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64화 (64/118)
  • [■] 네? 뭐 잘못 드셨어요? [■]

    ─────

    "와, 이거 호텔 좋은데?"

    이지혁은 푹신해 보이는 침대에 뛰어들었다.

    몸이 푹 잠기는 것이, 비싼 침구가 분명했다. 집에도 이런 침구가 있다면 좋을 텐데. 관리하기 귀찮다는 어머니의 한마디가 모든 것을 정리해 버렸다.

    "그냥저냥 지낼 만하겠네."

    하지만 에르카나의 눈에는 영 성에 차지 않는 모양이었다.

    마계에서 온갖 사치를 부리는 그녀의 눈에는 7성급 호텔도 눈에 들어오지 않을 텐데, 이런 곳이야 마구간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그나마 이지혁이 있으니까 지내보겠다는 것일 테지.

    "재미있는 곳이야."

    "여기?"

    "응."

    에르카나는 진득한 미소를 지었다.

    "이 세계에서 느끼지 못했던 공포와 불안이 가득하네. 베라프쯤은 되어야 느낄 수 있는 분위기인데?"

    "그렇겠지."

    이지혁은 심드렁하게 침대에 몸을 파묻었다.

    뭐, 북한이야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부조리가 현존하는 국가이다 보니, 베라프와 크게 다를 것도 없었다.

    "그래도 사는 건 좀 나으니까."

    "응, 그렇지."

    에르카나는 그 말을 끝으로 북한에 대한 관심을 끊어버렸다. 그녀가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응?"

    "악의가 느껴지던데?"

    "악의?"

    "응. 달링을 향한 악의. 아주 진득하고 맛있어 보이는 악의가 느껴졌어."

    "흐음……."

    이지혁이 몸을 일으켰다.

    북한에서 자신에 대해 악감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었다. 일단 북한의 입장에서 NDF는 주적이나 다름없고, 그중에서도 이지혁은 남한의 가장 강한 전력이었으니까.

    이지혁이 사라진다면 남한의 타격은 어마어마할 것이다.

    이 기회에 암살이라도 시도해서 남한에 타격을 주겠다는 주전파가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생각은 있겠지.'

    이지혁이 없으면 지금 몬스터 웨이브를 막아낼 여력이 북한에는 없다. 그것도 고려하지 않고 지금 이지혁을 암살하려 들지는 않을 것이다.

    "죽이러 오지 않을까낭?"

    에르카나는 기대된다는 듯 콧소리를 냈다.

    "끄응."

    이지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버렸다.

    하기야.

    밤을 지배하는 서큐버스 퀸이 있는 곳에서 암살이라니. 물속에서 맨몸으로 상어와 싸우는 격이다.

    "괜히 사고 치지 마."

    "응? 내가? 에이, 달링도. 내가 사고나 치는, 그런 여자야?"

    "……."

    이지혁은 눈물을 삼켰다.

    '사고나 치는 여자냐고?'

    니가 친 사고 수습하느라 내가 한 고생을 말하자면 하루 밤낮이 하니라 한 달 밤낮도 모자란다.

    내가 누구 때문에 마왕이 됐는데!

    이지혁이 부들부들거리고 있자 에르카나가 이지혁에게 달려들었다.

    "꺄핫! 울 달링 화났어?"

    "끄으으응."

    이지혁은 얼굴을 들이미는 에르카나를 쭈욱 밀어냈다.

    "넌 마계로 안 돌아가나?"

    "돌아가야지."

    "언제 가냐?"

    "으음, 달링이 죽으면?"

    "…안 돌아간다는 말보다 더 무섭네."

    이지혁에게는 평생일지 모르겠지만, 에르카나에게는 눈 깜짝할 새겠지.

    "그런데 달링."

    "응?"

    "안 무서워?"

    "뭐가?"

    "죽음이란 거 말이야."

    이지혁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드러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조금 시간이 지나고 이지혁이 입을 열었다.

    "난 너무 오래 살았어."

    "얼마 안 산 거 같은데……."

    "그건 너희 기준이고."

    마족의 기준으로 인간을 논하지 말란 말이다!

    "인간의 기준으로 보자면 나는 이미 화석이나 다름없지. 삶이 너무 오래됐어."

    "흐응?"

    에르카나는 코웃음을 쳤다.

    "거짓말하네. 달링에게 있어서 지금까지의 시간은 그저 멈춰 있던 시간일 뿐이잖아. 꿈이나 다름없지. 사람이 꿈속에서 천 년을 살았다고 해서 실제 삶에서 노인이 되지는 않는 거야. 아니야?"

    "……."

    "달링은 수천 년의 삶을 산 마왕이기도 하지만, 스무 살의 청년이기도 하지. 그리고 가면 갈수록 후자 쪽으로 좀 더 기울고 있을 거고. 제자리를 찾아가는 거잖아."

    "흐음……."

    이지혁은 반박하지 못했다.

    베라프에서 이곳으로 돌아왔을 당시의 이지혁은 거칠 것이 없었다. 가족이 아니라면 누구도 그의 앞을 막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이지혁은?

    그러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이미 여러 가지에 휘둘리고 있었다.

    관계를 맺고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신경 쓰지 않으려 해도 관계가 맺어져 버리면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다.

    수없이 배신당하고 고통을 받았음에도 아직 인간과의 관계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 미련할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인간인 거잖아."

    "남의 마음 읽지 말라고 했지."

    에르카나는 고혹적으로 웃었다.

    비웃음이 섞인 저 웃음.

    태생적인 서큐버스라 어찌 고칠 수도 없는 저 웃음이 이지혁은 싫었다.

    "정말 인간과 관계를 끊고 싶다면 인간이 아니면 되는 거지. 마족이 돼버려."

    "정말 그걸 원해?"

    "달링은 절대 그러지 않을 거니까. 이렇게 말하면 부들거리는 게 재밌어."

    "이래서 마족이라는 것들은."

    이지혁은 한숨을 내쉬었다.

    인간을 농락하고 가지고 노는 것을 유희거리로 삼는 마족의 특성은 이만한 관계가 되어서도 달라지지 않는다.

    "남을 놀리는 게 재밌어?"

    "아니. 달링을 놀리는 게 재밌는 거야."

    "내가 싫어한다고 해도?"

    "말은 그렇게 하지만, 정말 싫어하지는 않는 걸 아니까 말이야."

    "휴……."

    이지혁은 눈을 감아버렸다.

    속속들이 서로 잘 안다는 것은 이렇게 불편하기도 하다.

    "언제까지 인간들을 도울 셈이야?"

    "내 마음이지."

    "결국에는 막을 수 없어진다는 것 알잖아?"

    "막을 수 있을 때까지는 막아야지."

    "달링."

    이지혁은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에르카나를 바라보았다.

    에르카나도 이지혁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이제 그만 현실을 봐."

    "알아."

    "달링은 더 이상 멸망의 좌도 아니고, 마왕도 아니야. 인류라는 것을 짊어지기에는 그 어깨가 너무 작아. 어깨뼈가 내려앉아 버릴걸?"

    "안다니까."

    "정말 알고 있는 걸까나?"

    이지혁은 눈살을 찌푸리고 에르카나를 바라보았다.

    이지혁의 시선을 받은 에르카나가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나라고 이런 말을 하고 싶어서 하는 건 아니니까. 남편이 약해졌다는 말을 하는 나도 상처 받는다고."

    "말은 잘하는군."

    "여튼 달링, 할 수 있는 일만 해야 해. 오히려 달링이 신성에 도달했을 때는 인간이라는 것들에 대해 관심이 없었으면서 왜 이제 와서 집착하는 거야?"

    "베라프의 인간과 이곳의 인간이 같다고 생각해?"

    "다를 게 있어?"

    "다를 게 없다고?"

    에르카나는 입가에 비웃음을 담았다.

    "착각하지 마, 달링. 그들이나 이들이나 다를 것이 없어. 다른 게 있다면 이들은 달링을 동족으로 여긴다는 것이고, 그들은 달링을 동족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뿐이지. 이곳에서도 달링이 그들이 느꼈던 정도로 외모가 다르다고 생각한다면 그리 다를 것 없을걸? 팔 다섯 개 달리고, 다리 여섯 개 달린 채 다른 말을 쓰는 인간을 누가 인간이라고 하겠어?"

