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65화 (65/118)
  • [■] 아저씨가 왜 거기서 나와요? [■]

    ─────

    "저, 저게 뭐네?"

    앞쪽에서 몬스터들이 미칠 듯이 달려들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게 얼마나 위험한 상황인지 모를 만큼 멍청이도 아니다.

    하지만 리진철은 도무지 이지혁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대로 몬스터들이 덮쳐 온다고 해도 눈을 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만큼이나 이지혁이 보여주고 있는 광경은 압도적이었다.

    이지혁의 작다면 작은 몸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연기가 마치 불꽃처럼 작렬하며 하늘로 충천한다.

    마치 악마가 거대한 검은 불꽃의 날개를 피워 올린 것과 같은 형상이었다.

    '사람인가?'

    이지혁이 한 짓거리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그가 감히 리진철이 상대할 수도 없는 능력자라는 사실도 충분히 알고 있다.

    하지만 듣는 것과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은 전혀 달랐다.

    저건 이미 사람이라고 할 수 없었다.

    경외가 드는 것이 아니라 공포가 느껴졌다. 인간이 아닌 존재를 보는 듯한 이질감과 압도적인 힘 앞에서 느껴지는 탈력감이 리진철의 온몸을 싸고돌았다.

    "연대장 동무!"

    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리진철이 넋이 나간 얼굴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 스스로도 반응하고 있는지 몰랐을 것이다. 그저 들려오는 목소리에 몸이 알아서 반응했을 뿐, 그의 정신은 여전히 이지혁에게 쏠려 있었다.

    "연대장 동무, 정신 차리시라요! 연대장 동무!"

    "…알고 있어."

    리진철이 풀린 눈으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능력자라는 건 저렇게까지 강해질 수 있는 건가?'

    그 역시도 능력자다.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에서는 짝을 찾기 힘들 정도로 강한 능력자로 불려왔다. 이번 사태에서 크나큰 실수를 저질렀음에도 숙청되지 않은 것은 그만한 능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그 역시 그 점을 믿었기에 목숨을 부지하는 선택을 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리진철은 자부심이 있었다.

    그의 능력이 세계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거라는 자부심.

    가끔씩 교류하는 중국 능력자들의 능력은 그의 생각이 결코 과한 것이 아니라는 확신마저 안겨주었다.

    하지만 리진철의 자부심은 지금 이 순간 바닥으로 추락한 유리잔처럼 산산이 조각나고 있었다.

    '저게 리지혁…….'

    세계제일의 능력자.

    다른 능력자들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말을 여러 번 듣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최고를 띄워주는 형식적인 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알 수 있었다.

    그건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이지혁은 그들과 같은 능력자지만, 분명히 그들과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존재인 것이다.

    '이길 수 있을까?'

    그 혼자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인민 무력 여단을 총동원해서 싸운다면 희망이 있을까?

    리진철은 피식 웃고 말았다.

    희망?

    지금 이지혁이 그들을 향해 적의를 드러낸다면 리진철은 그 자리에서 오줌을 싸버리고 말 것이다. 저 악마 같은 모습에 대항하느니, 차라리 그들에게 달려드는 몬스터가 귀여울 정도였다.

    "대장 동무!"

    "안다 카지 않았네!"

    "그게 아닙네다! 보십시오!"

    "뭐?"

    리진철이 고개를 다시 돌렸다.

    그러고는 보았다.

    끝도 없이 밀려들고 있던 괴물들의 돌진이 거짓말처럼 멈춰 있었다.

    "…이런 미친."

    리진철은 어이가 없다 못해 정신이 나가 버릴 지경이었다.

    모든 것을 집어삼킨 채 부수고 파괴하며 달려들던 몬스터들이 한순간 석상이라도 된 듯이 일제히 그 자리에 멈춰 있었다.

    고요함.

    방금 전까지의 울부짖음이 거짓이기라도 한 듯 전장 전체가 고요함으로 물들어 있었다.

    몬스터들은 숨을 죽인 채 바닥으로 고개를 내리깔았고, 인민군들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전장을 감싸고 있는 무거운 공기를 느낄 수 있기에 누구도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리지혁.'

    총참모장 박용휘는 이지혁의 뒤에서 모든 광경을 지켜보았다.

    '너무 위험하다.'

    남조선 최고의 용사라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설마 이 정도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아직 딱히 물리적인 능력을 보여준 것이 없음에도 이지혁이 얼마나 거대한 힘을 가지고 있는지는 짐작하고도 남았다.

    'NDF도 보통은 아니군.'

    이지혁도 이지혁이지만, 저 많은 몬스터가 몰려오는데도 이지혁 하나를 믿고 철통같은 경계를 펼치고 있는 NDF도 굉장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인민 무력 여단들도 몬스터가 출현한 시점에는 흔들리는 것이 역력하게 보였는데… 자신의 나라도 아니고, 타국에 지원을 와서도 저런 광경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확실히 대단하다.

    '가공할 신뢰 관계로군.'

    이지혁과 NDF의 균열 조짐이 보인다는 보고를 받았건만, 그 보고는 폐기해야 할 것 같았다.

    겉으로 보이는 투닥거림이 아닌, 실제 신뢰 관계를 바탕으로 보고를 작성하라고 그만큼이나 이야기를 했건만.

    저들의 신뢰 관계는 파고들 틈이 없을 만큼 굳건했다.

    그때,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해요?"

    "으응?"

    박용휘가 뜬금없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안 쏘고 뭐하냐구요."

    "아……."

    박용휘의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아니, 니가 그렇게 폼을 잡고 힘을 끌어 올리기에 뭐라도 할 줄 알았지.

    보통은 다 그렇게 생각하잖아!

    "고, 공격합네까?"

    "아니, 저 아저씨 왜 갑자기 저렇게 어리바리하게 군데요?"

    최정훈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걸 자신한테 물어보면 어떻게 하는가.

    입이 있어도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저는 잘 모릅니다."

    귀머거리 삼 일, 벙어리 삼 일, 장님 삼 일.

    시집살이를 체험하는 마음으로 최정훈은 눈을 감았다.

    "쏘라구요. 몬스터들 잡아줬잖아."

    "아……."

    그러고 보면 달려들던 몬스터들을 멈춰 세워준 것만 하더라도 엄청난 전과였다.

    "가, 갈기라! 뭐하고 있나! 갈기란 말이다! 사령관 동무!"

    무전을 켜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자 저 멀리서 김룡성이 다시금 고함을 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멈추었던 포격이 다시 시작되었다.

    "쯧."

    이지혁은 그 광경을 보며 혀를 찼다.

    "이래서야 뭔 전쟁을 하겠다고."

    강성대국, 강성대국 외쳐 대더니.

    타국의 군대와 함께 싸워온 것이 한두 번이 아니건만, 이런 꼴을 보는 것은 또 처음이었다.

    미군은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공격을 멈추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들은 영 오합지졸스러운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효과가 있겠습니까?"

    최정훈이 걱정스레 묻자 이지혁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없죠."

    "그런데 왜 이런 쓸데없는 짓을……."

    이지혁이 피식 웃었다.

    "남의 나라 전쟁에 대신 끼어든 건데, 내가 다 해결해 줘버리면 그건 무슨 재미예요. 일단 이 양반들 고생하는 꼴을 좀 더 보고 싶기도 하고."

    "그리고?"

    "탄약을 갈아 넣고 있잖아요."

    "아……."

    "있는 탄을 다 쓰고 나면 자체로 제작할 여력이 없는 나라니까 수입이라도 해와야겠죠. 그때 압박하는 거야 윗선에서 할 일이고, 나는 지금 할 만큼 해주는 거예요."

    최정훈은 감탄한 눈으로 이지혁을 새삼스레 바라보았다.

    이 인간은 정말 생각이 없는 것 같으면서도 가끔 보면 발상이 매우 번뜩번뜩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 급박한 와중에 상대의 탄을 소모시킨다는 생각은 어떻게 한 걸까?

    "그러다가 피해가 커지면?"

    "그건 내 알 바 아니니까."

    하기야 그것도 맞는 말이고.

    북한의 사정까지 이지혁이 일일이 신경을 써줄 필요는 없는 거니까.

