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67화 (67/118)

[■] 내가 어리석었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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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뭐라고 하신 겁니까?"

최정훈은 도무지 지금 들리는 말이 무엇인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쿠데타라구요?"

- 그래, 인마! 지금 난리가 났어!

"여긴 조용한데요?"

- 아직 전파는 안 됐어. 지금 상황 파악 중이야. 아무래도 박용휘가 일을 저지른 것 같아.

"박용휘?"

최정훈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총참모장 박용휘 말입니까?"

- 그래.

국방부 장관이 하는 말이니 거짓말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대체 왜 박용휘가 쿠데타를 저질렀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가만히 있어도 권력의 핵심이 아니던가.

"아무래도 믿기지가 않습니다. 제가 본 박용휘는 그런 모험을 할 사람이 아닌 것 같았는데."

- 나라고 뭐 알겠냐? 일단 그런 정황이 포착되었다니까 그렇다고 아는 것뿐이지. 지금 통일부 쪽이랑 국정원 쪽에서 데스크 열고 분석 중이니까 좀 기다려 봐. 그리고 너희 쪽은 별일 없지?

"예."

- 국경은 넘었어?

"방금 넘었습니다."

- 다행이네. 일단 복귀해.

"복귀 말입니까?"

- 그래. 뭐 따로 할 것 있어?

"아뇨, 아닙니다. 복귀하겠습니다."

최정훈은 거기까지 대화를 나누고 전화를 끊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최정훈은 혼란에 빠졌다.

갑작스럽다. 너무도 급작스럽다. 일을 벌인다고 하더라도 왜 이런 혼란스러운 시기에 일을 벌인단 말인가.

"…아니지."

일을 벌인다면 지금이 적기였다.

우선 첫 번째로 평양이 유례없이 혼란에 빠져 있다는 것.

그리고 두 번째로는 지금 평양 주변에 십만에 달하는 정예군이 있고, 그 지휘권이 박용휘에게 있다는 점이었다.

'안 할 이유가 없군.'

이지혁을 빨리 보내려던 분위기도 이제는 이해가 갔다.

이지혁이 있다면 변수가 어디로 튀어버릴지 모르니까. 이지혁만 없다면 확실하게 우선권을 잡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처음부터 계획된 건가?"

"뭔 소리예요?"

최정훈이 이지혁을 돌아보며 힘없이 말했다.

"쿠데타가 일어났답니다."

"쿠데타?"

"아마도 박용휘 총참모장이 중심인 모양입니다."

"하, 그 양반하고는."

이지혁이 선물이라고 받아 온 상자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혀를 찼다.

"뭐 그리 급했지?"

"…그러게 말입니다."

"강단이 있는 건 좋지만, 너무 성급했다는 생각도 드네요. 하기야 북한 내부 사정이야 우리보다야 자기가 더 잘 알겠지."

"네, 그렇죠. 게다가 김씨 일가의 독재 체제가 확립된 이후로 단 한 번도 시도되지 못했던 쿠데타가 벌어졌다는 것이 주목할만한 점이죠. 그만큼이나 경직된 사회에서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것은 이번 몬스터 사태가 북한에도 그만큼 큰 충격이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이상하죠."

"…뭐가요?"

"내가 아는 쿠데타는 항상 위기가 있을 때 벌어지는 거거든요."

"으음……."

"그런데 지금은 위기가 해소된 상황이란 말이에요. 위기가 해소되고 나자 쿠데타가 벌어진다는 건 역사적으로 봐도 드문 일일 텐데."

"역사를 좀 아십니까?"

"나는 아는 게 아니라 직접 본 거죠."

"아……."

최정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지혁은 지구의 세계사에 대한 지식에는 무지할지 모르지만, 이계에서 수천 년 동안 왕조의 흥망성쇠를 그 몸으로 직접 겪어왔다.

그러니 역사를 관조하는 눈도 일반인의 수준은 아닐 것이다.

"뭔가 좀 이상하긴 하지만……."

이지혁이 기지개를 켰다.

"어떻게 할까요?"

"뭘요?"

"이 사태를 말입니다."

이지혁이 피식 웃었다.

"제가 무슨 도깨비 방망이쯤으로 보이시는 거예요?"

"…그건 아닙니다만."

"몬스터와 관련된 사태라면 모를까, 인간과 인간이 벌이는 일에 끼어드는 건 사양이에요. 어떤 결과가 나오든 간에 우리 측이 좋을 일은 없어요. 그냥 지켜보시죠."

"그래야죠."

최정훈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짧은 시간이나마 함께했다고 정이라도 든 건지, 박용휘가 걱정되고 있었다.

'어차피 그도 북한 주민들의 고혈을 빨아먹던 집권층인 것은 다르지 않은데 말이야.'

더 나쁜 놈과 덜 나쁜 놈을 구분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박용휘든, 정병서든, 김룡성이든 그 체제하에서 그러한 지위에 올랐다는 것은 수많은 이들을 고통 속에 몰아넣으며 살아왔다는 것과 일맥상통했다.

"가시죠."

"으음."

정인수 역시 꺼림칙한 기분인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까지는 나름 평온해 보였는데 말이야."

"그러게요."

"이래서 알 수 없는 국가라고 하는 건지, 아니면 우리가 너무 무지했던 건지."

정인수는 고개를 저었다.

걸려온 전화대로라면 그들이 평양을 빠져나온 바로 직후에 일이 터졌다는 뜻이리라.

"일단은 복귀해야지."

"예."

이상하게도 무거운 마음이었다. 실제로 북한에 머문 시간은 총 24시간도 넘지 않을 텐데, 왜 이렇게 기분이 이상한지 알 수 없었다.

그들 역시 쿠데타를 몇 번이고 겪은 국가의 국민이라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변하지 않고 썩어 들어가던 체계의 변화를 목격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북한 쿠데타라……."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최정훈과 정인수가 모두 고개를 돌렸다.

어디서 얻었는지 말끔한 정장으로 갈아입은 송정수가 버스 뒷자리에서 다리를 떨고 있었다.

"보통 일은 아닌데, 이거."

"관련 정보가 좀 있으십니까?"

"글쎄, 뭔가 있었던 것 같기는 한데, 시간이 워낙에 오래돼서 잘 기억이 안 나는군."

송정수가 너스레를 떨며 이지혁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시겠죠."

기억을 하면 그게 더 이상한 것이다. 이미 이십 년이 지난 정보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다. 그것도 어쩌면 다시는 쓰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텐데.

"영민이 놈이 고생 좀 하겠구만. 뭐, 이젠 나랑은 상관없는 이야기니까."

"…총재님, 아직 총재직은 유지되고 있습니다."

"내가 지금 와서 그 짓거리를 할 수 있겠나? 감각이 죽은 정치인은 개똥으로도 못 써."

"현 대통령도 대통령 하고 있는데……."

"어?"

송정수가 당황한 듯한 얼굴로 멍청히 말했다.

"그, 그러네? 그런 놈도 대통령을 하는데……."

정인수가 헛기침을 했다.

"국가수반에 대한 예의는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없는 데서는 나라님도 욕하는 법이다. 놈이 나라님이니까 욕하는 거야."

"말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래도 천상 군인인 정인수로서는 정치인 송정수의 말빨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예?"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누가 승리하는 가가 중요하지. 실패한 쿠데타는 피바람을 부르기 마련이고, 쿠데타가 성공한다고 해도 북한이라는 나라의 특수성을 고려한다면 그리 쉽게 안정되지는 못할 거야."

"으음."

"더구나 지금처럼 몬스터 때문에 수많은 나라들이 자국의 안전에 민감한 상황이라면, 북한이라는 위험 국가의 체제가 뒤흔들리는 것을 반길 나라는 어디도 없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지."

"그렇겠지요."

"그래도 일단은 김씨 일가를 숙청할 수 있다면 더 좋은 결과를 바랄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정인수의 말에 송정수가 부드럽게 웃었다.

"나는 자네 같은 사람들을 좋아하지."

"가, 감사합니다."