    "……."

    "베라프의 인간이 이상한 게 아냐. 인간은 원래 그런 것이지. 알고 있잖아?"

    "그래, 안다."

    이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박해한 것도 인간이고, 나를 괴롭힌 것도 인간이지. 그리고 내가 죽인 것들도 인간이라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어."

    아니라고 하는 건 그저 현실도피일 뿐이지.

    "하지만 나도 모순투성이의 인간이기에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르게 느낄 수밖에 없는 거야."

    집 밖을 돌아다니는 들개와 집 안에서 키우는 애완견이 다르듯이 말이야.

    똑같은 개지만 다른 개인 거지.

    "달링이 그렇다면야 그런 거겠지만……."

    에르카나는 미묘한 시선으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감당하지 못할 것을 감당하려 하다가는 살아서 지옥을 겪게 된다는 걸 모르지는 않잖아?"

    "그래서?"

    이지혁은 피식 웃고 말았다.

    "감당하지 못할 일이니 손이나 놓고 있다가 때 되면 죽으라는 건가? 그게 네가 말하는 편해지는 방법이야?"

    "달링은 굳이 이곳에 집착할 필요가 없잖아?"

    "너는 마계가 없어진다면 어떨 것 같아?"

    "아쉽겠지. 하지만 그게 전부야. 내가 마계보다 중요하니까."

    이지혁은 고개를 저었다.

    "나 자신을 세상보다 소중하게 여기기에는 난 너무 오래 살았어. 쉴 곳이 없는 삶이라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지 너무 많이 겪었어."

    "그럼 이 세상이 필요한 이유가 달링을 위해서라는 거야?"

    "그래?"

    "흐음, 납득이 갈 것 같기도 하고, 가지 않을 것 같기도 하고……."

    "이해할 필요는 없어."

    이해 받을 필요도 없고.

    이지혁은 그런 걸 원한 적이 없었다. 어차피 이해 받지 못하는 삶은 익숙하니까.

    "좋아. 아무래도 좋은 거니까. 대신에……."

    에르카나가 천천히 다가와 이지혁의 볼을 핥았다.

    "마음대로 죽어버리면 용서하지 않을 거야."

    "큭큭큭."

    "항상 마음대로야."

    "뭐가?"

    "옆에서 말리고 난리를 쳐도 언제나 하고 싶은 대로만 하잖아."

    "그랬나?"

    "말해 뭐하겠어. 고집불통."

    이지혁은 가만히 에르카나를 바라보았다.

    짜증이 나고 때때로 정말 죽여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사람을 괴롭혀 대지만, 에르카나가 아니었다면 과연 이지혁이 이 세계로 돌아올 수 있었을까?

    돕는다 말만 하고 그를 막아서던 아펠드리체 같은 것들에 비하자면 에르카나는 정말 성심껏 그를 도왔다.

    "…인정하긴 싫지만 말이야."

    "흐응?"

    에르카나가 이지혁의 볼을 쓰다듬었다.

    "마왕의 사랑을 받는 남자로서 자부심을 가져도 좋아. 특히나 나는 특별하니까."

    "자기 입으로?"

    "예쁘잖아?"

    "끄응."

    이지혁은 고개를 저어버렸다.

    예쁘기야 예쁘지, 서큐버스 퀸이니까.

    아마 이쁜 걸로 따지면 마계에서도 가장 이쁠 테니까.

    이지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 안에 담긴 콜라를 집어 들어 뚜껑을 열었다.

    "캬!"

    이 맛이지.

    내가 이 맛을 천 년이 넘게 찾아 헤맸는데…….

    창으로 다가가 보니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모든 불이 꺼진 도시를 내려다보니 이곳이 북한이라는 것이 새삼 실감 났다.

    "음……."

    "왜?"

    "음, 뭐랄까… 좀 불편한 느낌이 들어서. 안정이 안 된다고 할까?"

    "그래?"

    "흐음, 잠이 잘 올까 모르겠네."

    에르카나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집에 가면 되잖아?"

    "어?"

    "도마뱀 불러. 집에 가자. 집에 가서 자고 오면 되지."

    그러네?

    이지혁은 게이트를 열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이 세계로 돌아오고 나서 다른 데서 잠을 자본 기억이 없는 이유가 있었구나."

    게이트도 열 수 있는데 집에 가서 자면 그만이지 뭐하러 이런데서 잔다는 말인가.

    호텔이고 개뿔이고 집이 최고다!

    "가, 가자."

    이지혁이 게이트를 열었다.

    그사이, 에르카나가 아펠드리체를 데리고 왔다.

    "이, 이지혁 씨!"

    최정훈이 아펠드리체를 끌고 가는 에르카나를 보고 냄새를 맡았는지 헐레벌떡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저 집에 가서 자고 올게요."

    "어디 간다고요?"

    "집에요."

    집에 왜 가, 이 미친놈아!

    최정훈이 뭔가 말을 하기도 전에 이지혁들이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

    그래도 착하네.

    게이트 안 닫고. 만약 닫기라도 했으면…….

    그 순간, 게이트가 닫혀 버렸다.

    "……."

    최정훈은 게이트가 닫힌 곳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천장을 올려다보며 일생에 다시없을 욕을 내뿜었다.

    하지만 곧 달려온 보안위원들 때문에 필사적인 변명을 해야 했다.

    * * *

    "거, 사람 뚱하기는."

    부들.

    최정훈은 죽일 듯한 눈빛으로 이지혁을 노려보았다.

    "아, 거, 잠 좀 편하게 자고 온다는데, 왜 그렇게 난리예요? 전화기 불나겠네. 부재중 전화 80통이 말이나 돼요?"

    "오죽하면 그랬겠습니까! 오죽하면!"

    "어련히 알아서 안 올까 봐."

    "으으으."

    최정훈은 자신에게 능력이 없다는 것이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능력만 있다면 이기지는 못해도 저 재수없는 면상에 한 방 정도는 먹여줄 수 있었을 텐데!

    '내가 멍청했지.'

    그래도 그동안 이지혁이 말을 좀 들어준다고 생각했던 게 실수였다. 원래 이런 인간이었는데!

    "북한이지 않습니까! 북한이었다구요! 오늘은 작전에 참여해야 하는데 제시간에 못 오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 했습니까?"

    "왔잖아요."

    그래, 왔지.

    내가 부재중 전화를 80통을 남겼지!

    난 니가 없는 동안 보위부에 끌려갈 뻔했단 말이다!

    최정훈은 입으로 불을 뿜을 수 없는 것이 아쉬웠다. 가능만 했다면 지금의 그의 심정을 표현할 수 있었을 텐데.

    "크으으."

    최정훈이 뱃속에 숯을 삼킨 심정으로 몸을 오그렸다.

    '참자.'

    참아야 한다.

    이제 곧 작전인데 이지혁을 자극해서 좋을 게 없었다.

    좋을 게 없는데…….

    "사람이 상황을 보고 행동을 해야지! 사람이!"

    참지 못한 최정훈이 불타오르고 말았다.

    "거참, 잔소리 진짜."

    "이게 잔소립니까! 이게 잔소리야?"

    이지혁은 대꾸하지 않고 귀에 이어폰을 끼더니, 노래를 크게 틀었다.

    "으아아아아!"

    더 참지 못한 최정훈이 발악을 하자 서아영이 달려들어 질질 끌고 갔다.

    "진정해요."

    "제가 진정하게 생겼습니까!"

    "그래서 북한 애들 다 보는 데서 나라 망신 시킬 일 있어요?"

    "끄으으으응."

    최정훈이 앓는 소리를 내다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이고,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서아영은 처음으로 최정훈을 위로하고 싶어졌다. 다른 대원들도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다.

    그래.

    따지고 보면 저 인간이 그동안 그 난리를 친 것도 이지혁을 어떻게든 일 시켜보겠다는 일념으로서 한 일이 아니던가.

    모든 원인은 이지혁인 것을.

    "진정해요, 최정훈 씨. 원래 그런 사람인 걸 알잖아요."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게 실수였습니다."

    뭐랄까.

    지금 이 기분은?

