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66화 (66/118)
  • [■] 미쳤다고 하려면 이 정도는 해야지 [■]

    ─────

    "으아아아……."

    총참모장 박용휘는 반쯤 넋을 잃은 얼굴로 하늘 위를 바라보았다.

    시커먼 게이트가 입을 쩌억 벌리더니, 바닥을 향해 거대한 몬스터의 탁류를 울컥울컥 토해내기 시작했다.

    "뭐, 뭐이네, 이게!"

    박용휘는 기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지금 있는 몬스터들만도 공화국이 괴멸할 위기인데, 거기에 몬스터가 더 추가되고 있는 것 아닌가.

    "도대체 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네?"

    박용휘의 외침은 애처롭기만 했다.

    지금 있는 몬스터들도 감당할 수가 없다.

    그런데 거기에 몬스터들이 추가되면…….

    그 순간, 박용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게?"

    그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크르르르르.

    카아아아아아!

    바닥으로 떨어진 몬스터들이 주변을 가득 메운 몬스터들을 일순 경계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그도 잠시.

    흉성이 폭발한 몬스터들이 주변의 몬스터들을 향해 과격하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크르르르륵!

    몬스터들이 두 패로 나뉘어 서로 물어뜯기 시작했다.

    "낄낄낄낄."

    이지혁이 그 광경을 보며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먹어라."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몬스터들이 서로 죽이고 있는 것 같아 보이겠지만, 이지혁의 눈에는 전혀 다른 광경이 보이고 있었다.

    이지혁이 소환한 몬스터와 같은 곳에서 온 놈들은 뒤로 슬금슬금 물러나고 있고, 이지혁이 모르는 몬스터들은 이지혁이 소환한 몬스터들과 피나는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잘하고 있군."

    아무리 이지혁이라고는 하지만 본인이 전혀 알지 못하는 종류의 몬스터들에게까지 종속의 인을 박을 수는 없다. 최소한의 이해도는 필요한 법이다.

    그러니 쓸모없는 것들은 제거할 뿐.

    "달링."

    "응?"

    "쟤들도 해보면 끌어들일 수 있지 않을까?"

    "귀찮게 뭐하러."

    "흐응……."

    에르카나는 입술을 핥았다.

    전력의 낭비라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더 이상 저지하지는 않았다.

    그녀 역시 마족. 피와 살이 튀고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는 광경은 꽤나 유쾌한 장면이 아니던가.

    "게다가 우리 애들이 너무 굶었어."

    "…달링 쪽 애들이 더 많이 잡아먹히고 있는 것 같은데?"

    "쟤들도 곧 우리 애들이 될 거니까."

    "역시 달링. 똑똑하다니까."

    최정훈은 그 말을 들으며 실실 웃었다.

    "아주 쿵짝이 작렬이시네요."

    최정훈의 생각에는 지금 이 순간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바로 자신이었다.

    "아이고… 게이트 열지 말라니까."

    몬스터가 인류에게 실질적으로 위협이 되기 시작한 지금, 이지혁이 게이트를 통해 대규모의 몬스터를 소환할 수 있다는 것을 타국에 알려주는 것은 전혀 이득이 없는 짓이었다.

    인간이란 개념에 좌우되는 동물이다.

    지금의 이 광경 하나로 이지혁이 게이트를 막아내는 수호자에서 게이트 자체를 열 수 있는 인간 병기로 바뀌어 버릴 수가 있다.

    그나마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나라를 미국 하나로 한정하여 여파를 막아왔건만, 한국과 딱히 사이가 좋다고 할 수 없는 동북아 쪽 나라들에게도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누가 알겠는가.

    '당장이야 별일 있겠냐마는…….'

    지금은 어느 국가든 이지혁이 필요하다.

    그러니 당장 이지혁에게 이를 드러낼 나라는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게이트 사태가 정리되면 정리될수록 이지혁이라는 존재는 위험 요소로 보이게 될 것이다.

    "내가 못살아."

    "하, 진짜 잔소리."

    "이게 잔소립니까, 이게? 이게 잔소리라구요?"

    "눼이, 눼이."

    이지혁이 파리를 쫓듯이 최정훈을 향해 손을 휘휘 젓고는 고개를 돌렸다.

    "이기는 쪽이 우리 편이지."

    * * *

    크롸롸롸롸롸!

    몬스터들이 서로를 물어뜯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아아!

    울부짖는 짐승들의 하울링이 귀를 찢을 듯 퍼져 나갔다.

    붉은 피가 바닥으로 흘러 연못을 이루고, 잘려 나간 촉수와 다리, 그리고 살점들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흐아아……."

    리진철은 멍하니 그 광경을 보다가 자리에 주저앉았다.

    집채만 한 몬스터들이 서로를 뜯어먹는 광경은 인간의 의식으로 감당할 수 있는 장면이 아니었다.

    순간적으로 눈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이다.

    지옥이 있다면 이런 광경일까?

    "미쳤어……."

    이런 광경을 만들어낸 자도 정상은 아니었다. 겪으면 겪을수록 저 이지혁이라는 놈이 대체 어떤 놈인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 리진철이었다.

    "대장 동지, 피하셔야 합니다!"

    "피해?"

    어디로?

    어디로 피해야 한단 말인가. 세상 모두가 몬스터들로 가득한데.

    "이러다가 큰일 나십니다."

    "…제기랄."

    리진철이 몸을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가 달리는 방향은 아군 쪽이 아니었다. 리진철은 전력을 다해 이지혁을 향해 뛰어갔다.

    "어?"

    최정훈은 자신들 쪽을 향해 달려오는 리진철을 보며 당황했다.

    "저 인간은 또 왜 저래?"

    안 그래도 골치 아픈 게 한두 개가 아닌데…….

    혹시나 뭔가 사고라도 칠까 봐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그 광경이 신난 사람도 있던 모양이다.

    "나이스!"

    박성찬이 쾌재를 지르더니, 앞으로 나갔다.

    "최정훈 씨."

    "예?"

    "보고 없이 이쪽으로 오는 거 위반 맞죠?"

    "아, 그렇죠."

    "그럼 저 짓거리를 우리 측을 향한 도발이나 위협이라 받아들인다 해도 저쪽에서는 할 말 없는 거죠?"

    "…아니, 거, 그렇게까지……."

    "맞아요? 틀려요?"

    "맞기야 하죠."

    "그럼 됐어요."

    박성찬이 만면에 미소를 띠더니 양 주먹을 꽉 움켜잡았다.

    "개새끼. 안 그래도 계속 거슬렸는데, 잘됐다."

    저기요, 성찬 씨.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성찬 씨가 그렇게 굴면 이쪽도 겁난단 말입니다.

    에헤이, 그 근육 좀 내려놓고! 근육에 힘 좀 뺍시다! 뭔 근육이…….

    "오, 멋진 몸이로군."

    송정수 총재가 박성찬의 몸을 보더니 감탄을 했다. 그와 동시의 그의 몸에 자리한 근육들도 꿈틀대기 시작했다.

    "…여기가 전쟁터인가, 미스터코리아 예선인가."

    정체성이 뒤흔들리고 있었다.

    "리지혁이!"

    바로 앞까지 달려온 리진철이 박성찬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이지혁을 불렀다.

    "넹?"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너 대체 뭔 짓을 하는 거네?"

    "막아주고 있잖아요."

    "저게 지금 막는 거네?"

    "그럼?"

    이지혁의 말이 슬슬 짧아지기 시작했다. 얼굴에 귀찮음을 가득 담은 이지혁이 되레 물었다.

    "그럼 뭘 어케 해줘?"

    "……."

    리진철은 이를 갈았다.

    그도 알고 있다. 이지혁이 아니었다면 그들은 진즉에 밀려났을 것이다. 평양은 아마 이때쯤 몬스터들에게 잔인하게 유린당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더불어 한 가지 더 느껴지는 것은 이지혁의 악의와 장난기였다.

    "마음만 먹었으면 이미 처리할 수 있던 것 아니네?"

    "봐, 쟤 눈치 빠르다니까?"

    이지혁이 최정훈을 보며 낄낄 웃었다.

    최정훈은 그 웃음에 동조하지 못하고 먼 하늘만 바라보았다.

    "사람을 가지고 놀고 싶네?"

    리진철이 이를 갈았다.