"정의감 있고, 배운 대로 움직이고, 국가에 대한 애국심이 가득한 부류. 총알받이 삼아 전장 한가운데로 내 몰아도 나라를 위해서라며 기쁘게 죽을 수 있는 사람들 말일세."

"……."

정인수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하지만 기분이 나쁘다고 해서 그보다 연장자이자 여당의 총재에게 대거리를 할 만큼 그의 대는 세지 못했다.

"미국과 중국, 그리고 한국이 북한의 체제를 바꿀 힘이 없어서 지금까지 지켜만 보고 있었겠는가? 쓰임새가 있으니 내버려 둔 걸세."

"그럴 리가……."

"하지만 이렇게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다면, 어떻게든 개입을 하려는 국가가 생길지도 모른다네. 아니, 어쩌면 이미 개입은 시작되었다고 봐야지."

"그럼 저희는 뭘 해야 하죠?"

"뭘 하기는. 못 들었어?"

"네?"

"집에 가세, 집에. 나는 얼른 가서 사우나나 좀 가야겠어. 아이고, 뼈마디가 찌뿌드드하네."

최정훈이 고개를 푹 숙였다.

"서울로 가자."

운전병에게 지시를 내린 정인수가 외투를 여몄다.

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새삼 차갑게만 느껴졌다.

* * *

"뭐가 어떻게 된 겁니까?"

국방부 장관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며 소리쳤다.

"앉아요, 일단."

하지만 상석에 이미 대통령 윤영민이 자리하고 있는 것을 본 국방부 장관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실례했습니다."

"됐어요. 나도 같은 심정이니까. 왜 내 임기 중에 자꾸 이런 일이 터지는 건지."

윤영민은 골치가 아프다는 듯 얼굴을 비볐다. 하나씩만 터져도 역대급 사건으로 남을 일들이 그의 임기 중에 줄줄이 터지고 있으니, 그의 심정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었다.

"쿠데타라니요. 갑자기 이게 무슨 일입니까?"

"우리도 방금 정보를 들었을 뿐입니다."

최선형 통일부 장관이 안경을 고쳐 썼다. 긴장했는지 그의 안색 역시 새하얗게 보였다.

"성공하겠습니까?"

"성공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성공과 실패 중 어느 쪽이 우리에게 더 이득입니까?"

"쿠데타를 벌이고 있는 박용휘 총참모장의 성향을 보았을 때, 쿠데타가 성공하고 정권을 잡는다면 개혁 개방 쪽으로 움직일 확률이 높습니다. 우리 측으로도 손을 뻗어올 수 있으니, 국가 경제적 측면으로는 이득이라고 봐야 합니다.

"그렇군요."

"그리고 아무래도 군사적 긴장도 줄어들 수 있겠죠."

국방부 장관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직 속단할 일이 아닙니다. 정권 교체기마다 내부 단속을 한답시고 아래쪽으로 미사일 날려 댄 적이 어디 한두 번입니까?"

"으음……."

윤영민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두 번째 정권이 교체될 무렵, 쿠데타에 대한 예측을 한 시기가 있긴 했지만, 그때는 나름 강성이라 불리던 인물이었던데다가 현재의 최고사령관보다 경륜과 경험에서 압도적인 인물이기에 나름의 대비를 한 것이다.

이번처럼 뜬금없는 쿠데타에 대해 미리 준비하고 상황을 예측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럼 일단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겠군요."

"미국 측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자국 단속하기도 바쁩니다. 주한미군 철수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던 상황인데, 북한에 관심이나 있겠습니까? 되레 일본과 중국이 좀 더 긴장한 것 같습니다."

"보통 일이 아니군요."

그때,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박두진이 입을 열었다.

"어차피 우리가 해야 할 행동은 하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정권이 교체되지 않으면 해프닝으로 끝날 일입니다. 북한 내부적으로야 피바람이 불겠지만, 타국에 영향을 끼치지는 않을 겁니다. 그럼 그때 비선으로 위로나 표하면 되는 거고, 실제로 대비해야 하는 것은 정권이 바뀌었을 때지요."

"으음……."

윤영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인민 최고지도자가 될지도 모를 박용휘에 대한 모든 정보와 성향에 대한 조사가 필요합니다. 최대한 빠르게요."

"준비하겠습니다."

통일부 장관이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윤영민은 그 광경을 보고 의자에 깊이 몸을 묻었다.

'복잡해.'

시국이 가면 갈수록 복잡하게 꼬여가고 있었다.

* * *

중간에 상황을 볼 겸 청와대 쪽으로 가자는 최정훈의 간곡한 부탁을 깔끔하게 무시한 이지혁은 NDF로 게이트를 열었다.

최정훈과 정인수는 마음이 급했지만, 이지혁을 위시로 한 능력자들은 북한에 쿠데타가 벌이지든 게이트가 열리든 관심이 없었기에 굳이 귀찮은 일을 자초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아이고, 삭신이야."

게이트에서 나오자마자 이지혁은 몸 이곳저곳을 두드렸다.

주물.

그러자 어디선가 손이 뻗어 나와 이지혁의 몸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시, 시원하다."

정체불명의 손이 몸을 주무르자 당연히 흠칫한 마음이 생겼지만, 그 손이 가져다주는 시원함에 이지혁은 이성을 잃어버렸다.

"뭐, 뭐야?"

이 몸이 절로 풀리는 이 기분은 대체 뭘까?

이지혁은 어깨를 주무르는 손이 이끄는 대로 뒷걸음질을 쳤다. 세이렌의 유혹보다 더 치명적인 유혹이었다.

털썩.

어느새 준비되어 있는, 푹신한 회장님 의자에 앉은 이지혁의 목과 어깨 위로 나긋나긋한 손길이 마사지를 시작했다.

영혼이 빠져나갈 것 같은 부드러움에 이지혁이 고양이처럼 갸르릉대기 시작했다.

"야, 너 뭐하는 거야!"

정해민이 분노에 차 외쳤다.

"왜요?"

"왜 사람 몸을 함부로 만지고 그래!"

"마사지해 주는 거잖아요. 좋아하시는데?"

이지혁은 더없이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최근 혹사로 인해 몸이 말이 아닌 느낌이었는데, 점점 노곤노곤해지는 게 이러다가 맨틀까지 파고들 기세였다.

"헉!"

이지혁은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악마의 현혹에도, 세이렌의 유혹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이지혁을 이렇게까지 만들다니!

이지혁은 의자 뒤에서 자신의 어깨를 주무르던 사람을 발견하고는 기겁했다.

"헐, 너 뭐야?"

김다솜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잘 다녀오셨어요?"

"너, 언제 이런 기술을 익힌 거야?"

"배웠어요."

"배워?"

"네. 가르쳐 주는 데가 많거든요. 그래서 좀 배웠어요. 타이 쪽으로 배워볼까 하다가 그쪽은 힘이 많이 들어가서요."

"으으……."

이지혁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그냥 마사지로 나를 이렇게 만들 수는 없을 텐데?"

그냥 일반적인 평범한 마사지로는 이지혁을 고양이로 만들 수는 없을 것이다.

"아펠드리체 님에게 마법을 배워서요. 회복 마법을 제 나름의 방식으로 응용해 봤어요."

"하, 하이브리드인 건가."

이지혁은 인류의 위대함을 느꼈다.

베라프와는 다른 게 바로 이것이다. 일단 체계가 정해지면 무작정 따라가고 보는 베라프와는 다르게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일단 뭐든 섞고 본다.

게임을 해도 온갖 스킬트리를 다 올려보는 변태 같은 족속들이 나오는 게 한국이고, 동영상 사이트만 보더라도 일반적인 방향을 벗어난 온갖 변태 플레이가 판을 치지 않는가.

회복 마법을 마사지에 접목하다니.

'떼돈 벌겠는데?'

마음만 먹으면 마사지만으로 건물 하나쯤은 올려 버릴 수 있는 무시무시한 기술이 탄생한 것이다.

"이쪽으로."

"어어."

이지혁은 자신의 어깨에 와 닿는 나긋나긋한 손길에 전율했다.

"어, 그런데 난 회복 마법 들어오면 아파야 정상인데?"

"응용만 했어요. 안으로 파고들지는 않을 거예요."

