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68화 (68/118)
  • [■] 이제 시작될 테니까 [■]

    ─────

    "여, 영감님이요? 송정수 총재 말씀이십니까?"

    "그럼 영감님이 그 영감님 말고 또 있어요?"

    "송정수 총재께서는 지금 청와대에 계십니다. 대통령님과 독대를 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갑니다."

    "아, 아이고 이지혁씨 진정하십시오. 뭐가 마음에 안 드시는 건지를 말씀해 주시면 바로 조치하겠습니다."

    뭐가 마음에 안 드냐니.

    마음에 드는 걸 찾는게 더 빠를 것 같은데.

    "괜히 잘 하고 있는 사람들 건드리지 말고 냅두라고 전해주실래요?"

    "꼭 전하겠습니다."

    "에. 그리고……."

    이지혁이 슬쩍 최정훈을 바라보자 최정훈이 나직하게 속삭였다.

    "인력충원."

    "인력 충원해 주시고."

    "비용처리."

    "밀려있는 영수증 다 끊어 주시고."

    "월급인상."

    "……은근슬쩍 이상한게 끼어들어온 느낌인데."

    최정훈이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인력 충원해 주시고 비용처리 다 해주세요. 무슨 말인지 아셨죠?"

    "여부가 있겠습니까?"

    "앞으로 의견은 최정훈씨 통해서 전달할테니까. 최정훈씨가 이야기하면 그냥 들어주는 쪽으로 가죠. 아 참고로 월급 인상해 주라는 말은 안 할겁니다."

    "……에이."

    최정훈이 대놓고 아쉬운 척을 했지만 이지혁은 듣는척도 해주지 않았다.

    "그럼 또 문제?"

    서아영이 손을 번쩍 들었다.

    "뭐?"

    "휴일이 너무 적어."

    "들으셨죠?"

    순식간에 불만 처리장이 되어버린 NDF 사무실이 후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 외에도 다른 요원들의 불만사항을 전달한 이지혁이 원장의 손을 굳게 잡으면서 말했다.

    "해결될거라고 믿습니다."

    "……저 혼자 처리할 수 없는 문제도 있습니다만."

    "믿습니다."

    "상부와 논의해서 어떻게든 처리하겠습니다."

    이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송정수가 지원을 해주기 시작한 이후로 일이 편해지는 느낌이었다. 이전에는 NDF가 미묘하게 찬밥이라는 느낌을 받았는데 말이다.

    "그럼 됐고. 내가 여기 왜 왔더라?"

    고개를 갸웃하는 이지혁의 앞으로 얼굴이 하얗게 질린 김다솜이 쪼르르 뛰어나왔다.

    "맞다."

    이지혁이 김다솜을 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아펠드리체."

    "네."

    이제는 당연하다는 듯이 NDF로 출근하는 아펠드리체가 이지혁의 말을 찰떡같이 알아듣고는 김다솜에게 회복마법을 걸었다.

    "그러고보니 너도 회복마법 쓸 수 있다며?"

    "저한테 쓰려고 배운 게 아니에요."

    "……."

    이지혁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사람이 이러기도 힘든데 말이다.

    "아무래도 좋다. 가자."

    "네!"

    김다솜이 더 없이 행복한 표정으로 이지혁의 옆에 섰다.

    "어, 어디가?"

    정해민이 당황하여 말하자 이지혁이 퉁명스레 대꾸했다.

    "쇼핑."

    "뭐 사러?"

    "옷 사러 간다."

    "그럼 나도 같이가."

    이지혁이 혀를 쏙 내밀었다.

    "싫은데요?"

    "왜? 왜 다솜이는 데리고 가고 나는 안 데리고 가?"

    "근무시간에 어디 쇼핑을!"

    그 말과 동시의 원장의 강렬한 눈빛이 정해민에게 떨어졌다. 찔끔한 정해민이 얼른 제 자리에 앉았다.

    '가만 보면 저것도 요즘 자꾸 사람을 부려먹으려고 한단 말이야.'

    예전에는 앵앵거려서 그렇지 나름 놀려먹는 맛도 있었는데 요즘은 머리가 굵어서 자꾸 이지혁을 부려먹으려 하는 기색을 보이고 있었다.

    이럴 때 잘 관리해서 관계를 되돌려야 한다.

    "가자."

    이지혁이 앞장을 서자 김다솜이 종종걸음으로 이지혁의 뒤를 따랐다.

    * * *

    "공황장애 올 것 같아."

    이지혁은 주변을 가득 메운 사람들을 보고는 혀를 내둘렀다.

    "오늘은 좀 적은 편이에요."

    "몬스터가 이만큼 있으면 차라리 마음이 편할텐데."

    다 쓸어버리면 되니까.

    수억의 몬스터에게 둘러싸여도 평온함을 느끼던 이지혁이 불과 수천의 사람을 보며 경기를 일으키고 있었다.

    "얼른 가요."

    "……저 인파 사이로 들어가야 하는 건가?"

    "에이. 알아서 다 비켜줘요."

    "으으."

    이지혁이 정말 싫다는 얼굴로 김다솜을 바라보았지만 김다솜은 확고부동했다.

    "내가 예전에는 어떻게 살았었는지 모르겠다."

    베라프에서 살다가 능력자 거주구로 이주하다보니 이리 많은 사람들과 한 곳에 있는 것은 정말 오랜만에 하는 경험이었다.

    "트레이닝복부터 사실거죠?"

    "응."

    "이쪽이에요."

    "끄응."

    "그렇게 싫어하시는데 그동안 옷은 어떻게 사셨어요?"

    "인터넷 쇼핑이라는 좋은 것이 있는 법이다."

    김다솜은 피식 웃고 말았다.

    남들에게는 당연한 쇼핑루트이지만 이지혁이 인터넷으로 쇼핑을 한다니 어쩐지 이미지에 맞지 않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가요."

    "으응."

    이지혁은 김다솜의 손에 이끌려 쭐래쭐래 백화점 안으로 향했다.

    사람들을 뚫고 여기까지 오는 것만해도 진이 반쯤은 빠져버렸는데 백화점 안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있을까를 생각하니 무섭기만 하다.

    겨우 겨우 사람들을 뚫고 매장에 도달한 이지혁이 눈에 불을 뿜었다.

    "옷을 사려고 이 고생을 해야 하다니!"

    "다들 그래요."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네."

    다채로운 디자인의 옷들이 수천벌이 걸려 있는데 그 중에서 예쁜 것을 찾아내라니.

    오백마리 오거중에서 제일 잘 생긴 오거를 골라내는 것이 차라리 쉬울 것 같았다.

    "여기가 원래 사시던 메이커죠?"

    "그런 것 같다."

    "골라보세요."

    이지혁은 담대했다.

    "아가씨!"

    점원은 뭔가 기묘한 분위기의 청년의 등장에 조금 긴장한 안색으로 이지혁에게 다가왔다.

    "예. 손님 찾으시는 게 있으신가요?"

    "트레이닝복!"

    "이쪽에 있습니다."

    점원이 트레이닝복 코너를 보여주자 이지혁은 자신이 입던 타입의 트레이닝복을 찾아내 외쳤다.

    "95로 다섯벌!"

    "……다섯벌요?"

    "네!"

    "새, 색깔도 같은 것으로 하실건가요?"

    "예!"

    "……."

    점원은 대체 이 인간은 뭔가하는 얼굴로 이지혁을 보다가 순간적으로 납득을 했다.

    뭔가 유니폼으로 구입을 하는거라면 그가 혼자 다섯벌을 다 입는 것은 아닐테니까.

    하지만 그녀의 생각은 여지없이 깨져 나갔다.

    "오빠. 다섯벌을 살거면 색을 조금 다르게 해서 사시는 건 어때요? 매번 같은 색만 입으면 질리잖아요."

    "난 안 질리던데."

    "그래도 다른 색으로 입으시면 기분이 달라질거예요."

    "그, 그럴까?"

    "속는셈치고 제가 골라주는 걸로 사 보세요."

    "으응."

    어리숙한 이지혁을 어르고 달래서 김다솜이 색깔별로 옷을 사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이지혁이 원하는 삼선이 아닌 다른 디자인의 트레이닝복도 은근슬쩍 끼워넣는 기지를 발휘한 김다솜이 만족스레 말했다.

    "이정도면 되죠?"