    "너희 남조선 에미나이들이 아무리 우리보다 잘산다고 해도 우리도 자존심이 있네. 이렇게 사람을 놀림거리로……."

    "아, 거참, 시끄럽네."

    이지혁이 귀를 후비더니 입으로 훅, 불고는 말했다.

    "그래서 뭘 어째 달라고? 사설 빼고 본론만 말해. 나는 바쁜 사람이라고."

    그 바쁜 사람만 아니었으면 이리 양심에 켕기지는 않을 텐데.

    최정훈이 민망한 얼굴이 되어 자꾸 애꿎은 바닥만 찼다.

    "그러니까……."

    "참 뻔뻔하네."

    "……."

    이지혁이 얼굴에 비웃음을 담았다.

    "제 나라 하나 지킬 힘도 없어서 남에게 손 벌리고 있는 주제에 성심성의껏 도와주지 않는다고 화를 내다니. 북한에서는 그따위로 교육을 하는 모양이지? 아가야, 삶이라는 건 기브 앤 테이크란다. 너희가 내게 준 것이 없는데, 내가 너희를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이유가 있나?"

    리진철이 이를 갈았다.

    그 역시 이지혁에게는 손을 벌리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아직 다친 사람도 없구만, 뭘 그렇게 열을 내는지 모르겠네. 진짜 열을 내게 만들어줘?"

    순간, 리진철의 등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놈은 진짜 할 놈이다.'

    대화를 하다 보니 알 수 있었다.

    이놈은 지금까지 그가 봐온 인간과는 전혀 달랐다. 그 역시 공화국에서 살아오면서 인간 같지 않은, 진정 괴물이라 느껴지는 종자들을 수 없이 봐왔다.

    하지만 이지혁은 그런 인간들과도 궤를 달리하고 있었다.

    인간의 관념에 속박되지 않는다기보다 애초에 그냥 인간의 거죽을 쓴 다른 무언가를 보는 듯한 느낌.

    경직된 체제 안에서 누구보다 눈치를 보고 살아야 했던 그였기에 이지혁이라는 얼빠져 보이는 인간 안에 잠재된 괴물을 누구보다 잘 알아볼 수 있었다.

    "…미친놈."

    "낄낄낄낄."

    이지혁은 낄낄대며 웃다가 말했다.

    "아직은 아니야, 아직은 아니지."

    무슨 말을 하는 걸까?

    "미쳤다고 하려면 이 정도는 해야지."

    그와 동시에 이지혁의 양손에 시커먼 마나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에르카나."

    "알았어, 달링."

    에르카나가 바닥을 박차더니,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뭐하려는 거지?"

    최정훈이 멍한 눈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허공에 몸을 띄운 에르카나가 그 매혹적인 육신을 뒤트는가 싶더니, 이내 칠흑과도 같이 검은빛을 사방으로 뿌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빛이 몬스터들을 향해 내려앉았다.

    크르르르…….

    카아아…….

    몬스터들의 울부짖음이 잦아들기 시작한다.

    격렬하게 미쳐 날뛰던 몬스터들이 진정제라도 맞은 마냥 둔중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더니, 다들 허공에 떠 있는 에르카나를 바라보았다.

    "나이스."

    이지혁이 양손에 뭉친 마나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뻗어라!"

    촤아아아아아아아!

    이지혁의 양손에서 수백줄기의 촉수가 비산했다.

    "히익!"

    징그럽기도 하거니와, 놀랍기도 한 그 광경에 리진철이 몸을 떨었다.

    저 인간은 대체…….

    이지혁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촉수들이 몬스터들에게 날아가더니, 그들의 목에 종속의 인을 박아 넣기 시작했다.

    탈진한 상태에서 현혹마저 걸린 몬스터들이 종속의 인에 함몰되기 시작했다.

    크롸롸롸롸롸!

    끼이이이이이익!

    몬스터들이 고통에 울부짖는 소리가 북녘 땅을 가득 울렸다.

    피거품을 물고 바닥을 구르며 괴로워하는 몬스터들의 모습을 보며 리진철은 반쯤 넋을 놓아버렸다.

    이건 숫제 게임이 안 된다.

    공화국을 파멸로 몰아넣을 뻔한 몬스터 떼이건만, 이지혁은 무슨 개미 떼라도 상대하는 것마냥 굴고 있었다.

    개미굴에서 나오는 개미들을 손가락으로 찍어 누르듯이 말이다.

    "자자, 포기해라."

    이지혁이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낄낄댔다.

    그러자 울부짖는 몬스터들이 바닥을 구르며 흙먼지를 자욱하게 뿜어내기 시작한다.

    "흠……."

    이지혁이 그 광경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된 것 같은데?"

    "저항이 거세지는 않지? 내 덕분인 줄 알아야 해, 달링."

    "오냐."

    어느새 바닥으로 내려선 에르카나가 이지혁의 어깨에 매달렸고, 이지혁은 답지 않게 에르카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확실히 편하긴 하군."

    최정훈이 다급하게 물었다.

    "뭐, 뭘 하신 겁니까?"

    "몰라서 물어요?"

    "모르니까 묻지요."

    "그럼 보면 되겠네. 저기 봐요."

    최정훈이 이지혁의 말에 흙먼지 사이로 드러나는 몬스터들을 향해 안력을 돋웠다.

    * * *

    '뭐가 편하다는 거지?'

    흙먼지 사이로 몬스터들이 드러나고 있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딱히 이상한 점을 찾을 수 없었다. 몬스터들이야 아까부터 질릴 정도로 보고 있었으니까.

    "…어?"

    하지만 이내 이상한 점을 찾아낼 수 있었다.

    '움직이지 않아?'

    몬스터들이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서로를 물어뜯으며 날뛰던 놈들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얌전히 그 자리에 대기하고 있었다.

    "설마?"

    최정훈의 동공이 지진을 일으켰다.

    "저거, 테이밍하신 겁니까?"

    "테이밍이 뭔데요?"

    "이지혁 씨가 몬스터를 부리듯이요."

    "아, 그렇죠. 아, 테이밍. 뭔 말인가 했네."

    영어가 짧은 걸 이런 순간에서 자랑하지는 말아야 할 것 아닌가.

    "비슷하긴 하죠."

    "저 많은 놈들을 다?"

    "그건 오해예요."

    "네?"

    이지혁이 씨익 웃었다.

    "저걸 다 현혹할 수는 없죠. 일단 가능한 수만큼만 해뒀어요. 나머지는 에르카나의 현혹에서 아직 풀리지 않은 거죠."

    "그럼 어떻게 합니까?"

    "간단하죠."

    이지혁이 씨익 웃더니 손가락을 튕겼다.

    딱!

    그 소리가 신호였다.

    크롸롸롸롸롸!

    크아아아아아아!

    일순 몬스터들이 자신의 주변의 몬스터들에게 달려들어 날카로운 이빨로 목줄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큭."

    최정훈이 깜짝 놀라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먹으면 되는 거죠."

    으드드득.

    으드득.

    살점이 뜯어져 나가고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린다.

    최정훈은 자신도 모르게 양 팔로 자신의 몸을 감쌌다.

    아무리 몬스터라지만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는 광경을 보는 게 유쾌하다면 그 사람은 절대 정상이 아닐 것이다.

    "낄낄낄낄."

    "아, 좀!"

    "왜요?"

    최정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 인간이야 원래 정상이 아니니까.

    주변의 다른 사람들도 얼굴이 파랗게 질려 있다. 아무래도 맨 정신으로 보기에는 힘든 광경이었다.

    "하아……."

    최정훈이 가슴을 부여잡았다. 심장이 덜컥대는 기분이 든다.

    "꼭 저렇게 해야 하는 겁니까?"

    "그럼?"

    "그냥 죽일 수도 있는 거잖아요. 꼭 저렇게 잡아먹어야 하는 겁니까?"

    "아니, 뭐, 안 그래도 되는데……."

    이지혁이 머리를 긁었다.

    "그런데 쟤들도 살아 있는 생물인데 뭘 먹기는 먹어야죠. 쌀 준다고 먹는 것도 아닌데, 고기를 먹여야 할 것 아니에요."

    "…그야 그렇죠."

    "그럼 쟤들을 먹일까요? 아니면 소나 돼지? 소나 돼지가 쟤들한테 잡혀 먹는 꼴을 보면 그런 말씀이 입에서 안 나오실 텐데."

