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63화 (63/118)
  • [■] 아, 이게 국가 망신이구나 [■]

    ─────

    "상황이 영 안 좋은 거 같은데?"

    박성찬의 말에 최정훈이 핀잔을 주었다.

    "가만히 있으면 해결한다지 않습니까. 육군을 그렇게 못 믿습니까?"

    최정훈이 방금까지 그들을 만류했던 대원에게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까?"

    "……."

    심각한 얼굴로 전방을 주시하던 대원이 민망함과 당혹감이 반쯤 섞인 얼굴로 말을 했다.

    "상황이 녹록치 않은 것 같습니다."

    "……."

    지금 당신이 그렇게 말하면 내가 뭐가 되나, 이 양반아.

    박성찬이 뚱하게 최정훈을 바라보며 말했다.

    "여하튼."

    최정훈은 반박조차 하지 못하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요즘 뭔가 계속 꼬이는 것 같은데?'

    이게 언제부터였더라?

    최정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언제부터긴 언제부터겠는가, 이지혁이 나타난 이후부터지.

    그전까지는 나름 신뢰 받는 사람이었는데…….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최정훈이 분위기를 환기했다.

    "일단은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상황이 안 좋아지면 철수도 고려를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철수요?"

    "총질하는 상대를 돕겠다고 나설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음……."

    최정훈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무엇보다 여러분의 안전이 가장 중요합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더 머물렀다가는 총격전이 벌어질 수도 있고, 잘못하면 다치는 분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저희는 여러분을 안전하게 평양까지 모셔 가는 것이 임무입니다. 임무를 달성하지 못한다면, 차선은 안전하게 서울로 복귀하는 것이죠."

    "그럼 어떻게……."

    판문점을 통해서 돌아간다는 것은 다시 말하자면 국경을 뚫는다는 의미였다. 압록강 쪽이라면 경계가 옅기라도 하지, 가장 삼엄한 경계가 펼쳐져 있는 곳을 뚫고 나간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여차하면 그냥 게이트 열고…….'

    최정훈이 이리저리 각을 잴 때, 등 뒤에서 움직임이 느껴졌다.

    "응?"

    "비켜봐요."

    이지혁이 짜증이 어린 얼굴로 나서고 있었다.

    "이지혁 씨, 일단 진정하시고."

    "진정이고 나발이고 비켜봐요. 이미 그런 식으로 처리할 상황은 넘었구만, 시간 자꾸 끌지 말아요. 실리도 잃고, 명분도 잃기 싫으면."

    "음……."

    최정훈은 이지혁의 말이 맞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상황을 좋게 풀기는 어려워졌다. 꼬인 실타래를 푸는 가장 좋은 방법은 칼로 잘라 버리는 것이고, 다행히 최정훈의 옆에는 세계에서 가장 날카로운 칼이 있었다.

    "너무 과하게는 하지 마십시오."

    "쯧."

    이지혁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최정훈이 자리를 비켜주었다.

    "달링, 뭐하게? 쟤들 다 죽일 거야?"

    에르카나가 신난다는 듯 이지혁의 어깨에 달라붙자, 이지혁이 인상을 쓰며 에르카나를 밀어냈다.

    "내가 무슨 살인마냐? 거슬린다고 다 죽이게?"

    "맞잖아?"

    "어… 맞네, 생각해 보니까."

    거슬리지 않아도 다 죽였던 시절도 있었지.

    지금 생각하면 나도 참 미친놈이었어.

    "여튼 안 죽여. 저런 애들 하나하나 죽이다 보면 세상에 남아나는 놈이 하나도 없을 거야."

    "나는 그것도 좋은데. 달링이랑 이 세계에 둘이 남는 거야. 로맨틱해!"

    다른 이들의 얼굴이 썩어 들어갔다.

    너무 아름다워서 한 번씩 잊어버리는데, 저 여자는 마왕이다. 마왕의 눈으로 보는 인간이란 얼마나 하찮은 존재일까?

    "개소리하지 말고 앉아 있어!"

    "달링, 터프해! 옛날 같아."

    "끄응."

    이지혁이 달려드는 에르카나의 얼굴을 쭈욱 밀고는 버스 밖으로 내렸다.

    "너는 뭐네?"

    버스에서 사람이 내리자 총구가 일제히 그쪽으로 돌아섰다.

    "사람."

    이지혁이 기지개를 켰다.

    늘어지게 하품을 한 이지혁이 목을 우득우득, 좌우로 꺾고는 북한군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이지혁 씨?"

    정인수가 놀라서 만류했지만, 이지혁은 손을 휘휘 저을 뿐이었다.

    "잠시만요."

    촤아악.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지혁의 전신에서 촉수가 뻗어져 나왔다.

    "헉!"

    "으아악!"

    "이, 이게 뭐야!"

    사방으로 총탄이 뿌려졌다. 당황한 군인들이 격발을 하고 만 것이다.

    "헛!"

    정인수는 자신의 몸을 감싸는 촉수를 보며 기겁을 했다. 하지만 이지혁이 자신을 해하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있기에 추태를 보이지 않을 수 있었다.

    투투투투!

    촉수에 맞은 총탄들이 튕겨져 나간다.

    "으아아악!"

    촉수가 병사들을 움켜잡고 허공으로 들어 올린다.

    이내 모든 병사들이 거꾸로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린 상황이 되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정인수가 그 광경을 보며 수습을 고민할 때, 이지혁이 정인수를 보고 말했다.

    "아저씨."

    "…예, 이지혁 씨."

    "우리가 무슨 죄졌어요?"

    "아니죠."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뒷일은 내가 책임지니까."

    정인수는 빙그레 웃고 말았다.

    그래, 이지혁의 말이 맞다.

    이곳이 북한이든 지옥이든 그는 이지혁과 함께 있었다. 무엇이 두렵겠는가.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의 목표는 이지혁을 보호하는 것이지, 한국과 북한의 관계를 고려하여 사고를 치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사고를 치든, 치지 않든 이지혁이 무사하게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의 임무는 완수되는 것이다.

    "얘들은 어떻게 할까요? 적당한 곳을 아는데……."

    "타 차원으로 보내신다구요?"

    "조용한 곳이죠, 아주 조용한."

    "총기만 뺏어놓으면 아무것도 못할 겁니다. 저기 구석에다 내려놓으시면 됩니다. 어차피 희생양들인데, 괜히 고생시킬 필요 없습니다."

    "뭐… 그러죠, 그럼."

    이지혁이 촉수를 움직여 북한군들을 한쪽으로 몰았다.

    그러고는 허공에서 촉수를 놔버렸다.

    "으아아악!"

    3m 높이의 허공에서 떨어진 군인들이 비명을 질러 댔다.

    쿵, 쿵쿵.

    바닥에 떨어진 군인들이 앓는 소리를 내며 드러누웠다.

    "아프겠네."

    정인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동하죠."

    정인수가 버스에 오르며 몸을 돌리는 순간, 악에 바친 소리가 들려왔다.

    "이 간나 새끼들, 니들이 이러고도……."

    퍽!

    깔끔한 타격음과 함께 소리가 멈추었다.

    정인수는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있었다.

    '그냥 입이나 닫고 있지.'

    상황이 이쯤 되었는데도 사태 파악이 안 되는 것도 병이다. 상대를 보고 나대야지.

    정인수는 한숨을 내쉬며 이지혁을 앞세워 버스에 올랐다.

    "놀라셨겠네요."

    걱정과 놀림이 반쯤 섞인 것 같은 최정훈의 환대에 정인수는 피식 웃고 말았다.

    뺀질거리기는.

    "그런데 이제 어떻게 합니까? 선도 차량이 없는데요. 여기서 마냥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수도 없고."

    정인수가 가볍게 웃고 말았다.

    "인마, 여기가 한국이냐?"

    "예?"

    "길이 뭐 여기저기로 막 나 있을 거 같아? 직진만 하면 평양이다."

    "아……."

    "그냥 가면 된다. 중간에 막아서는 것들이 또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강행 돌파해 버리지 뭐. 우물쭈물대다가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하는 것보다야 그게 훨씬 낫다. 시간적 여유는 있지만, 그 시간도 정확하다고 할 수는 없으니 한시라도 빨리 도착해야지."