    사자를 애완동물로 키워서 '이제는 우리는 가족이다'라고 생각하고 껴안았는데, 어느 순간 내 머리가 사자 입안에 들어가 있을 때 느끼는 배신감과 공포감?

    야생동물은 야생동물이고, 이지혁은 이지혁인 것이다.

    내 입장과 내 사정을 고려해 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 얼마나 무모한 짓거린지를 알게 되자 새삼 이지혁이라는 인간에 대한 이해도가 증가한 기분이었다.

    "내가 잘못했네."

    바라지 말아야 할 것을 바란 게 잘못이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최정훈은 깊게 한숨을 쉬었다.

    "우리끼리 싸우고 있을 때가 아니잖습니까?"

    김다현이 슬그머니 입을 열자 최정훈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곳이 어딘지를 생각하면 이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알고는 있는데… 속에서 자꾸 열불이 치솟는 것을 어쩌란 말인가.

    최정훈은 담배 한 대가 너무 간절해졌다.

    "…차 세우고 한 대만 피우고 가면 안 됩니까?"

    이지혁이 이어폰을 뺐다.

    "어? 그럼 나도 피울래요."

    "으아아아아아! 니가 왜 답답해!"

    "최정훈 씨, 진정해요!"

    최정훈이 발작을 시작하자 주변 사람들이 우르르 달려들어서 잡아 눌렀다.

    "거, 그 양반 성격 이상하네. 담배 한 대 피우겠다는데."

    "끄으응."

    최정훈이 왜 발작을 하는지 이해하는 사람들은 그저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저 인간이 방파제였네.'

    '인간 억제기여.'

    최정훈이 이성을 잃기 시작하자 이지혁이 부담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의외로 저 인간이 일을 많이 했구나.'

    '바쁜 척하는 게 아니었네.'

    비로소 최정훈의 소중함을 알게 된 사람들이 하나둘 다가와 최정훈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러고는 말했다.

    "야, 이 새끼야. 너 아까부터 뭐하는 거야?"

    어?

    고개를 돌려 자신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있는 정인수를 발견한 최정훈이 얼이 빠져 말했다.

    "예?"

    "너 여기가 어디야?"

    "부, 북한입니다."

    "정신 놨어?"

    "아닙니다."

    "이 새끼가 보자 보자 하니까. 정신 안 차리지?"

    "죄송합니다."

    최정훈이 고개를 푹 숙이고 일어났다.

    "앞에 연락해서 잠깐 물 좀 빼고 간다고 해."

    정인수의 지시가 떨어지자 얼마 안 가서 버스가 멈춰 섰다.

    정인수와 최정훈이 버스에서 내려서 담배를 물었다.

    "피워."

    "예."

    최정훈은 정인수가 준 담배를 물고는 깊게 빨았다.

    "마."

    "예."

    "너 인마, 요즘 하는 짓이 영 마음에 안 든다?"

    "죄송합니다."

    "그냥 말로만 '죄송합니다' 하지 말고. 너 여기 소꿉장난 왔어?"

    최정훈은 갑자기 자신이 훈계를 받는 상황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지혁 씨가 니 친구야?"

    "그건 아닙니다."

    "넌 여기 임무를 맡아 온 거고, 니 임무는 이지혁 씨를 컨트롤하는 거잖아. 아냐?"

    "맞습니다."

    "그런데 그 컨트롤에 인정이나 호소가 들어가면 어쩌자는 거야? 니가 오늘 이지혁 씨 처음 봤어도 그런 식으로 나오겠냐?"

    "아……."

    "사람이 달라진 건 이지혁 씨가 아니라 너야. 예전에는 집 앞에 열린 게이트에 이지혁 씨 보내는 걸로도 온갖 고생은 다 했었잖아. 그러면서도 그걸 이상하다고 여기지 않았는데, 요즘 보면 너는 해주는 건 하나도 없으면서 이지혁 씨가 당연하게 고생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 같더라?"

    "……."

    "그게 쉬운 일이면 나라에서 미쳤다고 비싼 월급 주면서 사람 부리겠어? 너도 니 밥값은 해야지. 아냐?"

    "맞습니다."

    "정신 차려."

    "예."

    최정훈은 정인수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느꼈다.

    정인수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언제부터 저 사람이 내가 해달라는 일을 당연하게 해주는 사람이었더라?'

    사실 따져 보면 북한까지 순순히 와준 것만 해도 예전의 이지혁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 이상을 바라다니…….

    최정훈은 씁쓸함을 곱씹었다.

    '잘해주면 기어오르는 게 사람이라더니.'

    그도 그런 경우를 몇 번이나 보면서 자신은 결코 그러지 않겠다고 다짐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자신이 느끼지도 못하는 사이에 똑같은 짓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지혁은 그의 부하도 아니고, 동료도 아니다.

    정확하게 따지자면, 계약이 되어 있는 외부 인사다. 그런데 외부 인사에게 인정을 바라다니.

    '언제부터 내가 이렇게 허술해졌지?'

    최정훈은 새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갑자기 가슴속이 싸해졌다.

    "정신 차렸어?"

    "예. 제가 멍청했습니다."

    "이지혁 씨가 한 일이 일반적인 상식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거야 알아. 그런데 너는 그런 걸 이해해야지. 아냐? 다른 사람은 화를 내더라도 너는 화내면 안 되는 거잖아."

    "맞습니다."

    "자꾸 그런 모습 보이지 마. 내가 너 빠졌다고 했지?"

    "예."

    최정훈은 고개를 푹 숙였다.

    반쯤은 꼰대짓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최정훈의 마음가짐이 과거와는 많이 달라졌던 것이다.

    "내가 알던 최정훈이로 돌아와. 요즘 보면 슬슬 짜증나니까. 이지혁 씨랑 같이 놀고먹는다고 니가 이지혁 씨가 된 건 아냐."

    "명심하겠습니다."

    최정훈은 버스로 올라 이지혁에게로 다가갔다.

    "이지혁 씨."

    "또 무슨 잔소리를 하려구요!"

    "죄송합니다."

    "네?"

    "제가 좀 건방졌던 것 같습니다."

    "왜 이래요, 갑자기?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죽는다더니. 괜찮아요? 건강검진 한 번 받아봐야 할 것 같은데?"

    "……."

    이 새끼는 사람이 좋은 의도로 말을 하는데, 꼭!

    "아, 앞으로는 주의하겠습니다."

    "젊은 사람이. 쯧쯧."

    이지혁이 안됐다는 얼굴로 바라보자 최정훈은 다시 울컥 하고 말았다.

    이거구나!

    내가 이상해진 이유가!

    이 인간 옆에 있는데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최정훈이 부들거리다가 심호흡을 했다.

    '진정하자.'

    예전에는 서아영이 발작을 하면 최정훈이 말리는 입장이었는데, 이제는 반대로 되었다는 것부터가 문제였다.

    일단 정신을 바짝 차리고…….

    "…현장에 도착하면 여러 가지 도발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요?"

    "네. 그렇지만 이들과 트러블이 있어서 우리가 좋을 게 없습니다."

    "그렇겠죠."

    "그러니, 음……."

    "왜 말을 하다 말아요?"

    최정훈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이것도 잘못됐네요. 생각해 보니 제가 해야 할 일은 이지혁 씨보고 참으라고 하는 게 아니라 애초에 그럴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차단을 하는 거였는데. 이리 보니 제가 그동안 많이 잘못하고 있었다는 게 실감이 납니다."

    "네? 뭐 잘못 드셨어요?"

    '그냥 하던 대로 할까?'

    차라리 그냥 하던 대로 하는 게 더 편할 것 같다.

    "거참, 이상하네. 별것도 아닌 일에다 난리란 난리는 다 치더니 잠깐 나갔다 왔다고 사람이 갑자기 미안하다 그러고. 안정제라도 드셨어요? 약 빠셨나?"

    그래.

    그냥 하던 대로 하자! 돌아가긴 뭘 돌아가!

    최정훈은 부들부들 거리다가 얼굴을 마구 문질렀다. 이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이미 몇 달이나 이지혁에게 젖어버린 몸은 제 멋대로 분노를 뿜어내고 있었다.

    '진정하자.'

    "휴우."

    최정훈은 깊게 심호흡을 했다.