    그 말에 최정훈의 머릿속으로는 귀여운 돼지와 소가 몬스터들에게 뜯겨 먹히는 장면이 절로 연상되었다.

    "탁월하신 선택이시군요."

    "그렇죠?"

    "착한 도살 인정합니다."

    아무리 식용으로 쓰이는 가축이라 해도 몬스터들에게 뜯겨 먹히는 걸 생각하니, 차라리 같은 몬스터들끼리 먹고 먹히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으……."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광경은 여전히 눈을 돌리고 싶을 정도로 끔찍했다. 최정훈은 고개를 숙이고 몇 번 심호흡을 한 뒤에야 다시 정면을 바라볼 수 있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서야 먹고 먹히는 지옥 같은 광경이 끝났다.

    "다 된 겁니까?"

    "음, 착한 애들만 남았네요."

    이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통제하에 있는 겁니까?"

    "보여 드려요?"

    "아뇨. 절대로 보고 싶지 않네요."

    "흐음, 재미있을 텐데……. 아쉽네요."

    이지혁이 몇 번 입맛을 다셨다.

    최정훈은 눈앞에 보이는 몬스터의 대군을 보면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저 많은 몬스터를 모두 통제할 수 있게 된 건가?'

    이지혁이 몬스터를 다룬 것은 처음이 아니고, 이전에 다루던 몬스터들도 그 수가 결코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의 몬스터와 지금 이지혁이 얻은 몬스터는 그 질이 달랐다. 이전의 몬스터 떼는 NDF들이라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다. 덕분에 마왕들이 쳐들어왔을 때도 고기 방패 이상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이지혁이 손에 넣은 몬스터들은 NDF들이 단체로 달려들어도 어떻게 하지 못할 정도로 강력했다. 이지혁 없이 그저 몬스터를 풀어놓는 것만으로 한 국가를 초토화시키고도 남을 전력인 것이다.

    '보통 일이 아니야.'

    이지혁이 더 강해지는 것은 최정훈 입장에서 나쁠 것이 없었다. 하지만 사람은 무언가를 손에 넣으면 사용하고 싶어지는 것이 인지상정이고, 귀차니즘 만렙인 이지혁이라면 직접 마법을 쓰는 것보다는 몬스터들을 통해서 일을 해결하려는 경향이 강해질 것이다.

    몬스터를 이용하여 몬스터와 싸우는 이지혁이 다른 이들에게 어떻게 보일 것인가.

    '어떻게 말리는가가 관건이겠군.'

    최정훈은 일이 늘어났다는 것을 직감했다.

    자신이 귀찮아질 것 때문에 이러는 것이 아니었다. 이지혁이 귀찮아질까 봐 이러는 것이다.

    "일단 저 몬스터들을 어떻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죠."

    이지혁이 손짓을 하자 몬스터들의 중앙에 거대한 게이트가 생겨났다.

    "오식아!"

    크르르르르르.

    어느새 원래의 모습을 회복한 오식이가 몬스터들의 가운데에서 포효했다.

    크아아아아아아!

    그러자 몬스터들이 일제히 게이트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결코 빠르지 않은 움직임으로 게이트 안으로 몬스터들이 하나둘 사라져 간다.

    "…오식이를 저렇게 쓰는 거군요."

    "몬스터들은 사람 말을 못 알아먹으니까요. 제가 몬스터 말을 배우려고도 해봤는데, 성대의 문제랄까……."

    "그럼 몬스터들끼리는 말이 다 통하는 겁니까?"

    "중간중간 둘 다 되는 애들이 통역해요."

    "……."

    거참, 이상한 세계일세.

    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그렇다니 알았다고 할 수밖에.

    최정훈은 몬스터들이 배수구로 흘러 들어가는 물처럼 게이트 안으로 사라지는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결코 느린 속도가 아닌데도 몬스터의 수가 워낙에 많다 보니 다 들어가는 데 한참은 더 걸릴 것 같았다.

    "대충 상황 종료된 것 같습니다."

    사태를 이해하고 있는 NDF들은 몬스터들의 움직임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북한 측은 도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지 못해 여전히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저 괴물 놈들이 대체 어디로 가는 거네?"

    육군 사령관 김룡성이 어리둥절한 눈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저대로 보내도 되는 겁네까?

    "그럼?"

    "…또 쳐들어오면 어떡합네까?"

    "지금 당장도 막을 수가 없는데 나중을 생각해서 더 싸워보자고 하는 거네?"

    "아……."

    "차라리 칼을 물고 엎어지라. 자살할 방법이야 수도 없이 많은데 꼭 몬스터한테 찢겨 죽는 수를 써야겠네?"

    "죄송합네다."

    "제길."

    김룡성이라고 마음이 편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미 몬스터들이 그들의 손을 떠났다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 믿었던 인민 무력 여단도 몬스터들에게 생채기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는 광경을 그의 눈으로 똑똑히 보지 않았던가.

    "어쨌든 살았지 않네."

    김룡성이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총참모장 박용휘는 그리 쉽게 생각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뭐가 어찌 돌아가는 건가?'

    이지혁과 최정훈이 쑥덕쑥덕대는 것 같더니, 몬스터들이 자기들끼리 물어뜯고 잡아먹다가 이제는 게이트 안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게이트는 분명 그가 알던 것과는 다른, 시커먼 게이트였다.

    '이지혁의 독문 게이트가 검은색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지혁은 전 세계적으로 가장 강한 능력자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지만, 게이트를 다룰 수 있는 능력자라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그리고 그가 듣기에 이지혁이 다루는 게이트는 일반적인 몬스터 게이트와는 다르게 검은색이라고 했다.

    한데 지금 몬스터들 사이로 보이는 게이트가 검은색이 아닌가.

    그럼 이지혁이 이 몬스터들을 다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옮기고 있다는 뜻이었다.

    "괴물 놈들을 다룰 수 있다는 건가?"

    다른 것은 다 이해할 수 있었다.

    그를 가장 큰 충격으로 몰아넣은 것은 저 몬스터들이 이지혁이 원하는 대로 순순히 움직이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성적으로야 저 몬스터들보다 이지혁이 강하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사람이란 것은 이성적인 동물이 아니다.

    핵미사일 한 발의 발사권을 가지고 있는 절대권력자는 물론 두려운 존재다. 하지만 인간은 눈앞에 있는 일만 명의 군대를 더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실질적으로 누가 더 강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느냐 묻는다면 첫 번째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같은 이치로 이지혁이 저 몬스터들을 다 합친 것보다 강할지도 모른다는 자각은 있지만, 이지혁이 저 몬스터들을 다 다룰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터지기 시작했다.

    '너무 위험해.'

    단순히 공화국에만 위협이 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지혁이라는 존재 자체가 인류에게 위협이 되고 있는지도 몰랐다.

    '미사일은 통할 것인가?'

    일반적인 미사일이 통할까?

    생물학 무기는?

    전술핵은?

    혹여 인류와 이지혁이 대립하게 된다면, 인류는 어떤 방법으로 이지혁이라는 능력자를 상대해야 할까?

    박용휘의 눈이 심각해졌다.

    그때,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머리 굴리는 소리가 들리는데."

    "……."

    이지혁의 목소리였다.

    박용휘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아저씨."

    이지혁이 낮은 목소리로 박용휘를 불렀다.

    "예, 예. 동무, 말씀하시라요."

    "제가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왔는지 아세요?"

    박용휘는 대답하지 못했다. 모르기도 하지만, 지금 저 질문이 그의 대답을 원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저는 눈치가 엄청 빠르거든요. 그래서 저한테 악의를 품은 사람은 귀신같이 찾아내요. 그 사람들이 다들 지금 어디 있는 줄 아세요?"

    "……."

    박용휘의 등을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통하지 않아.'

    공화국은 전 세계 어디보다 위험한 곳이지만, 반대로 전 세계 어디보다 안전한 곳이기도 했다.

    내부적으로야 언제나 위협과 문제가 산적해 있지만, 외부적인 영향을 가장 받지 않는 곳 중에 하나다.

    미국 대통령이 공화국 내의 누군가에게 앙심을 품었다고 해도 다른 나라와는 달리 그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수 없는 곳이다.

    암살 역시 마찬가지이고.

    하지만 지금 박용휘는 지금껏 자신을 보호해 주던 공화국이라는 장벽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꼈다.