"아!"

그래서인가?

"그런데 안으로 집어넣는 게 효과는 더 좋지 않아?"

"그럼 지혁 오빠가 아프잖아요."

"…그래도 이렇게 마력 컨트롤하려면 힘들 텐데?"

"지혁 오빠 좋으라고 하는 건데요, 뭐. 힘들더라도 이렇지 않으면 의미가 없으니까요."

울컥.

이지혁은 순간 눈물이 흘러나오려는 감정을 느꼈다.

최근 이놈이고 저놈이고 이지혁을 못 부려 먹어서 안달이다. 그 와중에 이지혁이 얼마나 힘든지는 아무도 생각을 해주지 않고 있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그저 잠시만 힘쓰면 끝날 일처럼 보여도 이지혁은 그 잠시의 힘을 쓰기 위해서 엄청난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는 것을 누구도 고려하지 않아주는 것이다.

그런데 김다솜은 이지혁을 위해서 이런 것까지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 세계로 온 이후로 가장 한결같이 이지혁을 위해준 사람은 엄마도 아니고, 예원이도 아니고, 바로 다솜이었다.

"…내가 어리석었도다."

이리 마음 착한 아이를 그동안 왜 무섭다고 피해 왔단 말인가. 사람이 좀 시원할 수도 있는 것인데.

주물주물.

이지혁은 자신의 어깨에서 전해져 오는 시원한 느낌에 무한히 감동했다. 이런 사소한 것 하나에 감동 받는 것이 인간의 삶인 것을!

저 악마 기집애와 용 지지배는 이런 기분을 모르겠지! 인간이 아니니까!

"적당히 주무르지? 너 지금 어디 주무르는 거야?"

아, 저 땅꼬마도 모르겠구나.

"마사지를 하면 원래 여기도 주무르는 거예요."

그러고 보니 얘도 예전보다는 말이 많아졌다.

예전에 비해서는 밝아진 것 같아서 좋아 보이기는 한데, 사람이란 게 정체성이 있는 법이 아닌가. 불과 몇 달 사이에 이렇게 바뀌어도 되는가 싶기도 하고.

'그러고 보면 얘… 불량 청소년 아니었나?'

지금은 어디에서도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성격만 고친다면 확실히 좋은 여자기는 하다. 얼굴도 인간계 끝판왕급으로 예쁜데다가 이지혁에게는 무한정 헌신적이기까지 하지 않은가.

눈이 제대로 박혀 있는 사람이라면 싫어할 수가 없는 타입이다. 다만, 너무 사람이 차갑고 뭔가 무서워서 껄끄러울 뿐이지.

"고마운데, 이제 그만해도 될 것 같은데?"

"네."

김다솜은 조금 아쉬운 얼굴이었지만, 깔끔하게 손을 떼고는 수줍은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데 사무실에는 어떻게 와 있었어? 어떻게 지금 올 줄 알고?"

"오실 거라 생각해서 그냥 기다렸어요."

"헐."

이지혁이 놀란 얼굴로 김다솜을 바라보았다.

딱히 정보도 없었으면서 언제 올지 모르는 자신을 그냥 무작정 기다렸다는 말이었다.

"너 엄청 티 낸다?"

정해민의 견제가 강하게 들어왔다.

에르카나에 아펠드리체라는 굴러온 돌, 아니, 따지자면 예전에 박혀 있던 돌들 때문에 입장이 매우 난처한 그녀로서는 김다솜의 활약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마법인가?"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하며 김다솜을 바라보았다.

체내에 마나가 느껴진다.

"마법을 배운다고는 해도 마나가 없어서 한계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마나는 어디서 난 거지?"

"아펠드리체 님이 실험용으로 쓰라고 나눠 주셨어요."

"그래?"

아펠드리체도 마나가 충분한 상황은 아닐 텐데?

이지혁이 돌아보자 아펠드리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그래도 그 부분 때문에 드릴 말씀이 있어요."

"응."

어투만 들어도 그리 좋은 이야기는 아닐 것 같았다.

"뭐, 그건 일단 좀 쉬고 이야기하자고 지금 당장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해서 큰일 나고 그런 건 아니지?"

"네."

이지혁은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저는 퇴근할게요."

"이제 점심시간인데!"

"그럼 어제 야근 수당 쳐주던가. 출장도 갔다 왔는데 어디서 정규 근무 시간을 들이대나요!"

"편히 쉬십시오."

최정훈은 그 말을 하는 동시에 다른 NDF들에게는 퇴근은 꿈도 꾸지 말라는 듯이 눈을 부라렸다.

"우리도 출장 갔다 왔잖아요!"

"저는 안 다녀왔습니까, 저는!"

"뭐, 딱히 할 일도 없어 보이는데……."

"출장을 다녀왔으면 업무 보고서부터 써야 할 것 아닙니까. 지금 KSF에서 인력이 부족해서 얼마나 난린데 하루를 더 놀려고 그럽니까! 하는 것도 없이 관광이나 갔다 온 주제에!"

"관광이라니!"

이지혁은 등 뒤에서 들리는 투닥거림을 뒤로하고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흐음, 프리덤의 향기."

사옥 밖으로 보이는 반듯반듯한 건물들이 이지혁의 마음을 채워주고 있었다. 평양에서 보이는 짬뽕스러운 건물들에서 느낄 수 없는, 대한민국만의 체취였다.

"자, 오식아."

따라 나온 오식이가 얌전히 이지혁이 채워주는 목줄을 찼다.

"이번에 밥 많이 먹었으니까, 괜히 사고 치면 안 된다? 저 아랫집 식육점 아저씨가 도둑 들었다고 신고하고 난리 났던 것, 내가 알고 있다."

끼이이잉.

"최정훈 씨가 몰래 가서 챙겨주기는 했는데, 그러는 거 아니다. 고기가 먹고 싶으면 말을 하면 되는 거지, 너는 왜 그걸 훔쳐 먹고 그러냐. 여기는 우리 살던 데랑은 달라서 아무거나 보인다고 막 주워 먹고 그러면 안 되는 거야. 알았지?"

컹!

오식이가 기운차게 대답을 하자 이지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런데 니 마누라는 어디 갔냐?"

컹컹!

"같이 살면 마누라지, 인마!"

컹!

"알았다, 알았어. 그런데 진짜 어디 갔지? 아무리 마나를 빼놨다지만 혼자서 덤프트럭 정도는 찜 쪄 먹을 텐데, 아무 데나 돌아다니면 안 되는데……."

별일이야 있겠냐 싶지만, 그래도 신경이 쓰이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럼 가볼까."

이지혁은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면 참 오랜만에 집에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미국에서부터 시작해서 제대로 집에서 쉬어본 적이 언제던가.

"같이 가요."

뒤에서 김다솜이 쪼르르 이지혁을 향해 달려왔다.

"집에 가?"

"네."

"네 오빠는?"

"지금 퇴근 못한데요. 그렇다고 계속 저기에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흠, 그래."

이지혁이 두말없이 김다솜과 함께 집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너는 공부는 좀 해?"

"네."

"오, 진짜 좀 해? 예원이한테 물어본다?"

"물어보지 마세요."

"왜?"

"예원이는 공부 이야기 나오면 경기 일으켜요."

"…미안하다."

하기야 이지혁의 동생인데 공부를 잘할 리가 없었다. 자신 역시 학교를 다닐 때는 찬란한 성적을 유지했으니까.

"유전자가 문제여, 유전자가."

어머니가 들었다면 등짝에 강스파이크를 처날릴 대사를 잘도 하는 이지혁이었다.

"호오."

김다솜이 양손을 모으고 입에 입김을 불어넣었다. 그러고 보니 날씨가 차다.

"손 시려?"

"…아니요."

"주머니에 손을 넣어. 왜 빼고 있냐?"

"네."

김다솜이 아무 말 없이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그래. 미련하게 왜 그러냐. 주머니는 괜히 뚫려 있냐?"

"…죄송해요."

이지혁은 한바탕 설교를 하고는 걸음을 빨리했다. 애가 춥다 하니 빨리 가는 게 맞는 것 같았다.