    "응."

    이지혁은 아무 생각이 없었다.

    '백화점은 이상한 곳이야.'

    멀쩡한 남자도 백화점에만 들어가면 바보가 되어버린다. 그리고 이상한 탈출강박증에 시달리게 된다.

    한시라도 빨리 쇼핑을 마치고 이 곳에서 빠져나가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낀 이지혁이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발도 사셔야죠."

    "응?"

    "신발도 매번 같은걸로 신으시던데 많이 낡았잖아요."

    "……그래?"

    이지혁이 머리를 긁었다.

    매번 같은 걸 신고 다니기는 했지만 딱히 신발에 신경을 써 본적이 없었다.

    고개를 내려 아래를 보자 반쯤 헤져있는 운동화가 보인다.

    '하기야.'

    베라프에서 돌아온 이후로 이것만 신고 다녔으니 찢어지지 않은게 용하다. 이지혁이 곱게 다니는 사람도 아니고.

    생각해 보면 이 신발이 마왕과의 격전도 버틴 유서 깊은 신발이었다.

    "신발은 여기 말고 다른데로 가요."

    "다른데로?"

    이지혁이 오만상을 쓰자 김다솜이 이지혁을 다독이기 시작했다.

    "바로 옆 매장이에요. 금방 골라드릴게요."

    "으응."

    김다솜이 어린애를 달래듯 이지혁을 어르고 달래서 옆매장으로 끌고 갔다. 결국 세컬레나 되는 신발을 산 이지혁이 숨이 차는 표정으로 백화점을 빠져 나왔다.

    "히, 힘들었다."

    "삼십분도 쇼핑 안 한거 같은데 그렇게 힘들어요?"

    "……난 저런데만 들어가면 숨이 막혀. 정신병인가봐."

    김다솜이 쿡쿡 웃었다.

    "오빠. 나 배고파요."

    "응?"

    "밥 사주세요."

    "으응. 그러지 뭐."

    이지혁은 김다솜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슬쩍 웃고 말았다.

    '이제 좀 보통사람 같은데.'

    그 전까지는 사람이 너무 살벌해서 껄끄러운 느낌이 강했는데 이제야 본인 나이대에 맞아 보인다.

    '많이 변했네.'

    처음 만났을 때에 비하면 변화가 너무 심한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저희 뭐 먹어요?"

    "응? 너 먹고 싶은거 먹자."

    "그럼 한식 먹으러 가요."

    "……한식 좋아하니?"

    "헤헤."

    김다솜은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고 이지혁의 팔을 잡아 끌었다.

    * * *

    "흐으으음."

    에르카나는 답지 않게 심각한 표정으로 이지혁과 김다솜을 바라보았다.

    고층 건물 옥상이다보니 사람이라면 망원경 없이 그들을 찾는 것이 불가능하겠지만 마족인 에르카나의 눈에는 두 사람의 모습이 매우 생생하게 보였다.

    "위험한데?"

    "뭐, 뭐가요?"

    "달링이 저런 표정을 짓는 건 정말 오랜만에 보는데. 뭔가 안정감을 느끼고 있다는 뜻이야."

    "……진짜?"

    정해민의 얼굴에 당혹이 떠올랐다.

    이게 무슨 뜬금없는 일이란 말인가. 그동안 고생은 정해민과 다 했는데 갑자기 김다솜과의 데이트라니.

    "확실히 자주 볼 수 없는 얼굴이군요."

    아펠드리체도 에르카나의 말에 동조했다.

    "흐음. 준비해야 할지도 모르겠는걸?"

    "준비요?"

    "응. 둘째부인 자리."

    "두, 둘째부인이라니!"

    정해민이 빽 소리를 질렀다.

    "그게 뭔 소리예요."

    에르카나가 깔깔대며 웃었다.

    "달링이 원한다면 받아들이는 것도 조강지처로서의 마음가짐이지. 사실 마계에서는 능력이 되는 남자가 수백명의 첩을 거느리기도 하니까."

    "수, 수백?"

    차원이 다른 결혼관에 정해민이 넋을 놓았다. 수백이라니!

    "응? 내가 알기로는 인간들의 왕도 첩을 수백씩 거느리기도 한다고 들었는데."

    "그건 옛날 이야기구요. 요즘은 그러면 맞아죽어요."

    "어쨌든 인간도 그런 본성이 있다는 거잖아. 내 입장에서야 둘째부인이 들어온다고 해도 별 문제는 없어. 그리고 인간이면 특히나 더 문제가 없지. 마족이 부인으로 들어온다면 앞으로 긴세월동안 달링을 나눠야 하는거지만 인간이라면 얼마 버티지 못하고 죽을거잖아."

    "죽어요?"

    "기껏해야 백년인데 뭐."

    정해민은 에르카나와 대화하는 것을 포기했다.

    마족의 시간관념과 결혼관념은 평범한 사람인 그녀에게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들 투성이었다.

    "어쨌든 여러분들이 보시기에는 지금 지혁이가 다솜이한테 끌리고 있다는 거죠?"

    "응,"

    "그렇네요."

    정해민은 도통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아니 왜 이렇게 급작스럽게?"

    에르카나가 깔깔 웃으며 말했다.

    "끌리고 있다고는 해도 뭔가 감정적으로 발전한 것은 아냐. 다만 지금 달링이 저 인간에게 편안함을 느끼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지. 모든 감정은 그런 것에서 시작하잖아?"

    "아……."

    "그리고 인간아. 애정이란 것은 납득할 수 있는 이유와 근거를 통해서 발현하는게 아니란다. 어느날 갑자기 받은 느낌하나만으로 애정은 얼마든지 자라날 수 있어."

    "그래서 그냥 두고 보시려구요?"

    "응."

    "질투도 안 해요?"

    "나지."

    에르카나의 말에 정해민이 고개를 갸웃했다. 보통은 여기서는 질투가 안 난다고 해야 앞뒤가 맞지 않는가?

    "그래도 어쩔 수 없는거야."

    에르카나가 씁쓸히 뇌까렸다.

    "이제 시작될 테니까."

    에르카나의 말에 정해민은 더더욱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아래를 바라보았다.

    * * *

    "잘 먹겠습니다."

    김다솜은 환히 웃으며 수저를 들었다.

    "으응."

    이지혁도 수저를 들고 앞에 차려진 음식들을 먹기 시작했다.

    "오늘 엄청 어색해 하시는 것 같은데요."

    "그래?"

    이지혁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어색해 하는 거 같은 게 아니라 실제로 좀 어색한데.'

    그냥 쇼핑을 나오려고 한 것이었는데 뭔가 데이트처럼 되어가고 있었다.

    결혼까지 한 이지혁이었지만 이렇게 누군가와 상식적인 데이트를 해본 것은 긴 삶을 통틀어서도 처음이었다.

    "넌 성격이 많이 변한 것 같다?"

    김다솜이 부드럽게 웃었다.

    "그래요?"

    "응 말도 부드러워지고 얼굴도."

    "오빠가 부담스러워 하시는 것 같아서요."

    "응?"

    "그럼 제가 바뀌어야죠."

    이지혁은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내가 너한테 뭐 해준거나 있니?"

    "많이 해주셨죠."

    "하하……."

    그러고보면 첫 만남부터 이상하기 짝이 없었는데 꾸준히도 이지혁을 챙겨주는 김다솜이었다.

    "네 오빠가 내 욕은 안 해?"

    "존경한다고 하던데요."

    "으응?"

    "귀찮은 티는 내도 한번도 힘든척은 안 하는 사람이라고, 자기 한테 그런 부담이 쏠렸으면 뒤도 보지 않고 도망갔을텐데 참 대단한 사람이라고 하더라구요."

    "왜 그런데?"

    그 뺀질이 김다현이면 뒤에서는 죽어라도 뒷담화를 깔 것 같았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NDF 사람들도 다들 지혁오빠 좋아해요."

    "……그건 네 착각인 것 같다."

    아무리 이지혁이 주위의 반응을 될 수 있으면 좋은 쪽으로 해석하려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이 발언만은 결코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진짠데."

    "거기까지."

    이지혁은 깔끔하게 김다솜의 발언을 끊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밥 먹고 영화보러 갈래요?"

    "아니."

    이지혁은 손을 내저었다.

    "왜요?"

    "같은 자리에서 2시간을 앉아있는 것은 내 성향과 맞지 않아."