    "알겠습니다."

    "소란이 있었군요. 이제 출발하겠습니다."

    * * *

    선도 차량은 돌아오지 않았다.

    정인수는 위화감을 느끼면서도 평양으로 향했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이라 긴장을 풀 수가 없…….

    드르르렁.

    코 고는 소리가 그의 귀를 괴롭혔다.

    '뭔 신경이 고래 심줄로 만들어졌나?'

    이 상황에서도 잠을 자다니,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이지혁이라는 세 글자로 모든 것이 설명되기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나마 그것에 신경을 쓰는 사람은 정인수뿐이었다. 다른 NDF들은 익숙한지 신경을 쓰지 않고 있고, 뒷자리에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에르카나는 이지혁이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이상한 점은 독점욕이 상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에르카나가 이지혁의 옆자리에서 아펠드리체가 무릎베개를 해주고 있는 것을 방관하는 중이라는 것이었다.

    '희한한 일이군.'

    보통의 인간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남편이 다른 여자의 무릎을 베고 자는 꼴을 좌시하지는 않을 텐데, 마왕이며 독점욕이 엄청나다고 알려져 있는 에르카나가 그것을 용인한다?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똑바로 막아, 도마뱀."

    "네."

    아펠드리체는 두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에르카나 님."

    "응."

    "많이 심한가요?"

    "흐으응."

    에르카나가 번뜩이는 눈으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슬슬 한계 아닐까?"

    "…그 정도나?"

    "침식은 이미 과도하게 이루어졌어. 일반인이 아니라 전설에 나오는 영웅쯤 되는 이라 해도 이미 변이가 이루어졌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야."

    이지혁의 머리를 쓰다듬는 아펠드리체의 손길이 떨렸다.

    "침식이 완전히 끝나면?"

    "다시 태어나는 거지."

    에르카나의 목소리도 그녀답지 않게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새로운 인격체로 말이야. 기억은 그대로 가지고 있겠지만, 그는 이미 네가 아는 그가 아니게 될 거야."

    "마족으로 다시 태어나는 거군요."

    "그렇지."

    에르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애초에 인간의 몸으로도 마왕이 되었던 이야. 마족이 된다면 역사상 가장 잔혹하고 위험하고 강한 마왕이 되겠지. 이미 달링의 사고방식은 인간이라고 하기도 어려워. 세상에 그 어떤 폭군과 잔혹한 범죄자도 달링 같지는 않거든."

    아펠드리체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지혁은 인간 같지 않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하는 말이기는 하지만, 이지혁이라는 인간의 사고방식이 보통과는 궤를 달리한다는 것은 딱히 생각할 거리도 없는 일이다.

    그런 이가 마족의 잔혹성과 파괴 본능을 가지게 된다면?

    그보다 끔찍한 일이 있을까?

    "마계에서 달링을 경계하는 가장 큰 이유가 그거지. 그가 동족이 되는 것이 두려우니까."

    "…그렇군요."

    아펠드리체가 심각한 눈으로 이지혁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다른 방법은 없나요?"

    "방법?"

    "마족이 되지 않게 막을 수 있는 방법이요. 지금은 그저 침식을 늦추고 있을 뿐이잖아요. 언젠가는 피할 수 없는 일이 되겠죠."

    "그래."

    "그전에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없나요?"

    에르카나가 고혹적으로 웃었다.

    "가장 확실한 방법이 있지."

    "뭐죠?"

    "죽음."

    에르카나가 혀로 입술을 축이며 낮게 킥킥댔다.

    "지금 그의 목을 가르고 그 피를 마신다면 이지혁이라는 객체의 정체성은 유지한 채로 죽을 수 있을 거야."

    "…매우 합리적이고 엿 같은 방법이군요."

    "어머? 도마뱀이 입이 거칠어졌네? 재미있어."

    에르카나가 아펠드리체를 놀리듯이 깔깔대며 웃었다.

    "그렇게 웃음이 나와요?"

    "호호호."

    에르카나는 소리 내 웃고 있지만, 눈만은 웃고 있지 않았다.

    "몰랐어?"

    "…아뇨."

    "알고 있는 사실에 새삼 놀라지 마."

    아펠드리체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지혁이 침식되는 것을 막기 위해 지구에까지 넘어왔다. 하지만 그녀의 힘으로는 그를 되돌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방법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지."

    "네?"

    "하지만 모르는 게 나을 텐데?"

    에르카나의 입술에 날카로운 미소가 맺혔다.

    그 미소의 불길함이 아펠드리체의 몸을 얼리고 있었다.

    * * *

    "마기가 뇌에 침입한다는 것은 보통은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에르카나는 설명을 계속했다.

    "막을 수 없는 이유는 간단해. 마기가 뇌에 침입하는 것이 바로 흑마법이기 때문이지. 마력을 다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야. 문제는 흑마력은 그 자체로 마이너스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는 거지."

    "네."

    "인간은 적당히 중립을 지키는 존재들이야. 어느 쪽으로 많이 기울게 되면 존재 자체가 무너지게 돼."

    "그렇죠."

    "그래서 흑마력을 과도하게 받아들인 존재들은 음의 존재가 되어버리지. 쉽게 말하면 언데드가 되는 거야. 생명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으니까."

    아펠드리체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이미 알고 있던 내용들이지만, 굳이 이 말을 하는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버틸 수 없는 이유는 전신이 흑마력으로 오염되기 때문이야. 마왕인 내 입장에서 오염이라고 표현하는 게 웃기기는 하지만, 그게 사실이니까. 여하튼 육체가 흑마력으로 오염된다는 것은 물드는 것이 아니라 바뀌는 것이지. 결국……."

    에르카나가 눈을 빛냈다.

    "정화는 불가능하다."

    "……."

    아펠드리체가 한숨을 쉬었다.

    "빤한 이야기군요."

    "하지만 정화가 아니라면 어떨까?"

    "…네?"

    "창조와 재생이라면 그의 육체를 처음으로 복원시킬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건 신의 영역이잖아요."

    "그래. 방법론적인 문제니까. 다만, 그런 방법이 있다는 거지. 불가능에 가깝지만, 불가능은 아니잖아?"

    "……."

    아펠드리체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창조의 권능은 신의 영역이다.

    '라트렐.'

    빛의 신 라트렐이라면 이지혁의 육체를 재생시킬 수 있을까?

    '어려워.'

    아펠드리체는 그 판단에 회의적이었다.

    그러한 권능을 현실에 강림시킬 수 있었다면 권속들을 이용하여 막으려 드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직접 이지혁의 육체에서 흑마력을 제거해 버렸을 것이다.

    "하아……."

    결국 이계의 존재인 이지혁에게는 라트렐의 권능조차도 범접할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이 세계에 존재했던 신들은 이제 흔적만 남아 있다.

    이 지구의 인간들은 신의 권속에서 벗어난, 독립적인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의미가 없네요."

    "그럴지도."

    에르카나가 미묘한 얼굴로 아펠드리체를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 달링이 좋기는 좋은가 봐? 그런 걱정도 다 하고?"

    "…당신은 모르겠죠."

    "응?"

    "당신은 알 수 없어요. 당신은 그를 이해할 수 없을 테니까."

    "도마뱀은 이해할 수 있다는 건가? 그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너도 마찬가지일 텐데?"

    "그렇겠죠. 다만……."

    악마는 물들이는 존재.

    그들은 호감을 갖는 이를 자신들과 같게 만들려고 한다.

    유혹하고, 변절시키고, 타락시킨다.

    하지만 드래곤은 지켜보는 존재.

    불가해의 대상이라 하더라도 그저 지켜볼 뿐이다. 그것이 이어지고, 또 이어지다 보면…….

    "내가 미친 거죠."

    "확실히."

    에르카나는 재미있다는 듯 아펠드리체를 바라보았다.

    드래곤은 변하지 않는 존재들이다.

    감정의 변화도 적고, 스스로 완전한 개체이기에 다른 존재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난생 동물이라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자아와 타아의 구별이 확실하고 다른 환경과 객체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고집불통들.

    꽉 막힌 존재들이라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인간과 악마 모두 동족과 타 종족을 가리지 않고 교류하는 존재들이지만, 드래곤은 동족끼리도 교류를 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고립되어 있는 존재들.