    "여튼 이지혁 씨에게는 최대한 귀찮은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제가 신경을 쓰겠습니다. 그러니 이지혁 씨께서도 한 번만 더 참아주십시오. 정도를 넘었다고 생각이 된다면 저도 말리지 않겠습니다."

    "듣다 보니 좀 그런 게……."

    "네?"

    "제가 무슨 사고 치고 다니는 사람도 아니고, 저한테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네요."

    "……."

    최정훈은 더 이상의 대화가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하튼 그렇게만 알고 계시면 됩니다."

    "넹."

    말도 잘 듣지.

    대답도 잘하고.

    정인수가 그 광경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지혁의 성격이 어떻든 간에 이지혁은 NDF와 대한민국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다. 사람이 초심을 잃게 되면 더 많은 것을 바라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하지만, 그 와중에 이지혁이 기분이 나빠져 버리면 NDF의 존재 의의 자체가 사라진다.

    어련히 알아서 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동안은 입을 떼지 않았지만, 최정훈이 균형을 잃은 지금은 그라도 나서서 균형을 잡아 주는 게 맞았다.

    '나아지겠지.'

    하루아침에 달라질 문제는 아니지만, 이제 생각이 바뀌었을 테니 곧 효과가 나타나리라 믿었다.

    "이제 도착할 때가 되었습니다."

    정인수의 말에 다시금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몬스터와 싸우러 가는 길이지만 우리가 정말 주의해야 하는 것은 몬스터가 아니라는 것은 여러분도 잘 아실 겁니다. 우리 방위사는 여러분을 지키기 위해서 최선을 다 할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께서는 우리를 믿고 스스로의 일에 전념해 주십시오."

    "예!"

    대답이 들려오고 버스가 멈춰 섰다.

    "하차하겠습니다."

    버스 문이 열리자 이지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어디 가볼까?"

    이지혁의 입가에 미묘한 미소가 감돌았다.

    최정훈은 그 미소를 보며 어쩐지 불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또 무슨 짓을 하려고!"

    "제가 뭘요?"

    이지혁이 휘파람을 불며 버스에서 내렸다.

    * * *

    버스에서 내리자 뭔가 을씨년스러움이 느껴진다.

    "흐음."

    이지혁은 주위를 둘러보며 위화감에 사로잡혔다.

    "뭔가 좀 이상한데?"

    "뭐가?"

    정해민이 묻자 이지혁이 고개를 내저었다.

    "뭐라고 딱히 설명은 못하겠는데, 보고 있자니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최정훈이 이지혁의 기분을 대신 해석해 주었다.

    "인공물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네?"

    "한국에서는 오지로 가더라도 최소한의 전신주라든가 하는 게 있기 마련이거든요. 주변에 그런 게 안 보이다 보니 이상한 위화감을 느끼게 되는 겁니다."

    "그런가?"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다고 하기에는 이지혁은 인공물이 없는 세상에서 너무 오래 살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 말을 그냥 믿기에도 이상한 것이…….

    "저것들은 인공물 아닌가?"

    이지혁이 가리킨 곳에서는 좌우로 길게 진형을 갖춘 북한군들이 있었다.

    "와우."

    최정훈도 감탄성을 냈다.

    "가용 가능한 병력을 다 끌어왔다고 하더니."

    적어도 십만 단위는 넘는 병력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운집해 있었다.

    "대단하다고 말해주고 싶지만……."

    실질적으로 저들이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를 생각해 보면 쓸데없이 피해를 늘리는 것밖에는 되지 않는다.

    이곳에 운집한 병력 중 대부분은 개인화기로 무장을 하고 있고, 그 개인화기라는 것은 인간을 상대로 사용할 것을 전제로 만들어진 무기들이다.

    레벨 1짜리 게이트에서 튀어나오는 고블린 수준의 몬스터들에게도 잘 먹히지 않는 개인화기로 레벨 6급 몬스터를 어떻게 막겠다는 것인가.

    대한민국에서도 대게이트 작전에 개인화기를 사용하기는 하지만, 그건 살상용이라기보다는 저지용으로 쓰는 것이다. 이곳처럼 먹히지도 않을 곳에 투입하여 인명을 낭비하지는 않는다.

    '아니, 생각해 보면…….'

    어쩌면 개인화기가 아니라 인간, 그 자체를 저지용으로 사용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끔찍하군."

    "뭐가요?"

    "아니, 아닙니다."

    이지혁은 최정훈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다는 듯 피식 웃었다.

    "나라가 망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으니까요."

    "……."

    "뭐, 반쯤은 동의해요. 이종족에게 나라가 먹히는 상화이 벌어지면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더 큰 지옥이 펼쳐지는 것은 상식이거든요."

    최정훈으로서는 알 수 없는 세계였다. 하지만 이지혁은 그런 경우를 많이 보았다는 듯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나쁘지 않은 방법이죠. 문제는 얘들이 과연 냉정하게 생각하고 이런 배수진을 쳤느냐는 문제지만. 뭐, 과정은 다르더라도 결과만 같으면 되는 거니까."

    최정훈은 이지혁의 말에서 설명할 수 없는 섬뜩함을 느꼈다.

    인간이란 종족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이 있다면 저런 식으로는 말을 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하튼 장관은 장관이군요."

    최정훈은 황급히 말을 돌렸다.

    "장관이라……."

    이지혁은 가볍게 웃고 말았다.

    수백만이 운집했던 베라프 최후의 결전을 생각한다면 이 정도의 인원은 병력 측에도 끼지 못했다. 하나하나가 개인화기로 무장했다는 측면에서 이점이 있기는 하지만, 당시 데라 라트렐에 운집했던 병력들 역시 각 국가에서 고르고 고른 성기사와 마법사들이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동수 대결에서도 이들이 이길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들만으로는 절대 게이트에서 나온 몬스터를 막아낼 수 없다.

    "…라는 결론인데……."

    이지혁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동안 이지혁이 지구의 위기에 큰 도움을 주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사태는 이지혁이 나서지 않아도 막을 수 있는 경우가 많았다.

    다만, 이지혁이 나섰을 경우에 좀 더 신속하게, 그리고 좀 더 피해 없이 막아낼 수 있다는 차이가 있을 뿐.

    하지만 이번 사태는 좌시할 경우에 정말 하나의 국가가 날아갈 판이었다.

    이지혁은 조금은 심각해진 얼굴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아직은 어둠이 내려앉아 있지만, 얼마만 한 병력이 모여 있는지 살피는 것에는 지장이 없었다.

    "정말 징그럽게 많이도 모았네."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어느새 나타난 박용휘가 이지혁을 향해 다가오며 말했다.

    "별 의미도 없는 사람들을 말이죠."

    박용휘는 빙긋 웃으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고조 리지혁 동무의 입장에서 보자믄 쓸모 있는 인간이 얼마나 되겠습네까."

    "흐음."

    "리지혁 동무의 눈에는 남조선 동무들이 필요한 사람으로 보입네까?"

    이지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사람은 다 똑같지 않겠습네까. 자신의 눈에 드는 사람만이 사람으로 보이는 법이지요."

    "뭔 말이 하고 싶은 건데요?"

    "남조선에서는 인권이다 뭐다 해서 북조선을 비난한다고 들었습네다."

    이지혁의 눈썹이 꿈틀했다.

    "하지만 그건 잘못된 것 아니겠습네까. 남조선의 자본가들이 가진 돈과 권력을 생각한다면 남조산과 우리 공화국이 다를 게 뭐가 있겠습네까?"

    이지혁은 피식 웃고 말았다.

    "아저씨."

    "예, 말씀하시라요."

    "어차피 인간이 만들어낸 체제에서 완벽함이라는 건 있을 수가 없어요. 인간 자체가 불안전한 존재들인데, 불안전한 이들이 만들어낸 것이 완벽할 리 없죠."

    "맞는 말씀이십네다."

    "하지만 적어도 더 나은 체제로 나아가 보겠다는 의지가 있는가 없는가는 확실하게 알 수 있죠."

    "공화국에는 그런 것이 없단 말씀입네까?"

    "글쎄요. 진짜로 지상낙원을 만들어보겠다는 생각이 있다면 아니겠죠."

