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69화 (69/118)
  • [■] 그거 위험한 발언 같은데 [■]

    ─────

    "어?"

    들어온 사람을 확인한 최정훈이 신음성을 냈다.

    "여긴 웬일이십니까?"

    "내가 오면 안 될 곳에 왔나?"

    "그런 건 아니지만……."

    최정훈은 들어온 이를 바라보고는 실소를 흘렸다.

    반백의 머리와 검은색의 슈트는 그의 댄디한 매력을 뽐내고 있지만, 불끈 솟아오른 대흉근과 금방이라도 슈트를 뚫고 나올 것 같은 이두박근과 대퇴근이 댄디함을 야성미로 뒤덮고 있는 사내.

    송정수 여당 총재가 그곳에 있었다.

    "아저씨, 오랜만에 보네요."

    송정수는 이지혁을 보며 침음을 삼켰다.

    참 뭐랄까.

    애증이 넘치는 사내다.

    그가 자신에게 한 짓을 생각하면 백번 죽여도 시원치 않은 기분이지만, 그 덕분에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는 사실 또한 송정수로서는 부정할 수가 없었다.

    지금 육체에 넘치는 활력은 그가 이계로 가지 않았다면 결코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열 살이나 어린 마누라도 어제 그를 보고 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온 것이냐고 난리가 나지 않았던가.

    덕분에 오늘 십 년 만에 푸짐한 아침상을 받은 송정수로서는 이지혁이 밉기도 하지만 고맙기도 했다.

    "잘 지냈는가?"

    "네, 뭐, 배려해 주신 덕분에."

    저 말이 얄밉게 들리는 것은 송정수의 성격이 꼬였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참자.'

    북한과 이계를 겪으면서 송정수는 이지혁이 한국에, 그리고 세계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를 실감했다.

    약육강식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홀로 억제력을 가지는 인간의 존재는 더없는 보물인 것이다. 그것을 깨닫고 보니 새삼 그동안의 대한민국이 이지혁을 얼마나 박대해 왔는지를 알 수 있었다.

    '나 같으면 진즉에 미국으로 떴다.'

    송정수가 미국이 아닌 한국에서 사는 이유는 미국보다 한국이 좋아서가 아니라, 미국에서는 그가 한국에서 누리는 우월적 지위를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가 아무리 여당의 총재라고는 하지만 미국에 가면 그냥 나이 먹은 동양인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 미국에 가도 나름의 대우를 받는 이유는 그가 송정수이기 때문이 아니라 여당의 총재이기 때문이니까.

    하지만 이지혁은 아니다.

    송정수의 권력이 상대적인 것이라면, 이지혁의 능력은 절대적인 것이다. 이지혁은 한국이 아니라 미국에서도 한국에서와 같은, 아니, 그 이상의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

    '한국이라는 나라는 항상 그렇지.'

    과학자든 뭐든 한국에서는 언제나 능력 있는 사람이 제대로 된 대접을 못 받는 일이 허다하게 벌어진다.

    능력 있는 사람을 박대하다가 외국에 뺏기고, 나중에 그 진가가 드러나면 애국심을 운운하며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는 경우가 어디 한두 번인가.

    '이번에는 그런 일이 벌어지게 놔둘 수 없지.'

    송정수는 적어도 이지혁만은 외국에 뺏길 생각이 없었다. 그는 지금의 대한민국을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로 만들어주고 있는 중요한 열쇠니까.

    "나름 신경을 써봤네만, 불편한 것이 있다면 말해주게나. 내 최대한 고쳐 줌세."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최정훈이 깊게 고개를 숙였지만, 이지혁은 여전히 뚱했다.

    "이지혁 씨는 불편한 게 없고?"

    "네. 뭐, 딱히."

    "NDF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최상의 지원을 약속하겠네."

    "지원을 할 게 아니라 일단 봉급부터 올려주시죠."

    "그러겠네."

    "엥?"

    이지혁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냥 해본 말인데 이렇게 즉각적인 대답이 돌아올 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안 그래도 확인해 보니 일반 KSF 대원들과 같은 월급 체계를 공유하고 있더군. 최상위 대원들이 차상위 대원들과 같은 체계를 가진다면 그건 사기에도 영향을 끼치는 문제지. 이 부분에 대해서는 2주 내에 빠르게 조절할 수 있도록 해보겠네."

    "아저씨는 정치인 아니에요?"

    "응?"

    "정치인은 보통 말로만 그러고 말던데. 대충 말 흐리고 시간도 정확하게 안 정하고."

    송정수는 피식 웃었다.

    "그건 그럴 생각이 없으니까 그런 거고. 나는 정치인은 맞지만, 해야 하는 일에 대해서는 시간이 생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일세. 일단 NDF 대원들에 대해서는 새로운 체계를 정해서 통보할 수 있도록 하겠네. 그리고……."

    송정수는 이지혁을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는 또 따로 정해야겠지. 지금 국가직 계약 공무원 취급을 받는다고?"

    "예."

    "어느 미친놈이 그런 걸 정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정훈이 찔끔하여 목을 넣었다.

    "당장 재계약을 하도록 하지. 오늘이 가기 전에 원장이 방문할 걸세."

    "……뭔가 이상한데?"

    이지혁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가 아는 대한민국은 이런 나라가 아니었다. 보통은 열심히 하려는 사람한테는 정당한 대가를 지급하지 않고 낙하산이나 타고 내려온 인간이나 의미 없는 자리에 앉아서 돈이나 축내는 놈들에게 막대한 예산을 배정하여 법인카드로 명품이나 긁고 다니게 만들어 주는 게 헬조선 아니던가.

    이래서야 헬조선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었다.

    "그리고 자네."

    송정수가 고개를 돌려 최정훈을 바라보았다.

    "예."

    최정훈이 군기가 바짝 들어가 차렷 자세가 되었다. 능력자들과는 다르게 그는 눈앞에 있는 노인이 얼마만큼의 힘을 가지고 있는지를 절절이 실감하는 공무원이었다.

    "자네도 노력과 하는 일에 비해서 벌이가 영 시원치 않은 것 같더구만."

    "……수당은 충분히 지급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NDF에서 일하는 사람을 일반 공무원 취급 하고 생명 수당이나 챙겨 주는 걸 정상적인 짓거리라고 할 수는 없지. KSF와 NDF의 일반 공무원들 역시 납득할 수 있는 봉급 인상을 약속하네. 다만, 이 부분은 입법 과정이 좀 필요할 것 같으니, 조금 기다려 주게나."

    "감사합니다."

    최정훈이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아저씨, 대통령 한 번 해보실 생각인가 보네요."

    "하하하!"

    송정수가 크게 웃었다.

    "대통령이 되고 싶으면 지금은 자네들을 박해해야지. 지금 일반인들 사이에 능력자들에 대한 반감이 얼마나 큰지 알면서 그런 말을 하는 건가?"

    "그래요?"

    이지혁이 돌아보자 최정훈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럼 왜 이러시지?"

    송정수는 가볍게 웃었다.

    "무서워서라고 해두지."

    "네?"

    "이계에 떨어져 보니 몬스터라는 것들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를 알겠더군. 자네가 나를 보낸 곳은 약한 몬스터들만 몰려 있는 세계라며?"

    "뭐, 그렇죠."

    "그런 곳에서도 몬스터들이 얼마나 잔혹한지를 알게 되었지. 그리고 전장에 놓여 산다는 게 얼마나 무서운지도. 그런데 생각해 보니 나는 한국에 있으면서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단 말이야. 한국에는 더 무서운 몬스터들이 항시 게이트를 통해 나오고 있는데도 말이지."

    최정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수많은 사회에서 겪고 있는 현상이다.

    "결국은 능력자들에 대한 착취와 희생 강요로 우리 사회가 돌아가고 있는 것이었지. 나는 정치를 한다는 사람임에도 그 현상에 대해 정확하게 캐치를 하지 못하고 있었어. 한 번 다녀오니 눈이 뜨이더구만. 그래서 생각한 거지. 능력자들이 단체로 파업이라도 하게 되는 상황이 벌어진다면… 이 사회는 그 즉시 붕괴하네. 물론 능력자들도 자신들이 움직이지 않으면 나라가 망한다는 것을 알 테니 파업까지야 하겠냐마는서도."