    그도 이제 이지혁이라는 인간이 얼마나 위험하고 얼마나 두려운 존재인지 알았다.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공화국의 이름과 병력, 체제, 그 어느 것도 그를 보호해 주지는 못할 것이다.

    "제, 제가 무슨 마음을 먹었다고 그러십니까?"

    "조심해요."

    "…절대 아닙니다, 리지혁 동무!"

    "나는 사람의 말을 믿지 않아요."

    "아, 아니라지 않습네까!"

    "그런데 눈은 믿죠."

    박용휘의 눈이 흔들렸다. 아무런 감정 없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이지혁의 눈을 마주한 그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지혁은 한참 동안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박용휘가 그 압박에 이기지 못하고 그 자리에 쓰러지려는 찰나, 이지혁이 씨익 웃었다.

    "그래요. 사람을 그렇게 적대적으로 바라보면 안 되죠. 내가 다 도와준 건데. 그죠?"

    "그, 그렇습네다."

    급변한 이지혁의 태도에 박용휘가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이제 뭐 다 끝났으니까."

    이지혁이 마지막 몬스터가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는 말했다.

    "밥이나 먹으러 가죠. 비싼 걸로."

    박용휘는 수명이 십 년은 줄어든 기분으로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 * *

    "그럽시다. 밥이나 먹으러 가시지요."

    박용휘는 결국 반쯤은 자신을 놓아버렸다. 그가 고민하고 걱정한다고 해서 달라질 게 있는 부류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 버렸기 때문이다.

    '무섭기도 하고.'

    박용휘는 진심으로 이지혁이 무서웠다.

    그저 그가 강하기 때문이라든가, 그가 박용휘쯤은 손쉽게 제거할 수 있는 힘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그 정도의 힘을 가진 이들은 수도 없이 많이 보아왔다.

    공화국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원래 그런 것이니까.

    하지만 이지혁은 근본적으로 무언가가 달랐다.

    '사람인가?'

    인간성이 말살되었다든가, 사이코패스라든가 하는 게 아니었다.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것 같다는 미적지근한 느낌이 아니라 정말 근본부터가 인간이 아닌 무언가로 이루어져 있는 것 같았다.

    마치 인간이 아닌 종류의 무언가가 필사적으로 인간을 흉내 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달까?

    "…총참모장 동무."

    어느새 육군 사령관 김룡성이 그에게 다가와 말을 건넸다.

    "뭐이네?"

    "이게 뭐 어찌 된 겁네까? 끝난 겁네까?"

    "…그걸 나한테 물어보면 어떻게 하네. 사령관이 판단할 문제 아니메."

    "도통 뭐이가 어드렇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어서 그럽네다. 우르르하더니 쾅쾅쾅하고, 이제는 다 사라져 버렸지 않습네까?"

    "나한테 물을 게 아니라 남조선 동무들한테 물어보라. 나야 뭘 알갔네."

    박용휘는 신경질적으로 말을 돌려 버렸다.

    무력하기도 하고, 짜증이 나기도 한다. 눈으로 모든 것을 보았음에서 사태를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을 굳이 그의 입으로 말해야 한다는 말인가.

    김룡성이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최정훈들을 바라보았다.

    "에……."

    정인수는 이지혁에게 먼저 확인을 했다.

    "상황이 정리된 거 맞습니까?"

    "헐? 계셨어요?"

    "…예."

    "어디 계셨어요? 코빼기도 안 보이던데?"

    "여기서 제가 얼쩡대 봤자 뭐 도움이나 되겠습니까? 그냥 차에서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현명한 거죠?"

    "물론이죠."

    어색하게 웃는 정인수를 보며 이지혁도 마주 웃었다.

    "잘하셨어요. 상황은 다 정리됐어요. 제가 또 뭐 할 거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와……."

    최정훈은 정인수에게는 친절한 이지혁을 보며 분노를 뿜어냈다.

    "왜 저는 그리 다정하게 안 대해주시는 겁니까!"

    "평소 하는 짓을 생각해 봐요."

    "제가 뭘요!"

    "어떻게 하면 편하게 해줄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사람하고, 어떻게 하면 좀 더 굴려 먹을까를 고민하는 사람을 어떻게 같이 놓고 비교를 해요."

    최정훈의 입이 조개처럼 다물어졌다.

    "개도 자기를 좋아해 주는 사람이 누군지는 아는 법이죠! 하물며 저는 사람인데!"

    "사람은 맞죠?"

    "시비 거시는 거예요?"

    "한 번씩 의심이 돼서요."

    이지혁과 최정훈이 투닥거리기 시작하자 정인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김룡성에게 다가갔다.

    "사령관님."

    "오, 정인수 동무."

    "이지혁 씨에게 확인한 결과, 상황은 종료되었다고 합니다."

    "그럼 그 괴물 놈들은 다 어디로 간 거요?"

    "그건 저도 정확하게 모르겠습니다. 능력자 개인의 능력에 대해서는 따져 묻지 않는 것이 이쪽의 불문율이라서요."

    "그렇디?"

    김룡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한다면 더 이상 그도 물을 것이 없었다.

    "그런데 정말 끝난 거겠디? 이랬다가 일이 또 터지면 내 모가지가 영 멀쩡하지 않을 것 같아서 묻는 기니까 오해 말라."

    "우선은 저희도 바로 복귀하지 않을 테니, 일이 다시 터진다면 다시 출동하겠습니다."

    "그래준다면야 우리야 든든하지 않갔네."

    김룡성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는 손을 내밀어 정인수와 악수를 나누었다.

    "말을 듣자하니 남조선에서는 정 대령이 곧 책임자급으로 올라간다고 하던데, 그 말이 맞네?"

    "제 나이와 계급을 감안할 때, 책임자라는 자리에는 어울리지 않지요. 다 헛소문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네. 능력만 있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 아니갔어? 우리 최고사령관 동지께서 나이가 많아서 그 자리에 있는 건 아니듯이 말이야."

    "듣고 보니 맞는 말 같습니다."

    여기서 아니라고 하면 북한을 모욕하는 꼴이 되어버릴 것이다. 정인수는 바로 말을 바꾸어 김룡성에게 동조했다.

    "그렇디. 그럼 앞으로도 볼 일이 종종 있겠구만. 앞으로도 잘 부탁하디. 좀 도와달라."

    "제가 필요하시다면 언제든지 달려올 것입니다."

    정인수는 형식적인 말로 대화를 끝내려 했다.

    하지만 김룡성의 입장에서는 앞으로도 언제 또 이지혁의 힘이 필요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남한의 군사 핵심 책임자 중 하나인 정인수와 끈을 만들어놓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는지 그를 쉽게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피곤하실 텐데, 뒷말은 가서 밥이나 먹으면서 하자."

    박용휘의 만류에 김룡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그 생각은 못했습네다. 빠르게 준비하도록 하디요."

    "그래."

    정인수의 눈에 피와 살점이 가득한 대지가 들어왔다.

    이 무지막지한 광경을 만들어냈으면서도 기적적으로 민간인이나 군인에 대한 피해는 전무하다시피 했다. 포를 쏘다가 자체적으로 불발이나 터진 탓에 죽은 이들을 제외한다면 희생자는 없다고 해도 좋았다.

    '무시무시한 거지.'

    결국 NDF도, 인민 무력 여단도 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 모든 것을 이지혁 혼자서 해결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갈수록 이지혁 씨에 대한 의존도가 늘어나고 있다.'

    처음 이지혁이 등장했을 때만 해도 이렇지는 않았다. 그런 탓에 정인수는 조금 복잡한 심정이었다.

    강력한 능력자의 출현은 환영할 일이지만, 강력한 개인의 출현은 현대 사회에서는 절대 환영할 만한 일이 아니다.

    "밥 먹으러 안 가요?"

    "가셔야죠."

    정인수는 빙그레 웃었다.

    '그래도 이 사람이라서 다행이다.'

    정인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 * *

    부르르릉.

    버스는 평양을 향해 달렸다.

    전장으로 향할 때와 한국에서 북한으로 넘어올 때의 긴장된 분위기에 비하면 한결 부드러워진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하나 달라지지 않은 게 있었다.

    푸르르르르르.

    이지혁은 신나게 코를 골아 제꼈다.