"너희 집 가는 길이 이쪽이지?"

"…네."

"그래. 그럼 잘 가."

"잘 가세요."

김다솜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음, 그리고……."

"네?"

"나 내일 노는데, 백화점 좀 안 갈래?"

"백화점이요? 뭐하시게요?"

"옷 좀 사야 돼. 이게 좀 해져서."

"…그 옷이요?"

"응. 닳은 게 보이지 않니? 이번에 힘 좀 썼더니 닳은 모양이더라고. 사람이 깔끔해야 하는데."

"……."

김다솜은 새삼스러운 사실을 깨달았다. 사시사철 같은 트레이닝복만 입고 다녀서 그냥 한 벌인 줄 알았더니, 저 트레이닝복이 한 벌이 아니었던 것이다. 여러 종류가 있는데, 바꿔 입고 다니는 것이었다.

"다른 디자인은 안 사세요?"

"이게 제일 무난한데."

"…제가 골라 드릴게요. 이번에만 좀 다른 걸 사보세요."

"그럴까?"

이지혁은 고민하는 눈빛이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안 그래도 한겨울에 이걸 입고 다니니 눈이 영 곱지가 않더라고. 알았다."

"네. 그럼 내일 전화드릴게요."

"응."

이지혁은 방방 뛰며 집으로 뛰어가는 김다솜의 등에 대고 차마 묻지 못한 말을 물었다.

"그런데 네가 내 전화번호는 어떻게 아는 거니……."

모르는 건 있니?

진짜로?

* * *

이지혁은 그렇게 김다솜을 보내고는 집으로 향했다.

"왜 이리 오랜만에 들어가는 기분이 들지?"

집에서 나온 지는 며칠 되지 않았는데 이상하게도 무척이나 오랜만에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생각해 보면 그사이가 워낙에 다사다난해서 그런 듯한 기분도 들었다.

이지혁은 문을 열고 현관 안으로 들어갔다.

"어? 너 왜 여기 있냐?"

오식이의 마누라가 이지혁에게 다가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밥 먹었어?"

끼잉끼잉.

오순이가 배를 뒤집자 이지혁이 톡톡, 두드려 주었다.

"외간 남자 앞에서 배 함부로 까고 그러는 거 아니다."

그러고 보면 얘는 하는 행동이 오식이 이상으로 개 같다는 기분이 든다. 오식이는 개처럼 생기긴 했어도 개의 습성을 보이지는 않는데, 얘는 생긴 것도 개 같고 하는 짓도 개 같다.

"네 남편, 회사에 있다."

말귀를 알아먹었는지 귀를 쫑긋하는 모습을 보니 어쩐지 귀엽다.

'원래 오거 새끼들이 다들 귀여운 건가?'

마나를 회수하여 강제로 만들어낸 모습이라서 차이가 있을 것 같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이리 작고 머리가 커진 모습이라면 새끼 때와 비슷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오거 새끼를 직접 본 적이 없으니 알 수는 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자, 얼렁 가라."

끼잉!

오순이가 몸을 일으키자 이지혁이 당부했다.

"가다가 사람들 괴롭히면 안 된다."

컹!

"목줄 안 맸다고 유기견 센터에 끌려갈 상황이 되면 사람들 다치게 하지 말고 알아서 탈출해라."

컹!

쫄래쫄래 집 밖으로 뛰어 나가는 오순이를 보며 이지혁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쟤… 유기견 센터가 뭔지는 알고 저리 가는 건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 * *

"엄마, 다녀왔어!"

이지혁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새로 이사한 지 얼마 안 된 집이라 들어오는 순간 마음이 편안해진다든가 하는 효과는 없지만, 그래도 집이라는 곳은 인간이 가장 편히 쉴 수 있는 곳 아니던가.

버스나 북한 호텔에서 잠을 자던 이지혁이다 보니 집에 오자마자 몸에 피로가 몰려오는 기분이 들었다.

'이상하네.'

이런 식으로 몸에 피로가 쌓인 것은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일이었다.

베라프에 있을 때는 육체가 언제나 재생되고 리프레시되기에 피로를 느낄 틈이 없었고, 지구로 돌아온 직후에는 일주일 동안 잠을 안 자고 공사장 막일을 해도 피로를 못 느낄 만큼 기쁨에 차 있었으니까.

'힘이 없네.'

최근에 들어서 마나를 엄청나게 먹어 댔는데도 이런 피로를 느낀다는 것은 육체의 부하가 상당하다는 이야기였다.

흑마력이 아무리 지속적으로 육체를 파괴한다고는 하나 그의 에테르 역시 지구로 돌아온 이후로부터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고, 절정의 마력 컨트롤과 에테르로 강화된 육체 보정까지 겹쳐 이제는 더 이상 육체가 자동으로 손상되지 않을 경지까지는 도달해 있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피로감을 느낀다?

어디 한 군데는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는 증거였다.

에르카나와 아펠드리체까지 나서서 어떻게든 유지하려 한 그의 육체가 무너지기 시작했다는 뜻이었다.

"음……."

이지혁의 얼굴이 오랜만에 심각해졌다.

"안 좋은데……."

"아들, 다녀왔어?"

깊이 뭔가를 생각하기도 전에 어머니가 그를 맞아주고 있었다.

"응, 엄마. 갔다 왔어. 예원이는?"

"아직 학교에서 안 왔지. 지금 시간이 몇 신데."

"그렇겠네."

"아들, 배고프지?"

"응?"

이지혁이 볼을 긁었다.

북한에서 차려준 밥을 미친 듯이 퍼먹은 지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배가 고프니 문제였다.

"으응. 엄마, 배고파."

"일단 씻고 있어. 엄마가 얼른 밥 차려줄게."

"응."

이지혁은 등을 미는 어머니의 손길에 욕실로 향했다. 욕실로 걸어가며 이지혁은 자신도 모르게 뒷머리를 긁었다.

'이상한 기분이네.'

뭔가 오늘은 평범하게 퇴근을 하고 평범하게 집에 돌아온 기분이었다.

이지혁이 그날 게이트에 빨려 들어가지 않고 세상이 이리 바뀌지 않았다면 어쩌면 지금쯤 이지혁은 이런 일상 생활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박봉에 괴로워하고 헬조선을 외치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지금과 같은 것들을 고민하며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샤워를 마치고 머리를 털며 밖으로 나오자 식탁 가득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뭘 이렇게 많이 했어?"

"그래도 아들내미가 출장도 갔다 왔는데 엄마가 신경 좀 써야지."

"출장은 뭔 출장이야. 하루 갔다 온걸."

"그게 출장이지."

"그런가?"

이지혁은 궁시렁대면서도 자리에 앉았다.

국을 한술 떠서 입에 넣자 절로 입가에 미소가 그려진다.

"맛있어?"

"엄마는 할 거 없으면 식당하면 되겠다. 내가 북한에서 내로라는 음식은 다 먹어보고 온 것 같은데, 엄마 솜씨 따라가는 사람이 한 명이 없네."

"니 입에만 그런 거야."

"진짜라니까."

어머니가 웃으면서 이지혁의 등을 두드리고는 방 쪽으로 향해 갔다.

"어디 가?"

"옷 빨아야지. 너는 옷을 입고 출장을 다녀왔으면 세탁기에 넣어야지, 또 입겠다고 그걸 또 걸어놓니?"

"안 더러운데."

"엄마 눈에는 더러워."

"헤헤."

이지혁은 밥을 퍼 입에 넣으며 조금은 멍해진 눈으로 식탁을 바라보았다.

'이거였어.'

돌아오고 싶어한 이유.

힘이 들고 괴로워도 마음을 놓고 쉴 곳이 있다는 것.

그 하나의 차이가 이곳과 베라프의 차이였다. 어쩌면 지금의 이지혁은 육체적으로는 과거 이상으로 힘들지도 몰랐다. 베라프에서는 겪지 않아도 되는 지속되는 고통을 지금은 당연한 듯 버텨야 하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이곳이 베라프보다는 훨씬 낫다고 생각되는 이유는 쉴 곳이 있고 그를 진심으로 위해주는 사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에르카나가 들으면 좀 섭섭해하겠는데?'