    송정수가 심호흡을 하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건 나라를 담보로 잡은 협박과 협잡에 지나지 않네. 적어도 제대로 된 나라라면 나라를 위해 희생하고 있는 이들에 대해서 정당한 대가를 지급하고 경외를 보내는 것이 맞겠지. 그런데 정치인이라는 놈들이 당장의 인기를 위해서 능력자들을 비난하고 있으니 답답할 노릇이지."

    이지혁은 결론을 내렸다.

    "그러니까 이계에서 뭘 잘못 드시고 오셨군요."

    "그렇게 되나……."

    송정수는 좌절스러운 심정이었다. 이지혁과 대화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쓰잘데기 없는 짓인지를 잘 알면서도 주저리주저리 상황을 늘어놓은 그가 바보지.

    "…여하튼 그런 걸로 알게."

    "뭘 알라는 거예요?"

    "아닐세."

    송정수는 이지혁에게 관심을 떼고 최정훈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 외에 필요한 것이 있으면 내게 이야기를 하게."

    "알겠습니다."

    최정훈은 송정수라는 존재가 자신들의 편이 되어준다는 사실이 얼마나 굉장한 것인지 알고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이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그건 두말할 것 없이 대통령인 윤영민이 될 것이다.

    아무리 평가가 좋지 않은 대통령이라고 할지라도 그가 가지고 있는 힘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현직 대통령의 힘은 그만큼이나 막강한 것이다.

    하지만 송정수의 힘도 그에 못지않았다.

    송정수는 실질적인 권한을 손에 쥔 사람은 아니지만, 그 이상의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입법부와 사법부, 행정부에 이르기까지 그의 입김이 닿지 않는 곳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심지어 대통령인 윤영민조차 그를 적대시하면서도 필요할 때는 그의 의견을 적극 수용하는 편이니, 두말할 것도 없었다.

    "감사합니다, 총재님."

    "그래."

    송정수가 인사를 받고는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시간은 좀 이르지만, 아침 안 먹었으면 같이 식사나 하러 가지."

    "아저씨가 사시는 거예요?"

    "그럼 설마 내가 얻어먹겠나?"

    "으음……."

    이지혁이 고개를 돌려 최정훈을 바라보더니 조용히 속삭였다.

    "이거 3만 원 넘기면 안 되는 건가요?"

    "네?"

    최정훈이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마 이지혁 씨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자네도 해당 없으니 따라오게."

    "그래도 되겠습니까?"

    최정훈이 반색했다.

    "아저씨, 재산이 많으신가 보네요."

    "…정치라는 게 원래 돈 많고 할 짓 없는 놈들이나 하는 거라 그런 걸세. 진짜 정치를 해야 할 사람들은 먹고살기가 바빠서 정치판에 뛰어들 생각 자체를 못하거든."

    "오, 듣고 보니 일리가 있네요."

    "그래서 국회의원이 되는 사람의 연금을 보장해야 한다고 내가 주장하고 있는 건데, 지금 국회의원이라는 놈들이 하나같이 도둑놈들이다 보니 국민 여론이 만만치 않지."

    "재산은 계속 늘어만 가는 양반들이 국가에서 세금으로 연금까지 받아 처먹겠다고 하니 누가 좋아해요."

    "그러니까 안 그런 사람들이 국회의원을 할 수 있어야 할 것 아닌가. 국회의원 한 번 하고 나면 일반 기업에 취직할 수도 없으니, 돈 있는 놈들만 한자리 해보겠다고 달려들고 있지 않은가."

    "…아저씨는 정치인이 맞는 것 같아요."

    "왜?"

    "그럴싸하게 들리거든요."

    "허허허허."

    송정수는 껄껄 웃고는 이지혁의 어깨에 팔을 올렸다.

    "그럼 이 사기꾼이랑 같이 밥 한 번 먹어보겠나? 정신 똑바로 안 차리면 전 재산을 탈탈 털릴 걸세."

    "이두박근이 경동맥을 조이는 느낌이네요. 박성찬 씨가 자리에 없는 게 무척 아쉬워요."

    이지혁은 송정수에게 질질 끌려 밖으로 나갔다. 최정훈이 그런 둘의 모습을 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따라 나섰다.

    뭐랄까.

    정말 어울리지 않을 것 같으면서도 어울리는 조합이라고나 할까.

    응?

    나도 그렇다고?

    "에이, 설마."

    * * *

    송정수가 이지혁과 최정훈을 데리고 간 곳은 누가 봐도 고급으로 보이는 음식점이었다.

    "이, 이건 좀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왜? 청탁이라도 할까 봐?"

    "그, 그래도 저희가 이래 봬도 공무원 신분이라……."

    안절부절하지 못하는 최정훈을 보고 송정수가 피식 웃었다.

    "청탁이나 뇌물이라는 것은 그러한 것을 할 수 있는 권력자에게 그러지 못하는 이들이 재물을 주고 부탁을 하는 것 아닌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내가 자네들에게 밥을 사 먹이는 것을 청탁이라 불러야겠는가?"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이지혁이야 애매하다 치고, 최정훈이 할 수 있는 것은 송정수도 뭐든 할 수 있었다.

    송정수의 한마디로 지금까지 최정훈이 골머리를 썩던 부분들이 단번에 해결되어 버린 걸로 충분히 설명이 될 것이다.

    "여기 뭐 나와요?"

    하지만 이지혁의 머릿속에는 이미 그런 부분이 없었다.

    밥집에 오면 밥을 먹는다.

    아주 단순명쾌한 사고방식뿐이었다.

    "한정식집이네."

    "오, 한정식."

    "그 동네에 다녀오기 전에는 나도 양식을 선호하는 편이었는데, 갔다 오니 이상하게 한식이 땡기더구만."

    "아, 그 기분 알 것 같아요. 그런데 이상하네? 나는 그런 거보다 그냥 음식이면 다 맛있던데."

    "으음, 그렇지."

    이상한 데에서 공감대를 찾는 둘을 보며 최정훈은 들리지 않게 웃음을 지었다. 하기야 저 두 사람이 아니고서야 서로의 기분을 이해하는 것은 힘들 것이다.

    부지불식간에 이계로 떨어져서 생존해야 했던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 서로 말고는 없을 테니까.

    이상하다면 이상한 점이 하나 있기는 했다.

    이지혁이 송정수에게 공감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송정수가 이지혁에게 저리 공감하는 것은 좀 이상하게 느껴졌다.

    어찌 되었든 간에 이지혁은 송정수에게 그 경험을 하게 만든 원인이 된 사람이고, 송정수의 입장에서는 이지혁에게 증오심을 품는다고 해도 당연하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런데도 굳이 이런 식으로 이지혁에 대한 지원을 늘리고, 위상을 재고하고, 따로 식사까지 하러 와서 친분을 쌓는다는 것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정치인이라는 건가?'

    원수와도 웃으면서 손을 잡을 수 있어야 정치인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지금 송정수의 모습은 완벽한 정치인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죽도록 고생을 하게 만든 원인과 이렇게 웃으면서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만 보더라도 송정수는 대단한 사람이었다.

    '하기야 송정수니까.'

    이런저런 수식어를 붙이지 않아도 송정수는 그 이름만으로도 대단한 사람이었다.

    대한민국 정계에서 가장 강한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니 오죽하겠는가.

    "양식이고, 한식이고… 간만 되어 있으면 못 먹을 게 없죠."

    "그렇지. 세상에 소금이 그렇게 중요한 것인 줄은 상상도 못했네."

    "크, 그걸 아셨네요."

    그런데 이거…….

    나 소외당하고 있는 것 아닌가?

    죽이 맞아 둘이 떠들고 있는 모습을 보자니, 뭔가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된 기분이었다.