    "아이고, 이것도 힘들다."

    이지혁은 몸 밖으로 뿜어져 나오는 마기를 조절하며 몬스터들을 바라보았다.

    '게다가 그냥 쓸어버리는 것은 아깝기도 하고.'

    이전이었다면 저만한 마수들을 상대하는 것도 보통의 일은 아니었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우선 이지혁이 마왕의 마나를 흡수하여 일부나마 전성기의 힘을 되찾았다는 것만으로 마수들은 이지혁의 상대가 아니었다.

    그리고…….

    "달링, 쟤들 엄청 귀엽게 생겼다."

    그의 옆에서 서큐버스 퀸이 있으니까.

    마수를 다루는 데 가장 우월한 종족 중 하나가 서큐버스였다. 마계에는 테이밍과 관련된 종족이 존재하지 않지만, 서큐버스는 기본적으로 상대를 현혹하는 존재이므로 자신보다 나약한 존재에 대한 간섭력을 가진다.

    서큐버스 퀸이자 열세 번째 마왕인 에르카나쯤 된다면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전력으로는 괜찮을 것 같은데…….'

    지구로 돌아온 초기에 마수들을 족족 흡수하여 예전과 같은 마수 군단을 만들어볼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넘어오는 마수의 급이 너무 저열하여 대형급 마수나 마왕들을 상대로는 딱히 힘을 발휘할 수 없기에 굳이 마나를 들이지 않기로 판단을 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보이는 마수들 정도라면 예전에 이지혁이 다루던 마수 군단의 질에 그리 뒤떨어지지 않는 느낌이었다.

    수야 어마어마하게 차이가 나지만.

    "영 찝찝한 것들이 섞여 있는 느낌이지만, 그건 거르면 될 테고."

    "끌어들이게?"

    "생각 중이야."

    "안 먹힐 애들이 좀 있어 보이는데?"

    "죽이면 되지."

    "역시 달링이야. 화끈하다니까! 꺄하하하!"

    에르카나가 이지혁에게 달려들어 볼을 비볐다.

    "끄응."

    이지혁은 자신에게 달라붙은 에르카나를 굳이 떼어내지 않았다. 에르카나가 그저 애정을 표현하기 위해 이런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는 탓이었다.

    그녀는 마계에 존재.

    이지혁에게 마기가 힘의 상징이라면, 그녀에게 마기는 살아 숨 쉬기 위한 기운이었다.

    문제는 인간이 산소를 소모하듯이 에르카나가 살아 있기 위해서는 마기를 소모해야 한다는 것.

    충분한 마기를 품고 왔다고 하더라도 심해에서 산소통의 산소가 줄어가는 것을 보듯 자신의 마기가 줄어들고 있는 것을 느끼는 에르카나는 심리적으로 쫓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와중에 이지혁이 고밀도의 마기를 내뿜고 있으니, 당연히 이지혁에게 끌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자, 자. 숨 쉬어라, 숨 쉬어."

    이지혁이 자신의 몸 주위를 휩쓸고 있는 마기를 강화했다.

    마계에 존재하는 코어에 두고 온 마기를 모두 합친다면 모를까, 지금 에르카나가 보유하고 있는 마기는 이지혁의 가진 양에 비할 바가 못됐다.

    "하아… 끈적한데? 달링."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마기가 끈적하다는 소리야."

    에르카나는 고혹적으로 웃으며 혀를 내밀었다.

    좀 더 붉어진 듯한 혀가 입술을 핥는다. 마기를 만나더니 서큐버스 퀸으로서의 본성이 폭발한 모양이었다.

    "포섭할 수 있는 마수가 반수도 안 될 것 같아. 그런데 구분할 수 있어?"

    "흐음……."

    이지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적당히 날려 대다 보면 죽기 싫어서라도 이쪽으로 붙겠지."

    "…달링은 뇌가 청순한 게 참 매력이야."

    "그거 욕이지?"

    "칭찬, 칭찬."

    욕이든 칭찬이든 무슨 관계가 있나.

    이지혁은 쏟아지는 포탄을 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슬슬 소진시킨 것 같으니, 이제 좀 움직여 볼까?

    일단은…….

    "오픈."

    이지혁이 우수를 휘젓자 허공에 게이트가 열렸다.

    "나와라."

    이만한 마수들을 끌어들이려면 아무래도 말 잘 통하는 지휘관이 필요하겠지. 그렇다면 마침 적절한 존재가 있었다.

    이지혁은 자신의 오른팔 같은 존재를 게이트에서 불러냈다.

    "오식아!"

    하지만 게이트 안에서 나온 것은 오식이가 아니었다.

    뜻밖의 존재를 발견한 이지혁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헐, 아저씨가 왜 거기서 나와요?"

    * * *

    이지혁이 깜짝 놀라 게이트를 바라보았다.

    "아……."

    잊었다.

    잊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북한에 넘어오기 전에 게이트에다가 사람 하나를 집어넣었지. 거기다 대충 좌표를 오토 다이렉팅해 놓고 있었는데, 그게 오식이 쪽 좌표에 덧씌워졌는가 보다.

    이지혁은 민망한 듯 머리를 긁었다.

    사람을 게이트에다 넣어놓고 까먹다니…….

    '죄책감이…….'

    아무리 신경이 쇠심줄로 만들어진 이지혁이라지만, 확실히 이번만큼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누, 누구?"

    그런 이지혁과 달리 최정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처음 보는 사람이 게이트에서 기듯이 나오더니, 바닥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그… 여기 오기 전에 넣은 사람 있잖아요."

    "오기 전에요?"

    "기자들이 둘러쌌을 때."

    "초, 총재님?"

    최정훈이 기겁을 하여 게이트를 향해 달려갔다.

    하지만 그 뒷모습에서 당혹스러움이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저 양반도 까먹었구만.'

    이지혁을 혀를 차든 말든 최정훈은 눈에 뵈는 것이 없었다.

    이런 실수를!

    일국의 여당 총재를 이계로 날려 버려 놓고 까먹고 있었다니, 실책 중의 실책이었다.

    아무리 급히 북한으로 넘어오고 청와대에서 신경전을 벌이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고는 하나, 결코 변명이 될 사안이 아니었다.

    '그런데 왜 아무도 연락을 하지 않았지?'

    청와대도 그렇고, 기자들 쪽도 그렇고… 연락 한 번만 해서 송정수 총재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어만 봤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심지어는 여당에서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자기들 총재가 실종이 됐는데 찾아보지도 않은 건가?

    '아니면 알고는 있는데 이지혁 씨와 연관이 되어 있어서 못 건드린 건가?'

    생각을 해보면 그가 그 입장이라고 하더라도 이지혁에게 연락을 해서 여당 총재를 어떻게 했냐고 물어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워낙 긁으면 긁는 대로 부스럼이 되는 사람이다 보니 안 엮이고 내버려 두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이니까.

    저들 기준으로 이틀 정도 '그냥 별일이야 있겠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고.

    '그런데 그 이틀이…….'

    사람을 이렇게까지 만들어놓는단 말인가!

    최정훈은 서서히 고개를 드는 송정수를 보며 움찔했다.

    "초, 총재님, 괜찮으십니까?"

    "흐, 흐흐흐흐."

    송정수가 실성한 듯 웃기 시작했다.

    최정훈은 그 광경을 보며 연민과 당혹을 동시에 느꼈다. 하루아침에 이계로 날아간 사람이라면 얼마나 당황을 했겠는가. 그 고생이야 이루 말로 할 수 없을 것이다.

    당장 최정훈만 해도 수련을 빙자한 괴롭힘 속에 일반인의 몸으로 육 개월 동안이나 이계에서 생존하느라 정신병에 걸릴 뻔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혼자서…….

    "잠깐만 총재님?"

    순간,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한 최정훈이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히 송정수 총재는 육십 대였을 텐데?

    그런데 저 목 아래로 보이는 이상한 몸뚱아리는 대체 뭐란 말인가.

    이상하다기보다는… 흉악한데?

    최정훈이 뭔가 말을 걸려다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서 송정수의 몸을 바라보았다.

    처음에 입고 있던 고가의 슈트는 어디다 갔다 팔아먹었는지,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짐승의 가죽으로 몸을 둘둘 말고 있었다.