    "어쩜 이렇게 코도 귀엽게 골까?"

    "제정신이세요? 이게 귀여워요?"

    "넌 안 귀여워?"

    정해민은 살짝 고민하는 듯하더니,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이, 인정."

    에르카나가 그것보라는 듯이 웃더니, 이지혁의 볼을 꾹, 찔렀다.

    "아웅!"

    이지혁이 파리를 쫓듯이 팔을 휘젓자 에르카나가 깔깔거리며 즐거워했다.

    "그만 괴롭혀요."

    "하지만 이 자는 얼굴을 보면 괴롭히지 않을 수가 없는걸."

    "평소에도 그렇게 괴롭혀요?"

    "아니."

    에르카나가 어깨를 으쓱했다.

    "달링이 잘 때는 소유권을 주장하는 막돼먹은 도마뱀이 있어서 평소에는 못 건드리지."

    "와……."

    예전에 들었으면 정말 기분이 나쁠 일이었는데, 지금 이 상황에서 들으니 다행이라 느껴지는 건 왜일까?

    "아펠드리체 님이 큰일 하시네요."

    "그러게 말이야."

    에르카나가 볼을 부풀렸다.

    그 모습마저 섹시하게 느껴지는 것을 보면, 남자들이 에르카나에게 정신을 못 차리는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여자인 내가 봐도 이렇게 이쁜데.'

    이지혁의 눈에도 에르카나는 아름답겠지.

    나름 아이돌 출신으로 어디에도 미모로는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해 온 정해민조차도 에르카나와 나란히 앉는 것은 부담이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누군가 사진이라도 찍는다면 미녀와 오징어라 이름이 붙겠지.

    "그런데… 앉으면 자네요."

    "피곤하니까."

    "…그렇게 피곤할 일이 있었나?"

    에르카나가 혀를 찼다.

    "이래서 인간들이란."

    "왜요?"

    "잘 들어라, 못생긴 인간."

    "못생긴은 빼고 말하죠. 나도 인간들 중에서는 나름 예쁜 축이란 말이에요."

    "그럼 잘 들어라, 인간 중에서는 나름 예쁜 못생긴 인간."

    "…그냥 못생겼다고 해요."

    "인간이 흑마력을 사용한다는 것에 과도한 육체적 부담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겠지?"

    "물론이죠."

    NDF의 다른 능력자들이 흑마력을 주입 받을 때마다 반쯤 죽어나던 것을 몇 번이나 봐온 정해민이다. 그 정도의 지식이야 당연히 있었다.

    "특히나 달링의 경우는 훨씬 심해. 아무래도 흑마력의 사용량이 다르고, 육체가 마력에 찌들어 있는 정도가 다르니까. 다른 이들의 몇 십 배에 해당하는 고통을 감내해야 하지. 너희가 그 고통을 정면으로 받는다면 바로 쇼크사할걸?"

    "그 정도예요?"

    "몰랐어?"

    "하지만 평소에 능력을 사용하면서도 매번 낄낄대던데."

    "그야……."

    에르카나가 손을 뻗어서 이지혁의 볼을 쓰다듬었다.

    "알다시피 우리 달링이 보통 사람이 아니잖아."

    "흐으음."

    "평범한 인간과 달링을 비교한다면 차라리 육체적이거나 마력적인 부분은 차이가 적다고 할 수 있어. 실제로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부분은 정신력이지. 달링에게는 내 현혹조차 통하지 않으니까."

    "뭐가 대단한 건지 모르겠네요."

    "차라리 아메바와 대화를 하는 게 덜 답답할 것 같군."

    "뭐예요?"

    정해민은 부들부들했지만, 이지혁이 잠들어 있는 동안 에르카나와 대립각을 세우는 것은 그녀에게 전혀 이로울 것 없는 일이었다. 유사시에 이지혁이 구해줄 수 없으니까.

    "하지만 아메바보다는 귀엽네. 인정할게."

    "칭찬인지 욕인지……."

    정해민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여하튼 그러니까 지금 지혁이가 엄청 피곤하다는 거죠?"

    "당연하지."

    "으음……."

    "너희 인간들은 아무짝에도 도움된 게 없잖아. 달링 혼자서 다 한 거지."

    "그러는 에르카나 씨도 딱히 도움된 건 없잖아요."

    "그럴 수밖에. 나는 달링을 만나겠다고 목숨 같은 마력을 모두 마계에다 두고 왔거든."

    "……."

    "사랑 앞에서 그런 건 다 하찮은 거야. 그걸 아니까 우리 달링도 나를 이뻐라 하는 거고."

    정해민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창피하지도 않아요? 그런 말을 자기 입으로 하는 게?"

    "왜 창피하지? 인간들은 이상하다니까. 자기감정을 말하는 게 왜 창피한 거지?"

    "돼, 됐어요."

    정해민은 에르카나와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런 사람이랑 앞으로 계속 같이 지내야 한다니.'

    그걸 생각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왔다.

    "힘들겠지."

    에르카나가 이지혁의 볼을 쓰다듬었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너무 많은 걸 겪었어. 그러니 달링이 멋진 거지만, 한편으로는 안됐다는 생각도 들긴 해."

    "악마답지 않은 말이네요."

    "용족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뭐."

    에르카나의 시선을 받은 아펠드리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의외인 건… 이 남자, 인간에게는 인기가 더럽게 없었는데, 이 세계에서는 나름 잘 먹히는 타입이라는 거지. 생긴 것 때문에 그런가?"

    "잘생기진 않았는데."

    "그게 어디야. 그쪽 동네에서는 괴물 취급 받았는데."

    "왜요?"

    "베라프에는 황인종이 없어."

    "아……."

    조선에 처음 백인이 왔을 때 도깨비 취급을 받았던 걸 생각하면, 이지혁이 겪었을 고초도 익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게 많은 걸 겪고도 인간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게 달링의 대단한 점이지. 포기를 모르는 남자거든."

    "흐으음……."

    정해민은 이지혁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그러고 보니 쟤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세상은 어떻게 됐을까?'

    옆에 있어서 실감하지 못하고 있지만, 어쩌면 이지혁은 이 세상을 구원하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푸르르르르르.

    코 고는 모습은 영 그렇게 보이지 않지만 말이다.

    * * *

    파티는 화려했다.

    최정훈이 생각하는 북한에 대한 이미지와는 전혀 동떨어진 모습이었다. 건물의 인테리어 자체는 조금 고풍스러운 모습이지만, 덕분에 되레 품격이 있어 보인다고 해야 하나?

    '품격 좋아하시네.'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는 벽면과 한눈에도 비싸 보이는 골동품들이 인민의 고혈이라는 생각을 하면 품격은커녕 다 부숴 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 정도였다.

    '아니, 팔아야지.'

    부수면 돈이 날아가잖아.

    "음식은 입에 맞으십네까?"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총참모장 박용휘가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최정훈은 즉시 얼굴을 영업용으로 바꾸었다.

    전투는 끝났지만, 이제 더 살벌한 전쟁이 시작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맛있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매번 먹고 싶을 만큼이나요."

    "하하하, 어려울 것 뭐 있겠습네까? 공화국에 몸을 담으면 되는 거디요."

    "제가 이곳에 몸을 담는다고 매끼 이런 것을 먹을 수 있겠습니까?"

    "물론입네다. 당은 최정훈 동무의 능력을 매우 높게 평가하고 있습네다."

    "그건 영광입니다."

    최정훈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저도 가족이 고국에 있는 관계로 안타깝게도 공화국과 함께할 수는 없겠군요."

    "저런. 남자가 가족에 연연하다 보면 큰일을 하지 못하는 법입네다."

    "게다가 제가 없으면 통제가 안 되는 사람이 하나 있기도 하구요."

    "리지혁 씨 말입네까?"

    "예."

    박용휘는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것 역시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지 않습네까? 리지혁 씨도 같이 오면 그만이지요."

    "후회하게 되실 겁니다."

    "그게 뭔 소리요?"

    최정훈은 방긋 웃으며 이지혁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테이블에 앉아서 눈앞에 있는 음식 접시들을 모조리 비워내고 있는 이지혁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워낙 자유로운 사람이라 공화국과는 맞지 않는 사람입니다."

    "남조선과는 잘 맞다고 하고 싶은 겁네까?"