    "그래. 지내는 데는 불편한 게 없고?"

    "사람 사는 게 다 그렇죠."

    "집은 어떤가? 능력자 거주구에 있다고 들었는데, 사람들이 많아서 불편하지는 않은가?"

    "요즘은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시대잖아요. 이사 온 지는 한참 됐는데, 아직 별일은 없어요."

    "혹시라도 주거에 관련해서 문제가 생기면 즉각 이야기해 주게. 전화번호 줄까?"

    "괜찮아요. 저 양반이 알겠죠."

    순식간에 전화 셔틀이 되어버린 최정훈이 분노를 담아 말했다.

    "네, 제가 알고 있습니다."

    '필요할 때 말씀해 주십시오'를 붙이지 않은 것이 최정훈이 발휘한 최대한의 자존심이었다.

    음식들이 나오기 시작하자 송정수가 식사를 권했다.

    "드시게."

    "네."

    "잘 먹겠습니다."

    아무래도 고급 음식점이라 그런지, 조금은 싱거운 듯 고급스러운 맛이 나는 것 같았다. 일반 음식점과는 조금 다른 맛이 나는 게 당연…….

    "맛없는데?"

    아, 이게 맛이 없는 거구나.

    비싼 건데 맛이 없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지 못한 최정훈이 자신의 혀를 탓할 때, 이지혁은 당당히 항의하고 있었다.

    "겉에만 번지르르하지, 싱겁고 맛이 없어요."

    "……조미료가 안 들어가서 그런 겁니다."

    "왜 안 넣었데요? 맛만 있으면 되지."

    "다음에는 주의하지. 메인 요리들은 간이 더 되어 있는 편이니, 조금 더 기다려 보게."

    "근데 뭐, 상관없어요. 저는 다 잘 먹거든요."

    이게 상관이 있다는 건지, 없다는 건지…….

    해석이 힘든 최정훈이었다.

    "생활이 쉽지는 않지?"

    "그냥 그렇다니까요."

    "그런가? 나는 힘들던데?"

    "……."

    송정수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지금도 등 뒤에 누군가 서 있으면 뒤돌아 후려쳐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네. 자네는 안 그런가 보이?"

    "저야 뭐, 위험에 처할 일은 잘 없던 터라……."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닐 텐데?"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니까요."

    "흐음, 맞는 말이네."

    송정수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이계에서 수천 년을 살다가 이쪽으로 넘어왔다면 사고방식부터 시작해서 모든 게 달라졌을 텐데, 용케도 적응을 해냈군?"

    "아직 적응 중이에요."

    "적응이 다 되기는 하는 건가?"

    "……글쎄요?"

    대화가 점점 진지해져갔다.

    "사실 내가 자네를 만나러 온 것은 보고 싶었기 때문일세."

    "뭘요?"

    "이계를 다녀온 이가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이지혁이 뚱한 얼굴로 송정수를 바라보았다.

    이제야 비로소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 것 같았다.

    "힘든가 보네요?"

    "쉽지는 않지. 아무래도 말일세."

    송정수가 냅킨을 꺼내 입을 닦았다.

    "이런 겉치레에 다시 익숙해져야 한다는 것도 힘든 일이지. 무엇보다… 뭐랄까,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다시 관계를 적립해야 한다는 것이 매우 힘든 일이네."

    "흐음……."

    "인간만이 정치를 하지는 않네. 하지만 인간이 아닌 존재들은 서로를 속여 먹거나 이용하기 위해서 노력하지는 않네. 그런데 이제 와서 그런 인간들의 모습을 보니 뭐라고 할까……."

    송정수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추악하다고나 할까?"

    "……."

    "인간에 대한 혐오감이 생기는 것을 어쩔 수가 없더군. 이게 내가 정치라는 것을 잘 알아서 생기는 것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고 싶었네."

    이지혁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솔직히 저는 머리가 그리 좋은 편이 아니라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도통 이해가 안 가요."

    "그럼 간단하게 설명하면 되겠군."

    "네?"

    "방해되지 않는가?"

    "……."

    송정수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내가 자네의 입장이라면 모든 것이 귀찮고 방해만 될 것 같아서 말이네. 사실 서포트라고는 하지만, 실질적으로 자네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은 정해민 씨라는 텔레포터 하나뿐이더군. 그리고 사실 그 정해민 씨라는 사람도 도움이 된다고 딱히 말하기는 애매하던데?"

    이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 사실이죠."

    "그럼 사실 자네는 NDF나 KSF라는 조직, 더 나아가서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게서 제대로 된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는 처지인 것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비록 그것이 능력의 부족으로 벌어지고 있는 일일지라도 말이야."

    "아니라고는 못하겠네요."

    "그럼 귀찮지 않나?"

    "흐음……."

    이지혁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고민하는 눈치였다.

    "글쎄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사실대로 말을 하자면 같이 데리고 다니는 양반들이 별 도움이 안 되고 있고, 때로는 되레 방해가 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죠."

    "으음……."

    최정훈이 침음성을 냈다.

    그 역시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기는 하지만, 이렇게 당사자의 입에서 듣게 되니 새삼 가슴이 갑갑해져 온다.

    NDF도 최선을 다해 이지혁을 지원하려고 하고 있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었다. 가진 능력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는 없으니까.

    "그런데 그게 다는 아니잖아요."

    "무슨 말인가?"

    "인간은 효율적인 동물이고, 합리적인 동물이지만, 반대로 지독하게 비합리적인 동물이기도 하니까요. 그들이 내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사실이지만, 도움이 되기도 해요."

    "……그렇게 필사적으로 변명을 해주지 않아도 되네만."

    최정훈은 조금 비참한 심정이었지만, 송정수는 다르게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과연, 그렇죠."

    "저기… 독특한 경험을 하신 두 분께서만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는 것은 알겠는데. 저는 중간에서 매우 힘듭니다만."

    "간단한 이야기지. 합리성을 따진다면, 필요 없는 것이 꼭 필요할 때가 있다는 말이야."

    "네. 이해한 걸로 하겠습니다."

    최정훈은 여전히 알아먹지 못하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인간성을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군.'

    송정수는 다행이라 느꼈다.

    그가 이계에서 돌아와 처음 느낀 것은 이지혁에 대한 맹렬한 적의였고, 그것이 풀리고 나자 새삼 느낀 것은 이 사회에 대한 저항감이었다.

    아니, 그건 저항감이라 말하기보다는 위화감이라고 말하는 게 옳을 것이다. 이전에는 당연하게 생각하던 것들이 다르게 다가올 때 느끼는 심정은 이 지구에만 있던 이들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불과 이십 년 정도를 이계에 머문 그가 이런 기분을 느끼는데, 수천 년간 다른 세계에서 살다 온 이지혁이 느낄 위화감은 얼마나 클 것인가.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지금 이지혁이라는 인간이 이 지구에 적응하여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아직은 괜찮아.'

    주변의 인간들은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고, 세계를 지킬 수 있는 힘을 가진 것은 이지혁 하나뿐이다. 그 중압감을 버티는 것과 동시에 그의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치적인 수사들을 외면해야 한다.

    세계 멸망의 위기에서 서로 힘을 합치기는커녕 자국의 이득을 위해 이지혁을 이용하려 드는 세력들을 보며, 이지혁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인간이라는 존재에서 반쯤 벗어나 버린 사람이 보기에 인간은 어떠할 것인가.

    "그런 눈으로 볼 필요 없어요. 그렇다고 내가 어느 순간 돌변해서 이놈의 세상 망해 버려라 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망해 버려라보다는 더는 귀찮아서 못해 먹겠다고 할까 봐 걱정인 걸세."

    "에이, 망하면 나도 죽잖아요."

    "죽음에 별 미련이 없지 않은가."

    "……."

    "이상한 일이지. 본인의 죽음에도 별 미련이 없는 사람이 세상을 지키기 위해서 피 흘리며 싸운다니. 그건 참 아이러니한 일이네."