이지혁은 말없이 어머니가 차려준 밥을 깨끗하게 비웠다.

* * *

"휴우."

최정훈은 진하게 탄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게 뭡니까?"

"아메리카노요."

"그게요? 에스프레소 같은데?"

"좀 진하게 탔어요."

"부부장님도 좀 쉬시긴 해야겠네요. 그동안 너무 고생하셨어요. 피로가 눈에 보이네요."

"그래요? 나름 관리는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살이 빠졌잖아요."

"그건 어쩔 수 없더라고요."

최정훈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러고 보면 참 쉴 틈 없이 달려왔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

블랙 먼데이 이후로 자신을 버리다시피 하고 살아왔지만, 이지혁을 만나고부터는 그전의 삶은 나름 여유가 넘치던 삶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지혁의 출현 이후로는 정말 사무실이 집인 것처럼 살아왔다. 팔자에도 없는 현장 관리까지 하게 되면서 정말 끝도 없는 일에 치여 살아왔다.

"슬슬 결혼도 생각하시고 가정도 이루셔야죠."

"제 팔자에 그게 되겠습니까?"

"부부장님 팔자가 어때서요?"

"제 생각에는 안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결혼이라는 게 어디 제 마음대로 되는 겁니까? 상대가 있어야 할 수 있는 거죠."

"상대요?"

김다현의 눈이 옆으로 돌아갔다.

저 뒤, 상석에 앉아서 모니터를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는 서아영이 보였다.

"…일하고 계신 겁니까?"

"저 표정은 인터넷 쇼핑이군요. 특가라도 떴겠죠."

"할인에 집착할 벌이는 아닌 걸로 아는데?"

"아껴야 부자 되는 거죠."

김다현은 피식 웃고 말았다. 얼굴만 보고도 뭘 하고 있는지 알 정도면서 상대가 없단다.

'총대 매줘야 하나?'

슬슬 나이가 차가는 둘이지만, 서로가 서로를 먼저 어떻게 해볼 생각이 없는 이상은 이대로 쳇바퀴만 돌게 될 것이다.

"제가 문제가 아니죠. 다현 씨도 여자 친구 없잖습니까."

"저요? 저야 언제든 만들려면 만들 수 있죠. 눈에 차는 여자가 없어서 그렇지."

"그래요?"

"에이, 부부장님 눈에야 제가 제 일도 제대로 못하는 얼치기처럼 보이겠지만, 바깥에서 NDF라고 하면 그래도 좀 먹어줍니다. 사실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다들 연봉도 엄청 높은 편이고, 능력자로 쳐도 대한민국 상위 0.1% 안에 드는 사람들이잖아요."

"생각해 보니 그러네요."

그만큼 엘리트가 모여 있는 곳이 NDF였다.

이지혁 때문에 이지혁 전담 뒷정리 요원들처럼 보인다는 게 문제긴 하지만 그건 그들끼리의 감상이었고, 다른 외부인들이 보기에는 대한민국 대표 능력자들처럼 보일 것이다.

'사실 그 말이 맞기도 하고.'

NDF를 처음 설립하려 했을 때의 목적은 그게 맞았다. 중구난방으로 흩어져서 지역 소속으로 활동하는 이들 중에 최고의 능력자들을 한곳으로 끌어모아서 산발적으로 벌어지는 게이트 사태에 대응하는 것. 그것이 최정훈이 처음 만든 NDF의 청사진이었다.

텔레포트 능력자인 정해민을 이용한다면 전국 어디든 빠른 지원이 가능할 것이고, 그걸 통하여 위기에 빠르게 대응하고 희생자를 줄이는 것이 NDF 프로젝트의 시작이었다.

다만, 이지혁이 갑자기 출현한 이후로 NDF만으로 감당할 수 없는 게이트들이 출현하기 시작했고, KSF도 전체적으로 수준이 높아져서 웬만한 게이트에는 자체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하면서 NDF의 입지가 애매해져 버린 것이다.

'입지가 애매해졌다기에는 이상한가?'

대한민국 최고의 단체에서 끝났어야 할 NDF가 국제적 대응 단체가 되었으니 입지 자체는 늘어난 것이지만, 나름 대접을 받아야 할 NDF가 이지혁에게 딸려오는 부록쯤으로 취급 받게 되어버린 것은 슬픈 일이었다.

"하기야 따져 보면 여러분도 나름 엘리트라고 할 수 있는 분들이었지요."

"과거형이 영 거슬리는데요."

"지금도 엘리트지요. 그러네요. 저도 그렇고 말입니다."

워낙 잘난 인간을 옆에 두고 살다 보니 자존감이 쭉쭉 내려갔던 모양이다.

이런 당연한 사실이 새삼스럽다니 말이다.

"그래도 요즘은 좀 안정이 된 것 같아서 편하기는 합니다. NDF 초기에는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요. 이지혁 씨 하나에게 적응하는 것도 큰일인데, 마왕들이 쳐들어오지를 않나, 드래곤이 나타나지를 않나."

"그랬죠."

최정훈도 끔찍하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제는 좀 편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김다현은 말을 하면서도 별로 기대하지는 않는 눈치였다. 가면 갈수록 게이트들을 막아내는 것이 힘겨워지고 있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던 것이다.

힘들게 유지하고 있는 이 균형이 무너지는 순간, 인류의 마지막이 되리라는 것을 그들도 알고 있었다.

"치트키가 있으니 어떻게든 버틸 수는 있을 것 같은데……."

김다현이 고개를 돌려 컴퓨터 화면을 보며 말했다.

"이쪽은 가슴 졸이느라 죽겠는데. 세상은 평온하기만 하네요."

"그 평온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우리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에이, 저는 그렇게 사명감에 넘치는 타입은 아니에요. 돈이나 잘 벌고 먹고살 수만 있으면 그만이죠."

"사실 저도 그렇습니다."

둘은 서로를 마주 보고 빙그레 웃었다.

"그런데 다솜이는 요즘 잘 지냅니까?"

"다솜이요?"

"예. 저번에 사무실에서 봤던 것 같은데……."

"다솜이 내일 지혁 씨랑 쇼핑 간다고 지금 준비하는 것 같던데?"

"쇼, 쇼핑이요?"

"예."

"뭘 사러 가는 겁니까?"

"옷이요."

최정훈의 눈이 흔들렸다.

"설마 이지혁 씨의 옷을 사러 간다는 것은 아니겠죠?"

"맞는 것 같은데요?"

"…만날 똑같은 옷인데 뭘 사겠다고 거창하게 쇼핑식이나."

"그 양반의 생각을 어떻게 알겠어요."

"그, 그건 그렇죠."

최정훈은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간만에 찾아온 이 휴식의 시간이 조금만 더 이어지기를 바라면서.

* * *

"상황은 어떻습니까?"

"글쎄요. 정확하게 말씀드리기는 애매한 상황입니다."

"그게 지금 할 말입니까?"

"들어오는 정보가 한정되어 있는데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지금 저희 쪽뿐 아니라 일본이나 미국이나 중국이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평소에는 이 정도는 아니었잖습니까."

국방부 장관은 눈살을 찌푸리고는 한숨을 쉬었다.

"몬스터 때문이지요."

"몬스터?"

"이번 웨이브 때 대부분의 공작원들이 평양에서 탈출했습니다. 잘못하면 평양이 밀려 버릴 수도 있는 상황인데, 정보를 계속 캐내라고 할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으음……."

통일부 장관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아무리 스파이라는 게 정보를 빼내는 임무를 맡고 있다고는 해도 자신의 목숨을 버려가면서까지 국가에 헌신하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지금은 냉전시대도 아니고, 과거처럼 국가 간의 긴장감이 극으로 치달아 있는 시대도 아니다.

그런 상황에서 공작원들의 목숨을 담보로 한 임무라는 것은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이대로 손을 놓고 보고만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다른 방도가 없으니까요."

"다른 채널은 없습니까?"

"북한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러시아나 중국마저도 관망하고 있는 처지입니다."

"흐음."

국방부 장관은 도무지 이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언론 쪽은 어떻습니까?"