    "우리나라 역시 이지혁 씨를 감당하지 못해서 허리가 휘청이고 있는 중입니다."

    "하하하, 엄살이 심하십네다."

    "엄살요?"

    최정훈은 가만히 박용휘를 바라보았다.

    "이번에 저희가 오기 전에 청와대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신다고는 하지는 않으시겠죠?"

    "무슨 소리신지?"

    "그 정도의 정보력은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흐흠."

    박용휘는 딱히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침묵은 긍정인 법 아닌가.

    "처음에는 몰랐습네다. 이번에 보고가 들어와서 알게 된 거디요."

    "이지혁 씨에 대한 관심이 늘어서 관련 정보를 열람해 보신 것은 아니구요?"

    "그게 중요합네까?"

    "물론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점은… 이지혁 씨는 일국의 대통령을 옆집 아저씨 정도로 취급한다는 거지요. 아니, 사실 그 정도만 되어도 바랄 게 없겠습니다. 보통 옆집 아저씨에게 틱틱대지는 않으니까요."

    "흐음……."

    "공화국에서 그런 일을 했다가는 이지혁 씨가 죽든가, 아니면 공화국이 파탄이 나든가… 둘 중 하나가 되어버릴 겁니다. 어느 쪽으로 결론이 나든 총참모장님에게 이득은 없습니다."

    박용휘는 즉시 말을 바꾸었다.

    "농으로 한 말을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시는 것 아닙네까?"

    "죄송합니다. 제가 유머 감각이 좀 없어서요."

    "공화국이 아니더라도 타국 역시 리지혁 동무를 탐낼 텐데, 괜찮겠습네까?"

    "이젠 탐내는 나라가 많이 줄었습니다."

    "어째서?"

    "감당이 안 되니까요."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았다.

    "이지혁 씨를 겪어본 나라에서는 귀화시켰을 때 감당해야 할 리스크가 얼마나 큰지 아는 겁니다. 처음에는 다들 적극적으로 나섰지만, 뒤에는 다들 발을 뺐죠."

    "하지만 그들 역시 리지혁 씨가 필요한 것은 사실 아닙네까."

    "그렇죠."

    "반드시 필요한 사람을 리스크가 있다고 해서 손 뗄 수는 없는 것 같은데, 내 생각이 틀렸소?"

    "지금 대한민국이 그 역할을 하고 있는 거죠."

    "그건 또 무슨 소리디요?"

    "쉽게 설명하자면 지금 대한민국은 외주 업체입니다."

    "외주?"

    "용병이라는 거죠."

    "아!"

    박용휘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야 동포이기도 하고 정치적 이해도 있으니 적당한 가격에 넘어온 거지만, 타국에서는 공화국에서 받은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금액을 받습니다. 덕분에 지금 대한민국은 역대 최고로 호황을 누리고 있죠."

    "흐음……."

    "미국에서 벌어온 돈을 보면 이지혁 씨는 거의 일인 국가 수준입니다."

    "그런 걸 내게 말해줘도 되는 기요?"

    "알고 계시잖습니까."

    박용휘가 미묘하게 웃었다.

    "우리 측 정보를 너무 과대평가하디 마시라요."

    "딱히 비밀도 아닙니다. 되레 미국에서는 자신들이 준 돈을 사방에다 알려서 애매한 국가들이 달려들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 정도는 줘야 쓸 수 있으니, 괜히 손대지 마라. 급할 때 우리가 쓸 거니까'라는 개념이죠."

    "미제 놈들은 그래서 안 되는 거요."

    최정훈은 딱히 동조하지도 반박하지도 않았다.

    "여튼 그래서 타국에서는 우리에게 이지혁 씨의 관리를 맡기는 대신에 관리비를 지급하는 거죠. 우리는 그 관리비와 일당을 받고 이지혁 씨를 파견하는 거구요."

    "국가가 받는 돈에 비해 리지혁 씨가 받는 돈이 너무 적은 거 아니오?"

    "설마 총참모장님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습니다."

    "후후, 공화국에 있다 해서 자본주의에 대한 이해가 없는 것은 아닙네다.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백전백승인 법이디요."

    "적죠, 적습니다. 문제는 이미 이지혁 씨는 개인의 만족을 다 채워 버렸다는 거지요. 그 이상의 돈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돈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네까? 주면 다 좋아하는 거디."

    "그렇긴 한데, 저분이 좀 특이하잖습니까."

    "흐음, 그렇긴 하디요."

    박용휘가 보기에도 이지혁은 남다른 사람이었다.

    아깝고 아쉽지만, 가까이하기에는 부담스러운 사람.

    '뭐라고 보고를 드려야 하는가.'

    이미 윗선에서는 이지혁에게 접촉하라는 명이 내려온 상황이다. 아주 접촉을 안 해보기는 뭐하고,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려 해봤자 무슨 말이 돌아올지 빤한 상황이었다.

    까라면 까는 것이기는 하지만, 결과가 빤한 일은 하고 싶지 않은 것도 사람의 심정이니까.

    "최 동무가 고생이 많소."

    "고생이랄 게 있겠습니까. 덕분에 제가 얻는 것도 많으니까요."

    박용휘는 가만히 최정훈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권력 관계를 파악하는 것에 그보다 민감한 사람은 없다. 이지혁은 절대갑이지만, 이지혁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고 있는 사람은 누가 뭐라 해도 최정훈이었다.

    "그런데……."

    "예?"

    "남조선에서는 밥을 잘 안 먹이오?"

    "……."

    미친 듯이 음식을 퍼 넣고 있는 이지혁을 보고 있자니 절로 최정훈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원래 저런 분이라……."

    "원래? 원래 밥을 저리 먹는단 말입네까?"

    "…오해하지 마십시오. 국가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지극히 개인적인 성향입니다."

    "나도 그리 생각은 하고 있습네다마는……."

    그래도 저건 너무하지.

    '눈을 의식하지 않는 건가?'

    보통은 아무리 식욕이 돋는다고 해도 다른 이의 눈치를 조금은 보기 마련인데, 이지혁에게는 그런 개념이 아예 없는 느낌이었다.

    '공화국에서 버틸 수 있는 종류가 아니야.'

    박용휘는 이 순간 이지혁에 대한 미련을 깔끔하게 버렸다. 괜히 영입했다가 이지혁이 당과 충돌이라도 벌인다면 누가 이기든 간에 공화국은 파멸이었다.

    폭탄의 성능이 아무리 고성능이라고 해도 뇌관을 끼워놓은 폭탄을 끼고 살 수는 없는 법 아닌가.

    "다음에도 도와줄 수 있겠습네까?"

    최정훈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이지요."

    * * *

    우걱우걱.

    이지혁은 눈앞에 보이는 음식들을 쓸어 담기 바빴다.

    "좀 천천히 먹어!"

    "천… 처이 무따보……."

    "아, 아냐. 말하지 말고 그냥 먹어."

    정해민은 사방으로 비산하는 음식물을 보며 기겁하여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이지혁은 억울했다.

    '천천히 언제 다 먹어.'

    소모한 마력이야 복원이 불가능하다고는 하지만, 체력과 정신력은 복원을 해야 한다. 그리고 지금 그가 가장 쉽게 체력과 정신력을 복원할 수 있는 방법은 칼로리의 섭취였다.

    문제는 이제 이지혁의 육체는 다른 이들과는 차원이 다른 소모량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고, 일반인들의 열 배에 달하는 음식을 먹어 대도 순식간에 소화가 되어버린다는 점이었다.

    천천히 그 양을 채우려 든다면 하루 종일 밥만 먹고 있어야 할 것이다.

    꿀꺽꿀꺽.

    바로 옆에 탑처럼 쌓여 있는 콜라 한 병을 가볍게 원샷한 이지혁이 트림을 크게 하고는 정해민을 보며 항의했다.

    "나라고 좋아서 이리 먹고 있는 것 아니거든?"

    "…그래."

    "아니, 진짜 그런 거 아니라고."

    "알았다니까."

    뭔가 억울한 느낌이었다.

    저벅저벅.

    그때, 그들을 향해 다가오는 이가 있었다.

    김룡성과 박용휘가 만들어낸 암묵적인 분위기 때문에 지금까지는 이지혁의 주변으로 접근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드디어 하나가 나타난 것이다.

    "어? 왔어요?"

    그 사람은 이지혁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리진철이 의자를 끌어서 이지혁의 앞에 앉았다.