    이지혁이 의미심장하게 웃자 박용휘는 눈썹을 꿈틀대다가 고개를 돌려 버렸다.

    "거, 내 생각에는 리지혁 동무는 입을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습네다."

    "새삼 충성스러운 척하지 말자구요."

    "……."

    이지혁이 키득대며 말했다.

    "왜요? 가는 길에 데려가 드려요? 남한으로?"

    "내래 남한에 가서 뭘 한단 말입네까?"

    "하기야 권력을 누리려면 이곳이 더 나을 수도 있겠죠. 언제 목이 떨어질지 모르는 권력이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어요?"

    박용휘가 가만히 이지혁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이지혁은 전혀 흔들림 없는 눈으로 박용휘의 눈을 마주보았다.

    "동무, 생각보다 무서운 사람입네다."

    "제가요?"

    박용휘는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그냥 힘만 센 얼간이가 아니었단 말인가.

    하기야 그냥 힘만 센 얼간이였다면 남조선 놈들이 통제를 못해서 그리 개고생을 할 이유가 없지.

    "동무, 어리숙한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닌가 봅네다. 이 박용휘가 사람을 잘못 봤소."

    "낄낄낄."

    이지혁이 이죽이며 웃었다.

    "내가 뭔 소리를 했다고 이러는지 모르겠네요."

    "말이 아니오."

    "음?"

    "눈이 문제요, 동무. 나는 이 바닥에서 괴물들은 수도 없이 봐왔디. 사람을 장난감처럼 다루는 짐승 같은 것들은 눈빛부터가 다르디."

    이지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큰일 날 뻔했구만. 하긴 그래야 말이 되지. 남조선 최고의 용사가 순둥이라는 게 말이나 되겠습네까?"

    "빤한 이야기는 그만하죠."

    "어차피 괴물 놈들이 도달하기 전에는 할 짓도 없지 않습네까."

    "안 그래도 그래서 하는 말인데……."

    박용휘가 고개를 갸웃했다.

    "언제 온데요?"

    "한 시간 정도 걸릴 겁네다. 이동 속도가 일정하지 않아서 정확한 시간은 측정할 수가 없다 합네다."

    한 시간이라…….

    이지혁이 눈살을 찌푸렸다.

    "미사일이라든가 그런 거 없어요? 얌전히 이리 기다리느니 오는 중에 쏟아부을 수 있는 전력을 모조리 때려 박는 게 나을 것 같은데?"

    "그거야 내래 소관이 아닙네다. 사령관 동무가 알아서 하겠지요."

    "흐음……."

    이지혁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진짜 사용해야 할 병기를 투입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 전투 이후에도 남한과 대치할 화력을 남겨두겠다는 뜻으로 보였다.

    물론 북한 놈들의 속내를 모두 알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말이다.

    '아까부터 뭐가 자꾸 찝찝한데…….'

    북한 놈들이 아무리 수작질을 부린다고 해도 이지혁이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애초에 미국조차 신경 쓰지 않는 이지혁이 북한이라는 나라의 움직임에 일희일비할 이유는 없으니까.

    하지만 아까 전부터 뭔가 자꾸 찝찝한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다.

    이성이 아닌 육감이 지금 뭔가가 거슬린다고 자꾸 외치고 있는 것이다.

    '내 육감은 쓰레기긴 하지만…….'

    이지혁은 낮게 가라앉은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애초에 이 모든 일은 자신이 초래한 것이니만큼 다른 이들의 의도가 들어올 리는 없겠지만, 아까부터 자꾸 장기판 위에서 놀아나는 기분이 들었다.

    "어이."

    그 순간, 저 멀리서 누군가가 이지혁을 발견하고는 서둘러 다가왔다.

    "음?"

    이지혁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이를 보고는 피식 웃었다.

    "어디서 본 얼굴인데?"

    "이 간나 새끼!"

    군사분계선에서 이지혁과 대치했던 리진철이 악귀 같은 얼굴로 다가오고 있었다.

    "간나 새끼, 잘도 여기 나타났구만!"

    리진철이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하자 박용휘가 슬그머니 앞으로 나서 이지혁의 앞을 가로막았다.

    "지금 뭐하는 거네?"

    "총참모장 동무!"

    "남조선에서 오신 손님들이시다. 무례하게 굴지 말라."

    "하지만 총참모장 동무! 저들이!"

    "이봐, 리진철이."

    "……."

    "네가 목숨 걸고 막으면 저 괴물 놈들 다 막아낼 수 있네? 확실하게 대답하라."

    리진철은 대답하지 못하고 이를 갈았다.

    "네 기분 때문에 평양이 무너지기라도 하면, 그 죄를 어찌 씻으려고 그러는 거네? 정신 차리라."

    리진철은 대답 없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러면서도 이지혁을 죽일 듯한 눈으로 노려보는 것은 잊지 않았다.

    "이 종간나 새끼가……."

    박용휘가 막 소리를 지르려는 찰나, 이지혁이 이죽이기 시작했다.

    "아니, 근데 북한 능력자 애들은 전두엽 절제술이라도 받는 거예요?"

    "그, 그게 무슨 소립네까?"

    "자기도 눈이 있으면 볼 거 다 봤을 텐데, 지금 무슨 배짱으로 나한테 욕을 하면서 달려드는지 모르겠네."

    "……."

    박용휘는 말을 잇지 못했다.

    "내가 이쪽 동네로 돌아온 이후로 한가락 한다는 나라는 다 가봤다고 생각하는데, 그 어디서도 저런 식으로 나한테 달려드는 애는 못 봤거든요. 이게 무식한 건지, 용감한 건지 모르겠네."

    이지혁이 이죽이자 리진철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자자, 이지혁 씨."

    최정훈이 빙그레 웃으며 이지혁을 뒤에서부터 슬쩍 잡아 당겼다.

    "애가 짜증을 부린다고 같이 짜증을 부리면 어른이 아닌 거죠."

    "저 어른 아닌데요?"

    "나이를 그만큼 먹었는데……."

    "에이, 제가 정신연령은 아직 10대잖아요. 의미 없이 나이 다섯 살 더 먹어서 억울한 판에."

    "인마! 사람이 양심이 있어야……."

    "네?"

    "…제가 또 속마음이 나왔나 보군요. 죄송합니다."

    "그래서요? 또 참으라구요?"

    "아니죠."

    최정훈이 빙긋 웃더니 고개를 돌려 박용휘를 바라보았다.

    "총참모장님."

    "으음, 말하라."

    "한 번만 더 이지혁 씨에 대한 모욕적 언사가 이어질 경우, 저희는 이지혁 씨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하여 즉각적으로 이곳에서 철수할 것입니다."

    순간, 박용휘의 눈이 흔들렸다.

    "대통령님께서도 이지혁 씨의 안위에 이상이 생기는 경우를 가장 경계하라 하셨습니다. 이런 식으로 귀국의 병력들이 이지혁 씨에게 위협을 가한다면, 저희는 이지혁 씨의 안전 보장을 위해 현 작전에서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경고해 드립니다."

    박용휘가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최정훈을 노려보다가 고개를 돌려 리진철에게 소리쳤다.

    "뭐하나! 당장 사과드리라!"

    이지혁이 금방이라도 열이 올라 쓰러질 듯 휘청이고 있는 리진철에게 혀를 쏙 내밀었다.

    "베에."

    최정훈은 그 광경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잘한다, 내 새끼.

    * * *

    "사과라고 하셨습네까?"

    리진철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저 망할 놈이 몬스터들을 북쪽으로 미는 바람에 얼마나 많은 희생이 생겼는가.

    이미 보고가 다 들어간 사항이었다.

    그런데 북한 땅을 유린한 원흉에게 사과를 하라고?

    대체 뭘 사과하라는 말인가!

    "귓구멍이 처막혔네?"

    하지만 총참모장의 의지는 단호했다.

    총참모장의 눈빛을 본 리진철은 입술을 굳게 깨물었다.

    "내래 못하겠습네다."

    "이 간나 새끼가!"

    총참모장이 갑자기 품 안에서 권총을 꺼내더니, 리진철의 이마에 겨누었다.

    "이 반동 노무 새끼가 어디서 항명질이야! 능력자라고 오냐오냐해 줬더니 눈에 뵈는 게 없네?"