    상반신을 두른 갈색의 가죽 밖으로 빠져나와 있는 팔은 그야말로 말 근육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주었다. 울룩불룩 솟아 있는 근육이건만 비대하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고, 잘게 갈라져 쭉 뻗은 육체는 마치 재규어를 보는 듯 살아 있었으며, 아래로 뻗어 있는 다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건 무슨 건강미가 넘치다 못해서 폭발할 지경이 아닌가.

    대체 이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사람이 저런 몸뚱아리가 되어서 나타나는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총재님?"

    "흐흐흐흐."

    최정훈은 불안한 느낌으로 고개를 돌려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안전한 곳으로 보낸 거 맞습니까?"

    "살아 있는 거 보면 몰라요?"

    최정훈은 자신의 첫 번째 실수를 깨달았다.

    처음 송정수 총재를 이지혁이 게이트 안으로 처넣었을 때, 혹시나 생명에 문제가 있을까 봐 괜찮은 곳이냐를 확인했다. 하지만 최정훈의 실수는 그 괜찮은 곳에 대한 최정훈과 이지혁의 기준이 무척이나 다르다는 점을 깨닫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목숨만 붙어 있을 수 있으면 안전한 곳이라는 개념을 머리에 박고 있는 이지혁에게 그런 질문을 하려면 좀 더 디테일하고 확실하게 물어봤어야 한다.

    '자기 가족한테도 그런 기준을 적용하면 내 목을 따려고 하겠지.'

    아무리 사람이 남과 가족을 달리 본다지만, 저건 좀 심한 게 아닌가.

    "그리고 이틀 사이에 육체 변화가 너무 심한데, 시간 기준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시간이야 별로……."

    뭔가를 확인하던 이지혁이 어색하게 웃기 시작했다.

    '사고 쳤군.'

    이지혁의 얼굴에서 민망함을 발견한다는 것은 매우 진귀한 경험이었다. 같이한 시간이 이제 적지 않음에도 몇 번 보지 못했으니까.

    최정훈은 차라리 이지혁의 대답을 듣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열려 있는 귀를 막을 수는 없는 법.

    "헐, 어쩌지? 하루에 십 년인 곳으로 보냈네."

    "십 년?"

    그럼 이틀이니까…….

    "이, 이십 년?"

    60살 먹은 노인을 칼 한 자루 없이 겨우 목숨만 부지할 수 있는 곳에 이십 년이나 처박아두다니!

    이건 노인 학대 이전에 인권유린의 현장이었다.

    "대,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겁니까!"

    "사람이 살다 보면 실수를 할 때도 있는 거죠."

    그래, 사람이 살다 보면 실수를 할 수도 있지!

    그런데 사람이 실수를 저질러 놓고 그렇게 당당하면 안 되는 거지!

    "크흐흐흐흑!"

    그 순간, 송정수가 바닥을 움켜잡고 노성을 토해냈다.

    "돌아왔다, 돌아왔어!"

    최정훈은 기묘한 데자뷔에 휩싸였다.

    이거, 어디서 본 거 같은데?

    불현듯 이지혁이 지구로 돌아왔던 순간을 떠올린 최정훈은 차마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해버렸다.

    "저… 콜라 드릴까요?"

    * * *

    "갈기라고 하지 않네! 쉬지 않고 갈기란 말이디!"

    김룡성은 목이 찢어져라 소리를 질렀다.

    사방에서 포화 소리가 터지고 있는 와중이라 목소리는 거의 전달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김룡성은 멈추지 않았다.

    '괴물 놈들.'

    북한 역시 게이트 사태를 5년이나 겪어왔다.

    타국에서는 능력자 관련으로 부서가 신설되고 새로운 책임자가 생기기도 했지만, 극도로 경직된 북한에서는 새로운 권력의 출현을 반기지 않았다.

    덕분에 육군 사령관을 맡고 있는 김룡성이 지금까지 능력자들에 대한 모든 관리를 해오고 있었다.

    5년이나 게이트를 관리하다 보니 수많은 몬스터를 겪으며 위기에 처한 적도 많았지만, 단언컨대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안 먹히는가!'

    화력을 죽어라고 때려 박고 있지만, 몬스터들은 전혀 쓰러지지 않았다. 체감상으로는 생채기도 나지 않는 느낌이다.

    아무리 화력이라는 것이 몬스터에게는 딱히 효과가 없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고속으로 움직이는 몬스터에게 개인화기 이상의 화기는 명중률을 담보하기가 힘들다. 치타나 재규어를 소총이 아닌 단발성 RPG-7으로 잡아야 한다면 얼마나 힘들겠는가.

    이쪽이 공격한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을 때는 어떻게든 선공으로 명중시킬 수 있겠지만, 이쪽의 공격을 눈치챈 야생동물을 범위성 단발 화기로 잡아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도 맞추기만 하면 효과는 있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통례였건만, 지금 눈앞에 보이는 괴물 떼는 그의 그런 상식조차 파괴하고 있었다.

    조금 전부터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는 괴물들에게 미친 듯이 화력을 때려 박고 있지만, 되레 이쪽이 먼저 지치고 있다.

    김룡성은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는 이런 놈들이 나오는 것인가?'

    왜 이 괴물들이 이곳으로 달려들었는가는 대충 설명을 들어 알고 있었다. 기분 같아서는 저 이지혁이라는 놈을 찢어 죽이고 싶지만, 평생을 북한이라는 폐쇄적인 사회에서 살아온 김룡성은 당장의 위협을 더 크게 인식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그렇다 치고, 앞으로도 저런 괴물들이 나온다면 어떻게 막아야 하는 것인가.'

    이번 위기를 어떻게도 넘긴다고 하더라도 앞으로도 북한 땅에 저런 괴물들이 나타난다면, 냉정하게 말해서 지금 북한의 전력으로는 감당할 수가 없었다.

    '어려운 문제군.'

    이지혁이 갈아 마시고 싶은 존재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가 없다면 북한에 위기가 닥쳤을 때 해결해 줄 사람이 없었다.

    항상 북한에 체제 붕괴급 위기가 닥쳐올 때는 남조선에 손을 뻗기는 했지만, 그때는 언제나 다른 대안이라는 것이 존재했다. 하지만 이처럼 남조선에 전적으로 의지해야 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은 처음이나 마찬가지였다.

    '주도권을 완전히 넘겨주게 되는 건가…….'

    아무리 북측이 핵을 보유하고 있다고 해도 이지혁이라는 존재 하나만으로도 앞으로는 계속 숙이고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게이트에서 더 위험한 몬스터가 나올수록 관계는 일방적으로 흐를 수밖에 없다.

    '대책이 필요하다.'

    하나 문제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첫 번째 문제는 고위층들은 이러한 사태의 심각성을 아직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고, 두 번째 문제는…….

    "미친놈."

    "예?"

    "아니다."

    옆에서 듣던 부관이 고개를 갸웃했다.

    '남조선 제일의 용사라는 놈이 저리 정신이 나간 놈일 줄이야 누가 알았겠냔 말이지.'

    앞으로도 저놈이 북한을 들락거리면서 사고를 쳐 댈 것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위가 아파오는 기분이었다.

    '아니디. 김칫국 마시지 말라.'

    김룡성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사태도 해결이 된 것이 아니다. 그런데 벌써부터 다음 일을 걱정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어떻게든 지금 사태부터 해결을…….

    "저게 뭐이네?"

    문득 김룡성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이지혁이 또 이상한 일을 벌이고 있는 것을 본 김룡성이 어안이 벙벙하여 소리쳤다.

    "저놈은 대체 뭐하는 놈이냔 말이다!"

    * * *

    "시끄럽네."

    이지혁이 귀를 팠다.

    포화 소리가 워낙에 크다 보니 귀가 멍멍할 지경이었다. 마법이 난무하는 전장에서도 이 정도의 소음이야 심심찮게 터지기는 하지만, 현대전의 화포가 뿜어내는 소음은 마법과는 다른 날카로움이 있었다.

    "총재님!"

    게다가 앞에서 고함을 토해내는 최정훈까지 있으니, 정신이 둘이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거, 지금 한창 싸우는 중인데 나중에 살펴도 될 일을……."