    "담배 못 펴서?"

    "빙고."

    김다솜이 꺄르르 웃자 이지혁은 어색하게 마주 웃었다.

    "오늘 오빠는 좀 다른 것 같아요."

    "응? 뭐가?"

    "평소에 오빠는 항상 보면 좀 뭐랄까. 특별해 보인다고 할까? 특별이라기 보다는 특이가 맞는 말 같은데, 여하튼 그런 느낌이 있었거든요."

    "아……."

    이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말 하자면 이지혁이 현대의 사람들과 다른점이 그만큼이나 눈에 띄었다는 것이다.

    '그럴 수 밖에.'

    베라프에서 살아온 시간을 감안한다면 현대인과는 사고방식이 같을 수가 없다. 야만의 시대를 천년이 넘는 세월동안 겪어온 이지혁이다.

    법과 제도에 보호를 받는 이시대의 사람과는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오늘은 평범해 보여요."

    "그래? 옷을 다르게 입어서 그런가 보다."

    "아뇨. 보이는게 그렇다는 게 아니라. 그냥 평범한 대학생 같아요."

    "……평범한 대학생이라."

    이지혁은 그 어감에 어색함을 느꼈다.

    '베라프를 가지 않았다면 그랬겠지.'

    블랙먼데이.

    세상에 게이트가 열린 그 날 이지혁이 게이트로 빨려들지 않았다면 지금쯤은 평범하게 대학을 다니고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남에게 떳떳하게 자랑할 수는 없는 수준의 대학이었겠지만.

    "그랬으면 좋았을텐데."

    "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새삼스럽다.

    '오늘 조금 기분이 이상하네.'

    이지혁은 왜 이런 기분이 드는지 알 수가 없었다. 오늘은 뭔가 다른 날 같다.

    게이트도 무엇도 신경 쓰이지 않는 날이다. 이지혁은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은 다들 저마다의 일들을 하고 있었다.

    길을 가는 이들도 있었고 물건을 사는 이들도 있다. 그리고 사람을 만나 대화를 하고 이지혁과 김다솜처럼 밥을 먹거나 카페에 앉아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저 그런 하루.

    "평화롭네."

    "그러네요."

    그러고 보면 너무 급박하게 달려온 것 같았다.

    아펠드리체나 에르카나가 말하는 그가 너무 애쓰고 있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딱히 그런 생각은 한 적 없는데 말이야.'

    할 수 있는 일이니 한 것이다.

    이제 더 이상은 전투에 휘말리지 않고 평범하게 살아보겠다는 의지로 이곳으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내가 살고 있는 터전이 몬스터의 침공을 받고 있는데 나몰라라 할 수도 없으니까.

    그렇게 시작을 했고 결국은 여기까지 왔다.

    딱히 후회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자꾸만 잡생각이 드는 것을 보니 한가지는 알 것 같았다.

    '지쳤구나. 나.'

    이지혁은 자신의 상태를 알 것 같았다.

    너무 쉼없이 달려왔다.

    지구로 돌아온 직후를 뺀다면 이지혁은 천년이 넘는 세월동안 쉬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지치지 않을 수가 없다.

    '휴가라도 가야할까봐.'

    몬스터들을 데려다 둔 섬으로 일주일이라도 날아가소 피서를 좀 즐기고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 할 짓 없는 최정훈이나 NDF들도 데리고 가면 좋을 것 같았다.

    "너도 갈래?"

    "네?"

    이지혁은 피식 웃고 말았다.

    "대학가면 데리고 갈게."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대학을 가면 되는거죠?"

    "그래. 예원이는 못갈 것 같으니까. 너라도 가라."

    "예원이도 갈 수 있지 않을까요?"

    "……설마."

    그 꼴통이 대학이라니. 이지혁은 웃어버렸다.

    * * *

    밥을 먹고 카페에서 커피까지 한 잔 마신 이지혁은 신발과 옷이 든 쇼핑백을 주렁주렁 들고 집으로 향했다.

    게이트를 열면 짐을 들고도 금방 집으로 갈 수 있지만 오늘은 왠지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난 사람이니까."

    마법에 너무 익숙해진 것도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이라면 발로 걷고 손으로 물건을 드는게 당연한 건데.

    능력이 퍼지기 시작했으니 이제 시간이 지나면 이런 생각도 고루해지겠지만 지금은 괜시리 능력을 사용해서 오랜만에 느낀 이 감정을 흩어버리고 싶지 않았다.

    컹!

    "으응? 오식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어떻게 알고 오식이가 나와있었다.

    "왜 나왔어? 마중 나온거야?"

    컹!

    이지혁은 오식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기분이 좋은 듯 갸르릉거리는 오식이를 보니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베라프에서 그래도 너 하나는 얻어왔네."

    엄밀히 따지자면 베라프에서 얻어 온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이지혁이 베라프에서 그대로 있었다면 오식이도 그저 이지혁의 밑을 지키는 수많은 오거들 중 하나였을 것이다. 언젠가는 어느 전장에서 죽어갔을 오거.

    "인연이라는 게 웃긴거다 그렇지?"

    너무 고차원적인 말이라서 이해를 못했는지 오식이가 몸에비해 큰 머리를 갸웃거렸다.

    이지혁은 피식 웃고는 오식이를 들어올려 어깨 위로 올렸다. 발톱을 세운 오식이가 이지혁의 어깨에 매달리자 이지혁은 빠르지 않은 걸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해가 지네."

    멀리 노을이 지고 있었다.

    * * *

    "다녀왔습니다."

    "어서오너라. 아들. 밥은 먹고 왔어?"

    "응. 아까 점심 먹었어요."

    "저녁 먹을거지?"

    "점심 먹은지 얼마 안 됐는데?"

    "그래서 안 먹을 거야?"

    "……먹을게."

    어머니가 빙긋 웃더니 이지혁의 등을 두드렸다.

    "사온 거 얼른 방에 가져다 놓고 씼어. 금방 엄마가 밥 차려줄게."

    "응."

    이지혁은 방으로 가 짐을 내려놓고는 샤워를 했다. 샤워를 끝내고 나오자 식탁 가득 밥이 차려져 있었다.

    "자꾸 이렇게 많이 하지마."

    "엄마가 아들 먹이고 싶어서 그러는건데. 장가가면 해주지도 못할거."

    "나 장가 안 갈건데."

    정확하게 말하면 이미 장가를 갔습니다. 어머니.

    "에르카나는 어쩌고……."

    "으음."

    어머니가 고민하는 듯한 얼굴이 되었다.

    "인정을 해야 하나. 너는 어떻게 생각해?"

    "나도 모르겠어."

    "우리 아들이 받아주라고 하면 인정을 해야지. 뭐 어쩔 수 없는 노릇 아니겠어? 내가 장가 가는 것도 아니고 아들이 가는 건데 아들이 정한대로 따라야지."

    "헤헤."

    이지혁은 웃음으로 상황을 얼버무리고는 식탁에 앉았다.

    "다녀왔느냐?"

    "어?"

    건너편에 앉은 아저씨의 얼굴이 낯이 익다.

    "아버지?"

    "……그 놀란듯한 반응은 뭐냐?"

    "뭔가 오랜만에 보는 듯한 느낌이라서요. 요즘 회사는 좀 어떠세요?"

    "다닐만 하다. 평생하던 일이랑 그리 다를 것 없어서 편히 다니고 있다."

    "힘드시면 좀 쉬세요. 돈이야 충분하잖아요."

    "사람이 일을 안하면 퍼지는 법이야. 그리고 아버지는 그나마 직장에서 사람 대접 받는다."

    "……집에서는 누가 대접을 안 해주나요."

    "없는사람 취급하지."

    그건 없는사람 취급하는 게 아니라 진짜로 발견을 못하는 겁니다.

    그러게 왜 스텔스를 걸고 다니시나요.

    "지혁아."

    "예?"

    "힘들지?"

    "……."

    아버지는 수저를 손에 잡고는 이지혁을 빤히 바라보았다.

    "요즘 슬슬 네 이름이 여기저기서 들리는 것 같더구나."

    "그래요?"

    "그래. 그래서 네 하는 꼴을 가만히 보고 있으니 요즘은 바빠보이더구나."

    "바쁘지는 않아요."