    그런데 아펠드리체는 달랐다.

    오랜 세월을 살아왔고, 또한 로드라는 지고한 지위에 있음에도 한낱 인간에게 영향을 받고 있었다.

    이지혁이 한낱 인간이라 지칭될 존재는 아니지만 말이다.

    "괜찮겠어?"

    "네?"

    "너는 지금 로드의 자리를 버리고 이곳에 온 거야."

    "그렇죠."

    "지금이야 그렇게 살아갈 수 있겠지. 하지만 인간의 삶은 영원하지 않아. 침식을 막아낸다고 하더라도 결국 달링은 죽어. 그럼 너는 남아 있는 만겁의 세월을 어떻게 버텨낼 생각이지?"

    "……."

    "드래곤의 기억은 영원하지. 너는 달링의 망령에 사로잡혀 살아서 지옥을 보며 살게 될 거야. 알고 있지?"

    "네."

    "그런데도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이곳에 올 가치가 있었나?"

    아펠드리체가 화사하게 웃었다.

    에르카나마저 순간 그녀가 아름답다고 느낄 정도였다.

    "당신이 할 말은 아닌 것 같네요, 열세 번째 마왕이시여."

    "하긴."

    에르카나가 툴툴대며 웃었다.

    그러고는 손을 뻗어서 이지혁의 볼을 꼬집었다.

    "못된 남자야."

    "그렇네요."

    "이만한 미인들이 좋아해 주면 고마운 줄을 알아야지. 배가 불렀어."

    아펠드리체는 웃고 말았다.

    그녀와 에르카나는 상극의 존재. 이지혁이라는 완충재가 없었다면은 마주친 순간 목숨을 걸고 서로를 죽이려 드는 사이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지혁은 드래곤과 악마, 인간의 차별을 두지 않았다.

    '그러니 외로운 거겠지.'

    딱히 어떤 종족에 소속감을 느끼지 못할 만큼 그는 혼자였던 것이다.

    "얼마나 남았을까요?"

    "글쎄."

    에르카나가 볼을 긁었다.

    "시간의 개념이라는 것이 내게는 매우 길어. 너도 그렇겠지만."

    "그렇죠."

    "그러니 나에게는 찰나에 불과한 인간의 삶 정도를 기준으로 시간을 나눈다는 것이 쉽지가 않아. 어쩌면 내일일 수도 있고, 어쩌면 그가 늙어 죽을 때까지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을 수도 있지."

    아펠드리체가 가만히 에르카나를 바라보다 말했다.

    "당신은 그걸 원하지 않나요?"

    "뭘?"

    "이지혁 씨가 마족이 된다면 당신과 함께 영겁의 세월을 함께할 수 있을 텐데요? 당신의 입장에서는 그게 더 나은 것 아닌가요?"

    "잊었어?"

    "뭘 말이죠?"

    "그가 마족이 된다는 것은 이지혁이라는 마족이 탄생하는 게 아니야. 이지혁의 존재는 사라지고, 새로운 마족이 탄생하는 것이지. 기억이 같다고는 하지만, 모든 것이 달라져. 그렇게 되면 달링은 더 이상 달링이 아니지."

    "……."

    "나는 껍데기는 필요 없어. 달링이 어떤 모습이라도 그게 달링이라면 나는 만족해. 하지만 껍데기는 그대로 둔 채로 속이 달라진다면, 나는 달링의 껍데기를 둘러쓰고 있는 그를 증오할 수밖에 없어. 그게 나라는 존재야."

    아펠드리체는 그녀의 마음에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 그녀도 비슷한 심정이었으니까.

    "다만……."

    "네?"

    "나도 미의식이라는 게 있으니까, 가끔은 달링 얼굴을 좀 고쳐보고 싶다는 충동은 느끼지."

    끄덕.

    아펠드리체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타 종족이니까 상관없다고?

    인간도 이쁜 개와 못생긴 개는 구분할 줄 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게 쉽지가 않은 거야."

    "그렇네요."

    드르렁.

    이지혁은 자신에 대해 어떤 이야기가 오가고 있는지도 모른 채 세상모르게 잠에 빠져 있었다.

    * * *

    차갑다.

    너무도 차다.

    코를 찌르는 악취는 이미 느껴지지도 않는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미치게라도 해주지.'

    이지혁은 떨어지는 물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밤과 낮의 구분이 사라지고 시간 감각마저 사라져 간다.

    그저 이곳에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나는 살아 있는가?'

    삶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호하다.

    숨을 쉬고 있는 것을 삶이라고 한다면, 그는 살아 있는 것이겠지. 하지만 움직이고 행동하며 변화하는 것을 삶이라 말한다면, 그는 지금 죽어 있다.

    숨은 붙어 있는 채로.

    대륙 최악의 감옥 벨카트라즈.

    빛조차 들지 않는 갱도의 바닥에 갇힌 채 반신이 물에 잠겨 있는 채로 일 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다.

    "큭큭큭."

    허기는 끝도 없이 몰려든다.

    다른 이라면 삼 일을 버티지 못하고 죽었겠지만, 이지혁에게 죽음은 허락되지 않은 사치였다.

    마비되어야 할 감각은 끝도 없는 예민함을 유지했고, 붕괴되어야 할 정신은 매시간 새롭게 깨어났다.

    증오조차 이어지지 않았고.

    원망조차 희석되고 만다.

    지옥이 있다 해도 그처럼 괴로움을 겪지는 않을 것이다.

    "하아……."

    이지혁은 낮게 한숨을 쉬었다.

    "지겹군."

    찾아오는 것은 권태로움.

    그리고 시시때때로 불처럼 솟아올랐다가 강제로 사라져 버리는 증오심이었다.

    단지 피부색이 다르고 생김새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그는 이곳에 갇혔다.

    이해?

    존재하지 않는다.

    대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그저 이방인.

    다른 곳에 살다 온 존재가 아니라, 전혀 다른 존재였다.

    '죽여 버리겠어.'

    분노가 몸을 지배한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보이지도 않는 곳을 향해 끝도 없이 고함을 친다. 벨카트라즈를 악마의 굴로 만들어 버린 귀곡성이 갱도를 울리고 또 울린다.

    식량이 들어오지 않은 지는 반년이 지났다.

    부술 수 없는 창살이 아니었다면 탈출이라도 시도했겠지만, 이 미친놈들은 갱도 안에 강철을 박아 넣는 미친 짓에 마법마저 걸어놓았다.

    일반적인 창살이라면 육체를 찢어 밀어 넣어서라도 탈출했겠지만, 마법은 어찌할 수가 없다.

    무슨 수를 써도 다시 튕겨나고 마는 것이다.

    "킥킥킥킥."

    이지혁은 창살을 향해 손을 뻗었다.

    파지지직.

    손이 불타오른다.

    '밝아.'

    손이 타오르며 주변이 밝아진다.

    이곳에서 즐길 수 있는, 몇 안 되는 취미였다.

    빛을 보는 것.

    이곳이 그저 어둠만이 존재하는 곳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

    "이제 결정을 내려야 해."

    더는 이곳에 머무를 수 없다.

    이 긴 시간을 이 지옥 안에서 머물렀던 이유는 혹여라도 굴을 파다가 갱도가 무너지기라도 한다면 육체가 짓눌려 뭉개진 채로 영원히 이곳에 존재해야 한다는 공포 때문이었다.

    지금 그에게 육신을 움직일 수 있다는 자유마저 앗아간다는 건 너무나도 끔찍한 형벌이니까.

    "낄낄낄낄."

    이지혁은 웃었다.

    그리고 울었다.

    자신이 무슨 죄가 있어서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가.

    "죽여 버리겠어."

    인간.

    아니, 인간의 탈을 쓴 그 무엇들.

    이곳에서 나가게 된다면 그들은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그를 박해하고 이곳에 가둔 대가를.

    증오심이 리셋됨에도 이런 생각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은 그의 생각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뜻이겠지. 한순간의 감정으로 결정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그에게 있어 인간이되, 인간이 아니었다.

    "낄낄낄낄."

    이지혁은 낄낄대며 웃다가 심호흡을 했다.

    신이 있다면…….