    그 순간, 최정훈이 눈에 불을 켜고 이지혁을 돌아보았다.

    "사람을 이 꼴로 만들어놓고 그게 할 소립니까?"

    "그 꼴이 어때서요?"

    "눈이 있으면 보고 말……."

    최정훈은 송정수를 가리키고는 입을 닫아버렸다.

    꼴이…….

    아니, 꼴이 참 뭐랄까.

    이게 참 이러면 안 되는데, 이계로 건너가기 전보다 몇 배, 아니, 몇 십 배는 좋아진 몸을 보니 비난의 당위성이 사라져 가는 느낌이었다.

    '적당히 좋아지면 할 말이라도 있을 텐데…….'

    강남 피트니스 센터에서 스카웃하려고 전화기에 불이 날 것 같은 몸이 되어 돌아온 사람을 근거로 비난을 퍼부으려니 영 각이 살지 않는 느낌이다.

    그때, 송정수가 천천히 고개를 들더니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마침내 돌아왔다."

    거, 비슷한 말인데 이지혁이 할 때랑은 느낌이 많이 틀리네.

    거참.

    * * *

    "그 지옥 같은 땅에서 나는 마침내 이곳으로 돌아왔다."

    비장하다.

    말투만 들으면 지옥에서 돌아온 전사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아니, 진짜 그런 느낌이 나는데?'

    과거의 능글맞던 정치인의 모습은 씻은 듯이 사라지고, 백전노전사의 모습이 된 송정수였다.

    당장 영화 한 편을 찍어도 될 듯한 모습을 보며 최정훈은 뻘쭘하게 송정수에게 다가섰다.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송정수는 회한이 담긴 눈으로 최정훈을 올려다보더니,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누구냐?"

    "최정훈입니다. 넘어가시기 전에 뵈었죠."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 것 같군."

    최정훈은 눈물을 삼켰다.

    불과 이틀이 지났을 뿐인데 이십 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다니, 얼마나 고초가 많았을까?

    "그런데 너는 얼굴이 바뀌지 않은 것 같군."

    "그럴 겁니다. 이곳은 불과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으니까요."

    "이, 이틀이라고?"

    송정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십 년이 넘는 세월을 그곳에서 보냈는데, 불과 이틀이라니! 아무도 나를 찾아주지 않기에 잊혀진 줄 알았는데, 겨우 이틀이 지났다는 말인가!"

    저…….

    아무도 찾아주지 않은 것은 맞습니다. 그게 이틀뿐인 거였지만요.

    "버려진 게 아니었는가……."

    송정수의 노안에 습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아니야, 이게 아니야.'

    최정훈은 격렬히 고개를 저었다.

    그가 보고 싶은 것은 노인의 감정을 담은 드라마가 아니었다. 조금 전까지는 전쟁 밀리터리 물이었는데, 순간적으로 장르가 바뀐 느낌이다.

    '이 다급한 와중에 이게 무슨.'

    앞에서는 몬스터가 와글와글거리는데, 이게 웬 블랙 코미디란 말인가.

    최정훈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상황은 울어야 할 상황인 것 같기는 한데, 보고 있자니 자꾸 웃음이 나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공감 능력이라는 것이 있는 사람이라면 절대 웃어서는 안 되는 상황이라는 인지가 있기에 최대한 참아내고 있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곳은 지옥이었다."

    '회, 회고하지 마시라구요.'

    상황을 보고 회고에 들어가야지!

    지금은 장면을 전환할 타이밍이 아니었다. 이러다 회상 단계까지 갈까 봐 걱정이 되는 최정훈이었다.

    "일단 이야기는 나중에 듣고, 지금 치열하게 전투가 벌어지고 있으니 안전한 곳으로 피해 계시지요."

    "뭐야? 이제 막 시작인데!"

    송정수가 버럭 화를 냈지만, 최정훈은 단호하게 송정수의 팔을 잡고 끌어 당겼다.

    하지만 송정수는 태산이라도 된 듯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무슨 노인네 힘이…….'

    겉으로 보이는 근육이 그저 장식이 아니라는 듯 송정수의 육체는 젊은 최정훈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힘을 보이고 있었다. 아무리 육체를 단련한 운동선수나 보디빌더라고 하더라도 건장한 성인 남성이 끌면 움직이기라도 할 텐데, 미동조차 보이지 않았다.

    "와, 할아버지 몸 좀 보소."

    이지혁조차 감탄을 하고 있다.

    이쯤 되면 이게 무슨 상황인가 하는 회의가 든다.

    "후후후, 그곳은 지옥이었지. 처음에는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는 나를 꺼내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누구도 나를 찾지 않았어."

    송정수의 목소리에서는 절망과 회환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지. 누구도 나를 지켜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내가 스스로 버텨내야 한다. 그렇게 나는 단련을 시작했고, 마침내……."

    "네네, 알겠으니까 나중에 들어드릴게요!"

    "이제 시작이라고! 젊은 놈이 노인이 말을 하면 듣는 척이라도 해야지! 요즘 것들은……."

    아, 이게 부작용도 있구나.

    이계에서 겪은 이십 년의 세월은 깔끔하고 주도면밀하던 정치인 송정수를 고집만 남은 노인으로 바꿔 버린 것 같았다.

    '일단 정치인으로는 끝난 것 같은데…….'

    저 육체를 잘 활용하여 과거의 스마트함과 잘 섞는다면 이미지 강화에 도움이 될 것 같기도 하지만, 정치 일선에서 20년을 떠나 있던 감을 찾는 건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이, 이게 아니지!"

    송정수가 눈을 희번덕대기 시작했다.

    "이지혁! 이지혁은 어디 있느냐!"

    송정수가 두 눈에 살기를 담고는 외쳤다.

    '아이고, 대표님.'

    그러다가 뼈 부러지십니다. 심정이야 알겠지만, 이지혁에게 당한 사람이 어디 한둘인가.

    이번에는 좀 과도하게 당한 것 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지혁한테는 따져 묻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오, 아저씨."

    '하지 말라고!'

    그냥 구석에 박혀 있으면 알아서 상황을 정리할 텐데, 왜 나서서 부르는가!

    "이지혀어어어억!"

    송정수가 울분에 차오르는 목소리로 이지혁을 외치더니,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오?"

    이지혁이 그 광경을 보며 손뼉을 쳤다.

    "잠깐! 잠깐만!"

    "으응?"

    송정수가 이지혁의 말에 발을 멈춰 세웠다.

    "뭐냐! 유언이라면 들어주마."

    "…유언은 아저씨가 작성해야 할 것 같아 보이지만… 뭐, 일단 넘어가구요."

    이지혁이 송정수의 위아래를 훑더니 정말 놀란 얼굴로 말했다.

    "회춘했는데?"

    "으응?"

    "아저씨 몸이 가기 전보다 더 좋은데요? 신체 나이는 더 어려진 것 같은데……. 어딜 보낸 거지, 내가?"

    송정수는 이지혁의 말에 움찔했다.

    신체 나이?

    "수명도 더 늘었겠는데? 와, 이거 잘만 하면 장사 좀 될 것 같은데?"

    "…수, 수명이 늘었다고?"

    송정수는 어안이 벙벙한 눈으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정말?"

    "속고만 사셨나."

    송정수는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표정으로 우물쭈물댔다.

    "그런다고 내 원한이 사라질 것 같으냐?"

    "거, 미안하게 됐습니다."

    이지혁이 어색하게 웃었다.

    현대로 온 이후로 누군가에게 잘못을 저질렀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이번만은 빼도 박도 못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어, 어쨌든 결과는 좋잖아요."

    이지혁이 슬쩍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결과야 이지혁도 좋지.

    현대에 있었으면 그냥 성격 더러운 일반인으로 끝났을 삶이건만, 베라프에 다녀온 것으로 전 세계 유일무이한 능력자가 되었다.

    결과만 보면 다 좋지, 결과만 보면!

    "미안합니다."

    이지혁은 시키지도 않은 사과를 하며 고개를 꾸벅 숙이고 말았다.

    "사과하지 마! 차라리 나쁜 놈으로 남아주는 게 나은 거야, 이놈아!"