"아직은 냄새를 맡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이번 사태에 북한에서 후퇴한 것은 정보원뿐만이 아니니까요. 북한에 들어가 있던 특파원들도 다들 빠져나온 상태입니다."

"그럼 아직은 시간이 있겠군요."

"북측에서 통신을 통제하고 있어서 그나마 아직 상황이 전파되지 않은 것일 뿐, 중국 측으로 향하는 통신 회선이 복구되는 순간, 상황은 일파만파 커져 갈 것입니다. 미국 측 언론은 이미 반쯤은 눈치를 챈 모양이던데, 한국과의 관계를 고려한 미 정부 측에서 막고 있는 듯합니다."

"막는 것에도 한계가 있을 테니, 이쪽에도 상황이 알려지는 것은 금방이라고 봐야겠군요."

"그렇죠."

"끄응."

국방부 장관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이걸 대통령님께 어떻게 보고드려야 할지."

"있는 그대로 보고하는 수밖에 더 있겠습니까? 딱히 저희가 뭘 잘못한 것도 아니잖습니까."

"국민들이 그렇게 생각을 해주겠습니까? 북한에서 쿠데타가 일어났는데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알리지도 않은 채 대기하고 있었다 하면 당장 야당부터 들고 일어날 텐데요."

"어차피 야당이야 우리가 뭘 해도 똑같이 깔 테니 상관없는 일 아닙니까. 정치가 다 그런 거지요."

"하긴 우리가 반대쪽에 있었다면 더했을 테니."

"장관님!"

그때, 문이 열리면서 보좌관이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인가?"

"박민철 대표님이 면담을 요청하셨습니다."

"박민철 대표?"

박민철이야 야당 대표가 아닌가. 그런 사람이 왜 갑자기 면담을 신청했다는…….

"알았군."

국방부 장관의 읊조림에 최선형 통일부 장관도 얼굴을 굳혔다. 북한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냄새를 맡지 않고서야 뜬금없이 자신에게 면담을 신청할 이유가 없었다.

"언제 보자고 하시던가?"

"지금 청사 앞에서 기다리고 계시답니다."

"끄응."

이건 빠져나갈 구석도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저라고 딱히 무슨 수가 있겠습니까?"

통일부 장관은 신소리를 냈다. 대통령 윤영민은 정치력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사람이다. 이미지가 강하고 청렴한 것은 장점이지만, 온갖 술수가 난무하는 정치판에서 버텨내기에는 정치력이 강하지 못하다. 덕분에 비서실장 박두진이 실질적으로 정계를 컨트롤하고 있었다.

하지만 야당 대표쯤 되어버리면 비서실장의 이름으로 통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대통령 윤영민이 직접 움직인다고 해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사람인데, 무슨 수로 그를 막아선다는 말인가.

"이걸 어찌해야……."

"일단은 둘러댑시다."

"빤히 알고 온 사람인데 둘러대는 게 가당키나 합니까? 괜히 정보를 안 주겠다고 입을 닫고 있다가는 언론에서 터뜨리는 꼴을 눈으로 지켜봐야 할 겁니다."

"으음."

메이저 언론계는 그들의 입김이 아직 먹히고 있지만, 친야당 성향을 띤 언론에서 먼저 사건을 보도하게 되어버리면 메이저 언론에서도 받는 타격이 지대하다.

그럼 그들 역시 원망을 들어야 할 것이다.

"이 상황을 어찌해야……."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하나? 야당이 북한에 대한 정보를 요구하게 되어 있나?"

"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을 보면서 국방부 장관이 놀라 신음을 내고 말았다.

"초, 총재님?"

맞나?

아닌가?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사람 처음 본 것처럼 왜 그러나?"

"아니, 그게……."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송정수가 나이에 맞지 않게 정정하다고는 하나 그건 나이에 비해서였고, 실제로는 예순이 넘은 장년이다.

체격 자체가 왜소한 편은 아니지만 그뿐, 그 나이에 맞는 몸을 갖추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잠시 안 본 사이에 사람이 너무 달라지지 않았는가.

"허, 허벅지 터지겠습니다."

"흐음, 새 옷을 맞춰야 하는데… 시간이 애매하군."

송정수는 바짓단이 터지려고 하는 자신의 양복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명품점에서 비싸게 구입한 옷인데 고스란히 버리게 생겼다.

"어, 어깨는 또 왜 그렇습니까?"

"내 어깨가 어때서 그러는가?"

"사람 하나는 더 넣고 다니시는 것 같은 느낌인데요."

"후후, 그런가?"

송정수가 가볍게 웃더니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국방부 장관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상석을 내주었다.

그가 아무리 장관이라고는 하나 송정수가 있는 자리에서 상석에 앉을 수는 없는 법이다. 대통령이 아니고서야 누가 감히 송정수보다 높은 지위에 있다고 자부하겠는가.

"그 얌생이 놈이 면담을 신청했다고?"

"예, 그렇습니다."

"그 인간은 내가 맡지."

"오, 총재님!"

통일부 장관이 깜짝 놀라 송정수를 바라보았다.

송정수의 경력과 지위, 정치력을 감안한다면 현 야당의 대표가 감히 송정수와 맞상대를 할 수는 없었다. 송정수가 나서주기만 한다면 봉합은 문제도 아닌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송정수는 정부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해왔다. 국민들의 눈이 있어서 나름 협조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는 하지만, 송정수와 윤영민이 견원지간이라는 것은 정치권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그런 송정수가 현 정권의 방패막이를 자처하고 나섰다는 것은 굉장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주시겠습니까?"

"뭐 어려운 일이라고."

송정수는 어깨를 쫙 펴며 뒤로 몸을 기댔다.

드드드득.

그 순간, 양복의 실밥이 터져 나가며 송정수의 터질 것 같은 허벅지와 뽕을 넣은 게 아닌가 의심하게 만든 어깨가 구릿빛 맨살을 드러냈다.

"허억."

국방부 장관이 그 광경을 보고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도 군인이라 육체의 강건함으로는 나름 자신이 있었다. 지휘관이다 보니 현장을 뛰지는 않아도 뱃살이 나온 군인은 군인이 아니라는 신념하에 지금까지도 꾸준하게 몸을 만들어왔다.

하지만 뜯어진 옷 사이로 드러난 송정수의 몸은 그런 국방부 장관의 자부심을 일순간에 부숴 버리기 충분했다.

"야, 약이라도 하셨습니까?"

"약?"

"스테로이드라든가……."

"허허."

송정수가 걸레 조각이 되어버린 옷을 걷어내며 헛웃음을 지었다.

"약이고 뭐고 전화해서 옷이나 좀 가져오라고 하게. 이런 꼴로야 밖에도 못 다니겠군."

"바로 지시하겠습니다."

통일부 장관이 전화기를 들고는 비서에게 기성복 구입을 주문했다. 특대 사이즈로.

"이거, 민망하구만."

송정수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얼굴도 젊어지신 것 같습니다?"

"그런가?"

"카메라 받으시면 송정수 총재님 성형설이 검색어에 뜨겠습니다만."

"끄응, 노출은 좋은 일이지만, 그런 걸로 노출되고 싶지는 않구만."

송정수는 한숨을 쉬고는 말을 이었다.

"북한의 상황은 파악하고 있나?"

"전혀 모르겠습니다."

"아무래도 그럴 테지. 대통령의 의중은 어떠한가?"

"의중이요?"

"방향에 대한 지시가 있었을 것 아닌가."

"그게… 딱히 내려온 지시가 없습니다. 워낙 정보가 없다 보니 일단 정보를 모아 오라는 지시 말고는……."

송정수가 못마땅한 얼굴로 혀를 찼다.

"그런 식으로 일을 하니 밑의 사람들이 갈피를 못 잡는 거 아닌가. 정보가 있으면 누가 방향에 대해 고민을 하나. 정보가 없으니 방향이 잡히지 않는 것인데, 이럴 때일수록 일관된 정책의 방향과 태도를 지시해야 할 것을."

'제 말이 그 말입니다.'

'그렇습죠.'

차마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지만, 송정수 총재의 말이 맞다는 것은 두 사람 모두 공감하고 있었다.