    "반동이라니요! 공화국에 대한 제 충성심을 의심하신다는 말입네까?"

    "그럼 말해보라. 왜 못하겠다는 거네?"

    "저 간나 새끼가 이 꼴을 만들었는데, 어떻게 저놈에게 사과를 할 수 있단 말입네까! 목에 칼이 들어오면 들어오는 거지, 내래 고렇게는 할 수 없습네다."

    "이 새끼."

    상황이 점점 심각해져 가자 최정훈이 고개를 슬쩍 돌려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거, 사과는 안 받아도 되지 않겠습니까?"

    "난 하라고 한 적도 없는데."

    물론 저 뺀질한 놈이 먼저 도발을 하긴 했지만, 이건 정당방위 수준을 넘어 가혹행위에 가까웠다.

    사람을 주먹으로 한 대 쳤더니 갑자기 옆에서 M60을 들고 연발로 갈겨 버린 수준인데, 그걸 사과 받으려니 이지혁도 어색하긴 마찬가지였다.

    "저 아저씨… 너무 오버하는데?"

    "그렇죠?"

    최정훈이 이마에 배어 나오는 땀을 닦았다.

    그냥 위협적으로 굴지 말라고 한 것뿐인데, 왜 권총까지 들이대서 사과하라고 하나.

    '여하튼 극단적이라니까.'

    북한 사람들이 과격하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저렇게까지 극단적으로 나올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하하하……. 총참모장님."

    최정훈이 중재를 해보려고 했지만, 총참모장은 단호했다.

    "남조선 동무들은 잠시 기다리시오."

    "아니, 참모장님."

    "내래 기다리라 하지 않았소?"

    순간, 총참모장의 눈빛을 본 최정훈이 입을 다물었다.

    호랑이 굴이나 다름없는 북한의 고위층 사회에서 지금까지 버티고 기어 올라온 남자다. 당연히 보통 사람일 리가 없다. 칼날을 벼린 듯한 살기를 느끼며 최정훈은 어설프게 드러난 박용휘의 본모습에 진저리를 쳤다.

    무서운 게 아니라 오싹했다.

    '이런 사람이었나?'

    방금 전까지 그들에게 보여주던 사람 좋은 미소가 다 거짓인 것처럼 박용휘는 그들에게 생생한 날것 그대로의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너, 이 새끼……."

    그때, 이지혁이 입을 열었다.

    "몬스터 올 텐데?"

    "……."

    "그때 이렇게 싸우고 있다가 대응 제대로 못하면 아주 재밌겠네요."

    박용휘가 말없이 고개를 돌려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지혁은 여전히 태연하기만 했다.

    "휴……."

    이윽고 박용휘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권총을 집어넣었다.

    "내래 별것도 아닌 일에 흥분해서 못 보일 꼴을 보였구만기래. 남조선 동무들께 사과드리겠습네다."

    "사람이 열 받으면 그럴 수도 있죠."

    "하하하, 리지혁 동무래 마음이 넓습네다?"

    "저도 얼마 전에 그랬거든요."

    이지혁이 리진철을 보며 씨익 웃어 보이자, 리진철은 이를 악물었다.

    "이익!"

    박용휘가 빙글빙글 웃으면서 리진철을 불렀다.

    "리진철 동무."

    "말씀하시라요."

    "리진철 동무가 저지른 일에 대해서 아직까지 판결이 난 거이 아니야. 무슨 말인지 알갔네?"

    리진철이 입을 꾹 다물었다.

    아무리 불가항력이었다고는 하나 군사분계선에서 몬스터들을 막아내라는 당의 명령을 거부하고 뒤로 후퇴한 것은 전적으로 그의 책임이었다.

    당은 한계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감투 정신과 충성심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해낼 수 있다고 강요하고 세뇌하는 곳이 바로 당이었다.

    "명심하갔습네다."

    지금에 와서 어쩔 수 없던 일이었다 항변한다고 해도 그의 말을 들어줄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한 번 인정하기 시작하면 다음에도 '어쩔 수 없었다'가 수도 없이 쏟아져 나올 만큼 북한은 부조리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번만 더 문제를 일으키면 그때는 나도 손쓸 방법이 없다는 것만 알아두라."

    "그렇다는데요?"

    이지혁이 다시 깝쭉댔지만, 이번만은 리진철도 발작하지 않았다.

    아까부터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는 박용휘의 눈빛이 그의 머릿속에 경고음을 울리고 있었다.

    "미안하게 됐습네다."

    이지혁이 거듭 도발을 했지만 리진철은 받지 않고 고개를 꾹 숙였다. 누가 봐도 억지로 숙이는 고개였지만, 겉으로나마 자신을 숙인 상황이라 이지혁 측도 어떻게 걸고넘어지기가 애매했다.

    적국 한가운데서 적장의 기를 죽이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저 새끼, 지가 먼저 난리치더니 이제 와 뭔 짓거리야?"

    하지만 그리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었다.

    아이언 박성찬이 이를 갈며 리진철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에헤이! 성찬 씨!"

    "아니, 저 새끼 때문에 우리 애들 죽을 뻔한 거 기억 안 나요? 그새 사람 얼굴 까먹었수?"

    "알지요, 알지요."

    최정훈이 박성찬의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그래도 결국 다친 사람은 없는 거고, 이쪽은 우리보다 몇 배로 피해 입고 있지 않습니까."

    "그게 저 새끼 때문입니까? 이지혁 씨가 개고생한 덕이지!"

    박성찬은 최정훈이 앞을 가로막자 더 달려들지는 않았지만, 그 부리부리한 눈으로 끝까지 리진철을 노려보았다.

    "너 조심해."

    리진철은 박성찬의 도발에 피식 웃고 말았다.

    "웃어?"

    "에헤이! 성찬 씨! 그만합시다."

    "하, 씨발. 너 해외 출장 안 나가냐? 내가 따라갈 테니, 어디서 한 번 보자."

    박성찬이 대놓고 으르렁대자 다른 능력자들도 곱지 않은 얼굴로 리진철을 노려보았다.

    "총참모장님!"

    최정훈의 다급한 외침에 박용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리진철이, 너는 일단 대대에 합류하라. 그리고 저기서 괴물 놈들 내려오면 제일 앞에서 제대로 싸우라. 무슨 말인지 알갔네?"

    "명심하겠습네다."

    "가보라."

    리진철이 거수를 절도 있게 올려붙인 후, NDF들은 한 번 노려보고는 몸을 돌렸다.

    "야리냐?"

    "아이고! 성찬 씨, 그만하라니까요. 여기 북한입니다."

    "북한인 건 아는데, 그래도 저런 새끼를 그냥 보내면 이 새끼들이 우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이지혁 꼬붕."

    "……."

    박성찬이 멍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서 목소리의 근원지를 찾았다.

    서아영이 뭔가 자신이 실수했냐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아냐?"

    박성찬은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저 새끼를 반죽여 놓든 그냥 보내든 쟤들 눈에 우리는 그냥 이지혁 부하지."

    "그게 말은 맞습니다만, 부장님……."

    적어도 당신만은 그런 식으로 말을 하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아무리 바지부장이라지만 그래도 직책이라는 게 있는 법인데, 본인의 직책을 그런 식으로 쓰레기통에 처박는 발언을 하시면…….

    "사실인데요, 뭐."

    서아영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서아영의 말은 끝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도 우리가 이지혁 씨 꼬붕이라도 저 새끼들이 감히 감당할 수 없는, 제대로 된 꼬붕이라는 걸 보여줘야죠."

    "……."

    뭔가 멋진 듯 지옥 같은 발언이었다.

    박성찬도 의욕을 잃었는지 고개를 푹 숙이더니 몸을 돌렸다.

    "여하튼 진짜!"

    최정훈은 자신은 생각하지도 못한 방법으로 박성찬을 제압해 버린 서아영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엄지를 치켜올렸다.

    "잘해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부장님."

    "부장은 괜히 다는 게 아니라는 걸 보여 드리죠."

    "믿습니다."

    지금만큼은 정말 믿고 싶은 심정이었다.

    "에……."

    그때, 이지혁이 저 먼 곳을 바라본다 싶더니,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슬슬 해 뜨겠는데요?"