    송정수가 보기에 이지혁이라는 존재는 모순투성이였다.

    "아무래도 좋네. 지금은 일단 자네가 세상을 지키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는 것 같으니, 나는 모든 힘을 다해서 지원해 줄 것일세. 비록 내가 실권이 없는 몸이라지만, 필요하다면 실권을 쥐어서라도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주겠네."

    "그거 위험한 발언 같은데……."

    "그런 뜻은 아닐세. 이제 대통령 선거가 얼마 남지 않았지. 대한민국 대통령의 임기는 오 년이니까."

    "아, 그러네요?"

    이지혁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다만……."

    "네?"

    "이만한 지원을 하는 데는 자네가 정말로 세상을 지키고자 하는 확고한 의지가 있는가가 중요하네."

    "에헤이! 저는……."

    "대답하지 않으셔도 좋네. 대답은 나중에 듣지."

    송정수는 가벼운 미소로 이지혁의 말을 눌렀다.

    이지혁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 * *

    식사 자리는 어색하게 끝이 났다.

    얻을 건 다 얻었다는 표정으로 차에 오른 송정수를 보자 어쩐지 손해 본 듯한 느낌이 든 최정훈이 혀를 찼다.

    "알 수가 없는 족속이 바로 정치인이라는 사람들 같습니다."

    "끙……."

    이지혁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정치인을 한둘 보아온 것은 아니다. 수천 년을 살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보아왔는데, 그중 음흉한 인간이 한둘이었겠는가.

    하지만 현대의 정치인은 이지혁이 보기에도 능구렁이가 수천 마리 정도는 또아리 틀고 있는 괴물들 같았다.

    "참 이상하죠."

    "네?"

    "왜 저런 양반들이 TV로 보면 다들 바보 같아 보일까요?"

    "하하하."

    최정훈은 웃고 말았다.

    정치인들이 모자란 사람들일 리는 없다. 기본적으로 어느 한 분야에서 성공을 하거나, 최소한 좋은 학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하겠다고 나서는 것이 정치인이다.

    국회의원들만 보더라도 그들의 약력에서 국회의원을 뺀다고 하더라도 어마어마한 경력을 가진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을 모아놓은 국회는 난장판이고, 그들이 TV에서 보이는 말과 행동은 코미디라는 것이 정치의 아이러니였다.

    "그걸 누가 알겠습니까."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현대의 딜레마 중 하나였다.

    "저런 양반만 있는 곳이라면 복마전이나 다름없을 텐데, 복마전이 그렇게 재미있다는 게 참……."

    "정치인들이 다들 송정수 총재 같지는 않을 겁니다. 아무래도 저 사람은 대한민국을 쥐락펴락 하는 사람이니까요."

    최정훈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송정수의 경력만 보더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지만, 더욱 그를 인정하게 만드는 것은 이계에서 이십 년 만에 돌아왔음에도 불과 며칠 만에 현대의 정치에 녹아들어 버리는 그의 적응력이었다.

    사실 최정훈은 송정수가 이계에서 이십 년을 버텼다고 했을 때, 그의 정치 인생은 이제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적응을 한 것에 그치지 않고 이전보다 훨씬 왕성한 활동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대단한 사람이지.'

    어찌 되었든 송정수라는 사람이 이지혁과 NDF를 밀어준다는 것은 그들의 입장에서는 호재였다.

    "여튼 좋지 않습니까. 저만큼이나 힘이 있는 사람이 도와주는 건데요."

    "뭐, 별 도움도 안 되는데."

    "……그렇죠."

    생각해 보니 이지혁에게는 딱히 좋을 것도 없었다.

    "가요. 게임이나 하러 가야겠네."

    "예. 이제 복귀해야죠."

    이른 점심을 먹은 만큼 남은 시간 동안은 더 의욕적으로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최정훈이었다.

    * * *

    사내는 처참한 몰골로 허공에 매달려 있었다.

    손을 묶은 쇠사슬이 손목으로 파고들어 피가 질질 흐르고 있지만, 사내는 이미 정신을 잃었는지, 그것도 아니면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건지 그저 늘어져 있을 뿐이었다.

    또옥, 또옥.

    피가 흘러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온다.

    감옥.

    빛 한 점 들지 않는 감옥에서 사내는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육신의 감각은 점점 사라지고, 의식은 점점 더 멀어져 간다.

    이제 사내에게 남은 것은 악과 자괴감뿐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이 빌어먹을 곳에 갇힌 지가 얼마나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빛 한 점 들지 않는 이곳에서 시간감각을 가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가끔 들어와 그를 치료하고 나가는 이들을 통해 시간을 알아내려 했지만, 모두가 의미 없는 일이었다.

    어두운 독방에서 그는 천천히 죽어가는 것이다.

    콰앙!

    한순간, 사내가 눈을 번쩍 떴다.

    외부의 자극이 거의 없던 그에게 난데없는 폭음 소리는 마치 천지가 개벽하는 것인 마냥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끄윽."

    고개를 들자마자 전신에서 격통이 인다. 하지만 사내는 그 격통을 거부하지 않았다. 감각이 없는 것보다야 이게 백배, 천배는 더 낫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콰앙! 콰앙!

    폭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사내는 눈을 감고 다가오는 폭음 소리에 집중했다. 이곳은 결코 폭음이 터져서는 안 되는 곳이다.

    금수산 태양 궁전이 전투의 장이 된다는 것은 북한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과 같으니까.

    외적이 쳐들어올 확률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그렇다면 가능성은 두 가지.

    하나는 몬스터가 쳐들어오고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총참모장 동무!"

    그렇지!

    박용휘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의 육체는 난자당하여 이미 원래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지경이었지만, 그의 의식은 아직 자신의 정체성을 놓지 않고 있었다.

    "누구냐!"

    "접네다! 리진철입네다."

    "간나 새끼! 여긴 뭐하러 왔네!"

    "탈출해야 하지 않갔습네까!"

    "헛소리하지 말고 빨리 도망치라! 너까지 잡혀 죽고 싶네! 미친놈이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나! 여기가 어디라고 대가리를 들이미네! 당장 도망치라!"

    "같이 갑세다!"

    "같이는 얼어 죽을!"

    박용휘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지금 사태가 어떤지 정말 모른단 말인가.

    "간나 새끼야, 지금 인민들이 다 죽어나게 생겼는데, 내 목숨이 귀하디? 지금 니가 해야 할 게 나를 구하는 기야? 당장 도망치라! 당장!"

    "총참모장 동무가 살아야 인민들도 살지 않갔습네까! 이 주위는 우리가 다 제압을 했습네다. 지금 문을 열 테니까 조금만 기다리시라요."

    "말귀를 못 알아먹네!"

    박용휘는 절규하는 심정으로 외쳤다.

    "네가 제압한 놈들은 피라미라 하지 않네! 진짜는 여기에 없단 말이디! 이 몸뚱아리로 내가 따라가면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 같네! 금방 박살이 난다, 이 말이야!"

    "…동무."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이 뭔지 모르갔네? 이 미친 짓을 막아야 해. 나한테 집착하다가 시기를 놓치면 큰일이 난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탈출하라."

    박용휘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것 같은 어조로 말했다.

    "탈북해서 남한으로 가라, 남한으로."

    "남한 말입네까?"

    "리지혁 동무를 찾아서 지금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 이야기하라. 도움을 청해서 군대든 뭐든 다 끌고 오란 말이다!"

    "총참모장 동무!"

    "그 새끼, 기집애처럼 징징대기는!"

    박용휘는 속이 탔다.

    이제 유일한 희망은 리진철밖에는 없었다. 그런데 그런 리진철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으니 애가 탈 수밖에.

    "진철아!"

    "…예, 총참모장 동무."

    "이제 믿을 건 너밖에 없다. 네가 여기까지 온 이상 저놈들은 반드시 너를 죽이려고 따라붙을 거다. 무슨 말인지 알갔네?"

    "예. 무슨 말인지 압네다."