    그가 이런 꼴을 당하게 방조한 신이 있다면, 그 신마저 찢어 죽일 것이다.

    그리고 그를 이리 만든 이들에게도 똑같이 돌려줄 것이다.

    이 증오를.

    이 공포를.

    "으으……."

    이지혁이 이를 악물고 전방으로 몸을 던졌다.

    파지지직!

    이지혁의 전신이 타들어 가기 시작한다.

    몸이 불타는 작렬감.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고통이 끊어지지 않는 의식과 함께 그의 전부를 지배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목에서 터져 나오는 고함 소리가 어느 순간 끊긴다.

    상해 버린 성대가 더 이상의 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이다.

    침묵으로 고함을 대신하며 이지혁은 전진하고 또 전진했다.

    녹아버린 안구로 아무것도 보지 못하면서 말이다.

    '죽여 버릴 거야.'

    일천하고도 팔백구십 번째 시도.

    이지혁은 뇌가 녹아버리기 전에 다시 전진했다.

    소리 없는 비명이 갱도를 가득 채웠다.

    * * *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아, 깜짝이야!"

    "뭐야!"

    이지혁이 비명을 지르며 몸을 일으키자 주변 사람들이 놀라 돌아보았다.

    "뭐여? 꿈꾼 거여?"

    "가지가지 한다."

    이지혁은 주변을 정신없이 둘러보다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가녀린 손길이 그의 이마를 가볍게 눌렀다.

    이지혁은 저항하지 않고 손길을 따라 몸을 눕혔다.

    "꿈을 꿨나요?"

    "…빌어먹을."

    이지혁은 욕지기를 내뱉었다.

    육체와 뇌가 리프레시되지 않는다는 것은 좋지만, 덕분에 더러운 기분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한 번씩 찾아오는 악몽은 이제 보호 받지 못하는 그의 기분을 박살 내놓기에 충분했다.

    "지난 일이에요."

    "그렇지."

    이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 지난 일이다.

    이곳은 더 이상 지옥이 아니다.

    빌어먹을 베라프.

    악몽밖에는 없는, 그 지옥 같은 곳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멘탈이 가루가 되는 느낌이었다.

    "달링, 꿈꿨어?"

    이지혁이 부들댔다.

    명색이 서큐버스 퀸이라는 여자가 옆에서 남편이 악몽을 꾸는데도 신경 안 쓰고 있다가 이제야 걱정하는 척이라니!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아펠드리체가 간섭하고 있으니 내가 어쩔 수가 없잖아. 중요도가 다른데."

    "끄응."

    이지혁이 더러운 기분으로 소리쳤다.

    "휴게소 없어요?"

    최정훈은 한숨을 쉬고 말았다.

    "이 미친놈아……."

    "뭐?"

    "아, 죄송합니다. 마음속으로 한 말이었는데 그만."

    최정훈이 어색하게 웃어 보이자 이지혁이 이를 갈았다.

    저 인간도 언제 날 한 번 잡아야 하는데.

    "여기가 남한도 아니고, 휴게소가 어디 있습니까?"

    "쉬어 가면 그게 휴게소지!"

    "…대령님."

    정인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화장실도 해결할 겸 쉬었다 갑시다."

    "예."

    버스가 길옆에 서자 이지혁이 버스에서 내려 담배를 꼬나물었다.

    "끄응."

    영 기분이 찝찝하다.

    "그게 언젯적 일인데."

    아직까지 시달려야 한다는 말인가.

    군대 갔다 온 사람들이 환갑까지도 군대 꿈을 꾼다더니, 딱 그 짝이었다.

    "진짜 환갑까지 시달리는 것은 아니겠지?"

    생각만 해도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일이었다.

    "괜찮아, 달링?"

    에르카나가 다가와서 그의 어깨를 감쌌다.

    "흐음……."

    "몸이 많이 약해졌네?"

    "…다됐지. 내 나이가 몇인데."

    "신체 나이는 어리잖아."

    "그것도 성한 데가 없다."

    이지혁이 노인처럼 어깨를 좁히자 에르카나가 깔깔 웃었다.

    "달링, 어차피 나보다 어린데, 너무 오버하는 거 아냐?"

    "넌 종족이 다르잖아."

    "흐음……."

    에르카나가 콧소리를 내며 이지혁을 좌우로 흔들었다.

    "손 좀 떼고 있어요."

    "응?"

    에르카나가 뒤를 돌아보자 정해민이 부들거리며 둘을 노려보고 있었다.

    "마계에서는 공중 도덕은 가르치지 않는 모양이죠? 사람들 앞에서 그게 뭐하는 짓이에요?"

    "…마족한테 도덕이 어딨어?"

    "어?"

    듣고 보니 그러네?

    "그, 그래도 로마에 갔으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말도 몰라요?"

    "로마가 어딘데?"

    "…유럽?"

    "여긴 아니지?"

    "네."

    "그럼 상관없지 뭐. 헤헤."

    에르카나가 이지혁을 더더욱 끌어안자 정해민의 눈이 불타올랐다.

    타깃이 바뀌었다.

    "야!"

    "으응?"

    "너는 부끄럼도 없어?"

    "나라고 부끄러움이 없겠는가."

    "그런데 왜 그러고 있어?"

    "…어찌하리오."

    이지혁은 담배를 물고 깊게 연기를 뿜어냈다.

    "말을 해도 통하지 않는 것을."

    "힘은 뒀다 뭐하나!"

    "…못 이겨."

    "엑?"

    이지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말해줘도 이해를 못하겠지만, 난 얘를 못 이긴다."

    "진짜?"

    "응."

    정해민이 이지혁의 귓가에 속닥댔다.

    어차피 바로 옆에 있어서 다 들릴 텐데, 이게 무슨 짓인가 싶기도 하고.

    "진짜 못 이겨? 너 마왕도 다 때려잡고 했잖아. 얘는 뭐가 다른 건가?"

    "…말해줘도 모른다니까."

    이지혁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절대 못 이기는 수준은 아니지만, 에르카나가 이지혁의 천적인 것은 맞았다. 애초에 기본이 되는 마력이 에르카나의 것이다 보니 상성이 안 맞았다.

    절반의 위력도 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정해민에게 설명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마력의 개념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무슨 수로 설명하라는 말인가.

    "됐다."

    이지혁이 담배를 바닥에 던지고는 발로 밟았다.

    "쓰레기 버리면 안 돼!"

    "북한에서도?"

    "…응?"

    북한에 경범죄가 있나?

    정해민이 고개를 갸웃했다.

    "들어가자."

    이지혁이 몸을 돌려 버스로 향하자 정해민이 팔을 잡고 늘어졌다.

    "왜 이러세요?"

    "같이 가자고."

    "끙."

    이지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양팔에 에르카나와 정해민을 달고는 버스 안으로 들어갔다.

    "다 와가나요?"

    "거의 도착했습니다."

    "그냥 헬기나 좀 태워줬으면 금방 도착했을 텐데."

    "…아!"

    정인수가 아차 싶은 얼굴을 하자 이지혁의 뚱하게 바라보았다.

    "설마 몰라서 그랬다고 하실 생각?"

    "그런 것보다는……."

    정인수가 어색하게 웃었다.

    "생각을 전혀 못했네요. 지금까지 그런 식으로 북한 땅으로 들어온 전례가 없어서."

    "……."

    "또 생각해 보니 버스에 비해서 몇 배는 더 위험하기도 한 것 같구요."

    "변명 보소."

    "그래도 뭐, 이제 다 도착했지 않습니까?"

    "끄응."

    이지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이리저리 마음에 들지 않는 북한행이었다.

    * * *

    "언제 도착한다는 기야?"

    "검문소를 통과했다는 연락이 왔습네다. 곧 도착할 겁네다."

    "그게 언제네?"

    조선인민군 육군 사령관 김룡성은 짜증을 냈다.

    "원래 예정 도착 시간보다 시간이 엄청 늦어지지 않았네? 애들 델꼬 온다고 간 애새끼들은 뭐하고 있는 기야?"

    "그게 연락이 잘……."

    "이 종간나 새끼들."

    김룡성이 이를 갈았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가장 큰 문제는 모든 행동의 평가를 지도자 동지 혼자서 내린다는 것이었다.