    "아니, 진짜 미안해서……."

    "사과하지 말라고!"

    "…진정 좀 하시죠. 근육이 꿈틀꿈틀하는 걸 보니, 제 기분이 다 이상하네요."

    말만 그런 게 아니라 정말 기분이 이상했다.

    60대, 아니, 80대 할아버지가 보디빌더 뺨치는 근육을 가지고 있는 것도 기분이 이상한데, 그 근육이 살아 움직이듯 꿈틀대고 있지 않은가.

    보고 있자니 영 속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이야기는 나중에 하죠. 지금 이러고 있을 상황이 아니라서……."

    "크흠."

    송정수가 고개를 돌려 몬스터들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이계에서 야인으로 살아왔다고 하나 그는 송정수. 여당의 총재이자 정치 9단이라 불리던 정치인이었다.

    개인적인 일은 국가적 일에 우선될 수 없다는 마인드를 가진 그는 달군 돌을 삼키는 심정으로 이지혁의 앞에 주저앉았다.

    "저기로 가시죠?"

    "그 약해 빠진 몸뚱아리로 몬스터들의 습격을 받기라도 하면 죽을 것 아닌가! 내 원한을 풀기 전에 죽으면 안 되지!"

    송정수는 이지혁을 지키겠다는 듯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앉았다.

    "뭔가 그럴싸하게 돌아가는데?"

    지휘관을 소환하려다 가드를 소환한 느낌이지만, 어쨌든 소환하기는 소환했다.

    "…카드를 잘못 뽑기는 했지만, 뭐."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최정훈이 의아해하자 이지혁은 고개를 내저었다.

    "뭐, 별거 아니에요. 신경 쓸 정도는 아니구요."

    지금은 일단 이 사태를 해결해야겠지.

    이지혁이 손을 뻗었다.

    이번에는 틀리지 말고 제대로 소환을 해야지!

    "오식아!"

    이지혁이 게이트를 열자 그 안이 휘돌기 시작하더니, 작은 강아지의 형상을 띤 오식이가 짧은 다리를 쫙 벌린 채 튀어나왔다.

    뀨?

    "뭐가 뀨야, 인마!"

    이지혁이 오식이에게 촉수를 갖다 꽂더니 마력을 주입했다.

    크아아아아아!

    오식이가 금세 부풀어 오른다 싶더니, 이내 당당한 오거의 형태로 돌아갔다.

    아니, 저걸 오거라고 하기에도 이제는 애매하지만.

    아마도 오식이라는 종이 새로이 생겨야 할 것 같았다.

    크륵.

    오식이의 시선이 이지혁의 압박에서 풀려나지 못한 몬스터들을 향해 돌아갔다.

    크르르르.

    과거 이지혁의 군단에서 날뛰던 기억이 떠올랐는지, 오식이가 흉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카아아아아아아!"

    "아, 시끄러워!"

    끼잉.

    하지만 그 흉성은 순식간에 진압되었다.

    "적당히 퍼부을 것이지."

    이지혁은 옆에서 날뛰는 오식이의 머리채를 끌어내려 쓰다듬으며 북한군을 바라보았다.

    이지혁이 몬스터들을 짓눌러 놓은 호기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포신이 녹아내리도록 연발을 갈기고 있었다.

    '탄은 딱히 차이가 없겠지.'

    얼마나 더 많은 탄을 짧은 시간 안에 더 멀리 보낼 수 있는가의 차이일 뿐, 북한군이 사용하는 탄이나 다른 군이 사용하는 탄이나 그리 큰 차이가 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 북한군의 화력이 딱히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현대의 열병기가 더는 몬스터에게 통하지 않는 수준까지 이르렀다는 말이었다.

    달리 말하자면…….

    "이제 지원은 의미가 없다는 거로군."

    선진국쯤 되면 폭격이나 미사일 등으로 나름의 지원을 해줄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북한 역시 군사력으로만 따지자면 전 세계에서도 상위권에 랭크되는 강국이었다.

    북한이 도움이 안 된다면 다른 나라도 빤했다.

    "시작되겠군."

    아마 이제 세상은 순전히 능력자들을 위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이지혁의 눈에는 그것이 보였다.

    베라프에서 능력자와 일반인들의 계층이 분화된 가장 큰 원인도 몬스터였다.

    오거 같은 몬스터가 출현하면 마법사나 기사 없이는 절대 잡을 수가 없다. 토끼가 백 마리 모여도 사자 하나를 감당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일반인들은 외부의 충격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해 줄 능력을 가진 이들에게 고개를 숙이고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 기간이 길어지면서 귀족은 곧 기사이자 마법사라는 공식이 정해진 것이다.

    그런데 이 지구에서는?

    능력자들은 자신들의 능력을 베라프보다 훨씬 더 유용하게 사용할 것이다.

    교육의 수준이 다르고 정보의 전파 속도가 다르니까.

    그런 와중에 가장 위험한 것은…….

    이지혁은 고개를 저었다.

    '오늘따라 잡생각이 많군.'

    왜 이렇게 불안한 느낌이 드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럴 때는 속 시원하나 한 방 날리는 것이 최고였다.

    "에르카나!"

    "기다리고 있었어, 달링."

    "적당히 한 번 뒤집어엎을 테니, 현혹 준비해 줘."

    "기다리고 있다니까, 달링."

    에르카나가 미소를 지으며 이지혁에게 날아와 그의 목을 잡고 매달렸다.

    "이러고 있으니 추억이 샘솟는데? 예전에 마계에서 날뛸 때의 달링은 정말 멋졌는데."

    "안 멋지고 편히 살련다."

    이지혁이 양손으로 마나를 끌어모았다.

    고오오오오!

    고밀도의 마나가 뿜어져 나와 이지혁의 손으로 뭉쳐 들기 시작했다.

    에르카나는 오싹오싹한 반응을 즐기며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거지.'

    인간의 몸으로 마왕의 위를 얻어낸 이지혁의 능력.

    같은 마왕이지만 절로 경배하게 되는 그 힘의 실체가 지금 이곳에 강림하고 있었다.

    * * *

    고오오오오!

    이지혁의 양손에 모인 마나가 소용돌이 치기 시작했다.

    크르르르.

    오식이조차 그 광경을 버텨내지 못하고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마나를 강제로 찌부러뜨리듯 뭉치고 또 뭉친다. 압력을 이기지 못한 마나들이 미친 듯이 꿈틀댄다.

    "흐으응."

    그 순간, 에르카나의 콧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녀에게 흑마력은 생명의 근원이나 다름없는 것. 생명이 짓눌리고 뒤틀리고 요동치는 광경은 그 자체로 환희였다.

    이지혁은 낮게 가라앉은 눈으로 마나를 응축하고 또 응축했다.

    투둑!

    마나의 반발을 이기지 못한 팔의 근육과 피부가 일순 터지면서 붉은 피를 분수처럼 뿜어냈다.

    "쯧."

    아무리 마나를 끌어모은다고 해도 그의 육체는 더 이상 이전의 육체일 수 없다.

    어떠한 충격에도 즉시 회복하던 육체는 사라지고, 이제는 조금 단단할 뿐인 인간의 육체만이 그에게 남아 있었다.

    하지만 아쉬워할 일은 아니다. 덕분에 얻은 것이 더 많으니까. 이 정도 핸디야 얼마든지 가져줄 수 있다.

    "그래도 아픈 건 아픈 거지만."

    이지혁은 입가로 흘러나오는 피를 소매로 훔쳤다.

    죽어라 다치고 회복하기를 반복하다 보니, 육체가 압력을 골고루 받으면 내장부터 터져 나간다는, 아주 쓸데없는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피만 좀 덜 나면 내장이 터져도 참을 만하겠는데, 일단 입으로 핏덩어리가 울컥대며 올라오는 느낌은 아무리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퉤."

    바닥으로 침을 뱉어낸 이지혁이 전방을 바라보았다.

    "으아아아아!"

    리진철은 육체에 존재하는 에테르를 모두 쥐어짤 기세로 전격을 퍼부었다.

    "죽어어어어!"

    리진철의 양손에서 새하얀 전격이 작렬했다.

    파지지직!

    인간은 스치기만 해도 숯덩이가 될 전격의 줄기가 수십 번이나 작렬했다.