    "반드시 살아서 남한으로 가라. 너한테 모든 게 달려 있다. 절대로 죽지 말고 남한까지 가라. 가서 리지혁 동무에게 지원을 요청해."

    "하지만 그가 와주갔습네까?"

    "와준다."

    박용휘는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그 양반이 말하는 거나 행동하는 꼬락서니가 꼴 보기 싫은 것이지, 결과적으로는 우리를 구해주지 않았네. 그 양반이 없었더라면 우린 이미 다 죽었어. 그러니 이번에도 도와줄 거다. 만약 도와주기 싫다고 하거들랑 바짓가랑이라도 물고 늘어지라."

    "…알갔습네다!"

    "빨리 가라! 간나 새끼야! 여기 더 있다가는 네 모가지까지 날아간다."

    "돌아오겠습니다. 꼭 돌아올 테니, 그때까지 죽지 말고 살아 계시라요."

    "미친놈."

    박용휘는 큭큭대며 웃었다.

    지금 당장 숨이 끊어질 판인데 언제 그가 돌아올 줄 알고 살아서 기다리라는 말인가.

    '하지만 말이야 천 번인들 못해줄 이유가 없지.'

    "걱정 말고 당장 출발하라. 내 목숨 질긴 거야 너도 잘 알지 않네. 인민들이 죽어갈 판인데, 무사히 이 일이 끝나기 전에는 죽어도 죽을 수가 없다는 거 알지 않네."

    리진철을 끓어오르는 속을 억지로 내리눌렀다.

    목소리만 들어도 지금 박용휘가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박용휘의 말대로 지금 시간을 끌다가는 리진철마저 당할 수도 있었다.

    '제길.'

    박용휘만 구해내면 어떻게든 길이 열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안타깝게도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꼭 살아남아 계시라요!"

    리진철이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외치고는 밖을 향해 뛰어나갔다.

    "간나 새끼."

    꼭 살아남아라, 반드시!

    박용휘가 이를 꽉 깨물었다.

    "크, 눈물 나는 우정이로군요."

    문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박용휘는 이를 꽉 깨물었다. 모든 일의 원흉이 지금 그의 바로 앞에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엉금엉금 기어서라도 저 망할 놈의 목줄을 물어뜯어 버리고 싶었다.

    "정민성이!"

    끼이이익!

    단단히 닫힌 철문이 열리고, 한 사내가 안으로 들어왔다.

    준수한 외모로 로동당복을 입고 있는 청년.

    최정훈에게 자신을 조선로동당 대외전략부의 소좌라고 소개한 정민성이었다.

    "너무 그렇게 소리 지르지 마시라요. 내가 좀 민감한 사람이라 그렇게 악을 쓰는 소리를 들으면 깜짝 놀란단 말이디요."

    정민성이 능글맞게 말하자 박용휘는 이를 갈았다.

    이놈만 아니었다면 상황은 백팔십도 달라졌을 것이다. 지금쯤은 인민의 고혈을 빨아먹는 돼지 새끼를 제거하고, 진정으로 인민들을 해방시켰을 수도 있었다.

    한데 거사가 이루어질 찰나에 이놈이 모든 것을 망쳤다.

    "네놈을 갈아 먹어버리갔어!"

    "그 꼴로 말입네까?"

    정민성은 비릿한 비웃음을 남겼다.

    "애초에 수령 동지께서 아무런 대비도 없이 능력자 놈들을 풀어놓았다고 생각하신 게 실수 아니겠습네까? 당연히 당신들이 일으킬지도 모르는 반동에 대한 대비는 되어 있었습네다. 그게 제 잘못은 아니잖습네까."

    정민성이 낄낄대며 웃었다.

    "너, 무슨 생각이네!"

    "뭐가 말입네까?"

    "사실대로 말하라. 너 같은 새끼가 그놈에 대한 충성으로 우리를 막아선 것은 아니잖네!"

    "잘 아십네다?"

    정민성의 눈이 가라앉았다.

    "권력욕에 눈이 멀어버린 돼지 따위야 안중에도 없습네다. 나는 그저 그분의 명을 따를 뿐입네다."

    정민성이 말하는 그분이 누구인지는 알고 싶지도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런 게 아니라 정민성이 벌이려고 하는 일이었다.

    "너,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인민들을 얼마나 학살하려고 하는 거냐고!"

    "…흐음, 그건 저도 잘 모릅네다."

    "뭐라?"

    "사실 견적이야 제가 내는 게 아니잖습네까. 그저 저야 시키는 대로 하는 거고, 그 와중에 조금의 희생이 따른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않갔습네까?"

    "조금? 조금이라고 했나?"

    박용휘의 눈이 튀어나올 듯 부릅떠졌다.

    "그 방자한 아가리 함부로 놀리지 말라! 인민들의 목숨이 쉬워 보이네?"

    정민성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네다."

    "…뭐?"

    "그래봐야 어차피 진화에 뒤처진 쓰레기들 아닙네까."

    "너 지금 뭔 소리를 하는 거네?"

    "큭큭큭큭."

    정민성이 유쾌하게 웃어 젖혔다.

    "아무짝에도 쓸모도 없는 쓰레기들이 몇이나 죽어 나가든 말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란 말입네까?"

    "너……."

    "총참모장 동무,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이미 그쪽들은 패배한 겁네다. 진화에 뒤처진 거란 말입네다. 이제 세상은 신인류들이 지배하게 될 겁네다."

    "능력자들이 신인류란 말이네?"

    "조금 다릅네다. 그렇지만 그쪽이 보기에는 별 차이가 없을 것 같습네다."

    정민성이 광소하기 시작했다.

    "그 버러지 같은 목숨들로 새로운 세상을 이룩할 수 있다면 값진 죽음 아니겠습네까? 크하하하하하핫!"

    정민성의 말을 들은 박용휘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리기 시작했다.

    * * *

    이놈은 미친 게 틀림없다.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할 수 있는 생각이 아니다.

    "이 미친놈!"

    "확실히 그쪽에서 보면 미쳤다고 해도 할 말은 없습네다. 다만, 변명을 하자면 저는 확실하게 제 신념으로 이 일을 행하고 있는 것이지, 일시적인 충동으로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닙네다."

    "인민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것을 신념이라 할 수 있는가!"

    정민성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과장된 그 흔들림이 조롱이라는 것을 모를 만큼 박용휘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것참 정상적이고, 정상적이라 신기한 발언인 것 같습네다? 총참모장 동지께서도 지난 일생을 인민을 착취하여 돼지 새끼의 입안에 처넣는 일에 최선을 다해오지 않으셨습네까?"

    "……."

    "그러던 분이 이제 와서 인민을 위한다는 양 그러시는 것을 보니, 솔직히 웃음을 참을 수가 없습네다. 그렇게 인민을 위하시던 분이 지금까지는 왜 그러셨습네까?"

    "힘이 없으니까!"

    박용휘가 눈을 부라렸다.

    "힘이 있다면 누가 지금까지 참았겠나! 힘이 없으니까 숨죽이고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는 것이디! 이제 겨우 힘을 키우고, 이제 겨우 기회를 잡았는데, 그걸 막아선 것은 너 아닌가!"

    "아주 좋은 사고방식입네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 인민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소수의 인민들이 희생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로 치부한다! 아주 공화국스러운 방식입네다! 경애하는 수령 동지께서 들으셨으면 울면서 박수를 치셨을지도 모르겠습네다?"

    "이……."

    박용휘는 이를 악물고 정민성을 노려보았다.

    "안타깝게도 총참모장 동지의 유일한 희망인 리진철 소좌는 제가 특별히 키운 애들이 뒤쫓고 있습네다. 저에게 윽박지를 시간에 차라리 리진철 동지가 하늘을 나는 능력이라든가, 공간을 이동하는 능력을 개화하기를 기도하는 것이 훨씬 건설적이지 않겠습네까?"

    정민성이 키득키득 웃었다.

    "오냐, 기도해 주마."

    박용휘가 씹어뱉듯 말을 이었다.