    "처음 돌아왔을 때는 하루종일 게임만 하던 녀석이 요즘에는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모습도 보기 힘드니 얼마나 바쁜지 알겠다."

    이지혁은 마땅한 대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고보니 마지막으로 게임을 한 게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언제부터 이리 바쁘게 살게 되었던 거지?'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면서 최대한 편히 살아보겠다던 그의 다짐은 이미 찾아보기 어려울만큼 멀리 가 버렸다. 이제 남은 것은 바쁜 일에 시달리는 능력자 하나 뿐이다.

    "바쁜 것도 좋다. 네가 하는 일이 사람들을 구하는 일이니 네가 바쁠수록 한 사람이라도 더 살 수 있겠지."

    "네."

    "하지만 내게는, 그리고 네 엄마에게는 그래도 네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말거라."

    "……예."

    "오년만에 돌아온 아들이 다른 사람들을 구한답시고 어디가서 다쳐 오는 꼴을 보고 싶지는 않다. 이기적이라고 한다 해도 어쩔 수 없는거야. 그래도 나는 네가 좀 더 편히 살았으면 좋겠구나. 네 말 대로 돈은 충분하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어요."

    "그래. 밥 먹자."

    이지혁은 고개를 숙이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

    어쩐지 오늘따라 밥이 입으로 잘 넘어가지 않는다. 식탁을 겨우겨우 한 그릇을 비운 이지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들어갈게요."

    "그래. 피곤해보이는 구나. 푹 쉬거라."

    "네."

    이지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피곤해 보인다고?'

    생소한 말이었다.

    하지만 이지혁은 그 말이 맞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피곤한 거구나.'

    정확하게 말하면 지친거겠지.

    이지혁은 침대에 드러누웠다.

    "에르카나 거기 있지?"

    "물론이지 달링."

    불꺼진 방의 한 구석에서 에르카나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물어볼 게 있어."

    "언제든지. 얼마든지."

    "얼마나 남았지?"

    "……."

    언제나 바로바로 대답을 하던 에르카나의 입이 아교라도 바른 것처럼 다물어졌다.

    "솔직하게 말 해봐."

    "달링."

    이지혁은 대답없이 가만히 에르카나를 바라보았다.

    "잘 모르겠어."

    에르카나가 고개를 젓는다.

    "정확하게 얼마나 남았는지는 나도 가늠이 잘 되지 않아. 하지만 그리 많은 시간이 남았다고는 할 수 없을거야."

    에르카나의 단호한 말에 이지혁은 대답없이 어두운 천정을 바라보았다.

    "슬슬 죽음과 변이중의 하나가 시작되겠지."

    * * *

    "죽음이란 선택지가 새로 생긴 건가?"

    "달링의 몸은 지금 너무 허약해져 있어."

    에르카나가 이지혁에게 다가와 그의 볼을 쓰다듬었다.

    "육체적인 강성함을 의미하는 게 아니야. 육체의 강함을 말하자면 달링의 몸은 그 어느 때보다 강하지.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닌 것을 알지?"

    "그래."

    "달링의 몸은 지금 코어가 무너지고 있어. 정신과 육체를 연결하는 부분이 더 이상의 부하를 이겨내지 못하고 있는 거지."

    "그렇겠지."

    "이대로 침식이 좀 더 진행된다면, 필연적으로 마족이 되게 돼. 나도, 아펠드리체도 필사적으로 막아보고는 있지만, 더 이상은 무리야."

    에르카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변이를 육체가 버틸 수 있다면 달링은 마족이 될 거야. 하지만 그 변이를 버틸 수 없다면 달링은 죽게 될 거야."

    "어느 쪽의 확률이 높지?"

    "후자. 압도적으로."

    "그거 안타까운 일인데."

    에르카나가 고개를 저었다.

    "달링."

    "응?"

    "어느 쪽이든 결과는 다를 것이 없어. 마족이 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잖아. 살아남아 마족이 된다 하더라도 그건 더 이상 당신이 아니야. 당신이라는 인격은 사라지게 돼. 새로운 마족이 태어나는 것뿐이지. 마족이란 그런 존재니까."

    "그렇지."

    쓸데없이 마족에 대한 지식이 많은 것도 이럴 때는 문제였다. 이지혁은 입맛이 썼다.

    "이제는 한계야. 달링도 느끼고 있지?"

    "응."

    "달링……."

    에르카나가 무언가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지혁은 에르카나가 하는 말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다.

    "그만두자."

    "달링!"

    "이번에 가면 나는 다시는 이 땅을 밟을 수 없을 거야."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영혼을 고정시키고 베라프로 넘어간다면 다시 영원한 삶을 살 수 있겠지. 하지만 그 대가로 나는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해. 돌아오는 순간 변이가 과속화되어 버릴 테니까."

    "그래, 맞아."

    제방으로 쌓아 올려 막아두었던 물이 제방이 터지면서 폭발적으로 흘러넘치듯이, 베라프로 넘어가서 침식을 막게 된다면 이 세계로 돌아오는 순간 한 번에 모든 마기들이 육체를 장악하게 되어버릴 것이다.

    이미 한 번 겪었던 일이다.

    지금 이지혁의 마족화가 급격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이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으니까.

    드래곤 로드의 마법과 서큐버스 퀸의 다스림이 있음에도 막아내지 못하는 마족화였다.

    "잘 들어, 에르카나."

    "응, 달링."

    "인간은 인간인 이유가 있는 거야."

    "……."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해 필요한 것 중 하나는 너무도 확실해. 유한한 삶이지."

    "달링……."

    "내가 지금의 삶을 포기하고 베라프로 넘어가서 무한한 삶을 손에 넣어버리는 순간, 나는 인간이 아니게 돼. 마족이 아니고자 인간을 포기하는 것은 참 웃기는 일 같지 않아?"

    "죽을지도 모르잖아. 아니, 무조건 죽는 거야. 마족이 되는 것은 인간의 말로는 죽음이라고."

    "오래 살았지."

    이지혁이 피식 웃었다.

    "너무 과분할 정도로 오래 살았어."

    "인간으로서의 삶을 얼마 누리지도 못했잖아. 아쉽지도 않아?"

    "당연히 아쉽지."

    이지혁은 솔직하게 말했다.

    "방법만 있다면 백 년이라도 더 살고 싶어. 이 세계는 즐겁거든. 베라프에서 몇 천 년 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즐거움이라는 걸 이 세계에서는 몇 달 만에 수도 없이 느꼈어. '이래서 사람이 살아가는 거구나'라는 생각이 들 만큼."

    에르카나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되레 알게 됐지. 인간이 아닌 채로 수천 년을 산다는 게 얼마나 의미가 없는지를 말이야. 베라프에서 살아온 그 수많은 세월이 내게 무슨 의미가 있었는지를 생각하면… 결과는 너무나 빤한 거야."

    "하지만 달링, 어쩌면 베라프에서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잖아."

    "다른 방법?"

    "달링은 마법의 조종이야."

    "……."

    "이렇게 말하면 자존심 상하는 이야기지만, 드래곤도, 마족도 달링이 도달한 마법의 경지에는 오르지 못했어. 달링이 육체를 고정시킨 채 무한한 시간을 손에 넣는다면 달링의 육체를 정화해 낼 새로운 방법을 찾아낼지도 모르잖아?"

    "…그런 생각은 안 해봤는데?"

    "수천 년이 걸릴지도 모르지만, 이곳으로 따지면 불과 십여 년의 세월이 더 지날 뿐이야. 마계를 이용한다면 더 짧은 시간이 흐를 뿐이겠지."

    이지혁의 얼굴이 조금 심각해졌다.

    "그러니 다짜고짜 포기하지 마. 달링답지 않아."

    이지혁이 미소를 지었다.

    "듣고 보니 그런 것도 같네. 내가 너무 지쳤나 봐."

    "어울리지 않거든."

    "그러네. 이리 와봐."

    "돼, 됐어! 갑자기 분위기 잡기는."

    이지혁은 꼬리를 흔들며 멀어지는 에르카나를 보며 키득대고 웃었다.

    '의미 없는 소리.'

    이 세상에 영혼을 고정한 채 베라프로 넘어간다고 해도 지구 자체가 붕괴해 버리면 이지혁의 영혼도 붕괴된다. 그리고 지구는 이지혁이라는 존재가 사라지는 순간, 순식간에 붕괴되고 말 것이다.