    "…잘도 처먹는군."

    "그럼 좀 드시든가."

    "아직도 현장에서 정리한다고 고생하는 동포들이 있는데 음식이 입으로 넘어가네?"

    "내가 왜 그걸 신경 써야 하는데요?"

    "…신경 쓸 필요 없지."

    촤아악.

    순간, 리진철이 성냥을 꺼내더니, 입에 문 담배에 불을 붙였다.

    "헐?"

    이지혁이 경악하여 그 광경을 보았다.

    "그, 그렇구나."

    이곳은 북한!

    실내 금연의 개념이 없는 곳이었던 것이다.

    "천국인가?"

    이지혁이 새로운 발견에 환희했다. 그 역시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하지만 리진철이 그보다 먼저 자신이 가진 담배를 이지혁에게 내밀었다.

    "한 대 피우라."

    "땡큐."

    이지혁은 거절하지 않고 담배를 입에 물었다. 리진철은 자신의 담배를 이지혁에게 대주었다. 불을 붙인 이지혁이 새하얀 연기를 허공으로 뿜어냈다.

    "하, 좋다."

    "실내에서 담배를 피우다니! 야만인!"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는 법."

    이지혁은 당당했다.

    "이봐, 리지혁이."

    리진철이 담배 연기에 휩싸인 채로 물었다.

    "어찌하면 그리 무지막지하게 강해질 수 있네?"

    "노력하면 돼요."

    "내 노력이 부족했다는 말이네?"

    "아뇨. 충분한 것 같은데요."

    "그럼 나와 너의 차이는 무엇이네?"

    "시간."

    리진철의 눈썹이 꿈틀댔다.

    "시간?"

    "네. 막대한 시간이요."

    리진철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해하려 하지 말아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니까. 그냥 나하고 비교를 하려고 하지 말아요."

    "나는 너를 따라잡을 수 없다는 거이네?"

    "그보다는… 음……."

    이지혁이 볼을 긁적이다 말했다.

    "나 같으면 따라잡으려 하지 않겠다는 거죠. 버려야 할 게 너무 많거든요."

    리진철은 아무 말도 없이 이지혁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하지만 이지혁은 그 눈빛에 맞상대를 해주지 않았다. 그저 담배를 몇 번 빨더니 비벼 끄고는 다시 음식을 먹기 시작할 뿐이었다.

    "…뭔 말인지 알갔어."

    리진철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이지혁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고맙다고 해두디."

    리진철이 몸을 돌려 멀어지자 정해민이 이지혁에게 다가왔다.

    "저 아저씨, 뭐라는거야?"

    "음……."

    이지혁이 씨익 웃었다.

    "나야 모르지."

    "…미안하다. 괜한 걸 물었네."

    정해민은 말없이 이지혁의 입에 잘라놓은 사과를 밀어 넣었다.

    * * *

    "고맙다고 해두지."

    리진철이 몸을 돌려 멀어지자 정해민이 이지혁에게 다가왔다.

    "저 아저씨, 뭐라는 거야?"

    "음……."

    이지혁이 씨익 웃었다.

    "나야 모르지."

    "…미안하다. 괜한 걸 물었네."

    정해민은 말없이 이지혁의 입에 잘라놓은 사과를 밀어 넣었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 복귀하는 거야?"

    정해민의 물음에 이지혁은 묘한 얼굴이 되었다.

    "그러게. 시간이 애매하네."

    저녁쯤에 일이 끝났다면 대충 밥 먹고 호텔에서 한숨 자고 출발하면 되는 일이건만, 지금 해 뜬 지가 얼마 안 돼서 아침을 먹고 있느라 영 상황이 껄쩍지근했다.

    "밥 먹고 출발하면 되는 거 아닌가?"

    "나 여기 있기 싫은데. 분위기도 이상하고, 뭔가 계속 찝찝해."

    "그렇지?"

    이지혁은 옆에 놓인 콜라를 꿀꺽꿀꺽 마시고는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나도 이상하게 여기는 불편하네."

    "너도 불편한 게 있어?"

    "더 불편하다는 개념은 있지."

    이지혁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영 별로란 말이야.'

    이곳의 경직된 분위기는 베라프를 생각나게 한다. 모두가 밝은 척은 하지만, 언제 자신이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안고 있는 대지.

    그 비문명의 폭력성이 이지혁을 슬쩍 자극하고 있었다.

    "기분이 좀 더러워지는 곳이야."

    이지혁은 고개를 돌려 남쪽을 바라보았다.

    헬조선이라고 불릴지언정 그래도 그가 그리워했던 세상이고, 그리워했던 나라다.

    '미국에서도 못 느꼈던 애향심을 이곳에서 느낄 줄이야.'

    이지혁은 키득키득대다가 주머니에서 다시 담배를 꺼내 들었다.

    찰칵.

    옆에서 누군가 오래된 지포 라이터를 켜 이지혁의 담배에 불을 붙여주었다.

    "고맙습니다."

    "천만의 말씀."

    불을 붙여준 노인이 이지혁의 앞자리 의자를 빼 앉았다.

    "담배가 미제 같은데, 맞습네까?"

    "네?"

    이지혁은 자신의 담뱃갑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 보네요."

    "저런 미제 담배는 질이 나쁩네다."

    사내가 주머니에서 자신의 담배를 꺼내서 이지혁 쪽으로 쓱 내밀었다.

    "펴보시라요. 공화국에서 특별히 재배하는 담뱃잎으로 만들 궐련이니까."

    "그래요?"

    이지혁이 물고 있던 담배를 비벼 끄고는 노인이 내민 담배를 입에 물었다.

    "흠……."

    불을 붙인 이지혁이 담배를 깊게 빨아들이고는 천천히 내뱉었다.

    "어떠십네까?"

    "좀 비릿한 것 같긴 한데, 묘한 매력이 있네요."

    "하하하, 좋은 평입네다."

    "그래서… 누구세요?"

    "그게 중요합네까?"

    "중요할 것까진 없는데, 할아버지가 여기 앉은 이후로 이쪽을 노려보는 사람이 굉장히 많아졌거든요.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 같아서요."

    "허허허."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손을 내밀었다.

    "만나서 반갑습네다. 조선로동당 상임위원장 정병서입네다."

    "이지혁이에요."

    이지혁은 정병서의 손을 맞잡고 흔들었다.

    "이번에 공화국에 주신 도움은 잊지 않갔습네다."

    "뭘요. 돕고 살아야죠."

    정해민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얘가 노인 공경을 할 줄 아는 사람이던가?

    사실 이지혁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이나 정병서나 새파란 애송이인 것은 똑같을 텐데?

    "남조선 최고의 용사라고 들었습네다. 받은 보고에 따르면 그 말이 거짓은 아닌 것 같더군요."

    "우리 애들이 워낙에 비실비실한 거죠."

    "하하하, 재미있는 분이구만기래."

    정병서가 다시금 자리에 앉더니 조용히 말을 꺼냈다.

    "리지혁 동무."

    "예."

    "곧 남조선으로 돌아가지 않갔시오?"

    "그렇겠죠."

    "그전에 이왕 공화국에 왔으니 만나볼 사람이 있지 않갔습네까?"

    "누구요?"

    정병서가 한껏 미소를 담고는 말했다.

    "조선노동당 최고위원이시자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동지께서 리지혁 씨를 만나보고 싶어 하십네다."

    "꿀꾸리?"

    "…뭐라고 하셨습네까?"

    정해민이 빛과 같은 속도로 다가가 다시 한 번 말하려는 이지혁의 입을 틀어막았다.

    "하하하, 얘가 체했나 봐요."

    정해민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저 멀리서 최정훈이 양손을 마구 움켜지고 조이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차라리 헤드록으로 기절을 시켜서라도 입을 틀어막으라는 신호였다.

    "거참, 싱겁기는."

    다행히 정병서의 귀에는 제대로 들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저, 저희는 이제 그만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아요."

    "벌써 말입네까? 최고사령관 동지께서 리지혁 씨를 꼭 한 번 봤으면 좋겠다고 하셨는데……."

    정해민이 어쩔 줄을 몰라 하자 저쪽에서 최정훈이 부리나케 달려왔다.

    "하하하하! 반갑습니다, 상임위원장님."

    "자네가……."