    결국 바로 윗선의 명령을 무시하는 한이 있어도 수령 동지가 보기에 충심 있는 행동이었다고 평가가 되면 직급이 상승해 버리는 사태가 다반사였다.

    그러한 상황은 결코 조직에 좋게 작용하지 않았다.

    명령 체계를 무시한 과잉 충성 경쟁은 언제나 당의 목적이 흐트러지게 만들었다.

    이번도 마찬가지였다.

    '이리될 줄은 알았다만…….'

    김룡성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남조선에서 능력자 놈들이 넘어오는 특이 사항은 수령 동지의 권력이 고착화되어 버린 지금, 간만에 벌어지는 이색적인 상황이었다.

    그들의 충심을 증명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인 것이다.

    분명 뭔가 문제가 생길 거라고 생각은 했다마는, 그게 이런 식으로 벌어지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그 새끼들, 당장 수배하라. 모가지를 따버리갔어!"

    김룡성은 남조선에서 온 능력자들에게 별일이 없기를 빌었다. 북한의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서 지원을 온 이들이 겨우 그런 일에 발목이 잡히기야 하겠냐마는, 만에 하나라는 것이 있으니까.

    "사령관 동지!"

    "뭔 일이야!"

    "지금 남조선에서 온 뻐스가 평양에 도착했다는 소식입네다."

    "고래?"

    김룡성이 화색을 띠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도로 쪽에 배치된 방어선에 접근했다고 합니다."

    "방어선 풀고 안으로 들이라. 괜히 도발하는 새끼 있으면 내가 직접 교화소로 처넣어 버린다고 확실하게 전하라. 알갔네?"

    "예, 그리하겠습네다."

    김룡성은 그제야 깊은 한숨을 쉬며 자리에 앉았다.

    "하나는 처리했구만."

    워낙 정신이 없어서 온다는 이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 가장 중요한 전력이 지원을 오는 것이니 좀 더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나 아니라도 누군가는 돌보겠지 싶어서 내버려 뒀더니 이 사단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까딱했으면 내 모가지가 날아갈 뻔했다 아니네."

    "수령 동지께 보고부터 드려야 하는 것 아니겠습네까?"

    "일단 상임위원장 동무께 보고드리자고. 그럼 수령 동지께는 상임위원장 동무가 보고를 드리겠지."

    "굳이 그렇게……."

    "조심하라. 이런 시국에 괜히 튀는 짓을 했다가는 목이 열 개라도 부족하다. 무슨 말인지 알간?"

    "예, 명심하겠습네다."

    "고조 우리는 우리가 할 것만 하면 된다. 괜히 이 와중에 공을 세워보겠다고 설치다가는 내일 아침은 수용소에서 먹게 될 거야. 요덕 가기 싫으면 설치지 말라."

    "알갔습네다."

    김룡성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밖으로 소리쳤다.

    "차 준비하라!"

    "예!"

    김룡성은 전화기를 들었다. 빨리 보고를 마치고 리지혁이라는 놈을 마중하러 가야 한다.

    쓸데없는 도발이 없어야 할 텐데.

    김룡성의 마음이 다급해졌다.

    * * *

    "와아!"

    이지혁이 창밖을 보며 입을 쩍 벌렸다.

    "생각보다 잘사는데?"

    "그지?"

    정해민도 놀랐다는 듯이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TV에서 볼 때는 나무뿌리나 캐먹고 사는 줄 알았는데, 이 정도면 나름 잘해놓고 사는 거 같은데?"

    "그런가 봐."

    최정훈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언제 TV에서 북한의 그런 모습만 보여주었단 말인가.

    조금만 관심 있게 지켜보았다면 매번 평양의 모습이 나온 것을 알 수 있었을 텐데.

    "저건 63빌딩보다 높은 것 같은데?"

    류경 호텔의 거대한 모습을 보며 이지혁이 탄성을 내뱉었다. 뉴욕에서 보던 건물에 비하면 그리 대단할 것도 없지만, 저 커다란 건물이 다른 곳도 아닌 평양에 있다는 것이 놀랍기 짝이 없었다.

    "류경 호텔 말씀이시군요."

    "호텔이에요? 우리 저기서 자는 건가?"

    "저거 안에는 텅 빈 겁니다."

    "엥?"

    "원래는 내부 인테리어 공사도 하려고 했는데, 돈이 없어서 일단 바깥만 그럴싸하게 해놓은 겁니다."

    "…그게 뭐야?"

    이지혁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대자 최정훈이 쓴웃음을 지으며 설명했다.

    "북한이라는 나라가 그렇습니다. 지금 보시는 평양의 모습이 생각보다 괜찮아 보이는 것은, 이곳에 북한이 가진 역량이 모두 집중되었기 때문입니다. 당장 이 길만 벗어나도 전혀 다른 실상이 펼쳐집니다."

    "흐음……."

    이지혁은 재미있다는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생기가 없네."

    길을 가는 사람은 많은데, 사람들의 모습에서 생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많이 나아진 겁니다. 게이트 사태가 벌어지면서 북한은 나름 호재를 맞았거든요."

    "호재?"

    "제제가 없어졌죠. 당장 자기 나라 건사하기도 힘든데 북한이 무슨 짓을 하든 건드릴 수가 없는 겁니다. 덕분에 경제 제재가 정지되었고, 혼란스런 틈을 타서 마약 제조로 돈을 좀 만졌다고 하더군요."

    "나라에서 마약을 만든다고?"

    "다들 쉬쉬하지만, 예전부터 국책사업이었죠."

    "와, 여기 재밌는 곳이네?"

    이지혁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뭐 딱히 혐오스러운 감정이 들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가 보아왔던 베라프의 국가들과 북한 중 어디가 더 나은 곳이냐를 물어본다면 고민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으니까.

    '중세보다야 여기가 낫겠지.'

    아무래도 말이다.

    마법 문명이 있다고는 하나 최상층 중 최상층만 영유할 수 있는 것이었고, 마법 문명의 존재 때문에 되레 발전이 늦어진 관계로 베라프 평민들의 삶은 기원전의 지구만도 못했다.

    그래도 이곳 사람들은 옷이라도 제대로 입고 다니니까.

    "도착했습니다."

    버스가 멈춰 서고 문이 열렸다.

    * * *

    "여기가 어디에요?"

    "평양이죠."

    "누가 그걸 몰라서 묻나?"

    이지혁의 핀잔에 최정훈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누군 평양 와봤나!

    여기가 어딘지 자신이 어찌 아는가!

    아무거나 일단 물어보지 말고 생각을 하란 말이다!

    "내려야 할 것 같은데요?"

    "그럴 것 같습니다만."

    정인수가 움직이지 않고 있으니 일단은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정인수는 날카로운 눈으로 밖을 보고 있었다.

    앞서 트러블이 있었기에 북한이 어떤 식으로 나올지 알 수 없었다.

    그때, 차를 향해 누군가가 걸어왔다.

    똑똑.

    한눈에 봐도 높은 지위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 중년인이었다.

    "안에 무슨 문제 있습네까?"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문 앞을 지키고 있던 대원이 정인수를 돌아보았다.

    "열어."

    "예."

    문이 열리고 문 앞에 서 있던 중년인이 양손을 벌리며 웃었다.

    "먼 길 오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네다. 환영합네다. 내래 조선인민공화국 조선로동당 총참모장 박용휘요."

    "대한민국 육군 국토 방위 사령부 대령 정인수입니다."

    "국토 방위 사령부면 중요한 곳에서 오셨구만기래. 그래서……."

    총참모장의 눈이 그의 뒤를 훑었다.

    "리지혁 동무가 누굽네까?"

    이지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데요."

    "거, 여기선 잘 안 보이는구만. 거, 그렇게 뻐스 안에 앉아 있으면 편합네까? 다들 내리시라요. 배고플 텐데 밥부터 먹읍시다."

    "크……."

    이지혁이 좋아라 하며 버스 복도를 걸어 입구로 향했다.

    "이지혁 씨."

    정인수가 제지하려 하자 이지혁이 피식 웃었다.

    "얘들도 생각이 있겠죠."

    "음……."