    "…대체 뭐야?"

    그럼에도 몬스터들은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이토록이나 무력한가?'

    자신의 능력에 나름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리진철은 눈앞에 보이는 몬스터들의 위용에 전율했다. 그가 가진 어떠한 능력도 통하지 않는다.

    한 마리에 모든 힘을 쏟아부어야 겨우 타격을 입힐 수 있을까 말까 했다. 그런 상황에서 수천 마리나 되는 몬스터들을 어떻게 상대하란 말인가.

    절망.

    그의 육신을 절망이 지배하고 있었다.

    절로 이가 갈려온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지혁이 몬스터들의 돌진을 막아주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그들은 몬스터 뱃속에서 재회하고 있었을 것이다.

    평양은 삽시간에 휩쓸렸을 것이고, 북한이라는 나라는 지도에서 사라졌겠지.

    "으아아아아아아!"

    리진철의 자부심과 자존심이 산산조각 나고 있었다.

    그가 태어났을 때부터 이미 공화국은 타국에 밀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괜찮았다. 애초에 출발점이 달랐으니까.

    하지만 능력은 아니다.

    능력자의 각성은 겨우 5년 전부터 시작되었다. 리진철은 초기 각성자 중 하나였고, 동등한 출발점에 선다면 다른 누구보다 앞서 나갈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리진철은 자신이 틀렸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괴물 놈!"

    누구에게 하는 말일까?

    "으아아아아! 괴물 같은 놈아!"

    "대장 동지! 진정하시라요!"

    "닥쳐!"

    입에 반쯤 거품을 문 리진철이 목이 터져라 외치기 시작했다.

    "죽이라! 다 죽이라! 이 괴물놈들 다 죽여 버리라!"

    리진철의 눈에 핏발이 돋아날수록 인민 무력 여단이 쏘아대는 에테르의 출기도 더욱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 * *

    "지랄을 한다."

    이지혁이 혀를 찼다.

    "여하튼 약해 빠진 것들이 자존심은 더 세다니까."

    진정한 강자는 굳이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는다. 본신의 힘 자체만으로 존중받을 수 있는데, 왜 쓸데없는 자존심을 내세우겠는가.

    항상 어설프게 경계에 걸쳐 있는 것들이 자존심을 내세우기 마련이었다.

    "비교할 사람을 가지고 비교를 해야지."

    자존심을 내세울 거면 자기들끼리 싸우면 될 텐데, 거기에 자신을 왜 끌고 들어가는가.

    이지혁이 마법을 배운 기간만 천 년이 넘는다. 천 년 동안 마법을 익혔는데, 이제 겨우 오 년 남짓 된 햇병아리가 그에게 잣대를 가져다 대고 있으니,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노릇이었다.

    물론 리진철은 이지혁이 얼마나 능력을 갈고닦아 왔는지 모르겠지만.

    "흐음……."

    재밌는 걸 보여줘 볼까?

    이지혁이 양손에 모은 마나를 가슴 앞으로 끌어모았다.

    변형은 영 귀찮고 손에도 맞지 않지만, 지금은 무작정 갈겨 버리는 게 해결책은 아니었다.

    이지혁이 양손을 하늘 위로 뻗어 올리자 그의 손을 타고 돌던 마기가 하늘 위로 비상해 올랐다.

    고오오오오!

    농구공만 한 크기로 뭉쳐졌던 마나가 허공으로 솟아오르다 몬스터들의 머리 위에 도달하자 그 자리에 멈췄다.

    "조, 조심해요!"

    최정훈이 목이 터져라 외쳤다.

    이지혁이 뭔가 하려 든다는 것을 눈치챈 최정훈이었다.

    최정훈의 고함 소리를 들은 이들이 긴장한 눈으로 허공에서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마나를 바라보았다.

    "저게 뭐네?"

    리진철의 동공이 떨려온다.

    작다.

    그저 공포에 떨기에는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너무도 작았다. 하지만 리진철은 육체 안에서 전해져 오는 경고음을 느끼고 있었다.

    저기 뭔가 무시무시한 것이 있다.

    리진철은 자꾸 현혹하는 시각을 차단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움찔.

    순간, 느껴진다.

    그의 머리 위.

    정확하게는 몬스터 떼의 머리 위에서 어마무시한 것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 존재감을 몸으로 느끼는 순간, 전신에 힘이 빠지고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버릴 것만 같은 거대한 힘.

    너무도 압도적이라 단 한 번도 저런 것이 존재할 것이라 상상조차 해본 적 없던, 너무나도 거대한 힘의 집합체.

    그것이 지금 그의 앞에 존재하고 있었다.

    "인간이 아니야……."

    저건 악마다.

    악마가 아니고서야 저런 힘을 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농담이 아니다.

    그의 몸이 절로 벌벌 떨리기 시작했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이가 미칠 듯이 맞부딪쳤다.

    저항하라는 건가?

    저것에?

    "대장 동무! 대장 동무! 왜 이러십니까!"

    리진철을 보좌하는 이들은 미칠 노릇이었다. 평소 항상 냉철하고 자신만만하던 리진철이 오늘따라 몇 번이고 자꾸 넋을 놓고 있었다.

    어딘가 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말이다.

    "피…하라."

    "예? 뭐라고 하셨습네까?"

    "피하라! 피하라고 하지 않네! 당장 여기서 물러나란 말이다! 당장!"

    "알갔습네다!"

    영문을 모르는 이들이 명에 따라 분분히 뒤로 물러났다. 왜 피하라고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명이 떨어지면 일단은 따른다. 그것이 그들의 방식이었다.

    "저 종간나 새끼."

    리진철이 이를 갈았다.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네!"

    이지혁은 리진철의 고함 소리를 들으며 낄낄 웃었다.

    오버하기는.

    "벌써부터 놀라면 심장마비 걸릴 텐데."

    이지혁의 눈이 빛났다.

    "자, 그럼 보여주지."

    진짜 뇌전이 뭔지 말이야.

    이지혁이 양손을 허공에서 그대로 움켜잡았다.

    "터져라!"

    순간, 허공에서 꿈틀대던 검은 마나가 팽창하기 시작했다. 아주 조금씩 불어나는 듯싶던 검은 마나의 덩어리는 순식간에 그 몸집을 키우더니, 이내 하늘 전체를 덮어버릴 것처럼 거대한 먹구름의 형태로 화했다.

    "진짜……."

    최정훈은 그 광경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이지혁이 일을 저지르는 것을 한두 번 보는 경우도 아니건만, 매번 적응이 되지 않으니 큰일이었다.

    '스케일이 적당해야 적응을 하지.'

    세상이 암흑으로 물들고 있다.

    하늘을 가득 덮어가는 마나의 구름은 빛 한 점도 통과하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중심으로부터 점점 암흑이 퍼져 나간다.

    세상 전부가 암흑으로 물들지 않을까 싶은 걱정이 들 때쯤, 구름이 팽창을 멈추었다.

    그리고 등 뒤에서 낄낄대는 이지혁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최정훈 씨."

    "예?"

    "평소에 죄 지은 거 있어요?"

    "……."

    이게 뭔 소린가?

    갑자기 죄 지은게 있냐니?

    "아주 안 짓고 살지는 않았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럴 테니까.

    "그럼 조심하는 게 좋아요."

    "네?"

    "벼락맞을 수도 있으니까. 낄낄낄낄."

    이지혁이 혼자서 미친놈처럼 낄낄대더니 소리쳤다.

    "떨어져라!"

    그리고 세상이 다시 빛으로 차오르기 시작했다.

    * * *

    번쩍.

    처음은 한 번의 낙뢰였다.

    콰쾅!

    빛이 번쩍이고 나서 조금 뒤에 소리가 터진다. 마나의 구름에서 벼락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

    리진철은 그 광경을 보며 입을 서서히 벌렸다.

    낙뢰.

    전기를 다루는 그를 비웃듯이 이지혁은 하늘에서 벼락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그 한 방의 파괴력은 감히 리진철의 전격이 견줄 수 있는 급이 아니었다. 인간이든 몬스터든 저 벼락 앞에서는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벼락이라고?"