    "간나 새끼! 너도 어떻게든 네 졸병 놈들이 리진철이를 잡아 오기를 기도하는 게 나을 게다. 그렇지 않으면 곧 리진철이가 리지혁 씨를 불러올 테니까."

    "흐음……."

    정민성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건 확실히 무서운 일입네다. 인정하디요. 리지혁이는 인간 같지 않은 놈이라는 걸 잘 알고 있습네다. 그분도 리지혁이에 대해서만큼은 상대하지 말고 척을 지지 말라고 했으니, 그 말에 따라야 하지 않갔습네까?"

    "……그분이 대체 누구냐?"

    "말해줘도 당신은 모를 겁네다."

    정민성이 가만히 박용휘를 보다 몸을 돌렸다.

    "거, 희망을 품는 건 좋디만, 자꾸 그렇게 격하게 소리를 질러 대면 몸이 상합네다. 다음에 올 때는 리진철이의 모가지를 들고 올 테니, 그때까지 죽지 말고 버티시라요."

    "큭큭큭큭."

    박용휘가 신소리를 내며 웃었다.

    "나를 살려두는 이유가 뭐네?"

    "돼지 새끼가 당신을 좀 더 괴롭히고 싶어 해서 그런 거라고 말하고 싶디만, 사실은 음……."

    정민성이 조금 안타깝다는 투로 말했다.

    "가두라는 명령은 떨어졌디만 죽이라는 명령은 떨어디지 않았습네다. 최근에는 약 때문에 뇌가 쩔어버린 것 같더니만, 결국에는 맛이 간 거 아니겠습네까? 요즘은 계집 치마폭에 싸여 있느라 정신이 없는 모양입네다."

    "……하하."

    박용휘는 힘없이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쿠데타를 일으키다 실패한 반동분자다. 원래대로라면 뼛조각 하나 남기지 못하고 죽어야 한다.

    그런데 뭐?

    잊었다고?

    '장악이 끝났구나.'

    아무리 최고사령관이 제정신이 아닌 놈으로 유명했다고 하더라도 반동분자의 처형을 잊을 정도는 아니었다.

    색을 밝히기는 했지만, 이 정도로 밝히던 놈도 아니다.

    제 삼촌을 죽인 이후로 과격해지고 외골수가 되어갔다고는 해도 지금처럼 정상적이지 않은 짓거리를 하지는 않던 놈이다. 아니, 애당초 그런 인간이었다면 북한을 장악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아무리 백두 혈통이라고는 하나 새파란 애송이에게 모든 것을 내주고 자신의 생사 여탈권까지 내줄 정도로 북한의 관료들이 멍청하지는 않으니까.

    이전 최고사령관이 그들의 권력과 수족을 거세해 놓았다고는 해도 현 최고사령관이 조금만 빈틈을 보였다면 그 사이를 파고들어 목줄을 물어뜯으려 한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최고사령관이 하는 꼴을 보자면 제정신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지경이 아닌가.

    '약인가?'

    마약이든 세뇌든 이미 최고사령관에 대한 작업이 끝났다고 봐야 했다.

    블랙 먼데이 이후에 급격하게 상태가 안 좋아지던 이유가 있던 것이다. 아무리 몬스터들이 출현하여 세상이 급변했다고는 하나 모든 대외적인 도발을 멈추고 내부적으로 파고들었을 때 눈치를 챘어야 하는 건데.

    "…돼지 새끼가 너희를 키운 게 아니라 너희가 돼지 새끼를 키우고 있었구나."

    "오, 눈치가 빠르십네다?"

    정민성이 킬킬거리며 웃었다.

    "그냥 단순한 변덕이라고 생각하십시오. 내일이라도 내 마음이 바뀌면 순순히 죽여줄 수도 있습네다. 그런데 아무래도 바뀌지는 않을 것 같으니 문제디요."

    "이놈!"

    "아무래도 이 조선 땅에서 인민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가장 고통스럽게 바라볼 사람이 당신인 것 같단 말입네다. 그러니 조금만 더 기다리시라요. 내가 아주 재미있는 것을 보여 드릴 테니 말입네다."

    쾅!

    문이 거칠게 닫히자 박용휘가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다.

    "정민서어어어엉!"

    하지만 정민성은 박용휘의 외침을 듣지 못했는지 돌아오지 않았다.

    * * *

    '살아야 한다.'

    리진철은 이를 악물었다.

    그의 부하들도 이미 거의 전멸한 상태였다. 살아남은 소수는 뿔뿔이 흩어져 어디에 있는지 알 수조차도 없었다.

    하지만 슬퍼할 겨를이 없었다.

    리진철이 살아남아 남한으로 가지 못한다면, 다른 이들도 결국 그의 부하들의 뒤를 따르게 될 것이다.

    가야 한다!

    리진철은 남쪽으로, 또 남쪽으로 달렸다.

    빤한 루트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중국 쪽으로 탈출을 해 다시 한국으로 가는 방법은 통하지 않는다. 지금 그는 안전하게 탈북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건 시간 싸움이었다.

    중국 쪽으로 탈출을 하게 된다면 비행기라도 타지 않는 이상 반드시 시간의 낭비를 불러오게 될 것이고, 북한 지도부를 장악하고 있는 놈들이 리진철이 얌전히 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를 탈 수 있도록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

    무식할 정도로 올곧게 남으로, 또 남으로 내달리는 것이다.

    "뭐야, 저거!"

    "큭."

    눈앞에 있는 초소에서 총탄이 불을 뿜기 시작했다. 이미 비상이 떨어졌는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총부터 갈기고 본다.

    "제길!"

    리진철은 양손에서 뽑아낸 전류를 그의 앞에 뭉쳤다. 날아든 총탄이 작렬하는 전류와 만나 그 방향을 틀었다.

    "크윽!"

    하지만 미처 다 틀지 못한 총탄들이 그의 몸 곳곳을 스치고 지나갔다.

    옆구리에 뭔가가 박혀드는 느낌이 들었지만, 리진철은 멈추지 않았다. 아니, 멈출 수가 없었다. 멈추는 순간이 곧 죽는 순간이니까.

    "크앗!"

    괴성을 지르며 달려 나간 리진철이 초소를 향해 전력을 내뿜었다.

    "으아아악!"

    비명 소리가 울려 퍼진다.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명령에 따를 뿐인 이들을 상하게 하는 것이 유쾌할 리는 없지만, 지금은 이런저런 사정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가야 한다.'

    남한으로 가야 한다. 그리고 리지혁을 만나야 한다.

    "으아아아아아아!"

    리진철이 앞으로 달리고, 또 달렸다.

    * * *

    "그래?"

    국방부 장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협조?"

    "예. 남한으로 도주하고 있는 반동분자를 받아들일 경우에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연락한 놈은 누구야?"

    "전에 그놈입니다. 수뇌부는 바뀌지 않은 것 같습니다."

    "으음……."

    국방부 장관이 침음성을 흘렸다.

    "결국 그렇게 되었나?"

    체제의 안정을 위해서는 지금의 수뇌부들이 자리를 지켜주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북한이라는 나라가 붕괴했을 때 가장 직접적으로 피해를 입고 그 부담을 떠안아야 하는 나라는 대한민국이니까.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렇게라도 북한의 체제가 붕괴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북한이 얼마나 비정상적이고, 그 안의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는지를 생각한다면, 외면하는 것이 답이 아니라는 것도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누가 탈출을 하고 있다는 건가?"

    "그런 것 같습니다."

    "탈출에 협조라……."

    국방부 장관은 이 문제가 자신이 판단할 문제를 넘어섰다는 것을 깨달았다.

    "통일부 장관 호출해서 청와대로 오라고 해. 나는 대통령님을 뵈러 간다."

    국방부 장관이 허겁지겁 밖으로 뛰쳐나갔다.

    * * *

    "탈출이라구요?"

    "예, 그렇습니다."

    "남쪽으로 탈출을 한다니, 탈북이라도 한 겁니까?"

    "그게 아니라, 군사분계선을 넘으려는 것 같습니다."

