급해야 합니다. 제 생각에 가장 좋은 방법은 이 상황 자체를 타국에 알리고 공동으로 대책을 수립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일단 최소한 미, 러, 중, 일, 4개국은 현 상황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군."

    윤영민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은 타국이 그들을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타국을 지원하는 것이 기본이다 보니 타국과 공조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선도국이라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군.'

    예전에 이런 사태가 벌어졌다면 미국에 상황을 알리고 탱자탱자 놀다가 시키는 것만 하면 됐는데, 이제는 자신들이 주도적으로 상황을 해결해야 하다 보니 생각할 것이 너무 많았다.

    "그럼 일단 타국에 상황을 알리게."

    "예. 그러려면 정보가 더 필요합니다."

    박두진이 굳은 얼굴로 리진철을 바라보았다.

    "우리끼리 해야 할 이야기가 좀 더 있을 것 같군요."

    이지혁이 그 광경을 보다가 넌지시 입을 열었다.

    "고문하고 그러면 안 돼요."

    "안 합니다!"

    박두진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시대가 어느 시대인대 고문이라는 말이 나온단 말인가.

    "영화 보니까 막 고문하고 그러던데. 북한 사람이면 더."

    "…정권 뒤집어지는 꼴을 보고 싶으신 겁니까?"

    박두진이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능력자를 고문하려면 무슨 짓을 해야 하는지가 더 궁금하네요."

    "하긴."

    이지혁이 안심하라는 듯이 리진철을 바라보았다.

    "됐죠?"

    리진철이 미묘하게 고맙다는 얼굴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리지혁 동무."

    "네?"

    "…이런 부탁 드리기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만……."

    "네."

    "박용휘 총참모장 동무를 구해주시라요."

    "엥?"

    "…살아 있습네다. 금수산 태양궁전 지하에 갇혀 있습네다. 지금도 죽어가고 있는 중이라요. 제발 부탁이니, 그를 구해주시라요."

    "아저씨, 말이 되는 소리를 해요. 내가 거길 어떻게 들어가서 구해 와요."

    "부탁드립네다."

    리진철이 이지혁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흐음."

    그 말을 남기고 리진철을 박두진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이지혁은 밖으로 나가는 리진철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이제 뭐, 우리는 할 거 다 한 거죠?"

    "그런 것 같습니다."

    최정훈이 심각한 얼굴로 고민하고 있는 윤영민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 더 없었다.

    "그럼 우리는 가볼 테니까, 결과 나오면 이야기해 주세요."

    "아, 그러시겠습니까?"

    윤영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지혁은 게이트를 열고는 그 안으로 들어가며 손을 흔들었다.

    "그럼 안녕히."

    "…예."

    이지혁과 최정훈이 게이트 안으로 사라지자 윤영민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국방부 장관이 재떨이를 앞으로 슬쩍 밀고는 품 안에서 담배를 꺼내 윤영민에게 내밀었다.

    "흐음."

    윤영민이 담배를 받아 물고는 불을 붙였다. 웬만하면 끊고 싶은 물건이지만, 이런 일들 때문에 도무지 끊을 수가 없었다.

    "국가적 위기라……."

    아무래도 보통 일이 아니라는 예감이 그의 머릿속을 뒤흔들고 있었다.

    "송정수 총재님 호출 가능한가?"

    "예. 가능합니다."

    "총재님을 모셔야겠어. 나 혼자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야."

    "지금 바로 연락하겠습니다."

    "그래. 그리고 타국 반응도 최대한 빨리 받아주게."

    "예."

    윤영민은 미간에 주름을 접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지금 그가 앉아 있는 자리가 이토록이나 무겁게 느껴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 * *

    "그럼 저 집에 갈게요."

    이지혁은 태연하게 손을 흔들었다.

    "예, 이지혁 씨."

    최정훈도 굳이 이지혁을 붙잡지 않았다.

    평소였다면 아직 퇴근시간이 되지 않았다거나 하는 둥의 딴지를 걸었겠지만, 지금 돌아가는 상황이 워낙 심상치 않았다.

    "그런데……."

    "예."

    "정말 그런 사태가 벌어진다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멸망이라니까요."

    "답도 없는 겁니까?"

    이지혁은 고민도 하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최전성기였을 때도 마계 전체를 상대로는 싸울 수 없었어요. 물론 게이트가 열린다고 해도 마계 전체가 넘어오는 것은 아니겠지만, 지금의 저는 마왕이 다섯만 넘게 넘어온다면 그냥 포기하고 도망쳐야 해요."

    "으음……."

    "엄살이 아니고, 진짜로 방법이 없어요. 어떻게든 막아야 해요."

    "……그렇군요."

    "그럼 저 가요."

    이지혁이 손을 흔들고 반대쪽으로 향하자 최정훈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집에 간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집은 그 방향이 아닌데요?"

    "머리가 좀 복잡해서 게임 센터나 가보려구요."

    "아, 예."

    이지혁이 저 멀리 사라지자 최정훈이 묘한 표정으로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머리가 복잡해?'

    그 이지혁이?

    * * *

    "악몽 같은 소리구만."

    크리스토퍼는 시가를 입에 물고는 허탈하게 웃었다.

    "차라리 마누라가 이혼하자고 하는 게 더 속이 편하겠어."

    "그건 좋은 일 아닙니까?"

    "옛날에야 좋은 일이지. 다 늙어서 이혼당하면 꼴이 말이 아니게 된다고."

    농담에도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북한에서 넘어온 자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어떻게 하긴. 북한을 쓸어버려야지."

    크리스토퍼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이건 비단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범인류적인 문제였다.

    마계와의 문이 열리게 된다면 아시아부터 유럽까지 모두 쓸려나가는 데 채 삼 일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이미 마왕의 위력을 그들이 직접 경험하지 않았는가.

    델카란이 런던을 날려 버리는 데 걸리는 시간이 10분을 넘지 않았다. 그것도 그가 굳이 빠르게 런던을 정리해야 할 필요성이 없었기 때문이지, 마음만 먹었다면 순식간에 날아가 버렸을 것이다.

    "마왕급이 넘어온다면 너무 위험하다. 그게 하나가 아니라고 하면 더더욱."

    지금까지는 이지혁이 어찌어찌 해결을 해오기는 했지만, 바로 옆에서 그 전투들을 지켜본 크리스토퍼는 그것이 얼마나 위태한 과정이었는가를 잘 알고 있었다.

    "일단 각국 정보국에 협조를 구해서 북한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아보게."

    "예."

    "그리고……."

    크리스토퍼가 이것을 말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듯하다가 결국은 입을 열고 말았다.

    "부통령에게 말해서 중국과 러시아에 협조를 구하도록 하게."

    "무슨 협조 말입니까?"

    "만약 게이트를 여는 것을 막지 못할 시에는……."

    "예."

    크리스토퍼는 입에 물고 있던 시가를 재떨이에 강하게 비비면서 말했다.

    "…삼국에서 핵 샤워를 퍼부어서 북한이라는 나라를 지워 버려야 할 거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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