"자세한 것은 내가 대통령과 대화를 해볼 테니, 일단은 정보를 더 모아보게. 방향은 복지부동일세."

"복지부동이요?"

"움직이지 마. 움직여서는 안 되네. 어떻게 움직이더라도 피해가 더 커.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아무것도 이해 못한 것처럼 멍청한 척하란 말일세."

"아……."

"지금은 현명한 것보다 멍청한 것이 더 낫네. 알고도 입 다물었다고 할 바에야 몰랐다고 해버리란 말일세. 어차피 장관 다음에 할 짓도 없지 않은가."

"…그렇습니다."

"그럼 괜히 쇼맨십에 휘둘리지 말고 윗선에 힘을 실어주게. 그게 애국 아니겠는가."

"그러겠습니다."

송정수의 말에 둘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송정수가 윤영민에게 힘을 실어주라는 말을 하니 그 진정성이 확 와 닿고 있었다.

"그리고 국방부 장관."

"예."

"이지혁 씨와 NDF에 관한 모든 자료가 필요하네. 기밀인 줄은 알고 있네만, 내 따로 허락을 받을 테니 자료를 좀 준비해 주게."

"이지혁 씨 말입니까……."

국방부 장관이 곤란하다는 듯이 말끝을 흐렸다. 아무리 송정수라고는 하나 야당 총재라는 지위 외에 정부에서 공식적인 직책을 맡고 있지 않은 사람에게 1급 국가기밀에 대한 정보를 유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내가 허락을 받는다고 하지 않았는가. 지금 달라는 게 아니라 허락을 구하고 나서 볼 테니, 미리 준비를 해달라는 말일세."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지혁 씨는 왜?"

"아무래도 지금까지 내가 뭔가를 잘못 생각하고 있던 것 같아."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이지혁 씨가 국가를 지탱하는 요소가 되는 게 아니었어."

"예?"

"이지혁 씨에게는 국가가 없어도 되지만, 국가에는 이지혁 씨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국가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그야……."

"권위적인 태도는 모두 버리게. 일단은 그 양반을 최대한 서포팅하고 돕는 것이 우리의 일일세."

국방부 장관은 눈만 끔뻑였다.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이 정말 그가 아는 송정수가 맞는지도 의문이 들었다. 송정수는 능력자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런 이가 이지혁에 대한 전면적인 지원을 고려하다니.

"의심할 것 없고, 의아해할 것 없네. 상황을 아는 이라면 누구나 나와 같은 결정을 할 걸세. 내가 조금 늦은 것뿐이지."

송정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윗선에 보고를 해주겠나? 야당 애송이 놈은 조금 기다리라고 하게. 난 일단 대통령부터 만나야겠어."

"아, 알겠습니다."

비선 연락을 넣으러 밖으로 뛰어가는 통일부 장관을 보며 송정수는 비서가 사 올 양복을 기다렸다.

"…기성복을 입을 수 있을까?"

꿈틀대는 자신의 근육을 보며 송정수가 한숨을 내쉬었다.

* * *

이지혁은 자신의 옷을 보며 어색함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 이게 뭐야?"

그냥 보자면 빤한 옷차림이었다.

하얀 셔츠와 청바지, 그리고 가벼운 블루종 정도를 입었을 뿐이다.

하지만 몇 달이나 트레이닝복만 입고 다닌 이지혁에게는 무척이나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면 처음 현대로 돌아왔을 때는 나름 옷가게에서 옷도 사 입고 했는데, 어느새 트레이닝복에 젖어버렸다.

"어, 어색하다."

맞지 않는 옷을 입었다는 관용어가 이리 어울리는 상황도 흔치 않을 것이다.

"왜 이리 어색하지?"

이지혁은 거울을 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잘 어울리는구만!"

"엄마, 아무래도 이건 아닌 것 같아."

"그럼 또 쫄쫄이 입고 나가겠다고?"

"쫄쫄이 아니거든? 스판덱스거든? 요즘은 스키니가 대세인 거 몰라?"

"오빠, 스키니 유행 지난 지가 삼만 년이야."

"…그래?"

"언제 적 이야기를 하는 거야."

이지혁은 시무룩해서 입을 쭉 내밀었다.

"그런데 왜 이걸 입고 나가야 하는 건데?"

"오빠, 다솜이랑 옷 사러 가기로 했다면서?"

"응."

"쇼핑 가는데 그렇게 입고 가면 점원들이 상대를 안 해준다."

"상관없는데? 내 옷 내가 고르는데 점원이 뭔 상관이야?"

"그리고 같이 다니는 사람이 자살하고 싶을 정도로 창피해."

"……."

그 정도는 아니라고 항변하고 싶었다.

트레이닝복이 뭐 어때서!

"이게 뭐 어때서! 메이커에서 파는 거잖아."

"……."

예원이는 더 이상 이지혁과 대화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는 듯 썩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여튼 그렇게 입고 나가."

"불편한데."

"더 불편하게 만들어줘?"

"에이!"

이지혁이 입을 삐죽 내밀고는 엄마를 보며 말했다.

"엄마!"

"무슨 말 할지 알 것 같으니까, 그 주둥아리를 다물렴."

어머니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 아들, 이렇게 입혀놓으니 얼마나 훤칠하고 사람 같으니."

그럼 그전에는 사람 같지 않았나요, 어머니?

"옷걸이가 워낙 좋아서 대충 추리닝이나 입고 돌아다녀도 괜찮기는 했다만, 그래도 이왕이면 사람답게 입고 다니지 않겠니?"

"…죄송합니다."

이지혁은 고개 숙여 사죄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들었다.

"그래, 아들. 사람답게 살자."

"옙."

이지혁은 빠르게 몸을 돌렸다. 어서 집을 빠져나가야 한다.

"오빠, 올 때 아이스크림."

"…박스째로 주둥아리에 처박아주마!"

"그럼 비싼 걸로!"

"끄응."

한마디를 안 져요, 한마디를!

여동생 하나 있으면 좋겠다고 하는 것들이 저것을 데리고 한 달만 살아봐야 하는데.

이지혁은 한숨을 쉬면서 현관을 나섰다.

"옷 사러 가는 게 뭐 이리 거창해?"

이럴 줄 알았으면 혼자 갈 것을.

예원이, 저것은 언제 다솜이랑 그렇게 친해져서 정보를 쏙쏙 빼온단 말인가.

"끄응."

이지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밖으로 나섰다. 얼른 쇼핑을 하고 돌아와야 한다.

"어?"

대문을 나선 이지혁이 주변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뭐예요?"

언제 왔는지 군인들이 좌우로 정렬해서 서 있었다.

"이지혁 씨 나오셨습니다!"

바로 앞에 서 있던 군인이 소리를 치자 저 끝에서 견장을 단 군인 하나가 후다닥 달려왔다.

"안녕하십니까?"

"안녕이고 뭐고……."

이지혁이 머리를 긁고는 말했다.

"여기서 왜 이러고 계세요?"

"아, 그건 제가 설명드릴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일단 이 전화 받으시죠."

"네?"

이지혁은 간부가 내민 전화를 받았다.

- 이지혁 씨, 국방부 장관입니다.

"아, 에, 안녕하세요. 이 사람들은 다 뭐예요? 제가 무슨 죄졌나요?"

-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최근에 이지혁 씨에 대한 호위가 부족하다는 의견이 나와서 특공대를 집 주변에다 배치했습니다.

"…제정신이세요?"

- 저도 이러고 싶지 않았습니다. 호랑이 주변에 토끼를 호위랍시고 배치하는 기분도 들고 해서 영 찝찝하기는 한데, 제 의견이 아니라 더 상부에서 내려온 말이라 무작정 무시할 수도 없는지라…….

"상부요? 대통령님이요?"

- 아닙니다.

"그럼요?"

- 그게… 음, 송정수 총재님이 지시하셨습니다.

"헐."

이지혁이 입을 쩍 벌렸다.

"아무리 여당 총재라고는 해도 직접적으로 이렇게 군부에까지 지시를 내리실 수 있는 거예요?"