    맞는 말이다. 괜히 자신이 과도하게 움츠려든 것일지도 모른다. 일단은 국빈으로 온 자들을 핍박할 만큼 북한이라는 나라가 막나가지는 않으니까.

    보통은 국빈의 자격으로 온 이들에게는 예의를 보이는 편이었다.

    "내립시다."

    정인수가 눈빛으로 대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긴장을 늦추지 말라는 뜻.

    그의 의도를 알아들은 대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 동무가 리지혁 동무인가?"

    "넹."

    이지혁이 고개를 끄덕이자 총참모장 박용휘가 환하게 웃었다.

    "반갑습네다. 리지혁 동무 덕에 우리 민족의 위상이 나날이 높아지고 있다고 들었습네다."

    "헤헤, 별말씀을요."

    이지혁은 칭찬에 약했다.

    어디서 칭찬을 듣고 살아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를 칭찬해 주는 존재는 마족이거나 흑마법사거나 사기꾼 쪽 계열밖에는 없었다.

    "잔치를 준비해 두었으니, 그쪽으로 가십시다."

    "밥인가요?"

    "공화국에서만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을 두루 준비해 뒀습네다. 한 번 먹어보면 돌아가기 싫을 수도 있으니, 주의하는 게 좋을 겁네다."

    "오!"

    이지혁이 기대가 된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생각보다 분위기가 괜찮은데?'

    주변이 수많은 병력으로 둘러싸여 있기는 하지만, 화기를 들고 있지 않아서인지 강압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되레 환대 받는다는 느낌이 강했다.

    "원래는 인민들이 환영을 해주어야 할 것인데, 상황이 상황이라 따로 준비를 못했습네다. 이해 좀 부탁드려도 되겠습네까?"

    정인수가 미소를 지었다.

    "별말씀을요. 상황이 이런데 그런 것을 받았다면 저희가 더 부담스러웠을 겁니다."

    "마음 써줘서 고맙소."

    "그건 그렇고, 몬스터들은 어떻습니까?"

    "먹으면서 이야기합시다."

    "예."

    정인수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서 걸어가는 박용휘를 따랐다.

    "리지혁 동무."

    함께 앞서 걸으며 박용휘가 말을 건네왔다.

    "네?"

    "리지혁 동무가 남조선 제일가는 용사라는 말이 있던데, 사실입네까?"

    "용사요? 나는 마왕인데."

    "하하하, 농담 참 잘하십니다기래."

    "진짠데."

    진실을 말해도 믿지 않는 세상이었다. 이지혁은 어쩐지 서글퍼졌다.

    "남조선 제일의 용사인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제일 센 건 맞을 거예요."

    "오, 과연 그렇군요. 리지혁 씨가 미제 놈들도 돕고 그랬다던데, 사실입네까?"

    "네, 요청이 와서요."

    "저런."

    "왜요?"

    "리지혁 씨가 그 코쟁이 놈들의 콧대를 부러뜨려 버린 것은 참 좋은 일이지만, 그냥 내버려 뒀으면 코쟁이 놈들이 고생을 더 했을 것인데… 아쉽습네다."

    "그래요?"

    박용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제 놈들이 통일을 막고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미제만 없었더라면 우리는 이미 한민족으로 같이 살고 있었을지도 모릅네다."

    "우리 대통령도 통일 별로 안 하고 싶어 하는 것 같던데……."

    "그렇습네까?"

    "그런 것 같더라구요."

    최정훈은 입을 쩌억 벌렸다.

    세상에 저런 민감한 발언을 무슨 지나가던 개가 어느 집 개인지 설명하듯이 하고 있는가!

    지금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는 아는 건가?

    "뭐, 근데 듣고 보니 상황이 안 되어서 못하는 거지, 하기 싫은 건 아닌 것 같던데……. 여튼 이모저모로 좀 복잡하더라구요."

    "고저 사람이 장가 한 번 가는 것도 힘든데, 나라끼리 합치는 게 어디 쉽겠습네까?"

    "듣고 보니 그것도 그렇네요."

    베라프에서 나라를 합치는 것은 매우 쉬웠는데.

    그냥 닥치고 쳐들어가서 왕 모가지만 자르면 바로 합체되는 거라서 쉽게 생각했는데, 이쪽 동네는 또 아닌 모양이었다.

    '아니, 뭐, 다를 것도 없지.'

    지금 이 동네도 어차피 왕조나 다름없는데, 대가리만 치면 바로 나라 하나 붕괴되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뒷수습이 그쪽 동네보다 어렵다는 것 때문에 굳이 건드리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지.

    '이기적인 건지, 실용적인 건지…….'

    아니, 같은 말일지도 모르겠다.

    "공화국의 능력자들도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리지혁 동무의 활약상을 듣고 보니 훈련이 부족했는가 봅네다."

    "그게 뭐, 타고나는 거죠. 열심히 한다고 되나요."

    겸손이라고는 베라프에 두고 온 이지혁이었다.

    "그런데 이 간나들이 자존심이 워낙에 세서."

    "그래요?"

    "나중에 만나면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자존심이 워낙에 세서 말을 안 들어 처먹습네다. 혹시라도 좀 까탈스럽게 굴더라도 사나이다운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길 바랍네다."

    "저 속 엄청 좁은데."

    "허허허, 농담을 잘하십네다."

    순간, 최정훈의 얼굴을 굳어졌다.

    저거, 농담으로 들으면 안 될 텐데…….

    이지혁의 입장에서는 답답할 만도 할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이지혁은 언제나 직설적으로 말을 바로바로 전달해 주는데, 듣는 입장에서 곡해를 하거나 안 믿다가 일이 터진 적이 어디 한두 번이던가.

    "끄응……."

    최정훈은 앞으로의 일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 * *

    "입성했답니다."

    "평양에?"

    "예, 연락이 왔습니다."

    지금 청와대는 초긴장 상태였다.

    "…보내지 말걸 그랬나?"

    윤영민이 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이미 많이 물어뜯었는지 튀어나와 있는 손톱이 거의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대통령님, 진정하십시오."

    박두진의 만류에 윤영민이 손을 내렸다.

    "끄응, 이렇게까지 불안할 줄이야. 미국에 보냈을 때는 이리 불안하지 않았는데."

    "그때는 이지혁 씨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몰랐으니까요."

    "…그거구나."

    개차반이라는 말만 들었지, 이렇게까지 개차반인 줄 누가 알았던가. 직접 겪어보니 말로 듣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런 사고뭉치를 북한에다 보내놨으니…….

    "위, 위장약 좀……."

    "여기."

    박두진이 바로 물과 위장약을 내밀었다.

    "오, 준비성이 철저하구만 역시 비서실장이야."

    "…그거 최정훈이가 주고 간 겁니다."

    "응?"

    "필요할 거라더군요."

    "……."

    확실히 이지혁에 관한 것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최정훈인 것 같았다.

    "최정훈이가 따라갔으니 좀 낫겠지?"

    "…지금까지도 그가 옆에 없어서 그 난리를 치고 다닌 게 아닙니다."

    "그냥 그렇다고 해주지."

    "죄송합니다."

    윤영민은 낮게 한숨을 쉬었다.

    "혹시 모를 도발에 대한 대처는 다 해두었겠지요?"

    국방부 장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대통령님. 전방 사단에서부터 공군까지 전부 비상대기를 내려놓았습니다."

    "불안하네요, 불안해."

    윤영민이 초조한 얼굴로 비전을 바라보았다.

    비전에는 평양의 광경이 보이고 있었다.

    "사고는 안 치겠지?"

    "곧 있으면 몬스터들이 몰려들 건데, 일부러 이지혁 씨를 도발하기야 하겠습니까?"

    "그럴 일이야 없다고 생각은 하지만, 북한이라는 데가 좀 그렇지 않은가요. 항상 생각 이상의 짓을 태연하게 저지르는 곳이다 보니 불안한 겁니다."

    "그렇긴 합니다."

    "일단 다른 건 모르겠고, 인민위원장이랑만 안 만났으면 좋겠는데. 우리 의도는 확실하게 전달했겠죠?"

    "전달했습니다. 다만, 그쪽에서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의도?"

    "저희 입장에서는 그쪽을 고려한 것인데, 그쪽은 그들이 이지혁 씨를 귀화시킬까 봐 그러는 걸로……."