    인간이 하늘에 구름을 만들어내고 벼락을 떨어뜨리고 있다는 것을 믿으란 말인가.

    믿을 수가 없다.

    누구도 믿을 수 없을 것이다.

    그 믿을 수 없는 일이 지금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믿지 않을 도리가 없다.

    "하…하하."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우르르릉!

    벼락이 치는 소리와 함께 하늘에서 새하얀 뇌전이 바닥으로 내리꽂히기 시작했다.

    한 줄기, 두 줄기…….

    그리고 이내 벼락의 비가 온 세상을 눈이 부시도록 환히 밝히며 작렬했다.

    콰릉! 콰르릉! 콰광!

    "피, 피하시라요!"

    부관이 그를 잡아끈다.

    리진철은 힘없이 뒤로 끌려가면서도 떨어져 내리는 전격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세상의 종말이 거기 있는 것 같았다.

    하늘은 검은 구름으로 뒤덮여 빛조차 보이지 않았고, 검은 구름에서는 시리도록 하얀 뇌전이 끝도 없이 떨어져 내린다. 마치 벼락의 신이 인간을 징벌하듯이.

    세상을 끝장내 버릴 것 같은 벼락의 비가 내리치고 또 내리쳤다.

    "키키키키키킥."

    리진철은 실성한 듯이 웃었다.

    어떻게 해야 사람이 저런 힘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일까?

    악마와 계약이라도 해야 하나?

    악마라고 해도 지금 이지혁이 보여주고 있는 압도적인 위용에 미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이건 말 그대로 이적이었다.

    "그의 말이 맞았어."

    리진철은 힘없이 뇌까렸다.

    위험한 것은 몬스터가 아니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바로 저 인간이었다.

    이지혁.

    존재 자체만으로도 세상에 종말을 가져올 수 있는 자라더니, 그 말이 틀리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어쩌라는 거지?'

    저자와 맞서 싸우라는 건가?

    저자와?

    "키키키키킥."

    리진철이 광소를 터뜨렸다.

    차라리 두 주먹으로 산을 무너뜨리는 것이 빠를 것이다. 인간이 어떻게 저것에 대항할 수 있단 말인가.

    '혼자서는 무리다.'

    그 혼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 능력자들이 연합하여 대항한다면 상대할 수 있을까?

    그것도 미지수다.

    확실한 것은 연합을 하지 않는다면, 이 세계는 저자를 결코 상대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리진철의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끊어졌다.

    그리고 그 순간.

    하늘을 뒤덮고 있던 구름이 이지혁을 향해 쭈욱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어둠이 천천히 걷히고, 세상으로 빛이 쏟아져 내렸다.

    "아……."

    리진철은 볼 수 있었다.

    벼락의 비가 내린 곳에 벌어져 있는 참상을.

    매캐한 연기와 고기 타는 냄새 속에 처참한 핏덩어리가 되어 꿈틀대고 있는 마수들의 모습을 말이다.

    * * *

    리진철은 할 말을 잃었다.

    그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인세의 것이라 하기 힘들었다.

    "…해도 너무한 것 아니네."

    리진철의 입에서 실소가 새어 나왔다.

    지옥처럼 벼락의 비가 쏟아지는 것을 눈으로 보았다. 그러니 이런 모습이 될 것이라 예측하지 못한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예상하는 것과 눈으로 직접 보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인간이……."

    사람의 거죽을 뒤집어쓰고 어떻게 이런 일을 벌일 수 있단 말인가.

    지금은 북조선에서도 우스갯소리로나 전해지는 수령님의 이적이 생각나는 광경이다.

    '마음만 먹으면 왕도 되겠어.'

    적당한 교육 수준의 국가를 찾아서 이적을 몇 번만 보여준다면 이지혁을 신으로 받들어 모실 이들도 있을 것 같았다.

    당장 공화국만 해도 이지혁이 저런 모습을 보인다면 감동하지 않을 이가 몇이나 될까?

    리진철도 그 압도적인 위용 앞에 이렇게 가슴이 떨릴 지경인데 말이다.

    신으로 떠받들지는 못해도 존경하고 따를 수는 있을 것 같았다.

    '하필이면 저런 사람이 남조선에서 났다는 말인가.'

    적국이되 적국이 아닌 나라.

    그런 나라에 이지혁이 있다는 것이 뼈아프게 다가오는 리진철이었다.

    "뭐, 뭐이가 어드렇게 된 거네?"

    김룡성의 목소리에 리진철은 정신을 차렸다.

    "아……."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분명히 아까 적당히 조져 놓을 테니 마무리를 하라 하지 않았던가.

    아니나 다를까.

    숨이 끊어진 듯 뻗어 있던 괴물들이 꿈틀대며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살아는 있는 건가?"

    저만한 벼락을 맞고도 살아 있는 괴물들이 굉장한 것인지, 괴물들이 죽지 않을만큼을 계산하여 벼락을 내린 이지혁이 대단한 것이지, 도통 구분할 수 없는 리진철이었다.

    "뭐, 뭐하고 있네! 갈기란 말이다!"

    김룡성의 다급한 목소리에 리진철은 눈살을 찌푸리고 고개를 돌렸다.

    "갈기라 하지 않네!"

    "사령관 동무."

    "갈기……."

    "사령관 동무!"

    커다란 고함 소리에 김룡성이 깜짝 놀라 리진철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강하게 입술을 깨물었는지 피가 줄줄 흐르고 있는 리진철이 낮게 말했다.

    "진정하시라요."

    "아……."

    "급하게 마음먹을 일이 아닙네다."

    "그, 그렇디."

    "어차피 대포는 안 통합네다. 이제부터는 이쪽에서 해야 할 일이니 쓸데없이 헛힘 빼지 마시고 다들 뒤로 물리십시오."

    "괜찮겠네? 방어선이 워낙 넓지 않네?"

    "애새끼들이 괴물 놈들이랑 같이 말려 들어가면 그게 더 골치 아픈 거 아니겠습네까? 멀쩡한 놈들 하나라도 덜 죽이려면 이제 후퇴시켜야 합네다."

    "그래도……."

    리진철이 인상을 썼다.

    김룡성이 뭘 걱정하고 있는지를 알아챈 리진철이 대안을 말해주었다.

    "쭉 빼시지 말고 뒤쪽에다 새 방어선을 더 좁은 구역에 포진 시키면 될 거 아닙네까."

    "그러면 되겠구만!"

    리진철은 혀를 찼다.

    북한에서 후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전술적인 후퇴조차도 꺼리는 것이 북한의 분위기였다.

    실제 당에서는 후퇴를 금지한 적이 없지만, 작은 꼬투리라도 잡으면 그것을 바탕으로 상대를 끌어내리기에 급급한 북한의 당내 정치 상황이 사람들을 경직시키고 있었다.

    더구나 김룡성은 리진철처럼 대체 불가능한 존재도 아니었다. 그러니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해는 하지만…….'

    리진철은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은 당에 대한 불만을 가질 때가 아니었다.

    '저 인간만 보지 않았더라면…….'

    공화국이 남조선이 비해 사정이 열악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이제는 북한 주민들도 당연하게 알고 있는 사실이다.

    군사력도 밀린다. 공화국이 핵에 집착하는 이유가 지속적인 전쟁을 할 수 있는 유지력이 없기 때문이 아니던가.

    그래도 능력자 전력만큼은 밀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전 세계의 전쟁 양상이 능력자전으로 대체되기 시작한 시점이니, 지금까지의 부진을 단번에 뒤집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저 괴물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알고 싶지 않은 현실이라는 것도 있는 법이지."

    리진철은 고개를 털어내 잡념을 날려 버리고는 소리쳤다.

    "가자! 괴물들이 일어나기 전에 털어버려야 한다!"

    "예!"

    인민 무력 여단이 쓰러져 있는 괴물들을 향해 돌진했다.

    * * *

    "워."

    이지혁이 그 광경을 보고는 낄낄댔다.

    "쟤는 눈치가 참 빠르다니까?"

    그닥 좋은 일로 엮인 적은 없지만, 다른 북한 사람들에 비하면 빠릿빠릿한 점은 좋았다. 이지혁과는 그리 크게 엮인 적이 없으니 악감정이 남아 있는 것도 아니고.