    생명의 조화가 깨어지고 죽음이 세상을 뒤덮어 버리면 이지혁의 영혼도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게 된다.

    결국 어느 것을 선택하든 이지혁에게 미래는 없다.

    베라프로 넘어가 천천히 다가오는 지구의 종말과 함께 산화하든가, 아니면 이 세계에서 하루라도 더 맞서 싸우다가 죽음을 맞이하든가.

    "해피엔딩은 없어."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하루하루 게이트가 더 늘어나고 강해질 때는 확신했다.

    모두가 즐겁게 호호, 웃으며 끝나는 결말은 없다. 안타깝게도 이 희극의 결말은 새드 엔딩이다.

    "알고 있었잖아?"

    "알았지."

    "그러니 새삼 우울한 척하지 말자고."

    "내가 아니라 달링이 우울하니까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 아냐?"

    "그런가?"

    이지혁이 낄낄대며 웃기 시작했다.

    "달링."

    "듣고 있어."

    "축이 너무 벌어졌어."

    "…그렇구나."

    "달링의 목숨도 얼마 남지 않았지만, 이 세계의 종말도 얼마 남지 않았어. 가까운 시일 내에 마계와의 동화가 이루어질 거야. 그럼 이 세계는 끝이야."

    차원의 축이 벌어져 지구와 마계의 문이 열려 버린다면, 인세는 지옥으로 화할 것이다. 마수와 마족이 끊임없이 뿜어져 나오는, 말 그대로의 헬 게이트가 열리는 것이다.

    "그러니 슬슬 돌아갈 생각 없어?"

    "나?"

    "아니, 쟤."

    이지혁이 보고 있는 곳에서 아펠드리체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부터 말씀드렸을 텐데요, 돌아갈 생각이 없다고. 저는 당신을 돕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

    "이제는 그 도울 일이 없을 것 같아서 그러는 건데."

    "단 일분일초라도 더 연장할 수 있다면 됩니다."

    "그게 뭔 의미가 있을까."

    "당신에게는 의미가 없을지라도 제게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

    이지혁은 몸을 일으켜 침대위에 앉았다.

    "그래, 그 말이 맞아. 단 1분, 단 1초라도 시간을 더 끌 수 있다면 그건 의미가 있는 일이지. 결론이 같다고 해서 과정을 의미 없다 할 수는 없는 거니까."

    "……."

    그런 의도로 한 말은 아니지만, 이지혁의 얼굴에 나름 생기가 돌아오는 것을 보니 아무려면 어떨까 싶은 아펠드리체였다.

    "이러지 말자고. 우린 비극의 주인공에 어울리는 존재들이 아냐."

    "특히나 당신은 그렇죠. 멸망의 좌."

    "끄응."

    이지혁이 기지개를 켰다.

    "나도 사람이라는 걸 오늘 새삼 느끼는군. 기분이 우울하기도 하고, 평범한 생활이 그립기도 했어. 며칠만 더 이렇게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니까."

    "하지만 막상 그 며칠이 주어진다면 지루해할 거면서."

    "그게 인간의 재밌는 점이지. 항상 다른 것을 바라게 되거든. 놀면 쉬고 싶고, 쉬면 놀고 싶은 게 인간이라고."

    이지혁은 낄낄대며 웃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좋아. 이제 그런 것은 됐어."

    길고 길던 피서가 끝난 느낌이었다.

    "뭐가 오든 상관없어. 결국은 나를 거쳐야 할 테니까."

    "그러니……."

    아펠드리체가 이지혁의 등 뒤에 앉더니 천천히 그를 끌어당겨 눕혔다.

    "지금은 휴식을."

    "…나에게 마법을 건 건가? 졸음이 쏟아지는데?"

    "잠은 언제나 마법과도 같은 거죠."

    이지혁은 대답 없이 눈을 감았다. 잠이 든 그의 이마를 부드럽게 쓸어내린 아펠드리체가 안타까운 눈으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가여운 사람."

    인간으로서 이토록이나 가혹한 삶을 살아온 이가 또 있을까.

    지고한 드래곤이라 해도 차마 버틸 수 없을 것 같은 치열함, 그 자체인 삶이었다.

    "적어도 조금의 시간이 더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그런 건 라트렐에게라도 빌어보지그래?"

    "…지혁 씨는 라트렐 님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계시잖아요."

    "흥."

    에르카나가 코웃음을 쳤다.

    "달링은 속일 수 있어도 나를 속일 수는 없어. 도마뱀, 뭘 꾸미고 있는 거지?"

    "미혹과 현혹을 가치로 삼는 당신이 제게 거짓을 묻는 건가요?"

    "나는 적어도 달링에게 거짓을 말하지는 않아."

    "드래곤이 거짓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은 당신도 알고 있는 바가 아닙니까, 서큐버스 퀸?"

    아펠드리체와 에르카나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물렸다.

    한참을 서로를 노려보던 그들은 이지혁이 몸을 뒤틀고서야 시선을 내렸다.

    "얄팍한 동맹을 계속 이어 나갈 생각은 없어."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네가 달링에게 피해를 준다면 맹세코 내가 네 목을 찢어버릴 거야. 잊지 마."

    "…그럴 일은 없어요."

    아펠드리체는 나직하게 속삭였다.

    "당신만이 지혁 씨를 위한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되레 제 입장에서 보면 마족인 당신이 지혁 씨를 정말로 위하고 있는 것인가 의심할 수밖에 없으니까."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는군. 네년이 달링을 괴롭히고 있을 때, 그에게 힘을 주고 이곳으로 돌아오게 만들어준 건 나야."

    "그 결과가 이거죠."

    "……."

    "당신이 한 일은 결과적으로 지혁 씨를 죽음으로 몰아간 것뿐이에요.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면 적어도 죽음을 걱정하지는 않을 수 있었을 테니까."

    "이 세상이 붕괴하면 지혁 씨도 죽어!"

    "글쎄요. 그래도 몇 백 년은 더 살았을 것 같은데?"

    아펠드리체는 낮은 숨소리를 내며 잠이 든 이지혁의 머리를 쓸어내렸다.

    "우리끼리 싸우지 말아요. 힘든 건 우리가 아니니까."

    "…그래."

    에르카나 역시 안타까움이 가득한 눈으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가여운 사람."

    "우리 달링을 동정하지 마, 망할 도마뱀아."

    에르카나가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인간의 몸으로 마계의 정점에 선 남자야.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낼 사람이니까 곧 죽을 사람 보는 듯한 눈 치우라고."

    "…그랬으면 좋겠네요. 진심으로."

    이지혁의 끝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직감한 둘은 더없이 날카롭게 서로에게 독설을 날려 댔다.

    하지만 그 독설이 진정한 감정 싸움으로 번지지 않는 것은 그 독설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서로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며칠만이라도 쉴 수 있었으면 좋겠군."

    "그러게요."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이지혁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은 고역이었다. 한때는 너무나도 강해서 세상 전체와 싸워도 이길 것 같던 사람이 나약한 인간의 육체에 갇혀서 죽어가고 있는 모습은 너무도 끔찍하고 서글펐다.

    "…편히 잠들길. 오늘 밤만이라도."

    에르카나와 아펠드리체의 손길이 이지혁의 볼에 머물렀다.

    이지혁은 아무것도 모른 채 깊고 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 *

    이지혁은 자신의 앞에 조아린 수백만의 몬스터들을 보며 허무에 빠졌다.

    '권력의 정점인가…….'

    인간을 뛰어넘는 존재들을 수족처럼 부리며 베라프를 정복해 나간다.

    딱히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이미 그는 마계에서도 같은 일을 했으니까.

    끝도 없는 몬스터들을 다루며 마왕이라 불리는 세상의 정점들을 하나하나 꺾어 나간다.

    인간으로서 이러한 위업을 달성한 이는 지금까지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지혁은 그 사실을 딱히 대단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인간인가?'

    내가?

    죽지 않는 자를 인간이라 할 수 있을까?

    이지혁이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죽지 않는 자를 인간은 두려워해 왔다. 서양에서는 하이랜더라는 이름으로 경외시되었고, 동양에서는 임모탈이라는 이름으로 경원시되었다.

    다른 능력 없이 그저 죽지 않는다는 것만으로 인간은 그들을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로 취급했던 것이다. 그럼 지금 그가 살던 세계의 사람들이 자신을 본다면 과연 이지혁을 인간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미치지 않은 게 용하지.'