    "귀화?"

    윤영민의 얼굴이 굳었다.

    "혹시 그럴 확률이 있나?"

    "안 그래도 최정훈 씨에게 이지혁 씨의 사상과 정치적인 성향에 대해 물었습니다만……."

    "뭐랍니까?"

    "콜라 없는 나라에서 살 확률은 없다더군요."

    "아……."

    이게 뭔 마트도 아니고, 나라를 정하는데 콜라라니.

    하지만 뭔가 설득력이 있었다.

    "자본에 쩔었군."

    윤영민은 피식 웃고 말았다.

    이지혁이란 사람은 같이 있으면 불안하고 짜증나지만, 남에게 던져 놨을 때는 더 없이 재미있는 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잠깐만. 콜라?"

    윤영민의 눈이 흔들렸다.

    "지금까지 이지혁 씨가 콜라가 없는 나라에 간 적이 있었나?"

    "없었죠. 중국, 영국, 미국, 일본으로 갔었으니까요."

    "설마 그것 때문에 문제가 생기지는 않겠지요?"

    "하하하……."

    박두진의 웃음소리가 잦아들었다.

    "설마요."

    아무리 개념이 없어도 그런 걸로 사고를 치지는 않을 것이다.

    * * *

    "이게 뭐야?"

    이지혁의 눈이 떨렸다.

    "코코아 탄산단물입니다."

    "이… 이런!"

    이지혁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눈앞에 수많은 산해진미가 있었다.

    하지만 조미료가 들어가지 않은 고급 음식은 싸구려에 젖어버린 이지혁에게는 밍밍하기 짝이 없고 느끼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콜라 한 병 달라고 한 건데…….

    그의 눈앞에 있는 것은 색깔만 콜라비스무리 할 뿐, 뭔가 탄산인지 뭔지도 알 수 없는 미묘한 맛을 내는 코코아 물이었다.

    "타, 탄산이 없잖아?"

    이지혁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이곳에 얼마나 더 있을지도 모르는데, 콜라가 없다니!

    이지혁의 눈이 단호해졌다.

    "돌아간다!"

    "이지혁 씨!"

    최정훈이 기겁하여 이지혁을 붙잡았다.

    "이거 놔요!"

    베라프에서 돌아오며 가장 행복해했던 것이 무엇인가.

    사람답게 먹고살 수 있다는 것이었다.

    베라프고, 마계고… 음식에 관해서는 쓰레기들만 존재하는 곳 아닌가.

    그런데 콜라를 먹지 말라니!

    이 세계에서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행복을 앗아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일단 기다려 봐요. 돌아가는 건 너무 심한 것 같고, 내가 갔다 올 테니까. 콜라 좀 사 올게."

    "안 됩니다!"

    "왜 안 돼요?"

    "큰일 날 소리를!"

    최정훈이 놀라 이지혁을 꽉 잡았다.

    여기서 게이트를 열고 한국으로 갔다 오는 모습을 보인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건가?

    마음만 먹으면 이지혁이 평양으로 잠입할 수 있다는 것을 직접 보여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걸 본 북한이 어떻게 나올지는 안 봐도 빤한 일이었다.

    "그 콜라가 뭐 그렇게 중요하다고!"

    "안 중요하니까 갔다 온다고!"

    이지혁이 난동을 부리기 시작하자 총참모장 박용휘가 멍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정인수에게 물었다.

    "저 동무, 저거 왜 저러는 겁네까?"

    정인수는 말문이 막혀 천장만을 바라보았다.

    아, 이게 국가 망신이구나.

    정인수는 한없이 서글퍼졌다.

    * * *

    "콜라 찾아오라! 당장!"

    박용휘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콜라라고 하셨습네까?"

    "그래! 거, 가정집 뒤져 보면 하나 둘은 나올 거 아니네. 당장 평양 시내 샅샅이 뒤져서 콜라 찾아오라!"

    "참모장 동무, 일전에 수령 동지께서 미제 물건을 사용하는 인민들은 전부 자아비판에 돌입시킨다고 하신 이후로 미제가 씨가 말랐습네다."

    "뭐가 어째?"

    "차라리 남조선 물건을 구하는 게 쉽지, 미제 물건은 구할 수가 없습네다."

    "이런……."

    박용휘가 머리를 감쌌다.

    저 난리를 치는 놈을 어떻게든 진정시켜야 한다.

    남조선 놈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번 상황은 그에게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래서 얼마나 긴장을 하고 준비를 많이 했는데 그 까짓 콜라 때문에 다 틀어질 상황이니, 미치고 팔짝 뛰고 싶지 않겠는가.

    박용휘는 이내 결심을 굳히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조선 연결하라."

    "예?"

    "귀가 먹었네? 남조선에 당장 연락하라. 해서 헬기로 콜라 가져오라고 하라."

    "총참모장 동무,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십네까!"

    "몰라서 그러는 거야? 지금 당장 콜라를 구해오란 말이다!"

    "나, 남조선 물품을 반입한 것을 수령 동지께서 아시게 되면 큰일이 납네다."

    "그럼 뭘 어떻게 하라는 기야!"

    박용휘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부관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대답했다.

    콜라 사 오라는 명령 때문에 이리 고심을 해야 할 날이 올 줄이야. 말세다, 말세.

    "급한 대로 중국에 부탁을 해보겠습네다. 헬기 하나 띄워서 룡성이나 대련 쪽으로 접선해 보시죠."

    "서둘러라!"

    "빠르면 두 시간 내에 올 수 있을 겁네다."

    "알았으니 서두르라 하지 않네!"

    "예!"

    박용휘는 부관을 보내고 난 후, 손수건을 꺼내 이마에 흐른 땀을 닦아냈다.

    "이게 다 뭔 일이네."

    리지혁이라는 놈이 생각이 없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설마 북한에 넘어와서도 저럴 줄은 상상도 못했다.

    세상에 적성국에 와서 콜라 없다고 발악하는 놈이 있을 줄이야.

    "총참모장 동무."

    "응?"

    "남한에서 연락이 왔습네다. 통일부 장관이라는데, 어떻게 합네까?"

    "당장 연결하라."

    박용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전화를 받았다.

    "조선로동당 총참모장 박용휘요."

    "대한민국 통일부 장관 최선형입니다."

    "무슨 일이오?"

    "이쪽도 방금 연락을 받았는데, 문제가 생겼다고 하더군요."

    "끄응."

    박용휘는 머리를 감쌌다.

    문제, 문제라…….

    문제는 문젠데, 이걸 문제라고 해야 할지가 문제다.

    "그렇소이다. 그 단물 하나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네까."

    "일단 죄송하다는 말을 드리겠습니다. 이쪽에서도 통제가 안 되는 사람이라……."

    "뭐, 그쪽이 미안해할 일은 아니지요."

    "미리미리 준비를 했어야 하는 건데,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 문제는 이쪽에서 해결할겁니다. 대신 한 가지 허가해 주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해결?"

    "텔레포트 능력자를 급파할 겁니다."

    "보라!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하지 않갔습네까! 남조선에서 이쪽으로 텔레포트를 타면 이쪽에서 어떻게 반응할지 몰라서 하는 말입네까?"

    "그래서 일본에서 갈 겁니다."

    "으음?"

    "일본 능력자가 협조를 해주기로 했습니다. 일본에서 그쪽으로 콜라를 가지고 넘어갈 테니, 그걸 허가만 해주시면 됩니다."

    박용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는 가능하디."

    "그럼 그렇게 알고 출발시키겠습니다."

    "알갔소. 내래 그리 알고 준비시키갔어."

    "예, 그럼."

    전화를 끊은 박용휘는 곧 일본으로부터 텔레포터가 넘어올 것이니, 그에 대비하라는 말을 전해놓고는 의자에 몸을 푹 기댔다.

    "이게 대체 뭐니."

    그까짓 콜라 하나 때문에 동아시아 삼국 협조가 이루어지는 상황이라니.

    저 리지혁이라는 놈은 대체 뭐란 말인가.

    "말세라더니."

    그 말이 맞는 모양이었다.

    * * *

    "캬!"

    이지혁은 콜라를 꿀꺽꿀꺽 들이켜더니 기분이 풀린 얼굴로 다시 음식을 집어먹기 시작했다.