    "눈치가 빠르긴 뭐가 빠릅니까. 아, 빠르긴 빠르네요. 약삭빠르죠."

    최정훈은 악감정이 남은 모양이었다.

    하기야 몬스터를 상대하는 와중에 뒤치기를 당했으니, 감정이 남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하다. 원래 게임할 때도 가장 열 받는 게 몹 잡다가 뒤치기당하는 것 아니던가.

    그렇게 캐릭터만 죽을 뻔해도 열이 받아 정신 줄을 놓는 게 사람인데, 사람이 죽을 뻔했으니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긴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딱히 손 써주지 않을 것처럼 구시더니, 너무 힘 빼신 것 아닙니까?"

    "…힘 조절이 잘 안 돼서……."

    이지혁이 머리를 긁었다.

    이렇게까지 요란하게 일을 벌일 생각은 없었건만, 육체 안을 채우고 있는 마나가 넘치는 느낌에 자신도 모르게 힘을 좀 과하게 쓰고 말았다.

    "이런 기분이 워낙 오랜만이라……."

    이지혁도 실수를 한 것이 겸연쩍은지 평소라면 하지 않을 말까지 하고 있었다.

    "이제 저들이 처리하게 놔두면 되는 건가요?"

    "흐음……."

    이지혁의 입가에 미묘한 미소가 맺혔다.

    "또또. 무슨 일을 벌이시려구요?"

    최정훈이 이지혁의 미소에 보이는 장난기를 발견하고는 기겁하여 외쳤다.

    이지혁이 저런 미소를 지을 때마다 항상 사고가 터졌다. 그걸 기억하고 있는 최정훈에게는 저 미소가 악마의 미소처럼 보였다.

    아니, 악마가 맞던가?

    "제가 뭘 하겠어요?"

    이지혁이 낄낄 웃으며 주저앉아 오식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껑껑!

    오식이가 기분 좋게 짖었다.

    "딱히 뭘 하려는 게 아니라 그냥 지켜보는 거죠."

    "지켜봐요?"

    "저렇게 만들어놨다고 쟤들이 만만해 보여요?"

    "……."

    이지혁은 낄낄대며 웃었다.

    '약해 빠졌어.'

    베라프와 인류가 붙으면 공멸한다.

    그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저만한 몬스터를 막아내는 것은 인류보다 배라프가 몇 배는 더 수월하게 해낼 수 있다.

    몬스터의 침입이라는 것을 수만 년 동안 겪으면서 체제를 발전시켜 온 베라프와 몬스터에 대한 면역이 없는 지구의 차이였다.

    대물저격총을 막지는 못해도 고위 성직자는 몬스터를 혼자서 수천 마리 막을 수 있는 대몬스터 병기이고, 고위 마법사는 혼자서 전장의 지형을 바꿔 버릴 수 있는 존재다.

    고위 기사는 전차급 파괴력은 낼 수 없을지 모르지만, 몬스터를 상대로는 전차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바리게이트를 쌓을 수 있다.

    "만만한 것들 상대로 편하게 살아온 거지."

    5년의 세월 동안 나름 대응 체계를 쌓았다고 자신만만해하는 모양인데, 진짜 몬스터란 존재들은 그런 얄팍한 대응으로 상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NDF들은 이지혁과 엮이면서 자신들이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 실감했고, 미국 역시 같은 길을 걸었다. 그리고 이제는 북한이 느낄 차례였다.

    * * *

    "먹히지 않습네다!"

    "알았으니 갈기라!"

    "알갔습네다!"

    "도, 동무! 괴물 놈들이 일어섭네다!"

    "나도 눈이 있다 하지 않았네!"

    리진철은 미칠 지경이었다.

    그도 눈이 있으니 괴물들이 슬금슬금 몸을 일으키는 것은 볼 수 있었다.

    "적당히 해야지 않네!"

    리진철은 이를 갈았다.

    그만한 대미지를 입은 괴물들에게 있는 힘껏 에테르를 갈기고 있는데, 피해를 더 입기는커녕 회복을 하며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 리진철의 자존심을 사정없이 깔아뭉개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해야 막을 수 있단 말인가.'

    막을 수는 있는 건가?

    "갈기라! 있는 힘을 다 짜내란 말이다!"

    퍼엉! 퍼엉!

    곳곳에서 가죽 북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겨우겨우 한 마리씩 쓰러뜨리고는 있지만, 그게 다였다.

    수천 마리의 괴물들을 상대하기에 그들은 너무도 미약했다.

    "종간나 새끼들……."

    리진철은 힘없는 목소리로 뇌까렸다.

    위기감은 사라졌다.

    어떻게 하든 저 리지혁이라는 놈이 마지막을 해결할 것이라는 생각이 그의 가슴 한구석에 자리 잡았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저 실력으로 진 것이 아니라 마음마저 꺾여 버린 것이다.

    "하하하……."

    리진철은 허탈하게 웃었다.

    몬스터들이 하나하나 몸을 일으키더니 으르렁대기 시작한다.

    "도, 동무! 어떡합네까?"

    "이러다 다 죽습네다!"

    자랑스런 공화국의 전사들이 계집애처럼 징징대는 꼴을 보고 있으려니, 그가 가진 자부심이 모조리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탓할 것도 없다.'

    그조차도 지위와 체면이 아니었다면 진즉에 도망갔을 것이다. 이미 한 번 후퇴를 하지 않았던가.

    "어떡하기는 뭘 어떡하네."

    리진철이 고개를 돌려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손 놓고 빌 수밖에 더 있네?"

    "낄낄낄낄."

    이지혁은 자신을 바라보는 리진철을 보며 장난스레 웃었다.

    "사태 파악 빠르다고 했잖아요."

    "자존심이 없는 거죠."

    "뭐,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최정훈을 보며 이지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서… 좀 더 골려줘요?"

    "그랬으면 좋긴 하겠지만……."

    최정훈의 눈에도 몸을 일으키는 몬스터들이 보였다.

    "까딱하다가는 다 죽겠네요. 저게 공세로 전환되면 순식간에 죽어 나가겠죠?"

    "아마도?"

    "그럼 안 되죠. 이제 슬슬 처리를 해주셔야 할 것 같은데요?"

    "흐음……."

    이지혁이 미묘하게 웃다가 대답했다.

    "그러죠, 그럼."

    최정훈의 눈이 의문으로 물들었다.

    지금이 이지혁에게는 가장 적기다. 보통의 이지혁이라면 이런 상황을 앞두고 협상을 한다든가 뭔가 얻어내려 했을 텐데, 오늘은 이상하게 순순히 그의 말을 들어주고 있었다.

    '뭔가 노림수가 있는데?'

    최정훈이 그 노림수를 채 알아내기도 전에 이지혁이 양 손을 허공으로 들어 올렸다.

    "슬슬 그럼 애들 밥을 줘볼까?"

    "네?"

    "낄낄낄낄."

    이지혁의 양손에서 뻗어 나간 마나가 허공에 괴이한 문양을 그려내더니, 이내 커다란 검은 게이트를 만들어냈다.

    "…설마?"

    이지혁이 허공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얘들아! 밥 먹을 시간이다."

    "그, 그만두십……."

    하지만 최정훈이 미처 만류하기도 전에 허공에서 게이트가 입을 쩌억 벌리더니, 몬스터들이 마치 거대한 탁류처럼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 이 미친 인간아!"

    "낄낄낄낄."

    이지혁의 눈이 광기로 물들었다.

    "몬스터를 상대하는 데는 몬스터가 제격인 법이죠. 이이제이 몰라요?"

    "그건 오랑캐고!"

    "오랑캐나 몬스터나."

    이지혁은 입에 피거품을 물며 바닥으로 추락하는 몬스터들을 보며 광소를 터뜨렸다.

    "많이 굶었잖아. 먹어 치워라!"

    크르르르륵!

    카아아아아아!

    몬스터들의 거대한 울부짖음이 북한 땅을 쩌렁쩌렁 울리기 시작했다.

    그 악귀와도 같은 울부짖음에 사태를 주시하던 군인들이 기겁을 하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지?"

    넋을 놓은 리진철의 뇌까림이 그들의 심정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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