    "그게 가능합니까?"

    윤영민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그동안 철책을 넘어 탈출한 이들이 없던 것은 아니다. 때때로 군인들이 넘어오기도 했고, 때로는 일가족이 모두 철책을 넘어서 탈북한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경계가 느슨해졌을 때를 노려 숨어들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지금처럼 군 수뇌부들이 중요한 인사가 철책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 무슨 수로 철책을 넘는단 말인가.

    "아무래도 능력자 아니겠습니까?"

    "능력자?"

    "능력자라면 군인들이 막고 있다고 해도 군사분계선을 자력으로 넘을 수 있습니다."

    "그렇군요."

    윤영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군사분계선과 탈북이라는 사실에 집중하다 보니 능력자의 존재를 잊어버렸다. 그들이라면 확실히 군인들이 틀어막는다고 하더라도 국경을 넘을 수 있을 것이다.

    "북한에서 직접 경고를 넣을 정도로 중요한 능력자라는 거지요?"

    "예."

    통일부 장관이 슬며시 입을 열었다.

    "그럼 아마도 쿠데타에 가담했던 리진철 소좌 아니겠습니까? 인민 무력 여단이 박용휘의 편에 붙었지 않습니까."

    "저도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리진철이라……."

    윤영민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는 리진철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지만, 통일부와 국방부가 동시에 같은 생각을 한다면 맞을 확률이 매우 높다는 뜻이었다.

    "그를 받아들여야 합니까?"

    "아무래도 북한군 능력자들 중 최고 책임자 같은 위치에 있던 자인 만큼 받아들일 경우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북한에서 전쟁을 불사하겠다며 강력하게 나오고 있는 만큼 신중한 대처가 필요합니다."

    "게다가 아무리 북한이 최근 상태가 좋지 않다고는 하지만, 마음먹고 국경을 틀어막는다면 리진철이라고 하더라도 국경을 넘는다는 건 쉽지 않을 겁니다. 괜히 그를 받아들이겠답시고 나섰다가 국경에서 저지당하는 사태가 벌어진다면, 저희의 입장만 곤란해집니다."

    "그도 그렇군요."

    윤영민은 고민에 빠졌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쪽이든 저쪽이든 나름 얻는 것이 있을 듯한데,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을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어째야겠습니까?"

    두 사람이 다 말이 없자 윤영민은 혀를 차고는 입을 열었다.

    "일단 상황을 송정수 총재께 이야기를 하고 상의해 봅시다. 가장 최근에 북한에 다녀온 분이니 아무래도 상황을 조금 더 잘 알지 않겠습니까?"

    남은 둘이 좋은 생각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 *

    윤영민은 지체없이 송정수에게 전화를 걸라 지시했다.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으려니, 곧 전화가 연결이 되었다는 말이 들려왔다. 윤영민은 얼른 책상에 놓인 전화를 켰다.

    - 무슨 일이십니까.

    "아, 송 총재님. 접니다."

    - 예, 대통령님. 어쩐 일이십니까, 전화를 다 주시고.

    윤영민이 겸연쩍게 웃었다.

    사실 그와 송정수가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니다 보니 그동안 통화를 할 일이 잘 없기는 했다. 최근 송정수가 제 발로 찾아와 그에게 조언을 늘어놓지 않았더라면 이런 상황이라 하더라도 송정수에게 조언을 구한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은……."

    윤영민이 눈짓을 주자 통일부 장관이 설명을 시작했다. 이윽고 설명이 끝나자 윤영민이 말을 가로챘다.

    "그렇게 된 겁니다. 그래서 송 총재님께서 최근에 북한을 다녀오고 우리보다는 뭔가 분위기라든가 하는 부분에 대해서 더 잘 아실 테니 조언을 구해볼까 전화를 드렸습니다."

    - 그렇군요.

    송정수는 그 말을 끝으로 잠시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다들 재촉 없이 송정수가 생각을 정리하기를 기다렸다.

    - 우선은 받아들이는 쪽으로 갔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저쪽은 전쟁을 불사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 말이야 그렇게 하지만, 자기 목숨 위험해질 일을 저지를 놈들이 아닙니다. 전쟁이 나게 되면 몬스터 때문에 공멸한다는 사실을 모르지도 않을 거구요.

    "그렇긴 합니다만."

    - 그리고 지금 북한은 전쟁을 벌일 여력이 없습니다. 내부 수습으로도 정신이 없을 겁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찝찝한 것은 사실이지 않습니까?"

    - 으음, 그렇죠.

    이론적으로야 완벽하다고 하더라도 만에 하나의 확률 때문에 전쟁이 나기라도 한다면 피해를 입는 쪽은 아무래도 이쪽이다.

    잃을 것이 없는 나라와 잃을 것이 많은 나라가 전쟁을 벌인다면 이긴다 하더라도 이긴 것이 아니게 될 테니까.

    - 가만. 이쪽으로 넘어오고 있는 능력자가 누구라고 하셨죠?

    "리진철이라 합니다."

    - 그런데 리진철은 왜 넘어오는 겁니까?

    "쿠데타에 가담했다가 실패해서 목숨을 위협당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 그런 사람이 국경을 넘겠다고 남진을 하고 있다구요?

    "……."

    윤영민은 그제야 이상한 것을 눈치챘다.

    보통 그런 상황이라면 몸을 숨기거나 중국으로 빠져나가려 할 것이다. 아무래도 중국에는 북한의 눈이 닿기 어려운 측면도 있고, 철책보다는 압록강이 훨씬 넘기가 쉬우니까.

    - 뭔가 있군요. 이쪽으로 최대한 빠르게 넘어와야 하는 이유가 있어 보입니다.

    "그렇군요."

    송정수가 아니었다면 눈치채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윤영민이 침음을 삼켰다. 노선은 다르지만, 송정수는 확실히 뛰어난 정치인이다.

    블랙 먼데이가 닥치지 않았다면 윤영민이 감히 송정수를 경선에서 이기고 대통령 선거에 나설 수는 없었을 것이다.

    -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면 북한 쪽의 강한 어조도 부자연스럽습니다. 아무래도 매우 중요한 정보를 쥐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군요.

    "으음……."

    윤영민이 침음을 흘렸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 이 정도만 알아도 우리가 할 건 다 한 겁니다.

    "예?"

    - 정보와 분석을 해결할 사람들에게 넘기고, 팝콘이나 먹으면 그만이지요.

    "예?"

    윤영민이 멍한 얼굴로 되물었다.

    * * *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최정훈은 굳은 얼굴로 전화를 끊었다.

    "이지혁 씨?"

    "……."

    "이지혁 씨?"

    의자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이지혁이 눈을 번쩍 떴다.

    "어?"

    "주무실 거면 차라리 퇴근을 하지그러십니까. 이지혁 씨 집에 간다고 뭐라고 하는 사람 아무도 없는데."

    "자는 거랑 조는 거는 다르잖아요. 대놓고 자면 이런 맛이 안 난다니까."

    "끄으응."

    최정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라고 하려고 했죠?"

    최정훈이 어버버 하는 동안을 놓치지 않고 이지혁이 딜을 넣었다.

    "그럴 거 같았어. 며칠이나 쉬게 해줄 리가 없지. 안 그래도 슬슬 불안하던 참이었어요."

    "…저희가 일부러 일을 만들어내는 건 아니잖습니까."

    "그야 모르죠."

    이지혁이 입이 댓 발이나 나와서는 중얼댔다.

    "별것도 아닌 걸로 나라 망할 듯이 호들갑을 떨어서 사람 부려 먹으려고 한 적이 한두 번이어야지."

    "별게 아니라니……."

    막말로 그동안 이지혁이 출동했던 일 중에서 별일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일이 몇이나 되는가.

    뜬금없이 6레벨 게이트가 열리지를 않나, 마왕이 강림하지를 않나.