    "벌써?"

    그러고 보니 동녘이 서서히 밝아져 오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거의 도착한 모양이에요."

    이번에는 최정훈도 반문하지 않았다.

    몬스터에 관련된 이지혁의 말은 대부분이 맞다는 것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준비하세요."

    최정훈이 진지한 얼굴이 되자 NDF들도 더는 투덜거리지 않고 각자 적절한 위치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총참모장님."

    "무슨 일인가?"

    "몬스터들이 곧 도달할 예정이랍니다. 슬슬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고래?"

    총참모장은 옆에서 상황을 주시하던 부관을 불러 몇 가지를 지시했다. 부관이 무전을 하더니, 다시금 총참모장에게 말을 전했다.

    "기가 막히구만. 안 그래도 지금 보고가 올라오던 중이라 그라지 않네. 위성이라도 띄운 건 아니겠지?"

    "…저희 쪽에 개코가 있어서요."

    최정훈은 가벼운 농담으로 총참모자의 의심을 풀어냈다.

    "그런데 지휘는 안 하십니까?"

    "내가 지휘할 게 뭐가 있네. 지휘는 사령관이 하는 것이지, 내가 하는 것이 아니지."

    최정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치부의 영역이 강한 북한이라 해도 작전권에 대한 존중은 존재하는 모양이었다.

    "어설프게 나대다가 실패라도 하면 모가지 떨어지는 건 순식간이거든. 자네도 조심하라."

    "……."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최정훈은 헛기침으로 어색함을 날리고는 여명으로 밝아진 시아를 통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미묘한데.'

    어둠 속에서 십만에 가까운 병력이 집결한 것을 보는 것은 감흥이 큰 경험이었다. 하지만 빛이 들기 시작하자 전혀 다른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 사람들이 군인인가?'

    대한민국이었다면 입대조차 불가능했을 정도로 마르고 작은 이들이 힘겹게 총을 들고 서 있었다. 북한의 실상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지 못할 대한민국 국민이 어디 있겠냐마는, 들은 것과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은 전혀 달랐다.

    '이게 모으고 모은 정예병이라는 거지.'

    북한의 가용 병력을 감안했을 때, 이곳에 모인 십만의 병력은 말 그대로 한 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평양이 날아갈 판국에 여유를 부릴 리도 없고, 북한의 무기와 여력이 허용하는 한 최대한의 병력을 끌어 모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이 촉박했다고는 하나 겨우 이 정도라니…….

    '상상 이상으로 상황이 좋지 않군.'

    일반 병력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기대는 접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나마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야포와 전차 정도인데, 그것도 얼마나 제 기능을 할지 알 수 없었다.

    북한의 전쟁 지속 능력과 평시 보급 능력을 감안했을 때, 제대로 정비가 되어 있는 물건이 얼마나 될지 추측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도 살고 싶다면 최대한 쓸 만한 물건으로 구해 왔겠지만…….

    "옵네다!"

    그 순간, 날카로운 음성이 울려 퍼졌다.

    최정훈이 낮게 가라앉은 눈으로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작은 구름이 인다.

    아주 작은 먼지구름 같은 것이 저 끝에서 보인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먼지구름 사이로 검게 일렁이는 물결 같은 것들이 그들을 향해 몰려오는 것이 포착되었다.

    "아……."

    최정훈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웨이브.

    몬스터들이 말 그대로 하나의 덩어리처럼 뭉치고 얽혀 그들에게로 폭주하듯 달려들고 있었다.

    그 가공할 광경에 최정훈마저 일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호오."

    다만, 이지혁만은 그 광경을 보며 비릿한 미소를 날렸다.

    "아주 그리운 광경이로군."

    * * *

    카아아아아아!

    그르륵! 그륵!

    귓가로 몬스터들의 그로울링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수많은 몬스터들이 제각각 울부짖는 소리가 한데 뭉쳐서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끔찍한 소리를 만들어냈다.

    '떨지 마.'

    정해민은 그 광경을 보며 어깨를 부여잡았다. 아무리 진정하려 해도 몸이 절로 떨리며 이가 맞부딪친다.

    광기에 물들어 달려드는 몬스터들의 웨이브는 맨 정신으로 바라보기 힘들 만큼 거대한 위압감으로 다가왔다.

    "히… 히익!"

    "저, 저게 뭐야!"

    그나마 정해민은 나은 편이었다.

    몬스터를 실제로 볼 기회가 많지 않은 북한군 병사들은 패닉에 빠져 연신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저만한 양의 해일만 몰아쳐도 사람은 기겁을 할 것이다. 그런데 몬스터가 해일처럼 밀려들고 있으니, 그 공포심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몬스터가 들이닥친 것도 아닌데 전열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진정하라! 진정하라 하지 않네!"

    "이 간나 새끼들, 자리 못 지키나!"

    지휘관들이 필사적으로 상황을 진정시키려고 애를 쓰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몬스터와의 교전 경험이라면 전 세계 어떤 능력자와 견주어도 뒤질 일이 없는 NDF들도 평정을 찾지 못할 정도로 끔찍한 광경인데, 일반인이 그 광경을 보고 버텨낼 리가 없었다.

    "주, 죽을 거야! 다 죽는다고!"

    "달아나야 돼! 이건 미친 짓이라고!"

    이지혁은 그 광경을 보며 턱을 긁었다.

    "에, 이걸 전문 용어로 뭐라고 하더라?"

    "전문 용어요?"

    "어, 그러니까… 맞다. 이걸 모랄빵이라고 하던가?"

    "틀려!"

    "멘탈펑?"

    "이상한 용어 만들어내시지 말란 말입니다."

    "낄낄낄."

    과거처럼 전황에 사기가 큰 영향을 미치는 전투 구도였다면, 이건 이미 끝난 전투였다. 그나마 근력과 사기에 영향을 덜 받는 총기로 무장한 현대 군대이기에 아직 희망이 있는 것일 뿐.

    "그런데 북한군을 현대 군대라고 해도 되나?"

    "자꾸 혼자서 뭐라고 하시는 겁니까?"

    "와, 이 상황에도 하나하나 태클은 다 거시네. 진짜 투철하시네요."

    "……."

    최정훈의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이지혁의 말이 틀린 게 없었다.

    "잘못하면 다 도망가겠는데요?"

    최정훈이 슬쩍 말을 돌리자 이지혁은 굳이 따져 묻지 않고 동조해 주었다.

    "죽기 싫은 거야 인지상정이죠."

    사실 개인화기로 무장한 병력에게 저 몬스터의 웨이브를 막아서라는 게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이지혁이 같은 입장이었다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을 것이다.

    차라리 권총 한 자루 들고 전차를 상대하는 게 낫지.

    저만한 몬스터들을 소총 들고 상대하는 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내 알 바 아니지만……."

    만약 대한민국 육군에서 같은 짓을 했다면 당장에 사령관 놈의 대가리를 열어보겠다고 길길이 날뛸 이지혁이지만, 이쪽 동네야 뭐 그와 딱히 관련 있는 곳이 아니니까.

    북한에서 무슨 짓거리를 하든 이지혁이 신경쓸 바가 아니었다.

    "도망치자! 도망쳐야 돼!"

    "이건 미친 짓이야!"

    슬슬 전열을 이탈하는 병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총참모장 박용휘가 심각한 얼굴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패배의식은 무엇보다 빠르게 전염된다.

    하나가 도망치기 시작하면 다른 이들 역시 순식간에 전열을 이탈하게 되는 것이다.

    "사령관 동무는 뭐하고 있네!"

    박용휘가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 순간이었다.

    탕! 탕! 탕!

    날카로운 총성이 울려 퍼졌다.

    병사들의 시선이 총성이 울린 곳으로 돌아갔다.

    "물러나 보라."

    조선인민군 육군 총사령관 김룡성이 매캐한 탄연이 새어 나오고 있는 권총을 들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가장 먼저 도망을 치려 했던 북한 군인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이 간나 새끼들! 어디 등을 보이고 있네! 위대한 수령 동지께서 지켜보고 계시는데, 감히 등을 보여? 물러나 보라! 도망쳐 보라! 괴물 놈들에게 죽는 게 빠른지, 내 손에 죽는 게 빠른지 알게 될 테니까!"