    옆에서 비서가 귀에 대고 뭔가를 속삭이자 정병서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자네가 그 호랑이 목줄이라는 최정훈인가 보군기래."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최정훈은 등이 촉촉이 젖어드는 것을 느꼈다. 저 미친놈을 북한 땅에 풀어놓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새삼 실감이 났다.

    "저희도 영광스러운 자리에 함께하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지만, 지금 한국에서는 저희가 빠진 공백으로 게이트 처리가 제대로 되고 있지 않아 민간인들이 피해를 입고 있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복구하지 않으면 막대한 피해가 누적될 수 있습니다."

    "기래?"

    "나라를 움직이시는 입장에서 서두를 수밖에 없는 저희의 입장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런 상황이라면 어쩔 수 없는 것 아니갔어? 무엇보다 인민의 안전이 중요한 법이디."

    정병서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기래도 참 아쉽군기래. 두 영웅이 만나면 멋진 그림이 나왔을 텐데."

    적당히 사진이나 찍어서 온 동네에 돌려서 또 자랑이나 해 먹겠지.

    최정훈은 정병서의 속셈이 빤히 보였지만, 지금은 적당히 장단을 맞춰줄 수밖에 없었다.

    "저도 아쉽게 생각합니다."

    그때, 최정훈의 등 뒤에서 뭔가 들려왔다.

    "아니, 왜 나도 한 번 그 돼……."

    최정훈이 손에 잡히는 뭔가를 우선 등 뒤로 집어 던졌다.

    챙!

    "꺄울!"

    다행히 명중한 모양이다.

    최정훈이 머리 위로 손을 올리고 마구 휘젓자 이곳저곳에서 식사를 하던 NDF 대원들이 우르르 달려와 이지혁을 덮쳐 누르고 꽁꽁 싸매더니 밖으로 들고 나갔다.

    "읍, 읍……."

    이지혁이 뭔가 말을 하려는 듯했지만, 서아영이 조용히 그의 입에 음식을 쑤셔 넣었다.

    "과, 과격하구만기래."

    "하하하, 이지혁 씨가 진짜 마음을 먹는다면 저 정도로 제압이 되겠습니까. 애정이 있는 장난이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저러다 죽을 수도 있갔는데……."

    "그 정도로 죽을 사람이 아닙니다."

    최정훈은 단호했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다른 사안에 대해서는 통일부를 통해 이야기해 주십시오."

    "아쉽군기래. 조심해서 가보라."

    "그럼 이만."

    최정훈은 허리를 깊이 숙이고는 몸을 돌렸다.

    손짓과 눈짓으로 빨리 이지혁을 버스에다 처박으라는 지시를 내린 최정훈이 이마에 흐른 땀을 닦았다.

    "…이러다 내가 죽지."

    * * *

    "뭔 일을 이렇게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이 처리해요? 남은 음식도 좀 싸 가고 특산물도 좀 챙겨 가고 해야지."

    최정훈이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이게 다 누구 때문입니까!"

    "누구요?"

    "이지혁 씨 때문 아닙니까! 세상에, 무슨 생각으로 북한에서 꿀꾸리우스라는 말을 꺼내는 겁니까!"

    "다들 그렇게 부르잖아요."

    "북한 애들이 그렇게 부르겠어요?"

    "아, 그건 그렇네요. 근데 귀여운데. 꿀꾸리우스."

    "끄응."

    최정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원래라면 더 많은 과정들이 남아 있었건만, 이지혁 때문에 간소화가 되었으니 고맙다고 해야 할지, 정신이 나갔냐고 해야 할지 애매한 상황이었다.

    '좋게 생각하자.'

    그래도 이 땅을 한시라도 빨리 나가는 것이 좋은 것이다. 불편하기가 짝이 없다.

    "집에 가면 뭐할 거냐?"

    "난 피자 시켜 먹으련다."

    "나는 게임할 거야. 다른 건 다 참겠는데, 컴퓨터 없으니 죽을 맛이더라."

    "뭔 하루 가지고 엄살은."

    다른 대원들도 다들 비슷한 심정을 느낀 모양이었다.

    "집에 가자, 집에."

    최정훈은 노래를 불러 대는 대원들을 보며 쓴웃음을 머금었다. 하기야 그도 차라리 여기보다는 그 일밖에 없는 사무실이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니, 다른 사람들이야 오죽하겠는가.

    "그럼 그만……."

    "잠깐만."

    "네?"

    그때, 정인수가 최정훈을 붙잡았다.

    정인수가 손으로 가리키는 곳을 보자 저쪽에서 박용휘가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문 열어드려."

    버스 앞문이 열리고 박용휘가 버스로 올랐다.

    "무슨 일이십니까?"

    "내래 줄게 있어서 들렸네."

    박용휘가 눈짓을 하자 등 뒤의 부관이 작은 상자를 앞으로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리지혁 동무께 최고사령관 동지께서 내리는 상일세."

    "아……."

    열어봐야 하나?

    어느 쪽이 예의인지를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이지혁 씨, 받으시죠."

    "뭔데요?"

    "상이라는데요?"

    이지혁이 의아하다는 듯이 바라보자 박용휘가 싱긋 웃고는 입을 열었다.

    "백두산 산삼일세."

    "오!"

    이지혁이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뭔가 상큼하면서도 조금은 씁쓸한 향기가 버스 안을 가득 메웠다.

    "뭔데?"

    "산삼이라는데?"

    이지혁이 뚜껑을 닫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 먹을게요."

    "그래, 애썼네. 그럼."

    박용휘가 버스에서 내려 몸을 돌렸다.

    "아, 리지혁 동무."

    "네?"

    박용휘는 한참을 이지혁의 얼굴을 보다가 손을 흔들었다.

    "살펴 가시라요."

    "……."

    버스의 문이 닫히고 특수부대 요원들이 자리를 잡자 천천히 버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흐으음……."

    이지혁이 의자 시트에 몸을 기댔다.

    '찝찝한데.'

    뭔가 있다는 것은 알겠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나설 만한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버스 점검 확실하게 했냐?"

    "예."

    정인수도 뭔가 불안함을 느꼈는지 조금 전부터 부하들을 계속 닦달하고 있었다.

    "뭔가 좀 어수선했는데?"

    이지혁은 이내 관심을 끄고는 눈을 감았다. 이제부터 벌어지는 일은 남은 이들의 소관이다.

    버스가 한참을 달렸다.

    올 때는 트러블이 좀 있었지만, 갈 때는 모든 검문소를 프리 패스하는 중이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그들을 빨리 이 땅에서 내보내려 하는 의지가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뭐지?'

    최정훈은 이상한 위화감을 느끼며 판문점으로 향하는 버스의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차피 무슨 일이 생긴다 쳐도 게이트로 바로 탈출해 버리면 그만이다. 그 이전에 이지혁이 있는 버스를 공격할 미친놈이 있는가부터가 문제겠지만.

    북한 지도부도 이지혁이라는 인간의 능력을 전해 들었다면 감히 헛수작은 부리지 못할 것이다. 실패는 그들의 죽음이 아니라 북한의 파멸로 이어질 테니까.

    "그런데 왜 이리 찝찝한 거지?"

    최정훈은 결국 답을 찾아내지 못한 채 판문점에 도달하고 말았다.

    팽팽하게 당겨진 판문점의 분위기가 새삼스러웠다. 몇 가지 서류를 작성하고 국경을 넘자 이상하게도 버스 안을 메우고 있던 날카로운 공기가 가라앉기 시작했다.

    "휴……."

    "이제 집에 왔네."

    다들 한숨을 내쉬었다. 말은 안 했다 하더라도 긴장감은 말로 못했을 것이다.

    RRRRR.

    그 순간, 최정훈과 정인수의 전화가 동시에 울리기 시작했다.

    "뭐지?"

    최정훈은 전화를 받았다.

    "예, 최정훈입니다."

    - 야, 최정훈이. 너 그쪽에서 따로 뭐 보거나 느낀 거 없어?

    "무슨 소리신지……."

    - 인마! 난리가 났어. 북한에서 쿠데타가 일어났대!

    "예?"

    최정훈이 기겁을 하여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이지혁은 상자를 열고 그 안에 든 산삼을 보더니, 한숨을 쉬며 뚜껑을 닫았다.

    "그럴 줄 알았다."

    상황이 극한으로 치닫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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