- 당연히 안 되는 일입니다마는, 권고의 형태로 정책에 도움을 주는 것은 여당의 역할이기도 한지라. 게다가…….

"게다가?"

- 무시했다가는 맞아 죽을 것 같은 기세라…….

이지혁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 아저씨… 근육이 터지려고 했지.

이지혁조차 그 근육을 보고 감탄했을 정도인데 일반인이 보면 어떻겠는가. 환갑을 넘긴 사람에게 육체적인 위협을 느낀다는 사실이 이상하긴 하지만, 사실이 그러했다.

"때리려고 하던가요?"

- 그건 아닌데, 말씀을 하실 때마다 뭐가 꿈틀꿈틀하는 것이…….

"…고의는 아니네요."

뭐랄까, 의도치 않고서도 타인을 위협하게 되어버린 몸뚱아리가 앞으로 송정수의 정치 인생에 도움을 줄 것인지, 아니면 반대로 약점이 될 것인지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수많은 정치판을 눈으로 봐온 이지혁으로서도 도무지 짐작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여튼 알겠으니까, 이 사람들 좀 물려주세요."

- 안 됩니다.

"내가 알아서 한다니까요.

- 송정수 총재께서 말씀하시기를, 적국이 이지혁 씨를 직접 노리지는 못해도 이지혁 씨의 가족을 노리는 방법으로 국가에 대한 실망을 유발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흐음?"

- 그리고 그 말이 사실이기도 합니다. 이지혁 씨는 하루에 최대 열 시간 이상 집을 비우시는 분입니다. 그사이에 집에 무슨 일이 벌어진다면 어떻게 합니까.

"그야……."

아펠드리체도 있고, 에르카나도 있고, 오식이도 있는데…….

생각해 보니 요즘 걔들 다 같이 다니는구나. 오식이는 NDF 청사랑 집을 옮겨 다니고.

누군가 마음을 먹고 집을 일주일만 감시한다고 해도 공백이 생기는 시간대를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나름 장치를 해두기는 했는데요."

- 안전하다고 확신하십니까?

"끄응."

저렇게 나온다면 할 말이 없다.

- 별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하시는 건 압니다. 이지혁 씨가 보기에는 애들 장난 수준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코끼리가 자신의 엉덩이를 볼 수는 없는 법 아닙니까.

"…비유가 상당히 이상하네요."

- 그런 건 저희에게 맡기시면 됩니다. 송정수 총재의 말씀에 저희도 느낀 게 많았습니다. 지금까지 다들 이지혁 씨를 꺼려하기만 했을 뿐, 국가의 재원이라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보호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런 거 바란 적 없는데……."

- 대통령 각하께서도 크게 동조하셨습니다. 앞으로는 이지혁 씨의 전반적인 생활 전부를 보호하기 위해서 저희도 애를 쓸 터이니, 조금 불편한 점이 있다 하더라도 감수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아니, 그게……."

-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아, 네."

이지혁은 국방부 장관의 간곡한 어조에 그렇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건너편에서 이렇게 간곡하게 나오는데 아니라고 잘라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느냔 말이다.

"흐으음."

이지혁은 끊어진 전화기를 앞으로 내밀었다.

"통화 끝나셨습니까?"

"아, 네."

잽싸게 폰을 받아 든 간부가 뒤로 슬쩍 물러나더니, 이지혁에게 경례를 붙였다.

"다녀오십시오."

"넵."

이지혁은 어색하게 경례를 받고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이상한 기분이네.'

한 제국의 수장 자리까지 올라간 적도 있지만, 그때 받던 경례와 지금 받는 경례는 느낌이 좀 달랐다.

'하긴 그때야 뭐…….'

능력과 지위에 굴복하기는 했지만, 인간이 아닌 것을 바라보는 듯한 경계심은 항상 있었다. 베라프는 이지혁에게 그런 곳이었으니까.

아무리 노력하고 아무리 애를 써도 결코 극복할 수 없는, 선천적인 장벽이 가로막고 있는 세상이었다.

"모르겠다."

이지혁은 군인들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 나와 폰을 들었다.

"어디야?"

아침부터 와 있는 문자를 통해 김다솜에게 전화를 걸었다.

- 오빠, 저 사무실이에요.

"어디? NDF?"

- 네.

"거기 왜 가 있어?"

- 아까 전부터 나가 있었는데 연락이 없으시기에 너무 추워서 잠깐 들어왔어요.

"언제부터 나와 있었는데?"

- 얼마 안 됐어요.

"그러니까 언제?"

- 점심쯤일 거예요.

지금이 대충 저녁이 되어가는 시간이니까…….

이지혁은 고개를 젓고 말았다. 김다솜 성격에 곧이곧대로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이 추운 날씨에 아침부터 나와 기다리다가 얼어 죽을 것 같으니 사무실에 잠시 들른 모양이었다.

목소리에 당황이 묻어났다.

"거기 있어 내가 갈게."

- 아니에요! 제가 바로 나갈게요.

"됐어. 게이트 열고 가면 되는데 뭐."

이지혁은 전화를 끊고 사무실로 통하는 게이트를 열었다.

"성격 참."

일찍 나왔으면 전화나 한 통 할 것이지, 나오실 때 연락 달라는 문자 하나 남겨두고 캠핑할 필요까지는 없지 않은가.

이지혁은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며 혀를 찼다.

* * *

"응?"

게이트에서 나온 이지혁은 어색한 사무실 공기에 당황했다.

"오, 오셨습니까?"

"오셨습니까?"

다들 단체로 삐죽이며 이지혁에게 고개를 숙였다.

"뭐지, 이 반응은?"

최정훈을 제외하고는 소 닭 보듯 그를 바라보던 NDF들이 아닌가. 그리고 최정훈도 인사야 했지만 그리 반가이 반겨주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이 짠 듯한 반응은 다 뭐란 말인가.

"저건 뭐예요?"

서아영이 앉아야 하는 자리에 휘황찬란한 원목 책상이 들어와 있었다.

"…이지혁 씨 자립니다."

"넵?"

이지혁이 뭔 소리를 하느냐는 듯 되묻자 최정훈이 어색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이, 이지혁 씨 자리라구요."

"그게 뭔 소리예요? 제 자리는……."

이지혁은 자신의 자리에 머리가 거꾸로 설 기세로 앉아 있는 서아영을 보고는 식겁하여 고개를 돌렸다.

자칫 눈이라도 마주쳤다가는 당장에 목을 따버리겠다는 기세로 씩씩거리고 있는 서아영을 보니 제아무리 이지혁이라도 쫄 수밖에 없었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고 하지 않던가.

"무, 무슨 일이에요?"

"오셨습니까?"

그때, 문이 벌컥 열리더니 웬 중년인이 안으로 뛰쳐 들어왔다.

"응?"

중년인은 우다다 뛰어오더니 이지혁의 앞에서 90도 폴더 인사를 했다.

"오늘은 출근하지 않으실 줄 알았는데, 나오셨군요."

"누구세요?"

"새로 온 KSF 원장입니다."

"아, 그래요?"

"네. 앞으로 NDF와 KSF를 총괄하여 관리하게 될 겁니다. 아무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제가 뭐 할 게 있나요. 그런데 저 책상은 아저씨가 하신 건가요?"

"하하하, 진짜 일하는 사람은 따로 있는데 놀고먹는 것들이 큰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으니 일이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지요."

"…놀고먹긴 했지."

"뭐?"

"아니, 내가 놀고먹었다고, 내가!"

서슬이 퍼런 서아영의 목소리에 이지혁도 손을 내저어 버렸다.

으드득!

이 가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지혁은 절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앞으로는 제가 NDF를 관리할 테니, 이제까지의 부조리함은 다 사라질 겁니다. 그 외에도 개선해야 할 점이 있다면 제게 말씀해 주십시오."

"좋은 말 같기는 한데… 이거, 누가 시킨 거예요?"

중년인이 살짝 좌우 눈치를 보더니 이지혁에게만 들리도록 나직하게 속삭였다.

"송정수 총재께서 특별히 당부하셨습니다."

이지혁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근육영감님이 오버를 시작한 모양이었다.

"영감님 어디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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