    김룡성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위협을 하자 북한군들의 소요가 조금은 잦아들었다.

    권총 한 자루가 위협이 되어서가 아니었다.

    눈앞에 개 떼처럼 달려들고 있는 몬스터들에 비하면 차라리 등 뒤에 겨누어진 권총 한 자루가 낫다는 것을 그들이 모르는 게 아니었다.

    다만, 어릴 적부터 끊임없이 받아온 상명하복에 대한 세뇌가 그들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이었다.

    당에 대한 공포, 몬스터들에 대한 공포.

    그 두 가지 공포가 북한군들을 짓누르며 압박하고 있었다.

    "히이이익."

    곳곳에서 소변을 지리고 주저앉는 이들이 늘어났다.

    그리고 그러는 와중에도 몬스터들은 착실하게 거리를 좁혀 그들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최정훈은 그 광경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물론 전열을 흐트러뜨린 것은 오합지졸이라고 불려도 할 말이 없는 행위였다. 군인이라면 적을 앞에 두고 결코 물러서면 안 되는 것이니까.

    하지만 동일한 상황에 처했을 때 대한민국의 군인들은 얼마나 당당할 것인가를 생각해 본다면 무작정 욕할 일도 아니었다.

    더구나 이곳에 있는 북한 군인 대부분이 자신들이 저 몬스터들의 돌진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알면서도 목숨을 걸어야 하는 심정을 누가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 저 미친놈이!'

    아무리 도망치는 아군이라도 그렇지, 주저 없이 총을 쏘다니! 지금이 무슨 중세 시대도 아니고, 대체 뭐하는 짓이라는 말인가!

    최정훈이 나직하게 이를 갈았지만, 총참모장 박용휘는 박수를 쳤다.

    "역시 김룡성이야! 애들을 통제하는 법을 잘 알고 있구만!"

    최정훈은 급격한 위화감을 느꼈다.

    같은 얼굴을 하고 같은 말을 하고 있지만, 이들은 그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이었다. 어떻게든 통일만 한다면 서로를 배려하며 융화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이런 사고방식을 가진 이들과 함께한다면, 남는 것은 불화뿐이다.

    크아아아아아!

    생김새가 눈에 잡힐 만큼 몬스터들이 가까이 접근하자 김룡성이 손을 들어 올렸다.

    "갈기라!"

    김룡성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장사정포가 불을 뿜었다. 동시에 전차들도 포탄을 갈겨 대기 시작했다.

    콰앙! 콰앙!

    최정훈의 우려와는 다르게 포와 전차들은 별 이상 없이 화력을 뿜어냈다. 심지어 다연장포마저도 별다른 트러블 없이 포탄을 날려 대고 있었다.

    무척이나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안타까운 일이기도 했다.

    '효과가 없군.'

    최정훈은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이미 짐작하고 있던 일이다.

    현대의 화기는 몬스터에게 큰 효과가 없다. 인마살상용으로 제조된 포탄은 몬스터에게 박히지 않는다. 그나마 대전차용 철갑탄은 어느 정도 먹히는 편이지만, 지금 그들의 눈앞에 있는 몬스터들은 보통의 몬스터도 아니었다.

    무려 레벨 6게이트에서 나온 몬스터들.

    그 한 마리, 한 마리가 단독으로 레벨 3 이상의 게이트급이라 분류될 정도의 몬스터들이었다.

    그런 몬스터들이 떼로 달려드는데 북한의 노후화된 구식화기가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갈기라! 더 갈기라!"

    하지만 김룡성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끊임없는 화력이 퍼부어졌다.

    인민들이 굶어 죽는 와중에서도 국방비에는 죽어라고 투자하더니, 나름 화력의 지속력은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최정훈은 그 모든 과정이 쓸데없는 돈 낭비 이상으로는 느껴지지 않았다.

    '쓸데없이 사람을 너무 끌어모았어.'

    당장 평양이 날아갈 판이니 어떻게든 가용한 병력을 모두 모으는 것이야 이해할 수 있었다.

    그중 정예만 모았으니 일천만 예비군을 자랑하는 북한군에서도 겨우 십만 정도만 모인 것이겠지.

    하지만 최정훈의 눈에는 그조차 과해 보였다.

    몬스터를 막기 위해 능력자가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능력자를 활용하지 않을 거라면 능력자 기구는 필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마침 총참모장 박용휘도 같은 생각인 모양이다.

    "리진철이 뭐하고 있네!"

    인민 무력 여단.

    북한이 심혈을 들여 준비한 인민 무력 여단의 활약이 절실했다.

    리진철은 등 뒤에서 쏟아지는 포격에도 미동조차 하지 않고 몬스터들의 웨이브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거 참."

    아무리 봐도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았다.

    괴물 놈들도 어느 정도라야 맞서 싸울 만한 것이다.

    "까라면 까야디."

    하지만 두 번의 후퇴는 있을 수 없었다. 이미 한 번의 후퇴로도 지위가 위태로운데 두 번 물러섰다가는 그 목을 보존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것은 세 살 먹은 아이도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준비됐네?"

    "준비됐습네다, 대좌 동무."

    "어차피 여기서 도망쳐 봤자 죽는 건 매한가지 아니네. 화끈하게 싸우다 죽자야."

    "알갔습네다."

    "무덤 하나는 기똥차겠네."

    리진철이 킬킬대며 웃고는 양손 위로 파직거리는 새하얀 뇌전을 말아 올렸다.

    "그런데 여단장 동무는 어딨길래 코빼기도 안 보이네기래?"

    "그러게 말입네다."

    "여하튼 윗대가리 새끼들은 꼭 필요할 땐 없다니까. 그 늙은 몸뚱아리로 살아봐야 얼마나 더 산다고."

    리진철이 크게 소리쳤다.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조선인민군 인민 무력 여단!"

    "으아아아아!"

    복창 소리가 악에 받쳐 비명으로 들릴 지경이었다.

    "우리야 당에서 죽으라 카믄 죽는 거 아니네."

    "그렇습네다!"

    "죽으러 가자!"

    "악!"

    리진철이 그 말과 동시에 해일처럼 밀려드는 몬스터들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와!"

    이지혁이 그 광경을 보며 감탄을 토해냈다.

    몬스터들의 웨이브를 상대로 돌진한다는 것은 웬만한 담력으로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대단한데?"

    최정훈도 고개를 끄덕여 동조를 표했다.

    입장이 다르고 서로 적국이라고 생각하는 나라의 부대지만, 순간적으로 그들이 소리를 지를 때는 최정훈도 피가 끓어오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막을 수 있을까요?"

    "장난해요?"

    "…그렇겠죠."

    의욕이야 좋지만, 의욕만으로 세상 일이 뜻대로 풀린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이지혁 씨."

    "알아요."

    이지혁은 최정훈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최정훈이 무슨 말을 할지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이번 웨이브를 막아낸다고 해도 인민 무력 여단이 무력화된다면 의미가 없었다. 그렇게 된다면 북한은 앞으로 열리는 게이트들을 감당하지 못하고 결국은 붕괴되고 말 것이다.

    냉정한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이곳에 있는 일반 병력들이 전멸하는 한이 있더라도 인민 무력 여단만큼은 보존을 시켜주어야 한다.

    "쯧, 마음에는 안 들지만……."

    세상은 필요에 의해 돌아가는 것이니까.

    "시작해 볼까?"

    "다들 엄호!"

    최정훈의 말이 떨어지자 NDF들이 이지혁의 주위를 감싸기 시작했다. 이번 작전에서 그들의 임무는 오로지 이지혁에 대한 경호만이 전부였다.

    고오오오오오.

    "뭐, 뭐야?"

    앞으로 돌진하던 리진철이 기겁을 하여 뒤를 돌아보았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섬뜩함이 도를 넘어서 마치 목 뒤를 날카로운 바늘로 푹푹 찌르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저, 저게 뭐네?"

    리진철의 두 눈이 지진이라도 난 듯이 떨려왔다.

    그의 시야에 하늘을 뒤덮을 듯이 솟아오른 거대한 검은 불꽃이 들어왔다. 마치 악마의 혓바닥처럼 날름이고 있는 짙고 짙은 불꽃이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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