    정체성의 혼란.

    인간이란 존재를 규정하는 것은 무엇인가.

    자신인가, 아니면 타인인가.

    이미 타인에게는 인간이라고 불릴 수 없는 존재가 되었음을 인정하면서도 스스로 인간이라 믿는다면 그 존재는 인간이라 불릴 수 있을까?

    이지혁은 끝나지 않는 딜레마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수천 년을 살아오면서 아직 해답을 얻지 못했다.

    풀리지 않는 난제를 풀다가 미쳐 버린 수학자들처럼 이지혁 역이 일찍이 미쳤어야 하지만, 변하지 않는 그의 육체는 이지혁이 미치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우스운 일이다.

    영혼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영혼이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다는 것도 이해했지만, 육체가 재생되면 영혼도 재생되어 버린다.

    크르르르르.

    낮게 들려오는 몬스터들의 하울링을 들으며 이지혁은 고개를 들었다.

    길게 내려온 로브의 모자를 잡아 벗기고는 그 역시 으르렁댔다.

    "쓸어라."

    단 한마디.

    아무렇지도 않은 단 한마디.

    하지만 그 한마디가 가져온 파급력은 엄청났다.

    몬스터들이 일제히 울부짖더니 흉성을 드러내고 돌진한다.

    "흥."

    저 흉포스러운 몬스터들이 향하고 있는 곳이 인간들의 집결지라는 사실은 알고 있다. 아마 이 한 번의 돌진으로 또 막대한 학살이 이루어질 것이다.

    '미련스럽긴.'

    종교에 미친 인간들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지독한지는 현대에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세계는 그런 현대의 광신도들이 애교로 보일 만큼 신이라는 존재에 목을 매는 인간들이 널려있었다.

    하기야.

    신성이 없던 세계에서도 신에게 자신의 목숨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바치는 일이 비일비재했는데, 신성력과 이적이 존재하는 세계에 사는 인간들이 신을 믿는 것을 탓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지혁은 그 꼴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인간 같지도 않은 것들.'

    자신들이 죽는다는 사실을 빤히 알고 있음에도 물러서지 않는 것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일지도 모른다. 신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친다는 괴이한 짓거리도 인간이기에 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인간스럽지 않다.

    모름지기 인간이란 스스로 발전하는 존재다. 이지혁은 그렇게 생각했다.

    원숭이와 인간의 다른 점은 발전이다.

    과거 인간이 원시인이던 시절, 인간과 원숭이는 그리 다를 것도 없는 존재였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발전하고 또 발전하여 마침내 문명을 쌓아 올리고 과학을 이룩했다.

    불과 몇 만 년 만에.

    하지만 이곳의 인간들은 벌써 수만 년 동안이나 그 자리에 머물러있다. 인간으로서 홀로 서는 것이 아니라 신을 의지하고 신에게 모든 것을 맡기다 보니 정체되어 버린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이지혁은 단 한 번도 그들을 적대시하려 들지 않았다.

    그저 비키라 말했을 뿐.

    라트렐의 눈.

    그 하나만이 이지혁의 목적이었다.

    그렇기에 위협했다.

    대화했다.

    그리고 겁박했다.

    데라 라트렐로 가는 길만 연다면 어느 누구도 다치지 않을 것이라 설득도 했다.

    그럼에도 아무도 물러서지 않았다.

    "멍청한."

    인간의 특징이 발전이라면, 인간의 강점은 합리성이다. 누가 보아도 지금은 그저 잠시 길을 비우고 외면하는 것이 이득일 터. 하지만 신앙에 미친 것들은 자신의 목숨을 도외시하고 이지혁에게 달려들었다.

    순교.

    죽으면 라트렐의 품으로 갈 수 있다는 믿음은 그들의 이성을 앗아갔다.

    이지혁은 그러한 이들에게 안타까움과 혐오를 동시에 느꼈다.

    같은 인간임에도 자신들이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지를 자각하지 못하고 파충류나 다름없는 것들에게 채이는 인간에게 안타까움을 느꼈지만, 그 모든 고통을 신앙이란 이름으로 외면해 버리는 인간들에게는 혐오를 느꼈다.

    "인간이 아냐."

    주체성을 잃어버린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이라고 할 수 없다. 이지혁은 그리 생각했다.

    지금 눈앞에서 자신을 막아서는 것들은 인간의 탈을 쓴 다른 그 무엇이다.

    인간처럼 생겼다고 해서 인간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래.

    이지혁처럼 말이다.

    "낄낄낄낄."

    인간으로 태어났다고 해서 지금의 이지혁을 인간이라 할 수 없듯이, 지금 그를 막아서는 이들 역시 인간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저 인간인 하는 그 무언가들이었다.

    인간이 아닌 존재와 인간인 척하는 존재들이 서로 죽고 죽이는 아비규환이 바로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낄낄낄낄."

    이지혁은 미친 듯이 웃어 젖혔다.

    '진즉에 미쳤겠지.'

    제정신을 차리고 있다고 하지만, 그걸 누가 알겠는가.

    재생되고 있다고 하지만 처음의 그와 지금의 그가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판단할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이미 미쳤을지도 모른다.

    아니, 이미 미쳐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몬스터를 이끌고 인간을 학살한다는 선택지를 선택할 수는 없을 테니까.

    인간임이 분명한 존재들을 인간이 아니라고 스스로 세뇌해 가며 이런 미친 짓을 벌이지는 않을 테니까.

    이지혁은 컥컥대며 웃었다.

    목에서 올라온 웃음과 침이 그를 뒤흔든다.

    "죽여라."

    가로막는 자들을.

    막아서는 자들을.

    데라 라트렐로 가는 길에 있는 모든 존재를 죽이고 길을 뚫어라. 지구로 돌아가는 길이 바로 거기에 있다.

    그가 고향을 찾아가는 길이 지금 그의 앞에서 죽어가는 모든 이들의 목숨을 앗아가야 할 만큼 커다란 가치가 있는 일인가를 묻는다면 대답해 주지.

    '그렇다'라고.

    희대의 악마가 되더라도 상관없다. 살육자가 된다 해도, 역사상 최악의 이기주의자가 된다고 해도 이지혁에게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이 지옥 같은 곳에서 천 년, 만 년, 수억 년, 수십억 년을 이대로 홀로 살아갈 바에야 악마가 되는 것이 백배, 천배는 나을 것이다.

    그러니까…….

    "죽여라."

    이지혁의 눈에 붉은 핏빛이 감돌았다.

    남김없이 죽이고 또 죽인다. 죽이고 또 죽여서 그의 세계로 돌아간다.

    그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 이지혁은 앞으로, 또 앞으로 전진했다.

    "아아아아악!"

    "크아아악!"

    "라트렐이여……."

    병사들은 당연히 죽는다.

    몬스터의 대군을 막아선 인간이 무사할 리가 없었다. 제아무리 이곳의 인간들이 현대의 인간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힘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수천 년간 이지혁이 쌓아 올린 힘 앞에서는 무력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병사가 아닌 인간도 죽는다.

    몬스터들이 성벽을 넘어 마을을 덮친다.

    이지혁은 그 광경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저항하지 않는 인간들도 쓸려 나간다.

    어른, 아이, 남자, 여자.

    나이와 성별 종족을 가리지 않고, 앞에 있는 모든 것들에게 공평한 죽음이라는 형벌을 부과한 몬스터들의 대군이 돌진하고 또 돌진했다.

    이지혁은 서두르지 않고 그 뒤를 따랐다.

    "으아아아아!"

    가끔 몬스터를 뚫고 그의 앞까지 도달하는 인간도 있었다.

    인간의 개념으로 본다면 초인이거나 혹은 용사라 불리는 것들.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위대한 존재들이다.

    하지만 그 끝은 같다.

    이지혁이 손끝에서 튕겨낸 마나가 방금 전까지 인간이라고 불리던 존재를 세포 하나 남기지 않고 분쇄한다.

    무심한 눈으로 그 광경을 바라본 이지혁이 조금의 허무를 담고 다시 앞으로 걸어간다.

    피, 그리고 잔해.

    그가 지나간 곳에 남는 것은 그뿐이었다.

    어느새 수많은 이들이 그를 두고 '멸망을 불러오는 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우스운 일이다.