    "아, 느끼해 죽는 줄 알았네."

    "끄응."

    최정훈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싸해진 분위기를 보니 그가 다 체할 지경이었다.

    '미친놈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콜라 없다고 북한에서 난장을 부릴 줄이야. 사람이라면 최소한 장소는 가려야지.

    우적우적.

    이지혁이 다시 음식을 흡입하기 시작하자 분위기는 급격하게 훈훈해져 갔다.

    남은 이들이 필사적으로 서로 미소를 지으면서 분위기를 풀어갔다. 저 미친놈 하나 때문에 서로 기분이 상해서는 안 된다는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국가적인 적대감이나 서로 불편한 분위기가 이지혁이라는 난적 앞에서 눈 녹듯 사라진 것이다.

    '죄송합니다.'

    '저 또라이 때문에 고생이 많으시겠군요.'

    '그건 말로 다 못하죠.'

    '고생 많으십네다.'

    눈으로 수많은 대화가 오갔다.

    "거, 식사는 좀 입에 맞으십네까?"

    최정훈은 자신에게 다가와서 말을 건네는 사람을 보며 마주 인사를 했다.

    "네, 뭐. 신경 써주셔서……."

    '누구지?'

    이런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젊은 청년을 보자 절로 긴장이 되었다. 주위에는 다들 나이가 지긋한 권력자들만 있으니, 그만큼 이 청년은 이질적으로만 보였다.

    "조선로동당 대외전략부의 소좌 정민성입네다."

    "아, NDF의 최정훈입니다."

    정민성이라는 자가 손을 내밀어 오자 최정훈은 그의 손을 맞잡고 악수를 했다.

    '대외전략부?'

    그런 부서가 있었나?

    최정훈이 알기로는 없는 부서였다. 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부서의 젊은 사람이 이런 자리에 나와 있을 리는 없으니,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신설 부서라고 생각해야 한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요즘은 남조선 대통령보다 최정훈 씨와 이지혁 씨가 더 유명하군요."

    "별말씀을요. 그런데 말투가?"

    정민성인 빙긋 웃었다.

    "다른 나라 말도 해야 하는 부서다 보니 남조선 말도 기본적으로는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북한에서 서울말 하는 북한 사람을 만나니 기분이 이상한가 봅니다?"

    "하하, 조금 그렇네요."

    최정훈은 웃으면서 정민성이라는 남자를 살피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대외전략부라…….'

    의미심장한 이름이었다.

    "뭐랄까, 하는 일이 하는 일이다 보니 이지혁 씨에 대해서는 참 많이 들었지만, 실제로 보니 음……."

    "상상을 초월한다구요?"

    "음, 좀 그런 면이 있네요."

    정민성이라는 남자는 화사하게 웃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곳에서는 그리 편히 움직이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제집인 양 굴고 있군요."

    조금은 가시가 돋아 있는 말투였다.

    "겁날 것이 없으니까요."

    "공화국이 겁나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북한이 아니라 세계 전체가 달려든다고 해도 딱히 겁내지 않을 사람입니다."

    "과연."

    정민성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지금까지의 까칠함이 마치 시험이었다는 듯.

    "듣던 대로군요. 안심했습니다."

    "뭘 안심했다는 거지요?"

    "이지혁 씨가 듣던 대로의 성격이라면 공화국 내에서 뭔가를 꾸미지는 못하겠지요. 워낙 기분 내키는 대로 움직이는 사람이니까요."

    "크, 반박하기가 힘들군요."

    "없는 형편에 힘들여서 마련한 자리입니다. 즐겨주시죠."

    "그러고는 싶습니다만……."

    최정훈이 쓰게 웃었다.

    "하기야 옆에다가 폭탄을 두고 즐길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겠군요. 최정훈 씨에 대한 말도 워낙에 많이 듣다 보니 최정훈 씨는 저 사람이 편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세상에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있다면 가족 정도겠지요."

    "그래요?"

    최정훈은 순간 아차 했다.

    분위기에 휩쓸려서 쓸데없이 많은 정보를 불고 말았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시간을 끌어도 되는 겁니까? 몬스터들이 접근하고 있다던데?"

    정보를 주었으니 받을 것은 받아야지.

    "시간이야 아직 충분히 남아 있습니다. 도착하기도 전에 현장에 가신다고 해서 하실 일이 있겠습니까?"

    "음, 그건 확실히 그렇군요."

    "현장에 가봤자 트러블만 생길 뿐입니다. 저희 입장에서는 차라리 격리해 놓는 것이 편하지요. 일선에 있는 양반들이야 워낙에 호전적인데다 머리에 충성 경쟁밖에 없는 인간들이라 보통 사람들은 생각도 못할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르지요. 그런 인간들이 싸그리 숙청되어 가는 것을 보면서도 바뀌지 않는 것을 보면 문제가 있긴 한 모양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저야 잘……."

    뭐지, 이 남자?

    북한 사람이라기에는 발언 수위가 너무 높았다.

    나이에 비해 직급도 높은 것 같은데, 발언 수위도 높다라…….

    '정씨인가?'

    그럼 백두혈족이라 불리는 최고 계층은 아닐 텐데.

    그런데도 뭘 믿고 이런 자신감을 보이는 걸까? 절대 숙청되지 않을 자신이 있는 걸까?

    최정훈은 정민성이라는 이름을 자신의 머리에 박아넣었다.

    이자는 곧 숙청되거나, 아니면…….

    '고위직으로 올라가겠군.'

    자주 봐야 할 사람인지도 몰랐다.

    "식사 마치셨으면 방으로 가시죠? 준비하는 모양입니다."

    최정훈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

    "원래는 밤새도록 연회를 해도 모자라겠지만, 내일 새벽부터 현장으로 이동해야 하니 미리 주무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그래야겠네요."

    최정훈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는 이지혁에게로 다가갔다.

    의자에 앉아 배를 두드리고 있는 이지혁을 보니… 뭐라고 해야 할까…….

    '안심이 된다?'

    최정훈은 피식 웃고 말았다.

    적지에 와 있다는 긴장감으로 얼어 있어야 할 상황인데 이지혁이 평소와 조금도 다름없이 행동하는데다가 북한을 반쯤 호구로 여기는 행동을 거리낌 없이 해 대자 긴장이 절로 풀렸다.

    '여기도 사람 사는 데구나' 하는 생각과 북한이 아무리 막 나가도 이지혁과 함께 있는 자신들을 건드리지는 못할 것이라는 자신감이 생겨났다.

    '의도한 건가?'

    그럴 리는 없겠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최정훈이나 요원들을 위해서 그런 행동을 해줄 사람이 아니었다.

    뭐가 겁나냐고 타박을 하면 타박을 했지, 배려를 해줄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

    "이제 올라가시죠."

    "벌써요?"

    "새벽에 출발해야 한다고 합니다."

    "새벽에?"

    이지혁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왜요?"

    "……."

    최정훈은 빙그레 웃었다.

    화내지 말자.

    화내지 말자.

    나는 유치원 교사다.

    유치원 교사는 너무도 당연한 것을 물어오는 아이에게 화를 내지 않는다!

    모르는 게 당연하다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하나 설명함에 이상함을 느끼지 않아야 한다.

    일단 심호흡을 하고…….

    "몬스터들의 예상 도착 시간이 내일 아침이라서 그렇습니다. 그러니 그만 올라가서 주무셔야죠."

    "걔들은 왜 아침에 온대?"

    "예의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어른이신 이지혁 씨가 참으셔야죠."

    "그럼 뭐 별수 없죠. 자러 가볼까?"

    이지혁이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남산만큼 부푼 배가 앞으로 볼록 튀어 나왔다.

    "이런 사람이 인류의 희망이라니."

    "네?"

    "또 제 못된 버릇이 도졌군요. 신경 쓰지 마시길."

    "넹."

    이지혁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안내를 받아 객실로 향하자 모두의 입에서 한숨이 나왔다.

    "일단, 음……."

    최정훈은 집중된 시선을 받으면 당연히 해야 할 한마디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사람을 데리고 올 수밖에 없던 점, 죄송합니다."

    남북이 슬픔으로 하나가 되는 순간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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