    예전에는 5레벨 게이트가 열 개 동시에 열린 정도로 나라가 비상이 걸리고 국가 멸망급 재난으로 취급 받았지만, 그동안 워낙에 지옥 같은 상황을 겪다 보니 이제 그 정도 사태는 굳이 이지혁을 부르지 않아도 된다고 판단할 정도였다.

    예전에야 전설로 회자되었지만, 이제는 웬만한 NDF 요원이라면 오거 정도야 혼자서 때려잡을 정도였다.

    다사다난하고 급박한 사태만을 꾸준히 겪어오며 지독하게 레벨업을 해온 결과였다.

    그런데 별것도 아닌 일이라니!

    억울함은 하늘을 찔렀지만, 지금 일을 하러 가자고 설득하려는 찰나에 굳이 그런 마음을 드러내 이지혁을 공격할 필요는 없었다.

    "정말 중요한 일 같습니다."

    "언제는 안 그랬나?"

    "진짜 중요하다니까요."

    "네네."

    "이지혁 씨도 아는 사람의 일입니다."

    "응?"

    그제야 이지혁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누구요?"

    "기억하실지 모르겠는데… 리진철이라고, 인민 무력 여단의 대장이었던……."

    "아, 그 뺀질이."

    자신을 보고 이를 바득바득 갈던 그놈이라면 아주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걔가 죽기라도 했대요?"

    "아닙니다."

    "그런데 뭐가 문젠데요?"

    "지금 그 양반이 남쪽으로 탈북을 시도하고 있다고 합니다."

    "엥?"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걔 박용휘 참모장이랑 같이 일 벌였다고 하지 않았나?"

    "예."

    "탈출 중이라는 건 실패했다는 뜻이네요. 쯧쯧."

    이지혁이 고개를 저었다.

    "박용휘 참모장이 참 괜찮은 사람 같았는데 그렇게 가는구나. 인생사 새옹지마라더니."

    "아직 죽었다고 판명된 건 아닙니다마는……."

    "쿠데타 실패하고 산 놈도 있대요?"

    "죽었겠죠."

    최정훈은 깔끔하게 박용휘의 죽음을 단정했다. 그러고 보면 북한에서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실패했는데 살아 있다는 건 난센스다.

    시신이라도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사형 집행을 박격포로 하는 나라인데, 얌전히 땅에라도 묻힐 수 있다면 다행이었다.

    "근데 걔가 탈출하고 있는 게 뭐가 문젠데요?"

    "북한 반응이 이상하답니다. 절대 그를 남쪽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 측에서 그를 받아들인다면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전언이 왔답니다."

    "크, 걔들은 왜 그렇게 과격한지 모르겠네."

    이지혁이 혀를 찼다.

    "뭐, 만날 전쟁에, 불바다에, 핵 맛에… 아주 그냥 입으로는 못하는 게 없어요."

    "원래 약한 개가 짓는 법이잖습니까."

    "그래서 뭘 어떻게 하래요?"

    "그걸 정하랍니다."

    "응?"

    그게 뭔 소린가.

    일순 말뜻을 이해 못한 이지혁이 빤히 바라보자 최정훈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우리더러 어떻게 할지를 정하랍니다."

    "…그 양반들 미쳤나?"

    "아무래도 민감한 사항이다 보니 구할지, 아니면 내버려 둘지를 정하라는 것 같습니다. 구하려면 이지혁 씨가 직접 가야 하는 거고, 내버려 두고 싶다면 여기서 게임이나 하고 놀면 되는 거겠죠. 그러니 이지혁 씨가 정하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그럼 게임하죠."

    이지혁은 간단히 결론을 내렸다.

    "…보통 이럴 때는 구하러 간다는 판단을 내리는 게 정상적인 건데……."

    "내가 걔가 뭐 이쁘다고 구하러 가요. 내가 무슨 유니세프 홍보 대사로 보이시나?"

    "그럴 리가요."

    "사실 걔 처음에 우리 골탕 먹이려고 한 놈이잖아요. 최정훈 씨도 엄청 싫어하는 걸로 아는데?"

    "싫죠. 싫습니다. 굉장히 싫은데……."

    "네."

    "아무래도 가지고 있는 정보가 장난이 아닌 것 같단 말입니다. 사람 하나 빠져나가는데 북한이 이리 발작적으로 나온 경우는 처음입니다.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네, 궁금하지 않아요."

    "…궁금하실 텐데?"

    "응, 아니야."

    이지혁은 최정훈이 뿌린 미끼를 깔끔하게 뿌리치고는 컴퓨터를 잡았다.

    "…이게 아닌데."

    슬슬 꼬임에 넘어와서 리진철을 구하러 가야 하는데, 이지혁이 정말로 관심이 없는 것같이 보이자 최정훈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북한에 문제가 생기면 저희 쪽이 위험하다고 말씀을 드렸잖습니까."

    "좀 참신한 협박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매번 같은 소리만 하시니 제가 좀 지겹네요."

    "…그냥 한 번 가주시면 안 됩니까?"

    "네."

    "휴, 알겠습니다. 안 되는 줄 알면서 말씀드려서 죄송합니다."

    "아니, 알았다고 했잖아요."

    "네. 안 가셔도 됩니다."

    "아니! 알았다니까!"

    "왜 화를 내고 그러세요. 안 가셔도 된다니까요."

    "간다고 했잖아요!"

    "네?"

    최정훈이 혼란스러운 머리를 부여잡았다.

    "지금 가주시겠다고 한 겁니까?"

    "네."

    "…어디 아프세요?"

    "안 가! 안 가!"

    "에헤이! 왜 이러십니까, 농담한 거 가지고."

    "안 간다고!"

    * * *

    '크윽.'

    리진철은 옆구리를 부여잡았다.

    '조금만 더 가면 되는데…….'

    출혈이 너무 심하다.

    치명상까지는 아니었는데 제대로 지혈을 하지 못하고 계속 달리다 보니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

    눈앞이 몇 개로 갈라져 보일정도로 흐릿하다.

    '안 돼.'

    당장에라도 바닥에 쓰러져 쉬고 싶지만, 지금 여기서 쓰러진다면 기다리는 것은 죽음밖에 없다.

    그리고 지금 그의 죽음은 단순히 그 혼자의 죽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수백, 수천을 넘어 수만, 수십만의 죽음이 함께할 것이다.

    그 막중한 무게가 쓰러지려는 리진철의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조금만 더.'

    저 멀리 철책이 보이고 있었다. 이제 저기만 넘으면 된다. 평양에서부터 여기까지 두 발로 달려서 마침내 이곳에 도착한 것이다.

    "큭큭큭."

    리진철은 비틀린 웃음을 토해냈다.

    그러고 보면 저번에는 이 근처에서 평양까지 도망쳤는데, 이제는 평양에서 여기까지 도망을 쳤다.

    몇 백 킬로가 되는 거리를 왕복하며 도망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터져 나오는 웃음을 막을 수가 없었다.

    "저기만 넘으면 된다."

    저기만 넘으면 남한이다. 그리고 남한에 가면 리지혁을 만날 수 있다. 그럼 리진철의 임무는 끝나는 것이다.

    자꾸 시아가 흐려지고 다리가 마음먹은 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정신 차려.'

    얼마 안 남았다.

    저곳을 넘고 그가 알고 있는 사실을 리지혁에게 전하고 나서는 얼마든지 죽을 수 있다. 그러니 지금은 버텨야 한다. 아무리 지금 당장이라도 정신을 잃어버릴 것 같더라도 버텨야 한다.

    "간나 새끼, 멀리도 왔구만기래."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리진철의 몸이 굳었다.

    콰앙!

    그와 동시에 커다란 폭음이 터지더니, 전신에 엄청난 고통이 찾아들었다.

    "끄으으윽."

    리진철이 바닥을 굴렀다.

    "쿨럭!"

    내장이 상했는지 피가 목으로 솟구친다.

    '안 돼. 조금만 더 가면 되는데…….'

    그의 눈에 하늘에서 그를 향해 떨어져 내리는 형형색색의 에테르가 보였다.

    리진철은 죽음을 직감하며 눈을 감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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