    그는 단 한 번도 이 세계의 멸망을 바란 적이 없다.

    그가 원했던 것은 이 세계에서 그가 사라지는 것이다.

    그토록이나 그가 불러올 멸망이 두려웠다면 그에게 라트렐의 눈을 주어 당장 꺼지라고 하면 될 것을, 두려움에 벌벌 떠는 몸을 신앙심이라는 거창한 명분으로 지탱하고는 순교를 위해 달려들어 온다.

    인간의 모순이 이만큼이나 극명하게 드러나는 장면은 없다.

    이지혁은 인간의 피를 밟고 앞으로 나아갔다.

    데라 라트렐까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 * *

    "……."

    눈을 뜨는 순간은 언제나 익숙하지 못하다.

    느낌이 미묘하게 다른 지구의 공기라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이곳에 있는 것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잘 잤어요?"

    "…좋은 꿈을 꿨지."

    "악몽이 아니라?"

    "즐거운 꿈이었다."

    눈앞에 있는 것이 지구에 있는 존재 중 가장 베라프를 떠올리게 하는 존재만 아니었어도 기분이 조금은 더 나을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아펠드리체가 이지혁의 볼을 쓰다듬었다.

    "비명을 지르던데요?"

    "환호였겠지."

    "식은땀은?"

    "더웠나 보지."

    아펠드리체가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자 이지혁이 이죽거렸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내가 죽인 것들이 인간이 아니라 드래곤이었다고 해도 네가 지금 같은 눈으로 날 바라볼 수 있겠어? 그 눈을 보기 싫어서라도 드래곤이라는 종족을 멸종시켜 버리고 싶은 충동이 드는데?"

    "우리가 얼마나 개인주의적인지 알고 있으면서도 그런 말을 하는 건가요?"

    "종족이 다르다는 건 한 번씩 매우 불편하단 말이야. 나의 개념으로는 도통 이해할 수가 없군."

    드래곤이라는 존재는 하나하나가 개별적인 종이라고 할 만큼이나 유대감이 없었다. 심지어 부모 자식 간에도 특별한 정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아펠드리체는 결코 이지혁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요."

    "누가 뭐라고 했나?"

    이지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자신의 머리를 안고 있는 아펠드리체를 밀어내고 몸을 일으켜 세운 이지혁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내리쬐는 햇살은 베라프와 다를 바가 없었다.

    "겉만큼이나 속도 강하면 좋을 텐데 말이죠."

    "부드러운 남자라는 뜻이지?"

    이지혁이 낄낄 웃으며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출근하는 날이니 꾸물대지 말라고."

    "네."

    샤워를 하러 가는 이지혁을 보며 아펠드리체는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시간이 조금 더 있었다면…….'

    육체의 붕괴가 슬슬 정신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인지, 육체가 붕괴하면서 그동안 잘 감춰오고 있던 내부가 드러나는 것인지는 정확하게 판단할 수 없지만, 지금 이지혁이라는 존재를 감싸고 있던 유리가 깨져 나가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조금만 더……."

    그녀의 목소리는 더없이 공허했다.

    * * *

    "아우으으!"

    이지혁은 쏟아지는 햇살을 받으며 어깨를 쫙 폈다.

    "간만에 좀 잔 것 같은데."

    꿈은 영 지랄 맞았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몸이 컨디션이 좋은 느낌이었다. 최근에는 아무리 잠을 자도, 아무리 쉬어도 몸이 무거운 느낌이었는데, 정말 오랜만에 몸이 가뿐하다.

    쌀쌀한 아침공기가 폐 속 가득하게 들어왔다가 나간다. 폐가 차가워지는 느낌이 좋다.

    "흐음."

    이지혁은 고개를 좌우로 꺾고는 사무실을 향해 걸었다.

    컹!

    "응?"

    현관 앞에서 오식이가 짧은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왜 왔어?"

    컹! 컹!

    저 작은 몸에서 저런 굵직한 소리가 난다는 게 웃기기도 하지만, 그래도 주인이라고 아침 마중을 나온 것을 보니 기특했다.

    "이리 와."

    컹!

    오식이가 이지혁에게 달려와 꼬리를 친다.

    이 모습을 본다면 누가 오식이가 오거라고 생각하겠는가.

    이제는 오거로서의 정체성도 모두 버렸는지, 이지혁의 다리에 몸을 비비는 오식이였다.

    "오거면 어떻고, 강아지면 어떠냐! 잘살면 그만이지!"

    오식이를 보고 있자니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했던 과거의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진다.

    그런 것들이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중요한 것은 현재를 얼마나 행복하게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다.

    "축생에게서 깨달음을 얻다니, 기특한지고."

    이지혁이 오식이를 잠시 세워두고 안으로 들어가더니, 냉장고에서 커다란 고깃덩어리를 꺼내 왔다.

    "자!"

    자기 몸만 한 고기를 본 오식이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언제나 개 사료나 먹이던 저 주인이 미쳤는지 오늘따라 고기를 주고 있었다.

    으득.

    칼도 안 들어갈 것같이 얼어붙은 고기를 이로 가볍게 찢어 먹는 모습을 보니, 과연 오거는 오거라는 생각이 든다.

    "…아냐. 정체성은 중요한 것 같아."

    생긴 건 귀엽게 생겨서는 몸뚱아리만 한 얼린 고기를 이로 찢어 삼키는 오식이를 보니 생긴 대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것 같았다. 위화감이 장난이 아니다.

    어느새 자신의 몸만 한 고기를 다 먹어 치운 오식이의 배가 빵빵해졌다.

    물리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저게?

    사람으로 치면 앉은 자리에서 소 한 마리를 뜯어 먹은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그러고도 영 성에 차지 않는지 입맛을 다시는 오식이였다.

    "더 없어, 인마."

    집에 있는 소고기를 개 먹였다는 말만 해도 엄마가 그의 등짝을 폭파시켜 버릴지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이지혁이 서둘러 대문 밖으로 나갔다.

    컹! 컹!

    오식이가 짖으며 그의 뒤를 따랐다.

    "나오셨어요?"

    "헐."

    이지혁이 문 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김다솜을 보고 깜짝 놀랐다.

    "웨, 웬일이니!"

    "출근하실 것 같아서 기다렸어요."

    볼이 발갛게 달아오른 채로 그를 기다리고 있던 김다솜이 옆에 끼고 있던, 뭔가 아이스박스 같은 가방에서 텀블러를 꺼내 이지혁에게 내밀었다.

    "뭐야?"

    "커피예요."

    "…나 이런거 안 먹는데?"

    "시럽 반, 커피 반."

    "땡큐."

    취향 파악이 완벽하게 되어 있는 김다솜이 두렵기도 하지만, 이 추운 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시럽 가득한 커피는 피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이지혁은 텀블러를 쪽쪽 빨면서 회사를 향해 걸었다.

    오식이가 김다솜에게 달려들어 애교를 부리자, 김다솜이 오식이를 들어 올려 품에 안았다.

    "얘는 왜 이렇게 귀여워요?"

    아마 걔 눈에도 니가 귀엽게 보일 거다.

    "…아니, 맛있게 보일지도 모르겠네."

    "네? 저 개 안 먹어요."

    "반대의 의미지."

    이해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진짜 오식이가 김다솜을 간식쯤으로 생각하고 침을 흘리지는 않는지 걱정되었다.

    아무리 교육이 잘되어 있다지만, 야생동물은 본성을 숨길 수 없다고 하지 않는가.

    "간지러워."

    하지만 김다솜의 얼굴을 핥아대는 오식이를 보고 있자니, 어쩐지 그 모든 것이 부질없게 느껴졌다.

    '저게 오거라니…….'

    저런 게…….

    저 따위가!

    하울링 한 번으로 산천초목을 벌벌 떨게 만들던 오거의 위엄은 이미 온데간데없었다.

    저건 그냥 개다, 개.

    "뭐 이리 일찍 나왔어?"

    "늦게 나온 거죠."

    "응?"

    "제 등교 시간이 더 빨라서 그동안 잘 못 왔어요. 오늘은 늦게 가도 되는 날이라서 일부러 온 거구요."

    "그렇구나."

    이지혁의 출근 시간을 보장해 준 학교에 상이라도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니, 솔직히 나쁘지는 않지만…….'

    관성이 있어서 엄살을 부리게 되는 거지, 이제는 김다솜과 함께 길을 걷는 게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혼자 가는 것보다야 심심하지도 않고…….

    "오빠, 손 시리죠?"

    김다솜이 주머니에서 장갑을 꺼냈다. 그러고는 이지혁의 손에 직접 그 장갑을 끼워주었다.

    "나는 그런 거 안 껴도 괜찮아."

    "에이, 손이 빨간데."

    응? 진짜?

    이지혁은 자신의 손을 보고는 살짝 놀란 심정이 되었다. 은근히 아까부터 손이 시린 느낌이 든다 했더니, 손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래 봬도 능력잔데…….'

    마법사 이지혁이라면 가능한 일이겠지지만, 에테르를 받아들인 이후로 강화된 이지혁의 육체라면 이 정도의 추위는 아무것도 아닐 텐데.

    '약해지긴 했나 보군.'

    몸뚱아리가 아무래도 맛이 간 모양이었다.

    심각한 상황도 아니고, 전투 중도 아닌 이런 상황에서 그걸 느껴야 한다는 것이 아이러니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날이 추워요."

    "응."

    "저번에 준 목도리는 어쨌어요?"

    "…집에 있을 거야."

    "잘 두르고 다녀요. 건강 망치면 다른 건 다 소용없대요."

    "으응."

    이지혁이 머리를 긁었다.

    원래는 이런 관심이나 잔소리가 부담되었는데, 딱히 싫지 않은 것을 보면 이지혁의 사고방식이 많이 바뀐 모양이다. 그게 아니라면 그도 이제는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은 마음이 강해졌거나.

    어느 쪽이든 변화가 찾아왔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예원이는 학교 잘 다녀?"

    "……."

    김다솜이 먼 곳을 바라보았다.

    "…솔직하게 말을 해봐라."

    "으음……."

    김다솜이 미묘한 표정을 짓더니 말을 했다.

    "전학 오고 한동안은 얌전히 다니나 했는데……."

    "응."

    "요즘은 음……."

    이지혁은 더는 묻지 않았다.

    세종대왕도 끝끝내 양녕대군을 다스리지 못했다더니, 형제자매는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그래도 요즘은 애들 괴롭히지는 않아요."

    "다행이네."

    이지혁은 자신의 영향력이 동생에게는 미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했다.

    '방법은 하나뿐이야.'

    최정훈을 어떻게든 예원이와 맺어줘야 한다.

    '졸업만 하면 바로 결혼시키는 것도 괜찮겠어.'

    최정훈이 들으면 거품을 물 사안이지만, 이지혁은 그리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결혼이란 당사자의 생각이 가장 중요한 법이구만, 콩깍지가 씐 이지혁은 그래도 예원이 정도면 나이도 어리고 최정훈과 좋은 짝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멀리 사무실 건물이 보이기 시작하자 이지혁이 기지개를 켰다.

    "너는 안 가봐도 돼?"

    "입구까지만 가구요."

    "그래, 그럼."

    그 순간, 저 멀리서 무언가가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다소오오오옴아아아아아!"

    "……."

    저러라고 준 능력이 아닐 텐데…….

    대한민국 최속의 능력자인 패스 드리프터 김다현이 엄청난 속도로 그들을 향해 돌진해 왔다. 그 꼴을 보고 있자니 능력자란 과연 무엇인가 회의가 들 지경이다.

    "도시락! 도시락 가져가야지!"

    한 손에 앞치마를 잡은 채 달려오고 있는 꼴을 보자니 입에다 죽빵을 박아 넣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이지혁은 끓어오르는 속을 달랬다.

    차라리 얼굴이라도 못생기든가.

    "그렇게 쓸 거면 그 얼굴 나 주지."

    이지혁도 못생긴 편은 아니지만, 연예인이 와도 오징어로 만들어 버리는 김다현이 가까이 오는 건 영 부담스러웠다.

    "왜 왔어?"

    "도시락 가져가야지."

    "우리 학교 급식한다고! 요즘 누가 도시락을 싸 가!"

    "그딴 대량생산품들 먹지 말라고 했잖니!"

    옥신각신하는 남매를 보니 한숨이 나온다. 남매가 싸우는 것이야 흔한 일이지만, 이 남매는 근본부터 뭔가가 잘못되었다.

    "……비켜라, 시스콤."

    "헐, 이지혁 씨."

    눈에 보이지도 않았던 건가?

    깜짝 놀랐다는 얼굴을 하는 김다현을 보니 어쩐지 서글퍼지는 이지혁이었다.

    "출근 안 해?"

    "이제 해야죠."

    김다현이 주섬주섬 앞치마를 주머니에 쑤셔 박았다.

    생긴 건 저리 생겨서 하는 짓은 왜 팔푼이란 말인가.

    이지혁도 어디서 정상적인 인간이라는 평가는 못 듣는 사람이지만, 김다현을 보고 있자니 그래도 능력자들 중에서 이지혁 정도면 매우 정상적인 사람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일단 가자."

    바보에게 낭비할 시간은 없다.

    이지혁은 김다현이 뭘 하든 말든 사무실로 가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남매가 등 뒤에서 투닥거리며 따라오는 걸 보니 한숨이 절로 났지만, 뭐 어쩌겠는가.

    '나랑 예원이도 다른 사람들 눈에는 저렇게 보일까?'

    그러면 정말 끔찍할 것 같았다.

    "나오셨습니까?"

    김다솜을 보내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자 최정훈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를 맞았다.

    "어? 커피?"

    "네?"

    "크, 이지혁 씨 오시면 타 드리려고 제가 커피를 준비해 놨는데, 아깝게 됐군요."

    언제부터 이지혁의 인식이 커피를 탐하는 존재가 되었는가가 걸렸다.

    "오늘은 별일 없어요?"

    "게이트 하나가 열리고 있기는 한데, 별일 없을 겁니다. 레벨이 낮아서 굳이 지원을 가지 않아도 될 것 같더라구요. 얼마 만에 한가한 오전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럼 집에 가서 좀 쉬세요."

    "하하하, 농담도 잘하시네요."

    "농담 아닌데."

    이런 날이라도 좀 쉬어둬야지, 저러다가 과로로 쓰러질 것 같았다. 최근 자신의 몸이 이상하다는 걸 느끼게 되니,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무리하고 있는지가 눈에 들어온다.

    "안 그래도 오늘은 칼퇴근이 목표입니다."

    "호오, 꿈을 꾸었군요."

    "꿈은 이루어지는 법이죠. 북한 쪽만 조용하다면 어떻게든 될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걔들은 어떻대요?"

    "아직 소식이 없습니다. 누가 이겼는지도 모르겠네요. 평양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합니다."

    "흐음……."

    사람 좋아 보이던 김용휘의 얼굴이 떠오른다. 권력을 탐하기는 해도 정점에 서려 피를 보는 타입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이지혁의 예상이 빗나간 모양이었다.

    '베라프의 사람과 현대의 사람은 사고방식이 다르니까.'

    수많은 경험을 했다고 해서 과거와 반드시 같아지지 않는 것이 인간이었다. 자신의 경험을 맹신하지 않아야 한다.

    "알겠어요."

    이지혁이 자리로 향하자 최정훈이 만류했다.

    "왜요?"

    "자리는 저쪽이죠."

    상석에 놓인 거대한 원목 책상을 본 이지혁이 한숨을 내쉬었다.

    "…제 자리로 옮겨주세요. 저건 서아영 씨 앉으라고 하구요."

    "저희 원장님한테 박살 납니다."

    "그 원장이 박살 나는 건 괜찮은 모양이죠?"

    "바꾸죠."

    명분을 찾아낸 최정훈이 새로 들어온 비서들에게 비품들을 서로 바꾸라고 지시를 내렸다.

    "오, 뭐랄까, 좀 있어 보이는데요?"

    "훗."

    최정훈이 미소를 지었다. 지금까지의 최정훈의 위상을 생각하면 부하 직원이 너무 적은 느낌이지만, 이번에 인원이 충원이 되면서 폼이 살기 시작했다.

    "원래 이랬어야 하는 겁니다."

    "그러게요. 그런데 왜 그렇게 오래 걸렸나 모르겠어요."

    "관료 조직이 다 그런 법이죠."

    최정훈이 뭔가 말을 더 하려고 하는데, 문이 열리더니 한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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